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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이해]
'기계' ‘접속’ '배치'
들뢰즈와 가타리가《천개의 고원》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천개의 고원》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접속, 배치와 ‘기계적 욕망’
다시 한가지 예를 들면 우리 손이 운전대와 접속하면 운전하는 손이 되고 지휘봉을 잡으면 지휘하는 손이 되지만, 다른 사람의 손과 접속하면 악수하는 손이 된다. 운전사인지 지휘자인지, 아니면 친구인지 하는 것은 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의 접속과 배치에 달린 문제다. 브랜드의 소비도 이와 같다. 브랜드의 소비는 모종 욕망의 결과인데 외부와의 접속과 배치를 통해 ‘욕망’은 사치가 아닌 필요가 된다. 이것이 ‘기계적 욕망’이다.
'욕망하는 기계'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양식은 '차이생성'이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영토화' '탈영토화' '탈주'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삶, 다른 존재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되기' ‘재영토화’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生成, 形成)라고 부른다. 기실은 바로 그것이 재영토화인 것이다. 들뢰즈는 이처럼 탈주하는 기계가 순간적으로 정착하면서 재배열되는 과정을 ‘재영토화’라 이름했다. ‘재영토화’가 정착된 단계에 와서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는 법칙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천개의 고원》에 따르면, 접속-배치-영토화-탈주-탈영토화를 통해 존재가 생성되듯 브랜드는 이 과정을 거치며 계속 새로워진다. 바로 이 점에서 브랜드는 탈영토화를 반복한다. 그 브랜드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 그러니까 접속, 배치, 영토화, 탈주, 탈영토화를 찾도록 자극한다.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축구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축구는 축구장에 심판과 두 개 팀의 선수가 모여 공을 대방의 골문에 차 넣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축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축구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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