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http://www.zoglo.net/blog/piaowenxi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칼럼

전체 [ 104 ]

84    “김정일 중국방문” 소감 댓글:  조회:9441  추천:68  2011-05-27
  “김정일 중국방문” 소감 김정일 조선 국방위원장이 지난 20일에서 26일까지 중국의 목단강, 장춘, 양주, 남경, 북경 지역을 참관했다. 7일 동안 이동한 거리가 무려 6천여 킬로미터라고 하니 70세의 노인으로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994년 집정해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중국방문이 모두 7차례 정도라고 하는데, 그중 최근 일년간 이례적이게도 이번까지 무려 세 번째이니 생각되는 바가 적지 않다. 김위원장이 이번에 만나서 회담을 가진 중국 지도자도 호금도 주석 및 온가보 총리를 비롯,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 9명중 외국 순방 중인 오방국을 제외한 8명이니 기실 전부라 해도 되는 것이고, 김위원장의 중국방문 수행자도 조선노동당 비서인 김기남, 최태복, 강석주 내각부총리,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등 고위급이 대거 들어있어 예사롭지 않음을 가히 짐작케 한다. 실제 그의 방문행보가 시종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을 감안하면 조선의 개혁개방의 미래에 대해서도 추측해볼만하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정확하며 과학발전노선이 생명력이 있다. 조선인민은 이로 인해 고무를 받는다.” 중국의 기업체 등을 시찰하면서 발표했다는 김위원장의 언론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김정일 위원장이 나라의 경제곤경에 대해 뼈를 깎는 고민을 하지 않았을 수는 없다. 그 고심의 흔적이 바로 지난 일년간 이루어진 파격적인 3차례의 빈번한 중국방문이 아닐까? 조선에 대한 중국의 경제지원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지원은 필수적이지만, 그러나 외부 지원이 조선의 강성대국건설의 근본도로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필경 자국의 시장개혁이 필수인데, 마음먹고 하면 바로 될 것 같은 그것의 실시가 왜 그토록 어려울까? 이것을 항상 문제로 짚지만, 그것에 대해 이해해주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우선 조선은 국제사회로부터 아직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의 개혁개방조치는 국가통제 시스템을 약화시켜 정권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 조선특유의 딜레마인 것이다.  한편 우리는 조선의 오늘 상황이 조선이 자초한 문제만은 아니며, 역사가 남긴 냉전시대 유산이기도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번 방문이 혹시 김정일 위원장이 시장개방을 최종 결심하고 나선 행동이 아닐까 생각된다. 참 기대가 되는 일이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김 위원장의 결심이 중조관계의 획기적 발전은 물론, 북남관계, 나아가 아시아의 장래에 획기적 기여가 될 것으로 본다. 중조 간, 북남 간, 나아가 조선과 국제간 경제협력이 봇물 터지듯 쏟아질 날이 크게 기대된다. 이를 받쳐주는 또 하나의 중대한 고무적 사안이 있으니 바로 한국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발표다. 이 대통령은 최근 "우리 남북은 서로 대화하고 보다 미래 지향적이고 발전적으로 나가야 한다"면서 "남과 북, 우리는 한민족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에 대한 지원은 북이 남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북의 자립을 도와주는 형태가 될 것임을 밝히고 "우리는 한민족이기 때문에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이북주민들이 정말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많은 분들이 (조선이) 중국에 너무 의존하지 않느냐 걱정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조선지도자가 중국에) 자주 가야 한다. 자주 봐야 한다. 배워야 한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자주 왕래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대통령은 조선과의 대화, 특히 경제-문화적 소통도 강조하면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말도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참 감동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다. 우리 조상의 나라 조선이 하루빨리 개혁개방을 해서 한국처럼 세계의 앞자리를 다투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북이 한집이 되는 그날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날이 너무 멀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83    지구촌 재앙의 메시지 댓글:  조회:8055  추천:60  2011-05-12
  지구촌 재앙의 메시지   5월 12일은 문천 대지진 발생 3주년이 되는 날이다. 2008년 5월 12일 8.0 규모의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사천성이 전국 여러 민족형제의 지원과 일본, 한국 등 국제사회의 원조에 힘입어 3년간의 복구 끝에 지진피해가 가장 심했던 문천현과 북천현을 사천관광의 새로운 명소로 바꿔놓고 경제도 크게 부상시키는 기적을 이뤄냈지만 그날의 악몽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   정말 명실상부한 대재난의 시대이다. 2004년 12월 14개 국 2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남아 쓰나미, 미국 남동부를 덮친 2005년 8월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금년 3월 일본 동북부지역을 강타한 규모 9.0의 강진과 쓰나미, 쓰나미에 이은 핵 원전 방사능유출의 재앙은 무지개 같은 환상을 현실의 삶속에 그대로 구현시켜주는 눈부신 현대과학도 인류에 복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상상력을 최대한 구사해 만든 재난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인류사상 미증유의 대형 참사들이 지구촌의 현실에 꼭 같이 발생하여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인류사상 전례 없는 대형 참사라 함은 재난 발생시간이 인류사회가 미개시대를 넘어 선지도 까마득하게 오래인,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시대라는데 기인한다.   천재성 재난참사만 해도 진저리치는데, 인재성 재난도 비일비재하여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갈수록 참혹해지는,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 세계자연에너지 쟁탈을 위한 전쟁, 세계패권확보를 위한 전쟁, 종교파쟁이 부른 세 불리기 전쟁, 테러와 반테러의 전쟁...이 세상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하지만 자연과 인위의 재앙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통감하면서도 인류는 결코 미래에로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지구촌 대재난은 과연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가슴 저미는 재난의 순간순간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지구의 안정과 더불어 인류의 행운을 빈다.   [길림신문]2011-05-10
82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담략” 댓글:  조회:10006  추천:77  2011-04-25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담략” 2011년 04월 21일 어느 분인가의 “탈북시인 장진성이 6일 동안 본 중국 강연이 재미있으니 시청해 보세요”라는 요청(왜서 이런 요청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에 호기심이 동해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8087&C_CC=AZ를 방문했더니 4월18일 오후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문화일보홀에서 ‘제168회 趙甲濟 기자의 現代史 강좌’가 개최됐다는 조갑제닷컴의 “최신정보”였다. 일면식도 없지만 내가 상당히 존중하는 조갑제선생의 강좌내용을 보니 사뭇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한데 정작 나의 흥미를 유발했던 장진성 脫北시인의 ‘6일 동안 본 중국’이란 제목의 강연내용을 보고서는 비교적 어리둥절해졌다. --- “중국에 있는 동안 느낀 것은 公安(공안)의 권위주의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지배한다는 그들의 통치철학을 공안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물어봐도 잘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일반 주민들에게도 권위주의가 드러납니다. 밥을 먹을 때 접시를 높이 쌓는 것, 호화로운 집에서 살려고 하는 것 등 스스로를 과시하려고 합니다. 한편으론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방식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시인은 중국사회에 배려문화가 없다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를 네 가지로 분석했다. ▲ 인구가 너무 많고 ▲ 1가구 1자녀 정책 ▲ 소수민족이 섞여 있다는 것 ▲ 文化(문화)대혁명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文化대혁명 때 많은 사람들이 연좌제 형식으로 숙청돼 서로간의 소통이 부족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보았다. 그는 중국 국가경제를 두가지로 분석했는데 하나는 글로벌경제, 다른 하나는 위조경제라고 했다. 중국이 가짜상품을 생산하는 것에 대해 장시인은“중국 사람들의 시장경제에 대한 인식은‘기업보다 공민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위조경제를 오히려 장려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을‘인류 근현대 100년의 進化(진화)과정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낙후된 모습과 가장 선진화 된 모습이 공존한다는 의미이다. 장 시인은 “중국에 머무는 6일 동안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참 재미있는 뉴스이다. “장시인은 중국사회에 배려문화가 없다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고 했는데, 나는 오히려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담략”에 상당히 놀랐다. 6년이나 16년도 아니고 단 6일 중국에 머물었던 기간 이런 중대한 결론을 얻어내고 그것을 한국청중들에게 강연까지 했다니...... 그런데 경탄한 나머지 한가지 의혹, 한가지 우려와 한가지 건의가 있다 --- 한가지 의혹: “중국에 있는 동안 느낀 것은 공안의 권위주의였습니다.” 탈북시인 장진성씨가 혹시 중국에 6일간 머물면서 시종 신변의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면 왜 불안했을까? 한가지 우려: “중국에 머무는 6일 동안 대한민국의 자부심...” 어쩐지 중국비하로 한국청중에 아부하려는 무슨 냄새가 풍기는데, 그런데 그게 진짜 먹힐까? 한가지 건의: “중국이 위조경제를 장려하고 있는 실정...” 이런 이상한 사실들을 만들어내느라 고생하지 말고 남북간, 그리고 이웃간의 화합과 협력을 위해 다소나마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81    영화 <황해>에 대하여 나도 몇마디 댓글:  조회:8762  추천:102  2011-03-19
  영화 <황해>에 대하여 나도 몇마디 조글로포럼 홈페이지 톱자리에 한국 영화평론가 이안씨의 <타자화된 조선족, 이탈리아계 마피아 묘사하듯>이 석달이 넘도록 그냥 걸려서 “문근영에서 '살인자'로…나는 황해가 불편하다”고 토로한다. 며칠전에야 나홍진감독의 영화 <황해>와 그의 데뷔작 <추격자>를 보았다. 아마 상당수 논자들은 <황해>를 단지 일확천금의 상업성효과만 꾀한, 또한 그것을 위해 조선족을 이용하고, 따라서 사람을 불안해지게 하거나 분노를 느끼게 할수밖에 없는, 그런 무책임한 영화로만 보는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본 <황해>는 그게 아니다. 엇갈리는 평가 이 영화에 대해 다양한 평가들이 있다. 조선족들중 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족의 현실을 엄중히 왜곡하고 조선족이미지를 엄중히 해쳤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런 견해에는 “조선족 범죄집단”과 “조선족”을 동등한 개념으로 취급하는 페단이 있다. 그외 이 영화는 단지 영화일뿐이므로 너무 현실에 가져다 맞추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한국인들의 반향을 보면 대체로 복잡하게 얽힌 영화의 스토리와 인물관계의 이해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영화의 의미도 잘 풀어내고 있는데, 영화를 재미와 자극으로 보면서 거기서 뭔가 계발도 얻는 이런 감상법에 대해 나는 긍정적으로 본다. 영화평론가들의 시각은 물론 조금 깊다. 영화가 내포한 의미에 대해서, 이안은 이 영화를 통해 보는 “조선족들에게 뿌려진 폭력의 근원은 아주 분명하다...병에 걸려들게 한건 한국사회다”라는 심각한 논점을 펴내기도 하지만, 웬일인지 “폭력에 의한 ‘떼죽음의 배경’이 고작 ‘치정문제’”라며 “칼깨나 쓰는 작자들을 줄줄이 거느렸으면서 굳이 연변까지 가서 목돈들여 살인청부할 대상을 찾는다는것은 너무 부도덕하거니와 설득력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본성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을 이끌어내지도 못한다”면서 논리의 전개를 접어버린다. 상업성영화를 두고 혹평이 아닌가 싶다.  장르문제 이안씨는 나아가 영화평에서 “불과 5년전만 하더라도 <댄서의 순정>에서 자본의 힘에 팔려와 공권력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꿈과 사랑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우리사회가 잃어버린 가치를 돌이켜보게하는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이었던 “조선족의 이미지”는 이제 <황해>를 통해 “소름끼치게 무시무시한 살인자무리”로 바뀌었다면서 역시 “조선족 범죄집단”과 “조선족전체”를 구별하기를 거부한다. 영화의 장르를 말해야 한다. 장르면에서 <댄서의 순정>은 사랑주제의 영화이고 <황해>는 범죄영화에 속한다. 두 영화를 억지로 연계시키는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거니와 여론을 이상하게 오도할수 있다.  영화 <황해>는 장르로 말하면 범죄영화로 분류되는 비극과 스릴러사이 영화라고 볼수있다. 범죄영화의 하위분류로 범죄드라마영화, 범죄미스테리영화, 범죄스릴러영화, 범죄코미디영화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영화는 주로 범죄스릴러영화의 범주에 속하며, 그러나 상당히 잘 짜인 드라마요소와 미스테리요소도 가지고있다. 범죄문제를 취급한 스릴러영화를 사랑영화 찍듯 찍을수는 없는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 그리고 “조선족 비하”문제 영화 <황해>의 이야기는 조선족중심으로 전개된다. 우선 주인공 김구남을 비롯해 사건에 조선족이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조폭두목 면정학과 그의 패거리들, 한국 조폭두목 김태원의 운전수에 고용된 2명, HK은행 김정환과장에 이용된 몇명, 그외에도 가리봉동의 이른바의 “불체자”들 등이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조선족은 범법의 성격과 정도가 부동하지만 “불체자”들을 망라해서 대부분 범법자들이다. 조선족이 다수 등장하기에 “조선족 범죄집단”과 “조선족전체”를 동등한 개념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생기기 쉽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반드시 철저히 갈라보아야 할 개념이다. 안 그러면 실제로 조선족전체를 범죄집단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되기때문이다. 조선족조폭의 잔인성에 대한 묘사를 조선족에 대한 비하로 보는것은 무리다. 조폭은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다 사회음지의 독버섯같은 존재로서 현실에서의 그들의 잔인성이 결코 영화에서 표현되는 잔인성에 떨어진다고 볼수 없다. 영화에서 아무런 저항수단도 없는 불쌍한 “불체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던 한국조폭은 조선족조폭만 만나면 쩔쩔매는 비겁한 무리로 둔갑한다. 이에 반해 조선족조폭은 잔혹은 할지라도 항상 당당하게 그려지고있는데, 흥미로운 부분이다. 실제 이 영화에서 비하한것은 한국의 공권력이다. 비하라는 낱말을 조폭무리에 가져다 붙일수는 없다. 조폭무리에는 폭로만이 어울릴뿐이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 상업효과만 노렸나? 범죄영화로 분류되는 비극과 스릴러 사이 영화로서의 이 영화가 상업효과를 노린것은 두말할것 없다. 데뷔작 <추격자>와 그를 이은 영화 <황해>는 모두 강자극적수법을 구사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문제를 진실하게 다뤘다고 본다. 중한양국의 범죄문제를 다루면서 특히 한국과 중국조선족 조폭사회가 결탁해 저지르는 대표적 범죄사건의 연관성을 극명하게 보여줬기때문이다. 그 진실은 예술의 진실에만 그치는것이 아니고,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의 어두운면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고있다. 이 영화에서 보면 청부살인사건의 단초제공자는 피살자와 형제관계이던 한국 조폭두목 김태원과 은행직원 김정환과장이고 중국의 조선족조폭두목 면정학은 돈을 위해, 김구남이는 면정학에 이용된,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오기 위해 살인청부를 받고 한국행을 한 범행자이다. “조선족들에게 뿌려진 폭력의 근원은 아주 분명하다...병에 걸려들게 한건 한국사회다”라는 이안평론가의 말을 새삼 되새겨보게하는 구도이다. “실화”에 근거 나홍진감독은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의 범죄는 모두 금세기 초에 발생한 “실화”에 근거했다고 매스컴에 전한다. 나감독의 말을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건발생 당시에서 여러 해 지난 2011년 오늘현재와는 거리감이 있을수 있지만, 실제로 중한수교후 조선족의 이민붐이 일면서 점차 불거진 각종 모순이 보다 치열해지는 양상을 보인 시점이 바로 그 시기다.   한국 악덕고용주의 만행을 도화선으로 조선족 6인이 한국인을 포함한 선원 11인을 무자비하게 죽여 바다에 던진, 세상을 경악케 한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 사업알선의 명의로 농민위주의 18만 가난한 조선족을 사기쳐 그들을 죽음의 나락에로 밀어넣었던 “한국초청사기사건” 등으로 조선족의 반한감정을 비롯해 중한 동족간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도 바로 그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갈등이 조선족일부에서 표현된 반한감정의 소산이었던것은 아니다. 중한조폭의 결탁범행도 양국 동족간 갈등을 부추긴 요소로 작용했기때문이다. 조폭문제 한국진출붐이 일기전 중국 동북3성에서 조폭집단이 이미 활동하고있었다. 2003년 3월 20일자 한국 “시사저널”은 “한·중 조폭, 손잡고 날뛴다”는 제하의 뉴스에서 “국내에 밀입국한 조선족 조직폭력단이 한국 조직폭력단과 손잡고 마약·밀수·살인청부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범죄세계에서 한·중국경이 사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그러니 중한수교후 몇년 안되어 중국경내에서 활동하던 조폭들이 하나 둘 한국에 진출해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한국내 조폭세력과 각종 연계를 맺었는데, 그들은 한국내 조선족 밀집거주지역인 서울 가리봉동 조선족타운과 안산 원곡동·원산동에 자리한 조선족타운을 근거지로 평소에는 조선족을 상대로 금품갈취를 일삼는 등 범죄를 저지르다가, 한국인이 의뢰해오는 청부폭력을 수행하고 뒷돈을 받기도 한다는것이다. 당시 서울 가리봉동, 대림동, 가산동, 봉천동, 신림동 일대와 경기도 안산시에도 생겨난 조선족타운에 자리잡은 조선족조폭은 중국조선족사회에서 10여개 파벌을 형성하며 활동해 왔던 이들이며, 잔인함으로 악명이 자자했다고 한다. 서울 가리봉동 일대는 연변의 용정 등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일명 “뱀파”, “호박파”, “승리파” 조직이 장악했으며 안산시의 조선족타운은 흑룡강성과 상해 출신 두 분파의 주된 활동무대라는것이다. 중국내 한국행사기행각을 살펴보면 연수생초청사기, 친지방문초청사기 및 유학생명의의 초청사기, 위장결혼사기, 한국방취제를 빙자한 사기행각이 다년간 살판쳐왔는데, 그 이면의 진실은 한국조폭과 조선족조폭의 결탁이었던것이다. 한국경찰은 “한국내 조폭과 조선족조폭은 줄곧 조선족불법송출에 깊숙이 개입해왔다”면서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중국으로 도피한 조폭출신들이 현지 조선족조폭과 손잡고 서류를 위조해 대규모 초청사기를 벌인다”고 했다. 한국경찰은 “한국인 범죄조직이 불법체류자라는 약점을 구실로 조선족을 악용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조선족을 상대로 고리대부업, 인신매매, 성매매나 살인폭행 등 청부업무를 맡겨왔는데, 그 원인은 조선족이 범행을 저질러도 지문감식이 불가능한데다, 중국으로 돌아가거나 종적을 감추면 “완전범죄”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라는것이다. 한국사회와 중국사회의 음지에 기생하는 독버섯같은 조폭사회의 존재는 회의의 여지도 없는 현실이며 따라서 우리는 <황해>의 스토리가 현실과는 무관한 허구가 아님을 알수 있다. “영화의 본질은 조선족에 대한 애정” 나홍진감독은 <황해>시사회에서 중국조선족 비하논란에 대해 “다소 과격하게 비쳐지는 부분이 있겠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조선족에 대한 애정”이라고 했다. 영화를 본뒤 나는 이 말의 진정성을 실감할수 있었다. 그 “애정”은 주로 두가지 형태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주인공 김구남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 표현되고, 다른 하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조선족의 불행한 처지에 대한 삽입적묘사를 통해 표현되고있다.  주인공 김구남을 통해--- 이 영화의 주인공 김구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어린 딸을 둔, 평범한 택시운전수이다. 힘도, 돈도, 빽도 없는 그는 이 사회의 소외계층에 속한 인물이다. 사회의 관심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흔히 범죄의 어두운 구석에 노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의 관심과 사랑이 이 계층에 특별히 기울여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가 부각한 김구남은 우선 시종 아내를 사랑한 남편이며, 그가 살인청부를 맡은것도 애오라지 잃어버린 가정을 되찾기 위해서다. 이 영화는 스릴러영화이지만, 어찌보면 아내를 사랑한 남편이 사랑을 찾아 떠난 피눈물의 사랑영화라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한국에 돈벌러 간 아내는 기별이 없다. 소식이 없으면 무조건 다른 남자와 눈맞아 돌아간게라는 여론이 돌고 어머니도 며느리를 갈보라고 욕하며 면가도 아내에 대해 모욕적언사를 던지지만, 그리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몸섞는 환각에도 여러번 빠지지만, 이 모든것은 아내를 찾아와야겠다는 그의 결심만 더욱 굳혀줄뿐이다. 살인피의자로 경찰에 쫓기면서 비참한 자신의 신세에 혼자 서럽게 우는 구남, 자신이 실제 살인자는 아니지만 살인청부를 했다는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구남, 자신을 살인범죄의 심연속에 몰아넣고 목적을 달성하자 자신을 “토사구팽”하려드는 조폭두목 면정학에 이를 갈며 절규하는 구남, 피튕기는 사투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구남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관계로 귀국선에서 “아내”의 유골함을 껴안은채 고달픈 인생을 마감하고 차디찬 황해바다에 던져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관중들은 솟구치는 동정심을 금치 못한다.   한편 주인공 김구남은 죄인임을 떠나서 “영웅”으로 부각된다. 종종 서로 겹치는 다양한 하위장르를 거느리고있는 스릴러영화는 일반적으로 빠른 전개, 빈발하는 액션, 재능있는 영웅이 대결하는 강력한 악당을 갖게 되는데, 김구남의 상대는 공권력의 경찰에 강력한 조폭무리까지 가세한다. 면정학과의 피비린 대결에서 도끼를 들고 까맣게 달려드는 조폭무리를 따돌릴뿐만아니라 근 100명 되는 한국경찰의 삼엄한 포위까지 유유히 뚫고나온다. 거의 불사신에 가깝다. 한국경찰은 영화에서 더 이상 무능할수 없는 “밥통”들로 그려지고있다. 철통같은 버스안 뒷자리에 앉은 구남도 놓치고 마는데, 경황망조한 경찰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구남에게 총겨누던 손을 덜덜 떨다가 동료경관을 쏘아죽이고는 대성통곡하는 장면, 신랄한 풍자를 넘어 매도수준이다. 나감독의 데뷔작 <추격자>에 나오는 경찰들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나홍진감독은 "살인자들이 활개치고 살인이 일어나게 방치한 사회에 대한 분노때문에 <추격자>를 쓰게 됐다"고 밝혔다. 하다면 <황해>를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조선족의 불우처지에 대한 묘사를 통해-- 주인공을 조선족으로 내세운 영화답게, 이 영화에서는 처처에서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들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묘사를 접할 수 있다. 가리봉동 “불체자”들이 한국조폭들에게 이유없이 당하는 처참한 장면, 구남이 양꼬치집에서 "괜히 사고치면 바로 쫓겨나니 그냥 돈이나 벌다가라"고 귀띔받는 장면, 수산물유통업자에 의해 조선족여성이 토막살해 당했다는 뉴스보도, 구남이 아내의 사체확인과정에 자기가 의뢰한 흥신소 직원에게 사기를 당하는 모습...등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같은 동포사회의 일원으로 한국에 가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범죄에 노출되어 고달프게 살아가는 조선족들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감독의 시선을 느낄수 있다. 맺는 말 오늘 세상은 금전이 모든것을 지배하는 풍조에 깊이 물들어있다. 돈때문에 웃고울고 돈때문에 서로 속이고 이용하며 돈때문에 살인도 저지른다. 한국사회와 중국조선족사회가 서로 얽힌 거의 전부의 범죄사건에서 “금전”은 마귀와도 같은 존재라 할수 있다. 그것은 항상 여자, 지위, 권력과도 연관되는데, 영화 <황해>속의 “여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피비린 사투를 금전과 권력, 지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악성사건으로 바꾸어도 조금도 안될것 없다. 영화 속의 “여자”는 상징물일뿐이다. 우리 대부분 사람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조폭들의 세계는 분명 다른 세계이다. 때문에 우리는 평소에 그 세계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실 조폭세계는 결코 우리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며 그 세계의 어두운 그림자는 연수생초청사기, 친지방문초청사기 및 유학생명의의 초청사기, 위장결혼사기, 한국방취제를 빙자한 사기행각 등 한국행사기행각에서도 드러나듯이 늘 우리 주변에 드리워져있는것이다. 그것의 존재는 결코 선량한 사람들의 의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 그림자가 드리운 처처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비일비재로 유린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너무도 무감각하다. 기실 두려운것은 어두운 그림자 자체보다도 그것에 대한 우리의 심각한 불감증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 <황해>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었다고 보는것이다.
