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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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봉황새 댓글:  조회:1139  추천:0  2020-01-04
봉황새   약탕관에 오가잡탕 정히 달인다. 해와 달의 폭포수에 약주 달인다.   공룡의 비늘 기린의 뿔 삼족오의 발톱에 가스통 바슐라르1) 아리스토텔레스2) 그리고 문덕수3)의 시론에 유협4)의 ≪문심조룡≫도 털어 넣고 달인다. 조리로 거르고 사포로 쥐어 짠다.   한가위 눈부신 은쟁반 위에서 봉황새 한 마리 포르르 춤춘다. ------------------------------------------ 1)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년 6월 27일 ~1962년 10월 16일)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가장 저명한 위치에 오른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기원전 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대왕의 스승이다. 3) 문덕수(文德守, 1928년 12월 8일~ )는 한국의 시인, 평론가이다. 4) 유협(劉勰, 465년~521년)은 중국 남조 시기의 이론가로서 자는 언화(彦和)이다. 저서에 ≪문심조룡≫이 있다. ≪문심조룡≫은 10권 50편(篇)으로 된 중국 최초의 시문학 평론 저서이다. 
179    팽 이 댓글:  조회:1056  추천:0  2020-01-04
팽 이 곰과 배암 겨울잠 털고 굼벵이 개구리 돌아눕는 소리. 박달나무 꿈 단불에 굽는 이맘때 빙산 저쪽에 징소리 다급하다.   닥나무팽이채 높이 들어라. 그리고 나의 엉덩이 매우 쳐라.   오롯한 뫼 뿌리에 하아얀 비단 발밑에 만경창파 거울로 반짝인다. 갈고 닦은 귀뚜라미 청아한 울음소리 짙붉은 낙조 되어 밤의 쪽문 연다.   닥나무팽이채 높이 들어라. 그리고 나의 엉덩이 매우 쳐라.    은하수 흐르는 새벽의 앞뜨락에 광속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영각소리 백세의 비운 씻고 열려라 참깨 영겁의 세월 깨고 열려라 참깨   닥나무팽이채 높이 들어라. 그리고 나의 엉덩이 매우 쳐라.  
178    삼족오의 이야기 댓글:  조회:1246  추천:0  2020-01-04
삼족오의 이야기 보름달을 뚝 따다 상 위에 걸어 놓고 녹슬지 않는 개구리 합창 들으며 손주 놈 도화지에 그림 그린다. 세발 가진 예쁜 새 그린다.   꼬맹이 고추 쳐들고 따발총 갈길 때 삼족의 새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온 동리가 횃불 되어 찾아 나섰다. 우물 속에 빠졌나? 잔솔밭에 숨었나?   불현듯 저어기 밤하늘 쳐다보니 촐랑촐랑 흐르는 은하수 날으며 반짝이는 별들을 쪼아 먹고 있었다. 바구니에 큰 별을 주워 담고 있었다. 
177    서사시적 대화 댓글:  조회:1180  추천:0  2020-01-02
서사시적 대화 바람이 늦잠 자고 땡볕이 신났다. 귀뚜라미 찬 노래 더위 식힌다.   사시나무 자작나무 오천 년의 이웃 반만년 침묵 깨고 대화를 한다. ——삼복염천에 추워서 파르르 떠는가? ——옳다구나 복더위에 삼천 누더기는 왜? 호랑이 따―웅 계곡 백 리에 비명 날린다. 해가 그만 기겁해서 흙빛이 된다. 
176    회오리바람 댓글:  조회:1331  추천:0  2019-12-31
회오리바람 우리 동네에 회오리가 한 줄금 휘젓고 지나갔다.   김 첨지가 창립한 독채의 이층 양옥 박 도감이 기록한 불멸의 ‘10대 기적’ 남산더기에 깔아 놓은 ‘세기의 낙원’   개발포 오 포장 님 간밤에 바람 맞고 반신불수로 편치 않지만 그래도 정신은 살아 개잡은 포수   휘젓고 간 돌개바람 꽁지에서 새털 한 대 낙하산 타며 매체에 전한다. “오 포장 씨 회오리 타고 미지의 낙원으로 출장 중……”   깃털이 전한 기별에 그만 눈 까집고 혼절했는데 무의식만 살아남아 이렇게 놀고 있다. 
175    등 산 댓글:  조회:1348  추천:0  2019-12-31
등 산 전설 닮은 탑 허리에 칠색비단 휘휘 두르고 짚신감발의 출발 꿈꾼다. 고즈넉한 수풀 만고의 벼랑 가 거기서 경건히 마른 낚시를 한다. 팔딱거리는 잉어 한 마리 낚아 올린다.   별안간 위챗이 영각을 한다. 침묵이 강변(強辯)을 경청한다. 안개 자욱한 허공의 발치에 옛말처럼 생겨난 작은 폭포 새우가 재롱 떠는 물줄기 숨결 퐁퐁 솟는 박동 눈부시다.   
174    생 명 댓글:  조회:1118  추천:0  2019-12-31
생 명 남산 너머 꽃동네 고추 달린 초립동 하나 달개비 한 포기 뽑아 반석 위에 알몸 채로 눕혀 놓는다. 머리 위에선 땡볕이 지진다.   별안간 북녘 하늘에 한가롭던 하얀 구름떼 먹장구름으로 돌변하여 우르르릉 합창하며 달려온다. 불 태양 한입에 꿀꺽 삼킨다.   대로한 불덩이 시커먼 우물 속에 천둥으로 터지자 반석 위에서 재 되어 가던 뿌연 달개비 새파랗게 살아나며 해쭉 웃는다. 
173    아득한 편지 댓글:  조회:1324  추천:0  2019-12-31
제1부 풍구의 바퀴가 서면 수펄은 죽는다  아득한 편지 허공을 정처 없이 맴도는 왕잠자리 까맣게 탄 기다림에 날갯짓 짙붉다.   팔매질에 수면을 뛰어가는 조약돌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간다.   이제 바람의 등에 실려 온 낙엽 창턱에 살포시 쪽잠이 든다.   발밑으로 맨발 밑으로 보랏빛 그리움이 한길 반 높이로 쌓였는데 왜가리 유리병 깡마른 꽃가지 초리 끝에 가녀린 상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린다. 
