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도
사할린의 망향가(외1편)
―로씨야기행1
“로씨야로 가지 않을래요?”
오래전부터 문학작품과 음악을 통해, 그리고 영화를 통해 알았던 그 나라에 직접 가볼 수 있는 기회가 드디여 찾아왔다.
전국 각지 녀성단체장들과 국제회의 참석차 함께하는 려행이라, 기대와 설레임으로 뇌리에선 벌써부터 “모스크바 교외의 밤” 선률이 흐른다.
그런데 가기 전부터 국제무대에 올릴 한복쇼요, 소품(토막극)이요 하면서 련습으로 긴장하게 돌아치다 보니 기대와 흥분이 반나마 가셔져버렸다. 출발전 날 인천공항 환승호텔 로비에서까지 한일자로 서서 한복쇼련습을 한다고 극성을 부렸으니 진짜 못 말리는 녀자들이다. ‘씨스뜨라’(로어로 ‘자매’라는 뜻)들과의 본격적인 려행이 서막을 연 것이다.
사할린의 망향가
5월 11일 오후, 드디여 사할린 도착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로씨야땅을 밟는 순간, 찬바람이 휙 불어와 옷속을 파고든다. 어느 정도 예상치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5월 중순인데라고 가졌던 요행심리가 보기 좋게 저격당한 것이다.
“남선생, 이게 바로 씨비리바람이라는 게요!”
일행중 연극배우 리옥희씨가 뒤따라오며 말을 건넨다.
“아, 글쎄 씨비리바람이 어찌나 쎈지 10메터 밖으로 날려가 하마트면 로씨야아바이 품에 안길 번했단데…”
입국절차를 밟느라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동안, 그녀가 수시로 빵빵 터뜨리는 유모아에 일행은 한바탕 웃으며 무료함을 날려보낼 수 있었다.
시내로 들어가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유즈노사할린스크시는 자그마한 산간도시였고 여기저기 이색적인 로씨야풍의 건물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사할린은 지도에서 보면 우리 나라 흑룡강성보다 더 북쪽에 위치해있는 물고기처럼 생긴 큰 섬인데 전체 인구가 50만명 좌우이고 조선인은 3만명정도 산다고 한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는 사할린주의 수부로서 인구 19만명의 작은 도시로 1905년부터 40년간 일본통치하에 있다가 1945년에 쏘련으로 넘어갔다.
국제회의 행사는 사흘 일정이다. 도착한 날 저녁 가가린호텔에서 간단한 환영식이 있었다. 물 흐르듯이 류창한 것 같은 젊은 사회자의 말투가 억양이나 발음상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우리 말을 배웠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이튿날 주제발표, 동영상, 강제징용되였던 현지인들의 체험담 등을 통해서야 사할린에 사는 동포들의 망향의 아픔이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막대한 것이였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사할린주 한인회 박순옥 회장이 “사할린 한인들의 아픔”이란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는데 전부 로어로 한다. 얼굴모습을 봐선 분명 우리와 같은 민족인데 우리 말을 전혀 못하니 통역을 내세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코가 큰 로씨야 녀성이 통역을 하는 것이였다. 알고 보니 그 녀성은 사할린국립대학 한국어과 교수인데 어릴 때부터 취미가 우리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어 사할린 조선인들의 망향의 아픔을 보여주는 동영상이 방영되였다. 사할린 조선인의 력사는 19세기 70년대로부터 시작되는데 1897년에 있은 첫 인구조사에 따르면 사할린에는 67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고 한다.(《사할린한인사》13페지 참조) 1910년 일본이 조선반도를 식민화시킴에 따라 조선인들의 사할린으로의 이주가 현저하게 증가되였고 그후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이주하는 조선인수가 급증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후 남사할린이 쏘련령으로 넘어가면서 이곳의 조선인들은 일본과 쏘련 그리고 한국 세 나라의 무관심 속에서 오랜 세월동안 무국적인로 살아오다가 1992년에야 영주귀국이 이루어졌는데 2007년까지 약 천명이 영주귀국하였고 2015년 기준으로 약 3,500명의 조선인들이 한국에 영주귀국하였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65세이상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여서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자식과 친지와 헤여져 살며 제2의 리산가족이 량산되기도 하였다.
