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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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백여년만에 돌아온 출해구 댓글:  조회:728  추천:0  2023-05-16
백여년만에 돌아온 출해구 --우리 성, 우리 주의 큰 경사   국가 해관총서는 최근 공문을 내려 6월 1일부터 흑룡강, 길림 두 성의 화물을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통해 동남연해로 운송할 수 있으며 이는 "국내무역"에 속하므로 수출입관세를 징수하지 않는다고 통고했다. 일본해로의 출해구를 다시 얻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길림, 흑룡강 두 성은 비록 토지가 비옥하고 자원이 풍요롭지만 출해구가 없어 장기간 료녕성 대련항을 거쳐 해운화물을 중계해 오다나니 운송원가 문제로 줄곧 경제발전이 제약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滿淸정부가 짜리로씨야와 굴욕적인 "북경조약"을 체결한 결과 원래 길림성에 속했던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가 그쪽으로 넘어가게 된 100여년 전 굴욕적인 력사는 세상이 익히 아는 바다.   쏘련 해체 후 로씨야는 극동개발문제에서 중국과의 협력에 장기간 소극적이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방체계 진입을 꿈꾸며 시종 그것에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로씨야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충돌로 서방진입 꿈이 철저히 깨졌다. 서방 전체의 경제제재와 군사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로씨야는 부득불 중국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로씨야 극동지역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항 사용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로씨야가 전향적인 자태를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우리에게 출해구가 열리게 됐다. 륙로를 통한 운수거리가 크게 단축(海運의 원가는 陸運의 몇 분의 1에 불과하다)되고 따라서 경제발전이 큰 힘을 받게 된 것이다.   일이 여기까지 온데는 미국의 공로가 크다고 봐야 한다. 가령 랭전 종식 후 미국이 로씨야를 지금처럼 못살게 굴지 않고 반대로 아주 살뜰하게 품어주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를 상상해보라. 금방 그 답이 나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국님들에게 적어도 한톤짜리 동질메달을 목에 걸어주어야 할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출해구가 생겼으니 전반 극동지역도 조만간 느슨해질 것이다.  
26    조미 간 극적 사태에서 조선의 변화를 본다 댓글:  조회:2803  추천:0  2018-05-27
지난 며칠간 ‘김정은-트럼프 회담’을 앞두고 극적 변화가 거듭되는 가운데 회담 문전에 잠깐 감돌던 암운이 눈 깜짝 새 맑게 걷혔다. 조선 핵실험장 페기의 폭파연기가 흩어지기 바쁘게 발표한 트럼프의 회담취소 선언(지금 와서 보면 대방의 진실한 의중 떠보기 게임, 세간에서 트럼프를 어떻게 평가하든 우리 입장에서는 트럼프에 대해 눈 씻고 다시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에 예전 같으면 북이 그 즉시로 거세게 맞받아쳤을 것이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뜻밖이자 신기하기까지 한 ‘깜짝 쇼’는 오히려 회담의 뜻 깊은 사전소통으로 되어 회담의 문전을 밝게 장식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북남 두 차례 정상회담, 미국간첩 3인 석방, 풍계리 핵 실험장 파기 등 모든 행동은 북남의 군사대결을 종말 짓고 평화와 번영을 실현하려는 조선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미 ‘핵·경제 건설 병진노선’ 대신 경제건설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한 조선에 있어서 선제적으로 북미정상회담의 판을 깨려는 의도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의중 떠보기 깜짝쇼’를 통해 북의 의중을 확인한 후 “그들(조선)은 조미정상회담을 무척 원하고 있다. 우리도 그것을 하고 싶다. (회담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번영과 평화로 이어지길 바란다”면서 최근에는 6·12 조미정상회담 재추진을 공식화했다.  그러니 조미정상회담의 개최와 성공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것이 성공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다음에 벌어질 일들은 과시 고무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도남북을 관통할 해륙공 통로, 반도와 이어지게 될 중국대륙과 유라시아대륙의 횡단철도, 나아가 일본과 이어질 해저터널, 이제 평양에 터져 내리게 될 국제적 경제지원의 봇물......땅덩어리가 별로 크지 않은 조선이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이면 한국과 비슷하게 될 거라면 지나친 속단일까? 일단 반도의 변혁이 시작되면 반도 전역과 중국의 동북, 러시아의 극동지역은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변혁의 중심이 될 수도 있을 것, 말하자면 이 광활한 지역이 명실 공히 동북아시아의 ‘노란 자위’이자 ‘황금의 삼각지대’ 역할을 착실히 수행할 수도 있으리라. 그때면 우리 연변에도 걷잡을 수없는 변화의 선풍이 휘몰아치게 되리라.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25    곪은 상처는 터뜨려야 아문다 댓글:  조회:6090  추천:5  2015-12-31
  곪은 상처는 터뜨려야 아문다 -“두가지 사건”으로 조선족사회가 불안정하던 나날에   우리 길림신문사가 성소재지 장춘으로 이전한 이듬해인 1996년, 그러니까 중한수교 4년이 되던 그해 중한간에 두가지 큰 사건이 터졌다. 하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엇바뀐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수많은 조선족가정을 파멸에로 몰아갔던“한국초청사기사건”이였다.   1996년 여름, 어선 페스카마호에서 일어난 가공의 반란사건은 그 살해수법과 피해규모도 끔찍했지만 사건을 유발한 조선족선원 상대의 선상폭력도 세상을 경악케 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조선족사회에 극통을 안겨준 일부 한국인들의 대규모 초청사기사건이 그해 11월 18일, 한국언론에 의해 만천하에 들통나자 전반 조선족사회는 엄청난 충격속에 빠져들었다. 실제로도 가해자가 피해조선족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랍치, 살해 사건이 중국 북경과 천진 등지에서 잇달아 발생했다.   한국인과 중국조선족간의 상호 불신과 갈등으로 당시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약고에 불똥이 튀기 일보직전처럼 팽팽했다. 언제 어떤 돌발사태를 터뜨릴지 모를 위험을 안고있는 이런 중대 사안에 직면하여 우리 신문사앞에는 이 사안들을 주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취급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가 나서고있었다.   1995년 4월, 장춘에 들어온 신문사의 상황은 그 당시 성위에서 신문사의 간부관리를 여전히 연변주위에 위탁하는 등 사정에 따른 사장 겸 주필 리금남의 계획과 포치에 의해 지도부 3명 성원중 나만 장춘에 들어와 조선족사회와 대내외 관련 부서와의 련계, 신문출판 등 장춘본부의 일상사업을 떠메게 되였다. 편집부에는 총편집판공실 김영규주임이 편집과 출판 업무를 맡아보고 한정일부주임이 취재와 기획을 관할하고있었다. 아울러 갓 입성한 장춘본부의 전체 임직원들은 “제2차 창업”의 열정과 감정을 가지고 밤늦게까지 신문을 꾸리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성과 장춘시 기관의 조선족간부, 조선족기업이나 학교, 사업단위의 일군들, 대학, 과학기술부문의 엘리트들, 농촌의 서기, 주임 그리고 농민들도 우리 신문을 민족의 대변인이라고 부르며 일만 있으면 신문사를 찾아왔다. 장춘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길림신문》은 장기간 구심점이 없던 조선족사회에서 사실상 구심점의 역할을 담당하고있었다. 이러한 때에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과 “한국초청사기사건”이 발발하자 그들은 당연히 신문사에서 나서줄것을 희망했다.   당의 보도기관으로서 외사에 관련되는 중대한 민감사안은 일반적으로 신화사소식에 준하는것이 상례였지만 우리 중국조선족의 권익과 직접 관련되는 이 두가지 중대사안에 대해서만은 우리가 함구할수도 피해갈수도 없었다. 페스카마호사건의 주인공 6명이 모두 우리 길림성사람들이고 한국초청사기의 피해를 가장 심하게 받은 지역도 연변을 비롯한 우리 길림성이였으니 말이다. 민족의 리익을 대변하는 언론사로서 피해의 통증을 하소연할 합법적인 분출구를 찾아주지 않고 옳바르게 인도하지 않는다면 조선족사회에서 언제 무슨 돌발사태가 터질지 예측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였다. 우리가 성기관의 관련 부서에 이런 상황을 반영했지만 실상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모두가 조심성을 보이면서 명확한 태도를 표시하지 않았다.   상황은 우리에게 “지시”를 기다릴 시간적여유마저 주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피해자들이 울분과 분노를 토하는데 합법적분출구를 틔여주고 조선족사회의 대표들을 통해 여론을 정확히 인도하는 길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 주저없이 행동에 돌입했다. 이 문제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바로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내무사법위원회에 재직중이였던 윤수범부주임을 비롯한 조선족사회 각계 인사들의 한결같은 기대와 신임이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등을 떠밀어주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언론의 사명감을 안고 “주동적인 개입과 정확한 여론인도”라는 큰 모험에 나서게 된것이다.     “한국초청사기사건”   우선 부딪친 사건이 “한국초청사기사건”이였다. 이 사건은 중한수교후 수년간에 걸쳐 중국의 수많은 조선족가정을 경제파탄의 불구덩이에 밀어넣었던 사건이였다. 당시 한국초청비용 수만원이란 천문수자와도 같은 거금이라서 동북3성의 수많은 조선족가정이 한줌도 안되는 한국사기군들의 사기협잡에 녹아나면서 리혼하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의 폭발시점은 한국의 외국인로동자피난소 등 민간단체들이 기자초대회를 가지고 중국 현지에서의 수만명 조선족의 피눈물의 피해사례 조사결과를 언론에 터뜨렸던 1996년 11월 18일에 준한다. 그날을 시점으로 한국 전역이 경악의 충격속에 빠져들고 그때까지도 행여나 하고 기다려오던 피해자들이 드디여 일말의 희망마저 잃은채 철저히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었던 바로 그 무렵이였다.   그러나 실상 우리 《길림신문》 은 11월 18일에 앞서 10월말에 이미 보도했다. 당시 우리 신문은 총편집판공실 한정일부주임의 발의로 1면에 “해외로무기별”전문란을 내오고 당시 중국조선족의 중요관심사인 해외로무와 관련된 소식들을 싣기 시작했는데 “해외로무기별”전문란이 태여난지 며칠 안되여 한국민간단체가 연변에 와서 “한국초청사기사건” 피해자 조사를 하고있다는 기별이 왔다. 중대한 사안이라고 판단하고 해외로무보도를 직접 주관하던 한정일부주임이 직접 취재하여 드디여 1996년 10월 31일, “우리 함께 풀어야 할 숙제”란 제목으로 “해외로무기별”전문란에 발표했던것이다. 당시 이 기사는 정치적민감성이 큰 두 나라 외교적문제와 관련된 중대사안이지만 나는 이렇게 엄청난 피해상황에서 우리 나라 공민의 합법적권익을 수호하는것은 정당한것이라고 판단하고 대담히 발표를 결정했던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층층이 상급에 보고한다면 발표가 가능할지, 발표를 허용한다 해도 언제 허용할지 모를 일이였다.   이 기사는 초청사기사건의 실질과 엄중성을 중국조선족사회에서 맨처음으로 까밝힌 중요기사로서 중국조선족사회에서 큰 반향과 관심을 자아냈었다. 그럼에도 이 기사가 한국사회에 강렬한 효과를 일으킬수 없었던것은 우리 《길림신문》 의 소식이 당시 한국국민들에 게 읽힐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 와중에 11월 18일, 한국의 기자초대회에서 한국인 사기행각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자 한국 전역이 경악한것은 물론 전반 조선족사회도 그때에야 경악, 분노, 허탈감과 절망으로 뒤엉킨 충격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던것이다.   우리는 “한국초청사기사건”을 중대보도로 기획하고 전반 피해사건 조사 및 사건해결진척을 추종보도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때 우리의 결책은 실사구시적이였고 과감했다. 당시 실정에서 장춘에서의 독립적사업추진이 상대적으로 가능한 시스템이였기에 때론 연길에 있는 사지도부에 일일이 반영할 새 없이 일을 밀고나가는 형국이였다. 나는 초청사기건 기획보도를 담당한 한정일부주임의 대담한 취재방안을 적극 수용하면서 뒤근심을 말고 대담하게 보도를 추진하라고 격려하고 함께 방안을 연구하고 확정하였다. 일단 방향이 결정되면 한정일부주임은 주동적이고도 대범하게 팀을 이끌고 일을 추진해나갔다.   그 시기 한국의 지성인들은 중국조선족사회를 파탄의 나락에 밀어넣었다는 죄책감에 분분히 모금운동 등으로 중국조선족피해자들을 도와나섰다. 그 조치의 일환으로 한국정부도 대책마련에 고심했고 민간에서도 새롭게 조사단을 무어 중국 현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해(1996년) 12월초, “한국초청사기사건”을 추적하던 한국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에서 민간단체조사방문단을 중국 현지에 파견하여 “한국인초청사기사건” 피해사례 조사를 하게 되였는데 이번 보도를 처음부터 이끌어온 우리 신문사에 조사와 사건해결에 협력해달라고 요청해왔다.   외사에 대한 당보의 보도는 일반적으로 신화사에 기준하며 지방 당보가 자의로 타국의 정책이나 문제를 비평하거나 또한 신문사가 직접 외사에 개입하지 못하게 되여있다. 외국인의 공식적인 방문을 취급하거나 그들과 공동행사를 치를 경우 관련 부서에 청시받는것은 필수적이다. 하여 나는 “1. 중국조선족의 한국초청사기피해상황, 2. 사기사건에 대한 한국사회의 최근 반향, 3. 한국민간단체조사방문단소개,4. 본사의 대책” 이런 4개의 소제목으로 한국방문단의 조사에 협력할데 관한 보고를 써가지고 선전부 신문처 강봉국처장에게 찾아가 청시를 했다. 결국 강처장은 주관부 부장인 양해천에게 보고를 올렸고 양부부장은 이 일을 길림성위 대외선전판공실에 돌렸다.   차라리 잘된 일이였다. 대외선전판공실에서 고금엽은 우리 신문을 주관하는 처장이였는데 경색된 사고방식에서 많이 탈피한 친구였다. 사연을 자세히 듣더니 알았으니 보고를 두고 돌아가 회시를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마 하고 대답은 했지만 워낙 시간이 긴박한지라 하회를 기다릴 새가 없었다. 우선 장춘시조선족중학교의 박동남교장과 학교강당을 모임장소로 빌려쓰기로 결정한 다음 조사단이 온다는 소식과 모임통지를 신문 톱자리에 내고나서 이틀을 기다렸지만 해당 부문은 그냥 무기별이였다. 피해를 심하게 받은 중국공민의 권익을 수호하는 정당한 일일진대 후에 조사추궁을 받는다 해도 두려울게 무엇인가. 우선 하고보자! 하는 배짱에 전화문의도 하지 않고 계획대로 일처리를 해나갔다.   결국 조사단이 와서 이틀간 조사를 마치고 돌아간지 한달이 넘어서야 3개 조목으로 된 회시가 내려왔는데 결론인즉 언론기관으로서 여차여차한 원인으로 외교사무에 직접 개입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오호라, 이런 묵허법도 있구나 하고 고처장의 대처방법에 속으로 못내 탄복해마지않았다.     그 일로 하여 고금엽과의 관계는 더 가까워져 그와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 조금 더 많아졌다. 《길림신문》 산하신문(子报) 《동북저널》창간을 신청할 때도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을 대상한 신문의 필요성을 설명하자 고금엽처장은 전적으로 필요하다고 찬성하면서 결정적인 지지를 주었다. 이렇게 태여난 《동북저널》 은 《길림신문》 의 산하신문으로 한동안 출간되다가 길림성신문출판국 신문처 리립후(李立厚)처장의 제안으로 우리 신문을 매주 3호(周三刊) 꾸리던것을 매주 4호(周四刊)로 확대하고 그중 1호를 전문 《동북저널》 부간으로 삼아 출판하게 됐다. 이로서 《동북저널》 은 《길림신문》 의 산하신문(子报)이 아닌 《길림신문》 본지(本纸)의 당당한 한 부분이 된것이다. 만약 시초에 고금엽처장의 결정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당시 상황에서 《동북저널》 의 창간은 복안에 그치고말았을 소지가 매우 높았다.   결국 이런 묵허하에 12월 14일과 15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시민대책위원회의 강영식사무국장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일행은 계획한대로 우리 신문사 10여명 자원봉사자들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으며 근 1000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의 피해상황등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됐다. 취재팀은 계속 추종보도를 통해 피해구제와 해결에 대한 보도를 하고 한국정부에 해결책을 촉구했다. 이런 활동은 봄바람마냥 피해자들의 언 가슴을 녹여주었고 녹은 가슴에 희망도 심어주었다. 또 그들에게 사기군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한국국민과 한국정부는 문제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고있다는것을 보여줌으로써 량국 국민간의 불신과 갈등을 풀어나갔다.   한정일 등이 쓴 “우리 함께 풀어야 할 숙제”(1996. 10. 31), “한국초청사기건해결 전면작동”(1996. 12. 7), “정부에 의거 합법적경로 통해 해결함이 바람직, 중국정부의 립장과 태도”(1997. 6. 12) 등 기사를 비롯하여 “한국인 사기부분 한국정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1997. 6. 12), “중국조선족 사기피해문제해결을 위한 한국정부의 립장”(1997. 6. 19), “한국, 외국인 연수취업제 도입”(1997. 9. 23),“서로간 리해와 대책마련 시급-한국민간조사단 및 성과 장춘시 유지인사 좌담회 요지”(1996. 12. 15), “사건해결과 우리의 자세”(본사론평원의 문장, 1996. 6. 12) 등 당시 김철룡, 김정애, 박명화 등 여러 기자들이 취재한 통신, 뉴스와 론평은 40여편에 달한다.   이런 영향력 있는 대량의 기사를 통해 피해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는외 중국정부와 한국정부의 립장과 태도, 대책마련 현황을 적시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알려주고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한국민간단체들의 적극적인 움직임도 통보함으로써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사회안정유지에 크게 이바지했다.   우리의 추적보도는 초청사기피해자와 가족이 모두 한국에 취업비자로 초청되여 로무로 피해보상을 받으면서 최종해결을 볼 때까지 수년간 계속되였다. 그번의 보도이벤트는 중대한 섭외사건에서 《길림신문》 이 중국조선족의 합법적권익을 수호하고 정확한 여론인도와 문제해결로 사회안정을 수호한 전형사례로 된다.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   페스카마호사건에 대한 우리 신문의 보도는 한국의 소수 악덕업주들에 대한 폭로비판으로 시작되였다. 통례에 따르면 외사보도에 대한 통제가 상당히 엄격한 우리의 국정에서 우리 나라와 국교를 수립한지 오래지 않은 한국에서 발생한 중대사안을 두고 꾸준히 폭로비판해나가는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사실 그번 “량대 사건”을 언론사에서 직접 취급하는 문제를 두고 우리 내부와 형제신문사들간의 일부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독자적으로라도 좌담회를 조직하고 독점보도도 전면적으로 내밀기로 분명히 결단을 내렸다.   보도의 구체추진방안은 주로 당시 총편집판공실에서 취재분야를 담당한 한정일부주임과 늘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연구하였다. 본사에서는 저돌적인 박명화기자에게 페스카마호사건에 대한 전문보도과업을 맡기고 점차 사건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페스카마호사건 피고의 고향인 통화지구 기자소 리창근소장에게도 전문과업을 주었다. 큰 좌담회를 소집할 때는 10여명의 편집기자들이 전부 동원되였는데 밤도와 기사를 쓰고 수정을 하고 판면을 짜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입력을 하고 3차의 교정까지 끝내고 필림을 떠 인쇄에 교부할 때는 항상 새날이 훤히 밝은 때였다.   페스카마호사건의 공정한 해결을 추진해나가는 행정에 《길림신문》 은 점차 문제해결의 “중국본부”가 되였다. 와중에 6명 피고인의 소송대리를 결심하고 본사를 찾은 료녕성공안사법관리간부학원의 법학교수 조봉(赵峰)씨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4월 9일, 페스카마호사건 2심판결을 앞두고 조선족사회에 이 사건의 전모를 알리고 조봉변호사를 성원함과 아울러 중국조선족사회의 목소리를 한국에도 전하기 위해 장춘시 각계 16명 지명인사좌담회를 소집했다. 좌담회 참석자들은 페스카마호사건의 성격규제, 피고인에 대한 형벌의 오유와 불공정성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이 향후 중한관계에 미칠 영향에 엄중한 우려를 표시하였으며 동시에 페스카마호사건에 대해 공정하게 처리할것을 한국정부에 강력히 희망했다.   “장춘시 지명인사들 좌담 페스카마호사건 공정처리 희망”이란 제목으로 1997년 4월 5일, 좌담회 요지를 발표한 그날 나는 페스카마호사건 2심 제3차 공개심리에 참가코저 한국행을 하는 조봉씨를 배웅하기 위해 장백산잡지사 남영전사장,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리학수처장과 함께 심양으로 향발, 저녁에 료녕신문사와 심양의 조선족엘리트들과 조봉씨를 위한 송별모임을 가졌다.     이번 만남에서는 김봉(장춘시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리금남(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 남영전(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주필), 리학수(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대표) 등 길림성 조선족사회의 유지인사대표와 료녕성조선족부녀협회 등 료녕성사회단체의 대표들이 이번 사건의 공정한 처리를 촉구하며 김영삼대통령 앞으로 련명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러 지역,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합심이 되여 마치 생사를 건 전쟁터에 친인을 보내는 심정으로 절절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당시 준엄한 얼굴들을 10수년이 지난 지금 다시 떠올려도 가슴이 뭉클해남을 금할수 없다.   2심판결은 6인 사형수중 전재천외 5명의 무기형전환의 성과를 올렸다. 이는 중국조선족사회가 자기의 목소리를 내서 거둔 제1차승리였다. 이는 중국의 4대조선족언론사가 한목소리를 내는 계기로도 되었다.   조봉변호사는 귀국후 심양유지인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5월 7일에는 우리의 초청을 받고 장춘에 왕림, 장춘 각계의 유지인사대표들을 만났다. 5월 8일, 그는 선후로 길림성외사판공실 책임자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규속(奎速)주임의 접견을 받았다. 그들은 페스카마호사건의 공정한 판결을 위해 한국법정에 떳떳이 나선 조봉변호사에게 뜨거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제3차 심리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정부와 사회의 지지, 성원 밑에 계속 노력을 기울여줄것을 당부했다. 이는 길림성이 정부차원에서 처음으로 지지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한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5월 9일, 길림신문사, 흑룡강신문사, 연변일보사, 장백산잡지사의 공동주최로 길림,흑룡강 두 성 각계의 48명 대표가 합석한 조봉변호사환영좌담회가 마련됐다.   이제 남은 과업은 여전히 사형수로 남아있는 전재천에 대한 구명운동과 중한관계 및 중한동족관계를 정상궤도에로 끌어올리는 일과 관련된 언론사들의 여론인도작업이였다. 우리는 이번 사건의 해결이 단순히 피고인들에 대한 감형이나 구명을 위한것이 아니며 사건 자체가 일반적인 형사사건이 아니라 력사적으로 형성된 동족간의 뿌리 깊은 문화적갈등의 소산임에 각별히 류의하여 보도기획의 목표를 시종 사건해결을 통해 그동안 쌓여왔던 상호 불신의 뿌리를 뽑는 계기를 만드는데 두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듯이 나쁜 일도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수 있는것이다.   전재천의 고향인 휘남현과 매하구, 통화 등지에서 전재천구명을 위한 서명운동과 더불어 사재를 털어 무료변호에 나선 조봉변호사를 후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이 벌어졌다. 이는 정귀순(“외국인로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민병렬(전국련합 부산본부) 등 한국사회단체들의 전재천구명운동과 기타 피고인들에 대한 감형활동과 서로 호응되면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에 적극적인 영향을 전했다.   최초의 보도기사 “한국원양어선 참살사건 발발”[한국 특약기자 편영우(片永宇), 1996. 8. 29]로부터 시작해서 전재천의 진정서 “우리는 강도살인범이 아니다”(1996. 12. 10), 페스카마호사건 2심 제3차 심리에서 진술한 조봉고급변호사의 변호의견 전문(1997. 4. 15) 등 만자 이상 되는 장편기사를 편폭에 구애없이 우리는 파격적으로 전문을 게재했다. 독자들이 관심하는 페스카마호사건판결에 관련되는 전 과정을 상세히 추종보도했다. 또 “장춘시 지명인사들 좌담, 페사건 공정처리 희망” (1997. 4. 5), “공정한 판결로 사건의 량성전환 맞아야”(1997. 4. 15), “우리의 자존 찾아 만리길-길, 흑 조선족여론계 유지인사 조봉환영모임 좌담요지”(1997. 4. 27) 등 장편 좌담회요지를 발표, 중국조선족사회의 지적인 목소리를 내여 정확한 여론인도역할을 충분히 발휘했다.     총목표는 문제해결과 신뢰, 화합 재구축   두가지 사건에 대한 보도를 다룸에 있어서 합법적경로를 통해 정서의 분출구를 마련함으로써 분노해소의 물곬을 틔여주는 한편 모든 문제는 합법적인 경로를 거쳐 해결해야 한다는 법률의식을 심어주기에 특별히 류의했다. 한국과 한국인을 무작정 미워하는 심리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초청사기피해자들을 물심량면으로 돕고저 힘쓰고있는 “외국인로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정귀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외국인로동자피난처 등 한국민간단체들에서 벌이는 전재천 등 구명운동에 대해 다각적으로 소개했다. 한편 당시 한국인 류재복특약기자를 통해 “중국인을 위해 뛰고있는 한국인” 계렬탐방보도도 수개월간 끌고나가면서 상호 리해와 화해의 밑거름을 뿌려가는 시도도 했다.   1997년 8월 24일, 중한수교 5주년에 즈음하여 《길림신문》 의 명의로 길림성주재 강원도사무소 대표, 한국기업인 대표와 길림성인대내무사법위원회, 성위대외선전판공실, 성공안청, 성대외경제무역청, 장춘시세관 등 성, 시 기관의 관련 부서 일군들이 참가한 중한교류좌담회를 조직, 상호간의 우호적관계를 확인하고 진일보의 구체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소식에 배합하여 좌담회요지를 큰 편폭으로 싣고 아울러 “밝은 앞날을 함께 만들자”는 제목으로 사설을 발표,전반 조선족사회와 재중한인사회에 중한관계전망에 대한 적극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이상과 같은 다방면의 노력은 문제의 해결에 좋은 밑거름이 되여주었고 응분의 결실을 맺었다. 홀로 사형수로 남았던 전재천은 상황에 의해 즉시 해결은 안되였지만 2006년, 한국 로무현대통령 대사령에 의해 마침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였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해고선원에 대한 구제절차 등을 담은 선원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했다.   그후 비록 어려운 과정을 거치기도 했지만 한국정부에서 조선족들이 연수하여 피해보상을 받을수 있도록 대책을 대는 등으로 시급한 문제들을 풀어나갔으며 따라서 대부분 피해자들이 한국에 입국 취업하여 생존상황이 개선되는 결과도 안아왔다.   전반 과정에 민족의 대변지로서의 우리 《길림신문》 은 시종 주동적자세와 적극적인 독점보도로 중국조선족사회의 여론을 리드해나갔으며 위험수위로 치닫던 불안정요소를 점차 해소하고 중한간의 리해와 화목을 회복, 발전시키는데 대체할수 없는 독특한 역할을 해왔던것이다.   (《길림신문사 사람들》연변출판사 2015,12)  
24    길림신문 초창기의 추억 댓글:  조회:5505  추천:2  2015-12-31
