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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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칼럼] 여러 가지 덕성의 조화로운 형성과 발달 댓글:  조회:3929  추천:79  2007-07-15
여러 가지 덕성의 조화로운 형성과 발달박문희 수년전 료녕성당뇨병치료쎈터의 원장이며 거부인 풍세량(馮世良)교수가 안해와 자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천만원에 달하는 전부의 재산을 기꺼이 나라에 바친 사례와 역시 수년전 북경보인외국어대학의 김신덕(金新德)교수가100만원에 달하는 전부의 개인저금과 매년 받아야 할10~20만원 보수를 몽땅 중국과학원 연구생원에 우수교사와 연구생 장려금으로 쓰라고 내놓은 사례를 많은 사람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아마 누구든 그같은 일을 한 두 분을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분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들을 도덕적이다, 인격적이다라고 부르는 것일가?  그 두분은 어떤 바람직한 특성을 지니고 있을 것일가? 우리는 그 두분에게서 평생 동안 남과 자신에게 거짓됨 없이 재산을 모아 온 정직함을 볼 수 있고 평생 게으름 없이 자신의 정력을 깡그리 사업에 바쳐온 근면함을 볼 수 있으며 사치와 랑비, 허례허식을 멀리하고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 온 절제의 특성을 볼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들에게서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의 립장을 헤아려 돕고자 하는 친절과 타인배려, 리타적인 삶의 자세를 찾아볼 수 있으며 재산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쓰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복지에 쓰고자 하는 봉사정신과 공익추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아가 우리는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도 이 모든 일들을 어렵게 결정하여 실행에 옮긴 용기있는 자세도 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그 두분을 도덕적인 분, 인격적인 분이라고 부르게 되는 데에는 바로 우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어떤 바람직한 자질들, 즉 정직, 근면, 절제, 친절, 타인배려, 리타심, 봉사, 공익추구, 용기 등등과 같은 특성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다면 그들에게서 나타난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질들은 과연 무엇일가? 그것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덕(德)"이다. 훌륭한 인성 내지 인격이 필요한 덕들, 이를 테면 지혜, 용기, 절제, 관후, 우애, 성실, 겸양, 믿음, 소망, 사랑이라든가 "유교"에서 말하는 "인, 의, 례, 지, 신"을 지님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관점은 동서양의 륜리학적 전통과 현대 도덕교육론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도덕교육 학자들 역시 인격은 고결함, 정직, 용기, 성실, 진실성 등과 같은 도덕적 자질들이 일관성 있게 실행되여 어떤 덕성들로 이루어질 때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인성 내지 인격에 대해 말할 때 그 사람이 현명하다거나 리해력이 높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성품이 온화하다거나 관후하다거나 절제적이라고 말한다. 이때 온화, 관후, 절제 등과 같은 것들이 바로 덕이며 이런 덕성들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인성 내지 인격을 말하게 된다. 결국 인성은 덕성을 토대로 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성교육은 바람직한 도덕성 내지 인격을 기르고자 하는 것이요 그러한 도덕성 내지 인격은 다시 도덕적 덕들로 구성되는 것이니 결국 인성교육은 자라나는 학생들로 하여금 바람직한 덕들을 잘 갖추게 하고자 진력하는 교육적 노력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덕이 인성 내지 인격의 토대가 된다고 해서 한가지 덕만으로 바람직한 인성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근면하지만 인색하거나 정직하지만 무모하거나 겸손하지만 비굴할 경우 우리는 그런 사람을 건전한 인성을 지닌 사람이라거나 인격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인성의 형성에는 여러 가지 덕성의 조화로운 발달이 반드시 필요하다. 길림신문
26    《물장난》은 아이들의 천당 댓글:  조회:3907  추천:96  2007-06-30
               《물장난》은 아이들의 천당한 녀자애가 외할머니네 집에 놀러 갔다. 집 정원의 꽃밭에 물주는 분사꼭지가 있는것을 보자 본능적으로 물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감히 꼭지를 틀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눈치를 채고 "겁낼것 없어. 꼭지를 틀어갖고 놀아라."고 했다. 하나 녀자애는 갑자기 정신이 든듯 "아니 안돼요. 보모가 물장난을 해선 안된다고  했거든요."라고 했다. "보모가 여기 안계시지 않니? 외할머니가 지금 물장난을 해도 된다잖어?" 그랬더니 녀자애는 "그래도 안돼요."라고 하면서 끝끝내 꼭지 틀기를 거부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딸리아의 녀류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가 한 얘기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 녀자애의 마음이 실상 그애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보모의 그 무엇에 빼앗겨 있음을 알수 있다. 그애는 이미 심령의 자유를 잃은 것이며 보모마음의 노예가 됐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이 아이가 장차 커서 어떻게 될가? 장기적으로 억압된 상태에 처한 심령이 자유로운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수 있을가? 초롱에 갇힌 새처럼 마음의 자유를 잃는다면 과연 일생을 동반할 독립적인격을 가질수 있을가?   국제적 명망이 있는 교육전문가들은 어린이가 건전하게 성장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어린이에게 심령의 자유, 과외독서의 자유, 시간을 스스로 지배할수 있는 자유, 자기로 소비돈을 관리할수 있는 자유, 창조정신과 잠재에너지 발굴에 기폭제로 되는 취미를 가질수 있는 자유가 주어짐이 필요하다고 루루히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장난치며 놀 기회와 자유를 주자고 대성질호하고 있다.  우리 상당수의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의뢰심이 너무 많고 독립성이 너무 차하고 많은 일들은 부모가 대신해 줘야 함을 한스러워 하지만, 기실 이것은 아이들에게 상술한 자유를 너무 적게 준데서 자초한 필연적 결과임을 알아야 할것이다.   "물장난"을 포함한 놀음과 장난은 아이들의 천성이며 어른들이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되는 당당한 권리다. 그런만큼 아이들에게는 대자연속에 들어가 동년배들과 어울려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장난칠 기회와 시간이 주어져야 하는데 지금 아이들은 그 권리를 점차적으로 잃어가고 있다. 성스러운 그 권리를 구경 누가 빼앗아 가는가? 불행하게도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 가정, 학교와 사회이다.  자식이 잘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우리 학부모들은 다투어 아이들에게 과외를 시키고 그들을 각종 재능반에 보내여 재능을 키우기에 급급하며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점수경쟁을 시키고 보충수업을 하고 숙제를 많이 내는것으로 아이들의 놀 시간을 박탈하는가 하면 사회여론도 이런 무한경쟁에 가세하고 부채질해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유형무형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 결과 아이들은 공부에 재미를 느낄 대신 역반심리가 생겨 강박관념과 억지공부의 악몽에 시달리는 고초를 겪는다.  생활수준이 높아졌지만 아이들은 압력에 고달프고 동년의 환락이 없다. 왜 성격이 괴벽해지고 우울해지거나 지어 자페증이 생기는가? 잘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아이들에게는 천성적으로 긍정적욕구(아름다운 꿈)와 향상심리가 내재해 있다. 아이들 자아관리권한 범위내에 속하는 일은 관계하지 않고 애들 자체에 맡겨도 그들이 스스로 알아서 처사할수 있음을 믿어주어야 할것이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관계하지 않는 것"이 바로 "관계하는 것"이다. 그것도 퍽 고명한 관계방법이다.   아이를 교육함에 있어서 일의 크고 작은 구분을 아주 무시한 "간곡한 타이름"만이 능사인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심령의 자유를 주어야 함이 마땅하다면 "물장난을 하지 말라"식의 "간곡한 타이름"은 제발 마음 먹고 접어 두자. 동년은 칠색 무지개라 했거늘 황차  "물장난"은 아이들의 천당임에랴. /길림신문
25    [창업칼럼]겸허함, 침착성, 그리고 강한 정신력 댓글:  조회:3932  추천:78  2007-06-30
직업을 찾는 일부 대학졸업생들은 맨 처음 마음먹고 찾아간 소망회사에서 퇴짜를 맞으면 지레 한풀 꺾여 어쩔바를 몰라하며 전도에 대한 불안감으로 그지없이 황황해한다. 무한경쟁시대에 소망회사를 찾기가 대야에 든 고기 건지기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물론 업종이 갈수록 세분화되여 가는 현실에서 생존필수의 기능을 갈고 닦기에 게을리 하지만 않는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운명의 시련은 어느때든 각오해야 할것이다. 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한 청년은 자기의 영어수준이 퍽 괜찮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문으로 쓴 리력서를 가지고 일부 무역회사에 가 초빙에 응했다. 그러나 받은 답복이란 다 당신과 같은 졸업생은 수요하지 않소이다였다. 그중 한 회사에서는 지어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 회사에는 사람이 부족되지 않습니다. 설사 사람이 수요된다 하더라도 당신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영어를 잘하는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보내온 편지만 봐도 문장수준이 너무 낮고 문법도 틀리는데가 넘 많아요."편지를 받은 청년은 화가 치밀었다. 하여 분풀이편지로 대방에 한바탕 기를 채워주려 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본 그는 분풀이편지를 접고 대신 감사의 편지를 썼다. "저에게 문제를 지적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꼭 배가의 노력으로 영어수준을 높일거예요."며칠후 그는 이 회사의 출근비준통지서를 받았다.겸손하면 믿음을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인데,  이 사례에서 우리는 청년의 겸허함과 아울러 마음과 행동의 침착성도 보아낼수 있다. 겸손과 침착은 또 밑바탕에 깔려있는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리라. 구직청년은 이 점을 꼭 알아두는것이 좋다.하지만 한두차례의 시련만 이겨나갈 준비에 그쳐서는 안된다. 장기적으로 심신을 괴롭히는 시련을 받아당하고 이겨낼 준비를 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미국의 저명한 방송국 녀아나운서 라파엘로는 30년 직업생애에서 일찍 180번 해고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굴하지 않는 오또기마냥 거듭되는 실패앞에서 내내 새로운 운명에 과감히 도전해 나서군 했다. 180번째로 해고당했을 때 그녀는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였다. 철야 고민한 끝에 그녀는 또 새로운 결심을 내렸다. 이틑날 행낭을 짊어지고 181번째로 직업을 찾아나섰다. 드디여 성공한 그녀는 미국력사상 가장 매력이 있는 아나운서로 되였다.181번째의 성공! 아주 전형적인 례다. 여기서 우리가 터득해야 할바는 그녀의 강한 정신력이다. 말하자면 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줄 아는 그의  "오또기정신"이다.누군가 "어려운 구직에 성공을 하는데는 비결이 없으며 기가 막힌 해법도 없다. 꾸준히 노력하고 참고 견디는것뿐이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181번째의 성공뒤에 얼마마한 고민과 갈등이 숨어있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그런 고민과 갈등 없이 얻고자 하는것을 쉽게만 얻으려 한다면 이는 더 큰 실망을 낳게 될 소지가 있다. 멀리 보고 높이 뛰려면 현재의 고통을 연습으로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원했던 일이 아니라고,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여 모두를 외면하는것도 취할바가 못된다. 그러면 무언가 배울 기회도 오지 않는다. 누구랄것 없이 자신의 부족점은 다들 알고 있다. 돈이 없고 실력이 없고 자신이 없고 용기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탄할 필요는 없다. 한탄만 하는건 아무런 도움이 안되니까. 뛰여 다니며 땀을 흘려야만 하며 실패를 해도 강한 정신력으로 오또기처럼 그냥 튀여 일어나야 한다. 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 받으려면 스스로 많이 배워 알고 경험을 쌓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움직이는게 귀찮아서 고민만 하며 잠만 잔다면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자신만의 경력을 열심히 쌓아가는게 가장 요긴하다는 얘기다.겸허하고 침착하며 거기다 "오또기정신"까지 가지면 성공은 틀림없이 당신을 찾게 될것이다.//길림신문
24    밝은 앞날을 함께 만들자 댓글:  조회:3697  추천:96  2007-06-09
                                 --중한수교 5주년에   1992년 8월 24일, 중국조선족들에게는 88올림픽도 큰 명절이었지만 그 날이 더 큰 명절이였다. 수만 이산가족은 물론 중국의 200만 조선민족 전체가 전쟁과 국계, 제도와 이념 차이로 장장 50여 년을 바다건너 벽 쌓고 지낸 과거를 씻고 동족간의 상봉이 가능해졌다는데서 가슴이 뭉클해 했고 격동의 눈물까지 흘렸었다. 그것은 쓰라렸던 과거를 뒤로 밀어버리고 양국간, 양국 국민간, 양국의 동족간 관계의 새장을 여는, 그리고 아시아의 궐기에 활력을 주입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날이 어제 같은데 어느새 만 5년이 흘렀다.   돌이켜 보면 중한수교 후의 5년은 중국 조선족들이 긍지와 자랑을 느낄만큼 양국관계가 밝게 발전해온 5년이었다. 이 기간 양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관계 정상화의 단계를 넘어 교류, 협력의 실질적 제휴단계로 달려왔는데 양국간 선린우호협력관계의 심화확대 추세하에 경제협력은 단순한 양적확대를 초월, 질적으로 차원높은 제휴의 기틀을 다져왔고 특히 중한 7개 로선 정기항공로와 중국 8대 항구—한국 4개 항구간의 정기해상로 개설로 인적교류와 물적교류가 급신장을 보였다. 조선족이 집중된 길림성의 경우를 보아도 근년들어 해마다 조선족 4~5만명이 한국을 방문, 한국인의 길림성 방문은 20만을 육박하는 실정이다. 인적교류와 동반, 경제협력교류도 상당히 활발하다. 6월 말 현재로 대길림성 한국투자기업은 873개 소로 외상투자기업의 제 1위를 기록했고 계약투자액은 4억 4675만 불, 미국 버금으로 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국의 3D 업종에서 값싼 인건비로 한국건설을 도와주고 있다.   중한 동족간 관계가 전체적으로 밝게 발전해온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불협화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불협화음이  없을리 만무하다. 제도와 이념의 차이로 우리의 노세대들은 한때 극통의 경난을 치렀었고 그 상처는 오랜 시일 아물지 않고 여러 세대를 괴롭혔었다. 그 상처는 세월의 흐름에 거의 씻기고 치유됐다고 확신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동반하여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문제점도 정시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로 담을 쌓고 수십년 제나름대로 뛰는 마당에 양국은 엄청난 문화차이를 빚어냈으며 그 차이는 담을 터쳤다 해서 하루 아침에 해소될순 없는 일이다. 그만큼 서로 간에 대방을 너무도 모르고 있었으며 문을 열고 접촉하면서부터 그것은 우리 앞에 만질듯이 다가왔다. 한쪽은 “온 세상이 변해 있는데 넌 엽때 무얼하고 있었느냐?” 대방의식의 “진부함”을 실감하고 놀라는 한편 “만만한 놈들 갖고 놀자”는 “범죄의식” 비슷한 것이 싹터나기 시작, 가난한 동족을 사기치는 일까지 서슴치 않고 하였고 한쪽은 대방의 경제문화의 발전에 놀라고 부러워하는 한편 일부 사람들의 못된 소행(졸부근성의 산물)에 반발, “너 좀 잘 산다고 뻐기고 으시대냐? 너 못살 때 외국놈들한테 당하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잘 산다는 주제에 못 사는 이국 동족을 사기쳐 혹사시키고 있지?” 하고 개별적 사람들을 미워하던 데로부터 위험하게도 나라와 국민 전체를 미워하는 데까지 감정이 비뚤어진다. “못 살면 동족간에도 얻어맞아 터지고 당하기 십상인가?” 