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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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치타치타'(외 2편)
2019년 07월 14일 09시 08분  조회:240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치타치타’(외2편)

남영도

 

“우리 모두 함께 해요 치타송

같이 같이 치타치타

우~우~ 할 수 있어요…”

 

한국 TV에서 <치타송>과 함께 치타댄스가 한창이다. 남녀로소 함께 나와서 간단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체조 비슷한 춤을 추는데 배우기 쉬울 것 같았다. 어머님도 화면을 보면서 같이 따라하고 있었다.

“치타? 그게 뭔데요?…” 

눈여겨보니 ‘치타’란 ‘치매타파’의 준말이였다. 듣자니 한국에는 10명 중에 1명이 치매환자라고 하니 예방 차원에서 국민적 댄스를 만들어 보급시키는 모양이다.

팔순이 넘는 시어머님과 함께 살아서인가, 치매는 은근히 신경 쓰이는 병이다. 방송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게 치매예방 관련 프로들을 내보내는데 들을수록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집에 치매환자가 있으면 가족들이 더 힘들다는 얘기에 더럭 겁이 나기까지 한다.

겉보건대는 밝고 명랑하지만 팔순을 넘기면서 어머님의 동작이 예전보다 느려지고 청력도 떨어지고 감각도 무뎌가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아서인지 남의 일 같지 않다.

주방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면서 보니 깜빡깜빡하는 일도 자주 생긴다. 팔순이 넘었다고 주방일을 전혀 안하는 것이 치매예방에는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어머님보고 전기밥솥으로 밥짓는 것만 책임지시라고 했더니 때로는 전기밥솥 단추를 누르는 것을 잊는다든지 밥을 다 푸고도 보온상태로 그냥 놓아두어서 밥솥 안의 물이 펄펄 끓는다든지 수도꼭지를 잘 닫지 않는다든지 하는 일들이 자주 생기군 한다. 매번 그러실 때면 “절대 정신줄 놓으시면 안돼요!” 하고 잔소리를 해댄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제주도에 려행을 갔다가 귀국하던 날 공항에 나오면서 매일같이 들고 다니던 손가방을 숙소에 둔 채 그대로 나와버려서 공항까지 나왔다가 숙소에 되돌아가 찾아온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기억력에 줄곧 자신감이 있었던 어머님은 그 일로 크게 락담을 하시면서 “이 로친네 이젠 안되겠다。 이제부턴 내 뒤를 살펴!”라고 부탁을 해왔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옛날부터 ‘산 백과사전’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억력 비상한(?) 녀자로, 누구네가 몇년 몇월 며칠에 이사를 했다든지 하는 별 쓰잘데기 없는 것까지 다 기억을 해서 ‘별걸 다 기억하는 녀자’로 통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30여년간 편집생활을 한 직업병이 남아서인지 뭐든지 정확하지 않으면 반드시 바로잡아놓아야 시름을 놓는 녀자로, 요즘엔 갱년기증상까지 겹쳐서 주방에서 밥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자꾸 이것저것 따지는 못된 습관이 있다. 

어머니가 시키지도 않은 옥수수를 사왔다고 미국의 단옥수수甜玉米가 아닌 국산옥수수를 사왔다고 하면서 미국산이 아니라거니 단옥수수가 맞다거니 하면서 어머니와 한바탕 설전을 벌이는 못 말리는 녀자이기도 하다. 사심을 다 빼고 지극히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옥신각신 다툴 때는 ‘고급편심’이 아니라 영낙없는 농촌아낙네다.

당시 다툴 때에 이런 것들을 미리 인지를 하였더라면 가정의 평화와 화목에 일조를 하였으련만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뒤늦게 인지를 하는 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후회막급병이여! 

후에 먹어보니 국산옥수수도 마찬가지로 달고 맛이 있었다는 눈물겨운(?)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란 간사하기 짝이 없어 “나도 인간인데 뭐…” 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상대에겐 높은 자대를 들이대면서 몹쓸 자존심 때문에 사후에도 사과 같은 것을 하려 들지 않는다. 

퇴직 후의 하루하루는 그렇게 자질구레한 일상을 동반하며 흘러간다.

