남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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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청담동사모님’(외1편)-남영도
2019년 07월 18일 09시 17분  조회:401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남영도
‘청담동사모님’ 
 
지난해 5월, 시어머님이 무릎관절수술로 서울 청담동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한국에서 류학하는 아들이 반년전에 연줄을 달아 찾은 병원인데 의술이 좋고 말이 통하는데다 친절하다는 등 여러가지 좋은 점들을 렬거하며 수술을 권고하였다. 애지중지 키웠더니 이제 손자 덕을 보게 되였다는 뿌듯함 같은 것이 작용을 하였던지 오랜 고민 끝에 어머님이 드디여 수술을 결정하신 것이다.
한평생 농사일로 뼈가 굵으신 어머님이시다. 팔순이 넘도록 입원수술란 것을 별로 해본 적이 없으셨던지라 신기해하면서도 두려운 표정이 살짝 어려있다. 집안의 대사인지라 며느리인 내가 청가를 맡고 간병한답시고 한달간 함께하게 되였다.
입원수속을 마치고 침대에 앉아있으려니 “조××님―” 하고 어머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들어보니 식사가 들어온다. 친절한 말투에 간이 녹는 듯한데 반찬들은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굴 것 같은 김치며 생선류들이다. 말이 통하는데다 서비스까지 좋으니 어머님의 표정이 금시 밝아진다.
“녀사님!”
이번에는 나를 부르는 줄 알고 뒤를 돌아다보니 맞은켠 침대의 간병인이 간호사를 따라 나간다. 간병인을 그렇게 호칭하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이 나라 스타일인지 아니면 강남 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역시 우리와는 다르게 참 교양있는 동네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인공관절수술은 두번에 나누어 하기로 되여있다. 먼저 오른쪽무릎부터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간병 일이 장난이 아니다. 의학 전문용어들을 동반한 그 모든 세부적인 일들을 제대로 할 엄두가 나지 않아 간병인을 청하기로 하였다. 전문 훈련을 거쳐서인가, 간병인들은 간호사가 할 법한 일들까지도 알아서 척척 잘해내는 것이였다.
우리 간병인은 칠십이 넘었다는데 외모나 날씬한 모습을 봐선 60도 안돼보인다. 표준적인 서울말씨를 쓰는데 첫 인상에 아주 교양 있어보이고 일도 깐지게 할 것 같아서 쓰기로 하였다. 우리의 신분을 알리니 가리봉동 구로공단에서 많이 봤다고 하면서 괴이찮아하는 듯한 표정인데 앉아있는 법 없이 내내 서 있고 밥도 창턱에 기대서서 먹는 품이 참 자세가 돼있다고 탄복하였는데 며칠 더 지내보니 어딘가 성격이 까다롭고 요구사항도 많아 맞추기가 좀 힘들었다. 모든 것을 환자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타일에 맞추려는 것이 좀 거슬렸다.
“병원 밥? 내레 그까짓 거 못 먹을 가 봐…”
평소에 식사를 잘하시던 어머님이 입원전에 이렇게 장담을 하시더니 수술을 하고 나서 링게르를 맞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통 음식을 못 드신다. 이상하게 병원음식에는 죽이 나오지 않는다. 아침부터 삼시세끼 계속 밥이다. 깔깔하시다며 집에서 먹던 죽이며 국수가 드시고 싶다고 하니 어머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려고 마트와 슈퍼를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병원 근처에 따로 얻은 월세방에서 아침부터 각가지 영양죽이며 칼국수, 냉면 등을 만들어 병실로 날랐는데 의외로 내가 해간 음식은 맛있다며 잘 드시니 그나마 다행이다. 27년간 한가마밥을 먹었으니 집밥의 위력이 아닐가 싶다.
거리에 나서니 우아하고 기품 있어보이는 모습의 사모님들이 유유히 지나간다. 병원에서 숙소, 숙소에서 마트, 그렇게 세곳만 뱅뱅 돌아치다가 어느 날 저녁 산책 삼아 좀더 걸어나가보니 곳곳에 성형수술광고판이 란무하고 눈부신 명품거리가 펼쳐지는데 완전히 딴세상이다. 쇼윈도 가까이 다가가보니 유리창너머 세련된 옷차림의 모델과 후줄근한 운동복차림에 푸석푸석한 얼굴을 한 내 모습이 한데 겹치며 크게 비교된다.
