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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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겨울밤의 클래식 댓글:  조회:1010  추천:35  2008-12-11
  겨울밤의 클래식 남영도      겨울밤, 밖에서는 눈이 내립니다. 회색빛의 콩크리트숲을 하얗게 덮으며 소복소복 내려쌓입니다. 방안에는 클래식이 흐릅니다. 겨울밤의 고요와 정적을 더해주며 조용히 흐릅니다… 밖에서 내리는 하얀 눈을 바라보면서 피아노며 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클래식음악의 향연에 기대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것인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설경을 흔상할수 있는 눈과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수 있는 귀를 가지고있다는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할따름입니다. 문득 내가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집니다. 이 세상에 온지 마흔해도 넘었는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스스로도 경이롭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건 뭘가고 생각해봅니다. 저기 내리는 눈우에 당당하게 발자국을 남길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살아오기나 한것인지 가슴에 손을 얹어봅니다. 이제 받기만 했던 사랑을 사람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때가 된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건 아직도 사랑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때문이 아닐가는 생각을 합니다. 눈이 내리는 밤은 사람을 침잠하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듯합니다. 눈이 내려서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밤, 눈이 내려서 풍요로운 세계,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들어 가끔씩 산다는것에 회의를 느끼며 가슴 시려하다가도 눈이 내리는 날만큼은 순수해지고싶고 겸허해지고싶고 너그러워지고싶은게 요지음의 심경이 아닌가싶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였느냐?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는 시의 한구절입니다. 저도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게 하는 이 시구, 처음 대했을 때는 크게 전률하기도 했습니다만 요지음과 같이 삭막한 날에는 다시금 생각나는 시구입니다.   눈감으면 미워했던 사람, 원망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용서할수 없는 이를 용서하는것이 진정한 용서라고 했던가요?! 그 사람들 어쩌다가 첫단추를 잘못 끼워 여기까지 온건 아닌지, 혹시 나와 달리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건 아닌지?!… 한번 생각을 바꾸어보기도 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했던가요?! 그러고보니 그렇게 될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의 처지가 이해되기도 하고 좀 더 인간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고픈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모든걸 다 놓아주고 모든걸 다 벗어놓고 내내 사랑하면서 살고싶습니다. 내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주위의 얼굴들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이 세상에 온 인연의 끈을 쉽게 놓아버릴수가 없습니다. 매번 내 사랑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의 미소를 짓는 그들을 볼 때면 내가 이 세상에 온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기지 않을수 없습니다. 요지음과 같이 삭막해보이는 세상에도 자원봉사로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는 이들이 늘어나고있다는건 좋은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한국의 연예인 차인표․신애라 부부가 둘째아이를 입양하였다는 기사가 추운 겨울날 훈훈한 감동으로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어찌구러 부모들의 버림을 받은 작은 생명, 그 작은 생명에게 이 세상에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부여해준 그 아량이 참으로 멋있고 아름답습니다. 말은 쉬워도 정작 실천하려면 결코 쉽지 않은 선행을 저지른(?) 그들이 다른 연예인들과 달리 훨씬 돋보이기도 합니다. “큰 애는 배 아파서 난 자식이고 둘째 애는 가슴이 아파서 난 자식”이라는 말이 너무나 인상 깊습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사랑의 실천을 해가는 사람들로 하여 더 살맛나지 않을가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행복이란 무엇일가고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은 흔히 당신은 행복하냐고 묻는 질문에 쉽게 예쓰라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기의 삶이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때문일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바로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기때문이라고 합니다. 눈 들어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사실 열손가락으로도 헤아릴수 없는 행복속에 쌓여있으면서도 행복을 못 느끼면서 살아가고있는건 아닌지요? 불행을 헤아리는데만 손가락을 사용하다보니 그 많은 행복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건 아닌지요? 끊임없는 소유욕으로 가진다는것에 집착하기때문에 늘 욕구불만으로 불행하다고 느껴지는건 아닌지요? 한해전 음력설즈음의 어느 겨울날, 몇년간 학비지원을 하던 창평의 고중생을 집으로 데려온적이 있습니다. 요지음 대도시의 사내애들한테는 전혀 낯설은 솜바지를 입고있었는데 혼솔기사이로 솜이 밀밀 나오고 여기저기 깁고  또 기운 그 솜바지를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역시 그런 장면은 처음인지라 눈이 휘둥그래진 아들애와 함께  당장 그애를 데리고 나가서 속내의며 스웨터며를 사주었을 때 그 순박한 얼굴에 피여나던 송구스러움과 감사의 눈빛, 그 눈빛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그리고 우리 가정의 조그마한 경제적도움으로 그 아이가 고중단계의 공부를 원만히 마치고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나도록 기뻤습니다. 아직도 이루지 못한 무언가로 늘 고민을 하고 안달을 하는 요지음의 나에게 그 애의 눈빛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미 가진것에 만족해하면서 작은것일지라도 주고 베푸는 일에 마음을 쓴다면 늘 욕구불만으로 심기불편해있기보다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을가고 생각해봅니다. 주는만큼 늘어나는것이 행복이라고 합니다. 작은 사랑, 작은 실천으로 자기보다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가난한 이들에게 하나, 둘 베풀어가느라면 이 세상은 사람, 사람들의 사랑으로 둥글어지고 행복으로 차고 넘치지 않을가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그만 산길에 흰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욱을 영원히 남기고싶소        내 작은 마음이 하얗게 물들때까지        새하얀 산길을 헤매고싶소        …      령혼을 순수에로 부르는 소프라노의 깊고 웅글진 소리가 조용히 방안에 울립니다. 그 음악소리속에서 겨울밤은 조용히 깊어갑니다… (2006.2)
6    비만과의 전쟁(수필) 댓글:  조회:1004  추천:40  2008-10-23
