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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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백여년만에 돌아온 출해구 댓글:  조회:707  추천:0  2023-05-16
백여년만에 돌아온 출해구 --우리 성, 우리 주의 큰 경사   국가 해관총서는 최근 공문을 내려 6월 1일부터 흑룡강, 길림 두 성의 화물을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통해 동남연해로 운송할 수 있으며 이는 "국내무역"에 속하므로 수출입관세를 징수하지 않는다고 통고했다. 일본해로의 출해구를 다시 얻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길림, 흑룡강 두 성은 비록 토지가 비옥하고 자원이 풍요롭지만 출해구가 없어 장기간 료녕성 대련항을 거쳐 해운화물을 중계해 오다나니 운송원가 문제로 줄곧 경제발전이 제약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滿淸정부가 짜리로씨야와 굴욕적인 "북경조약"을 체결한 결과 원래 길림성에 속했던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가 그쪽으로 넘어가게 된 100여년 전 굴욕적인 력사는 세상이 익히 아는 바다.   쏘련 해체 후 로씨야는 극동개발문제에서 중국과의 협력에 장기간 소극적이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방체계 진입을 꿈꾸며 시종 그것에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로씨야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충돌로 서방진입 꿈이 철저히 깨졌다. 서방 전체의 경제제재와 군사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로씨야는 부득불 중국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로씨야 극동지역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항 사용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로씨야가 전향적인 자태를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우리에게 출해구가 열리게 됐다. 륙로를 통한 운수거리가 크게 단축(海運의 원가는 陸運의 몇 분의 1에 불과하다)되고 따라서 경제발전이 큰 힘을 받게 된 것이다.   일이 여기까지 온데는 미국의 공로가 크다고 봐야 한다. 가령 랭전 종식 후 미국이 로씨야를 지금처럼 못살게 굴지 않고 반대로 아주 살뜰하게 품어주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를 상상해보라. 금방 그 답이 나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국님들에게 적어도 한톤짜리 동질메달을 목에 걸어주어야 할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출해구가 생겼으니 전반 극동지역도 조만간 느슨해질 것이다.  
101    최룡관시비 중국조선족민속원서 제막 댓글:  조회:2457  추천:0  2020-07-13
최룡관시비 중국조선족민속원서 제막  [ 길림신문 김태국기자 ] 2020-07-12 조선족문단의 중견시인 최룡관선생이 창작한 애향시 가 덩실한 시비로 태여나 중국조선족민속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잔잔한 향수를 선물하게 되였다. 7월 11일 오전에 개최된 최룡관시비제막식에서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방순애 회장은 “연변동북아문학연구회 회장단은 최룡관시인의 문학창작생애 50주년을 계기로 시비를 세우기로 결정, 유관 부문의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하에 모아산자락에 자리잡은 중국조선족민속원에 설립지를 마련하였다.”고 소개하였다. 답사를 하고 있는 최룡관시인. 제막식에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김영건, 전임 길림공상학원 당위서기, 단군문학상 리사회 리사장 신봉철, 연변시인협회 회장 전병칠 등과 시인의 제자, 고중동창, 대학동창대표가 축사를 하고 《장백산》, 《도라지》, 《송화강》 등 문학지 대표들의 축하메시지가 대독되였다. 부분적 참가자들이 시인과 함께 시비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회원인 최룡관시인은 연변사범학원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변일보 문예부주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면서 50여년간의 문학인생에《이미지창작론》, 《하이퍼시창작론》, 《동시창작론》 등 론문집과 시집, 문집 등 여러가지 작품집 총17권을 출간하였으며 준마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주인민정부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단국문학상,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공로상 등 다수를 수상하였으며 40여명의 문학후배를 양성해냈다.  
100    조미 간 극적 사태에서 조선의 변화를 본다 댓글:  조회:2788  추천:0  2018-05-27
지난 며칠간 ‘김정은-트럼프 회담’을 앞두고 극적 변화가 거듭되는 가운데 회담 문전에 잠깐 감돌던 암운이 눈 깜짝 새 맑게 걷혔다. 조선 핵실험장 페기의 폭파연기가 흩어지기 바쁘게 발표한 트럼프의 회담취소 선언(지금 와서 보면 대방의 진실한 의중 떠보기 게임, 세간에서 트럼프를 어떻게 평가하든 우리 입장에서는 트럼프에 대해 눈 씻고 다시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에 예전 같으면 북이 그 즉시로 거세게 맞받아쳤을 것이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뜻밖이자 신기하기까지 한 ‘깜짝 쇼’는 오히려 회담의 뜻 깊은 사전소통으로 되어 회담의 문전을 밝게 장식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북남 두 차례 정상회담, 미국간첩 3인 석방, 풍계리 핵 실험장 파기 등 모든 행동은 북남의 군사대결을 종말 짓고 평화와 번영을 실현하려는 조선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미 ‘핵·경제 건설 병진노선’ 대신 경제건설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한 조선에 있어서 선제적으로 북미정상회담의 판을 깨려는 의도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의중 떠보기 깜짝쇼’를 통해 북의 의중을 확인한 후 “그들(조선)은 조미정상회담을 무척 원하고 있다. 우리도 그것을 하고 싶다. (회담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번영과 평화로 이어지길 바란다”면서 최근에는 6·12 조미정상회담 재추진을 공식화했다.  그러니 조미정상회담의 개최와 성공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것이 성공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다음에 벌어질 일들은 과시 고무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도남북을 관통할 해륙공 통로, 반도와 이어지게 될 중국대륙과 유라시아대륙의 횡단철도, 나아가 일본과 이어질 해저터널, 이제 평양에 터져 내리게 될 국제적 경제지원의 봇물......땅덩어리가 별로 크지 않은 조선이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이면 한국과 비슷하게 될 거라면 지나친 속단일까? 일단 반도의 변혁이 시작되면 반도 전역과 중국의 동북, 러시아의 극동지역은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변혁의 중심이 될 수도 있을 것, 말하자면 이 광활한 지역이 명실 공히 동북아시아의 ‘노란 자위’이자 ‘황금의 삼각지대’ 역할을 착실히 수행할 수도 있으리라. 그때면 우리 연변에도 걷잡을 수없는 변화의 선풍이 휘몰아치게 되리라.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99    남북 정상회담을 기대한다 댓글:  조회:3043  추천:1  2018-02-12
남북 정상회담을 기대한다   남과 북이 국제대회에서 공동입장한 건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인 2007년 장춘동계아시안게임 이후 11년 만, 참으로 감격에 목 메이는 만남의 장면들이었다.    "불과 40여일 전만 해도 이렇게 감동적인 분위기가 되리라 생각조차 못했는데 개회식 때 북남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니 한 핏줄이라는 기쁨을 느꼈다".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을 지켜보며 울먹이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반도평화에 남북공감대는 분명 존재한다. 남북관계 역사상 분단 이후 최초로 조선 헌법상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직계 친족(여동생 김여정)이 한국을 방문,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북의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필요시에는 전례 없는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구두로 전달된 김정은 위원장의 방북제안에 문재인 대통령은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서 성사시켜나가자"고 뜻을 밝혔다. 하여 여건(비핵화문제 관련 朝美 공조 추진)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냐가 숙제로 남았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 이산가족 상봉, 군사회담, 비핵화 논의 등 이후의 발걸음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남북수뇌들의 정치적 용기와 지혜가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어렵지만 풀지 않으면 안 될 숙제다. 슬기롭게 난국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98    곪은 상처는 터뜨려야 아문다 댓글:  조회:6071  추천:5  2015-12-31
  곪은 상처는 터뜨려야 아문다 -“두가지 사건”으로 조선족사회가 불안정하던 나날에   우리 길림신문사가 성소재지 장춘으로 이전한 이듬해인 1996년, 그러니까 중한수교 4년이 되던 그해 중한간에 두가지 큰 사건이 터졌다. 하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엇바뀐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수많은 조선족가정을 파멸에로 몰아갔던“한국초청사기사건”이였다.   1996년 여름, 어선 페스카마호에서 일어난 가공의 반란사건은 그 살해수법과 피해규모도 끔찍했지만 사건을 유발한 조선족선원 상대의 선상폭력도 세상을 경악케 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조선족사회에 극통을 안겨준 일부 한국인들의 대규모 초청사기사건이 그해 11월 18일, 한국언론에 의해 만천하에 들통나자 전반 조선족사회는 엄청난 충격속에 빠져들었다. 실제로도 가해자가 피해조선족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랍치, 살해 사건이 중국 북경과 천진 등지에서 잇달아 발생했다.   한국인과 중국조선족간의 상호 불신과 갈등으로 당시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약고에 불똥이 튀기 일보직전처럼 팽팽했다. 언제 어떤 돌발사태를 터뜨릴지 모를 위험을 안고있는 이런 중대 사안에 직면하여 우리 신문사앞에는 이 사안들을 주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취급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가 나서고있었다.   1995년 4월, 장춘에 들어온 신문사의 상황은 그 당시 성위에서 신문사의 간부관리를 여전히 연변주위에 위탁하는 등 사정에 따른 사장 겸 주필 리금남의 계획과 포치에 의해 지도부 3명 성원중 나만 장춘에 들어와 조선족사회와 대내외 관련 부서와의 련계, 신문출판 등 장춘본부의 일상사업을 떠메게 되였다. 편집부에는 총편집판공실 김영규주임이 편집과 출판 업무를 맡아보고 한정일부주임이 취재와 기획을 관할하고있었다. 아울러 갓 입성한 장춘본부의 전체 임직원들은 “제2차 창업”의 열정과 감정을 가지고 밤늦게까지 신문을 꾸리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성과 장춘시 기관의 조선족간부, 조선족기업이나 학교, 사업단위의 일군들, 대학, 과학기술부문의 엘리트들, 농촌의 서기, 주임 그리고 농민들도 우리 신문을 민족의 대변인이라고 부르며 일만 있으면 신문사를 찾아왔다. 장춘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길림신문》은 장기간 구심점이 없던 조선족사회에서 사실상 구심점의 역할을 담당하고있었다. 이러한 때에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과 “한국초청사기사건”이 발발하자 그들은 당연히 신문사에서 나서줄것을 희망했다.   당의 보도기관으로서 외사에 관련되는 중대한 민감사안은 일반적으로 신화사소식에 준하는것이 상례였지만 우리 중국조선족의 권익과 직접 관련되는 이 두가지 중대사안에 대해서만은 우리가 함구할수도 피해갈수도 없었다. 페스카마호사건의 주인공 6명이 모두 우리 길림성사람들이고 한국초청사기의 피해를 가장 심하게 받은 지역도 연변을 비롯한 우리 길림성이였으니 말이다. 민족의 리익을 대변하는 언론사로서 피해의 통증을 하소연할 합법적인 분출구를 찾아주지 않고 옳바르게 인도하지 않는다면 조선족사회에서 언제 무슨 돌발사태가 터질지 예측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였다. 우리가 성기관의 관련 부서에 이런 상황을 반영했지만 실상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모두가 조심성을 보이면서 명확한 태도를 표시하지 않았다.   상황은 우리에게 “지시”를 기다릴 시간적여유마저 주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피해자들이 울분과 분노를 토하는데 합법적분출구를 틔여주고 조선족사회의 대표들을 통해 여론을 정확히 인도하는 길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 주저없이 행동에 돌입했다. 이 문제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바로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내무사법위원회에 재직중이였던 윤수범부주임을 비롯한 조선족사회 각계 인사들의 한결같은 기대와 신임이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등을 떠밀어주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언론의 사명감을 안고 “주동적인 개입과 정확한 여론인도”라는 큰 모험에 나서게 된것이다.     “한국초청사기사건”   우선 부딪친 사건이 “한국초청사기사건”이였다. 이 사건은 중한수교후 수년간에 걸쳐 중국의 수많은 조선족가정을 경제파탄의 불구덩이에 밀어넣었던 사건이였다. 당시 한국초청비용 수만원이란 천문수자와도 같은 거금이라서 동북3성의 수많은 조선족가정이 한줌도 안되는 한국사기군들의 사기협잡에 녹아나면서 리혼하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의 폭발시점은 한국의 외국인로동자피난소 등 민간단체들이 기자초대회를 가지고 중국 현지에서의 수만명 조선족의 피눈물의 피해사례 조사결과를 언론에 터뜨렸던 1996년 11월 18일에 준한다. 그날을 시점으로 한국 전역이 경악의 충격속에 빠져들고 그때까지도 행여나 하고 기다려오던 피해자들이 드디여 일말의 희망마저 잃은채 철저히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었던 바로 그 무렵이였다.   그러나 실상 우리 《길림신문》 은 11월 18일에 앞서 10월말에 이미 보도했다. 당시 우리 신문은 총편집판공실 한정일부주임의 발의로 1면에 “해외로무기별”전문란을 내오고 당시 중국조선족의 중요관심사인 해외로무와 관련된 소식들을 싣기 시작했는데 “해외로무기별”전문란이 태여난지 며칠 안되여 한국민간단체가 연변에 와서 “한국초청사기사건” 피해자 조사를 하고있다는 기별이 왔다. 중대한 사안이라고 판단하고 해외로무보도를 직접 주관하던 한정일부주임이 직접 취재하여 드디여 1996년 10월 31일, “우리 함께 풀어야 할 숙제”란 제목으로 “해외로무기별”전문란에 발표했던것이다. 당시 이 기사는 정치적민감성이 큰 두 나라 외교적문제와 관련된 중대사안이지만 나는 이렇게 엄청난 피해상황에서 우리 나라 공민의 합법적권익을 수호하는것은 정당한것이라고 판단하고 대담히 발표를 결정했던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층층이 상급에 보고한다면 발표가 가능할지, 발표를 허용한다 해도 언제 허용할지 모를 일이였다.   이 기사는 초청사기사건의 실질과 엄중성을 중국조선족사회에서 맨처음으로 까밝힌 중요기사로서 중국조선족사회에서 큰 반향과 관심을 자아냈었다. 그럼에도 이 기사가 한국사회에 강렬한 효과를 일으킬수 없었던것은 우리 《길림신문》 의 소식이 당시 한국국민들에 게 읽힐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 와중에 11월 18일, 한국의 기자초대회에서 한국인 사기행각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자 한국 전역이 경악한것은 물론 전반 조선족사회도 그때에야 경악, 분노, 허탈감과 절망으로 뒤엉킨 충격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던것이다.   우리는 “한국초청사기사건”을 중대보도로 기획하고 전반 피해사건 조사 및 사건해결진척을 추종보도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때 우리의 결책은 실사구시적이였고 과감했다. 당시 실정에서 장춘에서의 독립적사업추진이 상대적으로 가능한 시스템이였기에 때론 연길에 있는 사지도부에 일일이 반영할 새 없이 일을 밀고나가는 형국이였다. 나는 초청사기건 기획보도를 담당한 한정일부주임의 대담한 취재방안을 적극 수용하면서 뒤근심을 말고 대담하게 보도를 추진하라고 격려하고 함께 방안을 연구하고 확정하였다. 일단 방향이 결정되면 한정일부주임은 주동적이고도 대범하게 팀을 이끌고 일을 추진해나갔다.   그 시기 한국의 지성인들은 중국조선족사회를 파탄의 나락에 밀어넣었다는 죄책감에 분분히 모금운동 등으로 중국조선족피해자들을 도와나섰다. 그 조치의 일환으로 한국정부도 대책마련에 고심했고 민간에서도 새롭게 조사단을 무어 중국 현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해(1996년) 12월초, “한국초청사기사건”을 추적하던 한국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에서 민간단체조사방문단을 중국 현지에 파견하여 “한국인초청사기사건” 피해사례 조사를 하게 되였는데 이번 보도를 처음부터 이끌어온 우리 신문사에 조사와 사건해결에 협력해달라고 요청해왔다.   외사에 대한 당보의 보도는 일반적으로 신화사에 기준하며 지방 당보가 자의로 타국의 정책이나 문제를 비평하거나 또한 신문사가 직접 외사에 개입하지 못하게 되여있다. 외국인의 공식적인 방문을 취급하거나 그들과 공동행사를 치를 경우 관련 부서에 청시받는것은 필수적이다. 하여 나는 “1. 중국조선족의 한국초청사기피해상황, 2. 사기사건에 대한 한국사회의 최근 반향, 3. 한국민간단체조사방문단소개,4. 본사의 대책” 이런 4개의 소제목으로 한국방문단의 조사에 협력할데 관한 보고를 써가지고 선전부 신문처 강봉국처장에게 찾아가 청시를 했다. 결국 강처장은 주관부 부장인 양해천에게 보고를 올렸고 양부부장은 이 일을 길림성위 대외선전판공실에 돌렸다.   차라리 잘된 일이였다. 대외선전판공실에서 고금엽은 우리 신문을 주관하는 처장이였는데 경색된 사고방식에서 많이 탈피한 친구였다. 사연을 자세히 듣더니 알았으니 보고를 두고 돌아가 회시를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마 하고 대답은 했지만 워낙 시간이 긴박한지라 하회를 기다릴 새가 없었다. 우선 장춘시조선족중학교의 박동남교장과 학교강당을 모임장소로 빌려쓰기로 결정한 다음 조사단이 온다는 소식과 모임통지를 신문 톱자리에 내고나서 이틀을 기다렸지만 해당 부문은 그냥 무기별이였다. 피해를 심하게 받은 중국공민의 권익을 수호하는 정당한 일일진대 후에 조사추궁을 받는다 해도 두려울게 무엇인가. 우선 하고보자! 하는 배짱에 전화문의도 하지 않고 계획대로 일처리를 해나갔다.   결국 조사단이 와서 이틀간 조사를 마치고 돌아간지 한달이 넘어서야 3개 조목으로 된 회시가 내려왔는데 결론인즉 언론기관으로서 여차여차한 원인으로 외교사무에 직접 개입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오호라, 이런 묵허법도 있구나 하고 고처장의 대처방법에 속으로 못내 탄복해마지않았다.     그 일로 하여 고금엽과의 관계는 더 가까워져 그와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 조금 더 많아졌다. 《길림신문》 산하신문(子报) 《동북저널》창간을 신청할 때도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을 대상한 신문의 필요성을 설명하자 고금엽처장은 전적으로 필요하다고 찬성하면서 결정적인 지지를 주었다. 이렇게 태여난 《동북저널》 은 《길림신문》 의 산하신문으로 한동안 출간되다가 길림성신문출판국 신문처 리립후(李立厚)처장의 제안으로 우리 신문을 매주 3호(周三刊) 꾸리던것을 매주 4호(周四刊)로 확대하고 그중 1호를 전문 《동북저널》 부간으로 삼아 출판하게 됐다. 이로서 《동북저널》 은 《길림신문》 의 산하신문(子报)이 아닌 《길림신문》 본지(本纸)의 당당한 한 부분이 된것이다. 만약 시초에 고금엽처장의 결정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당시 상황에서 《동북저널》 의 창간은 복안에 그치고말았을 소지가 매우 높았다.   