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도
아직도 꿈꾸는 녀자
올해 3월은 내 나이 쉰다섯이 되는 생일이 있는 달이다. 이제는 ‘쉰내가 풀풀 나는’ 나이, 그럼에도 소녀적 감성은 여전히 살아있어 유치찬란하게도 이 세상에 온 지 ‘660개월이 되는 달’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의미를 부여해본다. 게다가 정년퇴직을 맞이하는 조금은 특별한 달인 것 같아 3월중 임의의 사흘간의 일지를 여기 옮겨본다.
사이판의 꿈―3월 4일
말로만 듣던 유명한 관광지 사이판(塞班)에 드디여 왔다.
오랜만의 일상탈출, 가없이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빛으로 신비스런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일년 내내 글밭에서 헤매다가 푸른 바다와 잔디가 어우러진 필드에 나오니 후련함이 페부속까지 파고든다. 부부동반으로 어울려 서툴기는 하나 이쪽에서 친 골프공이 태평양을 날아넘어 저쪽 그린에 가 떨어지는 신기한 경험도 하면서 련 며칠 천혜(天惠)의 자연세계에서 맘껏 휴가를 즐겼다.
한달 전, 사이판관광을 오기로 하고 관광 일정을 살펴보다가 눈이 반짝 빛났었다. 바로 그 일정 속에 내 생일이 끼여있었으니… 이제 흥분 같은 것을 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설렘 같은 것이 살짝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낮에는 골프와 관광, 저녁에는 화려한 디너쇼다. 여러 나라 관광객들의 취미에 맞게 〈만남〉(한국), 〈달빛이 제 마음을 대신하네요(月亮代表我的心)〉, 일본엔카(演歌) 등 기타반주로 된 남성이중창이 절묘한 화음 속에 어우러지고 무희들의 현란한 전통춤사위 또한 아릿다웠다. 4개 국어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관광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사회자의 능란한 말솜씨에 홀리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저녁나절을 보냈다.
이튿날, 가이드의 안내로 사이판에서 해발이 제일 높다는 포차우산 정상에 올라보니 사이판섬이 한눈에 안겨오는데 제주도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섬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머지않은 곳에서 유혹하는 에메랄드빛의 바다, 알고 보니 그것은 바다밑바닥에 가득 깔려있는 산호가루가 해빛을 받아서 옥색으로 빛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최대격전지로 두달간 불바다가 되였다는 이 섬, 미군과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 일본군이 항복을 하고 민간인 수천명이 천황페하 만세를 부르며 절벽에서 뛰여내려 집단자결을 했다는 만세절벽, 그 속에는 강제로 징병, 징용되여온 조선인과 위안부들도 적잖게 들어있었다고 한다. “한국인위령평화탑”앞에서 기념비들을 돌아보노라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한때 나라를 잃고 이 머나먼 곳에까지 끌려와 망향의 한을 달래며 비참하게 쓰러져갔을 겨레의 넋들! 70여년이 지난 오늘 그런 피눈물의 력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직 파도만이 흰 포말을 날리며 처절썩처절썩 바위를 때릴 뿐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티니안섬은 당시 핵폭탄을 저장했던 력사적 장소로 바로 여기서 폭격기에 핵폭탄을 싣고 일본에 날아가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군들이 원주민들을 마구 수장해버려서 더이상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여버린 저기 저 호수, 지금도 저기서 유골이 나오고 있다니 평화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여기 정상에 예수상을 세운 깊은 뜻을 알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이곳은 1990년대 유명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촬영지라고도 한다. 극중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간 의사 장하림과 종군위안부 윤여옥이 극적으로 만난 장소가 바로 여기 사이판의 제프리비치,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일본군이 그녀들을 집단 사살한 뒤 용케도 살아남은 윤여옥이 만삭의 몸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곳이였던 것이다. 20여년전 이 드라마를 보며 너무도 가슴이 먹먹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여 가이드의 소개를 들으며 연신 그곳을 뒤돌아보았다. 가슴이 알알해났다.
