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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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최룡관시비 중국조선족민속원서 제막 댓글:  조회:2511  추천:0  2020-07-13
최룡관시비 중국조선족민속원서 제막  [ 길림신문 김태국기자 ] 2020-07-12 조선족문단의 중견시인 최룡관선생이 창작한 애향시 가 덩실한 시비로 태여나 중국조선족민속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잔잔한 향수를 선물하게 되였다. 7월 11일 오전에 개최된 최룡관시비제막식에서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방순애 회장은 “연변동북아문학연구회 회장단은 최룡관시인의 문학창작생애 50주년을 계기로 시비를 세우기로 결정, 유관 부문의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하에 모아산자락에 자리잡은 중국조선족민속원에 설립지를 마련하였다.”고 소개하였다. 답사를 하고 있는 최룡관시인. 제막식에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김영건, 전임 길림공상학원 당위서기, 단군문학상 리사회 리사장 신봉철, 연변시인협회 회장 전병칠 등과 시인의 제자, 고중동창, 대학동창대표가 축사를 하고 《장백산》, 《도라지》, 《송화강》 등 문학지 대표들의 축하메시지가 대독되였다. 부분적 참가자들이 시인과 함께 시비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회원인 최룡관시인은 연변사범학원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변일보 문예부주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면서 50여년간의 문학인생에《이미지창작론》, 《하이퍼시창작론》, 《동시창작론》 등 론문집과 시집, 문집 등 여러가지 작품집 총17권을 출간하였으며 준마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주인민정부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단국문학상,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공로상 등 다수를 수상하였으며 40여명의 문학후배를 양성해냈다.  
84    《천개의 고원》학습필기-10 댓글:  조회:2242  추천:0  2019-10-14
《천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다섯 번째 원리와 여섯 번째 원리는 지도제작술과 전사술(轉寫術)의 원리이다. 여섯 번째 원리에 해당하는 전사술의 원리는 모사(模寫)나 재생산의 논리에도 맞는데 이는 수목체계의 위계 모델에서도 발견되듯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떠서 나타낸 모상(模相)에 다름 아니다. 모상(模相)은 항상 동일한 것, 말하자면 통일적인 것, 위계적인 것, 중심적인 것과 만나며 그것을 흉내 낸다. 책과 연관시켜 말하면 그것은 새로운 내용물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물을 베껴내는 것이며 책을 복제하는 것, 즉 같은 내용의 책을 적게 혹은 많이 찍어내는 일이다.   그러나 리좀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지도는 전사술 혹은 모사와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망상(網狀)조직, 그물(網, 네트)과 한 족속으로서 항상 열려있으며, 거의 무한한 다수의 입구를 가지며, 모든 차원들과 접속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분해할 수 있다. 리좀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다, 사본의 문제는 언어능력의 문제라고 할 때, 지도는 언어수행의 문제 즉 실천문제인 것이다. 모사는 노상 복제를 일삼는 반면 지도는 항상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다수의 입구'로 들어가는 실험을 향해 있다. 네트(網)는 컴퓨터들 사이에 수많은 링크(链接)와 라우터(路由器)들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접속자는 사이버공간을 넘나들면서 모상이 아닌 새로운 지도를 제작한다. 예컨대 노트북을 가지고 그 어떤 장소든 관계없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모뎀(调制解调器) 접속을 통해 네트안에 다양한 입구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리좀의 의의는 통일되고 고정된 이미지로 정형화할 수 없는 운동들의 특성을 통해 이른 바의 불가침의 영역을 깨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는데 있다. 실지 자율적 전자공간으로 일컬어지는 네트의 특성과 리좀적 특성은 상당히 유사하다.   지도의 원리는 비선형적, 수평적, 탈중심적 사고방식과 통한다. 이들은 무의식과 한집안이기도 하다.   의식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의식을 활용하면, 의식은 받아들이는 정보를 단순화시킨다. 많은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깊은 바닷물속의 거대빙산’과도 같은 존재인 무의식은 의식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따라서 정보가 과도하게 많은 상황이라면, 무의식에게 넘길 때 좋은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또한 무의식은 ‘선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 하다면 ‘선형적 사고’란 또 뭔가? 일종의 직선적이며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 단방향적 인과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한 두 개의 변수 사이 고정된 인과 관계만을 고려하고 이러한 함수에 따라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를 맹신한다. 고전 물리학에서 출발하였으며, 정해진 공식을 통해 운동의 결과를 사전에 알 수 있다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선형적 사고에 해당 분야에 깊은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은 당연히 미혹되기 쉽다. 1더하기 1은 2 다 란 식으로 명쾌하게 논리적, 인과적으로 설명을 하며 근거를 제시하는데 어떻게 미혹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우리 인간이 사는 사회가 선형적이라기보다는 비선형적이며 인과적이라기보다는 확률적이라는데 있다. 물질도 극미시 세계(極微視 世界, 極巨視 세계의 반대)로 가면 기계적 인과론이 통하지 않는 양자역학과 같은 현대 물리학으로 설명이 되며 전자의 운동 같은 경우 관찰의 유무에 따라 결과가 변하는 확률로서만 예측이 가능한 세계에 놓여 있다. 기계적 인과론보다는 상호 반응 관계이며 너무나 많은 변수로 인하여 예측만 할 수 있을 뿐 예언이 불가능하다. 극미시 세계뿐 아니라 구름의 형성, 날씨, 물의 흐름 등 또한 비선형 운동의 전형적 예이다. 물질도 이런데 인간 사회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인과 관계가 아닌 상호 반응관계로 얽혀 있으며 그래서 단일 공식으로 도출될 수 있는 필연적 결과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종합하고 수치화 하여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는데 참고만 할 수 있을 뿐. 그래서 책임성이 있는 전문가들은 절대로 서뿔리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한 척척박사이지만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단지 여러 가지 방향성에 대한 가설만 지극히 조심스레 내놓을 뿐이다. 만약 세상이 이렇게 비선형적이며 예언이 불가능한 복잡계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대중들에게 함부로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한다면 이는 양심불량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게 아니고 본인도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공부를 잘못해서 走火入魔에 빠진 반풍수나 선무당에 다름없을 것이다.   수평적 사고와 수직적 사고. 영국 에드워드 디보노의 저서 에 나오는 개념들이다. 한 구덩이를 계속 파고 들어가거나 적목을 계속 높게 쌓아올리는 것이 수직적 사고방식이라면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보거나 적목을 마구 흩어놓는 식이 수평적 사고방식이다.   디보노에 따르면 수평적 사고란 상황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사고하는 방식이다. 그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 때 기존에 전통적인 논리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면을 바라볼 수가 없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수평적 사고를 하여 문제를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 창의적인 문제해결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수평적 사고의 반대되는 개념이 수직적 사고이다. 수직적 사고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기존에 오랫동안 해온 이미 검증된 방식이라서 이 방식을 취하면 위험은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어떠한 문제에 닥쳤을 때 누구나 생각할 수 있거나 많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은 대부분 수직적 사고의 결과이다. 좋게 보면 논리적 사고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관행에 의존한 사고방식이다.   수직적 사고만을 하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 기존에 보아왔던 한 면만 보기 때문이다. 입체적인 사고나 다양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이런 사고방식만을 고집하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으며 문제를 해결할 때 새로운 접근을 할 수가 없다.   지금은 창의성의 시대이다. 때문에 수직적 사고보다는 수평적 사고가 더 중요하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평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의도적으로 훈련해야 한다고 경험자들은 제안하기도 한다. 그들의 제안내역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수평적 사고를 연습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을 의도적으로 채택하지 않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습관적으로 반응했던 것은 일단 보류하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 '다른 원인이 아닐까?'라고 의심해 본다. 그래도 다른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때 최초의 생각대로 행동해도 늦지 않다. 의도적이고 거듭되는 수평적 사고는 창의성을 높여준다. 새로운 접근을 함으로써 생각의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백두산은 술이랍니다 흰 술에서도 독한 술이랍니다   아침 문이 열리던 날 곰할머니께서 고아놓은 술이랍니다. 이 땅이 열 번 다시 썩었어도 이 제 또 다시 열 번 백번 썩는대도 변치 않는 술 영원히 다 먹지 못할 술이랍니다   어머니 배속에서 이 술 한잔 먹고 태여난 내 몸에서 푸르러 있답니다. 에밀레종소리가 내 몸에서 뛰여다닌답니다 리순신 장군의 호령이 내 몸에서 향기로 흐른답니다 훈민정음 자모가 내 몸에서 터지고 있답니다 장백산 줄기줄기 마다에서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나는 그것들에 취하여 발가락 끝까지 빨갛게 오리오리 머리마저 파랗게 고주망태가 되여 살아가고 있답니다.   이제는 죽어가도 산야에 짙푸른 풀 한 이파리 이제 다시 태여나도 첩첩 산을 헤치고 사품치는 강물 한 줌   오오! 백두산 나의 독주여!   최룡관 시인의 시  전문이다.   사상 백두산을 노래한 시는 주지하다시피 많기로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성산 백두산을 ‘독한 술’로 표현한 시는 어쩌면 이 시 한수뿐이 아닐까 싶다. 혹시 이 시가 바로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습관적으로 반응했던 것은 일단 보류하고, '다른 표현방법은 정말 없을까?'라고 거듭 의심해 본 결과가 아닐까”고도 생각해본다.   위에 예든 새로운 사고방식들을 우리의 시 창작에 이용해도 안 될 것 없겠다고 생각된다.
83    《천개의 고원》학습필기-9 댓글:  조회:2068  추천:0  2019-10-13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의 네 번째 원리로서 ‘탈기표(작용)적 도약 혹은 단절의 원리’를 들고 있지만 실제 리좀의 영토화, 도주선에 의한 탈주(도주)를 통해 끝없이 전개되는 탈령토화, 재령토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흥취를 가지는 것은 우선 ‘탈기표적 단절의 원리’중 ‘기표’라는 개념이다. 이른 바의 ‘기표(記表)’란 ‘기의(記意)’ ‘기호(記號)’와 함께 언어학자 소쉬르에 의해 정의된 언어학 용어인데, 언어를 주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시인이라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쉬르는 언어를 기호로 파악하고 있는데 기호와 그 의미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기표’(記表, 한어: 能指)는 기호의 모양이나 소리를 의미하고 ‘기의’(記意, 한어: ‘所指’)는 이 기표에 의해 의미되거나 표시되는 이미지와 개념 또는 의미 내용을 말한다. 기표와 기의를 하나로 묶어 기호(記號)라고 한다.   예컨대 ‘가로수’라는 세 글씨의 생김새(즉 시각적 이미지)와 ‘가로수’라는 발음(ga-ro-su, 즉 청각적 이미지)은 기표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가로수’라는 개념은 기의이다. 이 ‘가로수’라는 기표가 의미하는 내용은 ‘길가나 차도를 따라 줄지어 심은,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줄 뿐 아니라 먼지나 바람, 더위를 막고 공기를 깨끗하게 하는 구실을 하는 나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이 바로 기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들이 ‘기표’와 ‘기의’라는 얇은 두 겹으로 분리되어 있다.   말하자면 ‘가로수’라는 기표와 ‘길가나 차도를 따라 줄지어 심은 나무’라는 기의가 합쳐져 ‘가로수’라는 의미가 발생한다. 이것이 의미작용이다. 그러므로 의미작용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서 일어난다. 한편 기표와 기의가 지시하는 현실 속의 대상(가로수)은 지시체(指示體)이다. 예컨대 우리가 ‘가로수’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 음성적, 활자적 물질성은 기표이고, 그것이 뜻하는 바의 의미는 기의인데 여기서 지시된 대상, 즉 현실 속의 실물(가로수)은 ‘지시체’ 혹은 ‘지시대상’인 것이다. 우리가 글로 적거나 입으로 말할 때의 ‘가로수’는 글씨나 소리일 뿐이지 길가에 줄지어 심은 그 실물(나무)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어의 ‘기표+기의(의미작용)’와 그것의 객관 ‘대상물’을 혼동시하는 경우가 있다. 위와 같이 ‘가로수’를 예로 들면 책에 씌어있는 ‘가로수’란 글씨나 녹음기에 입력되어있는 ‘가로수’란 소리를 객관 대상물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길가의 배나무가 뚜벅뚜벅 걸어온다’라는 시구가 원고지에 적혀있다고 하자. 혹자는 이거 안 된다고 한다. 발 없는 배나무가 어떻게 뚜벅뚜벅 걸어오냐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언어의 의미작용과 그것의 객관 대상물을 혼동시하는 경우다.   기실 언어와 언어 간에는 아주 강한 접속기능을 갖고 있다. 이 기능을 잘 이용하면 상상력을 키우는데 크게 유조할 것이라 믿는다. 하이퍼시는 인터넷 시대의 산물이다. 이름 자체를 인터넷용어에서 따온 하이퍼시는 그 자체가 인터넷의 성질을 많이 닮아있다. 하이퍼시를 받쳐주는 이론도 현대철학의 리더 격인 리좀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이퍼시인들의 시 문법은 하이퍼링크(hyper link, 超链接)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속성을 결합한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특성을 현대시에 차용한 개념의 시가 하이퍼시라 할 수 있다. 이런 하이퍼시는 비선형(非線型), 비인과(非因果), 비고정(非固定), 탈중심, 탈관념, 다방향 등의 특성을 가진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시 세계이다.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차용, 기존의 문장 구조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이미지와 의미구조를 공유하며 시각적 언어와 청각적 언어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기존시에 대한 해체와 파괴를 통한 새로운 조립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하이퍼시의 등장은 인터넷 세계를 살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며 21세기 현대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그런 만큼 하이퍼시는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유동의 지식, 성장하는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연결고리는 리좀의 사유에 닿아있다. 수목의 개념이 계통화 하고 위계화(位階化)하고 혈통화 하는 방식에 있다면, 리좀의 개념은 통일되거나 위계화 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성에 있으며, 혈통에 국한된 협소한 관계가 아닌 광범한 결연관계를 이루는데 있다. 리좀은 새로운 접속과 창조가 이어지면서 열린 사고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그런 개념이다.   그래서 하이퍼시는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해방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시에 담아보려는 언어작업의 예술적 산물로 태어나 현재 한창 성장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새로운 이미지의 공간은 현실과의 만남에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대시로서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하이퍼시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인제 금방 발자국을 뗀데 불과하며, 현재 상당수의 창작은 실험성을 띠고 있으며 앞으로도 상당히 긴 시기내 실험은 불가피하게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약간의 성과물이 있다고 해도 아직은 매우 미숙한 생태이며,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반드시 부단히 수정, 갱신,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문제의식은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기존 관념의 해체와 단절면에 대해서만 봐도 하이퍼시는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해도 시에 대한 이해문제(이른 바의 난해성문제)를 두고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서 극복해야 할 과제가 남는 것이다.