  길림신문 초창기의 추억   1. 감구지회   1983년 봄부터 《길림신문》 창간에 대한 보고얘기가 나오더니 이듬해 8월에는 길림성위에서 정식 비준했다는 말이 나왔다. 당시 나는 《연변일보》 총편집판공실 편집으로 있었는데 그때 주임은 남인순, 부주임은 윤효식이였다. 그러다가 또 몇달이 지나 그해도 막가는 12월의 어느날 윤효식부주임이 《길림신문》 창간주비소조 조장의 신분으로 2층짜리 옛 신문사 자리의 한 자그마한 사무실에 김경욱, 림웅길, 김영오 등 예닐곱 되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전반 길림성 조선족을 대상한 《길림신문》 이 나오게 됐는데 이미 길림성위에서 비준이 내렸고 주비사업을 우리가 해야 하며 시간이 긴급하니 서둘러야 한다고 력설했다. 비준된 시간은 1984년 8월 7일인데 몇달이나 지난 오늘에 와서야 시급하게 움직이게 된것은 길림성 관련 부서와 운영자금 등 구체문제를 해결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였기때문이라고 했다. 실지로 신문허가증도 이듬해(1985년) 1월 15일에 받아 그날로부터 불과 보름만인 2월 1일에 첫 시험호를 냈고 그뒤로 보름에 한호씩 시험호를 도합 4호 출간했다. 《길림신문》 창간호는 1985년 4월 1일, 드디여 발간됐다.   그때 연변울타리를 벗어난 신문의 창간에 직접 참가한다니 자랑과 긍지를 느꼈었고 그게 어제 같은데 벌써 30년을 넘겼다. 감구지회에 젖어 자칫 잊혀질 옛 기억을 되살려본다.   2. “ 《길림신문》 이 나왔다는 일 자체가 대단한 거요.”   《길림신문》 의 창간작업은 처음부터 《연변일보》 의 오태호총편집이 맡아 추진했다. 길림성위에서 연변주위에 위탁한 일을 연변주위에서 다시 《연변일보》 에 책임지웠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이 일을 두고 산재지구의 조선족들은 시초에 리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산재지구를 대상한 신문인데 왜 연변에서 출판하느냐 하는 것이였다. 《길림신문》 창간시 발행과업을 수행했던 《연변일보》 의 김주철선배님(길동군정대학 출신으로 《동북조선인민보》 창간이나 조선문 《참고소식》 창간에 두루 참가했던분임)은 길림에서 발행회의를 열고 돌아와서 우리에게 그 시말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선배는 발행회의에서 반영된 그런 의견을 못들은척 묵과해 넘길수 없었던지라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부주임이자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있던 옛 상급인 최채(최채가《연변일보》 초대사장을 지낼 때 김주철선생은 연변일보사의 공청단 선전위원이였음)를 곧바로 찾아가 반영을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최채주임이 하는 말씀이 “ 《길림신문》 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현재 산재지구에서 직접 꾸리기는 여건상 시기상조이니 우선 신문을 잘만 꾸려라. 그러면 신문사는 아무때건 장춘에 들어오게 돼있다.”고 하시더라는것이다.   실지로 《길림신문》 은 전 성 120여만 조선족군중, 특히 산재지구 40여만명 조선족군중의 강렬한 요구와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부주임 최채, 길림성위 부서기 겸 길림성군구 정위 조남기, 길림성정부 고문 최림 등의 강력한 유세하에 대중의 요구를 수렴하여 중공길림성위에서 마침내 비준하였던것이다. 길림성위에서 우선 연변에 이 일을 맡기게 된것은 당시 관리나 경제 등에서의 막부득이한 사정이였다. 사실 최채주임의 말은 조금도 그른데가 없었다. 신문이 생기고보면 명색이 《길림신문》 인 이상 성소재지에 들어가게 되는건 시간상 문제라는것이다.   어쨌거나 중공연변주위에서 과업을 《연변일보》 에 일임한후 당시 《연변일보》 총책임자이자 중국조선문신문의 권위자인 오태호총편집이 모든 일을 맡아 추진했는데 이는 어느모로 보나 당연한 일이였다. 더군다나 《길림신문》 의 창간은 1979년에 길림성 6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됐던 오태호선생이 대표임직기간 장춘조선족중학교의 최일교장 등 동기(同届) 조선족대표들과 함께 거의 매년 련명으로 《길림신문》 창간을 제안한 노력의 결실이기도 한바 오태호총편집은 깊은 감정과 드높은 열성으로 이 작업을 추진해왔던것이다.   3. 신문풍격의 민족성 주창자 오태호총편집님   돌이켜보면 시험호를 구상할 때부터 오총편집은 이 신문에 민족적독창성을 부여하고저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것이다.   《길림신문》 창간을 전후해서 개추렴이요 하는 명목의 모임이 여러번 있었다. 그런 모임에는 꼭 이야기판이 벌어지군 했으니 화자는 항상 오총편집이였고 우리는 모두 그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김삿갓, 론개, 서산대사 등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으면서 우리가 탄복했던것은 그의 이야기재주와 비상한 기억력이였다. 례컨대 김삿갓이야기를 한다 하면 김삿갓의 풍자시가 빠질수 없었는데 “일출원생원(日出猿生原) 묘과서진사(猫过鼠尽死) 황혼문첨지(黃昏蚊簷至) 야출조석사(夜出蚤席射)” 등 풍자한시 여러수를 거침없이 외우면서 풀이해나가는 재주에 우리는 이야기에 끌려들어가는 한편 탄복한 나머지 입을 딱 벌렸고 게다가 웃지도 않고 “서당내조지(书堂乃早知)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 생도제미십(生徒诸未十) 선생래불알(先生來不谒)”을 외우는 대목에 들어가서는 우리는 배를 끌어안고 웃어제꼈다.     오총편집은 좌중을 웃겨 환심이나 사자고 이런 이야기를 한것이 결코 아니였다. 그 리면에는 《길림신문》 의 짙은 민족성구현을 위한 구상의 한 부분으로 신문을 산재지구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수 있게 꾸리자는 깊은 속셈이 깔려있었던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중 일부는 바로 우리 신문의 련재물로 실려나가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산재지구 독자들이 애독하는 우리 신문의 갈피갈피에는 분명 오총편집님의 고심과 땀이 녹아들어있는것이다.   산재지구에 취재를 보내면서 우리에게 한 부탁에서도 그의 당시 생각이 더듬어진다. 통화지구로 가게 된 나에게 오총편집은 통화지구에서 이 몇년 사이에 고구려문물이 꽤 출토되였다던데 이번 기회에 알아보라고 했다. 통화현에 취재를 간 나는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김춘삼을 만나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근년에 들어 특히 올해 이 지역에서 고구려무덤이 여러기 발굴되였다면서 현문화관의 한 관원을 소개해주는것이였다. 당시 지식이 짧아 취재를 깊이 하지는 못했지만 기본정황은 파악하였고 옛무덤과 발굴된 문물의 사진도 몇장 얻어왔다. 연길로 돌아와서 원고를 바친 그날 오총편집은 나를 이층 사무실로 불러 고적발굴 상황을 묻고 원고와 사진 배치를 직접 하면서 이렇게 배치하는게 어떤가고 했다. 나는 너무 고맙고 황송해서 취재를 잘하지 못했다고, 후에 기회를 봐서 보충하겠다고 결심발표를 했다. 그후 수차에 걸쳐 리원철, 허철룡 등과도 취재차로 통화현에 간적이 있으나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적당한 취재기회를 내내 찾지 못하고있다가 사학계에서 분규가 생기는 통에 종당에는 원래의 계획을 접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많은 사연을 통해 민족의 뿌리와 전통에 대한 오총편집님의 진정을 통감함과 아울러 우리 신문에 짙은 민족특색을 부여하려는 깊은 속심도 읽을수 있었다. 《길림신문》 으로 볼 때 짙은 민족성을 주창한 첫 사람으로 우리는 오태호총편집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말은 오태호총편집이 당보의 당성원칙을 불문에 부쳤다는 얘기가 아니다. 민족특성의 구현이 잘되지 않던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경주한 첫 사람이라는 얘기이다.   4. 창간대회의 취재이야기   《길림신문》의 창간대회는 1985년 3월 30일, 당시 연변주위 소속인 문화극장에서 열렸다. 이날의 창간소식보도조에는 문상호주임, 촬영부 전창식과 내가 배정이 됐는데 보도조의 조장은 내가 상당히 흠모하던 문상호선생이였다.   내가 농촌부에 있을 때 한번은 우리 부의 부주임이였던 문상호선생을 따라 삼합관개수로공정성과 보도취재를 내려간적이 있었다. 오전 내내 취재를 하고 오후에 보도기사를 쓰는데 쓰는 방식이 놀라왔다. 문주임은 팔짱을 끼고 방가운데에 앉아서 자기가 기사를 부를테니 나더러 받아쓰라는것이였다. 그는 취재수첩을 들고 가끔 들여다보면서 내가 받아적을수 있는 속도로 천천히 불렀는데 중간에 쉼이 없었다. 원고 받아쓰기를 끝내고보니 자그만치 4000자도 넘는 장편통신이였다. 용어나 철자가 틀리는데 있으면 고치면서 한번 정서해서 래일 직접 홍춘식주임에게 갖다바치라는것이다. 내가 너무 놀라서 장편기사가 어떻게 기성된 문장을 읽듯 한번 불러서 완성되는지를 물었더니 취재준비를 할 때부터 전반 취재과정에 시종 기사를 어떻게 쓸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목적성 있게 문제를 제기하고 필요되는 문제의 답이 완성되면 취재도 끝나는 셈이라는것이다. 그만큼 취재의 목적성이 뚜렷하게 벼려져야 하며 맹목성은 삼가야 한다는것이였다. 그후 문선생의 취재방법론을 조금씩 터득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취재를 끝내는 때이자 기사가 완성되는 시간”이란 경지에는 시종 이르지 못했다. 아니, 여러번 고쳐쓰며 발표한 기사도 항상 유감을 남기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삼합에서의 그 체험을 《길림신문》창간대회기사를 쓰면서 다시한번 겪게 될줄은 몰랐다. 그날도 그렇게 원고를 베껴서 그대로 오태호총편집에게 바쳤고 오총편집은 원고를 고치고나서 (아마 오총편집 자신의 연설 한토막을 잘라냈던것 같다) 리덕수서기의 사인을 받아오라고 해서 리서기의 사인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때 연변주당위는 신문사 바로 서쪽의 농업은행자리에 있었고 리덕수서기는 2층에서 사무를 보고있었다. 나는 문상호스승외에도 복잡한 일도 재치 있게 개괄해내는 뛰여난 함축력의 소유자 박경섭선생, 취재대상이 누구든 취재중 주요단서만 쥐면 대방이 진땀을 뺄 정도로 깡치를 내려 드는 남민옥녀사 등 스승 여러분이 있어서 행복했다.   5. 《길림신문》의 “인쇄공장”   신문이 창간된후 새 사원을 매일같이 받아들이는 형편에서 우리는 연변군분구 초대소로 이사를 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의 사옥자리에 있었던 원《연변일보》사옥은 사무실과 복도 바닥에 널판자를 깐 제정때의 2층짜리 낡은 건물로서 그러찮아도 비좁던터라 도무지 새로 나온 우리 신문사를 용납할 상황이 아니였기때문이였다.   비여있던 2층짜리 연변군분구 초대소(지금의 백산호텔 자리)의 웃층을 빌려들었는데 싸리나무 등 땔나무를 사다 난로불을 피워 겨울을 났다. 초대소 옥상은 평평한 세멘트바닥으로 되였는데 쉼터나 소풍장소로 딱 안성맞춤이였다. 편집을 하다 손이 저리면 줄레줄레 올라가서 담배도 피우고 해빛쪼임도 했으며 어느해 봄에는 가무단의 어느 무용선생을 모셔다 한 보름가량 사교무도 배웠다.     지금은 상상도 잘 안 가는 일이지만 신생한 《길림신문》은 가족의 직업문제도 해결할겸 길림성에서 주는 제한된 돈을 좀더 유용하게 쓸 료량으로 인쇄공장도 자체로 꾸렸다. 신문사 마당 동쪽켠에 줄 지어선 막사나 다름없던 좁고도 낮은 가건물의 한칸을 차지하고서는 “우리 인쇄창(공장)”이라고 불렀는데 말이 인쇄공장이지 기실은 20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조판실이였다. 그처럼 작은 칸을 또 문선실과 식자실로 나누었다. 문선공이 원고를 보면서 활자케이스에서 활자를 뽑아 손바닥만한 문선상자에 순서대로 배렬해 담은 뒤 그것을 식자공에게 넘기면 식자공은 원고배치도에 따라 판을 짜 맞추군 했다. 이렇게 조판의 교정까지 끝마치면 우리측의 일은 다 끝나는 셈이였다.   《연변일보》인쇄공장측에서 그 완성된 식자판을 넘겨받아 지형 뜨고 연물을 부어 연판을 뽑고 그것을 륜전기에 걸어 신문을 찍어냈다. 그다음 절차는 당연히 발행이였다. 창간된 첫해 우리 《길림신문》은 발행도 자체로 했는데 발행원들이 여간 수고를 하지 않았다. 우리 신문사의 김영오, 김규범 등 선배님들외에도 김경욱, 김주철, 김수국 등 림시로 우리 신문에 배치된《연변일보》의 선배님들이 새벽에 나와서 신문을 지역별로 나누어 묶어서는 전문 기차역에 내다 부쳤는데 기차역과의 관계처리 등 일들이 겹치여 그 사업량이 만만치 않았다. 드높은 책임감으로 열심히 《길림신문》발행을 위해 땀을 흘리던 그분들을 생각하면 고마웠던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아무튼 자체로 활자조판을 하던 일은 1989년 7월 중순까지 몇년간 지속되다가 문선식자실은 인쇄공장에 돌려주고 인원들도 모두《연변일보》복무공사에 넘김으로써 인쇄업무는 전부 《연변일보》공장에 위탁하게 되였다. 어찌 보면 《길림신문》은 초창기에 중국의 모든 구식신문이 걸어왔던 길을 모조리 경험해본 격이였다.   6. 《길림신문》의 “문풍백성티” 와 윤효식선생님   화룡현 서성 태생인 윤효식선생은 1951년에 사업수요로 연변일보사에 배치받은 뒤 근 40년간 조선족 번역계와 신문편집계에서 굴지의 성과를 쌓아올린분이다. 그러나 선생이 직접 취재와 집필에 참여할수 있게 된것은 개혁개방을 맞아서부터였다. 그것은 윤효식선생이 아버지의 력사문제로 인해 “통제사용인물”로 지목받고 탐구열에 들끓던 열혈청년시절, 그처럼 쓰고싶었던 자기의 글도 쓰지 못하고 근 10년간 시사번역만 해오다가 1963년에 비록 지방원고편집을 하게 되였지만 원고를 편집만 할수 있었을뿐 직접 취재해서 글을 쓸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엄혹한 시련속에서도 선생은 조금도 의기소침하거나 일에서 탕개를 늦춘적이 없이 자기에게 부과된 과업에 시종 충직하고 편집에 진력하는 한편 체계적인 자습으로 실제상 언어의 대가로 되여 후일의 집필사업에 튼튼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는 그를 조직에서는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다. 조직의 의도된 지지밑에 그는 《붉은 해》, 《찬란한 길》, 《룡담의 물결》등 여러부의 장편소설, “변형기”, “가정문제”, “1918년의 레닌”,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등 소설, 산문, 씨나리오와 같은 다양한 체재의 국내외 단편명작 수백편, 그외 대량의 시사번역작품까지 무려 1000여만자에 달하는 번역작업을 수행하여 번역계의 선두주자로 활약해왔던것이다.   이러한분이였으니 개혁개방을 맞으며 선생의 보도열정은 분수처럼 터져나오지 않을수가 없었다. 더구나 때를 맞추어 태여난 《길림신문》은 그로 놓고 말하면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아 새롭게 꽃피우는 활무대에 다름아닌것이였다.     《길림신문》을 초창기부터 맡아 책임지고 꾸려오면서 윤효식선생이 시도한것은 독자가 읽어주는 신문을 만들자는것이였다. 이를 위해 주창한 구호는 “우리 신문을 백성티가 물씬 풍기게!”였다. 조선족의 주류문화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있었던 산재지구 조선족독자들에게 이것으로 가깝게 다가가자는것이였다.   우선 개혁한것이 회의소식이였다. “회의취재를 가면 회의재료만 베끼지 말고 눈에 쌍불을 켜고 새로운 정보를 파내라.” 이것이 그의 당부였다. 한 회의에서 유용한 정보를 한가지씩만 추려내서 발굴해도 값이 있는 성과라고 기자들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했다. 그렇게 깊이 파서 쓴 소식은 신문 가치가 있는 톱소식이 되군 했다. 결국신생한 우리 《길림신문》 에서는 당팔고식 장편회의소식과 지방지도자들의 연설로 판면을 도배하던 일이 기본상 사라지고 필요한 회의보도는 짧게 알맹이만 다루었다. 지어 제목뉴스란것을 만들어 제목한줄로 회의소식을 전하는 때도 있었다. 당시 그것은 실로 파격적인것이였고 우리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신문은 내용과 형식의 결합체인바 좋은 내용이라 해도 좋은 형식의 맛갈진 표달방식이 없다면 효과를 최대한 낼수 없다면서 보도내용들은 되도록 조선족의 생활을 조선족의 마음에 드는 형식에 담아 보도하였다. “농가보감”, “흥부박”, “노다지곬”, “우리 마을”, “인생의 꽃철”, “주부생활”, “이 얘기 저 얘기”, “아리아리랑”, “60청춘닐리리”, “장백의 메아리”, “장생불로 원하시면”, “오는 말 가는 말”, “반디불”, “진담록”, “회초리”, “꽃망울”, “산들산들 보슬보슬” 등 다양한 코너를 개발했는데 이런 코너들은 모두 짙은 민족적정서를 담고있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창간 5주년을 맞아 그간의 코너를 통계낸적이 있는데 각종 전문란과 부간이 50여가지나 되었다.     사설, 론평원의 문장이나 단평 등 신문평론은 불가결의 신문쟝르이다. 이런 쟝르의 글이 농민, 시민과 기층간부 등 《길림신문》의 독자층에 잘 읽힐수 있게 하고저 윤효식선생은 역시 개혁을 시도했다. “오늘의 화제”가 그 실험의 하나였다. 가급적으로 알기 쉽고 생동한 언어로 당의 주장과 지침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군 했는데 심지어 시의 형식과 언어로 언론을 쓸 때도 있었다.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독자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그의 고심을 엿볼수 있었다.   창간때부터 민족성, 지방성 특성을 선명하게 살린 풍부한 내용과 생동활발한 문풍을 바탕으로 하나의 독특한 신문 문풍을 형성하였고 와중에 편집기자대오를 키워내여 특유의 《길림신문》풍격과《길림신문》정신을 창조해냈다. 그 정신과 풍격의 영향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오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길림신문》초창기에 신문의 백성티를 주창한 윤효식선생의 동기와 실험정신을 높이 사야 할것이며 그를 《길림신문》풍격개혁의 개척자, 나아가 《길림신문》풍격의 정초자라고 평가해도 결코 무리는 아닐것이다.   7. 《길림신문》 의 일터책임제   초창기에 편집기자들에게 고무와 편달이 되는것은 평보(评报)였다. 복도에 평보란을 만들어 걸어놓고 책임평보원이 평보를 하군 했는데 모든 편집기자가 자유로 평보를 할수 있고 반론도 허용되여 평보활동이 꽤 활약적이였다. 그러나 그러는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년말장려에 우수원고 몇건씩 표창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것을 일상화하지는 못하고있었다.   당시 전국보도계에서 솔선적으로 대담하게 신문개혁을 하여 소문을 크게 놓은 신문이 있었다. 호북성 효감지구의 《효감보(孝感报)》였다.     1989년 3월 중순경 나와 림웅길은 윤효식선생과 함께 무한으로 《효감보》고찰을 떠났다. 주로 《효감보》에서 일터책임제를 제정,실시한 내부관리경험을 배웠는데 그들의 생신한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계발을 주었다. 내친 걸음에 우리는 무한의 《장강일보》와 기자협회도 순방했다. 그들도 《효감보》의 관리방법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고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많이 듣고 감정교류를 했으며 가끔 책임제의 일부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리기도 했다. 순방을 끝내고 돌아온후 윤효식은 나더러 “길림신문사 취재편집, 행정인원 일터책임제” 초안을 짜보라고 했다. 《효감보》의 책임제도는 매우 세밀하게 제정됐으나 우리는 자체의 실제에 비추어 되도록 중점을 살리고 실제 락착에 편리토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렇게 기본임무, 상벌규정 등을 내용으로 책임제를 성문화한 다음 의견청취를 하고 몇번 수정을 거쳐 그해 6월부터 2개월간 시험실시하고 8월부터 정식 실시에 들어갔다. 그때를 시점으로 다달이 원고료를 지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시초에는 년간 원고료 합계가 2~3만원 좌우 되던것이 그후 매 2~3년에 책임제를 원래의 토대우에서 점차 조정을 하고 한번씩 수정하면서 원고료가 갈수록 늘어나 신문사본부가 장춘에 들어온 뒤에는 년간 7~8만원 선에서 여러해 지급되였던것 같다.   이 조치는 전체 임직원, 특히 편집기자들의 사업열성 향상에 유조했다. 질을 따져 우수한 원고에 대한 원고료를 후하게 책정했으므로 보도질을 높일수 있었다.   (《길림신문사 사람들》연변출판사 2015,12)
23    희로애락이 엉킨 로인세계 댓글:  조회:5521  추천:3  2015-03-10
    희로애락이 엉킨 로인세계      사회의 중심에서 사업과 삶의 주력으로 살고있는 청장년들의 세계도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사회의 변두리에 밀려나 비주력의 삶을 살고있는 로인세계 역시 다양하고 다채롭다. 사회로부터 소외되기 십상인 그들의 삶이 사회의 보다 깊은 주의와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할 필요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희로애락이 엉켜있는 로인세계를 초보적이나마 들여다보기로 한다.                                                                     ---편집자   리영(60세):   지금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해서 다섯 식솔이 어울려 살아갑니다. 나이 이젠 예순이라 로년기에 들어섰어요. 젊을 적 시집가서 6~7년을 재미있게 살아봤어요. 그러나 자식을 낳고나니 살림살이도 복잡해지더군요. 출근을 해야지, 아이를 키워야지. 그래도 덩덩 철이 없이 그게 재민가구 살아왔어요.   철을 알고 나니 남편이 시름시름 앓다가 86년도에 세상 떴습니다. 중년에 탑이 무너지니 앞이 캄캄해납디다. 자식 다섯을 두고 떠나간 남편이 야속하구 살길도 막막해 몇 번 통곡도 쳐보고 했어요. 안도 송강서 살다가 밥벌이 하려고 딸 둘 데리고 명월진으루 나왔지요. 제집도 없이 8년이나 떠돌이 셋집살이를 하면서 헤맸어요.   이루다 말 못할 고충을 겪으며 아이들을 성가시키고, 맏딸도 날 따라다니며 고생 많이 했지요. 나그네 없이 혼자 살자니 별 생각 다 듭디다. 물가가 자꾸 올리뛰는  통에 어디 셋집살이를 할수 있어야죠? 하는 수없이 아들 집에 들어갔지요. 그러니 다른 방향으루 심리고통이 생겨납디다. 신경이 약해 잠두 잘 안와요.   가운데 풍 하나 치고 사는 쬐꼬만 살림이라 한숨을 지어도 기침이 나와도, 오줌이 마려워도 밤 잘 때 조심성 없을 수 있나요? 시집살이죠. 아들도 맘 고와 역시 시집살이고, 애 에미의 눈치를 봐야 하니깐. 젊은 세월 꿈 같이 지나가고 남들 부부간이 몹시 부러워요.   옛날에는 부모자식은 같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기에 로인들은 밥 안 짓고 빨래 안하고도 호령 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지금 젊은이들은 부모공대사상이 아주 적어졌거든요. 그래 로인들은 하루도 맘 편히 살려고 로인활동실을 찾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지는 석양 늘그막에 맘편히 살 살아보자 마음 먹구 곁 동무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활동실로 춤 추러도 다니면서 하루하루 지우고 있어요. 밤 열시까지 춤추고 돌아오면 배가 고프지만 아들집이니 떨거덕거리며 맘대로 들춰먹고 끓여먹을 수도 없고, 시걱 때도 음식 습관들이 서로 다르니 입에 잘 맞지 않지만 어디 타발하게 됐나요?   원숙자(61세):   그러길래 난 자식과 갈라져 사는 게 좋다는 주장입니다. 왜? 서로 자유롭기 위해서죠. 자식들은 명일이면 부모생각 하지만 그저 그때뿐이죠. 평소에는 다 자기 일에 바삐 보내다 보니 부모들이란 건 있으나 마나한 존재죠.   옛날에는 부모자식은 같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기에 로인들은 밥 안 짓고 빨래 안하고도 호령 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지금 젊은이들은 부모공대사상이 아주 적어졌거든요. 그래 노인들은 하루도 맘 편히 살려고 노인활동실을 찾습니다. 내나 령감이나 아이 적부터 고생을 많이 하며 자랐어요. 내 21살에 시집가서 30여년 서로 아끼고 고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인젠 살만하니까 5년 전 령감이 병으루 돌아갔어요.   령감 항미원조 나가 고생하구 돌아와 공안사업을 37년 하면서 내내 바삐 보냈어요. 교통대 일을 보면서 한밤중에 술 마시고 돌아오면 나하구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지만 난 공장일 보구 피곤해서 돌아눕기 마련이였습니다. 우리 령감 한뉠 복 못 누려 보셨지요.   아이 넷을 나아 중도에 하나 죽이고 둘이서 아끼고 모아 아이들을 출세시켰는데 그러고 나니 령감이 병 걸려 세상 떴지 뭡니까. 령감은 세상 뜰 때 병원에서 내손을 잡고 “노친과 같이 유람 한번 못 다닌 게 죄송하고 원통하고 유감스럽다”고 울면서 말합디다. 리직휴양해서 반년도 안 돼 사망한 게 아깝기 그지없어요.   지금 월급만 받아서는 살기가 안돼요. 후에 장사를 좀해서 늘그막에 쓸 돈을 벌어놓으니 등아바이 노선이 정말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내같은 신세도 몇 만원 저금해 놓구 살 수 있으니, 자다가도 내 신세 좋게 된게 감개무량해서 잠 못들 때 많아요. 그래도 그냥 사회무도 활동엔 참가 안했어요   옛날 생각 오늘 생각 끝없이 하면서 집에서 홀로 울 때가 많았지만 사회활동생각 못했어요. 그러다가 재작년 아들집에 바람쐬러 갔다가 산에 올라가보니 농민들이 농사짓는 게 보입디다. 그때 무슨 생각 했겟어요? 애초에 농민령감을  얻었더면 매일매일 함께 농사를 짓구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나는 사회사업에 바삐 보내는 시내간부를 얻어 함께 있는 시간도 없이 일생을 외롭게 보냈지 뭡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에서 혼자 실컷 울었어요. 이런 걸 누구와 말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혼자 살다보니 록음기나 방송이나 텔레비가 동무 됩데다. 그러다가 어느 동무가 꼬시는 바람에 예라 무도장에나 다녀보자. 이런 생각을 갖게 됐어요.   원래는 무도장 다니는 사람 은 다 작풍이 나쁜가 했어요. 한번은 동무와 함께 무도장엘 가보니 이상하게도 그 무도곡에 심정이 유쾌해지더군요. 60살 먹도록 무도장 못 와봤는데 듣기와는 달리 무도 추는 사람들이 다 작풍이 나쁜 게 아닙디다. 처음 아바이들 손을 쥐니 막 몸이 떨리지 않겠어요?    원래는 무도장 다니는 사람은 다 작풍이 나쁜가 했어요. 한번은 동무와 함께 무도장엘 가보니 이상하게도 그 무도곡에 심정이 유쾌해지더군요. 60살 먹도록 무도장 못 와봤는데 듣기와는 달리 무도 추는 사람들이 다 작풍이 나쁜 게 아닙디다. 처음 아바이들 손을 쥐니 막 몸이 떨리지 않겠어요?   그 아바이 하는 말이“아, 이 동무 떨긴 왜 이리 떠우?”그래 내 “처음 손을 쥐여보니 그런가 봅꾸마, 많이 량해합소.”했습니다. 춤을 자주 추니 지금은 안 떨립니다. 작년부터 이런 활동에 참가하니 자연 몸을 거두게 되고 옷도 사 입고 싶어요. 누가“어째 아매는 점점 젊어짐둥?”하길래 “무도장에 댕겨 그렇다이”하구 대답했지요.   그전엔 “로년에 내 팔자 기구하다. 자식들두 등한하다”는 생각에 옛날 생각 자꾸 떠올리며 밤잠 설치는 일이 많았는데 집울타리 떠나 무도장 다니면서부터 잠 잘 자고 마음 상 해방 받은 느낌이예요. 매일 안 빼 놓구 다니는데 하루라도 안가면 허전감이 들 정도죠. 내 기분이 늘 좋아있으니 며느리도 좋아하는 눈칩디다.   “어머니 어떻게 무도장 선택하셨습니까?”하길래 “친구들이 가자구 해서”했더니 “참 잘 선택하셨습니다. 늘 아바이 생각에 울고 하시더니 정말 잘 선택하셨어요.”하더군요. 령감이 무도장 하번 못 다니고 돌아간 게 불쌍하기 짝이 없어요. 지금 노인들의 생활이 얼마나 좋습니까? 사는게 재미있으니 죽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저 오래 살구 싶어요.   오정옥(62세):   사회가 아무리 좋아도 내 좋아야 좋겠는데 사는게 어려우니 죽고 싶은 생각이 들때 있습니다. 자식 손구들을 키우느라니 우리 좋은 세월 다 갔어요. 늦은 거죠.   허금선(59세):   나는 농촌처녀로 신봉쟁이 남편한테 시집갔는데 그땐 그게 어찌도 자랑스럽던지 남편을 도끼 한번 안 들리고 몸 보양도 열심히 시켰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몸도 나고 젖통도 여자 것 만큼이나 컸지요. 그렇게 생때같던 남편이 남매 셋을 남겨놓고 갑자기 급병으로 사망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스물일곱에 남편 여의니 남편생각보다도 4남매 키울 걱정 더 커 그 부담에 눈물도 안 나데요. 너와 나 만들어놓은 새끼를 다 내버려두고 왜 혼자 갔어? 고생이 막심하니 설음만 북받치겠지요. 내가 울면 아이들이 따라 울가 봐 내놓고 울지도 못하구. 아무커나 그러다가 도시에 들어왔구 쏘련 가 1년 벌어 집도 한 채 사놨구요. 아이들두 성가시켜놨어요.   지금은 자식들 덕에 사는데 늘 아이들한테서 받아쓰는 게 그냥 안쓰러워요. 내가 자식들에게 줄때면 통쾌하지만 자식들이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나를 섬기니 고맙긴 해도 마음이 내내 무겁습니다. 한국 가서 내 힘으로 벌어다가라도 썼으면 유쾌하겠는데 지금 그게 안 돼요.   난 소갈비 먹길 좋아하는데 아들은 직방 녀편네하고 어머니한테 소갈비 사다 대접하라고는 못하고 “오늘 구추한데 소갈비나 사다 끓이오.”그럽니다..... 우에 셋은 제 에미 고생을 아는데 아래 셋은 뭐라는지 압니까? “엄마, 그런 말 맙소, 누가 그렇게 많이 낳으랍데?”   아들며느린 “어마이, 우릴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슴둥. 그렇게 생각 맙소!”하구 날 위안하지만 어려운데서 갖다 쓰니 내 심정 가벼울 리 있나요? 자식들 일을 힘자라는 대루 해주어야 시름도 좀 놓이죠. 그래서 지금 셋집 맡고 따로 나가  살면서도 아침이면 아들집에 가서 서둘러 손자 애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구 낮엔 친구들과 놀다가도 저녁때만 되면 허둥대며 또 손자 데리러 가요.   리옥금(62세):   자식들두 답답할 때가 많아요. 저녁이면 짜개바지손자를 이 늙은것한테 확 밀어 맡기고는 아무 관계도 안 해요. 그리고는 늘 한밤중까지 놀다 오는데 이 에민 아주 종노릇이나 하는 셈이죠.   오영금(66세):   49년도에 결혼을 해서 6남매를 낳고 64년도 큰 것이 열여섯 살, 막내 놈이 세 살 먹었을 때 남편을 여의고 “파밭”을 매며 이악스레 살아왔어요. 오죽하면 동네사람들이 날 보구 꽁지 없는 소라 했겠습니까. 고생 끝에 락이라구 몹시 어려웠지만 아이들을 다 공부시키고 큰 아들은 출세를 해서 지금 자치주무역공사에서 일보고 있어요.   나는 농민이기에 퇴직금 같은 건 없어도 별로 속태우는 일은 없어요. 오늘 행복하니 죽은 남편 더 생각나요. 연길에 와서 오리알 장사를 3년 해서 돈 좀 벌었어요. 