80    한국비림박물관, 금석문의 숲을 가다 댓글:  조회:8063  추천:47  2010-11-15
중한 문화교류의 공신, 대한민국 문화예술신 지식인, 한국비림박물관 관장 허유선생 탐방 한국비림박물관, 금석문의 숲을 가다   [길림신문 박문희기자] 2010-11-15   창포(蒼浦) 허유선생 프로필   ■허유(許由), 1946년 충남 공주시 출생. 동국대 행정대학원 지역개발과, 할빈공대 한어과 수료. 문화예술신지식인, 서예가(아호:蒼浦). ▲1973년-1976년 서울 광화문과 강북구에 《해강서예학원》과 《창포서예학원》설립. ▲1977년까지 서울시장상, 서도대전 특선, 동아일보 사장상, 한국미술대전 은상 등 수상, 1978년 국전에 서예작 출품해 입선. ▲1989년 한국인 최초로 무순에서 오복광씨와 공동으로 서예전시회 개최, 1991년 9월 할빈시에서 개인전시회 개최, 1998년 5월 세계미술대전 개최, 2002년 5월 11일 한국비림원 개관, 설립후 해마다 세계서예미술대전 개최. ▲2003년 문화예술부분 《신지식인》(행정자치부 장관 인증)으로. ▲2006년 6월 중국한원비림과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공동발기. ■한국비림박물관 서화대전운영위원장, 해강서예학원 원장, 창포서도회(蒼浦書陶會) 회장, 중국한원비림(翰園碑林) 고문, 중국 상지비림(尙志碑林)명예박물관장, 중국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세계비림협회 한국대표, 극동사회문화연구원 원장, 고운최치원선생국제교류사업회 국제교류위원 등 력임   ---------------------------- 지난 10월 23일 충북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에 위치한 한국비림박물관에서는 개관 8주년을 맞으며 한중작가와 한국 각계 인사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한중서화전》 행사를 융숭하게 치렀다. 비림박물관의 초청으로 중국 길림, 하남, 북경 등지 박물관, 서협, 미협의 서예미술가 등 60인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기자도 그중 일원으로 함께 했다. 그날 동정리 옛 동정초등학교 자리라는 곳에 이르러 대문현판에 《藝文館(예문관)》이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가 새겨져있는 붉은 솟을대문 입구에 들어서니 널다란 정원에 도렬하듯 세워진 비석들이 시야에 안겨왔다. 부지 8450㎡되는 정원 전체와 건평 1333㎡ 규모의 건물 외관에 비석이 숲을 이룬 이곳이 바로 창포(蒼浦) 허유관장이 사재를 다 털어가며 일으켜세운 한국최초의 비림박물관이라 한다.   시공을 뛰여넘는 력사명인들과의 만남   중국비림박물관 정원 일각. 한중 석경전문가들이 제작한 비석들이 숲을 이룬 이곳에는 김생, 최치원, 강감찬, 한석봉, 안평대군, 이항복, 김정희 등 한국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 서예가나 유명 인사들의 유묵과 중국 상나라 갑골문 및 왕희지, 안진경, 소식 등의 필체를 담은 석경 500여점을 포함하여 금석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량국 고전작가들의 작품 1000여점이 비석에 담겨 문화유산으로 보존, 전시되고있는데다 미술서예대전 등으로 기증받은 수상작들로부터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 히딩크감독의 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록물을 제작해 보존하고 있고 그외에도 3000여점의 실물이 전시된 산호․ 패류관과 미술관, 공예관도 갖추고있어 그야말로 력사문화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력대 대학자들과의 시공을 뛰여넘는 만남때문인지 선인의 사상이 깃든 비문은 무거운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좀 여유를 갖고 비석들 사이를 둘러보면 정갈한 느낌을 주는 예서와 부드러운 해서, 흐르는듯 이어지는 초서, 파격과 개성미를 보여주는 추사체(秋史體) 등 서체에서 최고서예작품의 묘미도 만끽할수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오른켠 바로 앞에 우리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구조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중국 한원비림(翰園碑林)의 창시자 리공도(李公濤)선생(1927~)의 동상이였다. 동상의 기록문에는 리공도선생이 한국비림박물관을 물심량면으로 도운 공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박물관에 세운다는 허유관장의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아직 세상에 건재한 한 외국인의 흉상을 어찌하여 여기다 세우게 되였을가? 그 사연을 알자면 우선 이 글의 주인공 허유관장부터 만나봐야겠다.   중한문화의 접목에 향한 격조높은 정감과 의지   중국한원비림의 창시인 리공도선생의 흉상.  허유선생은 1946년 충남 공주시 반포면 원봉리에서 한학자인 고(故) 허연선생의 3남매중 막내로 태여나 연기군에서 초등학교와 성남 중, 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행정대학원에서 지역개발과을 수료했다. 선친의 영향으로 5살때 천자문을 깨우쳤고 300여수의 한시를 암기했을 정도로 한학에 뛰여났던 그는 이미 1973년도 27세때 서울 광화문에 《해강서예학원》을 설립했고 그로부터 3년후에는 강북구에 《창포서예학원》을 설립하면서 한국의 서예진흥을 위해 앞장서 왔다고 한다. 그는 서울시장상, 서도대전 특선, 동아일보 사장상, 한국미술대전 은상을 수상하고 1978년 국전에 출품해 입선될 정도로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국전에 입선됐던 바로 그해 문공부 기획관리실장을 지내던 박종국씨의 소개로 서봉 김사달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서예를 하게 됐는데 이러던중 서울 88올림픽에 참석했던 중국조선족들의 소개로 심양의 오복광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여 중국과의 교분이 시작되는데 마침내 그 발걸음을 멈춰세울수 없을 정도로 지금까지 그 연분을 줄기차게 이어오고있다는것이다. 1989년 한국인 최초로 중국 료녕성 무순시에서 오복광선생과 공동으로 서예전시회를 개최했고 1991년에는 할빈공대 한어과에 입학하여 한국류학생 제1호가 됐는데 그해 9월 할빈공대 양사근교장의 주선으로 중국과 아직 국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향항을 경유해 작품 40여점으로 할빈시에서 개인전시회를 개최했다고 하니 중한 문화의 접목에 향한 그의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이 아니랄수 없다. 당시 한국 창포서도회(蒼浦書陶會) 회장으로 있던 허유선생은 중국작가들과 교류하는 과정에 중국에 유명짜한 한원비림(中國翰園碑林)을 일떠세운 하남성 리공도선생의 사적을 접하게 되는데 소시적부터 서예를 좋아했다는 리공도선생이 10여년간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조손 3대의 전 재산을 쏟아붓고 각계 각층의 지원을 받으면서 력대 7개 왕조가 흥망성쇠를 겪었던 천년고도 개봉시에 세계 최대의 민영비림을 일떠세웠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허선생이 받은 충격은 여간 컸던것이 아니였다. 하여 허유선생은 1992년 8월 중한 수교가 이루어질 그무렵 숙연한 마음으로 자신이 다년간 소중히 소장해온 서예정품들을 리공도선생에게 우편으로 기증한다. 그 작품들은 전달된 즉시 전부 비석에 새겨져 비림의 일부분으로 되였다고 한다.   사명감의 호소: “한국에도 비림원을!”   한국비림박물관 외곽 일별.  이듬해인 1993년,중국한원비림을 대외에 개방하자 허유선생은 드디여 한원비림을 방문, 리공도선생과 처음으로 대면한다. 리공도선생의 창업사를 경청하고 산수 수려한 자연속에 현대의 비석과 송조의 비석, 황제의 비석, 그림비석, 국제비석 등 3700여점의 다양한 서예와 조각의 문화재들이 장장 3km에 걸쳐 펼쳐져있는 한원비림을 답사하면서 뜨거운 가슴을 가진 개인의 힘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수 있는가를 거듭 확인한 허유선생은 특히 리공도선생이 한원비원 건설을 시작할 때 석비에 새겨세우고 드팀없이 실천해왔다는 《가훈(家訓)》을 읽고 감동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 모종의 사명감이 굽이쳐오른다- 《…(한원비원)건설자금은 전용으로 투하하되 누구든 생활용으로 인출 못하며 그 어떤 난관이 있어도 대를 이어 건설을 견지한다. 비림이 완성되면 나라에 무상으로 바친다. 비림에 리익금이 생긴다 해도 리씨가문에서는 자자손손 한푼도 챙겨서는 안된다...》 이 《가훈》을 통해 한원비림의 바탕에 깔린 저력을 터득한 허유선생의 뇌리에는 《한국에 비림원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고집스레 자리잡는다. 허유선생은 한원비림에 이어 섬서성 서안비림 등 중국 처처의 비림문화를 고찰하면서 넓고 심오한 중국전통문화에 대해 새로운 리해를 가지게 된다. 돌이켜보면 진왕조 이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유물로서의 비림문화는 진시황이 전국을 순방할 때 석각으로 력사를 기록했던것을 발단으로 후세에 크게 성행하면서 점차 중국인들의 사상적근간을 이루게 된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서안비림의 시작은 당나라말 오대시기인 900년전 일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많은 정품서예의 석비를 보존하고있는데 그것이 5000년 력사를 한눈에 볼수 있게 조성됐다는 점에서 허유는 그것을 한국의 비림문화와 즉각 련계시켜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실상 중국의 문화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에 비석문화가 없는것이 결코 아니다. 한국에서 흔히 만나는 무덤가의 비석이나 절에서 보는 탑비, 문화유적지 곳곳에 세워진 각종 비석은 분명 비림문화와 맥을 같이 하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차원의 비림문화로 집결승화되지 못한채 아직 분산상태에 머물러있다. 대한민국의 후손들도 이러한 력사적 작품들을 한곳에서 감상하고 배울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허유선생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라도 몸소 이 일을 실천하기로 작심한다.   뼈 깎는 고통을 각오하고 설립준비에 돌입    1997년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당교 교장 호금도가 한국을 방문했을때“협화만방(協和萬邦)”이라고 쓴 족자를 선물로 증정하고있는 허유선생.   우여곡절을 겪으며 문화관광부에 한국비림원 설립허가를 신청해 1997년 6월 5일 정식으로 사단법인 인가(문화관광부 허가번호 444호)를 받아낸 그는 그 즉시로 설립전 준비작업에 돌입한다. 1997년 8월 6일, 허유선생은 14인 방문단을 이끌고 재차 한원비림을 방문, 리공도선생을 명예총재로 초빙하며 이듬해 3월에는 리공도선생으로부터 비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경청하고 동시에 한원비림과 자매결연을 함으로써 한원비림으로부터 많은 자료도 확보한다. 1998년 5월, 허유는 서울에서 세계미술대전을 개최하고 대회에 한원비림 창설인 리공도선생을 초청했다. 성대한 개막식에서 리공도선생은 《필묵은 천추의 력사를 기록하고 묘필은 만리강산을 그리노라(翰墨書千秋靑史,妙筆繪萬裏江山)》라는 제사를 대회 현수막에 올리고 각국 대표들의 추대로 미국,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화란 등 12개 나라와 지구를 대표하여 연설, 중한 량국 인민의 우의와 량국간 예술교류를 위해 유익한 기여를 하련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한다. 비림, 한국 전 대통령 김영삼의 관심사로 허유선생이 한국비림원 건설준비로 로심초사하고있을 때 그에게 큰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마련됐으니 바로 그의 지속적인 유력홍보활동으로 리공도선생의 영향이 한국에서 날로 커져 김영삼대통령의 관심까지 끌게 된 그것이였다. 김대통령은 중국방문기회에 개봉시에 몸소 찾아가 이 전기적 인물을 만나보려고 했다. 2000년 5월,허유선생은 김영삼대통령의 방문사항을 의논코자 리공도선생를 만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원비림을 위해 쓴 “東方文化藝術寶庫”, “松柏長靑”과 “良心” 등 3폭의 족자를 전달했다. 리공도선생은 크게 기뻐하며 그 휘호를 전부 비석에 새겼다. 2000년 6월 16일, 김영삼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일행 18인이 한원비림을 방문했다. 김영삼대통령은 흥미진진하게 비림을 참관하면서 한원비림은 《과연 천하제일”이고 리공도선생은 《손색없는 세계문화명인》이라고 평가했다. 리공도선생은 《무괴(無愧)”라는 족자를 김영삼대통령에게, 또 《매향(梅香)”이라는 족자를 김영삼의 부인 손명순녀사에게 증정했다. 김대통령은 즉석에서 《호연정기(浩然正氣)》,《중국모범가정(中國模範家庭)”이라는 두폭의 글을 써서 리공도선생에게 답례했다. 이처럼 허유선생의 서예전으로부터 시작된 문화교류는 점차 량국 정부간의 우호교류를 이끌어내는 결실을 낳게 된다. 그해 12월 1일, 김영삼대통령이 부산에서 서도전(書道展)을 개최하고 대회에 리공도선생을 특별 초청했는데 당시 리공도선생은 심장수술로 다녀가지 못하고 대신 파견된 맏아들 효천과 둘째아들 효평이 방문기간 보은군 김종철군수에게 유구한 력사를 가진 옛 도시 개봉의 빛나는 력사와 현대건설의 성과를 소개하여 김종철군수의 지대한 흥취를 자아낸다. 결국 김종철군수가 보은군과 개봉시간에 우호도시관계를 맺을것을 제안, 개봉시지도부에서는 그 제안을 쾌히 수락하고 김종철군수를 개봉시에 초청하게 되며 드디여 쌍방은 협의를 거쳐 정식으로 우호도시를 결성, 중한간 문화교류와 무역왕래에 길을 틔워놓게 된다.    한국비림원 국제서화전 전람관 일별.   비림건설과 국내외 지성들의 합류 사재를 전부 털어가며 한국 최초의 비림원을 만들려는 허유선생의 진정에 감동된 많은 사람들이 물심량면으로 비림원건설을 지원해 나섰다. 한국 청주문화방송 최정준총무국장 , 농수산물주식회사 양승인회장의 천거로 충북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에 50무에 달하는 현 자리를 마련하게 되였고 청주시의회 서병각의원이 충청북도중소기업지원센터 박재식본부장 및 제자를 인솔하여 개봉시 한원비림을 방문한 후 허유선생을 여러 모로 힘껏 지원해나선다. 하여 원 학교건물과 정원을 비림으로 개조하는 작업이 마침내 막을 올리게 된다. 허관장은 전국 국립박물관과 기념관 등을 발뿌리 닳게 뛰여다니며 수백점의 전시품 탁본과 복제품을 수집했다. 와중에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명예회장 등 유지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여주었다. 허관장은 명품을 모으는 한편 질좋은 석재마련에도 혼신을 다하며 전국각지에서 우수한 석공을 물색, 그들에 의뢰해 력대서예작품을 돌에 새겼다. 리공도선생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2년 3월 한원비림에서는 서예조각정품 55점과 잘 가공한 석재 50점을 컨테이너로 한국비림원에 무상으로 보내주며 또 석경제작에 전문기술을 갖고있는 주소종 등 기술자 3명까지 보내여 비석에 글을 새기는 일을 돕게 한다. 그들은 석달동안에 110여점의 조각과업을 원만히 수행함으로써 한국비림원건립에 크게 일조했다. 한국비림원에 깊은 애정을 갖고 물심량면으로 도와나선 리공도선생의 정과 공을 허유는 마음으로 보답하고싶었다. 그래서 특별히 정을 담아 제작해 세운것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리공도선생의 흉상이다. 이 사실은 한중 량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에도 미담으로 전해졌다.   한국비림박물관 개관 8년       한국비림박물관 개관 8주년 기념행사.  천신만고끝에 비림원은 2002년 5월 11일 정식 개관했다. 산수 좋은 보은군에 마침내 력대의 문화정품을 통해 나라의 력사와 문화를 한눈에 읽을수 있는 한국의 첫 비림원이 탄생한것이다. 그때로부터 해마다 기념행사로 개최해온 《국제서화대전”은 중한 및 국제 문화교류의 장으로 자리매김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다. 2006년 6월, 개관 4주년 기념행사때에는 행사차로 한국을 방문한 한원비림 리공도선생, 할빈시서예가협회 주석 홍철군선생, 상지시비림박물관 하수령관장 일행과 공동으로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적절한 시기에 《세계비림협회》를 정식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허관장은 《개관 8년여에 이곳에 참관을 다녀간 사람은 연인수로 100만명을 웃돈다》면서 《시작 당시 돌에 글자를 새겨 박물관을 만든다니 미쳤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지금 비림은 한국에서 빼놓을수 없는 명물로 변했다》고 했다. 비림원 설립후 허관장은 중국한원비림 고문, 중국 상지(尙志)비림박물관 명예관장, 중국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극동사회문화연구원 원장,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 한국대표 등을 력임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 몽골, 로씨야, 미국 등의 석학들과 함께 한 《국제학술교류》를 비롯해 매년 개최되는 《국제서화대전》, 각국 지자체 간의 자매결연, 각국 교육기관과의 교류 등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예술 분야를 망라하는 국제교류에 앞장서왔으며 또 사설박물관의 립장을 넘어 한국의 문화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런 공적으로 말미암아 오늘 허유원장은 한국에서 추사체(秋史體)로 상징되는 한말 글씨의 명인 김정희, 1919년 3·1 운동시 민족대표 33인중의 1인인 오세창, 금석문과 한학 령역에서 당대 한국의 최고인자인 임창순선생으로 이어지는 금석문의 맥을 이어 한국비림박물관을 설립한 금석문(金石文)의 중시조로 불리고있다.   허유관장 왈: “아직 갓 시작일뿐, 앞으로 항상 함께 하자”   중국상지비림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맺고  행사일정이 발빠르게 돌아가는 틈사리에 허관장은 기자에게 창업사와 함께 사업진척현황과 향후 목표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허유관장은 《후손들의 정신문화함양을 위해 여러 해전부터 성경비림, 공자론어비림, 불경비림 등 세계인을 아우를수 있는 정신문화의 성지를 비림으로 형성하고싶었는데 여건이 마련되는대로 지난해부터 이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고 했다. 그 일환으로 현재 권오실선생과 이현종선생을 비롯한 국전작가 133인의 성경필사는 이미 완료된 상태이며 중국한원비림에서 현재 이 필사본을 1914개의 돌판에 새기고있다고 한다. 금번 8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이수성 전 한국국무총리는 대회에 드린 축사에서 《한국의 민간문화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다해온 허관장의 예술혼과 민족혼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고 치하하고 《한중 우의가 비림원을 통하여 굳건히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했다. 중국측 대표 백산시미술가협회 주련덕주석과 하남성 하남박물원 전기부원장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량국 문화인, 경제인들이 서로에 유익한 민간외교를 할수 있는것은 허유관장이 20여년 긴 세월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구축한 토대가 있었기때문》이라면서 《한사람 선각자의 노력이 얼마나 소중한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어 우리 모두를 떠밀어준다》고 했다. 이런 평가에 직면하여 허유관장은 《아직 갓 시작일뿐이니 앞으로 항상 함께 하자》는 한마디 말로 향후 할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음을 시사한다.
