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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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송화강》잡지 시문학상 수상작 읽기 댓글:  조회:49  추천:0  2024-11-13
《송화강》잡지 시문학상 수상작 읽기   일전 할빈에서 열린 《송화강》잡지 시문학상(한춘문학상, 상상문학상)에 강어금, 방순애가 수상의 영예를 지녔다.   《송화강》이 흑룡강성의 유일한 조선어 순문학잡지로서 60여년간 조선족 문단의 풍향계로 자리잡고 흑룡강 나아가서 전국의 조선족 문인 양성에 큰 기여를 해왔다는 점을 착안할 때 이번 시상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모든 생각을 략하고, 수상작을 읽어본다---   “상상문학상”가작상 수상작   생의 걸음 ▢방순애   구름의 책 번져진다 물의 종잇장에 쓰여진 바람 글씨 봄이 펼쳐놓은 추운 겨울 이야기 가지의 한숨이 새의 비늘 긁는다   바람 부는 날 구멍 난 모래자루는 육신의 껍질 한겹 한겹 벗어진다 까슬까슬하게 그을린 끝자락 삶 어둠속에 소설 쓴 고집불통 작가   빨간 침묵은 암반 타고 내려온다 자형나무 시간 틈에서 머리 든다 등허리에 띤 추억의 주머니 혈연의 푸른 띠 두른다     다음 “한춘문학상”대상 수상작 전문과 평어를 읽어본다---   바다의 농도 ▢강어금(강시나)   기지개 펴는 물결 위에 찬란한 현들이 꼬리치고   이슬이 돌아눕는 새벽 초리에는 별들의 오줌자리 깃 털고 솟아난다   게임하던 숲의 세력들은 바람의 삿대질에 휘말려 싯누런 열변 토해내고   우주를 떠멘 수레는 거친 투우사들의 함성 메어다가 초속으로 퇴색하는 사투리에 하늘 옷 갈아입힌다     평어: 23년도 작품으로서 새벽의 바다를 시적대상으로 하여 자연의 생명력을 은유와 상징으로 다각적으로 표현하였다. 시어의 선택이 기발하며 사물을 관조하고 그것을 이미지화하여 동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이 훌륭하다.   첫 련에서는 파도를 ‘기지개 편다, 꼬리치다’ 두 단어로 줄줄이 밀려와 철썩거리는 물결을 동사의 변형으로 표현하였다. 정지용의 시 ‘바다’에서는 “바다는 뿔뿔이 / 달아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 같이/ 재재 발렸다/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라고 하였다.   이 시의 ‘꼬리친다’는 단어가 표현은 다르지만 꼬리로 형상한 것은 시인과 같은 감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련에서는 시적 상관물인 ‘이슬’, ‘새벽 초리’ ‘별들의 오줌자리’ 등 파편적인 언어를 강제 조합함으로써 거기에 걸맞게 변형시킨 ‘돌아눕다’, ‘깃을 털다’ 동사로 바다우의 새벽시간을 동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셋째 련에 가서는 상징과 은유의 수법으로 ‘게임하던 숲의 세력이/ 바람의 삿대질에 휘말려/ 싯누런 열변을 토해내고 ‘라고 하면서 어떤 분위기를 특정지어 주고 있다. 여기서 ‘숲의 세력’은 뭍을 규정지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융(Jung, Carl Gustav)에 의하면 “무성한 나무가 있는 령역”은 리성적 사고를 위협하는 무의식의 위기를 상징한다. ‘바람의 삿대질’은 바람은 능동적이고 격동하는 상태의 대기 운동으로 우주변화의 1차적 요소로 력동적이다. 이 시에서 바람은 변화를 강요하는 행위로 ‘게임’과 이미지가 엇물리고 있으며 ‘삿대질’은 쌍관어로 작용하고 있다. ‘싯누런 열변’은 바닷가 사장에 밀려왔다 밀려가는 미세기를 가지고 뭍과 물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설정하여 그 결과를 “싯누런 열변을 토하는 것’으로 파도소리를 시각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대개 ‘싯누런’ 색상은 사물의 분산과정을 시각화하여 상징한다.   마감 련에서는 해 솟는 바다의 장쾌한 정경을 과장과 대용을 써서 표현하였는바 ‘우주를 떠멘 수레(태양)’는 모양에 의한 대용이며 ‘투우사들의 함성(파도)’은 소리양상을 대용한 것이며 ‘초속으로 퇴색하는 사투리’는 첫 련의 ‘찬란한 현들이 꼬리치는’ 것에 호응하여 아침해살에 어리광치며 부서지며 사라지는 갈피갈피 물결을 ‘사투리’로 대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바다는 하늘빛에 따라 색갈이 달라진다. 여기서 사투리는 변화가 수요되는 상태인데 태양이 떠오르면서 이런 변화를 ‘하늘 옷 ‘으로 갈아입히고 있다면서 시를 마감하고 있다.   다시 모두어 말하면 이 시는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구조에 현대시의 이미지 수법을 활용하여 력동적인 아침의 바다를 시인의 독특한 구사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인에게 기대의 말씀을 올린다면 시에서 좀더 자신의 개성이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다. 관조적이고 객관적인 시를 쓴다고 해도 이미지시의 창작 역시 독특한 자기만의 개성을 점차 갖추어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는 특히 시를 씀에 있어서 독자의 수용성도 생각해 보아야 하며 의식적으로 중화민족운명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하면서 더 밝고, 긍정적인 작품을 많이 창작하여야 한다. 2024. 10. 16. 상해삼달학원 김성우  
239    후생례찬 / 박문희 댓글:  조회:434  추천:0  2024-09-25
후생례찬 ▢박문희   쉴드머신[주]의 아득한 선배 두더지님 강연차비 마쳤다 소소리 높은 무대계단 톺는다   암초에 막힌 수풀너머에서 아주 오래된 묵은 바람 한줄기 달려온다 젊은 여우님 허리 닮은 아름다운 곡선은 어디서 왔을가? 동서양이 반죽된 면상에 선글라스 얼굴보다 깨끗한 호주머니에는 새파란 프로젝트가 골똑하다 청모자 하나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린다 홱 날린다 환희 자욱한 어깨너머로 씨우우우우우웅!   방울새님의 까마득 먼 후배 미래드론 환한 미소 만발한 작은 가슴에 6G엔진 돌리며 속도 처진 번개머리로 후닥닥 짓쳐나가는 중 삐딱한 잔등에는 출처 수상한 서캐 한 마리 딱 붙어간다   맑은 정신 깡그리 몰수한 덕분이랄가 무정세월 한번 곤두박질로 십만팔천리 그 늘어뜨린 그림자에 오글오글 말라붙은 옹이 잉걸불로 타올라 광야의 껍질 빨갛게 도배한다 [주]쉴드머신: 터널 굴착장비의 일종. 국산장비가 세계 으뜸이라고 함.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문고(13)    
238    몽유도원 (외 2수) 댓글:  조회:292  추천:0  2024-07-24
몽유도원 (외 2수)                                          ▢박문희   아는 듯싶어 으시대는데 알고 보니 모르는 중 깨어있는 듯싶어 방심인데 깨고 보니 통잠중이라   순간 삶일진대 어이 완벽하게 살아낼꼬 바닥 드러낸 봇도랑 가치의 고민, 그 미련과 환상   돌각담 옆구리에 늘어진 배꼽 휘파람 한 마디 고파라 그 고픔 식욕으로 바꾸어 하늘을 뚝딱 베어마신다   머리맡에 구겨져 있었나? 땡볕가린 가랑잎에 되살아난 시간 잘려나간 비너스 팔 베고 누워 먹은 하늘 새김질 하네   비상의 방정식   조약돌에 날개 피워낼 적 겨드랑이 통증에 호흡이 마비됐지만 그럼에도 보리싹눈 틔워 몰고 다니며 더는 들을 일 없는 노래가락 접어 책장에 끼우고 늦가을 빨간 수면에 저녁놀 주어 담는 여유 즐겼다고   다리 밑은 헛디디기 좋은 낭떠러지 되돌아서기엔 늦었지만 내리 꼰짐이 시작되자 놀랍게 풍화된 광경의 짭짤함에 주야장천 흥분했다고 거친 하강 와중에도 옆집 탈출한 슬픔과 비애 눈에 새겨 넣느라 땀동이 쏟았다고   저 길녘 사시나무 이파리들 소동 벌리며 요란 떨자 온 동네가 술렁 구멍 뚫린 간밤 밑바닥 치며 한없이 추락하던 찰나 근사한 길몽 무수히 꾸었어도 새벽 몽둥이 한방에 놀라 깨니 이상야릇한 망각의 풀피리소리밖에 남은 게 없더라고   하지만 섬뜩한 전율과 동시에 조약돌 가라앉기에 반기 들며 느닷없이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고 물과 바람 넘어 육신과 혼백 넘어 보풀 인 해와 달 숨소리 넘어 돌밭 꿈 통절한 감탄부 넘어 마침내 겨드랑이에 파릇파릇 날개 피워내더라고   땅거미 질 무렵   기울어진 호수위를 저문 바람이 미끄러진다 천지신명이 덩치를 드러내면서 드살 센 바위에 이끼를 재우고 있다   동네 들머리에서 바라보니 장승들 어깨 겯고 늘어선 공간 절름거리는 다리로 애수의 기슭 떠나며 서까래 아래 기억 꺼내 달군다   짓푸른 상념 아물아물 먼 길 삼키고 놓친 무지개 아쉬워 하늘도 목메어 흐느끼는데 뜨거운 피돌기로 하루 사냥 거두며 잠기 가신 세월잔등 두드려준다   시간의 은사슬 치렁대는 그리움 반쯤 빼앗긴 생의 계절마다 옷 갈아입고 쓰르라미 우는 소리 작두 여물 써는 소리 한데 비벼 거나히 말아 피운다  《詩夢文學》 2024년 통권 제8호
237    변주의 미학 댓글:  조회:450  추천:0  2024-02-29
변주의 미학   ----강동한 시 단평    ▢박문희      한수의 시에 대한 단평에 이란 거창한 제목을 단다는 것이 과연 적절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모종의 그럴만한 리유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여 그대로 쓰기로 했다.   '변주'는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 중 제하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네이버사전에서는 '변주'를 '색갈이나 모양 또는 내용을 다르게 바꿈'으로 해석, 이를테면 한복들이 현대에 시류를 타 변화하는 것도 '변주'(중문으로 된 《천개의 고원》에서는 '流變'으로 번역되였음)로 표현한다. 한편 동음어인 음악의 '변주(變奏)'로도 통한다. 리듬이나 선률 또는 화성 등을 여러 가지로 바꾸고 꾸며서 연주함을 일컫는 말이다.   '변주'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말을 조금 따다 음미해보자.   "...변주의 련속체를 만듦으로써, 그리고 상수들을 조이고 변주들을 풀어주도록 변수들을 조작함으로써, 언어가 말을 더듬도록 하라. 또는 언어가 '삐약삐약 울게' 하라..., 언어 전체에, 심지어 문어에도 텐서(tensor/张量)들을 설치하라. 그리고 거기서 웨침, 아우성, 음높이, 지속, 음색, 억양, 강렬함을 끌어내라....바꿔 말하기에 대한 취향..." (《천개의 고원》중 , 201페이지)   '변주리론'에 대한 나의 리해를 한마디로 개괄하면 시어를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옷을 현대시류를 타 변화시키듯 색갈이나 모양 또는 내용을 다양하게 바꾸고 음악에서 리듬이나 선률 또는 화성 등을 여러 가지로 바꾸고 꾸며서 연주하듯 바꿔주면서 원래의 틀 안에서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 강동한 시인의 시 한수를 옮겨온다.   만경창파 건너온 너 나 자취 더듬어 몇 만리   떨리는 손으로 옷 벗겼을 제 꼬박꼬박 수놓은 터밭의 화원 하얗게 뜬 초가의 록비 해진 젖살 달래주는 토장의 손길   오랜 보뚝 터져 녹아내린 눈가의 고드름 얼음의 빈구석에서 울고 있는 개바자의 해바라기꽃   언젠간 단비 되여 말라 찢긴 가슴 적셔 주리라   ----시 전문   4개 련에 12행으로 씌여진 시로서 제목은 다.   누구나를 막론하고 우리는 읽고자 하는 시를 접할 때 우선 시 제목부터 보게 된다. 제목을 봐야 읽고자 하는 시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시문을 여는 열쇠이자 시를 리해하는 지름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목은 또한 각 련과 행을 련결하는 하이퍼링크 기능의 주요담당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드시 전부의 담당자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제목-행-련’을 련결하는 구도를 갖는 링크기능은 각 련, 각 행, 지어 모든 시어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시 읽기와 시 쓰기에서 링크기능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시제가 이니 내용도 편지와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칼로 자르듯 철저한 단절, 도주와 탈령토를 운운하면서 그것을 련결과는 아주 무관하게 취급하는 것을 하이퍼시의 한 개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일도 있지만, 실상 분리탈주와 접속련결 및 탈영토와 재령토의 변증관계를 외면하고 도주, 분리와 단절만 강조하는 사고방법은 재고되여야 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제목과 내용의 관계처리도 그렇지만 련과 련, 행과 행과의 관계처리도 마찬가지이다.   만경창파 건너온 너 나 자취 더듬어 몇만리   시 의 첫 련이다. 시 제목이 이므로 첫 행의 '너'를 편지로 상정해볼 수 있다. 만경창파 수만리 먼 이역 땅에서 날아온 편지. 그러나 제목이 라 해서 내용이 반드시 편지라는 보장은 없다. 편지가 단지 상징물에 불과해 그것이 상징하는 대상이 다른 사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례컨대 막언의 장편소설 제목이 《풍유비둔(丰乳肥臀)》이라 해서 그 내용이 풍만한 가슴에 큼직한 엉덩이를 쓴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제2련:   떨리는 손으로 옷 벗겼을 제 꼬박꼬박 수놓은 터밭의 화원 하얗게 뜬 초가의 록비 해진 젖살 달래주는 토장의 손길   이 련은 '떨리는 손으로 옷 벗겼을 제'를 첫 행으로 시작된다.   의인화된 2인칭 '너'의 '옷'을 떨리는 손으로 벗기는 이미지는 경우에 따라서는 모종의 전률감을 줄 수 있는 시행이다. 여기서 '옷'은 편지봉투의 상징물이다. 하지만 '다르게 바뀐 내용물'로서의 '옷'은 필경 변주의 결과이며, 편지란 령토로부터의 탈주 혹은 탈령토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조금 긴대로 새겨볼 필요가 있다.   "...내용과 표현은 서로 결합되고 련계되고 서로 촉진되기도 하고 반대로 재령토화하며 안정화되기도 한다. 우리가 상황이나 변수라고 부르는 것들도 사실은 탈령토화의 정도들 자체이다. 한편으로 내용의 변수가 있는데 그것은 몸체의 혼합체 또는 몸체의 결집체 안에 있는 비률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표현의 변수가 있는데 그것은 언표행위 내부에 있는 요소들이다... 요컨대 표현은 내용을 발견하거나 표상함으로써 내용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이 서로 소통하며 끼여들고 작용하는 것은 내용과 형식의 상대적 탈령토화의 량자들의 결합 때문이다." (《천개의 고원》 중 171페이지)   시 제목 와 시 첫련의 '너'와 2련 첫행의 '옷'을 내용과 표현을 언급한 들뢰즈-가타리의 말에 련계시켜 보면 '편지'는 내용에 속하고 '너'와 '옷'은 표현에 속한다. 내용과 표현은 서로 결합되고 련계되고 서로 촉진되기도 하고 반대로 재령토화하며 안정화되기도 한다. 그것은 부단히 진행되는 변주의 과정이기도 하다.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이 서로 소통하며 끼여들고 작용하면서 '편지'는 령토로부터 탈령토, 재령토로의 과정을 밟는데 그것은 내용과 형식이 상대적으로 탈령토화한 량자들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꼬박꼬박 수놓은 터밭의 화원 하얗게 뜬 초가의 록비 해진 젖살 달래주는 토장의 손길   이것은 2련 첫행 뒤에 오는 3행의 시구다.   '너'의 '옷'을 벗긴 후에 나타난 경상은 눈처럼 희디흰 피부가 아니라 생뚱맞은 '수놓은 화원', '하얗게 뜬 녹비'와 '토장의 손길'이다. 이런 시어들의 조합은 일상론리에는 맞지 않으나 시적 론리에는 맞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행 '해진 젖살을 달래주는 익은 토장의 손길'은 '떨리는 손'에 대한 대응이면서 또한 이질적 언어의 무단 접속(례컨대 '해진 젖살', '토장의 손길')의 내포도 가진다. 이 시구들을 몇 번 음미해 보노라면 어머니의 손맛, 고향의 향기를 련상케 하는 전통 삶에 대한 회고의 의미도 지니지만 표현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다음 제3련을 보자.   