172    자서(自序) 댓글:  조회:1034  추천:1  2019-12-31
자서(自序)        정년 후 서예라든가 다른 뭔가는 할 생각이 있었으나 시를 쓴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한데 작년 이맘때 우연이랄까 우리 문단의 하이퍼시 주창자 최룡관 시인과 나 사이엔 시와 관련 두 차례의 진지한 토론 기회가 있었는데 처음 토론은 자연적으로 흘러나온 것이었고 두번째 토론은 나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바이지만 토론 끝에 나의 시흥은 유발되었고 종당에는 시 창작을 시작하여 첫 시집을 내기에 이른 것이다. 돌이켜 보면 시초 시에 대한 나의 이른바의 견해(시를 배운 적도 없는 나지만 여러 면으로 받은 기성관념의 영향은 퍽이나 심각했던 모양이다.)는 최 시인과 상당히 어긋났던 고로 근 네 시간 지속되었던 첫번째 토론은 가끔 치열한 논쟁 양상을 띠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나는 상대방 견해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기존의 이론을 무기 삼아 대방의 이론을 쉽게 혹은 무작정 부정해 버리는 그런 우는 범하지 않았다는 점, 그 결과로 시의 본질 나아가 시 창작의 본연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음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잘못된 것이 가득 들어찬 속을 다소나마 비워냄이 없이 현자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딴에는 뭔가 안다고 착각하면서 자신의 어설픈 생각을 고집했더라면 나는 오늘까지 시 창작은커녕 시의 진실이 뭔지도 몰랐을 게 뻔하다. 그 이상 남을 웃기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아무튼 지난 일 년 간 시 공부를 하면서 시어의 자유결합, 작품 속 사물의 자유전이, 나아가 시 형식의 중요성 등 주요 관심 사항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가질 수 있었음에 안도한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시를 시작한다니 내 머리에 열이 심한 것 같다며 이마를 짚어 보는 친구가 있었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나는 늦깎이임에 틀림없는 바에야 더 이상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현재를 시점으로 시 인생을 한번 살아보는 것도 살맛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시심을 깨워 준 최룡관 시인에게 감사한다.   2017년 초봄 박문희
171    [시] 낙 조 (落照) 댓글:  조회:2504  추천:0  2019-12-04
낙 조(落照)   □박문희   저무는 해 바위뿌리에 비끄러매고 황야에 엉겨붙은 풀벌레울음 달래며 허공의 설레임을 아슴하게 물들인 출렁이는 옹기 물컹한 꿈그릇   말뚝이 뽑힌다 송두리째 굵은 밧줄 동강났다 하얀 피 토하며 지는 해 따라 둥글이 서산아래 나가떨어지고 난바다에 휘영청 은접시 뜬다   터질듯 부푼 노을의 세포줄기에 각본에 없는 공중누각 쌓아올리고 사시나무 떨어대는 무풍지대 언덕에 봉두난발의 빛살 한 묶음 배달한다   《송화강》잡지 2019년 제6기
170    [시] 돌의 언어 댓글:  조회:2825  추천:0  2019-10-22
돌의 언어 ▢박문희 불에서 태어나 혼돈과 암흑의 비바람 먹고 티끌의 숨결에 태산으로 우거진다. 천둥이 운다. 두다리 썩둑 잘라 기우는 하늘 떠받치고 뻥 뚫린 구멍 혼신 불살라 틀어막는다. 산들바람 조약돌 기암괴석 실안개 물방울 속삭이면 몸 열어 반겨주고 애고사리 손 저으면 징검다리 놓아준다. (2019: 《중국조선족시선집》)
169    야생달빛의 내음(외 1수) 댓글:  조회:2860  추천:0  2019-10-20
야생달빛의 내음(외 1수) □박문희   샛눈 뜬 퉁소소리 바지랑대 타고 쥐굴로 스며들어 하얀 벽에 얼어붙은 까만 어둠 추방한다   등굽은 능선아래 모로 누운 착한 촛불 치맛폭에 쓸어담은 부스럭 바람에 휘청인다 앞버덕 찬 빗소리 불러 뒷동산 따가운 별빛에 요리한다   눈물 아롱진 현악기 등줄기 기별쪽지 한 되박 쏟을 때 봄 캐는 아지랑이 가슴에 뭉클한 안부 흥건하다     로 봇   방울새 만발한 버들가지 맨발로 달려와 칭칭 감기고 영롱한 베아링 껌으로 씹어 시들지 않는 나팔꽃 피운다   고양이 혀 내두른 날씬한 허리 다람쥐 보조개 닮은 해쭉 미소   가공의 불구름 소나기로 튀던 밤 봉황치마 뒤집어쓰고 눈부신 발레댄스 추며 설설 쇳물 끓는 함정속에 불사조로 뛰어들던 꽃다운 갸륵 천사!   나팔꽃이 웃자 소나기 멎었다 (《도라지》잡지 2019년 5기)  
168    《천개의 고원》학습필기-10 댓글:  조회:2144  추천:0  2019-10-14
《천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다섯 번째 원리와 여섯 번째 원리는 지도제작술과 전사술(轉寫術)의 원리이다. 여섯 번째 원리에 해당하는 전사술의 원리는 모사(模寫)나 재생산의 논리에도 맞는데 이는 수목체계의 위계 모델에서도 발견되듯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떠서 나타낸 모상(模相)에 다름 아니다. 모상(模相)은 항상 동일한 것, 말하자면 통일적인 것, 위계적인 것, 중심적인 것과 만나며 그것을 흉내 낸다. 책과 연관시켜 말하면 그것은 새로운 내용물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물을 베껴내는 것이며 책을 복제하는 것, 즉 같은 내용의 책을 적게 혹은 많이 찍어내는 일이다.   그러나 리좀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지도는 전사술 혹은 모사와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망상(網狀)조직, 그물(網, 네트)과 한 족속으로서 항상 열려있으며, 거의 무한한 다수의 입구를 가지며, 모든 차원들과 접속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분해할 수 있다. 리좀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다, 사본의 문제는 언어능력의 문제라고 할 때, 지도는 언어수행의 문제 즉 실천문제인 것이다. 모사는 노상 복제를 일삼는 반면 지도는 항상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다수의 입구'로 들어가는 실험을 향해 있다. 네트(網)는 컴퓨터들 사이에 수많은 링크(链接)와 라우터(路由器)들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접속자는 사이버공간을 넘나들면서 모상이 아닌 새로운 지도를 제작한다. 예컨대 노트북을 가지고 그 어떤 장소든 관계없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모뎀(调制解调器) 접속을 통해 네트안에 다양한 입구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리좀의 의의는 통일되고 고정된 이미지로 정형화할 수 없는 운동들의 특성을 통해 이른 바의 불가침의 영역을 깨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는데 있다. 실지 자율적 전자공간으로 일컬어지는 네트의 특성과 리좀적 특성은 상당히 유사하다.   지도의 원리는 비선형적, 수평적, 탈중심적 사고방식과 통한다. 이들은 무의식과 한집안이기도 하다.   의식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의식을 활용하면, 의식은 받아들이는 정보를 단순화시킨다. 많은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깊은 바닷물속의 거대빙산’과도 같은 존재인 무의식은 의식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따라서 정보가 과도하게 많은 상황이라면, 무의식에게 넘길 때 좋은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또한 무의식은 ‘선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 하다면 ‘선형적 사고’란 또 뭔가? 