무릎수술을 두번 하는 동안 병문안을 오는 친척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10여년을 못 보던 친척들이 이국땅에서 만났으니 왜 반갑지 않으랴, 남자들은 건설현장에서, 녀자들은 식당과 가정집에서 일하느라 많이 지친 모습들이다.
“일이 어드래? 많이 힘들지?”  
천성적으로 목청 높은 어머님과 고향 친척들이 그간의 회포를 푼다고 온 병실에 평안도사투리가 차고 넘친다. 병실의 다른 환자와 간병인들이 불편한 시선을 보내오는가 싶더니 아닐세라 우리 간병인이 다음번에 병문안 오면 어머님을 휠체어에 앉히고 1층에 내려가서 휴계실에서 만나라고 한다. 다른 환자들에게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선 죄송한 마음이 들었으나 말투 속에 약간 비하하는 뉴앙스가 풍겨 어딘가 거부감이 들었다.
조선에서 태여나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동북으로 이주한 어머님의 말투에는 진한 평안도사투리 외에 중국말도 섞여있었다.
“우리 며느리 찾으시우? 금방 1층에 빤쓸(办事―일보다)하러 갔시요.”, “맛이 어드렇소? 거 빙샹(冰箱―랭장고)안에 얼음주머니 좀 꺼내주시겠소?”
조선족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중국말들을 섞어가면서 기분이 좋을 때면 농촌에서 벼모 꽂던 얘기, 탈곡하던 얘기를 구수하게 들려주시는데 거침이 없고 당당하다. 그러면 옆에 환자들은 신기한 표정을 짓고 주의깊게 듣다가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참 말씀을 잘하신다!”라고 진심으로 탄복한다.
동창들도 나를 볼 겸 병문안을 온다. 청담동이 부자동네라 그런가, 참 찾기 힘들다고 하면서 나보고 “너 청담동에 있으니 청담동사모님이네.” 라고 우스개를 한다.
“어, 그런가? 거 말 되네! 뭐 그렇다 치지 뭐…” 웃으며 되받아친다.
그런데 우리 간병인에 대한 불편한 생각들이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 며칠 후에 판명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내가 없는 사이에 간병인들끼리 대판싸움이 벌어지더니 우리 간병인을 내쫓기에 이른 것이다. 바로 내내 서성거리면서 쓰레기가 나오는 족족 병실 밖으로 들고나가며 쓸데없이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다른 환자와 간병인들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맞은켠 침대의 뚱뚱한 간병인이 정신 사납다고 뿔이 나있더니 드디여 맞붙었는데 그 간병인의 말을 빈다면 “머리뚜껑이 제대로 열린” 것이였다. 알고 보니 우리 간병인은 다른 용역회사에서 보내온 ‘이방인’이였고 그녀가 쩍하면 “저 봐, 돼지처럼 맨날 누워있으니 뚱뚱한 거 좀 봐.”라고 비꼬던 그 뚱보간병인은 바로 이 병원 원장의 친척으로 간병인들의 녀왕이였던 것이다. 터세, 무시하는 태도 등 여러가지가 복잡하게 엉켜 일어난 사건이였다. 간병인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갈등에 그만 머리가 돌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거기도 또 다른 사회였던 것이다.
“와? 그분이 가시겠대?”
간병인들끼리의 그런 복잡미묘한 관계를 알길 없는 어머님이 의아해하며 물으신다. 성격 등 여러가지 리유를 들어 설명을 드렸더니 성격이 까다로운 건 있지만 며칠만 꾹 참고 계속 쓰자고 하신다. 자기절로 그만두고 가겠다는데 차라리 잘된 것 아니냐고 하고 간병비를 후하게 주어 내보냈다.
