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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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정신이 낳은 빛나는 업적
2008년 03월 25일 03시 06분  조회:4492  추천:83  작성자: 박문희
 
헌신정신이 낳은 빛나는 업적

 
--연변피부병예방퇴치원 의무일군들에 대한 이야기
 
박문희


 
동무들이 노력에 박차를 가하면서 본세기말까지 우리 나라

에서의 문둥병의 기본적소멸을 위해 힘쓰기를 바랍니다.


                                                                                   -----조자양

 
 

 
문둥병!
 
지지리 2,500여년이란 긴긴 세월 자자히 악명을 남겼던 문둥병은 인젠 그 위풍을 아주 꺾고 각일각 최후소멸기에 들어서고있다.
 
우리 성을 보면 1952년부터 환자 도합 1,071명을 발견하였는데 치료를 거쳐 이미 그 대부분이 완치되고 지금 남아 치료받고있는 환자가 근근 28명뿐이다.
 
지난 1월 31일,중국의 첫 문둥절에 즈음하여 룡정현 투도구진에서 소집된 우리 성 경축모임에서 1990년 전에 우리 성에서는 문둥병을 기본상 소멸할 수 있다고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사진설명] 사업하고있는 원장 진오영. 35년래 연변피부병예방퇴치원은 최초의 7명 일군에 수술칼 몇 자루밖에 없던 작은 병원으로부터 80명 종업원에 비교적 구전한 의료시설을 갖춘 큰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문둥병 소멸!
 
문둥병소멸사에서 이는 두말할 것 없이 큰 경사이다. 이 거창한 사업에서 세운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과 방역일군들의 위훈을 세상 사람들은 잊지 않을 것이다.

 
( 1 )

1952년 12월 15일, 연길현 투도구역에 갓 내린 웬 젊은이가 울부짖는 서북풍과 씨름하며 골안으로 통한 오솔길을 부지런히 걷고있었다. 성정부의 결정에 따라 이곳 산골안에 세워진 문둥병환자료양소로 걸음을 재우치고 있는 것이였다. 그가 바로 지금 이 병원의 원장으로 사업하고있는 진오영이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무살이였다.
 
며칠전 전근령을 받아쥔 그는 흠칫 놀랐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갓 성립 위생학교를 마치고 성인민병원에 배치된 지 몇 달 안되는 자기한테 말만 들어도 질겁을 할 문동병과 씨름하라는 전근령이 떨어질 줄은 애초에 생각지도 못했던 그였으니 말이다. 두려움이 앞설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문둥이를 보지는 못했어도 항간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문둥병에만 걸리면 눈, 귀, 코며 팔이며 다리며 다 썩어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옛날에는 문둥이를 발견만 하면 불태워 죽였다고 하지 않는가!
 
가느냐, 마느냐? 진오영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사상투쟁은 치렬했다.
 
나중에 이 나젊은 공청단원은 마침내 자기를 호되게 꾸짖기 시작했다.
 
“비겁쟁이! 너의 몇몇 동창생들을 봐라, 그들은 조선전쟁터에 나가 목숨마저 바치고 있다. 헌데 너는?”
 
가야 한다. 당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결론이였다. 구태현 농촌에서 자라나 당의 덕분에 의학공부를 한 그는 당의 명령을 거역하고 싶잖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너 그리로 갔다가 문둥병에 옮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일생을 망칠려구 그러느냐, 응? 성병원에 남지 못하겠거든 이 에미와 함께 집에서 농사나 짓자. 거기론 못 간다!”
 
“어머니, 전 꼭 주의할 거예요. 시름 놓으세요!”
 
눈굽을 자꾸 찍는 어머니를 장밤 설복하고 결연히 이 길을 떠나온 그였다.
 
그가 배낭을 끌러놓은 이곳은 전등도 못 들어온 곳인데 밤이면 승냥이 따위가 자주 출몰하였었다. 여기서 그는 첫패의 환자 셋을 맞았다. 그들은 모두 중환자들이여서 얼굴이 무섭게 변형된 데다가 몸의 여러 부위가 심하게 썩고 있었다.
 
