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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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책의 향기에 취했더이다-남영도
2019년 07월 15일 10시 17분  조회:306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남영도
책의 향기에 취했더이다
 
 
“선생님, 완전히 책 속에 묻히셨네요.”
젊은 편집들이 나에게 원고 맡기러 왔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씩 던진다. 그 말에 부지중 주위를 둘러보니 말 그대로 책더미 속에 내가 갇혀있는 형국이여서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책귀신’으로 불리우던 내가 대학을 마치고 출판사에 배치 받아와서 책 만드는 일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32년, 이제 여기서 정년퇴직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책과 씨름하며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나를 키운 8할이 책이라고 할 정도로 나는 독서의 힘으로 버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이 별로 많지 않았던 소녀시절, 활자라고 찍힌 것은 닥치는 대로 다 읽었고 그것도 오감을 총동원하여 ‘잘근잘근 씹어 소화까지 시키군 하였’으니 말 그대로 활자중독자인 셈이다. 처음으로 《반짝이는 붉은 별》이라는 장편소설을 읽고 나서 그 작품세계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채 동네집에 가서 물을 길어 동이에 이고 집에 왔는데 방안의 어느 시커먼 구석에서 소설 속의 악패지주 호한삼이 당장 뛰쳐나올 것만 같아서 집안에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무서운 기억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
생일날 어머니가 맛있는 걸 사먹으라고 준 용돈으로 고리끼의 장편소설 《어머니》를 사서 보았는가 하면 황계광, 구소운 등 영웅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각색한 그림책(련환화)들을 한가득 사서 벽에 쭉 걸어놓고 소조공부를 하러 온 학급친구들과 함께 재미나게 보면서 방과 후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었다.
그럼에도 시대적 제한성으로 유년의 심령에 최초의 륜리로 크게 작용한다는 명작동화들을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커다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의 풀을 요구할지언정 자본주의의 곡식은 요구하지 않는다”는 구호가 판을 치던 계급투쟁년대에 서방 자본주의나라 명작들은 모두 출판이 금지되던 때의 일이였으니 조금 늦게 태여나지 못한 것을 한탄할 수 밖에… 물론 그후 아이를 키우면서, 책을 만들면서 더러 보충을 하였으나 아직도 동화라면 콤플렉스 비슷한 감정들이 살아나 가끔씩 나를 괴롭히군 한다.
그러던 시골소녀가 처음으로 연길이라는 대도시에 작문경연에 참가하러 갔다가 외국문 서점이라는 데서 조선의 문학작품집들을 사들었을 때의 그 기쁨과 행복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가? 그 책들에 심취하여 류려한 문구와 숨막히는 묘사들을 수첩에 베껴넣으며 꿈에 부풀어있던 나날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문학의 꿈을 한가득 안고 대학문에 들어섰을 때 대학도서관의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책들은 나를 주눅들게 하기에 족했다. 그 책들을 다 독파하려는 오기로 책을 읽었으나 전공서와 관련된 책만 읽기에도 버거웠다. 소설책을 읽는 것도 숙제라고 하니 처음엔 신났지만 그것도 잠시, 점차 방대한 열독숙제의 높은 벽에 한계를 느끼게 되였다.
 
얼마전, 오랜만에 책장에서 묵은 자료들을 뒤지다가 먼지투성이 속에서 옛날 수첩들이 눈에 띄여 펼쳐보았더니 페지마다 깨알같이 박아쓴 독서필기들이다! 무려 20권도 더 되는 그 수첩들을 30여년만에 다시 보니 마치 잃었던 무언가를 되찾은 듯 가슴이 뭉클해난다. 
“창밖의 무관한 일에 관여하지 말고 일심으로 만권서를 독파하라(莫闻窗外无关事,一心读破万卷书)”는 아버지의 멋진 친필제사가 유난히 눈에 띈다. 맨아래에 “81년 10월 4일”이라고 씌여있는 걸 봐서 아마도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그해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수첩을 선물하면서 써주신 글귀 같다. 다음 페지에 “독파만권서, 하필여유신(读破万卷书,下笔如有神)”이라는 글귀를 적어넣고 독서필기를 열심히 한 흔적들이 거기 고스란히 남아있다.
《붉은 것과 검은 것》,《두번째 악수》, 파금의 《봄》을 보고 쓴 독서필기가 있는가 하면 조선 현대문학선집들에 나오는 리기영, 강경애, 한설야의 작품 그리고 천세봉의 《고난의 력사》에 관한 것도 있었으며 북경에 와서는 한국 대표문학선집들을 본 독서필기가 주를 이루고 그후에는 또 장애령, 왕소파, 여광중, 여추우 등 중국문단 작가들의 산문과 수필들을 읽은 흔적도 보인다.