79    된장술, 들어본적 있습니까 댓글:  조회:7528  추천:61  2010-07-05
  된장술, 들어본적 있습니까 연변민들레 리동춘회장,“술의 역사 다시 쓰련다”   "된장술"이란 낱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보도듣도 못한 된장술이 태어났으니 바로 연변민들레생태 산업연구유한회사의 최신양조제품 "장로주(醬露酒)"이다. 과연 된장으로 술을 빚어낼 수 있을까? 의문을 풀고자 이 회사의 리동춘회장을 찾았다.   전통된장의 심오한 "오덕문화   “된장처럼 살아라!”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리동춘의 좌우명.   그에 따르면 전통된장이야말로 신이 인간에 내린 최고의 선물이란다. 하긴 긴 설명이 필요 없이 인터넷 검색창에 들어가서 “전통된장”을 클릭하면 바로 답이 나온다. 전통된장이 지니고 있는 풍부한 영양가와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는 기능은 이 세상 그 어느 식품도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것.    리동춘은 전통된장 속에 "오덕문화(五德文化)"가 살아 숨 쉰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전통된장의 “오덕”이란 단심(丹心), 화심(和心), 항심(恒心), 선심(善心), 불심(佛心)을 말한다. 그가 일컫는 된장의 “오덕문화”를 풀이하면--   丹心이란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서 다른 음식물과 화합을 잘하면서도 자기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이고 和心이란 “구동존이(求同存異)”로서 자기 맛을 지키는 동시에 다른 음식물의 맛도 살려주는 것이며 恒心이란 “항구불변(恒久不變)”으로 오랜 시간을 거쳐도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맛과 기능을 배로 증식시키는 것이고 善心이란 “동화열성(同化烈性)”으로 된장국에 매운 고추를 넣으면 그 매운맛을 순화시켜주는 것이며 佛心이란 “구성제유(驅腥除油)”를 의미하니 물고기의 비린맛과 육류의 기름기를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수한 전통제품이 오히려 이른 바의 현대과학수단에 의해 변형되고 기형적으로 만들어진 개량된장에 의해 대체되면서 쇠망의 위기를 맞고 있으니 이를 통탄하여 리동춘씨는 생태문화를 선도하고 민족전통산업의 정수를 이어나가기 위한 취지로 련 5년간 해마다 "세계연변전통된장축제"와 "생태문화예술제"를 개최해왔다. 5회째 수많은 연변문화인들이 응모작으로 신곡가요 근 4천여 편, 그 외에도 많은 소설, 수필, 시 작품과 미술, 촬영 작품을 창출하면서 새로운 문화현상을 배태하고 있다. 금년 8월 "전통된장오덕문화축제"개최도 준비 중에 있다.   된장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 과학자의 아이디어   문화가 살아숨쉬는 전통발효식품을 세계인의 식단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리동춘의 지론이다. 이 목표과제를 스스로 안고 전통식품의 세계화 시장을 고안하여 부단하게 페스티벌을 개최해온 그다. 뚜렷한 목표는 좋은 아이디어를 창출하는데 기폭제로 작용했다.     페스티벌에 참석한 연변의 한 지성인이 된장술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 지성인이 연변에서 개최된 한차례의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하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 로 과학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온 로 과학자는 우리민족의 음식 중에서 두가지 식품이 오래 두어도 영원히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맛과 기능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발효식품인 전통된장과 술이라는 것. 이 두 가지 제품을 결합시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낸다면 과히 세계적인 제품이 될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은 아직 구상에 그칠 뿐이니 전통식품의 오리지널(原型)이 살아있는 연변에서 한번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것이다.   아이디어 하나로 개발에 착수,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오늘의 장로주(醬露酒)가 태어날 수 있었다. 술의 수천 년 역사를 바꾸는 작업이 이제 시작되고 있다면 지나친 속단일까?   해장국기능과 나노기술의 도입--술의 역사를 바꾸는 작업   자고이래 술에 콩발효성분(된장)과 그 발효공법을 활용하여 술을 숙성시킨 사례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발효된 콩에는 아미노산과 같은 인체에 필수적인 단백질영양소가 있으며 인체에 유익한 수많은 미생물이 있다. 과학적으로 권장하는 술의 섭취량은 극히 미소하다. 과음하면 건강에 해롭고 인체 내에서 숙취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그러나 된장술은 마시는 순간부터 위와 장에 단백질 영양가를 제공하게 되므로 위장이 윤활해지면서 위장과 간이 보호를 받게 된다고 한다.   조선민족은 술을 비교적 많이 섭취하는 민족이다. 이튿날까지 풀리지 않는 숙취현상을 된장국으로 해소시켜왔다. 해장국의 기능이 고스란히 된장술 속에 녹아있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다음, 나노기술(納米技術)로 술의 물 분자 클러스터(群)를 최소화시켜 충분히 희석된 체내의 알코올이 수분과 함께 빠른 시간 내에 체외로 배출되게 함으로써 숙취해소에 도움을 주게 된다고 한다.     과식은 불여불식이라 하지만 막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과음 욕이다. 술로 인해 얻는 병이 과연 적은가? 문제해소의 유효처방이 된장술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된장술 양조기술은 이미 발명특허 출원 중에 있다"고 하는 리동춘회장은 "하지만 이 기술은 나 개인의 발명이 아니므로 앞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한 분들, 그리고 무 숙취 건강주를 제조하여 인류건강에 기여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 기술을 공유하고 개발할 것"이라고 밝힌다.                                                                     *     *     * 일찍 흑룡강성 해림시 서부에 조선족신도시를 건설하여 농촌경제공동체발전에 크게 기여한 리동춘, 5년 전 민족의 문화와 전통산업의 정수가 고스란히 보존돼있는 중국 최대의 조선족 전통집거지 연변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이 땅에서 전통발효식품을 세계인의 식단에 올리기 위한 개발 작업에 혼신을 쏟아 불철주야 뛰어온 리동춘.   7월 5일부터 8일까지 나흘간 개최되는 이번 "심양한국주--글로벌 한상대회"에 "길림성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전통된장과 그 계열제품, 새 상품 장로주(된장술)도 올린 리동춘회장은 이번 대회가 자신이 끔찍이도 애지중지하는 최신작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라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관련보도] [길림신문 박문희기자] 2010-07-06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78    아름다운 발 댓글:  조회:9055  추천:98  2010-03-01
아름다운 발   한국 피겨 스케이팅 사상 처음으로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金姸兒, 1990년 9월 5일 출생)가 뭇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가운데 그의 발 사진이 인터넷에 뜨면서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김연아의 상처투성인 발을 보여준 사진--       그의 발을 보는 순간 몇 년 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 박지성(朴智星, 1981년 2월 25일 생)의 발사진을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나 인터넷 검색을 하여 그 사진을 찾아냈다. 그 발 사진은 지금 보아도 충격 그 자체였다.   상처투성이인 박지성의 발등, 굳은살이 박인 발가락 등이 자세히 나와 있어 박지성선수의 노력과 고통의 흔적을 알 수 있다. 갈라진 발톱과 가장자리를 따라 딱딱하게 뭉쳐있는 굳은살, 수많은 상처.     위 이미지를 본 네티즌들은 “여기저기 굳은살로 가득한 발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발이다”고 말한다.   박지성을 검색하는 중 또 하나의 발을 알게 되었으니 바로 한국의 발레리나 강수진(1967년 4월 24일 생)의 발이었다. 그녀는 현재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발레리나.   그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발레리노들도 그녀의 파트너가 되기를 열망한다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작가 고은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 심장이 어찌나 격렬히 뛰는지 한동안 두 손으로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답니다. 하마터면 또 눈물을 툭툭 떨굴뻔 하였지요. 감동이란...이런 것이로구나. 예수가 어느 창녀의 발에 입 맞추었듯, 저도 그녀의 발등에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마치 신을 마주 한 듯, 경이로운 감격에 휩싸였던 것 그녀의 발은, 그녀의 성공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루 열아홉 시간씩...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말짱하던 발이 저 지경이 되도록...그야말로 노력한 만큼 얻어낸 마땅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녀의 발을 한참 들여다 보고...저를 들여다봅니다. 너는 무엇을...대체 얼마나...했느냐...그녀의 발이 저를 나무랍니다. 인정합니다. 엄살만 심했습니다. 욕심만 많았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물과 감동 없이는 볼 수 없는 발들이다. 그들의 발 사진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며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린 이들이 절대 소수가 아니며 그 발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들도 많다.   세상을 주름잡는 성공의 주역들이지만 그들의 언행은 한결같이 평범하다. 2009년 4월 의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조사에서 박지성은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등을 따돌리고 5위에 올랐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박지성의 입은 어눌하고 태도는 투박했다.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을 요약하면 “팀이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팀이 우승해 기쁘다”는 것이다.   2007년 5월 초인가 조선일보 강천석 주필이 김연아 선수를 찾았다.   강천석: 김연아양, 반갑습니다. 먼저 지난 3월 세계 피겨스케이팅 대회에서 동메달 받은 것을 축하해요. 누구나 금메달이 탐나기 마련인데 “동메달이 더 좋다”고 한 수상소감이 유별나던데….   김연아: 한 번 출전으로 금메달을 땄다면 앞으로 계속 누군가에게 쫓길 것만 같아서요. 아직 어리니까 쫓기는 것보다 쫓아가는 게 마음이 더 편해요. 한꺼번에 많이 올라가는 것보다는 조금씩 올라가는 게 좋잖아요. 처음부터 1등을 하면 언론의 눈길에서 더 큰 부담을 느끼게 될 거고요. 강천석: 여자 피겨스케이팅 랭킹 세계 10위 안에 일본인이 5명이나 있다고 들었어요. 한국인으로는 김연아 선수가 유일한데, 혹시 쓸쓸하지 않나요. 함께 연습하고 경쟁할 동료가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김연아: 저는 누군가를 이기려고 경기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제가 잘하면 좋은 점수를 받고 못하면 나쁜 점수를 받는 것이니까, 결국 제 자신과의 싸움이죠. 그러니 동료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없다고 해서 허전하지는 않아요.   발레리나 강수진의 말을 들어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어딘가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날은 ‘내가 연습을 게을리 했구나’하고 반성하게 돼요.   “저는 발레를 하면서 경쟁자를 생각한 적도 어떤 목표를 가져본 적도 사실 없습니다. 모든 작품, 모든 동작, 모든 연습에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예요.   “전 발레의 테크닉은 두 번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는 인내심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레리나의 길은 아픔을 일상으로 껴안아야 하고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과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고단하고 외로운 길입니다. 그 길을 견디게 하는 것은 발레에 대한, 예술에 대한 사랑입니다.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삶을 동경해본 적이 없습니다. 발레에 인생을 바쳤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발레를 해왔고, 그래서 내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한다--   “발레는 다른 예술들 보다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 죽을 때까지 하기 힘들다. 그래서 연습은 필수다. 나는 3시간만 자고 연습에 몰두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연습했고, 밤12시가 넘어도 연습실로 늘 향했다. 시간은 사람이 만든 개념 아닌가. 시간을 안 보면 시간 가는지도 모르겠더라. 나는 한번 쉬면 회복기가 더 길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상당했을 때도 연습은 계속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한이 아니면 계속 연습실로 향했다. 나는 우리 발레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지만 가장 오랫동안 깨어있는 사람이다. 물론, 부상 때문에 팔이나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거나 구부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무대에 서서 흥분하면 내 몸의 아드레날린이 활성화 되었고 몸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게으른 사람은 무엇인가 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저 사람보다 부족하다’라는 사실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하면 안 된다. 하면 할수록 발전할 수 있다. 물론 재능도 중요하다. 그러나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연습이다. 같은 동작도 계속 해서 연습하면 다른 의미를 읽을 수도 있다.   “나는 발레를 다른 사람들 보다 늦게 시작했다. 말 그대로 늦둥이인 셈이다. 요즘은 발레단에서 군무에서 바로 주역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군무에서 하프솔로, 솔로, 마돈나의 단계를 다 거쳤다. 즉, 주연이 되는데 7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내가 늦었기에 감사하다. 요즘은 솔로가 되어도 못하면 다시 군무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나는 늦게 발레를 시작했지만 차근차근 밟아 갔기에 다시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77    호랑이 해에 호랑이의 생존을 말한다 댓글:  조회:4986  추천:49  2010-02-16
  호랑이 해에 호랑이의 생존을 말한다 박문희   경인년 첫날 아침 호랑이 얘기를 한다. 우리의 조상들과 후세 사람들은 내내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호랑이의 보호를 받으려 했는가 하면 호랑이 정신을 배워서 만방에 위용을 떨치려고 기를 써왔다. 하지만 자고이래 생물사슬에서 최정상급 패자로만 계셨던 신격존재의 호랑이가 오늘처럼 애절한 동정의 대상이 돼버린 적은 일찌기 없었다. 우리가 애정을 갖는 동북호랑이 총 수량은 현재 500마리에도 못 미치는 정도, 우리 나라 경내에는 고작 20마리밖에 없다고 한다. 그중 훈춘지역에 다행히 5~6마리 있어서 재작년 국내로서는 유일하게  《동북호랑이의 고향》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소시적 기억에는 산골 어디를 가나 호랑이가 없다는 마을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쩌다 중국 《동북호랑이의 고향》 훈춘에서 호랑이가 배가 너무 고파서 마을에 내려와 소를 잡아먹었다는 소식을 가끔 신문의 요란스런 보도를 통해서 즐겁게 접할뿐이다. 농민의 소를 잡아먹었는데도 즐거워지는것은 수년전 제정된《길림성중점보호륙생야생동물로 인한 인신재산피해 손해보상방법》에 의해 피해자가 성, 시(현) 급재정에서 각각 50%씩 보상을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야생생물보호학회(WCS)등 국제조직의 지원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호랑이를 잡으면 옛날에는 영웅호걸로 떠받들렸으나 오늘은 큰 경을 치른다. 작년에 운남의 농민 몇몇이 호랑이 한마리를 잡아먹고 옥살이는 물론 48만원 배상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포살도 포살이지만 문제는 호랑이의 생존기반과 먹이래원이 대책없이 줄어드는것이다. 호랑이 한마리가 자그만치 100평방킬로메터의 령지를 독차지하고 그 안에 득실거리는 메돼지, 사슴, 노루와 같은 짐승을 생각만 나면 골라먹을수 있어야 제격일텐데 그게 안되니 말이다. 길림성에서 야생동물 포획금지조치를 취한 10여년래 토끼, 메돼지, 꽃사슴도 조금씩 늘고있고 동북호랑이도 몇마리 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대책이 모자라 보인다. 현행 《손해보상방법》에서 한술 더 떠 보상외에 묵직한 상금을 내여 먹음직한 소를 호랑이에게 기꺼이 바칠수 있도록 장려하는 정책도 만들어졌으면 좀 좋을가? 호랑이의 씩씩한 기상이 인간과 자연에 차넘치기를 기원해본다. [길림신문] 2010-02-14
76    조선 대지에 변혁의 난류 일렁인다 댓글:  조회:5851  추천:50  2010-01-15