결국 이런 묵허하에 12월 14일과 15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시민대책위원회의 강영식사무국장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일행은 계획한대로 우리 신문사 10여명 자원봉사자들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으며 근 1000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의 피해상황등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됐다. 취재팀은 계속 추종보도를 통해 피해구제와 해결에 대한 보도를 하고 한국정부에 해결책을 촉구했다. 이런 활동은 봄바람마냥 피해자들의 언 가슴을 녹여주었고 녹은 가슴에 희망도 심어주었다. 또 그들에게 사기군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한국국민과 한국정부는 문제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고있다는것을 보여줌으로써 량국 국민간의 불신과 갈등을 풀어나갔다.   한정일 등이 쓴 “우리 함께 풀어야 할 숙제”(1996. 10. 31), “한국초청사기건해결 전면작동”(1996. 12. 7), “정부에 의거 합법적경로 통해 해결함이 바람직, 중국정부의 립장과 태도”(1997. 6. 12) 등 기사를 비롯하여 “한국인 사기부분 한국정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1997. 6. 12), “중국조선족 사기피해문제해결을 위한 한국정부의 립장”(1997. 6. 19), “한국, 외국인 연수취업제 도입”(1997. 9. 23),“서로간 리해와 대책마련 시급-한국민간조사단 및 성과 장춘시 유지인사 좌담회 요지”(1996. 12. 15), “사건해결과 우리의 자세”(본사론평원의 문장, 1996. 6. 12) 등 당시 김철룡, 김정애, 박명화 등 여러 기자들이 취재한 통신, 뉴스와 론평은 40여편에 달한다.   이런 영향력 있는 대량의 기사를 통해 피해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는외 중국정부와 한국정부의 립장과 태도, 대책마련 현황을 적시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알려주고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한국민간단체들의 적극적인 움직임도 통보함으로써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사회안정유지에 크게 이바지했다.   우리의 추적보도는 초청사기피해자와 가족이 모두 한국에 취업비자로 초청되여 로무로 피해보상을 받으면서 최종해결을 볼 때까지 수년간 계속되였다. 그번의 보도이벤트는 중대한 섭외사건에서 《길림신문》 이 중국조선족의 합법적권익을 수호하고 정확한 여론인도와 문제해결로 사회안정을 수호한 전형사례로 된다.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   페스카마호사건에 대한 우리 신문의 보도는 한국의 소수 악덕업주들에 대한 폭로비판으로 시작되였다. 통례에 따르면 외사보도에 대한 통제가 상당히 엄격한 우리의 국정에서 우리 나라와 국교를 수립한지 오래지 않은 한국에서 발생한 중대사안을 두고 꾸준히 폭로비판해나가는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사실 그번 “량대 사건”을 언론사에서 직접 취급하는 문제를 두고 우리 내부와 형제신문사들간의 일부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독자적으로라도 좌담회를 조직하고 독점보도도 전면적으로 내밀기로 분명히 결단을 내렸다.   보도의 구체추진방안은 주로 당시 총편집판공실에서 취재분야를 담당한 한정일부주임과 늘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연구하였다. 본사에서는 저돌적인 박명화기자에게 페스카마호사건에 대한 전문보도과업을 맡기고 점차 사건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페스카마호사건 피고의 고향인 통화지구 기자소 리창근소장에게도 전문과업을 주었다. 큰 좌담회를 소집할 때는 10여명의 편집기자들이 전부 동원되였는데 밤도와 기사를 쓰고 수정을 하고 판면을 짜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입력을 하고 3차의 교정까지 끝내고 필림을 떠 인쇄에 교부할 때는 항상 새날이 훤히 밝은 때였다.   페스카마호사건의 공정한 해결을 추진해나가는 행정에 《길림신문》 은 점차 문제해결의 “중국본부”가 되였다. 와중에 6명 피고인의 소송대리를 결심하고 본사를 찾은 료녕성공안사법관리간부학원의 법학교수 조봉(赵峰)씨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4월 9일, 페스카마호사건 2심판결을 앞두고 조선족사회에 이 사건의 전모를 알리고 조봉변호사를 성원함과 아울러 중국조선족사회의 목소리를 한국에도 전하기 위해 장춘시 각계 16명 지명인사좌담회를 소집했다. 좌담회 참석자들은 페스카마호사건의 성격규제, 피고인에 대한 형벌의 오유와 불공정성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이 향후 중한관계에 미칠 영향에 엄중한 우려를 표시하였으며 동시에 페스카마호사건에 대해 공정하게 처리할것을 한국정부에 강력히 희망했다.   “장춘시 지명인사들 좌담 페스카마호사건 공정처리 희망”이란 제목으로 1997년 4월 5일, 좌담회 요지를 발표한 그날 나는 페스카마호사건 2심 제3차 공개심리에 참가코저 한국행을 하는 조봉씨를 배웅하기 위해 장백산잡지사 남영전사장,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리학수처장과 함께 심양으로 향발, 저녁에 료녕신문사와 심양의 조선족엘리트들과 조봉씨를 위한 송별모임을 가졌다.     이번 만남에서는 김봉(장춘시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리금남(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 남영전(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주필), 리학수(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대표) 등 길림성 조선족사회의 유지인사대표와 료녕성조선족부녀협회 등 료녕성사회단체의 대표들이 이번 사건의 공정한 처리를 촉구하며 김영삼대통령 앞으로 련명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러 지역,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합심이 되여 마치 생사를 건 전쟁터에 친인을 보내는 심정으로 절절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당시 준엄한 얼굴들을 10수년이 지난 지금 다시 떠올려도 가슴이 뭉클해남을 금할수 없다.   2심판결은 6인 사형수중 전재천외 5명의 무기형전환의 성과를 올렸다. 이는 중국조선족사회가 자기의 목소리를 내서 거둔 제1차승리였다. 이는 중국의 4대조선족언론사가 한목소리를 내는 계기로도 되었다.   조봉변호사는 귀국후 심양유지인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5월 7일에는 우리의 초청을 받고 장춘에 왕림, 장춘 각계의 유지인사대표들을 만났다. 5월 8일, 그는 선후로 길림성외사판공실 책임자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규속(奎速)주임의 접견을 받았다. 그들은 페스카마호사건의 공정한 판결을 위해 한국법정에 떳떳이 나선 조봉변호사에게 뜨거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제3차 심리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정부와 사회의 지지, 성원 밑에 계속 노력을 기울여줄것을 당부했다. 이는 길림성이 정부차원에서 처음으로 지지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한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5월 9일, 길림신문사, 흑룡강신문사, 연변일보사, 장백산잡지사의 공동주최로 길림,흑룡강 두 성 각계의 48명 대표가 합석한 조봉변호사환영좌담회가 마련됐다.   이제 남은 과업은 여전히 사형수로 남아있는 전재천에 대한 구명운동과 중한관계 및 중한동족관계를 정상궤도에로 끌어올리는 일과 관련된 언론사들의 여론인도작업이였다. 우리는 이번 사건의 해결이 단순히 피고인들에 대한 감형이나 구명을 위한것이 아니며 사건 자체가 일반적인 형사사건이 아니라 력사적으로 형성된 동족간의 뿌리 깊은 문화적갈등의 소산임에 각별히 류의하여 보도기획의 목표를 시종 사건해결을 통해 그동안 쌓여왔던 상호 불신의 뿌리를 뽑는 계기를 만드는데 두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듯이 나쁜 일도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수 있는것이다.   전재천의 고향인 휘남현과 매하구, 통화 등지에서 전재천구명을 위한 서명운동과 더불어 사재를 털어 무료변호에 나선 조봉변호사를 후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이 벌어졌다. 이는 정귀순(“외국인로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민병렬(전국련합 부산본부) 등 한국사회단체들의 전재천구명운동과 기타 피고인들에 대한 감형활동과 서로 호응되면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에 적극적인 영향을 전했다.   최초의 보도기사 “한국원양어선 참살사건 발발”[한국 특약기자 편영우(片永宇), 1996. 8. 29]로부터 시작해서 전재천의 진정서 “우리는 강도살인범이 아니다”(1996. 12. 10), 페스카마호사건 2심 제3차 심리에서 진술한 조봉고급변호사의 변호의견 전문(1997. 4. 15) 등 만자 이상 되는 장편기사를 편폭에 구애없이 우리는 파격적으로 전문을 게재했다. 독자들이 관심하는 페스카마호사건판결에 관련되는 전 과정을 상세히 추종보도했다. 또 “장춘시 지명인사들 좌담, 페사건 공정처리 희망” (1997. 4. 5), “공정한 판결로 사건의 량성전환 맞아야”(1997. 4. 15), “우리의 자존 찾아 만리길-길, 흑 조선족여론계 유지인사 조봉환영모임 좌담요지”(1997. 4. 27) 등 장편 좌담회요지를 발표, 중국조선족사회의 지적인 목소리를 내여 정확한 여론인도역할을 충분히 발휘했다.     총목표는 문제해결과 신뢰, 화합 재구축   두가지 사건에 대한 보도를 다룸에 있어서 합법적경로를 통해 정서의 분출구를 마련함으로써 분노해소의 물곬을 틔여주는 한편 모든 문제는 합법적인 경로를 거쳐 해결해야 한다는 법률의식을 심어주기에 특별히 류의했다. 한국과 한국인을 무작정 미워하는 심리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초청사기피해자들을 물심량면으로 돕고저 힘쓰고있는 “외국인로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정귀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외국인로동자피난처 등 한국민간단체들에서 벌이는 전재천 등 구명운동에 대해 다각적으로 소개했다. 한편 당시 한국인 류재복특약기자를 통해 “중국인을 위해 뛰고있는 한국인” 계렬탐방보도도 수개월간 끌고나가면서 상호 리해와 화해의 밑거름을 뿌려가는 시도도 했다.   1997년 8월 24일, 중한수교 5주년에 즈음하여 《길림신문》 의 명의로 길림성주재 강원도사무소 대표, 한국기업인 대표와 길림성인대내무사법위원회, 성위대외선전판공실, 성공안청, 성대외경제무역청, 장춘시세관 등 성, 시 기관의 관련 부서 일군들이 참가한 중한교류좌담회를 조직, 상호간의 우호적관계를 확인하고 진일보의 구체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소식에 배합하여 좌담회요지를 큰 편폭으로 싣고 아울러 “밝은 앞날을 함께 만들자”는 제목으로 사설을 발표,전반 조선족사회와 재중한인사회에 중한관계전망에 대한 적극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이상과 같은 다방면의 노력은 문제의 해결에 좋은 밑거름이 되여주었고 응분의 결실을 맺었다. 홀로 사형수로 남았던 전재천은 상황에 의해 즉시 해결은 안되였지만 2006년, 한국 로무현대통령 대사령에 의해 마침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였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해고선원에 대한 구제절차 등을 담은 선원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했다.   그후 비록 어려운 과정을 거치기도 했지만 한국정부에서 조선족들이 연수하여 피해보상을 받을수 있도록 대책을 대는 등으로 시급한 문제들을 풀어나갔으며 따라서 대부분 피해자들이 한국에 입국 취업하여 생존상황이 개선되는 결과도 안아왔다.   전반 과정에 민족의 대변지로서의 우리 《길림신문》 은 시종 주동적자세와 적극적인 독점보도로 중국조선족사회의 여론을 리드해나갔으며 위험수위로 치닫던 불안정요소를 점차 해소하고 중한간의 리해와 화목을 회복, 발전시키는데 대체할수 없는 독특한 역할을 해왔던것이다.   (《길림신문사 사람들》연변출판사 2015,12)  
97    길림신문 초창기의 추억 댓글:  조회:5492  추천:2  2015-12-31
  길림신문 초창기의 추억   1. 감구지회   1983년 봄부터 《길림신문》 창간에 대한 보고얘기가 나오더니 이듬해 8월에는 길림성위에서 정식 비준했다는 말이 나왔다. 당시 나는 《연변일보》 총편집판공실 편집으로 있었는데 그때 주임은 남인순, 부주임은 윤효식이였다. 그러다가 또 몇달이 지나 그해도 막가는 12월의 어느날 윤효식부주임이 《길림신문》 창간주비소조 조장의 신분으로 2층짜리 옛 신문사 자리의 한 자그마한 사무실에 김경욱, 림웅길, 김영오 등 예닐곱 되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전반 길림성 조선족을 대상한 《길림신문》 이 나오게 됐는데 이미 길림성위에서 비준이 내렸고 주비사업을 우리가 해야 하며 시간이 긴급하니 서둘러야 한다고 력설했다. 비준된 시간은 1984년 8월 7일인데 몇달이나 지난 오늘에 와서야 시급하게 움직이게 된것은 길림성 관련 부서와 운영자금 등 구체문제를 해결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였기때문이라고 했다. 실지로 신문허가증도 이듬해(1985년) 1월 15일에 받아 그날로부터 불과 보름만인 2월 1일에 첫 시험호를 냈고 그뒤로 보름에 한호씩 시험호를 도합 4호 출간했다. 《길림신문》 창간호는 1985년 4월 1일, 드디여 발간됐다.   그때 연변울타리를 벗어난 신문의 창간에 직접 참가한다니 자랑과 긍지를 느꼈었고 그게 어제 같은데 벌써 30년을 넘겼다. 감구지회에 젖어 자칫 잊혀질 옛 기억을 되살려본다.   2. “ 《길림신문》 이 나왔다는 일 자체가 대단한 거요.”   《길림신문》 의 창간작업은 처음부터 《연변일보》 의 오태호총편집이 맡아 추진했다. 길림성위에서 연변주위에 위탁한 일을 연변주위에서 다시 《연변일보》 에 책임지웠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이 일을 두고 산재지구의 조선족들은 시초에 리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산재지구를 대상한 신문인데 왜 연변에서 출판하느냐 하는 것이였다. 《길림신문》 창간시 발행과업을 수행했던 《연변일보》 의 김주철선배님(길동군정대학 출신으로 《동북조선인민보》 창간이나 조선문 《참고소식》 창간에 두루 참가했던분임)은 길림에서 발행회의를 열고 돌아와서 우리에게 그 시말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선배는 발행회의에서 반영된 그런 의견을 못들은척 묵과해 넘길수 없었던지라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부주임이자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있던 옛 상급인 최채(최채가《연변일보》 초대사장을 지낼 때 김주철선생은 연변일보사의 공청단 선전위원이였음)를 곧바로 찾아가 반영을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최채주임이 하는 말씀이 “ 《길림신문》 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현재 산재지구에서 직접 꾸리기는 여건상 시기상조이니 우선 신문을 잘만 꾸려라. 그러면 신문사는 아무때건 장춘에 들어오게 돼있다.”고 하시더라는것이다.   실지로 《길림신문》 은 전 성 120여만 조선족군중, 특히 산재지구 40여만명 조선족군중의 강렬한 요구와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부주임 최채, 길림성위 부서기 겸 길림성군구 정위 조남기, 길림성정부 고문 최림 등의 강력한 유세하에 대중의 요구를 수렴하여 중공길림성위에서 마침내 비준하였던것이다. 길림성위에서 우선 연변에 이 일을 맡기게 된것은 당시 관리나 경제 등에서의 막부득이한 사정이였다. 사실 최채주임의 말은 조금도 그른데가 없었다. 신문이 생기고보면 명색이 《길림신문》 인 이상 성소재지에 들어가게 되는건 시간상 문제라는것이다.   어쨌거나 중공연변주위에서 과업을 《연변일보》 에 일임한후 당시 《연변일보》 총책임자이자 중국조선문신문의 권위자인 오태호총편집이 모든 일을 맡아 추진했는데 이는 어느모로 보나 당연한 일이였다. 더군다나 《길림신문》 의 창간은 1979년에 길림성 6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됐던 오태호선생이 대표임직기간 장춘조선족중학교의 최일교장 등 동기(同届) 조선족대표들과 함께 거의 매년 련명으로 《길림신문》 창간을 제안한 노력의 결실이기도 한바 오태호총편집은 깊은 감정과 드높은 열성으로 이 작업을 추진해왔던것이다.   3. 신문풍격의 민족성 주창자 오태호총편집님   돌이켜보면 시험호를 구상할 때부터 오총편집은 이 신문에 민족적독창성을 부여하고저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것이다.   《길림신문》 창간을 전후해서 개추렴이요 하는 명목의 모임이 여러번 있었다. 그런 모임에는 꼭 이야기판이 벌어지군 했으니 화자는 항상 오총편집이였고 우리는 모두 그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김삿갓, 론개, 서산대사 등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으면서 우리가 탄복했던것은 그의 이야기재주와 비상한 기억력이였다. 례컨대 김삿갓이야기를 한다 하면 김삿갓의 풍자시가 빠질수 없었는데 “일출원생원(日出猿生原) 묘과서진사(猫过鼠尽死) 황혼문첨지(黃昏蚊簷至) 야출조석사(夜出蚤席射)” 등 풍자한시 여러수를 거침없이 외우면서 풀이해나가는 재주에 우리는 이야기에 끌려들어가는 한편 탄복한 나머지 입을 딱 벌렸고 게다가 웃지도 않고 “서당내조지(书堂乃早知)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 생도제미십(生徒诸未十) 선생래불알(先生來不谒)”을 외우는 대목에 들어가서는 우리는 배를 끌어안고 웃어제꼈다.     오총편집은 좌중을 웃겨 환심이나 사자고 이런 이야기를 한것이 결코 아니였다. 그 리면에는 《길림신문》 의 짙은 민족성구현을 위한 구상의 한 부분으로 신문을 산재지구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수 있게 꾸리자는 깊은 속셈이 깔려있었던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중 일부는 바로 우리 신문의 련재물로 실려나가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산재지구 독자들이 애독하는 우리 신문의 갈피갈피에는 분명 오총편집님의 고심과 땀이 녹아들어있는것이다.   산재지구에 취재를 보내면서 우리에게 한 부탁에서도 그의 당시 생각이 더듬어진다. 통화지구로 가게 된 나에게 오총편집은 통화지구에서 이 몇년 사이에 고구려문물이 꽤 출토되였다던데 이번 기회에 알아보라고 했다. 통화현에 취재를 간 나는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김춘삼을 만나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근년에 들어 특히 올해 이 지역에서 고구려무덤이 여러기 발굴되였다면서 현문화관의 한 관원을 소개해주는것이였다. 당시 지식이 짧아 취재를 깊이 하지는 못했지만 기본정황은 파악하였고 옛무덤과 발굴된 문물의 사진도 몇장 얻어왔다. 연길로 돌아와서 원고를 바친 그날 오총편집은 나를 이층 사무실로 불러 고적발굴 상황을 묻고 원고와 사진 배치를 직접 하면서 이렇게 배치하는게 어떤가고 했다. 나는 너무 고맙고 황송해서 취재를 잘하지 못했다고, 후에 기회를 봐서 보충하겠다고 결심발표를 했다. 그후 수차에 걸쳐 리원철, 허철룡 등과도 취재차로 통화현에 간적이 있으나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적당한 취재기회를 내내 찾지 못하고있다가 사학계에서 분규가 생기는 통에 종당에는 원래의 계획을 접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많은 사연을 통해 민족의 뿌리와 전통에 대한 오총편집님의 진정을 통감함과 아울러 우리 신문에 짙은 민족특색을 부여하려는 깊은 속심도 읽을수 있었다. 《길림신문》 으로 볼 때 짙은 민족성을 주창한 첫 사람으로 우리는 오태호총편집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말은 오태호총편집이 당보의 당성원칙을 불문에 부쳤다는 얘기가 아니다. 민족특성의 구현이 잘되지 않던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경주한 첫 사람이라는 얘기이다.   4. 창간대회의 취재이야기   《길림신문》의 창간대회는 1985년 3월 30일, 당시 연변주위 소속인 문화극장에서 열렸다. 이날의 창간소식보도조에는 문상호주임, 촬영부 전창식과 내가 배정이 됐는데 보도조의 조장은 내가 상당히 흠모하던 문상호선생이였다.   내가 농촌부에 있을 때 한번은 우리 부의 부주임이였던 문상호선생을 따라 삼합관개수로공정성과 보도취재를 내려간적이 있었다. 오전 내내 취재를 하고 오후에 보도기사를 쓰는데 쓰는 방식이 놀라왔다. 문주임은 팔짱을 끼고 방가운데에 앉아서 자기가 기사를 부를테니 나더러 받아쓰라는것이였다. 그는 취재수첩을 들고 가끔 들여다보면서 내가 받아적을수 있는 속도로 천천히 불렀는데 중간에 쉼이 없었다. 원고 받아쓰기를 끝내고보니 자그만치 4000자도 넘는 장편통신이였다. 용어나 철자가 틀리는데 있으면 고치면서 한번 정서해서 래일 직접 홍춘식주임에게 갖다바치라는것이다. 내가 너무 놀라서 장편기사가 어떻게 기성된 문장을 읽듯 한번 불러서 완성되는지를 물었더니 취재준비를 할 때부터 전반 취재과정에 시종 기사를 어떻게 쓸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목적성 있게 문제를 제기하고 필요되는 문제의 답이 완성되면 취재도 끝나는 셈이라는것이다. 그만큼 취재의 목적성이 뚜렷하게 벼려져야 하며 맹목성은 삼가야 한다는것이였다. 그후 문선생의 취재방법론을 조금씩 터득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취재를 끝내는 때이자 기사가 완성되는 시간”이란 경지에는 시종 이르지 못했다. 