거의 30년간 한가마밥을 먹으며 살아온 고부 사이, 하루 삼시 어머니와 머리를 맞대고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며 생활의 지혜를 배우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말 뒤끝에 쩍하면 치매를 들먹이니 듣기가 거북했던지 어느날 어머님이 “그 치매소리 좀 그만해라, 무섭다!”고 하면서 질색을 하시는 것이다. 어머니를 위한 걱정인지 나를 위한 걱정인지 나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점심약속이 있어서 나갔다가 마트에서 장을 본 후 잔뜩 사들고 차에 오르며 길을 떠나려는데 갑자기 오른쪽 바지주머니에 있어야 할 휴대폰이 만져지지 않았다. “앗, 휴대폰!” 하고 새된 소리를 지르며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데 왼손에 쥐여있는 휴대폰이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이구…  아줌마!…”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동승한 친구들이랑 한바탕 유쾌한 웃음으로 날려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제주도에 려행 갔다가 생긴 일은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니였다.

다름 아닌 지갑을 택시에 두고 내린 것이다. 차에서 내린 지 거의 1시간이 지나서야 지갑이 없어진 것을 인지하였으니 ‘산 백과사전’은 무슨! 돈도 돈이지만 그 숱한 은행카드들을 분실신고할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났다. 각가지 상상을 다 하며 오로지 그 지갑이 되돌아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리나케 호텔 프런트를 찾아가 사정얘기를 했더니 호텔보이가 여기저기 전화를 하여 감시카메라에 찍힌 차번호를 확인하고 택시회사에 전화를 걸어 알아보는듯하더니 눈물나게도 택시 기사가 반시간 후에 도착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고마울 변이라구야!

기사님의 말에 의하면 지갑이 앞좌석 밑에 떨어졌는데 자기는 물론 보지 못했거니와 손님이 3명이나 갈아타도록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그 문제의 지갑을 내민다. 아까 택시에 탔을 때 좀 수다스러워보이던 기사아저씨가 그렇게 멋있어보일 수가 없다. 도민들의 높은 수양에 감사한 마음이 일면서 기사님께는 물론 사례금을 후하게 드렸지만 방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건 완전 환장할 일이다.

내 인생사전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내 몸에서 발생한 것이다. 슬프지만 내 기억력 심지어 건망증이라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상반신이 스멀스멀 달아오른다.

갱년기증상 치료약을 꺼내 한알 먹었다. 몇년 전 갱년기가 시작될 무렵에 가족들 앞에서 “이제 갱년기니까 제가 화를 내더라도 리해 바랍니다!”라고 엄포를 놓았었는데 일은 엉뚱한 데서 터진 것이다. 설명서를 보니 ‘건망증’이니 뭐니 하는 글자들이 안겨온다. 몸이 갑자기 더웠다 추웠다 하는 증상이 심해서 사먹는 약인데 그 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문구들이 이제야 보이다니… ‘수면장애, 신경과민증, 우울증…’ 그런 문구들이 나를 더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위축되게 한다. 

잠이 오지 않는 실면의 날들이 이어지면서 오만가지 생각들이 엄습해온다. 

갱년기증상과 치매증상을 두루 살펴보니 의외로 비슷한 것들이 많았다. 아직은 젊다는 것을 턱대고 자기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던 치매증상들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갱년기증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무섭게 한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가족일지라도 타인의 일일 때는 여전히 ‘먼산보기’이고 가족을 위한 걱정도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미칠 루를 짐작한 걱정이였고 자기 몸에 진짜로 닥쳐야 그 심각성을 느끼게 됨을 아프게 인지를 해냈다… 이제 ‘치매’는 팔순 시어머님만의 걱정이 아닌 내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심각한 것이였다. 

얼마 전 친구의 어머니가 4년간 치매로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저 잘사는 집의 어머니로, 본인에게나 가족에게나 다 해탈이라고 간단히 생각했는데 장례식장에서 장남이 읽는 추모문에서 젊은 날 그 어머님의 고생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우파로 갇혀있고 형제자매들이 조롱조롱 세명이나 되는데 한달에 생활비 8원으로 살아가려니 너무나 막막해서 콕스 줏기 등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면서 힘든 세월 질긴 모성애로 자식들을 키워온 어머니를 그리는 장남의 목멘 소리가 그대로 전달이 되여 눈물을 쏟게 한다. 그런 어머니를 어찌 ‘치매환자’라는 한마디로, 해탈이니 뭐니 하는 말로 일축할 수 있으랴…

공교롭게도 친정아버지와 친정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던 바로 그 장소인지라 여러가지 복합적 감정들로 눈물이 솟구친다. 몇해 전 엄마가 생전일 때 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나서 한동안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일들까지 마구 겹치며 가슴을 허빈다. 