려행가기 전 목적지에 대한 사전공부를 하지 않고 떠나군 하는 내 습관이 또 한번 보기 좋게 저격당한 것이다!
겉보건대 ‘화려한 의상을 떨쳐입은’ 이 열대섬이 워낙은 이렇게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슬픈 력사를 간직한 곳인 줄 그제야 안 것이다. 그래서 지난 며칠간의 관광과 디너쇼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강렬한 자외선 탓인지 구리빛 얼굴이지만 편안함이 느껴지는 원주민들의 미소 띤 모습에서 평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1990년대 방직공 모집때 왔다가 이곳에 아예 뿌리를 내린 조선족들이 통역, 가이드 등으로 생업에 종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또한 보기 좋았다.
저녁은 사이판에서의 마지막 식사, 예정대로 나의 생일축하파티가 열렸다. 유서 깊은 사이판에서의 생일파티, 일행 중 맏언니가 미리 준비한 깜짝 선물이 있었으니 바로 플루메리아꽃과 생일케익이다. 그 꽃을 목에 걸고 생일초불을 불며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뜻깊은 생일을 쇘다.
아침부터 위챗 대화방에서 생일축하세례를 받았던 터라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데 갑자기 목이 메여온다. 26년간 잊지 않고 내 생일을 꼭꼭 챙겨주셨던 시어머님이 안 계시는 이국땅에서의 생일파티라 그런지 울컥해난다. 그리고 겉으로 별로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지난 30여년간 적정온도와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이 자리까지 쭉 함께 와준 남편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준 남편이 옆에서 빙그레 웃어준다. 남세스럽게 닭살 돋는 멘트를 날리지 않아도 이제 미소 하나로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나이에까지 온 것이다.
지금 이대로 충분히 만족스러우니 범사에 감사하며 살어리랏다!
‘베푸는 자’의 자세―3월 18일
“그 당시 그 돈이 어떤 분들에게는 1%일 수 있었겠지만 우리에게는 100%였습니다!”
3월 18일,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 설립 15주년 기념행사에서 대학시절 장학금 지원을 받았던 수혜자(졸업생)들의 감격의 목소리가 울린다.
당시 북경에서 대학을 다니는 어려운 조선족학생들을 후원하기로 뜻을 모은 분들이 애심장학회를 만든 지도 어언 15년, 이제 북경조선족사회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고 그 기념행사에 후원자신분으로 표창을 받는 자리에 섰다. 10여년간 후원을 했으니 표창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베푼 자’의 심리로 말이다.
뒤이어 장학회의 사랑을 동력으로 꿈을 키워왔고 졸업 후 취업, 창업 경험담을 주고받는 졸업생들의 토크쇼이다. 볍률사무소를 차리고 회사를 차리면서 얻은 경험을 소개하면서 큰 꿈을 그리고 있는 여유 있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며 비전을 제시하는 말솜씨들이 대단해서 회장에서는 수시로 웃음이 터지고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오후에 진행된 후원자 간담회에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는 계속되였다. 그중 왜소한 체구의 어느 한국 녀성의 이야기가 귀를 솔깃하게 했다.
젊은 시절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시골학교에 내려가 근무한 적 있는데 지적 우월감에 잔뜩 젖어 몇달 만 가있기로 하고 도착한 첫날, 녀학생들이 마실 물이 귀한 당지에서 생수며 생활필수품들을 가지고 나타나 “선생님도 곧 가실 거죠?”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시골학교 근무 기피는 보편적 현상인지라 그렇게 묻는 것에는 리해가 가는데 곧 떠나갈 선생한테 생활필수품들을 가지고 나타난 학생들의 마음씀씀이에 커다란 감동을 받고 몇달 만 있기로 한 것을 몇년을 근무하다가 돌아왔다고 한다. 지적 우월감에 젖어있는 교만한 자신을 시골학교의 순수한 학생들이 치유해주었다고 하면서 그런 경력이 그 후로도 잘났노라, 베풀었노라 교만에 젖어있을 때면 흔히 가질 법한 교만과 편견을 깨도록 수시로 채찍질해주었다고 한다. 그 후로 학생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고 중국에 와서도 애심장학회를 통해 조선족학생들을 계속 만나고 있는데 순수한 조선족학생들한테서 많이 배우고 있다고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그런데 그 낮은 톤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관통하는듯 충격적이다.
