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녜? 구멍탄? 아, 북경에도 구멍탄이 있었슴까? 전 한국에만 있는줄 알았슴다!”
한 사무실 젊은 동료의 놀라움에 찬 소리다.
북경에서 30여년 살아오는 동안 구멍탄(蜂窝煤)만 8년 가까이 때며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내가 듣기에 그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경탄이여서 일순간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지만 또한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반증으로도 되기에 일단 웃음으로 넘기고 내 추억의 메모리에서 구멍탄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내였다.
누구와 더불어 지난날을 이야기하랴!
북경에서 1980년대중반에 결혼을 하고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조그마한 뙤창문이 달린 단칸방에서 구멍탄을 때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신혼초, 구멍탄불이 자주 꺼져서 이튿날 출근하여 한 사무실 선생님들께 하소연할라치면 “그거 요령을 모색 잘하믄 차차 될게요!”라고 하면서 구멍탄 때는 요령을 알려주군 하였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제일 싫은것이 추운 새벽에 잠자리에서 억지로 일어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채 집게로 새 구멍탄을 집어다 갈아야 하는 일이였다. 두말할것없이 이는 주로 남편 담당이였는데 난로뚜껑을 열었을 때 석탄불이 빨갛게 살아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꺼져있으면 추운대로 꾹 참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 새 구멍탄을 들고 이웃집에 가서 빨갛게 달아있는 구멍탄을 바꿔다가 다시 불을 살구는데 그 불길이 쉽게 올라오지 않아서 아침밥을 해먹으려면 한겻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그나마 이웃간에 오고가는 인정이 있어서 많이 위안이 되였다.
아들애가 태여난뒤 구멍탄불우에 우유를 올려놓고 끓이는데 불길은 올라오지 않지, 아이는 배고프다고 보채지 급한 마음에 숟가락으로 우유를 저으며 “우유야, 우유야, 빨리 끓어라, 우리 아기 맘마 빨리 끓어라…”라고 즉흥적으로 노래를 지어부르며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고생하며 어렵게 키운 아들이 어느덧 장성하여 장가까지 갔으니 격세지감이란 바로 이런것을 두고 말하리라!
그때 우리 사는 창고에서 바로 맞은켠에 있는 이층집에서 화려한 선률의 피아노소리가 들려오고 집에 손님들을 청한듯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그보다 더 부러운 귀족생활이 또 없었다.
아들애가 한살이 됐을무렵의 어느 휴일날, 참대로 결은 유모차(당시 26원)에 아들애를 태우고 산책을 나갔다가 부식물상점에 들어갔다. 유모차안에 서있던 녀석이 어느결에 매대우에 있는 앉은뱅이 저울을 확 잡아당기는바람에 저울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저울대가 절반으로 동강나는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영업원이 당장 저울을 배상하라고 잡아뗀다. 그래도 사정을 봐줘서 절반값만 내라는데 그게 자그만치 그때의 반달로임과 맞먹는 30원이였던것이다. 때는 한창 아이 키울 때라 가꾸지 않은 내 행색이 초라했던지 나를 녀석의 보모쯤으로 알고, 가서 빨리 주인을 데려오란다. 기가 막혔지만 그런 억울한 세절같은건 모두 생략한채 남편한테 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입을 하 벌린채 천정만 쳐다본다. 월말이라 생활비가 거의 다 떨어지고 새달 로임이 나오려면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어디 가서 그 돈을 구한다? 그때의 막막함이 아직도 가슴에 맞혀오는듯 한데 기억을 더듬으니 남편이 선배동료를 찾아가 사정얘기를 한후 어렵사리 남의 돈을 꾸어다 저울값을 갚았던것 같다.
가을이면 겨우내 땔 구멍탄을 사서 바람벽에 차곡차곡 쌓아놓느라 얼굴에 석탄검댕이가 묻은줄도 모르고 환하게 웃음 짓던 남편 얼굴과 김장용 배추를 쌓아놓고 김장을 한다고 분주스레 돌아치던 새댁, 아니, 그보다도 보모로 오인될 정도로 초라한 행색의 내 얼굴모습이 한데 오버랩되며 일시에 감구지회가 몰려온다. 그렇게 가난할지라도 꿈과 희망이라는것을 버리지 않고 살던 옛날 일들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기억속에 남아있는데 세월은 사정없이 흘러 먹고 입는것때문에 고뇌하던 우리를 이제 물질의 풍요앞에 세워놓은것이다.
느닷없이 튀여나온 구멍탄얘기가 사라진듯 했던 지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될줄 몰랐다. 선배님들이 쩍하면 옛날얘기를 꺼낼 때면 고리타분한 얘기를 또 꺼낸다고 속으로 웃었는데 내가 이제는 젊은이들과 더불어 지난날의 그 “고리타분한” 얘기를 하는 나이가 된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한편 고태스러워보이기는 하겠지만 엉뚱하고 발랄한 매력을 풍기며 톡톡 튀는 젊은이들과 어울려 지난 옛일을 얘기하는 멋 또한 좋다.