중국의 일부 조선족 농민들은 이런 심리까지 갖고 있다. 이와 같은 감정 대립이 물론 보편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은 심각하리만큼 큰 것이다. 양국간 문화 차이로 생긴 이러한 문제들은 양국, 한국과 중국 조선족 지성인들이 공동히 노력해서 풀어야 할 과제이다.   그렇다 해서 중국 조선족 지성인들은 한국의 개별적 사람들의 소행을 한국이나 한국 국민 전체에 들씌우지는 않는다. 실상 중국 조선족 일반은 한국 국민들에 의해 창조된 한국의 엄청난 현대문명에 긍지와 자랑을 느끼고있다. 그리고 중국의 조선족을 진심으로 돕고 있는 한국 정부와 민간 단체, 민간인들에게 진정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많은 민간 단체들이 중국 조선족의 경제 부흥을 위해 조선족과 한국업체간에 가교역할을 하고 있으며 조선족 교육문화부흥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많은 찬조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감사한 일이 아닐수 없다.   중국 조선족들도 자아반성을 할 때가 됐다. 조선족들 중의 개별적 사람들은 문화소질의 결여로 눈앞의 이익챙기기에만 급급하고 중국에 와 사업을 벌리려 하는 한국의 기업인들을 돕는다는 미명하에 돈주머니만 탐내면서 그들에게 불이익을 조성하는 현상이 드러나고 있으며 외국에 가 뼈빠지게 일해 번 돈도 어떻게 유용하게 쓸지를 몰라 흥청망청 먹고노는데 쏟아붓는 현상이 비일비재이며 불법체류현상은 한국에 사회문제까지 조성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조선족의 자아반성문제는 이미 조선족사회유지인사들과 언론계의 여론으로 떠올랐으며 자아반성을 통한 조선족사회의 의식성 제고 문제가 급선무로 대두했다. 물론 전반 조선족의 자질제고는 교육과 문화의 진일보의 보급, 제고를 통해 비로소 가능한만큼 경제발전을 그 토대로 해야 하는 마당에 그것의 성취가 상당 시일 걸릴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조만간 실현될것이라는데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사실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주지하건대 중국의 조선족들은 바깥과 막혔던 세월에도, 그 어려운 환경과 여건속에서도 종래로 자기고유의 교육문화를 포기한적이 없었다. 특수한 지리환경에서 자기의 문화를 지켜내고 또한 자기의 삶을 억척스레 개척하면서 자기만의 특유의 문화를 창출하였다. 그것은 역시 찬란한 우리 문화의 한부분으로 민족문화사에 한자리 떳떳이 차지할 것이다. 오늘 세상은 이미 열려 있거나 한창 열리고 있는 세상이다. 부동한 지역의 우리 조선민족문화가 합류되어 불신의 장벽을 허물고 불협화음을 해소하고 거대한 협화음을 동창하게 될날이 이제 멀지 않아 올것임은 틀림없다.   5천년 중한 관계사에서 5년이란 실상 극히 짧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짧은 5년에 중한 양국은 상호이해, 협력과 발전의 탄탄대로를 걸어왔으며 민간관계도 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연계와 접촉을 통해 서로간 모르던 데로부터 점차 알게 됐고 서로 관심을 기울이게 됐으며 동시에 서로간의 차이도 보아내게 됐다. 이는 큰 진보로서 서로간의 관계가 간단없이 깊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한 관계를 보다 성숙시키는 촉진파가 되어야 할것이다.                                                     1997. 7. 14. 중국 장춘에서한국 <열린교육신문> 창간호(1997, 7, 28)
23    [창업칼럼]“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댓글:  조회:3893  추천:92  2007-06-08
“뭐 저 개인의 회사지요.” 기업인들을 취재할 때 심심찮게 듣는 말이다. “전부 저 개인 투잡니다.” 그 개인의 회사임을 확인시키고자 부연설명도 잊지 않는다. 이럴 때면 이상하게도 꼭 10여년 전 어느 회사 사장 취재시 들은 말 몇마디가 떠오른다--    “로임을 누가 주냐고 물으면 저는 사원의 로임은 사장이 주는게 아니라 고객이 준다고 말합니다. 사장의 로임은 누가 주냐면 사원이 준다고 합니다. 로임을 고객이 준다고 생각하면 사원이 고객을 함부로 대할수 없고 로임을 사원이 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다면 사장이 사원 한 사람을 대해도 무책임할수가 없습니다. 회사는 저 개인의 것만이 아니죠.”   법률적 각도에서 볼때 그 사장 개인이름으로 등록된 회사가 그의 개인소유임은 두말할것 없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이건 내거야”란 생각만 깊이 각인되여 있다면 회사내 기타 임직원들의 존재는 지워지고 회장은 고립적인 존재로만 남게 된다. 그런 사장은 회사와 함께 직원들도 개인재산으로 혼동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이라면 직원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왜 당신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을것이다.   聯想그룹의 회장 柳傳志는 련상의 핵심가치관에 언급할 때 개인의 추구를 기업의 장원한 발전에 융합시켜야 한다면서 “련상그룹에 있어 바로 이 가치관이 지속적발전의 강대한 동력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창업시기 기업이 급신장하면서 기업과 직원의 관계처리 문제가 나섰는데 그때 반드시 풀어야 할 기본 명제는 “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였다.   “회사는 주주에게 속할뿐 아니라 직원 전체에 속한다.” 심사숙고를 거친 류전지의 대답은 명료했다. “우리 전체 임직원들은 자신의 추구를 회사의 장원한 발전에 융합시킴으로써 회사의 빠른 발전을 통해 매개인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옳은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재의 메커니즘이다. 련상의 골간직원들은 모두 주식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그룹내 상장회사는 모두 자체의 주권교역계획을 가지고 있다. 직원과 주주의 리익일치는 회장과 직원들을 하나로 단단히 묶어놓았으며 창업의 전반 행정에 시종 격정이 분출되도록 그들 모두를 분발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건 나 개인의 회사야”로 표현되는 자사자리는 그 회사 전체적 격정의 상실을 초래하기 십상이며 격정을 상실한 집단은 전투력이 있을 수 없는것이다.   회사를 순 개인의 것으로 여기는 회장은 책임심이 결여된 회장일수밖에 없다. 어느 억만장자는 한때 시운이 따르지 않아 경영이 엉망이 되였는데 층집꼭대기에서 뛰여내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그때 그의 머리를 치는것이 있었으니 내가 죽는건 쉽다치고 회사가 망하면 수천명 로동자는 어떻게 할거냐? 천여명 판매원은? 내가 죽으면 숱한 채권자들이 내 마누라를 찾아와 행악질 할것 아니냐? 이것이였다. 결국 그는 죽기를 포기하고 이를 악물고 회사를 이끌어 나갔다 한다. 회사가 어느 정도 크고 보면 그 순간부터 회사는 개인에게만 속하는게 아닌것이다.  //길림신문/박문희
22    [창업칼럼]고객 칭찬과 판매실적의 관계 댓글:  조회:4128  추천:86  2007-05-24
상점 점원이 고객의 장점을 발견하고 상황과 분위기에 맞게 칭찬해주면 고객의 몸에 엔도르핀(腦內啡―뇌분비물에서 진통작용을 하는 아미노산)이  솟는데 그것이 구매욕을 불러일으킨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외국의 한 음식점에서 부동한 고객에 따라 다양한 칭찬의 말을 사용하도록 점원들을 지도한 결과 매출액을 50% 이상 올렸다는 영업실기가 이 연구결과를 뒤받침해준다. 어느날 경영자와 직원들이 주부고객이 좋아할만한 칭찬의 말을 써내게 하고 그중에서 선택된 말을 마음을 담아 전달하는 연습을 시작했는데 주부고객에게 그런 칭찬의 말을 빈번히 사용한 결과 고객의 래점(來店)빈도가 높아져 매출이 크게 늘었다는것이다. 왜 영업장소에서 칭찬법을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볼수 있을가? 역설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삶에는 칭찬의 말이 대량 수요되는데 반해 실생활에서는 칭찬의 분위기가 너무 희박하다는데 있다. 칭찬은 칭찬의 대상에게 자신감을 갖도록 하고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마력이 있으며 칭찬자에게도 긍정적 가치관을 갖게 하고 마음이 여유로워지게 하며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등 효과가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칭찬의 말은 듣기 좋아하나 타인 칭찬에는 그지없이 린색하다. 가정이 있는 직업녀성을 례로 들면 출근을 하랴 남편과 자식들을 거두랴 심신이 고달픈데 남편으로부터 《거 당신 오늘 료리 별미야》 정도의 칭찬 한마디 듣고싶어도 정작 칭찬해 줘야 할 사람은 내내 덤덤하기만 하다. 회사에 나가도 과장이나 부과장의 칭찬의 소리 듣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렵다. 반대로 고달프고 짜증나는 일은 싫어도 자꾸 생긴다. 이럴 때 상점 점원들이 칭찬법을 능란하게 구사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가? 아, 그옷 손님 체격에 너무 잘 어울리네요, (두번째로 만난 손님이면)   또 찾아주시니 정말 반갑고 고맙습니다, (또 여타 상황에 따라) 손님 머리모양을 바꾸시니 너무 젊어보이시네요. 뭐 이렇게 가정이나 직장에서 받지 못한 칭찬을 매장에서 받으면 물건을 사는 재미에 칭찬받은 즐거움까지 배가(倍加)되여 구매욕이 자연 일게 되는것이다. 칭찬도 연습해야 하는가?  결론은 긍정적이다. 우리는 칭찬의 말에 익숙되여 있지 않기 때문에 칭찬에 자못 서투르며 지어 칭찬을 어떻게 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지어 칭찬을 한다는것이 듣는 사람에게는 비아냥으로 들려 오히려 고객의 기분을 잡치게 할 때도 있다. 고객은 천차만별이라 똑같은 칭찬의 말을 쓸수 없고 같은 고객이라 해도 경우에 따라 칭찬의 말이 달라야 한다. 칭찬은 구체적이여야 효과만점이지 텅 비여서는 아무 쓸모도 없다. 그러니 고객이 좋아할만한 칭찬의 말을 생각해서 상황에 맞게 사용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것이다. 칭찬에는 맹목적인 칭찬과 진실하고 따뜻한 칭찬의 구별이 있다. 아첨이나 비위맞춰주기는 칭찬과 거리가 멀다. 칭찬은 손님존중이 전제되여야 하며 분수에 맞고 사리에 닿아야 제격이다. 고객의 실제에 맞지 않게 아무렇게나 하는 칭찬, 아첨이나 비위맞춰주기에 가까운 저질칭찬의 람용은 긍정적 효과보다는 역작용이 크다. 칭찬의 람용을 막기 위해서는 고객의 몸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혜안을 갖추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 어떤 고객이나를 막론하고 아름다운 면은 언제나 있기 마련, 그 아름다움을 찾아내려는 마음가짐만 있다면 그것의 발견은 실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찾아낸 즉시 칭찬법을 잘 응용하면 손님이 즐거워할건 물론 자신도 아름다워지게 될것이며 따라서 경영실적도 올릴수 있을것이다.//길림신문
21    심수는 오역 댓글:  조회:4456  추천:86  2007-05-19
심수는 오역 요즘 "연변" 지명을 가지고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생각나는 바가 있어 그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深圳문제를 올려 봅니다. 이 지명이 지금 심천, 썬쩐, 심수 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조선어문에서는 "심수" 로 규범해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수" 는 완전히 오역입니다. 張三植 著 漢韓大辭典에는 圳를 chou(한어)로 발음하고 음독법으로 "수" 를 제시하고 있으나, 한편 이 字가 甽,畎으로 통하며 한어발음은 quan으로, 한글음독법은 "견" 으로 밝혔습니다. "천" 이란 독법은 이전에 없었던듯(?) 하나, 深圳이 유명해지면서 로창하, 문숙동이 주편한 "최신옥편"(2000년 판본)에는 圳(zhen)을 광동성의 도시이름 深圳이란 단독조항 밑에 "심천" 으로 규정했습니다. 출처와 근거는 알수 없지만 인터넷 새 한글 문서 한자바꾸기에도 圳이 "수", "견", "천" 으로 되어있습니다. 釧, 玔, 氚, 夼 등도 다 "천" 으로 된 상황에서 chou의 음독인 "수" 만을 따다다 "심수"라고 규정함은 어느 모로 보아도 가당치가 않지요. 틀리는 것은 가령 그것이 력사적으로 기성사실화 되었다고 해도 바로잡는게 바람직할 것입니다. 시정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조선어의 능률적학습과 漢字교육 중국 경내조선족의 조선어서사생활에서 한자를 페지한지 50 년도 넘는 오늘 한자혼용문제가 의연히 거듭 거론되는 까닭은 조선어에서의 한자페지가 조선어의 학습과 활용에 시종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한국에서 자주 벌어지는 론쟁과 사회적으로 시종 이뤄내지 못한 한글전용의 현실도 같은 차원의 문제에 다름아니다. 실질적으로 볼때 한자혼용문제는 한자교육문제와 직결된다.좀 더 분명히 말하면 조선어를 능률적으로 배움에 있어서 조선어한자교육이 필요한가 아니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것이 한자혼용문제의 본질이며 요해처인것이다. 나의 소견으로는 조선어를 효률적으로 배우기 위해서는 조선어한자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자교육을 거세해 버린 조선글전용정책은 조선어언어발전법칙을 어긴 것으로 우리 말의 발전제고에 걸림돌로 작용하므로 반드시 페지해야 한다는게 나의 주장이다. 이 문제를 규명하고자 우선 조선글의 한계와 조선어한자의 효용을 밝혀보고자 한다. 1. 조선글의 한계 조선글은 글획이 적고 표기법이 간단하여 문자를 익히기가 쉬운 반면에 표음문자로서 개개의 글이 독립적의미를 갖고있지 않기에 새로 접하는 신출한자어의 경우에 그 단어의 뜻이 일목료연히 안겨오지 않는 페단이 있다. 원인은 우리의 말과 글이 청각성 어휘와 시각성 어휘로 나뉘여진다는데 있다. 과 같은 청각성어휘는 귀로 듣는 즉시 뜻이 리해되는데 그것은 어려서부터 말로 배워익혀 이미 몸에 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이라 하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듣는 것만으로는 그 뜻을 분명히 알기 어렵다.왜냐하면 에 등 여러가지 의미가,엔 등 각종 의미가 있어 뜻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휘들을 한자로 표기해 놓으면 그 뜻들이 보는 즉시 명료해진다(물론 배우지 않으면 봐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적 언어를 조선글로만 표기해도 개념을 리해할수 있다고 하는것이 이 안고있는 모순이다. 필경 읽을 줄 안다는것과 그 뜻을 안다는것은 별개의 문제인것이다. 전문분야용어의 경우 조선글의 한계는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례: 이 문장에서 한자를 모두 조선글로 바꾸어 넣는다고 하자. 한자어의 뜻들이 확연히 안겨올 것인가 ? 이란 두 동음어는 또 어떻게 리해하겠는가? 순 조선글로 표기된 이런 단어들을 한두개만 정확히 리해하자 해도 피곤할텐데 이런 전문 용어들로 꽉 차 있는 두툼한 기술서적을 읽어 내려 가자면 그 고초가 얼마나 막심할것인가 ?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말로 풀어 쓰면 해결이 된다는 론리에도 무리가 있다. 례: 가령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하자. 이란 말은 에서 그 뜻을 바로 리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로 치부해서 따위 로 바꿔 쓸 것인가? 답안은 매우 간단하다. 로 바꿀 것 없이 그것을 이라고 한자로 표기해 놓으면 된다. 보는 사람은 보는 즉시 그 뜻을 알고 또 쉽사리 잊지도 않을 것이다. 그 다음번엔 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 볼수가 있는 것이다. 력사적으로 형성되고 전통적으로 계승되여 온 생명력 있는 말들을 필요 이상으로 이른바 새로운 고유어합성이나 새로운 한자어로 다면 오히려 력사와 전통을 단절시키고 언어의 천박성만 증대시키는 언어혼란을 빚어낼수 있다. 조선말한자가 완전히 당한 오늘 현실에서 우리 조상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신고스레 다듬고 벼려온 맛갈지고 아름답고 짜임새 좋은 한자어들이 무참히 배격당할 위험은 항상 우리곁에 도사리고 있다.우리는 우리 조상들에게 죄짓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우리 글이 배우기가 쉽다는 말은 이미 正說로 굳어진듯하다.그러나 이 說이 자칫 우리 글을 해치는 陷穽이 될수 있다는데 류의할 필요가 있다.조선글이 선진적이고 한자가 락후한 문자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 론자들은 는 極言도 서슴치 않고 한다.이와 같은 誤導로 하여 많은 학생들이 조선글을 읽을 줄만 알면 다 배운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조선어는 배울게 없다고 여기는 학생도 결코 소수가 아니다. 기실 세계상의 모든 언어와 마찬가지로 조선어 역시 한 평생 배워도 다 배워낼수 없다. 1996년에 출판된 엣센스국어사전에는 우리 글 어휘가 15만어가 수록되여 있다.근 50년간 조선글을 읽어왔고 20여년간 신문사 편집으로 일해온 필자의 소견으로는 우리 글이 결코 쉬운 글만은 아니라는것이다.내심 두려운 일이 한가지 있다.한자교육을 계속 지금처럼 배격해 나간다면 우리 글이 세상에서 배우기가 가장 힘든 글로 전락되지 않을가 걱정이다.아니,이미 전락된지가 오래되여 이미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심각한 불감증을 앓고 있는 그 과정일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글이 안고 있는 한계를 의도적으로 인정치 않고 조선어를 세계적으로 가장 뛰여난 글이라고 극찬만 하는 것은 설사 그 동기가 뜨거운 민족애와 민족적 긍지감으로부터 출발한 것일지라도 실질상 리론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미흡한 점이 많으며 실천적으로도 해로울뿐이라고 생각한다.