오랜 보뚝 터져 녹아내린 눈가의 고드름 얼음의 빈구석에서 울고 있는 개바자의 해바라기꽃   느닷없이 오랜 보뚝이 터지고 눈가에 매달린 고드름이 녹아내리며 또 예고 없이 개바자의 해바라기꽃이 얼음의 빈구석에서 울어재낀다. 이 역시 변주이다. '리듬이나 선률 또는 화성 등을 여러 가지로 바꾸고 꾸며서 연주하는 변주(變奏)'이기도 하고 '색갈이나 모양 또는 내용을 다르게 바꾸'는 변주(流變)이기도 하다. 여기서 '오랜 보뚝' 과 '녹아내린 고드름'은 눈물샘과 눈물의 변주이며 '해바라기꽃'은 '나'의 화신이자 변주이다.   이제 마지막 련을 보자.   언젠간 단비 되여 말라 찢긴 가슴 적셔 주리라   여기서 '나'는 '해바라기꽃'에서 탈주하여 '단비'로 '재령토화' 된다. 마른 '가슴'을 적신다는 대목에서 그 '가슴'이 상정하는 의미는 상당히 다양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읽는 이들이 스스로 읽어내야 할 터이다.   이제 시 전문을 표현대상의 측면에서 귀납해 보자.   1련: 너, 나 2련: 화원, 록비, 손길 3련: 보뚝, 고드름, 해바라기꽃 4련: 단비, 가슴   보다싶이 각 련의 표현대상들은 분명 자립성과 독립성을 가지며 그것들 서로간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례컨대 2련의 화원, 녹비, 손길과 3련의 보뚝, 고드름, 해바라기꽃은 각 련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서로간에 아무런 관계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란 제목의 링크기능에 의해 우리는 편지와 각 련이 분명 련결되고 있음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다. 오랜 보뚝의 터짐과 고드름의 녹아내림은 쏟아지는 눈물과 감정의 폭포일 터이고 얼음의 빈구석에서 울어 예는 해바라기꽃은 만경창파 수만리 이국타향에서 정든 고향을 그리는 화자의 화신일 터이다. 각 련과 행들에 새로 발생하는 이미지들은 변주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러한 변주들이 시 전반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을 이라 한 리유라면 리유겠다.   이상에서 우리는 시 를 한번 훑어보았다. 시 전반에 걸쳐 우리는 시어의 의미화에 대한 강동한 시인의 추구를 발견할 수 있으며 아울러 이미지의 활발한 변주와 확장도 맛보게 된다. '떨리는 손, 벗기는 옷, 해진 젖살, 울고 있는 해바라기꽃'과 같은 이미지의 변주와 확장된 이미지는 읽는 이의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하는 힘이 있다. 시어의 구사를 봐도 반 마디 설교도 없이 진지한 표현만 있을 뿐이며 내용은 진지하고 깊은데 반해 표현은 감각적이고 유연하다.   이런 점이 자못 중요하다고 본다. 이미지의 활발한 변주와 확장 및 시어의 의미화에 대한 의도적인 추구를 소홀이 한다면 우리의 시는 자칫 무의미한 언어유희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시어를 구사함에 있어서 유미주의적 감각을 충분히 살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시는 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최대한 살려야 할 것이다. 상상력의 공간을 충분히 확장함과 동시에 감각적 미의식을 살리는 것은 우리 시인들에게 있어 필수과목이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2023.5.28.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창작세미나에서)
236    방미화 시집 《나비의 사막》을 읽고 댓글:  조회:455  추천:0  2024-02-29
방미화 시집 《나비의 사막》을 읽고   □ 박문희     방미화시집 독후소감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 을 읽어봅니다.   달팽이 입맞춤 하얀 심연 변주곡 울리고 나비가 드리운 사막의 날개 불타는 오아시스 되여 날아오른다 거대한 새싹이여 하늘을 보라 반짝이던 마지막 별 해 뜨는 시간 알린다   거위 눈물 밀물의 파란 아픔 다독이고 사막 흐느낌 갇혀버린 샘물 웨침소리 날린다 하얀 먼지 순간이여 순간이 되어버린 꽃망울 빨간 몸짓이여 유리벽 따라 흘러내리며 옥에 티 되어 반짝거리는 반쪽 잎새여   이상 시 전문입니다.   모두 2련 15행의 짧은 시인데, 사막의 날개, 불타는 오아시스, 거대한 새싹, 마지막 별, 반쪽 잎새 등 본 이미지가 15개 있고, 그 외 밀물, 유리벽, 옥에 티 등 본 이미지를 규정해주는 보조적 이미지도 여러 개 있습니다.   이 시의 언어구성을 보면, 하얀 심연 변주곡, 밀물의 파란 아픔, 갇혀버린 샘물 웨침소리, 순간이 되어버린 꽃망울 빨간 몸짓, 옥에 티 되어 반짝거리는 반쪽 잎새 등 이미지덩어리들이 자유자재로 ‘야합’을 하고 있습니다. 행과 행간을 둘러보아도 인과관계나 유기적 관련이 전혀 없는 사물들(나비, 거위, 밀물, 사막, 먼지, 유리벽, 샘물 등)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사라집니다.   이 시의 중심이미지는 제목에서 보다 싶이 ‘나비의 사막’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비, 새싹, 오아시스 등 이미지는 상징성을 띈 시어들입니다. ‘오아시스’란 사막에서 희귀하게 발견할 수 있는 물웅덩이를 지칭하는데, 사막에서의 죽을 맛인 갈증 속에서 휴식을 주는 존재인지라 비유적으로 안식처라는 의미로 통하겠지요.   또 ‘나비’를 보면, 흔히 나비는 인간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하죠. 여름 한 철 아름다운 날개짓을 하며 유유히 날아다니는 시각적 아름다움은 예술적 령감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하겠죠. 하지만 나비가 오랜 시간 애벌레 상태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디다가 부화하는 모습은 시각적인 아름다움 이상의 의미를 띠기도 하죠. 그래서 나비는 현재까지도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뒤에 오는 변화와 생명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가 봅니다.   나비의 상징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를 이 시 전문에 대한 이해의 열쇠로 적용한다 할 때 우리는 나비가 드리운 ‘사막의 날개’를 통해 ‘불타는 오아시스’와 하늘로 솟는 ‘거대한 새싹’을 보게 되고 ‘사막의 흐느낌’과 ‘샘물의 웨침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전혀 뜻밖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시 95수로 묶여진 시집 전체를 단지 시어구사 측면에서 간단히 들여다본다면, 이 시집엔 동물, 식물과 기타 자연물들이 무수히 올라있는데요, 기중에서도 무지 흥미로운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물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돌뼈, 바람빛, 물바위, 바위눈, 모래쌀, 서리가슴, 바람심장, 천둥화살, 세월바퀴, 우주점액, 태양고막, 폭포수염, 념불비늘, 시간고름, 망각카텐, 계곡목덜미, 우주귀구멍, 우주휘파람, 려명면사포, 밀물생식기, 고통조미료, 모래껍데기, 시간찌꺼기 등 아무튼 저그만치 무려 70여개가 됩니다.   전부 이질적 언어들의 파격적 합성입니다. 이런 언어구성방법을 우리는 이미지 창조의 중요수단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 시어의 구사법은 방미화 시집에서는 비단 단어구성에서 뿐 아니라 시의 련과 행에서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례컨대----   ‘포도넝쿨 넘어가는 파아란 행복소리’ (봄빛) ‘닫힌 길 여는 열쇠는/순간 잡는 몸의 움직임/그 기억 썩은 기둥 무너뜨린다’ (달) ‘공기가 부서지고/바람이 쪼각난다/우리의 분신이 잠에서 깨어나는 날/우리는 우리를 넘어서고 있다’ (집행자) ‘기쁨액즙, 고통조미료 넣어/욕망료리로 반죽된 기나긴 동면/삶과 죽음이 똑같은 시간 려행’ (물의 숨소리)   등등 아주 많습니다.   시어들의 자유로운 결합은 종종 아주 멋진 싯구를 낳기도 합니다.   례를 들면 ‘진주성찬에 굶주린 것들/백색 태양줄기 번뜩이고/왕관 쓴 노예들 서서히 움직인다’ (경계를 넘어)와 같은 것이 바로 그겁니다.   시어구사에서의 이와 같은 자유로운 합성은 시집 전체에 관통되여 있는데, 가령 기존 관념으로부터의 철저한 탈출과 해탈, 기성 틀에 얽매인, 이른 바의 합리적 사유로부터의 해방이 없다면 이런 과감한 결합, 합성은 감히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시창작의 초기입문단계에 있어서 이점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최룡관시인의 많은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완전 신출햇내기로부터 불과 몇년 안 되는 시간에 시단에 당당히 진출하여 시집도 내고 상도 받아안을 수 있는지를 보면 당연히 답이 나올 것입니다. 방미화시인이 근래 륙속 이룩한 일련의 시작성과들 역시 좋은 례로 손색이 없습니다.   시집 에서 보여주다 싶이 방미화시인은 하이퍼시 창작실천과 리좀이론 학습을 하면서 기존관념의 해체, 단절과 재구성, 이질적 이미지들의 자유로운 결합과 시적 언어의 자유분방한 구사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데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았고 색다른 이미지 창조에서도 남다른 자질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토대위에서 방미화시인이 금후 시창작과 시론탐구에서 한층 높은 차원으로 정진하며 특히 그만의 독특하고 참신한 이미지 창조에서 보다 큰 성과를 올릴 것을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2022.7.29.   (연변대학 인문사회과학학원 주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주최로 진행된 방미화 시집 《나비의 사막》 출간식에서)  
235    백여년만에 돌아온 출해구 댓글:  조회:715  추천:0  2023-05-16
백여년만에 돌아온 출해구 --우리 성, 우리 주의 큰 경사   국가 해관총서는 최근 공문을 내려 6월 1일부터 흑룡강, 길림 두 성의 화물을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통해 동남연해로 운송할 수 있으며 이는 "국내무역"에 속하므로 수출입관세를 징수하지 않는다고 통고했다. 일본해로의 출해구를 다시 얻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길림, 흑룡강 두 성은 비록 토지가 비옥하고 자원이 풍요롭지만 출해구가 없어 장기간 료녕성 대련항을 거쳐 해운화물을 중계해 오다나니 운송원가 문제로 줄곧 경제발전이 제약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滿淸정부가 짜리로씨야와 굴욕적인 "북경조약"을 체결한 결과 원래 길림성에 속했던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가 그쪽으로 넘어가게 된 100여년 전 굴욕적인 력사는 세상이 익히 아는 바다.   쏘련 해체 후 로씨야는 극동개발문제에서 중국과의 협력에 장기간 소극적이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방체계 진입을 꿈꾸며 시종 그것에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로씨야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충돌로 서방진입 꿈이 철저히 깨졌다. 서방 전체의 경제제재와 군사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로씨야는 부득불 중국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로씨야 극동지역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항 사용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로씨야가 전향적인 자태를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우리에게 출해구가 열리게 됐다. 륙로를 통한 운수거리가 크게 단축(海運의 원가는 陸運의 몇 분의 1에 불과하다)되고 따라서 경제발전이 큰 힘을 받게 된 것이다.   일이 여기까지 온데는 미국의 공로가 크다고 봐야 한다. 가령 랭전 종식 후 미국이 로씨야를 지금처럼 못살게 굴지 않고 반대로 아주 살뜰하게 품어주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를 상상해보라. 금방 그 답이 나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국님들에게 적어도 한톤짜리 동질메달을 목에 걸어주어야 할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출해구가 생겼으니 전반 극동지역도 조만간 느슨해질 것이다.  
234    【民調詩】풀벌레 향기 (외 6편) 댓글:  조회:593  추천:0  2023-04-02
【民調詩】   풀벌레 향기 (외 6편)   ▢박문희   아늑한 뒤안길에 풀벌레 울면 잦아진 향내 빨갛게 물든다.   보랏빛 참새꿈에 샘물 뿌리면 작은 날개 피어 하늘을 덮는다.     희망봉   미래세 첫새벽에 불끈 떠오른 애젊은 동자별!     폭군   이 세상 가는 세월 말없는 폭군 뜨는 달 반갑고 지는 해 섭섭해.     세상 구경   도착과 출발을 거듭하면 세상 떠도는 하늘 바다 땅 닫히고 열리지.   하늘을 날고날면 종달이와 싱갱이질 은하수꿈엔 목욕도 한다네.   바다에 잠수하면 돌고래 타고 용왕님 뵈러가.   땅속에 스며들면 두더지 타고 땅불 구경 나서.   어허라 상사디야 지화자 좋다 얼씨구 절씨구 어절씨구씨구!   덜기의 철학   오밤중 비바람에 말려가 버린 부질없는 신 맘   맘덜길 거듭하니 앓던 이 뺀 듯 시원섭섭해   늴 늴 늴리리야.     회포   옛샘터 가마솥에 씨암탉 끓네. 백년 옛친구 범잡던 이야기.     신생   지우개 머릿속을 기어다니며 권태를 지우네.     【시평】 중국교포시인 박문희씨가 민조시 7편을 보내왔다. 7편 다 장단 · 가락을 지키고 있고, 수준이 고르다. 품격 또한 높다. 민조시 '풀벌레 향기' 외 6편 모두 수준으로 보면 합격품이다. '풀벌레 울면 / 잦아진 향내 / 빨갛게 물든다.'는 청각과 후각과 시각을 잘 활용해 짜낸 작품은 읽는 이로 하여금 묘한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라 둘째 수에는 '보랏빛 참새꿈에 / 샘물 뿌리면 / 작은 날개 피어 / 하늘을 덮는다.'는 표현이 그만이 아닌가...   (《自由文學》 2020년 겨울호)
233    룡두레우물 댓글:  조회:999  추천:0  2022-10-04
  룡두레우물     노란 수수깡에 팽글거리던 바람개비 옹알옹알 소싯적 허구 많은 사연 띄우고 이른 봄 피어난 연분홍 천지꽃 살진 록음綠蔭으로 달려와 삼복날 땡볕 언저리에 파랗게 안기네   산들바람 드나드는 동구밖에서 낯선 길손 위한 리정표 댕기 날리며 색동별 가득 박은 칠색무지개 맞아주네 수놓이 뜨개실에 올올이 피여난 종달이들 샘터발치 수양버들 아래 모였네 볼우물 살짝 패인 버들이파리 오구작작 귀맛 좋은 꿀 지저귐 까무룩 잊혀진 풍진세월 곤한 다리 하얀 구름 핀 하늘에 편히 뻗었네   시간덜미 잡아 큰 대자로 동여매고 샘우물에 덧앉은 세월이끼 걷어냈네 달그림자 잦아들어 시원한 하늘 두레박으로 푹 떠 마시네   별안간 금빛 왕방울 목에 두르고 눈부신 룡 한마리 고패 치며 날아오르네     《연변문학》2022년 제9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0돌 경축 특집  
232    신 념 댓글:  조회:693  추천:0  2022-07-24
  신 념   광풍 속에서도 관솔불은 날개 펄럭이며 나부낀다. 흔들리지 않는 몸가짐 신념 치켜든 앙가슴 보이지 않는 깃발 거침없는 질주 설마 바닷길 폭우가 송진 내음 피해간 것일까?   뼈마디 넋이 내민 주먹 뻔뻔스러운 파도 면상 강타할 때 느닷없이 솟아오른 암초 퍼렇게 멍든 팔뚝 감싸 안으며 무섭게 오열한다.   실개천 아지랑이 음해한 미친바람 내력 아는 관솔불 바람주소 품속에 찔러 넣고 이제 갈 길 시작되는 벼랑 가에 홀로 서서 소나무 옹이와 작별하고 있다.  