이른바 ‘베푸는 자’의 교만한 심리로 그 자리에 앉아 학생들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던 내 뒤통수를 치는 순간이다. 첫 몇년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처럼 저자세로 조용히 지냈지만 차츰 후원자 모임에 불리워나가면서 점차 ‘오른손’이 알게 되고 세상이 알게 됨에 따라 은근히 교만심리가 자라났던 것 같다.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키워주기 위한 주최측의 의도를 파악하고 몇년간 대학생성장포럼에 참가하여 심사위원을 맡아하면서도 줄곧 작간했던 그 무서운 ‘베푼 자’의 교만…
충격을 받고 가슴을 어루쓸며 생각해보니 후원자들과 학생들의 평범한 듯한 말속에 많은 의미심장한 말들이 들어있는 것이였다.
어느 졸업생이 어릴 때 자기의 꿈은 선생이 되는 것이였는데 지금은 그 꿈을 이루어 대학선생이 되였다고 하면서 그때 한 학급의 어느 남학생이 자기의 꿈은 “아바이가 되는 것”이라고 해서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인재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되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하면서 자기는 이제 좀더 멋진 선생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면서 말을 마치는데 한바탕 웃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말이 참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아바이가 되고” 멋진 “아바이로 되기”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베푸는 자’의 교만한 꼬리를 내리우고 이제 멋있게 나이 드는 법을 하나하나 터득해나가야겠다. 모든 이들에게서 배우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또 낮추어야겠다.
직업인생에 마침표 찍는 날―3월 30일
퇴직환송회가 끝났다.
간단한 작별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후배들이 정성껏 준비해준 생화와 선물을 받아안고 또다시 혼자가 되였다.
산책삼아 걸으며 생각해보니 감구지회가 몰려온다.
이변은 없었다. 온통 칭찬일색이다. 정든 후배들과 이제 더는 함께 지내지 못한다는 것은 심히 서러운 일이나 그렇다고 남들처럼 울고불고하는 해프닝을 벌이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굳이 이변이라고 한다면 부사장과의 담화에서였다.
아무 생각 없이 부사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맞은켠에 앉으라고 한다. 정년퇴직할 때에 있을 법한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나오면 되리라는 단순한 생각에 의자에 앉았다. 부지중 흰 하다가 날아오며 내 목에 걸린다. 부사장이 장족이라 자기 민족의 풍습에 따라 례의를 갖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것이다. 32년간 수고했다고, 편집일은 해본 사람만이 안다고, 몇마디 하지 않았는데 벌써 울컥한다. 무덤덤하게 앉아있다가 예상외로 감동폭탄을 맞은 것이다.
돌이켜보니 32년간 한 직장에서 오롯이 도서편집이라는 한 우물만 파면서 달려왔고 몸 여기저기서 적신호를 보내오는 시점에서 직업인생에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저도 모르게 32년전 북경에 도착하던 첫날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애인과 함께 출판사에 도착보고만 올리고 근처에 있는 신광식당이라는데 들어가 점심밥을 사 먹으려고 돈을 내미니 카운터 복무원이 량표(粮票)를 내라고 한다. 물론 전국적으로 배급제를 실시하던 시기라 준비해갔던 전국량표를 내놓으니 안된다고, 딱 북경량표여야 한다고 잡아뗀다. 아, 북경의 높은 터세여! 하고 한탄하고 있는데 우리 뒤에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던 나이 지숙한 분이 북경량표 6량을 내주는것 이였다. 꿔준 것이 아니라 그저 주는것 이였다. 덕분에 낯선 북경에서의 첫 끼니를 무난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 고마운 북경사람 덕분에 북경에서의 첫 출발을 잘하게 되였고 32년간 쭉 관건적인 모멘트마다 귀인들을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는 생각에 그 에피소드를 잊지 못하는 것 같다.
