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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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향 수/정지용 시 댓글:  조회:5899  추천:68  2009-10-25
                                    향 수                  정지용 시              박인수, 이동원 노래     【이어폰 착용하면 노래감상 가능합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선 자라난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80    유순호작가를 말한다 댓글:  조회:9082  추천:79  2009-09-07
  유순호작가를 말한다   --칼럼집 에 부쳐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유순호 작가의 칼럼집 "사람살이 때맛나는 세상"이 출간된다면서 서문을 몇자 적어달라는 부탁을 직접 유순호 작가로부터 받았다. 내가 쓰는게 적합하겠냐고 했더니 "선생님에게는 저그만치 30년이라는 기자생활을 해온 경력이 있지않는가"면서 재차 요청해왔다.    그런데 30년 기자경력보다는 이제 사귄지 겨우 얼마 안되는 유순호 작가, 그것도 인터넷상으로 만났고, 인터넷상으로 유순호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오면서 나는 유순호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짬짬의 시간을 타내어 그의 대량의 작품을 두루 섭렵하게 되었다. 그만큼 유순호 작가의 작품들은 매력적이며 특히 중국의 조선족 출신 작가들속에서는 독특하게 빼여난 작가임을 나름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음을 먼저 밝히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그동안 내가 읽은 유순호 작가의 작품은 소설, 수필, 칼럼을 포함해서 다양하다. 특별히 이번에 계열로 출판되는 "유순호문학전집"중 칼럼집에 실리게 되는 50여편의 칼럼속에는 내가 공개 마당에서 긍정적인 인상담을 발표한바 있는 글도 여러편이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서 나는 이 칼럼집에 서문을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미 인터넷상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순호 작가의 칼럼에는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체제인 나라에서 수많은 사상문제점들을 야기시킬수 있는 글들이 적지 않으며 실상 중국의 조선족 독자들은 유순호 작가에 대하여 서로 다른 평가를 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순호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나를 포함해 다수인 반면에 유순호 작가를 상당하게 미워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은바, 그들은 주로 중국 조선족 문화분야의 기득권세력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최근 몇 달사이에만도 유순호 작가는 그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죄목들을 선사받았는데 그런 죄목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무슨 "악질반화세력"이니 "미국망명작가"니 그 외에도 수두룩한 "반화작가", "반중국작가", "반체제작가", "반혁명분자", "달레라마를 두둔한 작가", "경외불순세력", "공산당을 반대하는 작가" 등 죄목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듣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열 두번도 더 기절초풍할만한 것들이었다. 적어도 나는 이런 죄목들이 생겨나게 된 문제의 칼럼들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주고싶었다. 그것이 다년간 기자생활을 해온 나의 직업적 의무이기도 하겠지만, 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우리 사회가 절대로 집단적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싶어서였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유순호 작가는 중국 조선족 출신 작가로 2002년에 미국으로 이민갔으며, 미국에서 지내는 지난 7년동안 그의 문학작품에서는 일대 비약이 일어났다. 특히 생계수단으로 신문사에 몸 담고 지내면서 수량상 적지만은 않게 써온 1천여편의 신문기사, 칼럼, 인터뷰, 기행, 논문 등 여러 가지 장르의 글에서 선정한 이 50편의 칼럼은 현재 변화중에 있는 중국 전역의 문화환경속에서도 여전히 고집스레 변화를 거부하고있는 조선족문단의 기득권세력이 저들의 기득이익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라도 얼마든지 저들에게 위협으로 간주되는 유순호 작가를 사경으로 몰아가기에 좋을듯싶은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본 유순호 작가의 칼럼, 말하자면 본 칼럼집에 수록된 이 50편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수량의 칼럼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경향은 결코 반중국이 아닌 짙은 친중국 성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른바 유순호 작가를 "반중국, 반체제작가"로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로 삼고 있는 글들로 "티베트사태 유감" , "정치는 야누스의 얼굴" , "베이징 올림픽을 결산한다"와 같은 글속에서도 대부분 유순호 작가의 자기 조국과 고향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사랑을 읽을수 있었다.    예컨대 제목만 읽어도 느낌이 섬뜩해보이는 "중국공산당은 개혁을 다시 개혁해야 한다"는 칼럼에서도 유순호 작가는 공산당의 일부 시책을 비판하지만 공산당이 집정하고 있는 중국정부에 대한 사랑과 애정으로 넘쳐있는바, 정부를 이끌고 정부를 감시해야 하는 사회주의 언론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숨기기만 하고 감추기만 하는 언론이 항상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고 했는데, 남도 아닌 자기의 상황과 문제점도 과감하게 드러내놓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기도 아닌 남과 싸워서 이길수 있겠는가"고 묻고 있다.    또 유순호 작가는 중국공산당은 일찍 2002년 제 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할데 관한 몇 가지 중대한 결정"을 지었고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나, 입 가진 당 간부들이 회의 때마다, 연설 때마다 입만 열면 부르짖는 소리가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가 되었지만, 진정으로 무엇이 조화로운 사회인지를 많은 공산당원들이 아직 제대로 터득한 것 같지않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정강이 태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오히려 중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그리고 인간, 자연과 정권이 얼마나 서로 조화롭지 못하고 불편하며 서로를 적대시하고 서로를 기시하게 되었는가를 여실하게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유순호 작가는 이렇게 된 원인을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에서 찾고있다.    유순호 작가의 이 칼럼속의 몇 단락을 돌아보기로 하자.    "마르크스에 의해 집필되어 23쪽 짜리 정치팸플릿에 담겨 이 세상으로 나올 때의 세계가 바로 그랬다. 산업혁명 후 자본가들에 의해 생산수단이 독점되면서 노동자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이 모두 독식하여버리고 말았다. 굶주림과 압제에 시달리다가 죽느니 몸부림이라도 쳐보고 죽겠다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심정을 이 ‘공산당선언’이 대변하였고, 이 선언을 품에 안고 싸워왔던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의 무산 대중, 즉 프롤레타리아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자본가도 때려잡고 국가도 전복시켜야 했다."    "레닌과 스탈린은 이 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거짓말이나 방화를 불사하였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념을 철저하게 실천으로 옮겨갔다. 1956년 2월 소비에트 전당대회에서 소련공산당의 새 지도자 후루시쵸프가 폭로한바에 의하더라도 스탈린은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10월 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 90%를 죽였고 그 후에 입당한 사람은 50%를, 군 장성급 60%를 처형시켰다고 하니, 이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압박과 착취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와 후과를 초래하게 되었던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칼럼에서 소련에 이어 신흥공산대국이었던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다. 철두철미한 마르크스 레닌주의 숭배자였던 모택동은 역시 공산주의 혁명을 핑계로 중국인민들을 도탄속에서 허덕이게 만들었고 자신의 가장 절친한 동지였던 류소기를 비롯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을 핍박한다. 이와 같은 전제와 폭력하에서도 죽지 않고 오또기마냥 살아남았던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하에서도 계급없는 사회, 모든 소유를 골고루 나눠가지고 평등하게 잘사는 지상천국 유토피아는 없었다. 그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자본가를 때려잡고 노동자, 농민, 무산 대중이 주인이 되어 돈과 재물을 공동 분배하자던 생산력의 모든 시스템이 다시 자본가의 손으로 슬슬 넘어가기 시작했고, 이들 자본가, 기업가들에 대한 명칭도 중국 공산당의 당장속에서는 ‘선진생산력’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등소평과 강택민, 호금도 등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인간은 생태적으로 "소유욕"을 가지고 태어났고  "내 것"을 갖기 원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내 것"이 안 되고 "소유욕"을 만족시킬수 없을 때 누구도 열심히 노력하려고 하지 않으며 누구도 창의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부르조아가 권력을 잡으나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으나 인간의 탐욕은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탐욕들이 한 때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으로 퇴치되는듯도 했으나, 사상운동만 하다보니 아무리 인민공사를 만들고 대약진운동을 하고 강제 노동을 시켜도 생산력은 올라갈 리가 없었다는 것이며, 결과 순수했던 공산주의는 모욕되었고 경제는 바닥이 났으며,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거대국가로 전락하고 말지 않았던가고 반문하고 있다.    이런 나라를 불과 30여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미국과도 능히 대적할만큼의 위대한 경제강국으로 다시 부흥시킨 중국 공산당에 대하여 충분하게 긍정하기도 한다. 이 칼럼에서 작가는 중국의 13억 인구중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못사는 가운데 잘사는 선진생산력이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노동생산력의 잉여가치를 너무 많이 독식하는데서 그 어떤 강대한 파괴력을 가진 보다 무서운 사상이 새로 생겨날가봐 우려하면서 중국공산당에 바란다. 많이 가진자가 자각적으로 못 가진자에게 내놓지 않으니 이럴 때야말로 공산주의 혁명전통을 발휘하여 강압적으로라도 잘사는 자들의 세금을 많이 징수하여 못사는 농민들에게 나눠주어야 할 때가 왔으며, 그냥 나눠만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절로 부유해질수 있게끔 돈도 주고 또 땅도 팔고살수 있게끔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한다.    개혁개방 이후, 문화대혁명이 결속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중국의 일부 조선족 지성들은 극좌사상의 復古主義에 깊이 물젖어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법이 없이 모든 현존 질서를 미신하며 이미 중공의 개명정책에 의해 관후한 언론환경이 상당정도 마련되어있음에도 낡은 사유방식에다 자신을 꽁꽁 묶어놓고 하고싶은 말과,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도 진실한 말을 할수 없게 구박한다. 말을 하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고 소통해야 관계도 원활해지고 사상도 원활해진다는 것이 이 칼럼집에 담겨있는 모든 칼럼들의 주장이다.    세상과 부딪치는 유순호 작가의 감히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면서 보면 한편한편 자기 조국과 자기의 고향, 그리고 자기의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정을 읽을수 있게되어 감동을 받는다.    그는 중국공산당과 중국 정부의 일부 시책에 대하여 비판할 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이 몸 담고 살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도 "강도같은 나라", "도둑놈 같은 나라"라고 거침없이 매도한다. 바로 칼럼집 제목으로 선정된 "사람살이 때맛나는 세상"에서 미국식의 민주주의라는 것도 알고보니 "천박하다 못해 비속하기까지 하다"고 한탄한다. 또 "미국은 다극화 시대를 새롭게 대비해야 한다"는 칼럼에서는 미국이 "강압적인군사력은 뒤로 숨기고 강대한 경제력으로 ‘하드 파워’와 더불어 세계적인 인적교류 확대를 강화하고 일본이나 영국 독일 같은 잘 사는 나라들보다 저개발국지원을 대대적으로 늘이면서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적어도 가난한 북한을 독려할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풍요로운 미국 땅에 남아도는 쌀과 기름과 고기를 그대로 썩이지 말고 없는 자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등 유토피아적 천진하면서도 아름다운 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시종 중국 국내에 몸을 담고 장기간 중국공산당의 언론사에서 평기자로부터 시작하여 부주필, 부사장으로, 이제는 은퇴를 앞두고 있는 나는 유순호 작가의 칼럼들을 읽으면서 간단없이 충격을 느껴온것이 사실임을 고백한다. 중국체제의 입장에서, 그리고 중공당원이란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유순호의 칼럼들에 문제점이 없는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바깥세상에 별로 습관되지 않은 우리가 반드시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작가의 글 한두편으로 또는 한 두 단락으로 문장 전체를 쉽게 부정해버리는 나쁜 습성이다. 이런 악성종양과도 같은 폐습에서 헤어나오면 우리는 한발 앞서 세상밖으로 나가 있는 유순호 작가의 보다 넓은 시각을 볼수 있게 된다. 활짝 트여있는 시각에서 자기 조국이 좀 더 잘하여 세계무대에서 가장 선진적인 리더국가로 성장하여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읽게될 때 어쩔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남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글 구석구석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유순호 작가는 분명하게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신봉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유순호 작가를 반공산주의 작가, 반사회주의 작가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목표가 미국에서 10년동안만 살면서, 서구문학을 배우는 것이라고 나에게 고백한바 있는 유순호 작가는 아마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때문에 10년 뒤에는 또 어디서 무슨 일로 살아가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에도 여전히 유순호 작가의 매력적이면서도 시원한 칼럼을 계속 읽을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때 가서도 유순호 작가의 자기 고향과 자기 조국, 그리고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은 여전할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온갖 유혹과 풍파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문학정신에 충직하고 자신만의 삶의 원칙에 충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그의 칼럼을 읽으면서, 그의 내일에 계속 쏟아져나오게 될 또 다른 칼럼들에서 작가의 한 길로 평생을 살아갈수 있는 바른 비결이 구경 무엇인지를 독자들과 함께 읽어낼수 있을 날이 이제 바로 눈앞에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국무원의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비준소식을 보고서 박문희 1. 8월 30일 길림성의 “長吉圖開發開放先導區計劃”을 국무원에서 비준했다. 두만강류역을 동북아물류의 前陣기지로 개발하기 위한 거창한 사업이 본격 가동되였음을 의미한다. 구역면적이 7만3000평방킬로메터로 전 성의 39%를 차지하고 인구가 1090만으로 전 성의 40%를 차지하는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를 건설하면 일본, 한국의 자본을 크게 흡인하게 될뿐만 아니라 중국 연해 및 내지와의 협력을 촉진하고 동북지구 대외개방 새 문호를 구축할수 있다. 중국에서 이러한 선도지역을 세우기는 길림성이 처음이며 동북아의 바둑판으로 말하면 중국의 先手라고 볼수 있다. 2. 동북아 지역의 기하중심에 위치해 있는 두만강지역은 중국 내륙에서 동해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水上通路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조선과 로씨야 정부와 오랜 시일 담판을 했지만 아직 두만강出海權을 가지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나 로씨야와 슬라브얀카 등 항구를 빌려쓸데 대한 협의를 달성하여 그나마 동해진출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였다. 중국-몽골 대통로 건설도 의사일정에 올라 목전 초기계획을 작성중이다. 자료에 의하면 목전 몽골국에서 조사확인한 80여종의 광산자원가운데 석탄은 1520억 톤, 철은 20억톤, 린은 2억톤, 동은 800만톤이라 한다. 수송력이 문제로 나서고있는데 중국이 中蒙大通路건설의 주체로 될것이며 몽골국에서도 그럴것을 희망하고있다고 중국 관련부문에서 피로했다. 실제로 중국 국가 철도부에서 현재 이 일을 기획중이라고 공영매체에서 이미 보도했다. 주지하다시피 연변에서는 延龍圖一體化를 여태 적극 추진해왔고 동시에 변경개항지 훈춘시를 통해 중-로항구, 중-조항구 항목건설도 추진하고있다. 로씨야의 블라디보스토크 관광지개발과 조선의 라진선봉경제특구 설립 추진, 한국의 속초항에 대한 동북아 물류항 육성계획과 맞물려 추진되는 훈춘변경경제합작구 동북아변경무역센터의 8월 16일 착공으로 2016년에 이르러 이 무역센터는 두만강 국제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훈춘에서 출발하는 중-로철도가 올 년말 개통되고 이어 훈춘-도문고속도로가 명년에 완공되며 길림-훈춘간 고속도로도 곧 국가사업으로 추진되는데 황금의 삼각주에 위치한 훈춘은 두만강개발의 핵심축이 될수 있는 기반을 다져가고있다. 훈춘을 窓口로, 연길-룡정-도문을 最前方으로, 장춘-길림을 엔진으로, 동북後背地를 버팀목으로 하는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 구도안에서 延龍圖를 核으로 한 연변은 말그대로 이 거대계획의 최전방이다. 3. 先導지역의 8大 중점공정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두만강 지역 국제자유무역지대 건설 2) 長吉圖 국제 내륙항구 건설 3) 과학기술 창조지역 건설 4) 국제협력 산업지역 건설 5) 현대 物流지역 건설 6) 생태려행지 건설 7) 최첨단 서비스업 집중지역 건설 8) 현대 농업모범지역 건설 여기서 생태려행지 건설이란 장백산의 생태자원과 국경지역에 위치해 있는 여건優位를 기반으로 이 지역을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다국적 생태계 려행 및 人文려행, 그리고 특색있는 휴가, 휴양의 생태지역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최첨단 서비스업 집중지역 건설의 내용에는 금융보험, 서비스아웃소싱(外购服务), 비즈니스展示, 문화創意 등 분야를 기반으로 동북지역 자본시장을 건설하고 東北亞指向의 현대서비스업 체계수립 등이 들어있다. 그 외 현대농업 모범지역 건설에는 토지의 集約的경영과 적당한 규모경영, 그리고 농업의 전반적 기계화 실현 및 시설농업, 우수농업 창출 등 내용이 망라된다. 보다싶이 향후 이 지역에 상업기회가 무한정 늘어나게 될것이라는것은 의심할바 없다. 그러나 단지 상업기회만 늘어난다고 보면 절대 안된다. 문화, 교육 등 모든 사회분야에도 수많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봐야 할것이다. 4. 우에다 周知의 사실을 이처럼 장황히 늘여놓는것은 우리 길림성 全域, 그리고 동북지역과 內地의 상관 협력관련지역, 나아가 동북아 각국이 참여하고 연구하고 관심하는 이 중차대한 대사를 앞에 두고 우리 연변, 나아가 전국 각지 지어 세계 각국에 진출해있는 우리 조선족들은 구경 어떠한 태도와 자세로 이와 같은 변화를 맞이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함께 의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 “長吉圖開發開放先導區計劃”은 중국 동북지역의 개발개방과 동북아개발의 거시적안목, 목표와 구도에서 치밀한 가능성연구와 檢證을 거쳐 내놓은 전략적계획으로 이제 5년 내지 10여년의 계획실시과정에 이와 련결되는 수많은 사업이 새로이 창출될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것이다. 대관절 어떤 사업들이 앞으로 창출될것이며 그런 사업들은 어떻게 전개될것인가? 이런 사업들은 예견된것들도 있지만 예견되지 않은것들도 필시 있으며 예견됐다 해도 아직 구체적 실시안이 연구되지 않은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족들에게 “평시불소향, 급래포불각(平時不燒香,急來抱佛腳)”이란 속담이 있다. 만약 앞으로의 실시행정에 모종 항목이 즉시 필요하다는것이 실증되여 그때 비로소 필요한 항목준비에 착수한다면 성복후 약방문식으로 기회를 놓지게 되거나 적어도 일이 크게 遲滯될것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장래에 對備하여 미리 예측을 하고 일찍 손써 준비작업을 시작하는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할수없다. 6. 례컨대 5년 내지 10년 사이, 그리고 그 이후에 이 지역에 로어번역인재, 몽골어 번역인재가 반드시 필요하리라는것은 누구나 예견할수 있는 일이다. 중국에 로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대학에 로어학부가 있으며 장춘에도 길림로어학원에 중등로어전문학교도 있다. 그러나 對 로씨야무역이 증대됨에 따라 로씨야어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제 중국과 로씨야의 국경무역이 급류를 타게 되면 이런 상황이 더 뚜렷하게 나타날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있다. 더구나 이 지역에 한국인이 대거 들어오면서 중국어, 한국어와 로씨야어를 동시에 구사할수 있는 인재가 반드시 대량 수요될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할을 놀수 있는 적임자로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로어를 배운 조선족만이 제격인것이다. 몽골어의 경우도 이와 다를바 없다. 이는 우리 연변에 초급, 중급, 고급 로어학교를 세우거나 연변대학에 로어학부를 설치하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어디로부터 착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것이다. 7. 그러나 언어문제가 전부인 것은 아니며 또 가장 중요한것도 아니다. 우리 조선족은 선도지역의 8大 중점공정을 망라한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과 관련된 전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적극 연구하고 장래를 예견해야 하며 우리의 실정에 따라 상당수의 대응책과 실시안을 내오고 정부에 제안하여 허락을 받아내고 실시하여야 하는것이다. 정부 상관 부처, 기업소, 사업단위나 대학의 연구부문은 물론, 나아가 사회단체나 개인도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방안을 연구함에 있어서 협소한 민족주의시각에서가 아니라 동북지역개발개방과 동북아경제의 엔진역할 증대의 큰 시각으로 출발해야 하지만 이 지역 개발에서의 우리 중국조선족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충분한 자기인식과 자신심을 반드시 가지고 이 작업을 주동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8. 우리 조선족은 거개 연변이 중국조선족의 首府이자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연변이 없으면 중국조선족공동체가 없다고 여긴다. 우선 이런 생각이 과학적인가 아닌가를 성급히 따질 필요는 없다. 중요한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연변을 지켜내야 한다는것이다. 연변을 지켜낸다는 개념은 결코 추상적인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개발에서 우리 조선족이 어느 정도 주도권을 쥐고 행사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제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이 전면적으로 가동되면 참여자가 얼마일지 모른다. 장춘, 길림, 나아가 전 동북의 기업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는건 차치하고 내지에서도 直, 間接的으로 참여하게 되며 국제적인 참여자도 많을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다. 도전을 맞받아 적극 응전하면 다시 없는 기회로 될것이고 도전 앞에서 無준비로 손을 놓고있으면 주도권을 상실하게 됨과 아울러 모든 기회를 남에게 고스란히 받쳐주고말것이다. 물론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에서 적극 행동하고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에만 의뢰해서는 결코 이 일을 잘 해낼수 없다.  9. 조선족사회에서 국내외적으로 대대적인 여론을 조성하여 보다 많은 조선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하며 연구기관이나 학술계 등에서 관련 포럼이나 세미나(국내 혹은 국제)를 가지고 衆智를 모아 정부에 보고서를 올리고 허락까지 받아내여 실행해야 할것이다. 이렇게 하는것이 우리 연변을 지켜낼수 있는 방도중의 하나가 아닐가 생각한다. 10. 국무원의 비준을 받은 길림성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의 실시로 앞으로 5~10년 사이 이 지역의 엄청난 可視的 변화가 예상되는데, 이 지역의 最前方인 조선족자치주 연변에서 조선족선줄군들의 유력한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  2009.9.4 장춘에서
최삼룡 편찬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 한국 문화관광부 2009년 우수도서로 선정   2007년 한국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 초청으로 해방전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연구 진행  장편론문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 연구》 창출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 정리 출판   기자가 최근 입수한데 따르면 한국 도서출판 보고사에서 2008년 8월에 출판한 중국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의 편찬도서《재만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이 2009년 7월  한국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도서로 평정되였다.  확인한데 의하면 중국조선족 작가나 학자들의 문학작품이나 학술저작이 한국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된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수도서로 선정되면 재판을 할 때에 책표지에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도서』라는 마크를 달아주고 국가에서 몇권을 구입해서 여러 도서관에 기증한다.   무려 827페이지, 80여만자 되는  《재만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에는 시 38수, 소설 8편, 수필 22편, 희곡 1편과  편저자가 쓴 해제ㅡ《재만조선인문학의 친일작가와 작품에 대하여》라고 제목한 5만여자의 론문이  수록되였다.   평론가 최삼룡은 정년퇴직한후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대학 조선-한국문학연구소의 요청으로 해방전 중국조선족문학을 발굴, 정리, 연구하는 작업에 정진하고있는데 현대시권,  항일문학권은 이미 출판되였고 민요권과 산문권(백만자, 상, 하권)이 인쇄중에 있다.   친일문학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2001년부터 시작되였는데 그 첫 결실이 2002년 5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20세기중국조선족문학자료전집 제6집》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연길에서 구독할수 있는 도서와 재료에만 의거하다 보니 많은 재료가 루락되였고 일부 재료는 여러가지 외적인 원인으로 수록하지 못하였었다.   이 책의 미흡한 점을 통절히 느낀 최삼룡평론가는  여러차례 한국으로  출국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연세대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들어가 유관재료를 발굴하였는데 그 자료를 복사하는데만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2007년 초 최삼룡평론가는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의 초청을 받고 해방전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연구를 하게 되였는데 그 결실로 장편론문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 연구》(8만자)가 창출되였고 그 부산물로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이 정리, 출판되였는데 이번에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된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친일문학연구에서 하나의 새로운 성과물로 평가를 받는다.   조선족문학사에서 가장 악독한 친일연극《김동한》의 작자가 김우석이 아니라 김영팔(金永八)이라는것, 박팔양의 창씨개명한 이름이『靑木一夫』외에『水原一夫』라는 이름이 더 있었다는것, 그리고《만선일보》에서 1942년 1~2월 사이에 조직한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같은 제목으로 쓴 11명 문인들의 친일문장 11편도 이 책에 처음으로 수록되였으며 또 안수길(安壽吉)이 만주제국협화회 룡정분회의 상무원이였다는것도 이 책에서 처음 밝혀졌다.   그리고 이 책에는 만주 조선인 친일문학에 대한 편찬자나름의  일부 새로운 견해도 있는데 례하면 친일작품을 썼다고 하여 모두 친일분자로 결론할수 없으며 작자의 주도적이고 일관적인 표현을 전면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작품을 평가할 때에도 친일작품과 친일성향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야 한다는 등 견해가 그렇다.   (박문희[인터넷 길림신문]2009.8.27 )
77    중·한 언론의 초여름 읽기 댓글:  조회:4242  추천:65  2009-06-13
중·한 언론의 초여름이 뒤늦게나마 찾아왔다. 중·한 언론의 봄은 중·한 언론인이 약속에 따라 만난 그 무슨 "언론포럼”같은 데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88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하면서 얼음이 풀리고 1992년도 중·한 수교가 되면서 완연한 봄빛을 맞아온 것 같다.   그런데, 봄을 맞아서 초여름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저그만치 17년이다.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과 문화체육관광부의 주최로 지난 11일 북경에서 열린 언론인 포럼. 중국과 한국의 주요 언론사 고위 언론인들이 참가한 사상 첫 “중·한 고위급 언론포럼”. 17년 만에 만나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량국 언론의 역할, 언론을 통한 량국 국민간 리해 증진 방안, 량국 언론교류 및 협력 채널 확대 방안 등에 대해 논의를 한 이번 포럼을 나는 나름대로 중·한 언론의 초여름으로 상정(想定)해 본다. 중·한 고위급 언론인들이 사상 "첫 번째 교류의 장"을 량국 수교 17년 만에 만들었다면, 봄과 초여름의 거리가 이 정도로 멀다면, 누가 봐도 “적시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더 늦기보다는 그래도 일찍한 셈이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밖에.  어쨌거나 이런 포럼이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고무를 받는다. 그 17년 간 이른 바 동북공정, 올림픽 성화 봉송, 서장, 로무송출 등 적지 않은 문제로 음으로 양으로 티격태격 해오면서 “혐한론”이나 “반중론”까지 불거져 나오고 량국 국민의 감정도 상당히 다친 터라 량국 고위언론인들이 고민도 많이 한 끝에 서로간 해해년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게 그래도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닌 것이다. 기다림에 조금 지치긴 했지만도. 실상 이와 같은 고위층 언론인의 만남의 필요성은 그간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경제 교류에 비해 문화나 교육 등 면의 협력이 너무 부진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럼에서의 발언을 통해서도 량국 국민들 간 상호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파생된 반한, 반중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언론이 정확한 역할을 발휘해야 한다는 데 대해 양국 언론인들이 심히 공감하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발언 속에 더러 각자 자국 언론을 점검해보는 의식도 진하게 배여있고 서로 대방 국가를 더 깊이 알아야 하겠다는 의중도 보이고 자주 합동취재도 하면서 대방 나라의 실정을 자국 내에 제대로 알리자는 의지도 보이여 기분이 괜찮다.    중국이 세계와 함께 올림픽을 치르고 또 이번 금융위기도 함께 겪는 사이, 그리고 양국이 제마끔 자기의 골칫거리들을 가지고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 중·한 양국 국민간의 갈등도 퍽이나 갈아앉은 이때 이와 같은 포럼이 열렸으니 모임의 분위기도 엄숙하고 평화롭기만 할 뿐 아주 화끈하거나 격동적이지 못할 건 당연하다. 늦겨울은 진작 옛날 일이고 그렇다고 땡볕이 지지는 한여름은 아직 아니니까. 하지만 발언 내용을 보면 모두가 따뜻하고 조금 따갑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이를 일컬어 초여름이라고 한다. 물론 양국 국민들 간 감정이 한참 격화되고 있을 때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라도 량국 고위층 언론인들이 오늘처럼 이렇게 모여 앉았더라면 문제 해결이 더 적시적이어서 훨씬 좋았을 것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매년 한차례씩 모여 앉을 계획이라니, 량국 국민들한테 무슨 “민감한 일”이 생긴다 해도 이번에 자리를 같이 한 근 30명 되는 고위층 언론인들이 이전처럼 나 몰라라 외면할까봐, 더구나 언론인 자체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 마른 나무에 불이라도 달까봐 혹은 붙는 불에 키질이라도 할까봐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이번 포럼에 대한 감상을 말하라면 논문이나 발언 내용의 중요성보다는 이른 바 고위 언론인들이 17년 만에 처음으로 코를 맞대고 앉아 얼굴을 익히고 친구를 사귀였다는데 의미의 비중을 더 두는 게 좋을 상 싶다. 일단 만나면 아무래도 말을 하기 마련인데, 말을 서로 주고받다 보면 아무래도 감정이 통하게 될 터이요, 그러다 가끔 삿대짓을 하고 침을 튕기며 다투더라도 싸움 끝에는 분명 정이 들게 될 거니까. 알륵이 있어도 끙끙거리며 5년이고 10년이고 곪아터질 때까지 묵새겨 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보다 행동일터이다. 중·한 양국은 리념과 제도도 다르고 문화차이도 작지 않아 언론이 그 제약에서 벗어나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례컨대, 중국의 주류언론더러 한국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한국 측에서 봐도 유익한 비판, 이런 비판도 중국은 감히 못한다, 흔히.)하라면 한국의 주류언론더러 중국의 문제점을 비판하지 말라(기실 정확한 비판은 중국도 필수)는 것만큼이나 힘들어 할 상황이니. 그러나 지금의 문제는 우선 중국이나 한국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중요한 사실과 그 사실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포착과 그것에 토대한 책임성 있는 보도일 것이다. 이 점에 류의치 않는다면 사달은 아무 때든 불거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량국 고위 언론인들의 책임성 있는 약속 리행으로 이런 생각이 부질없는 걱정으로 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언론인들이 자주 소통을 하다보면 서로 대방의 생각을 정확히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양국 국민이 서로 오해를 하더라도 그런 오해를 언론인이 나서서 풀어주는 그런 바람직한 언론으로 거듭나겠지. 아래 중·한 량국 11명 대회발언자들의 발언에서 몇 마디 추려 본다. --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에게 유익한 진정한 이웃이 돼야 하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소통에 량국의 책임 있는 언론들이 나서자.” “량국이 문화 사대주의와 자기 문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문화를 편견 없이 인정하는 문화 상대주의로 나아가자.” “량국 국민 간에 감정 문제가 생길 경우 정확히 주시하고 신속하게 해법을 찾자.” “량국 언론이 서로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보도하자.” "량국 관계 발전과 교류의 방향을 잘 파악해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자." 보다시피 무슨 대단한 말들인 건 아니다. 이런 말쯤이야 할 줄 몰라 못하겠는가. 이런 말을 하려고 언녕부터 별러온 사람들이 과연 적었겠는가. 암만 별렀댔자 그게 무슨 소용 닿겠는가. 하지만 별로 대단치 않는 이런 말들이 오늘 조금 대단하게 여겨지는 건 그런 말들이 양국 고위언론인 포럼석상에 올려졌고 아울러 서로에게 뜨겁게 안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중·한 언론의 초여름”이 늦게나마 찾아왔다고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욕하게도 화끈한 여름이 기다려지게 되는 것이다.