  조선 대지에 변혁의 난류 일렁인다    장춘레오폴라 오장권리사장 조선방문고찰기   [길림신문 박문희] 2006-07-26   중국기업가 조선방문팀 천리마동상앞에서. 방문팀은 오장권을 비롯한 길림, 료녕, 산동 등지 기업의 리사장들로 구성됐다. 기업소 직원들의 컴퓨터 공부 평양의 미장원 평양슈퍼의 상품진렬대   조선과 표고버섯, 인삼재배, 자동차가스충전 등 합작항목을 추진중인 장춘레오폴라(勒奧普拉)유한회사 오장권리사장이 7월 상순 조선을 다녀왔다. 작년 10월 사업차 평양 아리랑축제까지 관람하고 돌아온 뒤 금년 7월 조선땅을 다시 밟은 오장권씨는 일년도 채 안되는 사이 조선전역에서 생긴 변화에 대해서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조선에서 생기고있는 급변의 새 모습은 우리가 미처 상상할수도 없었던것이였다》고 오장권리사장은 말한다.   20년간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장춘소방지대에서 근무하면서 수십 차에 걸쳐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참모장 중책까지 떠메왔던 오장권씨는 1998년에 퇴직한 뒤 장춘유풍원예기술유한회사와 장춘레오폴라공업무역유한회사를 련이어 세우고 올해에는 사회주의 새농촌건설추진을 목표로 길림신태양그룹(주비) 산하에 길림신태양생태농업개발유한회사를 새로 설립,국내외로 관련사업들을 추진중이다.   《작년초 평양시교 칠골협동농장에 남새시범재배를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잘 되니 신심이 생겨서 이번에는 인삼과 표고버섯재배,자동차가스기화기와 같은 항목을 가지고 평양자유시장조사도 하고 관련회사고찰도 했어요. 련운항치신회사 오승길리사장, 청도성진회사 최가쟁(崔可崢) 리사장 등 네분도 동행을 했는데 한사람처럼 조선에 지금 획기적인 변천이 일어나고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양의 자유시장   《대동강변에 자리잡고있는 평양자유시장은 작년까지만 해도 조용했어요. 근데 이번에 가보니 중국의 대형시장을 짐쪄먹을만큼 많은 인파가 몰리고있었지 뭡니까.》   2층으로 된 이 대형종합시장이 정규화되기 시작한건 작년부터라 한다. 건평이 5000평방메터로 수도에 어울리는 규모, 모양과 깨끗함을 갖추었다. 그 큰 시장안에 장군들이 꽉 몰려 사람열기가 확확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시장 개장시간은 여름에는 오후 1시부터 저녁 6시까지,일요일에는 아침 6시부터 12시까지 6시간,기타 계절에도 상황에 따라 개장시간을 적절히 조정한다고 했다.   거래되는 상품품목으로는 수산물, 특산물, 육류, 알류, 남새, 식품, 의류, 일용잡화, 문구류, 가전제품, 거의 없는것이 없었다.   작년에는 길가의 농부산물시장에서 물건값을 깎거니 붙이거니 하며 흥정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지만 대형 시장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시장에서도 오손도손 왁자지껄 흥정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여기서 거래되는 상품은 대부분 중국산,그외 일본산도 있었다.그러나 올해에는 농부산물 대부분이 자국산이였다. 과자사탕류도 원래 90%이상이 중국산이였는데 지금은 거의 다 자국산으로 바뀌였단다.   일본상품은 대부분 가전제품이였다. 일본과의 무역과 지원은 조선민족경제협력련합회와 국제홍십자회 등 부처의 비준하에 이루어진다.   중국상품은 주로 실내장식재료, 타일, 쏘파, 세탁기, 전기랭장고, 컴퓨터, 주방용품, 에어콘 등, 그중 의상류는 중국의 북방제품이 많고 내장용품은 남방에서 들여온 것이 대부분이였다. 포장도 거친 포장으로부터 점차 정교한 포장으로 탈바꿈하고있었다.   물가(RMB 1원이 조선돈 300원에 해당)를 보면 남새가 비싼 편이고(중국과 비슷함) 공산물이 싼 편이였다. 킬로그람당 양파는 350원, 버섯은 1000원, 팥은 650원, 입쌀은 700원, 수산물에서 고등어는 600원이였다. 참나무버섯(표고버섯)은 고려호텔에서는 300그람에 2000원으로 자유시장보다 비쌌다.   기자가 시장전망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오장권씨는 《평양자유시장의 규모가 꽤 컸지만 시민들의 수요에 비하면 아직 판부족》이라면서 《그래서 평양시정부에서는 향후 이와 같은 규모의 자유시장을 대폭 확장할 계획이더라》고 했다.   거리의 변화도 눈에 띄였는데 도로변에 소매점, 슈퍼마켓이 많이 늘어났단다. 음식점밖에 없던 평양시내에 지금은 카라오케와 같은 오락시설도 많이 늘었고 작년에 사우나시설 같은 종합봉사쎈터가 처음 나타나더니 올해에는 그 수가 많이 늘어나 고객들에게 많은 편리를 주고있다 한다.   《시장이 활성화되니까 시민생활에 일고있는 변화도 직감할수 있었는데 특히 의상의 변화가 인상적이였습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거개 국방색이나 검정색 등으로 짙은 색이였는데 지금 층집우에서 내려다 보면 알락달락하고 환한 색갈이 많이 눈에 띄여 눈맛 당기더라, 녀성들도 그전엔 흰적삼에 검정치마를 받쳐입는것이 통례였고 하이힐을 신고 무릎을 넘는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녀성을 볼수 없었지만 지금은 거리에만 나서면 그런 옷차림이 눈에 띄고 옷의 색갈도 다양하고 밝아서 신선감을 주더라, 녀자들의 얼굴화장도 달라졌더라, 짙고 간단한 저질의 크림화장이 담담하고 고급스런 물화장으로 바뀌여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이 자연스럽고 우아하더라고 했다.   《지금 조선으로 가보면 금방 전에 없던 활력을 느낄수 있습니다.》   행인들이 배낭을 메고 다니는 모습은 조선특유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 모습에도 이전과 다른 확연한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배낭을 지고 다녀도 기운이 없어보이고 길가에 맥없이 앉아 쉬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아예 볼수 없고 모두의 얼굴에 활기가 넘치고 걸음걸이도 기운차고 씨엉씨엉했다. 말소리도 힘있고 얼굴표정도 밝았다.   외국인의 행동자유,자유행동을 통해 본 조선민간인   《지난번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은 외화상점에만 드나들수 있었습니다. 조선돈을 사용하는 시장에는 안내하지도 않았지요. 그것도 안내원이 규정한 로선에 따라 안내를 받아가며 제한된 곳만 볼수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아주 달라져 가보고싶은 곳을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어요. 안내원도 몸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것 외에는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습니다.》   발길 가는대로 들려 본 호텔이나 식당 화장실에서도 변화가 느껴졌다. 검고 조야하던 화장지가 점점 희여지고 질바탕도 좋아지고있음이 감지되였다고 했다.   방문단 일행은 조선민간인들에게서 표현되는 높은 자질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가래침을 뱉는 현상을 볼수 없었고 손님을 대할 때 떽떽거리지도 비굴하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품위를 지키고 례절스러웠다. 흑인종이나 백인종 외국인이 지나가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선의 교통은 시민들의 높은 자질을 잘 보여주는 창구라 할수 있습니다. 조선도 중국처럼 우측통행을 하는데 규정을 어기고 좌측통행하는 사람을 한사람도 못봤어요. 외국인들이 제멋대로 좌측통행을 하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더군요.》   그들은 늦저녁 십자거리 혹은 지하통로에서 감시인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교통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이 없다는데 주의를 돌렸다. 다니는 차량이 아주 적은데도 자동차 기사라면 규정을 위반하고 지름길을 택하는 법이 없고 거리가 퍽 멀더라도 꼭 지정한 곳에 가서 차머리를 돌린다. 동행자 5명중 한족은 최가쟁씨 한사람뿐. 오장권씨가 여러 차례 방문을 한 경험에 비추어 조선에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교통위반자가 없다고 하니 최가쟁씨는 전혀 믿지를 않았다 한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낮에는 철저한 교통규칙준수가 가능하지만 경찰이 없는 밤에는 위반자가 없을리 만무하다는것이다.   그럼 좋다 내기를 하자.   당신이 지면 어쩔래?   양주(한병에 125딸라) 한턱 쏘겠다. 그렇지만 당신이 지면 당신이 쏴야 해.   거야 물론이지, 그렇게 하자.   저녁 7시 사이 교통경찰이 없는 시간을 택해서 옹근 한시간동안 놓칠세라 눈을 밝혔는데 결과는 오장권씨가 이겼다. 경찰이나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길을 마구 건너는 사람이나 차량을 발견하지 못했던것이다. 지상으로 길을 가로 질러 가면 몹시 편할텐데도 자각적으로 지하통로를 리용해 길을 건는다. 교통위반자도 없거니와 거지도, 웃통을 벗어던진 사람도 보지 못했다. 결국 최가쟁씨가 감탄사를 련발하며 기꺼이 한턱 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정도 되자면 멀었어》라고 하더란다.   해외투자자에 대한 써비스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정부 관련부처 일군들의 써비스의식에 괄목할만한 변화가 보여 투자지향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면서 오장권씨는 《해외동포원호위원회는 원래 경제분야의 일에는 관여치 않았는데 지금은 경제발전을 촉진하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기구로 활약하고 있었다》고 례를 들어가며 알려주었다. 외국투자자에 후환해소조치도 대주고 유력한 정치적담보자로도 나서며 량국 기업인들을 이어주는 교량과 뉴대적 역할도 분담하고있다는것이다. 손실 안 보고 성사할수 있는 믿음직한 회사를 알선해주는가 하면 사전에 해당 기업을 조사해서 미팅도 시켜주고 전과(前過)가 있는 회사는 소개해 주지도 않거니와 경우에 따라서는 주의하도록 귀띰을 해주더라고 했다.   조선해외동포위원회에서는 해외투자인들을 조직하여 투자관련법 설명회도 열었다.   방문기간 평양법률사무소를 찾아간적이 있었다. 평양법률사무소 전직고문으로 있는 분이 오장권일행을 접대했는데 그분은 원래 대학교법률교수로 정부 고급법률고문을 맡고있었고 얼마전에 국가 파출기구인 이 사무소에 파견되여 와 대외법률써비스를 전담하고있었다.그분은 아주 높은 책임감으로 투자희망자들에게 주동적으로 투자정책을 설명하고 독자,합영,합작 경영은 어떻게 하는가? 정책면에서 중국과 차별이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등 의문을 제기하도록 하고 일일이 해석해주었다. 개성공단,금 강산관광지역,라진선봉 그리고 기타 지역 이를테면 평양에 투자한다면 어느 법에 따라야 하나?광산개발시에는 어느 법에 준하나? 그 외에도 부동산임대,경제타산서,대리활동,민사소송,중재대리,투자법,독자법,합영합작,기업합병 등 물어본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한 소개와 설명을 했고 상관자료도 제공해주었다.   과거의 손실을 미봉하도록 조선방문기간 오장권씨는 단동과 심양에서 온 조선족 기업가 두분을 만나 그간에 있었던 감동스러운 일들을 알게 되였다.사실은 이 두 기업가는 이전에 조선의 실정을 모르고 몇몇 회사와 합작건을 추진하다가 큰 손실을 본 일이 있었다. 최근 이 두분은 해외동포원호위원회에 당시 당했던 사실을 반영했다. 원호위원회에서는 이를 큰 일로 간주하고 적극 그들을 도와 나섰다.조선의 현행 정책에 의하면 금년 3월부터 석탄과 지철은 수출이 금지되여 있었다.그러나 상기 두 조선족이 과거에 당한 손실을 미봉하게 하고자 조선 정부에서는 특수조치를 대여 석탄과 지철을 수출입할수 있도록 특별비준을 함으로써 그들이 사업상 재기하는데 결정적인 조건을 지어주었던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오장권씨는 《이 사실은 중조무역간에 드리워있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는데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부언했다.   조선 회사들의 컴퓨터 사용 보편화   조선 보건성 산하 《만년제약회사》와 《56무역회사》를 방문했을 때 오장권일행은 이 두 회사의 모든 부처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고있음을 보고 《이 회사들은 국가에서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회사니까》 이런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여러 회사를 돌아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는것을 깊이 느꼈다.실은 어느 회사나 다 컴퓨터를 사용하고있었고 인터넷 사이트 사용도 아주 활발했던것이다.교육기초도 잘 돼 있었다. 공업분야만 봐도 인재구조가 비교적 합리했다.중등전문교육이 발달하여 실제 사업분야에 적응되는 전문인재가 풍부할 정도였다.이는 중국에서 대학이나 중등전문학교 졸업생이 많지만 전공이 맞는 전문인재가 극히 결여되는 실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있었다.물, 록화 등 환경건설도 제대로 돼있었다.원래 개발이 안됐기에 오염이 없을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외계의 이런 인식이 잘못된것임을 눈으로 확인했다.사실은 그게 아니고 원래 오염원관리가 엄격히 제도화되여있었으며 교육기초도 잘 다져져 있었다.   《여러가지 여건상 아직 시설은 안 되지만 환경건설이 잘 돼 있고 교육기초가 좋으니 고속발전이 완전히 가능하겠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오장권씨는 말한다.   남포항 인천항 직항 뚫리는 통상로   《평양에서 출발, 황해북도 개성으로 가는 행정에 만년제약회사 사장의 소개로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중조합작으로 생산된 제품이 직접 남으로 수송되고있다는것을 알고 몹시 흥분됐더랬어요.이런 일은 원래 상상도 못했었거든요.》   인삼과 표고버섯 생산기지를 만들기 위해 조선으로 간 오장권리사장은 워낙 조선에서 생산한 표고버섯을 중국에 실어온 후 다시 로선을 바꾸어 한국이나 기타 지역에 수출할 타산이였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게 아니였다.   북남 해상통로가 이미 뚫려있어 남포항에서 인천항까지 전용화물선이 매주 1회씩 직항하고있었던것이다.이제 륙로만 뚫리면 개성에서 서울까지 한시간이면 수송이 이루어질것이라고 해외동포사업국의 한 관원이 소개했다 한다.   관련상사들이 북측에서는 《민경련(민족경제련맹)》을,남측에서는 《통일부》를 통해 등록을 하면 북남통상이 이루어지는데 북의 상품은 세금이 없이 남으로 통과할수 있다.삼팔선은 국경선이 아니고 《우리끼리》의 장사요, 무역이니 세금을 부과할 리유가 없다는것이다.남에서도 북의 제품을 국산으로 인정해주고있고 삼팔선을 국경으로 보지 않는다.   남포에서 물건을 선박에 실으면 하루도 안돼 인천항에서 부린다!   이제 륙로가 열리면 개성에서 실은 상품이 두시간 안짝에 서울에 대일수 있다!이 사실에서 오장권씨는 지대한 고무를 받지 아니할수 없었다고 감개를 터놓았다.   《6.15선언후 북에서는 남쪽을 비방하는 일, 욕하는 일이 완전히 근절됐다. 지금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말은 란 낱말이다. 욕하는 말은 한마디도 못 들었다》는 오장권씨는 《우리끼리》란 낱말의 참뜻을 페부로 실감하고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합작추진을 위한 고무적인 움직임   《외국자본 유치에서 투자지분책정이 중요한데 이 문제에서 지금 조선은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있다》고 오장권씨는 소개했다.그전에는 건물과 토지를 조선측 지분으로 삼고 자금은 전부 외국의것을 도입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항목에 따라 조선에서도 현금투자를 같이 한다는것이다.현금투자를 각기 50%씩 하자고 주동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푸술한데 이것은 작년까지만 해도 볼수 없던 일이라고 했다.   에너지사업 등 국가 근본 리익에 관계되는 중점항목은 정부에서 투자하도록 돼 있고 국외의 투자에 상당히 후한 정책적혜택을 베풀고 있다 한다. 이에 고무를 받고 오장권씨는 태양에너지발전,CM4기체발전, 자동차가스기화기 등 항목을 지금 조선측과 상담중이다.   《인삼재배,표고버섯재배 등 합작항목에서도 조선에서는 진실한 합작 자태와 행동을 보여주고있습니다. 례컨대 우리는 기계, 종자, 균종과 재배기술만 제공하면 되죠.이 외의 모든 물자 말하자면 토지, 표고버섯재배막 등은 전부 조선측에서 해결합니다.》   작년 4월 조선에서는 6개 농호를 단위로 한 농촌생산분조책임제를 실시,대풍작을 거두었다.올해도 풍작을 이룰것 같다고 한다.   지난해 오장권씨는 강반석녀사의 고향인 칠골협동농장의 실험포전 한정보에 무우,상추,배추,쑥갓 등 12종의 남새를 실험재배했는데 조선 칠골농장에서 제공한 토지조사서류에 따라 미생물비료를 도입하면서 기술재배를 한 결과 례년의 3.2배에 달하는 소출을 올렸다.   오장권씨는 조선과의 합작에 확실한 신념을 갖고있었다.그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있다. 조선에는 농약잔류물이란 개념이 근본 존재하지 않는다.황해북도의 상황을 보면 물이 좋고 오염이 없어 유기농업을 잘할수 있는 절호의 생태조건을 갖추었다고 볼수 있다.조선은 현재 시설농업이 락후한 상태에 있어 비닐하우스 및 기계시설과 미생물비료를 갖춘 재배기지가 엄청 부족, 이 면에 무한히 큰 사업예비를 가지고있다. 제조업은 지금 엄중한 전력부족으로 잠시 어려운 상태지만 인삼, 표고버섯 재배 등을 망라한 농업은 활성화가 완전히 가능하다.   투자희망자들에 대한 희망사항   취재를 마칠 무렵 오장권씨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중국의 인삼을 조선 개성에 실어다 개성인삼으로 둔갑시켜가지고 한국에 팔아넘기다 들통이 났는데 조선정부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면서 조선족 대 조선투자 희망자들에게 《사기치는 사람을 각별히 조심하고 남을 사기하지도 말며 조선의 법률에 좇아 자기의 실정에 맞는 항목으로 정상적인 사업을 개척할것》을 권고하고싶다고 했다.   《조선이 대외로 문을 활짝 열고있는 시점에 조선족들이 자체 우세를 발휘하여 열심히 사업한다면 반드시 성공할수 있다》는것이 오장권씨의 소신이자 행동지침이다.
75    중국 “두만강지역개발프로젝트”와 다자간 국제협력 댓글:  조회:10198  추천:80  2009-12-30
중국 “두만강지역개발프로젝트”와 다자간 국제협력 박문희(중국 길림신문사 부 주필, 고급편집)   2009년 8월 30일 중국정부의 승인을 받은 이 지난 11월 18일 신화통신에 의해 그 전문이 공식 발표되면서 중국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의 깊은 관심도 유발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동북아 각국의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역면적이 7만3천 평방킬로미터(한국 면적의 약 73%)로 지린성의 39%를 차지하고 인구가 1090만으로 전 성의 40%를 차지하는 창춘시, 지린시 부분지역과 두만강 유역의 옌볜조선족자치주(즉 “長吉圖”지역) 개발 사업은 오는 2020년까지 이 지역을 동북아지역의 물류·공업 전진기지로 개발하는 중국의 국가적 전략 사업이다. 의 목표에 따르면 “창지투” 지역은 2012년까지 중국 두만강지역 국제합작에서 돌파적 진척을 가져와 동북지구경제발전의 새로운 성장극으로 부상하게 되며 2020년까지 중국 두만강지역 대외개방수준에서 획기적인 돌파를 이룩하여 지역 경제총량이 4배로 늘고 따라서 전국의 선진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두만강구역 국제합작개발프로젝트는 주변 국가와 국제사회의 공동참여하에 10수년의 건설을 거쳐 초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중, 러 양국은 훈춘과 러시아 핫산의 도로와 항만을 일체화시키고 관세를 없앤 봉쇄형 관리구역 조성이 한창 진행 중이며 주변 각국도 두만강지역 국제 자유 무역구 건설에 호응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도 변경구역의 도로와 항구를 일체화시키고 수출가공 및 보세물류단지 건설을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몽골 대통로 건설계획도 작성중이다. 자료에 의하면 목전 몽골국에서 조사 확인한 80여종의 광산자원가운데 석탄은 1520억 톤, 철은 20억 톤, 린은 2억 톤, 동은 800만 톤이라 한다. 수송력이 문제로 나서고 있는데 실제로 중국 국가철도부에서 현재 中蒙大通路 건설을 기획중이다.   옌볜에서는 변경개항지 훈춘시를 통해 중-러 항구, 중-조 항구 항목건설을 추진 중이며 조선과 접경하는 중국 측 구간인 훈춘-권하 도로(39km)는 이미 완공된 상태이며, 55만kw 발전 용량의 훈춘화력발전소 2단계 공사가 완료되었고 훈춘에서 출발하는 중-러 철도가 머지않아 개통되고 훈춘-도문고속도로도 명년에 완공되며 길림-훈춘 간 고속도로도 곧 국가사업으로 추진된다.   先導지역의 두만강 지역 국제자유무역지대 건설, 長吉圖 국제 내륙 항구 건설, 과학기술 창조지역 건설, 국제협력 산업지역 건설, 현대 물류지역 건설 등 8大 중점공정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중 국제협력 산업지역 건설을 보면 신형공업으로 자동차, 석유화학, 농산물가공, 광전자정보, 야금건자재, 장비제조, 바이오, 신소재 등 신형공업기지 건설이 포함되어 있고 생태여행지 건설은 장백산의 생태자원과 국경지역에 위치해 있는 여건우위를 기반으로 이 지역을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다국적 생태계 여행 및 人文여행, 그리고 특색 있는 휴가, 휴양의 생태지역으로 건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첨단 서비스업 집중지역 건설의 내용에는 금융보험, 서비스아웃소싱, 비즈니스展示, 문화創意 등 분야를 기반으로 동북지역 자본시장을 건설하고 동북아지향의 현대서비스업 시스템구축 등이 들어있으며 그 외 현대농업 모범지역 건설에는 토지의 집약적 경영과 적당한 규모경영, 그리고 농업의 전반적 기계화 실현 및 시설농업, 우수농업 창출 등 내용이 망라되어있다.   중국 정부는 특히 옌지시와 훈춘시 등 두만강 유역을 집중 개발한 뒤 조선의 나진항을 통한 동해 항로도 개척한다는 방침이다. 훈춘-나진-동해 항로를 이용하면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서 생산되는 광물자원과 농산물, 공산품을 수송하는 물류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다. 앞으로 10년 사이 “창지투” 지역에 엄청난 가시적 변화가 예상되는데, 지린성 전역, 그리고 동북지역과 내지의 상관 협력관련지역, 나아가 동북아 각국이 참여하는 이 중차대한 대사를 앞에 두고 중국은 한국, 일본 등 주변 중요국가들의 대거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과거 10여 년간의 두만강 개발 실천으로부터 보면 그 진척이 지지부진한 면이 많았는데 창구지역의 경제총량이 높지 못하고 체제와 메커니즘 혁신이 미흡한 것과 같은 제약적인 요인으로 국제적 지역합작개발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었던 것이 그 원인으로 되었던것만큼 결국 이 지역 개발의 성공 여부는 지역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본력이 있는 한국과 일본의 적극적인 참여와 투자 여부에 크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두만강지역개발은 동북지구 더 나아가 보다 넒은 범위에서 통일적으로 계획하고 상호 합작해야만 구역개발에 활력소를 불어넣고 실제적 효과를 기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상 동북아 6국을 멤버로 한 두만강구역합작의 비교우위는 아주 뚜렷하다. 한국의 경우 경공업부문과 에너지부문에 투자하고, 조선과 중국 길림성의 노동력을 이용하면서 중국, 조선, 러시아, 몽골의 광물자원,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다. 조선은 나진·선봉지역을 동북아지역의 중계수송 기지로 개발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기업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으며 중국 동북지역은 노동력, 중급기술을 제공하면서 한국과 일본에서 자본, 고급기술을 유입하고 조선, 러시아에서 자국 내에 부족한 에너지, 광물자원을 수입할 수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러시아 극동 오호츠크지역에서 생산된 수산물을 나진·선봉지역에서 가공하여 한국이나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도 전망이 밝으며 나진·선봉 경제특구 개발에 진전이 보일 경우 이미 중국 옌볜지역에 투자하고 있는 한국기업들이 의류, 섬유, 목재 가공업, 제지, 식품가공업의 투자를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투자로 경제특구의 인프라, 산업생산기반의 구축이 가속화되면 두만강 접경지역에서 중·조·러의 경제교류를 더욱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두만강 접경지역에서의 경제교류 활성화는 필시 현재 조선 개방을 전제로 논의되고 있는 동북아 철도 연결과 에너지 협력과 같은 다자간 국제 협력 사업을 크게 촉진하는 효과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한국 《시사뉴스》 2009년 12월호)
74    고아들의 아버지 ㅡ 리문철 댓글:  조회:8996  추천:47  2009-12-24