비만과의 전쟁                                                                        남 영 도 현대문명의 발전은 인류를 한없이 편리하게 해주었지만 그대신 사람들을 한없이 게으르게 만들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집에서는 티비와 에어컨을 리모콘으로 작동하고 회사에서는 장시간 컴퓨터에 마주앉아 키보드에 손목을 얹은채 손가락만 움직이는 생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활동량이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즐어든것이 요지음의 현실이다.   날씬하다고는 할수 없지만 30대까지도 남보기에 별로 미안하지 않은 몸매를 유지해왔었던 나다. 그런데 편리한 생활의 변화의 몫이였을가, 아니면 나이의 몫이였을가, 마흔이 넘으면서 컴퓨터앞에 장시간 마주앉아 일하는 생활이 되풀이되면서 슬금살금 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몸이 붇기 시작한다는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름대로는 다이어트를 한다고 근 3년간 매일 요가를 견지하면서 일부 효과를 보기도 하였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던지 1년이 지나자 또다시 붇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절구통이 왔다 울고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때로는 “‘육’이 있어야 ‘감’이 있지…”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안해보기도 하지만 그런 말은 대체로 날씬한 이들이 뚱뚱한 사람들의 체면을 세워주느라고 만들어낸 말일뿐 말그대로 “잠간”의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위안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수시로 다이어트의 절박성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내가 외모지상주의자인것은 아니다. 20여년전 쌍거풀수술이라는 성형붐이 크게 일 때, 보는 이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작게 생긴 외겹눈임에도 성형이란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인듯이 그 필요성이라는것을 별로 못느끼고(?) 살아왔고 옷차림같은것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잘만 살아왔었다. “순기자연(順其自然)”이라는 말을 좋아하듯이 모든 일에 순리를 따르려고 해왔던 내 성정의 발로일것이다.   외모지상주의가 아니더래도 의사들의 분석을 보면 비만은 모든 성인병의 온상이요, 중년건강의 적신호로 고지혈증, 고혈압, 당뇨병에 암증까지 초래한다고 하니 나중에 병으로 인한 고통에 대비해서라도 미리 조처를 할 일이렷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큰 맘 먹고 균형적인 영양식사를 하면서 근원적으로 비만을 근치할수 있다는 식이료법을 받아들이고 드디어 다이어트의 행렬에 끼여들었다.   다이어트는 석달 일정으로, 아침과 저녁 두끼는 식이섬유가루로 식사를 대신하는데 그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면 식사 끝. 간식뿐아니라 후식, 야식도 일절 금하고 정 배고플 경우 오이나 도마도를 먹는것은 허용한다는것, 그대신 물은 하루에 3리터이상 마셔야 한다는것이다. 그것도 오전 10시와 오후 3시에 시간을 맞추어 대량으로. 말그대로 살인적인 다이어트였다.   첫날은 호기심과 기대속에서 2~3분만에 식사를 끝내고 나앉았다. 그런데 한시간이 지나자 뭔가를 먹고픈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도마도 한개를 게눈 감추듯 먹고 났는데도 여전히 속이 허전하다. 그래서 오이 한개를 가져다가 쌈장에 찍어먹었더니 아, 그 맛이란…   다음날부터 밀려드는 음식물의 유혹. 배 고파서라기보다 구수한 음식물냄새를 맡고도 먹을수 없다는것이 가장 큰 유린이였다. 그럴수록 여태 분별없이 무절제하게 음식물을 먹어댄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마음을 고쳐 먹고 용케 참아내였다.   그러다보니 매일 기다려지는것은 점심식사였다. 밥과 반찬, 맛과 향이 어우러진 식사를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것은 커다란 향수가 아닐수 없었다.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어우, 맛있다!”는 감탄사가 연방 튀여나왔다.   미각과 후각이 발달했다는것은 점심식사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지만 저녁식사를 위해서는 혹형에 가까웠다. 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이 없을 정도로 다식가인 나에게 식욕억제처럼 잔인한 노릇은 또 없을것이다. 특히 눈에 맛있게 보이는 음식과 갖가지 유혹으로 코를 간지럽히는 음식물의 향은 그야말로 최고의 고문이요, 최대의 적이 아닐수 없었다. 티비를 보다가도 눈을 자극하는 현란한 요리들이 나오면 제꺽 채널을 돌려버린다. 퇴근길에 상점에 들려도, 주말에 거리에 나가도 음식물냄새의 유혹은 곳곳에서 온다. 아, 미각과 후각을 가진 인간의 불행이여! 이런 감탄사를 련발하며 억제하노라니 이 세상의 모든 음식물들은 나를 곯리려고 존재하는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저녁회식자리는 될수 있는한 피했고 피치못할 약속으로 꼭 그런 자리에 나가야 할 경우에는 무릇 “육”이 붙은 요리들은 눈으로 보는것으로 만족하고 야채만 집었다. 옆에서 식도락이라는 말로 유혹하기도 했지만 번마다 눈 한번 질끈 감고 참아냈다.   배고픈 자는 먹는것을 노래한다고 했던가, 긴긴 저녁 시간, 글을 쓰려고 컴퓨터에 마주앉으니 옛날에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이 자꾸 눈앞에 얼른거려 아예 음식에 관한 수필을 쓰는것으로 먹고픈 충동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 긴긴 시간을 잘 넘기면 나는 이기는것이다.   자연히 다이어트에 관한 기사며 비결들에 눈길이 갔다. 신문기사를 보니 예상외로 비만은 지구 온난화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라고 한다. 영국인의 23프로, 미국인의 30프로가 비만, 현재 전세계 65억인구중 4억이 비만이라고 하며 이대로 가다가는 2050년에는 성인의 절반이상이, 영국은 60프로이상이 비만상태로 될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에 영국은 범국가적 차원에서 비만과의 전면전을 펼치고있다는것, 즉 국가재정에서 자금을 떼내여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들을 장려한다는것이다. 이는 2050년에 이르러 비만으로 인해 국가의료시스템에 지워질 거액의 부담에 대처하기 위한 예방조치라고 한다.   예상보다 심각한 분석을 보니 비만은 현대문명의 발달에 따른 물질의 풍요와 함께 나서는 인류 공동의 문제였다. 이제 비만과의 전쟁이 전 지구적인 전쟁으로 번져지는것은 시간문제일것이였다.   인고의 열흘이 지나자 서서히 적응이 왔고 40일이 되자 그런 식생활에 점차 습관이 되였다. 두달이 지나자 체중이 5킬로정도 빠져 아침 출근시간이면 줄어든 허리사이즈때문에 바지를 골라 입어야 하는 즐거운 고민까지 생겼다. 만나는 사람마다 날씬해졌다고 난리들이고 옷가게에 가면 예전엔 엄두도 못내던 옷들에까지 손이 가진다.   40여일이 지난후 한동안 체중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 전문가에게 물으니 그것은 내장주변에 쌓인 지방을 빼는 중이여서 그렇다고 한다. 신비와 기대 속에서 계속 원래의 식단대로 복용하였다.   평소에 쩍하면 저녁밥을 많이 먹어 위가 더부룩하고 불편하던 현상이 가뭇없이 사라졌는가 하면 몇년간 나를 곤혹케하던 변비증상이 해결되여 말그대로 “유쾌, 통쾌, 상쾌”라는 낱말의 의미를 매일 실감하면서 산다.   잔인한 석달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날, 모처럼의 저녁회식자리가 있어서 순서를 바꾸어 점심에 대용찬을 먹고 저녁은 현란한 요리앞에서 금욕의 탕개를 좀 늦추어보았더니 식사후에 따르는 그 위의 불편함이라니…오히려 오이와 도마도로 조촐하게 하던 저녁식사가 편하게 느껴졌고 다시 한번 습관이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반년간의 다이어트, 식욕억제라는 인고의 시간을 감내하면서 느낀 비만과 건강 그리고 산다는것의 의미, 그것은 단순히 외모만의 문제에 한한 간단한것이 아니였다. 인간의 오욕중 첫번째 욕구인 식욕을 포함하여 끊임없이 팽창하는 인간의 허다한 욕구를 어떻게 절제하고 어떻게 그 욕구에 슬기롭게 대처해나갈것인지를 검증하는 한차례 시련이였고 따라서 체지방지수와 행복지수의 함수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좋은 계기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인고의 과정에 얻은 모든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이 세상 무슨 일이나 맘대로 할수 있다는 프랑스의 개혁대통령 사르코지도 맘대로 할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복부비만이라고 한다. 그 대단한 개혁대통령도 배살개혁에서는 실패를 하였다고 하니 비만과의 전쟁은 과시 쉬운 전쟁은 아니렷다.   비만과의 전쟁, 반년동안 지속된 그 인고의 과정도 일단은 이 아줌마의 승리로 한단락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다고 아줌마 몸매가 처녀 몸매로 될리 만무하겠으나 원체 그걸 바라고 시작한게 아니였으니 마음이 이토록 여유작작할수가…                                                                                                                              2008년 2월