환자를 접한 진오영은 온 몸에 소름이 쪽 끼쳤다. 이게 어디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당금이라도 이 자리를 뜨고싶었다.
 
그러나 첫패의 일군 7명중 의사란 오로지 그 한사람 뿐! 황차 환자를 치료하는것은 의사의 천직인데 고통에 모대기는 환자를 내버리고 어찌 뺑소니를 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마음을 모질게 도슬러먹었다. 격리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천이 어께까지 내리드리운 모자를 쓰고 고무수갑을 끼고 두툼한 마스크를 끼고 방풍안경까지 썼다. 흡사 반세균전차림새였다. 그때엔 아직 문둥병 치료약이 나오지 않았는지라 치료라야 림시 구급이나 하는 정도였다. 구급을 끝내고 나오면 밖에서 대기하고있던, 전문 그의 방역을 맡은 방역원이 분사기로 그의 일신에 소독약을 들씌우군 했다.
 
환자들과 자주 접촉하는 가운데서 진오영은 차츰 그들의 기막힌 신세를 알게 되었다.
 
낡은 사회에서 문둥병환자들은 생존권리마저 박탈당했었다. 부모형제처자--친인들마저 무고한 환자를 집에서 쫓아내는 판이니 그들더러 어찌 살아나가란 말인가!
 
류춘성이란 환자는 자기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이 발각되여 사회의 무자비한 버림을 받을가봐 병으로 오그라붙은 손가락을 식칼로 찍어버리고 피눈물 겨운 류랑생활을 시작했다. 낮이면 거리를 떠돌며 문전걸식하였고 밤이면 뉘집 풀더미속에 기여들어가 새우잠을 잤다. 영원한 안락처를 찾아 송화강에 몸을 던진 적도 있었다. 선량한 사람들이 그를 강기슭에 끌어냈었다. 정부에서 그를 찾아내여 이 병원에 보내오자 그는 자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공산당과 인민정부에 감지덕지했다.
 
문둥병환자들에 대한 감정은 하루하루 깊어만 갔다. 그는 문둥병환자들을 친인처럼 대해주면서 자기의 모든 정열을 깡그리 그들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리론학습과 의료실천을 거쳐 그는 문둥병이 이전에 듣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병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2 )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상급에서는 리극근, 박성관 등 의무일군들을 륙속 병원에 파견해왔다. 그들 가운데는 자각적인 용사들도 적지 않았다.
 
연변의학원 61년도 졸업생 최일범은 “죽기를 겁낸다면 병사가 되어 무엇하며 환자를 겁낸다면 의사가 되어 무엇하랴”--이런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결연히 자기의 지망에“문둥병원”이라고 똑똑히 써넣었다.
 
의료일군들이 환자를 회진하고있다. 다년래 그들은 근 800명 문둥병환자들의 병을 떼여 우리 성에서의 문둥병소멸을 위해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현재 치료를 받고있는 환자는 모두 28명인데 그중 17명은 자기 집에서 치료를 접수하고있다. 의료일군들은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약을 문전 송달해 주고 신체검사도 해주고있다.
 
이를 안 친척들과 벗들은 그의 심정을 도시 리해하지를 못했다.
 
“넌 대학생이자 당당한 반주석인데 왜 갈 곳 없어 그런델 가?너 오유나 범한 게 아니냐?”
 
“거기 가면 너두 문둥병 환자가 된다. 가지 말라!”
 
“......”
 
하지만 그는 의연히 자기의 심장이 가리키는 대로 이불짐을 싸가지고 이 병원에 왔다. 화룡현 현장으로 있던 그의 장인이 일자리를 구해주겠으니 그더러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그는 먹은 마음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토개간부의 후대로 자라난 리금덕은 연변위생학교 의사반 단지부서기였다.1964년 여름 졸업분배가 시작되자 그는 학교 당조직에 선뜻이 신청서를 내고 감옥보다도 더 무섭다는 이곳으로 의젓이 찾아왔다.
 