아니, 여러번 고쳐쓰며 발표한 기사도 항상 유감을 남기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삼합에서의 그 체험을 《길림신문》창간대회기사를 쓰면서 다시한번 겪게 될줄은 몰랐다. 그날도 그렇게 원고를 베껴서 그대로 오태호총편집에게 바쳤고 오총편집은 원고를 고치고나서 (아마 오총편집 자신의 연설 한토막을 잘라냈던것 같다) 리덕수서기의 사인을 받아오라고 해서 리서기의 사인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때 연변주당위는 신문사 바로 서쪽의 농업은행자리에 있었고 리덕수서기는 2층에서 사무를 보고있었다. 나는 문상호스승외에도 복잡한 일도 재치 있게 개괄해내는 뛰여난 함축력의 소유자 박경섭선생, 취재대상이 누구든 취재중 주요단서만 쥐면 대방이 진땀을 뺄 정도로 깡치를 내려 드는 남민옥녀사 등 스승 여러분이 있어서 행복했다.   5. 《길림신문》의 “인쇄공장”   신문이 창간된후 새 사원을 매일같이 받아들이는 형편에서 우리는 연변군분구 초대소로 이사를 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의 사옥자리에 있었던 원《연변일보》사옥은 사무실과 복도 바닥에 널판자를 깐 제정때의 2층짜리 낡은 건물로서 그러찮아도 비좁던터라 도무지 새로 나온 우리 신문사를 용납할 상황이 아니였기때문이였다.   비여있던 2층짜리 연변군분구 초대소(지금의 백산호텔 자리)의 웃층을 빌려들었는데 싸리나무 등 땔나무를 사다 난로불을 피워 겨울을 났다. 초대소 옥상은 평평한 세멘트바닥으로 되였는데 쉼터나 소풍장소로 딱 안성맞춤이였다. 편집을 하다 손이 저리면 줄레줄레 올라가서 담배도 피우고 해빛쪼임도 했으며 어느해 봄에는 가무단의 어느 무용선생을 모셔다 한 보름가량 사교무도 배웠다.     지금은 상상도 잘 안 가는 일이지만 신생한 《길림신문》은 가족의 직업문제도 해결할겸 길림성에서 주는 제한된 돈을 좀더 유용하게 쓸 료량으로 인쇄공장도 자체로 꾸렸다. 신문사 마당 동쪽켠에 줄 지어선 막사나 다름없던 좁고도 낮은 가건물의 한칸을 차지하고서는 “우리 인쇄창(공장)”이라고 불렀는데 말이 인쇄공장이지 기실은 20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조판실이였다. 그처럼 작은 칸을 또 문선실과 식자실로 나누었다. 문선공이 원고를 보면서 활자케이스에서 활자를 뽑아 손바닥만한 문선상자에 순서대로 배렬해 담은 뒤 그것을 식자공에게 넘기면 식자공은 원고배치도에 따라 판을 짜 맞추군 했다. 이렇게 조판의 교정까지 끝마치면 우리측의 일은 다 끝나는 셈이였다.   《연변일보》인쇄공장측에서 그 완성된 식자판을 넘겨받아 지형 뜨고 연물을 부어 연판을 뽑고 그것을 륜전기에 걸어 신문을 찍어냈다. 그다음 절차는 당연히 발행이였다. 창간된 첫해 우리 《길림신문》은 발행도 자체로 했는데 발행원들이 여간 수고를 하지 않았다. 우리 신문사의 김영오, 김규범 등 선배님들외에도 김경욱, 김주철, 김수국 등 림시로 우리 신문에 배치된《연변일보》의 선배님들이 새벽에 나와서 신문을 지역별로 나누어 묶어서는 전문 기차역에 내다 부쳤는데 기차역과의 관계처리 등 일들이 겹치여 그 사업량이 만만치 않았다. 드높은 책임감으로 열심히 《길림신문》발행을 위해 땀을 흘리던 그분들을 생각하면 고마웠던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아무튼 자체로 활자조판을 하던 일은 1989년 7월 중순까지 몇년간 지속되다가 문선식자실은 인쇄공장에 돌려주고 인원들도 모두《연변일보》복무공사에 넘김으로써 인쇄업무는 전부 《연변일보》공장에 위탁하게 되였다. 어찌 보면 《길림신문》은 초창기에 중국의 모든 구식신문이 걸어왔던 길을 모조리 경험해본 격이였다.   6. 《길림신문》의 “문풍백성티” 와 윤효식선생님   화룡현 서성 태생인 윤효식선생은 1951년에 사업수요로 연변일보사에 배치받은 뒤 근 40년간 조선족 번역계와 신문편집계에서 굴지의 성과를 쌓아올린분이다. 그러나 선생이 직접 취재와 집필에 참여할수 있게 된것은 개혁개방을 맞아서부터였다. 그것은 윤효식선생이 아버지의 력사문제로 인해 “통제사용인물”로 지목받고 탐구열에 들끓던 열혈청년시절, 그처럼 쓰고싶었던 자기의 글도 쓰지 못하고 근 10년간 시사번역만 해오다가 1963년에 비록 지방원고편집을 하게 되였지만 원고를 편집만 할수 있었을뿐 직접 취재해서 글을 쓸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엄혹한 시련속에서도 선생은 조금도 의기소침하거나 일에서 탕개를 늦춘적이 없이 자기에게 부과된 과업에 시종 충직하고 편집에 진력하는 한편 체계적인 자습으로 실제상 언어의 대가로 되여 후일의 집필사업에 튼튼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는 그를 조직에서는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다. 조직의 의도된 지지밑에 그는 《붉은 해》, 《찬란한 길》, 《룡담의 물결》등 여러부의 장편소설, “변형기”, “가정문제”, “1918년의 레닌”,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등 소설, 산문, 씨나리오와 같은 다양한 체재의 국내외 단편명작 수백편, 그외 대량의 시사번역작품까지 무려 1000여만자에 달하는 번역작업을 수행하여 번역계의 선두주자로 활약해왔던것이다.   이러한분이였으니 개혁개방을 맞으며 선생의 보도열정은 분수처럼 터져나오지 않을수가 없었다. 더구나 때를 맞추어 태여난 《길림신문》은 그로 놓고 말하면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아 새롭게 꽃피우는 활무대에 다름아닌것이였다.     《길림신문》을 초창기부터 맡아 책임지고 꾸려오면서 윤효식선생이 시도한것은 독자가 읽어주는 신문을 만들자는것이였다. 이를 위해 주창한 구호는 “우리 신문을 백성티가 물씬 풍기게!”였다. 조선족의 주류문화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있었던 산재지구 조선족독자들에게 이것으로 가깝게 다가가자는것이였다.   우선 개혁한것이 회의소식이였다. “회의취재를 가면 회의재료만 베끼지 말고 눈에 쌍불을 켜고 새로운 정보를 파내라.” 이것이 그의 당부였다. 한 회의에서 유용한 정보를 한가지씩만 추려내서 발굴해도 값이 있는 성과라고 기자들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했다. 그렇게 깊이 파서 쓴 소식은 신문 가치가 있는 톱소식이 되군 했다. 결국신생한 우리 《길림신문》 에서는 당팔고식 장편회의소식과 지방지도자들의 연설로 판면을 도배하던 일이 기본상 사라지고 필요한 회의보도는 짧게 알맹이만 다루었다. 지어 제목뉴스란것을 만들어 제목한줄로 회의소식을 전하는 때도 있었다. 당시 그것은 실로 파격적인것이였고 우리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신문은 내용과 형식의 결합체인바 좋은 내용이라 해도 좋은 형식의 맛갈진 표달방식이 없다면 효과를 최대한 낼수 없다면서 보도내용들은 되도록 조선족의 생활을 조선족의 마음에 드는 형식에 담아 보도하였다. “농가보감”, “흥부박”, “노다지곬”, “우리 마을”, “인생의 꽃철”, “주부생활”, “이 얘기 저 얘기”, “아리아리랑”, “60청춘닐리리”, “장백의 메아리”, “장생불로 원하시면”, “오는 말 가는 말”, “반디불”, “진담록”, “회초리”, “꽃망울”, “산들산들 보슬보슬” 등 다양한 코너를 개발했는데 이런 코너들은 모두 짙은 민족적정서를 담고있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창간 5주년을 맞아 그간의 코너를 통계낸적이 있는데 각종 전문란과 부간이 50여가지나 되었다.     사설, 론평원의 문장이나 단평 등 신문평론은 불가결의 신문쟝르이다. 이런 쟝르의 글이 농민, 시민과 기층간부 등 《길림신문》의 독자층에 잘 읽힐수 있게 하고저 윤효식선생은 역시 개혁을 시도했다. “오늘의 화제”가 그 실험의 하나였다. 가급적으로 알기 쉽고 생동한 언어로 당의 주장과 지침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군 했는데 심지어 시의 형식과 언어로 언론을 쓸 때도 있었다.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독자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그의 고심을 엿볼수 있었다.   창간때부터 민족성, 지방성 특성을 선명하게 살린 풍부한 내용과 생동활발한 문풍을 바탕으로 하나의 독특한 신문 문풍을 형성하였고 와중에 편집기자대오를 키워내여 특유의 《길림신문》풍격과《길림신문》정신을 창조해냈다. 그 정신과 풍격의 영향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오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길림신문》초창기에 신문의 백성티를 주창한 윤효식선생의 동기와 실험정신을 높이 사야 할것이며 그를 《길림신문》풍격개혁의 개척자, 나아가 《길림신문》풍격의 정초자라고 평가해도 결코 무리는 아닐것이다.   7. 《길림신문》 의 일터책임제   초창기에 편집기자들에게 고무와 편달이 되는것은 평보(评报)였다. 복도에 평보란을 만들어 걸어놓고 책임평보원이 평보를 하군 했는데 모든 편집기자가 자유로 평보를 할수 있고 반론도 허용되여 평보활동이 꽤 활약적이였다. 그러나 그러는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년말장려에 우수원고 몇건씩 표창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것을 일상화하지는 못하고있었다.   당시 전국보도계에서 솔선적으로 대담하게 신문개혁을 하여 소문을 크게 놓은 신문이 있었다. 호북성 효감지구의 《효감보(孝感报)》였다.     1989년 3월 중순경 나와 림웅길은 윤효식선생과 함께 무한으로 《효감보》고찰을 떠났다. 주로 《효감보》에서 일터책임제를 제정,실시한 내부관리경험을 배웠는데 그들의 생신한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계발을 주었다. 내친 걸음에 우리는 무한의 《장강일보》와 기자협회도 순방했다. 그들도 《효감보》의 관리방법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고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많이 듣고 감정교류를 했으며 가끔 책임제의 일부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리기도 했다. 순방을 끝내고 돌아온후 윤효식은 나더러 “길림신문사 취재편집, 행정인원 일터책임제” 초안을 짜보라고 했다. 《효감보》의 책임제도는 매우 세밀하게 제정됐으나 우리는 자체의 실제에 비추어 되도록 중점을 살리고 실제 락착에 편리토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렇게 기본임무, 상벌규정 등을 내용으로 책임제를 성문화한 다음 의견청취를 하고 몇번 수정을 거쳐 그해 6월부터 2개월간 시험실시하고 8월부터 정식 실시에 들어갔다. 그때를 시점으로 다달이 원고료를 지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시초에는 년간 원고료 합계가 2~3만원 좌우 되던것이 그후 매 2~3년에 책임제를 원래의 토대우에서 점차 조정을 하고 한번씩 수정하면서 원고료가 갈수록 늘어나 신문사본부가 장춘에 들어온 뒤에는 년간 7~8만원 선에서 여러해 지급되였던것 같다.   이 조치는 전체 임직원, 특히 편집기자들의 사업열성 향상에 유조했다. 질을 따져 우수한 원고에 대한 원고료를 후하게 책정했으므로 보도질을 높일수 있었다.   (《길림신문사 사람들》연변출판사 2015,12)
96    희로애락이 엉킨 로인세계 댓글:  조회:5503  추천:3  2015-03-10
    희로애락이 엉킨 로인세계      사회의 중심에서 사업과 삶의 주력으로 살고있는 청장년들의 세계도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사회의 변두리에 밀려나 비주력의 삶을 살고있는 로인세계 역시 다양하고 다채롭다. 사회로부터 소외되기 십상인 그들의 삶이 사회의 보다 깊은 주의와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할 필요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희로애락이 엉켜있는 로인세계를 초보적이나마 들여다보기로 한다.                                                                     ---편집자   리영(60세):   지금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해서 다섯 식솔이 어울려 살아갑니다. 나이 이젠 예순이라 로년기에 들어섰어요. 젊을 적 시집가서 6~7년을 재미있게 살아봤어요. 그러나 자식을 낳고나니 살림살이도 복잡해지더군요. 출근을 해야지, 아이를 키워야지. 그래도 덩덩 철이 없이 그게 재민가구 살아왔어요.   철을 알고 나니 남편이 시름시름 앓다가 86년도에 세상 떴습니다. 중년에 탑이 무너지니 앞이 캄캄해납디다. 자식 다섯을 두고 떠나간 남편이 야속하구 살길도 막막해 몇 번 통곡도 쳐보고 했어요. 안도 송강서 살다가 밥벌이 하려고 딸 둘 데리고 명월진으루 나왔지요. 제집도 없이 8년이나 떠돌이 셋집살이를 하면서 헤맸어요.   이루다 말 못할 고충을 겪으며 아이들을 성가시키고, 맏딸도 날 따라다니며 고생 많이 했지요. 나그네 없이 혼자 살자니 별 생각 다 듭디다. 물가가 자꾸 올리뛰는  통에 어디 셋집살이를 할수 있어야죠? 하는 수없이 아들 집에 들어갔지요. 그러니 다른 방향으루 심리고통이 생겨납디다. 신경이 약해 잠두 잘 안와요.   가운데 풍 하나 치고 사는 쬐꼬만 살림이라 한숨을 지어도 기침이 나와도, 오줌이 마려워도 밤 잘 때 조심성 없을 수 있나요? 시집살이죠. 아들도 맘 고와 역시 시집살이고, 애 에미의 눈치를 봐야 하니깐. 젊은 세월 꿈 같이 지나가고 남들 부부간이 몹시 부러워요.   옛날에는 부모자식은 같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기에 로인들은 밥 안 짓고 빨래 안하고도 호령 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지금 젊은이들은 부모공대사상이 아주 적어졌거든요. 그래 로인들은 하루도 맘 편히 살려고 로인활동실을 찾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지는 석양 늘그막에 맘편히 살 살아보자 마음 먹구 곁 동무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활동실로 춤 추러도 다니면서 하루하루 지우고 있어요. 밤 열시까지 춤추고 돌아오면 배가 고프지만 아들집이니 떨거덕거리며 맘대로 들춰먹고 끓여먹을 수도 없고, 시걱 때도 음식 습관들이 서로 다르니 입에 잘 맞지 않지만 어디 타발하게 됐나요?   원숙자(61세):   그러길래 난 자식과 갈라져 사는 게 좋다는 주장입니다. 왜? 서로 자유롭기 위해서죠. 자식들은 명일이면 부모생각 하지만 그저 그때뿐이죠. 평소에는 다 자기 일에 바삐 보내다 보니 부모들이란 건 있으나 마나한 존재죠.   옛날에는 부모자식은 같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기에 로인들은 밥 안 짓고 빨래 안하고도 호령 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지금 젊은이들은 부모공대사상이 아주 적어졌거든요. 그래 노인들은 하루도 맘 편히 살려고 노인활동실을 찾습니다. 내나 령감이나 아이 적부터 고생을 많이 하며 자랐어요. 내 21살에 시집가서 30여년 서로 아끼고 고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인젠 살만하니까 5년 전 령감이 병으루 돌아갔어요.   령감 항미원조 나가 고생하구 돌아와 공안사업을 37년 하면서 내내 바삐 보냈어요. 교통대 일을 보면서 한밤중에 술 마시고 돌아오면 나하구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지만 난 공장일 보구 피곤해서 돌아눕기 마련이였습니다. 우리 령감 한뉠 복 못 누려 보셨지요.   아이 넷을 나아 중도에 하나 죽이고 둘이서 아끼고 모아 아이들을 출세시켰는데 그러고 나니 령감이 병 걸려 세상 떴지 뭡니까. 령감은 세상 뜰 때 병원에서 내손을 잡고 “노친과 같이 유람 한번 못 다닌 게 죄송하고 원통하고 유감스럽다”고 울면서 말합디다. 리직휴양해서 반년도 안 돼 사망한 게 아깝기 그지없어요.   지금 월급만 받아서는 살기가 안돼요. 후에 장사를 좀해서 늘그막에 쓸 돈을 벌어놓으니 등아바이 노선이 정말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내같은 신세도 몇 만원 저금해 놓구 살 수 있으니, 자다가도 내 신세 좋게 된게 감개무량해서 잠 못들 때 많아요. 그래도 그냥 사회무도 활동엔 참가 안했어요   옛날 생각 오늘 생각 끝없이 하면서 집에서 홀로 울 때가 많았지만 사회활동생각 못했어요. 그러다가 재작년 아들집에 바람쐬러 갔다가 산에 올라가보니 농민들이 농사짓는 게 보입디다. 그때 무슨 생각 했겟어요? 애초에 농민령감을  얻었더면 매일매일 함께 농사를 짓구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나는 사회사업에 바삐 보내는 시내간부를 얻어 함께 있는 시간도 없이 일생을 외롭게 보냈지 뭡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에서 혼자 실컷 울었어요. 이런 걸 누구와 말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혼자 살다보니 록음기나 방송이나 텔레비가 동무 됩데다. 그러다가 어느 동무가 꼬시는 바람에 예라 무도장에나 다녀보자. 이런 생각을 갖게 됐어요.   원래는 무도장 다니는 사람 은 다 작풍이 나쁜가 했어요. 한번은 동무와 함께 무도장엘 가보니 이상하게도 그 무도곡에 심정이 유쾌해지더군요. 60살 먹도록 무도장 못 와봤는데 듣기와는 달리 무도 추는 사람들이 다 작풍이 나쁜 게 아닙디다. 처음 아바이들 손을 쥐니 막 몸이 떨리지 않겠어요?    원래는 무도장 다니는 사람은 다 작풍이 나쁜가 했어요. 한번은 동무와 함께 무도장엘 가보니 이상하게도 그 무도곡에 심정이 유쾌해지더군요. 60살 먹도록 무도장 못 와봤는데 듣기와는 달리 무도 추는 사람들이 다 작풍이 나쁜 게 아닙디다. 처음 아바이들 손을 쥐니 막 몸이 떨리지 않겠어요?   그 아바이 하는 말이“아, 이 동무 떨긴 왜 이리 떠우?”그래 내 “처음 손을 쥐여보니 그런가 봅꾸마, 많이 량해합소.”했습니다. 춤을 자주 추니 지금은 안 떨립니다. 작년부터 이런 활동에 참가하니 자연 몸을 거두게 되고 옷도 사 입고 싶어요. 누가“어째 아매는 점점 젊어짐둥?”하길래 “무도장에 댕겨 그렇다이”하구 대답했지요.   그전엔 “로년에 내 팔자 기구하다. 자식들두 등한하다”는 생각에 옛날 생각 자꾸 떠올리며 밤잠 설치는 일이 많았는데 집울타리 떠나 무도장 다니면서부터 잠 잘 자고 마음 상 해방 받은 느낌이예요. 매일 안 빼 놓구 다니는데 하루라도 안가면 허전감이 들 정도죠. 내 기분이 늘 좋아있으니 며느리도 좋아하는 눈칩디다.   “어머니 어떻게 무도장 선택하셨습니까?”하길래 “친구들이 가자구 해서”했더니 “참 잘 선택하셨습니다. 늘 아바이 생각에 울고 하시더니 정말 잘 선택하셨어요.”하더군요. 령감이 무도장 하번 못 다니고 돌아간 게 불쌍하기 짝이 없어요. 지금 노인들의 생활이 얼마나 좋습니까? 사는게 재미있으니 죽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저 오래 살구 싶어요.   오정옥(62세):   사회가 아무리 좋아도 내 좋아야 좋겠는데 사는게 어려우니 죽고 싶은 생각이 들때 있습니다. 자식 손구들을 키우느라니 우리 좋은 세월 다 갔어요. 늦은 거죠.   허금선(59세):   나는 농촌처녀로 신봉쟁이 남편한테 시집갔는데 그땐 그게 어찌도 자랑스럽던지 남편을 도끼 한번 안 들리고 몸 보양도 열심히 시켰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몸도 나고 젖통도 여자 것 만큼이나 컸지요. 그렇게 생때같던 남편이 남매 셋을 남겨놓고 갑자기 급병으로 사망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스물일곱에 남편 여의니 남편생각보다도 4남매 키울 걱정 더 커 그 부담에 눈물도 안 나데요. 너와 나 만들어놓은 새끼를 다 내버려두고 왜 혼자 갔어? 고생이 막심하니 설음만 북받치겠지요. 내가 울면 아이들이 따라 울가 봐 내놓고 울지도 못하구. 아무커나 그러다가 도시에 들어왔구 쏘련 가 1년 벌어 집도 한 채 사놨구요. 아이들두 성가시켜놨어요.   지금은 자식들 덕에 사는데 늘 아이들한테서 받아쓰는 게 그냥 안쓰러워요. 내가 자식들에게 줄때면 통쾌하지만 자식들이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나를 섬기니 고맙긴 해도 마음이 내내 무겁습니다. 한국 가서 내 힘으로 벌어다가라도 썼으면 유쾌하겠는데 지금 그게 안 돼요.   난 소갈비 먹길 좋아하는데 아들은 직방 녀편네하고 어머니한테 소갈비 사다 대접하라고는 못하고 “오늘 구추한데 소갈비나 사다 끓이오.”그럽니다..... 우에 셋은 제 에미 고생을 아는데 아래 셋은 뭐라는지 압니까? “엄마, 그런 말 맙소, 누가 그렇게 많이 낳으랍데?”   아들며느린 “어마이, 우릴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슴둥. 그렇게 생각 맙소!”하구 날 위안하지만 어려운데서 갖다 쓰니 내 심정 가벼울 리 있나요? 자식들 일을 힘자라는 대루 해주어야 시름도 좀 놓이죠. 그래서 지금 셋집 맡고 따로 나가  살면서도 아침이면 아들집에 가서 서둘러 손자 애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구 낮엔 친구들과 놀다가도 저녁때만 되면 허둥대며 또 손자 데리러 가요.   리옥금(62세):   자식들두 답답할 때가 많아요. 저녁이면 짜개바지손자를 이 늙은것한테 확 밀어 맡기고는 아무 관계도 안 해요. 그리고는 늘 한밤중까지 놀다 오는데 이 에민 아주 종노릇이나 하는 셈이죠.   오영금(66세):   49년도에 결혼을 해서 6남매를 낳고 64년도 큰 것이 열여섯 살, 막내 놈이 세 살 먹었을 때 남편을 여의고 “파밭”을 매며 이악스레 살아왔어요. 오죽하면 동네사람들이 날 보구 꽁지 없는 소라 했겠습니까. 고생 끝에 락이라구 몹시 어려웠지만 아이들을 다 공부시키고 큰 아들은 출세를 해서 지금 자치주무역공사에서 일보고 있어요.   나는 농민이기에 퇴직금 같은 건 없어도 별로 속태우는 일은 없어요. 오늘 행복하니 죽은 남편 더 생각나요. 연길에 와서 오리알 장사를 3년 해서 돈 좀 벌었어요. 좀 살만하게 되니 동무들과 같이 춤 추러도 다니고 싶어집디다만 아이들이 성가를 해서 손자를 보니 그것들을 봐줘야지요. 손자가 유치원에 가니 친구들이 무도장에 다니자고 해서 춤을 배웠지요.   배우고 나서 한 5년 안다니다가 재작년 5월부터 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 아글타글 벌어 재산 늘구자 들었는데 집금은 사상이 변해서 곱게 입고 바르고, 사상 점점 틀려가요, 호호...3년 춤추러 다니면서 집에 령감 없다는 소리 안했어요. 령감이 없다면 아바이들이 막 끌어안고 손도 더 꽉 잡고 하니까 그냥 집에 령감이 계신다고 하는 거죠. 그래야 그 아바이들이 마음대로 못하니까요.   설이랑 되면 손주 놈들한테 돈을 10원씩 5원씩 쥐어주는데 그럼 할머니 제일이라고 찧고 까불고 좋아해요. 