82    《천개의 고원》학습필기-8 댓글:  조회:1979  추천:0  2019-10-12
다양체 관련. 다양체란 4차원 이상의 공간을 연구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으로 점 · 직선 · 평면 · 원 · 삼각형 · 입체 · 구(球)와 같은 기하학적 도형의 집합을 일개 공간으로 보았을 때의 공간을 말한다. 자연이 대표적 다양체라고. 다양체에는 고정된 중심이 없고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가는 운동이 멈추지 않는데, 자연이 바로 그렇다는 것. 개개의 자연사물은 모두가 외부성을 갖는다. 책도 하나의 다양체이다. 세상에 대한 반영이자 반사물인 책도 외부성을 갖는다. 즉 그것은 어떤 다양체에 다른 것이 접속되면서 그 성질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탈주선 내지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된다. 접속되는 항에 따라 차원수가 달라진다. 어떤 개념들을 어떤 문제의식에 연결시키면서 강조하거나 제거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책이 되는 것이다. 낫이 어떤 외부와 접속하느냐에 따라 농사-기계도 되고, 살인-기계도 되고, 혁명-기계도 되는 것처럼. 자연만물은 모두가 리좀적 다양체다. 외부성을 띈 모든 리좀적 다양체들의 상호간 연결접속은 시시각각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인류가 자연을 파괴하면 반드시 보복을 당하게 마련인 것처럼 자연을 보호하면 반드시 그 덕을 입게 마련이다. 무의식도 리좀적 다양체다. 무의식이란 욕망하는 기계의 생산이고 그것의 변형이다. 욕망이란 프로이드가 말한 것처럼 가족적이고 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회적인 것이다. 무의식에는 부모가 없으며, 무의식은 고아다. 무의식 나아가 우리들의 삶 전체는 무리지어 움직이는 다양한 욕망의 집합이란 점에서 리좀적 다양체를 이룬다. 무의식의 문제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증상이나 비현실적인 공상 내지 환상으로만 해석하여 이해해서는 안 된다. 기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현실을 생성하고 변혁하는 문제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을 생산하고 변환하는 문제다. 인간이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삶이 리좀적 다양체이기 때문이라고 클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그들은 슬픔, 기쁨, 증오, 분노, 행복 등의 힘이 출렁이는 자신의 무의식을 자신과 바깥 세계(외부성과 관련됨) 사이에 다양체가 만들어진다는 신호로 풀이한다. 다양체는 바깥과의 접속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기에 그런 접속이 새롭고 낯설수록 에로스(性本能)도 훨씬 더 강렬해진다는 것. 이런 판단들에 대한 이해는 독자 자신의 독자적인 독서와 심사숙고에 맡긴다. 아래 《최룡관시선집》에 수록된 시 전문을 감상한다. 아주 기묘하게 씌어진 특이한 시다. 가을의 들판을 쓴 시들을 두루 보아왔는데, 솔직히 처럼 씌어진 시는 본 기억이 없다. 물론 내가 본 시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양체를 논의하면서 이 시를 감상하는 것은 “자연만물은 모두가 리좀적 다양체”라는 명제 때문이다. 바람독침을 맞아 떼주검이 더덕더덕 매달렸다 풀꽃, 옥수수, 콩, 조 긴긴 상여대오가 흔들린다 소조한 장송곡의 주악속에서 시체속의 노란자위들만 꿈을 베고 눈 뜬다 2개 연에 10행 짜리 짧은 영물시자 하이퍼시다. 웅장하면서도 정교하게 되었다. 웅장하다 해서 정교할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도리를 잘 보여준다. 바람독침을 맞아 떼주검이 더덕더덕 매달렸다 풀꽃, 옥수수, 콩, 조 긴긴 상여대오가 흔들린다 바람이 봄과 접속하면 약침이 되겠지만 가을과 접속하면 독침이 된다. 자연의 한 품종으로서의 바람은 다양체이며 외부성을 가진다. 봄이라는 외부와 접속하면 약침이 되고 가을이라는 외부와 접속하면 독침이 된다. 바람의 성질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약침을 맞으면 만물이 소생하지만 독침을 맞으면 만물이 죽음을 맞는다. 가없는 가을들판이 전부 상여대오의 흔들림으로 설레인다. 정말 근사한 이미지단위(환유)다. 소조한 장송곡의 주악 속에서 시체속의 노란 자위들만 꿈을 베고 눈 뜬다 쓸쓸하지만 장엄한 장송곡의 주악소리 속에서 눈부신 새 생명(노란 자위)들이 죽음을 딛고 탄생한다. 다양체의 접속을 통해 바람소리가 장송곡의 주악소리로 변신했다. 이런 변신은 무죄일뿐더러 유공(有功)이다. ‘시체속의 노란 자위들만/꿈을 베고/눈/뜬다’ 시체속 노란 자위들이 꿈 (베개 베듯)베고 눈 뜨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새김질 할수록 맛 나는 시행들이다. 언어의 파격적 결합(접속)이 명구를 낳는다. 가을들판이 말한다-- 이 들판에는 아직도 캐낼 수 있는 보물이 무진장 많다. 서두르지 말고 슬슬 캐내라. 뜻밖의 광상(鑛床)과 만날 것이다.
81    《천개의 고원》학습필기-7 댓글:  조회:1982  추천:0  2019-10-11
■원리 2. 이질성원리. 여기서 연결접속의 원리(원리 1)와 이질성의 원리(원리 2)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해도 된다. 그런 고로 에서도 여섯 가지 원리를 설명할 때 원리 1과 원리 2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했다.   여기서 리좀적인 접속은 어떠한 동질성도 전제하지 않으며 그것은 비일비재 다양한 종류의 이질성과 접속함으로써 새로운 것, 새로운 이질성을 창출하게 된다.   “리좀 체계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또한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이론을 폄에 있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樹木)과 뿌리줄기(리좀)를 대비시켜 설명한다. 수목이 중심적, 위계(位階)적, 배타적이라면 그와 대비되는 리좀은 이질적인 것들을 만나 변화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식시킨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나무와 리좀을 고정불변의 두가지 범주로 아주 고착시켜버린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무와 리좀간 상호변환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질성 속에 동질성을 내포할 수도 있으며 동질성속에 이질성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질성 속에서 동질성을 발견하거나, 동질성 속에서 이질성과 다른 점을 발견하고,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조합을 생각하는 것은 새로운 발견인 것이요 기존의 도식과 암호나 기호를 파기하고 새로운 도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탈영토화’이자 끊임없이 새로운 ‘도주선’을 찾아 도주하는 것인데, 이른 바의 도주란 바로 창조적 행위를 지칭함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고정관념이나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는 과정이기도 하고, 꽉 막힌 체제에 바람구멍을 뚫는 일이기도 하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反位階的)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 이미지들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먼저 시와 관련되는 문제, 언어의 결합문제를 보자.   돌과 사람은 이질적인 존재다. 접속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돌사람. 이런 식으로 벼락신, 불얼음, 풀태양...과 같은 접속도 가능하다. 명사화된 이질적 이미지간의 자유로운 접속들(예컨대 빛과 가루, 너구리와 밭, 얼음과 가죽...)이 접속결과 아주 엉뚱한 이질적인 ‘신형의 사물(빛가루, 너구리밭, 얼음가죽...)’을 낳기도 한다.   이질적 이미지단위들간의 접속도 모종의 효과를 유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졸시 한수를 예로 든다. 약탕관에 오가잡탕 정히 달인다 해와 달의 폭포수에 약주 달인다 공룡의 비늘 기린의 뿔 삼족오의 발톱에 가스통 바슐라르와 아리스토 텔레스 그리고 문덕수의 시론에 류협의 《문심조룡》도 털어넣고 달인다 조리로 거르고 사포로 쥐어짠다   한가위의 눈부신 은쟁반 위에서 봉황새 한 마리 포르르 춤춘다   -- 전문 이 시에서 ‘공룡의 비늘 기린의 뿔 삼족오의 발톱’ ‘가스통 바슐라르와 아리스토 텔레스’ ‘문덕수 시론’ ‘류협의 문심조룡’은 이질적인 여러개 이미지 단위들 간의 접속이다. 접속한 결과(모조리 털어넣고 달인 결과) 느닷없이 봉황새 한 마리가 태어난다.
80    《천개의 고원》학습필기-6 댓글:  조회:2018  추천:0  2019-10-10
[개념의 이해] '기계' ‘접속’ '배치' 들뢰즈와 가타리가《천개의 고원》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천개의 고원》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접속, 배치와 ‘기계적 욕망’ 다시 한가지 예를 들면 우리 손이 운전대와 접속하면 운전하는 손이 되고 지휘봉을 잡으면 지휘하는 손이 되지만, 다른 사람의 손과 접속하면 악수하는 손이 된다. 운전사인지 지휘자인지, 아니면 친구인지 하는 것은 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의 접속과 배치에 달린 문제다. 브랜드의 소비도 이와 같다. 브랜드의 소비는 모종 욕망의 결과인데 외부와의 접속과 배치를 통해 ‘욕망’은 사치가 아닌 필요가 된다. 이것이 ‘기계적 욕망’이다. '욕망하는 기계'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양식은 '차이생성'이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영토화' '탈영토화' '탈주'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삶, 다른 존재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되기' ‘재영토화’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生成, 形成)라고 부른다. 기실은 바로 그것이 재영토화인 것이다. 들뢰즈는 이처럼 탈주하는 기계가 순간적으로 정착하면서 재배열되는 과정을 ‘재영토화’라 이름했다. ‘재영토화’가 정착된 단계에 와서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는 법칙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천개의 고원》에 따르면, 접속-배치-영토화-탈주-탈영토화를 통해 존재가 생성되듯 브랜드는 이 과정을 거치며 계속 새로워진다. 바로 이 점에서 브랜드는 탈영토화를 반복한다. 그 브랜드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 그러니까 접속, 배치, 영토화, 탈주, 탈영토화를 찾도록 자극한다.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축구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축구는 축구장에 심판과 두 개 팀의 선수가 모여 공을 대방의 골문에 차 넣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축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축구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79    《천개의 고원》학습필기-5 댓글:  조회:2170  추천:0  2019-10-09
들뢰즈와 카타리는 짜장 철학개념들을 쉴 새 없이 창조한 전문호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2013년도에 500페지에 달하는《들뢰즈개념어사전》을 냈는데, 취급한 ‘리좀’을 비롯한 주요 철학개념어가 90개도 넘는다. 《천개의 고원》의 핵심개념인 ‘리좀’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한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원리’를 “속성법(?)”으로 알아볼까나?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원리’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 2: 다질성의 원리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원리 4: 탈기표(작용)적 도약의 원리 원리 5: 지도 제작의 원리 원리 6: 지도 전사의 원리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는《천개의 고원》에서 리좀에 대해 이렇게 말한바 있다.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개미 떼가 만든 선을 절단할 수 없다. 그 선 중간이 끊어지더라도 (개미군단에 의해 자동적으로) 다시 이어지거나 다른 방향으로 선들이 만들어진다. 이 개미떼를 리좀의 줄기라 친다면 줄기는 절단되더라도 다시 줄기를 형성한다. 접속이란 네트워크에서 끊어져 소외되더라도 거기서 또 다른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리좀이다. ” 아래 리좀의 그 원리들을 하나하나 만나보자.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根莖)이라는 땅속 줄기식물을 근거로 접속의 개념을 설명한다. 접속하는 것들은 이질적인 것들, 팔다리가 따로 노는 다양체들인데, 이들의 특징은 절단당해도 끝내 줄기식물이 된다는 것. 한 리좀의 그 어느 점(點)이든 다른 어떤 모든 점들과 접속할 수 있으며 또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순서를 고정시키는 나무 또는 뿌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하나의 리좀은 기호학적 고리들을, 권력의 조직화들을, 예술들, 과학들, 사회적 투쟁들에서 발생하는 출현들(우발적 사건들)을 끊임없이 접속시킨다. ■ 접속(연결): 소유의 새로운 개념 플랫폼은 목적지와 여행객을 접속(鏈結)시키는 통로. 새로운 접속을 위해서는 또 다른 플랫폼이 필요하다. 오늘 세상은 ‘접속’의 세상이다. 접속이 오늘날의 대세가 되었다. 접속은 소유나 수익의 새로운 개념. 수익은 접속으로부터 생긴다. 인터넷의 ‘검색엔진’이 이 말을 증명한다. 검색엔진의 핵심이 바로 접속이다. 검색엔진은 정보를 얻고자 하는 특정 웹페이지로 접속시키며 그렇게 얻은 정보는 더 많은 검색을 유발하고, 더 많은 검색은 더 많은 광고를 노출시켜 수익을 창출한다. ■ ‘플랫폼’은 경계공간이자 ‘탈주선’이다. 타 지역에 갈 일이 생기면 고속철이나 뻐스역을 찾는다. 그 역에서 북경 가는 사람도 있고 상해나 광주 가는 사람도 있다. 북경의 경우 같은 북경역이라 해도 목적지가 다름에 따라 사람들은 부동한 곳에서 승차하게 된다. 예컨대 1, 2, 3, 4......라고 붙여진 부동한 시발점에서 승차하게 되는데 이곳이 플랫폼이다. 역이 모든 기차 여행자들의 집결지라면, 플랫폼은 목적지와 여행객을 접속시키는 통로다. 그때그때의 목적지와 여행객을 연결하는 통로가 이제는 모든 디지털 ‘유목민’과 서로의 필요를 접속하는 통로가 되었다. 시장의 규칙이 바뀌고 있다. 현시기 급부상하는 기업들은 플랫폼, 그러니까 접속의 통로를 만든다. 온라인을 플랫폼의 문제로 이해한다는 것은 접속의 장, 소통하고 공유하는 마당으로 본다는 것. 그 마당을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눈으로 본다면 바로 ‘탈주선(逃逸线)’이 된다. 탈주선은 닫힌 경계선이 아닌 열린 공간을 만들며 끊임없이 외부와 접속한다. 탈주선을 만드는 사유방식은 ‘유목민’들의 삶의 방식을 아주 떼 닮았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뚫는 자 흥한다’! 이는 ‘유목민’들의 信條이자 좌우명이다. 유목민! 여기서 ‘노마디즘’이라는 개념이 또 하나 생겨난다. 아하! 보다싶이 접속(연결), 플랫폼, 탈주선, 유목민...새로운 철학개념들이 줄쳐 나온다. 노마디즘(nomadism) 노마디즘이란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을 뜻하는 말로, 살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노마드, Nomad)’에서 나온 말이며, 유목주의라고도 한다. 그러나 들뢰즈, 가타리가 주목한 유목적 삶은 그냥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에 달라붙어 새로운 생성(生成)의 땅으로 바꿔가는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기존의 가치나 철학을 부정하고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은 명실공히 플랫폼시대다. 일상에서 우리는 온라인, 그러니까 스마트폰, 컴퓨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인터넷(세상)과 접속하고 있지 않은가.