일종의 직선적이며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 단방향적 인과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한 두 개의 변수 사이 고정된 인과 관계만을 고려하고 이러한 함수에 따라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를 맹신한다. 고전 물리학에서 출발하였으며, 정해진 공식을 통해 운동의 결과를 사전에 알 수 있다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선형적 사고에 해당 분야에 깊은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은 당연히 미혹되기 쉽다. 1더하기 1은 2 다 란 식으로 명쾌하게 논리적, 인과적으로 설명을 하며 근거를 제시하는데 어떻게 미혹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우리 인간이 사는 사회가 선형적이라기보다는 비선형적이며 인과적이라기보다는 확률적이라는데 있다. 물질도 극미시 세계(極微視 世界, 極巨視 세계의 반대)로 가면 기계적 인과론이 통하지 않는 양자역학과 같은 현대 물리학으로 설명이 되며 전자의 운동 같은 경우 관찰의 유무에 따라 결과가 변하는 확률로서만 예측이 가능한 세계에 놓여 있다. 기계적 인과론보다는 상호 반응 관계이며 너무나 많은 변수로 인하여 예측만 할 수 있을 뿐 예언이 불가능하다. 극미시 세계뿐 아니라 구름의 형성, 날씨, 물의 흐름 등 또한 비선형 운동의 전형적 예이다. 물질도 이런데 인간 사회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인과 관계가 아닌 상호 반응관계로 얽혀 있으며 그래서 단일 공식으로 도출될 수 있는 필연적 결과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종합하고 수치화 하여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는데 참고만 할 수 있을 뿐. 그래서 책임성이 있는 전문가들은 절대로 서뿔리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한 척척박사이지만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단지 여러 가지 방향성에 대한 가설만 지극히 조심스레 내놓을 뿐이다. 만약 세상이 이렇게 비선형적이며 예언이 불가능한 복잡계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대중들에게 함부로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한다면 이는 양심불량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게 아니고 본인도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공부를 잘못해서 走火入魔에 빠진 반풍수나 선무당에 다름없을 것이다.   수평적 사고와 수직적 사고. 영국 에드워드 디보노의 저서 에 나오는 개념들이다. 한 구덩이를 계속 파고 들어가거나 적목을 계속 높게 쌓아올리는 것이 수직적 사고방식이라면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보거나 적목을 마구 흩어놓는 식이 수평적 사고방식이다.   디보노에 따르면 수평적 사고란 상황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사고하는 방식이다. 그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 때 기존에 전통적인 논리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면을 바라볼 수가 없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수평적 사고를 하여 문제를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 창의적인 문제해결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수평적 사고의 반대되는 개념이 수직적 사고이다. 수직적 사고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기존에 오랫동안 해온 이미 검증된 방식이라서 이 방식을 취하면 위험은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어떠한 문제에 닥쳤을 때 누구나 생각할 수 있거나 많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은 대부분 수직적 사고의 결과이다. 좋게 보면 논리적 사고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관행에 의존한 사고방식이다.   수직적 사고만을 하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 기존에 보아왔던 한 면만 보기 때문이다. 입체적인 사고나 다양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이런 사고방식만을 고집하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으며 문제를 해결할 때 새로운 접근을 할 수가 없다.   지금은 창의성의 시대이다. 때문에 수직적 사고보다는 수평적 사고가 더 중요하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평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의도적으로 훈련해야 한다고 경험자들은 제안하기도 한다. 그들의 제안내역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수평적 사고를 연습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을 의도적으로 채택하지 않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습관적으로 반응했던 것은 일단 보류하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 '다른 원인이 아닐까?'라고 의심해 본다. 그래도 다른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때 최초의 생각대로 행동해도 늦지 않다. 의도적이고 거듭되는 수평적 사고는 창의성을 높여준다. 새로운 접근을 함으로써 생각의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백두산은 술이랍니다 흰 술에서도 독한 술이랍니다   아침 문이 열리던 날 곰할머니께서 고아놓은 술이랍니다. 이 땅이 열 번 다시 썩었어도 이 제 또 다시 열 번 백번 썩는대도 변치 않는 술 영원히 다 먹지 못할 술이랍니다   어머니 배속에서 이 술 한잔 먹고 태여난 내 몸에서 푸르러 있답니다. 에밀레종소리가 내 몸에서 뛰여다닌답니다 리순신 장군의 호령이 내 몸에서 향기로 흐른답니다 훈민정음 자모가 내 몸에서 터지고 있답니다 장백산 줄기줄기 마다에서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나는 그것들에 취하여 발가락 끝까지 빨갛게 오리오리 머리마저 파랗게 고주망태가 되여 살아가고 있답니다.   이제는 죽어가도 산야에 짙푸른 풀 한 이파리 이제 다시 태여나도 첩첩 산을 헤치고 사품치는 강물 한 줌   오오! 백두산 나의 독주여!   최룡관 시인의 시  전문이다.   사상 백두산을 노래한 시는 주지하다시피 많기로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성산 백두산을 ‘독한 술’로 표현한 시는 어쩌면 이 시 한수뿐이 아닐까 싶다. 혹시 이 시가 바로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습관적으로 반응했던 것은 일단 보류하고, '다른 표현방법은 정말 없을까?'라고 거듭 의심해 본 결과가 아닐까”고도 생각해본다.   위에 예든 새로운 사고방식들을 우리의 시 창작에 이용해도 안 될 것 없겠다고 생각된다.