할머니도 돈이 있어야 값이 있는가 봐요.   전영실:   남편 집은 8남매로 살림이 구차했습니다. 난 어려 공불 잘했는데 일본 류학도 희망있었지요. 그런데 19살 시집을 와서 식솔 많은 가문에서 남편 공부시키고 난 시형네와 같이 농사질 했지요. 남편은 고중마치고 현총사에 배치 받아 일을 보았습니다. 아이 4남매를 낳아 셋을 대학 보내고 졸업까지 시켜놨어요.   그 돈 대느라 10년 동안 여자 몸으로 동불사역에서 석탄목도, 벽돌공장일, 막노동, 페물수매......못해 본 일 없어요. 령감노임으로 턱도 없어요. 령감은 병퇴를 해서 딸을 대신 직장에 들여보내고, 지금 자식들 다 제절루 나가살아요.   맏아들은 대학 마치구 대경유전에서 간부노릇 하고 있고 막내아들놈은 장춘설계학원 공부를 하다 병으루 중퇴했습니다. 맏이, 둘째네는 다 잘 사는데 막내아들이 제 노릇을 못해 잘못 사니 노상 가슴 아픕디다. 막내 놈 때문에 애도 많이 태웠어요.   다른 놈들은 다 일하러들 다니는데 막내 놈은 타락해서 집에서 술 먹구 주정하구. 그러니 머릿속에 그냥 그놈밖에 없구 얼마나 가슴 아프던지.그러다 한국 가서 1년 연수받고 돌아와 지금 대련의 한국회사에서 엘리베이터가설수리를 하는데 처자까지 다 데려다 살구 있어요. 인젠 만 시름 다 놨어요.   조순애(63세):   스무살에 시집와서 아들 둘, 딸 셋을 두었는데 딸들이 지금 내 생활비를 대요. 아들은 장사를 한답시고 돈 꾸고 집 2만 여원짜리 까지 다 말아먹고 피신을 하니 빚군들이 막 쓸어들지 뭡니까. 세집 맡고나오니 집세 잇기 힘들어요. 며느리가 아이 열 살 먹도록 일할 생각 안하니 답답해요.    그전에 아글타글 벌어 재산 늘구자 들었는데 집금은 사상이 변해서 곱게 입고 바르고, 사상 점점 틀려가요, 호호...3년 춤추러 다니면서 집에 령감 없다는 소리 안했어요. 령감이 없다면 아바이들이 막 끌어안고 손도 더 꽉 잡고 하니까 그냥 집에 령감이 계신다고 하는 거죠. 그래야 그 아바이들이 마음대로 못하니까요.   일은 안하고 외지에 갈 소리, 손자 봐달라는 소리밖에 없어요. 딸들이 내 생활비를 대는데 야금야금 그 속에서 아들네를 빼준 돈을 합치면 3000원 잘 될 거래요. 딸에게서 돈을 받아서 아들을 주니 도리 상 안됐지만 어쩌겠습니까. 딸은 내 낳은 새끼니까 내 마음대로 욕해도 일없지만 며느린 안 그래요.   난 딸 생일엔 10원도 안내놓다가도 며느리생일엔 차마 10원은 못 내고 100원 내놓는데 내 어망결에 한말에 그게 딸한테 탄로나 딸이 워라겠습니까. 딸 생일엔 10원도 아까워하다 며느리한테는 100원씩 척척 내미니 엄마 돈이 있소 양?   아들놈은 돈 꿔 쓰는 주제에 할 말은 그냥 있어요. 엄마, 내 돈 벌면 엄마 집 한채 사 낫을게. 그럼 엄마, 무도장 다니겠으면 무도장 다니구 맘대루 합소. 그 말 한마디에 내 속이 싹 녹아나서 그래 그냥 얼리워 삽니다.   리영금:   아들며느리 다투면 속이 번져져요. 아이 하나 줴박아도 속이 번져지고 아들도 제 에미와 네편네 사이에서 속 태우고 눈치놀음 놀 때 많아요. 그래서 나도 눈물 흘릴 때가 있어요. 난 소갈비 먹길 좋아하는데 아들은 직방 녀편네하고 어머니한테 소갈비 사다 대접하라고는 못하고 “오늘 구추한데 소갈비나 사다 끓이오.”그럽니다.   때론 며느리 모르게 나한테 소비돈도 쥐어주지요. 우에 셋은 제에미 고생을 아는데 아래 셋은 뭐라는지 압니까? “엄마, 그런 말 마오, 누가 그렇게 많이 낳으랍데?”   김성혜(62):   자식많은 분들이 이것저것 다 생각하자면 끝이 없어요. 로인들은 자기로 자기마음 달랠 줄도 알아야 해요. 령감이 사망한 뒤 의지할 곳 없어 자식들 집을 이집 저집 다니면서 어렵게 고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렵게 살면서 자기를 달랠 줄 모르면 그 마음고생에 못살아요.   젊은이들한테 부모모시는 문제가 있는데 지금 자식들은 옛날 부모공대전통을 거의 잊고 있는 것 같애요. 지금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는데 관건은 아마 경제에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돈이 있으면 서로 모시려 하고 돈이 없으면 천대하지요.   자식들의 마음씨 곱고 밉고가  주요한게 아니고 돈 없는 부모를 모시면 제 살림 차리기가 그만큼 힘들 테니까 자식 립장을 생각해서라도 부모들은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요즘 기풍이 이렇게 돼가고 있으니 우리 로인들의 신세가 가긍하고 불쌍해서 섭섭하기를 이를 데 없어요. 사실 돈 없는 부모를 모시려는 자식 극히 드물어요.   령감은 번 돈을 아이들한테 나눠주라고 하지만 내 의견은 안 그래요. 나눠줄게 아니라 다짐받고 꾸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랭장고, 텔레비 같은 건 사줄 수 있지만 돈은 나눠주지 말아야 하지요. 돈을 세워놨다가 주기는 쉽지만 거둬들이긴 힘들어요.   로인활동도 돈 없인 참가하기 힘들지요. 돈이 없으면 구경만 해야 하니까 멋없는 거죠. 자식들이 부모들의 심정 헤아려 소비돈이라도 드려야 할텐데 그렇지를 못하니 그럴 땐 부모들이 한쪽 날개가 축 처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식들이 돈을 많이 벌면 어떻겠는지? 그런데 돈 많이 번다 했자 그것도 소수일 뿐이죠.   딱 로임을 가지고 사는 자식들이 소비돈 쑥 쑥 내놓기도 어려울 테죠. 그렇기에 로인들도 자기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들 돈만 바랄 수 없지요. 명절에 돈이 없어 손자들에게 5원,10원씩밖에 못주면 좋아안하고 100원, 200원씩 쥐여 주면 아들도 며느리도 다 좋아하지요.   지금 로인소비도 실은 대단히 많습니다. 퇴직노인들이 활동에 한번 참가하려 해도 수백원씩 써야 하는데 명절에 손주들한테 쑥쑥 내밀 돈이 어디 그렇게 많겠습니까?   최송죽(62세):   확실히 늙은이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난 로씨야에 가 보짐장사도 하고 상점도 꾸리고 해서 돈 좀 벌었는데 돈이 있으니 속이 든든합니다. 령감은 번 돈을 아이들한테 나눠주라고 하지만 내 의견은 안 그래요. 나눠줄게 아니라 다짐받고 꾸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랭장고, 텔레비 같은 건 사줄 수 있지만 돈은 나눠주지 말아야 하지요.   돈을 세워놨다가 주기는 쉽지만 거둬들이긴 힘들어요. 령감이 병 보이러 북경갈 때 돈 1000원,2000원 내미는 자식 없습디다. 자식들 다 잘살지만 말입니다. 주긴 쉽지만 그때 뿐이죠. 버릇도 잘못 궂히구요. 그래서 자식들에게 돈을 꾸어는 주지만 나눠주지는 않아요.   고복순(65세):   서른 댓에 남편을 잃고 여때껏 과부로 늙어왔어요. 내 37살 먹던 해 시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젊은 나이에 어찌 생과부로 늙겠소. 아직 늦질 않으니 자리를 옮겨 앉게나  하겠지요.   그날 저녁 시누이가 한 남자를 데려왔는데 석유등불아래 어슴푸레한데서 서로 똑똑히 보지도 못하고 내 했다는 소리가“전 새끼도 가득하고 시집은 안가겠으니까 다신 찾지 마세요.”지금 보면 그때 머저리짓 했지요. 그 후 길에서 그 사람 똑똑히 봤는데 아주 잘 생겼습디다. 서로 다 후회했지만 후회한들 엎지른 물이지요.   59살 때 또 좋은 자리 있었는데 아직 안 늦으니 만나보라는 권고가 들어왔을 때도 늙은게 사람 웃기겠다 두려워 대바람 거절해버렸지요. 그때라도 갔더면 한번 화끈히 살아봤겠는데......지금은 싫어요. 살다가 령감이 풍이라도 맞으면 그 시중 어떻게 합니까. 아무튼 내 고생은 고생대로 다 했어요.   지금은 행복합니다. 등소평아바이 덕분에 우리 잘 살고 있어요. 그저 고독한 게 문제지요. 그전엔 집 없는 게 걱정이였는데 지금 집이 있으니 고독한 게 큰 걱정이이지요. 자식한테 얹혀살면 자유가 없고 혼자 살았으면 좋겠어요. 친구들끼리 어울려 자유롭게 살고싶어요.   김성혜:   로인들의 혼인문제도 살펴보면 간단하지는 않습디다. 서로 맞아 잘 사는 분들도 있지만 갈라지는 일도 많아요. 실제 문제는 자식과 관계돼요. 서로 좋다가 자식문제 때문에 갈라지는 거죠. 시초에 자식들이 다 동의해서 결합하구 또 서로 마음 맞아 살지만 살다보면 서로 대방의 자식들을 홀대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왜 제자식만 관심하구 내 자식은 관심 않나? 대방의 손군이 와있으면 이쪽에서 찡내고 하니 모순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서로 대방의 자식, 손군들을 생각 못해주니까 자연 불화가 일어나는 거지요. 재혼해서 살다가 갈라지는 건 대부분 원인이 자손문제와 관계돼요. 이 문제에서 넓게 생각하는 분들이 적어요.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늘그막에 결합하면 마음고생만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남의 살림에 가서 남의 령감 옷 빨아줄게 있느냐고도 말합니다. 옷 빨고 밥 짓는 게 큰 문제 아니라 치고 아무튼 부담이고 자유롭지 못할거라는 겁니다. 지금 어떤 젊은이들은 정부를 두고 있다는데 로인들도 결혼 안하구 사는법이 없을까요?   있는 것 같애요.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춤을 추다가도 맞갖지 않으면 안 추면 되는 거지요. 로인들도 그저 마구 춤추는 게 아니라요. 늘 춤추러 다니는 로인들은 서로를 잘 알고있어요. 서로 거래하면서 고독이나 말리고 말동무가 있고 같이 춤이나 추면 돼요.   혼자 살면서 보니 외로움이 너무 어렵습니다. 식솔 여섯이 있다가 왜 이렇게 혼자 있냐? 밥 끓여놓고 혼자 먹자고 보면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막 눈물이 솟구쳐서 밥도 못 먹고...... 늙은이들두 친구가 있어야 해요. 부모들에게나 자식들에게 못할 말도 친구에게는 하지요. 친구에게는 속심 말을 다 할 수 있어요.   로인들도 사람마다 성격이 달라요. 어떤 사람은 혼자 다니기 좋아하고 집에 홀로 조용히 있기를 원하지요.   나는 친구 대여섯이 모여 먹고 얘기도 나누고 싶어하는 성민데 제일 유쾌할 때는 무도장에서 춤출 때이고 그 외 마작도 놀구 문구도 칩니다. 마작을 놀면 시간 가는 줄 몰라 좋아요. 마작을 놀면서 롱담도 하고 별 얘기 많아요. 그리고 텔레비를 틀어놓고 가무도 보고 련속드라마도 보고 노래 감상도 즐깁니다.   오정옥:   5년 혼자 살면서 보니 고독이 너무 어렵습니다. 식솔 여섯이 있다가 왜 이렇게 혼자 있냐? 밥 끓여놓고 혼자 먹자고 보면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막 눈물이 솟구쳐서 밥도 못 먹고......   조순애:   늙은이들두 친구가 있어야 해요. 부모들에게나 자식들에게 못할 말도 친구에게는 하지요. 친구에게는 속심 말을 다 할 수 있어요. 령감한테도 안할 말이 있어요. 동무도 늘그막 동무가 좋아요. 서로 믿어주고 호흡이 통하고, 친구를 사귀면 진정한 친구를 사귀여야 하지요. 그래야 서로 리해하고 도울수 있거든요.   정신적으로 서로 의탁하게도 되는 거죠. 여러 날 못 만나면 만나고 싶고 소식 알고 싶고 서로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겁니다. 마음속 고통도 서로 털어놓고 나누고 위로하고 좋은 일 있어도 기쁨 서로 나누면서 마음이 즐거워지는 거죠. 외로움도 그러는 가운데 풀어지는 거죠.   1997년 5월 6일   
95    홍보시대 간판아리아【3】 댓글:  조회:6722  추천:17  2015-01-22
  홍보시대 간판아리아   ◎박문희      (전호의 계속)   (5)    “호잉래잉영”?    이런 간판어도 있나? 그밑에“好孕来孕婴”이란 한자가 병기돼있으니 망정이지 조선어글씨만 보고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수 없다. 이처럼 연변의 간판은 조선어표기야 틀리든 말든 병기된 한자표기덕에 그 가게가 무슨 가겐지 알아보지 못해 안달 떨어야 하는 고충은 없다.   언론에서 시때없이 암만 떠들어도 흐르는 강물에 칼질하는 격이 되고마는것도 아마 이런 상황때문이리라. 어디선가“한어가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조선어는 저리 가라”는 괴음이 지동치듯 울려오는것 같다. 소름이 끼친다.   조선어와 한어를 반드시 병용하게 돼있는 연변의 간판문화. 있는듯 없는듯 몽롱한“대등번역론리”......   간판번역은 소설번역과 달라서 쉽다면 너무 쉽고 어렵다면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다. 간판번역에서“대등번역론리”가 법적으로 채택된 일은 없다.“好孕来孕婴”은 그 업소의 뜻을 고객에게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한어의 특수한 표달방식에 구애를 받음이 없이 순 조선말로 된 자체의 표달방식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 한어 몇글자에서 탈피하지 못한 결과 “호잉래잉영”이란 같잖은 직역으로 얼렁뚱땅 뭉때버린것이다.   이와 같은 례가 한두가지도 아니고 기수부지다. 때문에 이른바의“대등번역론리”를 깨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현재 한어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고객을 사로잡을수있는 그런 조선말간판어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있다.   “好孕来孕婴”을 그냥 물고늘어지자. “호잉래잉영”이란 직역이 별로라면 대관절 뭐라면 좋을가? “好孕来”는 “孕婴”의 수식어에 불과하니 내버려두고 “孕婴”은 임부와 영아를 뜻하니 간판명을 “xxx 임부와 영아”로 해볼가? 아니 잠간! 연길시내에 걸린 孕婴 관련 간판은 한두개가 아니라 십수개도 넘는다. 그런것을 모조리 “xxx임부영아”라고 해달수는 없다. 그럼“마미와 베이비”? 아니면 "임신부와 영아" 혹은“엄마와 아기”? 어느것을 취하든 “호잉래잉영”에 뒤질일은 없어보인다.    연변은 민족자치주지만 필경은 중국의 한 개 지역이므로 정식 간판등록은 한어로 하게 돼있다. 조선말로 가게이름을 지었다 해도 한역을 해서 신청해야 등록이 가능하다. “덕분”에 민족특색이 자못 짙은 간판어가 한무더기 생겨났다.   “놀러와bar/闹乐哇吧”•“나들이김밥집/拿得利紫菜饭”•“마시자/玛喜扎”•“푸름이독서사/璞润读书社”•“하나로마트/哈那露玛特”•“피자나라/比萨拿啦”•“데이트맥주옥/贴伊特啤酒屋”•“부뚜막/富多满”......    모두가 조선말을 한어로 번역해서 간판에 병기한 것, 그런 번역어가 연변 간판문화의 일대경관을 이루고있다. “누나국밥집”의 경우 “姐姐汤饭屋”이라 해도 안될것 없다. 그럼에도 기어이“努拿汤饭屋”라 음역해 올린것은 특정의 민족지역에서“努拿”란 언어 자체가 가지는 특수한 매력때문일 것이다.   “努拿汤饭屋”처럼 조선어를 한어로 음역하는 일은 허다한데 반해 한어에 대한 조선말음역의 활용이 실제수요를 따르지 못하고있다는 사실은 심사숙고해야 할바다. 한어로 된 간판어에서“鑫(흠)”자는“鑫欣•鑫鑫•鑫丰•鑫红•宏鑫”등으로 아주 흔하게 쓰이는 글이고 그 발음도 쉽고 편하다. 그런데“한자어음독법”에 의한 조선어발음은 “흠흔•흠흠•흠풍•흠홍•굉흠”등으로 굉장히 힘들고 말째다. 간판에 “흠홍신발/鑫红鞋店” 이라고 씌여있지만 “흠홍”두 글자는 극상해야 눈요기나 하는데 그칠뿐 입에 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눙신발”이라고 발음되는대로 적으면 입에 담을 것이다.   이런 일을 가지고 조선족의 번역수준을 론하는건 무리다. 조선어를 한어로 번역해 올리는 이가 누군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조선족이 아닌가. 조, 한 “쌍어”에 막힘이 없는 조선족은 실상 두가지 번역의 대부분작업을 다 떠메고있다.   때문에 새로 등록하는 타민족가게들에서는 조선족 하면 모두가 번역의 달인인줄 알고 후한 번역료를 내걸고 점포의 작명에 이름번역까지 아무에게나 청탁을 해오는데 청을 받은 사람은 호기있게“즉시번역”을 해 주지만 가끔 본의 아니게 번역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한때는 시중에 새로 개발돼나왔다는 이른바의 “번역어플(软件)”을 맹신한 나머지 조선어를 모르는 일부에서 그런 “어플”로 번역한 점포이름을 간판에 새겨올리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져 사람들을 웃긴 일도 생겼었다. 그런데 근간에는 그런 일이 많이 준것 같다. 봄에 피는 꽃도 한철이라더니 “‘어플’맹신”풍조 역시 “한철”을 넘기기 어려운가보다.   (6)    점포이름을 잘 달면 수익성을 높일수 있다고들 한다. 그래선지 연길의 거리에 나서서 일부의 잘된 간판들을 보면 어쩐지 좋아지는 게 나의 기분이다.   “진달래마을아파트분양센터/金达莱小区售楼处”•“아기사랑/爱婴宝孕婴”•“뉴타운포장마차/新城布帐马车” • “사랑의 카페/爱心咖啡/Coffee in love” • “별이 빛나는 밤/星夜” • “양춘가절/艶阳天”...이런 간판들은 그속에서 좋은 어감이나 말맛을 느낄수 있어 좋다.   간판이라면 어감이 좋아야 한다. 연변의 간판에는 “鸭脖”이 “오리목” 지어는 “압발”로 올려지기 일쑤인데 어감상 별로 신통치가 않다. “압발”은 “앞발”과 발음이 같아 거부감부터 앞서고 “오리목”은 “가늘고 길게 켠 목재”의 의미라서 싫다. 그렇다고 “오리모가지”는 더욱 아니다. “猪头”를 “돼지머리”라 높여 쓰면서 오리한테는 “모가지”라고 낮추어야 할 하등의 리유가 없기때문이다. “오리목살전문”이라고 하든지 “오리목뼈구이” 혹은 “오리목덜미료리”로 하든지 하면 어감도 개선되고 말맛도 좀 살아나지 않을가?   다른 점포들과의 차별화를 시도해 “나만의 간판”을 만들어내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 연길에 죽가게가 자그만치 수십집이 있다. 그런데 가게이름들이 별로 신통치 않다. “죽집”이나 “팥죽” 또 간혹 “죽이야기”와 같은 색다른 이름도 있긴 하지만 어감상 따분해보이고 말맛같은걸 느낄수 없는 경우가 많다.   “죽락떡집/粥乐馅饼”이란 간판을 봐도 그렇다. 한어쪽은 그런대로 말맛이 있어보이지만 조선어쪽은 말맛의 냄새조차 없다. 한어를 보면 죽과 떡이 두루 다 주인공인줄 알겠는데 조선어를 보면 떡만 주인공이다. 이름을 “맛죽과호떡전문”이라 달았어도 “죽락떡집” 처럼은 싱겁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경우에 따라 죽가게 이름은 훨씬 더 다양할수 있다. “죽마을/맛죽고을/맛갈죽/ 맛갈참죽/미음전문/새우죽/소고기죽/죽전문점/죽배달전문점” 등등...   언젠가 한국의 어느 미식거리에서 “맛이 죽여줍니다”라는 명칭의 죽가게를 본적이 있다. 일곱글자에서 “죽 ”자 하나만 크고 유표하게 쓰고 나머지는 모두 작은 글씨로 썼는데 발상이 기발한 그 간판이 나한테는 식상한 내용의 간판과 차별화된 신선함을 안겨주는 충격적인 것이여서 지금까지 잊지를 못하고있다. 듣자니 “뒤죽박죽”이란 죽가게도 있다고 한다.   연길시 서시장 근처의 한 침실용품가게에 “따스안/达丝安”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따스한 느낌”이 든건 나만의 감각이였을가? “따스안”의 “모본”이 “따스한”임은 회의의 여지도 없고 “达丝安” 또한 당연히 “따스안”의 음역이다. “따스안”명칭 작명자의 고명한 점은 “한”을 “안”으로 바꾼데 있다. 별 볼일 없던 일개 규정어를 고유명사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따스안”이란 품위있고 근사한 침실용품 가게이름을 탄생시켰으니 말이다. 이와 비슷한 간판작명의 례로 “조은맥주옥/卓恩啤酒屋”, “몬니저맥주옥/勿忘啤酒屋” 등을 더 들수 있다.   이런 조선말간판의 이름이 좋다 함은 읽기에 편하고 거부감이 안들고 그속에 점포의 목표를 겨냥한 묘한 뉘앙스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글자 하나 속에 깔린 티끌같은 묘한 뉘앙스와 지극히 미세한 어감의 차별이 아주 다정다감하게 안겨오는 좋은 간판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하다.    조금 잘됐다는 느낌이 드는 간판 몇가지만 더 들어보자.   “삼일에 살 까기/伊姿美体瘦身”--이 간판을 보면 조, 한 두가지 문자의 글자 수는 같으나 내용은 판이하다. 사흘에 효과를 본다니 살까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심히 지나치지 않을것이다.   “구들박사/电热板”--“전열판”이 아닌 “구들박사”!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박사의 매력, 얼마나 좋은가.   “웰빙!멸치국수/大家快餐”--역시 제마끔인 조,한 명칭. 만약 “1 대 1의 대등번역”을 시도한다면 어떻게 될가? “대가속성음식점”? “따쟈스낵”? 그래도 “웰빙!멸치국수”가 월등히 우수해보인다. 연변이란 특정된 민족지역에서 “대가속성음식점/大家快餐” 하면 따분한 “동어반복”에 불과하겠지만 “웰빙!멸치국수/大家快餐” 하면 적어도 정보량이 배이상 증대(웰빙•멸치•국수)되는데다 생동성에 차별화된 독특미가 있다.   상기 실례는 “별도명명법”의 가능성 지어 필요성을 보여주고있다. 말하자면 공상부문에 등록된 “한어간판어”에 구애됨이 없이 점포의 자체수요에 따라 조선어간판명을 별도로 만들어올림을 허용하자는 것, 아니 허용만이 아니라 그것을 대대적으로 제창하자는 것이다.   이를 관념적, 실천적으로 끈질기고 확실하게 밀어부친다면 연변 간판문화의 획기적인 변화를 유발할수도 있겠다는것, 그러면 종당에 조선말같지 않은 조선어간판어를 모든 간판에서 몰아낼수도 있겠다는것이다.   [끝]    《문화시대》2014년 제6기  
94    홍보시대 간판아리아【2】 댓글:  조회:6864  추천:21  2014-11-05