치매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돌아온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진짜 효녀라고 그동안 정말 수고했다고 위안을 했더니 몇번이고 포기하고 양로원에 보내고 싶은 것을 남편이 보내지 말자고 우겨서 4년을 버텼다고 하니 그 사위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4년간 버틴 그 가족의 막막함과 어려움을 외인들이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만 그렇게 장례식장은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삶에 대해, 가족에 대해 다시 반추하게 만드는 장소인 것 같다.

 “설명절이 오는 건 좋은데 나이 먹는 건 싫구나!” 

이번 음력설에 시어머님이 하신 말씀이다. 팔순이 넘은 로인의 페부지언肺腑之言이였을 텐데 당시는 친척들 음식상을 갖추는 고달픔에 그저 귀등으로 흘려보냈다가 요즘에야 문득 생각히우다니…

3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압록강을 건너온 그 꼬마가 어느덧 팔순고개를 넘으신 것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오로지 앞만 보고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왔으나 백년인생이라는 명제 앞에 서면 다 그러하듯이 몰려오는 절대적 고독을 어찌할 수 없으셨으리라.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 벼랑 끝에 서보면 알아요. /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다 /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누군가 모멘트에 올린 <위대한 약속>이라는 노래가 유별나게 가슴을 친다. 

‘하나’도 모르면서 잘난 척을 하며 쩍하면 공부 못한 어머님을 가르치려 들었던 나 같은 인간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세월 앞에 고개 수그리고 유자孺子의 소가 되여 그동안 내가 받아안은 사랑을 되갚는다는 마음으로 림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한편 자식들한테 페를 끼치지 않겠다고 로인합창단에 다니며 부지런히 가사를 외우고 꾸준히 걷기운동을 하며 건강을 다지는 어머님이 한없이 고마워난다. 내가 어머님의 그 나이까지 살 수 있을지도, 가령 그 나이까지 산다 하더라도 저렇게 명랑하고 단순하게 락천적으로 살 수 있을지도 장담 못할 일이니 늘 ‘어머님의 산 교과서’에서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겠다.

“100살까지 문제 없겠수다!” 

며칠 전 어머님과 함께 건강검진을 갔을 때 의사선생이 불쑥 던진 한마디가 어머님을 다시 ‘미소할머니’로 만들어준다. 

 

 “나 늙어 로인 되고 로인 젊어 나였네. 

로인과 나는 둘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네.”

 

오래 전 한국의 어느 치매센터에서 보았던 시구절이 떠오르는 요즈음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미소할머니’와 함께 ‘치타송’을 부르며 단순하게 살고 싶어진다. 세월의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싶다.

 

마음의 금선을 튕기며

가야금이 나에게로 왔다.

오십 평생을 살도록 악기라고는 하나도 다룰 줄 아는 게 없어서 늘 가슴 한켠에 서운함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만난 가야금이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순 우리말로 ‘가얏고’라고 하는 가야금은 옛날 가야국에서 유래됐다는 궁중악기로 대체로 문인묵객들이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는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우아한 악기이기도 하다. 이름만 들어도 고전적 랑만의 대명사나 다름없어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에게는 한낱 막연하게만 바라보게 되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악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20여년 전, 어느 수필에서 TV화면에 비친 거문고 연주가의 차분한 연주모습을 보면서 거문고의 우아한 음색에 반하여 엉뚱하게도 그 연주가의 고독한 인생길에 길동무가 되고 싶다고 술회한 적이 있는데 20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하게도 그 고전적 악기가 내게로 온 것이다. 애심녀성문화원의 배려로 가야금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차례지면서 쉰다섯에 내 생애 악기 다루기의 첫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자, 오늘은 먼저 뜯고 튕기는 주법입니다…”

한국문화원의 권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가야금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 

오선보도 볼 줄 몰라서 크게 걱정을 했는데 그저 12줄 가야금선만 잘 기억하고 주법만 잘 배우면 된다고 알기 쉽게 가르쳐주어서 리론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뜯고 튕기려니 생각처럼 되여주질 않는다. 