231    겨울바람 댓글:  조회:559  추천:0  2022-07-24
  겨울바람   번개 싹틔워 잎 뽑아내는 사이 세상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어둠에 짓눌린 구름 성화에 땅 위 여름풀들 숨 죽이지만 눈보라 앙칼진 노래 부르며 달려올 때 대지는 환희로 전율한다.   천년 고목 틈바구니에 숨어 버린 시동계획 가물가물한 꼬리 태초에 멈춰 버린 행진의 그림자와 시위 떠난 화살의 망설임 그리고 들불에 얼어 버린 꿈의 귀와 가람의 코는 임해설원 가슴 위를 달리는 뭇새들 환영(幻影) 뒤에 숨어 바야흐로 허공에서 너울너울 춤추고 있다.   이제 거친 광야 짓밟으며 달려온 겨울바람은 칼벼랑에 혼신 기대인 나무뿌리가 되어 쉬고 싶다.        
230    하이퍼시의 동음 댓글:  조회:548  추천:0  2022-07-24
  하이퍼시의 동음   나무 바위 바람 번개 휘파람 불며 다니는 길에 풀꽃 흐벅진 무지개 길 새로이 부설하는 거창한 작업 양자(量子) 껍질 부수고 튀어 우주 꼬리에 달려 있는 단추 6차원 공간 구멍에 꿰맞추고 블랙홀에 빠진 해의 귀 얼구어 남극의 온난화 먹어치운다. 공간과 시간 소리와 날빛 상존(常存)이란 씨실과 부재(不在)란 날실로 다시 짠다. 날개와 발 마찰음이 창조한 노래 난바다 가장 깊은 곳 날아옐 때 파랑새 플라스마* 귀에 걸고 천구(天球)의 음악 듣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플라스마(plasma)는 물질의 상태로 볼 때 고체, 액체, 기체에 이은 제4의 상태.
229    바람의 비밀 댓글:  조회:531  추천:0  2022-07-24
바람의 비밀   웅숭깊은 바다 속을 날던 날 바다 꼬리에서 토네이도에 휘말려 별 모서리에 이마를 찧었다. 조개의 깊은 젖꼭지에 먹혀 껍질 속에서 소화되는 중 시커먼 우주에 배설물로 던져져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주고혼이 되었을 때 속도 팔에 깎인 빛 그림자만이 유일한 지음(知音)으로 남아 있었다.   구름 뼈가 산화되어 증발하기 직전까지 투명한 구름 위에 소금이 쉬도록 머물러 길손들 신세 진 사실은 두개골에 생생한 영상으로 입력돼 있다.   하늘 바다 야합하는 수평선과 하늘땅 흘레붙는 지평선 심지로 꼬아 바다 밑 잠든 화산의 배꼽에 심는다. 생명 내쏘는 고래 등으로 쏜살같이 내리꽂히는 성난 날빛의 허리를 자르며 갈매기 편대가 해적선의 늑골과 청화 자기의 비밀을 바람의 얼굴에 붙여 놓는다.      
228    [시] 황금의 두만강삼각주 댓글:  조회:1001  추천:0  2021-12-13
황금의 두만강삼각주 □ 박문희     장백의 하늘 아래 서기가 비꼈는가 폭포수 룡이 되여 날아내리네 가람이 룡이 되여 날아오르네   설레이는 향풍날개 노젓는 소리 천지가에 활짝 돋는 새파란 아침 군함산 건너 선경대 악단 파도치는 반주 천불지산 어깨 넘어 일광산 허리 휘휘 돌아 버들방천에 내려 사방 둘러보네 파랗고 빨간 융단 얼기설기 펼쳐지고 별무리 내려앉아 우쩍우쩍 자라네   새날 밝은 진달래산천 영렬들 혼백 서린 신전(神殿)에 하늘 우러러 두 팔 벌린 천년바위 신도시 풍경 가꾸는 꽃동네 뭇가슴에 들불 지피네   지저귀는 록음방초 거느리고 가람꼬리에 사뿐 내려앉은 봉황새 호함진 알 품은 동가슴 열어 눈부신 노란 자위 선보이네 젊은 별들 발끝에 뻗은 길목 노래가락 뽑는 화초군단과 춤추는 상모 환상의 짝궁 양달진 봄언덕 축복의 샴페인 터뜨리네   벼랑이 가로막아도 세월은 흐르며 눈부신 꽃노을 피워올리리.   《연변일보》해란강 부간  장백에서 방천까지 우리 시가 간다(6)     2021.11.10
227    가을련가 —숭선 인상 댓글:  조회:987  추천:0  2021-12-05
가을련가 —숭선 인상   □ 박문희     단풍이 익는 계절 마음도 익네   뼈대 튼실한 군함 푸른 갑옷 벗고 칠색 꽃바구니 두른 유람선으로 거듭났네   노루 사슴 토끼 다람쥐 동승하야 만수국 샐비어 빨갛게 타는 뼈와 피 바꾸고 오색구름으로 피여난 저 맑은 하늘에 꽃배를 띄워라   눈뿌리 시린 갑판 우 꿈틀대는 저 금물결 타오르는 벼랑 아래론 천길 폭포수 구천가에 아스라니 날아내리는데 갑판 아래 신난 계곡 우 얼기설기 얽힌 거미줄엔 채운이 드리워 눈부시고 이곳 저곳에 올망졸망 솟아있는 산더기들을 꽁꽁 밟아 납작하게 평지 만들고 호미로 휘익 금 그어 뺀 할아버지 그림자 비껴있는 저 강줄기 물갈기 우로 애되고 늘찬 제비들 옛이야기 담은 가죽배 산천구경에 여념이 없어라   실바람 간지러운 선녀호수 푸른 물 라일락 반기는 동구 밖 단풍 든 숲속 삼강이 귀바퀴에 서성거린다 방울새의 노래 늘씬한 맨발로 달려와 칭칭 감기네   마을 할머니 웃음소리 찰랑이는 백일홍 꽃밭에 선다 오매불망 그리던 강남 강북 해동 해서의 후손 마중하며 반가움에 눈시울 적시네   푸른 물결 타오르네 쭉쭉 빠진 길로 세상 싣고 나가고 들어오며 어제 오늘과 래일을 잇는 큰 배에 올라 옛꿈 이루려 바다건너 방황하며 밑바닥 없는 향수 달래던 출렁이는 고운 청춘들 오늘은 새로운 꿈바퀴 굴리며 달려오누나.   《연변일보》해란강 부간  장백에서 방천까지 우리 시가 간다(5)   2021.11.3 
226    황당소설《길라의 곤혹》 댓글:  조회:662  추천:0  2021-09-15
《장백산》위챗판 소설    황당소설《길라의 곤혹》   O박준희 지음     니체가 백여년 전에 “나는 어쩌면 요렇게 총명할가!”1)고 크게 자찬한 후로 세상에 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 후 시대가 여러번 바뀌면서 거리바 닥엔 총명한 사람들로 우글거렸다. 물건은 흔치 말아야 귀한 법인데 총명한 사람들이 많아지니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려 귀해졌다.     나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길라는 이렇게 귀해진 사람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해1): 니체 저서《이사람을 보라(瞧,这个人)》중의 소제목“나는 무엇때문에 이렇게 총명한가”의 글뜻만 따온다. ---------------------     화창한 봄날의 어느 일요일 아침.   H시 광장의 돌걸상에 길라가 제 생각에 잠겨 앉아있는데 우아한 풍채의 멋진 할머니가 걸어오더니 맞은 편 장의자에 앉아 그보고 손짓한다. 금발머리의 외국인 이였다. 그의 왼손 무명지의 희한한 보석반지가 해빛에 눈이 부시게 반짝인다.   “길라, 여게 와서 나허구 말 좀 하세.”   길라는 깜짝 놀라 할머니를 어안이 벙벙해 한참 쳐다보다가 일어나 옆에 가 앉았다.     “할머닌 저의 이름을 어떻게 아셔요? 우리 말도 참 잘 하시는구만요.”     “길라, 놀랄 건 없네. 난 안나·페도토브나라고 하네. “     “안나——페도토브나요?”       길라는 어데서 듣던 이름같아 머리를 갸우뚱했다.     “호호호, 부르기가 불편하면 그저 백작부인이라 불러도 돼. 오늘은 참 이쁜 날씨야. 이런 날엔 기분이 늘 상쾌하거든.”     “할머닌 정말 멋지십니다. 어데서 오시는가요?”     “뻬쩨르브르그에서 오네.”   “로씨아요? 참 먼데서 오셨군요.”       ……     “길라는 뿌쉬낀2)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     “뿌쉬낀을 누가 모르겠어요. 로씨아의 대시인이지요. 저는 어려서 그의 시와 소설을 즐겨 읽었답니다. 그 시절엔 젊은이들이 그를 무척 숭배했지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해2): 알렉센드·쎄르게이비치·뿌쉬낀(1799.6.6—1837.1.29)은 세계적인 위대한 문학가이며 시인이고 로씨아 현대문학의 창시자이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결투로 죽었다. ----------------------     “하기야 대단한 시인이였지. 그런데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가버렸어. 정말 아깝지?”     “그때는 시인이 명예를 위해 단테스와 결투한 걸 생각하면서 며칠 밤을 잠도 못 이뤘어요. 너무 상심했죠.”     “비렬한 음모였어. 하늘이 용서 못 할 짓을 했지.”     “지금이야 결투와 같은 루습(陋习)은 없겠죠? 로씨아에서 말입니다.”     “그런 악습이야 언녕 근절됐지. 허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결투란 걸 계속하는거야. 그렇지 않나?”     “정말 그렇군요.”     “그런데 아까운 시인은 죽고 내가 아직까지도 살아있으니 안타깝기만 해. 하긴 나도 빨리 가야겠는데.”     “아니, 왜서 그런 말씀을, 백작부인님은 아주 건강해 보이시는데요. 지금 같은 세월에야 백살을 사신다 해도 놀라운 일이야 아니지요. ”     “자네 보기엔 내 나이가 얼마나 돼보이나?”     “백작부인은 아주 젊어보이십니다, 80이 되셨나요?”     “호호호, 내가 그렇게 젊어보인다구? 길라는 말도 참 재밌게 하누만.”   ……   “자넨 뿌쉬낀의 《스페이드 녀왕》3)을 읽어 보았겠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해3):《스페이드녀왕(黑桃皇后)》의 이야기는 18세기 말 로씨아 뻬쩨르브르그에서 일어난다. 독일인 청년장교 게르만은 친구들이 플레잉카드(트럼프도박의 일종)를 노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하고 참여하지 않는다. 도박판에서 친구 체킬러스킨이 자기 할머니 안나 페도토브나 백작부인의 젊은 시절에 겪었던 신기한 도박담을 들려준다. 빠리궁정내의 도박놀음에서 백작부인은 알취드크공작한테 도박에서 지고 거액의 빚을 걸머진다. 그녀는 로만백작(18세기 프랑스의 모험가)에게 구원을 청한다. 로만백작은 그한테 도박에서 련속 세번 이길 수 있는 석장카드의 비밀을 알려준다. 백작부인은 석장 카드로 자기가 도박에서 진 돈을 도로 찾는다. 후엔 가산을 팔아먹은 막내아들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어 도박에서 이기게 한다. 게르만은 야심이 있고 궁냥이 깊은 나뽈레옹식의 인간이다. 그는 언제부터 거금을 챙겨보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에 석장 카드의 비밀을 백작부인한테서 기어코 알아 내려고 한다. 그는 백작부인의 양딸 리잔카의 감정을 리용하여 백작부인의 침실에 들어가 비밀을 알려달라고 강박한다. 백작부인이 그건 롱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그는 듣지 않고 권총으로 위협한다. 백작부인은 그만 놀라 죽는다. 카드의 비밀도 알지 못하고 리잔카의 사랑도 잃고 돌아온 게르만은 술을 먹고 취한다. 밤중에 백작부인의 유령이 나타나 석장카드의 비밀(3점, 7점, A)를 알려준다. 다음 날, 게르만이 도박판에서 3점과 7점으로 련속 두판 이긴다. 세번째 판에 예정했던 대로 A를 걸었으나 번져보니 A가 아니라 스페이드 녀왕(Q)으로 카드가 바뀌여졌다. 게르만의 눈앞에 스페이드녀왕의 윙크하며 랭소하는 모습이 보인다. 게르만은 결국 미쳐버리고 만다. ------------------------------------------ “물론 읽어 보았죠. 뿌쉬낀의 소설《대위의 딸》과 《스페이드 녀왕》그리고 그의 서정시들을 중국의 젊은이들은 아주 즐겨 읽었답니다. 저는 지금도 그의 명시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4)중의 몇구절을 기억하고 있어요.”     “참 훌륭한 시지."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설음의 나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그 날이 오고야 말리...”     “길라는 대단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구려. 그런데 시의 뒤구절이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구먼.”     “너무 오래 돼서……”     “그럴 수 있지. 뒤구절은 이렇네……마음은 미래에 살고/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움이 되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해4): 단시《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뿌쉬낀이 추방당하던 나날(1825년)에 쓴 것이다. 이 시기는 로씨아 12월당인(1825년 농노제도와 짜리전제제도를 반대하여 무장기의를 시도한 로씨아아 민족혁명가들을 가리킴)들이 일으킨 혁명이 바야흐로 진행될 때였지만 시인은 추방지에서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     “백작부인님은 기억력도 놀라우시군요.”     “시는 뜻을 음미하며 읽어야 기억이 잘 되는 법이네. 그러니 길라는《스페이드 녀왕》의 이야기도 다 기억하고 있겠군.”     “《스페이드 녀왕》이요? 하도 재밌게 엮은 이야기라서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의 기억이 옳은가 들어보세요. 게르만이란 젊은 장교가 도박판에서 백작부인의 카드 석장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백작부인을 찾아 그걸 알아내려고 하였지요 ……앗! 방금 백작부인은 존함이 뭐라고 하셨죠?”     “안나·페도토브나일세.”     “아, 그럼 체칼린스킨(소설에서 석장카드의 일화를 들려준 젊은 장교)의 친 할머니 되시는 그 백작부인이란 말씀입니까?”     “바로 나네. 게르만이 나의 양녀 리잔카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나한테서 카드 석장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했지.”     “그런데 백작부인님,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을 수가……”     “길라는 믿지 못하겠단 말이겠지. ”     “정말 꿈만 같아요.”     “세상에 꿈같은 일이 많아. 그걸 다 알 수 없는 거구, 알려고 할 것도 없는 게야. 모든 게 다 가능한 거니 거기다 너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네. 그렇지 않나?”     “그런데 뿌쉬낀이 쓴 소설중의 인물이 내 앞에 이렇게 앉아 계신다고 생각하니 전혀 믿을 수 없군요. 소설이야 작가의 허구가 아닙니까?”     “허구라지만 뿌쉬낀에겐 그와 같은 생활이 있었던 거네. 그래서 소설이 훌륭하게 씌여진 거지. 생활이 전혀 없이 허공에서 태여난 명작이란 없는 법이야. 소설에 나오는 체칼린스킨을 뿌쉬낀이라고 가설한다면 게르만은 이름도 똑같은 사람이 있었거든.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뿌쉬낀의 친할머니라네. 그런데 그 애는 소설에서 자기 친 할미조차 혐오스럽구 괴벽한 로파로 묘사했네. 그러구보면 작가의 허구란 것도 한심한 거지. 별 수가 있나, 손자가 쓴 소설이니까, 난 탓하질 않네. 길라 눈에두 내가 그렇게 가증해보이나?” 5)     “아니요, 내가 보겐 백작부인은 멋진 머던할머닌데요!”     “그 머던이란 말만은 삼가하게. 뿌쉬낀이 소설에서 나를 케케묵은 머던로파라고 했었지! 호호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해5): 《스페이드 녀왕》은 뿌쉬낀이 1833년10월부터 11월초사이에 씌여진 것으로 전문가들은 인정하고있다.뿌쉬낀은 도박놀기를 즐겨 그 기간에 친구들과 함께 도박판에 깊이 빠져있었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도박에 관한 일화룰 듣기 좋아한다. 뿌쉬낀도 마찬가지였다. 도박판에서 친구 컬친공작이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루는 컬친공작이 도박에서 참패하고 조모한테 돈 달랄러 가니 조모는 돈은 주지 않고 카드석장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조모는 이것은 저명한 탐험가 게르만백작이 전수해 준 비결이라고 했다.