167    《천개의 고원》학습필기-9 댓글:  조회:1986  추천:0  2019-10-13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의 네 번째 원리로서 ‘탈기표(작용)적 도약 혹은 단절의 원리’를 들고 있지만 실제 리좀의 영토화, 도주선에 의한 탈주(도주)를 통해 끝없이 전개되는 탈령토화, 재령토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흥취를 가지는 것은 우선 ‘탈기표적 단절의 원리’중 ‘기표’라는 개념이다. 이른 바의 ‘기표(記表)’란 ‘기의(記意)’ ‘기호(記號)’와 함께 언어학자 소쉬르에 의해 정의된 언어학 용어인데, 언어를 주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시인이라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쉬르는 언어를 기호로 파악하고 있는데 기호와 그 의미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기표’(記表, 한어: 能指)는 기호의 모양이나 소리를 의미하고 ‘기의’(記意, 한어: ‘所指’)는 이 기표에 의해 의미되거나 표시되는 이미지와 개념 또는 의미 내용을 말한다. 기표와 기의를 하나로 묶어 기호(記號)라고 한다.   예컨대 ‘가로수’라는 세 글씨의 생김새(즉 시각적 이미지)와 ‘가로수’라는 발음(ga-ro-su, 즉 청각적 이미지)은 기표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가로수’라는 개념은 기의이다. 이 ‘가로수’라는 기표가 의미하는 내용은 ‘길가나 차도를 따라 줄지어 심은,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줄 뿐 아니라 먼지나 바람, 더위를 막고 공기를 깨끗하게 하는 구실을 하는 나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이 바로 기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들이 ‘기표’와 ‘기의’라는 얇은 두 겹으로 분리되어 있다.   말하자면 ‘가로수’라는 기표와 ‘길가나 차도를 따라 줄지어 심은 나무’라는 기의가 합쳐져 ‘가로수’라는 의미가 발생한다. 이것이 의미작용이다. 그러므로 의미작용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서 일어난다. 한편 기표와 기의가 지시하는 현실 속의 대상(가로수)은 지시체(指示體)이다. 예컨대 우리가 ‘가로수’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 음성적, 활자적 물질성은 기표이고, 그것이 뜻하는 바의 의미는 기의인데 여기서 지시된 대상, 즉 현실 속의 실물(가로수)은 ‘지시체’ 혹은 ‘지시대상’인 것이다. 우리가 글로 적거나 입으로 말할 때의 ‘가로수’는 글씨나 소리일 뿐이지 길가에 줄지어 심은 그 실물(나무)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어의 ‘기표+기의(의미작용)’와 그것의 객관 ‘대상물’을 혼동시하는 경우가 있다. 위와 같이 ‘가로수’를 예로 들면 책에 씌어있는 ‘가로수’란 글씨나 녹음기에 입력되어있는 ‘가로수’란 소리를 객관 대상물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길가의 배나무가 뚜벅뚜벅 걸어온다’라는 시구가 원고지에 적혀있다고 하자. 혹자는 이거 안 된다고 한다. 발 없는 배나무가 어떻게 뚜벅뚜벅 걸어오냐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언어의 의미작용과 그것의 객관 대상물을 혼동시하는 경우다.   기실 언어와 언어 간에는 아주 강한 접속기능을 갖고 있다. 이 기능을 잘 이용하면 상상력을 키우는데 크게 유조할 것이라 믿는다. 하이퍼시는 인터넷 시대의 산물이다. 이름 자체를 인터넷용어에서 따온 하이퍼시는 그 자체가 인터넷의 성질을 많이 닮아있다. 하이퍼시를 받쳐주는 이론도 현대철학의 리더 격인 리좀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이퍼시인들의 시 문법은 하이퍼링크(hyper link, 超链接)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속성을 결합한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특성을 현대시에 차용한 개념의 시가 하이퍼시라 할 수 있다. 이런 하이퍼시는 비선형(非線型), 비인과(非因果), 비고정(非固定), 탈중심, 탈관념, 다방향 등의 특성을 가진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시 세계이다.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차용, 기존의 문장 구조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이미지와 의미구조를 공유하며 시각적 언어와 청각적 언어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기존시에 대한 해체와 파괴를 통한 새로운 조립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하이퍼시의 등장은 인터넷 세계를 살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며 21세기 현대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그런 만큼 하이퍼시는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유동의 지식, 성장하는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연결고리는 리좀의 사유에 닿아있다. 수목의 개념이 계통화 하고 위계화(位階化)하고 혈통화 하는 방식에 있다면, 리좀의 개념은 통일되거나 위계화 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성에 있으며, 혈통에 국한된 협소한 관계가 아닌 광범한 결연관계를 이루는데 있다. 리좀은 새로운 접속과 창조가 이어지면서 열린 사고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그런 개념이다.   그래서 하이퍼시는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해방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시에 담아보려는 언어작업의 예술적 산물로 태어나 현재 한창 성장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새로운 이미지의 공간은 현실과의 만남에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대시로서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하이퍼시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인제 금방 발자국을 뗀데 불과하며, 현재 상당수의 창작은 실험성을 띠고 있으며 앞으로도 상당히 긴 시기내 실험은 불가피하게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약간의 성과물이 있다고 해도 아직은 매우 미숙한 생태이며,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반드시 부단히 수정, 갱신,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문제의식은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기존 관념의 해체와 단절면에 대해서만 봐도 하이퍼시는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해도 시에 대한 이해문제(이른 바의 난해성문제)를 두고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서 극복해야 할 과제가 남는 것이다.