1980년대 대학졸업생이라고 우쭐하며 ‘염황자손’이며 ‘스찔’이라는 낱말을 모르는 선생님들을 은근히 깔보면서도 정작 자기가 번역할 때는 ‘역할’을 전부 ‘역활’로 잘못 적어 혼나던 일, 처음으로 편집해놓은 원고를 조장선생님이 페지마다 빨간 볼펜으로 가득 고쳐놓은 것을 보고 억울해하면서도 수긍하던 일, 그렇게 선생님들의 손에 이끌려 한발자국한발자국 성장하며 걸어온 길이다. 편집은 잡가가 되여야 한다고 하시던 선생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감염되여 학구적인 태도로 배우고 실천하며 묵묵히 걸어온 길, 그렇게 나이 들어가면서 똑같은 자대로 젊은 편집들에게 엄하게 요구하면서 여러명 울리기도 했었지.
일각에서는 우리가 만든 조선어도서를 보는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된다고 그렇게 애쓰냐고 하지만 오랜 편집생활에 생긴 직업병이 고질병으로 자리 잡아 틀린 문구를 보면 그저 넘어가질 못하고 번역을 하다 해결 못한 것이 있으면 밤을 패서라도 꼭 답안을 찾아내고야 만다.
퇴직을 앞두고 묵은 원고들을 정리해 페품으로 팔아버릴 양으로 20여년전의 원고들을 펼쳐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수정한 원고들마다에 내 젊은 날 고뇌의 흔적들이 거기 력력하니 찍혀있는데 왜 아니랴, 여느 도서를 편집할 때는 경추가 너무 아파 울기까지 하였고 여느 도서를 편집할 때는 삼복철 땀을 철철 흘리며 먼 교외에 있는 80고령의 저자선생님에 다녀오며 의문점들을 해결하였었지.
편집실분위기 또한 가족 같은 분위기라 선배님들이 가끔씩 베풀어준 작은 은혜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기숙사에서 혼자 지낼 때 삶은 옥수수를 가져다주시던 L선생님, 취직한 첫해 겨울 음력설 쇠러 집으로 가는데 기차간에서 먹으라며 손수 만드신 가지김치를 도시락에 싸서 건네주시던 X선생님, 그리고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1살이 채 못된 아들을 업고 혼자 몸으로 동북에 있는 시집으로 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려고 친히 역에 나가 기차표를 끊어준 Q선생님… 신랑과 말다툼을 한 이튿날 출근하여 하소연을 하면 저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던 친정엄마처럼 후더운 교정조 선생님들…
그렇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는데 정작 자기가 로편집이 되여서는 젊은이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도움 제대로 준 적 없으니 어찌 가책이 아니 될가!
집에 도착해 퇴직을 했다고 위챗으로 알리니 어느 선배님이 퇴직간부 위챗대화방으로 안내한다. 들어가 보니 90여명이나 운집해계시는데 익숙한 분들 성함과 얼굴이 보여서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제 또다시 막내로 그들 앞에 선 것이다.
인생후반전 이렇게 다시 막내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다. 직장의 울타리에 갇혀 못해본 것들을 하나하나 시도해보고 이루어가고저 또다시 길우에 선 것이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과의 경계선에서 고민할 필요없이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여 마음이 시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 생후 660개월 된 녀자여!
다리 떨릴 때 말고 심장이 떨릴 때 떠나자!
꿈이 손짓해 부르는 저기 저 언덕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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