78    《천개의 고원》학습필기-4 댓글:  조회:1958  추천:0  2019-10-08
어찌 보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은 인터넷과 많이 닮아 있다. 뉴스, 논평, 소식들은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인터넷 내부의 연결망들, 즉 블로그들과 온라인 안의 카페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웹사이트들을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이루어지는 여기에는 리좀이 그렇듯이 중심이나 토대, 줄기가 없다. 끊임없는 경로들, 경로들의 일탈과 새로운 접속들의 련쇄만이 있을 뿐이다. 인터넷은 말 그대로 서로 련결된 많은 컴퓨터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자기들끼리 서로 련결된 대학과 기업, 정부 기관, 개인 소유자들의 네트워크가 다시 거미줄처럼 련결된 네트워크들의 련결망이다. 이 네트워크는 메시지와 정보를 실어 나르는 통로를 제공해준다. 이것들은 안과 밖이 하나로 순환하며 이어지는데, 접속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미 하나는 여럿이고, 여럿은 무수함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탈중심화해서 수목형의 위계질서를 벗어나라고 말한다. 정주민의 사유가 아니라 유목인의 사유를 찾으라고 호소한다. 리좀은 非 체계요, 비중심화한 접속들의 향연이다. 리좀의 세계에서 접속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따라서 책에서 구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생성을 위한 령감과 힘이다. 욕망이 움직이고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리좀을 통해서이다. 욕망이 가령 리좀을 통하지 않고 나무(체계)를 타고 올라간다면 필시 내적인 추락들이 생겨, 욕망은 좌절되고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리좀은 외부적이고 생산적인 발아를 통해 욕망에게 생명과 활력을 부여한다. 바로 이러한 리유 때문에 거꾸로이긴 하지만 대칭적이지 않은 다른 조작을 시도해 보는 일, 즉 주어진 경로에서 일탈하여 탈주선에서의 새로운 접속을 시도해보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는 나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우리는 더 이상 나무들, 뿌리들, 곁뿌리들을 믿지 말아야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대성질호한다----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력사를 쓰지 말라. 시작하지 말고 끝내지도 말며 그냥 흘러가라. 저자-텍스트가 아니라 그것의 배아, 그것을 배양하는 젖, 질료들, 즉 사유를 가로지르는 날짜와 속도들, 자연과 무의식, 고원들을 힘껏 빨아 들여라! 지식은 기껏해야 지식생산자의 머리를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방은 의미의 축소화이며, 그것에의 종속이다. 그러므로 해석하지 말고, 제발, 제발, 당신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다! 언제까지 어른이나 흉내 내는 덜된 어린애로 남으려고 하는가? 언제까지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는 응석받이 노릇을 할 텐가? “그만 둬!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 의미를 내보내거나 해석하지 말고 실험을 해! 너의, 너의 령토성, 너의 탈령토화, 너의 체제, 너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야! 이미 만들어진 너의 유년기와 서구의 기호론에서 찾지 말고 너 자신을 기호화하라고!” 왜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에 고착해 있으려 하는가? 왜 항상 계보학 속에 너의 가능성, 너의 힘, 너의 꿈과 상상력, 너의 잠재적 생성들을 매장시키려고 하는가? 수목형 사유에서 벗어나라. 그래야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위계적 질서, 중심화된 점에서 탈주하라. 반계보로, 다양체의 몸으로 나아가라. 진정 다양체를 꿈꾼다면 유일을 빼고서 n-1 (여기서 1이 ‘유일한 장군’을 표시한다)로 살아라. 책을 읽되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저자-텍스트를 덮쳐라! 공을 비켜나간 축구선수의 헛발질. 변혁의 힘과 선을 만들지 못하는 책-기계는 죽은 기계다. 어느 시대나 가장 중요한 책-기계들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예언과 변혁, 도래할 실재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오고야 말 현실에 대해 말한다. 좋은 책-기계들은 탈령토화한다. 탈령토화는 새로운 현실의 발명과 창조다. 네 속에 있는 질료적 흐름들을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으로 바꾸어라.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령토를 넓혀라. 항상 단절을 통해 리좀을 따라가라, 도주선을 늘이고 연장시키고 련계하라, 그것을 변주(變奏)시켜라! 물길을 따라가라. 둑을 만나면 둑을 넘고 큰 산을 만나면 휘감고 에돌아 나가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임제를 만나면 임제를 베어버려라! 아무렴, 점(點)을 만들지 말고 선(線)으로 나아가라. 멈추지 마라! 빗물이 파놓은 물길들. 물길에는 출발점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것은 항상 중간에서 시작하며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물길을 통해 씨앗들을 실어 나르는 식물들에게서 배워라. 식물들은 물길을 통해 탈령토화하며 제 령토를 확장한다. 물길은 감자를 심지도 않고 보리를 심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흘러갈 뿐. 물길은 네가 탈령토화할 수 있는 도주선이다. 물길에서 음악을 취하라. 물길이 곧 음악이고, 수시로 몸을 바꾸는 변형되는 다양체들이다. 물길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너를 버리고 네가 물길이 되어 흘러라!!!
77    《천개의 고원》학습필기-3 댓글:  조회:1872  추천:0  2019-10-07
《천개의 고원》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리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다. 지어 잠꼬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헷갈리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잠꼬대 같아 보이는 그런 부분까지 첫 시작부터 철저히 리해하느라 알골을 썩일 필요는 전혀 없다. 내 생각에는 그런 곳은 잠시 지나쳐버려도 된다. 그러면 우리는 알기 쉽고 생동하고 력동적인 부분과 바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재미나는 부분도 아주 많다. 이 책에는..... 들뢰즈 가타리가 주장하는 바가 뭔지 결론부터 알고 기타 개념이나 문제를 차차 풀어나가는 학습방법도 혹시 방법이라면 방법이 아닐가? 들뢰즈/가타리 주장의 매력은 뭘가? 우선 《천개의 고원》이 지극히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이른 바의 중심도 줄기도 토대도 갖지 않은 ‘리좀’이 보여주는 놀라운 상상력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한다. 실상 우리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배울 것은 무슨 지식이나 심오한 사상에 대한 리해가 아니다. 령감과 상상, 사유의 방법론, 존재의 쇄신/생성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것이 중심에 종속되여 있는 위계(位阶)질서 등 기존의 규범적 질서체계에 대하여 “진절머리가 난다”는 말로 타매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나무(树木적 体系)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우리는 더 이상 나무들, 뿌리들, 곁뿌리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말로 타매할 정도로 나무의 체계를 불신하는 것은, 리좀체계와의 관계에서 고찰할 때 나무체계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비생산적인 체계인 반면에 리좀은 지극히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체계인 까닭이다. 다시 말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서론 부분(리좀)에서 현대사회와 같은 위계질서의 세계를 수목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리좀(뿌리줄기)을 내세웠다. 나무라는 체계는 모든 것이 중심에 종속되여 있고 철저히 등급질서의 사유를 따르는 그런 기존의 규범적 질서체계다. 그러나 리좀은 그와 반대로 탈중심화와 非 위계질서를 본질로 하는 다양체(多元体)로서 중심도 계층도 서렬도 계보도 없고 초월적인 통일도 또 이항 대립이나 대칭성의 규칙도 없으며, 항상 그런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성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서렬과 위계질서와 규범으로 충만된 세계다. 그러나 발전을 거듭해온 현대사회의 리면에는 단순히 수목의 개념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현대사회에는 문명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친자연적이면서도 비체계적인 질서가 무수히 존재한다. 특히 현대와 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 지나치게 위계질서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수목의 개념은 처처에서 인류사회와 자연의 조화발전의 걸림돌이 될 소지가 많으며 이에 반해 리좀의 개념이 훨씬 현시대에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수목의 개념이 중심화를 지향한다면 리좀은 탈중심화를 지향한다. 나무체계가 자기가 몸담고 있는 령토를 지층화하고 그 안에서 탑이나 피라미트를 쌓으며 일직선의 수직형 체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면 리좀은 그것과는 달리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무엇과 련결하고 접속한다. 나무는 혈통관계로서 한핏줄일 때만 서로 통하고 상위이웃과 하위이웃들과만 련계를 가지지만 리좀은 결연관계로서 모든 것과 만나며 만나야만 한다. 기성의 령토를 떠나 다른 것과 만나고 접속하는 것이 바로 탈령토화며 탈령토화하는 과정이 바로 새로운 것을 창조(창신-創新)하는 과정이다. 사유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명하고 발견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즉각 페기해야 한다. 왜? 그것은 죽은 사유니까. 죽은 사유는 내부에서 작용하는 속도들과 변용태들을 끌어내 새로운 순환의 선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새로운 순환의 선을 타려면 작동하는 옛 힘들의 순환을 정지시키고 해체해야만 한다. 옛 순환이 정지되지 않고서는 새 순환은 작동하지 않는다. 지층은 기성의 위계체계이며 이미 형성된 중심이며 령토이다. 되기를 위한 령감생성(灵感生成)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당신은 력사의 재귀(再歸), 노예의 도덕에 매인 하수인,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다.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 등을 통해 지층에서 벗어나야 창조로 나갈 수 있다.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은 예술에서의 아방가르드(先锋派)와 상당히 닮아 있다. 그는 정지되여 경직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들뢰즈의 욕망리론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도 다르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동원해 억압된 욕망의 양상을 가족 내부 차원에서 분석했다면, 들뢰즈는 욕망의 창조력을 강조했다.
76    《천개의 고원》학습필기-2 댓글:  조회:1782  추천:0  2019-10-06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천개의 고원》서론부분인 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관계이며 오직 결연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나지 않는 것이다...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40여 페지에 달하는 서론부분에 머리가 아프고 아찔할 정도로 수많은 개념이 등장하는데(례컨대 수목형 체계, 리좀형 체계 등 외에도 분절선, 분할선, 선, 지층, 령토성, 절편성, 도주선, 탈령토화운동, 탈지층화운동, 기계적배치물, 다양체, 고른 판, 기관 없는 몸체, 문학기계,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어린뿌리체계 등 매우 다양함) 그러나 리좀형 체계와 수목형 체계에 대한 묘사만큼은 머리가 시원해지도록 나에게 생동한 이미지를 안겨준 것 같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樹木的 體系’란 위계적(位階的)인 체계로서, 의미화와 주체화의 중심을 포함하며, 조직된 기억과 같은 중심적 자동장치를 갖고 있다. 위계(位階)란 벼슬의 품계나, 지위나 계층의 등급을 일컫는다. 이처럼 위계적인 체계에서 하나의 개체는 오직 하나의 상위이웃을 가질 뿐이다. 분류학에서 호랑이는 고양이라는 상위이웃을 가질 뿐이고, 고양이는 개라는 상위이웃을 가질 뿐이다. n명이 발포하게 하는데 오직 한명의 장군이 필요한 그런 관계, 그것이 바로 중심화 된 수목적 체계의 특징이다. 그러나 리좀은 탈중심화와 비 위계질서를 본질로 하는 다양체이다. 리좀은 나무나 뿌리와 같은 것으로 표상되는 사유의 재현모델을 따르는 기존의 담론과 제도들에 구현된 규범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성으로 나아간다. n명의 사람 가운데 오직 하나의 공통된 친구를 제거하는 것,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 혹은 수목형 체계에서 오직 하나의 중심인 1을 제거하는 것, 이를 저자들은 n-1이라고 표시한다. 요컨대 n-1, 혹은 중심의 제거, 바로 이것이 수목적 체계와 대비되는 리좀적 체계를 정의하는 명제다. 이런 점에서 리좀이란 非 體系가 아니라 非 中心化된 체계요, 각각의 부분들이 중심으로 귀속되는 상위의 이웃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이웃과 만나고 접속하는 체계고, 그 자체로 유의미한 다양한 집결지를 가질 수 있는 체계며, 그런 만큼 여러 방향으로 열린 체계고, 접속되는 항들이 늘거나 줄어듦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리좀과 나무의 이항대립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사본과 지도, 무리와 군중, 분자와 그램분자, 소수와 다수, 유목주의와 정주주의, 전쟁기계와 국가장치, 매끄러운 판과 홈 패인 판과 같은 ‘천 개의 고원’의 가장 중요한 중추적인 개념들로 변주되고 넓혀진다. 이것들은 수없이 많은 창조적인 연결접속들로 이어지고 이것들 속에서 다시 다양한 변이들을 만들어낸다. 이와 같이 脫 중심화와 非 위계질서를 본질로 하는 다양체(多元體)로서의 리좀은 기존의 규범적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생성을 이룩한다. 불파불립(不破不立)-파괴가 없이는 건설도 없다는 성어를 련상시키는 부분이다. 그러나 리좀은 파괴를 앞세우는 것만으로 새로운 생성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은 또한 활짝 열려있는 상태에서의 무수한 ‘창조적 련결접속’으로 ‘다양한 변이들’을 생성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낡은 질서 파괴’와 ‘창조적 련결접속’ 수단을 동시에 구사하여 새로운 생성을 도모하고 다양한 변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중심화된 수목적 체계의 위계질서하에서는 창조적 련결접속이 허용되지 않으며 따라서 새로운 생성이나 다양한 변이들이 만들어질 수 없다.