5    도시의 곤혹(남영도) 댓글:  조회:928  추천:54  2008-07-29
  도시의 곤혹 “철커덩, 쫙… 철커덩 쫙…” 귀청을 째는듯한 요란한 소리에 새벽잠에서 깨여났다. 베란다로 나가보니 또 그 문제의 건축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벌써 여러달째이다. 철근콩크리트에 대한 도시인의 집착은 언제까지 계속될것인가? 가로세로 나란히 들어앉은 아빠트틈새에 잔디나 꽃을 심었으면 좋음직한 좁은 틈새에 또 층집이 들어서는것이다. 계획에 어긋나는것도 어긋나는것이려니와 하늘땅을 진동하는 그 소음이 주민들에게 주는 피해는 시끄러운 정도만이 아니다. 그래서 아빠트주민들이 피해보상비를 받겠다고 들고일어났는데 나중에는 흐지부지해지고 그 문제의 층집은 나 보란듯이 5층건물로 완공이 되어 아빠트틈새에 우뚝 서있다. 조그마한 자투리땅도 사정을 두지 않는 도시인의 “걸작”이 또 하나 탄생한것이다. 도시의 비애는 이뿐이 아니다. 얼마전 상해 어느 구의 주민들이 주택구역남쪽 10메터 앞에 28층짜리 아빠트를 짓는데 항의해 들고일어났다. 높이가 85메터나 되는 그 초대형아빠트 3채가 줄지어 일어서는 날에 거폭의 병풍마냥 태양광선을 차단하여 그 주택구역의 주민들이 영영 해빛을 볼수 없게 되기때문이라는데서였다. “우리는 해빛없이는 살수 없다.(我们不能没有阳光!)” 자연이 하사한 마지막 권리마저 박탈당하게 된 그 주민들이 터뜨린 분노의 원성이다. 도시인이 만들어놓은 “걸작”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풍경이 또 하나 있다. 회색빛의 콩트리트벽에 유일하게 나있는 조그마한 창을 쇠창살로 얼기설기 얽어맨 그것이다. 맨 아래층에서 안전을 고려하여 쇠살창을 해다는건 그런대로 리해가 가겠으나 2층, 3층, 지어 6, 7층에서까지 쇠살창을, 그것도 부엌이건, 거실이건, 화장실이건 할것없이 창이란 창엔 죄다 쇠살창을 해다는데는 통 리해가 되지 않는다.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만단의 태세를 취하고잇는 맹수의 그것처럼 보여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친다. 베란다에 나가 설때마다 어쩔수 없이 대하게 되는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앞에서 나는  한번 또 한번 도시의 삭막함을 느낀다. 쇠살창의 포위속에 갇혀있는 아빠트단지, 그것은 으스스한 감옥을 방불케한다. 도적을 방비하기 위하여 자기를 청창속에 가두어야 하는 오늘의 도시인! 자기를 철창속에 가두고 그대신 도적을 철창밖 너른 천지에서 활개치게 한다는것,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현대인의 “걸작”인가? 다시금 우리의 삶의 공간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다. 날이 갈수록 도시를 메우는 고층건물, 철근, 콩크리트, 유리, 화강암…여하튼 견고하고 빛이 번뜩거리는 재료란 재료를 다 써가며 경쟁이나 하듯이 더 높이 더 멋있게 도시를 “장식”한다. 그 빌딩의 유리가 해빛을 반사하여 날아가는 새들에게 여러 가지 착각을 주는바람에 새들이 빌딩유리벽에 부딪쳐 죽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신문은 전한다. 회색빛 콩크리트숲이 푸른 숲을 대신하는 도시에서 새들은 이제 점점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외국의 어떤 나라들에서는 새들이 사나운 날짐승(猛禽)을 두려워하는 원리를 리용하여 그런 날짐승모양의 종이를 유리벽이 붙이는 것으로 새들이 빌딩에 부딪치는것을 방비하는 대책을 세우기도 한다지만 그것은 인류로 말하면 비애가 아닐수 없다. 지구에 생존하는 생물들이 직면한 위기는 곧 인昰黴탔?위기를 예시하는것이 아닐가? 자기 거처를 짓기에 정신이 없는 인류는 그까짓 새들의 거처 같은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차를 타고 거리에 나가면 눈에 안겨오는것은 온통 회색빛의 콩크리트건물뿐이다. 옛스러운 단층집들은 하나하나 현대냄새를 풍기는 고층건물로 대체되고 어쩌다 푸른 풀이 자란 자투리땅이 눈에 띄여 다행이다싶었는데 웬걸, 몇달후에 다시 나가보면 그것은 철근콩크리트의 세례를 벗어나지 못하고만다. 도시의 복판을 흐르는 강은 진작 오염이 되여 혼탁해지고 석탄가스와 자동차배기가스로 하늘은 희뿌옇다. 어쩌다 마음먹고 찾아간 도심의 유일한 록지―공원도 인산인해로 발디딜 틈이 없다. 기능과 효률만 따지는 도시인은 그까짓 쾌적한 삶의 공간같은것은 안중에도 없다. 도시는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걸가? 어느 만화에서는 콩크리트숲속에 곡괭이를 든 신농(神农) 씨를 세워놓고있다. 사무청사, 오락성, 술집, 가라오케 등으로 꽉 들어선 건물들 틈새에서 신농씨가 농사지을 땅이 없다고 푸념하자 핸드폰을 손에 든 도시인이 골프장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개의찮게 대답한다. 자연과 점점 멀어져가는 오늘의 도시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 하겠다. 실지로 도시의 끝없는 확장으로 교외의 경작지와 목장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교외의 농민, 목축민들이 곤혹을 겪고있다고 매스컴은 전한다. 교외에 들어선 연분홍빛의 화려한 별장과 얼마 남지 않은 언덕에서 풀을 뜯는 젖소가 텔레비죤화면에서 묘한 대조를 이루며 보는 이를 슬프게 한다. 이제 젖소업도 다 된것 같다고, 친부모를 잃었을 때처럼 마음이 허전하다고 젖소주인은 비감한 어조로 말한다. 작가 풍기재는 요지음의 도시를 우려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동양사람들이 도시로 대거 밀려들 때 서양사람들은 시골로 돌아가 푸르른 자연에 입맞추기 시작하고 동양에서 하늘을 찌를듯한 고층건물을 현대화의 상징으로 간주 할 때 서양에서는 이 차디찬 콩크리트괴물을 이제 어떻게 제거할것인가를 두고 걱정하고있고 동양사람들이 화학섬유, 비닐, 플라스틱 등 인공재료로 만든 물건에 열을 올리고있을 때 서양사람들은 다시금 목천, 나무, 흙, 가죽 등 원시적재료와 가까이 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자연은 무엇이던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인생이라는 말도 있듯이 인간은 자연을 떠나 살수 없다. 옛 선인들이 집은 초가집이로되 자연을 벗으로 삼고 산수와 어우러져 풍월을 지으며 여유있게 산 그것은 우리의 귀감으로 되지 않을가. 푸른 숲대신 철근콩크리트숲을 숨막히게 만들어놓고 그것을 발달한것인양 착각하는 현대인, 자연을 하나, 둘 파괴하면서 거기에 이른바 물질문명의 탑을 구축하기에 정신이 없는, 그러고도 물질문명의 창조자로 으시대는 현대인이 참으로 가소롭다. 이제 이 땅에서 록지가 서서히 사라지고 만구할수 없는 공해로 생물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는 날, 인류는 과연 어떻게 될가? 자기가 구축한 그 “문명의 탑”속에서 자멸할가 겁난다. 요즈음 신문에 소개된 위계영이라는 농촌녀성이 12년간 민둥산에 나무를 심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올해 60인 위계영은 집을 아예 산에 잡고 남편과 자식들을 동원하여 12년을 하루와 같이 5,000여무의 산에 100여만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말그대로 나무는 숲을 이루고 숲은 삼림을 이루었다. 언제 그 혜택을 볼지 모르는 요원한 사업이라 할수 있는 나무심기에 온 정력을 몰부은 이 녀성,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나무를 심는다고 한 그 말이 심금을 울린다. 아직은 지구의 위기를 모르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런 말이 조금은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러나 회색빛의 콩크리트숲속에서 자기의 사업에, 돈벌기에만 정신이 없는 도시인에게 주는 계시는 적지 않다. 며칠전 《남방일보》에서 보았던 한 미국청년의 이야기도 한줄기 샘물마냥 가슴속에 흘러들어 잔잔한 감동을 준다. 대위라는 그 미국청년은 중국 주해에서 아이들한테 글을 가르친다. 평범한 그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는다. “아이들과 같이 있는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천진란만한 애들과 같이 있느라면 일하는것이 노는것처럼 편하게 느껴져요. 퇴근하면 기타를 치고 편지를 씁니다. 때로는 동료들과 어울려 롱구를 치거나 등산을 갑니다. 저는 대도시사람이 아닙니다. 비교적 농민적이죠. 그래서 그런지 반드시 대자연과 가까이 있어야만 통쾌하거든요. 저는 겨울을 좋아합니다. 떵떵 어는 그런 감각을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주해에는 겨울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중국의 북방을 더 좋아합니다. 올 겨울에 저는 서북으로 갈가 합니다. 거기 가서 애들을 가르치지요. 