76    직녀에게[문병란 시/박문옥 작곡] 댓글:  조회:5543  추천:55  2009-02-05
                               직녀에게    (문병란 시/박문옥 작곡/백창우 편곡)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은하수 건너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연인아 연인아 이별은 끝나야 한다  슬픔은 끝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문병란 시집 에 담겨 있는 시*                                       
75    나의 집 사랑 이야기 댓글:  조회:5001  추천:59  2009-01-31
나의 집 사랑 이야기 ○ 중국 길림성 화룡시 희망복리원 원장 리 문 철 나는 1954년 12월 화룡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환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고 나와 누나도 몸이 허약하여 늘 시름시름 앓곤 했다. 일가 일곱 식솔의 생계는 어머니 한 사람에 달려있었다. 어머니는 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하거나 강변에서 모래를 쳐 얻은 수입으로 온 집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소학교를 다닐 때 나는 새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고 원족도 딱 한번밖에 가본 적이 없었다. 원족을 가려면 맛있는 것을 도시락에 싸가지고 가야 하는데 우리 집에서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학교를 다닐 때 있은 한 가지 일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때 내가 쓰는 공책이란 형편없는 저질이었는데 그런 것마저 살 돈이 없어 정면을 쓰고 나서는 뒤 면에도 글을 써야 했다. 몇 푼 안 되는 연필도 없어 연필 끄트머리를 나무 가지에 동여매여 썼다. 그런 연필로 공책 뒷면에 숙제를 하려니 조금만 힘을 주어 글을 써도 공책에 구멍이 펑펑 뚫리기 일쑤였다. 그때 우리 반에 젊은 여자 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는데 한번은 내가 쓰고 있는 공책과 연필을 들여다보시더니 갑자기 "너 이것도 책이라고 가지고 다니니? 너 아빠엄마는 이런 걸 너에게 주어 학교에 보낸다니?" 하고 몹시 화를 내시면서 나의 공책을 빼앗아 와락와락 찢어 바닥에 동댕이치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널려진 공책을 보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어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길모퉁이에 숨어서 정말 오랫동안 울었었다. 집으로 돌아 온 나는 머리에 열이 나면서 며칠 앓아누웠다. 열이 몹시 나는 나 때문에 어머니는 몹시 마음 아파하시면서 강변에 모래 치러도 나가지 않고 나를 간호하셨다. 그런데 토요일 날 저녁인가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날 보러 찾아오셨다. 등에는 애기를 업고 있었고 왼손에는 달걀구럭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공책, 연필 등 학용품이 들려있었다. 우리 반 학생이 우리 집에 왔다가 내가 앓는것을 보고 선생님한테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후에 생각해보니 선생님은 나를 호되게 비평하시고 그래서 내가 앓는것이나 아닌지 하여 몹시 걱정하셨던것 같다. 우리 집을 찾으시어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 한발 막대기를 휘저어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우리 집의 가난한 살림형편을 보시고 난 선생님은 자식공부하나 변변히 대주지 못하여 미안해 하시는 어머니의 자책어린 말씀에 눈시울을 붉히시었다. 선생님은 그날 눈이 퀭해진 나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었다. "내가 너를 잘못 꾸지람 했구나. 어린 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마음 아팠겠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날 어머니와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셨다. 그 후 선생님은 자주 우리 집으로 찾아오셔 나에게 보충수업을 해주곤 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나한테 선물하신 학용품을 정말 소중하게 다루었다. 그것은 나에게 어둠속의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일은 나의 머리 속에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감동적인 영상으로 남아 나를 고무하고 채찍질한다. 가난했던 가계, 암울했던 동년은 나에게 간고소박하고 고생과 노고에 견디는 품성을 키워주었으며 자상하신 아버지, 근로하신 어머니와 따뜻하신 선생님의 사랑은 나의 어린 가슴에 맑고 밝은 마음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아마 그 마음의 씨앗이 눈을 틔고 그 눈이 작은 줄기로 자라 점차 아치를 치고 열매를 맺게 되었을게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차 가난한 아이들과 사회의 최하층에 처해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뜻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고 종당에는 자기의 필생의 사업으로 삼게 된것이다. 30여년 전인 1974년도에 있은 일이다. 문화혁명 후기였던 그때는 전반 사회가 말 그대로 침체상태였는데 그러던 중 수년 전에 타도되었던 등소평이 다시 정치무대에 나타나면서 새로운 움직임들이 보이는 듯 했다. 그때 나는 갓 스무살이었는데 농촌에서 뽑혀 와 화룡시 부동산관리소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단위에 종업원 숙소가 없어 나는 한 개인집 방을 세내어 들었다. 그 집 방에 들고 나서야 그 집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집 주인은 박씨였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병으로 앓는데다가 고정수입도 없이 아이 다섯이나 데리고 있었다. 아이들 중 큰 아이는 14살이였고 작은 것은 6살밖에 되지 않았다. 수입이라야 내가 집세로 내는 8원이면 고작일 터이였다. 그렇다 할만한 수입 내원도 없이 여섯 식솔이 도대체 무얼 먹고 산단 말인가?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한 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 몇은 당연히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찬란한 동년을 만끽해야 할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다니? 그 광경을 보는 나는 마음이 괴롭기 짝이 없었다. 나의 앞에는 두가지 선택이 놓여있었다. 남이야 어찌 되든 눈을 질끈 감고 그집을 훌쩍 떠나 다른 집을 세내어 드는 길과 이 집에 그냥 눌러 있으며 그들과 고생을 함께 하는 길 이 두가지었다. 이 집을 떠나려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양심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어릴 때 고생하던 생각이 되살아 나면서 동정심이 괴어 올라와 이 집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치밀었던 것이다. 나한테 무슨 도울 힘이 크게 있으랴만 그래도 나는 사업이 있는 한창 나이 아닌가? 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아이들까지 죄를 받아야 하나? 이 아이들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장차 커서 무용지물이 될게 아닌가? 고민끝에 나는 결국 이 집에 눌러 앉기로 마음을 굳혔다. 우선 나는 매달 39원 되는 월급을 몽땅 이 집에 맡겨 살림을 유지하게 했다. 그리고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들과 연통을 해서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다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낮에는 출근을 하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학과지도를 해주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나는 봄에는 애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캤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며 가을에는 이삭주이를 하고 겨울에는 산에 가 땔나무를 해왔다. 그리고 짬을 내여 아이들을 데리고 감옥에 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면회하고 매번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그때 복직을 한 등소평이 나라가 잘 되려면 계급투쟁도 계급투쟁이지만 우선 경제를 춰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한창 철도수송 분야로부터 정돈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얼마 못가서 계급투쟁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등소평을 다시 권좌에서 몰아내고 전국적으로 그를 재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다시 계급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갔다. 이런 판국에 나는 뭘 하고 있었는가? "나쁜 사람의 가정"과 계선을 나눌 대신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하고 심지어 감옥을 찾아가 “나쁜 사람”을 면회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러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해하기는 고사하고 나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면서 수차 나를 찾아 “교육”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왜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 무척 곤혹스러웠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계선”을 나눌 수 없어 남이야 뭐라 하든 나는 그냥 나대로 내 할 일을 했다. 내가 “기본 도리”를 깨닫지 못하니 우리 회사에서도 더는 못본 척 그대로 놔둘 수 없었던지 대회에서 수차 나를 공개 비판을 했다. 당시 계급투쟁을 부르짖던 살벌한 환경에서 회사의 책임자들도 아래 직원이 “검은 오류(黑五類)”와 휩쓸리는 것을 관계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책임 추궁을 받을 소지가 있었던만큼 나를 내놓고 비판하는 것은 아주 지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었다. 그래도 결국 나는 머리를 시종 “깨치지” 못하고 그냥 그집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4인방”이 잡혀 나오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어 세상이 살만해졌다. 박씨네 살림은 점차 호전되게 시작했고 아이들의 학습 성적도 많이 올라갔다. 맏이는 학급의 단지부서기로 되었고 둘째는 학급장으로 되었으며 넷째는 전국 소학생 스케이트시 게임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 박씨도 열심히 개조를 해서 복역 기간을 2년 줄이고 1987년에 앞당겨 출옥해 가족과 단란히 모이게 되었다. 그들 온 집 식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나의 마음도 말할 것 없이 개운하고 후련해졌다. 그리고 내가 한 일에 대한 보람을 처음으로 가슴 뿌듯하게 받아 안았다. 그 때를 시작으로 해서 나는 의지가지 없는 고아, 가정 살림 형편이 어려운 학생, 지체 장애자, 그리고 형기가 차 석방됐거나 노동 교양에서 풀려나온 인원들을 도와주고 교양하고 안치하는 사업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안락한 집은 행복의 일대 근원이다. 그것은 바로 착한 양심 다음의 자리를 차지한다. 집은 모든 사람이 자라는 요람이다. 정다운 내 집이 없으면 내가 대하고 있는 것이 비록 온 세상일지라도 역시 커다란 감방에 지나지 않는다. 쾌락과 궁전 속을 지날지라도 언제나 초라하지만 내 집만 한 곳은 없다. 한 사람은 그 나이가 얼마든 사업에서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를 막론하고 아무리 수고하거나 천애지각 그 어디를 방랑할지라도 우리의 피로한 희망은 평온을 찾아 역시 가정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의지 가지 없는 고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갈 곳이 없고 가정의 따사로움을 누릴 수 없는 그들은 약세 군체로서 사회에서 소외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1982년이었다. 화룡시 투도진에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있었는데 형님 집에서 초중까지 다녔다. 그러나 고중에 시험 쳐 붙은 후에는 학비를 이어 대지 못해 더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아내와 그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다 키우며 공부시키는게 어떨가 하고 상의를 했다. 아내는 얼굴에 난색을 띠었다. 1979년에 결혼한 나에게는 그때까지 아직 아이가 없었다. 그때 나의 누나가 장기환자로 앓다가 사망한지 얼마 안 되었다. 누나가 사망한 후의탁할 곳이 없는 두 외조카를 내가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네 식솔이 18평방미터밖에 안 되는 비좁은 집에서 붐비는 삶이 원래 기막힌데다 16살 나는 고중 학생 하나를 더 데려다 키운다는 건 누가 봐도 머리를 저을 일이었다. 난색을 짓던 아내는 끝내 나의 뜻을 따라 주었다. 그러는 아내가 나는 너무도 고마왔다.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 와서 보름만인가 나의 아내가 병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한 병실에 김해연이란 여자애가 입원해 있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다 부어 있었다. 여러 번 캐물어서야 그 애는 자기가 고아라고 실토정했다. 자기가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가 세상을 떴고 아버지도 얼마 전에 자기 하나를 남겨놓고 사망했다고 했다. 아내가 출원하자 우리는 그 애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하여 우리 집 식구가 또 하나 늘었다. 우리는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어 공부도 시키고 병 치료도 해주었으며 또 늘 영양식품을 사다 먹이고 입에 맞게 전문 밥과 요리를 해주어 점차 건강이 회복되게 했다. 아이들이 미안해 하니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얘야, 여기가 바로 너희들 집이고 나는 너희 엄마다. 마음 놓고 있으면서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 다들 알았지?" 아이 둘만 키우고 공부까지 시키려니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는데 그 후 우리가 아이를 하나 낳자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매달 39원의 노임으로 아이 둘을 공부시키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때 우리는 정말 굶기를 밥먹듯 했다. 하루에 끼니 두 때를 제대로 먹을 수 있으면 그건 아주 정상 생활을 하는 거였다. 1988년 전까지 우리 집에서는 석탄을 때본 적이 없었다. 돈이 안 드는 땔감이란 저목장이나 기차역 목재적재장의 나무껍질부스러기를 주어다 때는 것이었다. 경비원들은 안전 책임 사고가 날까 봐 저목장이나 적재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긴 겨울을 나려면 그것을 줍는 길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용케 적재장에 들어가 한 마대씩 나무껍질을 긁어 담아 짐으로 메여 오군 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년이었던지? 그러나 불을 때면 추운 겨울은 날 수 있었지만 다섯 식솔의 배가 저절로 불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밥을 먹자면 돈이 있어야 했다. 당시 아내는 양식 창고에 출근하고 있었고 나는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수업을 마치고 종자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노임만 가지고서는 다섯 식솔이 먹고 살기도 힘들었으므로 돈을 만들기 위해 우리 부부는 출근을 하는 한편 퇴근 후의 시간을 이용하여 돼지치기 등 가축사양을 벌이기 시작했다. 돈을 만들기 위해 먹이는 돼지한테도 돈은 들여야 했다. 먹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나와 아내는 쓰레기무지를 뒤지며 넝마주이 하듯 남들이 버린 감자껍질과 배추 잎을 주어다 얼리어서는 돼지를 먹이거나 닭 먹이로 했다. 때는 맏이가 갓 태어났을 때어서 아내는 애기를 업고서 짐승먹이 주이를 다녔다. 밀차에 뜨물통을 싣고 식당을 돌아다니며 뜨물 한통에 2원이나 5원씩 주고 사다가 돼지를 먹였다. 골목길에 뜨물을 쏟뜨려 길바닥이 어지럽혀지면 멀리 가서 펌프 물을 길어다 골목길을 청소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 끼니 쌀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그러면 외상으로 쌀을 사다가 밥을 지어 먹고 나중에 돼지도 팔고 달걀도 팔고 하여 그 돈으로 쌀값을 갚기도 하였다. 처음 데려다 키운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3년만에 대학에 시험 쳐 붙었다. 이는 그때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있은 큰 경사였다. 나는 아이가 너무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좁은 집에 친구들을 몇몇 불러다 “축하연”을 차렸다. 친구들은 저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기념품을 하나씩 들고 와 춤노래로 방이 떠나갈 듯 우리 집에 새로 난 대학생을 요란스레 축하해주었다. 그날 밤 새 대학생은 우리 부부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아내도 그 애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다. “사내답지 않게 울긴!” 이렇게 그애를 나무람 했지만 나도 그만 눈물 두 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우리 말 속담이 있다. 우리 민족이 자식교육을 중히 여기고 문화를 중히 여기는 우량한 전통을 잘 보여주는 속담이다. 그러나 실 생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도 늘 목격하게 된다. 적지 않은 가정들은 너무도 가난하여 허리띠를 암만 졸라매도 자식을 공부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가계마저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들이 돈을 댈 수 없어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며 대학시험에 높은 점수로 합격되었지만 농민이나 도시 빈곤층 부모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학비 때문에 대학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 결코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나라를 잃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건너온 할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아버지를 공부시켜 중학교를 마치게 했다. 중학교 졸업생이라면 그 당시 큰 인테리였는데 그 보람으로 아버지는 화룡시예술단 창시자로 활약할 수 있었고 전직 연출(감독)로 되어 장막극 로 전국 우수연출상을 수상하고 등 유명한 노래가사들을 많이 창작해 낼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3년 대기황 때 심한 병환에 시달리면서 우리 가정은 몹시 어려운 나날을 이어왔었다. 아버지가 장기환자인데다 누나까지 지병이 도지다보니 아버지의 노임은 병구완에 다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모진 고생을 다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문화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나는 대학공부를 할 기회를 놓지고 말았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5년간 중앙농업학교 통신수업을 받기도 했으나 한창 나이에 공부할 기회를 놓쳤던 일은 내 가슴에 여전히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고 한창 배울 나이에 공부를 할수 없었던 이런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나는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빈곤한 가정의 학생들을 보면 도시 그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눈에 고아나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할수 없는 애들이 발견되거나 그런 애들이 있다는 말을 얻어 들으면 무작정 그 애들을 찾아 우리 집에 데려오거나 무슨 방법을 대서든 도와주곤 했다. 아이들이 늘어나니 나의 39원 노임만 가지고서는 아이들을 학교공부를 시키기는 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때 마침 개혁개방이 갓 시작되어 개인 창업열이 한창 오를 때였다. 그때 나는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학습을 마치고 화룡시종자공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개인 창업을 해서 돈을 벌기로 마음 먹고 아내와 함께 회사에 출근하는 한편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가축사양을 벌였다. 후에는 아예 단위에 적을 남겨둔 채 노임도 받지 않고 나와 곰 사육장을 꾸렸다. 그 수입은 내 기대 이상으로 짭짤했다. 나는 그 수입을 전부 고아들 부양과 학생들 보조에 썼다.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그러니 집이 너무 비좁아 집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돈을 다 아이들 부양과 보조에 쓰다보니 1987년에 와서야 18평방미터짜리 초가집을 2000원에 팔고 시 교외에 땅을 얻어 66 평방미터 되는 벽돌집을 짓게 되었다. 이 집을 지을 때 임시 셋방에 들 돈이 없어 길가에 비닐막막 텐트를 쳐 놓고 그 안에서 살았다. 전기도 물도 공급이 안 되는 텐트 속에서 지내는 생활이란 정든 연인들이 경치 좋는 강가에 멋진 텐트를 쳐 놓고 사랑과 아름다운 추억을 엮어가는 그런 낭만과는 하늘과 땅만큼 동이 뜬 것이었다. 친척 친구들이 이러는 나를 보고 기가 막혀 자기들 집에 임시 들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들에게 페를 끼치는 게 싫어 내가 데리고 있던 고아들만 그들에게 잠시 돌봐달라 부탁하고 우리 부부는 딸 아이를 데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옹근 7개월을 텐트 속에서 지냈다. 집을 짓는데 돈이 딸려 재료를 이어대기 어려웠던 까닭에 집 짓는 일은 자꾸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뭐니뭐니 해도 빗바람 몰아치는 장마철이 견디기 어려웠다. 비가 주룩주룩 새는 캄캄한 텐트안에서 뜬 눈으로 날을 지새우는 고생이란 말 그대로 비참함 그 자체였다. 무슨 짓을 못해서 이처럼 말도 못할 고생을 사서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여러 가지로 자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간이었다. 그러다가 새날이 밝으면 모든 잡념을 다 뒤로 하고 다시 힘을 내서 집짓는 일에 뛰어들곤 했다. 아무튼 천신만고 끝에 66평방미터짜리 아담한 집이 지어져 우리는 드디어 새집들이를 하게 되었다. 나는 친척 친구들에게 잠시 맡겼던 여섯명의 고아를 모두 불러들였다. “여기가 바로 너희 집이다. 이제 너희들은 다시 떠돌뱅이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시름놓고 살면서 공부도 열심히 잘해야 한다. 다들 알겠지?” 김은실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다병한 아버지가 80여세의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집에 은실 아래로 초중에 다니는 여동생까지 달려 있어 수입 내원이 없는 집에 생활형편이란 말이 아니었다. 이제 바로 고중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김은실은 앞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앞에 길이 있기나 한지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이 일을 알게 된 나는 주동적으로 은실을 찾아가 그를 우리 집에 데려왔고 학비를 대주어 계속 고중공부를 하게 했다. 은실이는 우리 집에서 4년을 있으면서 머리를 동여매고 공부를 하여 작년에 북경교통대학에 붙었다. 입학통지서를 받은 날 은실이는 기뻐할 대신 여전히 수심어린 얼굴빛이었다. "너 웬일이냐? 오늘 같은 날 너 의례 기뻐해야 할 거 아니야? 전업이 너 마음에 안 들어 그러냐?” 머리를 가로 젓는 은실이는 무슨 말못할 사연이라도 있는듯 했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냐? 가타부타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내처 따져 물어서야 은실이는 자기의 걱정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런 게 다 아니에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병이 중하지 집은 찌그러져 금방 허물어질 것 같고 동생도 중학교에 들어갔지 하니 대학을 가도 공부가 머리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아요. 대학공부고 뭐고 아예 집어치우겠어요." 4년간 피타게 공부를 해서 어렵사리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중점대학에 붙었는데 그걸 포기하겠다니? 은실이는 두고 가는 아버지와 동생이 걱정되어 그러지만 나로서는 그러는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아내와 상의하고 은실이가 북경에 가 시름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그의 다병한 아버지와 초중 공부를 하는 동생을 함께 우리 집에 옮겨 오게 했다. 김은실은 드디어 마음을 놓고 북경으로 떠났다. 은실이 아버지와 동생은 지금도 우리 집의 성원으로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최광일은 내가 다년간 후원해준 특곤생이다. 나는 줄곧 "양민"이란 이름으로 그에게 돈을 부쳐주었었다. 내가 이 일을 극비에 부쳤으므로 그는 "양민"이란 사람이 누군지 몰라 사처에 수소문하면서 "양민"을 찾았다. 그가 많은 사람을 통해 수소문하는 과정에 점차 "의혹"의 눈길이 나한테로 집중되면서 1997년 어느 날 어느 우연한 일로 나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긴 시일 끝에 요행 나를 만나게 된 광일이는 이런 말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저는 ‘양민’이 나한테 부친 소유의 송금 통지서를 모두 복제하여 보관해 뒀어요. 저는 제가 ‘양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찾지 못한다 해도 저는 저도 역시 ‘양민’ 과 같은 사람으로 되려고 작심했습니다." 1998년 최광일은 우수한 성적으로 북경우전학원에 입학했다. 그가 북경에서 학습하는 기간에 나는 그에게 컴퓨터가 급히 수요 된다는 사실을 알고 컴퓨터를 사도록 5000원 돈을 부쳐주어 그의 학습이 영향을 받지 않게 했다. 2000년 그는 북경시 20개소 중점대학의 일본어경연에서 단연 1등을 하였으며 2002년에는 일본에 가 연구생공부를 하게 되었다. 용화향 신안촌에 사는 차영옥은 진취심이 있고 학습 성적도 우수했다. 그러나 그가 처한 가정환경은 너무도 불행했다.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장기 환자로 병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빠 또한 정신병환자였다. 불쌍한 어린 영옥이의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나는 그를 여러 모로 살뜰히 도와주었다. 1998년 그는 길림농학원에 시험 쳐 들어갔다. 대학에 보낼 때 나는 학교에 영옥이의 특수정황을 소개해주었다. 나의 소개를 들은 학교에서는 그의 학비를 면제해주는데 동의했다. 작년에 영옥이는 학업을 순조롭게 완성하고 졸업 후 한 제약공장에 들어가 근무하게 되었다. 출근한지 한 달 만에 그는 나에게 노임과 함께 편액 한 틀을 보내왔다.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학문탐구는 저의 꿈이었습니다. 저의 꿈이 우리 집의 불행으로 수포로 돌아갈 때 아버지가 다함없는 사랑으로 저의 꿈이 활짝 피어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 하늘같은 은혜를 어디 간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가정이 빈한한 학생들을 부조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 우리 글 신문인 에 나의 사적이 크게 실리었고 그 뒤 연변TV에서도 찾아와 나의 사적을 취재해 갔다. 얼마 후 이란 제하에 나의 사적이 2집 시리즈로 크게 보도되었다. 화룡시교육국의 리직퇴직 간부들이 이 보도를 보고 감동된 나머지 모금을 해가지고 쌀, 기름을 사들고 돈을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 왔다. 그들은 한구들 가득한 손자손녀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어선 안된다. 너희들의 이 아버지는 너희들의 은인이다.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자라거라. 학습을 잘해서 장차 아버지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우리는 석양에 걸음이 빠른데 너희들은 앞날이 창창한 나라의 기둥감들이다. 건실하게 잘자라서 … 그날 우리는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울었다. 나의 사업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해마다 설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입쌀, 과일 등 식품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위문을 왔으며 물만두를 가득 빚어가지고 오기도 했다. 전화로 관심과 문안을 표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내가 아이들의 곤난을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생기면 관계 부문의 일군들도 나를 찾아와 함께 해결책을 연구하기도 했다. 2001년도 관계 부처의 협력과 지지밑에 우리 부부는 개체의 명의로 화룡시희망복리원을 설립했다. 대문 기둥에 간판을 거는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 특수한 가정의 설립을 축하해 주었다. 그해 연길감옥에서 나를 교양보도원으로 특별위임을 하여 정기적으로 감옥에 가서 형기가 차 감옥을 나오는 석방인원들에게 출옥교육보고를 해달라고 했다 . 그리고 공안부문에서는 우리 희망복리원 아이들에게 집체호구를 등록해주어 고아나 출옥후 여러 가지 원인으로 호적등록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진정 자기의 안신처가 있게 하였다. 이때로부터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경제내원이 없어 공부를 할수 없는 애들을 부조하고 출옥인원들을 안치하는 일은 명실공히 나의 사업으로 되었다. 나는 그 전보다 더 바삐 돌아쳐야 했다. 고아를 수양하고 빈곤층 아이들을 도와줌에 있어서 먹고 자는 일과 학비를 대주는 일만 해주면 일이 다 끝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을 키우고 도와주면서 내가 갈수록 깊이 느끼게 되는 일이었다. 김일은 고아로서 거리를 떠돌며 걸식하던 유랑아였다. 어머니는 그를 낳자 어디론가 가버렸고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농사를 짓다가 그를 더 키울 힘이 없게 되자 그를 집에서 내쫓았다. 어린 김일이는 거리를 누비며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느 해 어느 달에 세상에 태어났는지도 몰랐다. 민정부문에서는 그에게 출생증명서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수용할 수가 없다면서 나더러 그를 키울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때 나는 이미 9명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고 있었으니 하나쯤 더 데려다 키우는 건 문제가 안 될 것이라고 민정부문의 관련일꾼들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마음을 먹고 하는 일이니 망정이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속 태울 일이 많고 돈도 엄청 들었다. 이제 한사람 더 받아 키운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당분간 대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때가 다닥다닥한 남루한 옷차림에 봉두난발을 한 어린이가 불안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마음이 아려오며 거부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수용하지 않으면 그 아이가 또다시 유랑걸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차마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를 받았다. 이 아이가 방금 왔을 때 한 가지 모병이 있었는데 저녁에 잘 때가 되면 언제나 상의로 머리를 감싸고 고슴도치처럼 온 몸을 꼬부리고 자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도 전등만 켜지면 발딱 일어나 공포에 질린 눈으로 불안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거리에서 유랑 걸식하던 그가 그 어떤 불의의 습격에 마주치었을 때 이를테면 한밤중 길가의 집 모퉁이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불안한 쪽잠을 자다가 난데없는 발길과 주먹세례를 받을 때 무의식 중 그것에 저항하는 습관적 동작임을 나는 보아낼 수 있었다. 그러는 그를 볼 때마다 나는 명치끝이 아파왔다. 이처럼 고통스럽게 비틀려져 있는 여린 심령을 제때에 교정하지 않고 치유하지 않는다면 나이가 커감에 따라 비틀린 마음도 교정 없이 자랄 것인데 그러면 그때 그의 눈에 이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 것인가? 기왕 아이를 수용한 이상 나는 반드시 아이에게 가장 깊은 정과 사랑을 주어야 하며 그로 하여금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한다. 하여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가지게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매일 저녁 그와 함께 보내면서 잠을 자도 그가 안전감을 가지도록 품에 꼭 그러안고 잤다. 6개월 동안 나는 그와 함께 잤다. 아이가 자기 나이를 모르지만 그러나 키가 겅충하게 커서 나는 그를 직접 2학년에 붙였다. 그리고 낮에 학교를 보낼 때에는 용돈을 조금씩 쥐어주어 차를 타거나 점심을 사먹게 했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또 과일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사주어 먹게 했다. 아무튼 일반 가정의 아이들이 누리는 삶을 그도 되도록 누리게 하려고 안간 힘을 다 넣었다. 석 달이 지나갔다. 이 아이는 점차 심리상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해탈되어 잠잘 때의 그 버릇을 고쳐버리는데 성공했다. 하여 다른 아이들처럼 뛰놀며 유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김일이한테는 유랑생활을 할 때부터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었다. 집에 사람이 없을 때면 나의 방에 들어와 나의 호주머니도 들췄고 다른 애들의 방에 들어가 호주머니를 들추기도 했다. 그리고는 사탕이나 과자를 사다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어느 학부형이 내가 고아라고 불쌍하다면서 돈을 주더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 줄을 감감 모르고 나는 김일이를 도와주는 이들이 하도 고마와 학교에 선생님을 찾아 감사를 드리러 갔는데 선생님은 그런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아이가 자극을 받을가봐 기회를 타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전혀 뜻하지 않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김일이가 다른 아이의 방에 들어가 한 아이의 호주머니를 들추다가 그 방에서 자는 아이가 밖에서 돌아오는 통에 그만 덜미를 잡혔던 것이다. 삽시에 온 집안의 기운이 팽팽해졌다. 나이가 많고 주먹이 센 애가 그 일을 알고 김일을 쪼지었다. 