복도에 나가니 간병인들끼리 쑤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자리를 피하려는데 그동안 풋면목을 익힌 다른 병실 환자분들이 말을 걸어온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니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처음엔 우리가 모녀간인 줄 알았는데 고부간이라고 하자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라는 눈치들이다. 사람 사는 동네는 다 비슷한듯, 딸들이 간병을 하는 경우는 많아도 며느리가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면서 방송에 날 일이라고 한다. 한 병실에 든 안로인의 경우를 보아도 일주일이 넘도록 며느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수술까지 반대한다고 하니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닌가. 매일 침대에 누워 천정만 쳐다보면서 수술날자를 기다리는 그 할머니를 보노라니 늙어간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관절수술은 재활치료가 관건이다. 무릎수술의 경우 무릎을 꺾는 것이 제일 힘든 고역이다. 물리치료기에서 130도가 최고목표수치인데 80도에서부터 90, 100… 이렇게 조금씩 강도를 높이며 꺾기를 한다. 기계가 꺾어주기에 일단 다리를 묶이우면 도망칠 구멍이 없다. 매일 꺾을 때마다 어머님은 이를 사려물고 참으신다. 젊은 시절 남정들과 같이 100키로그람짜리 마대를 메고 씽씽 뛰여다니던 그 기세 그대로 매일 재활치료에 림한다.
두 무릎관절을 열흘 간격으로 련이어 수술하다 보니 재활치료실에 들어서는 것이 도살장 들어가는 기분이라는 말이 그저 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치료실에 정작 들어서면 또 통증을 참으며 다리를 맡긴다. 자전거를 타는데 너무 아파서 새된 소리를 지른다. 이튿날 주치의가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만 재활치료 담당의사는 또 그 나름대로의 욕심이 있어서 자꾸 강도를 높인다. 너무 아파서 젊은 치료사가 잡아준 손을 저도 몰래 꼬집기까지 했다고 한다. 병실에 돌아와서도 쉬지 않고 다리 굽히기를 계속하길래 뭘 그렇게 열성이냐고 다른 간병인들이 말하면 의사선생이 매일 300번씩 하라고 숙제를 줬는데 열심히 안하면 되냐고 하신다. 그럼 의사선생한테 300번 했다고 거짓말하면 될게 아니냐고 간병인들이 방법까지 알려준다. “난 길케 못해요!”라고 웃으시고는 계속 숙제를 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매일 무릎 굽히기, 발목 굽히기, 걷기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드디여 130도를 꺾고 병실에 들어서던 날, 온 병실에서는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130도를 꺾지 못하고 퇴원하는 환자들도 많은데 나흘 만에 꺾었으니 환자고 간병인이고 모두 그 의지력에 진심으로 탄복을 한 것이다.
병실에만 있기 답답하여 입원한 지 20여일 만에 보조기에 의지하여 바람 쐬러 밖으로 나가 잠간 벤취에 앉았다. 거리에서 유유히 오가는 선남선녀들을 부러운 눈매로 바라보신다. 당신도 언제면 저렇게 걸을가는 기대가 가득 차있는 눈빛이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르다. 청담동 네거리에서 활보하는 그네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비록 논판에서 틔운 걸걸한 목청에 진한 평안도사투리를 쓰는 평범한 할머니지만 늘 당당하고 씩씩하신 어머님, 간병인한테 종래로 불평 부릴 줄 모르고 재활치료에 어느 환자보다 모범적이고 의지력이 강한 어머님이 너무도 의젓해보여 동창들이 나에게 선물한 그 ‘청담동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선뜻 어머님에게 선물하고 싶어진다. 그런 어머님이야말로 진짜 품위 있는 사모님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
그로부터 어느덧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귀국한 후 매일 정해진 시간에 걷기운동, 무릎 300번 굽히기 등 재활치료에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더니 석달 만에 보조기, 지팽이를 팽개치고 한시간을 넉근히 걸어내시였고 이제는 계단도 척척 잘 오르내리시고 동네 헬스장에 가면 자전거를 1,000바퀴씩 돌리시는 어머님, 그렇게 완강한 의지력으로 재활치료에 최선을 다한 보람으로 금년 5월에는 또다시 로년중창단 일원으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며 열연하시는 어머님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내가 언제 벌써 팔십이 됐을가…”라고 입버릇처럼 외우며 소녀처럼 깔깔 웃으시는 어머님, 오늘도 ‘청담동사모님’은 예나 다름없이 씨엉씨엉 거리를 활보하신다.