주해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돈벌기에 여념이 없는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도시로 밀려들고 많은 사람들이 콩크리트숲속에서 출로를 찾으려 하고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시체멋에 열을 올리고있는데 반해 이런 사람의 소행은 얼마나 촌스러운가! 그래도 어쩐지 그런 촌스러운 사고방식이 마음에 든다. 자기는 비교적 농민적이라는 말이 인상깊다. 대자연과 가까이 있으면서 천진무구한 아이들과 어울려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 미국청년의 삶이 얼마나 충실해보이는지 모른다. 언제면 우리의 사회가 기능과 효률만 따지던데로부터 지투리땅에 잔디를 깔고 꽃을 심을만큼 멋과 여유를 즐길줄 아는 사회로 변할가? 언제면 우리의 도시인이 철근콩크리트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연과 교감할줄 알고 주위의 동물, 식물들과 어울릴줄 알만큼 여유로와질가? 언제면 우리의 인간관계가 쇠창살속의 삭막함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사랑으로 이 세상을 아량있게 포섭할줄 알만큼 원만해질가? 언제면 우리의 현대인 모두가 지구의 위기를 느끼고 지구를 살리는 환경보??발벗고 나설수 있을만큼 문명해질가? 이 모든것이 결코 물질문명의 발달에 정비례하는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기에 인간 스스로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것이 아닐가? 벌써 여러 도시들에서 애조(愛鳥)협회같은것들을 내오고 실질적인 일을 벌리고 있다니 반갑다. 그리고 지구를 살리기 위해 “백색오염”을 제거하는 등 환경보호운동을 벌리는것도 기꺼운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요지음의 우려에서 벗어나 도시의 밝은 미래를 전망해봄도 과분한것은 아니리라. 1996. 12    
4    귀 기울이기(수필) 댓글:  조회:745  추천:51  2008-07-01
  귀기울이기 남 영 도 어느날 퇴근길에 CD가게앞을 지나다가 \"어?\" 싶어지는 음악에 걸음을 멈추고 저도모르게 귀를 강구었다. 다름아닌 아들녀석이 좋아하는 유명가수 우․천(羽․泉)의 《심호흡》이라는 노래였다. 녀석이 매번 머리를 저어가며 들을때는 저다지도 신날가싶고 대체로 수긍이 안가는 그런 선률이였는데 오늘 밖에서 우연히 들으니 그렇게 정답고 그렇게 감미로울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무료로 얻어들은 그닥잖은(?) 음악이 어느새 나를 매료시킨것이였다. 이 아빠트로 이사오기전인 지난해까지만 해도 집이 좁은 관계로 녀석과 나는 대체로 한방에서 지냈다. 내가 한켠에서 신문이나 책을 읽을 때면 녀석은 컴퓨터게임을 놀지 않으면 CD를 틀고 음악을 듣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그 음악이라는것이 도대체 내가 즐기는 클래식과 영 딴판으로 선률이 빠르지 않으면 소음처럼 조잡한 시원치않은것이여서 거부감이 든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래서 가끔 볼륨을 낮추라고 호통을 치기라도 하면 녀석은 무슨 못할 짓을 저지르기라도 한것처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분고분 내말에 순응해주었다. 새 아빠트로 이사오자 녀석에게도 방 한칸이 차례졌다. 자기만의 자유공간이 생겼다고 기뻐날뛰던 녀석은 이제 누구 눈치 볼것 있느냐는듯 볼륨을 한껏 높이고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만끽한다는데 더는 엄마의 권리로 왈가왈부하면서 간섭한다는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원치않는 음악을 무료로 듣기를 밥먹듯, 그런데 그렇게 흘려들은 음악에 내가 어느새 정이 들어 이렇게 감동까지 하다니?! 이제 고?1학년, 16살이라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벌써 185센치메터의 신장을 자랑하는 녀석에게 엄마인 내가 말이라도 걸려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쳐다보아야 한다. 아들의 눈에 비친 나는 이제 더는 위엄있는 가장이 아니라는것은 아들의 말투에서도 얼마든지 느낄수 있다. 하지만 때로 “엄만 너무 보수적이야!” “또 그 얘기!” 라는 말을 들을 때면 정말이지 그냥 넘어갈수가 없다. 스스로를 애들의 심리를 잘 아는, 아직까지는 녀석의 구미를 맞출수 있는 괜찮은 엄마로 자부해왔는데… 그때마다 어쩔수 없이 자신의 나이를 실감하게 되고 세월의 무쌍함을 느끼게 된다. 말끝마다 “정말 쿨해!”,“이젠 N번도 더 말했는데…”라는 말로 나를 말문막히게 하는 녀석앞에서 자존심따위로 버티겠다는것은 이제 무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 인정하기는 싫지만 세대차이는 어쩔수 없는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들녀석의 어릴적에 녀석에게 피아노공부 시키면서 모자간이 클래식음악에 공감하고 동요도 같이 불렀던 시절이 아련한 추억으로 밀려든다.… 그런데 엄마따라 동요를 부르던 그 홍안의 소년은 어디로 가고 랩과 힙합풍의 음악에 열광하는 구척장신의 청년이 내 눈앞에 서있는것인가?! 녀석이 좋아하는 음악에 별로 공감할수 없듯이 모자간의 생각도 서서히 엇갈리면서 갈등이 생기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데 그런 녀석과 나사이에 요지음 음악을 두고 공감대가 생기는 일이 더러 생겼으니 과시 나쁜 일은 아니렷다. 요지음 TV를 통해 젊은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아리랑그룹의 노래가 바로 그러하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전통과 현대를 아주 잘 결합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민족의 전통민요인 《아리랑》을 원래의 기본선률을 보유하면서도 현대적음감에 맞게 편곡을 하였는데 녀석과 내가 흥미있게 감상하는 음악중의 하나이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음악이기도 한 《아리랑》은 많은 편곡이 있고 여러가지 창법이 있지만 아리랑그룹의 경우 랩과 힙합풍의 댄스곡을 곁들이고 미묘한 화음으로 새로운 앙상블을 만든 시도가 무척 돋보인다. 거기다가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화려한 춤까지 동반하여 그 인기는 말그대로 하늘을 치솟는다. 한국에서의 공연실황을 보아도 관객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조선족 하면 한복을 곱게 입고 전통민요나 부르는것쯤으로 알고있었는데 그게 아니고 멤버중의 김진우가 한 말처럼 “새시대의 청년”답게 신선하면서도 돋보이는 가창력으로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통념을 깼다는 점에서도 높이 사줄만한 공연이 아니였나싶다. 게시판에 쏟아져나온 네티즌들의 한결같은 찬사, 열광, 환호를 보면 그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통과 현대의 어울림은 이렇게 각이한 취향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신비를 갖고있는가부다. 전통적인것은 고루하다고 왼고개를 꼬는 요지음 신세대들이 수용할수 있도록 현대적인것을 곁들임으로써 신세대들이 즐기는 형식속에 전통적인것을 심어주는 노력을 시도해봄도 좋으리라. 여기서 잠간 귀기울인다는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적성에 맞고 자기가 좋아하는 소리에만 귀기울이려는 통념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원치않는 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으며 많은 경우 주관적인 가치판단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좋은 소리, 좋은 음악을 들을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만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원치않는 음악에 귀기울인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는 더구나 쉽지 않은 일이다. “음악은 오직 듣는 자만을 위해서 존재할뿐이다.” 드보르작의 이 말은 음악감상에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귀기울여 듣는것이 중요하다는 말로도 되겠다. 다시 말하면 수용의 자세를 가지고 귀기울이다보면 부동한 곳에서 들려오는 부동한 소리를 들을수 있고 그렇게 듣다보면 예상외로 기상천외하고 신선하고 이색적것인들을 발견할수 있으며 따라서 음악이외의 많은것들을 수확할수 있게 된다. 요지음을 일컬어 퓨전시대라고도 한다. 음악뿐아닌 모든 분야에서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의 어울림이 서서히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양상을 낳고 있는것은 실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진선미를 향한 인간의 다양한 시도와 추구는 계속될것이고 그런 시도와 추구가 있음으로 하여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현란해지고 아름다워지는게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 자의든 타의든 녀석과 다양한 음악을 공유하였던 나날들이 결코 무의미한 나날이 아니였다는 생각이 든다. 녀석이 좋아하는 음악에서는 클래식에서는 느낄수 없었던 신선하고 발랄한 미를 발견할수 있어 좋았고 더불어 전통과 현대의 중간쯤에 서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서있는 자기를 발견할수 있어 좋았다. 그보다도 녀석과 마음?터놓고 음악이며 인생이며 미래며를 담론할수 있었다는것이 더 좋았던것같다.   《엽기적인 그녀》의 주제가며 god의 노래가 슬슬 좋아지기 시작하는 요지음이다. 그런 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를 신기하다는듯 머리를 갸웃하고 바라보는 녀석의 눈이 반가움으로 반짝 빛난다. 이러다가 정말 쿨한 엄마로 돼가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3    클래식이 수필을 만났을 때 (서영빈) 댓글:  조회:888  추천:53  2008-06-20