1965년 8월, 연변위생학교 호사반 공부를 마친 김금자는 문둥병원에 올 것을 탄원해 나섰다. 18세 나어린 처녀의 거동은 전교를 진동했다. 왜 안 그러랴. 당시 의학전업 졸업생들에게는 분배되여 가기를 제일 꺼리는 곳이 세곳 있었는데 그곳인즉 정신병원, 결핵병원, 문둥병원이였다. 그 가운데서도 문둥병원은 더욱 못갈 곳으로 치부되고있었다. 하여 적지 않은 학생들은 꽃다운 처녀의 앞날을 위해 애석해했다.
 
이 병원에 온후 그는 한때 마음이 뒤흔들려 남몰래 눈물도 흘렸었다. 일손을 잡아 한달만에 훈춘에 있는 집으로 갔다가 집식구들의 살틀한 말 한마디 못 듣고 포위공격만 받았다. 언니네 집으로 찾아갔더니 아예 집으로 들여놓지조차 않았다. 아, 그때 애어린 그녀의 가슴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던가!
 
......
 
그들은 모두다 사회의 무서운 압력을 이겨나온 강자들이였다.
 
사회의 각종압력이 닥쳐올 때마다 우리의 문둥병의료일군들은 얼마나 웨치고싶어 했던가! “문둥병환자들에게 인도주이를 베풀라! 전 사회가 문둥병 환자들을 동정하라! 문둥병의료일군들을 존중하라!”고.
 
현대의학실천은 문둥병은 예방할 수도 퇴치할 수도 있어 두려울 것 없다는 것을 충분한 사실로 똑똑히 증명하였다. 문둥병은 불치지증이 아니다. 치료를 거친 문둥병환자는 문둥병전염능력을 상실한다. 98%이상의 건강한 사람들은 다 문둥병에 대한 자연면역능력을 갖고있다. 2%에 속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병에 쉽사리 전염되는 것이 아니다. 해방 이래 전국적으로 약 50만명의 문둥병환자들이 발견되였는데 치료를 거쳐 이미 대부분이 나았다. 초기 환자는 치료를 거쳐 후유증마저 남기지 않을수 있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은 많은 환자들은 병을 뗀 후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낳아 무사히 기르고있다. 전국의 수많은 문둥병예방퇴치일군 가운데 수십년래 문둥병에 전염된 사람이 하나도 나지지 않았다......
 
사실이 이처럼 명백하였지만 낡은 사회가 남겨놓은 편견은 여전히 그처럼 완고히 사회상에서 살아숨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문둥병환자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그들을 기시하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둥병환자들에 대한 공포와 기시를 억울하게도 문둥병의 소멸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는 일군들에게까지 전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편견이란 문둥병자체보다도 더 질기고 무서운 것이였다.
 
우리의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은 이 모든 것을 웅숭깊은 가슴속에 깊숙이 파묻어두고 묵묵히 묵묵히 환자들에 대한 인도주의 직책을 드팀없이 수행해나가고있다.

 
( 3 )
 
자기의 병이 문둥병이라는 것을 아는 환자들은 대체로 문둥병원을 찾는 실례가 매우 드물었다. 현대의학에 대한 털끝만치의 료해도 없는 그들은 병원에 대해서는 공포감을 가지면서 자신을 한사코 류리방황, 가정파산, 종신페질의 구렁텅이에로 밀어넣고있었다.
 
그들을 재난속에서 구원하려면, 그들로 인한 문둥병의 전파만연을 통제하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부분의 환자들을 찾아내여 치료해야만 하였다.
 