컬친공작은 이 석장카드로 도박을 이겼다. 컬친공작의 들려준 이야기는 뿌쉬낀의 창작령감을 불러 일으켰고 시인은 얼마되지 않아 명작 《스페이드 녀왕》을 써냈다. -----------------------------------------------------------------     “백작부인님, 알구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요? 물어봐도 될가요?”     “맘대로 하게. 우린 이렇게 연분으로 만나지 않았나.”     “카드 석장의 비밀이란 게 정말로 있었던 사실인가요?”     “왜? 거짓말 같은가? 하긴 그때도 사람들이 자네처럼 물어왔었지.”     “그게 정말이라면 왜서 게르만의 마지막 카드 A를 스페이드녀왕과 바꾸어 놓았는가요. 게르만에 대한 보복이였나요?”     “나는 보복할 생각은 조금치도 없었네. 역시 뿌쉬낀의 허구였지. 소설이란 원체 그렇거든. 생활 그대로가 아니고 그걸 통해 작가의 내심세계를 반영하는 거니까. 지금은 소설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쓰네만 그 시절엔 그렇게 썼던 거야. 그리고 뿌쉬낀은 게르만처럼 탐욕스런 사람을 몹시 미워했었네.”     “백작부인은 게르만을 좋아했던가요?”     “좋아한다기보다 리잔카가 불쌍해서 조건부를 건 거지. 그리구 게르만은 젊은이 니까 앞으로 개변될 거라고 생각했네.”     “그럼, 현실에선 게르만이 도박에서 지지 않고 이겼단 말씀이군요.”     “이겼지. 그리구 게르만이 도박에서 이긴 대신 내 요구대로 리잔카와 결혼했네.”     “리잔카와 게르만이 결혼하다니요? 리잔카야 후에 백작부인의 로집사의 아들과 결혼하고 친척집의 녀자애를 양녀로 삼질 않았어요? 오, 역시 뿌쉬낀의 허구였겠군요.”     “그렇다네. 뿌쉬낀은 소설에서 당연히 리잔카를 게르만과 결혼시킬 수 없었던 거야.”     “그런데 소설에선 백작부인은 세상뜨고 장례식까지 치렀지요. 게르만도 그 장례식에 참가했구요, 리잔카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지요.”     “그거야 내가 연극을 꾸민거지, 내가 죽었더라면 게르만에게 어떻게 석장 카드의 비밀을 알려줄 수 있고 지금 자네와 마주 앉을 수가 있나?”     “소설에서 보면 리잔카는 처음엔 게르만을 진짜로 사랑했지요?”     “리잔카의 처지에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그렇긴 해요. 젊은 처녀로서 너무 외롭게 지냈으니까. 그러면 후엔 게르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나요?”     “리잔카는 행복했지, 그앤 게르만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니까. 게르만이 결혼시초에 행복했는지는 잘 모르겠네. 허지만 후엔 둘이 백년해로를 했다네. 게르만의 욕구를 내가 만족시켜줬는데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나? 내가 줄 수도 있지만 도로 빼앗을 수도 있다는 걸 그가 잘 알고 있는데, 리잔카는 참 훌륭한 애였어. 나중엔 게르만두 리잔카를 진정 사랑하게 된 거지.”     “현실이 소설과 이렇게 다를 줄은 전혀 생각밖이군요.”     “소설과 현실은 같질 않네. 소설속의 생활보다 현실생활이 더 잔혹할 수 있고 진실로 말하면 소설속의 생활이 현실보다 더 진실할 수 있지. 그걸 잘 가려야 해. ”     “그래서 뿌쉬낀은 소설에서 게르만을 훼멸시켰지만 백작부인은 현실에서 그를 용서해줬군요.”     “자넨 총명한 사람이야. 내가 빗보질 않았네.”   ……   “길라, 난 오늘 밤 비행기로 뻬쩨르브르그에 돌아가야 하네. 참, 말동무를 해줘서 고맙네.” “아니요. 오히려 제가 정말 유쾌했습니다. 아쉽군요, 이렇게 갑자기 떠나가시니.” “중국에 ‘세상에 끝나지 않는 연석이 없다’는 말이 있지 않나? 좀 섭섭하긴 해도 아무튼 자넬 만나서 기쁘네.” “제가 바래다 드릴가요?” “괜찮네. 길라, 처음 만났는데 나 자네한테 례물하나 선사하려네.” “웬걸요, 전 한 일이 없는데요. 난 그저 백작부인께서 만수무강하시기만 바랍니다. 다시 중국에 놀러 오시게 되면 꼭 찾아주세요, 부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내가 이번 걸음이 마지막이 될런지도 모르겠네, 너무 오래 살았으니깐. 언녕 손자를 찾아가야 하는 건데. 그렇지만 별 수 없지, 할 일을 끝내지 못했으니 갈 수 없었어. 그런데 길라, 내가 주는 례물을 받게나. 자네가 몹시 수요될 것 같아 그러는 건데 사양 말게.” “저한테 몹시 수요된다니요, 뭔데요?” “사람마다 일생에 한두번 쯤은 좋은 운을 만나게 되여있네. 하느님은 공정하네. 그 기회를 내가 오늘 자네한테 주려네, 운명이라고 할지. 오늘이 양력으로 어떻게 되는가?” “2013년 7월11일이예요.” “세월이 가긴 많이 갔군. 그러니 바로 오늘이야. 이 비밀은 세상이 다 알지만 내가 주지 않으면 누구한테도 소용 없는 거라네. 세기 비밀이라 해도 과분하지 않지. 그러니 똑똑히 기억해두게.” “그러죠.” “《스페이드 녀왕》에 나오는 카드점수를 기억하고 있나?”   “3점, 7점, 에이스(A)지요.” “오늘 저녁 6시 전에 이 점수로 3D복권 한장만 사게 .”   “복권이요?”     “지금은 플레잉카드를 노는 사람이 없거든. 중국엔 더구나 없고. ”     “백작부인은 왜 절 도와줘요. 원인이 있을 텐데요?”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가지 일을 꼭 하고 가야 해. 다른 원인은 없어. 자네를 해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해주게 돼있지. 운명이고 연분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달리 생각 말게, 난 자네가 맘에 드네.”    “고마워요.”    “고마울 것 없네. 그런데 한가지만 일러 둡세. 돈이란 게 많을수록 좋지만 욕심을 너무 부리면 사람이 오래 못 살아. 나만큼 살려면 돈을 쓸 줄도 베풀 줄도 알아야 해.”    “명심할 게요.”   “자네가 행복하길 바라네.”     길라는 멍하니 서서 멀어져가는 백작부인을 점도록 바랬다.   점심해는 눈부시게 찬란하다.   조용한 골목 차집의 한 깨끗한 단간방에 길라는 송희와 마주 앉았다.   송희는 가두문화소의 무용보도원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길라를 선생님이라 부르 다가 후에는 오빠라 불렀고 지금은 단둘이 있을 때면 이봐요, 저봐요 한다. 길라는 송희의 새별처럼 깜박거리는 눈을 들여다 보고있다. 그는 그 눈에 반했었다.   “이봐요. 오늘은 내가 한 턱 쏠 게요. ”   “왜? 좋은 일이라두 있니?”   “내게 무슨 좋은 일. 그저, 좋아서.”   “돈은 어데서?”   “성문예경연대회에 참가했잖아요? 땀 흘린 대가죠.”   송희는 남자들의 속도 알고 맘씀도 곱다. 길라는 그래서 좋아했다. 그의 눈길이 발가벗은 그녀의 맨발에 닿았다. 깜찍하기가 인형같다. 저게 진짜일가 하는 괴상한 생각이 불쑥 떠오르며 그녀의 발을 끄당겨 무릎에 올려놓았다. 만져보니 전과 같은 감각이다. 송희와의 시작은 번마다 여기서부터다. 그러는 걸 송희가 좋아했다. 알록달록하게 매니큐어를 바른 발톱이 너무 이쁘다. 만날 때마다 보면 번마다 색갈이 다르다. 발의 보드라운 촉감을 느끼면서 머리속에 백작부인의 희한한 보석반지를 그려보다가  엉뚱한 생각이 떠 올라 길라는 피식 웃었다.   “뭐가 우스워요?”   “요 발가락마다 보석반지를 하나씩 끼워주믄 어떨가? 고울 거야.”   송희는 까르르 웃으며 두손을 쫙 펴 알록달록한 손톱이 달린 손가락을 쳐든다.   “먼저 요게다가, 담에 고게다두.”   송희는 깜찍한 처녀애다. 더우기 길라를 감복케 하는 건 그녀가 주견이 여물어 다른 녀자애들처럼 드놀지 않는 점이다. 안해에 애까지 달린 그를 아무런 조건부 없이 그저 제가 좋아서 따른단다. 가두문화소를 떠나게 좋은 단위로 조동시켜 달란 말도, 안해와 리혼하란 말도, 화장품 하나 사달란 말도 없다. 안타까워 한번 물어 보았더니 까만 눈알을 새록거리며 모르겠다는 듯, 사랑이란 게 그런게 아닌가고 되물어 그 후로는 이따위 싱거운 말은 아예 입밖에 내지도 못했다. 길라는 그러는 그녀한테 내심 미안했다.     길라는 오후 5시에 식당을 나와 복권소매점으로 찾아갔다. 마침 봉사원아가씨만 있을  뿐 다른 손님들은 없다. 봉사원아가씨는 잠기가 폭 괘인 얼굴로 심드렁하니 길라가 부르는 대로 수자를 쳐넣고 복권을 뽑아주었다. 그는 복권 수자3-7-1을 확인하고 소매점 문을 나와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텔레비죤을 틀어 열고 복권프로 채널에 맞춰놓고 앉아 기다렸다. 도중에 아들애를 데리고 본가집에 갔던 안해가 전화룰 쳐와서 어머니한테서 돈을 2만원 꾸어놓았으니 친구들한테서 만원만 보태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집을 새로 장식하기로 계획했던 일이다. 그는 시름을 놓으라 이르고는 전화를 인차 놨다. 텔레비죤에서 뉴스방송을 한다. 아나운서가 공안국의 수배령을 랑독하는데 요즘 강도 한놈이 나타나 밤이면 가족사택의 층계나 다리 근처에서 대기하고있다가 밤늦게 다니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리고 돈과 핸드폰 같은 걸 빼앗는다고 한다, 그러니 시민들을 주의하라고,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바로 공안국에 신고를 하라고 한다. 요즘은 이런 일도 가끔 생긴다. 8시45분이 되자 텔레비에서 음악과 함께 아나운서가 추첨시작을 선포한다. 추첨기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라비아 수자가 새겨진 탁구공 한알이 떨어졌다. 수자 3이였다.    “정말이구나!”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쳤다.   다음엔  7이 나왔다.   가슴이 쿵쿵 세차게 뛰였다.   세번째 탁구공이 떨어질 때 그는 숨이 당금 넘어갈 것 같았다.     1이였다.     길라는 컴퓨터를 열고 추첨상황을 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자기가 복권을 샀던 그 소매점에서 특등상이 나왔다고 밝혀있고 상금은 1000만원이였다.     180년이 지난 오늘, 백작부인의 카드석장의 비밀이 다시 령험해졌다.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해6): 1833년에 뿌쉬낀이《스페이드 녀왕》을 창작했다. 카드석장의 비밀이 소설창작과 동시에 탄생했다고 해도 리유가 성립될 것이다. 본 소설의 시간배경이 2013년이니 《스페이드 녀왕》이 발표된 때부터 18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 이날 밤. 길라는 인터넷에서 뿌쉬낀의 소설《스페이드 녀왕》을 체크하여 두번 읽었다. 지금 읽어봐도 신선하고 재미있는 소설이였다.   이튿날 아침.   길라는 전화로 복권총부에 확인을 하고 8시반에 상금 타러 오라는 명확한 대답을 받은 후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문을 나섰다. 그는 시간을 단축하고 의외사고를 피하고저 택시를 불렀다. 복권총부로 지체없이 몰라고 택시운전사한테 부탁했다. 택시운전사는 “대상에라도 걸렸는 모양이구려.”하며 이죽거린다. 그는 말없이 손짓으로 어서 몰기나 하라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가는 길에 운전사가 지름길로 간다면서 골목길에 굽어들었다. 뭐가 잘못되는구나 하는 이상한 예감이 드는데 아닌 게 아니라 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더니 거무틱틱한 사내 둘이 차에 올라탔고 그한테 다짜고짜 칼을 들이댔다. 그중 한 사내가 가방을 빼앗아 복권을 꺼내가지고 중도에서 내렸다. 택시가 다시 고속으로 달리고 라지오에서는 방정맞게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울린다. 창밖을 내다보니 차는 이미 시내를 벗어나 산으로 가는 공로로 달린다. 차가 산굽이를 돌 때 길라는 차문을 냅다 차고 무작정 뛰여내렸다. 공중전을 몇바퀴 했지만 다행히 상한 데가 없어 그는 기여 일어나자바람으로 시내로 향해 정신없이 뛰여갔다. 제정신이 아니다보니 차번호도 강도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복권총부로 바로 달려가 기소했지만 상금은 강도가 언녕 타갔고 그가 해석을 아무리 해도 증인도 증거물도 없는지라 봉사원들은 그를 아주 환장한 놈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복권 소매부의 봉사원아가씨를 데려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질만 한다.     길라는 불현듯 백작부인이 의심됐다. 그런데 뭐라고 할 리유가 없다. 그는 뻬쩨르브르그의 호화로운 커피숍에서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을 백작부인의 우아한 모습을 눈앞에 떠올렸다. 길라는 지금 소설속의 게르만의 신세로 되였다. 그의 머리에는《스페이드녀왕》종장의 게르만의 말로(末路)를 언급한 글이 떠올랐다.   “게르만은 미쳐버렸다. 그는 오프호브정신병원의17호병실에 안치되였다. 그는 의사들의 묻는 말에 일절 대답하지 않았고 입속으로 한 말을 반복하여 중얼거리고 있었다.   “3점, 7점, 에이스! 3점, 7점, 에이스!......”   시계바늘이 밤 열두시를 가리킬 때에야 길라는 정신이 좀 들었다.   그의 머리에는 갑자기 게르만처럼 미쳐버리기 전에 아주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잔인한 생각이 떠올랐다. 리유가 따로 없었다. 모든 게 싫증났다. 이같이 가증스럽게 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번뇌가 없이 아늑하기만 할 천당이 그리웠다. 그런데 도무지 죽어본 경험이라곤 없는 그는 다시 고뇌에 잠겼다. 그는 마치 남의 청탁을 받고 자살방법을 설계해주듯 여러가지 죽는 방법을 머리에 쭉 그려보았다. 차바퀴밑에 뛰여드는 방법, 칼로 목의 동맥을 베는 방법, 목을 매고 죽는 방법,  가스관을 입에 물고 죽는 방법, 층집에서 뛰여 내리는 방법…방법은 수두룩했다.   하지만…   밤이 깊어 지나가는 차가 없어 차에 치워 죽자니 안되겠고, 목의 동맥을 베자니 칼이 없다. 집에 가서 목을 매거나 가스에 취해 죽는 것도 편하겠지만 호주머니에 택시를 탈 돈 한푼 없다. 남다자는 밤중에 남의 층집 꼭대기로 기여 올라간다는 것도……   그는 이때에야 자기가 죽을 능력조차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몹시 구슬펐다   길옆에 거무칙칙한 담장이 서있다. 저기다가 머릴 박으면 죽을 수도 있지 않을가? 그는 백메터 속도로 달려가다가 담장에 머리를 박으면 큰 고통이 없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릴 수 있는 거리를 재여보니 이십메터가 잘 됐고 땅도 평평하여 뛰기도 쉬울 것 같았다. 일단 결정을 지으니 안도의 숨이 나간다. 그는 담장을 향해 달리기 전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듯 안해와 아들, 아버지, 그리고 단위의 령도나 친구들에게 유서를 한 장 남기자고도 생각해보았으나 중도에 자살할 용기를 잃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길라는 머리속의 모든 잡념을 쫓아버리고 지체없이 담벽을 향해 내달렸다.   바람이 귀전에 쌩쌩 스쳤고 온몸에 힘이 솟구쳤다. 기분이 상쾌했다. 담장 앞에 거의 다달았을 때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담벽에 머리를 처 박았다. 