166    《천개의 고원》학습필기-8 댓글:  조회:1895  추천:0  2019-10-12
다양체 관련. 다양체란 4차원 이상의 공간을 연구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으로 점 · 직선 · 평면 · 원 · 삼각형 · 입체 · 구(球)와 같은 기하학적 도형의 집합을 일개 공간으로 보았을 때의 공간을 말한다. 자연이 대표적 다양체라고. 다양체에는 고정된 중심이 없고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가는 운동이 멈추지 않는데, 자연이 바로 그렇다는 것. 개개의 자연사물은 모두가 외부성을 갖는다. 책도 하나의 다양체이다. 세상에 대한 반영이자 반사물인 책도 외부성을 갖는다. 즉 그것은 어떤 다양체에 다른 것이 접속되면서 그 성질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탈주선 내지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된다. 접속되는 항에 따라 차원수가 달라진다. 어떤 개념들을 어떤 문제의식에 연결시키면서 강조하거나 제거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책이 되는 것이다. 낫이 어떤 외부와 접속하느냐에 따라 농사-기계도 되고, 살인-기계도 되고, 혁명-기계도 되는 것처럼. 자연만물은 모두가 리좀적 다양체다. 외부성을 띈 모든 리좀적 다양체들의 상호간 연결접속은 시시각각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인류가 자연을 파괴하면 반드시 보복을 당하게 마련인 것처럼 자연을 보호하면 반드시 그 덕을 입게 마련이다. 무의식도 리좀적 다양체다. 무의식이란 욕망하는 기계의 생산이고 그것의 변형이다. 욕망이란 프로이드가 말한 것처럼 가족적이고 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회적인 것이다. 무의식에는 부모가 없으며, 무의식은 고아다. 무의식 나아가 우리들의 삶 전체는 무리지어 움직이는 다양한 욕망의 집합이란 점에서 리좀적 다양체를 이룬다. 무의식의 문제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증상이나 비현실적인 공상 내지 환상으로만 해석하여 이해해서는 안 된다. 기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현실을 생성하고 변혁하는 문제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을 생산하고 변환하는 문제다. 인간이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삶이 리좀적 다양체이기 때문이라고 클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그들은 슬픔, 기쁨, 증오, 분노, 행복 등의 힘이 출렁이는 자신의 무의식을 자신과 바깥 세계(외부성과 관련됨) 사이에 다양체가 만들어진다는 신호로 풀이한다. 다양체는 바깥과의 접속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기에 그런 접속이 새롭고 낯설수록 에로스(性本能)도 훨씬 더 강렬해진다는 것. 이런 판단들에 대한 이해는 독자 자신의 독자적인 독서와 심사숙고에 맡긴다. 아래 《최룡관시선집》에 수록된 시 전문을 감상한다. 아주 기묘하게 씌어진 특이한 시다. 가을의 들판을 쓴 시들을 두루 보아왔는데, 솔직히 처럼 씌어진 시는 본 기억이 없다. 물론 내가 본 시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양체를 논의하면서 이 시를 감상하는 것은 “자연만물은 모두가 리좀적 다양체”라는 명제 때문이다. 바람독침을 맞아 떼주검이 더덕더덕 매달렸다 풀꽃, 옥수수, 콩, 조 긴긴 상여대오가 흔들린다 소조한 장송곡의 주악속에서 시체속의 노란자위들만 꿈을 베고 눈 뜬다 2개 연에 10행 짜리 짧은 영물시자 하이퍼시다. 웅장하면서도 정교하게 되었다. 웅장하다 해서 정교할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도리를 잘 보여준다. 바람독침을 맞아 떼주검이 더덕더덕 매달렸다 풀꽃, 옥수수, 콩, 조 긴긴 상여대오가 흔들린다 바람이 봄과 접속하면 약침이 되겠지만 가을과 접속하면 독침이 된다. 자연의 한 품종으로서의 바람은 다양체이며 외부성을 가진다. 봄이라는 외부와 접속하면 약침이 되고 가을이라는 외부와 접속하면 독침이 된다. 바람의 성질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약침을 맞으면 만물이 소생하지만 독침을 맞으면 만물이 죽음을 맞는다. 가없는 가을들판이 전부 상여대오의 흔들림으로 설레인다. 정말 근사한 이미지단위(환유)다. 소조한 장송곡의 주악 속에서 시체속의 노란 자위들만 꿈을 베고 눈 뜬다 쓸쓸하지만 장엄한 장송곡의 주악소리 속에서 눈부신 새 생명(노란 자위)들이 죽음을 딛고 탄생한다. 다양체의 접속을 통해 바람소리가 장송곡의 주악소리로 변신했다. 이런 변신은 무죄일뿐더러 유공(有功)이다. ‘시체속의 노란 자위들만/꿈을 베고/눈/뜬다’ 시체속 노란 자위들이 꿈 (베개 베듯)베고 눈 뜨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새김질 할수록 맛 나는 시행들이다. 언어의 파격적 결합(접속)이 명구를 낳는다. 가을들판이 말한다-- 이 들판에는 아직도 캐낼 수 있는 보물이 무진장 많다. 서두르지 말고 슬슬 캐내라. 뜻밖의 광상(鑛床)과 만날 것이다.