홍보시대 간판아리아   ◎박문희    (전호의 계속) (3)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저급적인 오류도 없고 억지번역으로 생기는 딱딱함과 어색함도 없어 친절하고도 자연스럽게 안겨오는 그런 생동하고도 창의적인 간판이 우리 도시의 모든 거리를 밝게 메웠으면! 이것이 시민들의 소망일것이다.   연변의 간판은 국내 다수지역과 달리 번역작업이 필수다.“번역”이라 하면 직역(直译), 음역(音译), 의역(意译) 등 수단이 동원되기 마련인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먼저 “직역”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古术点穴院”같은것은 “고술점혈원”으로 직역이 제격이며 그 근거도 찾아볼수 있다. “牛肉面”은 “우육면”으로 중국조선어사정위에서 만든 한조대역법에도 이미 규범화돼 올라있다.“都市驿站”,“松林阁”은 간판에 “도시쉼터”,“솔밭집”으로 씌여져 보기에 아주 정답게 안겨오지만 실은“도시역참”,“송림각”으로 직역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卫浴",“佳音发艺”,"日杂店",“供求世界”,"肥牛城"의 경우 그것을“위욕”, “가음발예”등으로 직역하는것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卫浴”은 상황에 따라 “욕실설비/욕실용품/욕조”로, “肥牛城”은 “신선로/소고기신선로/샤브샤브”로, “劳保日杂”은 “로동보호용품일용잡화”로, “佳音发艺”는 “쟈인뷰티헤어/가음머리방” 등으로 조선말규범에도 맞고 발음도 편하게 풀어쓸 여유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许黑鸭”이란 료리는 2005년도 연길에서 탄생한 브랜드인데 “허흑압”이란 조선말 직역명칭을 입에 올리기가 너무 힘들었던 탓인지 그 맛에 대한 관심조차 별로 일으키지 못한듯하다. 만약“허씨네 깜장오리 특별메뉴”라든가 “연길브랜드—-까만오리”이런 식으로 했다면 어땠을가? 하다못해 음역을 취해 "쉬헤이야 특별료리전문"이라고 했어도 말번지기가 “허흑압”보다는 덜 어려웠을것이다.   “早敎中心-조교쎈터”. 여기서 "조교"는 분명 틀리는 “직역”이다. 대학에서 교수의 지시에 따라 학술연구와 사무를 돕는 직위로“조교”가 있고 중국에서 영주권을 갖고 있는 조선교민도“조교”이다. 이런 상황에서 “早期敎育”의 준말인 “早敎”를 “조교”로 직역할수 없다.“早敎中心”은 “조기교육쎈터”로 돼야 한다.   실상 우리가 보다 자주 접하는 문제는 “사이비직역현상”이다. "검패(箭牌) 주방가구", "문봉(文风)서점", "리침(利晨)리발점", "돈화로명(鹿鸣)산장", "소군(晓军)부품" “소동 (晓东)특색구이”,“연화(艳花)보신탕”,“운룡(运隆)식당”,“가화(家合)식품”,“만국첨(万果甜)슈퍼”,“전구(站久)꼬치집”,“명사테마객전(客栈)”,...뭐 이런게 수두룩한데 피끗보면 문제가 별로 있어보이지 않지만 기실 모두가 오역이다. 모르긴 해도 箭(전)은 剑(검)과 한어발음이 같으니 당연히“검”일 것으로 착각했을수 있겠고, 같은 리유로 风(풍)은 峰(봉)과, 晨(신)은 钱其琛(전기침)의 琛자와, 鹿(록)은 路(로)와, 晓(효)는 小(소)와, 艳(염)은 宴(연)과, 隆(륭)은 龙(룡)과, 合(합)은 和(화)와, 果(과)는 国(국)과, 站(참)은 战(전), 栈(잔) 역시 战과 한어발음이 같으니 우에서 보는 간판어처럼 쓰는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했을수 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게 아닌것이다. 조선어는 필경 한어와는 별개의 언어체계인만큼 한어발음이 같다고 해서 한자어발음도 반드시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는것이다. 더도 말고 “站,占,战” 세글자를 보자. 이 세 글자의 발음은 한어로는 똑같지만 조선어 한자음은 “참, 점, 전”으로 모두 다르다.   이제 상기문제를 산생시키는 뿌리요인을 따져보자. 이는 분명 조선어교육 부재의 필연적악과라고 생각한다.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아니, 조금도 심하지 않다. 우리 조선말어휘는 약 70%가 한자어로 되여있다. 한자를 바탕으로 조선말 한자음독법을 리용해 만들어낸 우리말낱말이 한자어다. 또한 한자를 주어진 위치에서 글자의 뜻과 일치하게 해석해 읽는 법이 훈독법이다. 한자어의 음독법으로“한래서왕(寒来暑往)”하면 훈독법으로 찰 한(寒), 올 래(来), 더울 서(暑), 갈 왕(往)이 되는데, 만약 2천자 가량 되는 상용한자어의 음독법을 모르면서도 문제가 안 생긴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것이다.   한자어의 음과 훈을 익히면 평생 그 득을 보게 되지만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조선어학습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문제는 우리의 학교교육에서 교수대강에 의한 한자어교육이 빠져있다는것이다. 바꾸어말하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자음독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으니 적지 않은 학부형들은 비싼 값을 치러가며 자식들에게 과외로 한자어공부(례컨대 천자문학습)를 시키기도 하지만 그게 필경은 제한적일수밖에 없다.   가르쳐 주지도 않고 간판어를 정확하게 쓰라고 하면 못배운 사람들만 힘들뿐이다.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결국 못배운 사람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그러니 간판용어에 이런 문제가 많이 생기만 자연히 자학 등으로 한자어를 배워 언어학자로 된 이들과 번역관련실무를 맡은 공무원이나 전문가들만 욕을 도맡아먹게 돼있는것이다.   (4)    연길의 약방, 아니 중국 전역의 약방간판은 덮어놓고 모두 “대약방”이다. 크면 물론 대약방, 작아도 대약방이다. 약방처럼 평등한 업종이 약방말고 또 있을가 의심될 정도다. 기실 연길의 약방치고 진짜 큰 약방이 있기나 한가? 대부분 작은것 같고 중등정도의 약방도 별로 있는것 같지를 아니하다. 그래도 간판에는 큰“大”자가 약방의 감초처럼 붙어다니는데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글자랑비다. 모든 약방에 다 큰“대”자가 붙는다 할때 사실 그“대”자는 있으나마나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전국 각지 모든 약방의 “대”자를 가차없이 없애라고 호소하고 싶다. 물론 호소하나마나 한 일이겠지만.   한데, 모든 약방들을 분별없이 다 대약방이라고 이름 달아주는것도 그렇지만 성곽 성(城)자를 쓰지 않으면 마치나 간판이 안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성(城)자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문제다. 한족들은 워낙 집주변에 성을 잘 쌓으니까 리해되는 점이 있지만 그옛날 쪽박차고 살길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 조선족은 집주변에 싸리나 옥수수대로 울타리나 두르는데 습관되여 성(城)하고는 분명 거리가 있는데도 누구한테 뒤질세라 간판에 성을 쌓으니 참 기분이 어수선하다. 鞋城-신성, 串城-뀀성, 红酒城-와인성, 台球城-당구성, 电子城-전자성, 批发城-도매성, 饺子城-물만두성...말짱 이런 식이다. 그래 “성”자를 모조리 뽑아던지고 “모카와인, 신주물만두, 양고기꼬치, 신사당구, 아리랑전자, 신발도매” 이런 알맹이만 남겨두면 정말 간판이 안된다는 말인가?   한어간판어가 조선말로 이상하게 “번역”되는 상황을 흔히 볼수 있다. “日月红”이 “해달홍”으로,“一口香”이“한입향”으로,“异火香”이“이불향”으로,“碳烤家”가 “구이가”로, "鲜鱼馆"이 "선물고기집"으로,"梦乡园" 이 "꿈향원"으로 번역된 례가 그렇다. 여기서 日月红이나 一口香 등은 가게의 명칭으로 명사화된것인데 간판은 그것을 마음대로 의역(“日月红”의 “해달”,“一口香”의 “한입”)혹은 직역(“日月红”의 “홍”,“一口香”의 “향”) 을 해서 “해달홍”, “한입향”으로 합성했다. “이불향”, “구이가”, "선물고기집"이나 "꿈향원"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는 번역이 아니다. 우리말을 어지럽혀 웃음거리를 빚어내는것이다.   의역어와 직역어의 합성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간판어“骨汤米粉”을 골탕쌀국수로 번역하면 큰일난다. “그집으로 골탕먹으러 가자!” 하면 말이 되겠는가? 국수집의 립장에서도 손님에게 “골탕을 먹인다”면 죄되는 일밖에 없을것이다. 때문에 점포이름을 “뼈탕쌀국수집”으로 하는게 비교적 안전하다. 그런데 실제 "뼈탕집에 가서 골탕먹었다"는 말은 없지만 "골탕집에 가서 뼈탕 먹었다"는 식의 말은 있다고 한다.   “달리쿨문신(跑酷刺青)”이란 간판어에서“刺青”과 “문신”은 정확히 대응되는 언어지만 “달리쿨”은 역시 웃음거리다. “달리쿨”이란 대체 어디서 온 이름일가?“달리다(跑)”와 “쿨하다(酷)”에서 왔을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사 “달리다”의 어근 “달리”와 형용사“쿨하다(酷)”의 어근 “쿨”자만 따다가 한데 붙이는 식의 이런 고유명사 합성법은 있을수 없다. 실제로 "跑酷刺青"의 업소주인은 업체이름을 체육종목의 일종인 "跑酷(영어표기 Parkour)"에서 따왔을수 있다. 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업소의 조선말명칭은 “파쿠르문신”이여야 맞다.   간판어를 취급할 때 정말 주의해야 할점이 있다. 원 간판어의 뜻이 뭔지를 똑똑히 알고 번역을 해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名花串城/명꽃뀀성”이란 간판을 보면 명꽃이란 말이 이상하다. 명화면 명화지 명꽃이라니? 인터넷검색을 해보면 한국의 진도지방 말로 면화를 명꽃이라 한다는 것이 바로 나타난다. 그러니“名花”는 의례 “명화”로 바뀌여야 한다. 그리고 방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串城”도 “뀀성”으로 할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양고기/소고기)꼬치”,“꼬치전문점”아니면“꼬치구이” 혹은 “꼬치맛집”과 같은 정갈한 우리말로 새겨올려야 하는것이다.   “索菲亚衣柜/쏘베야옷궤”에도 문제가 있다. 옷 의(衣)에 궤 궤(柜)이니 당연히 “옷궤”겠거니 하고 “쏘베야옷궤”라고 했는데 “衣柜”란 실상“옷장, 장롱”, 말하자면 한어의 立柜,衣橱를 두고하는 말이고 “옷궤”란 “옷을 넣어 두는 나무상자”, 즉 한어의 “箱笼”, 우리말의 휴대용 옷궤나 트렁크를 일컬음이다. 그러니 홍보물의 원뜻과는 거리가 먼것이다. “索菲亚(Sophia) ”도 “쏘베야”가 아니라“소피아”로 해야 옳다.   서시장에 “土家酱香饼”이란 음식가게가 있는데 조선말간판어는 “토집장향병”이다. 한데  가게명칭중의 “土家”란 사실“흙집”이나 “토집”이 아니라 우리나라 56개 민족의 하나인 “투쟈족”을 일컫는다. 따라서 “酱香饼”이란 투쟈족의“전통맛떡”을 의미하는것이다. 그런데 “土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은채 성급하게 “번역”을 해 올리다보니 이런 웃도울도 못할 문제가 빚어진것이다. 투쟈족관련자가 이런 사실을 아는 나들에는 모종의 불쾌한 일도 생길만 하다. 이런 의미불명의 간판어가 지금도 장마당 한복판에 버젓이 자리하고있으니 투쟈족형제들과 매일 그 간판을 보는 손님들에게는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다음 호에 이음) 《문화시대》2014년 제5기  
93    홍보시대 간판아리아【1】 댓글:  조회:6963  추천:25  2014-10-04
         홍보시대 간판아리아           (1)  오늘 시대는 홍보시대다. 홍보를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나라든 기업이든 개개인이든 막론하고)를 세상에,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시대다. 모든 업체에 걸려있는 간판은 바로 그 업체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그런 간판들이 모이면 도시의 얼굴이 된다.   30년 전 연변의 거리를 처음 와 보는 한국 손님들이“우리나라(한국) 70년대 초반의 모습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시장경제가 갓 도입될 무렵 길가의 낮고 꾀죄죄한 점포들 이마에 초라한 간판들이 무질서하게 달려서 호객하던 때를 련상하면 참말 격세지감이 드는 오늘이다.   간판문화가 무질서에서 유질서로 급격히 전환하는 요즘인지라 물론 꼬집을 점이 수두룩하지만 모든 일에 과정이 있게 마련인데 어찌 단술에 배부르기를 바라겠는가? 금년 초인가 연길공원 입구쪽에서 큰길 건너 20층도 더 돼보이는 건물의 앞면에 다닥다닥 (그러나 질서있게) 붙어있는 간판들을 한참씩이나 바라보면서 퍽이나 감개무량해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몹시 뜻밖의 일이였던 까닭에 그 일로부터 받은 충격이 꽤나 컸던것 같다. 그날 나는 인터넷사이트를 유람하던중 吉林边务督办公署에 대한 글제목을 발견하고 바로 그 내용물을 읽고있었는데 무심중 잘못 번역이 된 간판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 吉林边务督办公署를 소개한 글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연길시 하남가두 광화로 서광골목 7-17번지. 고층건물속에 포위되여있는 자그마하고 낡은 2층건물, 이 건물이 바로 연길에서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청조시기의 유일한 건축물이며 길림성중점보호문화재인 길림변무독판공서—일명 수변루(吉林边务督办公署楼--戍边楼, 도윤루라고도 한다)이다...그런데 지금은 현판 사진에 보듯이 (‘吉林边务督办公署’가) ‘길림변무독사무서’라고 되여있다. ”   사진을 보니 현판이 두개가 가지런히 걸렸는데 왼쪽은 한어원문이고 오른쪽은 조선어 번역문이였다. 원문은“吉林省重点文物保护单位 吉林边务督办公署吉林省人民政府 1999年2月26日公布”인데 번역문에는 “吉林边务督办公署”가 “길림변무독사무서” 로 되여있고 락관의 “公布”는 “공보”로 되여있었다.   “길림변무독사무서”라, 그러니 督办公署의 督이 앞의 边务에 붙어 边务督이 되고 나머지 办公署가“사무서”로 번역된 결과 督办과 公署가 아주 엉뚱한 언어로 바뀌고만것이다. 그리고 “公布 (공포)”도 의미가 완전히 다른 언어인 “공보(公报)”로 탈바꿈해 결국 성인민정부의 엄숙한 의도가 번역문에서는 완전히 왜곡돼 전달된것이였다.   필자는1999년도에 걸린 이 현판이 자그만치 15년이나 흘러가는 사이 혹시 시정이 됐을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기대감에 바로 그 이튿날 수변루를 직방 찾아갔었다. 섭섭하게도 실망이였다. 15년전에 걸린 현판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본 자리에 견결히 붙어있었다. 참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간판문제에 대한 나의 관심을 야기했던가보다. 나에게는 진짜 필요이상인 스마트폰까지 하나 사가지고 기회만 생기면 간판찍어모으기를 했으니말이다. 한데 그러다보니 간판모양뿐 아니라 간판의 내용에 대해서까지 관찰하게 되였는데 와중에 일련의 문제를 두루 발견하면서 그것이 이 칼럼을 쓰는데 동기부여가 됐던 것이다.   (2)    연변의 간판문화의 력사는 기실 아주 짧다. 외계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의 언어도 엄청난 변화를 겪고있으며 그런 변화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현재 우리의 간판문화는 기실 외적이미지의 정돈미화에 꾸준히 성과를 올리는 한편 내용물의 혼돈상황개선에 박차를 가하는 시초단계라고 봐도 무방할것이다.   이런 형편에서도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간판어는 다양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조,한 두가지 문자는 법적으로 병용하도록 돼있는것인데 그중 조선어는 또 실질상 대한민국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어, 중국조선어가 혼용중인 상태이며 동시에 한국으로부터 외래어도 대거 수입되고있다. 그 외 영어, 일어, 로씨야어, 회족어 지어 윁남어까지도  적게많게 간판언어들의 향연에 끼여들고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연변의 간판은 아직 “전국시대”에 처해있다고 볼수 있다. 아래의 례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간판에는 “소고기국”이 있는가 하면 “수육국밥”,“우육탕”,“소탕”이 있으며 “전골”,“신선로”가 있는가 하면“샤브샤브”가 있으며“천층떡(千层酥餠)”이 있는가 하면“바삭떡(酥餠)”이 있으며“뀀점”,“뀀성”, “뀀왕”,“대뀀”,“대뀀왕”이 있는가 하면“미친꼬치(味亲串)집”이 있으며 “담배술전매점”이 있느냐 하면“담배술점”,“담배술행”,“연주행(烟酒行)”이 있으며“구두전문”,“신발나라”가 있는가 하면“신성(鞋城)”,“신점(鞋店)”도 있으며 “머리방”,“머리마당”,“미발”,“발예(发艺)”가 있는가 하면 “헤어클럽”,“헤어컨디션”,“헤어스타일”,“헤어시티”,“헤어뷰티샵”도 있다.   이뿐이 아니다.“麻辣香锅”하나가 “매운요리”,“매운료리”,“마라료리”,“마라볶음”으로, 지어“마라향솥”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같은 “疯狂烤翅”도 점포나름대로 “뢰지핫닭날개”혹은 “미더닭날개”가 되기도 한다. “疯狂”이 “狂疯”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狂疯鸡”가 그것이다. 여기에 붙은 조선어간판어는 “매드후라이치킨”이다.   등록상표가“瘦猴”인 瘦猴麻辣烫은 연길시민 류청송씨가 지난세기 90년대에 창출한 브랜드인데 아주 잘 나가는 모양, 전국 각지에 체인점도 두고있다. 그런데 그 간판이 이상하다. “瘦猴”가 “원숭이”,“여윈원숭이”로 된것이 있느냐 하면 “말라꽹이”로 된것도 있다.   이런 례는 얼마든지 들수 있다. 만일 우리의 간판어에 오류가 많거나 또는 그 언어가 어느것이 옳은지 가려내기 힘들거나 사람을 많이 웃길 정도로 추락되여있다면 그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물론 이런 언어들을 모종 규칙에 맞게 규제한다는게 쉬울리 만무하며 하루한시의 해결은 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단지 일부에 존재하는 혼란상일지라도 너무 오래 방치해두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일파만파로 번지는 그 영향을 과소평가할수는 없으니까.   어쨌거나 문제의 시정을 위해서는 간판문화현황을 잘 파악하는것이 우선일것이다. 이른바의 현황이라야 한어로 작성된 간판어를 조선어로 번역(汉译朝)해서 병기한 것, 조선어로 작성이 된것을 한어로 번역(朝译汉)해서 병기한 것, 병용한 조, 한 두가지 언어가 직접 대응되지는 않지만 서로 보완하면서 동일한 홍보목표를 노린것, 세가지 혹은 그이상의 언어(이미지언어 망라)를 “짬뽕”시켜 하나의 홍보목표를 노린것 등등 뭐 이런 것들에 다름아닐 것이다.   이제 상기 몇가지 현상의 범위내에서 일부 두드러진 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해 자유롭게 의논해보고자 한다.   (다음 호에 이음) 《문화시대》2014년 제4기  
92    중한일《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한국에서 댓글:  조회:5320  추천:4  2014-04-29
중한일《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한국에서 [ 길림신문 박문희] 발표시간: 2014-04-28 서울 우이동에서 향항 탕원가내외가 기증한 공자동상 제막식도 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 대회장. 중국(향항 대만 포함), 한국 일본의 서화 작가 수백명이 참가한 한국국제서화교류사상 최대규모의 서화전이 한국에서 성대히 열렸다. 한국상지학원과 한국비림원에서 주관하고 한국문화체육관광부와 주한중국대사관에서 후원한 이 《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論語碑林書畵大展)》은 16부터 20일까지 5일간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과 노암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렸다. 그간 공자동상제막식도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서 치러졌다. 대한민국 김영삼전대통령, 이수성전국무총리,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한성호총회장, 중국당대문화우공으로 불리는 중국한원비림창시인 리공도선생 등 인사들이 축사를 보내왔다. 이번 서화대전에서는 중국, 한국과 일본의 서예미술작가 350명이 참가해 다양한 서화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중국 경필서법가협회 장화경주석 등 중국 내지 북경, 길림, 흑룡강, 운남, 하남 등 성, 시와 향항특별구 및 대만성의 서예작가 497명이 론어경구(警句)작품을 대거 출품해 한층 더 관심을 자아냈다. 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 서예작품전시장 일각. 이번 대전은 론어비림박물관 및 론어대학원대학교 설립에 힘을 싣기 위해 마련됐다. 앞서 중국(대만 포함), 한국, 일본의 석학들과 예술가들은 21세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사고의 구현과 인류정신사의 보배인 론어를 현대에 되살리고 리기주의와 배금사상을 배척하자는 취지에서, 후학들에게 론어의 정신과 학문을 체계적으로 전할 공간으로 비림박물관과 론어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본 서화대전 발기자의 한사람인 한국비림원(리사장 허유)에 따르면 론어비림박물관과 론어대학원대학교는 한국상지학원 설립자인 김문기원로가 기증하는 10만㎡ 부지에 조성될것이라 한다. 이에 따라 이번 전시회는 론어배움터 마련이라는 동아시아 학계 및 예술계의 오랜 바람이 이뤄지는 출발점이 될것으로 전망되고있다. 공자동상제막식은 4월19일 오전 김문기원로의 소유지인 서울 강북구 우이동 234-2번지에서 치러졌다. 공자동상은 향항공교(孔敎)학원의 탕은가(湯恩佳)원장이 기증했으며 탕원장내외가 이날 제막식에 참석했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234-2번지에 세워진 공자동상. 중•한수교 이전부터 중국과 각종 교류를 통해 비림문화의 력사성을 깊이 인식했던 한국비림원 허유리사장은 《중국 하남성 한원비림 등 중국의 비림문화에 크게 영향받아 한국에서의 론어비림박물관 건립계획을 추진하게 됐다》면서 《론어비림에는 공자상을 사표(師表)로 모시고 론어를 돌에 새겨 전시하고 각종 행사장, 교육관, 수련관을 마련할 계획》이며 《론어비림이 완공되면 종교단체와 문화예술계와 협력하여 국내외 각종 행사를 유치하고 각국과 문화, 학술교류 등을 추진하겠다》고 표시했다. 허유 리사장은 또 《이미 세계적인 론어비림 성지(聖地) 건립을 위해 한•중•일 전각자 1,000여명이 성지조성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허유리사장과 오랜 친구인 중국경필서법협회 장경화주석은 《2013년 1월 18일 중국 북경에서 허유관장을 만나 공자동상은 향항공교학원 탕은가원장이 기증하셨으니 중국경필서협에서 론어를 작품화하여 주시면 한국에 론어비림과 론어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허유선생의 말을 듣고 리사회에서 결정한 뒤 전국 유명서예가 497인에게 부탁, 2013년 9월에 완성하여 허유관장한테 증품하였다》고 이번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경위를 소개했다. 허유 리사장은 현재 한국비림박물관장에 서예가와 력사가를 겸하고 중국의 한원(翰園) 비림 고문, 중국 상지(尙志)비림 명예관장, 중국 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등 비림문화 관련직외 세계문자 평화공원 추진위, 세계성경비림박물관 건립위, 공자론어박물관 건립위 리사장으로 보다 큰 꿈을 꾸고있는것으로 알려졌다.