우리말 공부가 조선글 전용으로 인해 비능률적으로 진행된다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전반 교육수준향상에 계속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2 . 조선어한자의 효용 표음문자인 조선글에 대비해 표의문자인 한자의 가장 큰 우점은 바로 그것의 에 있다. 글자마다 뜻을 가짐으로써 글자와 글자를 련결해서 새말을 지어내는 강력한 造語力을 지니고 있다는것이 바로 한자의 妙所다. 新出 한자어의 경우, 각 한자의 訓과 音을 익히고 그 훈들의 결합인즉 그 한자어의 뜻이란 점을 발견하면 그 단어의 뜻을 똑바로 리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 배운 한자와 이미 배운 한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한자어의 일차적인 뜻은 자동적으로 리해되여 어휘확장이 아주 능률적으로 이루어진다. 리해에 토대한 학습능률의 제고로 어휘습득량이 확장됨에 따라 일부 한자의 파생적의미도 어렵잖게 파악하게 되여 어휘의 2차적 뜻 리해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한자어 해득효과는 幾何級數로 늘어나게 된다. 례를 들어 訓에서 제시한 자의 뜻은 로 되여 있다. 여기에 새로 익힌 한자를 결합시키면서 , 등으로 어휘를 확장해 나가다 보면 字가 이란 뜻 외에도 등 파생적 의미도 지니며 또 그것을 토대로 다른 추상적의미도 이끌어 낼 수 있음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알게 된다. 하여 의 뜻을 쉽게 파악하고 기억할 수 있으며 나아 가 가 가지는 추상적 의미까지 類推해내는 推理力과 創意力도 스스로 키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 文理가 확 트이게 되여 學力은 급속도로 제고될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한자교육을 완전히 배격해 버린 상태에서의 조선말 한자어는 무의미철자의 집합체와 다름이 없어서 상기한 바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을 이라고만 해석해 놓으면 학생은자의 뜻이 뭔지 자의 뜻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기계적으로 그 뜻을 암기해야 한다. 그러나 자와 자를 각각 가르치면 선생이 해석할 필요 없이 학생은 자동적으로 의 뜻을 알고 기억하게 된다. 리해된 것이라야 빨리 기억할수 있다는것은 정한 리치다. 반대로 리해되지 않은 것은 왕왕 여러차례의 반복을 거쳐야 비로소 기억이 가능하다. 바로 우리의 학생들은 조선글로 표기된 한자어에서 뜻감을 잡을만한 아무런 표식도 없는 무수한 무의미철자묶음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느라 기막힌 고역들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근본적으로 한자어의 리해를 돕는것은 한자교육일뿐이다. 한편 한자는 글획이 많고 복잡하며 글자수가 너무 많아 평생을 배워도 그 일부분을 겨우 배워내나마나 한 기막힌 약점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한자를 다 배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글자만 2 ~ 3천자 정도 골라 배워도 조선어학습에 충분하다. 북경대 언어학과 연구팀은 漢字 3000자만 알면 나머지 한자는 저절로 리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의 比峰출판사에서 동양고전을 번역하면서 분석해 보니 에 등장하는 漢字는 1500여자,에는 1800여자 정도였다. 그 출판사 朴琪鳳사장은 고 말했다. 3 . 한자교육의 당위성 우에서 언급한 리유로부터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조선글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메울수 있는것이 漢字일진대 굳이 그것을 배우지 말아야 할 리유가 무엇이겠는가? 조선어의 효률적인 학습과 활용에 크게 리롭다면 그것을 거부할 하등의 리유도 없다. 況且 한자어에서 쓰는 한자는 재래로 우리 글의 일부분으로 취급되여 온 것이 력사사실인데 그것을 기어이 남의 것으로 밀어 붙이고 원쑤인양 타매하고 축출해야 시름을 놓겠는가? 한자교육은 외 다음과 같은 리유에서도 당위성을 가진다. * 한자교육은 민족전통교양에도 유리하다.례컨대 우수한 우리 민족전통으로서의 륜리도덕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마당에 한자교육을 전통교양에 효과적으로 활용할수 있다. 한자안에 인성교육의 모든 요소, 충과 효의 도리, 옳바른 국가관, 보편적인 인류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 한자교육은 모든 사회분야의 진보에 유리하다. 한자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면 한자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과 능력으로 사회에 보다 훌륭히 봉사할 수 있다.언어학 연구분야를 보자. 한자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어학연구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인가? * 부대적으로 언급할 말이 있다.필자의 짧은 관찰(일면적일수도 있으니 연구의 참고로만 삼아주기를 바란다)에 따르면 조선글전용주장은 대체로 두가지 부류에서 온다.한 부류는 조선어를 쉽게 배우려는 이들이다.리해가 된다.그러나 이에 대해서 필자는 조선어를 쉽게 배우려는 생각을 가지고서는 결코 조선어를 제대로 배워낼수 없다고 귀띔하고 싶다.다음 한 부류는 한자교육을 받은 일부 학자들이다.이미 漢字교육을 받은 이들이 아직 한자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조선말漢字를 가르쳐줄 대신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그 底意를 도저히 알수 없고 리해가 되지 않는다. 4 . 한자교육의 방법론 * 모든 언어간에 차이가 없을수 없듯이 조선어한자와 한어한자 사이의 差異의 존재도 필연적이다. 이를테면 같은 한자어는 한어에서 으로 표시되는데 그것은 필경 두가지 부동한 언어체계인만큼 차이의 존재는 확실하다.한편 대량 엄존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기실 조선어가 오랜 세월 자체의 언어발전법칙에 의해 발전해왔다는 유력한 근거로 되기에 충분하다.그러나 그것이 한자교육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리유로 될수는 없다.이 올수 있다는 리유로 한자교육을 포기하는것은 조선어를 보다 높은 수준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포기하는것과 같기 때문이다. 한어한자와 조선어한자의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비교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는것은 언어공부의 좋은 방법이다. 옅은곳으로부터 깊은곳으로 점차 배워 나가다 보면 학생들은 자연히 두가지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지하게 될것이며 언어의 비교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될것이다. 이른바의 혼란이란 배우지 않아 모르는데서 생기는것이다. 한자의 뜻, 훈과 음독법을 가르치면 배운 학생이 평생 활용할수 있다. 가르치지 않으면 학생이 평생 혜택을 볼 수 있는 엄청 큰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 한어과와 조선어과의 상호보완 원칙을 적용하여 한어학습과 조선어학습을 능률화하면 학습속도가 갈수록 빨라져 결과적으로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줄어들게 될것이다. * 중국 조선족의 실정에서는 간체자로 배워도 무방하다고 본다. 우리가 한자를 배우는 것은 선차적으로 한자어에 대한 리해를 도움으로써 조선어를 능률적으로 배우자는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번체자를 꼭 배워야 할 리유가 없다. 간체자를 배움으로 해서 생기는 일부 구체 문제는 전문가들이 공동연구를 해서 결정을 짓던지 하는 특수방법을 대서 해결하면 그만이다. 번체자는 필요에 따라 천천히 여유 있게 배워도 별 문제가 없다. * 조선어과에서 해야 한다고 본다. 한어과의 교수목적은 학생들의 한어 열독 * 서사 * 회화 능력을 키워 주는데 있지만 조선어과의 한자교수목적은 우리 말 한자어에 대한 학생들의 인지 * 식별 능력과 서사능력을 높여 조선어 학습효률을 극대화하기 위한데 두고 있다. 그리고 한어과에서는 한어병음으로 한자를 가르치고 조선어문에서는 訓과 조선말 音讀法으로 한자를 가르친다. 그러나 량자의 교수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면 상호보완의 효과를 볼 수 있을것이다. 이는 조선어 한자교수의 유리한 조건이다. *한자교육은 가급적 어릴때부터 시작하는것이 좋다.이것은 중국과 한국의 경험있는 전문가들의 공통한 주장이다.이 점을 리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것이다. * 근본적으로 말하면 학교에서의 한자교육이 선차적이고 사회에서의 한자혼용은 후차적이다. 그러나 한어가 보급된 중국의 실정에서 한자의 訓 * 音 교육에 앞서 사회의 신문 * 출판물에 한자혼용을 부분적으로 , 실험적으로 추진하는것은 가능하다고 본다.물론 현재 신문간행물에서 시험적으로나마 을 실시한다면을 한어발음으로 읽거나 인명 을 등으로 잘못 발음하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대량 나타나게 될것이다.이런 현상의 출현은 결코 선생이 둔재이거나 학생이 저능아여서가 아니라 50여년간 한자교육을 페지하고 조선글전용 정책을 실시한 필연적악과이다.訓과 音을 제대로 가르친다면 이런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그래 을 가르치지도 않고 한자를 대로 읽으라고 요구할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한자혼용실험에서 일부 문제들이 나타날수는 있지만 정확히 인도하기만 한다면 한자교육개혁에 필요한 경험을 더듬어내는데 크게 유조할것이다. *한자교육정책은 정부차원에서 상당시일을 두고 계획적으로 , 그리고 점진적으로 펴내여 실행하는것이 바람직하다. 교재의 편찬, 학교 교사와 보도출판 분야 편집일군 양성, 사회에로의 조선어한자 보급, 여러 경로를 통한 한자혼용실험 , 한자혼용실정에서의 언어규범화 후속조치 제정 등 代案들을 가급적 적극 따라세우는것이 시급하다. *당면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일은 한자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관련 연구부처나 사회 여론 기관,단체의 의견을 통일하고 정부에 한자교육실시안을 다시 한번 제시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예상컨대 의견통일은 어려울 것이다.의견이 통일되지 않으면 부동한 의견을 동시에,혹은 각기 정부에 제시하는 안도 마련할수 있을것이다.과거 정부에서 수차 한자교육문제와 관련된 조사작업을 벌리고 한자교육추진을 시도했지만 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가급적 조속히 문제해결이 됐으면 하는 소망이다.  
20    분단을 뛰어넘어 / (한국) 이선명 댓글:  조회:4885  추천:105  2007-05-16
   “어머님, 금년 어머니날에는 정말 좋은 소식이 들려 옵니다. 이제 어머님도 외국 여행을 가실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을 것 같아요. 경의선이 곧 개통된다는 소식이에요. 어머니, 그렇게 되면 개성과 평양, 그리고 신의주에 들렀다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 대륙까지 기차로 갈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어머님 모시고 꼭 중국, 아니 내친 김에 유럽까지 기차여행을 하고 싶어요.”   “글쎄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라고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미덥지 않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시지만, 목소리는 분명 기대에 차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 한번도 외국에 나가보신 적이 없다. 고소증이 있으신 지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하시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못 하셨다. 중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삼촌과 조카가 보고 싶으셔도, ‘바쁜 사람 귀찮게 뭐 하러 가냐?’ 하며 스스로 마음을 달래곤 하셨다. “아, 그런데 이제 중국과 유럽까지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할머니는 다시 한 번 천지개벽을 보는 것 같은 뭉클한 감회가 동맥을 타고 뜨겁게 전신을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경의선이 뚫리면 부산과 신의주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기차를 타고 서울과 평양의 백화점에 나란히 진열되겠지… 북한의 노동력과 남한의 기술력이 남북 경제 공동체를 이루어, 한반도에서 생산된 우수한 상품이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 철교를 넘어 중국으로, 러시아로, 그리고 저 유럽까지 실려가게 될 것은 물론이고, 남북이 지척인데, 인적 및 물적 교류를 제3국을 통하는 황당한 일도 더는 없을 것이고. 내년에 중국에서 열리는 베이징 올림픽 구경을 기대하고 있는 재미 동포들은 일단 서울에 가서 친지들과 합류하여, 경의선 철도편을 이용하여 개성과 평양에 들러 역사 유적지도 둘러보고 나서 베이징까지 안락한 기차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어 “설레는 가슴을 억제하기 어렵다”고 실토할 인사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분단의 고통, 그리고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문산에 멈추어 선 철마의 소원이, 아니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 전체의 염원이기도 하지만, 실현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장장 56년 전 1951년 6월12일 한국전란으로 끊겼던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선·동해선 철도가 오는 17일 시험 개통된다. 한민족의 혈맥을 이어 한반도가 동북아의 경제적 중심으로 다시 태어나는 역사적인 새 날이 밝아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발표된 남북의 합의에 의하면 이날 디젤기관차 1량과 객차 5량씩으로 구성된 시험운행 열차에는 남측과 북측에서 100명씩, 동해선과 경의선 열차에 각각 200명씩 모두 400명이 타고 오전 11시 출발, 경의선의 경우 남측 문산-도라산역을 거쳐 북측 판문역-개성역으로 가고, 동해선은 북측 금강산역-감호역에 이어 남측 제진역까지 운행한다.   남북이 앙숙처럼 대결하던 불과 십 수 년 전과 대비해 보면 내외의 끊임없는 방해공작을힘겹게 물리치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전진해온 ‘데이땅트’ 속의 남북 통일세력의 밀월은 우리의 민족사에 정말 장엄한 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물론 시험운행이라는 제한성 때문에 아쉬움이 있지만, 그러나 대국적으로 보면 우리의 통일염원의 실현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작가 생떽주퍼리는 그의 유명한 단편소설 <밤의 비행>에서 “길이 나면 사람들이 다니게 돼 있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야 말로 이번 남북의 임시 철도운행이 정기적 운행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는 개연성을 은유(隱喩)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 21세기 실크로드는 부산에서 출발, 평양을 거쳐 신의주와 시베리아, 만주, 중국, 혹은 시베리아 등지를 통과해 유럽으로 연결되는 유라시아 대륙횡단철도로 발전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남북이 진정한 ‘한’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서 현해탄을 건너 일본까지 포함하는 동북아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최근 소식통은 "1990년 초 1천5백여 명에 불과했던 단둥 시내 조선족의 숫자가 남북경협활성화의 기대로 이미 2만 명에 이르고 있다"고 전했다. 이것은 중국 동북3성과 만주 및 연해주에 산재한 우리 동포들이 남북경협이 가져올 효과를 예견하고, 고대하고 있음을 반증한 다. ‘달리고 싶다’는 말로 우리 민족 비극을 되새겨 주던 철마, 그 철마가 이제 세계 속으로 달릴 날이 다가오고 있다. 경의선 철도 재운행은 통일 대장정에 새 이정표이다. 우리 한민족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이 꿈의 ‘무지개의 다리’ 건설이 순조롭게 진전되기를 기원한다. // USNews 이선명 주필 
19    [창업칼럼]창업 제1과: 나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3868  추천:90  2007-05-13