                            클래식이 수필을 만났을 때                             ―-남영도의 수필읽기                                                                                                                                     서영빈                                                1 남영도라는 이름을 대할 때 먼저 그녀의 노래를 떠올리게 되는것은 나 혼자만의 경우는 아닐것이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하나의 문학동호회에서 활동하는 관계로 우리는 심심찮게 그녀의 노래실력을 테스트할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선구자>나 <그리운 금강산>과 같은 민족가곡에서부터 <나의 중국>과 같은 중국가곡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노래는 언제나 소프라노 톤이다. 물론 노래실력은 프로급이다. 그녀의 노래만 들은 사람은 평소 그녀의 소탈한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고 평소 그녀의 소탈한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은 그녀의 노래실력에 대뜸 놀라기 일수다. 나는 그녀의 수필을 읽을 때마다 그녀의 음악을 상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의 수필은 롱담 잘하기로 소문난 그녀의 익살스러운 평소 모습보다는 가곡을 열창할 때의 진지한 모습에 훨씬 더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녀의 수필에는 진지함과 예술적미감이 배어있다. 그녀의 수필중에 음악과 관련된 수필이 유난히 많은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것이다. 또한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고백이 결코 과장이나 포장이 아니라는것은 그녀의 글을 통해서 증명된다. 그녀는 글을 통해 분명히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있다. 부언하자면 고전적이라는것과 귀족적이라는것은 엄연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글의 제목을 <클래식이 수필을 만났을 때>로 정했다. <김치와 물만두가 만났을 때>라는 제목의 수필이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를 패러디한것처럼 말이다. 발랄하고 귀여운 맥 라이언 주연의 진지한 사랑영화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는 이미 로맨틱코미디의 고전이 된 작품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다소 촌스러운 감도 없지 않지만 은은한 아취(雅趣)만은 여전하다. 엄숙함과 경건함, 거기에 조금은 감상적인 랑만이 함께 어우러진 클래식, 그녀의 수필은 바로 이러한 클래식을 꿈꾸는 집이다. 2 한 작가의 작품을 내용별로 분류하여 그 류형을 나누는것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작가의 작품전체를 관통하는 몇가지 수필시학적 특징을 귀납해보는것이 훨씬 의미있는 작업이 될것이다. 소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음악이야기, 아들이야기, 남편이야기, 기행이야기가 주를 이루고있지만 남영도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것은 그녀가 어떤 소재를 다루든 그 기조에는 서정성을 깔고있다는점이다. 흔히 그녀의 수필을 서정수필로 분류하는 리유도 여기에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수필을 면밀히 관찰해보면 서사가 생략된 순수 서정수필은 몇편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의 서정은 서사와 어우러져 공존하거나 아니면 배경음악처럼 서사의 주변을 잔잔히 감돌고있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남영도수필의 이러한 서정성을 높이 사고싶다. 이야기성이 철저히 배제된, 서정에서 서정으로 흐르는 수필의 경우 읽을 때는 아름답게 느껴지다가도 읽고나면 메시지가 없기 때문에 자칫 실체가 안겨오지 않는 안개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 경우가 뭅? 이러한 서정수필은 수필문학의 내실있는 발전을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수필독자층의 저변확대라는 과제가 부과되여있음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남영도수필의 다른 한가지 특징은 그녀의 독특한 의미화기법이라고 생각된다. 일부에서는 수필에서도 형상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필자는 단연 의미화라는 표현에 무게를 둔다. 어떤 대상이나 사건, 현상에 자기만의 독특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으로 독자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수필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의미화기법이란 표현이 어울릴것이다. 의미화의 기법은 작가마다 같지 않을수 있는데 남영도의 경우는 클래식으로 대표될수 있는 음악과 대상을 병치시키는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는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창에 카텐을 내리우고>이다. 창에 카텐을 내리고나서 그녀는 혼자가 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생각에 잠긴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네가지 일은 동격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외로움, 독서, 음악감상, 사색은 따로따로 동떨어진 네개의 개별적인 행위가 아니라 4위일체가 되여 그녀를 클래식하게 만드는것이다. 그녀는 카텐을 내리는 행위로 자신과 바깥세상을 잠간 차단시킴으로써 이러한 클래식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것이다. 일반일들에게 있어서 고독과 독서, 사색은 흔히 하나로 통일될수 있는 사안이지만 음악만은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서 음악에 대한 남영도의 독특한 리해가 드러난다. 그녀에게 있어서 음악은 휴식이나 오락과 이어져있는것이 아니라 내면세계의 가장 치렬한 고민과 맞물려있는것이다. 음악을 듣는 행위가 그녀에게는 이처럼 신성한것이다. 독서나 고독, 사색과 동격을 부여받을수 있는 음악, 가장 외롭고 고민스럽고 괴로울때 만나는 음악, 필자가 그냥 음악이 아니라 굳이 클래식이라고 표현한것은 남영도 특유의 이러한 고전적인 취미를 지칭하기 위한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클래식은 또 언제나 수필과 함께 한다. 수필에 림하는 그녀의 자세가 얼마나 엄숙하고 경건하고 또한 로맨틱한가를 알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수 없다. 문학의 곁에 음악이 흐를때 자칫 소녀적인 감상주의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는것은 사실이다. 다행스러운것은 그녀의 이러한 고전적인 취미가 귀족적으로 비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카텐으로 자신과 바깥세상을 철저히 차단시키지 않고 소통의 통로를 마련해놓고있다. 그녀는 방안에서 카텐을 들치고 바깥세상을 내다보기도 한다. 그녀는 내실보다는 포장에 치중하는 가짜의 세계, 탐욕의 세계와 <안>을 지키는 <나>의 세계를 대립시키면서 내면세계의 중요성을 확인한다. 이러한 시선의 연장선에 서있는 글들이 바로 <잔인한 계절이 남기고 간 자리>와 같은, 이른바 사회수필이라 칭할수 있는 글들이라 하겠다. 