열 살도 안되는 어린 김일이는 잔뜩 겁이 나서 또 다른 애 누구누구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 다 실토했다. 김일이 이 정도로 “탄백”을 했는데도 주먹이 센 아이는 쪼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뿐이야? 아버지가 널 울집에 데려 오기 전에도 남의 돈을 훔쳤지?” 김일이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너무 배고파서…” 그러다나니 나중에 어린 김일이는 나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 다른 애들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는 애들이 분한대로 넘길수 있었지만 나의 호주머니를 털었다는 말에 애들은 치를 떨었다. “이 새꺄! 너도 사람새끼냐? 개만도 못한 놈.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 “형, 누나. 나 잘못했어. 다신 안그럴게. 제발 안 그러겠어. 엉엉…” 김일이가 손이야 발이야 비는 데도 애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이런 새끼와 한집에 살자니 낯이 뜨거워 못살겠다.” “이런 새끼는 이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 야 당장 여기서 꺼져라!” 불쌍한 어린 김일이는 그말에 그만 잔뜩 겁이 나서 형이야 누나야 하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나 다시 안그럴게. 나를 쫓아내지 마! 엉엉엉!...” 이 일을 나는 그날 연길에 회의를 갔다 오다나니 그 이틑날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 집 식구로 살고 있는 10여 명의 애들이 이구동성으로 분개를 표시했다. 만장일치로 이런 은덕도 모르고 패가망신하는 애를 어떻게 남겨둘 수 있느냐며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원래 김일에 대해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라 이번에 터진 일이 너무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아이들을 교육하는 기회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아이들의 말을 내심하게 다 듣고 나서 그들을 차분히 타일렀다. “김일이를 쫓아내자구? 너들 생각해 봐라. 걔를 쫓아내면 걔가 어디로 가겠니? 김일이는 아직 어리다. 어린 아이가 왜 잘못을 저지를 때가 없겠느냐. 너희들 잘 생각해 봐.” 이렇게 아이들을 꾹 눌러 놓고 내 방으로 돌아 왔는데 그 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나의 아들이 뒤따라 들어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손버릇 나쁘고 양심도 없는 아이를 왜 그냥 남겨두려고 합니까? 이 애를 남겨두면 다른 애들도 얼굴이 깎인다고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이들이 다 벼르고 있어요.”라고 나를 설복하러 들었다. 다른 애들이 김일이를 쫓아버리자고 할 때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친 아들이란 놈이 이런 말을 할 때 나는 천둥같이 화를 내었다. “너희들은 양심들을 어디다 내팽겨 버렸니? 너는 애비에미 다 해주는 밥을 먹고 근심걱정 없이 자랐지만 김일이는 아버지 어머니 다 없는 고아다. 이제 열살도 안되는 걔를 내쫓으면 걔는 어디로 가야 하냐? 너 인정머리 있는 놈이냐? 너한테 걔를 쫓아 낼 권리가 있냐? 나가겠으면 네가 나가라! ” 내가 화를 몹시 내는 바람에 아이들 열몇이 문밖에 와서 무슨 일이 생길가봐 조마조마해서 모여서 있었다. 그 기척을 알고 나는 아이들을 모두 들어와 앉으라 하고 김일이도 불러오게 하였다.아이들이 분개해서 쏘아보는 가운데 김일이는 고개를 푹 떨구고 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얼굴은 언녕 눈물 범벅이 되었다. 나는 기일이를 나의 옆에 끌어다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딱 그쳐. 남자애라는게 울면 못쓴다. ” 그러면서 그 애를 비평할 대신 칭찬을 해줬다. “내가 보기엔 너에게 사랑스러운 점이 있다. 너는 나이가 어리지만 어른들처럼 맛있는 걸 사서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던거지?” 김일이는 내 말이 너무 뜻밖이었던지 더 크게 흐느끼며 재빨리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래, 그게 너에게는 큰 쾌락이었지. 넌 종래로 혼자 사먹는 법이 없이 그냥 다른 애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잖아?” 김일이는 더욱 크게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런데 어느 애가 갑자기 큰소리로 “걔는 훔친 돈으로 산거에요. 아버지 호주머니까지 털어낸 양심없는 나쁜 애에요!”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못써. 김일이는 어머니 얼굴도 못보고 자랐고 자기가 어느 날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의지 가지 없이 불행하게 자란 애들이다. 배가 하도 고프니까 물건을 훔쳐 먹을 수 있지 않니? 그러다 그것이 버릇이 될 수도 있지. 그게 어디 아이들 탓 뿐이겠냐? 우리 어른들한테도 책임이 있다. 물론 훔치는건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어린 애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서 함부로 쫓아내야 한다면 얘가 정말 나쁜 아이가 될 수 있잖겠니? 너희들 정말 김일이를 나쁜 아이로 만들고 싶니? ”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이쯤 되자 나는 아이들의 기분전환을 시켜볼 요량으로 한마디 농담을 했다. “수호전 너들 봤지? 양산백 호걸들이 부자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이야기? 김일이가 그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양산백 호걸들처럼… ” 그런데, 나는 아이들의 기분 전환을 시키려고 농담삼아 한 말인데, 그만 내가 실수를 한 것이다. 어느 앤가 나의 말을 중단시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진 부자가 아니잖아요? 돈을 벌어도 다 우리를 위한 거잖아요?” 그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애들도 다투어 말했다. “아버진 택시 타는 돈도 아까워 그냥 삼륜차를 타시지 않아요? 돈을 절약하느라고 술담배도 다 끊으시고 어머니 병치료를 위해 상해에 가실 때도 그 먼 길을 침대차도 안 타시고…식사 때도 늘 우리가 다 먹은 다음 어머니와 함께 우리가 남긴 밥과 채를 자시지 않아요? 우리가 다 먹어 남은 밥이 없으면 라면도 끓여 자시고 때론 굶기도 하시잖아요?...그러면서도 우리한테는 소비로 하라고 달마다 소비돈을 주시지 않아요?... ” 이 애는 말을 하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방안의 애들이 모두 엉엉 울어대서 방안이 그만 울음바다가 돼버렸다. 그 통에 나도 그만 눈물을 흘려버렸다. 그 날 일이 있은 후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고 서로간에 더욱 관심하고 아껴주면서 사이가 훨씬 가까와졌다. 김일의 진보는 더욱 눈에 띄게 알리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었다. 아이들에게 먹고 잘 곳이 있게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것은 절대 아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참된 인간으로 키우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먹고 입고 자는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수 있는 일이지만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돈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돈을 잘 못 쓰다가는 오히려 아이들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참된 인간으로 키우자면 진정 아이들을 사랑하는 뜨겁고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시시각각으로, 처처에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장차 사회건설에 적응할 수 있는, 이상이 있고 삶의 올바른 목표가 있는, 도덕적 자각이 있고 진취심과 밝은 꿈이 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적 노력을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으로 키워내는 일, 적어도 그 기초 작업을 잘 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작업은 아이들의 실정에 맞게 해야지 처음부터 요구를 너무 높여도 안 되었다. 실제로 아이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나의 사업에서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일이었다. 그들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이상이 있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한 데 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이면 애들을 데리고 화룡시 13용사기념비, 청산리항일유적지에 가서 혁명전통교양을 하였으며 또 연변과기대를 견학하여 아이들의 나라와 고향을 사랑하고 과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주었다. 자금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아이들에게 해마다 각종 신문, 간행물을 1000여원어치 주문해서 짬짬이 보게 하였고 다달이 독서모임을 한 차례씩 열어 독서심득을 나누게 했다. 아이들의 학교에서의 학습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자주 학교를 찾아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학습을 열심히 하는 아이는 제때에 칭찬을 해주고 고무를 해주었으며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 대해서는 제때에 타일러 잘못을 깨닫고 고치도록 했다. 김철희는 두도진 신민촌의 장애인가정에서 온 애인데 내가 수양하여 공부시키는 애이다. 이 애가 한번은 담배를 피우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었다. 학교지도부에서는 철희더러 전교 사생들 앞에서 자기검사를 하도록 요구했다. 철희는 전교 사생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구기는 일을 받아 당할 수가 없어 집으로 도망쳐와 행장을 꾸려가지고 농촌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는 철희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얘야, 네가 고중공부를 할수 있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냐? 몸이 불편하신 너의 부모님들은 네가 여기서 열심히 공부해서 꼭 출세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계신다. 네가 이 꼴로 집으로 돌아가면 너희 부모님들이 얼마나 실망하시겠냐? 요만한 좌절도 이겨나가지 못하는 애가 당당한 남자라고 자부할 수 있니? 이래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부모에 효도할 것이며 앞으로의 삶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여러 모로 리치를 따져주자 드디어 철희는 자기 잘못을 느끼고 학교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철희가 마음을 돌려먹자 나는 즉시로 학교 당국을 찾아가 철희의 가정상황을 소개하고 학교에서 철희에게 관심을 돌려 줄 것을 부탁했다.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이때에야 내가 철희의 친부모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내가 철희에 대해 이처럼 관심하는데 몹시 감동되어 했다. 결국 학교에서는 철희에게 주려던 처분결정을 철회했다. 철희는 학교에 돌아간 후 학습에 열중하여 종당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춘외국어학원에 붙는데 성공했다. 지금 철희는 이미 대학을 마치고 안휘성 황산시의 한 여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때 화룡시내에서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PC방 중독에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엄마, 학교 다녀올게요.” 이렇게 말하고 집을 나간 뒤 곧바로 지하 PC방에 가서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퀭한 눈동자로 몇 시간씩 게임에 빠지는 자녀들 때문에 학부모들이 모진 애를 다 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무심히 넘길 수 없는 나는 우리 집에는 PC방에 다니는 애들이 없는지를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알아본 결과 우리 집 몇몇 애들도 밤마다 PC방에 다닌다는 것이 아닌가? 무척 놀란 나는 즉시 그 애들을 불러 놓고 단단히 다짐을 땄다. 그 아이들은 이제부터는 PC방에 가지 않겠노라고 굳게 결심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아이들을 매일 저녁 열시 전에 자도록 하고 열두시 쯤 아이들의 신발이 제대로 있나 검사를 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 시름을 놓았었는데, 어느 날 열두 시에 아이들이 자는 방을 일일이 돌며 검사했더니 웬걸, 두 녀석이나 자리에 없지 않는가? 신발은 분명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는데 이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했지? 그날 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의 PC방을 한집한집 참빗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두시간 만에 찾아 들어간 담배연기 자욱한 한 PC방에서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한 채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며 게임에 푹 빠져 있는 우리 집 녀석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이 녀석들은 내가 매일 신발검사를 한다는 것을 어느 결에 눈치를 채고 신발을 제 자리에 얌전하게 앉혀 놓는것으로 나를 속여넘기고 창문으로 해서 감쪽같이 새어버린 것이었다. 그날 밤 녀석들을 집까지 끌어다 놓은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녀석들더러 우선 제 방에 가서 자게 했다. 이틑날 저녁 나는 PC방 출입이 잦은 녀석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교육을 했다. --너들 생각해 봐라. 애비를 속이고 밤 열두시에 창문으로 빠져 세시, 지어 네시까지 담배연기가 매캐한 PC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정신 없다. 매일 이렇게 몸이 혹사당하니 이틑날 공부에 정신집중이 되겠냐? 그래 일단 PC방 중독에 걸리면 심신이 다 망가지는 걸 몰라? --친부모를 일찍 여의고 불쌍히 자란 너희들이 자기 운명을 자기로 개척해야 할거 아니냐? 공부란 단순히 공부하기 위해 하는거 아니야. 자기 운명을 앞으로 자기로 열어나갈 수 있는 기능을 닦아 사회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당당한 이 사회의 주인으로 자라나자면 오늘 어릴 때부터 해로운 유혹을 스스로 물리칠 줄 알아야지. --너희들이 잘 자라줘야 이 아버지도 기쁜거다. 너희들 잘 자라주지 않고 하나하나 심신이 망가진다면 내가 그래 시름을 놓을 수 있겠니? 나는 녀석들더러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속으로 우러나오는 반성을 해야지, 맘에도 없는 반성으로 또 한번 아버지를 속여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하고 두 녀석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했다. “알고 있다니 시름을 놨다.” 나는 왜 목소리가 그리 낮으냐고 녀석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고 웃음띤 얼굴로 녀석들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는 전체 모임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이상, 전도와 운명에 대한 교육을 하고 모두들 결심서를 쓰도록 했다. 전반 교육과정에 나는 위협과 공갈 같은 저질적인 교육방법은 쓰지 않았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나는 PC방 출입이 비교적 잦았던 녀석을 내방에 데려다 같이 잤다. 그 후 우리 집 아이들은 다시는 PC방 출입을 하지 않았고 평소보다 공부에 더 열중을 하였다. 아이들에게 남을 관심하고 도울 줄 아는 품성을 키워주기 위해 나와 아내는 매년 청명절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열사비 앞에 가서 벌초를 하였으며 친인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제물을 사가지고 친인의 묘소를 찾아가 제를 지내게 하였다. 명절이나 휴가에는 아이들과 함께 홀로 계시는 노인들을 찾아가 마당 청소도 해드리고 빨래도 해드리고 창문유리도 닦아드렸다. 아이들에게 우리 말 예절과 한어예절도 가르쳐 아침 저녁으로 집안 어른들과 동네어른들에게 인사를 할 줄도 알게 하였다. 사스로 온 나라가 바짝 긴장하던 때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이닥쳤을 때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관심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키워주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스로 불행을 당하고 있는데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내놓고 집안에서 토론을 벌였다. “우리도 사랑의 헌금을 해야죠.” 형기가 차서 우리 집에 와 있는 청년이 자기의 소비돈에서 선참 50원을 내놓았다. 그가 솔선수범을 하자 너도 나도 다투어 호주머니를 털었다. 5원, 10원, 20원…이렇게 모은 성금이 800원 되었다. 우리 구역 한 집에 가스폭발사고가 났을 때도 부상자치료를 돕기 위해 우리 애들은 쓰지 않고 모여두었던 소비돈을 모아 모두 280원을 만들어 의연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아이들은 사랑의 마음을 우썩우썩 키워갔다.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 날이나 설날이면 집안에서 송구영신행사를 가지곤 했다. 그해 성탄절에도 우리 집 10여명 식구들은 선물들을 준비해놓고 오락활동을 벌이고 잛은 글짓기 시합도 가졌다. 과거, 현재, 장래란 세 단어를 가지고 짧은 글 짓기를 하였는데 김일이가 글 두개를 지어 단연 1등을 했다. 그가 지은 글은 이러했다 과거 나는 집도 없이 떠도는 유랑아였어요. 그러나 현재 나는 따듯한 가정이 있는 학생이예요. 장래 나는 훌륭한 경찰이 되어 나쁜 사람과 맞서 용감히 싸우겠어요. 그리고 한어로도 글을 하나 지었다 去我有家,在我有)暖的家,e我要孝敬88和。(과거 나에게는 집이 없었어요. 현재 나에게는 따뜻한 집이 있어요. 장래 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효도할래요.) 이런 스스로 교육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레 밝은 마음을 갖추게 되었다. 올해 소학교 5학년생인 김일은 지금 반급의 중대장이고 남을 잘 돕고 노동 잘하고 하여 작년에 학교에서 최우수 진보상과 노동열애상을 탔다. 6.1국제아동절 날에는 자기도 불우한 학생이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자기가 입던 옷도 벗어주고 내가 준 소비돈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자기보다 더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학교선생님을 통해 아이들이 셈이 다 들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매양 격동되곤 한다. 나는 많은 고생을 감내하면서 밤낮 그들을 위해 쏟은 심혈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너희들은 마침내 앞으로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너희들에게 마침내 자기의 인생 이상과 삶의 목표가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보람감에 기쁜 감정과 더불어 가슴이 후련하고 뿌듯해났다. 이처럼 다년래 나는 선후로 고아 10여명을 수양하면서 그들더러 가정과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하였으며 그들의 건전한 성장에 평탄한 길을 깔아주었다. 30여 년래 학생후원에 돈이 얼마 들어갔는지는 나 자신도 계산해낼 방법이 없다. 매번 학교에서 개학을 할 때면 아이들의 학비문제가 나의 주요한 걱정거리로 된다. 아이들을 위해 정부 관련부처와 학교를 뛰어다니며 학비감면문제로 해당일군들과 상의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신경이 여간 씌우는 게 아니다. 그러나 매번 아이들이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을 때면 나와 아내는 친자식이 대학에 붙었을 때와 꼭 같은 희열에 푹 잠기게 되는데 이 때면 노고로 인한 모든 고달픔과 번뇌가 씻은 듯 말끔히 가시어지고 모종의 성취감으로 정신이 부쩍 난다. 1998년 10월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지면서 목으로 밥을 넘기지 못했다. 병원에 가 검사를 해보니 의사가 하는 말이 간암후기가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마른 하늘에 생벼락을 맞은 듯 앞이 캄캄해났다. 과로로 인해 아내를 이 지경이 되게 만든 내가 용서 못할 죄인으로 느껴졌다. 1979년 나와 채명자는 결혼해서 18평방미터짜리 집에서 지극히 어렵게 살아왔다.아이를 낳기도 전에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면서 돼지를 먹여 판 돈으로 아이들을 학교공부 시켰다. 첫 아이를 낳을 때 나는 30원 되는 병원 주원비도 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 형편에서도 우리는 자기 집을 출옥한 인원이 사회로 진입하는 중계소로 삼고 그들을 데려다 밥을 먹이고 그들에게 일거리를 찾아주기 위해 동분 서주했다. 이러는 나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내 신랑”이라고 하면서 불평 하나 없이 나와 모든 고락을 같이 해온 아내!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생계를 돌보느라, 내가 하는 일을 돕느라 과로로 불치병에 걸린 아내!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에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내만은 살려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즉시 상해 병원에 가 확진을 하고 시급히 치료를 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리고 즉시 행동에 옮겼다. 상해로 떠나는 날 내가 수양했던 고아들과 학생들이 모두 우리를 바래러 왔다. 그 애들에게 무슨 돈이 있으랴? 하지만 그들은 우러나오는 진심에서 자기 몸에 있는 돈을 다 털어냈다. 10원이 있는 애는 10원을, 5원이 있는 애는 5원을, 2원이 있는 애는 2원을 내놓았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꼭 병 치료를 잘해서 빨리 돌아와야 돼요. 우리는 모두 어머니를 한번 잃었는데 또 잃을 수는 없어요. 우리는 다 어머니가 돌아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릴 거예요." 이 광경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모자간이 아니면서도 모자간을 초월하는 사랑만큼 가슴 치는 정이 또 있을까? 아내는 떨리는 손으로 병 치료에 쓰려고 준비했던 만원 돈에서 천원을 내여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들의 정과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우리는 상해에 도착했다. 하늘도 눈이 있는가 보다. 진일보의 검사를 거쳐 아내의 암증의혹은 배제되고 종양으로 확진이 내렸다. 몸속에 지금도 종기가 6, 7개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나와 우리 아이들은 모두가 일장 악몽에서 깨어난 심정이었다.0 아내에 대해 조금 시름을 놓게 된 나는 내가 이미 푹 빠진지 오래인 사업속으로 다시 빠져 들어갔다. 한번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맞닥쳤다. 진래감옥의 초청을 받고 가 감옥수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내가 30년 전에 후원해주었던 주인집 박씨의 맏아들을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를 통해서 안 일이지만 그의 아버지 박씨는 출옥후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이미얘기를 한 바이지만 그때 맏이는 학교에서 단지부서기를 했었는데 졸업 후 어쩌구러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되었다. 감옥수의 아들로 고생스레 자라온 그였지만 평생 농촌에서 땅을 뚜지며 묵묵히 살아나가야 할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자기의 기막힌 신세를 한탄하며 모대기던 그는 시내에 들어가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혈혈 단신으로 어느 큰 도시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어느 우연한 기회에 남의 돈을 아주 쉽게 자기 손에 넣었다. 그때 학교에서 단지부서기를 할 때 노래처럼 부르던 이상과 인생목표는 이미 그의머리속에서 까맣게 사라져버린지도 오랬다. 그는 쉽게 훔친 돈뭉치의 유혹을 부리치지 못하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을 훔친 다음 손을 씻고 사람답게 살아가겠다는 범죄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는 이런 마음을 사려먹었을 때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얼마 안 돼 그는 절도죄를 짓고 진래감옥에 들어갔다. 진래감옥에서 강연을 하는 나를 알아본 박모는 몹시 놀랐다고 했다. 이삼십년 전 자기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었던 사람을 강산이 몇 번 변한 오늘 자랑스러운 곳도 아닌 감옥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부끄러워 나를 만나지 않으려 했다고 실토정했다. 그런데 부끄러운대로 나의 도움을 받고 싶더라면서 주동적으로 나를 찾은 경위를 나중에 내가 그와의 면회를 마치는 순간에 밝히는 것이었다. 면회실에서 우멍한 눈으로 나를 일별하고는 참괴스레 머리를 돌리고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의 눈물은 끝이 없었다. 그 눈물은 감동의 눈물이기에 앞서 부끄러움의 눈물이자 자기를 도와준 사람의 희망을 저버리고 굽은 길에 들어선 못난 자기에 대한 뉘우침의 눈물이요 회한의 눈물이었으리라. 그도 한때는 학급을 이끄는 학생대표였지 않았는가? 그때 그 열정과 호기는 어디로 갔어? 대관절 무슨 유혹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냐? 무슨 유혹이? 배우기 싫어서? 일하기 싫어서?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난 20여년간 그에게서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나는 불현듯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리에서 그는 그 이상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나도 말을 몇 마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낱낱이 읽고 있었다. 작별하면서 나는 "새 출발 준비를 열심히 해! " 하고 한마디를 했다. 그는 말은 없이 그저 머리만 거듭 힘 있게 끄덕여 보였다. 그 후에 나는 수차례 그를 면회하러 갔다. 그도 감옥에서 열심히 노동개조를 했다. 개조 표현이 좋아 1998년 그는 드디어 2년 앞당겨 출옥하였다. 하지만 40을 바라보는 그는 어디 갈 곳마저 없었다. 나는 그를 우리 집에 데려다 잡일을 시켰다. 그 후 나는 그에게 대상도 소개해주고 혼례식도 치러주었다. 하여 그에게는 포근한 가정이 있게 되었다. 그 후에는 외국노무를 나가겠다고 하여 수속을 해주었다. 한번은 그한테 돈이 급히 수요 되었다. 갑자기 어디 가 꾸려 해도 꿀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나는 남몰래 아내의 의약비용에서 2000원을 잘라내어 그에게 주었다. 얼마 전 나의 아내가 한국으로 갈 때 그는 2000원을 아내의 손에 쥐어주면서 "이전에 아저씨가 저한테 뀌어준 거래요."라고 했다. 아내는 "아저씨가 뀌어준 돈은 지금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우선 조카 살림을 춰 세우고 나중에 봐." 아주머니의 이해와 지지 앞에서 아주머니의 몸속 간장에 아직 혈관종기가 다섯 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감동된 나머지 아주머니를 덥석 그러안고 말 한마디 못하고 눈물만 좔좔 흘렸다. 지금 그는 연길시의 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가 세 식구가 본분을 지키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몇달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 잘 있느냐 무슨 어려움은 없느냐고 문안을 한다. 남윤송은 타인상해죄로 17년 유기형을 언도받았는데 나의 도움 밑에 개조에 노력하여 2003년 2월 앞당겨 풀려나왔다. 출옥 후 일시 거처할 곳이 없자 나는 그더러 우리 집에 와 있게 하였다. 그는 심한 폐결핵으로 앓고 있었는데 당시 우리 집에는 내가 데려온 가난한 애들이 6명이 들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감염이 될까봐 걱정이었다. 생각 끝에 그에게 단독 방을 하나 내주었고 아내도 따로 그에게 식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매번 식사를 끝내면 식기를 끓여서 소독을 했다. 그의 병이 깨끗이 완치 될 때까지 견지했다. 그러나 생활상의 관심과 병에 대한 치료만으로는 남윤송의 "사상병"을 퇴치하기에 부족했다. 사회상에서 기시를 받는 일이 내키지 않아 그는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다. 하루는 남몰래 애꿎은 술만 축내면서 한밤중이 되도록 자지 않고 속에 가득 깔려있는 울분을 쉼 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타이르고 말렸으나 그는 듣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나를 쥐어흔들면서 내가 자기의 고충을 모른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는 키꼴이 1.93미터나 되는 헌걸찬 사내인데 반해 나는 키가 1.58미터밖에 안 되는 왜소한 몸이어서 근본상 힘센 그를 말려내는 재간이 없었다. 그한테 이리저리 밀치어 내 몸 여러 곳에 멍이 들었고 다리는 어디에 다쳤는지 피까지 흘렀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냥 설득작업을 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우선 네가 사회를 위해 해놓은 일이 뭔가를 생각해야지.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루기 마련 아니야? 남들이 왜 너를 차별시 하겠냐? 우선 남들이 널 차별시하고 깔본다고 탓하기에 앞서 네 자신이 차별시 당한 짓을 한 게 아니야? 네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자기절로 꿋꿋이 일어나야 한다. 너 오늘 이런 꼴로는 백년가도 사람들에게 존중 받을 수 없다. " 그날 마침내 정신을 차린 그는 나를 붙들고 울면서 "나는 정말 무용지물입니다. 나에게 과연 차별시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건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그런 날이 안 올 리 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다시는 자기의 삶에 비관하지 않고 일마다 열심히 했다. 병이 완치되자 그는 천진에 가서 일자리를 찾았다. 얼마 전에 그는 천진에서 전화를 걸어왔는데 회사에서의 사업상황을 자세히 전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몸은 여기 천진에 살고 있지만 화룡의 나의 집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화룡의 집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있는 집입니다. " 그의 전화로부터 나는 그의 꽁꽁 얼었던 마음이 완전히 풀렸음을 폐부로 느끼었고 그의 앞날이 창창하기를 기원해마지 않았다. 이씨는 상해죄로 8년 유기형에 언도된 사람으로 돈화시 추리구 감옥에서 복역했었다. 그더러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사회에 돌아오도록 나는 늘 감옥에 가서 그를 면회하군 했다. 면회 때마다 마음속 얘기를 나누면서 열심히 개조를 하라고 고무 격려해 줬고 과학기술 도서와 문화서적도 자주 보내주어 장래 출옥한 후 사회에서 일을 찾는데 기초를 닦게 했다. 이씨가 향기가 차 석방된 후 경제수입이 없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나는 만원을 내서 목기공장을 꾸리도록 도와주었다. 몇 년간 경영을 열심히 잘한 보람으로 공장은 경기가 갈수록 좋아져 지금 이씨는 이미 백만 자산을 갖춘 민영기업가로 되었다. 장청학이란 청년은 상해죄로 유기형 7년에 언도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한번은 감옥에 가 보고를 할 때 특히 그를 보러 간적이 있다. 그 때 장청학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세상을 떴지 내가 이 모양이지 삶이란 것이 이제 나에겐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 범인이 앞으로의 생활에 신심을 잃는다면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며 새 출발을 할 결심과 용기마저 잃게 된다. 복형인원에게 있어서 이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이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낙망할 이유가 없어. 신심을 잃지 말고 열심히 개조를 해. 너 원하기만 한다면 출옥 후 나를 찾아와라.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 나의 말을 들은 그는 삶의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가다듬었다. 그는 마침내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감옥에서 열심히 일하며 개조의 노력을 기울였다. 개조 표현이 아주 돌출했으므로 그는 2년 앞당겨 석방되었다. 그가 출옥하는 날 나와 아내는 새 옷을 사가지고 감옥으로 그를 마중 갔다. 식당에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고 택시를 내서 그를 데리고 연길시내를 한 바퀴 구경시키면서 그 사이에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느껴보게 했다. 그는 감동되어 이렇게 말했다. "저를 믿는다면 저더러 이 경리 집에 남아 일하게 해주세요." 나는 정말 그를 우리 집에 남겨 매달 600원 노임을 주면서 그에게 할 만한 일을 맡겼다. 감옥에서 나오면 어떻게 살아나갈까 무슨 나에게 차례질 일감이나 있을까 걱정이 많았던 그는 일감이 생기고 생활이 보장되자 정서도 매우 좋아졌고 일을 해도 자신감에 넘쳐했다. 어느 한번 나는 연길감옥에서 보고를 할 때 형기가 거의 끝나가고는 있으나 돌아갈 집이 없는 왕모의 사정을 알고 왕모가 석방되는 날에 주동적으로 감옥까지 찾아와서 왕모를 나의 집에 입적시켰다. 또한 왕모에게 인력거를 사주어 왕모의 생계문제도 해결해주었다. 절도범죄자인 주모는 만기석방 된 후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나는 두말없이 사법부문과 향정부에 찾아가 주모에게 농사에 필요한 생산대부금을 해결해주었다. 장춘에서 농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또 주모에게 여비를 대주면서 박람회에 참가하여 치부의 길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최근 나는 또 3명의 형기가 차 출옥한 석방인원과 원조커플이 되었다. 그중의 둘은 갈 곳이 없는 무의탁자이다. 그들에게 장사를 해보라고 돈 만원을 뀌어주면서 "바른 길만 걷는다면 어느 때든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들도 노력을 아끼지 않아 장사가 꽤 잘 되고 있다. 이처럼 30여 년래 나는 시종 변함 없이 이른 바의 많은 "불량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교양하는 사업에 많은 심혈을 기울려왔으며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돌려세웠다. 내가 도와준 청소년 치고 다시 죄를 짓고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이 점을 다시 없는 자랑으로 생각한다. 몇 년래 나는 초청을 받고 여러 번 연변 자치주내 각지를 돌면서 사적보고를 하였다. 작년에 연길감옥의 초청을 받고 곧 출옥하게 될 석방인원들에게 강연을 한차례 하였는데, 그들은 나의 보고를 듣고 모두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어느 하루는 박문길이라는 청년이 우리 집에 찾아 왔는데 그는 자기는 최근 연길 감옥에서 출옥한 자로 감옥에서 나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당신이 보고에서 말한 그 일들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보나마나 당신은 허풍 치는데 불과하지요. 