75    《천개의 고원》학습필기-1 댓글:  조회:2030  추천:0  2019-05-02
근자들어 동북아회원들을 중심으로 시론이나 시평 발표시 철학경전을 인용하거나 철학경전속의 개념을 응용하여 시론이나 시평을 전개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학습을 꾸준히 견지하면 좋은 점이 많을 것이라 확신한다. 들뢰즈/가타리의 철학명저 《천개의 고원》을 읽다보면 그 속의 핵심개념 ‘리좀’ 을 중심으로 ‘접속과 단절’ ‘도주와 도주선’ ‘령토화’ ‘탈령토화’ ‘재령토화’ ‘매끈한 공간’ ‘홈패인 공간’ ‘지층’ ‘겉지층’ ‘곁지층’ ‘웃지층’ ‘생성-되기’ ‘다양체’ 등 수많은 신개념과 만나게 되는데, 처음 이런 개념들과 만나는 경우 어쩌면 머리가 때끔때끔 아파날 수도 혹은 무시로 튀여나오는 신개념들에 거부감이 들 수도 짜증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짜증이 나서 책을 덮어버리고 다시는 열어보지 않는다는 것은 이 책의 중요성과 의의를 전혀 모르고 있거나 혹은 필요한 공부에 대한 의욕을 잃은 지 오래 되여 무슨 취미 같은 것을 유발할 가능성이 전무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독서가의 경우 이런 책이 있는 줄 알고 찾아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일 것이며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라 못 읽는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십분 아쉬운 일일 것이다.   솔직히 우리에게 《천개의 고원》속의 허구 많은 신개념들은 모두가 생소한 것이며, 그것들은 하이퍼시를 배우면서 비로소 하나하나 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개념들은 결코 한두번 혹은 십수번 읽거나 들으면 제대로 그 내포를 알 수 있으리만치 리해하기 쉬운 개념들이 아니다. 어느 한 유명한 연구학자는 들뢰즈 가타리 연구에서 가장 큰 성과를 올린 전문적 권위학자도 그들의 사상에 대한 리해가 3분의 1 정도에 그친다고 했을 정도다. 들뢰즈의 리론을 가장 잘 아는 학자가 그 정도라고 하니 가히 들뢰즈리론의 난해도를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욕을 가지고 그의 저작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적어도 나 개인의 각도에서는 우선 들뢰즈리론의 핵심개념 례컨대 리좀(根茎) 등에 대한 접촉, 연찬과 수락을 거쳐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를 깊이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창작사유면에서 어느 정도 자유(아직은 아주 제한적인 것일 테지만)를 획득할 수 있었다는, 말하자면 그것이 고정관념에 얽매여있던 나의 관념 해방에서 상당한 작용을 했다는 강렬한 느낌 때문이였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천개의 고원》이란 이 철학저작의 강렬한 흡인력은 그것의 세계적 영향력 자체가 충분히 증명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소개에 따르면 20세기 중반 이후 철학적 사유에서 들뢰즈의 리론은 미술, 영화, 문학, 음악, 건축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다. 넷 검색을 해보면 그 영향의 전반에 대해 금방 알 수 있다.  [百度검색: ‘千高原, 德勒兹’.《资本主义与精神分裂(卷2):千高原》(中文版).pdf_微盘下载.] 이딸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천개의 고원》에 대하여 “우리 시대에 적합한 유물론의 부활”이며, “맑스의 에 필적한다”고 말한바 있고, 프랑스 철학자인 푸코도 “언젠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부 15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마다 음악, 미술, 국가론, 문학론, 정신분석비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일관되게 저자들은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여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의 서론으로 두 저자의 이론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1장의 리좀부터 읽기 시작하면 이들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전인미답의 사유의 길을 열어나가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주는 책! 생소한 신 개념으로 꽉 차 있고 그 개념들을 리해하는데 힘이 부치는 감이 들긴 하지만, 그러나 례컨대 핵심개념 리좀부분만 해도 수십번 읽었지만 싫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한 호기심이 유발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가? 확실히 들뢰즈와 카타리의 리론은 보기 드물게 웅숭깊은 리론임이 틀림없고 그것은 또 1000페지를 넘기는 방대한 분량의 리론저서이지만 여느 철학서와는 달리 생동한 비유 은유 환유와 상상력으로 충만된 지극히 볼거리 있고 재미있는 책이라는 것이 시종 기분 좋았다. 강한 흡인력이 책을 계속 파고들도록 유혹한다. 뜻 모르면서도 듣기 좋은 노래가 있듯이 의미가 몽롱하지만 재미나는 시가 분명 있다. 《천개의 고원》은 분명 그 이상으로 신비한 매력을 가진 책이다.
74    남북 정상회담을 기대한다 댓글:  조회:3110  추천:1  2018-02-12
남북 정상회담을 기대한다   남과 북이 국제대회에서 공동입장한 건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인 2007년 장춘동계아시안게임 이후 11년 만, 참으로 감격에 목 메이는 만남의 장면들이었다.    "불과 40여일 전만 해도 이렇게 감동적인 분위기가 되리라 생각조차 못했는데 개회식 때 북남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니 한 핏줄이라는 기쁨을 느꼈다".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을 지켜보며 울먹이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반도평화에 남북공감대는 분명 존재한다. 남북관계 역사상 분단 이후 최초로 조선 헌법상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직계 친족(여동생 김여정)이 한국을 방문,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북의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필요시에는 전례 없는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구두로 전달된 김정은 위원장의 방북제안에 문재인 대통령은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서 성사시켜나가자"고 뜻을 밝혔다. 하여 여건(비핵화문제 관련 朝美 공조 추진)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냐가 숙제로 남았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 이산가족 상봉, 군사회담, 비핵화 논의 등 이후의 발걸음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남북수뇌들의 정치적 용기와 지혜가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어렵지만 풀지 않으면 안 될 숙제다. 슬기롭게 난국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73    홍보시대 간판아리아【3】 댓글:  조회:6795  추천:17  2015-01-22
  홍보시대 간판아리아   ◎박문희      (전호의 계속)   (5)    “호잉래잉영”?    이런 간판어도 있나? 그밑에“好孕来孕婴”이란 한자가 병기돼있으니 망정이지 조선어글씨만 보고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수 없다. 이처럼 연변의 간판은 조선어표기야 틀리든 말든 병기된 한자표기덕에 그 가게가 무슨 가겐지 알아보지 못해 안달 떨어야 하는 고충은 없다.   언론에서 시때없이 암만 떠들어도 흐르는 강물에 칼질하는 격이 되고마는것도 아마 이런 상황때문이리라. 어디선가“한어가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조선어는 저리 가라”는 괴음이 지동치듯 울려오는것 같다. 소름이 끼친다.   조선어와 한어를 반드시 병용하게 돼있는 연변의 간판문화. 있는듯 없는듯 몽롱한“대등번역론리”......   간판번역은 소설번역과 달라서 쉽다면 너무 쉽고 어렵다면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다. 간판번역에서“대등번역론리”가 법적으로 채택된 일은 없다.“好孕来孕婴”은 그 업소의 뜻을 고객에게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한어의 특수한 표달방식에 구애를 받음이 없이 순 조선말로 된 자체의 표달방식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 한어 몇글자에서 탈피하지 못한 결과 “호잉래잉영”이란 같잖은 직역으로 얼렁뚱땅 뭉때버린것이다.   이와 같은 례가 한두가지도 아니고 기수부지다. 때문에 이른바의“대등번역론리”를 깨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현재 한어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고객을 사로잡을수있는 그런 조선말간판어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있다.   “好孕来孕婴”을 그냥 물고늘어지자. “호잉래잉영”이란 직역이 별로라면 대관절 뭐라면 좋을가? “好孕来”는 “孕婴”의 수식어에 불과하니 내버려두고 “孕婴”은 임부와 영아를 뜻하니 간판명을 “xxx 임부와 영아”로 해볼가? 아니 잠간! 연길시내에 걸린 孕婴 관련 간판은 한두개가 아니라 십수개도 넘는다. 그런것을 모조리 “xxx임부영아”라고 해달수는 없다. 그럼“마미와 베이비”? 아니면 "임신부와 영아" 혹은“엄마와 아기”? 어느것을 취하든 “호잉래잉영”에 뒤질일은 없어보인다.    연변은 민족자치주지만 필경은 중국의 한 개 지역이므로 정식 간판등록은 한어로 하게 돼있다. 조선말로 가게이름을 지었다 해도 한역을 해서 신청해야 등록이 가능하다. “덕분”에 민족특색이 자못 짙은 간판어가 한무더기 생겨났다.   “놀러와bar/闹乐哇吧”•“나들이김밥집/拿得利紫菜饭”•“마시자/玛喜扎”•“푸름이독서사/璞润读书社”•“하나로마트/哈那露玛特”•“피자나라/比萨拿啦”•“데이트맥주옥/贴伊特啤酒屋”•“부뚜막/富多满”......    모두가 조선말을 한어로 번역해서 간판에 병기한 것, 그런 번역어가 연변 간판문화의 일대경관을 이루고있다. “누나국밥집”의 경우 “姐姐汤饭屋”이라 해도 안될것 없다. 그럼에도 기어이“努拿汤饭屋”라 음역해 올린것은 특정의 민족지역에서“努拿”란 언어 자체가 가지는 특수한 매력때문일 것이다.   “努拿汤饭屋”처럼 조선어를 한어로 음역하는 일은 허다한데 반해 한어에 대한 조선말음역의 활용이 실제수요를 따르지 못하고있다는 사실은 심사숙고해야 할바다. 한어로 된 간판어에서“鑫(흠)”자는“鑫欣•鑫鑫•鑫丰•鑫红•宏鑫”등으로 아주 흔하게 쓰이는 글이고 그 발음도 쉽고 편하다. 그런데“한자어음독법”에 의한 조선어발음은 “흠흔•흠흠•흠풍•흠홍•굉흠”등으로 굉장히 힘들고 말째다. 간판에 “흠홍신발/鑫红鞋店” 이라고 씌여있지만 “흠홍”두 글자는 극상해야 눈요기나 하는데 그칠뿐 입에 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눙신발”이라고 발음되는대로 적으면 입에 담을 것이다.   이런 일을 가지고 조선족의 번역수준을 론하는건 무리다. 조선어를 한어로 번역해 올리는 이가 누군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조선족이 아닌가. 조, 한 “쌍어”에 막힘이 없는 조선족은 실상 두가지 번역의 대부분작업을 다 떠메고있다.   때문에 새로 등록하는 타민족가게들에서는 조선족 하면 모두가 번역의 달인인줄 알고 후한 번역료를 내걸고 점포의 작명에 이름번역까지 아무에게나 청탁을 해오는데 청을 받은 사람은 호기있게“즉시번역”을 해 주지만 가끔 본의 아니게 번역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한때는 시중에 새로 개발돼나왔다는 이른바의 “번역어플(软件)”을 맹신한 나머지 조선어를 모르는 일부에서 그런 “어플”로 번역한 점포이름을 간판에 새겨올리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져 사람들을 웃긴 일도 생겼었다. 그런데 근간에는 그런 일이 많이 준것 같다. 봄에 피는 꽃도 한철이라더니 “‘어플’맹신”풍조 역시 “한철”을 넘기기 어려운가보다.   (6)    점포이름을 잘 달면 수익성을 높일수 있다고들 한다. 그래선지 연길의 거리에 나서서 일부의 잘된 간판들을 보면 어쩐지 좋아지는 게 나의 기분이다.   “진달래마을아파트분양센터/金达莱小区售楼处”•“아기사랑/爱婴宝孕婴”•“뉴타운포장마차/新城布帐马车” • “사랑의 카페/爱心咖啡/Coffee in love” • “별이 빛나는 밤/星夜” • “양춘가절/艶阳天”...이런 간판들은 그속에서 좋은 어감이나 말맛을 느낄수 있어 좋다.   간판이라면 어감이 좋아야 한다. 연변의 간판에는 “鸭脖”이 “오리목” 지어는 “압발”로 올려지기 일쑤인데 어감상 별로 신통치가 않다. “압발”은 “앞발”과 발음이 같아 거부감부터 앞서고 “오리목”은 “가늘고 길게 켠 목재”의 의미라서 싫다. 그렇다고 “오리모가지”는 더욱 아니다. “猪头”를 “돼지머리”라 높여 쓰면서 오리한테는 “모가지”라고 낮추어야 할 하등의 리유가 없기때문이다. “오리목살전문”이라고 하든지 “오리목뼈구이” 혹은 “오리목덜미료리”로 하든지 하면 어감도 개선되고 말맛도 좀 살아나지 않을가?   다른 점포들과의 차별화를 시도해 “나만의 간판”을 만들어내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 연길에 죽가게가 자그만치 수십집이 있다. 그런데 가게이름들이 별로 신통치 않다. “죽집”이나 “팥죽” 또 간혹 “죽이야기”와 같은 색다른 이름도 있긴 하지만 어감상 따분해보이고 말맛같은걸 느낄수 없는 경우가 많다.   “죽락떡집/粥乐馅饼”이란 간판을 봐도 그렇다. 한어쪽은 그런대로 말맛이 있어보이지만 조선어쪽은 말맛의 냄새조차 없다. 한어를 보면 죽과 떡이 두루 다 주인공인줄 알겠는데 조선어를 보면 떡만 주인공이다. 이름을 “맛죽과호떡전문”이라 달았어도 “죽락떡집” 처럼은 싱겁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경우에 따라 죽가게 이름은 훨씬 더 다양할수 있다. “죽마을/맛죽고을/맛갈죽/ 맛갈참죽/미음전문/새우죽/소고기죽/죽전문점/죽배달전문점” 등등...   언젠가 한국의 어느 미식거리에서 “맛이 죽여줍니다”라는 명칭의 죽가게를 본적이 있다. 일곱글자에서 “죽 ”자 하나만 크고 유표하게 쓰고 나머지는 모두 작은 글씨로 썼는데 발상이 기발한 그 간판이 나한테는 식상한 내용의 간판과 차별화된 신선함을 안겨주는 충격적인 것이여서 지금까지 잊지를 못하고있다. 듣자니 “뒤죽박죽”이란 죽가게도 있다고 한다.   연길시 서시장 근처의 한 침실용품가게에 “따스안/达丝安”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따스한 느낌”이 든건 나만의 감각이였을가? “따스안”의 “모본”이 “따스한”임은 회의의 여지도 없고 “达丝安” 또한 당연히 “따스안”의 음역이다. “따스안”명칭 작명자의 고명한 점은 “한”을 “안”으로 바꾼데 있다. 별 볼일 없던 일개 규정어를 고유명사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따스안”이란 품위있고 근사한 침실용품 가게이름을 탄생시켰으니 말이다. 이와 비슷한 간판작명의 례로 “조은맥주옥/卓恩啤酒屋”, “몬니저맥주옥/勿忘啤酒屋” 등을 더 들수 있다.   이런 조선말간판의 이름이 좋다 함은 읽기에 편하고 거부감이 안들고 그속에 점포의 목표를 겨냥한 묘한 뉘앙스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글자 하나 속에 깔린 티끌같은 묘한 뉘앙스와 지극히 미세한 어감의 차별이 아주 다정다감하게 안겨오는 좋은 간판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하다.    조금 잘됐다는 느낌이 드는 간판 몇가지만 더 들어보자.   “삼일에 살 까기/伊姿美体瘦身”--이 간판을 보면 조, 한 두가지 문자의 글자 수는 같으나 내용은 판이하다. 사흘에 효과를 본다니 살까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심히 지나치지 않을것이다.   “구들박사/电热板”--“전열판”이 아닌 “구들박사”!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박사의 매력, 얼마나 좋은가.   “웰빙!멸치국수/大家快餐”--역시 제마끔인 조,한 명칭. 만약 “1 대 1의 대등번역”을 시도한다면 어떻게 될가? “대가속성음식점”? “따쟈스낵”? 그래도 “웰빙!멸치국수”가 월등히 우수해보인다. 연변이란 특정된 민족지역에서 “대가속성음식점/大家快餐” 하면 따분한 “동어반복”에 불과하겠지만 “웰빙!멸치국수/大家快餐” 하면 적어도 정보량이 배이상 증대(웰빙•멸치•국수)되는데다 생동성에 차별화된 독특미가 있다.   상기 실례는 “별도명명법”의 가능성 지어 필요성을 보여주고있다. 말하자면 공상부문에 등록된 “한어간판어”에 구애됨이 없이 점포의 자체수요에 따라 조선어간판명을 별도로 만들어올림을 허용하자는 것, 아니 허용만이 아니라 그것을 대대적으로 제창하자는 것이다.   이를 관념적, 실천적으로 끈질기고 확실하게 밀어부친다면 연변 간판문화의 획기적인 변화를 유발할수도 있겠다는것, 그러면 종당에 조선말같지 않은 조선어간판어를 모든 간판에서 몰아낼수도 있겠다는것이다.   [끝]    《문화시대》2014년 제6기  