“4,6~ 8,6,8,7~ 6,5,4…” 가야금선을 외우며 부지런히 뜯는데 대바람에 식지에 물집이 생기더니 피까지 난다. 

“선생님, 반창고 붙이고 하면 안돼요?”

“아니돼요.” 

고운 목청의 선생님이 미소를 띄우며 말한다. 반드시 물집이 생겼다 터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뜯고 튕기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는 게 선생님의 지론이다. 어디 그 뿐인가. 오른손은 닭알 쥐는 모양을 하되 식지를 절대 치켜들지 말라고 한다. 앞에 앉은 임금님을 손가락질하는 거로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제야 품위 있는 궁중악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정신이 번쩍 든다. 꼬박 2시간 동안 책상다리를 한 채 앉아있으려니 다리가 저려났지만 꾹 참아야 했다. 

가야금에 관해서는 재직 당시 민족음악 관련 책들을 편집하면서 가야금 산조며 계면조며 두루 얻어들은 풍월이 있어 처음에는 선생님과 궁금한 것들을 물어가며 대담을 하는 멋이 좋았다. 그리고 12현 가야금과 23현 개량가야금이며를 두고 아는 만큼 나누는 멋 또한 좋았다. 

그런데 실전은 영 아니다. 더구나 ‘쌍튕김’은 아무리 해도 손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누가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고 했는가. 별로 련습을 한 것 같지도 않은 젊은 사람들은 알아서 척척 진도를 나가는데 내 손가락은 굵은 탓인지 아니면 감각이 둔한 탓인지 잘 튕겨지지 않고 그냥 제자리걸음이다. 

결국 ‘나머지공부’ 신세가 되였다. 내 공부생애에 없던 일이다. 선생님을 마주보고 앉아 공부하다가 이제 선생님 곁으로 자리이동을 하게 된 것이다. 곁에 앉으면 선생님이 손동작을 바로바로 잡아준다는 좋은 점이 있다. 여태껏 들어오던 “총명이 과인过人하다”는 이제 낡은 터에서 이밥 먹던 소리로 되였다. 

좀 창피했지만 선생님과 나란히 앉으니 수업 시작할 때 학생들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고개 숙이며 하는 인사도 함께 받을 수 있어 좋다고 너스레를 떨며 마음을 비웠다. 자존심 따위를 다 내려놓고 유치원생의 자세로 돌아가야 제대로 배워낼 수 있음을 터득한 것이다. 

어느덧 가야금을 사기에 이르렀다. 추운 겨울날 련습한다고 맨날 문화원에 가지 않아도 되니 좀 좋은가. 그토록 갖고 싶던 가야금을 사놓으니 집에서 언제든지 련습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처음 얼마간은 호기심에 열정까지 붙어 좀 련습하는가 싶더니 얼마 안되여 바로 꿔온 보리자루 신세다. 책을 사놓으면 빌려서 볼 때보다 더 보지 않는 격이 되고 만 것이다. 

스모그를 무릅쓰고 가야금 들고 수업하러 다니는데 뻐스에서 숱한 사람들이 쳐다본다. 아닐세라 늦은 밤 가야금 들고 귀가하면 남편이 “당신 무슨 악단 단원이요?”라고 칭찬인지 타발인지 모를 소리를 한다. 모르긴 해도 그 화외음은 그렇게 폼 잡고 다닐 거면 제대로 하라는 말일 것이다.

배운 지 한달이 될가 말가 했는데 벌써 공연을 나간단다. 협회 내의 송년회 무대라 크게 부담은 되지 않지만 연주와 노래를 병행하는 병창으로 나간다니 왼심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도 나지 않았는데 콩밥 먹는 격, 게다가 <아리랑> 후렴부분의 휘모리장단은 리듬이 빨라 난이도가 있었지만 말 그대로 ‘휘몰아가며’ 맹연습을 하였더니 예상 외로 공연은 대성공이였다. 문화원 원장님을 비롯해서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내주었고 여기저기서 부러운 시선들을 보내온다. 