[공화국창립60주년에 만나본 60인]    《고아들의 아버지》 사랑이야기 화룡시희망복리원 리문철원장의 한가지 소망은-고아, 장애인, 가난한 학생...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줄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줬으면   [길림신문 박문희 2009-12-22]      리문철 프로필 1954년 12월 화룡의 한 가난한 문화인 가정에서 출생. 1970년 10월-1974년 9월 화룡시 서성진 룡포촌 하향청년 단지부서기, 민병련장. 1974년 10월-1975년 10월 화룡시 부동산계통 로동자. 1975년 10월-1976년 12월 화룡시 토산향에 사회주의교육공작대로 내려감. 1976년 12월-1979년 11월 화룡종자공사 기술원, 검사원. 1979년 12월-1980년 12월 길림성 남파공작대로 해남도에서 육종시험에 종사 . 1980년 12월-2001년 6월 화룡종자공사 과장, 부경리, 소장. 2001년 6월 -현재 화룡시희망복리원 원장, 화룡시 정협 상무위원, 연변주정협위원. 2000년이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서 수여한 《꽃망울프로젝트 최우수 조학상》, 《차세대배려선진개인》, 《연변감동10대인물》, 《길림성로력모범》, 《2008중국적십자회원의 별》, 《길림성도덕모범제의상》, 《전국민족단결선진개인》, 《전국5호문명가정》, 《전국공익사업걸출인물》, 《전국5.1로력메달》 등 중앙급 7차례, 성급 8차례를 포함 도합 50여차례 영예 획득. 2009년 9월 20일 제2회전국도덕모범선발표창활동에서 전국도덕모범제의상 수상. 선후로 《길림신문》, 《연변일보》, 《중국민족화보》, 연변TV방송, 길림일보, 로동자일보, CCTV, 인민일보, 신화통신 등 많은 지방 및 중앙급 보도매체를 통해 사적이 전국에 널리 알려짐.  ------------------------------------ 리문철은 1954년 12월 화룡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는 병환으로 일을 할수가 없었고 그와 그의 누나도 병약한 몸이였다. 어머니 혼자 힘으로 강변에서 모래를 쳐 온집식구를 먹여살려야 하는 형국이였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소학교를 다닐 때 문철이는 새옷을 입어본적이 없었고 원족 가본적도 딱 한번밖에 없었다. 원족을 가려면 맛있는것을 도시락에 싸가지고 가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되였던것이다.   소학교를 다닐 때 있었던 일을 그는 항상 잊지 못한다. 그때 그가 쓰는 공책이란 검고 엷은것이였는데 연필 살 돈도 없어 늘 연필 끄트머리까지 나무가지에 동여매여 쓰다보니 조금만 힘을 주어 글을 써도 공책에 구멍이 펑펑 뚫리기 일쑤였다. 그때 그가 다니는 반에 젊은 녀자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는데 한번은 그가 쓰고있는 공책과 연필을 들여다보시더니 갑자기 《너 이것도 책이라고 가지고다니니? 너 아빠, 엄마는 이런걸 너에게 주어 학교에 보낸다니?》 하고 몹시 화를 내시는것이였다.   그날 귀가때 그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어느 길모퉁이에  숨어서 정말 오래동안 울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머리에 열이 나면서 며칠 앓아누웠다. 그런데 토요일날 저녁인가 담임선생님이 그의 집으로 찾아오셨다. 등에는 애기를 업고있었고 왼손에는 달걀구럭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공책, 연필 등 학용품이 들려있었다.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 한발 막대기를 휘저어도 거칠것 하나 없는 가난한 살림형편을 보시고난 선생님은 자식공부 하나 변변히 대주지 못하여 미안해하시는 어머니의 자책어린 말씀에 눈시울을 붉히시였다. 그후 선생님은 자주 문철의 집으로 찾아오셔서 그에게 보충수업을 해주곤 하셨다.   문철이는 선생님이 선물하신 학용품을 정말 소중하게 다루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둠속의 등불과도 같은것이였습니다. 그 일은 나의 머리 속에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감동적인 영상으로 남아 나를 고무하고 채찍질합니다.》   30여년전인 1974년도에 있은 일이다. 갓 스무살난 리문철은 농촌에서 뽑혀와 화룡시방산관리소에서 로동자로 일하고있었다. 그때 단위에 종업원숙소가 없어 그는 한 개인집 방을 세내여 들었다. 그집 주인은 박씨였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감옥살이를 하고있었고 그의 안해는 병으로 앓는데다가 고정수입도 없이 아이 다섯이나 데리고있었다. 아이들중 큰 아이는 14살이였고 작은것은 6살밖에 되지 않았다. 수입이라야 그가 집세로 내는 8원이면 고작일 터이였다.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한 집이였다. 그 집을 훌쩍 떠나 다른 집을 찾으려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량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눌러앉기로 마음을 굳히고 우선 매달 39원되는 월급을 몽땅 이 집에 맡겨 살림을 유지하게 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봄에는 그집 애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캤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며 가을에는 이삭주이를 하고 겨울에는 산에 가 땔나무를 해왔다. 낮에는 출근을 하고 밤에는 아이들의 숙제지도를 해주었다. 짬이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감옥에 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면회하고 매번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개혁개방이 시작되여 세상이 살만해졌다. 박씨네 살림은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고 아이들의 학습성적도 많이 올라갔다. 맏이는 학급의 단지부서기로 되였고 둘째는 학급장으로 되였으며 넷째는 전국소학생스케이트시합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 박씨도 열심히 개조를 해서 복역기간을 2년 줄이고 1987년에 앞당겨 출옥해 가족과 단란히 모이게 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의지가지없는 고아, 가정살림형편이 어려운 학생, 지체장애자 그리고 형기가 차 석방됐거나 로동교양에서 풀려나온 인원들을 도와주고 교양하고 안치하는 사업과 떨어질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였다고 리문철은 회고했다.   1982년이였다. 화룡시 투도진에 어려서 부모를 여읜 아이가 있었는데 형님집에서 초중까지 다녔다. 그러나 고중에 시험쳐 붙은 후에는 학비를 이어대지 못해 더는 공부를 할수가 없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리문철은 그 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공부시키는게 어떨가 하고 안해 채명자와 상의를 했다. 1979년에 결혼한 리문철, 채명자 부부에게는 그때 아직 아이가 없었는데 누님이 병으로 사망한지 얼마 안되여 두 외조카를 데려다 키우고있었다. 10여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비좁은 집에서 네 식솔이 붐비는 삶이 원래 기구한데 16살나는 고중학생 하나를 더 데려다 키운다는건 누가 봐도 머리를 저을 일이였다. 그러나 난색을 짓던 안해는 끝내 남편의 뜻을 따라주었다. 그러는 안해가 너무 고마웠다.   아이를 집에 데려와서 보름만인가 안해가 병으로 입원하게 되였다. 한 병실에 해금이란 녀자애가 있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다 부어있었다. 여러번 캐물어서야 그애는 자기가 고아라고 실토정했다. 안해가 퇴원하자 그애를 집에 데려왔다. 하여 집식구가 또 하나 늘었다. 아이 셋만 키우고 공부까지 시키려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는데 그후 아이를 하나 낳자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매달 39원의 로임으로 아이 둘을 공부시키고나면 남는것이 없었다. 그때 그들은 정말 굶기를 밥먹듯했다고 한다.   때마침 개인창업열이 한창 오를 때였다. 당시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학습을 마치고 화룡시종자공사에서 근무하고있던 리문철은 창업을 해서 돈을 벌기로 마음먹고 안해와 함께 회사에 출근하는 한편 과외시간을 타서 가축사양을 벌였다. 후에는 아예 단위에 적을 남겨둔채 로임도 받지 않고 나와 곰사육장을 꾸렸다. 그 수입은 기대했던바 이상으로 짭짤했다. 그 수입은 전부 고아들 부양과  학생들 보조에 씌여졌다.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그러니 집이 너무 비좁아 집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돈을 다 아이들 부양과 보조에 쓰다보니 1987년에 와서야 18평방메터짜리 초가집을 2000원에 팔고 교외에 땅을 얻어 66평방메터되는 벽돌집을 짓게 되였다. 이 집을 지을 때 림시 세방에 들 돈이 없어 길가에 비닐텐트를 쳐놓고 옹근 7개월을 그안에서 살았다. 천신만고 끝에 66평방메터짜리 아담한 집이 지어져 드디여 친척친구들에게 잠시 맡겼던 여섯명의 고아를 모두 불러들였다.   《여기가 바로 너희 집이다. 이제 너희들은 다시 떠돌뱅이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시름놓고 살면서 공부도 열심히 잘해야 한다. 다들 알았지?》   처음엔 아이들이 먹고 잘 곳을 마련하는데만 신경을 쓰다보니 아이들의 사상교양에 등한했다고 한다. 그러던중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는데 몇몇 애들이 밤중에 남몰래 어디로 사라져서 장밤 온 시내 PC방을 샅샅이 훑은적이 한두번이 아니고 집안에서 돈도적사건이 생겨 애들이 도적을 쫓아내야 한다고 소동을 벌이는 일까지 생겼다는것이다.   《그래서 먹고 자는 일과 학비대주는 일만 해주면 다 끝나는게 아니라는걸 알게 됐습니다. 그들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리상이 있는 인간으로 키우는것이 먹이고 재우는것보다 몇갑절 더 중요한 일이라는걸 통감하게 됐지요.》   화룡시희망복리원 한가족 그후부터 실제로 아이들에 대해 생활상 관심도 게을리 할수 없지만 사상교양에 몇갑절 더 신경을 쓰게 됐다는것이다.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이면 애들을 데리고 화룡시13용사기념비, 청산리항일유적지에 가서 혁명전통교양을 하였으며 또 연변과기대를 견학하여 아이들의 리상을 키워주었다. 자금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아이들에게 해마다 각종 신문, 간행물을 1000여원어치 주문해서 짬짬이 보게 하였고 다달이 독서모임을 한차례씩 열어 독서심득을 나누게 했다.   아이들에게 남을 관심하고 도울줄 아는 품성을 키워주기 위해 매년 청명절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렬사비앞에 가서 벌초를 하였으며 친인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제물을 사가지고 친인의 묘소를 찾아가 제를 지내게 하였다. 명절이나 휴가에는 아이들과 함께 홀로 계시는 로인들을 찾아가 마당청소도 해드리고 빨래도 해드리고 창문유리도 닦아드렸다.   사스로 세상이 바짝 긴장하던 때 《사랑의 헌금》활동도 가지고 성금 900원을 모아 기부했으며 복리원 근처의 한 집에 가스폭발사고가 났을 때 부상자치료를 돕기 위해 애들은 소비돈을 280여원 모아 의연했다. 사천지진때에도 리문철은 매일 중앙TV 뉴스를 집체로 시청, 아이들이 자각적으로 모은 돈에 자기 돈을 보태 애들의 요구대로 999원 99전(救救救)을 만들어 시적십자에 헌금하였고 그외 그자신도 따로 1000여원을 시농업국당위에 특수당비로 바쳤다. 이런 일들을 통해 아이들은 사랑의 마음을 키워갔다.   리문철이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가정이 빈한한 학생들을 부조한 사적이 《길림신문》에 크게 실리고 그뒤 연변TV에서도 찾아와 그의 사적을 취재해갔다. 얼마후 《고향의 아침》프로에 그의 사적이 2집 시리즈로 보도되였다. 화룡시교육국의 리직퇴직간부들이 그의 사적을 보고 감동된 나머지 쌀, 기름을 사들고 돈도 모아가지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한구들 가득한 손자손녀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어선 안된다. 이 아버지는 너희들의 은인이다.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자라거라. 학습을 잘해서 장차 아버지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우리는 석양에 걸음이 빠른데 너희들은 앞날이 창창한 나라의 기둥감들이다. 건실하게 잘 자라서…   그날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할것없이 모두 울었다.   리문철의 사업을 지지해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해마다 설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입쌀, 과일 등 식품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위문을 왔으며 물만두를 가득 빚어가지고 오기도 했다. 전화로 관심과 문안을 표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그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관계부문의 일군들도 찾아와 함께 해결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2001년도 리문철은 낡은 공장건물을 구입개조한 뒤 관계 부처의 협력과 지지밑에 화룡시희망복리원을 설립했다. 공안부문에서는 희망복리원 아이들에게 집체호구를 등록해주었다. 하여 고아들에게는 명실공히 자기의 포근한 집이 있게 되였다. 그해 연길감옥에서 리문철을 교양보도원으로 특별위임하여 정기적으로 감옥에 가서 형기가 차 감옥을 나오는 석방인원들에게 출옥교육보고를 해달라고 했다.   어느 한번 연길감옥에 강연하러 갔을 때 리문철은 형기가 거의 끝나가지만 돌아갈 집이 없는 왕모의 사정을 알고 그가 석방되는 날 주동적으로 감옥까지 찾아가서 왕모를 데려다 희망복리원에 입적시켰다. 또한 그에게 인력거를 사주어 생계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절도범죄자인 주모는 만기석방된 후 그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두말없이 사법부문과 향정부에 찾아가 주모에게 농사에 필요한 생산대부금을 해결해주었다. 장춘에서 농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또 주모에게 려비를  대주면서 박람회에 참가하여 치부의 길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최근 그는 또 3명의 출옥인원과 원조커플이 되였다.   이처럼 다년래 시종 변함없이 이른바의 《불량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교양하였으며 한사람 한사람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돌려세웠다. 《내가 도와준 청소년 치고 다시 죄를 짓고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이것을 다시 없는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리문철은 말한다.   어느 날 박문길이라는 청년이 희망복리원에 찾아왔는데 그는 자기는 최근 연길감옥에서 출옥한 자로 감옥에서 리문철의 강연을 들은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당신이 말한 그 일들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보나마나 당신은 허풍치는데 불과하지요. 오늘 세상에 당신이 말한바와 같은 그런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까? 나는 그 많은 고아와 빈곤한 학생을 정말 수양하고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오늘 이 집을 찾아온겁니다.》   이어 그는 도전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마음이 그렇게 좋다면 나를 수양할수 있다고 지금 감히 장담할수 있습니까?》   리문철은 즉시 시원한 대답을 주었다. 《안될것 없소. 원한다면 지금 바로 우리 집에 짐을 풀어도 되오. 》 그는 말한대로 복리원에 머물었다.   어느 날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리원장님, 리원장님한테 두손 들었습니다. 당신이 실지 한 일은 당신이 말한것과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많더군요. 저의 목적은 당신이 말한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직접 내눈으로 보려는것이였는데 이 며칠간에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이 사회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몇분만 더 있어도 좋을텐데…》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보시다싶이 나는 몸이 튼튼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기서 고이 리원장이 끓여주는 밥만 먹고있을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가거든 그 자리에 가난한 아이 하나를 더 받아 기르세요. 나는 꼭 당신을 따라배워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가겠습니다. 후에 능력이 될 때면 꼭 와서 당신을 도울것입니다.》   리문철은 복리원의 아이들이나 사회의 약세군체에 대해서는 씀씀이가 대범할 때가 많았다. 매년 설이 되면 그들 부부는 위문품을 가득 사가지고 독신로인, 지체장애자와 곤난호들을 집집이 방문하여 위로했다. 수년래 선후로 여러명의 빈곤학생에게 컴퓨터와 CD기 그리고 기타 생활용품을 사주고 석방인원들에게 장사를 하라고 자금을 대주었으며 고독한 로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식품이나 생활용품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든 자금이 해마다 수만원이 되였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늘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돈 한푼 함부로 랑비하지 않았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그는 친구들이 가지는 모임에도 웬만하면 가지 않았고 가라오케 같은 고소비 장소에는 더구나 드나든적이 없었다. 20여년래 그들 네 식구는 종래로 단독으로 지낸적이 없으며 따로 명절을 쇤 적도 없다.   그의 집에는 자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택시도 마음대로 타지 못한다는 제도가 있다. 그 자신도 이 제도를 준수한다. 북경, 장춘, 상해나 사천 등 먼 곳으로 가도 침대차에 앉지 않고 앉은채로 자면서 먼 거리를 줄이곤 했다.   그의 딸 춘이(23 살)는 어릴 때부터 줄곧 아버지가 수양하는 고아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부모님들을 도와 나이가 자기와 같거나 자기보다 더 큰 아이들을 돌보군 하였다. 그런 춘이가 작년에 한국류학을 가게 되였는데 떠날 때 아버지에게 한 유일한 요구인즉 젯빠(MP3)를 선물해달라는것이였다. 리문철은 호주머니사정으로 그 작은 요구마저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친자식한테 너무 혹독하지 않은가 하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런 뜻으로 말했다.   -내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것이 아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아끼지 않을 부모가 어데 있겠는가? 나의 딸이 이 아비한테 유감스럽게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의 딸은 어려서부터 친부모의 품에서 자라면서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유감없이 받아왔다는것이다.   -하지만 내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 곁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없다. 그 유감은 무엇으로든 미봉할수가 없다.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좀 더 쏟는것은 그 애들이 친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꼭같이 행복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소망때문이다.   35년래 리문철이 수양하고 도와준 아이와 석방인원은 모두 130여명에 이른다. 그들중 50여명이 북경, 상해, 운남, 사천, 대련, 장춘 등지의 대학에 입학했다. 금년에 나온 대학생만도 7명이다. 일본에 연구생으로 간 학생을 포함하여 연구생도 3명이 나왔다. 그의 딸애도 현재 한국 조선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 연구생공부를 하고있고 아들애는 청도대학 경제학부에서 공부하고있다. 현재 희망복리원에는 29명의 청소년이 있다.   2009년 9월 20일 제2회전국도덕모범선발표창대회에서 조선족으로서는 유일하게 표창받은 리문철은 《근 10년간 중앙, 성, 자치주와 화룡시에서 50여차 표창받는 영광을 지녔는데 이런 명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일들을 하는가고. 실상 나 개인으로 놓고말하면 그 무엇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답을 바라는것도 아니요 명예나 명성이나 그 어떤 관직을 바라는것도 아니다. 내가 그런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결코 이 길을 걷지 않았을것이고 30여년씩 견지할수는 더욱 없었을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를 바보라고 말한다. 바보라도 좋다. 물론 내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큰 대가를 치른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나의 조그마한 희생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결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명예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나의 명예와 관련해서 내가 바라는것이  있다면 오로지 나의 영향으로 고아, 장애인, 가난한 학생, 감옥에서 나와 사회사람들의 기시를 받으며 죽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줄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줬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소박한 소망뿐이다.