72    홍보시대 간판아리아【2】 댓글:  조회:6949  추천:21  2014-11-05
홍보시대 간판아리아   ◎박문희    (전호의 계속) (3)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저급적인 오류도 없고 억지번역으로 생기는 딱딱함과 어색함도 없어 친절하고도 자연스럽게 안겨오는 그런 생동하고도 창의적인 간판이 우리 도시의 모든 거리를 밝게 메웠으면! 이것이 시민들의 소망일것이다.   연변의 간판은 국내 다수지역과 달리 번역작업이 필수다.“번역”이라 하면 직역(直译), 음역(音译), 의역(意译) 등 수단이 동원되기 마련인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먼저 “직역”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古术点穴院”같은것은 “고술점혈원”으로 직역이 제격이며 그 근거도 찾아볼수 있다. “牛肉面”은 “우육면”으로 중국조선어사정위에서 만든 한조대역법에도 이미 규범화돼 올라있다.“都市驿站”,“松林阁”은 간판에 “도시쉼터”,“솔밭집”으로 씌여져 보기에 아주 정답게 안겨오지만 실은“도시역참”,“송림각”으로 직역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卫浴",“佳音发艺”,"日杂店",“供求世界”,"肥牛城"의 경우 그것을“위욕”, “가음발예”등으로 직역하는것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卫浴”은 상황에 따라 “욕실설비/욕실용품/욕조”로, “肥牛城”은 “신선로/소고기신선로/샤브샤브”로, “劳保日杂”은 “로동보호용품일용잡화”로, “佳音发艺”는 “쟈인뷰티헤어/가음머리방” 등으로 조선말규범에도 맞고 발음도 편하게 풀어쓸 여유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许黑鸭”이란 료리는 2005년도 연길에서 탄생한 브랜드인데 “허흑압”이란 조선말 직역명칭을 입에 올리기가 너무 힘들었던 탓인지 그 맛에 대한 관심조차 별로 일으키지 못한듯하다. 만약“허씨네 깜장오리 특별메뉴”라든가 “연길브랜드—-까만오리”이런 식으로 했다면 어땠을가? 하다못해 음역을 취해 "쉬헤이야 특별료리전문"이라고 했어도 말번지기가 “허흑압”보다는 덜 어려웠을것이다.   “早敎中心-조교쎈터”. 여기서 "조교"는 분명 틀리는 “직역”이다. 대학에서 교수의 지시에 따라 학술연구와 사무를 돕는 직위로“조교”가 있고 중국에서 영주권을 갖고 있는 조선교민도“조교”이다. 이런 상황에서 “早期敎育”의 준말인 “早敎”를 “조교”로 직역할수 없다.“早敎中心”은 “조기교육쎈터”로 돼야 한다.   실상 우리가 보다 자주 접하는 문제는 “사이비직역현상”이다. "검패(箭牌) 주방가구", "문봉(文风)서점", "리침(利晨)리발점", "돈화로명(鹿鸣)산장", "소군(晓军)부품" “소동 (晓东)특색구이”,“연화(艳花)보신탕”,“운룡(运隆)식당”,“가화(家合)식품”,“만국첨(万果甜)슈퍼”,“전구(站久)꼬치집”,“명사테마객전(客栈)”,...뭐 이런게 수두룩한데 피끗보면 문제가 별로 있어보이지 않지만 기실 모두가 오역이다. 모르긴 해도 箭(전)은 剑(검)과 한어발음이 같으니 당연히“검”일 것으로 착각했을수 있겠고, 같은 리유로 风(풍)은 峰(봉)과, 晨(신)은 钱其琛(전기침)의 琛자와, 鹿(록)은 路(로)와, 晓(효)는 小(소)와, 艳(염)은 宴(연)과, 隆(륭)은 龙(룡)과, 合(합)은 和(화)와, 果(과)는 国(국)과, 站(참)은 战(전), 栈(잔) 역시 战과 한어발음이 같으니 우에서 보는 간판어처럼 쓰는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했을수 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게 아닌것이다. 조선어는 필경 한어와는 별개의 언어체계인만큼 한어발음이 같다고 해서 한자어발음도 반드시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는것이다. 더도 말고 “站,占,战” 세글자를 보자. 이 세 글자의 발음은 한어로는 똑같지만 조선어 한자음은 “참, 점, 전”으로 모두 다르다.   이제 상기문제를 산생시키는 뿌리요인을 따져보자. 이는 분명 조선어교육 부재의 필연적악과라고 생각한다.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아니, 조금도 심하지 않다. 우리 조선말어휘는 약 70%가 한자어로 되여있다. 한자를 바탕으로 조선말 한자음독법을 리용해 만들어낸 우리말낱말이 한자어다. 또한 한자를 주어진 위치에서 글자의 뜻과 일치하게 해석해 읽는 법이 훈독법이다. 한자어의 음독법으로“한래서왕(寒来暑往)”하면 훈독법으로 찰 한(寒), 올 래(来), 더울 서(暑), 갈 왕(往)이 되는데, 만약 2천자 가량 되는 상용한자어의 음독법을 모르면서도 문제가 안 생긴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것이다.   한자어의 음과 훈을 익히면 평생 그 득을 보게 되지만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조선어학습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문제는 우리의 학교교육에서 교수대강에 의한 한자어교육이 빠져있다는것이다. 바꾸어말하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자음독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으니 적지 않은 학부형들은 비싼 값을 치러가며 자식들에게 과외로 한자어공부(례컨대 천자문학습)를 시키기도 하지만 그게 필경은 제한적일수밖에 없다.   가르쳐 주지도 않고 간판어를 정확하게 쓰라고 하면 못배운 사람들만 힘들뿐이다.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결국 못배운 사람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그러니 간판용어에 이런 문제가 많이 생기만 자연히 자학 등으로 한자어를 배워 언어학자로 된 이들과 번역관련실무를 맡은 공무원이나 전문가들만 욕을 도맡아먹게 돼있는것이다.   (4)    연길의 약방, 아니 중국 전역의 약방간판은 덮어놓고 모두 “대약방”이다. 크면 물론 대약방, 작아도 대약방이다. 약방처럼 평등한 업종이 약방말고 또 있을가 의심될 정도다. 기실 연길의 약방치고 진짜 큰 약방이 있기나 한가? 대부분 작은것 같고 중등정도의 약방도 별로 있는것 같지를 아니하다. 그래도 간판에는 큰“大”자가 약방의 감초처럼 붙어다니는데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글자랑비다. 모든 약방에 다 큰“대”자가 붙는다 할때 사실 그“대”자는 있으나마나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전국 각지 모든 약방의 “대”자를 가차없이 없애라고 호소하고 싶다. 물론 호소하나마나 한 일이겠지만.   한데, 모든 약방들을 분별없이 다 대약방이라고 이름 달아주는것도 그렇지만 성곽 성(城)자를 쓰지 않으면 마치나 간판이 안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성(城)자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문제다. 한족들은 워낙 집주변에 성을 잘 쌓으니까 리해되는 점이 있지만 그옛날 쪽박차고 살길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 조선족은 집주변에 싸리나 옥수수대로 울타리나 두르는데 습관되여 성(城)하고는 분명 거리가 있는데도 누구한테 뒤질세라 간판에 성을 쌓으니 참 기분이 어수선하다. 鞋城-신성, 串城-뀀성, 红酒城-와인성, 台球城-당구성, 电子城-전자성, 批发城-도매성, 饺子城-물만두성...말짱 이런 식이다. 그래 “성”자를 모조리 뽑아던지고 “모카와인, 신주물만두, 양고기꼬치, 신사당구, 아리랑전자, 신발도매” 이런 알맹이만 남겨두면 정말 간판이 안된다는 말인가?   한어간판어가 조선말로 이상하게 “번역”되는 상황을 흔히 볼수 있다. “日月红”이 “해달홍”으로,“一口香”이“한입향”으로,“异火香”이“이불향”으로,“碳烤家”가 “구이가”로, "鲜鱼馆"이 "선물고기집"으로,"梦乡园" 이 "꿈향원"으로 번역된 례가 그렇다. 여기서 日月红이나 一口香 등은 가게의 명칭으로 명사화된것인데 간판은 그것을 마음대로 의역(“日月红”의 “해달”,“一口香”의 “한입”)혹은 직역(“日月红”의 “홍”,“一口香”의 “향”) 을 해서 “해달홍”, “한입향”으로 합성했다. “이불향”, “구이가”, "선물고기집"이나 "꿈향원"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는 번역이 아니다. 우리말을 어지럽혀 웃음거리를 빚어내는것이다.   의역어와 직역어의 합성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간판어“骨汤米粉”을 골탕쌀국수로 번역하면 큰일난다. “그집으로 골탕먹으러 가자!” 하면 말이 되겠는가? 국수집의 립장에서도 손님에게 “골탕을 먹인다”면 죄되는 일밖에 없을것이다. 때문에 점포이름을 “뼈탕쌀국수집”으로 하는게 비교적 안전하다. 그런데 실제 "뼈탕집에 가서 골탕먹었다"는 말은 없지만 "골탕집에 가서 뼈탕 먹었다"는 식의 말은 있다고 한다.   “달리쿨문신(跑酷刺青)”이란 간판어에서“刺青”과 “문신”은 정확히 대응되는 언어지만 “달리쿨”은 역시 웃음거리다. “달리쿨”이란 대체 어디서 온 이름일가?“달리다(跑)”와 “쿨하다(酷)”에서 왔을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사 “달리다”의 어근 “달리”와 형용사“쿨하다(酷)”의 어근 “쿨”자만 따다가 한데 붙이는 식의 이런 고유명사 합성법은 있을수 없다. 실제로 "跑酷刺青"의 업소주인은 업체이름을 체육종목의 일종인 "跑酷(영어표기 Parkour)"에서 따왔을수 있다. 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업소의 조선말명칭은 “파쿠르문신”이여야 맞다.   간판어를 취급할 때 정말 주의해야 할점이 있다. 원 간판어의 뜻이 뭔지를 똑똑히 알고 번역을 해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名花串城/명꽃뀀성”이란 간판을 보면 명꽃이란 말이 이상하다. 명화면 명화지 명꽃이라니? 인터넷검색을 해보면 한국의 진도지방 말로 면화를 명꽃이라 한다는 것이 바로 나타난다. 그러니“名花”는 의례 “명화”로 바뀌여야 한다. 그리고 방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串城”도 “뀀성”으로 할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양고기/소고기)꼬치”,“꼬치전문점”아니면“꼬치구이” 혹은 “꼬치맛집”과 같은 정갈한 우리말로 새겨올려야 하는것이다.   “索菲亚衣柜/쏘베야옷궤”에도 문제가 있다. 옷 의(衣)에 궤 궤(柜)이니 당연히 “옷궤”겠거니 하고 “쏘베야옷궤”라고 했는데 “衣柜”란 실상“옷장, 장롱”, 말하자면 한어의 立柜,衣橱를 두고하는 말이고 “옷궤”란 “옷을 넣어 두는 나무상자”, 즉 한어의 “箱笼”, 우리말의 휴대용 옷궤나 트렁크를 일컬음이다. 그러니 홍보물의 원뜻과는 거리가 먼것이다. “索菲亚(Sophia) ”도 “쏘베야”가 아니라“소피아”로 해야 옳다.   서시장에 “土家酱香饼”이란 음식가게가 있는데 조선말간판어는 “토집장향병”이다. 한데  가게명칭중의 “土家”란 사실“흙집”이나 “토집”이 아니라 우리나라 56개 민족의 하나인 “투쟈족”을 일컫는다. 따라서 “酱香饼”이란 투쟈족의“전통맛떡”을 의미하는것이다. 그런데 “土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은채 성급하게 “번역”을 해 올리다보니 이런 웃도울도 못할 문제가 빚어진것이다. 투쟈족관련자가 이런 사실을 아는 나들에는 모종의 불쾌한 일도 생길만 하다. 이런 의미불명의 간판어가 지금도 장마당 한복판에 버젓이 자리하고있으니 투쟈족형제들과 매일 그 간판을 보는 손님들에게는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다음 호에 이음) 《문화시대》2014년 제5기  
71    홍보시대 간판아리아【1】 댓글:  조회:7050  추천:25  2014-10-04
         홍보시대 간판아리아           (1)  오늘 시대는 홍보시대다. 홍보를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나라든 기업이든 개개인이든 막론하고)를 세상에,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시대다. 모든 업체에 걸려있는 간판은 바로 그 업체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그런 간판들이 모이면 도시의 얼굴이 된다.   30년 전 연변의 거리를 처음 와 보는 한국 손님들이“우리나라(한국) 70년대 초반의 모습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시장경제가 갓 도입될 무렵 길가의 낮고 꾀죄죄한 점포들 이마에 초라한 간판들이 무질서하게 달려서 호객하던 때를 련상하면 참말 격세지감이 드는 오늘이다.   간판문화가 무질서에서 유질서로 급격히 전환하는 요즘인지라 물론 꼬집을 점이 수두룩하지만 모든 일에 과정이 있게 마련인데 어찌 단술에 배부르기를 바라겠는가? 금년 초인가 연길공원 입구쪽에서 큰길 건너 20층도 더 돼보이는 건물의 앞면에 다닥다닥 (그러나 질서있게) 붙어있는 간판들을 한참씩이나 바라보면서 퍽이나 감개무량해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몹시 뜻밖의 일이였던 까닭에 그 일로부터 받은 충격이 꽤나 컸던것 같다. 그날 나는 인터넷사이트를 유람하던중 吉林边务督办公署에 대한 글제목을 발견하고 바로 그 내용물을 읽고있었는데 무심중 잘못 번역이 된 간판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 吉林边务督办公署를 소개한 글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연길시 하남가두 광화로 서광골목 7-17번지. 고층건물속에 포위되여있는 자그마하고 낡은 2층건물, 이 건물이 바로 연길에서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청조시기의 유일한 건축물이며 길림성중점보호문화재인 길림변무독판공서—일명 수변루(吉林边务督办公署楼--戍边楼, 도윤루라고도 한다)이다...그런데 지금은 현판 사진에 보듯이 (‘吉林边务督办公署’가) ‘길림변무독사무서’라고 되여있다. ”   사진을 보니 현판이 두개가 가지런히 걸렸는데 왼쪽은 한어원문이고 오른쪽은 조선어 번역문이였다. 원문은“吉林省重点文物保护单位 吉林边务督办公署吉林省人民政府 1999年2月26日公布”인데 번역문에는 “吉林边务督办公署”가 “길림변무독사무서” 로 되여있고 락관의 “公布”는 “공보”로 되여있었다.   “길림변무독사무서”라, 그러니 督办公署의 督이 앞의 边务에 붙어 边务督이 되고 나머지 办公署가“사무서”로 번역된 결과 督办과 公署가 아주 엉뚱한 언어로 바뀌고만것이다. 그리고 “公布 (공포)”도 의미가 완전히 다른 언어인 “공보(公报)”로 탈바꿈해 결국 성인민정부의 엄숙한 의도가 번역문에서는 완전히 왜곡돼 전달된것이였다.   필자는1999년도에 걸린 이 현판이 자그만치 15년이나 흘러가는 사이 혹시 시정이 됐을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기대감에 바로 그 이튿날 수변루를 직방 찾아갔었다. 섭섭하게도 실망이였다. 15년전에 걸린 현판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본 자리에 견결히 붙어있었다. 참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간판문제에 대한 나의 관심을 야기했던가보다. 나에게는 진짜 필요이상인 스마트폰까지 하나 사가지고 기회만 생기면 간판찍어모으기를 했으니말이다. 한데 그러다보니 간판모양뿐 아니라 간판의 내용에 대해서까지 관찰하게 되였는데 와중에 일련의 문제를 두루 발견하면서 그것이 이 칼럼을 쓰는데 동기부여가 됐던 것이다.   (2)    연변의 간판문화의 력사는 기실 아주 짧다. 외계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의 언어도 엄청난 변화를 겪고있으며 그런 변화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현재 우리의 간판문화는 기실 외적이미지의 정돈미화에 꾸준히 성과를 올리는 한편 내용물의 혼돈상황개선에 박차를 가하는 시초단계라고 봐도 무방할것이다.   이런 형편에서도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간판어는 다양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조,한 두가지 문자는 법적으로 병용하도록 돼있는것인데 그중 조선어는 또 실질상 대한민국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어, 중국조선어가 혼용중인 상태이며 동시에 한국으로부터 외래어도 대거 수입되고있다. 