돌이켜보면 저 유명하다는 동화 한편 읽어보지 못하고 오로지 “투쟁정신”만 강조하는 책들만 읽으면서 자란 우리 세대, “독서무용론”이 살판치고 오로지 로동생산만 강조하는 풍조속에서 원만한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그나마 문학을 지상에서 가장 숭고한것으로 간주하였었던 우리 세대다. 지금의 젊은이들과 마주하고 그때 나에게 있어 “문학은 숙명과도 같은것”이였다는 등으로 얘기를 할라치면 여러 코드들이 들어맞지 않아서 키득키득 웃으며 “리해불가”라는 표정을 짓는 그들이 역시 리해불가이지만 그래도 그들과 마주하고 지적대화를 나누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그들의 지식축적량에 한번 놀라고 솔직함과 당돌함에 두번 놀라면서 신선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세대들에게 내가 늘 가졌던 자대는 “지금의 젊은 애들은 참…”라고 하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웃세대들이 우리한테 가졌었던 바로 그 자대이다. 그래서 지금의 젊은이들이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뇌와 방황을 털어놓을 때면 속으로 “고까짓 일로 무슨…우리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라는 심리를 가지며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준적 없고 그들의 아픈 마음을 제대로 보듬어준적 없다. 내 젊은 시절 사노라 정신없이 돌아치면서 한 고뇌만이 아픈것이고 구멍탄을 사들이는것같이 당장 입에 풀칠하는것때문에 신경 쓸 일 없는 “물질의 풍요” 시대에 사는 요즘 청년들의 고뇌는 고뇌도 아니라고 간주했었다.
한편 력사를 되돌아보면 우리 세대보다 훨씬 살기 힘들었던 100여년전 우리 할아버지 세대들의 고뇌와 방황인들 어찌 적었으랴. 째지게 가난할지라도 피를 팔아서 책을 사보았다는 우리 아버지세대의 이야기에 기가 차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그 절실함이 쉽게 피부에 닿지 않듯이 현대 젊은이들의 정신적고뇌와 방황 역시 피부로 다가오지 않기는 매일반이였다.
몇년간 사회인들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각계각층 젊은이들의 글과 만나 그들의 령혼심처에 깊숙이 들어가볼 기회가 많아지게 되였다. 높은 학력을 쌓고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과정에 부딪치는 높은 현실의 벽만치나 그들의 고뇌와 방황은 심각한것이였다. 그런 그들에게 년장자노라고 어설프게 이도저도 아닌 대안을 제시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옛날에 비해 살기는 더할나위없이 편해졌는데 인간의 고뇌는 왜 줄어들줄 모르고 갈수록 더 많아지고 깊어지는것일가? 다시금 인간의 정신적추구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앞에 마주서게 된다.
결국 청춘의 고뇌란 시대에 따라 그 고뇌의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을뿐 인생의 의미나 삶의 가치 그리고 꿈의 실현을 두고 가지게 되는 고뇌나 방황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청춘들을 울리고 아프게 한다는걸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그러고보면 글을 쓰는 과정은 정직하게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볼수 있는 시간인것 같다. 글을 쓰면서 자기의 고뇌와 방황을 털어놓고 자기를 성찰하면서 사유의 뜰을 정리하는 과정에 어느덧 혼란스럽던것들이 가닥이 잡히면서 상처들이 치유된다고 그네들은 말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힐링이 되는 과정이라고 기뻐하는 그네들과 격이 없는 대화를 나눌수 있다는것에 보람을 느낀다.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서른즈음에”라는 노래가 애된 목소리를 타고 절절하게 울린다. 멀어져가는것이 어찌 청춘뿐이랴, 이른바 꽃중년도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훌쩍 가버리는것임을… 가고나면 상실의 아픔과 함께 후회가 남고 통탄이 남는다는것을 지나온 사람은 다 알리라!
한편 나이를 먹어가며 잃는것도 많지만 얻는것 또한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이를 먹는다는것은 자신의 고집스런 편견과 세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가는 과정이며 이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눈을 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한것 같다. 그래서 나이가 들었음에도 젊은이들과 어울릴수 있다는것을 분복으로 삼고 그들의 고뇌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토로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작은 일상에, 별치 않은것을 두고도 목에 피대를 세우며 한바탕 열변을 토하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고싶기도 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는 안도현의 시가 허를 찌르는 겨울밤이다. 아직도 철이 덜 든채 서른즈음에 머물고싶어하는 어느 오십대 아낙의 하루가 또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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