73    유순호작가를 말한다 댓글:  조회:9079  추천:79  2009-09-07
  유순호작가를 말한다   --칼럼집 에 부쳐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유순호 작가의 칼럼집 "사람살이 때맛나는 세상"이 출간된다면서 서문을 몇자 적어달라는 부탁을 직접 유순호 작가로부터 받았다. 내가 쓰는게 적합하겠냐고 했더니 "선생님에게는 저그만치 30년이라는 기자생활을 해온 경력이 있지않는가"면서 재차 요청해왔다.    그런데 30년 기자경력보다는 이제 사귄지 겨우 얼마 안되는 유순호 작가, 그것도 인터넷상으로 만났고, 인터넷상으로 유순호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오면서 나는 유순호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짬짬의 시간을 타내어 그의 대량의 작품을 두루 섭렵하게 되었다. 그만큼 유순호 작가의 작품들은 매력적이며 특히 중국의 조선족 출신 작가들속에서는 독특하게 빼여난 작가임을 나름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음을 먼저 밝히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그동안 내가 읽은 유순호 작가의 작품은 소설, 수필, 칼럼을 포함해서 다양하다. 특별히 이번에 계열로 출판되는 "유순호문학전집"중 칼럼집에 실리게 되는 50여편의 칼럼속에는 내가 공개 마당에서 긍정적인 인상담을 발표한바 있는 글도 여러편이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서 나는 이 칼럼집에 서문을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미 인터넷상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순호 작가의 칼럼에는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체제인 나라에서 수많은 사상문제점들을 야기시킬수 있는 글들이 적지 않으며 실상 중국의 조선족 독자들은 유순호 작가에 대하여 서로 다른 평가를 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순호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나를 포함해 다수인 반면에 유순호 작가를 상당하게 미워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은바, 그들은 주로 중국 조선족 문화분야의 기득권세력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최근 몇 달사이에만도 유순호 작가는 그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죄목들을 선사받았는데 그런 죄목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무슨 "악질반화세력"이니 "미국망명작가"니 그 외에도 수두룩한 "반화작가", "반중국작가", "반체제작가", "반혁명분자", "달레라마를 두둔한 작가", "경외불순세력", "공산당을 반대하는 작가" 등 죄목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듣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열 두번도 더 기절초풍할만한 것들이었다. 적어도 나는 이런 죄목들이 생겨나게 된 문제의 칼럼들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주고싶었다. 그것이 다년간 기자생활을 해온 나의 직업적 의무이기도 하겠지만, 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우리 사회가 절대로 집단적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싶어서였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유순호 작가는 중국 조선족 출신 작가로 2002년에 미국으로 이민갔으며, 미국에서 지내는 지난 7년동안 그의 문학작품에서는 일대 비약이 일어났다. 특히 생계수단으로 신문사에 몸 담고 지내면서 수량상 적지만은 않게 써온 1천여편의 신문기사, 칼럼, 인터뷰, 기행, 논문 등 여러 가지 장르의 글에서 선정한 이 50편의 칼럼은 현재 변화중에 있는 중국 전역의 문화환경속에서도 여전히 고집스레 변화를 거부하고있는 조선족문단의 기득권세력이 저들의 기득이익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라도 얼마든지 저들에게 위협으로 간주되는 유순호 작가를 사경으로 몰아가기에 좋을듯싶은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본 유순호 작가의 칼럼, 말하자면 본 칼럼집에 수록된 이 50편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수량의 칼럼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경향은 결코 반중국이 아닌 짙은 친중국 성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른바 유순호 작가를 "반중국, 반체제작가"로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로 삼고 있는 글들로 "티베트사태 유감" , "정치는 야누스의 얼굴" , "베이징 올림픽을 결산한다"와 같은 글속에서도 대부분 유순호 작가의 자기 조국과 고향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사랑을 읽을수 있었다.    예컨대 제목만 읽어도 느낌이 섬뜩해보이는 "중국공산당은 개혁을 다시 개혁해야 한다"는 칼럼에서도 유순호 작가는 공산당의 일부 시책을 비판하지만 공산당이 집정하고 있는 중국정부에 대한 사랑과 애정으로 넘쳐있는바, 정부를 이끌고 정부를 감시해야 하는 사회주의 언론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숨기기만 하고 감추기만 하는 언론이 항상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고 했는데, 남도 아닌 자기의 상황과 문제점도 과감하게 드러내놓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기도 아닌 남과 싸워서 이길수 있겠는가"고 묻고 있다.    또 유순호 작가는 중국공산당은 일찍 2002년 제 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할데 관한 몇 가지 중대한 결정"을 지었고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나, 입 가진 당 간부들이 회의 때마다, 연설 때마다 입만 열면 부르짖는 소리가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가 되었지만, 진정으로 무엇이 조화로운 사회인지를 많은 공산당원들이 아직 제대로 터득한 것 같지않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정강이 태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오히려 중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그리고 인간, 자연과 정권이 얼마나 서로 조화롭지 못하고 불편하며 서로를 적대시하고 서로를 기시하게 되었는가를 여실하게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유순호 작가는 이렇게 된 원인을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에서 찾고있다.    유순호 작가의 이 칼럼속의 몇 단락을 돌아보기로 하자.    "마르크스에 의해 집필되어 23쪽 짜리 정치팸플릿에 담겨 이 세상으로 나올 때의 세계가 바로 그랬다. 산업혁명 후 자본가들에 의해 생산수단이 독점되면서 노동자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이 모두 독식하여버리고 말았다. 굶주림과 압제에 시달리다가 죽느니 몸부림이라도 쳐보고 죽겠다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심정을 이 ‘공산당선언’이 대변하였고, 이 선언을 품에 안고 싸워왔던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의 무산 대중, 즉 프롤레타리아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자본가도 때려잡고 국가도 전복시켜야 했다."    "레닌과 스탈린은 이 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거짓말이나 방화를 불사하였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념을 철저하게 실천으로 옮겨갔다. 1956년 2월 소비에트 전당대회에서 소련공산당의 새 지도자 후루시쵸프가 폭로한바에 의하더라도 스탈린은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10월 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 90%를 죽였고 그 후에 입당한 사람은 50%를, 군 장성급 60%를 처형시켰다고 하니, 이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압박과 착취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와 후과를 초래하게 되었던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칼럼에서 소련에 이어 신흥공산대국이었던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다. 철두철미한 마르크스 레닌주의 숭배자였던 모택동은 역시 공산주의 혁명을 핑계로 중국인민들을 도탄속에서 허덕이게 만들었고 자신의 가장 절친한 동지였던 류소기를 비롯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을 핍박한다. 이와 같은 전제와 폭력하에서도 죽지 않고 오또기마냥 살아남았던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하에서도 계급없는 사회, 모든 소유를 골고루 나눠가지고 평등하게 잘사는 지상천국 유토피아는 없었다. 그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자본가를 때려잡고 노동자, 농민, 무산 대중이 주인이 되어 돈과 재물을 공동 분배하자던 생산력의 모든 시스템이 다시 자본가의 손으로 슬슬 넘어가기 시작했고, 이들 자본가, 기업가들에 대한 명칭도 중국 공산당의 당장속에서는 ‘선진생산력’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등소평과 강택민, 호금도 등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인간은 생태적으로 "소유욕"을 가지고 태어났고  "내 것"을 갖기 원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내 것"이 안 되고 "소유욕"을 만족시킬수 없을 때 누구도 열심히 노력하려고 하지 않으며 누구도 창의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부르조아가 권력을 잡으나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으나 인간의 탐욕은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탐욕들이 한 때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으로 퇴치되는듯도 했으나, 사상운동만 하다보니 아무리 인민공사를 만들고 대약진운동을 하고 강제 노동을 시켜도 생산력은 올라갈 리가 없었다는 것이며, 결과 순수했던 공산주의는 모욕되었고 경제는 바닥이 났으며,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거대국가로 전락하고 말지 않았던가고 반문하고 있다.    이런 나라를 불과 30여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미국과도 능히 대적할만큼의 위대한 경제강국으로 다시 부흥시킨 중국 공산당에 대하여 충분하게 긍정하기도 한다. 이 칼럼에서 작가는 중국의 13억 인구중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못사는 가운데 잘사는 선진생산력이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노동생산력의 잉여가치를 너무 많이 독식하는데서 그 어떤 강대한 파괴력을 가진 보다 무서운 사상이 새로 생겨날가봐 우려하면서 중국공산당에 바란다. 많이 가진자가 자각적으로 못 가진자에게 내놓지 않으니 이럴 때야말로 공산주의 혁명전통을 발휘하여 강압적으로라도 잘사는 자들의 세금을 많이 징수하여 못사는 농민들에게 나눠주어야 할 때가 왔으며, 그냥 나눠만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절로 부유해질수 있게끔 돈도 주고 또 땅도 팔고살수 있게끔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한다.    개혁개방 이후, 문화대혁명이 결속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중국의 일부 조선족 지성들은 극좌사상의 復古主義에 깊이 물젖어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법이 없이 모든 현존 질서를 미신하며 이미 중공의 개명정책에 의해 관후한 언론환경이 상당정도 마련되어있음에도 낡은 사유방식에다 자신을 꽁꽁 묶어놓고 하고싶은 말과,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도 진실한 말을 할수 없게 구박한다. 말을 하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고 소통해야 관계도 원활해지고 사상도 원활해진다는 것이 이 칼럼집에 담겨있는 모든 칼럼들의 주장이다.    세상과 부딪치는 유순호 작가의 감히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면서 보면 한편한편 자기 조국과 자기의 고향, 그리고 자기의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정을 읽을수 있게되어 감동을 받는다.    그는 중국공산당과 중국 정부의 일부 시책에 대하여 비판할 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이 몸 담고 살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도 "강도같은 나라", "도둑놈 같은 나라"라고 거침없이 매도한다. 바로 칼럼집 제목으로 선정된 "사람살이 때맛나는 세상"에서 미국식의 민주주의라는 것도 알고보니 "천박하다 못해 비속하기까지 하다"고 한탄한다. 또 "미국은 다극화 시대를 새롭게 대비해야 한다"는 칼럼에서는 미국이 "강압적인군사력은 뒤로 숨기고 강대한 경제력으로 ‘하드 파워’와 더불어 세계적인 인적교류 확대를 강화하고 일본이나 영국 독일 같은 잘 사는 나라들보다 저개발국지원을 대대적으로 늘이면서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적어도 가난한 북한을 독려할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풍요로운 미국 땅에 남아도는 쌀과 기름과 고기를 그대로 썩이지 말고 없는 자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등 유토피아적 천진하면서도 아름다운 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시종 중국 국내에 몸을 담고 장기간 중국공산당의 언론사에서 평기자로부터 시작하여 부주필, 부사장으로, 이제는 은퇴를 앞두고 있는 나는 유순호 작가의 칼럼들을 읽으면서 간단없이 충격을 느껴온것이 사실임을 고백한다. 중국체제의 입장에서, 그리고 중공당원이란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유순호의 칼럼들에 문제점이 없는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바깥세상에 별로 습관되지 않은 우리가 반드시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작가의 글 한두편으로 또는 한 두 단락으로 문장 전체를 쉽게 부정해버리는 나쁜 습성이다. 이런 악성종양과도 같은 폐습에서 헤어나오면 우리는 한발 앞서 세상밖으로 나가 있는 유순호 작가의 보다 넓은 시각을 볼수 있게 된다. 활짝 트여있는 시각에서 자기 조국이 좀 더 잘하여 세계무대에서 가장 선진적인 리더국가로 성장하여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읽게될 때 어쩔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남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글 구석구석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유순호 작가는 분명하게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신봉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유순호 작가를 반공산주의 작가, 반사회주의 작가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목표가 미국에서 10년동안만 살면서, 서구문학을 배우는 것이라고 나에게 고백한바 있는 유순호 작가는 아마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때문에 10년 뒤에는 또 어디서 무슨 일로 살아가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에도 여전히 유순호 작가의 매력적이면서도 시원한 칼럼을 계속 읽을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때 가서도 유순호 작가의 자기 고향과 자기 조국, 그리고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은 여전할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온갖 유혹과 풍파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문학정신에 충직하고 자신만의 삶의 원칙에 충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그의 칼럼을 읽으면서, 그의 내일에 계속 쏟아져나오게 될 또 다른 칼럼들에서 작가의 한 길로 평생을 살아갈수 있는 바른 비결이 구경 무엇인지를 독자들과 함께 읽어낼수 있을 날이 이제 바로 눈앞에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국무원의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비준소식을 보고서 박문희 1. 8월 30일 길림성의 “長吉圖開發開放先導區計劃”을 국무원에서 비준했다. 두만강류역을 동북아물류의 前陣기지로 개발하기 위한 거창한 사업이 본격 가동되였음을 의미한다. 구역면적이 7만3000평방킬로메터로 전 성의 39%를 차지하고 인구가 1090만으로 전 성의 40%를 차지하는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를 건설하면 일본, 한국의 자본을 크게 흡인하게 될뿐만 아니라 중국 연해 및 내지와의 협력을 촉진하고 동북지구 대외개방 새 문호를 구축할수 있다. 중국에서 이러한 선도지역을 세우기는 길림성이 처음이며 동북아의 바둑판으로 말하면 중국의 先手라고 볼수 있다. 2. 동북아 지역의 기하중심에 위치해 있는 두만강지역은 중국 내륙에서 동해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水上通路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조선과 로씨야 정부와 오랜 시일 담판을 했지만 아직 두만강出海權을 가지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나 로씨야와 슬라브얀카 등 항구를 빌려쓸데 대한 협의를 달성하여 그나마 동해진출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였다. 중국-몽골 대통로 건설도 의사일정에 올라 목전 초기계획을 작성중이다. 자료에 의하면 목전 몽골국에서 조사확인한 80여종의 광산자원가운데 석탄은 1520억 톤, 철은 20억톤, 린은 2억톤, 동은 800만톤이라 한다. 수송력이 문제로 나서고있는데 중국이 中蒙大通路건설의 주체로 될것이며 몽골국에서도 그럴것을 희망하고있다고 중국 관련부문에서 피로했다. 실제로 중국 국가 철도부에서 현재 이 일을 기획중이라고 공영매체에서 이미 보도했다. 주지하다시피 연변에서는 延龍圖一體化를 여태 적극 추진해왔고 동시에 변경개항지 훈춘시를 통해 중-로항구, 중-조항구 항목건설도 추진하고있다. 로씨야의 블라디보스토크 관광지개발과 조선의 라진선봉경제특구 설립 추진, 한국의 속초항에 대한 동북아 물류항 육성계획과 맞물려 추진되는 훈춘변경경제합작구 동북아변경무역센터의 8월 16일 착공으로 2016년에 이르러 이 무역센터는 두만강 국제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훈춘에서 출발하는 중-로철도가 올 년말 개통되고 이어 훈춘-도문고속도로가 명년에 완공되며 길림-훈춘간 고속도로도 곧 국가사업으로 추진되는데 황금의 삼각주에 위치한 훈춘은 두만강개발의 핵심축이 될수 있는 기반을 다져가고있다. 훈춘을 窓口로, 연길-룡정-도문을 最前方으로, 장춘-길림을 엔진으로, 동북後背地를 버팀목으로 하는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 구도안에서 延龍圖를 核으로 한 연변은 말그대로 이 거대계획의 최전방이다. 3. 先導지역의 8大 중점공정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두만강 지역 국제자유무역지대 건설 2) 長吉圖 국제 내륙항구 건설 3) 과학기술 창조지역 건설 4) 국제협력 산업지역 건설 5) 현대 物流지역 건설 6) 생태려행지 건설 7) 최첨단 서비스업 집중지역 건설 8) 현대 농업모범지역 건설 여기서 생태려행지 건설이란 장백산의 생태자원과 국경지역에 위치해 있는 여건優位를 기반으로 이 지역을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다국적 생태계 려행 및 人文려행, 그리고 특색있는 휴가, 휴양의 생태지역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최첨단 서비스업 집중지역 건설의 내용에는 금융보험, 서비스아웃소싱(外购服务), 비즈니스展示, 문화創意 등 분야를 기반으로 동북지역 자본시장을 건설하고 東北亞指向의 현대서비스업 체계수립 등이 들어있다. 그 외 현대농업 모범지역 건설에는 토지의 集約的경영과 적당한 규모경영, 그리고 농업의 전반적 기계화 실현 및 시설농업, 우수농업 창출 등 내용이 망라된다. 보다싶이 향후 이 지역에 상업기회가 무한정 늘어나게 될것이라는것은 의심할바 없다. 그러나 단지 상업기회만 늘어난다고 보면 절대 안된다. 문화, 교육 등 모든 사회분야에도 수많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봐야 할것이다. 4. 우에다 周知의 사실을 이처럼 장황히 늘여놓는것은 우리 길림성 全域, 그리고 동북지역과 內地의 상관 협력관련지역, 나아가 동북아 각국이 참여하고 연구하고 관심하는 이 중차대한 대사를 앞에 두고 우리 연변, 나아가 전국 각지 지어 세계 각국에 진출해있는 우리 조선족들은 구경 어떠한 태도와 자세로 이와 같은 변화를 맞이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함께 의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 “長吉圖開發開放先導區計劃”은 중국 동북지역의 개발개방과 동북아개발의 거시적안목, 목표와 구도에서 치밀한 가능성연구와 檢證을 거쳐 내놓은 전략적계획으로 이제 5년 내지 10여년의 계획실시과정에 이와 련결되는 수많은 사업이 새로이 창출될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것이다. 대관절 어떤 사업들이 앞으로 창출될것이며 그런 사업들은 어떻게 전개될것인가? 이런 사업들은 예견된것들도 있지만 예견되지 않은것들도 필시 있으며 예견됐다 해도 아직 구체적 실시안이 연구되지 않은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족들에게 “평시불소향, 급래포불각(平時不燒香,急來抱佛腳)”이란 속담이 있다. 만약 앞으로의 실시행정에 모종 항목이 즉시 필요하다는것이 실증되여 그때 비로소 필요한 항목준비에 착수한다면 성복후 약방문식으로 기회를 놓지게 되거나 적어도 일이 크게 遲滯될것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장래에 對備하여 미리 예측을 하고 일찍 손써 준비작업을 시작하는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할수없다. 6. 례컨대 5년 내지 10년 사이, 그리고 그 이후에 이 지역에 로어번역인재, 몽골어 번역인재가 반드시 필요하리라는것은 누구나 예견할수 있는 일이다. 중국에 로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대학에 로어학부가 있으며 장춘에도 길림로어학원에 중등로어전문학교도 있다. 그러나 對 로씨야무역이 증대됨에 따라 로씨야어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제 중국과 로씨야의 국경무역이 급류를 타게 되면 이런 상황이 더 뚜렷하게 나타날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있다. 더구나 이 지역에 한국인이 대거 들어오면서 중국어, 한국어와 로씨야어를 동시에 구사할수 있는 인재가 반드시 대량 수요될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할을 놀수 있는 적임자로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로어를 배운 조선족만이 제격인것이다. 몽골어의 경우도 이와 다를바 없다. 이는 우리 연변에 초급, 중급, 고급 로어학교를 세우거나 연변대학에 로어학부를 설치하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어디로부터 착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것이다. 7. 그러나 언어문제가 전부인 것은 아니며 또 가장 중요한것도 아니다. 우리 조선족은 선도지역의 8大 중점공정을 망라한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과 관련된 전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적극 연구하고 장래를 예견해야 하며 우리의 실정에 따라 상당수의 대응책과 실시안을 내오고 정부에 제안하여 허락을 받아내고 실시하여야 하는것이다. 정부 상관 부처, 기업소, 사업단위나 대학의 연구부문은 물론, 나아가 사회단체나 개인도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방안을 연구함에 있어서 협소한 민족주의시각에서가 아니라 동북지역개발개방과 동북아경제의 엔진역할 증대의 큰 시각으로 출발해야 하지만 이 지역 개발에서의 우리 중국조선족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충분한 자기인식과 자신심을 반드시 가지고 이 작업을 주동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8. 우리 조선족은 거개 연변이 중국조선족의 首府이자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연변이 없으면 중국조선족공동체가 없다고 여긴다. 우선 이런 생각이 과학적인가 아닌가를 성급히 따질 필요는 없다. 중요한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연변을 지켜내야 한다는것이다. 연변을 지켜낸다는 개념은 결코 추상적인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개발에서 우리 조선족이 어느 정도 주도권을 쥐고 행사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제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이 전면적으로 가동되면 참여자가 얼마일지 모른다. 장춘, 길림, 나아가 전 동북의 기업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는건 차치하고 내지에서도 直, 間接的으로 참여하게 되며 국제적인 참여자도 많을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다. 도전을 맞받아 적극 응전하면 다시 없는 기회로 될것이고 도전 앞에서 無준비로 손을 놓고있으면 주도권을 상실하게 됨과 아울러 모든 기회를 남에게 고스란히 받쳐주고말것이다. 물론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에서 적극 행동하고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에만 의뢰해서는 결코 이 일을 잘 해낼수 없다.  9. 조선족사회에서 국내외적으로 대대적인 여론을 조성하여 보다 많은 조선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하며 연구기관이나 학술계 등에서 관련 포럼이나 세미나(국내 혹은 국제)를 가지고 衆智를 모아 정부에 보고서를 올리고 허락까지 받아내여 실행해야 할것이다. 이렇게 하는것이 우리 연변을 지켜낼수 있는 방도중의 하나가 아닐가 생각한다. 10. 국무원의 비준을 받은 길림성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의 실시로 앞으로 5~10년 사이 이 지역의 엄청난 可視的 변화가 예상되는데, 이 지역의 最前方인 조선족자치주 연변에서 조선족선줄군들의 유력한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  2009.9.4 장춘에서