오늘 이 세상에 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 많은 고아와 빈곤한 학생을 정말 수양하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오늘 이 집을 찾아온 겁니다. " 이어 그는 도전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마음이 그렇게 좋다면, 나를 수양할 수 있다고 지금 감히 답복 줄 수 있습니까? " 나는 주저 없이 말을 받았다. "안 될 거 없소. 원한다면 지금부터 우리 집에 머무르오. " 그는 말한 대로 우리 집에 머물러 살았다. 그가 우리 집에 머무른 시간은 십여 일간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보고 이런 말을 했다. "이 원장님, 이 원장님한테 두 손 들었습니다. 당신이 실지 한 일은 당신이 말한 것에는 비교가 안 되게 훨씬 더 많더군요.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직접 내 눈으로 보려는 것이었는데, 지금 나는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분이고 훌륭한 분입니다. 이 사회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몇 분만 더 있어도 좋을텐데…"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보시다시피 나는 몸이 튼튼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기서 고히 이원장이 끓여주는 밥만 먹고있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가거든 그 자리에 가난한 아이 하나를 더 받아 기르세요. 나는 꼭 당신을 따라 배워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가겠습니다. 후에 능력이 될 때면 꼭 와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방탕한 아이의 개심은 금주고도 못 바꾼다는 속담이 있다. 나는 박문길과 내가 도와주었던 모든 "방탕아", "문제아"들이 꼭 자기의 앞길을 잘 헤쳐 나가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그들에게 대량의 심혈을 몰부었을 뿐만 아니라 대량의 자금도 쏟아 부었다.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문철은 돈 많은 부자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확실히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1974년부터 경제적으로 고아와 빈곤학생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들을 도와주려면 반드시 자금이 있어야 했으므로 나는 이 문제의 해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나는 1985년에 회사의 직을 보류한 채 노임도 받지 않고 나와 자체로 돈이 될 만한 일들을 여러 가지 벌렸다. 돼지사양도 하고 점포도 차리고 식당도 경영하면서 자금누적도 얼마간 했었다. 2001년에는 종자공사 경리 직을 그만두었다. 후에 나는 곰 20여 마리를 치고 샤워실도 경영하여 해마다 근 1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그간 내가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지 않고 빈곤한 학생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석방해제인원들을 여러모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 나에게는 100만원을 웃도는 자금이 있을 것이며 이미 큰 부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전히 비교적 가난한 상태에 있다. 그것은 내가 다년간에 걸쳐 번 돈을 모두 고아, 빈곤학생, 장애인, 그리고 석방해제인원들을 돕는데 썼기 때문이다. 한번은 아내가 감개에 젖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양주가 긴긴 세월 적어도 별장 한 채와 고급승용차 한대는 잃어버린 것 같네요." 그러는 아내를 보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선물한 것’이요. ‘잃어버렸다’와 ‘선물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요. ‘잃어버렸다’는 것은 제대로 지키지 못해 누군가가 우리 몰래 가져갔다는 것이고 ‘선물했다’는 것은 우리가 자원해서 내놓은 것이고 기여한 것이 아니겠소! 이런 명세를 구구히 따질 필요야 없지. 물론 이런 일들을 하노라니 우리에게 희생이 있게 되고 우리 살림이 조금 고달파진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오. 우리는 조금 고달프지만 그 대신 의지 가지 없는 고아들이 의탁이 있게 되고 돈 없는 학생들이 대학 꿈을 이루고 방탕아 문제아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되지 않았소? 이 큰 명세는 따져야 하오. 세상에 이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어데 있소?" 나는 아내에게 또 이런 말을 했다. "기왕 이 길을 선택한 이상 이 길이 아주 어렵다 해도 후회 없이 끝까지 걸어 나가야 하오." 어떤 이들은 나를 바보라고 말한다. 바보라도 좋다. 나는 어려서 모진 고생을 다하며 자랐다. 오늘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지지리도 못살던 지난 날을 깡그리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나에게 능력이 있다면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이것은 철칙으로 우리에게는 개인의 이익을 옴니암니 따져야 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내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상당히 큰 대가를 치른 것은 사실이다. 우리 가정 식구들은 늘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돈 한푼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딸이 고중을 다닐 때도 매 주 돈 5원씩만 소비돈으로 주었고 아들이 소학교를 다닐때도 이틀에 50전 주었을 뿐이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는 담배와 술을 끊어버렸고 친구들이 가지는 모임에도 웬만하면 가지 않았다. 가라오케 같은 고소비 장소에는 더구나 드나든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우리 집은 아이들이 먼저 밥을 먹고 나서야 우리 어른들이 비로소 밥술을 든다. 아이들이 다 먹고 나면 어른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도 있다. 어른이 좀 굶더라도 친부모의 사랑을 너무 일찍 잃고 자란 이 애들을 굶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시종 나의 생각이었다. 20여 년래 우리 네 식구는 종래로 단독으로 지낸 적이 없으며 우리 집 식구끼리 명절을 쇤 적도 없다. 우리 집에는 자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택시도 마음대로 타지 못한다는 제도가 있다. 나도 물론 이 제도를 준수한다. 한번은 시에서 회의를 하다가 집에 급한 손님이 와서 급히 귀가해야 하였다. 택시를 타면 5원이 들었고 3륜차를 타면 1원이면 집까지 갈수 있었다. 하여 삼륜차를 불러 탔는데 마침 그 인력거군은 용정에서 온 사람으로 본지에서 인력거를 몰려니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꺼림칙해서 우리 화룡으로 와서 인력거를 모는 거였다. 그런데 이 분은 아마 텔레비전에서 나의 사적을 본 모양, "며칠 전 텔레비전에 나온 분 아닙니까? 참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하시는 훌륭한 분이신데 어찌 이런 초라한 차를 타시는지요? 좋은 일을 말하기야 뭐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실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집에 이르러 돈 1원을 내니 그분은 "선생님이 저의 차에 앉으신 것만 해도 너무 영광스러운 일인데 어찌 돈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기어이 받지 않으려 했다. 기차를 타도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는 침대차에 앉지 않는다. 북경, 장춘, 상해, 사천 등 먼 곳으로 가도 좌석 표를 끊어가지고 앉은 채로 자면서 먼 거리를 줄이곤 했다. 때때로 조용히 생각을 하다보면 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감을 느끼게 된다. 나의 아내는 중병이 있는 몸임에도 훌륭한 치료를 받을 대신 종일 나와 함께 고아들과 빈곤한 학생들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나의 두 자식도 자랄 때 우유 한통 못먹고 자랐다. 좀 큰 뒤에는 나를 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다. 때로는 나도 어떤 억울함을 당하여 마음의 고통에 모대기고 분하고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지는 못하고 자기 자식에게 화풀이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의 자식들은 용케도 참아내고 묵묵히 견뎌 내었다. 나의 딸 이춘이는 올해 23 살이다. 춘이는 어릴 때부터 줄곧 내가 수양하는 아이들, 빈곤한 아이들과 생활을 함께 했으며 나를 도와 나이가 자기와 같거나 자기보다 더 큰 아이들을 돌보군 하였다. 매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를 도와 곰을 먹이고 상점경영을 돕곤 했다. 말하자면 나의 사업에서 좌우 팔이 되어주었다. 작년에 그가 한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떠나갈 때 춘이는 두 눈을 깜빡이며 "아빠, 나한테 기념품을 사주지 않을래요?" 하고 물었다. "너 가지고 싶은 게 뭐지?" "MP3. 사주실래요?" "그거 하나에 얼마씩 하는데?" "600원 하는 것도 있고 1000원씩 하는 것도 있어요. " 나는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런 말을 했다. "얘야, 우리 집은 오랫동안 간고분투 정신을 버리지 않고 이어왔다. 이 전통을 잊어서야 되겠니? 너 우선 한국에 가서 공부를 시작해라. 그러다 그것이 정말 수요되거든 자기 절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하나 사든지 하는 게 좋지 않겠니? " 딸은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유감을 남긴 채 한국으로 떠나갔다. 기실, 나의 딸은 나를 따라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는데 출국을 하면서 기념으로 MP3 한대 사달라는 건 조금도 분에 넘치는 요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집에 아직 돌봐줘야 할 어려운 아이들이 10여명이나 있는데 그들을 생각하면 가계계산을 꼼꼼히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는 이처럼 각박하면서도 의지 가지 없는 고아나 가정 살림이 어려운 학생들이나 석방해제인원들이나 홀로 사는 노인, 지체장애인과 같은 약세군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씀씀이가 대범했다. 장홍란은 내가 수양한 빈곤학생인데 작년에 동북사범대에 시험 쳐 붙었다. 그를 대학에 보낼 때 나는 그에게 CD기 한대를 사주었다. 그의 언니가 출국유학을 갈 때 돈이 모자라니 나는 비싼 이식으로 돈 3만원을 꾸어 그를 출국유학 시켰다. 매년 설이 되면 나와 아내는 위문품을 가득 사가지고 독신노인, 지체장애자와 곤란 호들을 한 집 한 집 방문하며 그들을 위로했다. 수년래 나는 선후로 여러 명의 빈곤학생에게 컴퓨터와 CD기, 그리고 기타 생활용품을 사주었으며 석방해제인원들에게 장사를 하라고 자금을 대주었으며 고독한 노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식품이나 생활용품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든 자금이 평균 해마다 만 여원어치 되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 친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낳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부모가 어데 있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하는 데는 나로서의 도리가 있다. 나의 딸이 이 아비한테서 MP3을 선물 받지 못한데 대해 조금은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의 딸은 어려서부터 친부모의 품에서 자라면서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유감없이 받아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복을 누릴 수 있다. 그중 최고의 복은 아마 친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는 것이리라. 이 의미에서 말하면 나의 딸은 분명 행복하다. 하지만 내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 곁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없다. 그 유감은 그 무슨 방법을 대든 미봉할 수가 없다. 내가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좀 더 쏟는 것은 미봉하기 어려운 그 유감을 단 얼마만큼이라도 줄여주어야겠다는 마음에서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그 아픈 상처를 다문 얼마라도 무마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애들도 친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꼭같이 행복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일들을 하는가 하고. 실상 나 개인으로 놓고 말하면 결코 그 무엇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요 명예나 명성이나 그 어떤 관직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런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결코 이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나라고 왜 편한 삶을 살고 싶지 않겠으며 늘 고달픈 삶을 살고 싶겠는가? 지금 나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 식솔들이 지금은 23명 대가정과 한데 섞이어 먹고살고 있지만 어느 땐가는 우리 네 식솔에게만 속하는 공간을 마련해 가지고 단란하게 모여 살면서 가정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내가 직접 차를 몰고 우리 식솔들을 태워 연변의 아름다운 산천을 함께 구경하는 것이다. 최근 나는 외상으로 26만원짜리 포크리프트 한대를 사서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희망복리원을 자기 힘으로 잘 꾸려나가자면 경제내원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30여 년래 내가 수양한 고아, 경제지원을 해준 빈곤학생, 석방해제인원은 모두 70명에 이른다. 그중 북경, 상해, 운남, 사천, 대련, 장춘 등지의 대학에 간 아이가 33명이다. 일본에 연구생으로 간 학생을 포함하여 연구생도 3명이 나왔다. 한 학생은 졸업후 연변과기대 에서 근무하고 있고 몇몇은 기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아이들은 남방의 한국 기업에 취직했다. 개인으로 창업을 한 아이들도 많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서 수여한 , , , , 국무원에서 수여한 등 여러 가지 영예를 받았고 사적이 , , , 연변TV방송 등 많은 신문간행물과 기타 매체에 보도됐다. 그러나 나는 이런 영예를 단지 나의 전진의 동력으로 간주할 따름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명예가 중요한게 아니다. 나의 명예와 관련해서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나의 영향으로 고아, 장애인, 가난한 학생, 감옥에서 나와 사회 사람들의 기시를 받으며 죽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한 가지 소망뿐이다. __끝__
74    소띠의 해,고향의 진흥을 기원하며 댓글:  조회:4153  추천:63  2009-01-27
소띠의 해, 고향의 진흥을 기원하며   대희대비가 엇갈린 쥐의 해 무자년이 저물고 세계경제의 중대한 변화를 예시하는 소의 해 기축년을 알리는 종소리가 “뗑~~!” 하고 울렸다. 그 소리가 인간의 심령을 울릴만큼 자못 웅숭깊고 우렁차다.    소의 덕성에 대해 인간의 평가는 종래로 대단하여 소를 “짐승 중의 군자”로, 지어 “동물 중의 부처요, 성자”라고 떠받들 정도다. 특히 소의 조건타발없는 봉사성, 근면성과 철저한 자기희생정신에 경복해 마지 않으며 흔히 경건한 마음으로 그러한 소의 정신을 배우겠다고들 발표를 한다.   명인들도 례외가 아니다. 로신선생은 <자조(自嘲)>라는 시에서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쌀쌀하게 눈썹 치켜세워 응대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머리 숙여 소가 되리라(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爲孺子牛)”라고 했다. 곽말약선생은 자기는 몸집이 우람진 소가 아니라 “소의 꼬리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고 모순선생은 소꼬리도 아니고 소의 몸에서 피를 빨아먹으려고 달려드는 파리와 모기를 쫓는 “소꼬리의 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인민의 황소(노복)란 허울을 쓰고 오히려 주인행세를 하면서 깍듯이 모셔야 할 주인(인민)을 괴롭히는 사람들, “닭의 대가리가 될지언정 절대 소꼬리로는 되지 않겠다”면서 벼슬자리만 노리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될수 있는 거룩한 심령의 고백에 머리가 깊숙이 숙여지지 않을수 없다.   세계가 금융위기로 심한 몸살을 앓고있다. 이러한 때 황소처럼 끄떡없는 우리 중국의 온건한 걸음새가 너무나도 듬직해보인다.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1%로 전망한 것과는 달리 올해 중국이7.0~8.9%의 경제성장을 이룩해낼것이며 세계 경기 침체를 완충하는 “기관차”구실을 할 것이라는 국제기구의 분석이 나왔다.   우리 길림성도 근년들어 발전을 재촉하는 움직임이 평범치만은 않다. 지난해 GDP, 고정자산 투자 증장폭 등 주요경제지표가 모두 전국의 앞자리를 차지했는데 올해도 이런 태세를 그냥 유지할 잡도리다. 3000만원 이상규모의 신규항목을 1500개나 새로 가동시킨다는 점만 봐도 여간 간단치 않은게 아니다.    연변의 잡도리도 만만치 않다. 올해 황소 등 7대산업 프로젝트를 계속 실시하며 고정자산 투자도 지난해보다 35% 나 더 많은 567억원에 도달시키려 계획하고있지 않는가!    국가 종합경제실력이 크게 강화됨에 따라 우리 나라 경제발전의 전략중심은 이미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겨졌으며 “3농”에 대한 국가의 투자도 아주 적극적이다. 농촌개혁에 대한 당의 17기 3차전원회의의 최신결정과 국제금융위기의 배경하에 4만억을 쏟아부은 중앙정부의 내수진작책, 그리고 농촌토지류전정책과 관련, 농민리익보장을 위해 중앙정부에서 속속 마련중인 각종 제도적장치 등은 최근년간 지지부진하던 농촌개혁을 자극하여 신농촌건설을 크게 밀어주게 될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한국 등 나라에 진출했던 조선족농민들이 대거 귀국붐을 일으키고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주었던 토지를 도로 찾아오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지고있다. 안정된 삶의 보장인 고향땅의 중요성을 그 어느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피부로 느낄수 있는 오늘이다.     조선족농민들의 대도시 및 외국에로의 대량진출로 농촌인구가 크게 류실됨에 따라 장기간 인재결핍으로 시달리는 위기의 농촌상황이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우리의 농촌에 촌민들을 진정 대표할 수 있는 간부가 있어야 농민들을 이끌어가지고 토지합작사를 꾸리든 농산물판매합작사를 꾸리든 합작기금을 세우든 하나하나 중대한 일들을 해낼수 있을것이 아니겠는가. 촌간부를 할만한 적임자도 찾기 어려운 안타까운 현실문제들이 한국진출농민들의 대거 귀국으로 잘 풀렸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또 이 문제가 조만간 잘 풀릴것이라고 믿는다. 우선 바깥세상에 나가 눈뜨고 돌아온 이들이 고향에 대한 애정과 피땀흘려 벌어온 돈으로 고향건설에 반드시 한몫 크게 할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촌간부의 원천은 환고향한 로무일군들속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대학교 졸업생들도 원천의 하나일수 있다. 우선 그들중 단 10여명이라도 농촌개혁과 고향건설에 큰 뜻을 품고 나서서 인재난을 혹심하게 겪고있는 우리 고향에 희망을 불어넣었으면 하는 기대도 가져본다. 물론 큰 포부와 상당한 준비가 없이 아무나 쉽게 할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중앙으로부터 정책적으로 적극 밀어줄 조치를 대고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정치가적 두뇌와 총명재질을 갖춘 청년들이 반드시 나타나 수많은 청년들에게 훌륭한 본을 보여주게 될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우리 농촌의 밝은 희망을 저 푸른 하늘에 띄워보고싶은 소띠의 해다.   근면과 유유자적의 미덕으로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소, 우직한 품성에 “황소고집” 으로 항상 굳건히 제 자리를 지켜온 소, 농업을 천하지대본이라고 할 정도로 농업에 치중했던 력대 경제생활에서 거의 우리 인간과 한 가족이라고 봐도 될만큼 귀하게 대접받아왔던 소, 정말 우직하고 순박한 소의 본성을 본받아 여유와 평화를 누리며 새해부터는 우리 고향에 복된 삶을 부르고 영위하는 그런 힘센 존재로 우뚝 서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길림신문]
73    리귀남의 유화작품전시회를 가다[박문희] 댓글:  조회:9050  추천:58  2008-12-22
리귀남의 유화작품전시회를 가다 일전 중앙번역국의 리란녀사가 어느 만난 자리에서 (10월) 18일 중앙민족대 유화학부 리귀남 주임 신작개인전 개막식 칵테일파티가 있는데 구경하지 않겠느냐면서 초대장 한장을 건네오는것이었다.   미술과 서예 따위에 취미가 있는데다 미모의 리란여사가 모처럼 추천하는 행사인지라 "두말할것 있나, 구경하고말고" 하고 청첩장을 얼른 받아 챙겨넣었다.     미모의 리란여사. 하나의 판에 박아낸것처럼 어머니 우복순(룡정소학교 로교원)을 빼닮아먹은 이란씨는 북경에 온지도 20여년이 되는데, 어려운 대학생들을 돕느라고 장학금사업을 지금까지 7년째 해오고있다.   현재 세계적인 금융풍파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경제상황이 그닥지 않지만 장학금사업을 접어버릴 생각은 전혀 없으며 이 일은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치든 계속 견지해나갈것이라고 했다.   미술전개최장은 베이징 北 2環에 위치한 德勝門 箭樓 3층의 藝森畵廊이었는데, 이날따라 교통체증이 심해 나는 한시간 늦게 도착했지만, 그렇다고 볼 것 못보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명청시대 베이징보위에 대공을 세운 군사방어용 성문으로서의 덕승문은 당년의 웅위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 기품이 범상치 않았다.     좁은 층계로 줄쳐오르는 참관자들의 모습이 갑옷 차림의 옛군사들 모습과 오버랩되어 안겨온다.     구불구불 위(箭樓)로 뻗힌 층계를 톺아오르노라면 一夫當關 萬夫莫開의 고사가 보는듯이 뇌리에 떠오르는것이었다.   한 젊은 여성이 꽃묶음을 안고 총총걸음으로 톺아올라온다. 누구한테 선물하는 꽃묶음일까?   눈에 익은 꽃인데, 이름을 알수 없다. 개나리꽃 같기도 한데, 그건 아니다. 그러나 아마 개나리꽃의 사촌이나 육촌쯤은 될것이다.       저기 보이는 고대 축조물이 바로 箭樓이다. 명청시대 건물이 멋지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나라때의 덕승문은 이런 모습이었다.  종루에서 내려다본 녹지. 이귀남 신회화전 축하함이라고 씌어진 꽃바구니가 줄느런히 서서 하객들을 반긴다.   오, 그리고보니 그 여성도 이귀남 미술전을 축하하러 온게로구나.   건물앞에서 리란씨가 중앙민족대의 어느 교수와 무슨 얘기인지 나누고있었는데, "청각장애"가 심한 나에게는 그들이 입을 닫았다 열었다 하는 모습만 보이고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날의 주인공 리귀남 씨. 꾹 다문 입과 커다란 눈.   커다란 눈은 그의 작품의 주제의 하나이기도 하다. 아래 큰눈계열의 작품 몇폭이 소개된다. 그의 자화상도 거개 다 큰 눈이다.  어느 미모의 녀성이 리귀남씨에게 사인을 요구하는듯 했다. 말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의 움직임을 통해 볼수는 있었다.   --사인 좀 해주실래요? --머, 사인해드리죠. 얼마든지. --기념사진 남겨도 될까요? --아 되구말구요. 얼굴 잠간 빌려주는것 쯤이야 어려울 것 없죠..       --음 그렇다면 울도 한번 사진 남겨볼까요? --그러죠 머.   다리를 쩍 벌리고 선 리귀남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에도 다리를 쩍 벌리고 선 자화상과 인물들이 적지 않은데, 참 재미가 있는 동작이다. 나는 미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므로 다리를 쩍 벌리고 선 것에 무슨 심각한 의미가 있는지는 전혀 알수 없다.   때문에 무슨 해석같은 것은 시도할수 없다.   리귀남의 미술을 보러왔다 해서 리귀남과만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 특히 미모의 그의 부인과 기타 미인들과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말도 안되거니와 옳지도 않을 것이므로 나는 리부인과 리란씨와도 한컷 찍었다.    근데 사후에 점검해보니 내가 머리를 너무 하늘로 쳐들고 있어서 건방진 작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지만 머리를 쳐든 부분을 수정하자니 나의 보잘것없는 포토샵 기술로는 엄두도 낼수 없었다.   이미 엎지른 물을 주어담을 수는 없는지라 그냥 건방진 그대로 두는수밖에 없었다.   참관자들은 집단적으로 리귀남과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를 거쳐 좁은 층계를 오르면 전시청에 이른다. 접대원아가씨가 맞아주었다. 란 신문과 (제3집)을 선물하는데 신문은 옹근 한면의 편폭으로, 은 책 전부가 리귀남의 유화신작과 미술평론가들의 평론을 싣고있었다. 의 표지. 리귀남의 자화상. 커다란 눈이 이 세상을 내다보고있는데, 눈은 분명 무슨 말인가를 하고있다. 의 한면. 온 화면에 말하는 눈이 가득 차있다. 근데, 그들은 정면으로가 아니라 거의 하나같이 삐딱한 시선으로  이 세상을 내다보고있는데  그것도 한결같이 의혹에 차있는듯 크게 뜨고 보는 눈길이라서 뭔가 가슴에 쿵 맞혀오는 것이 있다. 그게 뭘까? 칵테일이 비치되어있는 파티장 일각. 커다란 눈은 무슨 말을 하고있을까? 아마도 이손은 유화를 그린 그 손일게다. 분명. 자화상. 아래는 계열의 작품이다. 다리를 쩍 벌리고 선 기수. 계열의 대학생. 로동자. 예술가. 아래는 계열의 작품. 녀자의 벗은 몸. 녀체도 무언가 하소연하고 있다. 다음은 인물화. 장고치는 녀인들. 고독한 로인. 사과를 손에 쥐고있는 녀인. 녀 대학생. 가을 풍경화. 황혼 무렵의 말없는 덕승문 성루. 황혼의 빛깔. 예술가 리귀남은 항상 그림으로 말할 뿐이다.     2008.11.6 북경에서  
72    혈혈단신으로 중국 서부에 진출한 한국사나이 댓글:  조회:5441  추천:52  2008-12-14
혈혈단신으로 중국 서부에 진출한 한국사나이 녕하한통지능시스템유한회사 박영수 리사장 탐방 [박문희 기자] 2008-12-15  중국 서부 녕하회족자치구 은천시에 한국인으로 2004년도에 첫발을 들여놓고 하이테크기업을 창설하여 간난신고 끝에 성공을 맞아온 기업인이 있으니 다름아닌 녕하한통지능시스템유한회사의 박영수 리사장(44세)이다.                                      투자사절단 접대하며 한족친구를 사귀다  1965년도 한국 충청남도 태안 태생인 박영수씨의 중국 진출은 한국에 일보러 왔던 중국 친구들을 사귀면서 시작된다.  1994년 녕하회족자치구 투자사절단이 서울에 투자유치를 왔는데 그때 한 중형 회사에서 근무하던 박영수씨는 그들 일행 15명을 접대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어 자습에 열을 올리고있던 그는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들 중의 몇 친구를 사귀게 되였다. 사절단이 귀국한 후, 그때까지 그들 사이에 높다란 언어장벽이 가로 놓여 있는 상황에서 그들간의 련계는 박영수씨의 열정으로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박영수씨는 1989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1997년부터 (주)트래픽 아이티에스(ITS-Intelligent Transpotation System) 에서 근무했는데 한국의 현대화 교통시스템의 보급작업은 마침 이 해부터 시작되여 그에게 능력발휘의 기회를 안겨준다. 사업에서 남다른 추진력과 능력을 보여준 그는 1999년 마침내 현대화 교통시스템 도입을 시도하고있는 중국에 파견되여와 회사의 해외투자기업인 성도트래픽유한회사 리사장에 부임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지능형 교통시스템을 나라 전역에 도입하기 시작한 초기 단계였는데, 박영수씨는 성도에서 3년간 사업하는 기간 사업 특성상의 우세를 빌어 중국의 각급 정부와 관련 회사를 접촉하면서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혈혈단신 녕하 찾아 《한통회사》를 창설하다  패기 있게 업무를 펼치던 중 2003년 사스의 발생과 함께 귀국했다가 1년 후  줄곧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친구들이 있는 녕하에 혈혈단신으로 찾아와 녕하한통(翰通)지능시스템유한회사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상해, 북경 등 다국적 기업이 치열한 경쟁을 벌리는 곳에는 자신이 없었던 그는 자기만의 독자적 능력발휘가 가능한 지역으로 중국 서부의 녕하를 선택한 것이다. 교통시스템이 없는 빈 구석인 이곳에서 일을 벌리면 주변 관계를 활용해서 길을 틔울 수 있고 일단 길만 뚫어놓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친구가 몇이 있다지만 필경은 생소한 곳이라 처음부터 인맥관계 구축에 숱한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술초대는 다반사고 정부와 기업소의 관련자를 한국에 청해다 구경도 시키고 했다. 그의 한족 친구들에게는 공무원 친구가 많았다. 일단 술초대를 하면 관련자뿐 아니라 무관련자들까지 부르니 환장할 노릇이였다. 상무국 국장 부르는건 좋은 일이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교육국 국장은 왜 부른단 말인가? 저녁 한끼를 대접하는데 만원 이상 때려넣어야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계산 없이 친구를 불러들이는 친구가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 아무런 소용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친구의 친구한테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 도움을 받았을 때는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중국의 생리를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최초에 고달팠던 일은 직원관리였다. 한국에서 직원들은 하나를 시키면 두개 세개를 하려 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하나는 고사하고 70%나 80% 정도밖에 못하니 속이 타서 재가 될 일이였다. 더구나 기막히는 것은 사장 시키는 대로 하는 한국의 직원들과는 아주 딴판으로 이곳 사람들은 사장이 시키는데 따르기는 고사하고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딨어》하면서 어처구니 없게도 자기 주장을 펴러 드는 통에 결국 큰 피해를 보는 경우였다. 그러나 이런 일이 몇 번 거듭되면서 사장이 시킨 일이 원래 옳았는데 집행이 안돼서 결국 회사에 불이익이 조성됐다는 것이 증명되자 차츰 직원들이 사장의 지시에 따르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였다. 물론 프로젝트 수행과정에 시행착오도 많이 빚었다.                                        《우회전술》구사하여 첫 오다를 수주받다  중국 실정에 역행하기보다는 실정을 알고 순리로 일을 진척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박영수씨는 말한다.      북경출장시 숙소에서도 컴퓨터를 리용해 데이터파일 처리에 드바쁘다.   2005년은 중국에서 중량별 화물차 료금징수 시스템을 산동성을 기점으로 중국 전역에 정식 도입하기 시작한 첫해였다. 이 시스템에 대해서는 전문가수준인 박영수는 처음에 당지 한족 친구들의 도움은 받되 오다는 자신이 직접 따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시 현실로 보아  한국인의 직접적인 오다수주가 불가능함을 재빨리 낌새채고 우회전술을 폈다. 한족 친구들에게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친구들이 방도를 대주니 그대로 했다. 한국식대로라면 전혀 상상이 안되는 이런 일도 여러 모로 분석판단한 끝에 대담히 친구들이 대주는 방도에 따랐다. 친구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작용했지만 이런 믿음은 또한 현실에 립각한 정확한 판단에 토대한 것이였다. 그의 판단은 빗나가지 않았다. 친구들을 내세워 입찰을 한 그는 개찰 전에 벌써 《이 프로는 인젠 내꺼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결국 그해 말께 그는 1500만원짜리 첫 오다를 따는데 성공했다. 하나 수주를 받았다 해서 일을 곧바로 진행시켜 일거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금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프로젝트는 수주받았는데 갖고온 돈 200만원이 몽땅 거덜이 났다. 중대 프로젝트를 수주받았으니 한국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필시 도와올게 아니냐고 할 이들이 있을테지만 그런게 아니였다.                                             친구들 도움으로 막혔던 숨통을 틔우다  중국 진출 2년 사이, 가족과 주변 친구들이 다 그를 《미친 놈》이라고 했다. 부모들은 친척들에게 부탁해서 돈을 대주지 말라고 쐐기를 박고 아내는 남편의 친구들에게 절대 돈을 대줘선 안된다고 그루를 박았다. 이렇게 돈줄기를 차단하면 배기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것이였다. 부모, 형제, 자매, 아내, 친척, 친구, 아무튼 주변의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철저한 합동작전을 폈다. 이렇게 하기를 만 2년이였다.  그런데 지금 굵직한 프로젝트를 이미 땄으니 돈만 대면 성공이라고 이실직고하는데도 모두들 한결같이 믿지를 않고 《이놈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또 〈사기술〉을 쓰는게다. 이제 돈줄기를 딱 끊으면 돌아온다》고들 하니 한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각삼추로 피말리는 고초를 겪고있을 때 그를 도와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와 가까이 지내던 한족 친구들이였다. 친구들끼리 련통해서 200만원을 만들어 뀌어주었다. 친구의 귀중함을 통감하게 하는 대목, 꽉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이는 순간이였다. 결국은 밥먹을 돈마저 떨어져 더 버티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들어섰을 때에 와서야 줄곧 목표로 삼고 노력하던 일이 비로소 결과가 나서 드디여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길이 트이자 일마다 순풍에 돛단배였다. 그 이듬해인 2006년 두 번째로 1200만원짜리 고속도로 《원카드시스템》 프로젝트를 따냈다. 2007년에는 2000만원 짜리를, 올해는 3000만원짜리를 수주 받아 수행했다.  2007년부터 자금이 돌기 시작, 《인제 자리를 잡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때에 와서야 박영수는 가정과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다.                                        중국 내수시장 뚫어 제2차 도약을 준비하다  4년간의 실천을 거쳐 그는 자기의 최초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였다. 그가 뚫은 것은 중국의 내수시장이였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의 내수시장을 뚫었기에 장래의 발전에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는 지어 현재 기승을 부리고 있는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자기에게 찾아온 두번째 호기로 간주하고 있다.  중국이라는 이 거대 시장에 4만 억(한화 8000조원)을 풀어 내수 확대를 하는 시점에서 이 호기를 잡아 날개를 활짝 펼 수 있는 제2차 도약기를 예상하고 있는 그다. 2009년 그는 녕하에서 수주액 1억을 올릴 목표를 이미 세워놓고있다. 사천대학교 기술연구소와 자매관계를 맺고 한국기술을 중국화하는 자기의 시스템개발작업을 연구소에 의뢰하기도 했다. 남들은 중국 전역을 상대로 시장공략을 꿈꾸지만 그는 녕하 시장을 전면적으로 집중공략할 전략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해왔던 교통시스템을 위주로 전력시스템과 오수처리장 등 환경관련 프로젝트에까지 진출을 준비 중이다.    