현지 조선인 로인 두 분이 강단에 올랐다. 바로 1940년대, 일본의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40여년간 광산에서 광부로 지내면서 온갖 설음과 차별시를 다 받아온 김윤덕(91세)옹의 이야기가 눈굽을 적시게 한다. 또한 장차분할머니가 어린 나이에 사할린에 시집 와서 어렵게 살아오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렬악한 조건에서도 여섯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모두 대학공부 시켜 성공시킨 회상담을 들려주는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지난날 살아오던 이야기와 너무도 비슷하여 커다란 공명이 일었다.
중간 휴식시간에 당지 조선인들의 력사를 보여주는 사진전을 돌아보면서 오랜 세월동안 무국적인으로 죄인취급,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고 사할린을 떠날 수도, 국내에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도, 서신거래를 할 수도 없었다는 그들의 “망향의 한”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무시와 차별시 속에서 인고하며 살아온 그들의 삶에 가슴이 먹먹해났다.
낮동안에 보고 들은 많은 것들은 그날 저녁 우리가 소품 〈웰컴투 사할린〉을 연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전까지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사할린에 대한 인상들에 많은 색갈을 입혀 대사 한마디한마디에 사할린 동포들의 아픔을 더한층 깊이있게 담게 되였는 바 관중들은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어느새 끝난 공연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주었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보는 사람마다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사할린 주최측에서는 이번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는데 중국대표단들이 큰 힘이 되여주었다고 하면서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꼬르사꼬브의 아픔
13일 날 우리는 계속하여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약 40키로메터 떨어진 꼬르사꼬브에 가서 ‘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사할린희생동포 위령탑을 돌아보았다.
이 위령탑은 배모양으로 되였는데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버림받은 채 이곳 ‘망향의 언덕’에 서서 고국으로 데려다 줄 배를 한없이 기다리다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간 동포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1945년 8월 일제패망후 일본측은 마지막 배를 띄우며 조선인들도 데려가겠노라고 꼬르사꼬브항구에 다 모이라고 하였다. 많은 조선인들이 항구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그들이 더는 일본국적이 아니라는 리유로 그냥 내버려둔 채 떠나가버렸다. 이민국에 찾아가 무릎 꿇고 책상다리 부여잡고 집에 보내달라고, 어서 집에 보내달라고, 처자들이 집에서 기다린다고 그렇게 통곡하며 하소연했건만 다 소용이 없었다. 무국적인이라고 쏘련당국도, 혼란상태에 있던 고국도 그들을 돌보지 못했다. 위령탑 비문에 새겨진 문구가 가슴을 허빈다.
“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속에서 / 굶주림을 견디며 / 고국으로 갈 배를 /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 혹은 굶어죽고 / 혹은 얼어죽고 / 혹은 미쳐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 / 배는 오지 않아 / 하릴없이 빈손 들고/ 민들레 꽃씨마냥 흩날려 / 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 /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김문환)
반세기동안 서로 생사도 모르고 살아오던 조선인 1세들의 피타는 노력 덕분에 많은 2세들이 성공하였다. 국적을 네번이나 바꿔야 했던 어렵고 힘든 삶이였지만 현재 사할린에서 사는 2만 6,000여명의 동포들은 우리 민족 특유의 끈기와 근면성으로 각 분야에서 전문가, 엘리트로, 중소기업을 이끄는 훌륭한 기업가들로 성공을 이루었다.
현지조선인 권행자사장이 경영하는 ‘가가린호텔’에 투숙하여 로씨야료리와 조선료리맛이 결합된 퓨전료리를 먹으면서, 그리고 ‘송뚝배기’라는 꽤 큰 규모의 조선인식당에서 동태찌개를 먹으면서 이 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할린 우리말방송국 김춘자국장이 다년간 로씨야에서 우리말방송국을 운영하면서 우리 말과 우리 문화를 지킨 공이 크게 인정받아 로씨야련방공화국의 문화공로자로 국가급 상을 받고 뿌찐대통령메달까지 수여받았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로씨야땅인데도 이상하게 사할린에서는 어디 가나 친근감이 느껴졌다. 시장에 가봐도 옷가게, 화장품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중에 동포들이 꽤 있어 말이 통하지 않아도 미소로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로씨야에는 어디 가나 동상이 많은것이 특징이다. 사할린미술관 가는 길에는 체호브동상이, 레닌광장에는 레닌동상이 있었다. 듣자니 이 레닌동상은 로씨야에서 제일 큰 동상이라고 한다. 뉴스를 통해서 레닌동상을 다 철거했다고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당년에 결혼식을 치를 때면 신혼부부들이 이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하니 그들에겐 많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이리라. ‘씨스뜨라’들도 당년의 ‘벨리끼(위대한)’ 레닌을 생각하면서 진격의 포즈를 취하고 사진들을 남겼다.