성룡이 주연한 영화 《나는 누구인가?》가 상연된 후 온 세계가 "나는 누구인가?"를 가지고 무수한 화제를 만들어 뿌렸다. 오늘 창업문제에 이 화제를 적용해 보려 한다. 창업을 함에 있어서도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것이다. 왜? 자기를 모르고 창업을 하면 많은 경우 실패위험이 즉시 뒤따르기 때문이다.내가 알고있는 한 친구의 딸 얘기다. 작년에 그녀는 부모와 친척의 돈 20만원을 꾸어 미용점을 차렸다. 미용원을 하고있는 한 한국사장님이 아버지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여서 그 사장님의 도움을 받을수 있고 한국의 미용술이 중국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으니 미용점을 꾸리면 잘 할수 있다고 여겼던것이다. 100여 평방메터 되는 점포를 임대 맡았는데 한국 사장님의 도움을 받으며 실내 장식도 한국식으로 하고 설비도 한국것을 들여오고 직원도 받아 훈련을 시켰다. 한국사장님이 몸소 직원들에게 미용기술도 가르치고 고객접대도 직접 하고 하여 영업틀이 꽤 잡히고 손님들도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 사장님이 귀국한 뒤 얼마 안돼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녀가 원인을 찾아내기도 전에 점포임대료, 전기, 물값에 영업세, 공상관리비 등 명세서가 련이어 날아들었다. 수입은 없는데 지출은 팍팍 생기고 직원들 로임도 지불해야 하니 안이 단 친구의 딸은 불안해서 아주 환장할 지경이였다. 상황이 배배 꼬이니 점원들도 마음이 흔들려 그달 로임을 받아 쥐자 하나 둘 점포를 떠나버렸다. 이제 억지로 유지를 해 봤대야 비용만 들어갈 터이기에 그녀는 남은 점원들도 다 내보내고 점포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외지에서 무역사업을 하는 외삼촌이 이 일을 알고 전화를 걸어와 "창업을 하려면 이만한 실패는 감수해야 한다. 창업하는 사람치고 대번에 성공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실패경험도 재부다. 내가 뒤를 대줄테니 끝까지 해봐."하고 극구 설복했지만 그는 "다신 이런 일 못하겠다"고 진저리를 쳤다. 결과 그의 창업은 불과 두달만에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실패한 원인을 진지하게 찾아보지 않을수 없다. 영업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는 여러 미용점들을 돌아보면서 창업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국의 화장품, 미용술, 설비 등을 중국인들이 선호하니 이 우세만 가지면 영업은 얼마든지 잘해낼수 있다고 너무 이르게 자신했다. 말하자면 "시장성"이 있을 것이라는것만 생각했지 "나의 강점은 뭐고 약점은 무엇이며 나를 둘러싼 기회요인은 뭐고 경계해야 할 위험요인은 뭔가?" 이런 것은 홀시했던것이다.이 교훈에서 창업의 성공이 반드시 시장성유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것,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수 있다. 똑같은 아이템이라 해도 성공은 사람나름이다. 시장성이 없어 보이는 아이템도 개조를 해서 시장성을 갖게 할수 있지 않는가?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진정 창업을 할수 있는 사람인가? 정말 창업을 원하는가? 창업외 내 적성에 더 알맞는 일은 없는가? 재취업에 대한 미련은 없는가? "등등 자기 분석을 분명히 한 후 창업을 해도 늦지 않다. 이것이 전혀 없이 접어들었다가 한번 용도 써볼새 없이 무너지니 질겁한 나머지 실패를 딛고 제자리에서 재기할 용기마저 잃고말았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연약성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한차례의 실패로 하여 기가 죽고 진취심이 소진되여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십수차례 실패의 시련을 이겨나갈 정신적 준비도 갖추어야 한다. 유망 청년이라면 이쯤의 시련은 반드시 감수하고 용케 넘겨야 하는것이다. 이게 안 된다면 그 전도는 심히 걱정스러울수밖에 없다.나는 대관절 누군데 실패에 대처할 용기도 없느냐? 이런 문제는 한 사람의 일생에 여러 차례 등장할 수도 있다. 문제를 푸는 행정에 자기가 갖고 있는 긍정적요인을 발견 발굴하는데 모를 박아야지 부정적요인을 부풀려 스스로 신심과 용기를 마모시키는 일은 절대 피면해야 할것이다.젊은 나이에 아직 앞날이 창창하니 너무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한두 차례 지어 그 이상 실패를 한다 해도 재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마음을 차분히 하고 경험과 교훈을 정리하면서 진로를 잘 설계해 보는것이 바람직한 자세이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창업자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업종에 들어가 석달이든 반년이든 아르바이트를 하는것이 좋다고 권한다. 지어 취업을 해서 몇년 동안 체험할 수도 있다고 한다. 례컨대 해당하는 물건의 구입가격, 고객대처법, 사람들의 성향, 재고처리방법 등을 경험자들을 통해 체험하고 나서 자신이 생길 때 자체로 영업을 시작하면 하면서 배우기보다 차이가 많이 날수 있다고 한다. 천만 지당한 권고이다. 몇달 지어 몇년씩 체험하고 나서 다시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해 보자. 만족스러운 답이 나올수가 없겠는가?//길림신문
18    리룡희,“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 댓글:  조회:3876  추천:96  2007-05-06
리룡희,“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 신임 장춘시 부시장 리룡희 탐방   《길림신문》박문희 기자       신임 장춘시 부시장 리룡희씨를 만나기란 실로 조련치 않은 일이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와 그의 례절스럽고 열정적인 장용 비서를 통해서 그의 행적을 조금 알수 있을 뿐 만나기가 어려운건 물론 전화를 통한 대화조차 기대하기 쉽잖았다. 취재과정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거의 사무실에 눌러앉아 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전 장비서에게 수차례 간곡한 부탁을 해서야 드바쁜 시장실무의 틈새를 찾아 짧은 만남의 기회를 요행 가질수 있었다.   “시장님을 만나 뵙기가 굉장히 어렵네요. 공청단 성위에서 일을 보시다가 장춘시 부시장으로 오시니 사업이 훨씬 바쁘시지요? ”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일도 물론 바쁘지만 솔직히 말씀 드리면 공청단위에서 사업한 13년간 기자들의 취재요청이 무지 많았어도 저는 전부 사절했댔습니다. 소문을 적게 내고 실제적인 일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딱 한번 례외가 있는데 16차 당대회 때 이상 분들이 젊은이가 (기자 앞에) 나가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취재를 수락한 적이 있습니다. ”   “아, 그러세요? 그럼에도 이렇게 만나 주시니 다행이군요. 부시장으로 오신 후 무슨 일을 맡아 보십니까?”   “상업, 대외경제무역, 상업국유자산경영과 공상관리부문입니다. 이런 부문들의 산하에는 수다한 기업소와 단위가 있는데 경영활성화와 정돈개혁의 임무가 십분 번중합니다. 례컨대 상업국유자산경영공사 산하에만 해도 89개 국유상업기업이 있는데 그중 대다수는 결손기업입니다. 대표적 결손단위로 중흥백화점을 들수 있는데 이 기업은 10년 동안 결손기업의 모자를 써 온 오랜 문제꺼리 단위죠. 2512명 종업원의 로임을 내주지 못해 종업원들의 래신래방이 그칠 새 없는데다 새로운 문제들도 자꾸만 터져 나와 시정부는 물론 성정부에서도 골치를 무척 앓았습니다. 저는 중흥백화를 전반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 돌파구로 삼아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고 깊이 있는 조사로부터 착수해서 문제를 발견하는 족족 해결책을 들이 댔습니다. 법원 등 관련부문에도 직접 찾아 가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두달 사이에 중흥문제를 가지고 도합 8차례의 회의를 열었어요. 지금 문제는 점차 풀림새를 보이고 있는데 올해 안으로 확실한 해결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3월 1일에 도임해서 80일도 안되는 사이에 안고 있는 문제가 돌출하고 또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십개 기업과 단위를 거의다 한두차례씩 훑었다.   그의 사업은 사실 무겁고 번거롭다. 시장관리를 하면서 음식안전을 틀어쥐는 데로부터 해외로 로무자를 파견하고 투자유치대표단을 이끌고 해외고찰방문을 하고 내외 고찰단을 접대하는데 이르기까지 할 일이 아주 많다. 장바구니공사는 장춘시의 으뜸가는 공사로 현재 식료품안전정보통보 기제를 건립중이다. 음식안전관리를 보면 륙속 비법아가위과자가공점, 비법우유류통점, 비법개고기가공점 등 소탕전을 치렀는데 그중 비법개고기가공점을 들부신 전역은 영향면이 넓고 효과가 좋아 소비자들의 한결같은 옹호를 받았다.   “크고작은 일들이 항상 끊이질 않습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문제를 연구할 시간마저 없어요. 그러니까 조사하는 한편 문제를 해결하고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는 가운데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져 보니까 3월 초 이래 제가 단독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은 시간은 한주일에 불과 두어 시간밖에 안돼요. 그외 시간은 전부 밖에서 실제문제를 해결하는데 돌렸습니다.”   “인터넷검색을 통해 리시장님께서 투자유치대표단을 이끌고 한국 울산시를 방문한 소식을 읽었는데 많은 성과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   “방문은 성공적이였습니다. 박맹우 울산시 시장과 만나 좋은 얘기를 나눴고 또 경제합작계약들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합작항목들이 작동과정에 있기 때문에 언론에는 최대한 압축보도를 했을 뿐입니다. 그 기간에 삼성, LG와 SK 본부도 방문했습니다. 현대자동차 본부를 방문했을 땐 명년에 열리는 ‘장춘제 4기국제자동차박람회’에 참가할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금년 6월은 장춘시와 울산시가 자매결연을 한 10주년 기념월간입니다. 이달 하순에 울산시 정부와 의회에서 기업인대표단, 문화교류대표단과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장춘시에 와 기념축제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번 행사 기간에 고신기술개발구의 한 거리를 울산거리로 명명하는 의식과 시내 공공뻐스 한대를 울산뻐스로 명명하는 의식도 가지게 됩니다.”   학습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 리룡희 부시장은 “리론학습은 정치자질을 높이는데 있어서의 관건이요, 학습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자칫 형세에 뒤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언제나 감히 리론학습을 늦출 수 없었다”고 했다.   2002년 그는 중앙당교 중청년 간부 훈련반에 참가했었는데 이를 계기로 맑스주의 경전저서와 론술을 참답게 정독하고 등 6편의 론문을 써냈다. 그중 란 론문은 전국 핵심간행물인 (理論前沿)에 발표됐다.   리룡희는 경제지식과 현대기능에 대한 학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업여가를 타 대량의 경제학도서를 탐독하고 50여만자에 달하는 국내외 관련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아울러 , 등 5편의 론문을 써냈다. 경제학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2001년에는 길림대 경제학박사 공부에 몰입, 동북아 구역경제를 전문 연구했다. 공청단사업을 할 때 기층에 대한 료해를 비교적 투철히 쌓은데다가 정치리론과 경제리론의 조예가 비교적 깊었으므로 리룡희는 장춘시정부에 전근된 뒤 재빨리 새로운 사업환경에 적응하여 배역전환(角色轉換)을 완성할수 있었던것이다.   “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자기의 소신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사업과 생활에 대한 태도를 물었을 때 그는 “이 면에서 나는 자기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은 편 ”이라고 했다.   직위가 높아짐에 따라 그는 렴정문제에 보다 깊은 주의를 돌렸다. 자각적으로 당내의 감독, 법률의 감독과 군중들로부터 오는 감독을 접수하고 배금주의. 향락주의와 극단적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권력관, 명예지위관, 리익관과 인정관을 잘 넘기기에 십분 류의했다. “제1책임자” 란 특수신분을 리용해 사리를 도모하거나 특수화를 부리지 않았으며 주택, 승용차의 사용문제에서나 개인생활, 가족과 친인척의 취업 등 문제에서 종래로 단위에 페를 끼친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활면에서 저는 매우 만족하는 편이고 사업면에서는 반대로 늘 부족감을 느낍니다.”   그의 과외취미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제일 좋아하는것이 촬영이라고 했다.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한 기회를 리용하여 그는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방면의 자료를 수태 찾아 읽고 자세히 연구하였으며 피타는 노력을 들여 미국사회의 이모저모에 대한 대량의 사진을 찍었다. 최근에 그는 사진 500여폭에 7만여자의 문자해설이 달린 책자 (黑白美國)을 탈고, 출판했다. 독서 역시 그의 애호이다. 그가 읽는 책은 고금중외의 정치, 경제, 문화에서 천문, 지리, 력사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아주 광범하다. 그외 그는 컴퓨터기술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한다. 짬을 타 외국어공부도 내내 손에서 떼지 않고 있다.   “주요취미가 촬영이지만 전혀 시간적 여유가 없어 지금같애선 퇴직한 후라야 사진기를 들것 같네요. 동북 로공업기지 진흥사업에서 현재의 형국은 동북 3성의 세 도회지 및 대련의 합동작전과 각자 자체우세발휘의 구도입니다. 경제진흥의 견인차 역할을 노는 ‘3두마차’는 적극적인 투자, 내수 진작과 수출 확대입니다. 이 세가지는 모두 직접 물류사업과 이어져 있습니다. 제가 맡은 과업도 실상 물류사업인데 제 어깨가 무거워 짐을 느끼는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업상 압력은 받고 있지만 잘 할수 있다는 신심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정한 시간이 됐다. 다음 일이 리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는 후날 만날 기회를 다시 갖기로 리시장과 약정을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길림신문》 2004년 5월   ======================================================================================= 16차 당대회 대표 -- 리룡희 박문희   【리룡희 략력】     1963년 출생,길림성 매하구시 사람.     1986년 연변농학원 졸업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음. 1988년부터 선후로 공청단 연변주위 부장, 훈춘시 량수진 당위 부서기, 공청단 연변주위 부서기, 서기, 복건성 하문시 정부 판공청 주임조리, 연변주 조직부 부부장, 공청단 길림성위 부서기, 서기, 당조서기, 길림성청년련합회 주석을 력임.     2004년 2월 장춘시 정부 부시장으로 조동.     1998년 길림대학 경제학 석사학위 획득.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 미국 일리노이주 등지에서 학습 고찰.     2002년 16차 당대회 대표에 당선.      -----------------------------------------         리룡희는 1986년 사업에 참가한 뒤 부동한 일터에서 간단없이 자기를 련마했다. 공청단성위 부서기로 발탁되자 그는 변화된 사업환경에 재빨리 적응, 주요령도에의 배합에서 직접 주 책임을 지는데로, 몇개 부문을 맡아 관리하던데로부터 전면사업을 주최하는데로의 배역전환을 신속히 완성했다. 아울러 사업주제의 요구에 따라 전 성 공청단의 제반 사업을 효률적으로 설계 조직했다. 구체적인 사업 행정에 그는 “봉사성 발휘”와  “창의력 개발” 이 두가지에 모를 박았다. 청년들의 책임감을 유발시키는 각종 주제교양활동과 2차 창업활동을 고안 전개하였으며 청년취업과 재취업 이벤트도 활발히 벌려 뚜렷한 성과를 올렸다. 이를테면 도시에서 취업과 재취업 활동을 벌린 3년 동안에 전 성 공청단 조직들에서는 선후로 3500여명 청년들의 자주창업을 도와 주었으며 467명의 재취업전형과 창업 선줄군을 키워 냈으며 3만여명 귀휴청년들을 재취업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외 5.6만명 농촌청년들을 도와 취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지도부 내부에서 그는 주변의 일군들을 성심과 관용으로 대하면서 할 말이 있으면 앞에서 말하고 문제가 있으면 책상우에 내놓도록 고무해 주었으며 서로 리해하고 신임하며 협조 배합할것을 창도했다. 공청단 성위에서 사업한 시간이 길고 자격과 경력이 오랜 그지만 지도부 성원들을 충분히 존중해 주고 그들의 의견을 허심히 청취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절차를 중요시했다. 특히 인사문제라든가 경비문제같은 일을 처리할 때면 의식적으로 여러 사람의 의견청취를 하고 사상을 통일한 전제하에서 집단 결책을 하였다.       공개경쟁을 창도하는 방법으로 현명하고 재능 있는 자를 선발 등용하고  기관내에서  학습교양활동을  전개하며  기층에 직무를  가지고 내려가 단련받게 하는 등 경로를 통해 청년간부를 적극 선발하고 훈련시켰다.       리론학습을 늦추지 않았다. 리론학습은 정치자질을 높이는데 있어서의 관건이라고 리룡희는 말한다. 2002년 학습기한이 1년인 중앙당교 중청년간부 훈련반에 참가했던 그는 이를 계기로 맑스주의 경전저작과 론술을 정독하고 등 6편의 론문을 써냈는데 그중 는 전국 핵심 간행물인 < 理論前沿 >에 발표됐다.     경제지식과 현대기능에 대한 공부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상사업가운데서 기층 조사에 류의, 3년 남짓한 시간내에 전 성 60개 현(시,구)을 거의 다 돌았으며 제1자동차공장, 통화제철소, 길림화학공정공사 등 성내 수많은 국유기업과 민영기업을 돌아보면서 특정쩨마의 조사연구를 진행, 하부의 실정을 대량 장악하고 기층을 도와 걸린 문제들을 적극 풀어주었다. 한편 사업 여가를 타 수많은 경제학 도서를 열독하고  50여만자에 달하는 국내외 경제지식과 경제동정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아울러 등 5편의 론문을 써냈다. 그중 는 중앙당교로부터 우수고찰보고로 평정됐다. 경제학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리룡희는 2001년 길림대 경제학 박사공부에 몰입,  동북아 구역경제를 전문 연구했다. 