 
 
▣ 수필 / 남영도
로씨야음악의 날개에 실려
-로씨야기행(3)
 
9박10일간의 로씨야려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해외려행의 경우 흔히 말 타고 꽃구경식의 려행이 되기 쉽상인지라 아쉬움 같은 것들이 앙금처럼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랠 양으로 로씨야음악을 틀어놓고 사진을 뒤지기 시작했다.
장중한 선률이 방안을 한가득 메운다. 그 친숙한 음악을 들으니 또다시 기차를 타고 가없는 씨비리벌판을 가로지르는 듯하다.
옳거니, 음악은 그래서 국경 없는 예술이라 했던가? 려행지에서 이미 돌아왔음에도 음악의 날개에 실려 다시 그 현지로 날아갈 수 있다는건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이더냐!
로씨야에 대한 나의 동경은 로씨야음악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씨야음악, 아니 정확히 ‘쏘련음악’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뜸 1950년대에 우리 나라에 불어쳤던 쏘련음악열풍을 떠올리게 된다. 그 선풍적인 인기에 대해서 그 년대에 태여나지도 않은 내가 속속들이 알리 만무하지만 그 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느 정도 감지할 수는 있었다.
1970년대, 평강벌의 어느 향(공사)소재지 마을에서 살 때다. 모든 것은 농업을 위하던 때라 탈곡철이 되면 낮에만 전기를 주고 밤이 되면 자주 정전이 되였다. 초불이 있으면 물론 더없이 좋겠지만 초가 없을 때면 접시에 콩기름을 붓고 솜을 비벼서 심지를 만들어 콩기름에 적시고는 성냥을 드윽 그어서 불을 켠다. 그 불빛에 책을 읽기에는 너무 희미하고 잠 들기에는 이른 초저녁때라 심심해할 때쯤이면 의례 엄마의 노래소리가 울린다.
“작디작은 집에 등불이 반짝이네 / 나젊은 방직처녀 창가에 앉았네…”
1950년대말 대학을 다니던 시절 학교합창단에서 솔로를 담당했었다는 엄마의 구수한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쏘련노래’들이 유장하게 울려퍼진다.
듣는 이들에게 끝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선률의 〈모스크바교외의 밤〉으로부터 시작하여 〈방직처녀〉, 〈붉은 딸기꽃 필 때〉 그리고 〈산사나무〉에 이르기까지…
‘문화대혁명’후기라 본보기극노래외에 부를 수 있는 건 조선노래와 쏘련노래 뿐, 한번 부르기 시작하면 계속 부르고 싶고 그 속에서 헤여나올 수 없도록 만드는 그 ‘쏘련음악’ 특유의 마성의 선률때문에 강냉이밥에 시래기국을 먹던 가난한 시절이였지만 앞날에 대한 동경과 설레임을 한가득 안고 잠시나마 행복감에 젖어 부르고 또 불렀었다. 인간개성이 많이 억압당하던 시절 그나마 이런 노래들을 부를 수 있음으로 하여 숨구멍이 좀 틔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쩍하면 “수정주의 퇴페한 생활방식을 추구한다”고 매도당하며 혼났기 때문이였을가, 엄마는 학교선전대에 그토록 들고 싶어하는 나의 소망을 단번에 묵살해버리고 그저 공부만 하라고 딱 잡아뗀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음악시간도 전부 전투적 기백이 넘치는 노래로 채워졌으니 오선보를 배운다는 것은 사치였으며 음악과 예술을 향한 갈증은 늘 채워지지가 않았다.
그때를 돌아보면 지금도 리해되지 않는 한가지 일이 있다. 연변가무단소분대가 처음으로 우리 고장에 와서 가무공연을 한다는데 너무 보고 싶어 엄마한테 애걸하다 싶이 하여 겨우 입장권을 얻어 극장에 들어는 갔는데 황홀한 무대를 지켜보면서도 한쪽 가슴이 콩당거리며 내내 불안했다.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이 언제라도 나타나 덥석 잡아갈가 봐서였다. 공부보다는 생산로동을 강조하던 시대인데 왜 어른들은 볼 수 있는 그런 공연을 학생들은 보면 안된다는 금지령을 내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한이 맺혀서일가, 그후로 대학입시 공부를 하면서도 나는 늘 라지오를 틀고 음악방송을 들으며 공부를 했는가 하면 그 습관이 쭉 지금까지 이어져 집에만 들어오면 음악을 틀어놓고서야 하고픈 일을 하군 한다.