좀 살만하게 되니 동무들과 같이 춤 추러도 다니고 싶어집디다만 아이들이 성가를 해서 손자를 보니 그것들을 봐줘야지요. 손자가 유치원에 가니 친구들이 무도장에 다니자고 해서 춤을 배웠지요.   배우고 나서 한 5년 안다니다가 재작년 5월부터 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 아글타글 벌어 재산 늘구자 들었는데 집금은 사상이 변해서 곱게 입고 바르고, 사상 점점 틀려가요, 호호...3년 춤추러 다니면서 집에 령감 없다는 소리 안했어요. 령감이 없다면 아바이들이 막 끌어안고 손도 더 꽉 잡고 하니까 그냥 집에 령감이 계신다고 하는 거죠. 그래야 그 아바이들이 마음대로 못하니까요.   설이랑 되면 손주 놈들한테 돈을 10원씩 5원씩 쥐어주는데 그럼 할머니 제일이라고 찧고 까불고 좋아해요. 할머니도 돈이 있어야 값이 있는가 봐요.   전영실:   남편 집은 8남매로 살림이 구차했습니다. 난 어려 공불 잘했는데 일본 류학도 희망있었지요. 그런데 19살 시집을 와서 식솔 많은 가문에서 남편 공부시키고 난 시형네와 같이 농사질 했지요. 남편은 고중마치고 현총사에 배치 받아 일을 보았습니다. 아이 4남매를 낳아 셋을 대학 보내고 졸업까지 시켜놨어요.   그 돈 대느라 10년 동안 여자 몸으로 동불사역에서 석탄목도, 벽돌공장일, 막노동, 페물수매......못해 본 일 없어요. 령감노임으로 턱도 없어요. 령감은 병퇴를 해서 딸을 대신 직장에 들여보내고, 지금 자식들 다 제절루 나가살아요.   맏아들은 대학 마치구 대경유전에서 간부노릇 하고 있고 막내아들놈은 장춘설계학원 공부를 하다 병으루 중퇴했습니다. 맏이, 둘째네는 다 잘 사는데 막내아들이 제 노릇을 못해 잘못 사니 노상 가슴 아픕디다. 막내 놈 때문에 애도 많이 태웠어요.   다른 놈들은 다 일하러들 다니는데 막내 놈은 타락해서 집에서 술 먹구 주정하구. 그러니 머릿속에 그냥 그놈밖에 없구 얼마나 가슴 아프던지.그러다 한국 가서 1년 연수받고 돌아와 지금 대련의 한국회사에서 엘리베이터가설수리를 하는데 처자까지 다 데려다 살구 있어요. 인젠 만 시름 다 놨어요.   조순애(63세):   스무살에 시집와서 아들 둘, 딸 셋을 두었는데 딸들이 지금 내 생활비를 대요. 아들은 장사를 한답시고 돈 꾸고 집 2만 여원짜리 까지 다 말아먹고 피신을 하니 빚군들이 막 쓸어들지 뭡니까. 세집 맡고나오니 집세 잇기 힘들어요. 며느리가 아이 열 살 먹도록 일할 생각 안하니 답답해요.    그전에 아글타글 벌어 재산 늘구자 들었는데 집금은 사상이 변해서 곱게 입고 바르고, 사상 점점 틀려가요, 호호...3년 춤추러 다니면서 집에 령감 없다는 소리 안했어요. 령감이 없다면 아바이들이 막 끌어안고 손도 더 꽉 잡고 하니까 그냥 집에 령감이 계신다고 하는 거죠. 그래야 그 아바이들이 마음대로 못하니까요.   일은 안하고 외지에 갈 소리, 손자 봐달라는 소리밖에 없어요. 딸들이 내 생활비를 대는데 야금야금 그 속에서 아들네를 빼준 돈을 합치면 3000원 잘 될 거래요. 딸에게서 돈을 받아서 아들을 주니 도리 상 안됐지만 어쩌겠습니까. 딸은 내 낳은 새끼니까 내 마음대로 욕해도 일없지만 며느린 안 그래요.   난 딸 생일엔 10원도 안내놓다가도 며느리생일엔 차마 10원은 못 내고 100원 내놓는데 내 어망결에 한말에 그게 딸한테 탄로나 딸이 워라겠습니까. 딸 생일엔 10원도 아까워하다 며느리한테는 100원씩 척척 내미니 엄마 돈이 있소 양?   아들놈은 돈 꿔 쓰는 주제에 할 말은 그냥 있어요. 엄마, 내 돈 벌면 엄마 집 한채 사 낫을게. 그럼 엄마, 무도장 다니겠으면 무도장 다니구 맘대루 합소. 그 말 한마디에 내 속이 싹 녹아나서 그래 그냥 얼리워 삽니다.   리영금:   아들며느리 다투면 속이 번져져요. 아이 하나 줴박아도 속이 번져지고 아들도 제 에미와 네편네 사이에서 속 태우고 눈치놀음 놀 때 많아요. 그래서 나도 눈물 흘릴 때가 있어요. 난 소갈비 먹길 좋아하는데 아들은 직방 녀편네하고 어머니한테 소갈비 사다 대접하라고는 못하고 “오늘 구추한데 소갈비나 사다 끓이오.”그럽니다.   때론 며느리 모르게 나한테 소비돈도 쥐어주지요. 우에 셋은 제에미 고생을 아는데 아래 셋은 뭐라는지 압니까? “엄마, 그런 말 마오, 누가 그렇게 많이 낳으랍데?”   김성혜(62):   자식많은 분들이 이것저것 다 생각하자면 끝이 없어요. 로인들은 자기로 자기마음 달랠 줄도 알아야 해요. 령감이 사망한 뒤 의지할 곳 없어 자식들 집을 이집 저집 다니면서 어렵게 고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렵게 살면서 자기를 달랠 줄 모르면 그 마음고생에 못살아요.   젊은이들한테 부모모시는 문제가 있는데 지금 자식들은 옛날 부모공대전통을 거의 잊고 있는 것 같애요. 지금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는데 관건은 아마 경제에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돈이 있으면 서로 모시려 하고 돈이 없으면 천대하지요.   자식들의 마음씨 곱고 밉고가  주요한게 아니고 돈 없는 부모를 모시면 제 살림 차리기가 그만큼 힘들 테니까 자식 립장을 생각해서라도 부모들은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요즘 기풍이 이렇게 돼가고 있으니 우리 로인들의 신세가 가긍하고 불쌍해서 섭섭하기를 이를 데 없어요. 사실 돈 없는 부모를 모시려는 자식 극히 드물어요.   령감은 번 돈을 아이들한테 나눠주라고 하지만 내 의견은 안 그래요. 나눠줄게 아니라 다짐받고 꾸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랭장고, 텔레비 같은 건 사줄 수 있지만 돈은 나눠주지 말아야 하지요. 돈을 세워놨다가 주기는 쉽지만 거둬들이긴 힘들어요.   로인활동도 돈 없인 참가하기 힘들지요. 돈이 없으면 구경만 해야 하니까 멋없는 거죠. 자식들이 부모들의 심정 헤아려 소비돈이라도 드려야 할텐데 그렇지를 못하니 그럴 땐 부모들이 한쪽 날개가 축 처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식들이 돈을 많이 벌면 어떻겠는지? 그런데 돈 많이 번다 했자 그것도 소수일 뿐이죠.   딱 로임을 가지고 사는 자식들이 소비돈 쑥 쑥 내놓기도 어려울 테죠. 그렇기에 로인들도 자기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들 돈만 바랄 수 없지요. 명절에 돈이 없어 손자들에게 5원,10원씩밖에 못주면 좋아안하고 100원, 200원씩 쥐여 주면 아들도 며느리도 다 좋아하지요.   지금 로인소비도 실은 대단히 많습니다. 퇴직노인들이 활동에 한번 참가하려 해도 수백원씩 써야 하는데 명절에 손주들한테 쑥쑥 내밀 돈이 어디 그렇게 많겠습니까?   최송죽(62세):   확실히 늙은이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난 로씨야에 가 보짐장사도 하고 상점도 꾸리고 해서 돈 좀 벌었는데 돈이 있으니 속이 든든합니다. 령감은 번 돈을 아이들한테 나눠주라고 하지만 내 의견은 안 그래요. 나눠줄게 아니라 다짐받고 꾸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랭장고, 텔레비 같은 건 사줄 수 있지만 돈은 나눠주지 말아야 하지요.   돈을 세워놨다가 주기는 쉽지만 거둬들이긴 힘들어요. 령감이 병 보이러 북경갈 때 돈 1000원,2000원 내미는 자식 없습디다. 자식들 다 잘살지만 말입니다. 주긴 쉽지만 그때 뿐이죠. 버릇도 잘못 궂히구요. 그래서 자식들에게 돈을 꾸어는 주지만 나눠주지는 않아요.   고복순(65세):   서른 댓에 남편을 잃고 여때껏 과부로 늙어왔어요. 내 37살 먹던 해 시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젊은 나이에 어찌 생과부로 늙겠소. 아직 늦질 않으니 자리를 옮겨 앉게나  하겠지요.   그날 저녁 시누이가 한 남자를 데려왔는데 석유등불아래 어슴푸레한데서 서로 똑똑히 보지도 못하고 내 했다는 소리가“전 새끼도 가득하고 시집은 안가겠으니까 다신 찾지 마세요.”지금 보면 그때 머저리짓 했지요. 그 후 길에서 그 사람 똑똑히 봤는데 아주 잘 생겼습디다. 서로 다 후회했지만 후회한들 엎지른 물이지요.   59살 때 또 좋은 자리 있었는데 아직 안 늦으니 만나보라는 권고가 들어왔을 때도 늙은게 사람 웃기겠다 두려워 대바람 거절해버렸지요. 그때라도 갔더면 한번 화끈히 살아봤겠는데......지금은 싫어요. 살다가 령감이 풍이라도 맞으면 그 시중 어떻게 합니까. 아무튼 내 고생은 고생대로 다 했어요.   지금은 행복합니다. 등소평아바이 덕분에 우리 잘 살고 있어요. 그저 고독한 게 문제지요. 그전엔 집 없는 게 걱정이였는데 지금 집이 있으니 고독한 게 큰 걱정이이지요. 자식한테 얹혀살면 자유가 없고 혼자 살았으면 좋겠어요. 친구들끼리 어울려 자유롭게 살고싶어요.   김성혜:   로인들의 혼인문제도 살펴보면 간단하지는 않습디다. 서로 맞아 잘 사는 분들도 있지만 갈라지는 일도 많아요. 실제 문제는 자식과 관계돼요. 서로 좋다가 자식문제 때문에 갈라지는 거죠. 시초에 자식들이 다 동의해서 결합하구 또 서로 마음 맞아 살지만 살다보면 서로 대방의 자식들을 홀대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왜 제자식만 관심하구 내 자식은 관심 않나? 대방의 손군이 와있으면 이쪽에서 찡내고 하니 모순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서로 대방의 자식, 손군들을 생각 못해주니까 자연 불화가 일어나는 거지요. 재혼해서 살다가 갈라지는 건 대부분 원인이 자손문제와 관계돼요. 이 문제에서 넓게 생각하는 분들이 적어요.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늘그막에 결합하면 마음고생만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남의 살림에 가서 남의 령감 옷 빨아줄게 있느냐고도 말합니다. 옷 빨고 밥 짓는 게 큰 문제 아니라 치고 아무튼 부담이고 자유롭지 못할거라는 겁니다. 지금 어떤 젊은이들은 정부를 두고 있다는데 로인들도 결혼 안하구 사는법이 없을까요?   있는 것 같애요.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춤을 추다가도 맞갖지 않으면 안 추면 되는 거지요. 로인들도 그저 마구 춤추는 게 아니라요. 늘 춤추러 다니는 로인들은 서로를 잘 알고있어요. 서로 거래하면서 고독이나 말리고 말동무가 있고 같이 춤이나 추면 돼요.   혼자 살면서 보니 외로움이 너무 어렵습니다. 식솔 여섯이 있다가 왜 이렇게 혼자 있냐? 밥 끓여놓고 혼자 먹자고 보면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막 눈물이 솟구쳐서 밥도 못 먹고...... 늙은이들두 친구가 있어야 해요. 부모들에게나 자식들에게 못할 말도 친구에게는 하지요. 친구에게는 속심 말을 다 할 수 있어요.   로인들도 사람마다 성격이 달라요. 어떤 사람은 혼자 다니기 좋아하고 집에 홀로 조용히 있기를 원하지요.   나는 친구 대여섯이 모여 먹고 얘기도 나누고 싶어하는 성민데 제일 유쾌할 때는 무도장에서 춤출 때이고 그 외 마작도 놀구 문구도 칩니다. 마작을 놀면 시간 가는 줄 몰라 좋아요. 마작을 놀면서 롱담도 하고 별 얘기 많아요. 그리고 텔레비를 틀어놓고 가무도 보고 련속드라마도 보고 노래 감상도 즐깁니다.   오정옥:   5년 혼자 살면서 보니 고독이 너무 어렵습니다. 식솔 여섯이 있다가 왜 이렇게 혼자 있냐? 밥 끓여놓고 혼자 먹자고 보면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막 눈물이 솟구쳐서 밥도 못 먹고......   조순애:   늙은이들두 친구가 있어야 해요. 부모들에게나 자식들에게 못할 말도 친구에게는 하지요. 친구에게는 속심 말을 다 할 수 있어요. 령감한테도 안할 말이 있어요. 동무도 늘그막 동무가 좋아요. 서로 믿어주고 호흡이 통하고, 친구를 사귀면 진정한 친구를 사귀여야 하지요. 그래야 서로 리해하고 도울수 있거든요.   정신적으로 서로 의탁하게도 되는 거죠. 여러 날 못 만나면 만나고 싶고 소식 알고 싶고 서로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겁니다. 마음속 고통도 서로 털어놓고 나누고 위로하고 좋은 일 있어도 기쁨 서로 나누면서 마음이 즐거워지는 거죠. 외로움도 그러는 가운데 풀어지는 거죠.   1997년 5월 6일   
22    중한일《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한국에서 댓글:  조회:5338  추천:4  2014-04-29
중한일《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한국에서 [ 길림신문 박문희] 발표시간: 2014-04-28 서울 우이동에서 향항 탕원가내외가 기증한 공자동상 제막식도 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 대회장. 중국(향항 대만 포함), 한국 일본의 서화 작가 수백명이 참가한 한국국제서화교류사상 최대규모의 서화전이 한국에서 성대히 열렸다. 한국상지학원과 한국비림원에서 주관하고 한국문화체육관광부와 주한중국대사관에서 후원한 이 《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論語碑林書畵大展)》은 16부터 20일까지 5일간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과 노암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렸다. 그간 공자동상제막식도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서 치러졌다. 대한민국 김영삼전대통령, 이수성전국무총리,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한성호총회장, 중국당대문화우공으로 불리는 중국한원비림창시인 리공도선생 등 인사들이 축사를 보내왔다. 이번 서화대전에서는 중국, 한국과 일본의 서예미술작가 350명이 참가해 다양한 서화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중국 경필서법가협회 장화경주석 등 중국 내지 북경, 길림, 흑룡강, 운남, 하남 등 성, 시와 향항특별구 및 대만성의 서예작가 497명이 론어경구(警句)작품을 대거 출품해 한층 더 관심을 자아냈다. 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 서예작품전시장 일각. 이번 대전은 론어비림박물관 및 론어대학원대학교 설립에 힘을 싣기 위해 마련됐다. 앞서 중국(대만 포함), 한국, 일본의 석학들과 예술가들은 21세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사고의 구현과 인류정신사의 보배인 론어를 현대에 되살리고 리기주의와 배금사상을 배척하자는 취지에서, 후학들에게 론어의 정신과 학문을 체계적으로 전할 공간으로 비림박물관과 론어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본 서화대전 발기자의 한사람인 한국비림원(리사장 허유)에 따르면 론어비림박물관과 론어대학원대학교는 한국상지학원 설립자인 김문기원로가 기증하는 10만㎡ 부지에 조성될것이라 한다. 이에 따라 이번 전시회는 론어배움터 마련이라는 동아시아 학계 및 예술계의 오랜 바람이 이뤄지는 출발점이 될것으로 전망되고있다. 공자동상제막식은 4월19일 오전 김문기원로의 소유지인 서울 강북구 우이동 234-2번지에서 치러졌다. 공자동상은 향항공교(孔敎)학원의 탕은가(湯恩佳)원장이 기증했으며 탕원장내외가 이날 제막식에 참석했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234-2번지에 세워진 공자동상. 중•한수교 이전부터 중국과 각종 교류를 통해 비림문화의 력사성을 깊이 인식했던 한국비림원 허유리사장은 《중국 하남성 한원비림 등 중국의 비림문화에 크게 영향받아 한국에서의 론어비림박물관 건립계획을 추진하게 됐다》면서 《론어비림에는 공자상을 사표(師表)로 모시고 론어를 돌에 새겨 전시하고 각종 행사장, 교육관, 수련관을 마련할 계획》이며 《론어비림이 완공되면 종교단체와 문화예술계와 협력하여 국내외 각종 행사를 유치하고 각국과 문화, 학술교류 등을 추진하겠다》고 표시했다. 허유 리사장은 또 《이미 세계적인 론어비림 성지(聖地) 건립을 위해 한•중•일 전각자 1,000여명이 성지조성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허유리사장과 오랜 친구인 중국경필서법협회 장경화주석은 《2013년 1월 18일 중국 북경에서 허유관장을 만나 공자동상은 향항공교학원 탕은가원장이 기증하셨으니 중국경필서협에서 론어를 작품화하여 주시면 한국에 론어비림과 론어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허유선생의 말을 듣고 리사회에서 결정한 뒤 전국 유명서예가 497인에게 부탁, 2013년 9월에 완성하여 허유관장한테 증품하였다》고 이번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경위를 소개했다. 허유 리사장은 현재 한국비림박물관장에 서예가와 력사가를 겸하고 중국의 한원(翰園) 비림 고문, 중국 상지(尙志)비림 명예관장, 중국 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등 비림문화 관련직외 세계문자 평화공원 추진위, 세계성경비림박물관 건립위, 공자론어박물관 건립위 리사장으로 보다 큰 꿈을 꾸고있는것으로 알려졌다.
21    오덕장로주의 전설 리동춘 댓글:  조회:5551  추천:4  2014-04-28
  태동하는 꿈   사람의 마음속에 항상 자리하는 꿈, 말하자면 집착이라 할 정도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아이템이나 목표가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꿈의 씨앗이라고 한다.   2005년 50세의 리동춘이 연변진출을 결심했을때 그의 가슴에서는 20대의 젊은이에 못지않은 꿈이 태동하고있었다. 그 꿈은 무엇이였을가?   연길시에서 약 60리 떨어져있는 산간계곡 의란향 련화동의 400헥타르 개활지에 한국의 한 기독교단체와 중국의 한 공산당원이 이끌어가는 조선족민간단체가 협력하여 생태과학의 시대를 선도하는 미래지향의 생태공동체사회를 조성해간다는 꿈이였다. 깊숙한 산속에 펼쳐갈 꿈속의 그림에는 록색산업단지, 생태민속촌이 있었고 생태주택과 별장단지, 로인시대에 대비한 실버타운이 있었으며 초대형 산중호수와 수상공원, 그리고 자연동물 서식지도 있었다.   아라비안나이트같은 허황한 공상인가? 하지만 사고하기를 즐기는 머리 하나와 젊은 패기와 미래로 향한 꿈 하나로 1997년 해체위기에 놓인 조선족촌들을 통합하여 조선족 신도시“백두산타운”을 일떠세움으로써 일약 중국 조선족사회의 밝은 별로 떠올랐던 이가 바로 당시 제9기 전국인대대표로 활약하던 흑룡강성 해림시 백두산그룹의 회장 리동춘이였음을 상기하면 이런 의문은 다소나마 풀릴것이였다.   당년, 북경주재 우리 민족의 엘리트들이 펼치는 강력한 유세에 못이겨 민족의 소임을 다하고자 친인척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창설한 백두산그룹을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결연히 고향을 떠나 혈혈단신 북경에 려장을 풀었던 리동춘.   동북삼성과 북경 사이를 누비며 조선족농촌지도자 한국연수를 수차례 조직하고 농촌진흥을 위한 전국범위의 심포지움도 개최하는 등 조선족 농촌의 후계지도자 양성에 땀동이를 쏟으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땅우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서있는것이 아니라 뜬구름우에 둥둥 실려가는듯한 석연치 못한 느낌에 남몰래 고민하고있던 차 리동춘은 뜻하지 않던 일로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연변진출로 인생의 궤적을 바꾸다   때인즉 한국두레공동체 김진홍목사가 당시 연길시정부로부터 심산유곡의 땅 400헥타르를 임대하여 추진하던 개발프로젝트가 연변 현지에 파견된 실무진의 불찰로 난항을 겪던중, 때마침 언론을 통해 리동춘의 사적을 접한 김목사가 리동춘을 비롯한 중국조선족사회에 땅을 기부해주는 방법으로 이 난국을 수습해볼 료량으로 리동춘에게 사업요청을 해왔던것이다.   “연변으로 들어가서 함께 사업을 해보심이 어떨가요?”   결국 리동춘은 김진홍목사로부터 모든 개발권한을 위임받고 우선 100헥타르의 땅을 인수받아 2005년 그 깊은 산속에다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를 설립하고 개발사업에 본격 착수하게 되는데 비록 기획중의 프로젝트가 남들 보기에 너무 거창했던건 사실이지만 실제 첫 합작사업으로 택한 품목은 지극히 현실적인 전통된장 생산이였던것이다.   그 품목선택의 리면에는 혹 리동춘의 햇내기적 기억이 깔려있었을지도 모른다.   1955년 흑룡강성 해림시 한 농사군 집안 7남매중 셋째로 태여난 리동춘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소학교시절 갑자기 알지 못할 원인으로 페결핵과 결핵성 륵막염에다 또 한쪽 다리가 쫄아붙는 이상한 병까지 덮쳐 다들 그를 얼마 못살고 죽는다고 했었다.   페결핵은 전염이 되는 병이라 그는 메주덩이를 가득 달아맨 두 간벽사이의 어두운 골방에 자기를 가두어넣고 진동하는 메주냄새와 씨름하며 어머니가 만들어준 메주가루를 일년 넘게 먹으며 버텼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삶의 의욕이 생겨나면서 그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시작한다. 문제의 다리를 어린 동생들더러 꽁꽁 묶어 단단히 붙잡게 한다음 자체로 수십방의 쑥뜸을 뜨면서 이를 앙다물고 일어서는 연습에 매달린다. 두다리를 와들와들 떨면서라도 기적적으로 자리를 차고 일어설수 있게 되자 그는 한술 더 떠 겨릅대같이 마른 다리로 아버지가 신던 무거운 구식군용구두를 끌고 비칠거리며 매일 한시간씩 마을둘레를 철벅거리군 했다.   이렇게 하기를 일년 여, 그는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특유의 인내력과 위기극복의 지도력으로 스물한살에 공청단 서기를 하고 서른살에는 신합촌의 당총지서기로 되여 촌기업 백두산그룹을 일떠세운다.   혼신을 던져 일하는 그의 의지를 떠보기라도 하듯 위기가 또 한번 그를 시험대에 올린다. 40대 초반 몸속 위장에 종양 다섯개가 생겨서 대수술을 받게 되는데, 그러나 민간처방대로 날된장을 밥먹듯 먹으면서 위장을 씻어준덕에 종당에는 무리없이 이승에 남겨진다. 두번에 걸쳐 살아남은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그는 된장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저도 모르게 가득 차오른다고 한다.   오뉴월에 된서리야 내리든 말든   한데 오뉴월에 된서리라더니 김진홍목사가 리동춘사장을 협조하라고 현지에 파견한 일군이 리동춘이 비 기독교인이라는 리유 하나로 협조는커녕 오히려 김진홍 목사와 리동춘이 제정하여 추진중인 사업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훼방을 놓을 줄이야.   된장합작공장건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마당대문을 닫아걸고 들어가지 못하게 저지하는가 하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경찰에 신고하고 쩍하면 연길시와 자치주정부에 찾아다니면서 리동춘이 저들의 기업전체를 빼앗으려 한다고 고발하는 통에 리동춘은 수년간 파출소로부터 공안국 안전국 당기률검사위 등에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은 일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김진홍목사가 리동춘에게 기부한 100헥타르의 땅도 기부전에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린터였다. 공장도 땅도 없어져 아주 거지신세가 된것이다. 불행중 다행이랄가 김진홍목사는 동료들 앞에서 “리동춘은 우리가 필요해서 모셔온 분인데 그를 이런 곤경에 처하게 하여 너무도 안타깝다”면서 림시공장을 짓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도록 한화 2,000만원을 지원해주어 그나마 엉덩이를 들여놓고 된장생산은 할수 있게 됐다.   그야말로 힘든 나날의 연속이였다. 그러나 암만 역경에 처해도 굴할줄 모르는 리동춘은 끈질긴 성미와 함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능력을 가진 사나이였다.   “합작이 안되면 우리 단독으로라도 하자! 크게 할수 없으면 작게라도 하자!”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과 끈기있는 도전정신으로 기운을 추스르며 자그마한 집에서 된장 개발과 생산을 견지하는데, 고마웁게도 민들레마을 전통된장을 알아주는 연변소비자들로부터 주문이 꽤 자주 들어오는 편이였다. 회사의 녀직원을 시켜 뻐스를 타고 집집이 배달을 다니게 하면서 얼마 안되는 수입으로 연명을 해오던 일을 리동춘은 가끔 옛말처럼 외우군 한다.   된장의“오덕”문화, 우리 조선족은 된장을 많이 닮아있다   어려운 와중에도 해마다 전통된장축제를 치르면서 관련연구를 지속해오는 가운데 “장인합일 오덕문화(酱人合一五德文化)”의 리념을 확고히 수립하게 되며 아울러 그는 개량된장이 아닌 전통된장문화를 끝까지 지켜내기로 작심한다.   그의“오덕문화론”에 따르면, 된장은 령성(靈性)이 스며있는 식품인데 그 령성인즉 “5덕”이라는 것, 요컨대 다른 음식속에 섞여도 자기의 맛을 잃지 않는 화이부동 본성고수(和而不同 本性固守)의 단심(丹心)문화, 다른 음식과 잘 조화하면서 자기 맛을 내는 구동존이 관후포용(求同存異 寬厚包容)의 화심(和心)문화, 매운맛을 부드럽게 해주는 렬성순화 화목공존(烈性淳化 和睦共存)의 선심(善心)문화, 기름기와 비린내를 제거하는 거성제유 렴결봉공(驅腥除油 廉潔奉公)의 불심(佛心)문화, 오래 두어도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기능으로 승화하는 항구불변 송백지조(恒久不變 松柏志操)의 항심(恒心)문화! 이것이란다.   이 “오덕”은 우리 중국조선족의 특성과 너무 많이 닮아있다고 한다.“우리 조선족은 150년이나 중국속에서 다른 민족과 어울리면서 살아왔지만 종래로 자기의 문화를 잃은적이 없습니다! ”이런 “오덕”이 있기에 우리 조선족은 자기의 전통문화를 지키며 중국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민족으로 꿋꿋이 살아올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템은 오아시스, 장로주 일거에 국가급브랜드로   “된장문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생태된장 개발의 큰 꿈이 있었기에 2008년의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의 창설과 그 이듬해 “민들레표”전통된장 무형문화재의 출원 등록이 비로소 가능했음은 그 누구라도 짐작할수 있을터이다. 전통된장의 성, 자치주“무형문화재”등록은 기실 된장술의 탄생을 예고한 전주곡이였다.   한차례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하였던 조선의 한 과학자가 우리민족의 음식중에서 두가지 식품이 오래 두어도 영원히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맛과 기능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발효식품인 전통된장과 술이며 이 두가지를 결합시키면 세계적 브랜드창출도 가능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순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 된 리동춘은 “바로 이거야!”하며 두 손벽을 짝!소리나게 마주쳤다. 연구 실험 생산 성공의 연결고리는 이음새가 탄탄하고 얼음에 박밀듯 거침이 없었다.“오덕(悟德)”장로주 발명특허를 출원한게 어제같은데 어느새 시중 소비자들 속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면서 판매량을 10만 상자에 훌쩍 끌어올리고 두만강지역 국제투자무역박람회에서 국내외 여러 회사와 무려 3000만원에 달하는 판매계약까지 체결했으니 리동춘 자신마저 혀가 내둘릴 지경이였다.   2012년 5월 국가급간행물《중국브랜드》잡지사와 민들레의 전략합작파트너관계가 이루어지고 "오덕표"장로주는 일약 국가급브랜드로 승격했다. 이 소식에 접한 상해로마방(上海老磨坊) 그룹의 보스 오가빈은 즉시 불원천리하고 연길로 날아왔다. 공장과 기지를 며칠동안 깐깐히 돌아보면서 오가빈은 거대한 중국의 수천년 술양조력사를 바꾼 이가 어찌하여 중국의 동북변강 오지에서 나올수밖에 없었는지 심사숙고해보지 않을수가 없었다 한다.   어쨌거나 장로주에 대한 그들의 칭송은 한결같았다. 술과 된장의 융합, 이는 수천년 양주리념의 돌파이고 술에 영양가를 부여한것 역시 수천년 양주공예의 돌파라는 것. 술을 마시면서도 숙취의 고통을 받지 않고 오히려 영양을 흡취할수 있음은 그 자체가 일대기적이라는 것.“오덕표”장로주의 출현으로 중국의 무숙취 배갈생산의 새 기원이 펼쳐졌다는 것.     무지개 같은 전설이나 진배없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던 리동춘이였다.   이어지는 된장꿈   된장술과 민들레술, 블루베리(蓝莓)술 등 계렬영양형“장로주”개발에 이어 연변의 지방특산물들인 사과배와 복분자로 사과배된장술, 복분자된장술 등 계렬상품도 개발해 출시한 리동춘은 올해의 된장축제행사는 여러 형제민족이 공동히 참여하는 “민속전통주축제”로 한다는 발상이다.   사과배된장술, 도라지된장술, 더덕된장술, 홍경천된장술...어느 술이든 된장과 만나면 기이한 변화가 일어난다니, 얼마나 신기한가...동북아의 “노란 자위”황금의 삼각주인 연변땅에 꿈씨를 심고 싶다는 리동춘, 이제 록음이 우거진 연변대지에 보다 시원한 미래가 펼쳐지려나보다.※   2014년 제1기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20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댓글:  조회:5818  추천:19  2014-02-08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문학평론가 최삼룡선생을 만나다       서재의 풍경   일전 최삼룡평론가 댁으로 찾아갔던 필자는 방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었다. 서재 한칸은 물론 세벽이 책으로 차넘쳤고 큰 객실 한쪽 벽은 서가로 되였으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공간 역시 서가로 돼있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서재에 다 들이지 못한 책들은 아직 창고에 박스채로 그냥 쌓여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책이 곧 재부다.   서재. 벽을 빙 둘러싸고 방바닥으로부터 천정까지 촘촘히 꽂혀있는 책들, 서재와 객실 창문 가까이에 놓여있는 두대의 컴퓨터 그리고 테이블과 문턱 혹은 구들 복판에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잡지와 신문과 글의 초고를 타자한 종이들, 원고지 갈피갈피에 정성껏 가위질하여 풀로 붙인 옛 자료들과 가쯘하게 묶은 옛 자료 복사본들―《싹트는 大地》,《滿洲詩人集》,《滿洲朝鮮詩人輯》,《滿洲朝鮮文藝選》,《北鄕》,《半島史話와 樂土滿洲》, 《颱風》,《北陸의 敍情》등등, 그중 복사해온 《滿鮮日報(만선일보)》복사본은 아예 통째로 쌓여있다. 최삼룡선생의 서재는 말그대로 서산문해(書山文海)다.   지금 최삼룡선생의 서재에는 사전류만 해도 100여종, 중국의 여느 도서관이나 문학가들에게서 찾아볼수 없는 귀중한 사전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인 작가, 시인들 례컨대 김학철이면 김학철, 조룡남이면 조룡남, 그들의 대표작품집을 포함해 거의 없는것이 없다.   현장평론가, 문학사가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 겸《문학과 예술》주필로 재직할 당시 최삼룡선생은 조선족문단에서 왕성한 정력으로 현장평론가로서의 평론활동에 종사했다. 특히 작가들로부터 탈고하는 원고를 놓고 평론해달라는 청탁이 자주 온다. 