최근에는 란 쩨마의 론문을 완성했다.     기층에 대한 료해가 비교적 투철한데다 정치리론과 경제리론의 조예가 깊었으므로 리룡희는 장춘시정부에 전근된 후 재빨리 새로운 사업환경에 적응할수 있었다. 출근 이튿날부터 곧바로 기층에 대한  조사연구에 들어가 조사를 하는 한편 문제해결에 착수했다.     리룡희가 맡은 사업은 상업, 대외경제무역, 상업국유자산경영과 공상관리 부문이다. 이런 부문들의  산하에는 수다한 기업과 단위가 있는 데 경영활성화와 정돈개혁의 임무가 십분 번중하다. 비컨대 상업국유자산경영공사 산하에만 해도 89개 국유 상업기업소가 있는데 그중 대다수는 결손기업이다. 대표적 결손 기업소로 중흥백화점을 들수 있다. 이 기업은 10여년간 결손의 음영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오랜 문제거리 단위이다. 2512명 종업원의 로임을 내주지 못해 종업원들의 래신래방이 그칠새 없는데다 새로운 문제들도 자꾸 터져 나와  시정부는 물론 성정부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었다. 리룡희는 중흥백화를 전반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 돌파구로 삼아 해결하기로 작심, 깊이있는 조사로부터 착수해서 문제를 발견하는 족족 해결책을 댔다. 법원 등 관련 부문에도 몸소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두달도 안되는 사이에 중흥문제를 가지고 도합 8차례의 회의를 소집, 올해 안으로 걸린 문제를 기어이 다 풀어내고야 손을 뗄 잡도리다.     이처럼 그는 도임해서 석달도 안되는 사이에 안고있는 문제가 돌출하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십개 기업과 단위를 거의다 한두차례씩 훑었다.       그의 사업은 사실 무겁고 번거롭다. 해외로 로무일군을 파견하고 시장에서의 음식안전을 틀어쥐는데로부터 시작해서 초상인자대표단을 이끌고 해외고찰방문을 하고 내외 고찰단을 접대하는데 이르기까지 크고작은 일들이 항상 끊이지않는다. 사무실에 앉아서 문제를 연구할 시간마저 없다. 그러니까 조사하는 한편 문제를 해결하고 배우면서 일하며 일하는 가운데서 배우는 수밖에 없다. 3월 초 이래 한주일에 그가 단독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은 시간은 불과 두시간밖에 안 된다. 그외 시간은 전부 기층에 내려 가 실제문제를 해결하는데 썼다.     사업과 생활면에서 리룡희는 자기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하다. 직무가 진급함에 따라 그는 특히 렴정문제에 보다 자각적으로 주의를 돌리고 있다. 당내의 감독, 법률의 감독과 군중들로부터 오는 감독을 접수하고 배금주의, 향락주의와 극단적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권력관, 명예지위관, 리익관과 인정관을 잘 넘기기에 십분 류의한다. 그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명히 가르고 “제1책임자”란 특수신분을 리용해 사리를 도모하거나 특수화를 부리지 않으며 주택, 승용차의 사용문제에서나 개인생활, 가족과 친척,인척의 취업 등 문제에서 종래로 단위에 페를 끼친적이 없다.       그의 과외애호는 주로 촬영이다.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한 4개월간의 기회를 리용,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면의 자료를 수태 찾아 읽고 연구하였으며 피타는 노력을 들여 미국사회 이모저모에 대한 대량의 사진을 찍어 사진 500여폭에 7만 여 字의 문자해설이 달린 책자 을 탈고, 출판했다. 독서 역시 그의 애호이다. 그가 읽는 책은 고금중외의 정치, 경제, 문화에 천문, 지리, 력사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아주 광범하다. 그외, 그는 컴퓨터기술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한다. 외국어 공부도 내내 놓지 않고 있다.   , 료녕민족출판사, 2004년
17    "10등현상"에 대하여 댓글:  조회:4176  추천:169  2007-05-01
당신은 아들(혹은 딸)이 학급에서 1등(학습성적)을 하는것이 좋겠는가? 아니면 10등을 하는것이 좋겠는가? 누군가가 이런 류의 물음을 제기해 오면 우리는 경하면 "그것도 문제라고 내놓는가?"하고 그 말을 장난의 말로 치부하여  너그럽게 웃어주거나  중하면 "저 사람 머리가 돈게 아니야?" 하고 이상한 눈초리로 정신질환자를 바라보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10倍速의 경쟁시대에 자녀가 학급의 1등, 지어 학교의 1등을 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어느 부모에겐들 없겠는가.   그러나 "10등"이 "1등"보다 나을 수 있다는 론리와 함께 그 론리를 받쳐주는 연구결과가 제시되여 중국 남부 전역의 여론을 휘저어놓은 적이 있다. 일반에 통하는 상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新 관념이여서 많은 물의를 빚어내기도 했지만,  의례 그렇게 됐어야 할텐데 하는 합리상상이 왕왕 빗나가 의례 그렇게 돼야 할 일이 그렇게 되지 않고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할 일이 오히려 그렇게 돼버리고 마는 일이 非日非在인 우리의 생생한 현실생활에서 우리는 고정관념을 개뜨려야 할 필요성과 함께 입시교육과 소질교육 문제해결에 대한 현실적 대안마련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아울러 갈수록 1등을 하는 학생들에게 문제점이 따르는 경우가 있을수 있고 10등(꼭 10등이란 얘기가 아니고 10등을 포함해 중등 정도의 성적을 말함)을 하는 학생들에게 되려 利點이 주어질수 있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항주시 천장소학교의 교원 周武씨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리유를 어느 정도 알수 있을 것이다. 1989년에 주무씨는  초청을 받고 졸업생들의 모임에 참가한적이 있었다 한다. 그때 그는 예상밖의 奇현상을 발견하고 내심 놀랐었는데 그 현상인 즉 그번 모임때 이미 부교수나 경리로 된 학생들은 학창시절에 학습성적이 그닥지 않았었다는 사실과 당년에 성적이 뛰여났던 학생들은  반대로 지금 그렇다 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였다. 실상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례는 아주 많다. 다만 우리가 이런 사실에 대해 진일보의 리론 사유를 하지 않고 있거나 하려는 생각마저 가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자기의 발견에 충격을 받은 주무씨는 졸업반 학생들에 대해 추적조사를 벌리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151명 학생을 추적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였다.소학교 때 主課 성적이 5등 안에 들었던 학생중 43%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 성적이  뒤로 밀려난 반면에 7~15등에 들었던 학생의  81.2%는 초중과 고중에 붙은 후 등수가 앞자리로 바뀌였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주무씨는"10등 현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10등 현상"은 왜서 생기는 것일가? 이 원인을 구명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현실적으로도 필요할 것이다. 현실을 들여다 보면 대개 主課 성적이 뛰여난 학생에게 부모와 선생님들의 관심과 배려가 쏠리는 경우가 많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른 바의 배려란 대부분 학과성적을 높이는데 과분하게 치우쳐 학생은 왕왕 모종 압력에 시달리게 되며 따라서 능력예비와 학습자주성의 발휘에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와중에 학생은 학습목적에 異常변화를 가져와 장래의 발전에 토대를 닦기 위해서가 아닌, 학습점수를 표현하기 위한 공부에 자신을 맡기기 쉽다.   그러나 성적이 10등 좌우인 학생군체는 상황이 다르다. 상대적으로 선생님이나 부모들로부터 관심이나 배려를 덜 받게 되는데 그것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 어른들로부터 오는 압력이나 속박에서 탈피하여 학습의 자주성이 보다 강하고 취미분야도 더 넓어질수 있으며 따라서 인생의 경기판에서 승자가 되기가 비교적 쉬워질수 있다는 리치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관련되는 다른 실례도 떠올릴수 있다. 대만의 유명한 기업 聯華電子의 대변인 劉啓東씨의 학창시절 학습성적은 종래로 10등안에 들어본적이 없다고 한다. 국제외자법인들의 투표로 "아세아태평양지역 제1인"에 입선됐던 이 반도체분석大家는 "내가 학교 때 공부를 하지 않았던건 아니다. 단지 공부에만 전념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류계동씨는 학생시절 공부만 한것이 아니라 과외독서를 비롯해서 자기가 흥취를 가지는 "다른 노릇"도 했다는것이다.   하다면 "10등현상"으로부터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의 교육을 점검해 봐야 할 점이 과연 없을가?   //吉林新聞
16    [창업칼럼]인맥관리 역시 생산력 개발 댓글:  조회:4067  추천:105  2007-04-29
길가에서 창업청년을 붙들고 느닷없이  당신에게 얼마마한 자원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선생님,지금 저한테 자원이 있는가고 물으셨습니까? 참 웃기십니다. 저에게 자원이 있는가고 물으시다니!' 라고 할 이가 분명 있을걸로 짐작한다. 자원이나 자본이라 하면 젊은이들은 흔히  '사회에 발을 금방 들여놓은 나에게 무슨 자원(혹은 자산이나 자본)이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실상 묻는측이 웃긴다고 볼게 아니다. 아주 진지한 상황조사일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다면  우선 조사대상으로 된 그 창업청년에게 정말 자원 혹은 자본이 있냐없냐를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원은 사람자체라고 한다.그  자원을 분류하면 첫째가 건강한 신체이고 다음은 자산의 축적량과 지출량, 그외 인맥, 심리구조, 지식구조, 인품 등인데 여기서 앞 세가지는 유형자산이고 인맥부터는 모두 무형자산에 속한다.  무형자산에서는 당연히  '인맥'이 제1호로 꼽힐것이다.일명 '관계망' 으로도 불리는  '인맥' 은 지금까지 주로 혈연, 지연, 학연을 지칭해 왔는데 요즘 들어서는  '디지털인맥'  이라는 낱말까지 생겨났다. 서로간에 정보를 우선해서 주고받는 사람들의 가까운 관계를 인맥이라 할수 있겠다.  사회인이라면 세상에 태여난 그 순간부터 자의와는 무관하게 일정한 사회관계속에 놓이게 되는데 일단 사업에 참가하는 나들에는 인맥관계가 급격히 확장되여 친척, 친구,동료,동창생, 이웃과 기타 방식으로 만나 알게 된 사람들이 다 그 인맥범위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중 친척, 친구나 동창생 등이 인맥관계의 핵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그래서 중국에 옛날부터 '집안에서는 부모에 의뢰하고 밖에 나가면 친구에 의뢰하라'는 말까지 생겨났나보다. 근데 언제부턴가는 '30전에는 능력에 의뢰하고 30후에는 인맥에 의뢰하라' 는 새말이 사이버공간에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우에 언급한 그 창업청년은 가능하게 이미 유용한 인맥을 갖고있을수도 있다. 이제 중요한것은 평소에 대인관계를 윤활하게 하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해서 필요한 사람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미리 확보해 둠과 아울러 기성성과를 부단히 확장, 활용하면서  '인맥관리' 를 잘하는것일 터인데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 이런 중요한 자원, 자산과 자본을 보아내지 못하고 그것의 활용과 확장에는 더구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다양한 관계속에서 학연, 지연, 혈연 등을 축으로 형성되는 인맥이 경쟁이 있는 모든 경우에 중요한 역할을 발휘함은 의심할나위 없는 일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도 인맥을 주요기반으로 발전해왔음을 감안하면 그 작용을 충분히 알수 있다.   믿음직하고 경험도 풍부한 조력자 한둘만 있다 해도 큰 도움이 될수 있다.지금 각지에서 다양하게 조직되고있는 여러 가지 동호회도 인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흡인력이 있을법하다. 사이버공간도 인맥구축의 좋은 발상지가 될수 있다. 창업청년은 가능한 인맥을 많이 확보하기에 신경을 써야 하며 그러면 사업전개에 절대적으로 리롭다.  물론 인맥만 있으면 모든게 다되는게 아니며 또 인맥이란것이 한번 구축하면 영원히 불변하는것도 아님을 분명 알아두어야 한다. 인맥이 깨지는 일도 사실 흔히 발생하기 때문이다.주로 일방적으로 자기의 리익만 챙기려 하고 조력자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게 문제다. 조력자가 꼭 보답을 바라는것이 아니라 해도 그렇다. 도움을 받는 측이 마냥 그새 장새로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의 이미지는 자연 손상을 입게 되기 마련일 터이요, 기존 인맥자원의 리용은 그때로부터 원활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다수의 경우 인맥의 지속적인 활용은 또한 자신의 실력이 전제돼야 비로소 가능하다. 실력이 전무한 사람의 인맥활용은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십상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조력자에게 불리익을 줄수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그 인맥은 오래 가기가 힘들게 된다.//길림신문
15    [창업칼럼]미국회사: “저질제품을 급히 수매함!” 댓글:  조회:4066  추천:109  2007-04-06
(음악이 시그러우시면 Esc를 누르시고)“저질유리섬유제품을 급히 수매합니다!”   일전 인터넷 사이트를 유람하다가 이런 광고제목을 보고 호기심이 동해 그 내용물을 읽어봤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저희는 미국회사의 중국내 구매담당인데 미국의 대형 에어컨제조상의 위탁을 받고 국내에서 저질유리섬유제품을 긴급 구입중입니다.수요량은 매달 20컨테이너...”   미국회사에서 저질제품을 매달 20컨테이너 사간다?이 광고를 보고 호기심 발동도 잠간,이상하게도 갑자기 전에 안 하던 생각들이 머리 한쪽을 비집고 올라오는 것이였다.저질원료도 재처리과정을 거치면 고급원료로 될수 있겠다?고급원료가 되면 고급 상품 생산도 당연히 가능할거 아닌가?저질제품을 헐값으로 사다가 유용하게 쓸수도 있잖아?   그렇지, 기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중국의 저질제품이 외국에 수출된 례가 없는것이 아니다.이를테면 북경의 한 우산공장에서 생산하는 우산은 형편없는 저질이였다.중등 정도의 비나 막을 수 있는, 어디에 살짝 긁혀도 쫙 찢어져나가고 조금만 심하게 굴면,아니, 몇번만 열었다 접어도 우산 전체가 각이 물러나 다시 쓸수가 없을 정도인 그런 우산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다른 질 좋은 모든 우산을 제치고 유독 이 제품만이 열띤 경쟁에서 단연 왕자로 뽑혀 영국, 미국,독일 등 경제발달국에로의 수출특권을 땄다 하니,그것도 매번 수출량이 저그만치 수십만 자루라 하니 상계법칙의 무상함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기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가? 원래 구미의 발달국에 사는 사람들은 바깥 나들이를 할 때 거치장스러움을 고려해서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지극히 드물다고 한다.거리에 나갔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면 길가의 점포에 들어가 몇딸라를 주고 우산을 사서 쓰면 그만이다.값어치가 안 가니까 아까울것도 없고 해서 집까지 쓰고 와서는 바로 쓰레기통에 버린다.일부 슈퍼에서는 “따뜻한 봉사”란 회사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비가 올 때면 고객들에게 무료로 이런 우산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일차성 소비물이니만큼 각별히 잘 견디고 우수해야 할 필요가 없다.단 값은 쌀수록 좋은 것이다.이런 경우의 이른 바 “저질제품”은 가짜저질상품을 진짜량질제품으로 속여서 비싸게 팔아먹는 그런 간상배적행위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잘 팔리는 상품이 반드시 량질제품인 것만은 아님을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결코 저질제품생산을 창도함이 아니고 시장매출은 고객의 다양한 실제수요에 의해 결정된다는것을 상기시키고자 함이요,우리의 젊은 창업자들이 국내외 시장고찰을 할 때 모종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변화 많은 시장속에서 유용한 정보를 신속히 포착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가질것을 권고하고자 함이다.//길림신문
14    [창업칼럼]창업자가 써볼만한 상술--《호기심유발책》 댓글:  조회:4059  추천:98  2007-03-31