사할린미술관은 2층건물로 당년에 일본은행이였다고 하는데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서민들의 일상을 담은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여있었고 조선의 미술작품과 시를 곁들인 한국의 작품들도 전시되여있어 일시 그곳이 로씨야라는 것을 잊게 만들기도 하였다.
꼬르사꼬브로 가는 길에 길녘 화장실에 들리게 되였는데 화장을 진하게 하고 돈을 받으며 휴지를 내주던 전형적 로씨야녀인의 얼굴모습이 다시한번 거기가 로씨야임을 일깨워준다. 호피무늬의 복장을 입은 그 모습에서 로씨야 서민의 일상을 알 수 있었고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자존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사할린을 떠나던 날 현지가이드가 하던 말이 인상 깊다.
“엄마는 1932년생인데 사할린에서 태여났어요. 국적이 없어서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고향생각만 나면 담배를 피웠어요. 저는 2세인데 우리 세자매중 제가 우리 말 제일 잘해요. 지금는(은) 그런 차별이 없어요. 우리 3세들이 차별없이 사는 것이 너무 좋아요.”
어눌한 우리 말이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이면서 또 희망에 넘치는 이야기이다.
통한의 력사를 간직한 사할린 동포들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기원하며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수필 / 남영도
문학과 예술이 존중받는 나라
―로씨야기행2
예술이 탁월한 나라
사할린에서부터 장장 8시간의 비행을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한 우리는 드디여 로씨야 력사와 문화의 산 증거인 붉은 광장에 서게 되였다.
사실 ‘붉은 광장’에서 말하는 ‘붉다(끄라스니)’는 고대로어에서 ‘아름답다’는 뜻으로 사용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붉다’는 뜻으로 전이되였다고 한다. 실제로 가보면 광장주변을 둘러싼 건축물들이 수려하기 그지없어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붉은 광장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축물은 단연 성바실리성당이였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세워졌는데 그 8개의 양파모양의 지붕을 얼핏 보면 같은듯하나 자세히 보면 높이도 색상도 무늬도 다 다르다. 이슬람사원과 흡사하여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당시 로씨야는 다민족국가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존경한다는 뜻에서 이슬람사원 비슷하게 지었다고 한다.
이 성당이 완공되자 그 아름다움에 도취된 황제 이반 4세가 다른 곳에 같은 건축물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건축가의 눈을 멀게 했다는 설도 있다. 사실은 력사적근거가 없는 설이라고 하는데 그런 설이 있고도 남을 법하게 성당은 웅장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동화책에서 금방 튀여나온 듯한 독특한 건축물, 그 내부가 궁금했으나 시간의 촉박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붉은 광장은 실제 듣던 소문과는 달리 천안문광장보다 크지 않았다. 해도 모스크바의 상징인지라 못 말리는 ‘씨스뜨라’들이 각가지 포즈들을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는데 마치도 “내가 여기 왔노라”라고 선고하는 듯했다. 로씨야는 그렇게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후에는 크레믈리궁을 돌아보았다. 이 세상에 태여나 영화관에서 맨처음 본 영화가 《1917년의 레닌》이 되겠는데 그때부터 익숙히 들었던 그 크레믈리궁, 그런데 실제로 현장에 도착해보니 그것은 궁전이 아니라 커다란 건축군체였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건축물들은 붉은 성벽에 둘러져있었는데 망루, 대성당, 박물관, 정부기관사무청사에 대통령집무청사까지 다 들어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축군이였다. 그러니 력사적인 건축물인 동시에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생생한 문화재인 것이다.