71    음지에서 양지로의 첫 관문 통과한 한국의 중의 댓글:  조회:4894  추천:69  2008-11-13
향후 2년내 중의제도권진입을 목표로 박차   --대한중의협회 조근식회장 일행을 만나       왼족으로부터 대한중의협회 오재경 부회장(대한중의 신문 주필 겸), 이병근 사무총장, 조근식회장, 주일권 고문(북경광자병원 원장), 구자온 부회장.    “세계위생조직전통의학대회”가 11월 7일부터 9일 오전까지 북경에서 성대히 열렸다. 9일 오후 기자는 한국을 대표하여 이번 대회에 참석한 대한중의협회 조근식회장 일행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점잖은 기품의 조근식회장은 만나는 사람으로하여금 대한중의협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은근한 끈기를 느끼게 하는 분이였다. 조회장은 “세계위생조직전통의학대회”에 참석하게 된 것은 “전 세계 전통의학계에 대한중의협회의 립장을 알리기 위해서”라면서 이것이 중의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있는 한국정부의 정책을 바꿀수 있는 추진력으로 작용할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대한중의협회는 중국의 중의학대학 본과를 졸업한 우수한 인재 300여명을 정회원으로 둔 한국내 유일한 중의학단체이다. 300여명에 달하는 중의 의사들은 모두가 중국에서 정식으로 중의학을 전공한 고급인력들인데 그들중에는 중의학기초연구와 림상과정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우수한 인재들도 적지 않다.   “저희 대한중의협회는 2007년 8월 세계중의약학회련합회에 단체로 가입한 뒤를 이어 외교통상부 허가번호 제585호로써 금년 7월 4일 정식 허가를 획득했고 7월 16일 법인등록까지 마쳤다”고 말하는 조근식회장은 “이는 음지에서 양지로의 첫 관문을 통과한 셈”이라면서 어려움이 첩첩했던 지난 10여년간의 려정을 회고했다.   “1996년 9월 전중협(전중국중의학원한국본과생협의회)의 발족을 시작으로 1997년 첫 중의학졸업생이 배출되면서 한국진출을 모색했지만 결과는 암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대한중의협회 의사들은 중국에서 정식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중의의사자격고시에 합격해 자격증을 취득하였지만 한국정부에서 한의학과 중의학은 다르다는 리유로 활동을 금지하였던 연고로 심지어 의료봉사활동마저 고발당하는 실정이였지요.”   10여년이나 중의학을 공부했음에도 의술을 펼칠 무대가 없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조근식회장의 경우도 다를바 없었다. 공무원생활을 하던중 우연한 기회에 한의학을 접했던 조회장은 중국의 천진중의대 병원 원장과의 만남으로 중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나이 40이 넘어 중국으로 와서 7년여를 열심히 공부했다. 류학을 마친 그는 부푸는 꿈을 안고 귀국했지만 배운 의술을 의료봉사에 적용할 수 없는 판국이였다.    “중국에서 오래동안 공부하고 돌아온 저희들에게 중국은 제 2의 고향입니다. 우리 대한중의협회 가족은 사천지진소식을 듣고 모두 울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조근식 회장은 사천 지진사태때 제도적인 규제때문에 지진피해자들을 직접 달려가서 도울수 없었던 당시의 안타깝던 심정을 털어놨다.   한국 전역의 5000여명 중의대 졸업생들중 한국중의협회의 300여명 의사들은 중국인들도 하기 힘든 중국의사고시에 합격된 정식의사들이고 중국어 표준어 뿐 아니라 사천성 방언까지 구사 가능하다. 하지만 단지 정부의 모순된 행정관리로 인정을 받지 못해 사천성으로 의료봉사를 가고 싶어도 갈수 없었던 그들의 마음은 돌덩이로 지지누르듯 무거웠다고 한다.      그때 조근식 회장, 김웅 국제의료봉사단장, 오재경 중의 의사 등 6명은 대한중의협회를 대표해 종로구 효자동에 위치한 주한중국대사관을 방문, 지진피해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고 성금 500만원을 전달했었다.   그러나 중의학단체로서 외교통상부 정식 허가를 받고 법인등록까지 마침으로 해서 지금까지 중의학을 전공하고도 써볼데 없어 고통을 받고있던 대한중의협회 회원들은 제도권으로 들어가기 위한 힘찬 첫발을 내디뎠다. 이로부터 사단법인으로서의 대한중의협회는 학술 ,교육, 문화, 봉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당당히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것이다. 한국에 와있는 외국인과 소외된 계층을 위해 침구술무료봉사를 할 권한마저 없었던 대한중의협회가 “전중협”을 발족해서 장장 11년 만에 법인활동이 가능해져 제도권내로 들어갈수 있는 기틀이 잡힌 셈이다.     조근식 회장은 현재 대한중의협회는 명년에 회원을 300여명으로부터 1000여명으로 늘이고 의학교육 전문강의와 중의학번역, 신문출판사업을 비롯해 건강식품제조가공판매, 수출입도매, 약재관련 법제사업 등의 건강관련사업, 그외에도 정기의료봉사 활동 및 해외활동범위를 넓혀간다는 계획을 세워놓고있다.   조회장은 또 “한의학과 중의학 사이 정보교류에 단절이 존재한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보완책으로 중의학연구소 건립을 추진중이고 도 지난 10월 8일 허가를 맡아냈는데 12월 말 창간호를 내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작업추진을 통해 한의사나 중의 의사 그리고 모든 동양의학도를 위한 정보와 학술교류의 장이 될수 있도록 할것이라고 조근식 회장은 밝혔다. 지난 8월에 가진 대한중의협회 총회 기념사진   “전 세계에서 중의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세계가 개방의 추세에 있는 만큼 우리 나라도 개방을 추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의 와 중의는 적수가 아니라 동반자지요. 좋은 의료서비스는 경쟁을 통한 상생의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지 독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개방을 하면 우리 쪽에서 중국쪽으로 진출도 가능합니다. 그럴 경우 중의의사 자격을 가진 한국의 류학생들이 그들의 폭넓은 인맥으로 중국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수 있을것입니다. 향후 2년내에 제도권진입을 목표로 회원들과 함께 노력해 갈것입니다.”   한국의 중의계가 제도권에 진입해 대한중의협회의 회원들은 물론 수천 능력자들이 모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 [길림신문]정공철특약기자/박문희기자  
70    “토지유전개혁”과 조선족농민(박문희) 댓글:  조회:5490  추천:125  2008-10-12
“토지유전개혁”과 조선족농민     졸문 중 “토지유전개혁”언급부분에 대한 몇가지 질문과 관련하여 박문희       “토지유전(流轉)”정책에 대한 이해문제와 관련하여 좋은 질문들을 하셨습니다. 농민형제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문제죠.   아래 천천히 말씀드리면, 이번 중공중앙 제17기 3차전원회의에서 채택될 토지유전관련정책의 근본 목적은 “토지경영을 적절히 규모화”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농민들에게는 토지 사용권만 있었지 유전권이 없었기 때문에 도시주변이나 개발구역에서 농촌토지를 징용할 때 개발상들이 아주 헐값으로 사서 폭리를 얻는 일이 많았습니다. 농민들이 엄청 당한거죠. 한족농민이나 조선족농민이나 똑같이 개발상들에게 당했습니다.   도농간 양극분화가 갈수록 심해져 작년에 수입차이는 개혁개방이래 가장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이제 농촌개혁을 더 늦추면 도농관계에 수습하지 못할 엄중한 후과가 생기게 될것입니다.   도농관계를 갈수록 벌어지게 하는 이런 기성의 제도를 개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이런 극히 불합리한 제도를 고치는게 왜 우리 민족에 불리한지 어느분께서 간단히 설명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이번에 이 문제해결이 가능한데, 물론 기득권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것으로 봅니다만, 그러나 그들이 득세할 가능성은 극히 적죠. 농민들의 이익을 계속 침해하다간 농민들이 가만있지 않을테니까요. 마른 나무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될테니까요.   그러나 30년의 발전과 최근 10년간의 기타 준비를 거쳐 현재 새로운 토지개혁의 조건이 이미 성숙됐습니다. 농촌개혁의 절호의 기회이죠.   토지에 대한 권리는 농민들의 기본권리의 하나입니다. 팔권리, 살권리 다 줘야죠.   나는 조선족농민들이 땅을 가급적 타민족에 팔아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습니다. 물론 조선족농민들 자체가 결정할 일이지만 말입니다.   조선족 촌관리위원회에서 토지유전문제와 관련된 인도작업을 잘해서 조선족농민들의 근본적 이익을 잘 보호해야 할것입니다.   조선족 농민들이 합작사를 뭇고 땅으로 주식을 사는게 좋은 방법의 하나죠. 토지문제를 가지고 조선족농민들은 물론 조선족사회에서 여론을 많이 해서 인도를 잘 하기를 기대해봅니다. 강압적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런 식은 안 통하니까요.   어느분께서 말씀하신 조선족농민이 “돈도 안받고 그냥 국가에 바치는 땅세만 대신 물어주면 된다는 조건으로 밭을 내놓았다”는 예는 땅을 합리가격으로 유전시킬수없는 상황에서 생긴것입니다.   말하자면, 땅을 부쳤대야 얻는게 별로 없고, 또 사실상 부칠 사람도 없고, 그거 묵이기보다는 누구한테나 대신 부치게 해서 그 댓가로 약간의 알곡이나 돈을 받으면 족하다고 여긴 결과입니다. 현행 정책하에선 그 이상의 좋은 방법도 있기가 곤란하지요.   농민들에게 극히 불합리한 이런 정책을 이번에 철저히 고친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토지개혁이라고도 하는것 같습니다. 토지유전정책은 한족농민들이 강열히 요구할뿐만 아니라 조선족농민들도 강열히 요구합니다. 농민들의 강열한 요구사항이 이번에 실현가능한데, 이게 그래 고무적인 일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합리가격으로 일부 땅의 사용권을 다른 민족에 팔아넘긴대도 하늘이 무너질 일은 없다고 봅니다. 농민 자율에 맡길 일이죠. 기실 그런다 해도 연변에 우리 민족이 설 땅이 없는게 아니죠.   이와 관련해서 잠시 북경 얘기를 삽입하면,   현재 북경에서 한국인과 조선족이 집결돼있는 곳은 왕징(망경)지역인데 이곳은 아세아에서 가장 큰 사회구역으로, 전체 50만 인구중 한국인 10만, 조선족 7만 해서 오늘 현재 우리 민족 인구가 모두 17만입니다. 2010년까지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전망이 나왔는데, 그렇게 되면 아세아 최대의 이 사회구역에서 우리 민족은 완전 주인이 되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도 이 지역 한족들이 놀라서 눈이 뒤집히는걸 못봤습니다. 내가 지금 왕징구역에 와 있은지 한참 되는데, 이곳 한족들은 오히려 환영하는 표정입니다. 청도, 위해, 심천, 상해, 주해, 의오(이우) 등 다른 지역도 다를바 없죠. 한족들의 넓은 궁냥에 호감이 가게 되는걸요.   본 화제로 다시 돌아오면--   물론 연변에서 좋은 지역, 좋은 땅까지 팔아넘기는것은 큰 실수일것입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이름이 지워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죠. 그러나 이미 말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것으로 봅니다.   도시 근처의 땅값이 이미 엄청 올랐거나 앞으로도 그냥 오르겠는데, 조선족농민들이 바보라고 그런 寶地를 쉽사리 내놓겠습니까?   “이제 이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을 텐데, 경영할 사람이 없더라도 팔지말고 합작사를 뭇고 능력자에게 맡겨 경영하게 합시다. 우리가 모두 주주로 되어 영원히 이 땅의 혜택을 받읍시다.”   이러한 발상들이 틀림없이 나올것입니다.   남방 일부 성 농민들은 수년전부터 대담하게 널리 토지유전을 시험했고, 장춘시 구태현 신립촌 등 북방의 일부 조선족농민들도 토지집중을 시험하면서 정부의 지지도 받았지만 널리 보급이 안되어 현재 규모화 농토경영을 하는 농민이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토지유전이 정책적으로 허용이 되고 정책적 자금지원이 이뤄진다면 조선족농민들이 합작사를 꾸리고 땅을 주식으로 들여놓고 내부에서 능력자를 선발하거나 지어 외부에서 능력자를 초빙하여 그 땅을 경영하게 함으로써 대부분 농민이 농사를 짓지 않고서도 이윤분배를 받을수 있고, 토지주인은 토지를 떠나 시내나 외국에 나가 이중 돈벌이도 할수 있습니다. 꿩먹고 알먹기죠.   왜 이런 좋은 일도 마다하고 그 좋은 땅을 팔아버리겠습니까? 만일의 경우 팔아버린다 해도 수익성을 우선 잘 따져봐야겠지요. 밑지는 장사야 하지 말아야겠지요.   "농촌토지유전"정책이 효력을 내게 되면 도시주변농촌의 토지는 그 즉시로 농민들의 값진 “보물단지”로 될것이며,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세주고 나간 조선족농민들은 그 땅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고도로 신경을 쓰게 될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제가 “농촌토지유전(流轉)개혁을 비롯한 이번 개혁안이 채택된 후 고향을 떠나 외국과 외지에 나가있는 연변농민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고 한 주요 이윱니다.   “농촌토지유전개혁이라고 하면 연변은 조선족의 손에서 급속도로 한족의 손에 넘어가게 될것은 빤한 사실”이라는 생각은 일단 추측에 불과한데, 연변조선족농민들의 계산속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에 연변조선족 농민들만큼 이속에 밝고 용감한 농민도 흔치 않다고 봅니다. 어떤 목표가 일단 설정되면 큰 모험도 과감히 할줄 아는 군체입니다. 다른 민족이 계산하는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계산에 밝습니다. 밑지는 노릇은 안할거라고 확신해도 문제없을겁니다. 바깥 세상에 나가 눈뜨고 돌아온 분들이 많으니까요. 이 면에서 다른 민족 농민들이 비교가 안될꺼라고 봅니다.   다른 민족 농민들을 숙보아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것은 바깥세상을 겪은 경력이 타민족에 비해 조선족이 조금 더 많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어느분께서 “연변경제가 이미 파탄되어버렸다”는 이유로 “원래 변변치 않던 중공업이 다 없어져버렸다”는 예를 드셨는데. 예중 석현종이공장, 개산툰팔프공장 등은 왜정때 세운 것으로 특정시기 계획경제의 역사사명을 완성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거나 사라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것입니다.   연변의 팔대림업국을 원래의 모양대로 계속 “살려나간다”면 연변의 수림은 전부 요절되고 생태가 철저히 파괴될것입니다.   국제 유명인사들이 장차 연변에서 동북아 전역을 대상한 가공업, 물류업과 관광업 등이 유망산업으로 될것으로 보는걸로 알고있는데 동감되는 부분입니다.   이른바 “창 까오땨오(唱高調, 근거없이 흰소리치는 짓)”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창 까오땨오”는 저 역시 반대합니다. 되지도 않을 일을 된다고 흰소리를 쳐서 농민들을 얼려넘긴다면 종당에는 농민들에게 더욱 큰 실망만 안겨주게 될것이니까요.   그러나 근거가 있고 노력만 하면 실현가능한 일을 제시하는것과 “창 까오땨오”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문제로 되는것은 근거도 있고 3년이나 5년, 혹은 좀 더 먼 불원한 장래 실현 가능한 일을 당금 1~2년내에 실현 안된다 해서 입가진 모든 사람들이 “되지도 않을 일을 아예 시작도 마오” 하고 김빠진 소리만 하고 “비관론”과 “전도무망론”만 퍼뜨린다면 농민들의 힘이 어디서 생기겠습니까? 기운이 나다가도 김이 빠져버릴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연변조선족이 동북아개발의 붐을 빌어 재궐기할것임을 믿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밝혔음으로 여기서는 약하겠습니다.   존재하는 문제는 충분히 주의를 불러일으길 바이고 해결책도 적극 마련해야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적극적인 일면을 보지 못할 수도 있지요.   병원에 가면 눈에 보이는게 거개 다 환자들뿐이지만 그렇다 해서 이 세상에 환자들만 사는게 아니잖습니까. 거리에 나서면 건강한 사람들도 꽤 많지 않습니까.   조선족의 미래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탐구하고 싶습니다. 낙관론이나 비관론이나 출발점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의문이 많이 제기되어야 탐구도 깊어질수 있다고 믿습니다. 10월 12일, 북경에서
69    동북아의 개발과 연변조선족의 미래 댓글:  조회:5590  추천:137  2008-10-09
제1회 조선족발전포럼-"연변의 의미와 가치 좌담회" 발표문 동북아의 개발과 연변조선족의 미래 박문희   1.연변조선족, 변혁과 진통 “연변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고있다. 중국조선족에 있어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무엇일가? 이 문제를 오늘날 새삼스레 묻게 됨은 개혁개방전 상대적으로 휘황찬란하고 자랑스러웠던 연변의 과거를 뇌리에 떠올림으로 해서 오는 모종의 상실감에 따른,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하는 막연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연변과 연변사람들의 자신심에 문제가 생긴 결과라는것이다. 현재 동북삼성에서 국외와 국내 여러 도시에 진출한 조선족의 규모는 약 9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그중 연변조선족의 국내외진출인구는 적어도 30만명 이상일것으로 본다. 그중에서도 농촌인구가 반수를 훨씬 넘긴다. 85만 연변인구의 1/3을 웃도는 수치이다. 그중 연변을 떠난 인재들도 많다. 연변인재의 이동은 대체로 각 현, 시에서 연변의 수부 연길로의 이동, 혹은 연변 각지에서 대도시와 국외에로의 이동이다. 그들은 청도, 북경, 상해, 심천, 광주, 주해 등 수십개 발달도시에 대거 진출해 있을뿐만 아니라 한국, 미국, 일본, 영국, 카나다 등 많은 나라에 진출해있다. 연변 농촌의 변화와 진통은 중국 농촌 전역에서 발생하는 변화와 대동소이하면서도 더 급격하고 아울러 보다 큰 진통을 동반하여왔다. 원인이라면 중국의 타 지역 농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출국붐이 거세차게 일었기 때문이다. 변화에 뒤따르는 새로운 문제점들은 확실히 많고 심각하다. 연변인구의 외국진출과 도시진출은 농촌학교의 소실과 농가마을의 황페화로 이어졌으며 인재 결핍, 리혼률 증가, 자녀교양 부재 등 문제를 량산했다. 인구 대이동으로 조성된 새로운 문제의 량산은 연변사람들의 각종 우려를 낳고 있다. 그중의 하나는 인구의 급감으로 인한 장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존속여부에 대한 걱정과 그에 따르는 불안감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관련하여 발생한 허다한 사회문제에 대한 우려이며 그 외 하나는 과거 휘황찬란했던 연변이 중국의 조선족사회(심지어 고향 연변을 떠나가는 사람들도 망라)로부터 소외를 당하는것이나 아닌지 하는 피해의식이다. 이 몇가지 문제는 우리 연변 사람들에게 있어서 체질적으로 아주 절실한 사안이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문제로 자리잡아가고있다. 때문에 외부에서 연변이나 연변 사람들을 비평하면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며 쉽사리 포용적인 자세를 보이지 못한다. 인구의 류실(당연히 인재류실 포함)에 대해서도 외지 진출의 추세를 가로막을수 없음은 인정하면서도 나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연변인들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순적인 심리정서를 가지고있다. 이것은 실상 상대적으로 휘황했던 과거와 역시 상대적으로 걱정스러운 오늘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지성인들의 현실적 심리상태를 말해주는것이다. 문제는 급격한 변혁의 행정에 필시 동반하게 되는 이른 바의 “진통”을 어떤 시각으로 진단하고 민족의 진로를 어떻게 짚어내는가 하는데 있다. “진통”에 대한 진단은 고립적으로가 아니라 반드시 “진통”의 발생원인 즉 획기적 변화와 련계시켜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그것은 “진통”자체가 발전의 부산물이고 관계로 말하면 주류와 지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발전”의 부산물인 “진통”을 무슨 방법으로 치유할것인가? 발전에 제동을 거는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발전을 가속화하는 개혁의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가? 이를 분명히 하는것이 당면 우리의 급선무이다. 문제의 “진통”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발전현황에 대한 옳바른 판단도 이끌어내기 힘들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망에 대해 드높은 자신심을 확보할수도 없게 될것이다. 연변조선족이 자치주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한다면 그날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아무런 실질적의미도 가지지 못하게 될것이다. 산재지구 사람들뿐 아니라 연변사람 자체도 한국이나 대처에 나간 뒤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 사례가 많으며 한국에서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와도 연변이 아닌 대도시에 거처를 잡고 사업을 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져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원인으로 작용했을수 있다. 한국에로의 진출로 연변사람들이 연변의 바깥세상에서 보다 크고 발달한 우리 민족의 발전상을 본것이 그중 하나다. 그 외 국내 발달지역으로 대거 진출, 새로운 조선족 집거지를 형성하면서 연변에 대한 애정과 동경심이 적지 않게 분산돼버린 것일수도 있다. 중국조선족은 변강지대의 고로한 농경민족에서 발달한 대도시의 현대민족으로 거듭나는 세기적 변화를 겪고있으며 그 앞장에 한국, 세계와 국내 대도시에로 진출한 중청년들이 서있다. 그들의 후대들 상당수는 대도시의 새로운 조선족집거구에서 태여나 진정한 도시현대인으로 자리를 굳할것이다. 따지고보면 기실 그들은 모두가 우리 민족의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일등 공신들이라고도 볼수 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태를 묻은 고향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것은 결코 고향이 미워서거나 고향을 잊어서가 아니라 필경 개개인의 삶으로 말할 때에는 성공과 발전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연변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해마다 고향에 부쳐오는 외화가 해마다 10억 딸라를 넘기고 있는 사실이 단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고향 연변과 끈끈한 련계를 유지하고있으며 이런 련계는 앞으로도 끊어지지 않을것이다. 동북삼성의 조선족이 중국에 진출하는 세계 조선민족과 더불어 북경, 청도, 상해 등 대도시들에 조선족의 새로운 삶터를 확고히 마련했다 해도 그들은 중국조선족의 수부 연변과 떨어질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게 될것이다. 온가보총리는 중국의 화교를 중국 개혁개방의 개척자, 공신이자 참여자라고 평가했다. 개혁개방 30년간 그들이 국내에 일떠세운 기업수는 해외투자기업 총수의 70%를 점하며 투자액은 60% 가량 차지한다. 국내 타지역과 국외에 진출한 연변조선족도 장차 연변의 건설을 각종 방식으로 지원하는 중요한 인적재부로 될것이다. 때문에 인재를 포함한 연변사람들이 나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불안해 할 리유가 없는것이다.   2.동북아의 개발전망, 자신감구축의 중요한 근거 앞으로 얼마 못가 연변이 조선족자치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것인가?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앞으로 상당히 긴 력사단계에 소실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불원한 장래에 과거 반세기 동안 주요 의미로 불려졌던 “조국변강”이란 협소개념에서 탈피하여 “동북아의 아침” 혹은 “동북아의 중심”이란 현실화된 “신개념지역”으로 거듭날것으로 본다. 나라의 민족정책과 동북개발정책으로 봐도 그렇고 지정학적 함수관계로 봐도 그렇고 동북아 각국의 최근 10여년간의 목표 뚜렷한 움직으로 봐도 그렇다. 우선 한국붐에 대해 진일보의 분석을 해보면 현재 한국붐은 거의 마지막 단계에 와있으며 이제 과거 20년간 지속돼온 엄청난 규모의 한국붐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것이라는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원인은 다음과 같은데 있다. 즉 한국은 현재 여전히 비교적 발달한 국가이긴 하지만 중국의 지속적인 고속발전으로 량국 국민생활수준의 거리는 급속히 줄어들고있다. 조선족의 한국진출이 앞으로도 장기간 이어질것이지만 한편 현실을 감안할 때 한국인의 중국진출은 오히려 더욱 활발한 편이며 국외에 나간 조선족인수가 약 45만명인데 반해 중국에 들어온 한국인이 75만명을 넘긴 것만으로 봐도 중국에서 우리 민족인구의 절대치는 줄어든것이 아니라 반대로 늘어났음을 알수 있다.혹자는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인들은 모두 연해지구의 발달지역을 선망하지 연변을 선망하지 않으며 현실로 봐도 연변으로 밀려들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거니와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이 조금은 경솔해보인다. 중국 조선족은 국내 대다수 소수민족과 다른 특수성을 가지고있다. 중국과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있는 조선반도가 있기때문이다. 중앙정부 정책의 안정성으로 봐도 연변의 조선족인구가 자치주존속의 상대적 허용비례 이하로 줄어들었다 해도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경솔히 지워버리는 일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목전 연변 조선족인구의 격감은 장원한 안목으로 볼때 잠시적 현상에 불과하다는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반도가 존재하는 한 연변조선족의 소실가능성과 타민족에의 완전동화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반도와 그 주변의 변화를 념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두만강구역국제합작개발항목은 주변 국가와 국제사회의 공동참여하에 10수년의 건설을 거쳐 초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세기 말 어느 학자인가 “동북아는 21세기의 기관차로서 서구와 북미주와 함께 ‘3자정립(三足鼎立)’의 구도를 형성하게 될것이며 세계경제의 발전을 좌우지하게 될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최근 미국 랜더회사의 한 연구보고는 “미래 10년 내지 20년 내 동북아구역은 세계 최대 경제실체로 발돋움할 확률히 극히 높다”고 내다 봤다. 우리는 흔히 중국이 한국, 조선, 일본, 로씨야, 몽골과 함께 두만강지역 국제자유무역구 건설에 꾸준히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있다. 이는 분명 우리 나라 및 동북아 각국 그리고 유엔 주도의 다국적 개발프로젝트에 따른 진행중의 사실이고 앞으로의 전면적 개발을 위해 중국, 로씨야와 조선이 협력하여 도로, 항만 등 기반시설건설에서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있는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은 우리가 당면 봉착한 일부 문제를 과대포장하여 류포한 결과일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동북아개발의 큰 흐름을 반드시 주의 깊게 관찰하여야 할것이다. 중로 량국은 훈춘과 로씨야 하산의 도로와 항만을 일체화시키고 관세를 없앤 봉쇄형 관리구역 조성이 한창 진행중이며 주변 각국도 두만강지역 국제자유무역구 건설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올 들어서는 우리 성 관할구역내에서의 한국공업단지와 일본공업단지 건설도 허용됐다. 길림성은 우선 자동차와 환경분야에 종사하고있는 일본 대기업과 한국 중소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유치하게 된다. 중국과 조선도 변경구역의 도로와 항구를 일체화시키고 수출가공 및 보세물류단지 건설을 본격화하고있다. 조선은 1984년에 “합영법”을 제정한 이래 줄곧 조선국정에 맞는 새로운 경제개발전략을 탐구해왔으며 선후로 일련의 상관조치를 내왔다. 조선은 시장경제요소를 부분적으로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이미 인식했다. 평양보통강수입물자교류시장의 지배인 김응연선생은 “지금 우리 나라 대외경제의 기본대상은 자본주의국가이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범위내에서 시장의 기능을 정확하게, 유기적으로 결합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였다”고 말했다. 조선에서 현재 주변정세가 복잡하고 자칫 소홀히 했다간 국가정권이 위태로워질수 있는 상황에서 급진적개혁은 물론 하기가 어렵겠지만 점진적인 개방은 조심스레 추진할것이며 일단 조미관계가 정상화를 실현하여 국가안전이 확보되기만 하면 필시 개방성경제개발의 속도를 다그치게 될것이다. 조선은 동북아개발의 처녀지로서 주변국들에 대해 말할 때 상당히 큰 경제합작의 예비를 갖고있는 지역이다. 실지로 현재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조선의 개발에 큰 기대를 걸고있는 상황이다. 조선의 부분적 변화(부분적 시장경제의 도입과 기반시설 건설 포함)는 이미 시작되였고 중등 규모의 변화도 조만간에 일어나게 될것이다. 따라서 중등 규모 이상의 변혁이 생기면 조선반도 전역에 류례없는 변혁의 선풍이 일게 될것이며 이런 변화와 거의 동시에 로씨야 극동지구의 전면적개발도 시작될것이다. 이를 발단으로 동북아의 “노란자위”이자 "황금의 삼각지대"인 연변과 조선의 라선, 극동의 하산지역은 중국의 동북, 로씨야의 극동지역과 조선, 나아가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는 변혁의 중심이 될것임이 틀림없다. 동북아개발붐의 도래를 앞에 두고 연변의 움직임도 상당히 절주 있고 유력하다. 연길을 “핵”으로 한 “연룡도”중심도시건설전략과 실행프로젝트의 제정이 그중의 하나다. 연변 내외 각계 인사들의 깊은 관심속에 며칠전 “연룡도도시공간발전계획요강”이 편성되여 이제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대회의에서 심의, 채택하면 곧바로 실시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연길중심도시 육성으로 연변경제를 궐기시킴으로써 두만강지역개발의 국제경쟁에서 감제고지(瞰制高地)를 차지하고 주도권을 장악하여 동북아경제일체화행정을 다그치기 위한 작업이 보다 구체적으로 실시되고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노란자위”를 핵으로 확산적인 전면개발이 본격 가동되면 국내외 투자자들이 돈주머니를 메고 대거 연변에 몰려들것이며 또한 연변을 떠나 대처나 외국에 가서 돈을 번 사람들도 분분히 고향에 돌아와 가공업과 물류업에 투자하게 될것임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중국 조선족, 한국인, 조선인과 세계 각지의 동포를 망라한 연변의 우리 민족 인구는 폭발적인 장성기를 맞게 될것이며 연변의 가치는 크게 증폭되여 동북아경제발전에서 발동기와 같은 존재로 될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충분한 신심을 가져야 하며 비관론은 근거가 없는것이다.   3.관념전환, 10년 준비의 기본고리 그러나 연변사람들은 10년 좌우 혹은 더 먼 장래에 있게 될 이런 변화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아서는 안된다. 하다면 무슨 준비가 필요할가? 준비해야 할 일이야 수 없이 많겠지만 몇가지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되지 않을가 싶다. 1. 여러 가지 포럼이나 세미나를 통해 연변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를 보다 높이 서서 깊이 있게 토론함으로써 학술상, 리론상으로 연변의 의미와 가치문제를 명확히 하고 이로써 연변인의 자신심을 확고히 세워야 할것이다. 밝은 전망을 리론적으로 철저히 구명해야 비로소 장래에 대한 자신감을 확보할수 있다. 때문에 학술 문화 분야에서 관념전환을 주 목적으로 한 이 작업을 선행시키는것은 연변의 사상해방과 련계되는 것으로서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이는 결코 학술리론분야에서만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교육, 신문, 출판 부문과 기타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다 함께 참여해야 할 일이다. 2. 로씨야진출을 지금부터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이를 감안하여 로씨야의 극동지구에 대한 정보수집, 개발연구 작업을 잘해야 하며 투자환경과 발전전망에 대한 소개작업도 적극 벌려야 한다. 과거 우리가 로씨야에 대거 진출했던 시기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된 로씨야 전역과 적어도 극동지역의 현황에 대해 아는것이 많지 못하다. 장래의 경제교류와 협력에 대비하여 정부는 물론이지만 대대적인 여론 작업을 통해 민간차원의 교류도 크게 확대해야 할것이다. 3. 중국 조선족은 한어와 한국어를 천성적으로 구사할수 있기에 한국,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 발전에 기여함에 있어서 누구도 대체할수 없는 독자적인 우세를 갖고있다는 견해가 상당히 보편화되여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반드시 시각전환을 가져와야 한다. 현재 중국에 진출하여 거주하고있는 한국인은 약 75만이며 앞으로 10년 내 그 수는 200만 이상으로 늘어나게 될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있다. 중국 대도시들에 진출, 정착한 한국인들이 중국어를 열심히 배우고있을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도 중국의 학교에서 정규적인 중국교육을 받고있다. 앞으로의 조선족은 언어면에서 독자적인 우세를 갖고있는 군체가 아니다. 급변하는 동북아의 정세와 결부하여 이 면에서 시각전환을 가져와야 하며 대응책을 미리 강구해야 할것이다. 4. 대응책의 일환으로 우리는 학교에서 영어, 일어만 가르칠게 아니라 로어과목도 설치하여 5~10년 내에 로어인재를 대량 키워내야 한다.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로어과를 설치해야 할뿐만 아니라 대학교에도 설치해야 하며 사회력량도 동원해서 로어학교를 꾸려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로어교원을 양성해야 한다. 한어, 한국어에 능통한 기초우에서 일어나 로어까지 구사하는 능력을 갖추면 동북아개발사업의 중심에서 남다른 특수역할을 발휘할수 있게 될것이다. 5. 장원한 관점에 립각하여 목적성 있게 조선과의 각종 교류를 추진, 활성화하고 지정학적 견지에서 조선의 발전전망에 대한 구체적연구를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조선에 대한 중소형투자(연변과 국내 조선족의 능력에 걸맞는) 전략을 연구하고 조선의 인문지리, 자연부원, 개발여건 등에 대한 연구와 소개작업을 진일보 진행해야 할것이다. 6. 현재 홀시되고있는 몽골공화국에 대한 연구교류와 료해증진 작업도 시작해야 하며 정부 및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와 합작도 시도하고 활성화하여 장차 이 지역개발(주로 투자개발)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준비도 해야 한다. 7. 연변의 기업인들도 동북아개발이란 큰 구도에서 기업의 앞날을 설계해야 할것이다. 그 외 앞에서 언급했지만 연변조선족이 외국에서 벌어오는 외화는 해마다 10여억 딸라에 달하는데, 이런 방대한 자금의 축적과 리용도 이한 거창한 개발사업에 투여되여야 최대의 가치를 창출할수 있을것이므로 이런 자금의 투자방향에 대해서도 참다운 연구와 지도를 따라세워야 할것이다. 조선족이 벌어온 외화중 상당부분은 농민들이 벌어온것인데 현재 분산된 형태로 있는 이런 자금은 합당한 투자항목을 찾지 못하여 잠자고있거나 지어 소비에 탕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변농촌에서 농민합작기금을 세우는 방안도 연구돼야 할것이다. 8. 동북아 6개국의 현실적 준비상황과 기타 모든 여건으로 보아 앞으로 동북아개발에서 중국이 주도적역할을 담당하게 되리라는것은 거의 의심할 나위없다. 한편 여러 나라 여러 민족이 공동 참여하는 동북아 전역의 거창한 개발사업행정에 각종 민족정서가 필시 불거져나오게 될것이며 지어는 국가간, 민족간에 엄중히 대립하는 현상도 피면하기 어려울것이다. 례컨대 일본기술의 “무차별침략”에 대한 민족적 불안감, 중국 이민의 “극동점거”에 대한 로씨야 민족의 거부감, 조선에 끼치는 중국경제의 강대한 영향에 대한 반발심리, “중국경제에 의한 동북아통일의 가능성”으로 인한 한국 국민의 대립정서 등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의 발생가능성에 대해서도 예견해야 하며 대응준비가 있어야 할것이다. 9. 여러 나라지간의 일부 민족적 대립정서는 심지어 우리 중국의 여러 민족 사이에도 파급되여 예기치 못한 후과를 유발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사태들이 발생한다면 개발의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는 연변의 조선족들이 그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다. 발생해서는 안될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열리는 관련 포럼이나 동북아 6개국이 참여하는 국제적 세미나에 이런 문제를 미리 제시하여 공동히 예방책을 토의, 마련할 필요가 있다. 10. 현재 주의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될 문제는 조선족문화계의 “자페상태”이다. 례컨대 중국 조선족문화계가 민족내부의 교류협력(한, 미, 일 등 국의 동포문화계 망라)은 비교적 빈번한데 반해 국내 주류문화계와는 거의 담을 쌓고 지내는 현상이 오랜 시일 지속돼왔는데, 이를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페상태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국내 주류문화계와의 활발한 교류협력관계를 수립하며 와중에 주류문화를 배우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켜 우리 민족의 문화수준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문화보급률을 극대화하는것은 장차 동북아 각국 문화가 충돌할 경우 중국조선족이 건설적인 역할을 발휘하는데 대해 보다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될것이다. *    *    * 요컨대 변하지 않는 세상은 없으며 변혁기의 세상은 반드시 진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일정한 력사단계에 있어서 진통은 모종의 희생이며 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러나 변화에 뒤따르는 진통은 치유가 가능하지만(수많은 개체로 말할 때 치유가 가능하지 않을수도 있다) 만약 진통이 두려워 변화를 안한다면 문제가 심각성을 넘어 치유불능의 중독증에 걸리게 될것임이 자명하다. 온 세계가 다 변하는 판국에 우리만 변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는 길 밖에 없을것이기 때문이다. 하다면 “진통”을 무슨 방법으로 치유할것인가? 발전에 제동을 거는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발전을 가속화하는 개혁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른바 사상해방이나 관념혁신도 늘 빈말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요즘들어 특히 고무적인 사안은 래일(9일)부터 나흘동안 북경에서 열리는 중앙 17기 3차 전원회의에서 채택하게 될 중대한 농촌개혁안이다. 농민들의 근본적리익 보장에 립각점을 둔 농촌토지류전(流轉)개혁을 비롯한 이번 개혁안이 채택된 후 고향을 떠나 외국과 외지에 나가있는 연변농민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과거에도 중국 조선족의 수부이자 마음의 고향이였을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 점은 변함이 없을것이다. 일부 외지에 진출한 연변인과 산재지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의 연변에 대한 애정의 분산은 잠시적인것이며 연변과 연변인에 대한 일부 불만의 목소리도 기실 미운 감정의 발산이 아니라 애정표현의 색다른 방식에 다름 아니다. 연변조선족의 생존발전에 어떤 도전적인 상황이 빚어지는 경우나 혹은 외계에서 들려오는 일부 비판적 목소리에 직면하여 우리는 부적절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허심하게 수용하는 자세와 자기를 변화시키는 용기, 지혜를 갖추는 노력이 우선 필요할것이다. 우리 연변조선족에게 있어서 자치주의 미래 나아가 전반 중국 조선족의 미래에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감이 결여된 민족에게는 희망과 활력, 그리고 개혁적이며 발전적인 사고방식이 있을수 없다. 동북아 경제 일체화란 대세의 흐름앞에서 연변 조선족들이 주동적인 자세로 거창한 변혁의 중심에서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력사를 창조할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2008년 10월 8일  