홍콩에 점착제를 경영하는 전문점이 하나 있는데 이 집에서 구사한 상술(商術)이 아주 흥미롭다.   이 점포의 주인이 한번은《강력만능점착제》라는 새로운 제품을 들여왔다. 질이 만점이라 잘 팔릴수는 있겠는데 그러자면 광고를 해야 했다.그런데 조업한지 얼마 안되는 작은 점포로서는 그 광고료가 만만치 않았다.광고회사에 퍼줄 돈은 없고 상품은 팔아야겠고 이럴 땐 어떡허지?며칠동안 알골을 굴리던 점포주인이 갑자기《으핫,한가지 수가 있어!》하고 머리를 탁 쳤다.  주인은 가치가 천원 되는 금화 한잎을 점포 앞벽에 풀(바로 새로 들여온 그 점착제)로 찰싹 붙여놓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여기 금화 한잎 보이죠? 먼저 뜯어가는 사람이 임자입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저런! 공짜라면 비상도 큰것으로 골라 먹는 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금화를 뜯어가지려 했지만, 짜장 이거 아니올시다였다.뜯어내기에는 너무나도 단단히 들어붙어 있어서 벽돌장채로 들어내기 전에는 금화를 자기것으로 만들기가 전혀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과는 불보듯 했다.마찬가지로 질이 좋은 다른 점포의 점착제는 매상고가 내내 별로였지만 이 집만은 삽시에 소문이 쫙 나서 성업이 꽤 오래 지속됐다 한다.  이집 주인이 쓴것이 대관절 무슨 묘수인가?《호기심유발》이라는 상업술이다.모종의 물욕에 바탕을 둔 호기심은 인간의 본성(큰 비상을 골라먹는 사람을 망라하여 우리 모두는 적게많게 다 이런 근성을 가지고 있다)이라서 일단 유발이 되면 뜻밖의 효과를 보는 수가 있다. 때문에 심리학원리를 시장판매술에 적용, 사람들의 호기심을 리용하거나 이끌어내는것이 이미 갈수록 많은 창업자들의 흥취를 사는 중요한 경영처방으로 자리하고있다.   현재 우리 조선족의 다수 창업자들은 짧은 밑천으로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큰돈을 털어 중앙TV 등 거물급매체에 큰 광고를 하기 어렵다.작은 지방신문 귀떼기에 성냥갑만한 싸구려광고는 할수 있겠지만 그 효과가 여의치 않다.이런 경우엔 위에 언급한 점포주인의 방법도 써볼만한 것이다.  큰 기업들에서는 체면상 이런 장난같은 방법을 쓰지 않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광고에 엄청난 돈을 얼마든지 쏟아부을수 있으니까.기본상술이야 뭐 다를리 있을가마는 그래도 큰 기업에는 나름대로의 상술이 따로 있다.그러니 초창기의 작은 창업자들에게 큰 기업들이 쓰지 않는 이런 방법을 능력껏 사용할수 있는 전용특권이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 상술을 사용할 때 류의해야 할 점이 있다.뭐니뭐니 해도 상품의 질에 대해서만은 절대적으로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만약 밥풀같은 저질풀로 금화를 붙여놓고 재간있는 놈은 떼여 가라고 큰소리 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는가? 천원을 공떼우는건 둘째치고 그 즉석에서 미친놈이라고 비웃음과 빈축을 사게 될것이요,심하면 사기꾼으로 몰려 패가망신할수도 있다.물론 이와 같은 미련탱이는 없을테지만, 비유를 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상술을 구사함에 있어서 사기(詐欺)는 금물인것만큼 상품의 질을 우선 확보하고나서 비로소《호기심유발책》을 써야 한다는 얘긴데, 생각과는 달리 이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그런 방책이 하늘에서 떨어지는것도 아니요 땅속에서 솟아나오는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고객들의 심리를 연구해야 하고 그들이 듣도보도 못했던 새로운 실행안도 몸소 더듬어내야만 하는것이다.평소에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않으면 호기심유발묘수가 어디서 나오겠는가? //길림신문  
13    연변항운협주곡 댓글:  조회:4220  추천:80  2007-03-30
   연변항운협주곡 높은 산 깊은 골 동트는 연항 망망한 대해를 헤치고 간다 야망과 패기가 가득찬 연항 진취적 기상은 우리의 자랑    --에서   연항--심신유곡에 떠오른 기적 --세계와의 거리를 엄청나게 줄여 오늘 세상은 환상과 신화를 현실로 만드는 시대에 와있다. 하늘에 올라 별을 딴다 해도 별로 놀랄 이가 없으리만치 세상은 많이 변해 있다. 연변항운공사의 다섯척 상선이 동아세아 각국의 주목례를 받으며 일본해, 황해를 주름잡아 달리고있다. △“연변1호”화학품특수선의 위용. 1992년 10월 10일, 연변의 첫 상선 인수식이 천진항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이날 연변, 길림은 해상선박이 없던 자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부터 나흘만인 14일, 는 화학제품을 가득 싣고 천진항을 떠나 18일 한국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는 연변항운사의 뜻깊고 성공적인 첫 운항이였다. 드디여 1993년 6월 12일 연변항운공사가 자기의 탄생을 세상에 선고했다. 그후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연변항운은 1,000여만 딸라에 달하는 거액의 투자로 네척의 선박을 구입, 국제 항선우에 륙속 띄움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크게 놀래웠다. 바다와 부두를 끼지 않고 있는 내륙지로서 해운의 초창기에 이처럼 방대한 자금의 투하와 더불어 총적재톤수 2만톤을 육박하는 중형선박 다섯척을 연이어 경영에 투입시킨 일은 국제해운사에서도 매우 보기 드물다 한다. *     *     * 지난 3월 4일, 연변자치주 정협 위원이며 연변항운공사 회장인 전룡만씨가 조선 평양에서 “각방면의 조화협력을 거쳐 부산--청진항로 개척의 모든 준비가 전부 끝났다. 3월 15일 우리 연변항운이 개척한 부산--청진 컨테이너 정기항선은 예정한대로 정식운항에 들어가게 된다”고 전화편으로 정식 통지를 해왔다. 금년 3월 15일!남북분단으로 끊어진 동해허리의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청진항 리용을 통한 일본해 진출을 실현하게 될 이날은 두만강지역 개발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하루로 세계 해운사에서도 그 위치를 차지하게 될것이다. 청진--부산 직통!근해를 통해 세계로!이 꿈은 인제 우리 앞에 현실로 성큼 다가왔고 아울러 아득히 멀었던 세계가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청진항은 현재 적극 개발중인 로씨야의 짜르비노항과 조선의 라진항 외 요즘 유일하게 열릴 우리 성의 대외 수출 항구이다. 주지하다싶이 여직껏 흑룡강, 길림, 내몽골 등 지역의 바다를 통한 수출수입은 거의다 멀고 붐비는 대련항을 통해 어렵게 진행돼왔다. 이 항선이 개통됨으로 해서 이 지역의 “3자기업”을 망라한 많은 기업들은 연항의 선박을 리용하여 막대한 경제적 리익을 창출하게 될것이다. *    *    * 연변항운의 개척사업에 줄곧 큰 힘을 경주해왔던 연변자치주 남상복부주장은 연항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연항은 중국내륙의 유일한 국제항운이다. 산골연변에 선 연항은 일대 기적이다. 연항의 신장발전으로 해서 연변과 주변지역의 수출입은 시간, 경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는 가까운 해상통로를 갖게 되었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이 지역의 경제는 커다란 활력을 얻게 될것이다. 실상 연항의 의의은 이 지역을 훨씬 초월한다.” 기회의 서광 휘여잡고 --사나이 전룡만의 “야심작”                              ---------------------------------------------------------------------- “연변1호”--디젤오일탱크선(유조선), 적재톤수 3404톤, 93년 7월 17일 일본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 운항 구역: 한국의 울산--홍콩--중국의 대련, 상해, 광주--필리핀의 마닐라 ------------------------------------------------------------------- 80년대 하반으로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훈춘의 개방작업과 두만강출해권회복사업, 탈랭전시대의 도래와 함께 다가온 두만강지역개발에의 유엔의 참여는 동북아의 중심, 속칭의 “황금의 삼각주”지대에 력사적인 발전기회를 시사했다. 국제적개발작업이 서막을 고한뒤 정부에서 “제2홍콩”건설을 영접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자국나게 펼치는 가운데 기회의 서광을 틀어잡고 바다에로의 직접진출을 시도, 행동에까지 옮긴 이는 다름아닌 연변항운공사 회장 전룡만씨(금년 43세) 한사람 뿐이다. 85년도 창업의 난바다에 뛰여들어 갓 터진 시장경제의 모진 세파를 헤가르며 선후로 연변대외무역경제개발공사, 중조합자기업연진수산물합자경영공사, 중한합자기업 연고정수기유한공사 등 기업을 일떠세우고 드디여 연변대외무역경제개발그룹을 설립하기에 이른 전룡만씨가 진정 바다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0년도 10월 중국해원대외기술복무 연변공사를 세울 때부터였다. 웅숭깊고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들먹이는 웅심으로 보다 큰 활무대에로의 출범을 계획한 그는 한국 해운계의 인사들과 널리 접촉하면서 서둘러 출두여건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드디여 당시 아직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형편에서도 국내 처음 한국 선주협회와 공식관계를 맺고 연변의 조선족가운데서 부원급 선원 700여명을 키워 한국,일본 등 나라의 상선에 수송하는 등 일들을 신용있게 추진해 나갔다. 수백명 선원을 외선에 보내면서 전씨에게는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국제물류업은 90%이상이 해운을 통해 실현되는데 우리 절로 해운업을 하면 어떠냐?“황금의 삼각주”에서 주무대로 등장한 연변이 으례당당 자기 몫을 해야 할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암시가 되어 그의 뇌리엔 차츰 “우리 항운을 세우자”는 대담한 구상이 륜곽을 그리며 나타났던 것이다. 전룡만씨의 구상에 대해 자치주 정부에서는 물심량면으로 열성껏 도와나섰다. 그와 수년간 합작을 해왔던 한국벗들도 발벗고 나서서 협력했다. 발뿌리 닳게 한국을 드나들면서 입술이 닳도록 유세를 들이댄 결과 한국 금융계를 크게 감동시켜 마침내는 한국특수선 주식회사, 동북선박주식회사 등의 결정적인 련대보증밑에 거익의 국제금융을 도입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가운데 전씨의 끝질긴 노력, 강한 추진력, 드높은 신용이 한국 벗들이 그를 믿고 도와 나서도록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국제표준의 중형해운회사를 일거에 일떠세운 전룡만씨에게는 할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유예함이 없이 일들을 벼락치듯 밀어나갔다. 항운의 원활한 성장을 유력하게 보좌하기 위해 외국 벗들과 공동히 투자하여 한국 서울에 장룡해운회사를, 홍콩에 룡방해운회사를 설립하고 북경에 영업부를, 서울, 홍콩에 선박대리점을 세웠으며 그 외 대련, 광주, 상해 등 10여 개 연해도시의 대외수송대리공사와 실무계약을 체결하고 중국대외수송집단 도문공사 등과도 실무협조협의를 달성했다. 최근에는 한국에 있는 해운집행자매사인 장룡해운회사와 함께 해운경영관리정책협의회를 정식 설립하고 연변항운 연변본사 조직기구도 새오 조정, 확인했다. 이로써 연변항운공사의 조직 기틀은 원만히 잡혀진 셈이다. 그러나 연변항운이 해야 할 일이 어찌 이에만 그치겠는가?   기둥재목이 수풀 이루게 --연항의 인재전략   --------------------------------------------------------------------  "연룡3호"--잡화물선, 적재톤수 8800톤. 93년 10월 24일 중국 영구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한국의 부산--중국의 영구, 룡구, 상해--대만의 기륭, 화현 ---------------------------------------------------------------------   “인재! 인재!” 항운공사를 세울 준비를 할때부터 전룡만씨의 머릿속에서는 내내 이 문제가 지꿎게 맴돌이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그마한 일을 벌려도 인재가 수요되는 법인데 황차 바다라는 개념과 황운이라는것을 전혀 모르는 연변땅에서 그가 세우려는 것은 국제대상의 현대화한 대형물류업이 아닌가! 그에 걸맞는 상당수의 인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선진적인 선박을 아무리 많이 해놓는다 해도 그것은 실상 페철무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여 그는 중해연변공사에서 해원송출사업을 할때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면서 풍부한 해원사업경험을 쌓은 량동섭, 엄영자 등 중견인물들을 중역진에 기용하는 한편 고급해원양성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92년도부터 해마다 100여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해서 중등전문학교 졸업생을 남경항해학원에 19명, 광주항해전과학교와 대련해운학원에 40명을 학습보냈고 또 한국 선주협회와 연줄을 달고 반년에 2명씩 한국의 해운회사에 보내여 실습하도록 했다. 그외 해마다 영어에 능한 대학교 졸업생들속에서 엄격한 시험을 거쳐 신입사원을 10명씩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하다고 그는 인정했다. 참신한 사고방식을 가진 세계기업의 발전추세를 따를수있는 그런 관리일군이 필요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취한 방법이 외국으로부터의 인재도입이다. 처음 청해들인 인재는 화교출신, 한국태생의 담도굉(한족, 32세)씨다. 84년도 한국고려대 기업관리학부를 나온 그는 현대그룹에서 유망한 관리일군으로 일하면서 오스트랄리아 주재원으로도 3년간 근무했었는데 상당한 외국어 회화능력과 현대화기업관리능력을 갖고있다. 다음은 신연우(24세)씨인데 특수산업학교인 부산해양대에서 항만, 운송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항운지식이 막히는데가 없고 조직능력도 갖고 있으며 영어에 또한 능란하다. 그들은 선후하여 서울서 전룡만씨의 눈에 우연히(?) 걸려들었던 것인데 허심탄회한 속심얘기들을 수차 나눈 끝에 담도굉씨는 현대그룹의 정예공업회사에서의 승진기회를 내버리고, 신연우씨는 미국의 대형물류회사에 들어갈 기회를 포기하고 결국 “심산유곡의 연변항운”에서 하나와 같이 모이게 된것이다. 그들의 연변진출에서 연변개발의 밝은 전망이 전제로 작용한 것은 물론이지만 전씨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떠밀어주었던 것도 역시 사실이다. 연변항운에 온 첫날부터 그들이 공동히 겪은 것은 뛰고있는 바깥세상과는 의념과 사고방식이 판판 다른 그런 사업환경과 분위기였다.“환경 속에 내가 용해돼 버리고 마느냐 아니면 환경을 변화시켜 뛰는 세계에 적응시키느냐”가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도전을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적극적인 스타일로 그 도전에 응했다. 말그대로 항운이안 세계적인 물류서비스산업인만큼 국제관례에 따르도록 연항의 모든 기초사업을 다져가야 했다. 총경리 중임을 떠멘 담도굉씨는 이한 요구에 좇아 회장보좌, 통솔관리, 업무감독, 정책연구, 영어교수 등 일상사무를 타진해나가는 한편 “직원의 자질향상”,“회사의 대외이미지 향상”,“현대화기업질서수립”을 목표로 내걸고 그것을 회사의 전반 상버에 철저히 관철시켜나갔다. 전화를 받고 손님을 접대하는 례절, 상하급간의 례절로부터 시작해서 사업에 림한 자세, 실무자질제고 등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굳어진 재래의 습관을 새로운 이미지로 부각한다는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그것을 봉사정신, 애사정신, 분초정신 등 일련의 정신교육으로 받쳐주면서 아주 효과 있게 이 일을 진척시켜나갔다. 연항 종합기획실에 도임한 그날부터 신연우씨는 우선 지식과 경험의 결여로 초래되는 낮은 사업효률, 주, 부 순서가 뒤바뀌고 사업절차가 무시당하여 일어나는 질서마찰 등 곤혹을 자주 치러야 했다.하여 그는 자신이 익해 배워두었던 전업지식을 최대한 발휘해서 선원, 선박, 재무, 해사 등 제반 부서에 대한 종합적 기획관리와 해운지식 전수 등 업무를 진지하게 수행함과 동시에 서둘러 모든 사업절차를 새로 분명하게 만들어내고 각 부서들에서 소정의 절차를 드팀없이 밟도록 확실한 조치들을 따라세우기에 전념을 했다. △“연변항운”은 태평양을 활무대로 삼아가지고 연변과 주변지역의 경제신장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충정을 토설하고 있는 연변항운공사 회장 전룡만씨. 연항에서 외국의 선진적 관리경험을 도입하여 조직, 관리, 경영체계를 일원화하고 인사, 행정, 재정, 기획체계를 개혁, 조정하는 행정에 한국에서 온 이 두 젊은 일군은 각자의 사업분야에서 열심히 뛰는 정신, 상당한 실력과 높은 사업효률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전 직원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영향과 전체 직원들의 노력 밑에 현재 연항에는 현대화 기업답게 완전히 새로운 사업분위기가 형성되였다. 여기에서는 일에 게으름을 부리거나 사업질서를 흐리우거나 상급에 거역하는 직원을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창의적인 자세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맡은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 반수 직원이 중등영어 수준에 이르렀고 전체가 컴퓨터 조작을 배워냈으며 또한 상당한 해운지식을 배워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중견력량들이 불끈불끈 솟아나오고들 있다. 바뀌여진 환경은 어느새 사람을 키우는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     *     * 이 장에서 간과해 넘어가지 말아야 할 건이 하나 있다. 그것인즉 전룡만 회장이 한국에 스승 두 분을 모셨다는 것이다. 한분은 정책고문으로 한국동국대 경제학교수이며 동북아경제연구소 회장인 김태홍선생이고 한분은 한국 동북선박주식회사 리사인 한강륭선생이다. 1965년도에 연세대를 마치고 미국에 류학 가서 박사칭호까지 받은 김태홍교수는 귀국한 뒤 한때는 한국정부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으로도 있었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두만강 개발 등 국제 경제협력활동에 빈번히 참가하면서 , 등 저서도 펴낸 한국 1류의 중국경제연구 전문가이며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명망 높은 분이다. 1968년도에 한국해양대를 졸업하고 한국특수선주식회사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한강륭리사는 풍부한 해운경영경험을 가진 실력가인데 중국조선족선원송출사업에서 전룡만씨와 수년간 합작하면서 연항의 설립을 위해 크게 조력했던 분이다. 