머리를 힘껏 담벽에 박으면서 눈앞에 불찌 같은 것이 일어날 줄로 알았는데 물렁한 감각이 머리에 느껴지면서 몸이 앞으로 쏠리며 훌렁 나자빠졌다. 머리가 아프거나 휭--하지도 않았고 정신도 말짱했다. 혹시 뛰는 방향을 잘못 잡은게 아닌가고 눈을 떠보니 그런 같지도 않다. 담벽안의 풀잔디에 멀쩡하게 누워 있었고 돌아다보니 담장도 그대로 서 있다. 이건 또 웬 뚱딴지같은 일이냐?   그는 오늘 일이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어리둥절했다. 길라는 이번에는 담장 안에서 밖으로 내뛰였다. 다시 눈을 뜨고보니 담장 밖에 와 서있다. 이렇게 담장에 머리를 박으며 안팎으로 몇번이나 오갔다. 그런데 죽기는커녕 어데 맞쳐 아픈 데도 없다. 풀밭에 앉아 쉬면서 정신을 한참 가다듬어서야 자기가 확실히 이 담장을 꿰뚫고 지나왔다는 것, 그리고 오늘 밤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도무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죽을 수 없으면 사는 길 밖에 없다.   길라는 마음을 진정하고 일의 자초지종을 곰곰히 따져봤다. 무언가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긍정코 백작부인의 수작이다. 백작부인은 복권이 강탈당할 것을 예견했거나 혹은 이 모든 걸 손수 조작했을 수도 있다. 내가 자살시도를 할 줄도 사전에 알았고 그래서 나한테 특이한 기능을 부여했을 수 있다.   이때, 갑자기 길라의 머리에는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래 전에 읽었던 프랑스소설《벽을 꿰질러가는 사람》7) 중의 정절이 아리숭하게 기억났다. 바로 소설 속의 주인공한테 길라처럼 담벽을 꿰질러가는 초능력이 생겼다. 그런데 그의 초능력은 이름 모를 괴상한 병에 걸린 후과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해7): 마르쎌·에매(马塞尔·埃梅1902-1967)프랑스소설가, 극작가. 소설《벽을 꿰질러가는 사람》(穿墙过壁1943년 창작)은 황당(荒诞)소설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 길라는 자기가 소설주인공과 같은 초능력을 소유하게 된 데 기쁜 한편 겁도 났다. 소설주인공의 종말이 어찌됐던지 잘 생각이 나진 않지만 기억에는 주인공이 해괴망칙한 짓거리를 하다가 병을 치료하느라 먹은 약이 효력을 발생하여 종당에는  초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 같다   길라는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나의 경우는 그 사람과 좀 다르다. 나의 초능력은 분명 병이 아니다. 백작부인의 선물이라 해도 무방하다. 병이 아니기에 약을 먹을 념려도 없고 뒤끝이 좋지 않을 우려도 없다. 이렇게 궁리하고나니 공포감은 점차 사라지고 자신감 비슷한 것이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여 올랐다. 그렇다면 백작부인은 왜서 나한테 이런 초능력을 선물했을가? 그러구보면 부인은 나한테 뭉치돈을 선물하고 싶었던 건만은 틀림 없다. 그가 카드의 비밀을 알려줄 때는 나의 궁색한 처지를 동정하여 돈을 벌게 하자는 거였다. 내가 지금 돈이 당장 수요된다는 걸 그는 손금보듯 환히 알고 있었다. 후에 내가 강도들에게 강탈당하자 그는 나한테 이러한 초능력을 부여해주었다. 백작부인은 내가 재수 없는 일에 부딪친다 해도 자기가 한 보증을 어김없이 실현할 수 있도록 사전에 다 작정해놓은 거다. 백작부인의 기대를 어기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선물한 초능력으로 잃은 것만큼의 돈을 되찾아오는 거다. 길라는 이쯤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후련해졌다. 이럴 바 하고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밤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일을 마무려내야 했다.    그는 용단을 내렸다. 시작을 뗐으면  끝을 보자!   길라는 목표물로 공상은행을 선택하였다. 곧바로 공상은행 뒤골목으로 갔다. 은행정문은 전등불이 너무 환해 불편했다. 시계를 보니 야밤 2시. 거리에 사람그림자 하나 없다. 그는 무인지경에 들어선 듯 아무런 저애가 없이 은행건물속으로 꿰질러 들어갔고 지하금고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     지하금고에는 금괴가 천정까지 쌓여있고 줄느런한 덕대에는 돈뭉치가 차곡차곡 장져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돈을 모조리 가져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백작로인의 갈라지면서 하던 경고가 생각났다. 돈이란 게 많을수록 좋지만 욕심을 너무 부리면 사람이 오래 못살아.   길라는 정확히 당첨상금수인 1000만원만 자루에 넣어가지고 나왔다. 그는 돈주머니를 메고 들어오던 길로 돌아섰다.   길라는 손쉽게 벽을 여러개 꿰뚫고 복도를 지나 은행뒤벽에 다달았다. 여기만 빠져나가면 만사는 끝난다. 그의 심장은 흥분한 나머지 가슴에서 당금 튀여나올 듯 쿵쿵 세차게 뛴다. 그는 먼저 머리를 밖에 가만히 내밀었다. 사위를 살펴보니 쥐죽은 듯 고요하고 거리쪽에도 차량 한대 사람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는 또 돈자루 를 메지 않은 손을 밖으로 쑥 내밀었다. 다리 한짝도 훌렁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야흐로 기여나오던 중 길라의 머리에는 불현듯 금괴 하나만 더 가지고 나올 걸 그랬다는 엉뚱한 생각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마음은 유혹을 거절하는데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몸뚱아리가 귀신에게 홀리운 듯 제멋대로 돌아서는데 갑자기 사타구니에 달린 연장이 어디엔가 걸리는 감이 든다. 몸을 이쪽저쪽 움직이면서 엉뎅이를 빼려 하나 연장이 어디에 걸렸는지 마뜩찮다. 한참이나 애를 썼지만 도무지 몸을 빼낼 수가 없다. 손을 뻗쳐 연장을 쥐고 휘여서 사타구니에 끼여넣자니 그놈이 어떻게나 육실한지 소원대로 되지 않는다. 평소에는 남들 것보다 곱배 커서 우쭐하던 이놈이 관건적인 시각에 이다지 거치장스러울 줄은 전혀 생각밖이다. 그는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한참 역사질을 해도 쉬히 빼낼 수 없자 저으기 안달아났다. 그저 일 같지 않았다. 무진 애를 다 썼지만 안된다. 그는 겁이 덜컥 났다. 이놈의 연장을 떼여버리지 않고는 이 벽에서 빠져나올상 싶질 않다. 그런데 정작 떼여 버리자니 아깝고 지금은 그걸 베낼 칼도 없다. 길라는 다시 안간힘을 써가며 반시간가량 좋이 애써 보았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공교롭게도 이때 생각나지 않던 프랑스소설의 종말이 떠올랐다. 소설의 주인공은 건축물을 꿰고 나오다가 약효력으로 초능력을 상실하고 머리와 팔다리 한짝이 벽에 조각처럼 굳어져 버린다. 굳어진 주인공은 한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 벽에 남아서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된다. 길라는 지금 자기도 소설주인공의 꼴이 될 것을 상상하니 앞이 캄캄해났다.   길라는 절망했다. 이어 심한 공포 속에 빠져들어갔다.   래일이면 길라는 기문의 주인공이 되여 세상을 웃길 것이다.   기자들이 그를 취재하려고 산지사방에서 새까맣게 몰려든다.   전세계 수십억 관중들이 생방송으로 길라를 주목한다.   벽에 끼워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그의 꼴을 보고 세상사람들은 희한한 코미디라도 보듯 낄낄거리며 좋아 야단이다......   반생을 청백한 몸으로 살아오다가 오늘 이런 망신을 당할 줄을 길라가 꿈엔들 알았으랴!.   길라는 문화관의 동사자들이요, 가무단이고 예술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이며 그외도 숱한 알고모를 사람들이 그를 구경하려고 달려올 걸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더구나 안해와 아들, 아버지, 그리고 친척과 친구들이 자기 실수로 하여 망신하고 괴로워할 걸 생각하면 길라는 가슴이 당장 터진다.   길라는 H시에서 별반 큰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이 꽤나 알아주는 문화인이다. 시문화관에서 부관장을 하는 그는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문화인이란게 기실 남보다 더 고명한 데도 없고 손에 쥐뿔두 쥔 건 없지만 얼굴만은 아낀다. 그걸 버리면 송장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런 꼴이 되였으니 남들은 나를 겉보기보다는 속에 똥이 들어찬 더런 놈이였구나 하고 빈정대고 욕지거릴 할 게다. 이걸 어쩌면 좋으냐!     한편 그는 또 억울하기도 했다.     그의 인생력사를 회고해 보면 기본상 큰 흠이 없이 깨끗했다. 단위에서도 맡은 바 업무를 실수없이 착실하게 해왔고 남들이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남 다 부리는 욕심도 될수록 참았다. 그래서 정관장자리도 지금의 박관장한테 양보했고 승직이나 로임승급같은 중대한 일에 들어가서도 남한테 양도하면 했지 결코 선후를 다투지 않았다. 그걸 후회하지도 않았고 남을 시기하지도 않았다. 남들의 말밥에 오르기 싫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사람됨이 좋다는 말을 듣는 게 제일 좋았다. 사람사는 멋이 남의 존중을 받고 사는 거라고 확신했던 그였다.   시종 절제됐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마흔살을 먹는 생일을 쇠고난 후부터였다. 그날 숱한 친구들이 모여와 그의 생일을 쇠여 주었는데 흥성한 술좌석에서 친구들이 그를 사람됨이 여사하게 좋고 어쩌고 떠들면서 하늘만이 올려 추었지만 그날만은 다른 때처럼 기쁘지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친구들의 처지가 다 자기보다 나았다. 한자리 하는 친구들은 벼슬길이 씽씽 잘 나갔고 장사하는 친구들은 돈을 무지로 벌었다. 한 친구는 별장까지 사놓고 산다. 그날도 보란듯이 벤츠S급을 몰고왔다. 생일 쇠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사십고개에 정작 들어서고 보니 지나간 이십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앞길이 막막해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한테 신세를 진 적 있는 친구들의 일처리도 고깝게 여겨졌다.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박관장만 봐도 그렇다. 당초엔 울상을 해가지고 빌붙어 사정을 봐달라고 해서 친구정분에 못이겨  정관장자리 선거에도 참가하지 않았는데 첫 며칠은 은인이요 뭐요 하며 술사발을 먹이더니 정작 관장자리에 올라 앉은 후로는 매일매일 기색이 달라졌고 얼마 안 지나니 수염을 싹 씻고 나앉는 게다. 회의요 고찰이요 하면서 외국이고 내지고 들락날락 나다니는 일에는 나 만을 쏙 빼놓는다. 문화관이란 게 토지국이요, 상업국이요 하는 단위와는 비교가 안 되고 먹을 낫도 없지만 없는 떡부스레기라도 나누어 먹는 게 친구의 도린데 박관장이라는 놈은 기회만 생기면 제 배만 채운다. 더구나 기분이 잡치는 건 이젠 반반한 녀자애들도 술좌석에 앉으면 그의 앞에선 대강 흉내나 내고 박관장한테는 찰떡처럼 찰싹 달라붙어 아양에 부산을 곁들어 피워댄다. 그는 단위일에 막힘이 없고 좋은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도맡아 했다. 그런데 일은 뉘가 하고 먹기는 뉘가 처먹는지 모르겠다. 고작 로임에 매달려 살다보니 녀편네가 어쩌다 집을 새로 장식하려고 돈 몇만원을 내놓으래도 남의 눈치를 봐 가며 친구들한테서 꾸어야 한다. 친구들앞에서는 물론 안해앞에서도 면목이 엉망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나간 20년을 무슨 똥궁리를 하고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애초부터 관장이구 뭐구 다 집어 치우고 전공쪽에 정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리직하고 장사길에라도 나서야 하는 건데, 남들이 그를 일 잘하고 사람 좋다고 하며 춰주는 바람에 반평생 남의 심부름만 실컷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통 바보노릇만 해온 게다. 장사는 그렇다 치고 젊어서는 천성이 좋아서 악기도 잘다루고 작곡, 작사에 편곡도 하고 소설평론두 꽤나 써서 전공쪽으로만 열심히 나갔더라도 지금쯤은 한다하는 전문가로 받들리울 게다. 그런 걸 괜히 아무런 권력도 없는 부관장인지 뭔지 하면서 허송세월만 보냈다. 이젠 사십이  지났으니 모든게 다 늦었다. 싫단 말 한마디 없이 따라주는 송희두 그렇지. 손가락이나 발가락에다 반지도 주룩주룩 끼여주구 큰 도시랑 데리구다니며 사랑을 해야 멋이 나는 거지. 이게 다 돈 문제다. 전번 어느 날 아버지는 젊은 시절의 집체호친구들과 함께 시골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그 시절에 시골에서 민영교원을 했었다. 그번 모임이 있은 후부터 아버진 아무갠 시골에 돈 얼마를 기부했소, 누구는 시골에 뜨락또르를 사줬소 하면서 부러워 했다. 아버지 소원은 시골에 자그마한 학교를 하나 세우자는 건데 눈치를 보면 도와줬으면 하는  게다. 대답은 있는 힘껏 도와준다고 버젓이 해놓았지만 지금 같아서는 막막하다. 섭섭해하시는 눈치가 뻔하다. 아버지가 이제 살면 얼마나 오래 산다고. 아직 운신할 만 할 때 면목이 서게 잘해줘야지, 세상 뜬 다음에야 무슨 소용이 있을가. 한뉘 남편시중을 든 불쌍한 안해두 욕심은 크게 없이 눅적한 걸루 승용차 한대를 사고 싶어하는데 잠시는 가망이 없다. 그런데 이놈의 백작부인은 왜서 나를 요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달아났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그 속셈을 알아야 죽어도 원인이나 알고 죽지. 래일 공안국에 잡혀가면 백작부인과 만났던 일이라도 해야겠는데 그 말을 경찰들이 곧이 듣겠는가는 것도 문제다. 자칫하면 미쳤는가 할 거구 혹시 믿는다 쳐도 이거야 나라망신을 혼자 다 시킨 셈이니 사형선고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아아,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보세요, 당신은 여기서 무얼하고 계십니까?”   절망 속에 빠진 길라가 이렇게 오만가지 궁리를 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귀전에서 들려오는 통에 화닥닥 놀라 머리를 들고 쳐다보았다.  훑어보니 경찰이나 보안원 같지는 않고 얼핏 봐서는 점잖아 보이는 사내다. 길 가던 손님같다. 길라는 그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다. 여기서 무얼 한다고 해야 할지 몰랐다. 제풀에 짜증이 났고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높아졌다. 화는 났지만 물어오는 말이 경어를 쓰니 별 수 없이 그도 경어를 썼다..     “무얼 하긴요, 보시면 모르겠습니까!!”     그제야 사내는 어둑시그레한 벽에 사람 반쪽이 붙어있는 길라의 해괴망칙한 꼴을 보았던지 기절초풍한다.     “저런! ? 어쩌면 이럴 수가? ”    사내는 밖에 드러난 길라의 반쪽 몸뚱아리와 벽을 자상히 살펴보더니 이상해 했다.    “허리아래가 보이지 않군요. 둔부도 없고 팔다리도 각각 한짝이 없군요, 이것들은 다 어데 갔습니까?”     보건대 얼떨떨한 사람같은 게 그한테 별로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말동무라도 해주는 사람이 나지고 잘만 구슬리면 도움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뻤다.     “후, 보시다 싶이 더러는 저 벽안에 있습니다, 어이쿠!”     “더러 벽안에 들어가 있다니 모를 일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요? 원래 이 벽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까?”     “허참, 숱구멍에 구멍난 소릴 하시는구만. 은행벽에 구멍이 나 있는 걸 언제 봤더랬습니까?”     “정말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서 뭘 하구 계십니까?”     길라는 사내가 말하는 꼴이 너무 어이없어 쏘아버렸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한 밤중에 왜 여기로 왔습니까?”     “왜서 그렇게 물어봅니까? 내가 누군 걸 알아 뭘 하자고 그럽니까?”     사내는 뭐가 께름직한지 머리를 돌려 사위를 두리번거린다. 뭔가 좀 겁나하는 모양이다.         “허참. 내가 왜 그러겠습니까? 남은 바빠 죽겠다는데 도와주실 생각은 전혀 하지 않구 되지도 않을 소리만 자꾸 하니까 그러지요,.”       그제야 안심되는지 사내는 정색을 하고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당신이 누군지를 알려주면 저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도움이 필요하 시다면 도와드릴 수도 있구요.”     이건 아주 어리숙한데다가 심심하기까지 한 놈이다. 그래도 그게 좋을상 싶었다. 약삭바른 놈이라도 만나면 큰 일이다.     “말씨를 들으니 본고장에 사시는 분은 아니시군요?”     “그렇습니다. 이곳에 온 지 며칠 안됩니다.”     “난 시문화관에서 사업합니다.”     “문화관이라구요? 허허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반갑다니, 뭐, 뭐가 반갑단 말씀입니까?”     “저도 한 땐 현문화관에서 사업했습니다. 5년 가량 했지요. 물론 몇해 전에 거길 떠났지만, 이러구 보면 우린 동업자로군요.”     “그렇군요. 그러구 보니 나도 반갑습니다. 이곳엔 출장 나오셨습니까?”     “허허허, 출장이라구 해두 틀리지야 않지요. 저의 성은 공씨입니다.”     “공씨라면 공자님의 후손이시군요. 대단한 가문이죠.”     “아아, 거야 다 옛날 얘기지요. 부끄럽습니다.”   “저는 길라라고 합니다. 시문화관에서 부관장을 합니다. 공동무는 문화관에 계실 때 전공이 뭐였습니까?”     “저는 젊어서 시와 연극으로 시작을 뗐다가 후에는 소설을 전공했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소설평론을 좀 했더랬습니다. 후에 부관장을 하면서 다 버렸죠.”     “그렇군요. 저도 후엔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보니 필을 논 지가 오랩니다. 평론을 하셨다니 리론가이시군요. ”     “리론가라니, 아아, 그저 취미로 좀 했을 뿐입니다.”     “미안하지만, 이렇게 만난 김에……이전에 알고 싶었던 의문거리가 있었는데 지금 당신한테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     “괜찮습니다, 아는 건 별반 없지만두……”   “길부관장님은 제 물음이 당돌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저, 도대체 소설이란 게 뭡니까?”     “아아, 소설이란 게 뭐라니요?……공동문 지금 나를 놀리는 겁니까?”     “아아, 놀리다니요? 천만에, 저는 확실히 잘 몰라서 묻는 겁니다.”     “허참, 소설을 한다는 분이 소설이 뭔지도 모른다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아, 길부관장님처럼 평론을 하시는 량반들이 문학리론 같은 건 우리보담 더 잘 알 거라고 해서 모처럼 묻는 건데 이렇게 말하시면 ……”   “공동무의 생각엔 평론하는 사람들은 뭐나 다 알고 쓰는 줄 압니까? 원, 소설한다는 량반이 이렇게 코막고 답답할 수가 있습니까?"   “그럼 평론가들은 어떻게 글을  씁니까?”     “사실 리론이란 게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와 같은 그런 겝니다. 두루 그렇게 쓰지요.”     “아아, 이거 정말 너무합니다. 사람을 아주 깔보는군요, 저는 길부관장님을 존경해서 이렇게 공손하게 묻고 있는데......정 이러시면 저는 고만 가겠습니다. 잘 계십시오.”   길라는 그제야 안달아나 손을 내밀어 사내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아, 잠간, 공동무, 제발 화를 내지마십시요. 허물 없다고 생각하고 제가 말이 과분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동무가 저를 두고 떠나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제라도 제가 아는만큼 신중하게 말씀드리면 안되겠습니까?”   사내는 화가 풀리는지 진지한 얼굴로 그를 쳐다본다.   길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사내의 눈치를 본다,   “후--,저는 공동무가 정말 탄복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공동무의 물음은 상당히 수준급입니다.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소설이 도대체 뭐냐 하는 건 표상으로 보면 간단한 문제 같지만 실은 문학의 본질과 관련된 궁국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공동무를 괜히 얕잡아본 것 같습니다.”   사내의 얼굴에 희색이 돈다.   “아아, 황송합니다. 제가 묻는 리유는 사실 이렇습니다……길부관장님이 더 잘 아시겠만 지난 시절 우리문단에서 선봉이요 판타지요 신사실주의요 하고 떠들법썩 했지 뭡니까. 후엔 잔설(残雪)이란 녀작가가 뛰여나와 문학이 전통적 의미로서의 사실주의에 회귀하는 걸 극구 반대해나서면서 “령혼밑바닥해부설”을 들고 나와 순수한 문학관을 선양했지요, 요즘의 문단에는 또 문체선행론을 극구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문학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시단은 더 란장판이구요. 추시(丑诗)인지 신시(新诗)인지 모를 시들이 엄엄한 문학대상을 타는 통에 시단에 란리가 터져 아직도 분쟁이 사그러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죠. 하기야 지금은 백화제방시대라 누가 무얼 주장하고 나서든 무관하지만 내가 옆에서 아무리 봐도 이 문학이란 게 알고도 모를 일이더란 말입니다……”   “공동문 사고를 아주 깊이 하셨군요. 아무튼 간단치 않습니다. 나의 관점을 말한다면  문단에서 아무리 란시를 벌린다 해도 쟁론자체는 정상적인 현상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각자가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쟁론하는 거야 왜 문제거리가 되겠습니까.  ‘예술에는 고정된 철칙이 없다’(艺无定法)는 게 바로 진리니깐요. 누가 무슨 기치를 내 들던지간에 그건 다 자유지요. 문제거리가 되는 건 어떤 사람들이 창작자유란 미명하에 진리를 고의로 외곡하고 람용한다는데 있습니다. 그게 내가 아까 말한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의 본 뜻입니다.”   “알듯말듯한데, 잘 모르겠군요.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례를 들면 책시장에 나오는 광고와 문학평론들을 두루 살펴보면 이 점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책광고를 보십시요. 할것없이 획기적이요 사상처음이요 세계를 휩쓸 것이요 하는 따위의 어마어마한 광고어로 외국에서 들여오는 작품이든 국내에 새로 나온 작품이든 모두 금테를 덮어 씌웁니다, 평론도 대체 이와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런 작품들이 과연 그들이 불어대는 것처럼 명실이 상부할가요?”   “아아, 좀 알 것 같습니다. 그런 경우를 저도  많이 보아왔어요. 얼토당토 않은 광고와 평론에 속히워 책을 산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요. 그런데 읽어보면 엄청난 찬사와는 천양지차고 완전히 유명무실하다구 해도 과언이 아니더군요……”   “바로 그거죠, 이렇게 진리가 사람들의 수요나 리익에 따라 코걸이와 귀걸이로 외곡되고 람용되지요. 진리는 궁지에 빠지고 불쌍한 처지로 륜락되였지요. 그럼 이걸 단순히 책을 팔아 돈이나 벌려고하는 장사아치들의 소행이라고만 볼가요. ”   “그럼 우리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장사아치들과 짜구들어 점찮지 못하게 그런 짓거리를 한단 말씀입니까? 저런 기막힌 일이라구야.”   “표면상의 짓거리보다 정교한 리기주의자적 심리를 가진 문화인들의 그 속알머리가 더 고약하고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게 더 가증스러운 게 아닙니까?”   “듣고보니 일리는 있는 것 같은데......그렇다면 문학엔 표준따위 같은 건 전혀 없어도 된단 말씀입니까?”   “표준이 있다면야 있죠.”   “그게 뭔데요?”   “실은 아주 간단합니다. 일단 작품이라고 이름을 달았으면 그저 이 작품이 좋으냐 아니면 나쁘냐 이렇게 두가지 표준으로 따져야지요. 고전주의든, 랑만주의든,  사실주의든, 선봉파소설이든, 판타지소설이든, 신사실주의든 류파를 구태여 따지지 말고 미의 창조에서 독창성이 있는가를 봐야지요. 좋으면 좋은 거고 나쁘면 나쁜 거죠. 하물며 오늘까지 경전작가들은 종래로 자기를 어느 주의나 류파에 귀속시킨 적이 없어요. 다 리론가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거죠. 마르케스가 언제 《백년동안의 고독》(百年孤独)을 판타지소설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가 자기는 순수한 사실주의작가라고 표방한 걸로 나는 알고 있는데요......”   “말씀엔 도리가 있는데 작품이 좋고 나쁜 걸 어떻게 가려냅니까?”   “로신선생의 《광인일기》《아큐정전》같은 건 세상에 나오자마자 세계급의 좋은 작품이란 걸 세상사람들이 알아보았죠, 왜서겠습니까, 새로울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완미했으니까요.”   “정말 그렇군요.”   “유고의 《레 미제라블》이나 뿌쉬낀의 시나 도스토예프스끼 작품도 마찬가지고요. 하긴 허먼 멜빌의 《백경》같은 건 처음엔 인정 받지 못했지만 반세기가 지난 후엔 종내 좋은 작품이란  평가를 받았죠, 이런 경우도 종종 있죠. 진짜로 훌륭한 작품은 매몰되지 않는다고 봐야죠.”   “아아, 이제야 머리가 좀 트이는 같아요. 길부관장님, 내친 김에 한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가요?”   “허물하지 말고 물어보십시요.”   “길부관장님은 작가와 평론가는 어떤 사이라고 봅니까? ”   “내가 보건댄 작가와 평론가가 진정 문학의 진보에 도움을 주려면 서로 원쑤 사이가 되는게 가장 유리하지만 이건 지나치게 높은 요구라서 성미가 지독하지 못하고 마음씀이 헤픈 사람들은 그렇게 못해요.”   “아아, 제가 말귀가 무디다고 깔보실지 모르겠지만……말씀을 좀 알아듣기 쉽게 해주면 안됩니까? ”   “아아, 내 말투가 건방지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아아, 죄송하기까지야……”   “사실 작가와 평론가는 복싱링에 나선 권투선수와 같다고 봐도 무방하죠. 두 권투선수가 복싱링에 마주섰을 땐 죽느냐 사느냐 하는 사활 싸움이고 원쑤사이죠.  그러나 진정한 적과는 좀 다르죠. 평론가의 눈에는 영원히 완미한 작품이 없어야 해요, 진정한 평론가는 작가를 괴롭히고 고통에 빠뜨리는 걸 신조로 삼고 그 멋에  사는게 적절하다면 이건 작가들에겐 화가 아니라 복이죠. 왜냐 하면 병이 없는 작가란 원체 쌀의 뉜데 그 병을 떼는 유일한 방법이 단 하나, 똑똑한 평론가들에게 되게 혼쌀 나는 거죠. 평론가들이 작가를 원쑤 대하듯이 호되게 족칠수록 그게 약이 되고 그러느라면 아무리 무서운 병에 걸린 작가라도 건강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아, 알만합니다. 좋은 작품이 나오지 못하는 원인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죽어가는 게 다 의사 탓이란 거야 너무 무단적인 결론이 아닙니까? 그런 의미야 아니겠지요.”   “그야 그렇죠. 자신의 건강이야 본인이 책임져야죠. 내외인(内外因) 관계랄가요.”   “아아, 그렇군요, 헌데 지금 같은 인터넷시대에 소설이란 게 정말 현실적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봅니까? 지금의 젊은이들은 위쳇이나 틱톡을 놀지언정 소설 같은 건  보기 싫어하지요. 고작 본대야 현실과 아무런 상관없는 허황한 이야기나 보기 좋아하구요. 그러다 보면 젊은 작가들도 자연히 독자들의 구미를 맞추느라 애를 쓰게 되지요.”   “단일하게 어느 한 류파의 심미적 관점으로 그 외의 모든 창조적인 문학을 배척하는 건 망녕스러운 짓입니다. 이건 모파상이 한 말입니다. 나는 아직도 경전작가들의 어떤 말들은 심히 도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젊은이들 앞에서는 될수록 그런 말씀을 삼가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자칫하면 욕을 볼 수가 있지요. 하물며 우리도  젊은 시절에 제멋대로 글을 써서 선배들한테 무지 욕을 먹었댔죠.  ”   “거야 다 옳은 말씀이죠. 다만 소설이 앞으로 예술과는 전혀 무관한 노리개로 전락되지나 않을가 우려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금 꼴을 봐서는 문학의 운명이 너무 위태해 보인단 말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얼마 못 가 문학이란 게 예술성을 떠나 유명무실한 존재로 남지 않을가요?”     “그건 부질없는 걱정입니다. 문학의 미묘함을 다른 예술쟝르들이 대체할 수가 있습니끼? 없다는 게 당연하죠, 그러니 문학은 결코 쉽게 죽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야 물론 좋지요. 그런데 길부관장님이 어떻게 그걸 단정합니까?”     “공동문 지금 소설을 봅니까?”     “봅니다, 시간이 날 때엔.”     “왜서 봅니까?”     “즐겨하니깐요, 재미로 봅니다.”     “바로 그겁니다. 당신같이 문학에 인이 배기고 재미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문학은 결코 훼멸되지 않을 겁니다. 하물며 당신처럼 얼빤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디 한둘인 줄 아십니까? ”     “말씀을 드럽게 하시는군요. 