최삼룡 편찬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 한국 문화관광부 2009년 우수도서로 선정   2007년 한국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 초청으로 해방전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연구 진행  장편론문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 연구》 창출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 정리 출판   기자가 최근 입수한데 따르면 한국 도서출판 보고사에서 2008년 8월에 출판한 중국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의 편찬도서《재만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이 2009년 7월  한국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도서로 평정되였다.  확인한데 의하면 중국조선족 작가나 학자들의 문학작품이나 학술저작이 한국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된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수도서로 선정되면 재판을 할 때에 책표지에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도서』라는 마크를 달아주고 국가에서 몇권을 구입해서 여러 도서관에 기증한다.   무려 827페이지, 80여만자 되는  《재만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에는 시 38수, 소설 8편, 수필 22편, 희곡 1편과  편저자가 쓴 해제ㅡ《재만조선인문학의 친일작가와 작품에 대하여》라고 제목한 5만여자의 론문이  수록되였다.   평론가 최삼룡은 정년퇴직한후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대학 조선-한국문학연구소의 요청으로 해방전 중국조선족문학을 발굴, 정리, 연구하는 작업에 정진하고있는데 현대시권,  항일문학권은 이미 출판되였고 민요권과 산문권(백만자, 상, 하권)이 인쇄중에 있다.   친일문학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2001년부터 시작되였는데 그 첫 결실이 2002년 5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20세기중국조선족문학자료전집 제6집》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연길에서 구독할수 있는 도서와 재료에만 의거하다 보니 많은 재료가 루락되였고 일부 재료는 여러가지 외적인 원인으로 수록하지 못하였었다.   이 책의 미흡한 점을 통절히 느낀 최삼룡평론가는  여러차례 한국으로  출국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연세대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들어가 유관재료를 발굴하였는데 그 자료를 복사하는데만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2007년 초 최삼룡평론가는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의 초청을 받고 해방전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연구를 하게 되였는데 그 결실로 장편론문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 연구》(8만자)가 창출되였고 그 부산물로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이 정리, 출판되였는데 이번에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된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친일문학연구에서 하나의 새로운 성과물로 평가를 받는다.   조선족문학사에서 가장 악독한 친일연극《김동한》의 작자가 김우석이 아니라 김영팔(金永八)이라는것, 박팔양의 창씨개명한 이름이『靑木一夫』외에『水原一夫』라는 이름이 더 있었다는것, 그리고《만선일보》에서 1942년 1~2월 사이에 조직한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같은 제목으로 쓴 11명 문인들의 친일문장 11편도 이 책에 처음으로 수록되였으며 또 안수길(安壽吉)이 만주제국협화회 룡정분회의 상무원이였다는것도 이 책에서 처음 밝혀졌다.   그리고 이 책에는 만주 조선인 친일문학에 대한 편찬자나름의  일부 새로운 견해도 있는데 례하면 친일작품을 썼다고 하여 모두 친일분자로 결론할수 없으며 작자의 주도적이고 일관적인 표현을 전면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작품을 평가할 때에도 친일작품과 친일성향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야 한다는 등 견해가 그렇다.   (박문희[인터넷 길림신문]2009.8.27 )
70    중·한 언론의 초여름 읽기 댓글:  조회:4239  추천:65  2009-06-13
중·한 언론의 초여름이 뒤늦게나마 찾아왔다. 중·한 언론의 봄은 중·한 언론인이 약속에 따라 만난 그 무슨 "언론포럼”같은 데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88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하면서 얼음이 풀리고 1992년도 중·한 수교가 되면서 완연한 봄빛을 맞아온 것 같다.   그런데, 봄을 맞아서 초여름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저그만치 17년이다.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과 문화체육관광부의 주최로 지난 11일 북경에서 열린 언론인 포럼. 중국과 한국의 주요 언론사 고위 언론인들이 참가한 사상 첫 “중·한 고위급 언론포럼”. 17년 만에 만나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량국 언론의 역할, 언론을 통한 량국 국민간 리해 증진 방안, 량국 언론교류 및 협력 채널 확대 방안 등에 대해 논의를 한 이번 포럼을 나는 나름대로 중·한 언론의 초여름으로 상정(想定)해 본다. 중·한 고위급 언론인들이 사상 "첫 번째 교류의 장"을 량국 수교 17년 만에 만들었다면, 봄과 초여름의 거리가 이 정도로 멀다면, 누가 봐도 “적시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더 늦기보다는 그래도 일찍한 셈이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밖에.  어쨌거나 이런 포럼이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고무를 받는다. 그 17년 간 이른 바 동북공정, 올림픽 성화 봉송, 서장, 로무송출 등 적지 않은 문제로 음으로 양으로 티격태격 해오면서 “혐한론”이나 “반중론”까지 불거져 나오고 량국 국민의 감정도 상당히 다친 터라 량국 고위언론인들이 고민도 많이 한 끝에 서로간 해해년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게 그래도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닌 것이다. 기다림에 조금 지치긴 했지만도. 실상 이와 같은 고위층 언론인의 만남의 필요성은 그간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경제 교류에 비해 문화나 교육 등 면의 협력이 너무 부진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럼에서의 발언을 통해서도 량국 국민들 간 상호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파생된 반한, 반중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언론이 정확한 역할을 발휘해야 한다는 데 대해 양국 언론인들이 심히 공감하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발언 속에 더러 각자 자국 언론을 점검해보는 의식도 진하게 배여있고 서로 대방 국가를 더 깊이 알아야 하겠다는 의중도 보이고 자주 합동취재도 하면서 대방 나라의 실정을 자국 내에 제대로 알리자는 의지도 보이여 기분이 괜찮다.    중국이 세계와 함께 올림픽을 치르고 또 이번 금융위기도 함께 겪는 사이, 그리고 양국이 제마끔 자기의 골칫거리들을 가지고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 중·한 양국 국민간의 갈등도 퍽이나 갈아앉은 이때 이와 같은 포럼이 열렸으니 모임의 분위기도 엄숙하고 평화롭기만 할 뿐 아주 화끈하거나 격동적이지 못할 건 당연하다. 늦겨울은 진작 옛날 일이고 그렇다고 땡볕이 지지는 한여름은 아직 아니니까. 하지만 발언 내용을 보면 모두가 따뜻하고 조금 따갑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이를 일컬어 초여름이라고 한다. 물론 양국 국민들 간 감정이 한참 격화되고 있을 때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라도 량국 고위층 언론인들이 오늘처럼 이렇게 모여 앉았더라면 문제 해결이 더 적시적이어서 훨씬 좋았을 것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매년 한차례씩 모여 앉을 계획이라니, 량국 국민들한테 무슨 “민감한 일”이 생긴다 해도 이번에 자리를 같이 한 근 30명 되는 고위층 언론인들이 이전처럼 나 몰라라 외면할까봐, 더구나 언론인 자체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 마른 나무에 불이라도 달까봐 혹은 붙는 불에 키질이라도 할까봐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이번 포럼에 대한 감상을 말하라면 논문이나 발언 내용의 중요성보다는 이른 바 고위 언론인들이 17년 만에 처음으로 코를 맞대고 앉아 얼굴을 익히고 친구를 사귀였다는데 의미의 비중을 더 두는 게 좋을 상 싶다. 일단 만나면 아무래도 말을 하기 마련인데, 말을 서로 주고받다 보면 아무래도 감정이 통하게 될 터이요, 그러다 가끔 삿대짓을 하고 침을 튕기며 다투더라도 싸움 끝에는 분명 정이 들게 될 거니까. 알륵이 있어도 끙끙거리며 5년이고 10년이고 곪아터질 때까지 묵새겨 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보다 행동일터이다. 중·한 양국은 리념과 제도도 다르고 문화차이도 작지 않아 언론이 그 제약에서 벗어나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례컨대, 중국의 주류언론더러 한국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한국 측에서 봐도 유익한 비판, 이런 비판도 중국은 감히 못한다, 흔히.)하라면 한국의 주류언론더러 중국의 문제점을 비판하지 말라(기실 정확한 비판은 중국도 필수)는 것만큼이나 힘들어 할 상황이니. 그러나 지금의 문제는 우선 중국이나 한국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중요한 사실과 그 사실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포착과 그것에 토대한 책임성 있는 보도일 것이다. 이 점에 류의치 않는다면 사달은 아무 때든 불거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량국 고위 언론인들의 책임성 있는 약속 리행으로 이런 생각이 부질없는 걱정으로 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언론인들이 자주 소통을 하다보면 서로 대방의 생각을 정확히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양국 국민이 서로 오해를 하더라도 그런 오해를 언론인이 나서서 풀어주는 그런 바람직한 언론으로 거듭나겠지. 아래 중·한 량국 11명 대회발언자들의 발언에서 몇 마디 추려 본다. --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에게 유익한 진정한 이웃이 돼야 하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소통에 량국의 책임 있는 언론들이 나서자.” “량국이 문화 사대주의와 자기 문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문화를 편견 없이 인정하는 문화 상대주의로 나아가자.” “량국 국민 간에 감정 문제가 생길 경우 정확히 주시하고 신속하게 해법을 찾자.” “량국 언론이 서로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보도하자.” "량국 관계 발전과 교류의 방향을 잘 파악해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자." 보다시피 무슨 대단한 말들인 건 아니다. 이런 말쯤이야 할 줄 몰라 못하겠는가. 이런 말을 하려고 언녕부터 별러온 사람들이 과연 적었겠는가. 암만 별렀댔자 그게 무슨 소용 닿겠는가. 하지만 별로 대단치 않는 이런 말들이 오늘 조금 대단하게 여겨지는 건 그런 말들이 양국 고위언론인 포럼석상에 올려졌고 아울러 서로에게 뜨겁게 안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중·한 언론의 초여름”이 늦게나마 찾아왔다고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욕하게도 화끈한 여름이 기다려지게 되는 것이다.
69    나의 집 사랑 이야기 댓글:  조회:4994  추천:59  2009-01-31
나의 집 사랑 이야기 ○ 중국 길림성 화룡시 희망복리원 원장 리 문 철 나는 1954년 12월 화룡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환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고 나와 누나도 몸이 허약하여 늘 시름시름 앓곤 했다. 일가 일곱 식솔의 생계는 어머니 한 사람에 달려있었다. 어머니는 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하거나 강변에서 모래를 쳐 얻은 수입으로 온 집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소학교를 다닐 때 나는 새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고 원족도 딱 한번밖에 가본 적이 없었다. 원족을 가려면 맛있는 것을 도시락에 싸가지고 가야 하는데 우리 집에서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학교를 다닐 때 있은 한 가지 일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때 내가 쓰는 공책이란 형편없는 저질이었는데 그런 것마저 살 돈이 없어 정면을 쓰고 나서는 뒤 면에도 글을 써야 했다. 몇 푼 안 되는 연필도 없어 연필 끄트머리를 나무 가지에 동여매여 썼다. 그런 연필로 공책 뒷면에 숙제를 하려니 조금만 힘을 주어 글을 써도 공책에 구멍이 펑펑 뚫리기 일쑤였다. 그때 우리 반에 젊은 여자 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는데 한번은 내가 쓰고 있는 공책과 연필을 들여다보시더니 갑자기 "너 이것도 책이라고 가지고 다니니? 너 아빠엄마는 이런 걸 너에게 주어 학교에 보낸다니?" 하고 몹시 화를 내시면서 나의 공책을 빼앗아 와락와락 찢어 바닥에 동댕이치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널려진 공책을 보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어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길모퉁이에 숨어서 정말 오랫동안 울었었다. 집으로 돌아 온 나는 머리에 열이 나면서 며칠 앓아누웠다. 열이 몹시 나는 나 때문에 어머니는 몹시 마음 아파하시면서 강변에 모래 치러도 나가지 않고 나를 간호하셨다. 그런데 토요일 날 저녁인가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날 보러 찾아오셨다. 등에는 애기를 업고 있었고 왼손에는 달걀구럭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공책, 연필 등 학용품이 들려있었다. 우리 반 학생이 우리 집에 왔다가 내가 앓는것을 보고 선생님한테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후에 생각해보니 선생님은 나를 호되게 비평하시고 그래서 내가 앓는것이나 아닌지 하여 몹시 걱정하셨던것 같다. 우리 집을 찾으시어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 한발 막대기를 휘저어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우리 집의 가난한 살림형편을 보시고 난 선생님은 자식공부하나 변변히 대주지 못하여 미안해 하시는 어머니의 자책어린 말씀에 눈시울을 붉히시었다. 선생님은 그날 눈이 퀭해진 나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었다. "내가 너를 잘못 꾸지람 했구나. 어린 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마음 아팠겠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날 어머니와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셨다. 그 후 선생님은 자주 우리 집으로 찾아오셔 나에게 보충수업을 해주곤 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나한테 선물하신 학용품을 정말 소중하게 다루었다. 그것은 나에게 어둠속의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일은 나의 머리 속에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감동적인 영상으로 남아 나를 고무하고 채찍질한다. 가난했던 가계, 암울했던 동년은 나에게 간고소박하고 고생과 노고에 견디는 품성을 키워주었으며 자상하신 아버지, 근로하신 어머니와 따뜻하신 선생님의 사랑은 나의 어린 가슴에 맑고 밝은 마음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아마 그 마음의 씨앗이 눈을 틔고 그 눈이 작은 줄기로 자라 점차 아치를 치고 열매를 맺게 되었을게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차 가난한 아이들과 사회의 최하층에 처해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뜻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고 종당에는 자기의 필생의 사업으로 삼게 된것이다. 30여년 전인 1974년도에 있은 일이다. 문화혁명 후기였던 그때는 전반 사회가 말 그대로 침체상태였는데 그러던 중 수년 전에 타도되었던 등소평이 다시 정치무대에 나타나면서 새로운 움직임들이 보이는 듯 했다. 그때 나는 갓 스무살이었는데 농촌에서 뽑혀 와 화룡시 부동산관리소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단위에 종업원 숙소가 없어 나는 한 개인집 방을 세내어 들었다. 그 집 방에 들고 나서야 그 집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집 주인은 박씨였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병으로 앓는데다가 고정수입도 없이 아이 다섯이나 데리고 있었다. 아이들 중 큰 아이는 14살이였고 작은 것은 6살밖에 되지 않았다. 수입이라야 내가 집세로 내는 8원이면 고작일 터이였다. 그렇다 할만한 수입 내원도 없이 여섯 식솔이 도대체 무얼 먹고 산단 말인가?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한 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 몇은 당연히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찬란한 동년을 만끽해야 할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다니? 그 광경을 보는 나는 마음이 괴롭기 짝이 없었다. 나의 앞에는 두가지 선택이 놓여있었다. 남이야 어찌 되든 눈을 질끈 감고 그집을 훌쩍 떠나 다른 집을 세내어 드는 길과 이 집에 그냥 눌러 있으며 그들과 고생을 함께 하는 길 이 두가지었다. 이 집을 떠나려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양심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어릴 때 고생하던 생각이 되살아 나면서 동정심이 괴어 올라와 이 집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치밀었던 것이다. 나한테 무슨 도울 힘이 크게 있으랴만 그래도 나는 사업이 있는 한창 나이 아닌가? 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아이들까지 죄를 받아야 하나? 이 아이들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장차 커서 무용지물이 될게 아닌가? 고민끝에 나는 결국 이 집에 눌러 앉기로 마음을 굳혔다. 우선 나는 매달 39원 되는 월급을 몽땅 이 집에 맡겨 살림을 유지하게 했다. 그리고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들과 연통을 해서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다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낮에는 출근을 하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학과지도를 해주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나는 봄에는 애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캤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며 가을에는 이삭주이를 하고 겨울에는 산에 가 땔나무를 해왔다. 그리고 짬을 내여 아이들을 데리고 감옥에 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면회하고 매번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그때 복직을 한 등소평이 나라가 잘 되려면 계급투쟁도 계급투쟁이지만 우선 경제를 춰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한창 철도수송 분야로부터 정돈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얼마 못가서 계급투쟁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등소평을 다시 권좌에서 몰아내고 전국적으로 그를 재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다시 계급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갔다. 이런 판국에 나는 뭘 하고 있었는가? "나쁜 사람의 가정"과 계선을 나눌 대신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하고 심지어 감옥을 찾아가 “나쁜 사람”을 면회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러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해하기는 고사하고 나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면서 수차 나를 찾아 “교육”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왜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 무척 곤혹스러웠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계선”을 나눌 수 없어 남이야 뭐라 하든 나는 그냥 나대로 내 할 일을 했다. 내가 “기본 도리”를 깨닫지 못하니 우리 회사에서도 더는 못본 척 그대로 놔둘 수 없었던지 대회에서 수차 나를 공개 비판을 했다. 당시 계급투쟁을 부르짖던 살벌한 환경에서 회사의 책임자들도 아래 직원이 “검은 오류(黑五類)”와 휩쓸리는 것을 관계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책임 추궁을 받을 소지가 있었던만큼 나를 내놓고 비판하는 것은 아주 지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었다. 그래도 결국 나는 머리를 시종 “깨치지” 못하고 그냥 그집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4인방”이 잡혀 나오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어 세상이 살만해졌다. 박씨네 살림은 점차 호전되게 시작했고 아이들의 학습 성적도 많이 올라갔다. 맏이는 학급의 단지부서기로 되었고 둘째는 학급장으로 되었으며 넷째는 전국 소학생 스케이트시 게임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 박씨도 열심히 개조를 해서 복역 기간을 2년 줄이고 1987년에 앞당겨 출옥해 가족과 단란히 모이게 되었다. 그들 온 집 식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나의 마음도 말할 것 없이 개운하고 후련해졌다. 그리고 내가 한 일에 대한 보람을 처음으로 가슴 뿌듯하게 받아 안았다. 그 때를 시작으로 해서 나는 의지가지 없는 고아, 가정 살림 형편이 어려운 학생, 지체 장애자, 그리고 형기가 차 석방됐거나 노동 교양에서 풀려나온 인원들을 도와주고 교양하고 안치하는 사업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안락한 집은 행복의 일대 근원이다. 그것은 바로 착한 양심 다음의 자리를 차지한다. 집은 모든 사람이 자라는 요람이다. 정다운 내 집이 없으면 내가 대하고 있는 것이 비록 온 세상일지라도 역시 커다란 감방에 지나지 않는다. 쾌락과 궁전 속을 지날지라도 언제나 초라하지만 내 집만 한 곳은 없다. 한 사람은 그 나이가 얼마든 사업에서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를 막론하고 아무리 수고하거나 천애지각 그 어디를 방랑할지라도 우리의 피로한 희망은 평온을 찾아 역시 가정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의지 가지 없는 고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갈 곳이 없고 가정의 따사로움을 누릴 수 없는 그들은 약세 군체로서 사회에서 소외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1982년이었다. 화룡시 투도진에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있었는데 형님 집에서 초중까지 다녔다. 그러나 고중에 시험 쳐 붙은 후에는 학비를 이어 대지 못해 더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아내와 그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다 키우며 공부시키는게 어떨가 하고 상의를 했다. 아내는 얼굴에 난색을 띠었다. 1979년에 결혼한 나에게는 그때까지 아직 아이가 없었다. 그때 나의 누나가 장기환자로 앓다가 사망한지 얼마 안 되었다. 누나가 사망한 후의탁할 곳이 없는 두 외조카를 내가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네 식솔이 18평방미터밖에 안 되는 비좁은 집에서 붐비는 삶이 원래 기막힌데다 16살 나는 고중 학생 하나를 더 데려다 키운다는 건 누가 봐도 머리를 저을 일이었다. 난색을 짓던 아내는 끝내 나의 뜻을 따라 주었다. 그러는 아내가 나는 너무도 고마왔다.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 와서 보름만인가 나의 아내가 병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한 병실에 김해연이란 여자애가 입원해 있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다 부어 있었다. 여러 번 캐물어서야 그 애는 자기가 고아라고 실토정했다. 자기가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가 세상을 떴고 아버지도 얼마 전에 자기 하나를 남겨놓고 사망했다고 했다. 아내가 출원하자 우리는 그 애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하여 우리 집 식구가 또 하나 늘었다. 우리는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어 공부도 시키고 병 치료도 해주었으며 또 늘 영양식품을 사다 먹이고 입에 맞게 전문 밥과 요리를 해주어 점차 건강이 회복되게 했다. 아이들이 미안해 하니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얘야, 여기가 바로 너희들 집이고 나는 너희 엄마다. 마음 놓고 있으면서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 다들 알았지?" 아이 둘만 키우고 공부까지 시키려니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는데 그 후 우리가 아이를 하나 낳자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매달 39원의 노임으로 아이 둘을 공부시키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때 우리는 정말 굶기를 밥먹듯 했다. 하루에 끼니 두 때를 제대로 먹을 수 있으면 그건 아주 정상 생활을 하는 거였다. 1988년 전까지 우리 집에서는 석탄을 때본 적이 없었다. 돈이 안 드는 땔감이란 저목장이나 기차역 목재적재장의 나무껍질부스러기를 주어다 때는 것이었다. 경비원들은 안전 책임 사고가 날까 봐 저목장이나 적재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긴 겨울을 나려면 그것을 줍는 길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용케 적재장에 들어가 한 마대씩 나무껍질을 긁어 담아 짐으로 메여 오군 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년이었던지? 