68    조선어의 능률적학습과 漢字교육 댓글:  조회:6059  추천:115  2008-09-30
조선어의 능률적학습과 漢字교육   □ 박 문 희   1, 문제의 제기   중국 경내조선족의 조선어서사생활에서 한자를 페지한지 50 년도 넘는 오늘 한자혼용문제가 의연히 거듭 거론되는 까닭은 조선어에서의 한자페지가 조선어의 학습과 활용에 시종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어를 능률적으로 배움에 있어서 조선어한자교육이 필요한가 아니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것이 한자혼용문제의 본질이자 요해처이다. 조선어를 효률적으로 배우기 위해서는 조선어한자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것, 아울러 한자교육을 거세해 버린 조선글전용정책은 조선어언어발전법칙을 어긴 것으로 우리 말의 발전제고에 걸림돌로 작용하므로 반드시 페지해야 한다는게 본고의 주장이다.   우리는 평소에 우리 말 조선어를 배움에 있어서 근본으로 되는 법칙이 있다는 점에 대해 주의를 돌리지 않고있다. 표음문자이면서도 대부분 어휘가 한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조선어는 영어와 같은 표음문자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자체의 특수한 발전법칙을 태성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 법칙이란 무엇인가?   우리말 한자어 (례를 들어 “표음문자”)가 우리 조선어 표기법으로 표기되였을 때 “표, 음, 문, 자” 이 네 글자가 겉보기엔 아무런 뜻도 없는것 같지만 기실은 각기 자기의 뜻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여기의 “표”자의 뜻은 바로 “表” 이며 그 외의 다른 뜻(이를테면 彪나 瓢 등)이 아니다. “음(音)”, “문(文)”, “자(字)”도 마찬가지로 다 자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 그것이 조선어표기에 가리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조선어 글자는 한자어휘를 형성하지 않았을 때는 개개의 글자가 무의미 철자에 불과하지만 일단 한자단어로 구성됐을 때는 그 한자들의 원뜻이 표층에 로출됐든 로출되지 않았든 개개의 글자가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얘기다. 그 의미는 외부에서 부여한 것도 아니고 그 자체가 가지고 있다.   문제는 조선어한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그런 의미가 머리속에 떠오를수 없다는데 있다. 그것을 눈에 보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자를 가르치고 필요한 경우에 그것을 로출시키는것이다. 우리 말 한자를 가르치면 그것이 머리속에 떠오르고 한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그것이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 이것이 바로 영어와 같은 다른 알파베트문자와 구별되는 우리 글 공부의 본연의 법칙이다. (기실 영어도 몇개 안되는 자모로 복잡한 언어를 표기하는데서 오는 리해의 혼란을 피면하기 위한 자기 특유의 해결방법이 있다.) 우리글 공부는 이 본연의 법칙을 떠날수 없는것이다.   이 법칙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조선어공부에 필연코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을수 없다. 이런 대가치르기는 력사발전의 굴곡성에 의해 때론 굴곡적으로 표현될수도 있다.   이를테면 50년대 초기 중국조선족 언어문자정책이 “조선어전용”방침을 채택하여 실시한 례가 그것이다. 당시 우리 조선족가운데는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문맹이 많았다. 전 인민적 문맹퇴치 운동가운데서 우리 조선족은 우리 말 병음문자의 우세에 힘입어 문맹을 재빨리 퇴치하고 문화를 전면에 보급할수 있었다. 우리 민족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농민들에게 문화를 보급한다는 의미에서 조선어전용정책의 제정은 대다수 조선족군중의 념원을 반영했다고 볼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조선어 자체의 학습법칙이 무효로 된것은 결코 아니였다. 단지 특수한 력사시기에 군중들의 문맹퇴치열망, 민족자주의식의 고조로 그 법칙이 잠시 은페되였을 뿐이였다.   결국 전 사회적 문화가 낮은 수준에서 탈피하면서 “조선어전용”정책은 그 한계를 드러냈고 따라서 “조한혼용”주장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론쟁은 불가피한것이였다.   필연적 결과로 1953년도 “조선글전용”정책이 실시되여서부터 장장 50여년간 이 문제를 두고 론쟁은 그치지 않았다. 그중 일부 토론은 학계나 여론 기구에서 주도했고 일부는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토론때마다 “두가지 의견”이 팽팽히 대립되였지만 시종 일치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데 기인된다고 볼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토론의 근본과 목표가 시종 분명치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 토론 각방이 각기 자기의 론점 론거를 제시했으나 누구도 대방을 설득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짚고지나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십수차례에 걸친 전용이냐 혼용이냐 하는 토론이 겉으로 보기엔 두가지 의견이 대립하는듯한 양상을 보였지만 기실 따져보면 적어도 네가지 의견이 교차혼선을 빚은 상태였다는것이다.   례컨대 “조한혼용”회복주장은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일치한것이 아니고 대체로 두가지 견해였다. 즉 “한자어의 정확한 리해를 위해서는 한자어를 가르치고 적당히 신문간행물에 혼용해야 한다”(잠시 “리해론”으로 략칭함)는 견해와 “중국 조선족의 실정에서 조한혼용을 하면 한어학습에 리롭다”(잠시 “방편론”으로 략칭함)는 견해 이런 두가지였다.   “조선어전용”주장 역시 견해가 두가지로 갈린다. 한가지는 “한자어를 가르치지 않고 순 조선어만 가르쳐도 조선어리해에 아무런 불편도 없다”, “혹은 우리 민족언어를 발전시키는 장원한 관점으로 볼 때 이렇게 하는것이 더 리롭다”(잠시 “전용론”으로 략칭함)는 견해였고 다른 한가지는 “조선어전용을 하되 한자어도 별도로 가르쳐야 한다”(잠시 “별도론”으로 략칭함)는 견해였다(여기서 말하는 “별도”란 한자교육을 학교 교육내용에 넣지 않고 과외를 리용, 자원원칙에 따라 별도로 가르칠수 있다는것이다).   이 네가지 견해는 실상 모두가 독자적인 견해들인데 아마 토론목표의 불명으로 크게 두가지 주장(전용론과 혼용론)으로 나뉘여 교차혼선을 빚은것 같다.   례컨대 “리해론”과 “방편론”은 련계가 거의 없는, 그리고 “조한혼용”에 대한 리해와 풀이가 완전히 다른 견해다. 그럼에도 일치하게 “한자혼용”을 주장한다는 리유때문에 다 같은 “혼용론자”로 되여버렸다. 한편 “전용론”과 “별도론”도 기실 판판 다른 견해지만 “조선글전용”이란 측면에서 주장이 일치하기에 함께 “조선글전용론자”로 돼버린것이다.   몇가지 견해중 “방편론”은 “전용론”의 강한 반발을 부르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그러나 “조한혼용”주장의 첫번째 견해 즉 “혼용론”은 본질적으로는 정확한 것이였지만 론점을 받쳐주는 론거와 문제해결의 대안제시가 미흡했고 그 론점에 대한 리해에 따른 동조자도 적어 결국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반해 “조선글전용”주장은 강력했다. 기성 “조선글전용정책”의 후광도 후광이였겠지만 그 정책을 지키려는 의지와 결의가 확고했고 “內外의 추세”도 이 주장을 뒤받침해주는 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의 “방편론”에 대해서도 “리론우위”를 점하고 있었기때문이다.   이미 말했지만 “조선글전용”주장중의 두가지 견해(“전용론”과 “별도론”)는 실질적으로 다른 견해다. 일치하다면 이 두가지 견해가 모두 “민족언어의 자주성원칙”, “민족언어 수호”, “언어순결성 고수”란 이름으로 “민족의 감정과 大義”를 내세우고있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문제를 본다면 “한자혼용”주장중 “리해론”과 “조선글전용”주장중 “별도론”이 오히려 핵심문제에서 일치한 점이 있다고 볼수 있다. 왜냐하면 “별도론”은 “전용론”과는 달리 조선어공부에 대한 조선말한자어의 유용성을 인정하고있기때문이다.   원래 “조한혼용”이냐 “조선글전용”이냐 하는 토론은 의당 “우리글을 효률적으로 습득하고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한자교육이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목표를 두어야 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토론은 이 근원적인  핵심문제는 별로 건드리지 않고 단 “우리글의 순수성을 확고히 지키느냐 아니면 섞어쓰기로 우리글에 흠집을 내느냐” 하는쪽으로 번졌는데 그 결과 토론은 학술의 범위를 떠나 마치  “민족문화지키기”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된 공방전인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키는 후과가 초래됐다. 이런 토론풍토에서 “조한혼용”을 주장하는 론자에게는 자칫 복고주의자, 민족언어말살론자 등의 감투가 날아들기 십상이였고 그들은 또 “조선어”의 “자주적발전”과 “순결성확보”를 방해하는 “위험인물”로 간주되기도 했다.   과거의 토론이 시종 문제의 근본과 핵심을 분명히 짚지 못했다고 하는것은 바로 이 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의 언어를 어떻게 효률적으로 배우고 가르치고 발전시킬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떠나 이른바 “민족언어의 자주성원칙”, “민족언어 수호”, “언어순결성 고수”란 명분을 내걸고 민족정감을 내세우는데 지나치게 치우침으로써 토론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술성연구와는 거리가 먼, 거의 “정치적 리념가르기”에 가까운 기로에 빠져들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리념화”한 토론방법에서 뛰쳐나와 진정한 학술토론의 견지에서 이 문제를 고찰한다면 기실 “한자교육”, 나아가 “조한혼용”의 필요성, 합리성을 보아내기 어렵지 않은것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조한혼용”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조선어를 능률적으로 배움에 있어서 조선어한자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것이다. 바로 이런 취지에서 아래에 “조한혼용”(“한자교육”필수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의 합리성과 필요성을 몇가지로 나누어 규명하고자 한다.   우선 조선글의 한계와 조선어한자의 효용 문제를 말하겠다.     2. 조선글의 한계   조선글은 글획이 적고 표기법이 간단하여 문자를 익히기가 쉬운 반면에 표음문자로서 개개의 글이 독립적의미를 갖고있지 않기에 새로 접하는 신출한자어의 경우에 그 단어의 뜻이 일목료연히 안겨오지 않는 페단이 있다.   원인은 우리의 말과 글이 청각성 어휘와 시각성 어휘로 나뉘여진다는데 있다. “아버지, 어머니, 하늘”과 같은 청각성어휘는 귀로 듣는 즉시 뜻이 리해되는데 그것은 어려서부터 말로 배워익혀 이미 몸에 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수”나 “배식”이라 하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듣는 것만으로는 그 뜻을 분명히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배수” 에 “配水, 排水, 倍數, 陪隨, 拜手, 拜受” 등 여러가지 의미가, “배식”엔 “配食, 陪食, 培植, 倍殖”등 각종 의미가 있어 뜻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휘들을 한자로 표기해 놓으면 그 뜻들이 보는 즉시 명료해진다(물론 배우지 않으면 봐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적 언어를 조선글로만 표기해도 개념을 리해할수 있다고 하는것이 “조선글전용”이 안고있는 모순이다. 필경 읽을 줄 안다는것과 그 뜻을 안다는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문분야용어의 경우 조선글의 한계는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례: “증기타빈이란 汽罐에서 발생된 고압증기를 低壓力부분으로 引渡하여 軸車주위에 부설된 回轉翼을 고속으로 회전시키는 機關이다.” 이 문장에서 한자를 모두 조선글로 바꾸어 넣는다고 하자. 한자어의 뜻들이 확연히 안겨올 것인가? “기관”이란 두 동음어는 또 어떻게 리해하겠는가? 순 조선글로 표기된 이런 단어들을 한두개만 정확히 리해하자 해도 피곤할텐데 이런 전문 용어들로 꽉 차 있는 두툼한 기술서적을 읽어 내려 가자면 그 고초가 얼마나 막심할것인가 ?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말로 풀어 쓰면 해결이 된다는 론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론리에도 무리가 있다.   례: “그의 작시금비론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가령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하자. “작시금비론” 이란 말은 “초면상태” 에서 그 뜻을 바로 리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어려운 한자어”로 치부해서 “과거를 긍정하고 현실을 비난하는 론조” 따위 “쉬운 말”로 바꿔 쓸 것인가? 답안은 매우 간단하다. “쉬운 말”로 바꿀 것 없이 그것을 “昨是今非論”이라고 한자로 표기해 놓으면 된다. 보는 사람은 보는 즉시 그 뜻을 알고 또 쉽사리 잊지도 않을 것이다. 그 다음번엔 “작시금비론”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 볼수가 있는 것이다.   력사적으로 형성되고 전통적으로 계승되여 온 생명력 있는 말들을 필요 이상으로 이른바 “알기 쉬운” 새로운 고유어합성이나 새로운 한자어로 “다듬는”다면 오히려 력사와 전통을 단절시키고 언어의 천박성만 증대시키는 언어혼란을 빚어낼수 있다. 조선말한자가 완전히 페기처분당한 오늘 현실에서 우리 조상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신고스레 다듬고 벼려온 맛갈지고 아름답고 짜임새 좋은 한자어들이 무참히 배격당할 위험은 항상 우리곁에 도사리고 있다.    우리 글이 배우기가 쉽다는 말은 이미 正說로 굳어진듯하다. 그러나 이 說이 자칫 우리 글을 해치는 함정이 될수 있다는데 류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글이 선진적이고 한자가 락후한 문자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 론자들은 “한자는 한뉘를 배워도 다 못배워내는 반면에 조선글은 몇년 지어 몇달이면 다 배워낼 수 있다”는 극언도 서슴치 않고 한다. 이와 같은 오도로 하여 많은 학생들이 조선글을 읽을 줄만 알면 다 배운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조선어는 배울게 없다고 여기는 학생도 결코 소수가 아니다.   기실 세계상의 모든 언어와 마찬가지로 조선어 역시 한 평생 배워도 다 배워낼수 없다. 1996년에 출판된 엣센스국어사전에는 우리 글 어휘가 15만어가 수록되여 있다. 근 50년간 조선글을 읽어왔고 20여년간 신문사 편집으로 일해온 필자의 소견으로는 우리 글이 결코 쉬운 글만은 아니라는것이다. 내심 두려운 일이 한가지 있다. 한자교육을 계속 지금처럼 배격해 나간다면 우리 글이 세상에서 배우기가 가장 힘든 글로 전락되지 않을가 걱정이다. 아니, 이미 전락된지가 오래되여 이미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심각한 불감증을 앓고 있는 그 과정일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글이 안고 있는 한계를 의도적으로 인정치 않고 조선어를 세계적으로 가장 뛰여난 글이라고 극찬만 하는 것은 설사 그 동기가 뜨거운 민족애와 민족적 긍지감으로부터 출발한 것일지라도 실질상 리론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미흡한 점이 많으며 실천적으로도 해로울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말 공부가 조선글 전용으로 인해 비능률적으로 진행된다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전반 교육수준향상에 계속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3 . 조선어한자의 효용   표음문자인 조선글에 대비해 표의문자인 한자의 가장 큰 우점은 바로 그것의 “表意性”에 있다. 글자마다 뜻을 가짐으로써 글자와 글자를 련결해서 새말을 지어내는 강력한 造語力을 지니고 있다는것이 바로 한자의 妙所다. 新出 한자어의 경우, 각 한자의 訓과 音을 익히고 그 훈들의 결합인즉 그 한자어의 뜻이란 점을 발견하면 그 단어의 뜻을 똑바로 리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 배운 한자와 이미 배운 한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한자어의 일차적인 뜻은 자동적으로 리해되여 어휘확장이 아주 능률적으로 이루어진다. 리해에 토대한 학습능률의 제고로 어휘습득량이 확장됨에 따라 일부 한자의 파생적의미도 어렵잖게 파악하게 되여 어휘의 2차적 뜻 리해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한자어 해득효과는 기하급수로 늘어나게 된다.   례를 들어 訓에서 제시한 “천(天)”자의 뜻은 “하늘”로 되여 있다. 여기에 새로 익힌 한자를 결합시키면서 “天地”, “天宮” 등으로 어휘를 확장해 나가다 보면 “天”字가 “하늘”이란 뜻 외에도 “자연의, 천연적인, 타고난, 선천적인, 임금, 하느님” 등 파생적 의미도 지니며 또 그것을 토대로 다른 추상적의미도 이끌어 낼 수 있음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알게 된다. 하여 “天理, 天生, 天命, 天性, 天成, 天賦, 天子…”의 뜻을 쉽게 파악하고 기억할 수 있으며 나아 가 “天長地久, 天藏地秘” 등이 가지는 추상적 의미까지 류추해내는 추리력과 창의력도 스스로 키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 文理가 확 트이게 되여 學力은 급속도로 제고될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한자교육을 완전히 배격해 버린 상태에서의 조선말 한자어는 무의미철자의 집합체와 다름이 없어서 상기한 바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동참”을 “같이 참가함”이라고만 해석해 놓으면 학생은 ”동”자의 뜻이 뭔지 “참”자의 뜻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기계적으로 그 뜻을 암기해야 한다. 그러나 “同(같이할 동)”자와 “參(참여할 참)”자를 각각 가르치면 선생이 해석할 필요 없이 학생은 자동적으로 “동참”의 뜻을 알고 기억하게 된다.   리해된 것이라야 빨리 기억할수 있다는것은 정한 리치다. 반대로 리해되지 않은 것은 왕왕 여러차례의 반복을 거쳐야 비로소 기억이 가능하다. 바로 우리의 학생들은 조선글로 표기된 한자어에서 뜻감을 잡을만한 아무런 표식도 없는 무수한 무의미철자묶음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느라 기막힌 고역들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한자어의 리해를 돕는것은 한자교육일뿐이다.   한편 한자는 글획이 많고 복잡하며 글자수가 너무 많아 평생을 배워도 그 일부분을 겨우 배워내나마나 한 기막힌 약점도 가지고 있다. 3000년 전 한자의 자종은 3500자가량이었는데 2000년 전에는 약 1만자, 한자가 조선반도에 들어갔던 1500년 전 삼국시대에는 약 2만6000자가 됐고 오늘날 큰 자전에는 약 5만자가 실려 있다. 만약 이 5만자를 다 배워야 문자생활이 가능하다면 한자는 언녕 도태돼 버린지도 옛날이였을것이다.   그러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학술연구를 포함한 일반적인 문자생활에 있어 5만자의 한자 자종이 모두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글자만 2 ~ 3천자 정도 골라 배워도 조선어학습에 충분하다. 한국의 比峰출판사에서 동양고전을 번역하면서 분석해 보니 에 등장하는 漢字는 1500여자,  에는 1800여자 정도였다. 일본에서 상용한자로 쓰고 있는 것이 현재 1945자다. 일본은 한국보다 한자를 훨씬 많이 혼용하고 있음에도 1945자의 상용한자를 사용하면서 아무런 불편이 없다한다.   전문 한자만 사용하는 우리 나라의 경우 현대의 각종 출판물에 쓰이는 한자를 사용빈도가 높은 순서대로 통계를 낸 결과 950자가 90%, 2400자가 99%, 3800자가 99.9%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경대 언어학과 연구팀은 漢字 3000자만 알면 나머지 한자는 저절로 리해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1988년 국가교육위원회와 국가어언문자공작위원회가 공동으로 ‘현대한어상용자표(現代漢語常用字表)’를 발표했는데 상용자 2500자와 차상용자 1000자 등 합계 3500자였다. 이 3500자만 알면 중국 모든 출판물의 99.48%를 커버한다고 한다. 이 정도의 한자는 학습에 큰 어려움도 없고 오히려 청소년의 뇌력강화 훈련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이미 과학적으로 립증된 상태다.   “전용론”은 대개 조선글에 대비해 한자가 락후하다는 설을 많이 편다. 하지만 우리 조선족 학생들 경우 소학교 때부터 한어를 主과목으로 배우는 상황에서 한자가 락후하고 배우기 힘들다는 리유를 내세워 조선어한자를 배격하는것은 무리하다.   한어한자와 조선어한자의 관계 등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래 “한자교육의 방법론”에서  좀 더 설명할가 한다.     4 . 한자교육의 당위성   우에서 언급한 리유로부터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조선글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메울수 있는것이 漢字일진대 굳이 그것을 배우지 말아야 할 리유가 없는것이다.   한자교육은 “조선어학습의 능률제고”외 다음과 같은 리유에서도 당위성을 가진다. 한자교육은 민족전통교양에 유리하다. 례컨대 우수한 우리 민족전통으로서의 륜리도덕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마당에 한자교육을 전통교양에 효과적으로 활용할수 있다. 한자안에 인성교육의 모든 요소, 충과 효의 도리, 옳바른 국가관, 보편적인 인류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자교육은 모든 사회분야의 진보에 유리하다. 한자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면 한자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과 능력으로 사회에 보다 훌륭히 봉사할 수 있다. 언어학 연구분야를 보자. 한자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어학연구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인가? 한자어학습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만큼 풍성할 수 있는 문화적유산으로부터 멀어지게 됨으로써 놓치는것도 많을것이다.   우리는, 만약 한자사용을 완전히 페기한다면? 이런 문제를 스스로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한자사용이 완전히 페기된다면 그에 따라 사라지게 될 단어도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단어들은 한자에서 떨어져 나와서 의미와 소리로만 존재하다가 점차 기억에서 잊혀지게 될것이다.   우리 민족이 수천년간 사용해온 한자를 기반으로 한 지적사유의 령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한자공부문제를 간단히 대할수 없는것이다. 다른 건 제쳐놓고라도 우리말 사전에서 한자어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한자표기를 전부 없애버린다고 가정해보자. 우리의 언어문자생활이 과연 어떤 경난을 치를것인가 하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일전에 어느 분이 “한자혼용은 취할바가 못된다”면서 “우리 말의 페단에 대한 해결을 한자에 국한시키는것은 과학적이지 못하며 우리는 한자 없이도 독자적으로 우리 글을 더 합리하게 더 효률적으로 만들수 없겠는가에 연구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자 없이도 독자적으로 우리 글을 더 합리하게 더 효률적으로 만들려는 그 “량호한 념원”은 십분 가상치만 그러나 이 말은 아주 훌륭한 우리 말을 완전히 뒤엎고 새로 만들자는 주장에 가까운 것으로 가능성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발상 자체가 언어발전법칙과는 전혀 동이 닿지 않는것이다.   부대적으로 언급할 말이 있다. 필자의 짧은 관찰(일면적일수도 있으니 연구의 참고로만 삼아주기를 바란다)에 따르면 조선글전용주장은 대체로 두가지 부류에서 온다. 한 부류는 조선어를 쉽게 배우려는 이들이다. 리해가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필자는 조선어를 쉽게 배우려는 생각을 가지고서는 결코 조선어를 제대로 배워낼수 없다고 귀띔하고 싶다. 다음 한 부류는 한자교육을 받은 일부 학자들이다. 이미 漢字교육을 받은 이들이 아직 한자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조선말漢字를 가르쳐줄 대신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 그 底意를 도저히 알수 없고 리해가 되지 않는다.     5. 한자교육의 방법론   한어를 배우고 있는 중국조선족의 실정에서 한자교육을 실시하면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나타날가봐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일각에서 “한어한자와 조선어한자 사이에는 차이가 적잖이 존재하는데 중국 조선족의 실정에서 한자어를 가르치면 학생들의 학습상 혼란이 조성되지 않겠는가?”하고 우려하는것이 그것이다. 이런 우려는 아주 현실적으로 제기되였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사고해보면 이 문제가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다. 기실 모든 언어간에 차이가 없을수 없듯이 조선어한자와 한어한자 사이의 差異의 존재도 필연적이다. 이를테면 “입찰계약(入札契約)”, “입찰매매(入札買賣)”와 같은 한자어는 한어에서 “投標合同”, “投標交易”으로 표시되는데 그것은 필경 두가지 부동한 언어체계인만큼 차이의 존재는 확실하다. 한편 대량 엄존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기실 조선어가 오랜 세월 자체의 언어발전법칙에 의해 발전해왔다는 유력한 근거로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자교육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리유로 될수는 없다. “혼란”이 올수 있다는 리유로 한자교육을 포기하는것은 조선어를 보다 높은 수준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포기하는것과 같기 때문이다.   “조한혼용”을 실시한다면”百聞不如一見”을 한어발음으로 읽거나 인명 “金鑫”이나 “盧春艶”을 “김신”, ”로춘연” 등으로 잘못 발음하는 현상이 생길가봐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지금 바로 시험적으로라도 신문 간행물에서 “조한혼용”을 실시한다면 이와 같은 현상이 필연적으로 대량 나타나게 될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의 출현은 결코 선생이 둔재이거나 학생이 저능아여서가 아니라 50여년간 한자교육을 페지하고 조선글전용 정책을 실시한 필연적악과이다. 訓과 音을 제대로 가르친다면 이런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 “한자어音讀法”을 가르치지도 않고 한자를 “음독법”대로 읽으라고 요구할수 있단 말인가?   한어 한자와 조선어 한자의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비교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는것은 언어공부의 좋은 방법이다. 옅은 곳으로부터 깊은 곳으로 점차 배워 나가다 보면 학생들은 자연히 두가지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지하게 될것이며 언어의 비교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될것이다. 이른 바의 혼란이란 배우지 않아 모르는데서 생기는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자의 뜻, 훈과 음독법을 가르치면 배운 학생이 평생 활용할수 있다. 가르치지 않으면 학생이 평생 혜택을 볼 수 있는 엄청 큰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많지는 않지만 가끔 “한자교육은 한어과에서 해도 된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러나 두말할것 없이 한자교육은 조선어과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그것은 한어과의 교수목적은 학생들의 한어 열독, 서사, 회화 능력을 키워 주는데 있지만 조선어과의 한자교수목적은 우리 말 한자어에 대한 학생들의 인지, 식별 능력과 서사능력을 높여 조선어 학습효률을 극대화하기 위한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어과에서는 한어병음으로 한자를 가르치고 조선어문에서는 訓과 조선말 音讀法으로 한자를 가르친다. 그러나 량자의 교수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면 상호보완의 효과를 볼수도 있다. 이는 조선어 한자교수의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이 가능할것이다. 그리고 한자교육은 가급적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것이 좋다. 이것은 중국과 한국의 경험있는 전문가들의 공통한 주장이다. 이 점을 리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것이다.   그외 “조선어한자는 번체자인데 그대로 배워야 하는가?”하는 물음도 제기된다. 필자의 소견엔 중국 조선족의 실정에서는 간체자로 배워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한자를 배우는 것은 선차적으로 한자어에 대한 리해를 도움으로써 조선어를 능률적으로 배우자는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번체자를 꼭 배워야 할 리유가 없기때문이다. 간체자를 배움으로 해서 생기는 일부 구체 문제는 전문가들이 공동연구를 해서 결정을 짓던지 하는 특수방법을 대서 해결하면 그만이다. 솔직히 한국 학생들이 한자를 배우기 어려워 하는 주요한 원인중 하나가 바로 번체자를 가르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중국의 간체자를 채용하지 않는데는 나라와 민족의 체면문제가 깔려 있겠지만 그러나 결과 혹사당하는것은 한자사용자와 학생들뿐인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조선어전용”을 하는 전제하에서 한자교육을 학교 교육계획과는 무관하게 별도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런 견해는 조선어한자교육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합리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요점을 말하면, 한자교육을 진행하면서도 학교 교재, 사회 신문간행물과 도서출판물들에서 혼용 혹은 병용을 하지 않고 조선어전용만 한다면 한자교육의 효과를 半減시키는 효과만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한자교육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역할 외 아무런 리점도 없는것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학교 교장들과 교원들이 “조한혼용”이나 한자교육문제에 대해 저촉적인 경향을 보이는것은 주로 학생부담과 교원들의 부담이 큰데서 생기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어과에서 한자교육을 한다고 하면 원래의 교수내용에 한자교육내용을 가첨해서 그만한 부담이 액외로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아무튼 조선어 한자를 더 배워야 하니 학생들의 학습부담이 더 중해질건 뻔한 일이 아닌가?”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기실 불필요한 것이다. 만약 정부 차원에서 한자교육을 학교교육에 정식 도입한다면 이것은 조선어교육의 중대한 개혁으로 되는만큼 적어도 수년간(례컨대 3년 내지 5년 지어 더 긴 시간)의 준비과정과 시험과정이 있게 된다. 50여년간 실시해온 조선어전용정책으로 인해 조선족 소학교와 중학교 지어 대학교의 관련 학과는 전부 조선어전용일체화로 돼 있으므로 우선 교재가 재편찬돼야 하며 그에 따라 교원양성도 해야 한다. 그외 보도출판 분야 편집일군 양성, 사회에로의 조선어한자 보급, 여러 경로를 통한 한자혼용실험, 한자혼용실정에서의 언어규범화 후속조치 제정 등 代案들도 필연적으로 따라세우게 된다. 말하자면 한자교육정책은 정부 차원에서 상당시일을 두고 계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펴내여 실행하게 되는것이다.   이런 장원한 목표하에 계획적으로 편찬된 교재는 결코 학생들에게나 교원들에게 액외의 부담으로 되지 않으며 반대로 한자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해득력과 학습효률이 현저히 높아짐으로 해서 궁국적으로는 학생들의 학습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되며 조선족교육의 전반 소질이 크게 향상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한자교육, 나아가 “조한혼용”이 가지는 중요한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6. 결론   표음문자이면서도 대부분 어휘가 한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조선어는 자체의 천성적 발전법칙을 가지고 있다. 表意문자인 漢字는 조선어 한자어휘 리해에 큰 도움을 주기에 학생의 학습능률제고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자교육이 거세된 조선말한자어는 무의미철자의 집합체와 다름이 없어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암기하자면 기막힌 고역들을 치러야 하며 따라서 학생들의 학습취미를 크게 떨어뜨릴수밖에 없다. 이로 하여 우리의 조선어는 쇠퇴의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미 엄청 큰 대가를 치렀음에도 여전히 불감증을 앓고있는 상태다. “조선글전용”정책은 우리 말의 발전제고에 걸림돌로 작용하므로 반드시 페지해야 한다.   “한자교육”과 “조한혼용”정책은 정부차원에서 중대한 개혁내용으로 연구, 제정되여야 하며 학교교육에 정식 도입되여야 할뿐만 아니라 전반 사회에 일반화되여야 한다. 수년간의 준비과정(교재편찬, 교원과 편집일군 양성, 제도 제정 등)을 거쳐 점차 완정한 정책으로 정착시키고 실시중 부단히 정비보완한다면 조선어학과의 발전을 효과적으로 추진할수 있으며 아울러 조선족교육의 전반 질을 크게 향상시킬수 있는것이다.   [2007년 8월 중국조선어학회 제15차학술토론회(장춘)에서 발표]  