그 외 영어, 일어, 로씨야어, 회족어 지어 윁남어까지도  적게많게 간판언어들의 향연에 끼여들고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연변의 간판은 아직 “전국시대”에 처해있다고 볼수 있다. 아래의 례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간판에는 “소고기국”이 있는가 하면 “수육국밥”,“우육탕”,“소탕”이 있으며 “전골”,“신선로”가 있는가 하면“샤브샤브”가 있으며“천층떡(千层酥餠)”이 있는가 하면“바삭떡(酥餠)”이 있으며“뀀점”,“뀀성”, “뀀왕”,“대뀀”,“대뀀왕”이 있는가 하면“미친꼬치(味亲串)집”이 있으며 “담배술전매점”이 있느냐 하면“담배술점”,“담배술행”,“연주행(烟酒行)”이 있으며“구두전문”,“신발나라”가 있는가 하면“신성(鞋城)”,“신점(鞋店)”도 있으며 “머리방”,“머리마당”,“미발”,“발예(发艺)”가 있는가 하면 “헤어클럽”,“헤어컨디션”,“헤어스타일”,“헤어시티”,“헤어뷰티샵”도 있다.   이뿐이 아니다.“麻辣香锅”하나가 “매운요리”,“매운료리”,“마라료리”,“마라볶음”으로, 지어“마라향솥”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같은 “疯狂烤翅”도 점포나름대로 “뢰지핫닭날개”혹은 “미더닭날개”가 되기도 한다. “疯狂”이 “狂疯”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狂疯鸡”가 그것이다. 여기에 붙은 조선어간판어는 “매드후라이치킨”이다.   등록상표가“瘦猴”인 瘦猴麻辣烫은 연길시민 류청송씨가 지난세기 90년대에 창출한 브랜드인데 아주 잘 나가는 모양, 전국 각지에 체인점도 두고있다. 그런데 그 간판이 이상하다. “瘦猴”가 “원숭이”,“여윈원숭이”로 된것이 있느냐 하면 “말라꽹이”로 된것도 있다.   이런 례는 얼마든지 들수 있다. 만일 우리의 간판어에 오류가 많거나 또는 그 언어가 어느것이 옳은지 가려내기 힘들거나 사람을 많이 웃길 정도로 추락되여있다면 그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물론 이런 언어들을 모종 규칙에 맞게 규제한다는게 쉬울리 만무하며 하루한시의 해결은 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단지 일부에 존재하는 혼란상일지라도 너무 오래 방치해두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일파만파로 번지는 그 영향을 과소평가할수는 없으니까.   어쨌거나 문제의 시정을 위해서는 간판문화현황을 잘 파악하는것이 우선일것이다. 이른바의 현황이라야 한어로 작성된 간판어를 조선어로 번역(汉译朝)해서 병기한 것, 조선어로 작성이 된것을 한어로 번역(朝译汉)해서 병기한 것, 병용한 조, 한 두가지 언어가 직접 대응되지는 않지만 서로 보완하면서 동일한 홍보목표를 노린것, 세가지 혹은 그이상의 언어(이미지언어 망라)를 “짬뽕”시켜 하나의 홍보목표를 노린것 등등 뭐 이런 것들에 다름아닐 것이다.   이제 상기 몇가지 현상의 범위내에서 일부 두드러진 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해 자유롭게 의논해보고자 한다.   (다음 호에 이음) 《문화시대》2014년 제4기  
70    사진시대 촬영공부론 댓글:  조회:6985  추천:25  2013-01-26
사진시대 촬영공부론   오늘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문자로 표현되기에 앞서 먼저 사진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되고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가? 지난 20세기를 활자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21세기를 단연 사진의 시대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모든 영상물도 기실 사진의 연장에 다름 아니다. 카메라의 세대교체도 그 속도가 절대 컴퓨터에 못지않다. 디지털카메라의 폭발적인 확산으로 원래 사진기자나 사진예술가의 전유물이였던 사진촬영은 오늘 대중생활의 일부, 놀이의 하나로 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촬영전문가들의 역할이 박탈당한것은 아니다. 금년봄 어느 촬영동호회의 일원으로 되어 촬영을 배우면서 절실히 느낀것이 이점이다. 선경대의 가을단풍이며 “9.3”명절의 연길야경이며 맹령사과절의 풍년무며 봄물먹은 평강벌이며 백년부락의 재봉어머니며를 만나며 카메라로 한폭한폭의 사진을 담아내는 가운데 나는 전문기술을 소유한 전문촬영가들의 지도와 인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새삼 통감하게 되였다.   그들은 리론과 실천경험을 겸비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보류없이 타인에게 전수한다. 다년간 연변땅을 메주밟듯 해온 그들은 동호회원들의 촬영실기를 위해 시기, 날씨와 안전 등을 고려한 려정을 짜느라 로심초사하며 새로운 행선지를 개척하기 위해 사전답사를 떠나기도 한다. 동호회의 빈번한 활동에 빠짐없이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항상 그들의 로고에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한다.   동호회와 함께 하는 시간이 나에겐 참으로 소중하다. 함께하는 행정에 즐거움이 가득할뿐 아니라 촬영을 필한 뒤에도 그 즐거움이 그냥 이어지니 말이다. 사진을 편집하고 저장하고 발표하고 교류하는 것 모두가 즐거움의 연장 그 자체다.   고백해야 할 사항이 있다. 나의 촬영경력이 꽤나 길어 적으만치 30여년이라는 것. “갈매기(海鷗)”표 카메라로 시작한 나의 촬영은 그 초기 사진인화지로 직접 사진을 씻어서 발표할수 있었을만큼 조금은 “전업적”이였던 적도 있었고 신문에 적지 않은 량의 보도사진을  발표해왔던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촬영입문의 초보자”라고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금년들어 사진배우기를 새로 시작하기 직전까지 디지털카메라의 “수동모드”를 전혀 쓸 줄 몰랐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수동모드”를 모른다는것은 내가 그때까지 “전자동모드”로 사진을 찍어왔다는 것인데, 그것은 카메라셔터를 누를 줄만 알면 나머지는 모두 기계가 알아서 해준다는 의미다. 우수한 사진에는 사상이 살아숨쉰다고 하는데 기계가 사진에 사상을 불어넣는 작업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나절로도 이건 아니다 싶어 큰 마음먹고 좀 자신을 개변시켜볼 양으로 “전자동은 너무 그렇고 반자동을 좀...”라고 했다.   이때 한 전문가 친구가 권고의 말 한마디를 했다. “실패를 미리 많이 맛보더라도 처음부터 완전수동에 집착하라. 그것이 빠른 길이다.”   “완전수동모드(M)”로 찍은 첫 몇장의 사진이 모조리 캄캄칠야 아니면 새하얀 백지가 되여나왔다. 나의 촬영지식이 완전 “제로상태”임이 백일하에 드러나버린것이다. 그렇게 나의 “초짜의 입문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캄캄칠야”와 “백지”의 원인을 찾아내는 작업은 뜻밖에도 지극히 간단했다. 빛을 너무 적게 주면 사진이 백지가 되고 빛을 너무 많이 주면 새까맣게 되는것이다. 그러니까 빛을 너무 많이 주었으면 덜어내서 적게 주면 된다는 얘기다. 알고보면 너무나도 간단한데 우리는 흔히 입문의 그 문턱을 넘기를 거부한다. 조리개 값과 셔터 속도, iso 감광도, 그리고 해상도...몇개 안되는 개념의 문턱을 그토록 넘기 어려워한다는 말이다. 포토샵공부 역시 그렇다.    사진을 배워 뭘 하냐? 가끔 만나는 물음. 아주 단순하지만 록록치는 않은 물음이다. 나의 경우 보통 “취미로 하는거야”라고 짤막히 대답하지만, 평소 촬영을 재미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인지라 “재미가 없다면 내가 왜 이딴짓을 하겠어? 재직때는 하고 싶어도 못했거든.” 이러기도 하지만, 취미가 과연 전부인가 하는 의혹을 가질 때도 있다.   그러면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취미로 촬영을 한다.” 그래. 취미로 하는 수가 있지. “배운다는건 항상 즐거운 일이잖아?” 그래, 컴 앞에서 해방되여 야외로 나가고 사람들과 만나고 건강을 챙기고 스트레스도 풀고 모르는것을 배워익힌다는 모종의 획득감.    그러나 그것이 목적 그 자체일가? 젓가락질이 재미있어서 료리를 먹는다? 삽질이 재미나서 과일나무를 떠다 옮긴다? 분명 석연치 않은 구석이다. 그럼 낚시질은? 많은 낚시군들의 낚시질은 그 취미가 잡아올린 고기를 료리해 먹는데 있지 않고 고기를 낚아올리는 그 순간의 자극의 짜릿함에 있다고들 하는데.   그러나 낚시질과 촬영은 성격이 판판 다른 활동일터이다. 낚시는 생계 혹은 쾌감획득을 목적으로 생명을 가진 수중동물을 “사기적수법”으로 유혹해서 잡아올리는 행위인 반면에 촬영, 례컨대 예술촬영은 순간순간의 빛으로 예술이미지를 그려내는 창조적 예술활동이라고 할수있겠다. 그래서 촬영을 “찰나의 미학”이라고도 하며 사진은 “붓대신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도 한다. 자치주창립 60주년을 기념하여 연길에서는 부르하통강반에서 꽃불축제를 벌렸었다. 하늘에 불꽃을 쏘아올려 만든, 순간에 폭발했다 순간에 사라지는 아름다운 화폭을 그 순간 빛의 원리로 사진속에 잡아넣어 영구화시키는 촬영자들의 창작, 그것은 참으로 고상한 예술창조행위라 하겠다. 그런 우수한 사진들을 그저 취미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니까 찍은 사진이라고 할수 있을가? “취미론”, 어찌 보면 그것은 자신을 취미란 작은 울타리에 가두어넣는 “생각의 조각”일수도 있다. 그런 “생각의 조각”은 촬영활동을 예술창조의 행위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목표설정에 반기를 들도록 유혹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취미론”으로부터의 탈출을 꾀하면 더 넓은 공간이 보일수도 있을것이다.   예술창작의 동기가 없이 놀음으로 하는 촬영은 단순 취미에 귀결시켜도 무방하겠으나 창작을 목적으로 한 촬영활동은 그렇지 않다고 봐야겠다. 모종의 사상을 사진을 통하여 표달하려는 작가, 암만 아마추어작가라 해도 이런 목표의 설정은 가능할것이며 그것은 의미있는 작업일터이다. 사상이 있는 사진, 아마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좋은 사진이 아닐가? 이런 의미에서는 창작사상의 깊이를 벼리는 작업이 필수일 것이다.   자신의 삶의 근저에서 괴여나온 생동한 사상을 순간의 빛에 고착된 피사체이미지를 통해 표현하는 사진, 그런 사진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많이 시도돼야 할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진의 특정경향을 따르면서 새로운 표현양식을 보여주는 광고 등 사진작품들이 시각적 충격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작품들은 보는 이들의 감성을 깊이 자극하고 시선을 오래동안 잡아두는 힘을 가지고있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전통적인 사진 표현양식의 매력이 아주 색바래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디지털기술과 사진의 만남으로 사진을 비롯한 시각예술의 령역이 무한대로 확장된 오늘 시각예술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도 가급적 다양해져야 할것이다.   2012년 제6기
69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댓글:  조회:10119  추천:33  2011-11-12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이는 시인 남영전의 유명한 명제이다. 이 말은 민족이 혈통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혈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같은 민족이라 해서 혈통이 반드시 다 같은 것이 아니고 또 민족이 다르다 해서 혈통이 반드시 다른 건 아니라는 것이다. 고로 남영전은 이렇게 말한다. 민간에서 말하다시피 500년 전 우리는 다 한집식구다. 500년 전에 한집 식구가 아니라 해도 수 천 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긍정코 한집 식구다.   중화의 56개 형제민족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땅위에서 살아오면서 광활하고 부요한 땅을 함께 개척해왔다. 夏, 商, 周에서 秦汉에 이르기까지 한족의 선민 화족과 하족이 황하유역을 개발할 때 여러 소수민족의 선민들도 동시에 주변의 광대한 지역을 개발하였다. 동북만 보아도 우리 조선민족의 선민들인 부여, 고구려, 몽골민족의 선민들인 동호, 다다, 만족의 선민들인 숙신, 읍루 등 부족집단들은 모두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건립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지난 날 우리는 민족을 담론할 때 흔히 혈통에 대해 거론하기를 즐겨했다. 한 민족의 성원들은 왕왕 본 민족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같은 것이며 아울러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믿어마지않았다. 하지만 실상 민족이란 “실제로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한국 고려대학 정호영 교수:《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역사적, 이론적 접근》)인 것이다. 엄격한 과학적 의의에서 말하면 우리나라 현존 민족이나 역사상 존재했던 소유의 민족은 그 혈통이 아주 순수한 것이 아니었으며 모두다 정도부동하게 부동한 혈통이 서로 섞이는 과정을 겪어왔었다. 조선민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 건국대의 신룡복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민족은 35개 이상의 부동한 씨족, 부족이 융합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상고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씨족은 혈연관계를 유대로 결성된 인간군체이고 부락은 혈연관계를 토대로 구성된 씨족군체이며 부락연맹은 혈연관계를 매개로 공동이익을 위해 형성된 여러 개의 부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씨족, 부락, 부락연맹은 혈연관계를 특징으로 하고 있고, 민족은 혈연관계를 초월해서 역사淵源, 생산방식, 언어, 문화 풍속습관 및 심리적동질감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혈통의 사람들도 기나 긴 역사 시기 복잡한 이동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민족으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같은 도리로 원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던 부동한 혈통의 사람들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한 지역에 몰리고 장기간 함께 생활함으로 해서 한 민족으로 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역사연원, 생산방식, 언어, 문화 풍속습관 및 심리적동질감 이런 것은 다 문화적 개념이다. 이처럼 수많은 혈통집단이 부동한 민족으로 형성되는 데는 문화적 요소가 작용하는 것이지 혈통자체가 결정적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남영전은《토템문화와 조화세계》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시조 南敏에 대해 말한바 있다. 남민은 당 왕조 때의 凤阳府 汝南사람으로서 당나라 천보 14년(서기 755년)에 按廉使의 사신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신라국에 표착, 그곳에 자리 잡게 되었는데 남씨가족의 시조로 되었다. 그의 이와 같은 예는 기실 보기 드문 것이 아니다.   조선민족과 漢민족은 같은 성씨를 다수 쓰고 있는데, 설사 김씨, 리씨, 최씨 등 짜장 조선민족 성씨로 보여지는 성씨도 더러 중원이나 그 주변 지역에서 들어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박씨는 그야말로 조선민족의 원색적인 성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의 하북, 료녕 등 성에 박씨가 수천 명 살고 있는데 그들의 민족성분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이나 만족이다. 그들은 모두 청나라 때 조선이민의 후예들이다. 