시대의 변천과 함께 ‘쏘련음악’의 존재를 거의 잊고 산 우리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던 로씨야음악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백학〉이였다. 1990년대 한국의 인기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으로 우리의 가슴을 흠뻑 적셨던〈백학〉의 여운은 주인공의 이미지와 더불어 오래도록 지속되였었다. 그 장중하면서도 애잔한 선률의 음악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은 전혀 모른 채 한동안 그 마성의 음악에 빠져있었었다.
클래식음악에 어섯눈을 떠가며 CD를 사들이고 곡명도 작곡가도 모른 채 그냥 틀어놓고 듣기만 하던 시절 로씨야의 음악거장 챠이꼽스끼의 〈백조의 호수〉 음악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선률로 사람의 마음을 휘여잡았다. 우리의 심혼을 뒤흔드는 그 교향악의 세계는 더구나 어마어마하여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범주이기도 하다.
다행히 우리와 같은 아마추어들에겐 음악가들의 일화가 곁들여지면 그 음악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지름길이 생기기도 한다.
챠이꼽스끼의 제4교향곡에는 그의 음악을 사랑한 메크부인의 이야기가 숨겨져있다고 한다. 독학으로 공부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까지 되였으나 챠이꼽스끼는 너무나 적은 월급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시기 철도경영자의 미망인으로 메크부인이라는 엄청난 재력가가 있었는데 챠이꼽스끼의 음악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14년간 6천루블에 달하는 돈을 그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긴 세월 동안 그들은 서신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진정으로 선생님을 뵙고 싶을 때도 있지만, 선생님의 음악을 들을수록 두려워졌습니다. 오직 음악을 통해서만 선생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메크부인의 마음을 전해받은 챠이꼽스끼는 “저와의 만남을 통해 제 음악에 대한 사랑이 깨져버릴가 우려하시는 부인의 마음을 충분히 리해합니다. 저 역시 인간이기에 부인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라고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애틋한 련민의 정은 서신으로만 전해졌을 뿐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모스크바 교외의 호수가에서 한번 마주친 적 있었지만, 두 사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그냥 지나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메크부인을 위해 작곡한 것이 바로 제4교향곡이고 메크부인의 청에 따라 〈나의 가장 좋은 벗에게〉라는 부제가 붙여졌다고 한다.
챠이꼽스끼의 제4교향곡을 들을 때면 이런 일화를 떠올리며 100여년전 로씨야음악가의 그 경지에 들어가보고저 한다. 흔히 음악이나 예술작품 감상에는 정해진 답이 없이 천사람이 천가지의 해석을 가지는 게 정상이라고들 하지만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인생사를 많이 겪고 내공이 쌓이다 보면 그 예술의 깊이라든가, 진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지 않을가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도 챠이꼽스끼의 교향곡을 들으며 장편소설 한권 분량을 쓰고도 남을 법한 그 넓이와 깊이에 감탄하면서도 그런 섬세한 느낌들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음에 내 언어의 빈곤을 한탄하게 된다. 다행히 작가 보르헤스의 “우리는 우리의 언어보다 더 복잡한 언어를 상상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음악이라는 언어이다.”라고 한 명언이 있어 내 언어의 빈곤을 변명할 수 있는 방패막이 되여주어 저으기 위안이 된다.
실제로 이번 로씨야방문길에 우리는 가는 곳마다에서 음악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5월 17일 저녁, 식사하러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음악밴드가 한창 소형공연을 하고있었다. 중후한 중저음의 남성보컬이 한창 목청을 뽑고 있었는데 빠른 템포의 곡이 끝나자 이번에는 바로 그 〈모스크바교외의 밤〉이다! 이런 운 좋을 변이라구야! 식사할 생각도 잊고 따라부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거리에 나서니 버스킹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인다. 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지지 않는 거리에서 흥겹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이 자유분방해서 보기 좋았다.