이 두분은 현재 연항으로부터 여러 가지 연구쩨마를 맡아가지고 연항의 순탄한 발전을 위해 고심들을 하고있다.   *     *     * 연항의 인재전략은 한마디로 말해서 현존인재를 기용하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며 외부인재를 도입하고 외계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회사에 적용시키는 전략이다.   동북아해운과 사고방식 전환 --김태홍교수,전룡만회장과의 인터뷰 -------------------------------------------------------------  “연룡4호”--세미컨화물선, 적재톤수 1600톤, 93년 12월 24일 부산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부산--청진 -------------------------------------------------------------   (연항에 대한 몇가지 관심사를 가지고 일전에 두분과 인터뷰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따로 가진 부동한 내용의 대화지만 서술의 편리를 위해 여기에 한데 묶어 적는 바이다.)   김태홍교수와 가진 인터뷰   기자:갓 탄생한 연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태홍교수: 짧은 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 봅니다. 지리적으로 불리하고 (바다와 떨어져있음을 말함--필자 주) 기초작업이 끝나지 않아 어려운 점이 많은 연변실정에서 이와 같은 큰일을 해냈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연항의 성과를 적어도 연해도시 상해나 대련에서 성취한 것의 200%로 볼 수 있습니다. “황금의 삼각주”개발과 더불어 이 지역의 기업들은 연항의 선박을 최대한 리용하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연항은 이 지역 경제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기자: 근년래 세계경제의 불황으로 해운업도 진통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김교수의 견해는요? 김교수: 연항이 국제해운저조기에 탄생한건 사실입니다만 실상 저저기의 끝은 상승의 시발점으로 되기에 연변항운도 상승의 기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동북아지역의 경제는 호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경제기술합작이 활발해짐에 따라 자연 무역을 통한 물동량이 급 장성하게 될 것인데 물동량 대부분은 항구를 통한 해운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항운은 이 지역 발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업입니다. 기자: 연항의 성공에 대한 확신여부를 동북아 개발의 큰 시각으로 고찰함은 두말할 것 없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국제해운의 특유의 존재발전법칙으로도 가늠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김교수: 그렇습니다. 이 문제를 해답하자면 이 지역 해ㅔ운의 성격부터 구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역의 해운은 그 성격으로 보아 연근해 해운입니다. 이 지역과 같이 가까운 거리의 해운에는 중형선박이 알맞지요. 하지만 동북아의 일본, 중국, 한국, 로씨야 등 나라는 모두 해운 강국들인만큼 대부분의 국가 기간 해운 선사들이 모두 대형 선박들로 편성돼 있어서 원양해운에는 알맞지만 근거리해운에는 알맞지를 않아요. 소형 선사들은 내항이 위주여서 역시 이지역의 해운에 알맞지 않습니다. 황해, 일본해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지역에서는 주로 이삼천 톤, 만 톤 좌우의 중형선박들로 편성된 연변항운이 우세입니다. 대형선박해운과 소형 선박해운의 “틈새시장”--이것이 바로 동북아 연근해 해운입니다. 연변항운은 이 “틈새시장”을 최대한 리용해서 신속히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자: 대형상선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어렵다는 리유는 뭡니까? 김교수: 일본, 한국, 대만 등 나라와 지역의 경우, 비싼 인건비가 그들을 주춤하게 만드는 관건적 요인이 됩니다. 다음 륙상관리비가 너무 비싸고 비용이 많이 들어 도저히 리윤을 내기 어렵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되지요. 대형선박의 연근해해운은 수지가 맞지 않은 노릇이라 그거지요. 그러나 중국의 경우 저렴한 인건비의 선원을 양성할 수 있고 륙상관리비도 상대적으로 싸기에 한국, 대만 등과의 생존경쟁에서 충분한 우세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여건을 어떻게 리용하느냐는 완전히 연항 지도진의 역할에 달려있습니다. 요컨대 전룡만회장은 추진력이 아주 큰 사람이고 정부 측의 대폭적인 지지도 있기에 연항은 전망이 매우 밝다고 봅니다. 이를 확신하고 있기에 한국 측에서도 연항을 발 벗고 나서서 돕는 거죠. △국제금융도입은 신용을 생명으로 한다. 그만큼 전룡만회장의 어깨에 놓인 짐은 무겁다. 국제차관서약서에 싸인하고 있는 전씨(앞줄 가운데 사람).   전룡만회장과 가진 인터뷰 기자: 현재 여론은 연항이 전대미문의 사업을 창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을 해나가면서 전회장이 가장 깊이 느낀 감수는 무엇입니까? 전룡만회장: 모든 일에서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부한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놀랍게 변해있는 바깥세상에 적응할 수 없어요. 쉬운 례 하나 들어봅시다. 로임을 누가 주냐고 물으면 우리는 사장이 주는 게 아니라 고객이 준다고 말합니다. 사장이 준다는 것과 고객이 준다는 것은 완전히 상반되는 사고방식이지요. 로임을 고객이 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다면 전화 한통을 받아도 심상히 넘겨버릴 수가 없습니다. 실상 전화 한통도 순간광고에 다름 아니죠. 친절한 표준어로 “안녕하세요! 연변항운입니다.”고 하면 그게 바로 광고가 되거든요.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냥 견지를 해나가면 그게 곧 큰 광고역할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전엔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요. 순간순간을 잘 해 나가는 사람이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벌린 게 “초(秒)관리운동”입니다. 매 하루를 분, 초로 나누어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주먹구구식의 경쟁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기자: 국제물류서비스기업으로서의 연항의 영업활동취지는 무엇입니까? 전회장: 통일적이고도 일원화된 경제체계 속에서 유력한 책임경영제를 도입하고 민족과 국적, 지역과 국경에 상관없이 세계적인 조직망을 건립하여 영업활동의 국제화와 효률화의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 한국, 인도네시아, 타이 등 7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그중 서울,연변의 륙상 근무 인원만 해도 16명이 외국인입니다. 사업효률성과 경제효과성에 구애 없이 월급을 주고 상금을 주던 그런 무책임한 관리체계를 털어버려야 합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분공위임하고 그 책임과 근무여하에 따라 승진을 결정하고 공과를 판단하는 새로운 관리체계로 바꿔버리지 않으면 안 되지요. 우리는 항운의 현대화관리요구에 따라 20여세, 30세 좌우의 젊은이도 지도진, 중역진에 올려놓고 그렇지 못한 경우엔 원로파들도 말단 직원으로 배치하는 등 대담한 개혁조치를 댔는데 전반 사업에 대한 추진이 매우 컸습니다. 내부관리 측면으로 볼 때 우리의 사업효률은 이미 국제수준에 와있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자: 전회장의 최종목표는 무엇입니까? 전회장: 동북아 최대의 기업을 키워나가자, 이 지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어 사외에 보다 많은 재부와 가치를 창조해주자는 게 저의 리상이자 인생목표입니다. 목표를 크게 세워놓고 보니 어려움에 부딪칠 때도 많고 저의 능력과 회사의 능력에 비해 부하가 점점 커가고 있음도 느끼게 됩니다만 그럴수록 나 하나를 둘로, 셋으로 쪼개서 배 이상으로 뛰여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국제해운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기업을 모델로 삼아 열심히 뛰고 있어요. 이 순간에 일본의 회사들은 어떤 스타일로 일하고 있느냐? 이런 생각을 안고 말입니다. 직원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처사가 국제적인 흐름에 몹시 뒤진다면 회사가 도저히 살아남질 못할 테니까, 그리고 회사운영효률의 여하에 따라 직원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만큼 직원모두가 높은 자각을 안고 뛰고있는 거죠. 때문에 곤난도 많지만 신심으로 충만돼 있습니다. 뜻이 있는 사나이들이 애써 일한다면 사회의 지지 밑에 꼭 풍만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연변자치주정부와 한국 벗들은 연항의 개척사업을 시초부터 물심량면으로 지지 협력해 왔다. 호상협력을 약속하며 뜨겁게 손을 잡은 자치주 남상복부주장(오른쪽)과 한국케미칼해운주식회사 박종규사장.   동트는 연항, 서막은 열렸다 --연변항운의 프로젝트와 밝은 전망 --------------------------------------------------------- “연룡5호”--잡화물선 적재톤수 2611톤, 93년 11월 5일 한국 서울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한국--일본--중국--조선 청진 -------------------------------------------------------- 금년 1월11일부터 이틀간 연변항운은 제1기 총회를 연길에서 가졌다. 이 회의는 1년 남짓한 동안의 준비와 연습을 거쳐 바야흐로 본격적 운영에 들어가는 시각에 열린,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그 영향력을 과시하게 될 중요한 회의였다. 회의에서는 연항의 지난 단계 사업을 총화검토하고 세계경제,해운형쎄와 내외사업여건을 연구분석한 기초우에서 향후목표를 전략적각도에서 명확히 제출했다. 회의는, 40만톤의 화물수송과 1000만 딸라의 영업수입창출을 금년도 목표로, 년간 150만톤 화물을 수송할수있는, 총적재톤수가 5만톤에 달하는 동북아해상수송의 중견사로 발돋움하는것을 96년도 말까지의 목표로, 해륙공복합수송체계를 수립하는것을 세기 말까지의 목표로 제기했다. 연항의 “야심”만만한 삼단도약전략! 뽀세창고, 콘테이너적하장 등 기초시설의 마련, 컴퓨터련락망 설립 등 현대화고한리의 정착, 엄밀한 인재양성체계의 확립, 과학적조직, 관리체계의 진일보의 구축, 타사와의 업무제휴 등을 그 바탕에 깔고있는 이 프로젝트는 두만강 삼각주에 대한 국제개발 프로젝트가 추진됨에 따라 허황한 신기루로가 아니라 뚜렷한 현실로 우리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게 될것이다. 보라, “연변1호”는 가동해서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연습의 때를 지우고 흑자를 기록했고 그 외의 선박들도 흑자경영체계의 기치밑에 한국, 일본, 중국, 조선, 필리핀 구간을 부지런히 뛰고들있다. “연룡4호”도 당금 동북과 세계와의 거리를 엄청나게 줄여 이 지역 경제에 흥분제를 주입하게 될 것이다. 동북아지역 물동량의 급증추세는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연변항운은 부원 급 선원 700여명을 키워 국내외 여러 선사들에 수송했다. 그들은 연변 제1대의 해원들이다. 해륙공복합수송체계의 수립도 막연한 호언장담이 아니다.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소요의 거액신용차관을 약속해왔기 때문이다. 전룡만씨는 말한다-- “방향과 목표를 뚜렷이 잡아놨으니 아무튼 우선 금년을 촌놈이 신사무대에서 겨루어 이기는 한해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촌놈”이 “신사무대”에서 겨루는 한해로! 아울러 겨루어 이기는 한해로! 이것은 심산유곡 연변항운의 세계로 향한 “야심”적인 도전이요, 진공태세인것이다. 이런 도전적 스타일은 1996년도 말, 본세기말에 가서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또한 약동하는 연항의 희망소재이기도 하다! (본문의 사진은 연변항운공사의 량동섭씨가 제공했음)  
12    젊은 창업자들에게 해보는 제안 댓글:  조회:3924  추천:115  2007-03-22
옛날 녀자들은 신랑을 잘못 고를가봐 무척 겁을 냈다. 일단 시집을 가면 좋던 궂던 그집 귀신이 돼야 했으니까. 지금은 세상이 변해서 아이 둘을 낳고도 훌쩍 리혼해서 행복을 찾아 떠나지만 그래도 따지고 보면 와중에 쓰라림과 손실이 기수부지다. 젊은이들의 창업도 결혼과 다를바 없다. 창업과 《결혼》했다가 한번 실패하면 기가 꺾여 재기의 꿈마저 접고 취직이란 《행복》을 찾아 떠난다. 향항, 상해와 북경의 창업조사에 따르면 20세좌우 젊은이들의 창업열이 40대나 50대를 초월했다 한다.길림성에는 아직 통계가 없지만 사회 일반보다 청년창업률이 높을거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런 청년들은 개인봉사업, 상업봉사나 창조성 업종에 종사하고있는것이  통례이고 그중 성공사례도 적지 않아 다른 젊은이들을 시샘케 하고 들뜨게 한다.이와 때를 같이 하여 보도매체들은 한결같이 청년창업을 부채질하고있는것이 현실이다.  전반 시장경제가  성숙돼감에 따라 상업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마당에 멋도 모르고 창업에 몰입했다가 골탕을 먹는 사실에 대해서는 류의하는 이가 별반 없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열정은 하늘을 찌르지만 자본이 없고 경험도 없어 창업에서 실패하는 사례가 많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종당에 성공하고야 마는 그런 정신은 창도해야 한다.  하지만 사고방식은 이런  경우에도 활성화하는것이  바람직할것 같다. 이를테면 어느  괜찮은 기업에서 일하다가  날개를 어느 정도 굳힌 다음 창업의 길에 나서면 어떨가 하는 물음을 한번쯤 스스로 던져본다면? 경영의 달인,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질만큼 수많은 업적을 남긴 피터 드러커는 《가장 성공한 젊은 기업인은 큰 기업의 조직에서 한 5년 내지 8년 정도 일해본적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그 기업에서 배운 경영관리방법으로 굽은 길을 적게 걷고 성공을 했다》고 말했다. 집계에 따르면 가장 빠른 성장을 기록한 세계 500대 기업에서 71%에 달하는 기업의 핵심기술,핵심자원은 모두 기업창시자가 시초에 취직했던 기업에서 가져온것이라 한다. 놀랍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럴수밖에 없을것 같다. 그러고 보면 경력 역시 중요한 자원이다. 큰 회사에서 뛰쳐나와 창업을 한 사람들에게는 직업생애에서 쌓아올린  환경우세와 더불어 전문업종에 대한 추앙을 받을만한 지식이 있으며 업종내 사정에 밝은 자로서의 특수한 지위도 가지고있다. 물론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창업을 하면 좋은 점도 있다. 실패를 거듭해도 나이가  젊기에 재기할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으며 그렇게 어렵사리 쌓은 경험으로 큰 성공도 가능한것이다.하지만 치러야 하는 댓가가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클 경우 모든 꿈이 수포로 돌아갈수 있음도 반드시 예견해야 한다. 이제 각도를 한번 바꾸어 생각해보자. 가령 실패가 피면키 어려운 일이라면 왜 하필 자기가 창설한 기업에서 실패를 거듭하겠느냐? 큰 기업에서 일할 때 실패를 미리  경험해서 그 경험으로 자기 창업을 하면 더 좋지 않겠느냐? 이것이다. 큰 기업에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젊은 창업자들에게 리롭다 할 때 과감히 이런 제안도 해보는 바다. 창업준비가 잘 돼있고 자신에 차 있는 청년은 당연히 례외다.//길림신문
11    엄마의 계산서 댓글:  조회:4147  추천:136  2007-03-18