곧 이어 박물관을 참관하면서도 입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눈이 부실 정도의 금은보화들, 화려한 궁중의상들, 그리고 미술작품을 방불케 하는 마차들, 몇세기 지났으나 그 당시 짜리로씨야 대제들이 누렸을 부귀와 영화를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로씨야의 옛수도인 싼끄뜨뻬쩨르부르그의 에르미타쥐궁전에 가보니 모스크바에서 본 것은 아무 것도 아니였다. 세계3대박물관의 하나인 이 궁전에는 몇백만점의 예술품이 소장되여있다고 하는데 단 겨울궁전만 돌아보았는데도 10여년전에 가본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보다 더 큰 규모와 웅장 화려함으로 우리의 넋을 앗아갔다. 이름난 명화들과 샹들리에와 황금빛무늬 벽지로 도배된 겨울궁전의 모습이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어디 그뿐이랴, 지하철을 타보면 또 지하궁전을 련상시킬 정도로 지하철역 곳곳에 새겨진 조각상과 미술품들, 저녁산책길에 다리를 지나는데 노을이 지는 네바강의 경치를 유화로 그려내는 수수한 옷차림의 할아버지… 그렇게 로씨야는 건축, 미술, 등 모든 예술분야에서 탁월한 나라임을 수시로 일깨워주고 있었다.
일찍 위대한 음악가 챠이꼽스끼의〈백조의 호수〉의 음악과 발레에 매료되였었는데 려행스케줄 덕분에 이번에 마린스끼극장에서 발레를 구경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발레를 관람하는 현지인들의 옷차림을 보면 단정하면서도 수려하여 예술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함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한껏 차려입고 입장하는데 5층으로 된 관람석이 전부 만석이다. 우리는 2층에서 관람하는데도 무대우의 배우들이 개미같이 보여 집중이 잘 안되는데 그 5층의 관중들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피로가 몰려와 잠간 졸다가 요란한 박수소리에 놀라 깨여 주위를 살펴보니 공연은 끝났고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공연의 성공을 축하하며 박수를 보내는데 가히 지루하다 할 정도로 오래오래 지속되였다.
구경이 끝나 나오니 밤 11시, 그때에야 저녁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당지의 관례에 따르면 옷에 음식냄새가 밴다고 공연구경전에는 일절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과 예술인에 대한 존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15일 저녁, 모스크바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구경하면서 ‘씨스뜨라’들의 기분은 완전히 고조되였다. 그토록 동경해마지 않던 모스크바에 왔는데 어찌 그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깊이 잠든 화원은 고요해 / 산들바람 속삭이네 / 아름다워라 / 내 맘 이끄는 황홀한 이 밤이여 / …”
독창이 중창으로, 그리고 합창으로 번지며 〈모스크바 교외의 밤〉의 노래소리가 모스크바의 밤하늘을 가르며 멀리 울려퍼졌다.
우리를 심취케 했던 로씨야문학
모스크바에서 싼끄뜨뻬쩨르부르그로 가기 위하여 우리는 기차역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역이 없었다. 알고 보니 기차역 이름에 도착지 지명을 쓰기 때문이란다.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되였는데 한번 타보니 그 기발한 발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파로 북적이는 기차역에서 기차를 잘못 타는 실수는 흔히 생길 수 있는 일, 그렇지만 로씨야에서는 기차역만 제대로 찾아가면 기차를 잘못 탈 념려는 전혀 없을 것 같다. 실제로 모스크바에는 이런 기차역이 9개나 있다고 하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기차에 앉으니 30여년전 일이 생각난다. 대학시절 어느 여름방학에 한달동안 로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쏘련문학석사시험을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쏘련작품을 펼치면 첫페지부터 일여덟페지 쭉 환경묘사가 이어지고 심리묘사가 또 지루하게 계속되여서 그까짓 따분한 쏘련문학공부를 안한다고 포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구석이 없지 않으나 이십대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자아위안을 해본다.
차창으로 스쳐지나는 가없는 들판을 바라보노라니 그때 읽었던 문학작품속의 그 지루한 환경묘사가 련상되며 그만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된다. 맞은켠에 앉은 소박한 차림의 모녀가 조용히 책을 읽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어디 가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우리네 풍경과 크게 대조된다.