40년전부터 시작된 이 독서필기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울 때까지도 가끔씩 이어져왔으나 언젠가는 독서필기가 없는 독서로 되였고 컴퓨터가 보급된 후 독서의 량이 점점 줄어들다가 이제 스마트폰시대에 이르러서는 두석달이 지나도록 책 한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출판사에서 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면서 나는 서서히 성장해왔다. 따분한 듯한 정책 리론 도서를 번역, 편집하면서 정책을 리해하는 안목을 키웠고 우리 민족의 력사, 민속, 문학, 예술 등 여러 분야의 창작도서를 편집하면서 종합지식을 쌓는 동시에 사고의 폭을 넓혀갔으며 각양각색의 저자들의 원고를 만나면서 책임감과 사명감 비슷한 것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였다. 그중 《한세대의 별》과 《그리움의 시공을 넘어》의 작가를 만난 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
전국 각지에 금싸락처럼 널려 있는 조선족 과학자들을 취재하기 위하여 사비를 털어 만리답사길에 올랐고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과학자들에 대한 취재를 멈추지 않은 놀라운 정신력의 소유자--김영금 선생님의 《한세대의 별》을 편집하면서 우리 민족 청소년들에게 탐구정신과 꿈을 심어주기 위한 그 작가적 사명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한 암환자의 투병일기--박경식 선생님의 《그리움의 시공을 넘어》라는 책의 편집을 맡았다.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투병환자가 쓴 원고라 편집과정을 다그쳐야 했기에 선생님댁을 여섯차례 방문하면서 인간적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70여세 고령의 저자와 망년지교를 맺게 되였다. 그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의 눈물을 쏟으며 출판을 다그친 결과 제 시간에 저자에게 책을 안겨드릴 수 있어서 보람을 느끼게 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 제자들의 옹위 속에서 출판식까지 원만히 치른 선생님은 몇달 뒤 조용히 세상을 하직했다. 때를 같이 하여 이 책의 편집을 끝내고 쓴 <우리의 령혼을 울리는 감동 에세이>라는 서평이 《도라지》잡지에 발표되였는데 하늘나라로 가시는 고인에게 드리는 의미 있는 추념문으로 된 것 같아 슬픔 속에서도 저으기 위안이 되였다.
이와 같이 책을 만드는 나에게 있어 책은 가까우면서도 또한 먼 존재인 것 같다. 업무적으로 일과 관련되는 책들만 보고 만지다보니 개인적으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지 못하는데서 오는 ‘욕구불만’의 정서, 비슷한 감정이 가슴 한켠에 늘 자리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래서 욕심나는 책들이 눈에 뜨이기만 하면 수시로 사들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입을 다문 채 책장에만 꽂혀있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누군가 독서는 “살아가기에 필요한 행위가 아니라 랑만적으로 살아가기에 필요한 행위”라고 했던가, 랑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답게 살아가는”데는 불가결의 요소이리라. 굳이 랑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에게 독서는 하루 세끼 밥을 챙겨먹는 것처럼 내 삶의 일차적인 수요이고, 눈만 뜨면 몸이 먼저 원해오는 행위임에랴…
혹자는 요즘과 같은 인터넷시대에 검색만 하면 모든 정보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굳이 옛날식으로 만권서를 독파할 필요가 있는가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종이로 된 책의 존재가 자칫 아날로그적인 고물로 취급받기 십상인 세상이 온 것이다. 오래된 것, 고전적인 것들이 소중히 여겨지기보다는 새로운 것, 획기적인 것, 이색적인 것들이 점차 대세로 떠오르는 변화무쌍한 세태 속에서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제품의 무한한 가능성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스마트한 전자제품들을 거부할 정도로 고루한 편은 아니지만 가슴 한켠에는 늘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향수가 서려오르며 알알해나기도 한다
만시름을 푹 놓은 채 클래식음악을 틀어놓고 옛날처럼 오감을 총동원하여 손때를 묻혀가며 내 사랑하는 책들을 원없이 읽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대의 락오자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10년전이나 100년전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여전히 행복의 문제일 것이요,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한 것들은 물질이 아닌 정신이라는 사실, 어린시절부터 쭉 그래왔 듯이 이제 남은 인생도 책에 심취하고 책과 교감하며 살고 싶다는 꿈이 변함이 없다. 여태까지는 남의 책을 읽고 남의 책을 만들며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나의 책도 써서 서가에 꽂고 싶다는 야무진 꿈도 살짝 얹어서 말이다.
유태인들이 성경책 겉표지에 꿀을 발라놓고 아기들더러 빨아먹게 하여 책은 꿀처럼 달콤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하는 종이책에 관한 전설들도 이제 고루한 옛이야기로 남게 될 테지만 아직도 책이 우리를 키워주는 어마어마한 파워라는 것에 대해서는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펼쳐지지 않은 책은 존재할 뿐 살아있지 않다. 고운 먼지들의 품에 감싸안긴 책은 어쩌면 속이 텅 빈 직륙면체 상자에 불과하리라.”프랑스의 유명한 독서광 샤를 단치의 말이다.
아무리 스마트한 전자제품들이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잠간이라도 종이책을 촉감으로 느껴보고 책장에 밑줄을 그어가며 글을 읽는 그런 여유를 가져보고 싶다.
머지않은 앞날 종이책 읽기가 고전적인 아취로 취급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지금부터라도 책의 향기에 푹 취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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