남영도수필의 다른 한가지 특징은 글의 흐름이 음악처럼, 물처럼 자연스럽다는데 있다. 그녀의 수필에는 기교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파격적인 비유나 론리적인 비약에 편승하지 않고도 함축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있다.  <김치와 물만두가 만났을 때>가 좋은 보기로 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인 김치와 중국의 대표적인 음식인 물만두, 이 두 음식의 만남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것일가? 작가는 20년 경력의 주부답게 중한 두나라의 대표적인 음식문화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하고있다. 한국에 가서야 본인이 중국음식에 많이 길들여져있었음을 느끼게 되고 또 연변에 가서 중국인들이 한국음식을 잘 먹고 연변말을 잘 하는것을 보면서 감회가 남달랐다는 고백에 이르기까지 그냥 음식이야기로 일관하고있다. 그러면서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만두에 김치를 곁들이면 그 맛이 더 잘 어우러짐은 먹어본 사람이라야 안다\"고 담담하게 마무리하고있다. 대체적으로 흔히 우리가 주부수필이라고 이름하는 형식의 틀에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단정할수 있을 법한 글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글에서 많은 련상을 하게 된다. 이 수필이 과연 음식이야기일뿐일가? 만두와 김치가 만나서 잘 어울린다면 한국과 중국이 만나면 어떨가? 혹 김치만두 같은것은 없을지? 우리 조선족들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일환으로 이 작품을 읽는다면 조선족은 혹 김치만두 같은 존재는 아닐지? 이런 시각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저자의 마지막 한마디는 평범한 감회가 아닐수도 있다. 조선족보다 조선족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처럼 저자는 굳이 작품속에 어떤 메시지를 강조하려고 애쓴 흔적없이 자연스럽게 글을 마무리하고있지만 독자들에게 남겨주는 여운은 다양하고 강렬하다. 교훈적이지도 않고 설교적이지도 않은 이 평범한 글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는것이다. 3 남영도만큼 수필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나는 아직 국내 조선족문단에서 보지 못했다. 흔히 우리 수필작품만을 읽고 수필을 쓰는 대부분의 수필작가들과는 달리 남영도는 한국의 수필작품을 정기적으로 대량 열독하였을뿐 아니라 수필리론서적도 누구보다 많이 읽었다. 수필에 대한 그녀의 리해와 안목은 수필이라는 장르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 진지한 수학과정을 거쳐 형성된것으로서 안정적인 기반우에 세워진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수필창작은 량적으로 다산은 아니지만 태작이 거의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의 수필작품들을 살펴보면 한국수필의 영향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일상의 자잘한 사건들에 대한 의미부여, 이미지와 정서를 강조하는 작품 분위기, 잘 다듬어진 문장, 이런것들은 하나같이 모두 오늘날 한국수필의 특징들이라 하겠다.  하지만 남영도수필의 장점과 단점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수필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수필관이 그만큼 안정적으로 형성되었다는것을 뜻하며 그것은 또한 그녀의 창작이 기성수필리론의 틀우에서 이루어졌다는것을 말한다. 그녀가 <나의 고백>에서 밝히고 있는것처럼 한국수필과의 만남에서 그녀는 거의 첫눈에 반할 정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린다. 이것은 그녀가 한국수필의 한계까지도 그대로 답습할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있다. 오늘날의 한국수필계는 스스로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있다. 한국 서정수필의 아버지라고 할수 있는 피천득선생의 타계를 계기로 한국수필계에 끼친 선생의 영향을 놓고 최근 많은 설전이 벌어지고있다. 전범은 필요하지만 우상이 되고나면 자유를 구속하는 있는 틀로 기능할수도 있다는것을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다. 틀이라는것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것이라는 점을 명심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2    나의 고백(남영도) 댓글:  조회:780  추천:31  2007-12-19
나의 고백남영도편집부로부터 문학자서전을 쓰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많이 머뭇거렸다. 이제 나도 문학인이라는건가. 문학에서는 늘 자신을 문학동네 어구에서 바장이며 가끔 가다 갸웃하고 동네안을 들여다보는 아마추어쯤으로 간주한 나더러 이렇게 떳떳이 문학을 담론하라는것은 조금은 황공하고 어딘가 격에 맞지 않는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직도 문학소녀의 그것과 같은 문학에 대한 동경과 설레임만은 여전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림하여 나의 문학을 얘기하는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펜을 들기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책밖에 모르는 책벌레였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된《문화대혁명》의 동란년대에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여섯살때에 중학교 교원인 부모가 학생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는 모습을 본것이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또한 《문화대혁명》후기에는 늘 혁명이요, 비판이요 하면서 정신없이 돌아치는 부모들 귀가시간이 늦어 아홉살때부터 물동이를 이고 밥을 짓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 시절, 공부를 해야 할 어린 나이때부터 전민이 대채를 따라배우는 운동속에서 모내기철과 가을철은 물론 해란강공사요, 조전이요, 옥수수영양단지요 하면서 일년사시절 거의 농민들과 함께 바삐 돌아쳐야 했던 그 력사의 불가사의… 책가방과 로동도구를 동시에 메고 학교에 다녀야 했던속에서도 다행히 책이라는것이 있어 그 험난한 세월을 무난히 보낼수 있었던것이 아니였나싶다.   내가 맨 처음 접한 책은《반짝이는 붉은 별》이라는 장편소설이였던것 같다. 그 소설을 한 이틀새에 다 읽었는데 다 읽고 책을 놓으니 날이 어둑어둑한 저녁때였다. 물길러 갔다가 물동이를 이고 집안에 들어서는데 방구석 시커먼 곳에서 소설속의 호한삼이 당장 뛰쳐나오는것 같아서 집안에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일이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남들이 보면 미련하다고 할 정도로 책에 미쳐있어서 친구집에 놀러 가도 친구와 얘기하며 노는것이 아니라 한구석에 박혀 책만 보다가 돌아오기가 일쑤였고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 불을 땔 때도 책을 들여다보면서 풍구질하여 밥을 태운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생일날 어머니가 맛있는걸 사먹으라고 준 용돈으로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를 샀는가 하면 련환화(그림책)를 가득 사서 벽에 쭉 걸어놓고 소조공부를 하는 친구들과 함께 책속에서 과외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늘 책속에 파묻혀있다보니 집에 손님이 와도 머리만 꾸벅하는 식으로 인사를 대신하여 부모들의 꾸중을 들었고 여느 집 처녀애들처럼 멋 부릴줄도, 말을 곱게 할줄도 모르는가 하면 또한 세상물정에 어두워《저 계집애 저러다가 시집이나 제대로 가겠니?》하는 지청구를 자장가처럼 들어야 했다.  뿐더러 중학교 교장이셨던 아버지께서 즐겨 구독하던 《연변일보》, 《광명일보》, 《문회보》 등 신문들을 아버지가 퇴근하기 바쁘게 빼앗다싶이 해서 읽으면서 좋은 구절, 속담, 성구들은 수첩에 베껴두고 자주 들여다보군 하였다.  한편 오락모임이라면 의례 노래를 부르는 남들과는 달리《세계의 정직한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라 싸우는 조선을 찾으라…》는 조기천의 시를 늘 격정드높이 읊으시던 아버지와 노래를 수준급으로 잘 부르셨던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유전자가 작용하였던것이였을가. 