고 김성휘시인이 일찍 1980년대에 1만 5000행이 되는 장편서사시 《사랑이 무엇이길래》를 투고전에 보내왔을 때에도, 고 김운룡소설가가 100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광야의 아리랑》을 투고전에 보내왔을 때에도 최선생은 작품을 읽은후 자기의 견해를 솔직하게 밝혀 수정건의를 했고 평론도 써서 책과 함께 발표했다.   문학평론에 있어 그는 다산작가이다. 금년(2013년)에 들어와서도 《장백산》 잡지에 3편, 《도라지》 잡지에 4편,《연변문학》 잡지에 2편,《송화강》 잡지에 3편,《예술세계》잡지에 1편, 《길림신문》에 1편의 평론을 게재했고 그 외 여러가지 학술모임에서 발표했거나 이미 편집부에 교부되여 발표를 대기중인 평문, 론문이 4~5편 된다.   “평론이란 워낙 시끄러운 일로 욕먹기를 밥먹듯 한다”고 최선생은 말한다. 개중에는 “청탁평론”이나 “어용평론”이 많아서 평론가로서의 이미지가 초라할뿐만 아니라 “평가를 높게 하나 낮게 하나 잘하나 못하나 덮어놓고 욕”이라는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워낙 좀 부실”하여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축”이여서 뒤에서 그 누가 잡아 죽이려 해도 그는 “남이야 뭐라든 항상 솔직한 마음으로 사람이나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애를 쓴다”고 자평한다. 례를 들어 2012년 자치주성립 6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대형 련속드라마 《장백산기슭의 나의 집(長白山下我的家)》이 한창 방송중에 있을 때 한 신문사에서 평론을 해달라는 간청이 와서 일주일 밤을 새우면서 써냈다. 그 평론은 간담회에서 발표되고 신문에도 게재되고 또 한어로 번역되여 나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반향이 별로였다. 정부에서 거금을 들여 제작했다는 프로그램에 부동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데다 글자체가 “청탁평론”이여서 말썽이 있으리라는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작품을 함부로 비판할수도 없는 상황이고 또한 문제점을 제출하여도 통과될리 만무하거나 무작정 삭제가 불가피한 현실이라 최선생은 그저 허허 웃으면서 사는것이 이러할진저 하고 말았다.   당대 조선족문학 현장평론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문학연구에서도 최삼룡선생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쌓았다. 1990년 8월 일본 오사카정법대학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에서 발표한《재래설화변이고》로부터 1991년 고려대학 민족무화연구소에서 발표한 《백두산 설화의 의미》, 《송화강》잡지에 1년 련재한 《신민요연구》, 그리고 《구경전(狗耕田)형 민담의 비교연구》,《방리득보(放鯉得寶)형 민담연구》, 금년 8월 황구연연구회에서 발표한 론문 《황구연의 민담에서 사랑과 결혼》등 20여만자가 된다. 그는 “민간문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의식과 신앙들이 깔려있어 참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최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사 연구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조선족의 첫 문학사로 조성일, 권철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가 1990년에 중국과 한국에서 각기 출판되였는데 이 책에서 최삼룡선생은 1966년부터 1986년까지 20년간의 중국 조선족문학사 부분을 집필했다. 퇴직후 21세기 들어 오상순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2005년 출판)에서는 해방후의 시문학과 산문문학의 집필을 담당하였고 북경대학 조선문학연구소에서 편찬한《중국조선족문학사》(2004년 출판)에서는 중국 조선족 시문학사, 산문문학사 부분을 맡았다. 현재 최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지도》라고 제목한 자기의 문학사를 집필중이다.   해방전 자료 발굴, 정리   1999년 4월 정년퇴직한 최삼룡선생은 주요한 정력과 시간을 해방전 조선족 문학자료의 발굴과 연구에 바치고있는데 그가 여기에 발을 들여놓은것은 정년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는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자료 전집》편찬진에 참가하여서부터이다.   그가 처음 편찬을 맡은 책은 친일문학권이였다. 최선생은 자기의 서재와 연변대학도서관을 뒤집듯이 들추어가며 2002년 책을 편찬해내고야 말았는데 사회적반향이 괜찮았다.   이 책의 출판은 최선생이 해방전 조선족문학연구에 보다 깊이 개입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그해 여름 한국정신문화원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기회에 그는 꼬박 9일간 연세대 귀중도서관과 국회도선관에 들어가 자료발굴작업을 했다. 거기서 최선생은 친일문학자료를 많이 찾아냈을뿐아니라 해방전 만주조선인 문학작품도 숱해 접했다. 특히 시와 수필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상태임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원래 권철교수 등은 컴퓨터작업이 없을 때라 육필작업만 가능했음으로 대표적인 작가들의 대표작외에 대부분 자료들을 베껴낼수가 없었던것이다.   최삼룡선생은 남들이 다 수확한 텅 빈 들에서 홀로 재료를 발굴하는 자기의 작업을 "이삭줍기"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이삭줍기"는 말이 헐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스스로 경비를 팔아 려관을 잡고 교통비를 해결하고 도서관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작업을 하곤 했는데 어떤 날에는 복사료만 해도 한화로 10만원 나갔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이렇게  하기를 5~6차례, 그래도 리상규선생 같은 한국의 고마운 이들이 숙박료도 대주고 자가용으로 도서관문전까지 데려다주군 하여서 경제적으로 큰 무리가 없었다면서 항상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있다고 한다.   한국 도서관들에 보관되여 있는 신문, 잡지가 이미 낡았고 복사해온 글자들이 선명하지 않은데다가 전부 우리 글과 한자(正字 즉 번체자)가 혼용된 자료라 정리시 여러 모로 품이 많이 들었지만 최삼룡선생은 자료를 인용할 때 문헌의 가치에 손색이 갈세라 한자와 철자법과 띄여쓰기를 드팀없이 원본에 따랐다. 때로는 글자 하나를 복원하는데 하루가 걸렸고 시 한수를 복원하는데 사흘씩 걸렸다. 그래도 복원을 못하면 출판에 교부할 때 부득불 ◯이란 기호를 대용하는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삭줍기”에 기초하여 2003년 《세월에 묻힌 겨레의 기억》이라는 총제목밑에 《강경애와 간도》등 글을 《연변문학》에 1년간 12기에 거쳐 련재하였으며 2005년에는 《문학과 예술》잡지에 《문학기행》이라는 표제로 6편 련재하였다. 그리고 연변대학 조선(한국)어문학연구소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행한 해방전문학총서에 《현대시집성》,《항일문학》,《해방전민요》《종합산문(상, 하)》등 9권을 륙속 출판하였다.   2006년 3월 한국의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에서 최삼룡선생에게 만주조선인친일문학연구에 대한 정식요청이 왔다. 결과 반년간의 품을 들여 집필한 론문《재만조선인친일문학연구》가 유관자료집에 게재되였고 이 론문은 후에 한국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참고도서”로 삼았다는 감사의 말씀을 전해받았다. 이 론문 집필중 자연스럽게 묶어진《만주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은 2008년 보고사에 의해 출판되였고 2009년에는 한국문화체육부의 《2009년 대한민국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2010년 한국 보고사에서 또 최삼룡, 허경진 편찬《만주기행문》을 펴냈다. 이 책의 편찬에 동참한 한국 연세대 허경진교수는 이 책의 머리글에서 최삼룡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문학대계 30권을 편찬하면서 연변의 학자 여러분을 알게 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학자가 바로 최삼룡선생이였다. 그분은《조국조선민족문학대계》30권가운데 5권을 책임 편찬하였는데 대부분 본인이 여러해동안 수집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편찬하였다. 나는 중국조선민족문학학술대회를 5년째 주관했는데 해마다 그분의 열정적인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함께 책을 쓰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민족문학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해박한 지식, 방대한 자료 그리고 컴퓨터를 련상케하는 기억력이 부러웠다.”(최삼룡, 허경진 편찬 《만주기행문》보고사 2010년 5월 제1판 머리말에서)   2012년 민족출판사에서 최삼룡이 편찬한 《해방전아동문학(상, 하)》을 출간하였으며 이제 《해방전기행문》, 《해방전평론집》등 6권이 2013년 년내에 륙속 출간된다고 한다.   최선생은 암만 둘러봐도 20세기 우리의 문학을 수집, 정리하는 일은 자신들 세대 문인들이 해야 할 일이란다. 그래서 최선생은 계속 해방전 조선족문학에 관심을 두면서 수필집《만주조선문예선(滿洲朝鮮文藝選)》, 장편기행문 《백두산행기(白頭山行記)》, 력사문헌 《강북일기(江北日記)》,《간도개척사(間島開拓史)》 등 중국조선족력사문화와 관계되는 희귀본도서를 수집하느라 숱한 시간과 정력, 재력을 소모하였단다. 여러가지 여건의 미비로 이 책들의 출판은 아직 묘연(渺然)하지만 그는 볕을 볼날이 어느때든 반드시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문학과 인생   20세기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수집, 연구, 편찬 작업을 지대한 흥취와 열정을 갖고 열심히 했고 그속에서 자기가 몰랐던 지난 시기 우리문화 공부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최선생은 그 과정을 일컬어 문학과 인생을 함께 향수하는 과정이였다고 갈파한다.   말썽 많은 해방전 만주조선인 친일문학을 연구하면서 최삼룡선생은 세월의 먼지속에 깊숙히 파묻힌 재료를 적잖이 발굴했다. 이를테면 박팔양과 김영팔의 친일행적이 그 생동한 례로 된다. 박팔양은 만주에 건너온 다음 어용신문사에서 부장으로 일했으며 만주협회총부 리사로도 있었는데 이는 해방전 만주 조선인의 정치직무에서 최고의 직위였다. 그리고 친일작품도 썼다. 김영팔은 만주에 온 다음 신경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있었고 협화회 문화부 부장으로 있기도 했으며 통화협화회에 임직하기도 했다. 그는 만주건국 10주년 기념으로 일본 욱일훈장을 수여받고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세웠던 친일 주구 김동한을 기념하는 장막연극 《김동한》대본을 창작하고 공연에서 연출 겸 배우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반동연극의 작자가 바로 김영팔이라는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최선생이 밝혀냈다. 그리고 1941년에 《만선일보》 는 만주 조선문인들에게《大東亞戰爭과 文人들의 覺悟》라는 제목의 글을 쓸것을 강요하였는데 당시 이에 호응하여 만주 조선문인들이 쓴 같은 제목의 글 11편을 최삼룡선생은 모조리 발굴해냈다.   최삼룡선생은 이러한 재료의 발굴 연구 편찬과정은 참으로 문학과 인생의 참맛을 고루 맛보는 과정이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문학과 인생을 덤으로 누린 행운아라고 한다.   김학철문학 연구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중국 조선족문학의 정상이다.《격정시대》를 비롯해 그의 장, 중, 단편소설들은 20세기 우리 중국 조선족문학의 최고봉이며 그의 잡문, 수필, 회상기, 전기 등은 우리 중국 조선족 산문문학을 형태적으로 정착시키는데 절대적인 작용을 했다. 특히 그의 문학의 비판리성은 중국 조선족뿐만 아니라 20세기 중국 전체 지식인들을 견주어 봐도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김학철선생에 대한 최삼룡선생의 평가이다.   이미 김학철문학에 대한 글을 15만자 이상 발표했지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고 갈라야 할 시비가 너무 많아 잠시 중단했다고 한다. 이제 가장 민감한 부분에 대한 집필에 손을 대야 하겠는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한다.   “《김학철론》으로 평론가로서의 내 인생의 마침표를 찍고싶다. 그러기에 잘 쓰고싶고 따라서 지금 함부로 쓰지를 못하고있다.”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평론가 최선생의 좌우명이다. 오늘도 최삼룡선생은 고래희를 훨씬 넘긴 년세임에도 지칠줄 모르고 매일 10여시간씩 컴퓨터앞에서 꾸준히 작업해나가고 있다.   2013년 제6기  
19    조선 양대특구 공동개발의 감동 댓글:  조회:7014  추천:40  2011-06-10
  조선 황금평•라선 양대특구 공동개발의 감동   김정일 위원장 중국방문 후 중조 간 대규모 경제협력이 바로 가동됐다.  조선 황금평•라선 양대 특구 중조공동개발 및 공동관리대상 착공식이 8일과 9일에 연일 진행되었다. 라선개발 1차 착공대상으로 라진항-원정도로개건, 아태라선세멘트공장과 라선시-길림성고효율농업시범구 착공식, 라진항을 통한 중국국내화물중계수송출항식도 줄줄이 이어졌다. 학수고대하던 일이 어느새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조선의 '공동개발계획요강'에 따르면 황금평(위화도도 포함)특구는 상업센터와 정보산업, 관광문화산업, 현대시설농업, 가공업 등을 중점 육성하고 라선특구에는 물류, 첨단기술, 목재가공, 선박수리 등을 주 업종으로 하는 10개의 공업단지를 키운다는 구상이다. 이로써 양국국경을 기준으로 북은 라선, 남은 황금평이 명실공히 중조경제협력의 거점으로 우뚝 서게 됐다.   양대 특구 공동관리를 위해 중조양국이 지난해 설립한 특구개발합작연합지도위원회는 이미 ‘정부가 이끌고 기업이 주역이 되며 시장의 원리로 운영하고 상호이익을 추구한다’는 협력의 4대원칙에 합의했고 아울러 양측은 각자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해 양대 경제특구를 중조간 경협의 모범사례이자 세계 각국이 경협을 할수있는 공간으로 육성하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심천의 개발과 비견되는 가속이 붙기를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조선에서 홍콩의 다국적 투자회사인 新恒基그룹의 高敬德 이사장을 특구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하여 협력개발을 주도하도록 조치(중국정부도 동의했다고 함)한 점은 다국적 회사를 통한 해외자본도입을 암시하는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금후 조선경제가 개혁개방에로 이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중국으로 말하면 조선 양대 경제특구의 공동개발은 동북진흥전략과도 직접적으로 연계되어있다. 라선특구 개발의 본격화로 이제 두만강지역개발프로젝트의 실시가 황금기를 맞게되어 이제 개발의 중심에 선 연변의 발 빠른 움직임이 예상되는 시점이다.   양대 특구에 대한 중조 양국의 본격적 협력개발은 동북아개발의 기폭제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주변국들이 동북아개발에 열성을 보인지가 오래다. 러시아는 이미 극동지구 대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하였으며 한국도 기실 동해전략을 실시하고 있고 일본 역시 자국의 서해기슭에 중심항구건설을 진행중이다. 목전 일본, 한국, 러시아 등 나라의 근 50개 기업이 이미 훈춘에 와 자리 잡았다.   이런 와중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은 개성공단을 축으로 하는 남북경협이 아쉽게도 현재 중단상태이며, 이와 같은 교착상태가 언제가야 풀릴는지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남북이 하루속히 대결국면을 화합의 장으로 바꾸어 이한 역사적 개발사업에서 주역으로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8    “김정일 중국방문” 소감 댓글:  조회:9447  추천:68  2011-05-27
  “김정일 중국방문” 소감 김정일 조선 국방위원장이 지난 20일에서 26일까지 중국의 목단강, 장춘, 양주, 남경, 북경 지역을 참관했다. 7일 동안 이동한 거리가 무려 6천여 킬로미터라고 하니 70세의 노인으로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994년 집정해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중국방문이 모두 7차례 정도라고 하는데, 그중 최근 일년간 이례적이게도 이번까지 무려 세 번째이니 생각되는 바가 적지 않다.   김위원장이 이번에 만나서 회담을 가진 중국 지도자도 호금도 주석 및 온가보 총리를 비롯,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 9명중 외국 순방 중인 오방국을 제외한 8명이니 기실 전부라 해도 되는 것이고, 김위원장의 중국방문 수행자도 조선노동당 비서인 김기남, 최태복, 강석주 내각부총리,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등 고위급이 대거 들어있어 예사롭지 않음을 가히 짐작케 한다. 실제 그의 방문행보가 시종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을 감안하면 조선의 개혁개방의 미래에 대해서도 추측해볼만하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정확하며 과학발전노선이 생명력이 있다. 조선인민은 이로 인해 고무를 받는다.” 중국의 기업체 등을 시찰하면서 발표했다는 김위원장의 언론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김정일 위원장이 나라의 경제곤경에 대해 뼈를 깎는 고민을 하지 않았을 수는 없다. 그 고심의 흔적이 바로 지난 일년간 이루어진 파격적인 3차례의 빈번한 중국방문이 아닐까?   조선에 대한 중국의 경제지원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지원은 필수적이지만, 그러나 외부 지원이 조선의 강성대국건설의 근본도로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필경 자국의 시장개혁이 필수인데, 마음먹고 하면 바로 될 것 같은 그것의 실시가 왜 그토록 어려울까? 이것을 항상 문제로 짚지만, 그것에 대해 이해해주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우선 조선은 국제사회로부터 아직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의 개혁개방조치는 국가통제 시스템을 약화시켜 정권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 조선특유의 딜레마인 것이다.    한편 우리는 조선의 오늘 상황이 조선이 자초한 문제만은 아니며, 역사가 남긴 냉전시대 유산이기도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번 방문이 혹시 김정일 위원장이 시장개방을 최종 결심하고 나선 행동이 아닐까 생각된다. 참 기대가 되는 일이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김 위원장의 결심이 중조관계의 획기적 발전은 물론, 북남관계, 나아가 아시아의 장래에 획기적 기여가 될 것으로 본다. 중조 간, 북남 간, 나아가 조선과 국제간 경제협력이 봇물 터지듯 쏟아질 날이 크게 기대된다.   이를 받쳐주는 또 하나의 중대한 고무적 사안이 있으니 바로 한국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발표다.   이 대통령은 최근 "우리 남북은 서로 대화하고 보다 미래 지향적이고 발전적으로 나가야 한다"면서 "남과 북, 우리는 한민족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에 대한 지원은 북이 남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북의 자립을 도와주는 형태가 될 것임을 밝히고 "우리는 한민족이기 때문에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이북주민들이 정말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많은 분들이 (조선이) 중국에 너무 의존하지 않느냐 걱정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조선지도자가 중국에) 자주 가야 한다. 자주 봐야 한다. 배워야 한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자주 왕래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대통령은 조선과의 대화, 특히 경제-문화적 소통도 강조하면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말도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참 감동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다.   우리 조상의 나라 조선이 하루빨리 개혁개방을 해서 한국처럼 세계의 앞자리를 다투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북이 한집이 되는 그날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날이 너무 멀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17    한국비림박물관, 금석문의 숲을 가다 댓글:  조회:8071  추천:47  2010-11-15
중한 문화교류의 공신, 대한민국 문화예술신 지식인, 한국비림박물관 관장 허유선생 탐방 한국비림박물관, 금석문의 숲을 가다   [길림신문 박문희기자] 2010-11-15   창포(蒼浦) 허유선생 프로필   ■허유(許由), 1946년 충남 공주시 출생. 동국대 행정대학원 지역개발과, 할빈공대 한어과 수료. 문화예술신지식인, 서예가(아호:蒼浦). ▲1973년-1976년 서울 광화문과 강북구에 《해강서예학원》과 《창포서예학원》설립. ▲1977년까지 서울시장상, 서도대전 특선, 동아일보 사장상, 한국미술대전 은상 등 수상, 1978년 국전에 서예작 출품해 입선. ▲1989년 한국인 최초로 무순에서 오복광씨와 공동으로 서예전시회 개최, 1991년 9월 할빈시에서 개인전시회 개최, 1998년 5월 세계미술대전 개최, 2002년 5월 11일 한국비림원 개관, 설립후 해마다 세계서예미술대전 개최. ▲2003년 문화예술부분 《신지식인》(행정자치부 장관 인증)으로. ▲2006년 6월 중국한원비림과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공동발기. ■한국비림박물관 서화대전운영위원장, 해강서예학원 원장, 창포서도회(蒼浦書陶會) 회장, 중국한원비림(翰園碑林) 고문, 중국 상지비림(尙志碑林)명예박물관장, 중국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세계비림협회 한국대표, 극동사회문화연구원 원장, 고운최치원선생국제교류사업회 국제교류위원 등 력임   ---------------------------- 지난 10월 23일 충북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에 위치한 한국비림박물관에서는 개관 8주년을 맞으며 한중작가와 한국 각계 인사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한중서화전》 행사를 융숭하게 치렀다. 비림박물관의 초청으로 중국 길림, 하남, 북경 등지 박물관, 서협, 미협의 서예미술가 등 60인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기자도 그중 일원으로 함께 했다. 그날 동정리 옛 동정초등학교 자리라는 곳에 이르러 대문현판에 《藝文館(예문관)》이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가 새겨져있는 붉은 솟을대문 입구에 들어서니 널다란 정원에 도렬하듯 세워진 비석들이 시야에 안겨왔다. 부지 8450㎡되는 정원 전체와 건평 1333㎡ 규모의 건물 외관에 비석이 숲을 이룬 이곳이 바로 창포(蒼浦) 허유관장이 사재를 다 털어가며 일으켜세운 한국최초의 비림박물관이라 한다.   시공을 뛰여넘는 력사명인들과의 만남   중국비림박물관 정원 일각. 한중 석경전문가들이 제작한 비석들이 숲을 이룬 이곳에는 김생, 최치원, 강감찬, 한석봉, 안평대군, 이항복, 김정희 등 한국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 서예가나 유명 인사들의 유묵과 중국 상나라 갑골문 및 왕희지, 안진경, 소식 등의 필체를 담은 석경 500여점을 포함하여 금석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량국 고전작가들의 작품 1000여점이 비석에 담겨 문화유산으로 보존, 전시되고있는데다 미술서예대전 등으로 기증받은 수상작들로부터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 히딩크감독의 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록물을 제작해 보존하고 있고 그외에도 3000여점의 실물이 전시된 산호․ 패류관과 미술관, 공예관도 갖추고있어 그야말로 력사문화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력대 대학자들과의 시공을 뛰여넘는 만남때문인지 선인의 사상이 깃든 비문은 무거운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좀 여유를 갖고 비석들 사이를 둘러보면 정갈한 느낌을 주는 예서와 부드러운 해서, 흐르는듯 이어지는 초서, 파격과 개성미를 보여주는 추사체(秋史體) 등 서체에서 최고서예작품의 묘미도 만끽할수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오른켠 바로 앞에 우리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구조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중국 한원비림(翰園碑林)의 창시자 리공도(李公濤)선생(1927~)의 동상이였다. 동상의 기록문에는 리공도선생이 한국비림박물관을 물심량면으로 도운 공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박물관에 세운다는 허유관장의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아직 세상에 건재한 한 외국인의 흉상을 어찌하여 여기다 세우게 되였을가? 그 사연을 알자면 우선 이 글의 주인공 허유관장부터 만나봐야겠다.   중한문화의 접목에 향한 격조높은 정감과 의지   중국한원비림의 창시인 리공도선생의 흉상.  허유선생은 1946년 충남 공주시 반포면 원봉리에서 한학자인 고(故) 허연선생의 3남매중 막내로 태여나 연기군에서 초등학교와 성남 중, 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행정대학원에서 지역개발과을 수료했다. 선친의 영향으로 5살때 천자문을 깨우쳤고 300여수의 한시를 암기했을 정도로 한학에 뛰여났던 그는 이미 1973년도 27세때 서울 광화문에 《해강서예학원》을 설립했고 그로부터 3년후에는 강북구에 《창포서예학원》을 설립하면서 한국의 서예진흥을 위해 앞장서 왔다고 한다. 그는 서울시장상, 서도대전 특선, 동아일보 사장상, 한국미술대전 은상을 수상하고 1978년 국전에 출품해 입선될 정도로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국전에 입선됐던 바로 그해 문공부 기획관리실장을 지내던 박종국씨의 소개로 서봉 김사달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서예를 하게 됐는데 이러던중 서울 88올림픽에 참석했던 중국조선족들의 소개로 심양의 오복광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여 중국과의 교분이 시작되는데 마침내 그 발걸음을 멈춰세울수 없을 정도로 지금까지 그 연분을 줄기차게 이어오고있다는것이다. 1989년 한국인 최초로 중국 료녕성 무순시에서 오복광선생과 공동으로 서예전시회를 개최했고 1991년에는 할빈공대 한어과에 입학하여 한국류학생 제1호가 됐는데 그해 9월 할빈공대 양사근교장의 주선으로 중국과 아직 국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향항을 경유해 작품 40여점으로 할빈시에서 개인전시회를 개최했다고 하니 중한 문화의 접목에 향한 그의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이 아니랄수 없다. 당시 한국 창포서도회(蒼浦書陶會) 회장으로 있던 허유선생은 중국작가들과 교류하는 과정에 중국에 유명짜한 한원비림(中國翰園碑林)을 일떠세운 하남성 리공도선생의 사적을 접하게 되는데 소시적부터 서예를 좋아했다는 리공도선생이 10여년간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조손 3대의 전 재산을 쏟아붓고 각계 각층의 지원을 받으면서 력대 7개 왕조가 흥망성쇠를 겪었던 천년고도 개봉시에 세계 최대의 민영비림을 일떠세웠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허선생이 받은 충격은 여간 컸던것이 아니였다. 하여 허유선생은 1992년 8월 중한 수교가 이루어질 그무렵 숙연한 마음으로 자신이 다년간 소중히 소장해온 서예정품들을 리공도선생에게 우편으로 기증한다. 그 작품들은 전달된 즉시 전부 비석에 새겨져 비림의 일부분으로 되였다고 한다.   사명감의 호소: “한국에도 비림원을!”   한국비림박물관 외곽 일별.  이듬해인 1993년,중국한원비림을 대외에 개방하자 허유선생은 드디여 한원비림을 방문, 리공도선생과 처음으로 대면한다. 리공도선생의 창업사를 경청하고 산수 수려한 자연속에 현대의 비석과 송조의 비석, 황제의 비석, 그림비석, 국제비석 등 3700여점의 다양한 서예와 조각의 문화재들이 장장 3km에 걸쳐 펼쳐져있는 한원비림을 답사하면서 뜨거운 가슴을 가진 개인의 힘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수 있는가를 거듭 확인한 허유선생은 특히 리공도선생이 한원비원 건설을 시작할 때 석비에 새겨세우고 드팀없이 실천해왔다는 《가훈(家訓)》을 읽고 감동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 모종의 사명감이 굽이쳐오른다- 《…(한원비원)건설자금은 전용으로 투하하되 누구든 생활용으로 인출 못하며 그 어떤 난관이 있어도 대를 이어 건설을 견지한다. 