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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수필이란?
남영도
북경이라는 이 중국어의 포위권속에서 막연하게 우리 문학에 대한 사랑을 키우던 10여년전의 어느날, 우연히 만난 한국의 《수필공원》이라는 수필전문지. 너무나 진솔하고 너무나 청자연적인 그 아름다운 수필들에 매료되여 넋을 잃고있다가 그만 사랑해버린 수필이라는 이 문체, 바로 그날부터 수필은 내 생명의 한부분으로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가 오매 불망 찾아헤매던 문학이 바로 이것이였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자기의 진솔한 마음을 솔직담백하게 고백하는 그런 아름다운 수필이 쓰고싶어졌습니다.
그날부터 수필을 읽으며 수필을 꿈꿔온 기나긴 나날들, 그 숱한 수필들을 보면서 베끼고 스크랩하던 나날들은 내 인생에 아름다운 날들로 각인되여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필공부를 했음에도 아직도 쉽게 필을 들지 못하는 나는 도대체 무언가고 늘 자문해봅니다. 혹여 수필리론서와 수필작품에 너무 빠져있은건 아닌지? 그래서인지 요지음은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곤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나에게 수필이란 고백과 같은것입니다. 가슴속에 하고픈 이야기가 서려 누군가에게 토설하지 않으면 안될 충동을 받을 때면 나는 수필을 씁니다. 그래서 수필은 무엇보다도 자기성찰과 자아관조의 문학이라는 말에 동감을 합니다.
나는 흔히 음악을 들으며 수필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악의 날개에 실리면 사색은 훨훨 날아예고 따라서 상상도 나래칩니다. 음악가들이 몇개 안되는 음악기호를 자유자재로 쓰면서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자기의 복잡하고 미묘한 정감을 조화롭게 표현하는것이 무척 부럽습니다. 나도 그렇게 때로는 자유분방하게,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게 자기의 정감을 표현할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필의 형식을 두고 한국의 수필문단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목소리가 울립니다.
요지음은 《독자가 작가의 권위를 침범할수 없는 령역에 수필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 논픽션으로서의 수필의 장점을 한껏 고양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는 말로도 리해됩니다만 한편 신변잡기식 수필을 비롯하여 개성이 결여된 수필들이 크게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수필은 자유체조와 같은 자유분방한 문체라는 말에 동감이 갑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겉보건대는 작은 그릇같지만 사실은 많은것을 자유롭게 담을수 있는 큰 그릇이 수필이라는 생각을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을 가리켜 깊이를 모를 쟝르라고 감히 말하고싶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두고 연구하고싶은, 재미있는 쟝르이기도 합니다.
이제 수필중독증에 걸렸는가 봅니다. 가끔 산다는것에 회의를 느끼다가도 수필만 생각하면 살맛 나는것을 보면 말입니다.
나름대로 수필만큼은 발언권이 있다고 자부하던 어느날, 문득 수필작품과 수필리론서에 포위되여있다고 해서 결코 좋은 수필을 쓸수 있는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문학외 타 분야의 지식을 외면한채 수필관련서들만 읽다보면 자칫 소재의 단순함을 불러오고 안계의 협소함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것입니다.
그래서 요지음에는 비전문인들이 쓴 수필을 더 읽기 좋아합니다. 그들의 글에서는 이른바 수필의 예술성에 매이지 않은채 자연스럽게 풀어나가는 재치와 자유분방함과 개성이 엿보입니다. 기교를 크게 부리지 않은듯한 자연스러운 글, 그것이 더 고명한 기교가 아닐가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서두를 보면 무슨 말을 할 것인지가 뻔한 그런 정형화된 수필은 이제 식상해지고 우리 문단도 바야흐로 파격적인 수필, 개성있는 수필을 기대하게 될 시점에 와있는것 같습니다. 과연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인지는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세상에 왔다가 수필과 함께 할수 있다는것은 그야말로 큰 축복이 아닐수 없습니다. 구태여 피천득선생님이 갈파한 《서른여섯살이후의 문학》이라는 말이 아니더래도 수필은 평생을 두고 내가 사랑하고 연구해야 할 문학이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한줄의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고 모대기는 나는 행복합니다.
20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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