91    오덕장로주의 전설 리동춘 댓글:  조회:5536  추천:4  2014-04-28
  태동하는 꿈   사람의 마음속에 항상 자리하는 꿈, 말하자면 집착이라 할 정도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아이템이나 목표가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꿈의 씨앗이라고 한다.   2005년 50세의 리동춘이 연변진출을 결심했을때 그의 가슴에서는 20대의 젊은이에 못지않은 꿈이 태동하고있었다. 그 꿈은 무엇이였을가?   연길시에서 약 60리 떨어져있는 산간계곡 의란향 련화동의 400헥타르 개활지에 한국의 한 기독교단체와 중국의 한 공산당원이 이끌어가는 조선족민간단체가 협력하여 생태과학의 시대를 선도하는 미래지향의 생태공동체사회를 조성해간다는 꿈이였다. 깊숙한 산속에 펼쳐갈 꿈속의 그림에는 록색산업단지, 생태민속촌이 있었고 생태주택과 별장단지, 로인시대에 대비한 실버타운이 있었으며 초대형 산중호수와 수상공원, 그리고 자연동물 서식지도 있었다.   아라비안나이트같은 허황한 공상인가? 하지만 사고하기를 즐기는 머리 하나와 젊은 패기와 미래로 향한 꿈 하나로 1997년 해체위기에 놓인 조선족촌들을 통합하여 조선족 신도시“백두산타운”을 일떠세움으로써 일약 중국 조선족사회의 밝은 별로 떠올랐던 이가 바로 당시 제9기 전국인대대표로 활약하던 흑룡강성 해림시 백두산그룹의 회장 리동춘이였음을 상기하면 이런 의문은 다소나마 풀릴것이였다.   당년, 북경주재 우리 민족의 엘리트들이 펼치는 강력한 유세에 못이겨 민족의 소임을 다하고자 친인척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창설한 백두산그룹을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결연히 고향을 떠나 혈혈단신 북경에 려장을 풀었던 리동춘.   동북삼성과 북경 사이를 누비며 조선족농촌지도자 한국연수를 수차례 조직하고 농촌진흥을 위한 전국범위의 심포지움도 개최하는 등 조선족 농촌의 후계지도자 양성에 땀동이를 쏟으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땅우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서있는것이 아니라 뜬구름우에 둥둥 실려가는듯한 석연치 못한 느낌에 남몰래 고민하고있던 차 리동춘은 뜻하지 않던 일로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연변진출로 인생의 궤적을 바꾸다   때인즉 한국두레공동체 김진홍목사가 당시 연길시정부로부터 심산유곡의 땅 400헥타르를 임대하여 추진하던 개발프로젝트가 연변 현지에 파견된 실무진의 불찰로 난항을 겪던중, 때마침 언론을 통해 리동춘의 사적을 접한 김목사가 리동춘을 비롯한 중국조선족사회에 땅을 기부해주는 방법으로 이 난국을 수습해볼 료량으로 리동춘에게 사업요청을 해왔던것이다.   “연변으로 들어가서 함께 사업을 해보심이 어떨가요?”   결국 리동춘은 김진홍목사로부터 모든 개발권한을 위임받고 우선 100헥타르의 땅을 인수받아 2005년 그 깊은 산속에다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를 설립하고 개발사업에 본격 착수하게 되는데 비록 기획중의 프로젝트가 남들 보기에 너무 거창했던건 사실이지만 실제 첫 합작사업으로 택한 품목은 지극히 현실적인 전통된장 생산이였던것이다.   그 품목선택의 리면에는 혹 리동춘의 햇내기적 기억이 깔려있었을지도 모른다.   1955년 흑룡강성 해림시 한 농사군 집안 7남매중 셋째로 태여난 리동춘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소학교시절 갑자기 알지 못할 원인으로 페결핵과 결핵성 륵막염에다 또 한쪽 다리가 쫄아붙는 이상한 병까지 덮쳐 다들 그를 얼마 못살고 죽는다고 했었다.   페결핵은 전염이 되는 병이라 그는 메주덩이를 가득 달아맨 두 간벽사이의 어두운 골방에 자기를 가두어넣고 진동하는 메주냄새와 씨름하며 어머니가 만들어준 메주가루를 일년 넘게 먹으며 버텼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삶의 의욕이 생겨나면서 그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시작한다. 문제의 다리를 어린 동생들더러 꽁꽁 묶어 단단히 붙잡게 한다음 자체로 수십방의 쑥뜸을 뜨면서 이를 앙다물고 일어서는 연습에 매달린다. 두다리를 와들와들 떨면서라도 기적적으로 자리를 차고 일어설수 있게 되자 그는 한술 더 떠 겨릅대같이 마른 다리로 아버지가 신던 무거운 구식군용구두를 끌고 비칠거리며 매일 한시간씩 마을둘레를 철벅거리군 했다.   이렇게 하기를 일년 여, 그는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특유의 인내력과 위기극복의 지도력으로 스물한살에 공청단 서기를 하고 서른살에는 신합촌의 당총지서기로 되여 촌기업 백두산그룹을 일떠세운다.   혼신을 던져 일하는 그의 의지를 떠보기라도 하듯 위기가 또 한번 그를 시험대에 올린다. 40대 초반 몸속 위장에 종양 다섯개가 생겨서 대수술을 받게 되는데, 그러나 민간처방대로 날된장을 밥먹듯 먹으면서 위장을 씻어준덕에 종당에는 무리없이 이승에 남겨진다. 두번에 걸쳐 살아남은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그는 된장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저도 모르게 가득 차오른다고 한다.   오뉴월에 된서리야 내리든 말든   한데 오뉴월에 된서리라더니 김진홍목사가 리동춘사장을 협조하라고 현지에 파견한 일군이 리동춘이 비 기독교인이라는 리유 하나로 협조는커녕 오히려 김진홍 목사와 리동춘이 제정하여 추진중인 사업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훼방을 놓을 줄이야.   된장합작공장건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마당대문을 닫아걸고 들어가지 못하게 저지하는가 하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경찰에 신고하고 쩍하면 연길시와 자치주정부에 찾아다니면서 리동춘이 저들의 기업전체를 빼앗으려 한다고 고발하는 통에 리동춘은 수년간 파출소로부터 공안국 안전국 당기률검사위 등에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은 일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김진홍목사가 리동춘에게 기부한 100헥타르의 땅도 기부전에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린터였다. 공장도 땅도 없어져 아주 거지신세가 된것이다. 불행중 다행이랄가 김진홍목사는 동료들 앞에서 “리동춘은 우리가 필요해서 모셔온 분인데 그를 이런 곤경에 처하게 하여 너무도 안타깝다”면서 림시공장을 짓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도록 한화 2,000만원을 지원해주어 그나마 엉덩이를 들여놓고 된장생산은 할수 있게 됐다.   그야말로 힘든 나날의 연속이였다. 그러나 암만 역경에 처해도 굴할줄 모르는 리동춘은 끈질긴 성미와 함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능력을 가진 사나이였다.   “합작이 안되면 우리 단독으로라도 하자! 크게 할수 없으면 작게라도 하자!”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과 끈기있는 도전정신으로 기운을 추스르며 자그마한 집에서 된장 개발과 생산을 견지하는데, 고마웁게도 민들레마을 전통된장을 알아주는 연변소비자들로부터 주문이 꽤 자주 들어오는 편이였다. 회사의 녀직원을 시켜 뻐스를 타고 집집이 배달을 다니게 하면서 얼마 안되는 수입으로 연명을 해오던 일을 리동춘은 가끔 옛말처럼 외우군 한다.   된장의“오덕”문화, 우리 조선족은 된장을 많이 닮아있다   어려운 와중에도 해마다 전통된장축제를 치르면서 관련연구를 지속해오는 가운데 “장인합일 오덕문화(酱人合一五德文化)”의 리념을 확고히 수립하게 되며 아울러 그는 개량된장이 아닌 전통된장문화를 끝까지 지켜내기로 작심한다.   그의“오덕문화론”에 따르면, 된장은 령성(靈性)이 스며있는 식품인데 그 령성인즉 “5덕”이라는 것, 요컨대 다른 음식속에 섞여도 자기의 맛을 잃지 않는 화이부동 본성고수(和而不同 本性固守)의 단심(丹心)문화, 다른 음식과 잘 조화하면서 자기 맛을 내는 구동존이 관후포용(求同存異 寬厚包容)의 화심(和心)문화, 매운맛을 부드럽게 해주는 렬성순화 화목공존(烈性淳化 和睦共存)의 선심(善心)문화, 기름기와 비린내를 제거하는 거성제유 렴결봉공(驅腥除油 廉潔奉公)의 불심(佛心)문화, 오래 두어도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기능으로 승화하는 항구불변 송백지조(恒久不變 松柏志操)의 항심(恒心)문화! 이것이란다.   이 “오덕”은 우리 중국조선족의 특성과 너무 많이 닮아있다고 한다.“우리 조선족은 150년이나 중국속에서 다른 민족과 어울리면서 살아왔지만 종래로 자기의 문화를 잃은적이 없습니다! ”이런 “오덕”이 있기에 우리 조선족은 자기의 전통문화를 지키며 중국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민족으로 꿋꿋이 살아올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템은 오아시스, 장로주 일거에 국가급브랜드로   “된장문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생태된장 개발의 큰 꿈이 있었기에 2008년의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의 창설과 그 이듬해 “민들레표”전통된장 무형문화재의 출원 등록이 비로소 가능했음은 그 누구라도 짐작할수 있을터이다. 전통된장의 성, 자치주“무형문화재”등록은 기실 된장술의 탄생을 예고한 전주곡이였다.   한차례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하였던 조선의 한 과학자가 우리민족의 음식중에서 두가지 식품이 오래 두어도 영원히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맛과 기능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발효식품인 전통된장과 술이며 이 두가지를 결합시키면 세계적 브랜드창출도 가능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순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 된 리동춘은 “바로 이거야!”하며 두 손벽을 짝!소리나게 마주쳤다. 연구 실험 생산 성공의 연결고리는 이음새가 탄탄하고 얼음에 박밀듯 거침이 없었다.“오덕(悟德)”장로주 발명특허를 출원한게 어제같은데 어느새 시중 소비자들 속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면서 판매량을 10만 상자에 훌쩍 끌어올리고 두만강지역 국제투자무역박람회에서 국내외 여러 회사와 무려 3000만원에 달하는 판매계약까지 체결했으니 리동춘 자신마저 혀가 내둘릴 지경이였다.   2012년 5월 국가급간행물《중국브랜드》잡지사와 민들레의 전략합작파트너관계가 이루어지고 "오덕표"장로주는 일약 국가급브랜드로 승격했다. 이 소식에 접한 상해로마방(上海老磨坊) 그룹의 보스 오가빈은 즉시 불원천리하고 연길로 날아왔다. 공장과 기지를 며칠동안 깐깐히 돌아보면서 오가빈은 거대한 중국의 수천년 술양조력사를 바꾼 이가 어찌하여 중국의 동북변강 오지에서 나올수밖에 없었는지 심사숙고해보지 않을수가 없었다 한다.   어쨌거나 장로주에 대한 그들의 칭송은 한결같았다. 술과 된장의 융합, 이는 수천년 양주리념의 돌파이고 술에 영양가를 부여한것 역시 수천년 양주공예의 돌파라는 것. 술을 마시면서도 숙취의 고통을 받지 않고 오히려 영양을 흡취할수 있음은 그 자체가 일대기적이라는 것.“오덕표”장로주의 출현으로 중국의 무숙취 배갈생산의 새 기원이 펼쳐졌다는 것.     무지개 같은 전설이나 진배없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던 리동춘이였다.   이어지는 된장꿈   된장술과 민들레술, 블루베리(蓝莓)술 등 계렬영양형“장로주”개발에 이어 연변의 지방특산물들인 사과배와 복분자로 사과배된장술, 복분자된장술 등 계렬상품도 개발해 출시한 리동춘은 올해의 된장축제행사는 여러 형제민족이 공동히 참여하는 “민속전통주축제”로 한다는 발상이다.   사과배된장술, 도라지된장술, 더덕된장술, 홍경천된장술...어느 술이든 된장과 만나면 기이한 변화가 일어난다니, 얼마나 신기한가...동북아의 “노란 자위”황금의 삼각주인 연변땅에 꿈씨를 심고 싶다는 리동춘, 이제 록음이 우거진 연변대지에 보다 시원한 미래가 펼쳐지려나보다.※   2014년 제1기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90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댓글:  조회:5802  추천:19  2014-02-08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문학평론가 최삼룡선생을 만나다       서재의 풍경   일전 최삼룡평론가 댁으로 찾아갔던 필자는 방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었다. 서재 한칸은 물론 세벽이 책으로 차넘쳤고 큰 객실 한쪽 벽은 서가로 되였으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공간 역시 서가로 돼있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서재에 다 들이지 못한 책들은 아직 창고에 박스채로 그냥 쌓여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책이 곧 재부다.   서재. 벽을 빙 둘러싸고 방바닥으로부터 천정까지 촘촘히 꽂혀있는 책들, 서재와 객실 창문 가까이에 놓여있는 두대의 컴퓨터 그리고 테이블과 문턱 혹은 구들 복판에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잡지와 신문과 글의 초고를 타자한 종이들, 원고지 갈피갈피에 정성껏 가위질하여 풀로 붙인 옛 자료들과 가쯘하게 묶은 옛 자료 복사본들―《싹트는 大地》,《滿洲詩人集》,《滿洲朝鮮詩人輯》,《滿洲朝鮮文藝選》,《北鄕》,《半島史話와 樂土滿洲》, 《颱風》,《北陸의 敍情》등등, 그중 복사해온 《滿鮮日報(만선일보)》복사본은 아예 통째로 쌓여있다. 최삼룡선생의 서재는 말그대로 서산문해(書山文海)다.   지금 최삼룡선생의 서재에는 사전류만 해도 100여종, 중국의 여느 도서관이나 문학가들에게서 찾아볼수 없는 귀중한 사전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인 작가, 시인들 례컨대 김학철이면 김학철, 조룡남이면 조룡남, 그들의 대표작품집을 포함해 거의 없는것이 없다.   현장평론가, 문학사가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 겸《문학과 예술》주필로 재직할 당시 최삼룡선생은 조선족문단에서 왕성한 정력으로 현장평론가로서의 평론활동에 종사했다. 특히 작가들로부터 탈고하는 원고를 놓고 평론해달라는 청탁이 자주 온다. 고 김성휘시인이 일찍 1980년대에 1만 5000행이 되는 장편서사시 《사랑이 무엇이길래》를 투고전에 보내왔을 때에도, 고 김운룡소설가가 100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광야의 아리랑》을 투고전에 보내왔을 때에도 최선생은 작품을 읽은후 자기의 견해를 솔직하게 밝혀 수정건의를 했고 평론도 써서 책과 함께 발표했다.   문학평론에 있어 그는 다산작가이다. 금년(2013년)에 들어와서도 《장백산》 잡지에 3편, 《도라지》 잡지에 4편,《연변문학》 잡지에 2편,《송화강》 잡지에 3편,《예술세계》잡지에 1편, 《길림신문》에 1편의 평론을 게재했고 그 외 여러가지 학술모임에서 발표했거나 이미 편집부에 교부되여 발표를 대기중인 평문, 론문이 4~5편 된다.   “평론이란 워낙 시끄러운 일로 욕먹기를 밥먹듯 한다”고 최선생은 말한다. 개중에는 “청탁평론”이나 “어용평론”이 많아서 평론가로서의 이미지가 초라할뿐만 아니라 “평가를 높게 하나 낮게 하나 잘하나 못하나 덮어놓고 욕”이라는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워낙 좀 부실”하여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축”이여서 뒤에서 그 누가 잡아 죽이려 해도 그는 “남이야 뭐라든 항상 솔직한 마음으로 사람이나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애를 쓴다”고 자평한다. 례를 들어 2012년 자치주성립 6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대형 련속드라마 《장백산기슭의 나의 집(長白山下我的家)》이 한창 방송중에 있을 때 한 신문사에서 평론을 해달라는 간청이 와서 일주일 밤을 새우면서 써냈다. 그 평론은 간담회에서 발표되고 신문에도 게재되고 또 한어로 번역되여 나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반향이 별로였다. 정부에서 거금을 들여 제작했다는 프로그램에 부동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데다 글자체가 “청탁평론”이여서 말썽이 있으리라는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작품을 함부로 비판할수도 없는 상황이고 또한 문제점을 제출하여도 통과될리 만무하거나 무작정 삭제가 불가피한 현실이라 최선생은 그저 허허 웃으면서 사는것이 이러할진저 하고 말았다.   당대 조선족문학 현장평론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문학연구에서도 최삼룡선생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쌓았다. 1990년 8월 일본 오사카정법대학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에서 발표한《재래설화변이고》로부터 1991년 고려대학 민족무화연구소에서 발표한 《백두산 설화의 의미》, 《송화강》잡지에 1년 련재한 《신민요연구》, 그리고 《구경전(狗耕田)형 민담의 비교연구》,《방리득보(放鯉得寶)형 민담연구》, 금년 8월 황구연연구회에서 발표한 론문 《황구연의 민담에서 사랑과 결혼》등 20여만자가 된다. 그는 “민간문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의식과 신앙들이 깔려있어 참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최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사 연구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조선족의 첫 문학사로 조성일, 권철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가 1990년에 중국과 한국에서 각기 출판되였는데 이 책에서 최삼룡선생은 1966년부터 1986년까지 20년간의 중국 조선족문학사 부분을 집필했다. 퇴직후 21세기 들어 오상순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2005년 출판)에서는 해방후의 시문학과 산문문학의 집필을 담당하였고 북경대학 조선문학연구소에서 편찬한《중국조선족문학사》(2004년 출판)에서는 중국 조선족 시문학사, 산문문학사 부분을 맡았다. 현재 최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지도》라고 제목한 자기의 문학사를 집필중이다.   해방전 자료 발굴, 정리   1999년 4월 정년퇴직한 최삼룡선생은 주요한 정력과 시간을 해방전 조선족 문학자료의 발굴과 연구에 바치고있는데 그가 여기에 발을 들여놓은것은 정년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는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자료 전집》편찬진에 참가하여서부터이다.   그가 처음 편찬을 맡은 책은 친일문학권이였다. 최선생은 자기의 서재와 연변대학도서관을 뒤집듯이 들추어가며 2002년 책을 편찬해내고야 말았는데 사회적반향이 괜찮았다.   이 책의 출판은 최선생이 해방전 조선족문학연구에 보다 깊이 개입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그해 여름 한국정신문화원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기회에 그는 꼬박 9일간 연세대 귀중도서관과 국회도선관에 들어가 자료발굴작업을 했다. 거기서 최선생은 친일문학자료를 많이 찾아냈을뿐아니라 해방전 만주조선인 문학작품도 숱해 접했다. 특히 시와 수필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상태임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원래 권철교수 등은 컴퓨터작업이 없을 때라 육필작업만 가능했음으로 대표적인 작가들의 대표작외에 대부분 자료들을 베껴낼수가 없었던것이다.   최삼룡선생은 남들이 다 수확한 텅 빈 들에서 홀로 재료를 발굴하는 자기의 작업을 "이삭줍기"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이삭줍기"는 말이 헐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스스로 경비를 팔아 려관을 잡고 교통비를 해결하고 도서관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작업을 하곤 했는데 어떤 날에는 복사료만 해도 한화로 10만원 나갔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이렇게  하기를 5~6차례, 그래도 리상규선생 같은 한국의 고마운 이들이 숙박료도 대주고 자가용으로 도서관문전까지 데려다주군 하여서 경제적으로 큰 무리가 없었다면서 항상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있다고 한다.   한국 도서관들에 보관되여 있는 신문, 잡지가 이미 낡았고 복사해온 글자들이 선명하지 않은데다가 전부 우리 글과 한자(正字 즉 번체자)가 혼용된 자료라 정리시 여러 모로 품이 많이 들었지만 최삼룡선생은 자료를 인용할 때 문헌의 가치에 손색이 갈세라 한자와 철자법과 띄여쓰기를 드팀없이 원본에 따랐다. 때로는 글자 하나를 복원하는데 하루가 걸렸고 시 한수를 복원하는데 사흘씩 걸렸다. 그래도 복원을 못하면 출판에 교부할 때 부득불 ◯이란 기호를 대용하는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삭줍기”에 기초하여 2003년 《세월에 묻힌 겨레의 기억》이라는 총제목밑에 《강경애와 간도》등 글을 《연변문학》에 1년간 12기에 거쳐 련재하였으며 2005년에는 《문학과 예술》잡지에 《문학기행》이라는 표제로 6편 련재하였다. 그리고 연변대학 조선(한국)어문학연구소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행한 해방전문학총서에 《현대시집성》,《항일문학》,《해방전민요》《종합산문(상, 하)》등 9권을 륙속 출판하였다.   2006년 3월 한국의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에서 최삼룡선생에게 만주조선인친일문학연구에 대한 정식요청이 왔다. 결과 반년간의 품을 들여 집필한 론문《재만조선인친일문학연구》가 유관자료집에 게재되였고 이 론문은 후에 한국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참고도서”로 삼았다는 감사의 말씀을 전해받았다. 이 론문 집필중 자연스럽게 묶어진《만주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은 2008년 보고사에 의해 출판되였고 2009년에는 한국문화체육부의 《2009년 대한민국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2010년 한국 보고사에서 또 최삼룡, 허경진 편찬《만주기행문》을 펴냈다. 이 책의 편찬에 동참한 한국 연세대 허경진교수는 이 책의 머리글에서 최삼룡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문학대계 30권을 편찬하면서 연변의 학자 여러분을 알게 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학자가 바로 최삼룡선생이였다. 그분은《조국조선민족문학대계》30권가운데 5권을 책임 편찬하였는데 대부분 본인이 여러해동안 수집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편찬하였다. 나는 중국조선민족문학학술대회를 5년째 주관했는데 해마다 그분의 열정적인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함께 책을 쓰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민족문학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해박한 지식, 방대한 자료 그리고 컴퓨터를 련상케하는 기억력이 부러웠다.”(최삼룡, 허경진 편찬 《만주기행문》보고사 2010년 5월 제1판 머리말에서)   2012년 민족출판사에서 최삼룡이 편찬한 《해방전아동문학(상, 하)》을 출간하였으며 이제 《해방전기행문》, 《해방전평론집》등 6권이 2013년 년내에 륙속 출간된다고 한다.   최선생은 암만 둘러봐도 20세기 우리의 문학을 수집, 정리하는 일은 자신들 세대 문인들이 해야 할 일이란다. 그래서 최선생은 계속 해방전 조선족문학에 관심을 두면서 수필집《만주조선문예선(滿洲朝鮮文藝選)》, 장편기행문 《백두산행기(白頭山行記)》, 력사문헌 《강북일기(江北日記)》,《간도개척사(間島開拓史)》 등 중국조선족력사문화와 관계되는 희귀본도서를 수집하느라 숱한 시간과 정력, 재력을 소모하였단다. 여러가지 여건의 미비로 이 책들의 출판은 아직 묘연(渺然)하지만 그는 볕을 볼날이 어느때든 반드시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문학과 인생   20세기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수집, 연구, 편찬 작업을 지대한 흥취와 열정을 갖고 열심히 했고 그속에서 자기가 몰랐던 지난 시기 우리문화 공부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최선생은 그 과정을 일컬어 문학과 인생을 함께 향수하는 과정이였다고 갈파한다.   말썽 많은 해방전 만주조선인 친일문학을 연구하면서 최삼룡선생은 세월의 먼지속에 깊숙히 파묻힌 재료를 적잖이 발굴했다. 이를테면 박팔양과 김영팔의 친일행적이 그 생동한 례로 된다. 박팔양은 만주에 건너온 다음 어용신문사에서 부장으로 일했으며 만주협회총부 리사로도 있었는데 이는 해방전 만주 조선인의 정치직무에서 최고의 직위였다. 그리고 친일작품도 썼다. 김영팔은 만주에 온 다음 신경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있었고 협화회 문화부 부장으로 있기도 했으며 통화협화회에 임직하기도 했다. 그는 만주건국 10주년 기념으로 일본 욱일훈장을 수여받고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세웠던 친일 주구 김동한을 기념하는 장막연극 《김동한》대본을 창작하고 공연에서 연출 겸 배우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반동연극의 작자가 바로 김영팔이라는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최선생이 밝혀냈다. 그리고 1941년에 《만선일보》 는 만주 조선문인들에게《大東亞戰爭과 文人들의 覺悟》라는 제목의 글을 쓸것을 강요하였는데 당시 이에 호응하여 만주 조선문인들이 쓴 같은 제목의 글 11편을 최삼룡선생은 모조리 발굴해냈다.   최삼룡선생은 이러한 재료의 발굴 연구 편찬과정은 참으로 문학과 인생의 참맛을 고루 맛보는 과정이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문학과 인생을 덤으로 누린 행운아라고 한다.   김학철문학 연구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중국 조선족문학의 정상이다.《격정시대》를 비롯해 그의 장, 중, 단편소설들은 20세기 우리 중국 조선족문학의 최고봉이며 그의 잡문, 수필, 회상기, 전기 등은 우리 중국 조선족 산문문학을 형태적으로 정착시키는데 절대적인 작용을 했다. 특히 그의 문학의 비판리성은 중국 조선족뿐만 아니라 20세기 중국 전체 지식인들을 견주어 봐도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김학철선생에 대한 최삼룡선생의 평가이다.   이미 김학철문학에 대한 글을 15만자 이상 발표했지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고 갈라야 할 시비가 너무 많아 잠시 중단했다고 한다. 이제 가장 민감한 부분에 대한 집필에 손을 대야 하겠는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한다.   “《김학철론》으로 평론가로서의 내 인생의 마침표를 찍고싶다. 그러기에 잘 쓰고싶고 따라서 지금 함부로 쓰지를 못하고있다.”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평론가 최선생의 좌우명이다. 오늘도 최삼룡선생은 고래희를 훨씬 넘긴 년세임에도 지칠줄 모르고 매일 10여시간씩 컴퓨터앞에서 꾸준히 작업해나가고 있다.   2013년 제6기  