비림이 완성되면 나라에 무상으로 바친다. 비림에 리익금이 생긴다 해도 리씨가문에서는 자자손손 한푼도 챙겨서는 안된다...》 이 《가훈》을 통해 한원비림의 바탕에 깔린 저력을 터득한 허유선생의 뇌리에는 《한국에 비림원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고집스레 자리잡는다. 허유선생은 한원비림에 이어 섬서성 서안비림 등 중국 처처의 비림문화를 고찰하면서 넓고 심오한 중국전통문화에 대해 새로운 리해를 가지게 된다. 돌이켜보면 진왕조 이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유물로서의 비림문화는 진시황이 전국을 순방할 때 석각으로 력사를 기록했던것을 발단으로 후세에 크게 성행하면서 점차 중국인들의 사상적근간을 이루게 된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서안비림의 시작은 당나라말 오대시기인 900년전 일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많은 정품서예의 석비를 보존하고있는데 그것이 5000년 력사를 한눈에 볼수 있게 조성됐다는 점에서 허유는 그것을 한국의 비림문화와 즉각 련계시켜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실상 중국의 문화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에 비석문화가 없는것이 결코 아니다. 한국에서 흔히 만나는 무덤가의 비석이나 절에서 보는 탑비, 문화유적지 곳곳에 세워진 각종 비석은 분명 비림문화와 맥을 같이 하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차원의 비림문화로 집결승화되지 못한채 아직 분산상태에 머물러있다. 대한민국의 후손들도 이러한 력사적 작품들을 한곳에서 감상하고 배울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허유선생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라도 몸소 이 일을 실천하기로 작심한다.   뼈 깎는 고통을 각오하고 설립준비에 돌입    1997년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당교 교장 호금도가 한국을 방문했을때“협화만방(協和萬邦)”이라고 쓴 족자를 선물로 증정하고있는 허유선생.   우여곡절을 겪으며 문화관광부에 한국비림원 설립허가를 신청해 1997년 6월 5일 정식으로 사단법인 인가(문화관광부 허가번호 444호)를 받아낸 그는 그 즉시로 설립전 준비작업에 돌입한다. 1997년 8월 6일, 허유선생은 14인 방문단을 이끌고 재차 한원비림을 방문, 리공도선생을 명예총재로 초빙하며 이듬해 3월에는 리공도선생으로부터 비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경청하고 동시에 한원비림과 자매결연을 함으로써 한원비림으로부터 많은 자료도 확보한다. 1998년 5월, 허유는 서울에서 세계미술대전을 개최하고 대회에 한원비림 창설인 리공도선생을 초청했다. 성대한 개막식에서 리공도선생은 《필묵은 천추의 력사를 기록하고 묘필은 만리강산을 그리노라(翰墨書千秋靑史,妙筆繪萬裏江山)》라는 제사를 대회 현수막에 올리고 각국 대표들의 추대로 미국,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화란 등 12개 나라와 지구를 대표하여 연설, 중한 량국 인민의 우의와 량국간 예술교류를 위해 유익한 기여를 하련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한다. 비림, 한국 전 대통령 김영삼의 관심사로 허유선생이 한국비림원 건설준비로 로심초사하고있을 때 그에게 큰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마련됐으니 바로 그의 지속적인 유력홍보활동으로 리공도선생의 영향이 한국에서 날로 커져 김영삼대통령의 관심까지 끌게 된 그것이였다. 김대통령은 중국방문기회에 개봉시에 몸소 찾아가 이 전기적 인물을 만나보려고 했다. 2000년 5월,허유선생은 김영삼대통령의 방문사항을 의논코자 리공도선생를 만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원비림을 위해 쓴 “東方文化藝術寶庫”, “松柏長靑”과 “良心” 등 3폭의 족자를 전달했다. 리공도선생은 크게 기뻐하며 그 휘호를 전부 비석에 새겼다. 2000년 6월 16일, 김영삼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일행 18인이 한원비림을 방문했다. 김영삼대통령은 흥미진진하게 비림을 참관하면서 한원비림은 《과연 천하제일”이고 리공도선생은 《손색없는 세계문화명인》이라고 평가했다. 리공도선생은 《무괴(無愧)”라는 족자를 김영삼대통령에게, 또 《매향(梅香)”이라는 족자를 김영삼의 부인 손명순녀사에게 증정했다. 김대통령은 즉석에서 《호연정기(浩然正氣)》,《중국모범가정(中國模範家庭)”이라는 두폭의 글을 써서 리공도선생에게 답례했다. 이처럼 허유선생의 서예전으로부터 시작된 문화교류는 점차 량국 정부간의 우호교류를 이끌어내는 결실을 낳게 된다. 그해 12월 1일, 김영삼대통령이 부산에서 서도전(書道展)을 개최하고 대회에 리공도선생을 특별 초청했는데 당시 리공도선생은 심장수술로 다녀가지 못하고 대신 파견된 맏아들 효천과 둘째아들 효평이 방문기간 보은군 김종철군수에게 유구한 력사를 가진 옛 도시 개봉의 빛나는 력사와 현대건설의 성과를 소개하여 김종철군수의 지대한 흥취를 자아낸다. 결국 김종철군수가 보은군과 개봉시간에 우호도시관계를 맺을것을 제안, 개봉시지도부에서는 그 제안을 쾌히 수락하고 김종철군수를 개봉시에 초청하게 되며 드디여 쌍방은 협의를 거쳐 정식으로 우호도시를 결성, 중한간 문화교류와 무역왕래에 길을 틔워놓게 된다.    한국비림원 국제서화전 전람관 일별.   비림건설과 국내외 지성들의 합류 사재를 전부 털어가며 한국 최초의 비림원을 만들려는 허유선생의 진정에 감동된 많은 사람들이 물심량면으로 비림원건설을 지원해 나섰다. 한국 청주문화방송 최정준총무국장 , 농수산물주식회사 양승인회장의 천거로 충북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에 50무에 달하는 현 자리를 마련하게 되였고 청주시의회 서병각의원이 충청북도중소기업지원센터 박재식본부장 및 제자를 인솔하여 개봉시 한원비림을 방문한 후 허유선생을 여러 모로 힘껏 지원해나선다. 하여 원 학교건물과 정원을 비림으로 개조하는 작업이 마침내 막을 올리게 된다. 허관장은 전국 국립박물관과 기념관 등을 발뿌리 닳게 뛰여다니며 수백점의 전시품 탁본과 복제품을 수집했다. 와중에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명예회장 등 유지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여주었다. 허관장은 명품을 모으는 한편 질좋은 석재마련에도 혼신을 다하며 전국각지에서 우수한 석공을 물색, 그들에 의뢰해 력대서예작품을 돌에 새겼다. 리공도선생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2년 3월 한원비림에서는 서예조각정품 55점과 잘 가공한 석재 50점을 컨테이너로 한국비림원에 무상으로 보내주며 또 석경제작에 전문기술을 갖고있는 주소종 등 기술자 3명까지 보내여 비석에 글을 새기는 일을 돕게 한다. 그들은 석달동안에 110여점의 조각과업을 원만히 수행함으로써 한국비림원건립에 크게 일조했다. 한국비림원에 깊은 애정을 갖고 물심량면으로 도와나선 리공도선생의 정과 공을 허유는 마음으로 보답하고싶었다. 그래서 특별히 정을 담아 제작해 세운것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리공도선생의 흉상이다. 이 사실은 한중 량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에도 미담으로 전해졌다.   한국비림박물관 개관 8년       한국비림박물관 개관 8주년 기념행사.  천신만고끝에 비림원은 2002년 5월 11일 정식 개관했다. 산수 좋은 보은군에 마침내 력대의 문화정품을 통해 나라의 력사와 문화를 한눈에 읽을수 있는 한국의 첫 비림원이 탄생한것이다. 그때로부터 해마다 기념행사로 개최해온 《국제서화대전”은 중한 및 국제 문화교류의 장으로 자리매김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다. 2006년 6월, 개관 4주년 기념행사때에는 행사차로 한국을 방문한 한원비림 리공도선생, 할빈시서예가협회 주석 홍철군선생, 상지시비림박물관 하수령관장 일행과 공동으로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적절한 시기에 《세계비림협회》를 정식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허관장은 《개관 8년여에 이곳에 참관을 다녀간 사람은 연인수로 100만명을 웃돈다》면서 《시작 당시 돌에 글자를 새겨 박물관을 만든다니 미쳤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지금 비림은 한국에서 빼놓을수 없는 명물로 변했다》고 했다. 비림원 설립후 허관장은 중국한원비림 고문, 중국 상지(尙志)비림박물관 명예관장, 중국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극동사회문화연구원 원장,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 한국대표 등을 력임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 몽골, 로씨야, 미국 등의 석학들과 함께 한 《국제학술교류》를 비롯해 매년 개최되는 《국제서화대전》, 각국 지자체 간의 자매결연, 각국 교육기관과의 교류 등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예술 분야를 망라하는 국제교류에 앞장서왔으며 또 사설박물관의 립장을 넘어 한국의 문화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런 공적으로 말미암아 오늘 허유원장은 한국에서 추사체(秋史體)로 상징되는 한말 글씨의 명인 김정희, 1919년 3·1 운동시 민족대표 33인중의 1인인 오세창, 금석문과 한학 령역에서 당대 한국의 최고인자인 임창순선생으로 이어지는 금석문의 맥을 이어 한국비림박물관을 설립한 금석문(金石文)의 중시조로 불리고있다.   허유관장 왈: “아직 갓 시작일뿐, 앞으로 항상 함께 하자”   중국상지비림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맺고  행사일정이 발빠르게 돌아가는 틈사리에 허관장은 기자에게 창업사와 함께 사업진척현황과 향후 목표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허유관장은 《후손들의 정신문화함양을 위해 여러 해전부터 성경비림, 공자론어비림, 불경비림 등 세계인을 아우를수 있는 정신문화의 성지를 비림으로 형성하고싶었는데 여건이 마련되는대로 지난해부터 이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고 했다. 그 일환으로 현재 권오실선생과 이현종선생을 비롯한 국전작가 133인의 성경필사는 이미 완료된 상태이며 중국한원비림에서 현재 이 필사본을 1914개의 돌판에 새기고있다고 한다. 금번 8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이수성 전 한국국무총리는 대회에 드린 축사에서 《한국의 민간문화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다해온 허관장의 예술혼과 민족혼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고 치하하고 《한중 우의가 비림원을 통하여 굳건히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했다. 중국측 대표 백산시미술가협회 주련덕주석과 하남성 하남박물원 전기부원장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량국 문화인, 경제인들이 서로에 유익한 민간외교를 할수 있는것은 허유관장이 20여년 긴 세월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구축한 토대가 있었기때문》이라면서 《한사람 선각자의 노력이 얼마나 소중한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어 우리 모두를 떠밀어준다》고 했다. 이런 평가에 직면하여 허유관장은 《아직 갓 시작일뿐이니 앞으로 항상 함께 하자》는 한마디 말로 향후 할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음을 시사한다.
16    조선 대지에 변혁의 난류 일렁인다 댓글:  조회:5860  추천:50  2010-01-15
  조선 대지에 변혁의 난류 일렁인다    장춘레오폴라 오장권리사장 조선방문고찰기   [길림신문 박문희] 2006-07-26   중국기업가 조선방문팀 천리마동상앞에서. 방문팀은 오장권을 비롯한 길림, 료녕, 산동 등지 기업의 리사장들로 구성됐다. 기업소 직원들의 컴퓨터 공부 평양의 미장원 평양슈퍼의 상품진렬대   조선과 표고버섯, 인삼재배, 자동차가스충전 등 합작항목을 추진중인 장춘레오폴라(勒奧普拉)유한회사 오장권리사장이 7월 상순 조선을 다녀왔다. 작년 10월 사업차 평양 아리랑축제까지 관람하고 돌아온 뒤 금년 7월 조선땅을 다시 밟은 오장권씨는 일년도 채 안되는 사이 조선전역에서 생긴 변화에 대해서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조선에서 생기고있는 급변의 새 모습은 우리가 미처 상상할수도 없었던것이였다》고 오장권리사장은 말한다.   20년간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장춘소방지대에서 근무하면서 수십 차에 걸쳐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참모장 중책까지 떠메왔던 오장권씨는 1998년에 퇴직한 뒤 장춘유풍원예기술유한회사와 장춘레오폴라공업무역유한회사를 련이어 세우고 올해에는 사회주의 새농촌건설추진을 목표로 길림신태양그룹(주비) 산하에 길림신태양생태농업개발유한회사를 새로 설립,국내외로 관련사업들을 추진중이다.   《작년초 평양시교 칠골협동농장에 남새시범재배를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잘 되니 신심이 생겨서 이번에는 인삼과 표고버섯재배,자동차가스기화기와 같은 항목을 가지고 평양자유시장조사도 하고 관련회사고찰도 했어요. 련운항치신회사 오승길리사장, 청도성진회사 최가쟁(崔可崢) 리사장 등 네분도 동행을 했는데 한사람처럼 조선에 지금 획기적인 변천이 일어나고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양의 자유시장   《대동강변에 자리잡고있는 평양자유시장은 작년까지만 해도 조용했어요. 근데 이번에 가보니 중국의 대형시장을 짐쪄먹을만큼 많은 인파가 몰리고있었지 뭡니까.》   2층으로 된 이 대형종합시장이 정규화되기 시작한건 작년부터라 한다. 건평이 5000평방메터로 수도에 어울리는 규모, 모양과 깨끗함을 갖추었다. 그 큰 시장안에 장군들이 꽉 몰려 사람열기가 확확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시장 개장시간은 여름에는 오후 1시부터 저녁 6시까지,일요일에는 아침 6시부터 12시까지 6시간,기타 계절에도 상황에 따라 개장시간을 적절히 조정한다고 했다.   거래되는 상품품목으로는 수산물, 특산물, 육류, 알류, 남새, 식품, 의류, 일용잡화, 문구류, 가전제품, 거의 없는것이 없었다.   작년에는 길가의 농부산물시장에서 물건값을 깎거니 붙이거니 하며 흥정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지만 대형 시장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시장에서도 오손도손 왁자지껄 흥정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여기서 거래되는 상품은 대부분 중국산,그외 일본산도 있었다.그러나 올해에는 농부산물 대부분이 자국산이였다. 과자사탕류도 원래 90%이상이 중국산이였는데 지금은 거의 다 자국산으로 바뀌였단다.   일본상품은 대부분 가전제품이였다. 일본과의 무역과 지원은 조선민족경제협력련합회와 국제홍십자회 등 부처의 비준하에 이루어진다.   중국상품은 주로 실내장식재료, 타일, 쏘파, 세탁기, 전기랭장고, 컴퓨터, 주방용품, 에어콘 등, 그중 의상류는 중국의 북방제품이 많고 내장용품은 남방에서 들여온 것이 대부분이였다. 포장도 거친 포장으로부터 점차 정교한 포장으로 탈바꿈하고있었다.   물가(RMB 1원이 조선돈 300원에 해당)를 보면 남새가 비싼 편이고(중국과 비슷함) 공산물이 싼 편이였다. 킬로그람당 양파는 350원, 버섯은 1000원, 팥은 650원, 입쌀은 700원, 수산물에서 고등어는 600원이였다. 참나무버섯(표고버섯)은 고려호텔에서는 300그람에 2000원으로 자유시장보다 비쌌다.   기자가 시장전망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오장권씨는 《평양자유시장의 규모가 꽤 컸지만 시민들의 수요에 비하면 아직 판부족》이라면서 《그래서 평양시정부에서는 향후 이와 같은 규모의 자유시장을 대폭 확장할 계획이더라》고 했다.   거리의 변화도 눈에 띄였는데 도로변에 소매점, 슈퍼마켓이 많이 늘어났단다. 음식점밖에 없던 평양시내에 지금은 카라오케와 같은 오락시설도 많이 늘었고 작년에 사우나시설 같은 종합봉사쎈터가 처음 나타나더니 올해에는 그 수가 많이 늘어나 고객들에게 많은 편리를 주고있다 한다.   《시장이 활성화되니까 시민생활에 일고있는 변화도 직감할수 있었는데 특히 의상의 변화가 인상적이였습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거개 국방색이나 검정색 등으로 짙은 색이였는데 지금 층집우에서 내려다 보면 알락달락하고 환한 색갈이 많이 눈에 띄여 눈맛 당기더라, 녀성들도 그전엔 흰적삼에 검정치마를 받쳐입는것이 통례였고 하이힐을 신고 무릎을 넘는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녀성을 볼수 없었지만 지금은 거리에만 나서면 그런 옷차림이 눈에 띄고 옷의 색갈도 다양하고 밝아서 신선감을 주더라, 녀자들의 얼굴화장도 달라졌더라, 짙고 간단한 저질의 크림화장이 담담하고 고급스런 물화장으로 바뀌여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이 자연스럽고 우아하더라고 했다.   《지금 조선으로 가보면 금방 전에 없던 활력을 느낄수 있습니다.》   행인들이 배낭을 메고 다니는 모습은 조선특유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 모습에도 이전과 다른 확연한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배낭을 지고 다녀도 기운이 없어보이고 길가에 맥없이 앉아 쉬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아예 볼수 없고 모두의 얼굴에 활기가 넘치고 걸음걸이도 기운차고 씨엉씨엉했다. 말소리도 힘있고 얼굴표정도 밝았다.   외국인의 행동자유,자유행동을 통해 본 조선민간인   《지난번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은 외화상점에만 드나들수 있었습니다. 조선돈을 사용하는 시장에는 안내하지도 않았지요. 그것도 안내원이 규정한 로선에 따라 안내를 받아가며 제한된 곳만 볼수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아주 달라져 가보고싶은 곳을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어요. 안내원도 몸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것 외에는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습니다.》   발길 가는대로 들려 본 호텔이나 식당 화장실에서도 변화가 느껴졌다. 검고 조야하던 화장지가 점점 희여지고 질바탕도 좋아지고있음이 감지되였다고 했다.   방문단 일행은 조선민간인들에게서 표현되는 높은 자질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가래침을 뱉는 현상을 볼수 없었고 손님을 대할 때 떽떽거리지도 비굴하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품위를 지키고 례절스러웠다. 흑인종이나 백인종 외국인이 지나가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선의 교통은 시민들의 높은 자질을 잘 보여주는 창구라 할수 있습니다. 조선도 중국처럼 우측통행을 하는데 규정을 어기고 좌측통행하는 사람을 한사람도 못봤어요. 외국인들이 제멋대로 좌측통행을 하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더군요.》   그들은 늦저녁 십자거리 혹은 지하통로에서 감시인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교통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이 없다는데 주의를 돌렸다. 다니는 차량이 아주 적은데도 자동차 기사라면 규정을 위반하고 지름길을 택하는 법이 없고 거리가 퍽 멀더라도 꼭 지정한 곳에 가서 차머리를 돌린다. 동행자 5명중 한족은 최가쟁씨 한사람뿐. 오장권씨가 여러 차례 방문을 한 경험에 비추어 조선에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교통위반자가 없다고 하니 최가쟁씨는 전혀 믿지를 않았다 한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낮에는 철저한 교통규칙준수가 가능하지만 경찰이 없는 밤에는 위반자가 없을리 만무하다는것이다.   그럼 좋다 내기를 하자.   당신이 지면 어쩔래?   양주(한병에 125딸라) 한턱 쏘겠다. 그렇지만 당신이 지면 당신이 쏴야 해.   거야 물론이지, 그렇게 하자.   저녁 7시 사이 교통경찰이 없는 시간을 택해서 옹근 한시간동안 놓칠세라 눈을 밝혔는데 결과는 오장권씨가 이겼다. 경찰이나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길을 마구 건너는 사람이나 차량을 발견하지 못했던것이다. 지상으로 길을 가로 질러 가면 몹시 편할텐데도 자각적으로 지하통로를 리용해 길을 건는다. 교통위반자도 없거니와 거지도, 웃통을 벗어던진 사람도 보지 못했다. 결국 최가쟁씨가 감탄사를 련발하며 기꺼이 한턱 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정도 되자면 멀었어》라고 하더란다.   해외투자자에 대한 써비스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정부 관련부처 일군들의 써비스의식에 괄목할만한 변화가 보여 투자지향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면서 오장권씨는 《해외동포원호위원회는 원래 경제분야의 일에는 관여치 않았는데 지금은 경제발전을 촉진하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기구로 활약하고 있었다》고 례를 들어가며 알려주었다. 외국투자자에 후환해소조치도 대주고 유력한 정치적담보자로도 나서며 량국 기업인들을 이어주는 교량과 뉴대적 역할도 분담하고있다는것이다. 손실 안 보고 성사할수 있는 믿음직한 회사를 알선해주는가 하면 사전에 해당 기업을 조사해서 미팅도 시켜주고 전과(前過)가 있는 회사는 소개해 주지도 않거니와 경우에 따라서는 주의하도록 귀띰을 해주더라고 했다.   조선해외동포위원회에서는 해외투자인들을 조직하여 투자관련법 설명회도 열었다.   방문기간 평양법률사무소를 찾아간적이 있었다. 평양법률사무소 전직고문으로 있는 분이 오장권일행을 접대했는데 그분은 원래 대학교법률교수로 정부 고급법률고문을 맡고있었고 얼마전에 국가 파출기구인 이 사무소에 파견되여 와 대외법률써비스를 전담하고있었다.그분은 아주 높은 책임감으로 투자희망자들에게 주동적으로 투자정책을 설명하고 독자,합영,합작 경영은 어떻게 하는가? 정책면에서 중국과 차별이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등 의문을 제기하도록 하고 일일이 해석해주었다. 개성공단,금 강산관광지역,라진선봉 그리고 기타 지역 이를테면 평양에 투자한다면 어느 법에 따라야 하나?광산개발시에는 어느 법에 준하나? 그 외에도 부동산임대,경제타산서,대리활동,민사소송,중재대리,투자법,독자법,합영합작,기업합병 등 물어본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한 소개와 설명을 했고 상관자료도 제공해주었다.   과거의 손실을 미봉하도록 조선방문기간 오장권씨는 단동과 심양에서 온 조선족 기업가 두분을 만나 그간에 있었던 감동스러운 일들을 알게 되였다.사실은 이 두 기업가는 이전에 조선의 실정을 모르고 몇몇 회사와 합작건을 추진하다가 큰 손실을 본 일이 있었다. 최근 이 두분은 해외동포원호위원회에 당시 당했던 사실을 반영했다. 원호위원회에서는 이를 큰 일로 간주하고 적극 그들을 도와 나섰다.조선의 현행 정책에 의하면 금년 3월부터 석탄과 지철은 수출이 금지되여 있었다.그러나 상기 두 조선족이 과거에 당한 손실을 미봉하게 하고자 조선 정부에서는 특수조치를 대여 석탄과 지철을 수출입할수 있도록 특별비준을 함으로써 그들이 사업상 재기하는데 결정적인 조건을 지어주었던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오장권씨는 《이 사실은 중조무역간에 드리워있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는데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부언했다.   조선 회사들의 컴퓨터 사용 보편화   조선 보건성 산하 《만년제약회사》와 《56무역회사》를 방문했을 때 오장권일행은 이 두 회사의 모든 부처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고있음을 보고 《이 회사들은 국가에서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회사니까》 이런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여러 회사를 돌아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는것을 깊이 느꼈다.실은 어느 회사나 다 컴퓨터를 사용하고있었고 인터넷 사이트 사용도 아주 활발했던것이다.교육기초도 잘 돼 있었다. 공업분야만 봐도 인재구조가 비교적 합리했다.중등전문교육이 발달하여 실제 사업분야에 적응되는 전문인재가 풍부할 정도였다.이는 중국에서 대학이나 중등전문학교 졸업생이 많지만 전공이 맞는 전문인재가 극히 결여되는 실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있었다.물, 록화 등 환경건설도 제대로 돼있었다.원래 개발이 안됐기에 오염이 없을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외계의 이런 인식이 잘못된것임을 눈으로 확인했다.사실은 그게 아니고 원래 오염원관리가 엄격히 제도화되여있었으며 교육기초도 잘 다져져 있었다.   《여러가지 여건상 아직 시설은 안 되지만 환경건설이 잘 돼 있고 교육기초가 좋으니 고속발전이 완전히 가능하겠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오장권씨는 말한다.   남포항 인천항 직항 뚫리는 통상로   《평양에서 출발, 황해북도 개성으로 가는 행정에 만년제약회사 사장의 소개로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중조합작으로 생산된 제품이 직접 남으로 수송되고있다는것을 알고 몹시 흥분됐더랬어요.이런 일은 원래 상상도 못했었거든요.》   인삼과 표고버섯 생산기지를 만들기 위해 조선으로 간 오장권리사장은 워낙 조선에서 생산한 표고버섯을 중국에 실어온 후 다시 로선을 바꾸어 한국이나 기타 지역에 수출할 타산이였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게 아니였다.   북남 해상통로가 이미 뚫려있어 남포항에서 인천항까지 전용화물선이 매주 1회씩 직항하고있었던것이다.이제 륙로만 뚫리면 개성에서 서울까지 한시간이면 수송이 이루어질것이라고 해외동포사업국의 한 관원이 소개했다 한다.   관련상사들이 북측에서는 《민경련(민족경제련맹)》을,남측에서는 《통일부》를 통해 등록을 하면 북남통상이 이루어지는데 북의 상품은 세금이 없이 남으로 통과할수 있다.삼팔선은 국경선이 아니고 《우리끼리》의 장사요, 무역이니 세금을 부과할 리유가 없다는것이다.남에서도 북의 제품을 국산으로 인정해주고있고 삼팔선을 국경으로 보지 않는다.   남포에서 물건을 선박에 실으면 하루도 안돼 인천항에서 부린다!   이제 륙로가 열리면 개성에서 실은 상품이 두시간 안짝에 서울에 대일수 있다!이 사실에서 오장권씨는 지대한 고무를 받지 아니할수 없었다고 감개를 터놓았다.   《6.15선언후 북에서는 남쪽을 비방하는 일, 욕하는 일이 완전히 근절됐다. 지금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말은 란 낱말이다. 욕하는 말은 한마디도 못 들었다》는 오장권씨는 《우리끼리》란 낱말의 참뜻을 페부로 실감하고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합작추진을 위한 고무적인 움직임   《외국자본 유치에서 투자지분책정이 중요한데 이 문제에서 지금 조선은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있다》고 오장권씨는 소개했다.그전에는 건물과 토지를 조선측 지분으로 삼고 자금은 전부 외국의것을 도입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항목에 따라 조선에서도 현금투자를 같이 한다는것이다.현금투자를 각기 50%씩 하자고 주동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푸술한데 이것은 작년까지만 해도 볼수 없던 일이라고 했다.   에너지사업 등 국가 근본 리익에 관계되는 중점항목은 정부에서 투자하도록 돼 있고 국외의 투자에 상당히 후한 정책적혜택을 베풀고 있다 한다. 이에 고무를 받고 오장권씨는 태양에너지발전,CM4기체발전, 자동차가스기화기 등 항목을 지금 조선측과 상담중이다.   《인삼재배,표고버섯재배 등 합작항목에서도 조선에서는 진실한 합작 자태와 행동을 보여주고있습니다. 례컨대 우리는 기계, 종자, 균종과 재배기술만 제공하면 되죠.이 외의 모든 물자 말하자면 토지, 표고버섯재배막 등은 전부 조선측에서 해결합니다.》   작년 4월 조선에서는 6개 농호를 단위로 한 농촌생산분조책임제를 실시,대풍작을 거두었다.올해도 풍작을 이룰것 같다고 한다.   지난해 오장권씨는 강반석녀사의 고향인 칠골협동농장의 실험포전 한정보에 무우,상추,배추,쑥갓 등 12종의 남새를 실험재배했는데 조선 칠골농장에서 제공한 토지조사서류에 따라 미생물비료를 도입하면서 기술재배를 한 결과 례년의 3.2배에 달하는 소출을 올렸다.   오장권씨는 조선과의 합작에 확실한 신념을 갖고있었다.그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있다. 조선에는 농약잔류물이란 개념이 근본 존재하지 않는다.황해북도의 상황을 보면 물이 좋고 오염이 없어 유기농업을 잘할수 있는 절호의 생태조건을 갖추었다고 볼수 있다.조선은 현재 시설농업이 락후한 상태에 있어 비닐하우스 및 기계시설과 미생물비료를 갖춘 재배기지가 엄청 부족, 이 면에 무한히 큰 사업예비를 가지고있다. 제조업은 지금 엄중한 전력부족으로 잠시 어려운 상태지만 인삼, 표고버섯 재배 등을 망라한 농업은 활성화가 완전히 가능하다.   투자희망자들에 대한 희망사항   취재를 마칠 무렵 오장권씨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중국의 인삼을 조선 개성에 실어다 개성인삼으로 둔갑시켜가지고 한국에 팔아넘기다 들통이 났는데 조선정부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면서 조선족 대 조선투자 희망자들에게 《사기치는 사람을 각별히 조심하고 남을 사기하지도 말며 조선의 법률에 좇아 자기의 실정에 맞는 항목으로 정상적인 사업을 개척할것》을 권고하고싶다고 했다.   《조선이 대외로 문을 활짝 열고있는 시점에 조선족들이 자체 우세를 발휘하여 열심히 사업한다면 반드시 성공할수 있다》는것이 오장권씨의 소신이자 행동지침이다.