지금 저를 모욕하는 겁니까?”     “아아, 화를 내지 마십시오. 본심이 아닙니다. 당신처럼 문학의 불행한 처지를 우려하다 보니 말이 그만 빗나갔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욕할 게 아니라 소설을 도무지 보려고 않고 관심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욕해야지요. 소설도 안 보구 산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럼, 소설이 확실히 가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합니다. 여러가지 좋은 점을 다 말하지 않더라도, 숱한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한평생 이 노릇으로 밥먹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절대 나쁜 일이야 아니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홍루몽》으로 밥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이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아아, 나는 길부관장님이 문학인들의 고상한 직업을 먹고 살기 위한 짓거리로 말하는게 듣기에 거북하고 심히 고깝습니다.”     “아아, 제발 오해하지 마십시오. 누굴 비꼬아 말하자는 게 절대 아닙니다. 난 그저 당신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느라고 그런 겁니다. 문학도 다른 전문업처럼 결국은 먹고 살아가는 직업이란 걸 부인할 수는 없는 거고 그걸 속되다고 생각하면 더구나 틀립니다. 권고하지만 문학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심리건강에 상당히 해로와요, 그곳에 오입(误入)하여 잘못된 사람이 얼만지 아십니까. 문학이란 걸 너무 신중하게 생각지 마십시요. 그저 아이들의 유희와 비슷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아아, 유희라니요? 무슨 롱담을 그렇게 험하게 하십니까, 이렇게 엄숙한 문제를 아이들 놀음에 비기는덴 저는 동감할수 없습니다!”     “롱담이 아닙니다. 내가 유희라고 말하는 건 역시 비유를 하려는 겁니다. 공동무, 자꾸 께끼지 말고 좀 내심하게 들어주시면 안됩니까? 이렇게 자꾸 삐치니 감이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아아, 알았습니다. 더 께끼지 않겠으니 계속 말씀하십시오.”     “모든 사물의 내면엔 규률이나 규칙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유희와 같은 거다 이 말입니다. 유희를 진행할 땐 놀음규칙을 제정하고 놀지요. 그런데 유희를 오래동안 노느라면 자연 권태를 느끼게 됩니다. 십분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권태를 느낀다는 건 신선한 자극성과 사람을 흥분시키는 재미를 잃게 된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유희를 더 재미나게 놀려고 원래의 규칙을 다시 수정하고 거기에 다른 의미와 내용을 더 증가하고  다채로운 형식도 창조하여 계속 놉니다. 놀다가 권태를 느끼게 되면 또다시 규칙을 바꿉니다. 결국은 유희의 형식과 내용이 자꾸 바뀌게 되지요. 그런데 례외가 있습니다. 소수의 극히 총명한 사람들은 아예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걸 창조합니다. 카프카, 도스토예브스끼, 헤밍웨이, 쵸이스, 플루스, 버얼호스, 칼유노, 마르코스, 중국의 로신 그리고 당신이 아까 례를 들던 잔설 같은 분들이 바로 이런 지극히 총명한 사람들이지요.”     “도리는 있지만. 저는 유머스런 쎄르반떼스, 하쎄크나, 간결한 문체를 주장하는 헤밍웨이, 바베르나, 로신선생, 당대의 여화, 왕삭같은 작가들은 좋아하지만 쵸이스나 플루스트, 버얼호스나 잔설 같이 독자를 전혀 무시하고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작품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거야 물론 공동무의 자유지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자신의 협애한 호오(好惡)적 기준으로 문학전반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건 틀림니다. 머리를 써가며 읽어야 하는 소설을 혐오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나 재미만 추구하고 유머 따위나 좋아하는 그런 습성을 고쳐야 합니다. 물론 쵸이스나 플루스트, 버얼호스나 잔설 같은 사람을 리해하자면 당신 수준엔 아직 힘들 겁니다. 공동무야 순전히 재미로만 소설을 보니까.”     “아아, 왜 또 이러십니까? 나는 공평하지 못한 대화가 되는 걸 싫어합니다. 그래 길부관장의 눈엔 내가 시시한 우스깨나 좋아하는 사람으로만 보입니까? 쵸이스나 플루스트, 버얼호스 같은 사람들이 아무리 명성이 하늘을 꿴다 해도 유머도 잘 모르는 그들이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당신 말 대로 문학이 정말 유희와 같은 것이라면 재미부터 있어야지 재미가 꼬물만치도 없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또 오해하시는군요. 고의적으로 당신을 모욕하자는 게 아닙니다. 내 말은 재미를 위한 유머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유머란 결국은 조미료와 같은 거지요 그게 뭐 어쨌다고 그렇게 노여워하십니까? ”     “조미료라니? 그래 유머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맛내기 같은 거란 말입니까? 정  이러시다간 당신은 정말 나한테 혼날 수가 있습니다. 로신선생이 그래 남을 웃기기나 하자고 아큐를 창조했습니까? 유머가 진실에 접근하기 가장 훌륭한 수단이란 걸 생각이나 해보았습니까?”     “나도 유머를 싫어하진 않습니다. 세상에 유머를 반대할 사람도 없어요. 그저 유머를 이상하게 올리추며 말하는 당신의 의도가 하도 의심스러워 말하는 겁니다. ”     “아, 기가 찹니다. 길부관장은 지금 어데와 있습니까? 벽에 끼워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아닙니까? 이게 뭐 형식미나 행위예술 같은 건 아니겠죠?”     “뭐요?! 벽에 끼워있다니요. 에크! 우리가 말만 하다 보니 내가 이 꼴로 있다는 걸 깜빡 잊었군요.”     “흐허허, 그게 바로 유멉니다. 유머예요.”     “공동무, 우리가 지금 웃고 있을 땝니까? 우리가 이런 쓸데없는 걸 쟁론해서 뭘 합니까? 문학의 운명이 우리 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 겠습니다. 하마트면 문학인지 뭔지 하다가 큰코 칠 번했습니다. 공동무, 우리가 어떻게 되여 이런 잡담을 시작하게 됐습니까?”   “글쎄요……아아, 아까는 저의 딱한 사정을 길부관장님하구 말하려던 참이였는데 그만……”   “딱한 사정이라니, 그건 또 뭡니까? 저와 같은 위급한 사정이야 아니겠지요.”     “제가  솔직히 알려 드리면 공안국에 신고야 하지 않겠지요?”     “참 답답하십니다. 지금 내가 이 꼴을 해가지고 남을 신고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과연 그렇군요……길부관장님은 요즘 텔레비를 봅니까?”     “시간이 있을 땐 봅니다.”     “텔레비에 나오는 강도 얘기를 못 들었습니까? 아마 방송을 한 것 같은데……”     “아아, 공동무가 그 수배령에 나오는 강도……란 말입니까?”     “왜요? 믿을 수 없습니까?”     “정말 믿기 어렵습니다. 오--, 제가 이제야 경찰들이 당신을 붙잡지 못하는 원인을 알겠습니다. 공동무를 강도라면 누가 믿겠습니까? 문화관에서 사업하신 적이 있다지, 말을 해보니 문화인이 확실히 옳은데. 그런데 어떻게 되여 강도질하게 됐습니까. 점잖은 신분에 그래두 되는 겝니까?”     “제가 무슨 문화인이겠습니까. 그저 한때 순전히 취미로 오입했을 뿐이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실 강도질한 건 그럴 만 한 사정이 있어 그런 겝니다. 막부득이한 사정이였지요. 한두입으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전문으로 할 타산은 없습니다. 그런데 난 길부관장님이 야밤에 이곳에 이러구 계시는 게 전혀 납득이 안됩니다. ”     “후유. 말두 마십시오. 일구난설입니다. 이렇게 합시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 어데 가서 한잔 하면서 천천히 얘기를 나눕시다. 내가 한턱 내지요.”     “그게 좋겠습니다. 제가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그런데 찬찬히 보니 어데 단단히 걸린 것 같습니다……품이 많이 들겠습니다......”     “근심 마십시오. 헛수고야 시키겠습니까. 수고비를 택택히 드리겠으니 나를 빨리 이 벽에서 빼만 주십시오.”     “수고비라니요? 그걸 미안해서 어떻게….”     “천만에, 공짜로 일을 시키면 제가 오히려 미안하지요. 한 만원 쯤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그런데 돈은 확실히 있습니까?”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어디긴, 공상은행이지요.”     “알긴 아는군요. 난 지금 은행금고에서 돈을 가지고 나오다 이렇게 걸린 겁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길부관장님을 흉보는 건 아니지만 일처리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   “뭐가 지나칩니까?”   “말하자면 은행을 치고 돈을 털어가는 량반이 이렇게 힘든 일에 고까짓 만원을 보수로 준다는 게 저로서는 달통되지 않습니다. ”     “털어가다니요? 내가 지금 돈을 털어가는 게 절대 아닙니다. 그저 돈을 은행에서 가지고 나오는 길입니다. 자기 돈을 찾아가는 것과 같은 도리죠.”     “네, 그럼 가지고 나온다고 칩시다. 그런데 제가 길부관장님을 구해주지 않으면 나 밖에는 다른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고까짓 만원 돈으로 이렇게 위험한 일을 나한테 시킨다는 게 공정합니까?”     “공동무의 속알머리를 알 만 합니다. 그럼 구구히 쟁론하느라 말구 시원하게 값을 불러보십시오. 도대체 얼마를 주면 되겠습니까?”     “반씩 나누면 어떻습니까?”     “아아, 그건 너무합니다. 반씩이라니? 이거야말로 멀쩡한 대낮에 하는 강도행위가 아닙니까?”     “그럼 얼마면 되겠습니까? 서로 마음 상하지 않게 잘 상론합시다.”     “3대 7로 합시다. 나 7, 당신 3.”     “털어가지고 나온 돈이 모두 얼마나 됩니까?.”     “내가 금방 말하지 않았습니까? 털어가지고 나오는 게 아니라니깐요!”     “미안합니다. 깜박 잊었군요. 그래 지금 가지고 나온 돈이 모두 얼마나 됩니까?”     “일전도 곯지 않게 1천만원입니다.”     “아아, 적잖구만요. 그럼 내가 양보할 테니 4대 6으로 합시다. 나 4, 길부관장 6. 전 그 이상 더는 양보할 수 없습니다.”   “아아……그럼, 시간도 바쁜데 그렇게 합시다.”     사내는 길라를 벽에서 빼내려고 안깐힘을 다썼다. 하지만 갖은 방법을 대여 반나절이나 역사질했으나 애타게도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역시 길라의 큰 연장때문이였다. 어떻게 어디에 단단히 들어박혔는지 아무리 쥐여당겨도 아프기만 했지 빼낼 수 없다. 튼튼한 콩크리트벽에 영 들어박힌 게다.     “아아, 상황을 보니 오늘 밤으론 안 되겠습니다. 벽을 기계 같은 거로나 부수어 마스든지 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제발 좀 더 노력해 주십시오. 내 목숨은 당신 손에 달렸습니다.”     “심정은 알만하지만, 당신의 거시기가 너무 큽니다. 그걸 떼버리지 않구서는 불가능합니다.”     “떼버리다니요, 그것만은 안됩니다.”     “후. 거야 그렇죠. 돈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걸 떼여 버리구서야 어떻게 얼굴을 들구 나다니겠습니까. 사는 멋이 없지요. ”   길라는 울컥해지며 눈물이 다 난다.   “길부관장님,미안합니다.제가 도와주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정말 방법이 없어 그럽니다. 용서하십시오.”      사내가 담배를 한대 피워물고 또 한대 불을 붙여 그의 입에 물려 준다. 둘은 얼굴을 마주하고 묵묵히 담배를 피운다. 사내는 담배를 다 태우고 일어나며 그의 손을 잡아준다.     “너무 상심해 하지 마십시오. 래일 경찰들이 오면 방도가 있을 겝니다. 몇해 감옥에 있다가 나오면 될 텐데 먼저 살구봐야지요. 저는 아마 가봐야겠습니다. 날이 밝겠습니다.”     “아아, 공동무, 제발 가지 마십시오. 내 당신하구 상론할 게 있습니다.”     “부탁할 게 있으면 하십시오.당신의 안해한테 전화라도 쳐주든지 할게요.”     “그게 아닙니다. 공동문 강도시니 칼이야 가지고 다니겠지요?”     “칼을 해선 무얼 하자구 그럽니까?”     “나를 죽이구 이 돈을 꺼내가지고 가십시오.”     “무슨 소리를 합니까! 살아야지 죽다니요? 그런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마십시오.”     “살 면목이 없습니다.”     “그게 면목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죽은 정승보다 산 개가 낫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난 공동무와 다릅니다. 당신이야 지금은 강도 신분이니 괜찮지만 난 아직까지두 멀쩡한 문화인이란 말입니다. 이 꼴로 어떻게 삽니까? 그리구 감옥엔 절대 못가겠습니다.”     “허유, 죽을 때가 다 됐는데두 체면을 세우려구 드니, 쯧쯧, 당신 같은 사람들이 그래서 큰 일을 못하는 겝니다. 생각이 너무 복잡합니다.”     “공동무는 우리 진짜 문화인들의 심정을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건 관두구. 도대체 내가 하라는대로 할 만 합니까?”     “난 사람은 죽여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구두 강도질 한다구 하십니까?”     “강도란 걸 하고싶어 하는 줄 아십니까. 저도 마지못해 하는 겝니다. 길부관장님은 강도질하는 게 무슨 재밌는 일인 줄 아시는 모양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딱한 사정이 있더랬습니까?”     “그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길부관장님도 아시다 싶이 문화인이란 게 체면이나 지킬 줄 알았지 남의 걸 빼앗고 등쳐먹는  재간이라도 있나요? 나를 봐도 식솔은 많지, 적은 로임으론 살아가기 어렵지, 까짓 소설을 써서야 죽벌이도 안되겠지, 하도 답답 해서 몇해 전에 현문화관에서 사직하고 돈 벌러 떠났습니다. 한해 부지런히 막일을 해서 돈도 꽤나 벌었더랬는데 설 쇠러 집으로 가는 길에 도적놈들한테 몽땅 털렸습니다. 집에는 로인이구 녀편네구 애들이구 눈이 펀해 기다리는데 제가 빈손으로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만큼 벌자니 며칠 사이에 어데 가서 그렇게 많은 돈을 벌겠습니까? 그래서 이 짓을 시작한 겁니다. 