소학교때 어문선생님이신 김학범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동요, 동시라는걸 써가지고 당시《홍소병》잡지에 투고하였는데《내가 만든 붉은 창》, 《영이 엄마 뜨락또르 몰아요》라는 등 여러 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중학시절, 연변1중에서 가진 전 주 초중학생작문초청경연에서 의외로 1등을 하여 평강벌에 있는 이름없는 중학교를 위해 영예를 떨치기도 했고 대학입시때에는 만점을 맞은 나의 작문이 신문에 게재되는바람에 대학교입학결과가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온 집안에 환성이 터지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모교에 불리워가 후배들에게 학습경험담을 소개하며 작가가 될 꿈을 피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경력이 그후의 나에게는 플러스로 작용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하여 오래동안 나를 괴롭혔음을 실토하는바이다. 대학에 가서 나는 늘 고민과 방황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젊은 시절의 경우 다가 그러하듯이 사랑, 인생 등을 두고 고뇌하고 방황한것외에도 세계 명작가들의 대작을 읽으면서 거기에 비견할수 없는 미미한 자기에게 늘 화나있었고 따라서 대작이 아니면 발표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있었다. 3학년때쯤이였던가. 딴에는 괜찮게 썼다고 여겨지는 소설을 가지고 림원춘선생님을 찾아갔더니 대번에 퇴짜를 놓는것이였다. 문학적재능은 인정하나 너무나 비현실적인 소재여서 소설로서는 아니라는것이였다. 졸업때는 문학작품에서의 정감문제를 가지고 론문을 쓰면서 문학공부에서의 일대 진전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문학창작에서는 여전히 작품 한편 발표하지 못한채 졸업을 맞이하고말았다. 지금도 그때의 일기들을 보면 최서해의 영향을 많이 받아《참인간》의 《참생활》을 부르짖으며 인간세상의 비리를 대성질호하고 인간세상사를 깊이 해부한다고 하는 어구들이 눈에 띄여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늘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못마땅해하면서 처음으로《실버들》이라는 녀대생잡지를 창간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20여년전의 일로 되여버렸다.  사회에 진출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대작콤플렉스는 계속되여 작품을 발표하는것을 은근히 겁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 한가지― 문학을 향한 열망만은 식지 않아 일기를 쓰고 좋은 글을 스크랩하고 베끼는 작업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스케일이 크고 무게가 있는 소설 같은것만 문학인줄로 착각하고있었던것 같다. 《문화대혁명》이 낳은《문예창작에서의 3돌출 원칙》이라는것이 오래동안 의식속에 남아있은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북경이라는 이 한어문화권에서 종사하는 번역편집이라는 직업이 형상사유를 고갈시키는데 일조했음도 부인할수 없을것이다.  그러던중 만난것이 한국의《수필공원》(《에세이문학》의 전신)이라는 수필전문지였다. 그 담담하고 진솔하고 청아한 수필, 그때까지 내가 알고있었던 수필에 대한 모든 통념을 한방에 날려보내는 수필들을 만나면서 여태 가졌던 문학에 대한 생각― 거창하고 무게 있고 스케일이 큰 작품만 문학이라던 생각―을 버리고 차츰 주변의 사소한 일상에 눈을 돌리게 되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조정하니 평범하지만 뭔가 글감이 될것 같은 소재들이 하나, 둘 걸려나오기 시작했고 조금은 어설프지만 자잘한 소재를 바탕으로 자기의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담아내는 글을 한편, 두편 써서 조심조심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 중반, 아직 수필이 뭔지 모르고 갈팡질팡할 때 남영전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격려의 편지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러가지로 많이 위축되여있은 나에게 자신심을 북돋워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수필을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갸륵하게 생각한것이였을가. 늘 한국에 출장을 다니는 남편이 매번 한국에 갔다 올 때마다 수필지들을 한권, 두권씩 사다주더니 어느 한번은 수필에 관한 론문을 쓰련다는 나의 말에 한국수필계의 이름난 수필평론가 윤재천교수님을 무작정 찾아가 커다란 려행가방에 그 무거운 수필리론서 20여권을 가득 담아가지고 와 내앞에 와그르르 쏟아놓으면서 나를 경악케 하기도 하였다.  2001년, 기회가 닿아 부산에서 석달간 문화연수를 하는 기간에 한국의 여러 수필가들을 만나면서 우리 문단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수필의 높은 위상에 적잖이 놀랐고 동시에 여러번 품평회에 다녀오면서 수필에 림하는 그들의 진지한 자세와 높은 문학적기량에 많이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번 걸음에 잊지 않고 윤재천교수님을 찾아갔더니《구름카페》라고 이름한 사무실에서 반갑게 맞아주면서 어마어마한 장서의 수필도서관을 안내해주는가 하면 10여권의 수필관련서들을 골라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후로 오늘까지 줄곧 한국의 《현대수필》,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수필시대》 등 수필전문지들을 애독하면서 수필에 대한 사랑을 키워갔고 따라서 수필과의 인연은 점점 깊어져 이젠 수필을 떠나 내 문학을 론할수 없게 되였다.  2003년, 북경에서 삼지마을문학회가 발족되면서 나와 문학과의 인연은 더구나 끈끈하게 이어졌다. 동인들끼리 모여앉아 품평회를 가지고 문학을 담론하게 되였고 또한 수필에 조예가 깊은 쟁쟁한 문학동인들의 인맥에 힘입어 국제수필세미나 같은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국내외 여러 수필가들과 널리 교류를 진행하면서 점차 수필이라는 쟝르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였다.  이것이 이 세상에 왔다가 문학을 사랑하게 되고 나중에 수필문학에 정착하게 되기까지의 나의 문학려정이다. 구태여 《수필은 서른여섯살이후 중년의 문학》이라고 갈파한 피천득님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있어 수필은 내 생애의 20대에 소리없이 만나 30대에 그 묘미를 발견하면서 서서히 입문하였고 40대에 이르러서는 내 생명의 한부분과도 같이 깊이 사랑하면서 이제 한생을 수필중독증으로 살아가야 할 숙명적문학으로 자리매김한것이다.    나는 글을 자주 발표하는 편이 아니다. 그만큼 수필을 쓰는 속도가 남보다 느리고 또 어렵게 쓴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고 하여 조바심치지 않으며 다만 매편의 글에 최선을 다하고저 애쓸뿐이다.  한국의 이름난 소설가 리문열이 왜 수필을 쓰지 않는가는 물음에 《수필이 너무 어려워서 쓰지 못한다.》고 한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러면서 또한 《수필은 끝없는 내적 수련이 없이는 한줄도 쓸수 없다.》고 하였다 하니 여기서 수필에 대한 대문장가의 높은 존중과 선비정신을 엿볼수 있는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수필을 그런 대문장가들의 글과 비교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다만 수필이란 결코 《붓가는대로》 쓸수 있는 쉬운 글이 아님을 강조하려는것뿐이다. 수필이 쉽게 씌여진다는것,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할지 모르나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아직도 깊은 내적 수련을 거치지 못한 나의 경우에는 수필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깊이 천착하는 장인정신으로 수필에 림하고저 한다.  수필이라는 이 쟝르를 마주하게 되면 마치 오래전의 지기를 만난듯 모든것을 고백하고픈 심정이 되고 진지한 자세로 자기를 성찰하며 내밀한 심적 라체를 적라라하게 드러내는데 주저치 않는다.  나는 흔히 음악이 흐르는 속에서 글을 쓴다.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 클래식음악이 고요히 퍼지면 곧 순수한 소녀의 마음이 되면서 인생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픈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내 수필은 흔히 서정수필로 이름지어지는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쟝르에 비해 자칫 《신변잡기》라는 오명을 들쓰기 쉬운 수필, 거대담론이 판을 치는 시대에 작고 가녀리고 자잘한것들을 통해 인생을 조명할수 있고 삶의 의미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해줄수 있는 문학, 그래서 작지만 령혼심처를 울릴수 있는 정(情)의 미학, 그래서 《작은것이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수필, 나는 그런 수필을 사랑한다.  겉보건대는 작아보이지만 많은것을 담을수 있는《그릇》이 수필이다. 그만큼 다양한 각도에서 인생을 조명할수 있는 쟝르라는 말로도 된다. 무엇을 쓰는가보다 어떻게 쓰는가가 절실하게 제기되는 요즈음, 같은 소재의 글도 남다른 방식으로 써보려고 시도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 언저리에서만 맴돌고있는 나, 그 미궁 같은 속을 파헤쳐보고싶은 충동에 요즈음도 수필이라는 이 숲속에 묻혀 전전하고있다. 그속에 묻혀 《내게 주신 겸허하》고 아름다운 우리 말의 하나 또 하나의 낱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가장 적절한 어구를 고르느라 고심하는 나는 행복하다.   2007년 9월 <<연변문학>> 2007년 10월호