중화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나라 있는 여러 민족은 “네 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네가 있는 관계”인 것이다.    민족과 혈통에 대해서 기실 우리의 옛 성현들은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유가의 “华夷之辩”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공자는 춘추를 지어 이르되 “이적 입중국 하면 칙 중국지요 중국 입이적하면 칙 이적지 하니라(夷狄入中國,則中國之,中國入夷狄,則夷狄之)”라고 했다. 말하자면 동이나 북적 같은 중원주변의 민족이 중원지역에 들어와 화족이나 하족의 문화습속을 따르면 그들은 바로 화하족으로 되는 것이고 반대로 중원의 화족이나 하족이 주변지역에 들어가 그들의 문화습속을 익히게 되면 그들은 동이나 북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이족이냐 화하족이냐는 혈통에 따라 갈라지는 게 아니고 문화적인 구별에 의해 나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이 말은 그른데 없다. 여러 민족은 다 자신의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다. 문화의 구별이 없으면 민족의 구분도 없는 것이다. 56개 민족은 56가지 문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문화의 다름이 곧 문명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56개 문화는 상부상조하는 그런 관계인바 서로 보완하고 어울리면서 함께 빛을 내는 중화민족의 찬란한 대 문화를 형성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56가지 색다른 꽃이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면서 웅장하고 눈부신 연기를 펼치는 것과도 같다. 같은 종의 꽃이 저 앞산에 만개해도 기가 막히게 아름답겠지만 수십 종의 꽃들이 무덕무덕 저 동산에 만발한 모습도 과시 장관일 것이 아닌가!   새 중국이 탄생한 이래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화민족은 민족대단합의 깃발을 추켜들고 일심동체로 사회주의건설과 개혁개방사업을 추진하였으며 드높은 자부심으로 장려한 역사를 창조했다.   중화민족이 거대한 응집력을 과시할 수 있은 것은 중국공산당이란 이 견강한 영도핵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올바른 민족정책과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중화민족의 분복이자 자랑이다. 우리는 이를 소중히 여겨 손상이 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한족이 소수민족과 떨어질 수 없고 소수민족이 한족과 떨어질 수 없으며 여러 소수민족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오늘 날 이 이념은 이미 여러 민족인민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있으며 따라서 단결 분투하여 번영과 발전을 이룩하는 것은 이미 여러 민족인민의 공동한 추구로 되었다. 이는 중화민족이 자강불식의 정신으로 부단히 전진하는데 있어서의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구분된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다.” 남영전의 이 말은 참으로 쇳소리 나는 지론이다.   (2011년 7월 8일, 길림성문련, 성작가협회, 성사회과학원과 길림일   보그룹에서 공동개최한 남영전토템시연구토론회석상에서 한 발언) 【原 文】   民族是文化概念,而不是血统概念   朴文熙     诗人南永前有一句著名的命题叫“民族是文化概念,而不是血统概念”。这并不是说民族与血统无关,而是说民族不是以血统来区分的。比如朝鲜族,整个民族血统却未必都一样;再说我国56个兄弟民族,其血统也未必就不一样。所以南永前说:民间有个说法,500年前咱们是一家。如果500年前不是一家,再往回上溯几千年我们肯定是一家。   我们中华56个兄弟民族从遥远的古代起就劳动、生息、繁衍在我们祖国的土地上, 共同开发广阔、富饶的土地。从夏、商、周至秦汉时期,当汉族的先民华夏族开发黄河流域的时候,各少数民族的先民也同时开发了周围的广大地区。单说在东北,我们朝鲜族的祖先夫余、高句丽,蒙古族的先民东胡、鞑靼,满族的先民肃慎、挹娄等部族集团都为统一的多民族国家的建立作出了巨大的贡献。   通常人们讲民族的时候,都喜欢提到血统,过去,一个民族的每一个成员往往确信本民族成员身上都流着同样的血,而且都坚信“血浓于水”。其实,民族并不是具有同一血统的人群,而是“确信”他们具有同一血统的人群。从严格的科学意义上而言,我国现代的以及在历史上曾经存在过的所有民族,其血统都不是纯而又纯的,都曾经历过不同类型的融合。就拿朝鲜族来说,据韩国建国大学申福龙教授的研究,朝鲜民族是以35个以上不同氏族、部族融合而成的。   查一下上古史, 我们便可知道氏族是以血缘关系为纽带而结成的人们的共同体;部落是以血缘关系为基础而构成的氏族群体;部落联盟是以血缘关系为中介,为了共同的利益而形成的多个部落的联合体。就是说, 氏族、部落、部落联盟以血缘关系为特征, 而民族则超越血缘关系, 以历史渊源、生产方式、语言、文化、风俗习惯以及心理认同等为特征。虽是一个血统的人群,如经过相当长的历史时期复杂的移动过程,也就可以演化出多个民族;同理,原本在不同地域生活的不同血统的人群,因种种原因走到一起,在共同地域长期共同生活,那也就可以融合成一个民族。   南永前在一篇叫做《图腾文化与和谐世界》的论文里谈到自己的祖先,说他的始祖南敏就是唐朝凤阳府汝南人,唐天宝十四年(公元755年)以按廉使的使臣身份去日本返回途中遇上了台风飘泊到当时的新罗国定居,成为南氏家族的始祖。像他这样的例子其实并非罕见。朝汉两族姓氏多有相同,即使是金、李、崔等看起来十分地道的朝鲜族姓氏,其中的若干支也是来自汉族。朴氏当属是朝鲜族的原生姓氏,但如今河北、辽宁等省就有几千名朴氏分别是汉族和满族,而他们都是清朝时期朝鲜移民的后代。作为中华民族的成员,我国各民族是你中有我,我中有你的关系, 论血统是无法分得清楚的, 而且也没有必要分清楚的。   其实对于民族与血统这个问题,我们的古圣贤早已有了明确的认识。看儒家的“华夷之辩”,孔子老人家便作春秋曰:“夷狄入中国,则中国之,中国入夷狄,则夷狄之”,也就是说,夷狄到了中原地区,习用了华夏文化习俗,他们就成了华夏族,而中原华夏族如果进入了边远地区,习用了夷狄的文化习俗,他们就成为了夷狄,是夷狄还是华夏不在于血统,而在于所习用的文化,就是说华夷之辩不是血统上的区别而是文化上的差异。   孔夫子说的一点都没有错,各民族都有自己独特的文化。56个民族就意味着56种文化。然而,文化的不同,并不意味着文明的冲突。56个文化相辅相成、相得益彰、相映成趣,好似56个花朵争奇斗艳绽放异彩,形成了一个中华民族灿烂的大文化,这就大大胜过一花独放。   新中国诞生以来,由56个民族构成的中华民族始终展现出巨大的向心力、凝聚力,展现出无比的自信心、自豪感。多年来,各族人民高举民族大团结的伟大旗帜,和衷共济、和睦相处、和谐发展,携手推进社会主义建设和改革开放事业,谱写了中华民族自强不息、团结奋进的壮丽史诗。   中华民族之所以能够展现出如此巨大的向心力、凝聚力,这正是因为有了中国共产党这一坚强领导核心以及她所制定的光辉民族政策, 加上无比优越的中国特色社会主义制度。这是我们中华民族特有的福分,足以让我们引以为自豪,我们必须万分的珍视她,维护她。   今天,“汉族离不开少数民族、少数民族离不开汉族、各少数民族之间也相互离不开”的理念已经成为各族人民的自觉行动,共同团结奋斗、共同繁荣发展的主题已经成为各族人民的共同追求。这是中华民族自强不息、不断前进的力量源泉。   南永前“民族是以文化区分的,而不是以血统区分的,论血统各民族都是兄弟”这一句,真真切切、掷地有声。   (2011年7月8日在吉林省文联、省作协、省社科院和吉林日报报业集团联合主办的南永前图腾诗研讨会上的发言)
68    된장술의 탄생과 그 산고 댓글:  조회:10838  추천:28  2011-11-09
된장술의 탄생과 그 산고   --연변민들레마을과 연변두레마을 분쟁사건 조사실기     1. 술의 력사를 바꾼 오덕장로주   요즘 연변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태여난 된장술이 항간에 급속히 퍼지면서 크게 화제거리다.  된장이 갖고있는 영양물질과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할수 있는 기능들이 분명 된장술속에 녹아 들어가 출시 시작부터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고 술생산허가부문인 길림성기술감독국의 현장검사와 엄격한 검측을 거쳐 생산되고있으니말이다.   하다면 수천년 양주사상 콩에서 술을 걸러낸 전례가 워낙 없는데, 그래 연변민들레마을 리동춘회장을 비롯한 된장술 양조자 제씨들이 짜장 술의 수천년력사를 바꾸었다는 말인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 6월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의 주최하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사상 최초로 열린 “전통된장과 된장술의 영양학적 가치 발굴을 위한 학술세미나”에서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장로주의 탄생을 양주업계의 획기적인 혁명으로 일컫고 그 영양학적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으니 이는 필경 일대 경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흔히 좋은 결과가 쉽게 얻어지는것이 아니듯이 된장술 역시 잉태하여 고고성을 터칠 때까지 모진 산고를 동반했었다.   2. 한국목사와 중국기업인의 악수        연변민들레마을과 된장술의 탄생을 알아보자면 우선 그들의 오늘이 있도록 조건을 제공하여준 "연변두레마을"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   연변두레마을은 1997년, 한국 경기도 구리시 두레교회의 김진홍목사가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의란진 련화촌에 투자하여 설립한 한국독자 기업이다. 김진홍목사는 일찍 60년대 살길이 꽉 막힌 사회최하층 걸식자들을 이끌고 남양만이라는 곳에 새마을 생존터를 마련해주었던 전기적 인물이다. 그후 그는 이러한 공동체운동을 펼쳐나가기 위하여 한국 지리산자락에 "두레공동체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세계 여러나라에 공동체운동정신을 고양, 전파하는 사회적기업체들을 만들어 나갔었다.   당시 연변의 후한 투자유치정책으로 김진홍목사는 연길시 의란진 련화촌의 400헥타르(120 만 평)의 대지와 전체 마을을 50년의 기한으로 임대하게 되였다. 그러나 연변두레마을의 경영체제는 완벽한 기업경영시스템이 아닌 교회식 경영시스템, 말하자면 현장에 책임자를 파견한 뒤 경영보고만 듣고 결책하는 식의 원격조종 관리체계여서 실행초기부터 예상외의 문제점들을 많이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현장에 파견된 총경리가 교회식으로 일군들에게 새벽기도를 강요하는가 하면 탈북자를 수용하는 등 중국정책에 위배하는 일들을 골라가면서 저지르다보니 자연 지방 관련 당국의 주의를 불러일으키게 되였고 나중에는 책임자가 추방당하는 처벌까지 받게 되였다. 설상가상으로 보상금을 받고 련화촌을 떠났던 원주민들이 연변두레마을에 란입하여 소동을 부리는 바람에 마을경영에 큰 차질이 빚어질수밖에 없었다. 이에 김진홍목사앞에 시급하게 나선 특급과제는 신도들의 헌금으로 세운 연변두레마을을 어떻게 기사회생시키느냐였다. 김진홍목사가 해결책을 찾지 못해 밤잠도 설치던 그때 마침 리동춘씨가 등장했다.   리동춘은 흑룡강성 태생으로 개혁개방후 조선족농촌인구의 도시 및 해외진출로 농촌마을이 공동화되고 집체경제가 무너져나가는 형편에서 분산된 조선족농촌마을을 병합하여 집중촌을 건설함으로써 조선족농촌 재조합발전의 시대를 연 인물이였다. 언론보도를 통해 리동춘의 사적을 접한 김진홍은 연변두레마을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리동춘과 같은 원견, 능력과 지도력을 가진 현지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고 즉시 한국두레공동체운동본부의 동북아본부장인 임진철씨를 파견하여 리동춘과 접촉하도록 하였다.   당시 북경에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던 리동춘은 임진철교수가 일개 한국인으로써 조선족 농촌사회 해체위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대하여 경이롭게 생각하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뒤미처 2003년 1월 9일, 북경중앙대학 황유복교수를 대회장으로 모시고 그를 위시한 조선족사회지성인과 농촌간부들, 그리고 한국의 농업계인사들이 함께 하는 중국 최초의 조선족농촌발전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그번 대회를 계기로 리동춘은 새로운 인생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였다. 아울러 김진홍목사와 그의 동지들은 리동춘을 신임한 나머지 아예 리동춘을 권유하여 북경의 개인 사업체를 버리고 함께 연변두레마을을 건설하자고 거듭 제안해왔다. 그들의 끈질기고 진정어린 요청과 후한 투자조건, 그리고 자기가 추진하는 뜻과 비슷한 공동체운동의 비전에 마음이 동한 리동춘씨는 마침내 두레마을 건설에의 동참을 결의하게 되였다.   김진홍목사는 리동춘을 대표로하는 중국조선족발전기금회준비위원회(가칭)에 연변두레마을의 땅 100헥타르를 무상기증하기로 결정하고 2005년 5월 12일 한국 국회의사당 소회의실에서 기증식을 성대하게 치렀으며 정착에 필요한 상당한 투자와 지원약속도 하였다. 드디여 리동춘은 당년 12월 15일 독자적으로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를 설립하였다.   3. 좋은 만남 좌절의 시작   김진홍목사와 리동춘씨의 첫 합작사업은 신심과 열정이 충만한 가운데 시작됐다.   연변두레마을, 민들레마을과 한국순창진미식품주식회사 등 3자가 연변두레마을 기성의 된장공장을 합작운영키로 하고 민들레마을과 한국순창진미회사에 공장 전체를 인계했다. 매년 500톤 이상 전통장류 생산수출계약도 체결했다.   김진홍목사는 리동춘씨를 연변두레마을의 공동개발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연변두레마을 개발사업의 모든 업무를 위임한 동시에 리동춘씨와 공동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 근 만자에 달하는 연변두레마을개발계획서와 신청서를 상정하였다. 당시 자치주정부 란승관 부주장은 드높은 관심을 가지고 친히 신청서에 지시사항을 달아서 연길시정부에 이첩하였으며 드디여 연길시 강백준부시장이 도시건설계획국에 사업검토를 지시하고 나아가 개발도면을 전면적으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한창 사업이 무르익어 가던중, 2006년 2월 연변두레마을에 갑작스런 인사변동이 생겼다. 당시 연변두레마을의 총경리로 사업하던 정병석씨를 대체하여 현임 박상돈씨가 총경리로 부임돼온것이였다.   박상돈씨는 부임하자 된장공장의 합작을 부정하고 나섰다. 불문곡직하고 자기의 부하직원(한국인)을 시켜 합작공장의 열쇄를 파쇄하고 합작측의 직원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길을 막았다. 이 일을 알게 된 한국두레공동체운동본부는 박상돈씨를 파견할 때 업무교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명하면서 곧 해결해줄 것이니 합작측더러 참고 기다리라고 양해를 구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박상돈씨는 합작공장을 빼앗아내고서는 오히려 합작측이 계약내용을 리행하지 않았다고 거꾸로 바가지를 들씌우면서 리동춘씨를 “외국기업을 통째로 삼키려는 날강도”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양측은 심각한 대치상태에 처하게 되였으며 그것은 또 무시로 충돌로 이어졌다. 와중에 경찰의 조사를 수차례 거치기도 하였다. 합작측은 문제가 없으면서도 번번이 조사를 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경찰측은 민사사건이니 아예 법으로 해결하라고 밀어부쳤다. 결과 합작업무는 정지되고 따라서 수출계약리행은 불가능해졌으며 그로 해서 빚어진 손실은 해가 바뀔수록 계산하기조차 어렵게 될 것이였다. 김진홍목사가 개척한 합작사업이 박상돈부부의 불가사의한 소행으로 인해 철저한 파산의 기로에 놓이게 된것이다.   합작계약에 연변두레마을은 40%의 주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실무능력이 없어도 합작만 성사시켜나간다면 50년이란 긴 시간에 거대리익을 창출할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뭣이 불편하고 불만스러워서 이 합작을 박살내지못해 안달을 떤단 말인가?   4. 갈등의 주범--신앙과 문화의 차이     박상돈씨 부임 한달후 그의 부인인 임명자장로가 한국두레교회의 파견을 받고 선교사의 이름으로 연변두레마을에 나타났다. 그는 연변두레마을 교육원장이란 명의를 걸고 민들레마을의 사업에까지 사사건건 참견하기 시작했다.   봄을 맞아 민들레마을에서는 구덩이를 파고 마을어구에 장승조각상을 해 세우기 시작했다. 임명자장로는 장승세우는 일은 미신활동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세우지 못하게 방해하고 나섰다. 기독교문화에서는 장승문화를 용납할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길섶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면 안된다는 것이였다.   