1973년도부터 이 병원에서는 전 성 범위내에서 문둥병 보편조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복잡하고도 간고한 사업이였다. 19만 평방키로메터 땅덩어리우의 2,000여만 인구속에서 수효가 극히 적고 고도로 분산된 문둥병환자들을 모조리 찾아낸다는 것은 실로 수풀속에서 바늘 찾듯, 백사장에서 깨알 줏듯 아름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리극근, 박성관, 최일범, 리금덕 등 수십명 예방퇴치 일군들은 기와 패를 나누어 각 지구에 내려가 당지 방역기구의 배합밑에 골간 강습반을 꾸리고 군중을 발동하면서 넓은 평야구릉으로부터 깊은 심산궁곡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참빗질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당총지서기이며 당시 병원예방퇴치과에서 주임사업을 하고있던 리금덕은 구태현 농촌에서 “참빗질”하던 중 영성탄광구역의 한 구차한 집에서 문둥병 후기환자 하나를 발견하였다. 환자는 스물셋에 나는 젊은 청년이였는데 그는 쬐꼬만 뙤창 하나를 낸 네댓 평방메터짜리 차겁고 어둑침침한 고방에 쓸쓸히 갇혀있었다. 알아보니 그의 부모들은 전등도, 까래도 없는 감방같은 고방에 병든 아들을 5년 동안이나 가두어 왔었다!
 
왜 병원에 보내지 않는가고 물으니 그의 부모들은 공포에 떨며 “약도 안 드는 죽을병인데 거저 집에서 편히 죽게 놔 두시우!”하고 애걸하는 것이였다.
 
환자도 덴겁한 눈을 해가지고“병원엔 안 가겠어요. 죽어도 제집에서 편히 죽겠어요!”하고 연신 빌었다.
 
분명, 그는 세상과 격리된 이 음침한 고방에서 남몰래 조용히 죽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분명, 그들은 문둥병을 불치의 병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문둥병원을 환자를 참혹히 학대하는 감옥보다도 더 무서운 곳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수없는 이 정경은 문둥병환자를 한사람도 빠짐없이 찾아내고야 말리라는 리금덕의 결심을 더욱더 굳혀주었다.
 
[사진설명]이 병원에는 지금 치료를 받고있는 환자 11명, 병은 나았지만 갈 곳이 없어 계속 남아있는 환자 70명이 있다. 그들은 모두다 의료호리일군들의 살틀한 보살핌은 받고있다. 사진은 환자의 머리를 빗겨주는 호사 유채금과 호사장 김금자(오른쪽).
 
그는 로고를 무릅쓰고 원정을 시작했다. 하루에 사오십리길 걷는 것 쯤은 문앞마당 지나는 것으로 치부했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선전을 하고 군중을 발동했다. 선전효과를 높이고자 늘 환자네 집에서 먹고자고 했다. 여름엔 길가의 초저녁 모기무리에 얼굴을 뜯기기가 일쑤였고 겨울엔 초라한 농가집 랭돌방에서 외투 쓰고 쪽잠자기가 일쑤였다. 환자가 조사일군이 온다는 낌새를 채고 도망질을 칠 때면 한 벌 할 걸음을 세번 네번 해야 했다. 제공받은 정보가 틀려서 수십리 걸음이 허탕으로 돌아갈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드팀없는 목표는 아흔아홉번 허탕치는 건 별문제여도 환자 한사람을 놓쳐선 절대 안 된다는 것이였다.
 
이처럼 천신만고를 다하면서 이 병원의 일군들은 전 성 47개현, 시에서 도합 500여명의 문둥병 환자를 찾아냈다. 500명! 극히 평범한 이 수자에는 그들이 우리 성 에서의 문둥병의 전파만연을 방지하기 위해 엮은 비범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 4 )
 
환자수가 급격히 불어감에 따라 의사, 호사들의 사업량도 크게 늘어났다.
 
급한 환자가 들이닥칠 때면 진오영과 그의 동료들은 늘 격리복도 입지 못한채 환자구급에 서두르군 했다.
 
수술환자가 수혈이 수요되면 그들은 서슴없이 자기들의 피를 뽑아 환자에게 바쳤다. 새로운 약종을 찾아 문둥병 치료효과를 높이고자 진오영, 최일범 등 동지들은 주야분전하여 <704>, <681>, <랑독(狼毒)> 등 주사액을 만들어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하여 그들은 만들어낸 약들을 우선 자기들의 몸에 실험해보군 했다. 어느 한차례의 시험에서 진오영은 중독되여 몇 달 동안 입원치료까지 받았었다.
 