165    《천개의 고원》학습필기-7 댓글:  조회:1895  추천:0  2019-10-11
■원리 2. 이질성원리. 여기서 연결접속의 원리(원리 1)와 이질성의 원리(원리 2)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해도 된다. 그런 고로 에서도 여섯 가지 원리를 설명할 때 원리 1과 원리 2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했다.   여기서 리좀적인 접속은 어떠한 동질성도 전제하지 않으며 그것은 비일비재 다양한 종류의 이질성과 접속함으로써 새로운 것, 새로운 이질성을 창출하게 된다.   “리좀 체계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또한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이론을 폄에 있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樹木)과 뿌리줄기(리좀)를 대비시켜 설명한다. 수목이 중심적, 위계(位階)적, 배타적이라면 그와 대비되는 리좀은 이질적인 것들을 만나 변화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식시킨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나무와 리좀을 고정불변의 두가지 범주로 아주 고착시켜버린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무와 리좀간 상호변환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질성 속에 동질성을 내포할 수도 있으며 동질성속에 이질성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질성 속에서 동질성을 발견하거나, 동질성 속에서 이질성과 다른 점을 발견하고,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조합을 생각하는 것은 새로운 발견인 것이요 기존의 도식과 암호나 기호를 파기하고 새로운 도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탈영토화’이자 끊임없이 새로운 ‘도주선’을 찾아 도주하는 것인데, 이른 바의 도주란 바로 창조적 행위를 지칭함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고정관념이나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는 과정이기도 하고, 꽉 막힌 체제에 바람구멍을 뚫는 일이기도 하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反位階的)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 이미지들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먼저 시와 관련되는 문제, 언어의 결합문제를 보자.   돌과 사람은 이질적인 존재다. 접속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돌사람. 이런 식으로 벼락신, 불얼음, 풀태양...과 같은 접속도 가능하다. 명사화된 이질적 이미지간의 자유로운 접속들(예컨대 빛과 가루, 너구리와 밭, 얼음과 가죽...)이 접속결과 아주 엉뚱한 이질적인 ‘신형의 사물(빛가루, 너구리밭, 얼음가죽...)’을 낳기도 한다.   이질적 이미지단위들간의 접속도 모종의 효과를 유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졸시 한수를 예로 든다. 약탕관에 오가잡탕 정히 달인다 해와 달의 폭포수에 약주 달인다 공룡의 비늘 기린의 뿔 삼족오의 발톱에 가스통 바슐라르와 아리스토 텔레스 그리고 문덕수의 시론에 류협의 《문심조룡》도 털어넣고 달인다 조리로 거르고 사포로 쥐어짠다   한가위의 눈부신 은쟁반 위에서 봉황새 한 마리 포르르 춤춘다   -- 전문 이 시에서 ‘공룡의 비늘 기린의 뿔 삼족오의 발톱’ ‘가스통 바슐라르와 아리스토 텔레스’ ‘문덕수 시론’ ‘류협의 문심조룡’은 이질적인 여러개 이미지 단위들 간의 접속이다. 접속한 결과(모조리 털어넣고 달인 결과) 느닷없이 봉황새 한 마리가 태어난다.
164    《천개의 고원》학습필기-6 댓글:  조회:1933  추천:0  2019-10-10
[개념의 이해] '기계' ‘접속’ '배치' 들뢰즈와 가타리가《천개의 고원》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천개의 고원》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접속, 배치와 ‘기계적 욕망’ 다시 한가지 예를 들면 우리 손이 운전대와 접속하면 운전하는 손이 되고 지휘봉을 잡으면 지휘하는 손이 되지만, 다른 사람의 손과 접속하면 악수하는 손이 된다. 운전사인지 지휘자인지, 아니면 친구인지 하는 것은 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의 접속과 배치에 달린 문제다. 브랜드의 소비도 이와 같다. 브랜드의 소비는 모종 욕망의 결과인데 외부와의 접속과 배치를 통해 ‘욕망’은 사치가 아닌 필요가 된다. 이것이 ‘기계적 욕망’이다. '욕망하는 기계'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양식은 '차이생성'이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영토화' '탈영토화' '탈주'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삶, 다른 존재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되기' ‘재영토화’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生成, 形成)라고 부른다. 기실은 바로 그것이 재영토화인 것이다. 들뢰즈는 이처럼 탈주하는 기계가 순간적으로 정착하면서 재배열되는 과정을 ‘재영토화’라 이름했다. ‘재영토화’가 정착된 단계에 와서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는 법칙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천개의 고원》에 따르면, 접속-배치-영토화-탈주-탈영토화를 통해 존재가 생성되듯 브랜드는 이 과정을 거치며 계속 새로워진다. 바로 이 점에서 브랜드는 탈영토화를 반복한다. 그 브랜드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 그러니까 접속, 배치, 영토화, 탈주, 탈영토화를 찾도록 자극한다.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축구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축구는 축구장에 심판과 두 개 팀의 선수가 모여 공을 대방의 골문에 차 넣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축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축구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163    《천개의 고원》학습필기-5 댓글:  조회:2092  추천:0  2019-10-09
들뢰즈와 카타리는 짜장 철학개념들을 쉴 새 없이 창조한 전문호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2013년도에 500페지에 달하는《들뢰즈개념어사전》을 냈는데, 취급한 ‘리좀’을 비롯한 주요 철학개념어가 90개도 넘는다. 《천개의 고원》의 핵심개념인 ‘리좀’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한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원리’를 “속성법(?)”으로 알아볼까나?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원리’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 2: 다질성의 원리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원리 4: 탈기표(작용)적 도약의 원리 원리 5: 지도 제작의 원리 원리 6: 지도 전사의 원리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는《천개의 고원》에서 리좀에 대해 이렇게 말한바 있다.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개미 떼가 만든 선을 절단할 수 없다. 그 선 중간이 끊어지더라도 (개미군단에 의해 자동적으로) 다시 이어지거나 다른 방향으로 선들이 만들어진다. 이 개미떼를 리좀의 줄기라 친다면 줄기는 절단되더라도 다시 줄기를 형성한다. 접속이란 네트워크에서 끊어져 소외되더라도 거기서 또 다른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리좀이다. ” 아래 리좀의 그 원리들을 하나하나 만나보자.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根莖)이라는 땅속 줄기식물을 근거로 접속의 개념을 설명한다. 접속하는 것들은 이질적인 것들, 팔다리가 따로 노는 다양체들인데, 이들의 특징은 절단당해도 끝내 줄기식물이 된다는 것. 한 리좀의 그 어느 점(點)이든 다른 어떤 모든 점들과 접속할 수 있으며 또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순서를 고정시키는 나무 또는 뿌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하나의 리좀은 기호학적 고리들을, 권력의 조직화들을, 예술들, 과학들, 사회적 투쟁들에서 발생하는 출현들(우발적 사건들)을 끊임없이 접속시킨다. ■ 접속(연결): 소유의 새로운 개념 플랫폼은 목적지와 여행객을 접속(鏈結)시키는 통로. 