리동춘씨는 생태산업발전과 결부하여 토템문화를 연구하는 학술세미나를 조직한바 있다. 임명자장로는 이것도 미신활동이라고 하면서 반대해나섰다. 리유는 학술회의 주제가 "토템문화가 인류에게 주는 계시"라는데 이거야말로 황당하다는것이다. 인류에게 계시를 줄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하느님뿐인데 토템문화가 인류에게 계시를 준다고 하니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화와 리념의 차이, 신앙의 차이로 량자간 모순의 곬은 갈수록 깊어지기 시작했다.   5. 조작된 음해사건들   1) 기증한 토지가 사기극으로 리동춘씨가 기증받은 땅을 다루려고 하니 100헥타르중 70헥타르는 연변두레마을의 전임 총경리가 김진홍목사 몰래 한국기독교장로인 신씨라는 사람에게 이미 사용권을 팔아넘긴 땅이였다. 김진홍목사가 그것을 모르고 리동춘에게 기증했으니 결국 그 땅의 새 “임자”가 나타나 김진홍목사와 리동춘은 부득이 법정소송에 말려들어 패소하게 되였다. 리동춘씨가 중급법원에 상소할것을 요구했으나 박상돈씨는 상소를 거부하다가 두레본부의 핍박에 의해 서류만 제출하고 비용은 지불하지 않아 상소인이 오히려 피상소인으로 전락되여 다시 한번 패소하는 랑패를 보게 되였다.   2) 모든 투자금약속이 백지화 리동춘씨와 함께 추진하는 연변두레마을 개발계획은 실현될수 없는 공상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심지어 자기의 지휘본부까지 눈에 넣지 않고 적대모순으로 끌고 가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등 현장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모든 사업과 투자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토지 임대 1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연변두레마을의 땅은 여전히 페허상태에 처해있다.   3) 상급 김진홍목사도 막무가내 한국두레본부에서는 2008년6월 공문을 내려 된장공장을 민들레마을에 넘겨주라고 지시했으나 한사코 불복했다. 이에 김진홍목사가 직접 현장에 행차하여 민들레마을의 일군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지나간 불미스런 일은 서로가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저녁중으로 박상돈씨부부와 잘 상의하여 해결할터니 기대하라고 새삼스레 약속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박상돈부부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약속을 어긴 채 귀국해버렸다.   김진홍목사는 귀국후 동료들 앞에서 “리동춘은 우리가 필요하여서 초청해온 분이니 죄가 없다. 그를 이런 곤경에 처하게 하여 너무도 안타깝다”면서 림시공장을 짓고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도록 한화 2,000만원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4) 순창회사직원 경상해 사건 합작자인 한국순창진미식품주식회사에서 시비를 따지러 연변두레마을을 찾아왔다. 순창은 한국고추장의 대표브랜드이다. 순창회사는 연변두레마을에서 된장의 원료를 생산하여 수입하고자 합작에 동참했던 것이다. 그런데 멀쩡한 기업이 생산을 시작도 못한채 두레본부의 조처만 기다리는 판이였다.   그러나 무한정 참고 기다릴수만은 없는 순창진미회사는 2008년 12월말 드디여 연변두레마을에 와서 문제를 걸고 들었다. 합작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리기까지 하였다. 와중에 순창측 파견을 받고 온 직원이 연변두레마을 마당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들이닥친 5~6명 괴한들에게 구타당하여 팔뼈가 부러지는 경난을 치르게 되였다.   5) 민들레마을 전기선 절단사건 2009년 11월, 박상돈씨는 민들레마을에서 전기세를 일년동안 내지 않았다는 리유로 엄동설한 자기의 부하직원을 시켜 고압선에 올라가서 연변두레마을로부터 민들레마을로 이어온 전기선을 끊도록 사촉하였다. 이로하여 민들레회사 직원들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농호들이 근 반개월간 전기가 끊기여 밥도 제대로 끓여먹지 못한채 추위에 떨면서 지냈다. “기독교인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던데 이 사람들 기독교인 맞는가?” 하는 원성이 빗발쳤다.   사실 연변두레마을의 박상돈씨는 리동춘과 한국 김진홍목사댁에서 열린 두레공동체운동본부 회의에 참가하여 민들레마을에 농사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지불각서를 쓴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상돈씨는 보상금지불은 고사하고 그 돈에서 전기세를 계산하자는 제안도 받아 들이지 않고 전기선을 끊은것이였다.   6) 인권유린과 중상해 사건 2010년 민들레마을에서 된장술이 개발되여 술공장을 한창 신축하고 있는데 박상돈씨가 수도물을 끊었다. 수도물은 연변두레마을의 동의를 거쳐서 그곳 우물에서 이어온 것이였다. 지역주민들이 박상돈을 찾아가서 왜 물을 끊느냐고 따지자 박상돈은 리동춘과 모순이 있어서 끊었다고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나섰다.   이에 분개한 민들레마을 일군들이 저녁에 박상돈씨가 승용차를 몰고 들어가는 길을 막아나서 그와 시비를 따지자고 하였다. 갑자기 승용차의 뒤문이 열리더니 박상돈의 부하직원인 왕반장이 뛰여내리면서 쇠사슬을 휘두르고 벽돌장을 뿌려서 민들레마을의 직원 한사람의 머리에 타박상을 입혔다. 연길병원에 긴급호송해가 진단한 결과 피가 머리속으로 떨어져 두번의 수술을 받았다. 감정결과 중상해로 왕반장은 응징을 받기도 하였다.   6. 이상한 소송과 명징한 판결   2011년 초, 연길시법원으로부터 리동춘한테 두가지 소환장이 날아왔다. 연변두레마을의 법인대표인 김진홍목사가 민들레마을의 리동춘을 법에 고소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하나는 김진홍목사가 불찰로 중국의 법을 어기고 리동춘에게 땅을 기증하였으니 그 잘못을 법원에서 인정해달라, 따라서 잘못 기증한 땅을 되찾아달라, 한마디로 리동춘을 두레마을 지반에서 몰아내달라는 것이였다. 다음 하나는 김진홍목사가 임명한 공동개발위원장의 권한으로 연변두레마을에 투자유치를 한것이 잘못되였으니 역시 투자유치항목을 취소시키고 관련 투자자를 몰아내달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법정 판결은 무정했다. 결국 두가지 소송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급법원으로까지 상소되여 끌고 나갔다. 결과 리동춘씨의 최종 승소로 판결이 났다. 리동춘씨는 본 소송사건의 전후시말과 동기부여를 보면 이 소송은 분명 박상돈씨가 조작한 것이지 김진홍목사의 소행일수 없다고 단정하고있다.   7. 생태문화예술절과 오덕문화절 그리고 된장술의 탄생       연변두레와 문화와 리념상 지긋지긋하게 충돌해온 민들레마을은 산출이라곤 거의 없는 경영환경속에서 장장 6~7년이란 시간을 지탱해왔다. 연변두레마을은 한국선교회로부터 달마다 봉급과 경비가 조달되지만 민들레마을은 고립무원한 독불장군에 불과하였다. 불행중 다행으로 민들레마을 전통된장을 알아주는 연변소비자들의 주문이 자주 들어와 회사여직원이 들가방에 된장을 담아들고 뻐스를 타고 집집이 배달을 다니면서 연명해왔던 일을 떠올리며 리동춘은 자못 감개무량해했다.   역경속에서도 연변생태문화예술절과 전통된장오덕문화절, 민족의 대표술인 된장술을 배태했다. 이미 7회를 이어온 생태문화예술절과 된장오덕문화절은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는 의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문화지성인들이 인정하는 축제로 되였다.   회사의 설립취지대로 연변에 세계 최대의 민족전통발효식품산업단지를 일으켜 세우려는 민들레마을의 꿈을 간단없이 숙성시켜왔다. 이 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참아넘길수있었다.제품을 만들지 못하게 하면 거꾸로 제품의 시장을 미리 먼저 개척하는데로 방향을 돌리면서 제품개발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렇게 개발된 민들레마을의 전통된장생산공법은 이미 2009년 길림성급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상황이다.   이러한 결실이 밑거름이 되여 2008년 8월 사단법인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까지 설립되였다. 리동춘회장은 “해마다 치르는 축제에 연변두레마을로부터 기증받은 땅의 나머지 30헥타르 토지임대료가 보탬이 되였고 김진홍목사 역시 행사때마다 축사와 함께 대표단을 파견하여 동참해주었으니 감사한 마음은 항상 간직하고있다”고 밝혔다.   맺는 말   중국공민으로서 중국 땅에서 왜 외국인에게 그토록 기시를 받으면서도 참고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리동춘씨는 “얼핏 보기에 이 사건은 밥그릇 빼앗기 싸움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다른 목적의 문화를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우선 서로간 문화에 대한 리해와 소통이 없이는 갈등의 해소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 부간 2011-11-7 제43호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67    스티브 잡스의 “공개유언” 댓글:  조회:11868  추천:25  2011-10-08
   전 세계에 아이폰 광풍을 몰고 온 IT 혁명가 스티브 잡스[史蒂夫·乔布斯]가 이 세상을 하직했 다.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 너무나도 일찍 떠나버렸다.    세상을 바꾼 거인 잡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자 했으면서도 평소 사생활 노출을 꺼려왔던 애플 CEO 잡스, 그의 유언으로 장례식은 몇몇 사람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열렸지만,이 지구위에 그를 추모하는 사람은 아마 그 누구보다도 많으리라 .   2005년 미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한 스티브 잡스의 연설문은 스티브 잡스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봐야 할 텍스트다. 잡스는 졸업생들 앞에서 자신의 불우했던 성장과정, 창업과 좌절 등 속 깊은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특히 암 투병이라는 절망의 나락에서 건진 삶에 대한 깨달음은 큰 울림을 전해준다.   “늘 갈망해라, 우직하게!” “타인의 견해가 당신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라.” “남의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 이와 같은 당시 잡스의 충고는 결과적으로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남긴 마지막“공개 유언”이 된 셈이다.     아래는 잡스의 스탠퍼드대 연설문 가운데 세 번째 부분이다 --- ...................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17세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당신은 옳은 삶을 살 것이다.”   이 글에 감명 받은 나는 그 후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 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인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은 죽음 앞에서 모두 떨어져 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기에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야 합니다.   나는 1년 전쯤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30분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고칠 수 없는 암이기 때문에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생존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에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불치병 판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위를 거쳐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마취상태였는데 나중에 아내가 말하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 밝혀지자 의사들도 기뻐서 함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나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때만큼 내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수십 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도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도그마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은 당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66    지구촌 재앙의 메시지 댓글:  조회:8123  추천:60  2011-05-12
  지구촌 재앙의 메시지   5월 12일은 문천 대지진 발생 3주년이 되는 날이다. 2008년 5월 12일 8.0 규모의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사천성이 전국 여러 민족형제의 지원과 일본, 한국 등 국제사회의 원조에 힘입어 3년간의 복구 끝에 지진피해가 가장 심했던 문천현과 북천현을 사천관광의 새로운 명소로 바꿔놓고 경제도 크게 부상시키는 기적을 이뤄냈지만 그날의 악몽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   정말 명실상부한 대재난의 시대이다. 2004년 12월 14개 국 2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남아 쓰나미, 미국 남동부를 덮친 2005년 8월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금년 3월 일본 동북부지역을 강타한 규모 9.0의 강진과 쓰나미, 쓰나미에 이은 핵 원전 방사능유출의 재앙은 무지개 같은 환상을 현실의 삶속에 그대로 구현시켜주는 눈부신 현대과학도 인류에 복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상상력을 최대한 구사해 만든 재난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인류사상 미증유의 대형 참사들이 지구촌의 현실에 꼭 같이 발생하여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인류사상 전례 없는 대형 참사라 함은 재난 발생시간이 인류사회가 미개시대를 넘어 선지도 까마득하게 오래인,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시대라는데 기인한다.   천재성 재난참사만 해도 진저리치는데, 인재성 재난도 비일비재하여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갈수록 참혹해지는,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 세계자연에너지 쟁탈을 위한 전쟁, 세계패권확보를 위한 전쟁, 종교파쟁이 부른 세 불리기 전쟁, 테러와 반테러의 전쟁...이 세상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하지만 자연과 인위의 재앙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통감하면서도 인류는 결코 미래에로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지구촌 대재난은 과연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가슴 저미는 재난의 순간순간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지구의 안정과 더불어 인류의 행운을 빈다.   [길림신문]201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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