89    사진시대 촬영공부론 댓글:  조회:6895  추천:25  2013-01-26
사진시대 촬영공부론   오늘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문자로 표현되기에 앞서 먼저 사진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되고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가? 지난 20세기를 활자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21세기를 단연 사진의 시대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모든 영상물도 기실 사진의 연장에 다름 아니다. 카메라의 세대교체도 그 속도가 절대 컴퓨터에 못지않다. 디지털카메라의 폭발적인 확산으로 원래 사진기자나 사진예술가의 전유물이였던 사진촬영은 오늘 대중생활의 일부, 놀이의 하나로 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촬영전문가들의 역할이 박탈당한것은 아니다. 금년봄 어느 촬영동호회의 일원으로 되어 촬영을 배우면서 절실히 느낀것이 이점이다. 선경대의 가을단풍이며 “9.3”명절의 연길야경이며 맹령사과절의 풍년무며 봄물먹은 평강벌이며 백년부락의 재봉어머니며를 만나며 카메라로 한폭한폭의 사진을 담아내는 가운데 나는 전문기술을 소유한 전문촬영가들의 지도와 인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새삼 통감하게 되였다.   그들은 리론과 실천경험을 겸비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보류없이 타인에게 전수한다. 다년간 연변땅을 메주밟듯 해온 그들은 동호회원들의 촬영실기를 위해 시기, 날씨와 안전 등을 고려한 려정을 짜느라 로심초사하며 새로운 행선지를 개척하기 위해 사전답사를 떠나기도 한다. 동호회의 빈번한 활동에 빠짐없이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항상 그들의 로고에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한다.   동호회와 함께 하는 시간이 나에겐 참으로 소중하다. 함께하는 행정에 즐거움이 가득할뿐 아니라 촬영을 필한 뒤에도 그 즐거움이 그냥 이어지니 말이다. 사진을 편집하고 저장하고 발표하고 교류하는 것 모두가 즐거움의 연장 그 자체다.   고백해야 할 사항이 있다. 나의 촬영경력이 꽤나 길어 적으만치 30여년이라는 것. “갈매기(海鷗)”표 카메라로 시작한 나의 촬영은 그 초기 사진인화지로 직접 사진을 씻어서 발표할수 있었을만큼 조금은 “전업적”이였던 적도 있었고 신문에 적지 않은 량의 보도사진을  발표해왔던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촬영입문의 초보자”라고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금년들어 사진배우기를 새로 시작하기 직전까지 디지털카메라의 “수동모드”를 전혀 쓸 줄 몰랐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수동모드”를 모른다는것은 내가 그때까지 “전자동모드”로 사진을 찍어왔다는 것인데, 그것은 카메라셔터를 누를 줄만 알면 나머지는 모두 기계가 알아서 해준다는 의미다. 우수한 사진에는 사상이 살아숨쉰다고 하는데 기계가 사진에 사상을 불어넣는 작업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나절로도 이건 아니다 싶어 큰 마음먹고 좀 자신을 개변시켜볼 양으로 “전자동은 너무 그렇고 반자동을 좀...”라고 했다.   이때 한 전문가 친구가 권고의 말 한마디를 했다. “실패를 미리 많이 맛보더라도 처음부터 완전수동에 집착하라. 그것이 빠른 길이다.”   “완전수동모드(M)”로 찍은 첫 몇장의 사진이 모조리 캄캄칠야 아니면 새하얀 백지가 되여나왔다. 나의 촬영지식이 완전 “제로상태”임이 백일하에 드러나버린것이다. 그렇게 나의 “초짜의 입문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캄캄칠야”와 “백지”의 원인을 찾아내는 작업은 뜻밖에도 지극히 간단했다. 빛을 너무 적게 주면 사진이 백지가 되고 빛을 너무 많이 주면 새까맣게 되는것이다. 그러니까 빛을 너무 많이 주었으면 덜어내서 적게 주면 된다는 얘기다. 알고보면 너무나도 간단한데 우리는 흔히 입문의 그 문턱을 넘기를 거부한다. 조리개 값과 셔터 속도, iso 감광도, 그리고 해상도...몇개 안되는 개념의 문턱을 그토록 넘기 어려워한다는 말이다. 포토샵공부 역시 그렇다.    사진을 배워 뭘 하냐? 가끔 만나는 물음. 아주 단순하지만 록록치는 않은 물음이다. 나의 경우 보통 “취미로 하는거야”라고 짤막히 대답하지만, 평소 촬영을 재미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인지라 “재미가 없다면 내가 왜 이딴짓을 하겠어? 재직때는 하고 싶어도 못했거든.” 이러기도 하지만, 취미가 과연 전부인가 하는 의혹을 가질 때도 있다.   그러면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취미로 촬영을 한다.” 그래. 취미로 하는 수가 있지. “배운다는건 항상 즐거운 일이잖아?” 그래, 컴 앞에서 해방되여 야외로 나가고 사람들과 만나고 건강을 챙기고 스트레스도 풀고 모르는것을 배워익힌다는 모종의 획득감.    그러나 그것이 목적 그 자체일가? 젓가락질이 재미있어서 료리를 먹는다? 삽질이 재미나서 과일나무를 떠다 옮긴다? 분명 석연치 않은 구석이다. 그럼 낚시질은? 많은 낚시군들의 낚시질은 그 취미가 잡아올린 고기를 료리해 먹는데 있지 않고 고기를 낚아올리는 그 순간의 자극의 짜릿함에 있다고들 하는데.   그러나 낚시질과 촬영은 성격이 판판 다른 활동일터이다. 낚시는 생계 혹은 쾌감획득을 목적으로 생명을 가진 수중동물을 “사기적수법”으로 유혹해서 잡아올리는 행위인 반면에 촬영, 례컨대 예술촬영은 순간순간의 빛으로 예술이미지를 그려내는 창조적 예술활동이라고 할수있겠다. 그래서 촬영을 “찰나의 미학”이라고도 하며 사진은 “붓대신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도 한다. 자치주창립 60주년을 기념하여 연길에서는 부르하통강반에서 꽃불축제를 벌렸었다. 하늘에 불꽃을 쏘아올려 만든, 순간에 폭발했다 순간에 사라지는 아름다운 화폭을 그 순간 빛의 원리로 사진속에 잡아넣어 영구화시키는 촬영자들의 창작, 그것은 참으로 고상한 예술창조행위라 하겠다. 그런 우수한 사진들을 그저 취미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니까 찍은 사진이라고 할수 있을가? “취미론”, 어찌 보면 그것은 자신을 취미란 작은 울타리에 가두어넣는 “생각의 조각”일수도 있다. 그런 “생각의 조각”은 촬영활동을 예술창조의 행위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목표설정에 반기를 들도록 유혹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취미론”으로부터의 탈출을 꾀하면 더 넓은 공간이 보일수도 있을것이다.   예술창작의 동기가 없이 놀음으로 하는 촬영은 단순 취미에 귀결시켜도 무방하겠으나 창작을 목적으로 한 촬영활동은 그렇지 않다고 봐야겠다. 모종의 사상을 사진을 통하여 표달하려는 작가, 암만 아마추어작가라 해도 이런 목표의 설정은 가능할것이며 그것은 의미있는 작업일터이다. 사상이 있는 사진, 아마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좋은 사진이 아닐가? 이런 의미에서는 창작사상의 깊이를 벼리는 작업이 필수일 것이다.   자신의 삶의 근저에서 괴여나온 생동한 사상을 순간의 빛에 고착된 피사체이미지를 통해 표현하는 사진, 그런 사진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많이 시도돼야 할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진의 특정경향을 따르면서 새로운 표현양식을 보여주는 광고 등 사진작품들이 시각적 충격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작품들은 보는 이들의 감성을 깊이 자극하고 시선을 오래동안 잡아두는 힘을 가지고있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전통적인 사진 표현양식의 매력이 아주 색바래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디지털기술과 사진의 만남으로 사진을 비롯한 시각예술의 령역이 무한대로 확장된 오늘 시각예술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도 가급적 다양해져야 할것이다.   2012년 제6기
88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댓글:  조회:9998  추천:33  2011-11-12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이는 시인 남영전의 유명한 명제이다. 이 말은 민족이 혈통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혈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같은 민족이라 해서 혈통이 반드시 다 같은 것이 아니고 또 민족이 다르다 해서 혈통이 반드시 다른 건 아니라는 것이다. 고로 남영전은 이렇게 말한다. 민간에서 말하다시피 500년 전 우리는 다 한집식구다. 500년 전에 한집 식구가 아니라 해도 수 천 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긍정코 한집 식구다.   중화의 56개 형제민족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땅위에서 살아오면서 광활하고 부요한 땅을 함께 개척해왔다. 夏, 商, 周에서 秦汉에 이르기까지 한족의 선민 화족과 하족이 황하유역을 개발할 때 여러 소수민족의 선민들도 동시에 주변의 광대한 지역을 개발하였다. 동북만 보아도 우리 조선민족의 선민들인 부여, 고구려, 몽골민족의 선민들인 동호, 다다, 만족의 선민들인 숙신, 읍루 등 부족집단들은 모두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건립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지난 날 우리는 민족을 담론할 때 흔히 혈통에 대해 거론하기를 즐겨했다. 한 민족의 성원들은 왕왕 본 민족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같은 것이며 아울러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믿어마지않았다. 하지만 실상 민족이란 “실제로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한국 고려대학 정호영 교수:《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역사적, 이론적 접근》)인 것이다. 엄격한 과학적 의의에서 말하면 우리나라 현존 민족이나 역사상 존재했던 소유의 민족은 그 혈통이 아주 순수한 것이 아니었으며 모두다 정도부동하게 부동한 혈통이 서로 섞이는 과정을 겪어왔었다. 조선민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 건국대의 신룡복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민족은 35개 이상의 부동한 씨족, 부족이 융합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상고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씨족은 혈연관계를 유대로 결성된 인간군체이고 부락은 혈연관계를 토대로 구성된 씨족군체이며 부락연맹은 혈연관계를 매개로 공동이익을 위해 형성된 여러 개의 부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씨족, 부락, 부락연맹은 혈연관계를 특징으로 하고 있고, 민족은 혈연관계를 초월해서 역사淵源, 생산방식, 언어, 문화 풍속습관 및 심리적동질감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혈통의 사람들도 기나 긴 역사 시기 복잡한 이동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민족으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같은 도리로 원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던 부동한 혈통의 사람들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한 지역에 몰리고 장기간 함께 생활함으로 해서 한 민족으로 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역사연원, 생산방식, 언어, 문화 풍속습관 및 심리적동질감 이런 것은 다 문화적 개념이다. 이처럼 수많은 혈통집단이 부동한 민족으로 형성되는 데는 문화적 요소가 작용하는 것이지 혈통자체가 결정적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남영전은《토템문화와 조화세계》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시조 南敏에 대해 말한바 있다. 남민은 당 왕조 때의 凤阳府 汝南사람으로서 당나라 천보 14년(서기 755년)에 按廉使의 사신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신라국에 표착, 그곳에 자리 잡게 되었는데 남씨가족의 시조로 되었다. 그의 이와 같은 예는 기실 보기 드문 것이 아니다.   조선민족과 漢민족은 같은 성씨를 다수 쓰고 있는데, 설사 김씨, 리씨, 최씨 등 짜장 조선민족 성씨로 보여지는 성씨도 더러 중원이나 그 주변 지역에서 들어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박씨는 그야말로 조선민족의 원색적인 성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의 하북, 료녕 등 성에 박씨가 수천 명 살고 있는데 그들의 민족성분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이나 만족이다. 그들은 모두 청나라 때 조선이민의 후예들이다. 중화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나라 있는 여러 민족은 “네 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네가 있는 관계”인 것이다.    민족과 혈통에 대해서 기실 우리의 옛 성현들은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유가의 “华夷之辩”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공자는 춘추를 지어 이르되 “이적 입중국 하면 칙 중국지요 중국 입이적하면 칙 이적지 하니라(夷狄入中國,則中國之,中國入夷狄,則夷狄之)”라고 했다. 말하자면 동이나 북적 같은 중원주변의 민족이 중원지역에 들어와 화족이나 하족의 문화습속을 따르면 그들은 바로 화하족으로 되는 것이고 반대로 중원의 화족이나 하족이 주변지역에 들어가 그들의 문화습속을 익히게 되면 그들은 동이나 북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이족이냐 화하족이냐는 혈통에 따라 갈라지는 게 아니고 문화적인 구별에 의해 나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이 말은 그른데 없다. 여러 민족은 다 자신의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다. 문화의 구별이 없으면 민족의 구분도 없는 것이다. 56개 민족은 56가지 문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문화의 다름이 곧 문명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56개 문화는 상부상조하는 그런 관계인바 서로 보완하고 어울리면서 함께 빛을 내는 중화민족의 찬란한 대 문화를 형성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56가지 색다른 꽃이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면서 웅장하고 눈부신 연기를 펼치는 것과도 같다. 같은 종의 꽃이 저 앞산에 만개해도 기가 막히게 아름답겠지만 수십 종의 꽃들이 무덕무덕 저 동산에 만발한 모습도 과시 장관일 것이 아닌가!   새 중국이 탄생한 이래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화민족은 민족대단합의 깃발을 추켜들고 일심동체로 사회주의건설과 개혁개방사업을 추진하였으며 드높은 자부심으로 장려한 역사를 창조했다.   중화민족이 거대한 응집력을 과시할 수 있은 것은 중국공산당이란 이 견강한 영도핵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올바른 민족정책과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중화민족의 분복이자 자랑이다. 우리는 이를 소중히 여겨 손상이 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한족이 소수민족과 떨어질 수 없고 소수민족이 한족과 떨어질 수 없으며 여러 소수민족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오늘 날 이 이념은 이미 여러 민족인민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있으며 따라서 단결 분투하여 번영과 발전을 이룩하는 것은 이미 여러 민족인민의 공동한 추구로 되었다. 이는 중화민족이 자강불식의 정신으로 부단히 전진하는데 있어서의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구분된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다.” 남영전의 이 말은 참으로 쇳소리 나는 지론이다.   (2011년 7월 8일, 길림성문련, 성작가협회, 성사회과학원과 길림일   보그룹에서 공동개최한 남영전토템시연구토론회석상에서 한 발언) 【原 文】   民族是文化概念,而不是血统概念   朴文熙     诗人南永前有一句著名的命题叫“民族是文化概念,而不是血统概念”。这并不是说民族与血统无关,而是说民族不是以血统来区分的。比如朝鲜族,整个民族血统却未必都一样;再说我国56个兄弟民族,其血统也未必就不一样。所以南永前说:民间有个说法,500年前咱们是一家。如果500年前不是一家,再往回上溯几千年我们肯定是一家。   我们中华56个兄弟民族从遥远的古代起就劳动、生息、繁衍在我们祖国的土地上, 共同开发广阔、富饶的土地。从夏、商、周至秦汉时期,当汉族的先民华夏族开发黄河流域的时候,各少数民族的先民也同时开发了周围的广大地区。单说在东北,我们朝鲜族的祖先夫余、高句丽,蒙古族的先民东胡、鞑靼,满族的先民肃慎、挹娄等部族集团都为统一的多民族国家的建立作出了巨大的贡献。   通常人们讲民族的时候,都喜欢提到血统,过去,一个民族的每一个成员往往确信本民族成员身上都流着同样的血,而且都坚信“血浓于水”。其实,民族并不是具有同一血统的人群,而是“确信”他们具有同一血统的人群。从严格的科学意义上而言,我国现代的以及在历史上曾经存在过的所有民族,其血统都不是纯而又纯的,都曾经历过不同类型的融合。就拿朝鲜族来说,据韩国建国大学申福龙教授的研究,朝鲜民族是以35个以上不同氏族、部族融合而成的。   查一下上古史, 我们便可知道氏族是以血缘关系为纽带而结成的人们的共同体;部落是以血缘关系为基础而构成的氏族群体;部落联盟是以血缘关系为中介,为了共同的利益而形成的多个部落的联合体。就是说, 氏族、部落、部落联盟以血缘关系为特征, 而民族则超越血缘关系, 以历史渊源、生产方式、语言、文化、风俗习惯以及心理认同等为特征。虽是一个血统的人群,如经过相当长的历史时期复杂的移动过程,也就可以演化出多个民族;同理,原本在不同地域生活的不同血统的人群,因种种原因走到一起,在共同地域长期共同生活,那也就可以融合成一个民族。   南永前在一篇叫做《图腾文化与和谐世界》的论文里谈到自己的祖先,说他的始祖南敏就是唐朝凤阳府汝南人,唐天宝十四年(公元755年)以按廉使的使臣身份去日本返回途中遇上了台风飘泊到当时的新罗国定居,成为南氏家族的始祖。像他这样的例子其实并非罕见。朝汉两族姓氏多有相同,即使是金、李、崔等看起来十分地道的朝鲜族姓氏,其中的若干支也是来自汉族。朴氏当属是朝鲜族的原生姓氏,但如今河北、辽宁等省就有几千名朴氏分别是汉族和满族,而他们都是清朝时期朝鲜移民的后代。作为中华民族的成员,我国各民族是你中有我,我中有你的关系, 论血统是无法分得清楚的, 而且也没有必要分清楚的。   其实对于民族与血统这个问题,我们的古圣贤早已有了明确的认识。看儒家的“华夷之辩”,孔子老人家便作春秋曰:“夷狄入中国,则中国之,中国入夷狄,则夷狄之”,也就是说,夷狄到了中原地区,习用了华夏文化习俗,他们就成了华夏族,而中原华夏族如果进入了边远地区,习用了夷狄的文化习俗,他们就成为了夷狄,是夷狄还是华夏不在于血统,而在于所习用的文化,就是说华夷之辩不是血统上的区别而是文化上的差异。   孔夫子说的一点都没有错,各民族都有自己独特的文化。56个民族就意味着56种文化。然而,文化的不同,并不意味着文明的冲突。56个文化相辅相成、相得益彰、相映成趣,好似56个花朵争奇斗艳绽放异彩,形成了一个中华民族灿烂的大文化,这就大大胜过一花独放。   新中国诞生以来,由56个民族构成的中华民族始终展现出巨大的向心力、凝聚力,展现出无比的自信心、自豪感。多年来,各族人民高举民族大团结的伟大旗帜,和衷共济、和睦相处、和谐发展,携手推进社会主义建设和改革开放事业,谱写了中华民族自强不息、团结奋进的壮丽史诗。   中华民族之所以能够展现出如此巨大的向心力、凝聚力,这正是因为有了中国共产党这一坚强领导核心以及她所制定的光辉民族政策, 加上无比优越的中国特色社会主义制度。这是我们中华民族特有的福分,足以让我们引以为自豪,我们必须万分的珍视她,维护她。   今天,“汉族离不开少数民族、少数民族离不开汉族、各少数民族之间也相互离不开”的理念已经成为各族人民的自觉行动,共同团结奋斗、共同繁荣发展的主题已经成为各族人民的共同追求。这是中华民族自强不息、不断前进的力量源泉。   南永前“民族是以文化区分的,而不是以血统区分的,论血统各民族都是兄弟”这一句,真真切切、掷地有声。   (2011年7月8日在吉林省文联、省作协、省社科院和吉林日报报业集团联合主办的南永前图腾诗研讨会上的发言)
87    된장술의 탄생과 그 산고 댓글:  조회:10777  추천:28  2011-11-09
된장술의 탄생과 그 산고   --연변민들레마을과 연변두레마을 분쟁사건 조사실기     1. 술의 력사를 바꾼 오덕장로주   요즘 연변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태여난 된장술이 항간에 급속히 퍼지면서 크게 화제거리다.  된장이 갖고있는 영양물질과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할수 있는 기능들이 분명 된장술속에 녹아 들어가 출시 시작부터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고 술생산허가부문인 길림성기술감독국의 현장검사와 엄격한 검측을 거쳐 생산되고있으니말이다.   하다면 수천년 양주사상 콩에서 술을 걸러낸 전례가 워낙 없는데, 그래 연변민들레마을 리동춘회장을 비롯한 된장술 양조자 제씨들이 짜장 술의 수천년력사를 바꾸었다는 말인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 6월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의 주최하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사상 최초로 열린 “전통된장과 된장술의 영양학적 가치 발굴을 위한 학술세미나”에서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장로주의 탄생을 양주업계의 획기적인 혁명으로 일컫고 그 영양학적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으니 이는 필경 일대 경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흔히 좋은 결과가 쉽게 얻어지는것이 아니듯이 된장술 역시 잉태하여 고고성을 터칠 때까지 모진 산고를 동반했었다.   2. 한국목사와 중국기업인의 악수        연변민들레마을과 된장술의 탄생을 알아보자면 우선 그들의 오늘이 있도록 조건을 제공하여준 "연변두레마을"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   연변두레마을은 1997년, 한국 경기도 구리시 두레교회의 김진홍목사가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의란진 련화촌에 투자하여 설립한 한국독자 기업이다. 김진홍목사는 일찍 60년대 살길이 꽉 막힌 사회최하층 걸식자들을 이끌고 남양만이라는 곳에 새마을 생존터를 마련해주었던 전기적 인물이다. 그후 그는 이러한 공동체운동을 펼쳐나가기 위하여 한국 지리산자락에 "두레공동체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세계 여러나라에 공동체운동정신을 고양, 전파하는 사회적기업체들을 만들어 나갔었다.   당시 연변의 후한 투자유치정책으로 김진홍목사는 연길시 의란진 련화촌의 400헥타르(120 만 평)의 대지와 전체 마을을 50년의 기한으로 임대하게 되였다. 그러나 연변두레마을의 경영체제는 완벽한 기업경영시스템이 아닌 교회식 경영시스템, 말하자면 현장에 책임자를 파견한 뒤 경영보고만 듣고 결책하는 식의 원격조종 관리체계여서 실행초기부터 예상외의 문제점들을 많이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현장에 파견된 총경리가 교회식으로 일군들에게 새벽기도를 강요하는가 하면 탈북자를 수용하는 등 중국정책에 위배하는 일들을 골라가면서 저지르다보니 자연 지방 관련 당국의 주의를 불러일으키게 되였고 나중에는 책임자가 추방당하는 처벌까지 받게 되였다. 설상가상으로 보상금을 받고 련화촌을 떠났던 원주민들이 연변두레마을에 란입하여 소동을 부리는 바람에 마을경영에 큰 차질이 빚어질수밖에 없었다. 이에 김진홍목사앞에 시급하게 나선 특급과제는 신도들의 헌금으로 세운 연변두레마을을 어떻게 기사회생시키느냐였다. 김진홍목사가 해결책을 찾지 못해 밤잠도 설치던 그때 마침 리동춘씨가 등장했다.   리동춘은 흑룡강성 태생으로 개혁개방후 조선족농촌인구의 도시 및 해외진출로 농촌마을이 공동화되고 집체경제가 무너져나가는 형편에서 분산된 조선족농촌마을을 병합하여 집중촌을 건설함으로써 조선족농촌 재조합발전의 시대를 연 인물이였다. 언론보도를 통해 리동춘의 사적을 접한 김진홍은 연변두레마을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리동춘과 같은 원견, 능력과 지도력을 가진 현지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고 즉시 한국두레공동체운동본부의 동북아본부장인 임진철씨를 파견하여 리동춘과 접촉하도록 하였다.   당시 북경에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던 리동춘은 임진철교수가 일개 한국인으로써 조선족 농촌사회 해체위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대하여 경이롭게 생각하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뒤미처 2003년 1월 9일, 북경중앙대학 황유복교수를 대회장으로 모시고 그를 위시한 조선족사회지성인과 농촌간부들, 그리고 한국의 농업계인사들이 함께 하는 중국 최초의 조선족농촌발전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그번 대회를 계기로 리동춘은 새로운 인생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였다. 아울러 김진홍목사와 그의 동지들은 리동춘을 신임한 나머지 아예 리동춘을 권유하여 북경의 개인 사업체를 버리고 함께 연변두레마을을 건설하자고 거듭 제안해왔다. 그들의 끈질기고 진정어린 요청과 후한 투자조건, 그리고 자기가 추진하는 뜻과 비슷한 공동체운동의 비전에 마음이 동한 리동춘씨는 마침내 두레마을 건설에의 동참을 결의하게 되였다.   김진홍목사는 리동춘을 대표로하는 중국조선족발전기금회준비위원회(가칭)에 연변두레마을의 땅 100헥타르를 무상기증하기로 결정하고 2005년 5월 12일 한국 국회의사당 소회의실에서 기증식을 성대하게 치렀으며 정착에 필요한 상당한 투자와 지원약속도 하였다. 드디여 리동춘은 당년 12월 15일 독자적으로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를 설립하였다.   3. 좋은 만남 좌절의 시작   김진홍목사와 리동춘씨의 첫 합작사업은 신심과 열정이 충만한 가운데 시작됐다.   연변두레마을, 민들레마을과 한국순창진미식품주식회사 등 3자가 연변두레마을 기성의 된장공장을 합작운영키로 하고 민들레마을과 한국순창진미회사에 공장 전체를 인계했다. 매년 500톤 이상 전통장류 생산수출계약도 체결했다.   김진홍목사는 리동춘씨를 연변두레마을의 공동개발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연변두레마을 개발사업의 모든 업무를 위임한 동시에 리동춘씨와 공동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 근 만자에 달하는 연변두레마을개발계획서와 신청서를 상정하였다. 당시 자치주정부 란승관 부주장은 드높은 관심을 가지고 친히 신청서에 지시사항을 달아서 연길시정부에 이첩하였으며 드디여 연길시 강백준부시장이 도시건설계획국에 사업검토를 지시하고 나아가 개발도면을 전면적으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한창 사업이 무르익어 가던중, 2006년 2월 연변두레마을에 갑작스런 인사변동이 생겼다. 