(음악이 시끄러우시면 Esc를 누르시고)어린 피터는 상인의 아들이였다. 아이가 아주 총명했으므로 아버지는 늘 돈을 받거나 지불하는 명세서를 그에게 맡겨 처리토록 했는데 그는 번번히 잘 해냈다. 피터는 자아감각이 점점 좋아져 자기가 이미 상인이 된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어느날 그의 머리에는 갑자기 한가지《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계산서를 만들어 매일 엄마 심부름을 한 값을 받아 내야겠다고 생각한것이다.이날 엄마는 식탁우에 계산서 한장이 놓여있는것을 발견했다.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엄마가 피터에게 빚진 것:생활용품 사오기 20페니히(100페니히가 1마르크임), 우체국에 가 편지 부치기 10 페니히, 화원에서 일 돕기 20페니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장려 10 페니히, 루계 60페니히아들이 쓴 이 계산서를 보고 피터의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가?참, 피터엄마의 반응을 보기 전에 우선 이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적에 우리 아이들 엄마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표정을 짐작해보자--엄마들은 아들애에게 한 50원 정도 던져 주며《얘가 몹시 썰썰한 모양이구나? 엣다, 아무거나 네 먹고 싶은 걸 사먹어라》하거나 《이것봐라, 우리 아들이 인젠 다 컸네?》 혹은《이런? 우리 애가 진짜 대단하구나. 계산 속이 빠른걸 보니 장차 커서 부자 되겠다야?》 하면서 무척 기뻐하거나 《그래그래 엄마 빚졌다. 50원 주마. 잘만 하면야 까짓 돈 아끼겠니? 너 반에서 10등 안에만 들어라. 100원 장려다.》라고 하거나《뭐라고? 고까짓 심부름 좀 하고 돈 달라고? 엄마 뼈빠지게 일해 널 먹인 돈은 언제 갚을래? 》라면서 발끈하는 등 그 표정도 각각일 것이다.이런 식으로 교육한 결과는 구경 어떠할가? 아이들이 부모한테 손 내미는데 습관되거나 너무 개인 리속을 챙기거나 돈밖에 모르는 애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이제 피터의 이야기를 계속하면—피터의 엄마는 계산서를 자세히 보고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저녁에 피터는 식탁우에 자기가 요구한 60페니히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마치 개잡은 포수마냥 시뚝해지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곁에 또 한장의 계산서가 놓여있지 않은가.피터가 엄마에게 빚진 것:10년 동안 잘 키워준 것 0페니히, 그 사이에 먹이고 입힌 것 0페니히, 병이 났을 때 간호해 준 것 0페니히, 자애로운 어머니 장려 0페니히, 루계 0페니히자식을 위해 혼신을 다하면서도 일전한푼 보답도 바라지 않는 어머니! 어머니의 계산서를 읽은 어린 피터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콩콩 뛰는 가슴을 안고 살금살금 엄마한테로 다가가 부끄럼으로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엄마 품속에 깊숙히 묻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 60 페니히를 엄마의 행주치마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피터엄마의 계산서는 실로 천하의 부모들에게 떼여준 모범 《약방문》으로 되기에 손색없다.로동을 했으면 보수를 받아야지? 맞다. 어린 피터는 이렇게 생각했고 엄마는 두말없이 아들에게 60페니히를 주었다. 우선 이는 아들의 독립적인격에 대한 엄마의 인정이며 존중이다. 그럼 어린 피터가 엄마한테 로동보수를 달라고 요구한 것은? 당연히 맞지 않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아들더러 그 잘못을 깨닫게 하겠는가? 직설적으로 《너 그럼 못써!》하는 식으로? 만약 그런 식으로 했더면 어린 피터가 자기 잘못을 깊이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적어도 깊은 감동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피터의 엄마가 쓴 방법은 암시의 방법이였다. 그는 우리에게 자식을 교양함에 있어서 사랑과 책임성이 필수인 외 마음을 깊이 울려주는 암시적 방법으로 거룩하고 깨끗한 사랑을 표현하는 지혜도 갖추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길림신문
10    상인, 녕파사람, 연변 어머니, 그리고 집단집념 댓글:  조회:5045  추천:132  2007-03-12
죽는 순간에도 장사를 한 상인이 있다.그에게는 소학교시절에 벌써 주어온 완구차를 고쳐서 한반 동창에게 반센트(100센트가 한 딸라임)에 팔아먹은 기록이 있다. 중학교 졸업후의 어느날에는 일본사람들이 물감에 얼룩이 진 젖은 비단필을 처리못해 쩔쩔 맬 때 그걸 가져다 특이한 옷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 일로 해서 그는 대번에 부자가 됐다. 남이 버리는 땅을 아주 헐값에 사서 몇년 후 2400여만 딸라에 팔아넘기는 놀라운 장사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77세 때 림종을 앞두고 한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걸작이였다.비서를 시켜 《본인이 며칠내로 승천을 하겠는데 이미 승천한 분들에게 건재중인 친인들의 문안과 기별을 전해드릴 용의가 있으며 기별을 전하는 대가로 사람당 100딸라씩 받겠다》는 내용의 글을 신문에 게재토록 했다. 죽은 사람에게 기별을 전해달라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아주 많아 상인은 병상에 누운채로 10만딸라를 벌었다. 수전노로 점찍힌 인물이지만 《상업에 대한 집념》이란 점에서는 그에게 높은 점수를 줘야 한다. 상업분야에서 일개인의 집념도 이토록 무서운데 이런 집념을 한개 지역, 한개 집단 지어 한개 민족이 가지고있다면 그 힘이 어느 정도겠는가? 저 남쪽의 녕파사람들이 이런 집념의 집단소유자들이라면 틀리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옷장사를 잘한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아편전쟁후 상해에서 항구를 개방하자 녕파사람들은 상해로 우르르 쓸어가 도구도 간단하고 원가도 별로 안 드는 재봉업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돈벌이가 잘되니까 친척, 친구 지어 마을사람들까지 불러다 옷을 만들어서는 서양사람들에게 팔아 국내외로 크게 소문놨었다. 개혁개방후 녕파사람들은 옛 조상들의 재간을 들춰내여 다시 복장업을 벌였다. 재창업 행정에 보여준 복장업에 대한 그들의 강한 집념은 사람들에게 지극히 심각한 인상을 주었다. 한 복장기업의 사장은 할머니인데 애초에 농촌녀성 몇명을 데리고 창업할 때 상해에 있는 녕파적(籍) 복장디자이너의 기술을 얻기 위해 수십차례 그 스승을 찾아갔었다. 그 스승은 내내 머리 반쪽도 내밀지 않았었는데 그러던 중 그 스승의 어머니가 중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그녀는 인제 기회가 왔구나 하고 로환자를 다시 없는 정성으로 살틀히 보살펴드려 마침내 스승을 감동시키고야 만다. 그녀가 핵심기술을 얻게 된건 두말할 것 없다. 이런 집념을 가진 사람이 그 할머니 한사람뿐이 아니라 녕파사람들 다수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한테도 이런 집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긴 하다.문제는 아직 집단집념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힘이 미약하다는것이다.다행히 구심점을 찾아 고군작전체나 침체집단을 큰 활력체로 묶고자 하는 노력들이 보여 자못 고무를 받는다. 일전 연변에 갔다가 《세계연변된장축제》를 기획하고있는 친구를 만났다. 《연변민들레생태문화마을》을 창설한 이 친구에 따르면 전통장에 수백종의 미생물이 서식하는데 그 많은 미생물을 기계로는 생산해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근근히 몇가지 미생물만 기계화생산에 들어간 상황이며 생산에 한계가 있는 전통장은 그 가격이 기계로 만든 장의 5배이상으로 비싸다고 한다. 그런데 연변은 콩의 주요산지이고 또 우리 가정들은 모두가 장생산의 과학을 가지고있기에 농가를 기업으로, 어머니들을 경영인으로 해서 연변을 장류생산단지로 부상시킬수 있으며 가가호호에서 생산해낸 장을 총집합시켜 재숙성 과정을 거치면 통일된 맛과 가격으로 유명브랜드를 창출할수 있다는 계산이였다. 한국을 수십차례 드나들면서 한시도 된장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작년부터 북경에 차린 사업은 원격지휘로 하면서 아예 연변에 몸을 푹 담그고있는 그는 《전통된장의 현대화생산조건은 유일하게 연변만 가지고있다》는 설을 도도히 폈다.이 말을 나는 믿는다. 한마디 부언할 것은 워낙 외지인이라면 웬간해서는 잘 인정해주질 않는 연변의 특이한 《인정세태》에서 흑룡강출신인 이 친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수년간 현지실험을 거쳐 무공해알곡 증산에 효능이 특출함이 이미 밝혀진 기능성비료 《제타》(이 비료로 생산한 입쌀은 지난해 한 근에 5원씩 팔려나갔다)를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연변에 도입, 대량 생산을 꿈꾸었지만 종당에는 성사 못하고 그 항목(비료공장)을 부득이 흑룡강에 옮길 수밖에 없었던 그다.하지만 가지고 있던 꿈을 접지 않고 생태연변건설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집스레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를 주변의 여러 사람들은 지켜보고 있다. 아무커나 이제 《민들레마을》 사람들의 집념을 연변의 어머니들과 어머니가 아닌 사람들의 집념으로 바꾸는 어려운 작업이 필히 행해져야 한다. 이 작업 또한 강한 집념이 없인 결코 해낼수 없는 일이다. //길림신문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9    민영경제: 하지 말라는 말 안하면 하라 댓글:  조회:3902  추천:97  2007-03-10
민영경제: 하지 말라는 말 안하면 하라   최근 길림성 지도부에서 민영기업에 <비금즉입(非禁卽入)>정책을 실시한다고 선포했다. <금지하는 일만 아니면 다 할 수 있다>는 이 신 정책(길림성에서 <새것>이지 적잖은 타지방에서는 <새것>이 아닌지 오래다)의 선포와 아울러 시장에 신속히 진입할 수 있도록 차별시정책 및 걸림돌정책 페지 등을 망라한 열 가지 강력한 추진조치도 마련, 발표해 믿음 또한 주는 대목이다.   길림성의 발전이 여느 성들보다 많이 뒤처져 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왜 뒤처졌는가? 길림성 자체로서 어쩔 수 없었던 력사적 원인도 있겠지만 주로 자체의 인위적 요인을 찾아 봐야 한다. 무엇이 자체의 원인인가? 측간 바닥의 돌멩이처럼 더럽고 딱딱한 집단 무의식, 특히 중층 이상 간부층의 집단 무의식 때문이라고 필자는 꼬집고 싶다. 문서주의(文牘主義)로 표현되는 이 집단 무의식은 기성 문건에 대한 맹종을 모든 분야에 종양처럼 확산시켜 모든 일을 문서로만 처리하려 들고 인간의 창조적 활동은 철저히 외면한다. 문서로만 일을 처리하려 하니 문서주의를 버린지 오랜 다른 성에 뒤처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특히 공유경제에 속하지 않는 민영경제발전이 문서주의의 해를 많이 입었다. <하라는 것만 하라>는 풍토속에서 민영기업의 발전에는 장애가 첩첩했다. 왜냐 하면 정부에서 <하라는 일> 외에도 기실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많은 일을 제쳐두고 문서에 지정한 일만 하라니 바로 수족 얽어매기 그 자체였다. 정부 관련 부처의 일부 일군들은 문건에 없는 항목을 비준했다가는 자기한테 불리익이 떨어 질가 봐 항목이야 좋건 말건 차라리 비준을 안 해 주는 형국이였다. 길림성 경제발전에 대한 그 항목들의 유용성 여부는 결코 자기 체신만을 돌보는 그 알량한 량반들의 관심사가 아니였다.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민영기업은 공유기업과의 차별화 정책(이를테면 세수정책)으로 인해 시장경쟁에서 늘 일방적으로 당하기가 일쑤였다. 공유제기업소의 회장님이나 사장님들은 휘파람을 슥슥 불면서도 비까번쩍하는 고급 자가용을 몰고 다닐 수 있었지만 민영기업의 사장들은 고심참담하게 경영을 해도 자칫 망해 자빠지기가 십상이였다.   물론 중앙의 시책에 의해 민영경제의 시장진입문턱이 하루 다르게 낮아짐으로서 민영기업의 발전이 큰 힘을 입은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와중에 민영기업의 생명력은 류달리 왕성해서 지난 해 전국적으로 비공유기업에 취직한 인원은 1.1억 명에 달했다. 이는 전반 중국 취업인수의 80%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수자이다(우리 성 비공유기업 취직인원은 295만으로 전 성 취직인수의 54%를 차지한다. 아직 전국수준에 많이 뒤처져있다).지난해 민영기업의 등록자금은 6만3000억 원으로 우리나라 GDP총량의 50%를 차지하였다. 공유제 우세확보 운운은 이미 말도 안 되는 과거사로 되여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림성의 민영기업은 현재 구태의연히 거부기 걸음을 하고 있다. 통계수치가 말해주다시피 우리 성 민영기업 호수는 강소성의 1/8, 광동성의 1/7, 절강성의 1/6이고 절강성은 규모이상 민영기업이 만인 당 4.27호인데 반해 길림성은 만인 당 고작 0.53호 밖에 안 되는 실정이며 강소성에 등록자본이 억 원 이상인 민영기업소가 370호나 되는데 반해 길림성은 겨우 9호 밖에 없다. 한 하늘 아래 같은 볕을 쪼이면서 이게 말이 되는가?   성 지도부에서 일찍 이 점을 간파하고 이미 고질이 된 간부들의 머리를 깨쳐 볼 요량으로 중국에서 경제발전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에 해마다 간부를 몇십 명씩 견학연수(기한은 1년)를 보내지만 돌아 올 때는 경제개혁에 대한 신심, 용기가 하늘을 찌르던 이들이 정작 돌아와서 일년만 지나면 기관에 쫙 깔린 보수통간부들의 수풀속에서 초지(初志)는 마모(磨耗)되고 마침내 원점으로 되돌아가기가 일쑤다.길림성의 간부가 한꺼번에 절반 정도 나갔다 오면 상황이 확 바뀔 수도 있겠지만 안 될 말이고, 내내 지금의 이런 방식으로 급변을 창도해 낸다는 것도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길림성의 고질은 책(기성 문건)대로 하는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데 있다.남방에서 박살난지 오랜 이른 바의 <문서주의>가 아직도 우리 성 다수 간부들의 두뇌를 단단히 얽어 매고 있어서 앞으로 한 발 내디디기가 여간 힘드는게 아니다.   왕민 서기는 우리 성 경제발전이 굼뜬 것은 민영경제의 히스테레지스(滯後, Hysteresis)가 낳은 결과라고 못 박았는데, 옳은 말이다. 뜻인즉 길림성이 잘 되려면 민영기업이 잘 돼야 한다는 것이다.아무튼 정부는 <비금즉입>정책에 립각해서 올부터 민영기업의 창업문턱을 가능한 낮추고 <전인민적창업>의 짙은 분위기를 창출 하겠다는 확고한 방침이다. 각 현(시)에 창업부화기지 1~2개씩 앉히고 소기업주 만 명을 키워내게 된다고 하며 창업을 돕도록 민영기업에 간부 1000명을 파견하고 창업인재 양성에 거금도 퍼붓게 된다고 하며 초창기의 창업자들에게 대부금 지원도 하게 된다고 한다. 3년 내 민영기업은 10만 개로, 개체공상호는 100만 개로 늘이고 그 수입을 배로 신장시킬 계획이라 하며 올해 민영기업 100강을 평정, 표창하여 본보기를 수립할 것이라 한다.   <비금즉입>정책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 없다. 이 정책을 <할만한, 또는 해야 할 일이라면 다 하세요, 막지 않겠소이다>는 의미로, 또는 <우리 모르는 사람들이 앉아서 무엇무엇을 해도 된다 어쩌구 안할테니, 단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일 몇가지만 확실하게 규정해 놓을테니 그외의 모든 일들은 국민 여러 분이 다 알아서, 혹은 창조적으로 만들어들 하시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조선족사회의 민영기업이나 창업에 뜻을 둔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생각을 잘 정리하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할 때가 아니냐 싶다. 우리의 사고방식도 변화된 현실에 따라 적시적인 전환을 가져와야 할 것이다. 무슨 기성 항목이 정책상 허용이 되냐 하고 전전긍긍 하지만 말고 정책적으로 금지되지 않은 무한정한 신 항목을 발견, 발굴하는데 신경을 바짝 도사려야 할 것이다. <금지령>밖의 세상은 하도 넓고 할 일 또한 하도 많아서 창의력만 충분히 발휘한다면 자유롭게 활개 칠 공간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말이다.
8    '제미얀의 물고기탕'과 '과유불급' 댓글:  조회:4034  추천:121  2007-03-02
19세기 로씨야의 저명한 작가 그릴로브는 <제미얀의 물고기탕>이란 우화를 쓴적이 있다.이야기 줄거린즉 이렇다.주인공 제미얀이 맛있는 물고기탕으로 손님을 초대한다.손님은 구수한 고기탕을 맛갈스레 먹는다.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주인이 연신 대야들이로 쉴새 없이 고기탕을 강권하는 바람에 손님은 도시 받아 당할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좌석을 피해 달아나고 만다. 중국에 이 우화에 딱 들어 맞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속담이 있다.공자선생이 발명한 말인데 무슨 일을 하든 너무 지나치면 그 일을 안하니만도 못하다는 말이다. 로자선생도 이와 비슷한 리론을 편적이 있는데 <지지불패(知止不敗)>라는 낱말이 그것이다.일을 진척시킴에 있어서 적당한 부분에 와서 멈출줄 알면 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무슨 일을 하든 도를 장악할줄 알아야 하며  <도>를 넘는 모든 소행은 유해무익하다는 말이다.그러고 보면 이 두가지가 다 아주 유용한 철학인것 같다.아마 그래서 어느 큰 어른이 이 두마디 고전을 유가정신의 정수라고까지 치켜세웠는가보다.   사실 무슨 사물이나 다 일정한 질을 보장하는 량적 계선이 있다.  그 계선을 일컬어 <도>라고들 한다.  <도>를 넘으면 왕왕 사물의 원 <질>이 파괴를 입게 된다. 구수한 추어탕도 너무 먹으면 배가 세간나기 마련,물도 섭씨 령으로부터 100까지의 <도>를 벗어나면 얼음이나 수증기로 변해버리지 않는가.   가정교양에 과유불급 즉 <도>가 지나친 현상이 있는가?있다.   자식에 대한 영양보충이 지나치다.수요 이상의 영양가를 지나치리만큼 주입하면 랑비는 둘째치고 신체에 해롭다.지나친 단백질과 지방은 소화에 영향을 줄뿐더러 비만증을 초래하여 신체건강을 해친다.   지나친 관심,지나친 정감표시,익애도 문제다. 물론 부모와 어린이의 정감교류는 십분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도 년령의 변화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비교적 큰 아이에 대해서도 어린애 대하듯 지나치게 귀여워하면서 입에 넣으면 녹을가 머리에 이면 떨굴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아이 성별배역의 형성에 영향을 끼칠수 있다는게 심리학가들의 견해다.례컨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戀母情結”)도 왕왕 그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이는 아이들이 커서 정감상의 부담으로 시달리게 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어린이에 대한 돌봄도 나이가 커감에 따라 점차 줄여야지 모든걸 다 해주는 식이라면 스스로 자립능력을 키우는데 방해가 되고 아이의 건전한 심리발전에 불리하다는것이다.   교육내용이 지나치게 많아도 좋지 않다.아이의 능력범위를 넘어 지나치게 많은것을 머리속에 집어 넣어 주자고 하면 아이가 지친나머지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수 없게 된다.   과잉기대,기대치가 너무 높은것도 당연히 문제로 된다.알맞는 기대는 아이에게 진보의 동력으로 될수 있지만 아이의 년령특점이나 지력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과분한 기대를 한다면 아이가 애를 써도 안 될 때 신심을 잃게 되거나 심하면 절망할수도 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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