새로운 접속을 위해서는 또 다른 플랫폼이 필요하다. 오늘 세상은 ‘접속’의 세상이다. 접속이 오늘날의 대세가 되었다. 접속은 소유나 수익의 새로운 개념. 수익은 접속으로부터 생긴다. 인터넷의 ‘검색엔진’이 이 말을 증명한다. 검색엔진의 핵심이 바로 접속이다. 검색엔진은 정보를 얻고자 하는 특정 웹페이지로 접속시키며 그렇게 얻은 정보는 더 많은 검색을 유발하고, 더 많은 검색은 더 많은 광고를 노출시켜 수익을 창출한다. ■ ‘플랫폼’은 경계공간이자 ‘탈주선’이다. 타 지역에 갈 일이 생기면 고속철이나 뻐스역을 찾는다. 그 역에서 북경 가는 사람도 있고 상해나 광주 가는 사람도 있다. 북경의 경우 같은 북경역이라 해도 목적지가 다름에 따라 사람들은 부동한 곳에서 승차하게 된다. 예컨대 1, 2, 3, 4......라고 붙여진 부동한 시발점에서 승차하게 되는데 이곳이 플랫폼이다. 역이 모든 기차 여행자들의 집결지라면, 플랫폼은 목적지와 여행객을 접속시키는 통로다. 그때그때의 목적지와 여행객을 연결하는 통로가 이제는 모든 디지털 ‘유목민’과 서로의 필요를 접속하는 통로가 되었다. 시장의 규칙이 바뀌고 있다. 현시기 급부상하는 기업들은 플랫폼, 그러니까 접속의 통로를 만든다. 온라인을 플랫폼의 문제로 이해한다는 것은 접속의 장, 소통하고 공유하는 마당으로 본다는 것. 그 마당을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눈으로 본다면 바로 ‘탈주선(逃逸线)’이 된다. 탈주선은 닫힌 경계선이 아닌 열린 공간을 만들며 끊임없이 외부와 접속한다. 탈주선을 만드는 사유방식은 ‘유목민’들의 삶의 방식을 아주 떼 닮았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뚫는 자 흥한다’! 이는 ‘유목민’들의 信條이자 좌우명이다. 유목민! 여기서 ‘노마디즘’이라는 개념이 또 하나 생겨난다. 아하! 보다싶이 접속(연결), 플랫폼, 탈주선, 유목민...새로운 철학개념들이 줄쳐 나온다. 노마디즘(nomadism) 노마디즘이란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을 뜻하는 말로, 살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노마드, Nomad)’에서 나온 말이며, 유목주의라고도 한다. 그러나 들뢰즈, 가타리가 주목한 유목적 삶은 그냥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에 달라붙어 새로운 생성(生成)의 땅으로 바꿔가는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기존의 가치나 철학을 부정하고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은 명실공히 플랫폼시대다. 일상에서 우리는 온라인, 그러니까 스마트폰, 컴퓨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인터넷(세상)과 접속하고 있지 않은가.
162    《천개의 고원》학습필기-4 댓글:  조회:1875  추천:0  2019-10-08
어찌 보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은 인터넷과 많이 닮아 있다. 뉴스, 논평, 소식들은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인터넷 내부의 연결망들, 즉 블로그들과 온라인 안의 카페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웹사이트들을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이루어지는 여기에는 리좀이 그렇듯이 중심이나 토대, 줄기가 없다. 끊임없는 경로들, 경로들의 일탈과 새로운 접속들의 련쇄만이 있을 뿐이다. 인터넷은 말 그대로 서로 련결된 많은 컴퓨터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자기들끼리 서로 련결된 대학과 기업, 정부 기관, 개인 소유자들의 네트워크가 다시 거미줄처럼 련결된 네트워크들의 련결망이다. 이 네트워크는 메시지와 정보를 실어 나르는 통로를 제공해준다. 이것들은 안과 밖이 하나로 순환하며 이어지는데, 접속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미 하나는 여럿이고, 여럿은 무수함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탈중심화해서 수목형의 위계질서를 벗어나라고 말한다. 정주민의 사유가 아니라 유목인의 사유를 찾으라고 호소한다. 리좀은 非 체계요, 비중심화한 접속들의 향연이다. 리좀의 세계에서 접속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따라서 책에서 구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생성을 위한 령감과 힘이다. 욕망이 움직이고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리좀을 통해서이다. 욕망이 가령 리좀을 통하지 않고 나무(체계)를 타고 올라간다면 필시 내적인 추락들이 생겨, 욕망은 좌절되고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리좀은 외부적이고 생산적인 발아를 통해 욕망에게 생명과 활력을 부여한다. 바로 이러한 리유 때문에 거꾸로이긴 하지만 대칭적이지 않은 다른 조작을 시도해 보는 일, 즉 주어진 경로에서 일탈하여 탈주선에서의 새로운 접속을 시도해보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는 나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우리는 더 이상 나무들, 뿌리들, 곁뿌리들을 믿지 말아야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대성질호한다----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력사를 쓰지 말라. 시작하지 말고 끝내지도 말며 그냥 흘러가라. 저자-텍스트가 아니라 그것의 배아, 그것을 배양하는 젖, 질료들, 즉 사유를 가로지르는 날짜와 속도들, 자연과 무의식, 고원들을 힘껏 빨아 들여라! 지식은 기껏해야 지식생산자의 머리를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방은 의미의 축소화이며, 그것에의 종속이다. 그러므로 해석하지 말고, 제발, 제발, 당신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다! 언제까지 어른이나 흉내 내는 덜된 어린애로 남으려고 하는가? 언제까지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는 응석받이 노릇을 할 텐가? “그만 둬!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 의미를 내보내거나 해석하지 말고 실험을 해! 너의, 너의 령토성, 너의 탈령토화, 너의 체제, 너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야! 이미 만들어진 너의 유년기와 서구의 기호론에서 찾지 말고 너 자신을 기호화하라고!” 왜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에 고착해 있으려 하는가? 왜 항상 계보학 속에 너의 가능성, 너의 힘, 너의 꿈과 상상력, 너의 잠재적 생성들을 매장시키려고 하는가? 수목형 사유에서 벗어나라. 그래야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위계적 질서, 중심화된 점에서 탈주하라. 반계보로, 다양체의 몸으로 나아가라. 진정 다양체를 꿈꾼다면 유일을 빼고서 n-1 (여기서 1이 ‘유일한 장군’을 표시한다)로 살아라. 책을 읽되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저자-텍스트를 덮쳐라! 공을 비켜나간 축구선수의 헛발질. 변혁의 힘과 선을 만들지 못하는 책-기계는 죽은 기계다. 어느 시대나 가장 중요한 책-기계들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예언과 변혁, 도래할 실재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오고야 말 현실에 대해 말한다. 좋은 책-기계들은 탈령토화한다. 탈령토화는 새로운 현실의 발명과 창조다. 네 속에 있는 질료적 흐름들을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으로 바꾸어라.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령토를 넓혀라. 항상 단절을 통해 리좀을 따라가라, 도주선을 늘이고 연장시키고 련계하라, 그것을 변주(變奏)시켜라! 물길을 따라가라. 둑을 만나면 둑을 넘고 큰 산을 만나면 휘감고 에돌아 나가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임제를 만나면 임제를 베어버려라! 아무렴, 점(點)을 만들지 말고 선(線)으로 나아가라. 멈추지 마라! 빗물이 파놓은 물길들. 물길에는 출발점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것은 항상 중간에서 시작하며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물길을 통해 씨앗들을 실어 나르는 식물들에게서 배워라. 식물들은 물길을 통해 탈령토화하며 제 령토를 확장한다. 물길은 감자를 심지도 않고 보리를 심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흘러갈 뿐. 물길은 네가 탈령토화할 수 있는 도주선이다. 물길에서 음악을 취하라. 물길이 곧 음악이고, 수시로 몸을 바꾸는 변형되는 다양체들이다. 물길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너를 버리고 네가 물길이 되어 흘러라!!!