당시 연변두레마을의 총경리로 사업하던 정병석씨를 대체하여 현임 박상돈씨가 총경리로 부임돼온것이였다.   박상돈씨는 부임하자 된장공장의 합작을 부정하고 나섰다. 불문곡직하고 자기의 부하직원(한국인)을 시켜 합작공장의 열쇄를 파쇄하고 합작측의 직원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길을 막았다. 이 일을 알게 된 한국두레공동체운동본부는 박상돈씨를 파견할 때 업무교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명하면서 곧 해결해줄 것이니 합작측더러 참고 기다리라고 양해를 구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박상돈씨는 합작공장을 빼앗아내고서는 오히려 합작측이 계약내용을 리행하지 않았다고 거꾸로 바가지를 들씌우면서 리동춘씨를 “외국기업을 통째로 삼키려는 날강도”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양측은 심각한 대치상태에 처하게 되였으며 그것은 또 무시로 충돌로 이어졌다. 와중에 경찰의 조사를 수차례 거치기도 하였다. 합작측은 문제가 없으면서도 번번이 조사를 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경찰측은 민사사건이니 아예 법으로 해결하라고 밀어부쳤다. 결과 합작업무는 정지되고 따라서 수출계약리행은 불가능해졌으며 그로 해서 빚어진 손실은 해가 바뀔수록 계산하기조차 어렵게 될 것이였다. 김진홍목사가 개척한 합작사업이 박상돈부부의 불가사의한 소행으로 인해 철저한 파산의 기로에 놓이게 된것이다.   합작계약에 연변두레마을은 40%의 주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실무능력이 없어도 합작만 성사시켜나간다면 50년이란 긴 시간에 거대리익을 창출할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뭣이 불편하고 불만스러워서 이 합작을 박살내지못해 안달을 떤단 말인가?   4. 갈등의 주범--신앙과 문화의 차이     박상돈씨 부임 한달후 그의 부인인 임명자장로가 한국두레교회의 파견을 받고 선교사의 이름으로 연변두레마을에 나타났다. 그는 연변두레마을 교육원장이란 명의를 걸고 민들레마을의 사업에까지 사사건건 참견하기 시작했다.   봄을 맞아 민들레마을에서는 구덩이를 파고 마을어구에 장승조각상을 해 세우기 시작했다. 임명자장로는 장승세우는 일은 미신활동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세우지 못하게 방해하고 나섰다. 기독교문화에서는 장승문화를 용납할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길섶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면 안된다는 것이였다.   리동춘씨는 생태산업발전과 결부하여 토템문화를 연구하는 학술세미나를 조직한바 있다. 임명자장로는 이것도 미신활동이라고 하면서 반대해나섰다. 리유는 학술회의 주제가 "토템문화가 인류에게 주는 계시"라는데 이거야말로 황당하다는것이다. 인류에게 계시를 줄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하느님뿐인데 토템문화가 인류에게 계시를 준다고 하니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화와 리념의 차이, 신앙의 차이로 량자간 모순의 곬은 갈수록 깊어지기 시작했다.   5. 조작된 음해사건들   1) 기증한 토지가 사기극으로 리동춘씨가 기증받은 땅을 다루려고 하니 100헥타르중 70헥타르는 연변두레마을의 전임 총경리가 김진홍목사 몰래 한국기독교장로인 신씨라는 사람에게 이미 사용권을 팔아넘긴 땅이였다. 김진홍목사가 그것을 모르고 리동춘에게 기증했으니 결국 그 땅의 새 “임자”가 나타나 김진홍목사와 리동춘은 부득이 법정소송에 말려들어 패소하게 되였다. 리동춘씨가 중급법원에 상소할것을 요구했으나 박상돈씨는 상소를 거부하다가 두레본부의 핍박에 의해 서류만 제출하고 비용은 지불하지 않아 상소인이 오히려 피상소인으로 전락되여 다시 한번 패소하는 랑패를 보게 되였다.   2) 모든 투자금약속이 백지화 리동춘씨와 함께 추진하는 연변두레마을 개발계획은 실현될수 없는 공상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심지어 자기의 지휘본부까지 눈에 넣지 않고 적대모순으로 끌고 가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등 현장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모든 사업과 투자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토지 임대 1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연변두레마을의 땅은 여전히 페허상태에 처해있다.   3) 상급 김진홍목사도 막무가내 한국두레본부에서는 2008년6월 공문을 내려 된장공장을 민들레마을에 넘겨주라고 지시했으나 한사코 불복했다. 이에 김진홍목사가 직접 현장에 행차하여 민들레마을의 일군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지나간 불미스런 일은 서로가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저녁중으로 박상돈씨부부와 잘 상의하여 해결할터니 기대하라고 새삼스레 약속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박상돈부부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약속을 어긴 채 귀국해버렸다.   김진홍목사는 귀국후 동료들 앞에서 “리동춘은 우리가 필요하여서 초청해온 분이니 죄가 없다. 그를 이런 곤경에 처하게 하여 너무도 안타깝다”면서 림시공장을 짓고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도록 한화 2,000만원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4) 순창회사직원 경상해 사건 합작자인 한국순창진미식품주식회사에서 시비를 따지러 연변두레마을을 찾아왔다. 순창은 한국고추장의 대표브랜드이다. 순창회사는 연변두레마을에서 된장의 원료를 생산하여 수입하고자 합작에 동참했던 것이다. 그런데 멀쩡한 기업이 생산을 시작도 못한채 두레본부의 조처만 기다리는 판이였다.   그러나 무한정 참고 기다릴수만은 없는 순창진미회사는 2008년 12월말 드디여 연변두레마을에 와서 문제를 걸고 들었다. 합작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리기까지 하였다. 와중에 순창측 파견을 받고 온 직원이 연변두레마을 마당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들이닥친 5~6명 괴한들에게 구타당하여 팔뼈가 부러지는 경난을 치르게 되였다.   5) 민들레마을 전기선 절단사건 2009년 11월, 박상돈씨는 민들레마을에서 전기세를 일년동안 내지 않았다는 리유로 엄동설한 자기의 부하직원을 시켜 고압선에 올라가서 연변두레마을로부터 민들레마을로 이어온 전기선을 끊도록 사촉하였다. 이로하여 민들레회사 직원들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농호들이 근 반개월간 전기가 끊기여 밥도 제대로 끓여먹지 못한채 추위에 떨면서 지냈다. “기독교인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던데 이 사람들 기독교인 맞는가?” 하는 원성이 빗발쳤다.   사실 연변두레마을의 박상돈씨는 리동춘과 한국 김진홍목사댁에서 열린 두레공동체운동본부 회의에 참가하여 민들레마을에 농사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지불각서를 쓴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상돈씨는 보상금지불은 고사하고 그 돈에서 전기세를 계산하자는 제안도 받아 들이지 않고 전기선을 끊은것이였다.   6) 인권유린과 중상해 사건 2010년 민들레마을에서 된장술이 개발되여 술공장을 한창 신축하고 있는데 박상돈씨가 수도물을 끊었다. 수도물은 연변두레마을의 동의를 거쳐서 그곳 우물에서 이어온 것이였다. 지역주민들이 박상돈을 찾아가서 왜 물을 끊느냐고 따지자 박상돈은 리동춘과 모순이 있어서 끊었다고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나섰다.   이에 분개한 민들레마을 일군들이 저녁에 박상돈씨가 승용차를 몰고 들어가는 길을 막아나서 그와 시비를 따지자고 하였다. 갑자기 승용차의 뒤문이 열리더니 박상돈의 부하직원인 왕반장이 뛰여내리면서 쇠사슬을 휘두르고 벽돌장을 뿌려서 민들레마을의 직원 한사람의 머리에 타박상을 입혔다. 연길병원에 긴급호송해가 진단한 결과 피가 머리속으로 떨어져 두번의 수술을 받았다. 감정결과 중상해로 왕반장은 응징을 받기도 하였다.   6. 이상한 소송과 명징한 판결   2011년 초, 연길시법원으로부터 리동춘한테 두가지 소환장이 날아왔다. 연변두레마을의 법인대표인 김진홍목사가 민들레마을의 리동춘을 법에 고소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하나는 김진홍목사가 불찰로 중국의 법을 어기고 리동춘에게 땅을 기증하였으니 그 잘못을 법원에서 인정해달라, 따라서 잘못 기증한 땅을 되찾아달라, 한마디로 리동춘을 두레마을 지반에서 몰아내달라는 것이였다. 다음 하나는 김진홍목사가 임명한 공동개발위원장의 권한으로 연변두레마을에 투자유치를 한것이 잘못되였으니 역시 투자유치항목을 취소시키고 관련 투자자를 몰아내달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법정 판결은 무정했다. 결국 두가지 소송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급법원으로까지 상소되여 끌고 나갔다. 결과 리동춘씨의 최종 승소로 판결이 났다. 리동춘씨는 본 소송사건의 전후시말과 동기부여를 보면 이 소송은 분명 박상돈씨가 조작한 것이지 김진홍목사의 소행일수 없다고 단정하고있다.   7. 생태문화예술절과 오덕문화절 그리고 된장술의 탄생       연변두레와 문화와 리념상 지긋지긋하게 충돌해온 민들레마을은 산출이라곤 거의 없는 경영환경속에서 장장 6~7년이란 시간을 지탱해왔다. 연변두레마을은 한국선교회로부터 달마다 봉급과 경비가 조달되지만 민들레마을은 고립무원한 독불장군에 불과하였다. 불행중 다행으로 민들레마을 전통된장을 알아주는 연변소비자들의 주문이 자주 들어와 회사여직원이 들가방에 된장을 담아들고 뻐스를 타고 집집이 배달을 다니면서 연명해왔던 일을 떠올리며 리동춘은 자못 감개무량해했다.   역경속에서도 연변생태문화예술절과 전통된장오덕문화절, 민족의 대표술인 된장술을 배태했다. 이미 7회를 이어온 생태문화예술절과 된장오덕문화절은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는 의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문화지성인들이 인정하는 축제로 되였다.   회사의 설립취지대로 연변에 세계 최대의 민족전통발효식품산업단지를 일으켜 세우려는 민들레마을의 꿈을 간단없이 숙성시켜왔다. 이 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참아넘길수있었다.제품을 만들지 못하게 하면 거꾸로 제품의 시장을 미리 먼저 개척하는데로 방향을 돌리면서 제품개발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렇게 개발된 민들레마을의 전통된장생산공법은 이미 2009년 길림성급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상황이다.   이러한 결실이 밑거름이 되여 2008년 8월 사단법인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까지 설립되였다. 리동춘회장은 “해마다 치르는 축제에 연변두레마을로부터 기증받은 땅의 나머지 30헥타르 토지임대료가 보탬이 되였고 김진홍목사 역시 행사때마다 축사와 함께 대표단을 파견하여 동참해주었으니 감사한 마음은 항상 간직하고있다”고 밝혔다.   맺는 말   중국공민으로서 중국 땅에서 왜 외국인에게 그토록 기시를 받으면서도 참고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리동춘씨는 “얼핏 보기에 이 사건은 밥그릇 빼앗기 싸움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다른 목적의 문화를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우선 서로간 문화에 대한 리해와 소통이 없이는 갈등의 해소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 부간 2011-11-7 제43호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86    스티브 잡스의 “공개유언” 댓글:  조회:11803  추천:25  2011-10-08
   전 세계에 아이폰 광풍을 몰고 온 IT 혁명가 스티브 잡스[史蒂夫·乔布斯]가 이 세상을 하직했 다.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 너무나도 일찍 떠나버렸다.    세상을 바꾼 거인 잡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자 했으면서도 평소 사생활 노출을 꺼려왔던 애플 CEO 잡스, 그의 유언으로 장례식은 몇몇 사람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열렸지만,이 지구위에 그를 추모하는 사람은 아마 그 누구보다도 많으리라 .   2005년 미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한 스티브 잡스의 연설문은 스티브 잡스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봐야 할 텍스트다. 잡스는 졸업생들 앞에서 자신의 불우했던 성장과정, 창업과 좌절 등 속 깊은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특히 암 투병이라는 절망의 나락에서 건진 삶에 대한 깨달음은 큰 울림을 전해준다.   “늘 갈망해라, 우직하게!” “타인의 견해가 당신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라.” “남의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 이와 같은 당시 잡스의 충고는 결과적으로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남긴 마지막“공개 유언”이 된 셈이다.     아래는 잡스의 스탠퍼드대 연설문 가운데 세 번째 부분이다 --- ...................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17세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당신은 옳은 삶을 살 것이다.”   이 글에 감명 받은 나는 그 후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 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인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은 죽음 앞에서 모두 떨어져 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기에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야 합니다.   나는 1년 전쯤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30분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고칠 수 없는 암이기 때문에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생존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에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불치병 판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위를 거쳐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마취상태였는데 나중에 아내가 말하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 밝혀지자 의사들도 기뻐서 함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나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때만큼 내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수십 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도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도그마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은 당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85    조선 양대특구 공동개발의 감동 댓글:  조회:6995  추천:40  2011-06-10
  조선 황금평•라선 양대특구 공동개발의 감동 김정일 위원장 중국방문 후 중조 간 대규모 경제협력이 바로 가동됐다.  조선 황금평•라선 양대 특구 중조공동개발 및 공동관리대상 착공식이 8일과 9일에 연일 진행되었다. 라선개발 1차 착공대상으로 라진항-원정도로개건, 아태라선세멘트공장과 라선시-길림성고효율농업시범구 착공식, 라진항을 통한 중국국내화물중계수송출항식도 줄줄이 이어졌다. 학수고대하던 일이 어느새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조선의 '공동개발계획요강'에 따르면 황금평(위화도도 포함)특구는 상업센터와 정보산업, 관광문화산업, 현대시설농업, 가공업 등을 중점 육성하고 라선특구에는 물류, 첨단기술, 목재가공, 선박수리 등을 주 업종으로 하는 10개의 공업단지를 키운다는 구상이다. 이로써 양국국경을 기준으로 북은 라선, 남은 황금평이 명실공히 중조경제협력의 거점으로 우뚝 서게 됐다. 양대 특구 공동관리를 위해 중조양국이 지난해 설립한 특구개발합작연합지도위원회는 이미 ‘정부가 이끌고 기업이 주역이 되며 시장의 원리로 운영하고 상호이익을 추구한다’는 협력의 4대원칙에 합의했고 아울러 양측은 각자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해 양대 경제특구를 중조간 경협의 모범사례이자 세계 각국이 경협을 할수있는 공간으로 육성하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심천의 개발과 비견되는 가속이 붙기를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조선에서 홍콩의 다국적 투자회사인 新恒基그룹의 高敬德 이사장을 특구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하여 협력개발을 주도하도록 조치(중국정부도 동의했다고 함)한 점은 다국적 회사를 통한 해외자본도입을 암시하는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금후 조선경제가 개혁개방에로 이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중국으로 말하면 조선 양대 경제특구의 공동개발은 동북진흥전략과도 직접적으로 연계되어있다. 라선특구 개발의 본격화로 이제 두만강지역개발프로젝트의 실시가 황금기를 맞게되어 이제 개발의 중심에 선 연변의 발 빠른 움직임이 예상되는 시점이다. 양대 특구에 대한 중조 양국의 본격적 협력개발은 동북아개발의 기폭제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주변국들이 동북아개발에 열성을 보인지가 오래다. 러시아는 이미 극동지구 대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하였으며 한국도 기실 동해전략을 실시하고 있고 일본 역시 자국의 서해기슭에 중심항구건설을 진행중이다. 목전 일본, 한국, 러시아 등 나라의 근 50개 기업이 이미 훈춘에 와 자리 잡았다. 이런 와중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은 개성공단을 축으로 하는 남북경협이 아쉽게도 현재 중단상태이며, 이와 같은 교착상태가 언제가야 풀릴는지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남북이 하루속히 대결국면을 화합의 장으로 바꾸어 이한 역사적 개발사업에서 주역으로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84    “김정일 중국방문” 소감 댓글:  조회:9431  추천:68  2011-05-27
  “김정일 중국방문” 소감 김정일 조선 국방위원장이 지난 20일에서 26일까지 중국의 목단강, 장춘, 양주, 남경, 북경 지역을 참관했다. 7일 동안 이동한 거리가 무려 6천여 킬로미터라고 하니 70세의 노인으로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994년 집정해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중국방문이 모두 7차례 정도라고 하는데, 그중 최근 일년간 이례적이게도 이번까지 무려 세 번째이니 생각되는 바가 적지 않다. 김위원장이 이번에 만나서 회담을 가진 중국 지도자도 호금도 주석 및 온가보 총리를 비롯,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 9명중 외국 순방 중인 오방국을 제외한 8명이니 기실 전부라 해도 되는 것이고, 김위원장의 중국방문 수행자도 조선노동당 비서인 김기남, 최태복, 강석주 내각부총리,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등 고위급이 대거 들어있어 예사롭지 않음을 가히 짐작케 한다. 실제 그의 방문행보가 시종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을 감안하면 조선의 개혁개방의 미래에 대해서도 추측해볼만하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정확하며 과학발전노선이 생명력이 있다. 조선인민은 이로 인해 고무를 받는다.” 중국의 기업체 등을 시찰하면서 발표했다는 김위원장의 언론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김정일 위원장이 나라의 경제곤경에 대해 뼈를 깎는 고민을 하지 않았을 수는 없다. 그 고심의 흔적이 바로 지난 일년간 이루어진 파격적인 3차례의 빈번한 중국방문이 아닐까? 조선에 대한 중국의 경제지원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지원은 필수적이지만, 그러나 외부 지원이 조선의 강성대국건설의 근본도로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필경 자국의 시장개혁이 필수인데, 마음먹고 하면 바로 될 것 같은 그것의 실시가 왜 그토록 어려울까? 이것을 항상 문제로 짚지만, 그것에 대해 이해해주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우선 조선은 국제사회로부터 아직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의 개혁개방조치는 국가통제 시스템을 약화시켜 정권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 조선특유의 딜레마인 것이다.  한편 우리는 조선의 오늘 상황이 조선이 자초한 문제만은 아니며, 역사가 남긴 냉전시대 유산이기도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번 방문이 혹시 김정일 위원장이 시장개방을 최종 결심하고 나선 행동이 아닐까 생각된다. 참 기대가 되는 일이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김 위원장의 결심이 중조관계의 획기적 발전은 물론, 북남관계, 나아가 아시아의 장래에 획기적 기여가 될 것으로 본다. 중조 간, 북남 간, 나아가 조선과 국제간 경제협력이 봇물 터지듯 쏟아질 날이 크게 기대된다. 이를 받쳐주는 또 하나의 중대한 고무적 사안이 있으니 바로 한국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발표다. 이 대통령은 최근 "우리 남북은 서로 대화하고 보다 미래 지향적이고 발전적으로 나가야 한다"면서 "남과 북, 우리는 한민족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에 대한 지원은 북이 남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북의 자립을 도와주는 형태가 될 것임을 밝히고 "우리는 한민족이기 때문에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이북주민들이 정말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많은 분들이 (조선이) 중국에 너무 의존하지 않느냐 걱정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조선지도자가 중국에) 자주 가야 한다. 자주 봐야 한다. 배워야 한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자주 왕래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대통령은 조선과의 대화, 특히 경제-문화적 소통도 강조하면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말도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참 감동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다. 우리 조상의 나라 조선이 하루빨리 개혁개방을 해서 한국처럼 세계의 앞자리를 다투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북이 한집이 되는 그날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날이 너무 멀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83    지구촌 재앙의 메시지 댓글:  조회:8042  추천:60  2011-05-12
  지구촌 재앙의 메시지   5월 12일은 문천 대지진 발생 3주년이 되는 날이다. 2008년 5월 12일 8.0 규모의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사천성이 전국 여러 민족형제의 지원과 일본, 한국 등 국제사회의 원조에 힘입어 3년간의 복구 끝에 지진피해가 가장 심했던 문천현과 북천현을 사천관광의 새로운 명소로 바꿔놓고 경제도 크게 부상시키는 기적을 이뤄냈지만 그날의 악몽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   정말 명실상부한 대재난의 시대이다. 2004년 12월 14개 국 2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남아 쓰나미, 미국 남동부를 덮친 2005년 8월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금년 3월 일본 동북부지역을 강타한 규모 9.0의 강진과 쓰나미, 쓰나미에 이은 핵 원전 방사능유출의 재앙은 무지개 같은 환상을 현실의 삶속에 그대로 구현시켜주는 눈부신 현대과학도 인류에 복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상상력을 최대한 구사해 만든 재난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인류사상 미증유의 대형 참사들이 지구촌의 현실에 꼭 같이 발생하여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인류사상 전례 없는 대형 참사라 함은 재난 발생시간이 인류사회가 미개시대를 넘어 선지도 까마득하게 오래인,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시대라는데 기인한다.   천재성 재난참사만 해도 진저리치는데, 인재성 재난도 비일비재하여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갈수록 참혹해지는,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 세계자연에너지 쟁탈을 위한 전쟁, 세계패권확보를 위한 전쟁, 종교파쟁이 부른 세 불리기 전쟁, 테러와 반테러의 전쟁...이 세상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하지만 자연과 인위의 재앙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통감하면서도 인류는 결코 미래에로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지구촌 대재난은 과연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가슴 저미는 재난의 순간순간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지구의 안정과 더불어 인류의 행운을 빈다.   [길림신문]201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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