에르미타쥐박물관에서 참관을 하면서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팀에서 떨어져 다른 방향으로 새게 되였는데 거기서 남성3인조의 노래와 맞띄울 줄이야. 나이 지숙한 세분이 내가 익숙히 알고 있는 그 〈볼가강의 배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박물관이라면 조용히 전시된 것들을 구경한다는 통념을 깨는 대목이다. 화음을 넣으며 부르는 품이 프로성악가들임에 틀림없었다. 관광객들이 모두 발길을 멈추고 주의깊게 듣고 있다. 얼른 그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온통 회화예술로 넘치는 박물관에 소리의 예술이 가져다준 하모니, 뜻밖의 수확이였다. 발레 공연을 볼 때는 끄덕끄덕 졸다가 이렇게 뜻밖에 조우한 성악예술 앞에선 정신이 펄쩍 드는 자신이 조금은 리해불가이다.
그리고 5월 18일, 우리 관광팀일행이 여름궁전에 도착하여 단체입장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취주악이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중국에서 관광지에 도착하면 자기 특산물을 사라고 들이미는 것보다 훨씬 보기 좋은 풍경이다. 우리를 한국관광객으로 알았던지 〈그리운 금강산〉을 연주해준다. 겉모습을 보아 할아버지들로 무어진 아마추어밴드 같은데 연주가 프로 못지 않게 수준급이다. 내 십팔번이 나오는데 어찌 ‘함구무언’할 수 있으랴, 저도 모르게 한 목청 뽑았다.
그날 이동하는 관광뻐스에서 우리의 화제는 단연 전날 저녁 쫑파티에서 인기몰이를 한 음악 〈백학〉반주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연기한 뮤지컬이였다. 로어로 된 가사여서 대충 짐작해서 전선에서 돌아온 전사의 캐릭터를 잡아 조강지처와 련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자의 사랑과 고민을 연기하였는데 히트를 친 것이다.
모두들 히히호호 웃으며 그 뮤지컬이야기로 열을 올리는데 뒤켠에 앉아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가가린호텔 권사장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는다. 바로 음악 〈백학〉이 창작되던 배경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국보위전쟁 당시 많은 가정들에서 자식들을 전장으로 내보냈는데 어느 한 가정에 8명의 아들이 다 그렇게 전선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우편배달부가 그 집에 전사통지서를 배달하고 또 배달하다가 더는 그 어머니가 비통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배달을 포기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장내를 숙연하게 만든다.
솜씨 빠른 누군가의 클릭으로 〈백학〉이 또다시 뻐스 안에 울려퍼진다. 우리 말로 번역된 가사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난다.
 
가끔 생각하지, 피로 물든 들녘에서
돌아오지 않는 용사들이
잠시 고향땅에 누워보지도 못하고
백학으로 변해버린 듯하여
그들은 그 옛적부터 지금까지 날아만 갔어
그리고 우리를 불렀어
왜 우리는 자주 슬픔에 잠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잊는걸가…
 
날아가네, 날아가네
저하늘에 지친 학의 무리 날아가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무리 지은 대오의 그 조그만 틈새
그 자리가 혹 내 자리는 아닐런지!
그날이 오면 학들과 더불어
나는 회청색의 그 어스름 속을 날아가리
대지에 남겨둔 그대들 모두를
천상 아래 새처럼 목놓아 부르면서…
 
차창 밖으로 휙휙 스쳐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니 가사의 깊은 의미가 더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그 나무들 사이로 백학이 무리 지어 날아오르는 듯하여 감회가 새롭다.
로씨야땅에서 직접 듣는 〈백학〉, 그리고 돌아와서 안방에서 다시 듣는 똑같은 선률, 그렇게 나는 려행지와 안방 사이를 넘나들며 음악 속에서 추억하고 음악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려행은 일시적이지만 려행이 주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지 않다.” 괴테의 이 말이 이제야 나에게로 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 말을 패러디하여 “려행은 일시적이지만 려행이 주는 깨달음은 일시적이지 않다”는 말로 이번 로씨야기행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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