15    중국 “두만강지역개발프로젝트”와 다자간 국제협력 댓글:  조회:10205  추천:80  2009-12-30
중국 “두만강지역개발프로젝트”와 다자간 국제협력 박문희(중국 길림신문사 부 주필, 고급편집)   2009년 8월 30일 중국정부의 승인을 받은 이 지난 11월 18일 신화통신에 의해 그 전문이 공식 발표되면서 중국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의 깊은 관심도 유발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동북아 각국의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역면적이 7만3천 평방킬로미터(한국 면적의 약 73%)로 지린성의 39%를 차지하고 인구가 1090만으로 전 성의 40%를 차지하는 창춘시, 지린시 부분지역과 두만강 유역의 옌볜조선족자치주(즉 “長吉圖”지역) 개발 사업은 오는 2020년까지 이 지역을 동북아지역의 물류·공업 전진기지로 개발하는 중국의 국가적 전략 사업이다. 의 목표에 따르면 “창지투” 지역은 2012년까지 중국 두만강지역 국제합작에서 돌파적 진척을 가져와 동북지구경제발전의 새로운 성장극으로 부상하게 되며 2020년까지 중국 두만강지역 대외개방수준에서 획기적인 돌파를 이룩하여 지역 경제총량이 4배로 늘고 따라서 전국의 선진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두만강구역 국제합작개발프로젝트는 주변 국가와 국제사회의 공동참여하에 10수년의 건설을 거쳐 초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중, 러 양국은 훈춘과 러시아 핫산의 도로와 항만을 일체화시키고 관세를 없앤 봉쇄형 관리구역 조성이 한창 진행 중이며 주변 각국도 두만강지역 국제 자유 무역구 건설에 호응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도 변경구역의 도로와 항구를 일체화시키고 수출가공 및 보세물류단지 건설을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몽골 대통로 건설계획도 작성중이다. 자료에 의하면 목전 몽골국에서 조사 확인한 80여종의 광산자원가운데 석탄은 1520억 톤, 철은 20억 톤, 린은 2억 톤, 동은 800만 톤이라 한다. 수송력이 문제로 나서고 있는데 실제로 중국 국가철도부에서 현재 中蒙大通路 건설을 기획중이다.   옌볜에서는 변경개항지 훈춘시를 통해 중-러 항구, 중-조 항구 항목건설을 추진 중이며 조선과 접경하는 중국 측 구간인 훈춘-권하 도로(39km)는 이미 완공된 상태이며, 55만kw 발전 용량의 훈춘화력발전소 2단계 공사가 완료되었고 훈춘에서 출발하는 중-러 철도가 머지않아 개통되고 훈춘-도문고속도로도 명년에 완공되며 길림-훈춘 간 고속도로도 곧 국가사업으로 추진된다.   先導지역의 두만강 지역 국제자유무역지대 건설, 長吉圖 국제 내륙 항구 건설, 과학기술 창조지역 건설, 국제협력 산업지역 건설, 현대 물류지역 건설 등 8大 중점공정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중 국제협력 산업지역 건설을 보면 신형공업으로 자동차, 석유화학, 농산물가공, 광전자정보, 야금건자재, 장비제조, 바이오, 신소재 등 신형공업기지 건설이 포함되어 있고 생태여행지 건설은 장백산의 생태자원과 국경지역에 위치해 있는 여건우위를 기반으로 이 지역을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다국적 생태계 여행 및 人文여행, 그리고 특색 있는 휴가, 휴양의 생태지역으로 건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첨단 서비스업 집중지역 건설의 내용에는 금융보험, 서비스아웃소싱, 비즈니스展示, 문화創意 등 분야를 기반으로 동북지역 자본시장을 건설하고 동북아지향의 현대서비스업 시스템구축 등이 들어있으며 그 외 현대농업 모범지역 건설에는 토지의 집약적 경영과 적당한 규모경영, 그리고 농업의 전반적 기계화 실현 및 시설농업, 우수농업 창출 등 내용이 망라되어있다.   중국 정부는 특히 옌지시와 훈춘시 등 두만강 유역을 집중 개발한 뒤 조선의 나진항을 통한 동해 항로도 개척한다는 방침이다. 훈춘-나진-동해 항로를 이용하면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서 생산되는 광물자원과 농산물, 공산품을 수송하는 물류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다. 앞으로 10년 사이 “창지투” 지역에 엄청난 가시적 변화가 예상되는데, 지린성 전역, 그리고 동북지역과 내지의 상관 협력관련지역, 나아가 동북아 각국이 참여하는 이 중차대한 대사를 앞에 두고 중국은 한국, 일본 등 주변 중요국가들의 대거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과거 10여 년간의 두만강 개발 실천으로부터 보면 그 진척이 지지부진한 면이 많았는데 창구지역의 경제총량이 높지 못하고 체제와 메커니즘 혁신이 미흡한 것과 같은 제약적인 요인으로 국제적 지역합작개발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었던 것이 그 원인으로 되었던것만큼 결국 이 지역 개발의 성공 여부는 지역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본력이 있는 한국과 일본의 적극적인 참여와 투자 여부에 크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두만강지역개발은 동북지구 더 나아가 보다 넒은 범위에서 통일적으로 계획하고 상호 합작해야만 구역개발에 활력소를 불어넣고 실제적 효과를 기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상 동북아 6국을 멤버로 한 두만강구역합작의 비교우위는 아주 뚜렷하다. 한국의 경우 경공업부문과 에너지부문에 투자하고, 조선과 중국 길림성의 노동력을 이용하면서 중국, 조선, 러시아, 몽골의 광물자원,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다. 조선은 나진·선봉지역을 동북아지역의 중계수송 기지로 개발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기업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으며 중국 동북지역은 노동력, 중급기술을 제공하면서 한국과 일본에서 자본, 고급기술을 유입하고 조선, 러시아에서 자국 내에 부족한 에너지, 광물자원을 수입할 수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러시아 극동 오호츠크지역에서 생산된 수산물을 나진·선봉지역에서 가공하여 한국이나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도 전망이 밝으며 나진·선봉 경제특구 개발에 진전이 보일 경우 이미 중국 옌볜지역에 투자하고 있는 한국기업들이 의류, 섬유, 목재 가공업, 제지, 식품가공업의 투자를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투자로 경제특구의 인프라, 산업생산기반의 구축이 가속화되면 두만강 접경지역에서 중·조·러의 경제교류를 더욱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두만강 접경지역에서의 경제교류 활성화는 필시 현재 조선 개방을 전제로 논의되고 있는 동북아 철도 연결과 에너지 협력과 같은 다자간 국제 협력 사업을 크게 촉진하는 효과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한국 《시사뉴스》 2009년 12월호)
14    고아들의 아버지 ㅡ 리문철 댓글:  조회:9004  추천:47  2009-12-24
[공화국창립60주년에 만나본 60인]    《고아들의 아버지》 사랑이야기 화룡시희망복리원 리문철원장의 한가지 소망은-고아, 장애인, 가난한 학생...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줄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줬으면   [길림신문 박문희 2009-12-22]      리문철 프로필 1954년 12월 화룡의 한 가난한 문화인 가정에서 출생. 1970년 10월-1974년 9월 화룡시 서성진 룡포촌 하향청년 단지부서기, 민병련장. 1974년 10월-1975년 10월 화룡시 부동산계통 로동자. 1975년 10월-1976년 12월 화룡시 토산향에 사회주의교육공작대로 내려감. 1976년 12월-1979년 11월 화룡종자공사 기술원, 검사원. 1979년 12월-1980년 12월 길림성 남파공작대로 해남도에서 육종시험에 종사 . 1980년 12월-2001년 6월 화룡종자공사 과장, 부경리, 소장. 2001년 6월 -현재 화룡시희망복리원 원장, 화룡시 정협 상무위원, 연변주정협위원. 2000년이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서 수여한 《꽃망울프로젝트 최우수 조학상》, 《차세대배려선진개인》, 《연변감동10대인물》, 《길림성로력모범》, 《2008중국적십자회원의 별》, 《길림성도덕모범제의상》, 《전국민족단결선진개인》, 《전국5호문명가정》, 《전국공익사업걸출인물》, 《전국5.1로력메달》 등 중앙급 7차례, 성급 8차례를 포함 도합 50여차례 영예 획득. 2009년 9월 20일 제2회전국도덕모범선발표창활동에서 전국도덕모범제의상 수상. 선후로 《길림신문》, 《연변일보》, 《중국민족화보》, 연변TV방송, 길림일보, 로동자일보, CCTV, 인민일보, 신화통신 등 많은 지방 및 중앙급 보도매체를 통해 사적이 전국에 널리 알려짐.  ------------------------------------ 리문철은 1954년 12월 화룡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는 병환으로 일을 할수가 없었고 그와 그의 누나도 병약한 몸이였다. 어머니 혼자 힘으로 강변에서 모래를 쳐 온집식구를 먹여살려야 하는 형국이였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소학교를 다닐 때 문철이는 새옷을 입어본적이 없었고 원족 가본적도 딱 한번밖에 없었다. 원족을 가려면 맛있는것을 도시락에 싸가지고 가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되였던것이다.   소학교를 다닐 때 있었던 일을 그는 항상 잊지 못한다. 그때 그가 쓰는 공책이란 검고 엷은것이였는데 연필 살 돈도 없어 늘 연필 끄트머리까지 나무가지에 동여매여 쓰다보니 조금만 힘을 주어 글을 써도 공책에 구멍이 펑펑 뚫리기 일쑤였다. 그때 그가 다니는 반에 젊은 녀자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는데 한번은 그가 쓰고있는 공책과 연필을 들여다보시더니 갑자기 《너 이것도 책이라고 가지고다니니? 너 아빠, 엄마는 이런걸 너에게 주어 학교에 보낸다니?》 하고 몹시 화를 내시는것이였다.   그날 귀가때 그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어느 길모퉁이에  숨어서 정말 오래동안 울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머리에 열이 나면서 며칠 앓아누웠다. 그런데 토요일날 저녁인가 담임선생님이 그의 집으로 찾아오셨다. 등에는 애기를 업고있었고 왼손에는 달걀구럭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공책, 연필 등 학용품이 들려있었다.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 한발 막대기를 휘저어도 거칠것 하나 없는 가난한 살림형편을 보시고난 선생님은 자식공부 하나 변변히 대주지 못하여 미안해하시는 어머니의 자책어린 말씀에 눈시울을 붉히시였다. 그후 선생님은 자주 문철의 집으로 찾아오셔서 그에게 보충수업을 해주곤 하셨다.   문철이는 선생님이 선물하신 학용품을 정말 소중하게 다루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둠속의 등불과도 같은것이였습니다. 그 일은 나의 머리 속에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감동적인 영상으로 남아 나를 고무하고 채찍질합니다.》   30여년전인 1974년도에 있은 일이다. 갓 스무살난 리문철은 농촌에서 뽑혀와 화룡시방산관리소에서 로동자로 일하고있었다. 그때 단위에 종업원숙소가 없어 그는 한 개인집 방을 세내여 들었다. 그집 주인은 박씨였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감옥살이를 하고있었고 그의 안해는 병으로 앓는데다가 고정수입도 없이 아이 다섯이나 데리고있었다. 아이들중 큰 아이는 14살이였고 작은것은 6살밖에 되지 않았다. 수입이라야 그가 집세로 내는 8원이면 고작일 터이였다.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한 집이였다. 그 집을 훌쩍 떠나 다른 집을 찾으려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량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눌러앉기로 마음을 굳히고 우선 매달 39원되는 월급을 몽땅 이 집에 맡겨 살림을 유지하게 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봄에는 그집 애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캤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며 가을에는 이삭주이를 하고 겨울에는 산에 가 땔나무를 해왔다. 낮에는 출근을 하고 밤에는 아이들의 숙제지도를 해주었다. 짬이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감옥에 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면회하고 매번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개혁개방이 시작되여 세상이 살만해졌다. 박씨네 살림은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고 아이들의 학습성적도 많이 올라갔다. 맏이는 학급의 단지부서기로 되였고 둘째는 학급장으로 되였으며 넷째는 전국소학생스케이트시합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 박씨도 열심히 개조를 해서 복역기간을 2년 줄이고 1987년에 앞당겨 출옥해 가족과 단란히 모이게 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의지가지없는 고아, 가정살림형편이 어려운 학생, 지체장애자 그리고 형기가 차 석방됐거나 로동교양에서 풀려나온 인원들을 도와주고 교양하고 안치하는 사업과 떨어질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였다고 리문철은 회고했다.   1982년이였다. 화룡시 투도진에 어려서 부모를 여읜 아이가 있었는데 형님집에서 초중까지 다녔다. 그러나 고중에 시험쳐 붙은 후에는 학비를 이어대지 못해 더는 공부를 할수가 없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리문철은 그 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공부시키는게 어떨가 하고 안해 채명자와 상의를 했다. 1979년에 결혼한 리문철, 채명자 부부에게는 그때 아직 아이가 없었는데 누님이 병으로 사망한지 얼마 안되여 두 외조카를 데려다 키우고있었다. 10여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비좁은 집에서 네 식솔이 붐비는 삶이 원래 기구한데 16살나는 고중학생 하나를 더 데려다 키운다는건 누가 봐도 머리를 저을 일이였다. 그러나 난색을 짓던 안해는 끝내 남편의 뜻을 따라주었다. 그러는 안해가 너무 고마웠다.   아이를 집에 데려와서 보름만인가 안해가 병으로 입원하게 되였다. 한 병실에 해금이란 녀자애가 있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다 부어있었다. 여러번 캐물어서야 그애는 자기가 고아라고 실토정했다. 안해가 퇴원하자 그애를 집에 데려왔다. 하여 집식구가 또 하나 늘었다. 아이 셋만 키우고 공부까지 시키려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는데 그후 아이를 하나 낳자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매달 39원의 로임으로 아이 둘을 공부시키고나면 남는것이 없었다. 그때 그들은 정말 굶기를 밥먹듯했다고 한다.   때마침 개인창업열이 한창 오를 때였다. 당시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학습을 마치고 화룡시종자공사에서 근무하고있던 리문철은 창업을 해서 돈을 벌기로 마음먹고 안해와 함께 회사에 출근하는 한편 과외시간을 타서 가축사양을 벌였다. 후에는 아예 단위에 적을 남겨둔채 로임도 받지 않고 나와 곰사육장을 꾸렸다. 그 수입은 기대했던바 이상으로 짭짤했다. 그 수입은 전부 고아들 부양과  학생들 보조에 씌여졌다.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그러니 집이 너무 비좁아 집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돈을 다 아이들 부양과 보조에 쓰다보니 1987년에 와서야 18평방메터짜리 초가집을 2000원에 팔고 교외에 땅을 얻어 66평방메터되는 벽돌집을 짓게 되였다. 이 집을 지을 때 림시 세방에 들 돈이 없어 길가에 비닐텐트를 쳐놓고 옹근 7개월을 그안에서 살았다. 천신만고 끝에 66평방메터짜리 아담한 집이 지어져 드디여 친척친구들에게 잠시 맡겼던 여섯명의 고아를 모두 불러들였다.   《여기가 바로 너희 집이다. 이제 너희들은 다시 떠돌뱅이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시름놓고 살면서 공부도 열심히 잘해야 한다. 다들 알았지?》   처음엔 아이들이 먹고 잘 곳을 마련하는데만 신경을 쓰다보니 아이들의 사상교양에 등한했다고 한다. 그러던중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는데 몇몇 애들이 밤중에 남몰래 어디로 사라져서 장밤 온 시내 PC방을 샅샅이 훑은적이 한두번이 아니고 집안에서 돈도적사건이 생겨 애들이 도적을 쫓아내야 한다고 소동을 벌이는 일까지 생겼다는것이다.   《그래서 먹고 자는 일과 학비대주는 일만 해주면 다 끝나는게 아니라는걸 알게 됐습니다. 그들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리상이 있는 인간으로 키우는것이 먹이고 재우는것보다 몇갑절 더 중요한 일이라는걸 통감하게 됐지요.》   화룡시희망복리원 한가족 그후부터 실제로 아이들에 대해 생활상 관심도 게을리 할수 없지만 사상교양에 몇갑절 더 신경을 쓰게 됐다는것이다.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이면 애들을 데리고 화룡시13용사기념비, 청산리항일유적지에 가서 혁명전통교양을 하였으며 또 연변과기대를 견학하여 아이들의 리상을 키워주었다. 자금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아이들에게 해마다 각종 신문, 간행물을 1000여원어치 주문해서 짬짬이 보게 하였고 다달이 독서모임을 한차례씩 열어 독서심득을 나누게 했다.   아이들에게 남을 관심하고 도울줄 아는 품성을 키워주기 위해 매년 청명절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렬사비앞에 가서 벌초를 하였으며 친인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제물을 사가지고 친인의 묘소를 찾아가 제를 지내게 하였다. 명절이나 휴가에는 아이들과 함께 홀로 계시는 로인들을 찾아가 마당청소도 해드리고 빨래도 해드리고 창문유리도 닦아드렸다.   사스로 세상이 바짝 긴장하던 때 《사랑의 헌금》활동도 가지고 성금 900원을 모아 기부했으며 복리원 근처의 한 집에 가스폭발사고가 났을 때 부상자치료를 돕기 위해 애들은 소비돈을 280여원 모아 의연했다. 사천지진때에도 리문철은 매일 중앙TV 뉴스를 집체로 시청, 아이들이 자각적으로 모은 돈에 자기 돈을 보태 애들의 요구대로 999원 99전(救救救)을 만들어 시적십자에 헌금하였고 그외 그자신도 따로 1000여원을 시농업국당위에 특수당비로 바쳤다. 이런 일들을 통해 아이들은 사랑의 마음을 키워갔다.   리문철이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가정이 빈한한 학생들을 부조한 사적이 《길림신문》에 크게 실리고 그뒤 연변TV에서도 찾아와 그의 사적을 취재해갔다. 얼마후 《고향의 아침》프로에 그의 사적이 2집 시리즈로 보도되였다. 화룡시교육국의 리직퇴직간부들이 그의 사적을 보고 감동된 나머지 쌀, 기름을 사들고 돈도 모아가지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한구들 가득한 손자손녀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어선 안된다. 이 아버지는 너희들의 은인이다.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자라거라. 학습을 잘해서 장차 아버지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우리는 석양에 걸음이 빠른데 너희들은 앞날이 창창한 나라의 기둥감들이다. 건실하게 잘 자라서…   그날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할것없이 모두 울었다.   리문철의 사업을 지지해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해마다 설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입쌀, 과일 등 식품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위문을 왔으며 물만두를 가득 빚어가지고 오기도 했다. 전화로 관심과 문안을 표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그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관계부문의 일군들도 찾아와 함께 해결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2001년도 리문철은 낡은 공장건물을 구입개조한 뒤 관계 부처의 협력과 지지밑에 화룡시희망복리원을 설립했다. 공안부문에서는 희망복리원 아이들에게 집체호구를 등록해주었다. 하여 고아들에게는 명실공히 자기의 포근한 집이 있게 되였다. 그해 연길감옥에서 리문철을 교양보도원으로 특별위임하여 정기적으로 감옥에 가서 형기가 차 감옥을 나오는 석방인원들에게 출옥교육보고를 해달라고 했다.   어느 한번 연길감옥에 강연하러 갔을 때 리문철은 형기가 거의 끝나가지만 돌아갈 집이 없는 왕모의 사정을 알고 그가 석방되는 날 주동적으로 감옥까지 찾아가서 왕모를 데려다 희망복리원에 입적시켰다. 또한 그에게 인력거를 사주어 생계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절도범죄자인 주모는 만기석방된 후 그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두말없이 사법부문과 향정부에 찾아가 주모에게 농사에 필요한 생산대부금을 해결해주었다. 장춘에서 농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또 주모에게 려비를  대주면서 박람회에 참가하여 치부의 길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최근 그는 또 3명의 출옥인원과 원조커플이 되였다.   이처럼 다년래 시종 변함없이 이른바의 《불량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교양하였으며 한사람 한사람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돌려세웠다. 《내가 도와준 청소년 치고 다시 죄를 짓고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이것을 다시 없는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리문철은 말한다.   어느 날 박문길이라는 청년이 희망복리원에 찾아왔는데 그는 자기는 최근 연길감옥에서 출옥한 자로 감옥에서 리문철의 강연을 들은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당신이 말한 그 일들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보나마나 당신은 허풍치는데 불과하지요. 오늘 세상에 당신이 말한바와 같은 그런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까? 나는 그 많은 고아와 빈곤한 학생을 정말 수양하고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오늘 이 집을 찾아온겁니다.》   이어 그는 도전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마음이 그렇게 좋다면 나를 수양할수 있다고 지금 감히 장담할수 있습니까?》   리문철은 즉시 시원한 대답을 주었다. 《안될것 없소. 원한다면 지금 바로 우리 집에 짐을 풀어도 되오. 》 그는 말한대로 복리원에 머물었다.   어느 날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리원장님, 리원장님한테 두손 들었습니다. 당신이 실지 한 일은 당신이 말한것과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많더군요. 저의 목적은 당신이 말한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직접 내눈으로 보려는것이였는데 이 며칠간에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이 사회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몇분만 더 있어도 좋을텐데…》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보시다싶이 나는 몸이 튼튼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기서 고이 리원장이 끓여주는 밥만 먹고있을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가거든 그 자리에 가난한 아이 하나를 더 받아 기르세요. 나는 꼭 당신을 따라배워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가겠습니다. 후에 능력이 될 때면 꼭 와서 당신을 도울것입니다.》   리문철은 복리원의 아이들이나 사회의 약세군체에 대해서는 씀씀이가 대범할 때가 많았다. 매년 설이 되면 그들 부부는 위문품을 가득 사가지고 독신로인, 지체장애자와 곤난호들을 집집이 방문하여 위로했다. 수년래 선후로 여러명의 빈곤학생에게 컴퓨터와 CD기 그리고 기타 생활용품을 사주고 석방인원들에게 장사를 하라고 자금을 대주었으며 고독한 로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식품이나 생활용품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든 자금이 해마다 수만원이 되였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늘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돈 한푼 함부로 랑비하지 않았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그는 친구들이 가지는 모임에도 웬만하면 가지 않았고 가라오케 같은 고소비 장소에는 더구나 드나든적이 없었다. 20여년래 그들 네 식구는 종래로 단독으로 지낸적이 없으며 따로 명절을 쇤 적도 없다.   그의 집에는 자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택시도 마음대로 타지 못한다는 제도가 있다. 그 자신도 이 제도를 준수한다. 북경, 장춘, 상해나 사천 등 먼 곳으로 가도 침대차에 앉지 않고 앉은채로 자면서 먼 거리를 줄이곤 했다.   그의 딸 춘이(23 살)는 어릴 때부터 줄곧 아버지가 수양하는 고아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부모님들을 도와 나이가 자기와 같거나 자기보다 더 큰 아이들을 돌보군 하였다. 그런 춘이가 작년에 한국류학을 가게 되였는데 떠날 때 아버지에게 한 유일한 요구인즉 젯빠(MP3)를 선물해달라는것이였다. 리문철은 호주머니사정으로 그 작은 요구마저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친자식한테 너무 혹독하지 않은가 하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런 뜻으로 말했다.   -내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것이 아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아끼지 않을 부모가 어데 있겠는가? 나의 딸이 이 아비한테 유감스럽게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의 딸은 어려서부터 친부모의 품에서 자라면서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유감없이 받아왔다는것이다.   -하지만 내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 곁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없다. 그 유감은 무엇으로든 미봉할수가 없다.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좀 더 쏟는것은 그 애들이 친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꼭같이 행복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소망때문이다.   35년래 리문철이 수양하고 도와준 아이와 석방인원은 모두 130여명에 이른다. 그들중 50여명이 북경, 상해, 운남, 사천, 대련, 장춘 등지의 대학에 입학했다. 금년에 나온 대학생만도 7명이다. 일본에 연구생으로 간 학생을 포함하여 연구생도 3명이 나왔다. 그의 딸애도 현재 한국 조선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 연구생공부를 하고있고 아들애는 청도대학 경제학부에서 공부하고있다. 현재 희망복리원에는 29명의 청소년이 있다.   2009년 9월 20일 제2회전국도덕모범선발표창대회에서 조선족으로서는 유일하게 표창받은 리문철은 《근 10년간 중앙, 성, 자치주와 화룡시에서 50여차 표창받는 영광을 지녔는데 이런 명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일들을 하는가고. 실상 나 개인으로 놓고말하면 그 무엇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답을 바라는것도 아니요 명예나 명성이나 그 어떤 관직을 바라는것도 아니다. 내가 그런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결코 이 길을 걷지 않았을것이고 30여년씩 견지할수는 더욱 없었을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를 바보라고 말한다. 바보라도 좋다. 물론 내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큰 대가를 치른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나의 조그마한 희생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결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명예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나의 명예와 관련해서 내가 바라는것이  있다면 오로지 나의 영향으로 고아, 장애인, 가난한 학생, 감옥에서 나와 사회사람들의 기시를 받으며 죽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줄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줬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소박한 소망뿐이다.