어느 날 의사 박성관이 급보를 받고 천방지축 병실로 뛰여가 보니 환자 황옥란이 후두수종으로 호흡이 막혀 거의 죽어가고있었다. 후두수술을 해본 적 없는 그였지만 당금 죽어가는 환자를 두고 유예할 겨를도 없었었다. 그는 주저없이 수술칼을 집어들었다. 목을 어이고 기관지를 쨌다. 불현듯 막힌 구멍이 터지면서 그의 얼굴에 피가래를 쫙 들씌워 놓았다. 처음 하는 수술을 무사히 끝낸 뒤에도 그는 도저히 시름이 놓이지 않아 환자 곁을 꼬박 일주일간 떠나지 않았다.
 
의사 최일범은 대동란 기간에도 시종 일터를 고수하면서 문둥병 치료와 연구사업에 전심하였다. 70년대 중기부터 그는 문둥병 의약정보들을 애써 수집하면서 선후로 <아세토스팔아미드술폰>, <리복평> 등 약들을 치료에 도입하고 수년간씩 림상관찰을 진행하여 치료효률을 크게 높이였다. 80년대에 들어와서 세계위생조직에서 련합화학치료방법을 제창하자 그는 또 동료들과 함께 환자들에게 을 8개월간 들이댔는데 역시 리상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환자들에 대한 호리사업도 간거했다. 김금자, 유채금, 방분옥 등 호사들은 각종 수술후의 처치작업을 정성껏 하는 외 일상적인 생활호리까지 착실히 하면서 환자들을 빈틈없이 보살폈다.
 
한번은 왕청에서 종류형 문둥병환자를 보내왔다. 집에서 쫓겨나 거지질을 했던 이 녀성환자를 보니 썩은 삼검불 같은 머리엔 이가 우글거렸고 옷을 벗기니 이가 막 덩이져 떨어졌다. 기가 막혔다. 금자는 동정의 눈물을 머금고 그 환자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머리도 손수 깎아주고 이도 말끔히 잡아주었다. 사람대접을 생전 처음 받아보는 그 환자는 거저 감격의 눈물만 하염없이 쏟을 뿐이였다.
 
한번은 온 몸이 진창이 된 중병환자가 들어왔다. 금자는 매일 환자에게 약을 갈아주고 몸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손톱, 발톱을 깎아주는 것마저 잊지 않았다. 이렇게 꼬박 석달 동안 환자를 호리해주었다. 림종시에 환자는 눈귀를 적시며 가느다란 소리로, 그러나 분명 이렇게 말하였다.
 
“전 죽어도 선생님을 잊지 못하겠어요!”
 
......
 
아, 진오영을 비롯한 우리의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의 헌신적 처사에서 문둥병환자들이 받아않은 감동은 실로 아름차리만치 컸다!
 
* * * * * *
 
지난 35년간 성위, 성정부와 연변주위, 주정부에서는 줄곧 이 병원에 관심을 돌려왔다.
 
당과 정부에서는 문둥병 예방퇴치사업에서 대공을 세운 위훈자들에게 응분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 병원은 여러 차례 성, 주의 선진단위로 표창 받았고 이 병원의 수십명 일군들도 각급 선진개인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그중 원장 진오영, 진찰부 주임 최일범 등은 전국모범의 영광을 안아왔다.
 
진오영원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1990년 전에 문둥병을 기본상 소멸할 신심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병원에서는 이미 변화된 형세에 좇아서 우리의 사업중심을 문둥병에 대한 예방퇴치로부터 피부병에 대한 예방퇴치에로 옮길 준비를 하고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세계적 수수께끼로 되고있는 에이즈병에 대해서도 연구하려 합니다. 문둥병을 대처할 때와 같은 헌신정신으로 말입니다!”
 
헌신정신! 천신만고로 사업의 승리를 바꾸어온 이들은 헌신정신의 함의를 가장 잘 안다. 그들이 인류의 건강과 무병장수를 위하여 새로운 전투구상을 무르익힐 때 그 리면에 안받침되여 있는 것도 다름 아닌 헌신정신이리라!
 
[길림신문] 198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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