67    귀중한 선물 댓글:  조회:5061  추천:97  2008-09-02
귀중한 선물--서언을 대신하여 박문희    사석에서 나는 신승우선생을 로형, 혹은 신형이라 부르고 승우선생은 나를 아우라고 부른다. 풍운세월을 적잖이 겪은 나이지만 우리만이 조용히 마주 앉으면 둘다 순진무구한 동년시대로 돌아간듯한 기분까지 든다. 한없이 편하고 부담감이 없다.    신형의 《렌즈와 붓끝에 세월을 담아》는 이순을 맞아 정년퇴직을 하면서《신승우 촬영미술전각작품집(辛承佑摄影美术篆刻作品集)》,《남영전토템시자구인(南永前图腾诗字句印)》에 이어 내놓는 또 하나의 작품집이다. 신문보도사업에 종사해온 20년간 사회발전궤적의 단편들을 기록한 이 작품집은 신승우에게 있어서 첫 두 작품집과는 다른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신형이 신문사에 몸담근 20여년은 중국 개혁개방시대가 열려서 파죽지세로 변화를 거듭해온 가슴벅찬 세월이였다. 격정시대에 살면서 신형 역시 시대에 걸맞는 촬영기자의 보람찬 삶을 살아왔다. 20여년간 열근도 더 되는 카메라가방은 항상 그의 어께에 강력점착제처럼 붙어다녔다. 독실한 서예전각미술애호가였던 그의 붓과 전각칼은 이 20년간 서랍속에 깊숙히 묻혀서 한번도 빛을 보인적이 없었다. 판화나 전각예술에 대한 신형의 애정이 신문사에 들어온 그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던것은 아니다. 신문사치고 전업촬영기자는 신형 한 사람뿐이였던지라 전 성 각지를 골고루 누벼야 하는 상황에서 신문취재외 그 어떤 개인의 애호를 아쉬워하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개인적인 애호를 아쉬워하기엔 하루 다르게 변하는 세월과 그 세월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호소와 부름이 너무 강하고 절박한것이였다.    설령 그렇다 쳐도 그가 만약 업간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해서 서예창작을 하려고 맘먹었더라면 본부에서 떨어져있는 지역의 기자로서 그만한 “자유의 시간”을 트텨낼수 없는것은 결코 아니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간뿐만 아니라 의당 가정과 개인에게 돌려야 할 휴일마저도 깡그리 신문보도에서의 “자유의 왕국” 만들기에 돌렸다. 다른건 제쳐놓고 지방 선전부문에서 주로 촬영미술창작사업에 종사하면서 조선글을 단 한쪽도 써본적이 없었던 그가 각종 쟝르의 보도문을 조선어로 아무런 구애없이 구사하게 된 한가지 사실만 보아도 본직사업에 대한 그의 드높은 책임감을 충분히 감지할수 있다.    그는 말그대로 혼신의 정열과 심혈을 다 쏟아 만폭으로 헤아리는 사진보도와 대량의 문자보도에 시대의 창상지변과 인간의 온정을 담아낸것이다. 이러한 신형이였으니 신문사 직원들이 거의 해마다 만장일치 그를 선진일군으로 선거한것은 전혀 이상할것 없는것이다.   정년퇴직후에야 그는 비로소 시간을 조그만큼이나마 자기에게 드텨낼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였다. 아주 짧은 시간내에 촬영작품집을 묶어내고 이어 만강의 열정으로 전각작품을 창작하여《자구인》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기의 성과를 단지 자기 개인의 노력의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몸을 담그고 있는 신문사가 아니였다면 자기의 성과도 있을수 없는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의 작품은 취재대상자, 독자, 신문사 동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파되는것임을 강조하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이것이 정년 후 그가 가정 경제상황이 아직 궁핍한 형편임에도 책 3권을 륙속 자비로 출판하게 된 주요 동기이다. 그는 이 책들을 도서시장에 내다 팔려는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안해와 자식, 그리고 손자에게 기념으로 선물하고 고마운 이들, 동료와 벗들에게 선물하려는 것이다. 승우형의 깊고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이 선물들은 참으로 귀중하다 아니 할수 없다.    명리에는 취미가 없고 평생동안 책 수백권을 새겨 세상에 내놓은 청나라 때 문인 장해붕(張海鵬)이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장서(藏書)는 불여 독서요 독서는 불여 각서(刻書)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각서”란 오늘에서의 책출판을 일컫는다. 그의 뜻인즉 이러하다. “독서”는 자기 한사람만을 위한것이지만 “각서”는 남을 위한것이다. “독서”는 저자의 정신수명이 그것을 읽는 자기의 몸에서 연장되게 할수 있지만 “각서”는 후대들이 그 혜택을 누리게 할수 있으니 그 용처가 훨씬 더 많지 아니한가?    이미 출판한 《신승우촬영미술전각작품집》, 《남영전토템시자구인(字句印) 》과 지금 펴내는 이 책자는 정년퇴직(동시에 환갑)의 기념이기도 하고 다년간의 업무와 창작에 대한 한차례 총화이기도 하다. 그중 《촬영미술전각작품집》은 전 10권으로 된 《중국예술가총서》의 한권으로 그 예술수준이 중국의 유명한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으며 시대문예출판사에 의해 최근 출판된《자구인》은 또 하나의 서예정품으로 갑골문체와 전서체를 자유자재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구사하면서 고대 씨족의 동물에 빙자한 징표도형을 훌륭히 활용하여 평론가 주정(朱晶)씨도 그 재간이 너무 부럽다고 할 정도로 성과작이다. 개혁 개방의 력사현장사진을 대량 곁들인 본 작품집도 우리가 방금 겪어온 유정세월을 되새기는데 감흥깊은 자료로 될것이다. 물론 이 몇권의 책은 신형으로 말하면 창작의 마감인 것이 아니라 인제 시작일뿐이다.    신형은 퇴직한 후에도 신문보도 사업을 위해 두발이 다슬게 뛰여다니고있다. 이순을 제2 인생의 시작이라고들 하는데 신형이 바로 새 인생을 초시작부터 멋지게 장식하고있는것이다. 형수님과 더불어 인생을 좀 더 다양하게 살면서 그속에서 풍만한 각서(刻書)를 잉태하고 출산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 바이다. 2007년 10월 1일 장춘에서박문희: 현임 부사장, 고급편집<신승우신문작품집>(연변출판사)에서
66    한국언론의 중국보도에 몇마디(박문희) 댓글:  조회:4681  추천:132  2008-06-13
 한국언론의 중국보도에 몇마디     박문희     [글 앞에 쓰는 말: 정인갑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주류매체의 중국보도에 대한 비판은 요즘 들어 깊이있게 거론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고무적이다. 어느때부턴가 한국의 중국보도는 일반적인 왜곡보도의 차원이 아니라 중한관계파괴의 위험수위를 넘어서 더는 참을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영향으로 원래 한국에 호감을 갖고있던 중국인(당연히 우리 조선족을 포함한)들이 서서히 원유의 호감을 거두어들이는 상황이 빚어지고있다. 누구의 문제인가? 중국의 실상을 모르는 한국 일반인들을 나무릴 일이 아니다. 언론이 문제다. 개별적 한국인들(절대 다수가 아니다)에게서 표현되는, 중국조선족, 나아가 중국 전체 국민들의 감정에 서슴치 핞고 칼질하는 몰지각한 언행은 한국언론이 의도적으로 국민들의 눈을 멀군 결과이다. 현재 한국언론의 중국관련 보도와 관련하여 철저한 변화를 촉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와있다. 나도 주저없이 이 한 촉구의 대열에 서려 한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우리 중국 조선족은 자신의 특수한 신분으로서라도 모국의 그릇된 중국관련언론을 비판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한관계가 해를 입으면 조선족들에게도 해만 돌아올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하는것만이 진정 모국의 언론을 관심하는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래, 필자가 "뉴욕조선족통신"의 글에 달았던 리플(파란 글을 클릭하시면 원문을 보실수 있습니다)에서 관련되는 부분을 뽑아 올린다.]     (1)    한국언론에 하고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중국언론은 시종 한국에 우호적이고 선의적인데 반해 한국언론은 중국에 선의적이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올림픽은 중국만의 행사가 아니고 세계가 맡겨준 우리 모두의 행사입니다. 그런데도 이른 바 서방의 일부 발달국이나 한국언론은 올림픽의 입장이 아니라 이상한 입장(시각)에서 올림픽 방해자들을 저지할 대신 부추기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중국유학생들은 한국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갔다가 한국의 언론과 그 언론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국민(당연히 일부겠죠)들의 반향에 실망, 지어 분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쪽 네티즌들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한국언론의 무책임한 "자유보도" 가 무수한 문제를 야기하고있는겁니다. 장본인이 누군가를 알면 우리가 여기서 싸울 필요가 없을겁니다. 우리가 분열로 나가면 티베트독립파들만 좋아하겠죠.   여기서도 인신공격적인 글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품위를 낮추는것으로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2)   협애한 민족주의와 “붉은 깃대를 총대처럼 휘두르는 것”은 당연히 반대해야 합니다.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유해하니까요. 중국정부는 아마 이에 충분한 경각성을 가지고있을것으로 보며, 중국 국민들도 반드시 이에 철저한 자각이 있어야 할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서방의 일부 언론들의 문제점을 덮어감출수는 없습니다. 서방의 일부 영향력이 있는 언론은 이번 성화봉송을 중국에 강대한 압력을 가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티베트독립을 부추기고 돌발사태를 유발하고있으며 지어 달라이라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있습니다. 달라이라마의 거짓말이 다 드러난 뒤에도 16억달러짜리 언론은 그런 거짓말을 꾸짓지 않고있습니다. 과연 16억달러가 진리를 대표한다고 할수 있을까요?  적어도 그것이 진실을 재는 잣대가 될수 있을까요?   그러나 반화세력의 비열한 추태가 좋은점도 있습니다. 그들의 추태를 지켜보고 대처하는 과정에 지혜를 키우고 그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될것입니다. 그런 세력은 항상 있을것이지만, 잠시 득세할수 있을뿐 대세를 이루지는 못할것으로 봅니다.    미국언론은 강세를 턱대고 비록 낙후하고 아직 약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대단한 결심으로 고속발전을 추진중인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하고있습니다. 중국에 혼란이 일어나면 그들은 날듯이 좋아할것입니다. 중국 정권이 무너지길 바라는 그들이니까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것은 미국 국민들이 아닙니다.   한국의 주류언론도 중국의 놀라운 발전을 빤히 들여다 보고있으면서도 부정적인 면에다만 렌즈와 확대경을 들이대고있습니다. 중국의 보도와는 정 상반댑니다. 중국의 보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의 모든것을 좋게만 보도하는것이 문젭니다. 결과 중국유학생들은 한국 언론과 일부 국민들의 우호적이지 못한 작태를 보고 실망하지 않을수 없죠. 이건 나만의 견해가 아닙니다. 내가 접촉한 적지 않은 한국의 지성인들도 이렇게 보고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한국 언론을 말한다 해서 다 부정하는것은 아니고,사회주의 잣대를 적용하는것이 아닙니다. 중국관련 보도의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함의 필요성을 강조했을뿐입니다.   그리고 ***님의 말씀이 선의적이고 대부분 받아들일수 있는 좋은 건의와 우리가 반드시 깊이 생각해봐야 할 점들임을 느끼면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3)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며 심히 불안하고 안타깝습니다. 세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첫째, 이성 잃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극복은 당면 중국 유학생들에게 있어서 급선무입니다. 중국 정부에서 일찍부터 이른바 비이성적애국주의 문제에 주의를 돌리고 조치를 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올림픽을 앞둔 현시점에서 극복이 시급할 뿐 아니라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극복의 노력은 계속돼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어떠한 도전에 직면해서도 이성을 잃고 설친다면 중국과 올림픽에 아무런 도움도 줄수 없고 중국과 중국인들의 얼굴에 먹칠만 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 조선족유학생들의 얼굴에도 당연히 먹물이 튀게 됩니다.   위에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극히 개별적인 유학생이 “소림사무술동작”을 했다고 해도 마치 전 중국 유학생이 “소림사무술동작”을 한 것처럼 한국인과 세계인들의 눈에 비치게 됩니다. 자국 국민(그분이 먼저 어떤 동작을 했던 지를 막론하고)에게 행한 중국유학생의 이런 무술동작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한국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서 중국유학생들을 어케 자극했기에 그 애들이 저렇게 까지 무술동작을 했을까 하고 속으로 생각할 분들이 없을 리는 없지만, 적어도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는데 대해,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권 행사에 대해 선의를 품지 않은 “개별적 한국인”(그들은 절대 한국인 전체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이 어떻게 도전해왔든 중국 개별적 유학생이 그 사람에 행한 폭력은 전체 한국인을 상대로 한 무시와 폭력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한국과 세계 언론계의 선의적이지 못하거나 파렴치하거나 적어도 이성적이지 못한 언론사와 언론인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음을 충분히 알아두어야 할것입니다.   때문에 이 글이 호소하는 “협애한 민족주의와 '붉은 깃대를 총대처럼 휘두르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시적이며 필요합니다. 이런 글의 이면에는 민족 사랑과 한국 사랑과 중국 사랑이 깔려있습니다. 중국유학생들은 이면에서 반드시 충분한 인식을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인 대학생들이 이에 앞장서서 본을 보여주고 모든 중국인의 모범으로 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둘째,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원인을 찾아내고 문제의 발생을 근원적인 면에서 막고 치유해야 합니다. 원인을 찾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번 일이 까닭 없이 생긴 일입니까? 중국유학생들이 까닭 없이 생사람을 잡아 팰 정도로 무지막지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생사람이든 생사람이 아니던 “소림사무술동작”으로 사람을 잡아 팼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원인을 찾아 해결하지 않고 그 원인으로 되는 문제가 장기적으로 쌓인다면 앞으로는 “소림사무술동작”을 찜쪄먹는 작탄테러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만이 극대화되면 이지를 잃게 된다는 것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현재 한국의 일부 언론인들의 일방적인 매도와 모든 원인을 불문에 붙이는 작법이 과연 이지적인지 생각해 볼 바가 아닙니까? 사태발생의 근원을 캐는 노력이 없어서야 되겠어요? 이라크에서 왜 자살성 테러가 빈발합니까? 분노가 극에 달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원인을 반드시 캐여서 해결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원인을 열거한다고 해서, 그러는 말에 과격한 점과 감정적인 요소가 조금 섞였다 해서 그에게 맹비난을 퍼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과격한 점은 지적해주되 무책임한 언론의 악영향 등 원인은 우리 다 함께 사고해봐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셋째, 지금 발생한 문제는 우리의 토론이 상기 두 가지 문제의 한 방면에만 치우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가지에만 치우친다면 의견대립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문제의 양면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도립니다. 한 면만 있는 동전을 본적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한 면만 말하고 다른 면은 말하지 말아야 합니까? 어떻게 한 면의 문제를 가지고 다른 면의 문제를 아주 덮어감추어야 합니까? 이런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사람을 다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기를 아주 작살내고 싶을 때 이런 방식을 쓰면 그 효과가 아주 만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분열을 원치 않는다면 두 가지 문제가 다 깊이 토론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직접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 님께서 언급하신 저의 두 번째 문제는 원래 여기에 한국 분들이 적지 않게 다니고 계시므로 그중 일부 분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이 글은 중국유학생(조선족을 포함한)의 자성을 촉구하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글입니다. 역시 전 중국 국민들의 자성을 희망한 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필요하고 앞으로도 이 노력은 계속돼야 합니다. 이점은 이미 앞글에 분명히 말했으므로 구태여 더 말치 않겠습니다.   이 와중에 부동한 견해들이 양산됐고,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이 가운데는 극히 개별적으로 악의적인 비방 중상의 글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부동한 견해의 대부분은 악의적이 아니고 진심의 글입니다. 편집진의 진실한 의도를 보아내지 못하고 쓴 글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진심을 표달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중국 유학생들의 내심을 대표한 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태를 지켜보는 중국 국내 상당수 대학생들의 정서를 나타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무시해서는 좋은 점이 없습니다. 일부 한국 분들은 중국의 입장에서 말하는 중국조선족 학생들의 현재 정서나 감정이나 심정 같은 건 아예 무시, 그들이 지금 어떤 상처를 받고 있는지 하는데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고, 그들의 진실한 감정에 서슴없이 칼질하고 계십니다. 조선족 청년들이 자신을 중국인이라 하면 우리 민족 자격이 없다고 감히 말씀하십니다. 그럼 그들이 중국인이 아니면 한국인이란 말입니까? 한국에서 국적을 주었습니까? 주지 않았다면 그는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당당한 중국 조선족 청년으로서 사람이 갖고 있는 감정, 자존심과 자부심은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으로서 중국에 살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말고 치욕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함부로 그들의 가슴에 칼을 박아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들이 왜서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한국 분들에게 그들이 뭔가를 호소할 때, 적어도 그들이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무작정 “저 애가 우리 민족 맞나?”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우리의 젊은이들은 모두 우리의 고국인 한국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중국에서 이제 개최할 올림픽을 방해하고, 티베트독립을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을 무작정 차별시하고 쩍하면 “너 가만 보니 우리 민족이 아니고 중국 사람이구나.” 하고 함부로 말을 내뱉는 개별적 한국 분들의 몰지각한 태도입니다. 중국 조선족 청년들은 그런 자그마한 불만을 토로할 자격마저 없는가요? 민족의 고향, 우리의 모국에 계신 분들이라면 적어도 중국에 살고 있는 한 민족 청년들을 이해해주고 그들의 애국감정(중국사랑)을 존중해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존중해주고 아껴주어야 서로 더 마음 상 가까워지고 모국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생각은 중국의 조선족은 보다 선진적인 민족으로 거듭나기 위해 깊이 자성을 하고, 한국의 분들은 중국 조선족 청년들을 꾸짖기에 앞서 역시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서로 자기를 찾아 봐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한국 국민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중국에 사는 너희들만 잘못했으니 자성해라. 일부 중국 청년들이 접수할 수 있겠습니까? 북경올림픽을 방해하는 게 잘됐다는 말씀일 수야 없겠지요? 우리도 이런 거 잘못된 게 있는데, 양해를 좀 해 달라, 이렇게 나오면 중국 청년들이 그 한마디에 감동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지 않고 오히려 너 우리 민족 자격이 있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젊은 혈기에 자손심이 허락하겠습니까?    한국 언론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매일 한국 티비 프로를 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뉴스는 많이 열린 보도입니다. 그러나 중국 관련 보도에는 반감이 많습니다. 중국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많지만 뉴스는 거의 다 부정적인 것입니다. 저의 마누라는 한국 드라마가 없으면 살 것 같지 못합니다. 그런데 뉴스는 절대 안봅니다. 중국관련 보도는 보나마나 부정이니 기분이 상해서 안 본다는 겁니다. 저는 그나마 참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국민들이 그런 보도를 보고 중국을 어떤 시각으로 볼가는 불 보듯 한 일이겠죠.   저는 한국 언론인들도 많이 접촉하고 있는데, 친구도 많구요. 지금은 안 그렇지만 한 십년 전 그분들은 우리 중국에 사는 사람들보다 중국을 더 잘 알고 있더군요. 그래서 중국에 내처 살아온 나도 중국을 조꼼 밖에 모르는데, 당신이 중국을 며칠 와보더니 벌써 다 알고 있구만? 했더니 얼굴이 아주 붉어지더라구요. 그 후부턴 그럼 말을 안 합디다. 지금은 좋은 말만 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히려 좋은 말만 하지 말고 나쁜 얘기도 하라고 그럽니다. 우리는 줄곧 좋은 친굽니다.    한마디만 보충하겠습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모국인 한국을 사랑하고 있으며 한국의 존재로 하여 무한한 자부심을 안고 있습니다. 사실 한반도가 없으면 중국 조선족도 없습니다. 있다 해도 다른 민족에 동화돼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국은 중국에 비해 훨씬 발달한 선진국으로 중국은 한국에 많은 호감을 갖고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워져야지 서로 자극하면서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두 나라가 멀어지면 서로에게 이익이 없고, 조선족이 가운데서 당하게 됩니다. 서로 이해해주는 아량을 보이면서 특히 젊은 청년들에 대해서는 잘못한 점이 있더라도 감싸주면서 안아줍시다.   아래 참고로 한국 언론에 대한 중국 북경의 정인갑 선생님께서 최근 동북아신문 에 올리신 글을 첨부하겠습니다. 본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올리는데, 혹시 잘못됐다면 정 선생님에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사후 정인갑 선생님께서 흔쾌히 허락해주셨습니다.)   (5)   *** 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님의 말씀대로 사회주의 언론과 자본주의 언론의 구별 점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국정도 서로 다르죠. 중국의 민주정치는 20년 전이나 10년 전에 비해서는 비교가 안 되게 큰 진척을 가져왔지만 한국을 따라가자면 아직 멀었고, 그렇다고 해서 조급하게 급진적으로 할 수도 없습니다.   13억 인구의 낙후한 대국이 민주정치를 급진적으로 내 밀면 하루 사이에 수습할 수 없는 대란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이미 몇 번 겪었습니다. 문화혁명을 하면서 한 가지 자유도 아니고 “4대 자유”까지 해봤습니다. 영국을 15년 내에 따라잡는다고 설쳤던 적까지 있습니다. 빨리 하기는커녕 오히려 몇 십 년 지연시켰지요. 너무 유치했지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세계 1/4 인구를 가진 중국에 혼란이 빚어지면 주변국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겠죠. 중국의 1/10 인구가 주변국으로 피란 간다고 한번 가정해보세요. 그 나라들이 편하겠습니까?   한국의 언론은 저도 좋아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국제관련 뉴스입니다. 한국과 중국은 이 문제에서 정 반댑니다. 다 문제가 있어요. 좋은 것만 말하는 것도 문제지요. 중국은 자국의 발전이 시급하고 타국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되도록 자극을 피면하고 좋은 관계를 확보하려는 반면 한국은 국제적 행사를 앞둔 마당에도 티베트사태를 제멋대로 왜곡 보도함으로써 독자와 시청자들의 반화감정을 유발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있어요.   그게 어떻게 대중의 목소립니까? 대중은 시사보도를 통해 중국과 티베트를 알게 됩니다. 왜곡보도를 해도 그런가 하고 믿게 되죠. 이번에도 중국에서 서방매체에 왜 왜곡보도를 하냐고 항의를 하니까 비로소 보도태도를 바꿨지 않았습니까? 한국 언론도 이 점에서 고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찬송가만 부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라는 겁니다. 직업도덕을 지키라는 얘기죠. 해야 할 보도를 못하게 하는 것도 문제시 되지만 거짓보도를 하는 것은 더 문제가 된다는 얘깁니다. 티베트독립주장시위가 왜 생깁니까? 사실을 거꾸로 보도하니까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한국도 참가하는 올림픽을 방해하고 전체 중국인의 자존심이 손상 받고 조급해서 안달 떨고 심지어 분노하는 결과까지 빚어지지 않았습니까? 무슨 좋은 점이 있습니까?   제가 무슨 중국정부를 "두둔"해서 어쩐다고는 생각지 말아주세요. 중한 양국에 다 불리하고 우리 민족에게도 좋은 점이 없고 해만 되니까 말하는 겁니다.   --"뉴욕조선족통신"의 글 “美 조선족 올림픽성공 바라지만 폭력시위는 반대!” 에 단 리플중에서 (2008/04/30)    
65    “민족과 혈통”문제에 대한 통신 댓글:  조회:5151  추천:178  2008-04-27
  “민족과 혈통”문제에 대한 통신   4월 22일 화요일, 오후 4시==***님의 내신 제목 : 박선생님에게   박문희선생님 안녕하세요? ***입니다. 이번의 토템사건으로 하여 토템에 관해 좀 이해하려하는데 니카 역시 토론의 장으로는 무리인것 같은 느낌이라 이렇게 주저주저하다가 오늘 멜을 띄웁니다. 선생님을 알기 전에 김월성 글에 반론을 제기한 선생님의 글을 저의 불로그에 저장해 둔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진 선생님을 잘 몰랐구요. 니카를 통해 우연히 반론 글 임자가 선생님임을 알고 또 서글서글한 성격이 좋아 인상이 상당히 좋습니다. 단지 저와 관점이 다른 곳이 있어 섭섭은 하지만...단지 저의 견해를 전달하고 싶어 적은 단상을 보내는데 가르침을 바랍니다. 그럼 아래에 서술체로 쓴것 그대로 보내며 양지를 바랍니다.   란 명제가 성립되는가? 의심스러워 인테넷을 뚜져 보았는데 민족의 정의를 백과사전에선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국어사전엔 라고 정의하고 있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민족은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혈통과 관계가 없는 개념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이란 또한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별되는 문화나 전통적인 것이 바로 혈육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한 지역에 뭉쳐 오랜 전통을 보존하고 내려온 집단이라면 상대적인 혈통관계 외엔 다른 어떤 형식을 찾아볼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역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요하다. 고대로 놓고 볼때 부동한 혈통이 부단히 뭉치여 생활할 수 있기에 사회가 생기고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상고시대로부터 고대인들이 무리지음으로서 문화를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를 공유하면서 서서히 부족, 종족 등등의 사회형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에 기초하여 최후엔 민족으로 구분될 수 있는 상대적인 고정적인 혈통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때문에 백과사전의 정의를 쉽게 풀이하자면 민족이란 혈육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문화군체로서 그 주체를 이루는 속성은 지역성이고 그 민족의 상징으로 되는 것은 곧 문자라고 정의를 확대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말하면 이런 정의가 외려 국어사전의 정의와 더 접근한다고 할수 있겠다. 하기에 한마디로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는 명제는 성립되지도 않고 우리의 인식을 잘못 오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으로 생각된다.   4월 26일 토요일, 오전 10시==나의 답신 제목 : ***님에게   ***님,    22일, 보내주신 이메일을 제때 받아보긴 했는데, 시간상 관계로 즉시 회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늦은대로 오늘 회답 드립니다.   “백과사전의 정의를 쉽게 풀이하자면 민족이란 혈육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문화군체로서 그 주체를 이루는 속성은 지역성이고 그 민족의 상징으로 되는 것은 곧 문자라고 정의를 확대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민족은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혈통과 관계가 없는 개념일 수는 없다.”   이 말씀 맞습니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민족이 혈통과 무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족이 혈통에 의해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이라 해서 다 같은 혈통이 아니고, 다른 민족이라 해서 혈통이 반드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혈통은 선천적인 것이고 민족은 후천적인 것이 되겠죠. 혈통은 타고난 것이고 민족은 일정한 문화환경속에서 형성됐다 이겁니다.   그러니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는 명제는 성립되지도 않고 우리의 인식을 잘못 오도할수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으로 생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으며 해로운 것입니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런 개념이 소속한 범주가 다릅니다. 민족은 역사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혈통은 생물학적 범주에 속합니다. 연구대상도 다릅니다. 민족의 연구대상은 인류역사의 발전행정에 공동한 지역, 언어, 경제생활과 문화심리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혈통이나 종족의 연구대상은 인류의 군체유전자 돌연변이의 결과입니다. 속성도 다릅니다. 민족이란 사회적인 것이고 혈통이나 종족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형성시간도 다르죠. 종족이나 혈통이 먼저고 민족은 후에 형성됐습니다. 특징도 다릅니다. 민족은 지역, 언어, 경제생활과 문화심리를 특징으로 하고 종족은 모발, 눈동자, 사지형태, 피부색깔과 얼굴의 구조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여기서 역사, 언어, 심리, 경제생활, 공동생활의 지역 등은 문화개념으로 모두 민족이 민족으로 형성되는데 있어서의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인종, 종족이나 혈통이라면 그것은 생물학, 유전학적이고 자연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상고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는 씨족은 혈연관계를 유대로 결성된 인간군체이고 부락은 혈연관계를 토대로 구성된 씨족군체이며 부락연맹은 혈연관계를 매개로 공동이익을 위해 형성된 여러개의 부락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씨족, 부락, 부락연맹은 혈연관계를 특징으로 하고 있고, 민족은 혈연관계를 초월해서 지역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같은 혈통의 사람들도 기나 긴 역사 시기에 하나의 민족으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중국이란 땅에서 왔다고 하면 몰잡아 한족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 민족의 중요한 내원으로 되는 동이족이 어디서 살았습니까? 중국(중원)의 동쪽에 사는 수많은 부족집단(민족이 아니라 민족의 내원이죠)을 모두 동이족으로 불렀는데, 거기서 일부는 북상, 동진해서 우리 민족을 형성했고,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월족, 묘족 등 민족으로 되었으며 일부는 중원 화족에 융해되었다가 한족으로 거듭났습니다.   여기서 지역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당시 남으로 내려갔던 동이족이 우리 민족으로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거나 북상, 동진한 동이족이 묘족으로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같은 혈통도 이처럼 여러 개의 민족으로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다른 혈통도 한 지역에 몰리고 함께 생활함으로 해서 한 민족으로 될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혈통집단이 부동한 민족으로 형성되는데는 문화적 요소가 작용하는것이지 혈통자체가 결정적 작용을 하는것은 아닌것입니다.   민족이 다 형성된 다음에도 다른 한 민족에 동화된 사례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 민족 박씨의 일부가 한족으로 된 사례가 그것입니다. 중국의 다른 민족의 일부가 우리 민족에 동화된 사례는 더욱 많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이 좋아서 바다를 건너와 우리 민족이 됐다면, 그게 우리 민족의 자랑이지 치욕이겠습니까? 또 그들은 우리의 할아버지가 아니란 말입니까?   신복룡 한국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다”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우리 민족의 혈통은 적어도 35개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건대 35개 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순수혈통론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만약 우리민족이 하나의 순수한 혈통을 이어받은 민족이라면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을까도 문젭니다. 이어져 왔다고 해도 저능아가 많은 아주 낙후한 민족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래 주소에 들러서 신복룡교수의 글을 참고 삼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ckywf.com/news_2007/board.php?board=f_netizen01&act=view&no=141   원시사회에서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그 내부에서 혈연관계를 유대로 한 씨족, 부락의 분화와 해체란 심각한 변화가 생겼는데 이로서 원시공동체의 혈연관계가 점차 페지되기에 이릅니다.   