조금씩 진도를 나가면서 중모리요, 계면조(슬픈소리)요 하면서 롱현弄絃이라는 것도 배우게 되였다. 왼손으로 현을 눌러 떨면서 하는 주법인데 눈물이 뚝 떨어지는 슬픈 소리를 내라고 가르친다. 바로 말로만 듣던 가야금 산조에 입문한 것이다. 힘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음이 그렇게 여러가지로 달라질 줄 몰랐다. 세상은 그렇게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온통 신기한 것들이 나를 맞이한다. 그 기예의 깊이를 재일 길이 없으니 일시적인 호기심으로 그저 잠간만 머물러있을 생각을 한다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음을 실감한다.

배운 지 반년이 되자 또다시 공연에 나간다고 한다. 이번에는 조금 난이도가 가미된 ‘다스름’이 들어있는 곡인데 음을 조률하듯 쉴 새 없이 뜯고 튕기며 익숙히 해야 한다. 따분하고 지루한 련습이 이어진다. 몇달간 한곡만 련습하니 때론 싫증이 나기도 하지만 인내하며 버텨야 한다. 

멀리서 볼 때는 화려하고 멋있는 것들이 가까이에 다가가보니 실은 고된 련습과 노력의 결과물임을 몸으로 인지한다.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며 유명인사들까지 감동적인 연주였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든다. 

 “짜증을 내여서 무엇하나, 성화를 내여서 무엇하나…”

어쩌다 짜증 나는 일이 생기면 오랜 련습으로 입에 오른 그 가사를 외우며 심리평형을 잡는다. 어느 때부턴가는 가야금 앞에 마주앉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가야금과의 친밀한 접촉도 반년이 넘었다. 같이 배우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더니 반으로 줄어들었다. 각자 그럴 만한 리유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흔들리지 않는다. 악기라는 것을 처음 다뤄보는 아마추어의 설레임 같은 것이 동반되여 삶에 권태를 느낄 즈음에 적당하게 신선함을 불어넣어주었던 것이 사실인데 이제는 취미로 하던 그 선에서 잠간 멈춰서서 고민을 해보며 그 선을 넘어서야 할지 말지를 결정할 시점에 온 것이다.

따분한 련습들에 지쳐갈 즈음에 선생이 연주하는 익숙한 음악이 귀맛좋게 들려온다. 중국의 전통민요인 <말리화茉莉花>가 가야금으로 연주해도 그렇게 고전적인 아취가 풍길 줄 몰랐다. 가담가담 고쟁古筝의 중국풍 선률이 묻어나와 더 은은하게 들린다. 가야금이 옛날 중국의 고쟁에서 왔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이다. 

그리고 여기 또 한곡, “자세히 보아야 더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어느 사극드라마에 나오는 주제가처럼 선률이 너무 우아하여 물어보니 아니란다. 유명한 시인 나태주의 <풀꽃>이라는 시에 곡을 붙인 노래란다. 시도 처음 들어보지만 가야금선률을 입히니 더 매력적이다.

 마지막 <너도 그렇다!>를 듣는데 누군가에게서 고백을 받은 것처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오십대 아줌마를 십대 소녀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가야금의 마력에 빠지며 나태주의 시까지 좋아지기 시작한다. 

가야금은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현란한 손놀림과 우아한 선률로 나를 사로잡았다면 이제는 들뜨지 아니하고 차분하게 끈기 있게 다가갈 때 더 깊은 매력을 뿜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금예琴艺의 경지를 말할 것 같으면 옛날 춘추 전국 시대의 성련成连과 유백아俞佰牙와 같은 거문고의 달인을 손꼽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런 높은 기예를 갖추려 애쓰지 않으련다. 또한 종자기钟子期가 유백아의 거문고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들어 지음知音이라는 낱말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그런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고도 굳이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버거운 일이다. 

그저 물 흐르듯이 순리에 따라 살면서 가야금을 배우며 터득한 삶의 리치를 내 소소한 일상에 적용하여 누군가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지음이 되고 지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세히 보고 오래오래 보면서” 사랑하노라면 언젠가는 마음이 통하리라 믿으며 오늘도 마음의 금선을 튕겨본다.