161    《천개의 고원》학습필기-3 댓글:  조회:1818  추천:0  2019-10-07
《천개의 고원》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리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다. 지어 잠꼬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헷갈리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잠꼬대 같아 보이는 그런 부분까지 첫 시작부터 철저히 리해하느라 알골을 썩일 필요는 전혀 없다. 내 생각에는 그런 곳은 잠시 지나쳐버려도 된다. 그러면 우리는 알기 쉽고 생동하고 력동적인 부분과 바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재미나는 부분도 아주 많다. 이 책에는..... 들뢰즈 가타리가 주장하는 바가 뭔지 결론부터 알고 기타 개념이나 문제를 차차 풀어나가는 학습방법도 혹시 방법이라면 방법이 아닐가? 들뢰즈/가타리 주장의 매력은 뭘가? 우선 《천개의 고원》이 지극히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이른 바의 중심도 줄기도 토대도 갖지 않은 ‘리좀’이 보여주는 놀라운 상상력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한다. 실상 우리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배울 것은 무슨 지식이나 심오한 사상에 대한 리해가 아니다. 령감과 상상, 사유의 방법론, 존재의 쇄신/생성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것이 중심에 종속되여 있는 위계(位阶)질서 등 기존의 규범적 질서체계에 대하여 “진절머리가 난다”는 말로 타매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나무(树木적 体系)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우리는 더 이상 나무들, 뿌리들, 곁뿌리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말로 타매할 정도로 나무의 체계를 불신하는 것은, 리좀체계와의 관계에서 고찰할 때 나무체계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비생산적인 체계인 반면에 리좀은 지극히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체계인 까닭이다. 다시 말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서론 부분(리좀)에서 현대사회와 같은 위계질서의 세계를 수목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리좀(뿌리줄기)을 내세웠다. 나무라는 체계는 모든 것이 중심에 종속되여 있고 철저히 등급질서의 사유를 따르는 그런 기존의 규범적 질서체계다. 그러나 리좀은 그와 반대로 탈중심화와 非 위계질서를 본질로 하는 다양체(多元体)로서 중심도 계층도 서렬도 계보도 없고 초월적인 통일도 또 이항 대립이나 대칭성의 규칙도 없으며, 항상 그런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성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서렬과 위계질서와 규범으로 충만된 세계다. 그러나 발전을 거듭해온 현대사회의 리면에는 단순히 수목의 개념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현대사회에는 문명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친자연적이면서도 비체계적인 질서가 무수히 존재한다. 특히 현대와 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 지나치게 위계질서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수목의 개념은 처처에서 인류사회와 자연의 조화발전의 걸림돌이 될 소지가 많으며 이에 반해 리좀의 개념이 훨씬 현시대에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수목의 개념이 중심화를 지향한다면 리좀은 탈중심화를 지향한다. 나무체계가 자기가 몸담고 있는 령토를 지층화하고 그 안에서 탑이나 피라미트를 쌓으며 일직선의 수직형 체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면 리좀은 그것과는 달리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무엇과 련결하고 접속한다. 나무는 혈통관계로서 한핏줄일 때만 서로 통하고 상위이웃과 하위이웃들과만 련계를 가지지만 리좀은 결연관계로서 모든 것과 만나며 만나야만 한다. 기성의 령토를 떠나 다른 것과 만나고 접속하는 것이 바로 탈령토화며 탈령토화하는 과정이 바로 새로운 것을 창조(창신-創新)하는 과정이다. 사유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명하고 발견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즉각 페기해야 한다. 왜? 그것은 죽은 사유니까. 죽은 사유는 내부에서 작용하는 속도들과 변용태들을 끌어내 새로운 순환의 선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새로운 순환의 선을 타려면 작동하는 옛 힘들의 순환을 정지시키고 해체해야만 한다. 옛 순환이 정지되지 않고서는 새 순환은 작동하지 않는다. 지층은 기성의 위계체계이며 이미 형성된 중심이며 령토이다. 되기를 위한 령감생성(灵感生成)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당신은 력사의 재귀(再歸), 노예의 도덕에 매인 하수인,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다.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 등을 통해 지층에서 벗어나야 창조로 나갈 수 있다.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은 예술에서의 아방가르드(先锋派)와 상당히 닮아 있다. 그는 정지되여 경직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들뢰즈의 욕망리론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도 다르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동원해 억압된 욕망의 양상을 가족 내부 차원에서 분석했다면, 들뢰즈는 욕망의 창조력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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