13    리귀남의 유화작품전시회를 가다[박문희] 댓글:  조회:9049  추천:58  2008-12-22
리귀남의 유화작품전시회를 가다 일전 중앙번역국의 리란녀사가 어느 만난 자리에서 (10월) 18일 중앙민족대 유화학부 리귀남 주임 신작개인전 개막식 칵테일파티가 있는데 구경하지 않겠느냐면서 초대장 한장을 건네오는것이었다.   미술과 서예 따위에 취미가 있는데다 미모의 리란여사가 모처럼 추천하는 행사인지라 "두말할것 있나, 구경하고말고" 하고 청첩장을 얼른 받아 챙겨넣었다.     미모의 리란여사. 하나의 판에 박아낸것처럼 어머니 우복순(룡정소학교 로교원)을 빼닮아먹은 이란씨는 북경에 온지도 20여년이 되는데, 어려운 대학생들을 돕느라고 장학금사업을 지금까지 7년째 해오고있다.   현재 세계적인 금융풍파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경제상황이 그닥지 않지만 장학금사업을 접어버릴 생각은 전혀 없으며 이 일은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치든 계속 견지해나갈것이라고 했다.   미술전개최장은 베이징 北 2環에 위치한 德勝門 箭樓 3층의 藝森畵廊이었는데, 이날따라 교통체증이 심해 나는 한시간 늦게 도착했지만, 그렇다고 볼 것 못보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명청시대 베이징보위에 대공을 세운 군사방어용 성문으로서의 덕승문은 당년의 웅위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 기품이 범상치 않았다.     좁은 층계로 줄쳐오르는 참관자들의 모습이 갑옷 차림의 옛군사들 모습과 오버랩되어 안겨온다.     구불구불 위(箭樓)로 뻗힌 층계를 톺아오르노라면 一夫當關 萬夫莫開의 고사가 보는듯이 뇌리에 떠오르는것이었다.   한 젊은 여성이 꽃묶음을 안고 총총걸음으로 톺아올라온다. 누구한테 선물하는 꽃묶음일까?   눈에 익은 꽃인데, 이름을 알수 없다. 개나리꽃 같기도 한데, 그건 아니다. 그러나 아마 개나리꽃의 사촌이나 육촌쯤은 될것이다.       저기 보이는 고대 축조물이 바로 箭樓이다. 명청시대 건물이 멋지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나라때의 덕승문은 이런 모습이었다.  종루에서 내려다본 녹지. 이귀남 신회화전 축하함이라고 씌어진 꽃바구니가 줄느런히 서서 하객들을 반긴다.   오, 그리고보니 그 여성도 이귀남 미술전을 축하하러 온게로구나.   건물앞에서 리란씨가 중앙민족대의 어느 교수와 무슨 얘기인지 나누고있었는데, "청각장애"가 심한 나에게는 그들이 입을 닫았다 열었다 하는 모습만 보이고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날의 주인공 리귀남 씨. 꾹 다문 입과 커다란 눈.   커다란 눈은 그의 작품의 주제의 하나이기도 하다. 아래 큰눈계열의 작품 몇폭이 소개된다. 그의 자화상도 거개 다 큰 눈이다.  어느 미모의 녀성이 리귀남씨에게 사인을 요구하는듯 했다. 말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의 움직임을 통해 볼수는 있었다.   --사인 좀 해주실래요? --머, 사인해드리죠. 얼마든지. --기념사진 남겨도 될까요? --아 되구말구요. 얼굴 잠간 빌려주는것 쯤이야 어려울 것 없죠..       --음 그렇다면 울도 한번 사진 남겨볼까요? --그러죠 머.   다리를 쩍 벌리고 선 리귀남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에도 다리를 쩍 벌리고 선 자화상과 인물들이 적지 않은데, 참 재미가 있는 동작이다. 나는 미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므로 다리를 쩍 벌리고 선 것에 무슨 심각한 의미가 있는지는 전혀 알수 없다.   때문에 무슨 해석같은 것은 시도할수 없다.   리귀남의 미술을 보러왔다 해서 리귀남과만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 특히 미모의 그의 부인과 기타 미인들과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말도 안되거니와 옳지도 않을 것이므로 나는 리부인과 리란씨와도 한컷 찍었다.    근데 사후에 점검해보니 내가 머리를 너무 하늘로 쳐들고 있어서 건방진 작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지만 머리를 쳐든 부분을 수정하자니 나의 보잘것없는 포토샵 기술로는 엄두도 낼수 없었다.   이미 엎지른 물을 주어담을 수는 없는지라 그냥 건방진 그대로 두는수밖에 없었다.   참관자들은 집단적으로 리귀남과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를 거쳐 좁은 층계를 오르면 전시청에 이른다. 접대원아가씨가 맞아주었다. 란 신문과 (제3집)을 선물하는데 신문은 옹근 한면의 편폭으로, 은 책 전부가 리귀남의 유화신작과 미술평론가들의 평론을 싣고있었다. 의 표지. 리귀남의 자화상. 커다란 눈이 이 세상을 내다보고있는데, 눈은 분명 무슨 말인가를 하고있다. 의 한면. 온 화면에 말하는 눈이 가득 차있다. 근데, 그들은 정면으로가 아니라 거의 하나같이 삐딱한 시선으로  이 세상을 내다보고있는데  그것도 한결같이 의혹에 차있는듯 크게 뜨고 보는 눈길이라서 뭔가 가슴에 쿵 맞혀오는 것이 있다. 그게 뭘까? 칵테일이 비치되어있는 파티장 일각. 커다란 눈은 무슨 말을 하고있을까? 아마도 이손은 유화를 그린 그 손일게다. 분명. 자화상. 아래는 계열의 작품이다. 다리를 쩍 벌리고 선 기수. 계열의 대학생. 로동자. 예술가. 아래는 계열의 작품. 녀자의 벗은 몸. 녀체도 무언가 하소연하고 있다. 다음은 인물화. 장고치는 녀인들. 고독한 로인. 사과를 손에 쥐고있는 녀인. 녀 대학생. 가을 풍경화. 황혼 무렵의 말없는 덕승문 성루. 황혼의 빛깔. 예술가 리귀남은 항상 그림으로 말할 뿐이다.     2008.11.6 북경에서  
12    혈혈단신으로 중국 서부에 진출한 한국사나이 댓글:  조회:5440  추천:52  2008-12-14
혈혈단신으로 중국 서부에 진출한 한국사나이 녕하한통지능시스템유한회사 박영수 리사장 탐방 [박문희 기자] 2008-12-15  중국 서부 녕하회족자치구 은천시에 한국인으로 2004년도에 첫발을 들여놓고 하이테크기업을 창설하여 간난신고 끝에 성공을 맞아온 기업인이 있으니 다름아닌 녕하한통지능시스템유한회사의 박영수 리사장(44세)이다.                                      투자사절단 접대하며 한족친구를 사귀다  1965년도 한국 충청남도 태안 태생인 박영수씨의 중국 진출은 한국에 일보러 왔던 중국 친구들을 사귀면서 시작된다.  1994년 녕하회족자치구 투자사절단이 서울에 투자유치를 왔는데 그때 한 중형 회사에서 근무하던 박영수씨는 그들 일행 15명을 접대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어 자습에 열을 올리고있던 그는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들 중의 몇 친구를 사귀게 되였다. 사절단이 귀국한 후, 그때까지 그들 사이에 높다란 언어장벽이 가로 놓여 있는 상황에서 그들간의 련계는 박영수씨의 열정으로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박영수씨는 1989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1997년부터 (주)트래픽 아이티에스(ITS-Intelligent Transpotation System) 에서 근무했는데 한국의 현대화 교통시스템의 보급작업은 마침 이 해부터 시작되여 그에게 능력발휘의 기회를 안겨준다. 사업에서 남다른 추진력과 능력을 보여준 그는 1999년 마침내 현대화 교통시스템 도입을 시도하고있는 중국에 파견되여와 회사의 해외투자기업인 성도트래픽유한회사 리사장에 부임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지능형 교통시스템을 나라 전역에 도입하기 시작한 초기 단계였는데, 박영수씨는 성도에서 3년간 사업하는 기간 사업 특성상의 우세를 빌어 중국의 각급 정부와 관련 회사를 접촉하면서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혈혈단신 녕하 찾아 《한통회사》를 창설하다  패기 있게 업무를 펼치던 중 2003년 사스의 발생과 함께 귀국했다가 1년 후  줄곧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친구들이 있는 녕하에 혈혈단신으로 찾아와 녕하한통(翰通)지능시스템유한회사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상해, 북경 등 다국적 기업이 치열한 경쟁을 벌리는 곳에는 자신이 없었던 그는 자기만의 독자적 능력발휘가 가능한 지역으로 중국 서부의 녕하를 선택한 것이다. 교통시스템이 없는 빈 구석인 이곳에서 일을 벌리면 주변 관계를 활용해서 길을 틔울 수 있고 일단 길만 뚫어놓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친구가 몇이 있다지만 필경은 생소한 곳이라 처음부터 인맥관계 구축에 숱한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술초대는 다반사고 정부와 기업소의 관련자를 한국에 청해다 구경도 시키고 했다. 그의 한족 친구들에게는 공무원 친구가 많았다. 일단 술초대를 하면 관련자뿐 아니라 무관련자들까지 부르니 환장할 노릇이였다. 상무국 국장 부르는건 좋은 일이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교육국 국장은 왜 부른단 말인가? 저녁 한끼를 대접하는데 만원 이상 때려넣어야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계산 없이 친구를 불러들이는 친구가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 아무런 소용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친구의 친구한테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 도움을 받았을 때는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중국의 생리를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최초에 고달팠던 일은 직원관리였다. 한국에서 직원들은 하나를 시키면 두개 세개를 하려 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하나는 고사하고 70%나 80% 정도밖에 못하니 속이 타서 재가 될 일이였다. 더구나 기막히는 것은 사장 시키는 대로 하는 한국의 직원들과는 아주 딴판으로 이곳 사람들은 사장이 시키는데 따르기는 고사하고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딨어》하면서 어처구니 없게도 자기 주장을 펴러 드는 통에 결국 큰 피해를 보는 경우였다. 그러나 이런 일이 몇 번 거듭되면서 사장이 시킨 일이 원래 옳았는데 집행이 안돼서 결국 회사에 불이익이 조성됐다는 것이 증명되자 차츰 직원들이 사장의 지시에 따르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였다. 물론 프로젝트 수행과정에 시행착오도 많이 빚었다.                                        《우회전술》구사하여 첫 오다를 수주받다  중국 실정에 역행하기보다는 실정을 알고 순리로 일을 진척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박영수씨는 말한다.      북경출장시 숙소에서도 컴퓨터를 리용해 데이터파일 처리에 드바쁘다.   2005년은 중국에서 중량별 화물차 료금징수 시스템을 산동성을 기점으로 중국 전역에 정식 도입하기 시작한 첫해였다. 이 시스템에 대해서는 전문가수준인 박영수는 처음에 당지 한족 친구들의 도움은 받되 오다는 자신이 직접 따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시 현실로 보아  한국인의 직접적인 오다수주가 불가능함을 재빨리 낌새채고 우회전술을 폈다. 한족 친구들에게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친구들이 방도를 대주니 그대로 했다. 한국식대로라면 전혀 상상이 안되는 이런 일도 여러 모로 분석판단한 끝에 대담히 친구들이 대주는 방도에 따랐다. 친구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작용했지만 이런 믿음은 또한 현실에 립각한 정확한 판단에 토대한 것이였다. 그의 판단은 빗나가지 않았다. 친구들을 내세워 입찰을 한 그는 개찰 전에 벌써 《이 프로는 인젠 내꺼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결국 그해 말께 그는 1500만원짜리 첫 오다를 따는데 성공했다. 하나 수주를 받았다 해서 일을 곧바로 진행시켜 일거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금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프로젝트는 수주받았는데 갖고온 돈 200만원이 몽땅 거덜이 났다. 중대 프로젝트를 수주받았으니 한국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필시 도와올게 아니냐고 할 이들이 있을테지만 그런게 아니였다.                                             친구들 도움으로 막혔던 숨통을 틔우다  중국 진출 2년 사이, 가족과 주변 친구들이 다 그를 《미친 놈》이라고 했다. 부모들은 친척들에게 부탁해서 돈을 대주지 말라고 쐐기를 박고 아내는 남편의 친구들에게 절대 돈을 대줘선 안된다고 그루를 박았다. 이렇게 돈줄기를 차단하면 배기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것이였다. 부모, 형제, 자매, 아내, 친척, 친구, 아무튼 주변의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철저한 합동작전을 폈다. 이렇게 하기를 만 2년이였다.  그런데 지금 굵직한 프로젝트를 이미 땄으니 돈만 대면 성공이라고 이실직고하는데도 모두들 한결같이 믿지를 않고 《이놈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또 〈사기술〉을 쓰는게다. 이제 돈줄기를 딱 끊으면 돌아온다》고들 하니 한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각삼추로 피말리는 고초를 겪고있을 때 그를 도와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와 가까이 지내던 한족 친구들이였다. 친구들끼리 련통해서 200만원을 만들어 뀌어주었다. 친구의 귀중함을 통감하게 하는 대목, 꽉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이는 순간이였다. 결국은 밥먹을 돈마저 떨어져 더 버티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들어섰을 때에 와서야 줄곧 목표로 삼고 노력하던 일이 비로소 결과가 나서 드디여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길이 트이자 일마다 순풍에 돛단배였다. 그 이듬해인 2006년 두 번째로 1200만원짜리 고속도로 《원카드시스템》 프로젝트를 따냈다. 2007년에는 2000만원 짜리를, 올해는 3000만원짜리를 수주 받아 수행했다.  2007년부터 자금이 돌기 시작, 《인제 자리를 잡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때에 와서야 박영수는 가정과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다.                                        중국 내수시장 뚫어 제2차 도약을 준비하다  4년간의 실천을 거쳐 그는 자기의 최초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였다. 그가 뚫은 것은 중국의 내수시장이였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의 내수시장을 뚫었기에 장래의 발전에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는 지어 현재 기승을 부리고 있는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자기에게 찾아온 두번째 호기로 간주하고 있다.  중국이라는 이 거대 시장에 4만 억(한화 8000조원)을 풀어 내수 확대를 하는 시점에서 이 호기를 잡아 날개를 활짝 펼 수 있는 제2차 도약기를 예상하고 있는 그다. 2009년 그는 녕하에서 수주액 1억을 올릴 목표를 이미 세워놓고있다. 사천대학교 기술연구소와 자매관계를 맺고 한국기술을 중국화하는 자기의 시스템개발작업을 연구소에 의뢰하기도 했다. 남들은 중국 전역을 상대로 시장공략을 꿈꾸지만 그는 녕하 시장을 전면적으로 집중공략할 전략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해왔던 교통시스템을 위주로 전력시스템과 오수처리장 등 환경관련 프로젝트에까지 진출을 준비 중이다.    
11    음지에서 양지로의 첫 관문 통과한 한국의 중의 댓글:  조회:4892  추천:69  2008-11-13
향후 2년내 중의제도권진입을 목표로 박차   --대한중의협회 조근식회장 일행을 만나       왼족으로부터 대한중의협회 오재경 부회장(대한중의 신문 주필 겸), 이병근 사무총장, 조근식회장, 주일권 고문(북경광자병원 원장), 구자온 부회장.    “세계위생조직전통의학대회”가 11월 7일부터 9일 오전까지 북경에서 성대히 열렸다. 9일 오후 기자는 한국을 대표하여 이번 대회에 참석한 대한중의협회 조근식회장 일행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점잖은 기품의 조근식회장은 만나는 사람으로하여금 대한중의협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은근한 끈기를 느끼게 하는 분이였다. 조회장은 “세계위생조직전통의학대회”에 참석하게 된 것은 “전 세계 전통의학계에 대한중의협회의 립장을 알리기 위해서”라면서 이것이 중의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있는 한국정부의 정책을 바꿀수 있는 추진력으로 작용할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대한중의협회는 중국의 중의학대학 본과를 졸업한 우수한 인재 300여명을 정회원으로 둔 한국내 유일한 중의학단체이다. 300여명에 달하는 중의 의사들은 모두가 중국에서 정식으로 중의학을 전공한 고급인력들인데 그들중에는 중의학기초연구와 림상과정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우수한 인재들도 적지 않다.   “저희 대한중의협회는 2007년 8월 세계중의약학회련합회에 단체로 가입한 뒤를 이어 외교통상부 허가번호 제585호로써 금년 7월 4일 정식 허가를 획득했고 7월 16일 법인등록까지 마쳤다”고 말하는 조근식회장은 “이는 음지에서 양지로의 첫 관문을 통과한 셈”이라면서 어려움이 첩첩했던 지난 10여년간의 려정을 회고했다.   “1996년 9월 전중협(전중국중의학원한국본과생협의회)의 발족을 시작으로 1997년 첫 중의학졸업생이 배출되면서 한국진출을 모색했지만 결과는 암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대한중의협회 의사들은 중국에서 정식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중의의사자격고시에 합격해 자격증을 취득하였지만 한국정부에서 한의학과 중의학은 다르다는 리유로 활동을 금지하였던 연고로 심지어 의료봉사활동마저 고발당하는 실정이였지요.”   10여년이나 중의학을 공부했음에도 의술을 펼칠 무대가 없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조근식회장의 경우도 다를바 없었다. 공무원생활을 하던중 우연한 기회에 한의학을 접했던 조회장은 중국의 천진중의대 병원 원장과의 만남으로 중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나이 40이 넘어 중국으로 와서 7년여를 열심히 공부했다. 류학을 마친 그는 부푸는 꿈을 안고 귀국했지만 배운 의술을 의료봉사에 적용할 수 없는 판국이였다.    “중국에서 오래동안 공부하고 돌아온 저희들에게 중국은 제 2의 고향입니다. 우리 대한중의협회 가족은 사천지진소식을 듣고 모두 울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조근식 회장은 사천 지진사태때 제도적인 규제때문에 지진피해자들을 직접 달려가서 도울수 없었던 당시의 안타깝던 심정을 털어놨다.   한국 전역의 5000여명 중의대 졸업생들중 한국중의협회의 300여명 의사들은 중국인들도 하기 힘든 중국의사고시에 합격된 정식의사들이고 중국어 표준어 뿐 아니라 사천성 방언까지 구사 가능하다. 하지만 단지 정부의 모순된 행정관리로 인정을 받지 못해 사천성으로 의료봉사를 가고 싶어도 갈수 없었던 그들의 마음은 돌덩이로 지지누르듯 무거웠다고 한다.      그때 조근식 회장, 김웅 국제의료봉사단장, 오재경 중의 의사 등 6명은 대한중의협회를 대표해 종로구 효자동에 위치한 주한중국대사관을 방문, 지진피해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고 성금 500만원을 전달했었다.   그러나 중의학단체로서 외교통상부 정식 허가를 받고 법인등록까지 마침으로 해서 지금까지 중의학을 전공하고도 써볼데 없어 고통을 받고있던 대한중의협회 회원들은 제도권으로 들어가기 위한 힘찬 첫발을 내디뎠다. 이로부터 사단법인으로서의 대한중의협회는 학술 ,교육, 문화, 봉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당당히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것이다. 한국에 와있는 외국인과 소외된 계층을 위해 침구술무료봉사를 할 권한마저 없었던 대한중의협회가 “전중협”을 발족해서 장장 11년 만에 법인활동이 가능해져 제도권내로 들어갈수 있는 기틀이 잡힌 셈이다.     조근식 회장은 현재 대한중의협회는 명년에 회원을 300여명으로부터 1000여명으로 늘이고 의학교육 전문강의와 중의학번역, 신문출판사업을 비롯해 건강식품제조가공판매, 수출입도매, 약재관련 법제사업 등의 건강관련사업, 그외에도 정기의료봉사 활동 및 해외활동범위를 넓혀간다는 계획을 세워놓고있다.   조회장은 또 “한의학과 중의학 사이 정보교류에 단절이 존재한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보완책으로 중의학연구소 건립을 추진중이고 도 지난 10월 8일 허가를 맡아냈는데 12월 말 창간호를 내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작업추진을 통해 한의사나 중의 의사 그리고 모든 동양의학도를 위한 정보와 학술교류의 장이 될수 있도록 할것이라고 조근식 회장은 밝혔다. 지난 8월에 가진 대한중의협회 총회 기념사진   “전 세계에서 중의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세계가 개방의 추세에 있는 만큼 우리 나라도 개방을 추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의 와 중의는 적수가 아니라 동반자지요. 좋은 의료서비스는 경쟁을 통한 상생의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지 독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개방을 하면 우리 쪽에서 중국쪽으로 진출도 가능합니다. 그럴 경우 중의의사 자격을 가진 한국의 류학생들이 그들의 폭넓은 인맥으로 중국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수 있을것입니다. 향후 2년내에 제도권진입을 목표로 회원들과 함께 노력해 갈것입니다.”   한국의 중의계가 제도권에 진입해 대한중의협회의 회원들은 물론 수천 능력자들이 모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 [길림신문]정공철특약기자/박문희기자  
10    “토지유전개혁”과 조선족농민(박문희) 댓글:  조회:5489  추천:125  2008-10-12
“토지유전개혁”과 조선족농민     졸문 중 “토지유전개혁”언급부분에 대한 몇가지 질문과 관련하여 박문희       “토지유전(流轉)”정책에 대한 이해문제와 관련하여 좋은 질문들을 하셨습니다. 농민형제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문제죠.   아래 천천히 말씀드리면, 이번 중공중앙 제17기 3차전원회의에서 채택될 토지유전관련정책의 근본 목적은 “토지경영을 적절히 규모화”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농민들에게는 토지 사용권만 있었지 유전권이 없었기 때문에 도시주변이나 개발구역에서 농촌토지를 징용할 때 개발상들이 아주 헐값으로 사서 폭리를 얻는 일이 많았습니다. 농민들이 엄청 당한거죠. 한족농민이나 조선족농민이나 똑같이 개발상들에게 당했습니다.   도농간 양극분화가 갈수록 심해져 작년에 수입차이는 개혁개방이래 가장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이제 농촌개혁을 더 늦추면 도농관계에 수습하지 못할 엄중한 후과가 생기게 될것입니다.   도농관계를 갈수록 벌어지게 하는 이런 기성의 제도를 개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이런 극히 불합리한 제도를 고치는게 왜 우리 민족에 불리한지 어느분께서 간단히 설명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이번에 이 문제해결이 가능한데, 물론 기득권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것으로 봅니다만, 그러나 그들이 득세할 가능성은 극히 적죠. 농민들의 이익을 계속 침해하다간 농민들이 가만있지 않을테니까요. 마른 나무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될테니까요.   그러나 30년의 발전과 최근 10년간의 기타 준비를 거쳐 현재 새로운 토지개혁의 조건이 이미 성숙됐습니다. 농촌개혁의 절호의 기회이죠.   토지에 대한 권리는 농민들의 기본권리의 하나입니다. 팔권리, 살권리 다 줘야죠.   나는 조선족농민들이 땅을 가급적 타민족에 팔아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습니다. 물론 조선족농민들 자체가 결정할 일이지만 말입니다.   조선족 촌관리위원회에서 토지유전문제와 관련된 인도작업을 잘해서 조선족농민들의 근본적 이익을 잘 보호해야 할것입니다.   조선족 농민들이 합작사를 뭇고 땅으로 주식을 사는게 좋은 방법의 하나죠. 토지문제를 가지고 조선족농민들은 물론 조선족사회에서 여론을 많이 해서 인도를 잘 하기를 기대해봅니다. 강압적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런 식은 안 통하니까요.   어느분께서 말씀하신 조선족농민이 “돈도 안받고 그냥 국가에 바치는 땅세만 대신 물어주면 된다는 조건으로 밭을 내놓았다”는 예는 땅을 합리가격으로 유전시킬수없는 상황에서 생긴것입니다.   말하자면, 땅을 부쳤대야 얻는게 별로 없고, 또 사실상 부칠 사람도 없고, 그거 묵이기보다는 누구한테나 대신 부치게 해서 그 댓가로 약간의 알곡이나 돈을 받으면 족하다고 여긴 결과입니다. 현행 정책하에선 그 이상의 좋은 방법도 있기가 곤란하지요.   농민들에게 극히 불합리한 이런 정책을 이번에 철저히 고친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토지개혁이라고도 하는것 같습니다. 토지유전정책은 한족농민들이 강열히 요구할뿐만 아니라 조선족농민들도 강열히 요구합니다. 농민들의 강열한 요구사항이 이번에 실현가능한데, 이게 그래 고무적인 일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합리가격으로 일부 땅의 사용권을 다른 민족에 팔아넘긴대도 하늘이 무너질 일은 없다고 봅니다. 농민 자율에 맡길 일이죠. 기실 그런다 해도 연변에 우리 민족이 설 땅이 없는게 아니죠.   이와 관련해서 잠시 북경 얘기를 삽입하면,   현재 북경에서 한국인과 조선족이 집결돼있는 곳은 왕징(망경)지역인데 이곳은 아세아에서 가장 큰 사회구역으로, 전체 50만 인구중 한국인 10만, 조선족 7만 해서 오늘 현재 우리 민족 인구가 모두 17만입니다. 2010년까지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전망이 나왔는데, 그렇게 되면 아세아 최대의 이 사회구역에서 우리 민족은 완전 주인이 되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도 이 지역 한족들이 놀라서 눈이 뒤집히는걸 못봤습니다. 내가 지금 왕징구역에 와 있은지 한참 되는데, 이곳 한족들은 오히려 환영하는 표정입니다. 청도, 위해, 심천, 상해, 주해, 의오(이우) 등 다른 지역도 다를바 없죠. 한족들의 넓은 궁냥에 호감이 가게 되는걸요.   본 화제로 다시 돌아오면--   물론 연변에서 좋은 지역, 좋은 땅까지 팔아넘기는것은 큰 실수일것입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이름이 지워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죠. 그러나 이미 말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것으로 봅니다.   도시 근처의 땅값이 이미 엄청 올랐거나 앞으로도 그냥 오르겠는데, 조선족농민들이 바보라고 그런 寶地를 쉽사리 내놓겠습니까?   “이제 이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을 텐데, 경영할 사람이 없더라도 팔지말고 합작사를 뭇고 능력자에게 맡겨 경영하게 합시다. 우리가 모두 주주로 되어 영원히 이 땅의 혜택을 받읍시다.”   이러한 발상들이 틀림없이 나올것입니다.   남방 일부 성 농민들은 수년전부터 대담하게 널리 토지유전을 시험했고, 장춘시 구태현 신립촌 등 북방의 일부 조선족농민들도 토지집중을 시험하면서 정부의 지지도 받았지만 널리 보급이 안되어 현재 규모화 농토경영을 하는 농민이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토지유전이 정책적으로 허용이 되고 정책적 자금지원이 이뤄진다면 조선족농민들이 합작사를 꾸리고 땅을 주식으로 들여놓고 내부에서 능력자를 선발하거나 지어 외부에서 능력자를 초빙하여 그 땅을 경영하게 함으로써 대부분 농민이 농사를 짓지 않고서도 이윤분배를 받을수 있고, 토지주인은 토지를 떠나 시내나 외국에 나가 이중 돈벌이도 할수 있습니다. 꿩먹고 알먹기죠.   왜 이런 좋은 일도 마다하고 그 좋은 땅을 팔아버리겠습니까? 만일의 경우 팔아버린다 해도 수익성을 우선 잘 따져봐야겠지요. 밑지는 장사야 하지 말아야겠지요.   "농촌토지유전"정책이 효력을 내게 되면 도시주변농촌의 토지는 그 즉시로 농민들의 값진 “보물단지”로 될것이며,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세주고 나간 조선족농민들은 그 땅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고도로 신경을 쓰게 될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제가 “농촌토지유전(流轉)개혁을 비롯한 이번 개혁안이 채택된 후 고향을 떠나 외국과 외지에 나가있는 연변농민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고 한 주요 이윱니다.   “농촌토지유전개혁이라고 하면 연변은 조선족의 손에서 급속도로 한족의 손에 넘어가게 될것은 빤한 사실”이라는 생각은 일단 추측에 불과한데, 연변조선족농민들의 계산속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에 연변조선족 농민들만큼 이속에 밝고 용감한 농민도 흔치 않다고 봅니다. 어떤 목표가 일단 설정되면 큰 모험도 과감히 할줄 아는 군체입니다. 다른 민족이 계산하는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계산에 밝습니다. 밑지는 노릇은 안할거라고 확신해도 문제없을겁니다. 바깥 세상에 나가 눈뜨고 돌아온 분들이 많으니까요. 이 면에서 다른 민족 농민들이 비교가 안될꺼라고 봅니다.   다른 민족 농민들을 숙보아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것은 바깥세상을 겪은 경력이 타민족에 비해 조선족이 조금 더 많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어느분께서 “연변경제가 이미 파탄되어버렸다”는 이유로 “원래 변변치 않던 중공업이 다 없어져버렸다”는 예를 드셨는데. 예중 석현종이공장, 개산툰팔프공장 등은 왜정때 세운 것으로 특정시기 계획경제의 역사사명을 완성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거나 사라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것입니다.   연변의 팔대림업국을 원래의 모양대로 계속 “살려나간다”면 연변의 수림은 전부 요절되고 생태가 철저히 파괴될것입니다.   국제 유명인사들이 장차 연변에서 동북아 전역을 대상한 가공업, 물류업과 관광업 등이 유망산업으로 될것으로 보는걸로 알고있는데 동감되는 부분입니다.   이른바 “창 까오땨오(唱高調, 근거없이 흰소리치는 짓)”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창 까오땨오”는 저 역시 반대합니다. 되지도 않을 일을 된다고 흰소리를 쳐서 농민들을 얼려넘긴다면 종당에는 농민들에게 더욱 큰 실망만 안겨주게 될것이니까요.   그러나 근거가 있고 노력만 하면 실현가능한 일을 제시하는것과 “창 까오땨오”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문제로 되는것은 근거도 있고 3년이나 5년, 혹은 좀 더 먼 불원한 장래 실현 가능한 일을 당금 1~2년내에 실현 안된다 해서 입가진 모든 사람들이 “되지도 않을 일을 아예 시작도 마오” 하고 김빠진 소리만 하고 “비관론”과 “전도무망론”만 퍼뜨린다면 농민들의 힘이 어디서 생기겠습니까? 기운이 나다가도 김이 빠져버릴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연변조선족이 동북아개발의 붐을 빌어 재궐기할것임을 믿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밝혔음으로 여기서는 약하겠습니다.   존재하는 문제는 충분히 주의를 불러일으길 바이고 해결책도 적극 마련해야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적극적인 일면을 보지 못할 수도 있지요.   병원에 가면 눈에 보이는게 거개 다 환자들뿐이지만 그렇다 해서 이 세상에 환자들만 사는게 아니잖습니까. 거리에 나서면 건강한 사람들도 꽤 많지 않습니까.   조선족의 미래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탐구하고 싶습니다. 낙관론이나 비관론이나 출발점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의문이 많이 제기되어야 탐구도 깊어질수 있다고 믿습니다. 10월 12일, 북경에서
9    동북아의 개발과 연변조선족의 미래 댓글:  조회:5590  추천:137  2008-10-09
제1회 조선족발전포럼-"연변의 의미와 가치 좌담회" 발표문 동북아의 개발과 연변조선족의 미래 박문희   1.연변조선족, 변혁과 진통 “연변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고있다. 중국조선족에 있어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무엇일가? 이 문제를 오늘날 새삼스레 묻게 됨은 개혁개방전 상대적으로 휘황찬란하고 자랑스러웠던 연변의 과거를 뇌리에 떠올림으로 해서 오는 모종의 상실감에 따른,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하는 막연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연변과 연변사람들의 자신심에 문제가 생긴 결과라는것이다. 현재 동북삼성에서 국외와 국내 여러 도시에 진출한 조선족의 규모는 약 9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그중 연변조선족의 국내외진출인구는 적어도 30만명 이상일것으로 본다. 그중에서도 농촌인구가 반수를 훨씬 넘긴다. 85만 연변인구의 1/3을 웃도는 수치이다. 그중 연변을 떠난 인재들도 많다. 연변인재의 이동은 대체로 각 현, 시에서 연변의 수부 연길로의 이동, 혹은 연변 각지에서 대도시와 국외에로의 이동이다. 그들은 청도, 북경, 상해, 심천, 광주, 주해 등 수십개 발달도시에 대거 진출해 있을뿐만 아니라 한국, 미국, 일본, 영국, 카나다 등 많은 나라에 진출해있다. 연변 농촌의 변화와 진통은 중국 농촌 전역에서 발생하는 변화와 대동소이하면서도 더 급격하고 아울러 보다 큰 진통을 동반하여왔다. 원인이라면 중국의 타 지역 농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출국붐이 거세차게 일었기 때문이다. 변화에 뒤따르는 새로운 문제점들은 확실히 많고 심각하다. 연변인구의 외국진출과 도시진출은 농촌학교의 소실과 농가마을의 황페화로 이어졌으며 인재 결핍, 리혼률 증가, 자녀교양 부재 등 문제를 량산했다. 인구 대이동으로 조성된 새로운 문제의 량산은 연변사람들의 각종 우려를 낳고 있다. 그중의 하나는 인구의 급감으로 인한 장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존속여부에 대한 걱정과 그에 따르는 불안감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관련하여 발생한 허다한 사회문제에 대한 우려이며 그 외 하나는 과거 휘황찬란했던 연변이 중국의 조선족사회(심지어 고향 연변을 떠나가는 사람들도 망라)로부터 소외를 당하는것이나 아닌지 하는 피해의식이다. 이 몇가지 문제는 우리 연변 사람들에게 있어서 체질적으로 아주 절실한 사안이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문제로 자리잡아가고있다. 때문에 외부에서 연변이나 연변 사람들을 비평하면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며 쉽사리 포용적인 자세를 보이지 못한다. 인구의 류실(당연히 인재류실 포함)에 대해서도 외지 진출의 추세를 가로막을수 없음은 인정하면서도 나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연변인들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순적인 심리정서를 가지고있다. 이것은 실상 상대적으로 휘황했던 과거와 역시 상대적으로 걱정스러운 오늘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지성인들의 현실적 심리상태를 말해주는것이다. 문제는 급격한 변혁의 행정에 필시 동반하게 되는 이른 바의 “진통”을 어떤 시각으로 진단하고 민족의 진로를 어떻게 짚어내는가 하는데 있다. “진통”에 대한 진단은 고립적으로가 아니라 반드시 “진통”의 발생원인 즉 획기적 변화와 련계시켜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그것은 “진통”자체가 발전의 부산물이고 관계로 말하면 주류와 지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발전”의 부산물인 “진통”을 무슨 방법으로 치유할것인가? 발전에 제동을 거는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발전을 가속화하는 개혁의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가? 이를 분명히 하는것이 당면 우리의 급선무이다. 문제의 “진통”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발전현황에 대한 옳바른 판단도 이끌어내기 힘들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망에 대해 드높은 자신심을 확보할수도 없게 될것이다. 연변조선족이 자치주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한다면 그날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아무런 실질적의미도 가지지 못하게 될것이다. 산재지구 사람들뿐 아니라 연변사람 자체도 한국이나 대처에 나간 뒤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 사례가 많으며 한국에서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와도 연변이 아닌 대도시에 거처를 잡고 사업을 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져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원인으로 작용했을수 있다. 한국에로의 진출로 연변사람들이 연변의 바깥세상에서 보다 크고 발달한 우리 민족의 발전상을 본것이 그중 하나다. 그 외 국내 발달지역으로 대거 진출, 새로운 조선족 집거지를 형성하면서 연변에 대한 애정과 동경심이 적지 않게 분산돼버린 것일수도 있다. 중국조선족은 변강지대의 고로한 농경민족에서 발달한 대도시의 현대민족으로 거듭나는 세기적 변화를 겪고있으며 그 앞장에 한국, 세계와 국내 대도시에로 진출한 중청년들이 서있다. 그들의 후대들 상당수는 대도시의 새로운 조선족집거구에서 태여나 진정한 도시현대인으로 자리를 굳할것이다. 