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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송이 장미
“〈사랑의 미로〉를 〈백만송이 장미〉로 장식하는 그대를 〈선구자〉라 불러도 봅니다.”
내가 즐겨부르는 노래들을 단 한줄에 꿰여준 문우의 재치있는 한마디 말이 오래동안 나를 감동에 젖게 한다. 그야말로 나는 이 노래들을 떠나서는 살지 못할만큼 이 노래들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노래마다에 다 사연이 있지만 《백만송이 장미》에 깃든 사연은 국제적인연까지 동반하여 가히 이색적이라 할수 있다.
3년전, 북경음악방송국의 “서울음악실”프로에서 처음으로 이 노래를 들었을 때의 느낌은 한마디로 매료 그 자체였다. 제목도 랑만적이였지만 선률은 더구나 매혹적이였다. 심수봉의 아무도 흉내낼수 없는 그 특이한 목청과 로씨야풍을 련상케하는 선률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온 방안에 랑만의 분위기를 한껏 연출해주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사흘간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공자님의 말씀처럼 며칠간 기분이 상쾌했던것은 두말할것 없다. 하지만 당장 테프를 구할수 없는 처지라 이룰수 없는 “첫사랑”으로 일단 가슴속에 묻어두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이태전, 시동생의 결혼식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이 문제의 노래를 다시 들을수 있게 될줄이야!
가사는 물론 일본어로 되여있었고 선률은 다시 들어도 여전히 매혹적인 바로 그 선률이였다. 나는 마치 콜롬보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라도 하듯 거기가 일본사돈댁이라는것조차 잊은채 탄성을 질렀고 곧바로 그 선률속에 빠져버리고말았다. 이를 본 사돈내외분이 바쁜 일정임에도 자정이 넘도록 반복적으로 이 노래를 틀어주며 배우도록 하였고 자상한 안사돈은 3절까지나 되는 긴 가사를 베껴주고 토씨까지 달아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튿날 일본의 명승고적인 일광(日光)으로 가는 차안에서 우리 일행은 또다시 이 노래의 홍수속에 파묻길수 있었다. 일행중 운전을 맡은 바깥사돈을 내놓고 모두 녀자분들이였는데 바깥사돈은 “오늘은 꽃밭속에 앉아 운전을 하게 됐으니 이게 웬 행운이냐”고 한마디 던지여 일행을 즐겁게 해주었다.《백만송이 장미》의 선률이 흐르는 랑만의 분위기에 걸맞게 밖에서는 거짓말같이 함박눈이 쏟아지며 우리의 려행길을 장식하고있었다.
백만송이 장미를
당신에게 드립니다
당신에게 드립니다…
“백만송이 장미? 백만송이가 다 뭐야? 꽃이라고는 한송이도 받아본적이 없어!”
모처럼의 랑만의 분위기를 깨며 둘째동서가 던지는 불평 한마디.
교회당에서 화려하게 치뤄진 셋째 시동생의 결혼식을 지켜보면서 “우린 헛살았어!”를 련발하며 가뜩이나 심기 불편해있던 동서인지라 그 자리에서 동조의 말은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수긍이 가는 말이였다. 나 역시 결혼한지 10여년이 되도록 남편으로부터 꽃이라고는 한송이도 받아본적이 없었으니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꽃이며 옷이며를 사다주는 남편보다 책을 사다주는 남편이 더 좋았던것도 사실이다. 그런 지난 일을 다 잊은채 슬그머니 동서의 말에 수긍이 가는것은 나도 어쩔수 없이 랑만을 즐기는 녀자이기때문일가?
백만송이 장미! 그야말로 랑만의 대명사이다. 꽃이 몇송이인가를 떠나서 그 꽃을 받을 때의 그 느낌, 그 분위기자체에 녀자들은 목숨을 거는가보다. 그때까지만 해도 백만송이 장미를 랑만의 대명사로 알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뭔가를 받는다는 거기에 행복해하며 나는 이 노래를 불렀던것같다.
그로부터 일주일후 서울의 어느 음반코너에서 심수봉의 이 테프를 사든 나는 날아갈듯이 기뻤다. 이제는 듣고싶을 때 들을수 없어 가슴을 태울 일은 없을테니깐…
그런데 북경에 돌아와 이 노래를 다시 틀고 가사를 새겨들어보니 그 가사가 일본말가사와 많이 달라있었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할 때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백만송이 장미를 당신에게 드립니다”고 한 일본말가사와 비겨볼 때 이 가사는 좀 더 깊고 좀 더 많은것을 담고있는듯했다. 전자가 결코 이뤄질수 없는 남녀간의 사랑을 슬퍼하면서 사랑하는 녀인에게 백만송이 장미를 선물하고싶어하는 비극적주인공의 애달픈 심정을 읊조렸다면 후자는 특정된 대상이 없이 넓은 의미에서의 사랑을 담고있으면서 주관적 노력을 많이 강조하고있는듯했다.“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할 때에야 백만송이 꽃은 핀다.”, 얼마나 좋은 가사인가?
결코 가볍게 흥얼거릴 노래가 아니였다. 노래곡목을 선택할 때 대체로 가사보다 곡에 치중하는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것을 시사해주는 가사였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준다는것보다 가진다는것에 더 집착을 하는 요즈음 세태에 물젖어 타인에게 어느만큼 베풀었는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타인으로부터 어느만큼 가졌는가를 먼저 따지는 영악한 인간으로 변하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이 갈마들면서 저도모르게 자기를 성찰하는 마음가짐이 되는것이였다. 그저 랑만의 대명사쯤으로 알았던 《백만송이 장미》가 결국 이렇게 깊은것을 담은 노래인줄은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노래를 더 좋아하게 되였는지도 모른다.
역시 이 노래가 좋은 줄을 아는 남편이 어느날 자동차운전시에 듣겠다며 슬그머니 테프를 가져가는바람에 나와 이 노래의 인연은 잠시 끊어지고말았다.
중국국제방송국 조선말방송이 수도권방송을 시작하면서 요청프로가 생기자 나는 문득 이 노래 생각이 나서 선참으로 요청전화를 넣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없다는것이 아닌가? 유감스러웠지만 별수없이 다른 노래로 대체하고 한동안 이 일을 잊고있었다.
그리고 이 일을 거의 잊어갈 즈음에 국제방송국 음악담당자 주정선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러 방송국에 다 다니며 이 노래를 찾아보다가 없어서 고민중이였는데 요즘 마침 한국의 어느 단체에서 증송한 곡목중에 이 노래가 들어있으니 이번에는 소원을 풀어드리고싶다는것이였다. 세상에, 이 무슨 끈질긴 인연인가?! 한편 평범한 청취자를 위해 이처럼 최선을 다하는 그 음악담당자의 정성에 목이 메여왔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처럼 아낌없이 주기 위한 작은 실천을 착실히 해나가는 그 소행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드디어 라지오에서 내가 요청한 《백만송이 장미》의 선률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백번 들어도 매혹적인 그 선률, 그러나 이제 이 노래는 이미 원래 그 의미의 노래가 아니였다. 여러가지의 의미들을 담고있어 가슴 한구석이 잔잔한 감동으로 따뜻해났다.
세상은 베푸는 이들의 작은 실천 하나하나로 아름답게 둥글어간다.
2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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