어릴 적 생일날 엄마가 준 용돈으로 고리끼의 장편소설 《어머니》를 사서 보던 일이 떠오르고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는 소설속의 빠웰 꼴챠낀의 정신을 따라배우던 일도 생각나면서 몇세대에 걸쳐 미친 쏘련문학의 영향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대학시절 쏘련문학을 가르치던 림교수님이 머리를 뒤로 빗어넘기며 수업을 하던 정경이 떠오른다. 그때 로씨야사실주의문학의 거장 레브 똘스또이와 그의 장편소설 《부활》이 나에게 준 영향은 거대한 것이였다. 소설속의 남주인공 네흘류도브가 쩍하면 들먹이던 “참인간의 참생활”이 오래동안 나의 사상을 지배하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소설이랍시고 쓴 소설속의 주인공 이름도 안나였다.
로씨야사람들의 위대한 작가에 대한 존중과 숭배는 곳곳에 세워져있는 도스또엽스끼, 체호브, 똘스또이, 뿌쉬낀 동상을 통해서, 그리고 정성껏 조성해놓은 작가들의 생가, 박물관 등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었다.
시인 뿌쉬낀의 동상 앞에서 우리는 뿌쉬낀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시인의 령감이 그 손끝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뿌쉬낀의 명시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를 조용히 읊조려보았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 서러워 말아, 노여워 말아 / 울적한 날은 참고 견디라 / 즐거운 날은 돌아오리니
마음은 항상 미래에 살고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니 /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 지나간 일은 그리우니라.”
30여년전 천방지축 뛰여다닐 때 멋모르고 읊었던 시, 세월이 흘러 이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너나없이 어슷비슷하게 살아온 우리네 삶이란 것을 뒤돌아보면 아픔과 슬픔을 겪지 않은 인생이란 거의 없다. 그래도 꿋꿋이 살아가는 것은 아직도 꿈 한자락 가슴속에 품고있기 때문이 아닐가?
로씨야문학은 그렇게 우리 생활에서 사라진 듯하나 우리의 령혼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고 뇌리속의 세포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전 자료를 뒤지다가 1935년 《북향》지에 련재된 작가 안수길의 글과 맞띄우게 되였는데 그중 한 단락에 시선이 멈춰선다.
“수년전에 《죄와 벌》을 읽다 팽개쳤던 것을 수개월전에 다시 읽었는데 그것을 재독하는 사이에 자연히 도스또엽스끼의 위대한데 감격… 도스또엽스끼의 작품은 읽기 힘들다고 해서 그 가치가 감수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작가와 달라 철저한 현미경적인 리얼리스트이다… 그 앞에서 자연 머리가 숙여진다.”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심리적통찰력으로, 특히 령혼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도스또엽스끼, 이제 로씨야국립도서관앞에 그 동상이 세워진 리유를 알겠다. 그리고 또 괴테이후 세계문학을 지배한 소설가였고 커다란 문화적 각성을 일으킨 사상가였던 똘스또이, 이번 려행길에 스케줄사정으로 도스또엽스끼의 생가와 똘스또이박물관을 가보지 못한 것이 큰 한으로 남았으나 지루하다고 내팽개쳤던 명작들을 다시 집어들고 하나하나 독파하는 것으로 그 한을 치유하리라. 그런 명작들이 새로운 감동과 깨달음을 주리라는 기대에 벌써 가슴은 부풀어오른다.
10일간의 로씨야려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 바람으로 부랴부랴 된장찌개를 끓였다. 로씨야의 문학과 예술은 즐기면서 그 음식에는 쉽게 질려버리는 이 오십대 아낙을 어찌하랴.
된장냄새가 온 방안에 퍼지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이 익숙함. 국거리가 없어 김치를 넣었더니 된장맛이 좀 덜하긴 해도 열흘간 로씨야음식물로 느끼해질 대로 느끼해진 내 위에 위로를 주기엔 충분한 맛이였다.
배부른 오후나절, 문득 사할린의 그 ‘망향의 언덕’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어간 겨레들이 생각났다. 나는 고작 열흘 된장국을 먹지 못한 것이 이렇게도 한스러운데 그들은, 그들은…
그 처절한 심정이 가슴에 맞혀오며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난다.
로씨야려행은 그렇게 사할린과 모스크바를 별개로 각인시키며 내 추억의 고간속에 저장되여간다.
이제 또다시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슴없이 그 품에 안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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