따지고보면 기실 그들은 모두가 우리 민족의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일등 공신들이라고도 볼수 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태를 묻은 고향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것은 결코 고향이 미워서거나 고향을 잊어서가 아니라 필경 개개인의 삶으로 말할 때에는 성공과 발전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연변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해마다 고향에 부쳐오는 외화가 해마다 10억 딸라를 넘기고 있는 사실이 단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고향 연변과 끈끈한 련계를 유지하고있으며 이런 련계는 앞으로도 끊어지지 않을것이다. 동북삼성의 조선족이 중국에 진출하는 세계 조선민족과 더불어 북경, 청도, 상해 등 대도시들에 조선족의 새로운 삶터를 확고히 마련했다 해도 그들은 중국조선족의 수부 연변과 떨어질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게 될것이다. 온가보총리는 중국의 화교를 중국 개혁개방의 개척자, 공신이자 참여자라고 평가했다. 개혁개방 30년간 그들이 국내에 일떠세운 기업수는 해외투자기업 총수의 70%를 점하며 투자액은 60% 가량 차지한다. 국내 타지역과 국외에 진출한 연변조선족도 장차 연변의 건설을 각종 방식으로 지원하는 중요한 인적재부로 될것이다. 때문에 인재를 포함한 연변사람들이 나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불안해 할 리유가 없는것이다.   2.동북아의 개발전망, 자신감구축의 중요한 근거 앞으로 얼마 못가 연변이 조선족자치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것인가?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앞으로 상당히 긴 력사단계에 소실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불원한 장래에 과거 반세기 동안 주요 의미로 불려졌던 “조국변강”이란 협소개념에서 탈피하여 “동북아의 아침” 혹은 “동북아의 중심”이란 현실화된 “신개념지역”으로 거듭날것으로 본다. 나라의 민족정책과 동북개발정책으로 봐도 그렇고 지정학적 함수관계로 봐도 그렇고 동북아 각국의 최근 10여년간의 목표 뚜렷한 움직으로 봐도 그렇다. 우선 한국붐에 대해 진일보의 분석을 해보면 현재 한국붐은 거의 마지막 단계에 와있으며 이제 과거 20년간 지속돼온 엄청난 규모의 한국붐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것이라는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원인은 다음과 같은데 있다. 즉 한국은 현재 여전히 비교적 발달한 국가이긴 하지만 중국의 지속적인 고속발전으로 량국 국민생활수준의 거리는 급속히 줄어들고있다. 조선족의 한국진출이 앞으로도 장기간 이어질것이지만 한편 현실을 감안할 때 한국인의 중국진출은 오히려 더욱 활발한 편이며 국외에 나간 조선족인수가 약 45만명인데 반해 중국에 들어온 한국인이 75만명을 넘긴 것만으로 봐도 중국에서 우리 민족인구의 절대치는 줄어든것이 아니라 반대로 늘어났음을 알수 있다.혹자는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인들은 모두 연해지구의 발달지역을 선망하지 연변을 선망하지 않으며 현실로 봐도 연변으로 밀려들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거니와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이 조금은 경솔해보인다. 중국 조선족은 국내 대다수 소수민족과 다른 특수성을 가지고있다. 중국과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있는 조선반도가 있기때문이다. 중앙정부 정책의 안정성으로 봐도 연변의 조선족인구가 자치주존속의 상대적 허용비례 이하로 줄어들었다 해도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경솔히 지워버리는 일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목전 연변 조선족인구의 격감은 장원한 안목으로 볼때 잠시적 현상에 불과하다는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반도가 존재하는 한 연변조선족의 소실가능성과 타민족에의 완전동화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반도와 그 주변의 변화를 념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두만강구역국제합작개발항목은 주변 국가와 국제사회의 공동참여하에 10수년의 건설을 거쳐 초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세기 말 어느 학자인가 “동북아는 21세기의 기관차로서 서구와 북미주와 함께 ‘3자정립(三足鼎立)’의 구도를 형성하게 될것이며 세계경제의 발전을 좌우지하게 될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최근 미국 랜더회사의 한 연구보고는 “미래 10년 내지 20년 내 동북아구역은 세계 최대 경제실체로 발돋움할 확률히 극히 높다”고 내다 봤다. 우리는 흔히 중국이 한국, 조선, 일본, 로씨야, 몽골과 함께 두만강지역 국제자유무역구 건설에 꾸준히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있다. 이는 분명 우리 나라 및 동북아 각국 그리고 유엔 주도의 다국적 개발프로젝트에 따른 진행중의 사실이고 앞으로의 전면적 개발을 위해 중국, 로씨야와 조선이 협력하여 도로, 항만 등 기반시설건설에서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있는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은 우리가 당면 봉착한 일부 문제를 과대포장하여 류포한 결과일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동북아개발의 큰 흐름을 반드시 주의 깊게 관찰하여야 할것이다. 중로 량국은 훈춘과 로씨야 하산의 도로와 항만을 일체화시키고 관세를 없앤 봉쇄형 관리구역 조성이 한창 진행중이며 주변 각국도 두만강지역 국제자유무역구 건설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올 들어서는 우리 성 관할구역내에서의 한국공업단지와 일본공업단지 건설도 허용됐다. 길림성은 우선 자동차와 환경분야에 종사하고있는 일본 대기업과 한국 중소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유치하게 된다. 중국과 조선도 변경구역의 도로와 항구를 일체화시키고 수출가공 및 보세물류단지 건설을 본격화하고있다. 조선은 1984년에 “합영법”을 제정한 이래 줄곧 조선국정에 맞는 새로운 경제개발전략을 탐구해왔으며 선후로 일련의 상관조치를 내왔다. 조선은 시장경제요소를 부분적으로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이미 인식했다. 평양보통강수입물자교류시장의 지배인 김응연선생은 “지금 우리 나라 대외경제의 기본대상은 자본주의국가이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범위내에서 시장의 기능을 정확하게, 유기적으로 결합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였다”고 말했다. 조선에서 현재 주변정세가 복잡하고 자칫 소홀히 했다간 국가정권이 위태로워질수 있는 상황에서 급진적개혁은 물론 하기가 어렵겠지만 점진적인 개방은 조심스레 추진할것이며 일단 조미관계가 정상화를 실현하여 국가안전이 확보되기만 하면 필시 개방성경제개발의 속도를 다그치게 될것이다. 조선은 동북아개발의 처녀지로서 주변국들에 대해 말할 때 상당히 큰 경제합작의 예비를 갖고있는 지역이다. 실지로 현재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조선의 개발에 큰 기대를 걸고있는 상황이다. 조선의 부분적 변화(부분적 시장경제의 도입과 기반시설 건설 포함)는 이미 시작되였고 중등 규모의 변화도 조만간에 일어나게 될것이다. 따라서 중등 규모 이상의 변혁이 생기면 조선반도 전역에 류례없는 변혁의 선풍이 일게 될것이며 이런 변화와 거의 동시에 로씨야 극동지구의 전면적개발도 시작될것이다. 이를 발단으로 동북아의 “노란자위”이자 "황금의 삼각지대"인 연변과 조선의 라선, 극동의 하산지역은 중국의 동북, 로씨야의 극동지역과 조선, 나아가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는 변혁의 중심이 될것임이 틀림없다. 동북아개발붐의 도래를 앞에 두고 연변의 움직임도 상당히 절주 있고 유력하다. 연길을 “핵”으로 한 “연룡도”중심도시건설전략과 실행프로젝트의 제정이 그중의 하나다. 연변 내외 각계 인사들의 깊은 관심속에 며칠전 “연룡도도시공간발전계획요강”이 편성되여 이제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대회의에서 심의, 채택하면 곧바로 실시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연길중심도시 육성으로 연변경제를 궐기시킴으로써 두만강지역개발의 국제경쟁에서 감제고지(瞰制高地)를 차지하고 주도권을 장악하여 동북아경제일체화행정을 다그치기 위한 작업이 보다 구체적으로 실시되고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노란자위”를 핵으로 확산적인 전면개발이 본격 가동되면 국내외 투자자들이 돈주머니를 메고 대거 연변에 몰려들것이며 또한 연변을 떠나 대처나 외국에 가서 돈을 번 사람들도 분분히 고향에 돌아와 가공업과 물류업에 투자하게 될것임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중국 조선족, 한국인, 조선인과 세계 각지의 동포를 망라한 연변의 우리 민족 인구는 폭발적인 장성기를 맞게 될것이며 연변의 가치는 크게 증폭되여 동북아경제발전에서 발동기와 같은 존재로 될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충분한 신심을 가져야 하며 비관론은 근거가 없는것이다.   3.관념전환, 10년 준비의 기본고리 그러나 연변사람들은 10년 좌우 혹은 더 먼 장래에 있게 될 이런 변화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아서는 안된다. 하다면 무슨 준비가 필요할가? 준비해야 할 일이야 수 없이 많겠지만 몇가지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되지 않을가 싶다. 1. 여러 가지 포럼이나 세미나를 통해 연변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를 보다 높이 서서 깊이 있게 토론함으로써 학술상, 리론상으로 연변의 의미와 가치문제를 명확히 하고 이로써 연변인의 자신심을 확고히 세워야 할것이다. 밝은 전망을 리론적으로 철저히 구명해야 비로소 장래에 대한 자신감을 확보할수 있다. 때문에 학술 문화 분야에서 관념전환을 주 목적으로 한 이 작업을 선행시키는것은 연변의 사상해방과 련계되는 것으로서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이는 결코 학술리론분야에서만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교육, 신문, 출판 부문과 기타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다 함께 참여해야 할 일이다. 2. 로씨야진출을 지금부터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이를 감안하여 로씨야의 극동지구에 대한 정보수집, 개발연구 작업을 잘해야 하며 투자환경과 발전전망에 대한 소개작업도 적극 벌려야 한다. 과거 우리가 로씨야에 대거 진출했던 시기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된 로씨야 전역과 적어도 극동지역의 현황에 대해 아는것이 많지 못하다. 장래의 경제교류와 협력에 대비하여 정부는 물론이지만 대대적인 여론 작업을 통해 민간차원의 교류도 크게 확대해야 할것이다. 3. 중국 조선족은 한어와 한국어를 천성적으로 구사할수 있기에 한국,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 발전에 기여함에 있어서 누구도 대체할수 없는 독자적인 우세를 갖고있다는 견해가 상당히 보편화되여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반드시 시각전환을 가져와야 한다. 현재 중국에 진출하여 거주하고있는 한국인은 약 75만이며 앞으로 10년 내 그 수는 200만 이상으로 늘어나게 될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있다. 중국 대도시들에 진출, 정착한 한국인들이 중국어를 열심히 배우고있을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도 중국의 학교에서 정규적인 중국교육을 받고있다. 앞으로의 조선족은 언어면에서 독자적인 우세를 갖고있는 군체가 아니다. 급변하는 동북아의 정세와 결부하여 이 면에서 시각전환을 가져와야 하며 대응책을 미리 강구해야 할것이다. 4. 대응책의 일환으로 우리는 학교에서 영어, 일어만 가르칠게 아니라 로어과목도 설치하여 5~10년 내에 로어인재를 대량 키워내야 한다.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로어과를 설치해야 할뿐만 아니라 대학교에도 설치해야 하며 사회력량도 동원해서 로어학교를 꾸려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로어교원을 양성해야 한다. 한어, 한국어에 능통한 기초우에서 일어나 로어까지 구사하는 능력을 갖추면 동북아개발사업의 중심에서 남다른 특수역할을 발휘할수 있게 될것이다. 5. 장원한 관점에 립각하여 목적성 있게 조선과의 각종 교류를 추진, 활성화하고 지정학적 견지에서 조선의 발전전망에 대한 구체적연구를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조선에 대한 중소형투자(연변과 국내 조선족의 능력에 걸맞는) 전략을 연구하고 조선의 인문지리, 자연부원, 개발여건 등에 대한 연구와 소개작업을 진일보 진행해야 할것이다. 6. 현재 홀시되고있는 몽골공화국에 대한 연구교류와 료해증진 작업도 시작해야 하며 정부 및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와 합작도 시도하고 활성화하여 장차 이 지역개발(주로 투자개발)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준비도 해야 한다. 7. 연변의 기업인들도 동북아개발이란 큰 구도에서 기업의 앞날을 설계해야 할것이다. 그 외 앞에서 언급했지만 연변조선족이 외국에서 벌어오는 외화는 해마다 10여억 딸라에 달하는데, 이런 방대한 자금의 축적과 리용도 이한 거창한 개발사업에 투여되여야 최대의 가치를 창출할수 있을것이므로 이런 자금의 투자방향에 대해서도 참다운 연구와 지도를 따라세워야 할것이다. 조선족이 벌어온 외화중 상당부분은 농민들이 벌어온것인데 현재 분산된 형태로 있는 이런 자금은 합당한 투자항목을 찾지 못하여 잠자고있거나 지어 소비에 탕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변농촌에서 농민합작기금을 세우는 방안도 연구돼야 할것이다. 8. 동북아 6개국의 현실적 준비상황과 기타 모든 여건으로 보아 앞으로 동북아개발에서 중국이 주도적역할을 담당하게 되리라는것은 거의 의심할 나위없다. 한편 여러 나라 여러 민족이 공동 참여하는 동북아 전역의 거창한 개발사업행정에 각종 민족정서가 필시 불거져나오게 될것이며 지어는 국가간, 민족간에 엄중히 대립하는 현상도 피면하기 어려울것이다. 례컨대 일본기술의 “무차별침략”에 대한 민족적 불안감, 중국 이민의 “극동점거”에 대한 로씨야 민족의 거부감, 조선에 끼치는 중국경제의 강대한 영향에 대한 반발심리, “중국경제에 의한 동북아통일의 가능성”으로 인한 한국 국민의 대립정서 등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의 발생가능성에 대해서도 예견해야 하며 대응준비가 있어야 할것이다. 9. 여러 나라지간의 일부 민족적 대립정서는 심지어 우리 중국의 여러 민족 사이에도 파급되여 예기치 못한 후과를 유발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사태들이 발생한다면 개발의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는 연변의 조선족들이 그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다. 발생해서는 안될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열리는 관련 포럼이나 동북아 6개국이 참여하는 국제적 세미나에 이런 문제를 미리 제시하여 공동히 예방책을 토의, 마련할 필요가 있다. 10. 현재 주의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될 문제는 조선족문화계의 “자페상태”이다. 례컨대 중국 조선족문화계가 민족내부의 교류협력(한, 미, 일 등 국의 동포문화계 망라)은 비교적 빈번한데 반해 국내 주류문화계와는 거의 담을 쌓고 지내는 현상이 오랜 시일 지속돼왔는데, 이를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페상태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국내 주류문화계와의 활발한 교류협력관계를 수립하며 와중에 주류문화를 배우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켜 우리 민족의 문화수준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문화보급률을 극대화하는것은 장차 동북아 각국 문화가 충돌할 경우 중국조선족이 건설적인 역할을 발휘하는데 대해 보다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될것이다. *    *    * 요컨대 변하지 않는 세상은 없으며 변혁기의 세상은 반드시 진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일정한 력사단계에 있어서 진통은 모종의 희생이며 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러나 변화에 뒤따르는 진통은 치유가 가능하지만(수많은 개체로 말할 때 치유가 가능하지 않을수도 있다) 만약 진통이 두려워 변화를 안한다면 문제가 심각성을 넘어 치유불능의 중독증에 걸리게 될것임이 자명하다. 온 세계가 다 변하는 판국에 우리만 변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는 길 밖에 없을것이기 때문이다. 하다면 “진통”을 무슨 방법으로 치유할것인가? 발전에 제동을 거는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발전을 가속화하는 개혁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른바 사상해방이나 관념혁신도 늘 빈말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요즘들어 특히 고무적인 사안은 래일(9일)부터 나흘동안 북경에서 열리는 중앙 17기 3차 전원회의에서 채택하게 될 중대한 농촌개혁안이다. 농민들의 근본적리익 보장에 립각점을 둔 농촌토지류전(流轉)개혁을 비롯한 이번 개혁안이 채택된 후 고향을 떠나 외국과 외지에 나가있는 연변농민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과거에도 중국 조선족의 수부이자 마음의 고향이였을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 점은 변함이 없을것이다. 일부 외지에 진출한 연변인과 산재지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의 연변에 대한 애정의 분산은 잠시적인것이며 연변과 연변인에 대한 일부 불만의 목소리도 기실 미운 감정의 발산이 아니라 애정표현의 색다른 방식에 다름 아니다. 연변조선족의 생존발전에 어떤 도전적인 상황이 빚어지는 경우나 혹은 외계에서 들려오는 일부 비판적 목소리에 직면하여 우리는 부적절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허심하게 수용하는 자세와 자기를 변화시키는 용기, 지혜를 갖추는 노력이 우선 필요할것이다. 우리 연변조선족에게 있어서 자치주의 미래 나아가 전반 중국 조선족의 미래에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감이 결여된 민족에게는 희망과 활력, 그리고 개혁적이며 발전적인 사고방식이 있을수 없다. 동북아 경제 일체화란 대세의 흐름앞에서 연변 조선족들이 주동적인 자세로 거창한 변혁의 중심에서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력사를 창조할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2008년 10월 8일  
8    “민족과 혈통”문제에 대한 통신 댓글:  조회:5151  추천:178  2008-04-27
  “민족과 혈통”문제에 대한 통신   4월 22일 화요일, 오후 4시==***님의 내신 제목 : 박선생님에게   박문희선생님 안녕하세요? ***입니다. 이번의 토템사건으로 하여 토템에 관해 좀 이해하려하는데 니카 역시 토론의 장으로는 무리인것 같은 느낌이라 이렇게 주저주저하다가 오늘 멜을 띄웁니다. 선생님을 알기 전에 김월성 글에 반론을 제기한 선생님의 글을 저의 불로그에 저장해 둔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진 선생님을 잘 몰랐구요. 니카를 통해 우연히 반론 글 임자가 선생님임을 알고 또 서글서글한 성격이 좋아 인상이 상당히 좋습니다. 단지 저와 관점이 다른 곳이 있어 섭섭은 하지만...단지 저의 견해를 전달하고 싶어 적은 단상을 보내는데 가르침을 바랍니다. 그럼 아래에 서술체로 쓴것 그대로 보내며 양지를 바랍니다.   란 명제가 성립되는가? 의심스러워 인테넷을 뚜져 보았는데 민족의 정의를 백과사전에선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국어사전엔 라고 정의하고 있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민족은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혈통과 관계가 없는 개념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이란 또한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별되는 문화나 전통적인 것이 바로 혈육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한 지역에 뭉쳐 오랜 전통을 보존하고 내려온 집단이라면 상대적인 혈통관계 외엔 다른 어떤 형식을 찾아볼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역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요하다. 고대로 놓고 볼때 부동한 혈통이 부단히 뭉치여 생활할 수 있기에 사회가 생기고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상고시대로부터 고대인들이 무리지음으로서 문화를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를 공유하면서 서서히 부족, 종족 등등의 사회형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에 기초하여 최후엔 민족으로 구분될 수 있는 상대적인 고정적인 혈통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때문에 백과사전의 정의를 쉽게 풀이하자면 민족이란 혈육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문화군체로서 그 주체를 이루는 속성은 지역성이고 그 민족의 상징으로 되는 것은 곧 문자라고 정의를 확대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말하면 이런 정의가 외려 국어사전의 정의와 더 접근한다고 할수 있겠다. 하기에 한마디로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는 명제는 성립되지도 않고 우리의 인식을 잘못 오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으로 생각된다.   4월 26일 토요일, 오전 10시==나의 답신 제목 : ***님에게   ***님,    22일, 보내주신 이메일을 제때 받아보긴 했는데, 시간상 관계로 즉시 회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늦은대로 오늘 회답 드립니다.   “백과사전의 정의를 쉽게 풀이하자면 민족이란 혈육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문화군체로서 그 주체를 이루는 속성은 지역성이고 그 민족의 상징으로 되는 것은 곧 문자라고 정의를 확대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민족은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혈통과 관계가 없는 개념일 수는 없다.”   이 말씀 맞습니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민족이 혈통과 무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족이 혈통에 의해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이라 해서 다 같은 혈통이 아니고, 다른 민족이라 해서 혈통이 반드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혈통은 선천적인 것이고 민족은 후천적인 것이 되겠죠. 혈통은 타고난 것이고 민족은 일정한 문화환경속에서 형성됐다 이겁니다.   그러니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는 명제는 성립되지도 않고 우리의 인식을 잘못 오도할수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으로 생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으며 해로운 것입니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런 개념이 소속한 범주가 다릅니다. 민족은 역사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혈통은 생물학적 범주에 속합니다. 연구대상도 다릅니다. 민족의 연구대상은 인류역사의 발전행정에 공동한 지역, 언어, 경제생활과 문화심리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혈통이나 종족의 연구대상은 인류의 군체유전자 돌연변이의 결과입니다. 속성도 다릅니다. 민족이란 사회적인 것이고 혈통이나 종족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형성시간도 다르죠. 종족이나 혈통이 먼저고 민족은 후에 형성됐습니다. 특징도 다릅니다. 민족은 지역, 언어, 경제생활과 문화심리를 특징으로 하고 종족은 모발, 눈동자, 사지형태, 피부색깔과 얼굴의 구조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여기서 역사, 언어, 심리, 경제생활, 공동생활의 지역 등은 문화개념으로 모두 민족이 민족으로 형성되는데 있어서의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인종, 종족이나 혈통이라면 그것은 생물학, 유전학적이고 자연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상고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는 씨족은 혈연관계를 유대로 결성된 인간군체이고 부락은 혈연관계를 토대로 구성된 씨족군체이며 부락연맹은 혈연관계를 매개로 공동이익을 위해 형성된 여러개의 부락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씨족, 부락, 부락연맹은 혈연관계를 특징으로 하고 있고, 민족은 혈연관계를 초월해서 지역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같은 혈통의 사람들도 기나 긴 역사 시기에 하나의 민족으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중국이란 땅에서 왔다고 하면 몰잡아 한족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 민족의 중요한 내원으로 되는 동이족이 어디서 살았습니까? 중국(중원)의 동쪽에 사는 수많은 부족집단(민족이 아니라 민족의 내원이죠)을 모두 동이족으로 불렀는데, 거기서 일부는 북상, 동진해서 우리 민족을 형성했고,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월족, 묘족 등 민족으로 되었으며 일부는 중원 화족에 융해되었다가 한족으로 거듭났습니다.   여기서 지역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당시 남으로 내려갔던 동이족이 우리 민족으로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거나 북상, 동진한 동이족이 묘족으로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같은 혈통도 이처럼 여러 개의 민족으로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다른 혈통도 한 지역에 몰리고 함께 생활함으로 해서 한 민족으로 될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혈통집단이 부동한 민족으로 형성되는데는 문화적 요소가 작용하는것이지 혈통자체가 결정적 작용을 하는것은 아닌것입니다.   민족이 다 형성된 다음에도 다른 한 민족에 동화된 사례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 민족 박씨의 일부가 한족으로 된 사례가 그것입니다. 중국의 다른 민족의 일부가 우리 민족에 동화된 사례는 더욱 많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이 좋아서 바다를 건너와 우리 민족이 됐다면, 그게 우리 민족의 자랑이지 치욕이겠습니까? 또 그들은 우리의 할아버지가 아니란 말입니까?   신복룡 한국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다”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우리 민족의 혈통은 적어도 35개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건대 35개 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순수혈통론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만약 우리민족이 하나의 순수한 혈통을 이어받은 민족이라면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을까도 문젭니다. 이어져 왔다고 해도 저능아가 많은 아주 낙후한 민족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래 주소에 들러서 신복룡교수의 글을 참고 삼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ckywf.com/news_2007/board.php?board=f_netizen01&act=view&no=141   원시사회에서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그 내부에서 혈연관계를 유대로 한 씨족, 부락의 분화와 해체란 심각한 변화가 생겼는데 이로서 원시공동체의 혈연관계가 점차 페지되기에 이릅니다.   부동한 씨족, 부동한 부락 성원들의 서로 잡거하는 현상이 세대가 바뀌면 바뀔수록 더 심해져 결국 씨족, 부락의 혈연관계가 민족형성의 지연적 토대로 넘는데 조건을 마련해준 것이지요. 최초의 민족이 혈연관계에서 지연관계에로의 변화를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국가의 산생이겠죠. 국가의 산생으로 민족이란 이 신형의 공동체 형성이 완성되어 씨족과 부락을 완전히 대체해버린 것이죠.    민족이 형성되는데 여러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민족의 분화:“동원이류(同源異流)”라고도 하는데, 주로 원유민족의 분화로 새로운 민족이 생기는 역사현상을 말합니다.   민족의 조합:“이원동류(異源同流)”라고도 합니다. 주로 원유의 여러개 민족의 일부나 전부가 일체화 실현으로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는 현상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민족의 조합도 몇가지 현상으로 갈라 볼 수 있습니다.   민족의 동화현상--한 민족이 자기 원 민족의 특징을 상실하고 아주 다른 민족으로 되는 현상인데, 자연동화와 강박동화가 있습니다.   민족의 집합현상--여러개 민족이나 혹은 민족의 여러개 부분이 장기적인 교류와 서로간의 영향을 거쳐 점차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는 현상입니다.   민족의 일체화현상--여러 민족이 장기간의 발전과 교류가운데서 서로 대방의 문화를 흡수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서로에 융합되면서 점차 여러 가지 면에서 공동한 특징을 가지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문화나 전통적인 것이 바로 혈육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한 지역에 뭉쳐 오랜 전통을 보존하고 내려온 집단이라면 상대적인 혈통관계 외엔 다른 어떤 형식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틀립니다.    이미 말했지만 물론 민족이 혈통과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 민족 형성의 기초로 작용하는 혈통집단은 하나가 아닌 다수이며 다수의 혈통집단을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해 내는 과정에서는 흔히 여러 혈통집단들 사이에 중심성과 통합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지배적인 어떤 혈통집단이 존재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지배적인 혈통집단의 존재가 없이는 다수의 혈통집단들 사이에 문화적, 정치적 통일성과 일관성이 유지되기 힘들며, 그렇게 되면 민족의 형성이 어려워집니다. 우리 민족을 형성함에 있어서 그런 역할을 한 지배적 혈연집단은 부여족이나 고구려족으로 보는데, 그 부여와 고구려족은 또 예족과 맥족에서 왔다고 보는 견해가 목전에는 지배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혈통적인 핵심집단의 존재는 한 민족의 특징과 그 민족의 경계를 규정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이유는 국가가 특정한 어떤 혈통이나 종족 핵심의 기초 위에서 다양한 인적, 문화적 접합을 통해 민족을 구성해 내기 때문입니다. 현재 높은 동질성 수준을 보이는 민족도 처음에는 어떤 종족적핵심을 진원지로 삼은 확산적 민족 형성의 과정을 거쳐 동질성에 도달한 것이며, 확산적 민족 형성 과정을 주도한 것은 그 혈통적핵심에 의하여 지배되는 국가이죠.   한국 고려대 정호영교수의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역사적, 이론적 접근”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민족은 실제로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공유된 혈통이라는 믿음은 원래는 민족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어떤 혈통, 종족 핵심의 것이었고, 그것이 민족 형성 과정에서 다른 비지배적 혈통집단들에 속한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 국가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로 사회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혈통의 이미지는 영원한 운명 공동체이자 하나의 가족이라는 민족의 이미지로 확장되었습니다. 위에서 말했지만 우리 민족은 적어도 35개 혈통으로 구성된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우리는 한 피줄을 가진 민족이며 우리의 피줄에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민족은 실제로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임을 말해줍니다. 민족의 문화가 그런 믿음을 만들어 낸거죠.   일부에서는 인종적 요소들과 문화적 요소들을 결합시켜 민족을 이해하는 경향을 갖는데, 이런 입장은 자기 민족은 아주 오랜 과거부터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을 중심적 요소로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자기 민족을 근대적 구성물이 아니라 영원성의 실체, 역사적 유산으로 이해합니다.   민족이 전적으로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 사항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을 구성해 내는 실체란 점에서는 이런 입장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원을 고대에 두고서 민족에 원초성을 부여하여 그것을 영원성의 실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실상 민족은 근대로의 이행 과정 속에서 국가의 정치적 정당화라는 목적을 위해 국가에 의해 구성된 것이죠. 물론, 역사적, 문화적 유산으로서 인종적, 혈통적 기초에 바탕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민족의 형성에는 인종적, 혈통적 요소들이 필요하지만, 민족은 인종과 혈통을 넘어서는 실체인 것입니다.   민족과 혈통문제는 비교적 큰 문제이기 때문에 짧은 글로는 설명이 잘 될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 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6기까지 냈다가 이번 논쟁이 터져서 잠시 중단했는데, 순서도 바꾸어 원래 퍽 뒤에 써서 올리려 했던 민족과 혈통관련 글을 이번에 먼저 올릴 생각입니다. 요즘 시간 내서 정리해 조글로 미니홈에 올릴 생각이니, 오늘 이 회답글에 잘 설명이 안된 내용은 그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문 주시어 감사합니다.   박문희 드림   4월 27일 일요일, 오후 2시==***님의 내신 제목: 박선생님께   박문희 선생님 회답 멜 갑사합니다. 선생님 사업에 지장이 없기를 바랍니다. 소수민족으로 태여나서인지 민족이란 단어에 너무나 민감해 난해한 문제들을 스스로 해석하고 분석하려 노력했습니다. 선생님의 답변을 비록 한번 보고 이 멜을 작성하지만 선생님의 뜻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민족과 문화의 구분을 정확히 적어주셔 이 구분에 대해 더 한층 충분한 인식을 갖게 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글들을 더 찾아보고 이해 못할 것들이 있으면 역시 반문의 형식을 빌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려 하는데 괜찮겠지요? 하지만 저도 좀 더 깊은 파악이 있게 되면 선생님께 멜을 띄우지요. 허술히 선생님의 정력만 소비하게 될가 주저 됩니다. 선생님 갑사합니다.   주말에 즐겁기를 바라며...*** 올림 .................................................. 금방 전에 멜을 보내고 또 한번 읽고 또 멜을 띄우는데 다름 아니라 정성들여 작성해 주신 장편에 더 한층의 깊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만 하여 너무나 무례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칠수 없어서 입니다.   제가 문화, 민족, 혈통 등에 관한 개념이 명확하지 못하고 분산적인 인식밖에 갖고 있지 못한 전제하에서 체계적이지 못하여 갖게 된 결과임을 선생님이 체계적인 해석을 통하여 깨달았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럼 선생님 수고하십시요.  안녕히 ***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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