1    김치와 물만두가 만났을 때(남영도) 댓글:  조회:904  추천:46  2007-12-19
김치와 물만두가 만났을 때남영도몇해전 한국에 문화연수를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함께 있는 한국분들이 중국에서 온 나와 선배언니를 보고 오늘은 물만두를 빚어먹는것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중국에서 간 우리들 덕분에 오랜만에 중국음식을 먹어보자는것이다. 물론 우리는 쾌히 찬성했고 곧 준비물을 구입하러 시장으로 갔다. 한국에서는 숙주나물, 계란 등으로 만두소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냥 중국에서의 습관대로 배추가 좋겠다고 하여 배추 파는데로 갔다.  한국에서 《배추》하면 당연히 김치재료로 첫손에 꼽히기에 배추값이 폭등할 때에는 김치가 아니라 《금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더니 과연 그 말이 맞는것 같았다. 배추 파는 아줌마가 당연히 김치를 담그려고 배추를 사려는줄 알고 통이 잘 앉은걸로 골라주는데 우리가 물만두를 빚으려 한다고 하자 홀연 쳐다보던 그 의아해하던 눈빛, 《물만두를 빚는데 그 비싼 배추를 써요?》 아마 그런 뜻이였을것이다. 그런 눈빛을 북경에서도 본적이 있었다.  중국에서 가을철이 되면 제일 싼것이 배추다. 한키로에 이십전좌우인데 겨우내내 먹을 과동용인지라 뜨락에, 복도에 가득 쌓여있어 누가 그중 한포기를 슬쩍 채가도 별로 큰 일이 아니다.  8, 9년전의 일인데 어느날 김치를 담글 생각으로 배추 사러 시장에 갔는데 한족아저씨가 물만두를 빚으려고 그러는가고 하며 배추를 골라주기에 김치를 담그려고 그런다고 하자 쳐다보던 그 눈빛, 바로 지금 한국아줌마의 그것과 비슷한 표정이였다. 그 표정을 떠올리자 묘한 감정이 일면서 만두 빚는 일에 어떤 사명감 같은것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날, 물만두는 오전부터 시작하여 장장 6시간만에 다 빚어졌다. 먼저 배추와 고기를 잘게 탕쳐서 만두소를 만들고 만두피를 밀어서 만두를  빚어냈다. 만두피는 얇게 빨리 미는것이 재간인데 선배언니가 한꺼번에 두장씩 밀면서 잽싸게 해제끼는 놀라운 솜씨에 곁에서 구경하던 한국분들이 혀를 내두르며 찬탄해마지 않았다. 나는 미는데는 재간이 없어 싸는걸 맡았는데 솔직히 수준급이 못되는데도 모두들 곱게 잘 싼다고 칭찬이였다. 우리는 마치 요술사가 요술을 부리듯(?)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익숙한 솜씨로 만두를 빚고 또 빚었다. 어릴 때 고향에서 오붓이 모여앉아 만두 빚을 때에 하던 그대로 재미나는 유머에 노래까지 곁들이면서 말이다. 그리고 만두는 중국어에서 《교자》라고 하는데 묵은 해에서 새 해로 넘어가는 날 자정(交子)에 먹는 음식이라고 해서 그 음을 본따《교자(餃子)》라고 했다는것, 중국에서는《물만두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다(好吃不過餃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두를 중국의 대표적음식으로 꼽는다는것 등, 여하튼 물만두에 관해 아는것은 전부 털어놓았다. 그러는 자신이 마치 중국의 사절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물만두는 만드는 품에 비해 먹는데 드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게눈감추듯》이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로 식사가  빠른 음식이다.  저녁식사때 물론 만두맛이 일품이라는 탄성이 터져나왔음은 더 말할것 없다. 기름끼를 싫어하는 한국인들의 식성을 감안하여 기름을 적게 넣었음에도 느끼하다면서 만두를 김치에 말아서 드시는 분들도 있었다.  우리 민족이 어떠한 음식재료로도 김치를 만들수 있는것처럼 한족들은 어떠한 음식재료로도 다 물만두를 만들수 있다. 만두전문집에 가보면 몇십종의 재료로 된 물만두 메뉴를 보게 되는데 너무도 많아서 일시 어느것을 택했으면 좋을지 몰라 어리벙벙해지기가 일쑤이다. 흔히 부추로 된 물만두를 즐겨먹지만 그것도 이제는 너무 먹어 식상하고 어쩌다가 줄당콩으로 만든 물만두를 먹어보았는데 생각외로 맛있었다. 그리고 회향(茴香)이라는 야채로 만든 물만두는 그 강한 향에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지만 일단 맛을 들이면 마약과 같아 그 맛이 자꾸자꾸 생각나기도 한다. 10여년전 우리 집 맞은켠에 북경본토박이 할머니가 살았는데 늘 회향소를 둔 만두를 몇가마씩 쪄놓고 우리더러 맛보라고 하여 더러 맛보기도 했는데 그때는 무슨 맛으로 그런 이상한 향의 야채를 먹을가고 의심이 들 정도로 거부감이 들었던 음식이였다.  물만두말이 나오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지인들끼리 북경시 교외에 소풍을 자주 다니는데 그때마다 미나리뜯기는 우리 랑자군들의 일과로 되였다. 미나리를 뜯으면 동북삼성이 고향인 조선족들은 의례히 고추장으로 무침을 만들어먹는줄로 아는데 대도시에서 자란 어느 한 친구는 조선말만 서툰가 했더니 미나리 또한 분별할줄 몰라 미나리와 비슷한 풀을 한아름 뜯어안고 돌아와 우리를 경악케 하더니 다음번에 제대로 뜯어온 미나리를 집에 가져가서는 글쎄 물만두를 빚어먹었다는것이 아닌가. 못말리는 음식습관이였다. 오래동안 북경에서 살면서 김치와 된장을 즐겨 먹는 자신은 늘 한국적이라고 생각해왔다. 20여년전, 임신중에 된장국이 먹고싶었지만 북경에서는 구할수 없어 한밤중에 펑펑 울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어디 그뿐인가, 북경아세안게임때 미디어센터에 한 40일간 자원봉사를 나간적이 있는데 식사시간이면 꼭꼭 고추장을 챙겨가지고 식당에 나타나군 하는 나에게 숱한 한족친구들이 호기심어린 눈길을 보내오던 일은 아직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먹었던 중국음식들이 한국에 가서 석달을 지내는 동안에 가끔씩 생각나 나를 괴롭히는데는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으며 또 중국음식에 대해 아는것이 그토록 많은 자신을 발견하고서도 적잖이 놀랐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그런 중국음식을 찾을수도, 먹을수도 없다는 현실에 실망하여 민망스러울 정도로 안절부절 못하기까지 하였다.  한국에서 돌아오던 날, 란주라면이 먹고싶어 짐을 내려놓자바람으로 란주라면집으로 달려갔던 기억, 《아, 이 맛!》하고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련발하며 단숨에 라면 한사발을 게눈감추듯 먹어버리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그리고 향채(香菜)가 곁들여진 건두부무침은 왜 또 그렇게도 맛있던지. 해마다 구정이 되면 북경 지단공원에서 한 열흘간 묘회(廟會―장터)라는것이 서는데 그때가 되면 중국 동서남북의 특색있는 음식들이 다 등장한다. 지단공원근처에서 살던 10여년간 거의 해마다 가족들과 함께 묘회에 가는것이 구정때 년례행사로 되군 했는데 그때면 의례히 음식거리에서 중국 남북방의 여러가지 음식들을 맛보는것을 잊지 않는다.  겨울이라 가끔 먼지바람이 불면 음식거리 주위가 지저분하기도 하지만 사람들로 붐비는속에서 이리 밀리우고 저리 밀리우면서 선채로 먹는 그 맛이란 말그대로 별미다. 련자(蓮子)죽, 단단면(덫덫面), 대나무밥, 양고기산적… 그렇게 여러가지 음식을 골고루 맛보다보면 자연히 그런 음식에 길들여지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식성이 좋은 나에게 세상 맛없는 음식이란 별로 없었고 또 그런 음식을 좋아하다가 자연스럽게 그런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까지 좋아하게 되는것은 인지상정이리라. 얼마전 연변에 갔다가 우리 민족의 된장국이며 김치를 스스럼없이 잘 먹으면서 우리 말을 투박한 연변사투리 그대로 잘하는 한족들을 더러 보았는데 그 감회란 한두마디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남달랐다…  오늘도 물만두생각이 간절하다. 오늘은 맛도 맛이지만 독특한 향이 일품인 그 회향만두를 사다 먹을가보다. 거기에 김치까지 곁들여 먹는 그 맛이란… 물만두에 김치를 곁들이면 그 맛이 잘 어우러짐은 먹어본 사람이라야 안다. 2007년 9월 <<연변문학>> 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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