부동한 씨족, 부동한 부락 성원들의 서로 잡거하는 현상이 세대가 바뀌면 바뀔수록 더 심해져 결국 씨족, 부락의 혈연관계가 민족형성의 지연적 토대로 넘는데 조건을 마련해준 것이지요. 최초의 민족이 혈연관계에서 지연관계에로의 변화를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국가의 산생이겠죠. 국가의 산생으로 민족이란 이 신형의 공동체 형성이 완성되어 씨족과 부락을 완전히 대체해버린 것이죠.    민족이 형성되는데 여러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민족의 분화:“동원이류(同源異流)”라고도 하는데, 주로 원유민족의 분화로 새로운 민족이 생기는 역사현상을 말합니다.   민족의 조합:“이원동류(異源同流)”라고도 합니다. 주로 원유의 여러개 민족의 일부나 전부가 일체화 실현으로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는 현상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민족의 조합도 몇가지 현상으로 갈라 볼 수 있습니다.   민족의 동화현상--한 민족이 자기 원 민족의 특징을 상실하고 아주 다른 민족으로 되는 현상인데, 자연동화와 강박동화가 있습니다.   민족의 집합현상--여러개 민족이나 혹은 민족의 여러개 부분이 장기적인 교류와 서로간의 영향을 거쳐 점차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는 현상입니다.   민족의 일체화현상--여러 민족이 장기간의 발전과 교류가운데서 서로 대방의 문화를 흡수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서로에 융합되면서 점차 여러 가지 면에서 공동한 특징을 가지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문화나 전통적인 것이 바로 혈육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한 지역에 뭉쳐 오랜 전통을 보존하고 내려온 집단이라면 상대적인 혈통관계 외엔 다른 어떤 형식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틀립니다.    이미 말했지만 물론 민족이 혈통과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 민족 형성의 기초로 작용하는 혈통집단은 하나가 아닌 다수이며 다수의 혈통집단을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해 내는 과정에서는 흔히 여러 혈통집단들 사이에 중심성과 통합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지배적인 어떤 혈통집단이 존재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지배적인 혈통집단의 존재가 없이는 다수의 혈통집단들 사이에 문화적, 정치적 통일성과 일관성이 유지되기 힘들며, 그렇게 되면 민족의 형성이 어려워집니다. 우리 민족을 형성함에 있어서 그런 역할을 한 지배적 혈연집단은 부여족이나 고구려족으로 보는데, 그 부여와 고구려족은 또 예족과 맥족에서 왔다고 보는 견해가 목전에는 지배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혈통적인 핵심집단의 존재는 한 민족의 특징과 그 민족의 경계를 규정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이유는 국가가 특정한 어떤 혈통이나 종족 핵심의 기초 위에서 다양한 인적, 문화적 접합을 통해 민족을 구성해 내기 때문입니다. 현재 높은 동질성 수준을 보이는 민족도 처음에는 어떤 종족적핵심을 진원지로 삼은 확산적 민족 형성의 과정을 거쳐 동질성에 도달한 것이며, 확산적 민족 형성 과정을 주도한 것은 그 혈통적핵심에 의하여 지배되는 국가이죠.   한국 고려대 정호영교수의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역사적, 이론적 접근”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민족은 실제로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공유된 혈통이라는 믿음은 원래는 민족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어떤 혈통, 종족 핵심의 것이었고, 그것이 민족 형성 과정에서 다른 비지배적 혈통집단들에 속한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 국가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로 사회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혈통의 이미지는 영원한 운명 공동체이자 하나의 가족이라는 민족의 이미지로 확장되었습니다. 위에서 말했지만 우리 민족은 적어도 35개 혈통으로 구성된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우리는 한 피줄을 가진 민족이며 우리의 피줄에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민족은 실제로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임을 말해줍니다. 민족의 문화가 그런 믿음을 만들어 낸거죠.   일부에서는 인종적 요소들과 문화적 요소들을 결합시켜 민족을 이해하는 경향을 갖는데, 이런 입장은 자기 민족은 아주 오랜 과거부터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을 중심적 요소로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자기 민족을 근대적 구성물이 아니라 영원성의 실체, 역사적 유산으로 이해합니다.   민족이 전적으로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 사항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을 구성해 내는 실체란 점에서는 이런 입장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원을 고대에 두고서 민족에 원초성을 부여하여 그것을 영원성의 실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실상 민족은 근대로의 이행 과정 속에서 국가의 정치적 정당화라는 목적을 위해 국가에 의해 구성된 것이죠. 물론, 역사적, 문화적 유산으로서 인종적, 혈통적 기초에 바탕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민족의 형성에는 인종적, 혈통적 요소들이 필요하지만, 민족은 인종과 혈통을 넘어서는 실체인 것입니다.   민족과 혈통문제는 비교적 큰 문제이기 때문에 짧은 글로는 설명이 잘 될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 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6기까지 냈다가 이번 논쟁이 터져서 잠시 중단했는데, 순서도 바꾸어 원래 퍽 뒤에 써서 올리려 했던 민족과 혈통관련 글을 이번에 먼저 올릴 생각입니다. 요즘 시간 내서 정리해 조글로 미니홈에 올릴 생각이니, 오늘 이 회답글에 잘 설명이 안된 내용은 그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문 주시어 감사합니다.   박문희 드림   4월 27일 일요일, 오후 2시==***님의 내신 제목: 박선생님께   박문희 선생님 회답 멜 갑사합니다. 선생님 사업에 지장이 없기를 바랍니다. 소수민족으로 태여나서인지 민족이란 단어에 너무나 민감해 난해한 문제들을 스스로 해석하고 분석하려 노력했습니다. 선생님의 답변을 비록 한번 보고 이 멜을 작성하지만 선생님의 뜻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민족과 문화의 구분을 정확히 적어주셔 이 구분에 대해 더 한층 충분한 인식을 갖게 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글들을 더 찾아보고 이해 못할 것들이 있으면 역시 반문의 형식을 빌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려 하는데 괜찮겠지요? 하지만 저도 좀 더 깊은 파악이 있게 되면 선생님께 멜을 띄우지요. 허술히 선생님의 정력만 소비하게 될가 주저 됩니다. 선생님 갑사합니다.   주말에 즐겁기를 바라며...*** 올림 .................................................. 금방 전에 멜을 보내고 또 한번 읽고 또 멜을 띄우는데 다름 아니라 정성들여 작성해 주신 장편에 더 한층의 깊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만 하여 너무나 무례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칠수 없어서 입니다.   제가 문화, 민족, 혈통 등에 관한 개념이 명확하지 못하고 분산적인 인식밖에 갖고 있지 못한 전제하에서 체계적이지 못하여 갖게 된 결과임을 선생님이 체계적인 해석을 통하여 깨달았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럼 선생님 수고하십시요.  안녕히 *** 올림
64    동천(冬天) / 未堂 서 정 주 댓글:  조회:4292  추천:113  2008-04-17
                 동천(冬天)             未堂 서 정 주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한국 서지월시인의 글에서                 ∵∵∵∵∵  
63    “학술의 벽을 넘은 《중국조선족대개조론》”을 읽고서 댓글:  조회:6780  추천:75  2008-04-03
   “학술의 벽을 넘은 《중국조선족대개조론》”을 읽고서 박문희 오늘 [문화산맥]의 “열린마당”에서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의 글 “학술의 벽을 넘은《중국조선족대개조론》”(제목을 클릭하면 원문을 보실수 있습니다)을 읽었다. 조성일선생은 김문학이《대개조론》에서 “조선족사회 특히 연변 조선족의 문화, 의식구조, 생활양식, 행동양식 등을 폭넓게 다루면서 전면 부정의 메스를 댔다”면서 김문학의 언론 16條를 수집해 렬거했다. 두번은 빠른 속도로, 한번은 천천히 생각을 해보면서 16조를 모두 세번 읽었는데, 웬 일인지 나는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김문학이 제시한 문제가 대부분 정확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생각을 검증해보기 위해 그 16조를 원문 그대로 옮기고 나의 판단을 한마디식으로 첨부하니, 여러분께서 검증,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1)  우리의 조선족사회가 너무 추락되였기때문입니다. 이건 롱담이 아닙니다. 추락돼도 너무 추락되고 체질내부구조가 썩어도 한창 썩은게 아닙니다. 판단: 정확하다. (2) 흔들리다 흔들리다 남은건 우리 자신과 함께 바람과 같이 군무를 추고 우수수 노래하는 “가무의 민족”이란 텅빈 이미지뿐이다. 우리가 지금껏 창출한 문화, 새로운 문화는 갈대속같이 텅빈 외화내빈의 실속없는 제로상태다. 판단: 표현상 과분한데가 있지만 기본상 정확하다. (3) 조선족 사회의 우물안 개구리(사실은 올챙이)명창을 수집해 보았다. 나는 일시 귀국할 때마다 주위 조선족사회에서 들려오는 이런 왕나발소리를 대하면서 《20세기 조선족의 개구리명창》이란 책으로 편찬하면 재미있을거라는 아이디어까지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여가가 없으니까 혹시 독자 제현씨 가운데서 흥미있으면 한번 해보시는것도 어떨가 한다….공부 많이 못한 배속에 먹물이 없는 이 무지한 농민 아저씨는 그래도 한번쯤 그 욱하는 성격때문이라고 리해해주고 눈감아주고 용서해주자. 그리고 그 무지에 동정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도대체 먹물 많이 먹었다는 우리의 엘리트 지식인, 문화인들이 오히려 더 우물안 개구리 명창의 달인들이다. 판단: 정확하다. (4)  중국에서 인정받는 남영전, 한국에서 인정받는 김학철, 일본에서 인정받는 김문학과 같이 우리는 좀더 “우리”라는 울타리, 우물을 넘어서 보편적인 가치, 의식의 인물과 작품을 많이 키워야 한다. 하나 기이한 현상은 우리는 늘 “우리 조선족”이라는 울타리의식, “우물안 개구리”구조에서 리탈하지 못하는것이다. 우리문단의 작가, 문인들은 대부분 시야가 좁고 의식구조가 류사하다. 출신도 대부분 연변이며 대학도 연변대학 조문학부나 중앙민족대 조문학부라는 동일한 출신이 많다. 판단: 첫마디가 적절치 못한 외 나머지는 다 맞다. (5)  최근에 변경지역의 한 조선족대학 학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 대학의 학생들의 시대적 감수성이나 정보의식은 북경시내 거리에서 아이스크림 파는 로파만큼도 못하다.” 판단: 문장 발표당시 기본상 정확했을 것으로 보며 지금도 이런 현상이 있을 것으로 본다. (6) 중국인(한족)들이 조선족을 무어라고 비아냥거리는줄 아는가? “조선족이 중국사회에 공헌한 것은 랭면, 김치에 구육(狗肉), 인육(人肉)”이란다. 랭면과 김치, 개고기를 대표로 하는 음식문화는 알만한데 “인육(사람고기)”이란 웬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릴가? 좀 더 로골적으로 “조선족은 개고기와 사람고기를 함께 판다”고 비아냥거린다. 이래도 사람고기 판다는 얘기를 모른단 말인가? 바로 다른아닌 조선족의 녀성의 범람하는 매춘과 창녀를 빗댄 말이다. 판단: 과격한 표현이지만,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다. (7) 호스티스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내에서 매일 벌어지는 스캔들, 추한 뉴스들이다. 한집에 남편이 아니면 아내가 한국에 건너가 돈벌이하는 가정이 수백세대 되는데 바로 아빠트에 남은 조선족남녀들이 고독에 못이겨 회식을 하고 파티를 벌이다가 화통을 하고 불륜을 일삼듯하여 나중에는 집단 프리섹스까지 벌였다고 한다. 외국의 포르노 비디오를 같이 보면서 그 장면의 체위대로 프리섹스파티를 즐기면서 파렴치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스캔들을 두고 한족들은 또 뭐라고 비아냥거리는줄 아는가? 초우센주(肏鮮族)라고 한다. 아침이라는 그 “朝”자가 어느새 섹스한다는 “肏”자로 바뀐것이다. 과연 남도녀창(男盜女娼)의 조선족사회다. 옛날에 중국인들이 함께 배신하지 않음을 맹세할 때 “천주지멸(天誅地灭) 남도녀창(男盜女娼)”이라고 외웠다. 그런데 우리 조선족이 언제 남자는 남의 녀자를 도둑질하고 녀자는 서슴없이 벗어주는 창녀가 돼버린걸가. 판단: 과격하고 듣기 거북한 말이지만 잘못 지적한 말은 아니다. (8) 지금 조선족사회가 번영창성(繁榮昌盛)시대라고 누군가 롱담으로 말하듯이,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성적써비스를 하면서 매춘부나 창녀로 일하는 조선족녀자들이 조선족의 기반인 동북3성은 물론, 중국 남부지역으로, 연해도시에 대거 진출하여 북경에서 상해, 광주, 심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중국의 최남단인 해남도에까지 승승장구로 진출하고 있다. 상해에는 조선족호스티스만 해도 2000명은 충분히 된다는 말이 있다. 전국 대도시에 널린 호수티스군단은 수만명은 된다는 짐작도 있다. 이래서 조선족호스티스, 창녀군단을 중국사회에서는 “20세기 조선족의 위안부”라고도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해남도에서 대학교수로 있는 한족동창에게 들은 얘기지만 해남도에서도 조선족호스티스를 만났는데 서슴없이 매춘까지 강요했다면서 예전에 있던 조선족녀성의 이미지가 떨어졌어도 이렇게까지 떨어진줄은 몰랐다고 술회하는것이였다. 판단: 이 문장 발표당시 조선족녀성의 이미지 추락문제는 확실히 심각했었다. 그러나 외지에 진출한 우리의 일부 녀성들을 “창녀군단”으로 묘사하는데 대해서는 견결히 반대한다.    (9) 연변문단도 시기와 질투와 내홍이 심하다고 들었다. 손바닥만한 연변땅에서, 그것도 얼마 되지 않는 문인들끼리 단합해도 시원치 않겠는데 무슨 파요, 무슨 패요 하면서 끼리끼리 질시와 반목이 거듭된다고 한다. 한 유명한 산재지구의 문인은 “연변에 가면 어느 쪽과 어느 누구와 술 한잔 마셔도 서로 라이벌이 심하니까 조심스럽다”고 술회했다. 실제로 나는 연변밖의 문인들로부터 수많이 이런 고백을 들어왔고 내가 연변에서 직접 피부로 느끼기도 했다. 문인들의 이런 추악한 근성은 지어 해외에 나가서까지도 그 악마 같은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한다. 내가 일본에서 살면서 주위에 연변출신의 조선족이 모이고부터는 나의 조용한 삶을 깼다. 문인으로서의 나는 내 일에도 바빠서 숨을 못돌리겠는데 언제 누구하고 싸울 여가가 있겠는가! 또 내가 누구를 시기하고 미워할 추호의 리유도 없으며 내가 질투할만큼 재질있고 실적올린 문인은 적어도 내가 사는 주변에는 없다. 박사생이 석사도 못따낸 약자에게 배아플 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야말로 수양버들은 조용히 살고싶은데 괜히 옆에서 바람만 분주히 부는격이랄가. 그래서 덕분으로 나는 그 악명자한 “연변식내홍”을 실체험할수 있었다. 판단: 완전히 정확하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 문단은 희망이 없다. (10) 친애하는 조선족청중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김문학방송국 KMH입니다. 주파 0000KH로 일본에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연변극좌소아병원에 대한 체험리포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연변극좌소아마비병원을 잘 아시겠죠. 예예, 바로 연변극좌소아병원말입니다. 략칭으로 “연변극좌병원”이라고 하지요. 바로 연길시내의 극좌가 식인 1동10번지에 있는 건물입니다. 아직 한번도 안가보셨다구요? 물론 저도 오랫동안 해외서 살면서 소문은 좀씩 들었습니다만, 아직 가본적은 없어요.제가 뭐 거길 특별히 갈 일도 없고한데 왜 가겠습니까. 판단: 정확하다. 레닌이 비판한 “좌익소아병”이 우리 문단에 분명 존재한다. (11) 나는 《한국인이여 <상놈>이 되라》에서 한국인의 유치함을 빗대여 “9살짜리 미숙아”라고 혹평을 한적이 있다. 일찍 맥아더장군이 일본인의 유치성을 보고 일본인의 정신년령은 12살이라고 갈파한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의 정신년령은 얼마냐면 나는 7살반이라고 하고싶다.그것은 우리가 아직 한국인보다 많이 유치하고 또 유치하기때문이다. 7살반, 그래도 유치원수준은 넘어서지 않았는가! 소학교 1학년생의 정도는 되니까말이다. 판단: 기본상 정확하다. 그러나 평가가 너무 높다. 내보기엔 5살 반 정도밖에 돼 보이지 않는다. (12) 조선족의 의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농민의 촌닭의식을 리탈하지 못했다는것이다. 판단: 비슷하다고 본다. (13) 전국 제일의 문화수준이 높은 민족하는 식으로 수십년을 자랑했지만, 실제 주위의 평가는 정말 낮다. 그리고 해외동포사회에서의 조선족에 대한 평가도 솔직히 고백하여 조선족이 스스로 아주 높은것으로 착각하는 수평치 이하라는 것이 결론이다. 내가 보아도 재일 동포사회나 재미 동포사회에 비해도 그 갭은 100년은 잡아야 할것이다. 판단: 정확하다. 단 마지막 한마디는 지나친 것 같다. (14) 국제망신은 우리 조선족이 맡아놓고 한다. 왼팔에는 한국, 오른팔에는 조선, 고국의 동포를 다 팔아먹는건 조선족밖에 있을가? 그러고 보면 우린 약소민족이 아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고상하고 인도적인가! 우리는 우리의 고국에서도 못해낸 사상공전의 추악의 기록의 영광을 따내고있다. 판단: 완전히 정확하다. (15) 흥미로운 작은 “발견”이다. 팬티입은 원숭이는 엄청난 눈치의 천재라는것이다. 항상 두눈이 팽글팽글 돌고 두 귀를 세우고 주인과 주위의 구경군의 눈치를 살피면서 연기를 해간다. 세상만물가운데서 원숭이만큼 눈치의 “센스”가 고도로 발달된 족속은 없을것이라고 나는 늘 혀를 찼다. 어쩐지 아이러니컬하게 나는 팬티입은 원숭이의 모습에서 우리 조선족의 모습을 보는듯했다. 조선민족만큼 눈치빠른 민족이 더 있을가? 판단: 옳고그름을 떠나 속된 말이여서 비판가치마저 없다. (16) 우리는 100년동안 한번도 공동체의 일체감을 이룩한적 없이 흩어진 모래의 상태로 살아왔다. 그러니까 결국 여전히 우리는 몸에 배인 고추장같이 매운 개인적 리기주의와 돈을 추구하는것밖에 없는 민족이 된것이다. 판단: 지나친 말이지만 충분한 주의를 돌려야 할 바이다. 조성일회장은 김문학의 언론을 렬거하고나서 “김문학이 고백하기를 ‘나는 부득이하게 그리고 본의 아니게 이렇게 조선족을 비판한 글을 쓰게 되였다’고 하는데 본의 아니라면 누구의 ‘지령’인가?”고 질문하면서 비판의 예봉을 슬쩍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 하고있다. 우리 민족의 휘황한 성과를 칭송하는 글도 아니고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비평문에서 무엇때문에 상술한 문제들을 꼬집어서는 안되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4월3일)
62    헌신정신이 낳은 빛나는 업적 댓글:  조회:4403  추천:83  2008-03-25
  헌신정신이 낳은 빛나는 업적   --연변피부병예방퇴치원 의무일군들에 대한 이야기   박문희   동무들이 노력에 박차를 가하면서 본세기말까지 우리 나라 에서의 문둥병의 기본적소멸을 위해 힘쓰기를 바랍니다.                                                                                    -----조자양       문둥병!   지지리 2,500여년이란 긴긴 세월 자자히 악명을 남겼던 문둥병은 인젠 그 위풍을 아주 꺾고 각일각 최후소멸기에 들어서고있다.   우리 성을 보면 1952년부터 환자 도합 1,071명을 발견하였는데 치료를 거쳐 이미 그 대부분이 완치되고 지금 남아 치료받고있는 환자가 근근 28명뿐이다.   지난 1월 31일,중국의 첫 문둥절에 즈음하여 룡정현 투도구진에서 소집된 우리 성 경축모임에서 1990년 전에 우리 성에서는 문둥병을 기본상 소멸할 수 있다고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사진설명] 사업하고있는 원장 진오영. 35년래 연변피부병예방퇴치원은 최초의 7명 일군에 수술칼 몇 자루밖에 없던 작은 병원으로부터 80명 종업원에 비교적 구전한 의료시설을 갖춘 큰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문둥병 소멸!   문둥병소멸사에서 이는 두말할 것 없이 큰 경사이다. 이 거창한 사업에서 세운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과 방역일군들의 위훈을 세상 사람들은 잊지 않을 것이다.   ( 1 ) 1952년 12월 15일, 연길현 투도구역에 갓 내린 웬 젊은이가 울부짖는 서북풍과 씨름하며 골안으로 통한 오솔길을 부지런히 걷고있었다. 성정부의 결정에 따라 이곳 산골안에 세워진 문둥병환자료양소로 걸음을 재우치고 있는 것이였다. 그가 바로 지금 이 병원의 원장으로 사업하고있는 진오영이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무살이였다.   며칠전 전근령을 받아쥔 그는 흠칫 놀랐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갓 성립 위생학교를 마치고 성인민병원에 배치된 지 몇 달 안되는 자기한테 말만 들어도 질겁을 할 문동병과 씨름하라는 전근령이 떨어질 줄은 애초에 생각지도 못했던 그였으니 말이다. 두려움이 앞설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문둥이를 보지는 못했어도 항간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문둥병에만 걸리면 눈, 귀, 코며 팔이며 다리며 다 썩어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옛날에는 문둥이를 발견만 하면 불태워 죽였다고 하지 않는가!   가느냐, 마느냐? 진오영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사상투쟁은 치렬했다.   나중에 이 나젊은 공청단원은 마침내 자기를 호되게 꾸짖기 시작했다.   “비겁쟁이! 너의 몇몇 동창생들을 봐라, 그들은 조선전쟁터에 나가 목숨마저 바치고 있다. 헌데 너는?”   가야 한다. 당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결론이였다. 구태현 농촌에서 자라나 당의 덕분에 의학공부를 한 그는 당의 명령을 거역하고 싶잖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너 그리로 갔다가 문둥병에 옮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일생을 망칠려구 그러느냐, 응? 성병원에 남지 못하겠거든 이 에미와 함께 집에서 농사나 짓자. 거기론 못 간다!”   “어머니, 전 꼭 주의할 거예요. 시름 놓으세요!”   눈굽을 자꾸 찍는 어머니를 장밤 설복하고 결연히 이 길을 떠나온 그였다.   그가 배낭을 끌러놓은 이곳은 전등도 못 들어온 곳인데 밤이면 승냥이 따위가 자주 출몰하였었다. 여기서 그는 첫패의 환자 셋을 맞았다. 그들은 모두 중환자들이여서 얼굴이 무섭게 변형된 데다가 몸의 여러 부위가 심하게 썩고 있었다.   환자를 접한 진오영은 온 몸에 소름이 쪽 끼쳤다. 이게 어디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당금이라도 이 자리를 뜨고싶었다.   그러나 첫패의 일군 7명중 의사란 오로지 그 한사람 뿐! 황차 환자를 치료하는것은 의사의 천직인데 고통에 모대기는 환자를 내버리고 어찌 뺑소니를 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마음을 모질게 도슬러먹었다. 격리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천이 어께까지 내리드리운 모자를 쓰고 고무수갑을 끼고 두툼한 마스크를 끼고 방풍안경까지 썼다. 흡사 반세균전차림새였다. 그때엔 아직 문둥병 치료약이 나오지 않았는지라 치료라야 림시 구급이나 하는 정도였다. 구급을 끝내고 나오면 밖에서 대기하고있던, 전문 그의 방역을 맡은 방역원이 분사기로 그의 일신에 소독약을 들씌우군 했다.   환자들과 자주 접촉하는 가운데서 진오영은 차츰 그들의 기막힌 신세를 알게 되었다.   낡은 사회에서 문둥병환자들은 생존권리마저 박탈당했었다. 부모형제처자--친인들마저 무고한 환자를 집에서 쫓아내는 판이니 그들더러 어찌 살아나가란 말인가!   류춘성이란 환자는 자기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이 발각되여 사회의 무자비한 버림을 받을가봐 병으로 오그라붙은 손가락을 식칼로 찍어버리고 피눈물 겨운 류랑생활을 시작했다. 낮이면 거리를 떠돌며 문전걸식하였고 밤이면 뉘집 풀더미속에 기여들어가 새우잠을 잤다. 영원한 안락처를 찾아 송화강에 몸을 던진 적도 있었다. 선량한 사람들이 그를 강기슭에 끌어냈었다. 정부에서 그를 찾아내여 이 병원에 보내오자 그는 자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공산당과 인민정부에 감지덕지했다.   문둥병환자들에 대한 감정은 하루하루 깊어만 갔다. 그는 문둥병환자들을 친인처럼 대해주면서 자기의 모든 정열을 깡그리 그들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리론학습과 의료실천을 거쳐 그는 문둥병이 이전에 듣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병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2 )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상급에서는 리극근, 박성관 등 의무일군들을 륙속 병원에 파견해왔다. 그들 가운데는 자각적인 용사들도 적지 않았다.   연변의학원 61년도 졸업생 최일범은 “죽기를 겁낸다면 병사가 되어 무엇하며 환자를 겁낸다면 의사가 되어 무엇하랴”--이런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결연히 자기의 지망에“문둥병원”이라고 똑똑히 써넣었다.   의료일군들이 환자를 회진하고있다. 다년래 그들은 근 800명 문둥병환자들의 병을 떼여 우리 성에서의 문둥병소멸을 위해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현재 치료를 받고있는 환자는 모두 28명인데 그중 17명은 자기 집에서 치료를 접수하고있다. 의료일군들은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약을 문전 송달해 주고 신체검사도 해주고있다.   이를 안 친척들과 벗들은 그의 심정을 도시 리해하지를 못했다.   “넌 대학생이자 당당한 반주석인데 왜 갈 곳 없어 그런델 가?너 오유나 범한 게 아니냐?”   “거기 가면 너두 문둥병 환자가 된다. 가지 말라!”   “......”   하지만 그는 의연히 자기의 심장이 가리키는 대로 이불짐을 싸가지고 이 병원에 왔다. 화룡현 현장으로 있던 그의 장인이 일자리를 구해주겠으니 그더러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그는 먹은 마음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토개간부의 후대로 자라난 리금덕은 연변위생학교 의사반 단지부서기였다.1964년 여름 졸업분배가 시작되자 그는 학교 당조직에 선뜻이 신청서를 내고 감옥보다도 더 무섭다는 이곳으로 의젓이 찾아왔다.   1965년 8월, 연변위생학교 호사반 공부를 마친 김금자는 문둥병원에 올 것을 탄원해 나섰다. 18세 나어린 처녀의 거동은 전교를 진동했다. 왜 안 그러랴. 당시 의학전업 졸업생들에게는 분배되여 가기를 제일 꺼리는 곳이 세곳 있었는데 그곳인즉 정신병원, 결핵병원, 문둥병원이였다. 그 가운데서도 문둥병원은 더욱 못갈 곳으로 치부되고있었다. 하여 적지 않은 학생들은 꽃다운 처녀의 앞날을 위해 애석해했다.   이 병원에 온후 그는 한때 마음이 뒤흔들려 남몰래 눈물도 흘렸었다. 일손을 잡아 한달만에 훈춘에 있는 집으로 갔다가 집식구들의 살틀한 말 한마디 못 듣고 포위공격만 받았다. 언니네 집으로 찾아갔더니 아예 집으로 들여놓지조차 않았다. 아, 그때 애어린 그녀의 가슴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던가!   ......   그들은 모두다 사회의 무서운 압력을 이겨나온 강자들이였다.   사회의 각종압력이 닥쳐올 때마다 우리의 문둥병의료일군들은 얼마나 웨치고싶어 했던가! “문둥병환자들에게 인도주이를 베풀라! 전 사회가 문둥병 환자들을 동정하라! 문둥병의료일군들을 존중하라!”고.   현대의학실천은 문둥병은 예방할 수도 퇴치할 수도 있어 두려울 것 없다는 것을 충분한 사실로 똑똑히 증명하였다. 문둥병은 불치지증이 아니다. 치료를 거친 문둥병환자는 문둥병전염능력을 상실한다. 98%이상의 건강한 사람들은 다 문둥병에 대한 자연면역능력을 갖고있다. 2%에 속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병에 쉽사리 전염되는 것이 아니다. 해방 이래 전국적으로 약 50만명의 문둥병환자들이 발견되였는데 치료를 거쳐 이미 대부분이 나았다. 초기 환자는 치료를 거쳐 후유증마저 남기지 않을수 있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은 많은 환자들은 병을 뗀 후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낳아 무사히 기르고있다. 전국의 수많은 문둥병예방퇴치일군 가운데 수십년래 문둥병에 전염된 사람이 하나도 나지지 않았다......   사실이 이처럼 명백하였지만 낡은 사회가 남겨놓은 편견은 여전히 그처럼 완고히 사회상에서 살아숨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문둥병환자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그들을 기시하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둥병환자들에 대한 공포와 기시를 억울하게도 문둥병의 소멸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는 일군들에게까지 전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편견이란 문둥병자체보다도 더 질기고 무서운 것이였다.   우리의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은 이 모든 것을 웅숭깊은 가슴속에 깊숙이 파묻어두고 묵묵히 묵묵히 환자들에 대한 인도주의 직책을 드팀없이 수행해나가고있다.   ( 3 )   자기의 병이 문둥병이라는 것을 아는 환자들은 대체로 문둥병원을 찾는 실례가 매우 드물었다. 현대의학에 대한 털끝만치의 료해도 없는 그들은 병원에 대해서는 공포감을 가지면서 자신을 한사코 류리방황, 가정파산, 종신페질의 구렁텅이에로 밀어넣고있었다.   그들을 재난속에서 구원하려면, 그들로 인한 문둥병의 전파만연을 통제하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부분의 환자들을 찾아내여 치료해야만 하였다.   1973년도부터 이 병원에서는 전 성 범위내에서 문둥병 보편조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복잡하고도 간고한 사업이였다. 19만 평방키로메터 땅덩어리우의 2,000여만 인구속에서 수효가 극히 적고 고도로 분산된 문둥병환자들을 모조리 찾아낸다는 것은 실로 수풀속에서 바늘 찾듯, 백사장에서 깨알 줏듯 아름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리극근, 박성관, 최일범, 리금덕 등 수십명 예방퇴치 일군들은 기와 패를 나누어 각 지구에 내려가 당지 방역기구의 배합밑에 골간 강습반을 꾸리고 군중을 발동하면서 넓은 평야구릉으로부터 깊은 심산궁곡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참빗질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당총지서기이며 당시 병원예방퇴치과에서 주임사업을 하고있던 리금덕은 구태현 농촌에서 “참빗질”하던 중 영성탄광구역의 한 구차한 집에서 문둥병 후기환자 하나를 발견하였다. 환자는 스물셋에 나는 젊은 청년이였는데 그는 쬐꼬만 뙤창 하나를 낸 네댓 평방메터짜리 차겁고 어둑침침한 고방에 쓸쓸히 갇혀있었다. 알아보니 그의 부모들은 전등도, 까래도 없는 감방같은 고방에 병든 아들을 5년 동안이나 가두어 왔었다!   왜 병원에 보내지 않는가고 물으니 그의 부모들은 공포에 떨며 “약도 안 드는 죽을병인데 거저 집에서 편히 죽게 놔 두시우!”하고 애걸하는 것이였다.   환자도 덴겁한 눈을 해가지고“병원엔 안 가겠어요. 죽어도 제집에서 편히 죽겠어요!”하고 연신 빌었다.   분명, 그는 세상과 격리된 이 음침한 고방에서 남몰래 조용히 죽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분명, 그들은 문둥병을 불치의 병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문둥병원을 환자를 참혹히 학대하는 감옥보다도 더 무서운 곳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수없는 이 정경은 문둥병환자를 한사람도 빠짐없이 찾아내고야 말리라는 리금덕의 결심을 더욱더 굳혀주었다.   [사진설명]이 병원에는 지금 치료를 받고있는 환자 11명, 병은 나았지만 갈 곳이 없어 계속 남아있는 환자 70명이 있다. 그들은 모두다 의료호리일군들의 살틀한 보살핌은 받고있다. 사진은 환자의 머리를 빗겨주는 호사 유채금과 호사장 김금자(오른쪽).   그는 로고를 무릅쓰고 원정을 시작했다. 하루에 사오십리길 걷는 것 쯤은 문앞마당 지나는 것으로 치부했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선전을 하고 군중을 발동했다. 선전효과를 높이고자 늘 환자네 집에서 먹고자고 했다. 여름엔 길가의 초저녁 모기무리에 얼굴을 뜯기기가 일쑤였고 겨울엔 초라한 농가집 랭돌방에서 외투 쓰고 쪽잠자기가 일쑤였다. 환자가 조사일군이 온다는 낌새를 채고 도망질을 칠 때면 한 벌 할 걸음을 세번 네번 해야 했다. 제공받은 정보가 틀려서 수십리 걸음이 허탕으로 돌아갈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드팀없는 목표는 아흔아홉번 허탕치는 건 별문제여도 환자 한사람을 놓쳐선 절대 안 된다는 것이였다.   이처럼 천신만고를 다하면서 이 병원의 일군들은 전 성 47개현, 시에서 도합 500여명의 문둥병 환자를 찾아냈다. 500명! 극히 평범한 이 수자에는 그들이 우리 성 에서의 문둥병의 전파만연을 방지하기 위해 엮은 비범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 4 )   환자수가 급격히 불어감에 따라 의사, 호사들의 사업량도 크게 늘어났다.   급한 환자가 들이닥칠 때면 진오영과 그의 동료들은 늘 격리복도 입지 못한채 환자구급에 서두르군 했다.   수술환자가 수혈이 수요되면 그들은 서슴없이 자기들의 피를 뽑아 환자에게 바쳤다. 새로운 약종을 찾아 문둥병 치료효과를 높이고자 진오영, 최일범 등 동지들은 주야분전하여 , , 등 주사액을 만들어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하여 그들은 만들어낸 약들을 우선 자기들의 몸에 실험해보군 했다. 어느 한차례의 시험에서 진오영은 중독되여 몇 달 동안 입원치료까지 받았었다.   어느 날 의사 박성관이 급보를 받고 천방지축 병실로 뛰여가 보니 환자 황옥란이 후두수종으로 호흡이 막혀 거의 죽어가고있었다. 후두수술을 해본 적 없는 그였지만 당금 죽어가는 환자를 두고 유예할 겨를도 없었었다. 그는 주저없이 수술칼을 집어들었다. 목을 어이고 기관지를 쨌다. 불현듯 막힌 구멍이 터지면서 그의 얼굴에 피가래를 쫙 들씌워 놓았다. 처음 하는 수술을 무사히 끝낸 뒤에도 그는 도저히 시름이 놓이지 않아 환자 곁을 꼬박 일주일간 떠나지 않았다.   의사 최일범은 대동란 기간에도 시종 일터를 고수하면서 문둥병 치료와 연구사업에 전심하였다. 70년대 중기부터 그는 문둥병 의약정보들을 애써 수집하면서 선후로 , 등 약들을 치료에 도입하고 수년간씩 림상관찰을 진행하여 치료효률을 크게 높이였다. 80년대에 들어와서 세계위생조직에서 련합화학치료방법을 제창하자 그는 또 동료들과 함께 환자들에게 을 8개월간 들이댔는데 역시 리상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환자들에 대한 호리사업도 간거했다. 김금자, 유채금, 방분옥 등 호사들은 각종 수술후의 처치작업을 정성껏 하는 외 일상적인 생활호리까지 착실히 하면서 환자들을 빈틈없이 보살폈다.   한번은 왕청에서 종류형 문둥병환자를 보내왔다. 집에서 쫓겨나 거지질을 했던 이 녀성환자를 보니 썩은 삼검불 같은 머리엔 이가 우글거렸고 옷을 벗기니 이가 막 덩이져 떨어졌다. 기가 막혔다. 금자는 동정의 눈물을 머금고 그 환자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머리도 손수 깎아주고 이도 말끔히 잡아주었다. 사람대접을 생전 처음 받아보는 그 환자는 거저 감격의 눈물만 하염없이 쏟을 뿐이였다.   한번은 온 몸이 진창이 된 중병환자가 들어왔다. 금자는 매일 환자에게 약을 갈아주고 몸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손톱, 발톱을 깎아주는 것마저 잊지 않았다. 이렇게 꼬박 석달 동안 환자를 호리해주었다. 림종시에 환자는 눈귀를 적시며 가느다란 소리로, 그러나 분명 이렇게 말하였다.   “전 죽어도 선생님을 잊지 못하겠어요!”   ......   아, 진오영을 비롯한 우리의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의 헌신적 처사에서 문둥병환자들이 받아않은 감동은 실로 아름차리만치 컸다!   * * * * * *   지난 35년간 성위, 성정부와 연변주위, 주정부에서는 줄곧 이 병원에 관심을 돌려왔다.   당과 정부에서는 문둥병 예방퇴치사업에서 대공을 세운 위훈자들에게 응분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 병원은 여러 차례 성, 주의 선진단위로 표창 받았고 이 병원의 수십명 일군들도 각급 선진개인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그중 원장 진오영, 진찰부 주임 최일범 등은 전국모범의 영광을 안아왔다.   진오영원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1990년 전에 문둥병을 기본상 소멸할 신심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병원에서는 이미 변화된 형세에 좇아서 우리의 사업중심을 문둥병에 대한 예방퇴치로부터 피부병에 대한 예방퇴치에로 옮길 준비를 하고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세계적 수수께끼로 되고있는 에이즈병에 대해서도 연구하려 합니다. 문둥병을 대처할 때와 같은 헌신정신으로 말입니다!”   헌신정신! 천신만고로 사업의 승리를 바꾸어온 이들은 헌신정신의 함의를 가장 잘 안다. 그들이 인류의 건강과 무병장수를 위하여 새로운 전투구상을 무르익힐 때 그 리면에 안받침되여 있는 것도 다름 아닌 헌신정신이리라!   [길림신문] 198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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