 

독서와 려행이라는 듀엣

“내가 읽거나 전해들은 것은 내가 직접 려행하면서 본 것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13세기의 대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한 말이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를 거의 알지 못했던 그 시대에 동양에서 2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탐험려행을 하면서 동서양 문화의 충격을 수없이 경험하였을 마르코 폴로로서는 얼마나 많은 말을 쏟아내고 싶었을가? 그런 심경이 담겨진 말이였으니 당시에는 물론 명언이였을 터이다. 

그러나 려행이 바야흐로 류행처럼 번지는 21세기 ‘지구촌시대’의 맥락에서 봤을 때는 고명한 데가 하나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말일 뿐, 그럼에도 뒤늦게 나에게로 와서 나를 철들게 만들었으니 고마운 명언이라고 해두고 싶다.

글을 읽을 줄 알기 시작해서부터 책에 빠져있었고 출판사에 몸 담고 30여년을 일하면서도 줄곧 책 속에 묻혀있었던 나, 지금까지의 나를 키운 8할은 책이였다고 할 만큼 ‘책벌레’인 나에게 이 말은 조금은 충격적인 데가 있다. 오로지 글밭만 헤매면서 책으로부터의 ‘영양섭취’에 많이 기대여 세상을 바라보았을 뿐 려행에 대해서는 다소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해왔으니까. 

그 무덤덤함이란 아마도 목표려행지에 대한 기대나 궁금증 같은 것이 별로 없이 그저 ‘동무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팀을 따라 려행을 다녀오는 관습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알랭드 보통의 《려행의 기술》에 나오는 19세기의 그 고루한 데제생트 같은 심각한 려행기피증은 아니고 다만 려행을 갔다 오더라도 책을 통해서 얼마든지 세상만사를 알 수 있다는 ‘책만능주의’ 오기 같은 것이 장난쳤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유럽의 몇개 나라와 미국을 다녀왔고 돌아와 려행기 비슷한 글도 썼지만 그런 려행들은 대체로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기보다 려행사에서 보여주는 것만 보고 왔기에 자기만의 느낌과 발견이란  사진 찍기와 함께 거의 증발된 것 같다. 그러니 려행기라고 해봤자 책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정보를 한가득 깔고 될 수 있으면 멋진 말로 포장을 해서 썼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정년퇴직을 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자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기회만 되면 려행에 나섰다. 돌아와서 괜찮은 려행기를 써야겠다는 야무진(?) 꿈까지 한자락 얹어 사진촬영에 록음까지 곁들이면서 적극적인 자세로 림하니 서서히 려행의 묘미가 느껴졌다. 지난 1년간 사이판에서 사할린에서 모스크바에서 그리고 제주도와 강원도에서 자연이 하사한 천혜의 모든 것들과 인문적인 아름다움들을 책에서 본 통념적인 시각이 아닌 나의 눈으로 나의 귀로 나의 모든 오감을 총동원하여 받아들이고 느끼려고 하니 비로소 뭔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해외려행의 경우 팀을 따라가게 되면 함께 어울리는 멋은 좋지만 흔히 틀에 박힌 코스에 따라 관광명소를 가기 때문에 이색적이고 대단한 것을 보더라도 큰 울림 같은 것이 적다. 그렇게 대단하니까 우리가 보러 온 게 아닌가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씨야의 유명한 에르미타쥐궁전에서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 그 눈부신 것들이 허세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 같다. 

오히려 관광명소가 아닌 곳에서 우연히 보았던 사소한 것들과 생생한 체험들이 더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도 한다. 로씨야의 네바강 다리 우에서 우연히 만났던 유화 그리던 주름진 얼굴의 할아버지, 저녁 무렵 길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외롭게 버스킹을 하던 청년, 사할린의 어느 화장실에서 휴지 팔던 짙은 화장에 호피무늬옷을 요란하게 떨쳐입은 녀성, 기차 안에서 열심히 책을 읽던 단아한 모습의 어떤 모녀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로씨야녀인과 귀여운 아기… 이런저런 사연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그들의 사는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대화가 가능했더라면 그런 궁금증을 풀 수도 있었을테지만 굳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그 이색적인 옷차림과 말투, 표정 그리고 제스츄어에서 나름대로 상상하며 동질감과 이질감을 찾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복 항공권 값을 다 건진 기분이 든다. 