털린만큼 벌어가지곤 집으로 가려고 했지요.”     “아, 공동무의 심정을 리해할 만합니다. 오늘 차라리 잘됐습니다. 여기 있는 돈이면 공동문 한평생 못다 씁니다. 그러니 어서 날 죽이고 이 돈을 가지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강도 노릇에선 손을 떼십시오. 그렇게 위험한 노릇을 아짜아짜해서 어떻게 계속 합니까?”     “돈만 있다면야 강도질을 왜 하겠습니까. 집에 돌아가면 손을 싹 씻겠습니다..”     “그런데 요구가 있습니다. 그걸 꼭 들어줘야 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장 죽어가는 사람의 요구야 들어줘야지요.”     “난 공동무를 믿습니다. 만약 속인다면 저승에 가서두 당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요구나 빨리 말하십시오. 시간이 긴박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나를 죽인 후 저의 시체를 사람들 모르게 먼데 가져다가 묻어주십시오. 관 같은 건 필요없구 깜쪽같이 묻어버리면 됩니다.”     “그렇게 하자믄 얼마나 품이 들구 시끄러운지 압니까? 건 관둡시다.”     “절대 안됩니다. 내 신분이 들어나게 되면 헛죽는 겁니다..”     “오, 알 만합니다. 그렇다면 길부관장님 말씀대로 해드리지요.”     “그리고 이 돈을 공동무가 6등분을 가지십시오. 나의 몫은 제가 몇사람의 이름을 대줄 테니 남들이 모르게 가져다 주십시오. 다 나의 가장 친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지요.”   사내는 목책과 연필을 꺼내든다.     “저의 아버지 이름이 길남철입니다. 강남거리 13조 2호에서 삽니다. 150만을 가져다 드리십시오. 아버지의 소원이 집체호 시절에 가있던 시골에다 학교 하나 짓는 건데 이 돈이면 충분할 겁니다.”     “집의 부친은 참 착한 어른이시군요.”   “법이 없어도 살 분이지요. 후--, 전 외동 아들로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다 보니 아버진 엄마노릇까지 해가며 나를 애나게 키웠습니다. 어릴 때는 앞으로 커서 아버지한테 최상으로 효도하겠다고 수백번 마음 다졌지만 정작 장가들고 아들까지 둔 오늘까지 난 진짜로 효도 한번 못했습니다. 언젠가 아버지하구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옛날부터 털은 내려 쓸게 돼있다고, 네가 제자식이나 잘 키우고 안해와 함께 잘 살면 그게 효도를 다 한 게다, 이러시더라구요……”   길라는 목이 메고 눈굽이 젖어난다.   사내도 감동되는지 눈을 슴벅거린다.     “미안합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공동무가 조급하시겠는데......리옥녀라고 저의 안해입니다. 길남소학교에서 교원을 하지요. 150만원을 그한테 주십시오. 80만원은 아들 이름으로 은행에 장기저금을 해놓으라고 일러주십시오. 그리고 5만원을 꺼내 내가 써둔 글들을 정리했다가 몇해 후에 책을 하나 내라고 하십시오. 죽더라두 뭔가 남겨야지요. 50만원은 시3중의 최용이라는 교원을 갖다 주십시오. 요즘 암에 걸려 들어누웠습니다. 딱친군테 마음 뿐이지 아무 것두 해준 게 없어서 그럽니다. 이 돈으로 치료도 하고 살림도 보태라고 일러 주십시오. 나머지 50만원은 충산가  문화소에 있는 송희라는 처녀한테 꼭 가져다주십시오. 내가 걔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잊지 못하고 가더라구  전해주시오..”     “길부관장님은 마음씨도 곱고 아주  팔방미인이십니다. 헛되게 살지 않았어요.”     “송희 말만은 내 안해한테 하지 마십시요, 부탁입니다.”     “그만한 도리는 저두 압니다. 근심 마십시오.”     “돈을 가져다 주는 방식이나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공동무가 머리를 잘 써서 감동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주십시오. 돈을 갖다 주면서 잘 말해주시오. 부탁입니다. 될수록 재밌게 이야기를 만들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영원히 잊지 않게 해줘야 합니다. 공동물 믿겠습니다. “     “그만한 재간은 아직두 있습니다. 통속소설을 꽤나 썼으니깐요.”     “그럼 시간두 많이 갔는데 어서 일을 시작하십시요.”     사내가 조그만 손칼을 품에서 꺼내 들었다.     “칼이 너무 쬐꼬마구만요. 그걸루 되겠습니까?”     “ 쓰기엔 불편 없습니다. 시름 놓으십시오..”     “그럼 시작하십시오.”     “길부관장님이 고통스럽지 않게 단칼에 요정내주지요. 그리고 천천히 수습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생각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실수없이 잽싸게 해주십시오. 믿고 부탁합니다.”   “길부관장님, 정작 이렇게 갈라지자니 정말 섭섭합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인생을 마치고 가는 길인데 한을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그럴 시간이 있겠습니까? 공동문 할 일이 많은데요.”   “내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난 무슨 일을 하나 솜씨가 빨라 시간이 충족할 겁니다.”   “저를 념려해 주시는 마음은 고맙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죽기 전에 할 말이 많을 것 같던데 지금 정작 당하고 보니 그렇지 않군요. 생각해 보십시요.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대야 만구할 수는 없는 거구요. 리상이나 미래를 운운한다는 건 더 터무니 없구요. 두고 떠나는 아버지나 안해, 친구와 정부까지도 적지만 난 성의를 다 했습니다. 시름놓고 떠나게 되여 마음이 편합니다. 하지만 공동무의 성의를 봐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씀을 꼭 하세요.”   “저---, 우리 동네에 100살을 사신 할머니 한분이 계셨어요. 몇해 전에  로인의 100돐 기념잔치를 동네에서 크게 벌렸댔죠. 그날 내가 할머니한테 말씀 한마디를 청했더니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나 100살을 살았지만 한나투 산 것 같지 않다. 이제 백살을 더 살았으면 좋겠구나, 하, 이러시지 않겠습니까!”   “아아!”   “전 그때 뭔가 느껴졌지만 똑똑히는 몰랐습니다. 오늘 정작 죽을 림박에 이르니 할머니의 말씀이 리해되는군요. 인생이란 너무도 짧습니다. 난 40년을 살아왔습니다. 내가 지금 후회되는 게 있다면 금싸락 같은 시간을 너무 허무하게 보낸 겁니다. 하다면 길지 않은 인생이라도 시각시각을 금싸락처럼 아끼고 의의있게 보냈더면 좋은 일도 많이 했을 텐데, 그랬더면 마음이 지금처럼 허전하고 아프지야 않겠지요……”   동녘이 희붐이 밝아온다.   “말이 또 길어졌군요. 이젠  여기서 인사나 하구 갈라집시다..”   “그러죠. 길부관장님, 우리 둘의 문학에 대한 관점은 서로 다르다지만 저는 오늘 길부관장님한테서 공부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차, 공동무, 내가 아까 한 말들을 다 믿지 마십시요. 그게 다 두루 얻어듣고 본  소리를 얼렁뚱땅 엮은 겁니다. 모르시갰지만 내 별명이 원래 대폽니다. 쯧쯧, 당신 같은 고지식한 사람이나 그런 말을 들어주지 원, 공동무, 나 같은 엉터리 학문가들이 이 세상에 아직도 많으니 앞으론 꼭 조심하세요. 내 말을 들어 랑패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갈라집시다. ”     “공동무가 건강하시고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금싸락 같은 시간을 나처럼 허타히 랑비하지 마세요. 인생은 순간입니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말이 떨어지자 사내는 칼을 들었다. 그리고 바로 길라의 심장을 겨누어 찌르려는 순간, 길라는 그의 어깨 너머로 부랴부랴 이쪽으로 달려오는 백작부인을 보았다.     “죠또마떼(일어:잠간만 기다리라는 뜻)......”     급해맞아 외마디를 웨친 길라는 목소리의 여음이 채 사라지기 전에 심장에 칼을 느끼면서 투명한 자기의 령혼이 하늘 끝으로 날아가며 웃는 캐드득 소리를 들었다……                                   (끝)          
225    귀향곡 (외 3수) 댓글:  조회:1146  추천:0  2021-06-24
귀향곡 (외 3수) 박문희   넋 놓고 쳐다보는 노을의 꽃날개 바위숲 아래 북소리로 끓어 번지오 가는 구름 잡아 묶어 뱃놀이 하고 두 별 사이에 길 빼고 드론 날리오   배고픈 달구지냄새 노랗게 덥고 배부른 다리미숯불 빨갛게 맵소 땅속에 박힌 마당발 암초로 굳었지만 가지로 불거진 조막손 백년하늘 닮았소   살진 봄바람에 타들어가는 시간 취기어린 귀향시대 대문 두드리오 신들린 보석 풀어헤친 가슴 희대의 꽃무리로 타오르오       석 양   빛의 포물선 익는 소리 부채살에 매달리고 풍화된 폭포의 화석 백발의 비단 잉태하네   노을을 등에 지고 곤두박질하는 저녁 해 신들린 빨간 꼬리로 까만 영상 구워내네   달빛에 찍힌 나뭇잎들 밀어 주고받는 사이 바람이 가라앉은 호수 영마루 넘어가네       폭 서   피맺힌 가슴속에 눈시린 빙산 끓어번지고 불바람 우거진 바위 끝에 백년이끼 헐떡인다   시루에 찐 보석 바닥을 구르며 널뛰는 소리 산등성이에서 골물로 터져내리는 능구렁이 대군   투명한 날개 불사르며 달려와 꽃뱀으로 칭칭 감긴다 들숨날숨의 허리 잘라먹으며 빨간 세상 구워낸다       까만 눈동자   꽃샘추위 시작될 무렵 어디선가 기어 나온 애고사리에 잡혀 아렴풋한 그림 속으로 끌려들어갔네   산 너머 무연한 잔디밭 아지랑이 노는 곳에서 온 머리에 샛별눈 만발한 잠자리 엎어지며 달려오네 침묵이 다반사인 이파리지만 살집은 야무져 탐스럽네   살얼음 서걱서걱한 가슴벽위에 한껏 부푼 복수초로 피어났네 복수초로 피었다가 무지개로 사라졌네   착한 바람에 피곤한 눈 감고 흩어진 때깔조각 깁고 또 깁네 하얀 밤 빨간 양산 그늘  동그란 파문의 머리는 가고 한없이 예쁜 눈동자만 남았네   눈시울에 앉은 파랑새 놀랠세라 산간 벽수 안개비속에  소리 죽여 흐느끼네   《연변문학》 2021. 6
224    과 원 댓글:  조회:1216  추천:0  2021-02-01
과 원 파랑새 방울새 우짖음 하얀 구름산자락에서 풀색으로 피어날 때 별무리 흐르는 산정 호수 빨간 노을에 흠뻑 취해 둥그런 달덩이로 불끈 솟네. 쿵쿵 방아 찧는 천 길 폭포에 비단결 풍운조화 이네. 흘러가는 흰 구름에 쌍으로 드리운 칠색 무지개. 천실만실로 용두레 감싸 안은 수양버들 늘찬 가람으로 출렁이고 저 산허리 휘감은 꿀내음 너울너울 향무(香舞)를 추네. 
223    밤의 율동 댓글:  조회:1141  추천:0  2021-01-15
밤의 율동 (1)     반딧불이 반짝이는 구름다리 위 명멸하는 거룻배의 전조등과 후미등이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별똥 무리를 추적할 때 풀잎에 깃든 이름 모를 작은 벌레와 벌레의 등을 타고 앉은 그윽한 달빛이 잠든 바람을 툭툭 건드리며 저녁노을 너머 지평선을 막 넘고 있는 석양의 꼬리를 깔끔하게 먹어 버린다.   시장을 강타한 춘하추동 사시상품에 이어 요즘은 테러 관광과 환각 여행 상품도 새로 개발되어 상점, 극장과 영화관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테러와의 게임에 대비한 무기장비도 히트 치며 열매 중.   샨데리야 파벌 간의 박투 속에서 만신창이 된 나비 넥타이와 하이힐의 그림자는 밤의 복벽을 꿈꾸는 새벽 모살 계획을 바람에 새겨 병풍산으로 환생한 축복의 신전에 족자로 드리운다. 뙤창문 잠근 블랙홀에 갇힌 불의 화석은 물 위에 뜬 징검다리 업고 가는 오리 떼의 종적을 예의 주시한다.     (2)   거리의 밤하늘은 하늘 밖, 바다 밑과 지상, 지하의 뉴스 전하기에 드바쁘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석유 전쟁의 깃발, 은하계 밖에서 날아온 편지……십분 근사한 화면, 흥분에 한껏 상기된 얼굴, 여자 아나운서 우물눈이 네거리의 밤하늘에 가득 찬다. 대형 홀 창문 밖에서 산책하던 청중들 백이면 백이 다 그 깊은 우물눈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구조대가 긴급 출동한다.   핵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천리 평야에 백 개의 태산과 지하 도시를 신축했으니 태산 밑 지하 도시 규모는 지상을 능가하고 새 지하 하천의 폭과 길이는 나일강이다, 아마존강이다, 장강이다.   동녘 지평선에서 보이지 않는 까만 불덩이가 뜬다. 새로 태어난 태산무리 허리를 칠색 비단구름이 휘감는다. 그 위를 산책하는 천만 틀의 물레방아가 노란 하늘과 빨간 태산의 투명한 풍경을 배경으로 보랏빛 악장을 쿠웅―쿵 연주 중이다.
222    말똥 거르기 댓글:  조회:1092  추천:0  2021-01-11
말똥 거르기 (1)   빗소리 나팔소리 휘파람 소리 횃소리 영각 소리 돼지 웃는 소리 벼랑 가에 쥐 탄 놈 노 젓는 소리 얼음에 튀긴 잡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기름진 엉덩이 두드려 주는 소리 가렵지 않은 넓적 배 긁어 주는 소리 찢어진 상처에 소금 치는 소리 소금 친 상처를 기워 매는 소리 고속철 맨드라미 기어가는 소리 인공위성 꽁지에 별빛 스치는 소리 고무줄 탄 소똥이 하품하는 소리 종이배 위 말똥(馬糞)이 잠꼬대하는 소리 (2)   귓구멍 안에서 뿌지직 뿌지직 말똥(語屎)이 서 말 닷 되 밀밀 나온다. 대나무 속대 얼궈 뽑은 새파란 숯불 얼음조각 구워 빚은 빨간 탕후루 모난 가루 묽은 돌 동글납작 빈대떡 짭짤한 들깨, 참깨 시고 떫은 산수유 우수수 쏟아져 고분처럼 쌓인다. 돌절구에 털어 넣고 쇠공이로 빻아서 까만 말총 얼개미로 대충대충 거른다. 말똥가루 한 잔에서 벼룩이 논다. 팔딱팔딱 곤두박질 재주넘는다.
221    우주의 방언 댓글:  조회:1149  추천:0  2020-11-18
우주의 방언 상오 열한 시가 넘었는데도 기어이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피후(皮候)의 정곡(正鵠)을 향해 돌진하는 화살 자체가 공중 분해된 바람의 뿌리를 스치는 순간 어지럼증을 느낀 까닭이다. 화살과 시위는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빛의 뒷문이요, 복제된 개기월식이다. 시위 떠난 화살이 되돌아올 수 없다고들 하지만 이미 길에 오른 화살에 대한 설득반송, 혹은 강제반송은 근자에 언론에도 꾸준히 회자되는 사건이다.   유령의 마구간에서 신기루와 혈투를 벌인 도리깨의 귀와 발과 어깻죽지는 호수 위에 둥둥 떠도는 달의 그림자, 아울러 달의 그림자가 낳은 부드러운 능선은 다정다감하면서도 능갈친 우주의 방언이다. 바람개비의 뒤통수를 쥐어 당기는 안장형의 긴 하품은 잔디밭에 피어난 평면형의 짧은 잠꼬대와 더불어 운명의 동일선상에서 안으로 혹은 밖으로 열심히 튀는 방언 속의 돌꽃이다.   염소를 몰고 블랙홀을 방문한 방울새의 발에는 장수(長壽)의 뼈와 살을 만드는 식수(食水)가 시계추로 매달렸다. 홀의 문턱과 한 정거장 거리에서 시동을 멈추고 배꼽에 눈이 달린 블랙홀 두령의 환영연에 초대된 방울새 일행의 귀환 보고서에 따르면 생명폭포의 질주 속도는 제백석이 낳은 만추의 낙엽과 궤를 같이 한다. 불타는 단풍은 귀뚜라미를 베개 삼아 영원히 투명한 허공에 평화롭게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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