한편 말이 잘 통하는 제주도에서 팀을 따라 바다가를 산책할 때에는 이국적인 느낌은 없지만 스모그의 피해가 없는 푸른 바다와 청정한 공기의 자연에 몸을 맡기고 느긋하게 거닐면서 령혼까지 정화되는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스케줄 때문에 사진만 몇장 남기고 급급히 떠나야 했던 려행이라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아마도 그런 아쉬움을 달래고 싶었던 것일가? 똑같은 코스를 시어머님을 모시고 또다시 밟게 되였다. 로인들이 걷기에 좋은 코스라는 판단에 모시고 갔는데 예상 외로 어머님이 흡족스러워하시니 그게 더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무릎수술 후 그렇게 직접 당신의 다리로 걸어 곳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을 하시는 것 같다. 나 또한 여유 있게 걸으면서 오롯이 바람소리와 바다냄새에 집중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 좋았고 어머님과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면서 천천히 걷는 멋 또한 좋았다. 

집에서 하루 삼시 얼굴을 맞대고 사는 고부간이지만 려행지에 오면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별 감흥없이 바라보는 열대식물도 처음 보는 식물이라며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고 즐거워하시는 모습, 숲속의 작은 기차를 타고 곶자왈을 누비면서 소녀처럼 그네를 타기도 하고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환히 웃는 모습이 황홀하여 부지런히 샤타를 누르며 좋은 추억을 많이 쌓도록 배려할 수 있어서 흐뭇했다. 내가 짠 려행코스이기에 소소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고 예기치 않은 것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는 묘미가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역시 “려행은 좋은 것”이였다. “때로는 지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려행을 다니던 어느 날, 공항서점에서 책이 눈에 띄여 집어들었다. 첫페지를 읽어내려가는데 잔잔한 문구들이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오며 감성을 자극한다. 순간, 독서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온몸에 퍼지며 행복감이 몰려온다. 

려행이 끝나 집에 돌아와 책을 펼쳐들었을 때 몰려오는 편안함은 또다시 나를 깊숙한 쏘파에, 침대에 붙들어맨다. 붕 떠있던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는 은둔형인가보다고 개탄을 한다. 

하지만 이 때의 나는 원래의 나가 아닐 것이다. 알게 모르게 책에서는 배울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들을 한가득 안고 이 세상을 보다 넓게 그리고 깊게 바라보는 눈을 달고 돌아온, 많이 성장한 나일 것이리라.

그렇게 흡족해있을 즈음에 아우구스티누스의 한마디가 강하게 울린다. 

“세상은 한권의 책이다. 려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책의 한페지만을 읽을 뿐이다.” 

려행에 갓 어섯눈을 뜨기 시작한 이 ‘책벌레’에겐 직격탄이 아닐 수 없다. 말 그대로 책 한페지에만 머물러서는 책 전체가 주려는 메시지를 제대로 리해할 수 없을 것이 뻔하다. 이제 겨우 열페지 정도 읽었으니 ‘세상’이라는 그 ‘책’을 완독하기 위해서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겠다. 

한편 정적인 독서와 동적인 려행, 간접적인 경험과 직접적인 경험으로 내 령혼을 살찌우며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오늘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나는 결국 이 세상의 한낱 과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끼며 려행을 꿈꾸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일상 자체가 려행이기도 하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올 수 없는 이 세상의 시간 속을 려행하며 어제의 자기와 작별을 고하는 우리는 모두 고독한 나그네가 아니던가. 

이 세상에서의 긴긴 려행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 기왕이면  려행 잘 다녀왔노라고,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노라고 씩씩하게 말할 수 있는 좀 괜찮은 과객이고 싶다.

오늘도 나는 모든 오감을 열어젖히고 ‘세상’이라는 책과 마주한다. ‘세상’을 읽고 ‘세상’ 속을 거닐며 나만의 ‘려행기’를 쓰고 싶어진다.


출처:<장백산>2018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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