그러나 불을 때면 추운 겨울은 날 수 있었지만 다섯 식솔의 배가 저절로 불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밥을 먹자면 돈이 있어야 했다. 당시 아내는 양식 창고에 출근하고 있었고 나는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수업을 마치고 종자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노임만 가지고서는 다섯 식솔이 먹고 살기도 힘들었으므로 돈을 만들기 위해 우리 부부는 출근을 하는 한편 퇴근 후의 시간을 이용하여 돼지치기 등 가축사양을 벌이기 시작했다. 돈을 만들기 위해 먹이는 돼지한테도 돈은 들여야 했다. 먹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나와 아내는 쓰레기무지를 뒤지며 넝마주이 하듯 남들이 버린 감자껍질과 배추 잎을 주어다 얼리어서는 돼지를 먹이거나 닭 먹이로 했다. 때는 맏이가 갓 태어났을 때어서 아내는 애기를 업고서 짐승먹이 주이를 다녔다. 밀차에 뜨물통을 싣고 식당을 돌아다니며 뜨물 한통에 2원이나 5원씩 주고 사다가 돼지를 먹였다. 골목길에 뜨물을 쏟뜨려 길바닥이 어지럽혀지면 멀리 가서 펌프 물을 길어다 골목길을 청소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 끼니 쌀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그러면 외상으로 쌀을 사다가 밥을 지어 먹고 나중에 돼지도 팔고 달걀도 팔고 하여 그 돈으로 쌀값을 갚기도 하였다. 처음 데려다 키운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3년만에 대학에 시험 쳐 붙었다. 이는 그때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있은 큰 경사였다. 나는 아이가 너무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좁은 집에 친구들을 몇몇 불러다 “축하연”을 차렸다. 친구들은 저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기념품을 하나씩 들고 와 춤노래로 방이 떠나갈 듯 우리 집에 새로 난 대학생을 요란스레 축하해주었다. 그날 밤 새 대학생은 우리 부부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아내도 그 애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다. “사내답지 않게 울긴!” 이렇게 그애를 나무람 했지만 나도 그만 눈물 두 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우리 말 속담이 있다. 우리 민족이 자식교육을 중히 여기고 문화를 중히 여기는 우량한 전통을 잘 보여주는 속담이다. 그러나 실 생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도 늘 목격하게 된다. 적지 않은 가정들은 너무도 가난하여 허리띠를 암만 졸라매도 자식을 공부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가계마저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들이 돈을 댈 수 없어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며 대학시험에 높은 점수로 합격되었지만 농민이나 도시 빈곤층 부모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학비 때문에 대학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 결코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나라를 잃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건너온 할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아버지를 공부시켜 중학교를 마치게 했다. 중학교 졸업생이라면 그 당시 큰 인테리였는데 그 보람으로 아버지는 화룡시예술단 창시자로 활약할 수 있었고 전직 연출(감독)로 되어 장막극 로 전국 우수연출상을 수상하고 등 유명한 노래가사들을 많이 창작해 낼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3년 대기황 때 심한 병환에 시달리면서 우리 가정은 몹시 어려운 나날을 이어왔었다. 아버지가 장기환자인데다 누나까지 지병이 도지다보니 아버지의 노임은 병구완에 다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모진 고생을 다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문화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나는 대학공부를 할 기회를 놓지고 말았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5년간 중앙농업학교 통신수업을 받기도 했으나 한창 나이에 공부할 기회를 놓쳤던 일은 내 가슴에 여전히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고 한창 배울 나이에 공부를 할수 없었던 이런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나는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빈곤한 가정의 학생들을 보면 도시 그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눈에 고아나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할수 없는 애들이 발견되거나 그런 애들이 있다는 말을 얻어 들으면 무작정 그 애들을 찾아 우리 집에 데려오거나 무슨 방법을 대서든 도와주곤 했다. 아이들이 늘어나니 나의 39원 노임만 가지고서는 아이들을 학교공부를 시키기는 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때 마침 개혁개방이 갓 시작되어 개인 창업열이 한창 오를 때였다. 그때 나는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학습을 마치고 화룡시종자공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개인 창업을 해서 돈을 벌기로 마음 먹고 아내와 함께 회사에 출근하는 한편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가축사양을 벌였다. 후에는 아예 단위에 적을 남겨둔 채 노임도 받지 않고 나와 곰 사육장을 꾸렸다. 그 수입은 내 기대 이상으로 짭짤했다. 나는 그 수입을 전부 고아들 부양과 학생들 보조에 썼다.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그러니 집이 너무 비좁아 집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돈을 다 아이들 부양과 보조에 쓰다보니 1987년에 와서야 18평방미터짜리 초가집을 2000원에 팔고 시 교외에 땅을 얻어 66 평방미터 되는 벽돌집을 짓게 되었다. 이 집을 지을 때 임시 셋방에 들 돈이 없어 길가에 비닐막막 텐트를 쳐 놓고 그 안에서 살았다. 전기도 물도 공급이 안 되는 텐트 속에서 지내는 생활이란 정든 연인들이 경치 좋는 강가에 멋진 텐트를 쳐 놓고 사랑과 아름다운 추억을 엮어가는 그런 낭만과는 하늘과 땅만큼 동이 뜬 것이었다. 친척 친구들이 이러는 나를 보고 기가 막혀 자기들 집에 임시 들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들에게 페를 끼치는 게 싫어 내가 데리고 있던 고아들만 그들에게 잠시 돌봐달라 부탁하고 우리 부부는 딸 아이를 데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옹근 7개월을 텐트 속에서 지냈다. 집을 짓는데 돈이 딸려 재료를 이어대기 어려웠던 까닭에 집 짓는 일은 자꾸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뭐니뭐니 해도 빗바람 몰아치는 장마철이 견디기 어려웠다. 비가 주룩주룩 새는 캄캄한 텐트안에서 뜬 눈으로 날을 지새우는 고생이란 말 그대로 비참함 그 자체였다. 무슨 짓을 못해서 이처럼 말도 못할 고생을 사서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여러 가지로 자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간이었다. 그러다가 새날이 밝으면 모든 잡념을 다 뒤로 하고 다시 힘을 내서 집짓는 일에 뛰어들곤 했다. 아무튼 천신만고 끝에 66평방미터짜리 아담한 집이 지어져 우리는 드디어 새집들이를 하게 되었다. 나는 친척 친구들에게 잠시 맡겼던 여섯명의 고아를 모두 불러들였다. “여기가 바로 너희 집이다. 이제 너희들은 다시 떠돌뱅이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시름놓고 살면서 공부도 열심히 잘해야 한다. 다들 알겠지?” 김은실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다병한 아버지가 80여세의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집에 은실 아래로 초중에 다니는 여동생까지 달려 있어 수입 내원이 없는 집에 생활형편이란 말이 아니었다. 이제 바로 고중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김은실은 앞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앞에 길이 있기나 한지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이 일을 알게 된 나는 주동적으로 은실을 찾아가 그를 우리 집에 데려왔고 학비를 대주어 계속 고중공부를 하게 했다. 은실이는 우리 집에서 4년을 있으면서 머리를 동여매고 공부를 하여 작년에 북경교통대학에 붙었다. 입학통지서를 받은 날 은실이는 기뻐할 대신 여전히 수심어린 얼굴빛이었다. "너 웬일이냐? 오늘 같은 날 너 의례 기뻐해야 할 거 아니야? 전업이 너 마음에 안 들어 그러냐?” 머리를 가로 젓는 은실이는 무슨 말못할 사연이라도 있는듯 했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냐? 가타부타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내처 따져 물어서야 은실이는 자기의 걱정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런 게 다 아니에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병이 중하지 집은 찌그러져 금방 허물어질 것 같고 동생도 중학교에 들어갔지 하니 대학을 가도 공부가 머리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아요. 대학공부고 뭐고 아예 집어치우겠어요." 4년간 피타게 공부를 해서 어렵사리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중점대학에 붙었는데 그걸 포기하겠다니? 은실이는 두고 가는 아버지와 동생이 걱정되어 그러지만 나로서는 그러는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아내와 상의하고 은실이가 북경에 가 시름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그의 다병한 아버지와 초중 공부를 하는 동생을 함께 우리 집에 옮겨 오게 했다. 김은실은 드디어 마음을 놓고 북경으로 떠났다. 은실이 아버지와 동생은 지금도 우리 집의 성원으로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최광일은 내가 다년간 후원해준 특곤생이다. 나는 줄곧 "양민"이란 이름으로 그에게 돈을 부쳐주었었다. 내가 이 일을 극비에 부쳤으므로 그는 "양민"이란 사람이 누군지 몰라 사처에 수소문하면서 "양민"을 찾았다. 그가 많은 사람을 통해 수소문하는 과정에 점차 "의혹"의 눈길이 나한테로 집중되면서 1997년 어느 날 어느 우연한 일로 나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긴 시일 끝에 요행 나를 만나게 된 광일이는 이런 말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저는 ‘양민’이 나한테 부친 소유의 송금 통지서를 모두 복제하여 보관해 뒀어요. 저는 제가 ‘양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찾지 못한다 해도 저는 저도 역시 ‘양민’ 과 같은 사람으로 되려고 작심했습니다." 1998년 최광일은 우수한 성적으로 북경우전학원에 입학했다. 그가 북경에서 학습하는 기간에 나는 그에게 컴퓨터가 급히 수요 된다는 사실을 알고 컴퓨터를 사도록 5000원 돈을 부쳐주어 그의 학습이 영향을 받지 않게 했다. 2000년 그는 북경시 20개소 중점대학의 일본어경연에서 단연 1등을 하였으며 2002년에는 일본에 가 연구생공부를 하게 되었다. 용화향 신안촌에 사는 차영옥은 진취심이 있고 학습 성적도 우수했다. 그러나 그가 처한 가정환경은 너무도 불행했다.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장기 환자로 병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빠 또한 정신병환자였다. 불쌍한 어린 영옥이의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나는 그를 여러 모로 살뜰히 도와주었다. 1998년 그는 길림농학원에 시험 쳐 들어갔다. 대학에 보낼 때 나는 학교에 영옥이의 특수정황을 소개해주었다. 나의 소개를 들은 학교에서는 그의 학비를 면제해주는데 동의했다. 작년에 영옥이는 학업을 순조롭게 완성하고 졸업 후 한 제약공장에 들어가 근무하게 되었다. 출근한지 한 달 만에 그는 나에게 노임과 함께 편액 한 틀을 보내왔다.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학문탐구는 저의 꿈이었습니다. 저의 꿈이 우리 집의 불행으로 수포로 돌아갈 때 아버지가 다함없는 사랑으로 저의 꿈이 활짝 피어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 하늘같은 은혜를 어디 간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가정이 빈한한 학생들을 부조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 우리 글 신문인 에 나의 사적이 크게 실리었고 그 뒤 연변TV에서도 찾아와 나의 사적을 취재해 갔다. 얼마 후 이란 제하에 나의 사적이 2집 시리즈로 크게 보도되었다. 화룡시교육국의 리직퇴직 간부들이 이 보도를 보고 감동된 나머지 모금을 해가지고 쌀, 기름을 사들고 돈을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 왔다. 그들은 한구들 가득한 손자손녀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어선 안된다. 너희들의 이 아버지는 너희들의 은인이다.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자라거라. 학습을 잘해서 장차 아버지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우리는 석양에 걸음이 빠른데 너희들은 앞날이 창창한 나라의 기둥감들이다. 건실하게 잘자라서 … 그날 우리는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울었다. 나의 사업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해마다 설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입쌀, 과일 등 식품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위문을 왔으며 물만두를 가득 빚어가지고 오기도 했다. 전화로 관심과 문안을 표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내가 아이들의 곤난을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생기면 관계 부문의 일군들도 나를 찾아와 함께 해결책을 연구하기도 했다. 2001년도 관계 부처의 협력과 지지밑에 우리 부부는 개체의 명의로 화룡시희망복리원을 설립했다. 대문 기둥에 간판을 거는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 특수한 가정의 설립을 축하해 주었다. 그해 연길감옥에서 나를 교양보도원으로 특별위임을 하여 정기적으로 감옥에 가서 형기가 차 감옥을 나오는 석방인원들에게 출옥교육보고를 해달라고 했다 . 그리고 공안부문에서는 우리 희망복리원 아이들에게 집체호구를 등록해주어 고아나 출옥후 여러 가지 원인으로 호적등록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진정 자기의 안신처가 있게 하였다. 이때로부터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경제내원이 없어 공부를 할수 없는 애들을 부조하고 출옥인원들을 안치하는 일은 명실공히 나의 사업으로 되었다. 나는 그 전보다 더 바삐 돌아쳐야 했다. 고아를 수양하고 빈곤층 아이들을 도와줌에 있어서 먹고 자는 일과 학비를 대주는 일만 해주면 일이 다 끝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을 키우고 도와주면서 내가 갈수록 깊이 느끼게 되는 일이었다. 김일은 고아로서 거리를 떠돌며 걸식하던 유랑아였다. 어머니는 그를 낳자 어디론가 가버렸고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농사를 짓다가 그를 더 키울 힘이 없게 되자 그를 집에서 내쫓았다. 어린 김일이는 거리를 누비며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느 해 어느 달에 세상에 태어났는지도 몰랐다. 민정부문에서는 그에게 출생증명서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수용할 수가 없다면서 나더러 그를 키울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때 나는 이미 9명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고 있었으니 하나쯤 더 데려다 키우는 건 문제가 안 될 것이라고 민정부문의 관련일꾼들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마음을 먹고 하는 일이니 망정이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속 태울 일이 많고 돈도 엄청 들었다. 이제 한사람 더 받아 키운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당분간 대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때가 다닥다닥한 남루한 옷차림에 봉두난발을 한 어린이가 불안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마음이 아려오며 거부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수용하지 않으면 그 아이가 또다시 유랑걸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차마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를 받았다. 이 아이가 방금 왔을 때 한 가지 모병이 있었는데 저녁에 잘 때가 되면 언제나 상의로 머리를 감싸고 고슴도치처럼 온 몸을 꼬부리고 자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도 전등만 켜지면 발딱 일어나 공포에 질린 눈으로 불안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거리에서 유랑 걸식하던 그가 그 어떤 불의의 습격에 마주치었을 때 이를테면 한밤중 길가의 집 모퉁이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불안한 쪽잠을 자다가 난데없는 발길과 주먹세례를 받을 때 무의식 중 그것에 저항하는 습관적 동작임을 나는 보아낼 수 있었다. 그러는 그를 볼 때마다 나는 명치끝이 아파왔다. 이처럼 고통스럽게 비틀려져 있는 여린 심령을 제때에 교정하지 않고 치유하지 않는다면 나이가 커감에 따라 비틀린 마음도 교정 없이 자랄 것인데 그러면 그때 그의 눈에 이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 것인가? 기왕 아이를 수용한 이상 나는 반드시 아이에게 가장 깊은 정과 사랑을 주어야 하며 그로 하여금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한다. 하여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가지게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매일 저녁 그와 함께 보내면서 잠을 자도 그가 안전감을 가지도록 품에 꼭 그러안고 잤다. 6개월 동안 나는 그와 함께 잤다. 아이가 자기 나이를 모르지만 그러나 키가 겅충하게 커서 나는 그를 직접 2학년에 붙였다. 그리고 낮에 학교를 보낼 때에는 용돈을 조금씩 쥐어주어 차를 타거나 점심을 사먹게 했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또 과일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사주어 먹게 했다. 아무튼 일반 가정의 아이들이 누리는 삶을 그도 되도록 누리게 하려고 안간 힘을 다 넣었다. 석 달이 지나갔다. 이 아이는 점차 심리상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해탈되어 잠잘 때의 그 버릇을 고쳐버리는데 성공했다. 하여 다른 아이들처럼 뛰놀며 유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김일이한테는 유랑생활을 할 때부터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었다. 집에 사람이 없을 때면 나의 방에 들어와 나의 호주머니도 들췄고 다른 애들의 방에 들어가 호주머니를 들추기도 했다. 그리고는 사탕이나 과자를 사다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어느 학부형이 내가 고아라고 불쌍하다면서 돈을 주더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 줄을 감감 모르고 나는 김일이를 도와주는 이들이 하도 고마와 학교에 선생님을 찾아 감사를 드리러 갔는데 선생님은 그런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아이가 자극을 받을가봐 기회를 타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전혀 뜻하지 않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김일이가 다른 아이의 방에 들어가 한 아이의 호주머니를 들추다가 그 방에서 자는 아이가 밖에서 돌아오는 통에 그만 덜미를 잡혔던 것이다. 삽시에 온 집안의 기운이 팽팽해졌다. 나이가 많고 주먹이 센 애가 그 일을 알고 김일을 쪼지었다. 열 살도 안되는 어린 김일이는 잔뜩 겁이 나서 또 다른 애 누구누구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 다 실토했다. 김일이 이 정도로 “탄백”을 했는데도 주먹이 센 아이는 쪼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뿐이야? 아버지가 널 울집에 데려 오기 전에도 남의 돈을 훔쳤지?” 김일이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너무 배고파서…” 그러다나니 나중에 어린 김일이는 나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 다른 애들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는 애들이 분한대로 넘길수 있었지만 나의 호주머니를 털었다는 말에 애들은 치를 떨었다. “이 새꺄! 너도 사람새끼냐? 개만도 못한 놈.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 “형, 누나. 나 잘못했어. 다신 안그럴게. 제발 안 그러겠어. 엉엉…” 김일이가 손이야 발이야 비는 데도 애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이런 새끼와 한집에 살자니 낯이 뜨거워 못살겠다.” “이런 새끼는 이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 야 당장 여기서 꺼져라!” 불쌍한 어린 김일이는 그말에 그만 잔뜩 겁이 나서 형이야 누나야 하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나 다시 안그럴게. 나를 쫓아내지 마! 엉엉엉!...” 이 일을 나는 그날 연길에 회의를 갔다 오다나니 그 이틑날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 집 식구로 살고 있는 10여 명의 애들이 이구동성으로 분개를 표시했다. 만장일치로 이런 은덕도 모르고 패가망신하는 애를 어떻게 남겨둘 수 있느냐며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원래 김일에 대해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라 이번에 터진 일이 너무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아이들을 교육하는 기회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아이들의 말을 내심하게 다 듣고 나서 그들을 차분히 타일렀다. “김일이를 쫓아내자구? 너들 생각해 봐라. 걔를 쫓아내면 걔가 어디로 가겠니? 김일이는 아직 어리다. 어린 아이가 왜 잘못을 저지를 때가 없겠느냐. 너희들 잘 생각해 봐.” 이렇게 아이들을 꾹 눌러 놓고 내 방으로 돌아 왔는데 그 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나의 아들이 뒤따라 들어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손버릇 나쁘고 양심도 없는 아이를 왜 그냥 남겨두려고 합니까? 이 애를 남겨두면 다른 애들도 얼굴이 깎인다고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이들이 다 벼르고 있어요.”라고 나를 설복하러 들었다. 다른 애들이 김일이를 쫓아버리자고 할 때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친 아들이란 놈이 이런 말을 할 때 나는 천둥같이 화를 내었다. “너희들은 양심들을 어디다 내팽겨 버렸니? 너는 애비에미 다 해주는 밥을 먹고 근심걱정 없이 자랐지만 김일이는 아버지 어머니 다 없는 고아다. 이제 열살도 안되는 걔를 내쫓으면 걔는 어디로 가야 하냐? 너 인정머리 있는 놈이냐? 너한테 걔를 쫓아 낼 권리가 있냐? 나가겠으면 네가 나가라! ” 내가 화를 몹시 내는 바람에 아이들 열몇이 문밖에 와서 무슨 일이 생길가봐 조마조마해서 모여서 있었다. 그 기척을 알고 나는 아이들을 모두 들어와 앉으라 하고 김일이도 불러오게 하였다.아이들이 분개해서 쏘아보는 가운데 김일이는 고개를 푹 떨구고 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얼굴은 언녕 눈물 범벅이 되었다. 나는 기일이를 나의 옆에 끌어다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딱 그쳐. 남자애라는게 울면 못쓴다. ” 그러면서 그 애를 비평할 대신 칭찬을 해줬다. “내가 보기엔 너에게 사랑스러운 점이 있다. 너는 나이가 어리지만 어른들처럼 맛있는 걸 사서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던거지?” 김일이는 내 말이 너무 뜻밖이었던지 더 크게 흐느끼며 재빨리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래, 그게 너에게는 큰 쾌락이었지. 넌 종래로 혼자 사먹는 법이 없이 그냥 다른 애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잖아?” 김일이는 더욱 크게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런데 어느 애가 갑자기 큰소리로 “걔는 훔친 돈으로 산거에요. 아버지 호주머니까지 털어낸 양심없는 나쁜 애에요!”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못써. 김일이는 어머니 얼굴도 못보고 자랐고 자기가 어느 날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의지 가지 없이 불행하게 자란 애들이다. 배가 하도 고프니까 물건을 훔쳐 먹을 수 있지 않니? 그러다 그것이 버릇이 될 수도 있지. 그게 어디 아이들 탓 뿐이겠냐? 우리 어른들한테도 책임이 있다. 물론 훔치는건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어린 애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서 함부로 쫓아내야 한다면 얘가 정말 나쁜 아이가 될 수 있잖겠니? 너희들 정말 김일이를 나쁜 아이로 만들고 싶니? ”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이쯤 되자 나는 아이들의 기분전환을 시켜볼 요량으로 한마디 농담을 했다. “수호전 너들 봤지? 양산백 호걸들이 부자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이야기? 김일이가 그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양산백 호걸들처럼… ” 그런데, 나는 아이들의 기분 전환을 시키려고 농담삼아 한 말인데, 그만 내가 실수를 한 것이다. 어느 앤가 나의 말을 중단시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진 부자가 아니잖아요? 돈을 벌어도 다 우리를 위한 거잖아요?” 그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애들도 다투어 말했다. “아버진 택시 타는 돈도 아까워 그냥 삼륜차를 타시지 않아요? 돈을 절약하느라고 술담배도 다 끊으시고 어머니 병치료를 위해 상해에 가실 때도 그 먼 길을 침대차도 안 타시고…식사 때도 늘 우리가 다 먹은 다음 어머니와 함께 우리가 남긴 밥과 채를 자시지 않아요? 우리가 다 먹어 남은 밥이 없으면 라면도 끓여 자시고 때론 굶기도 하시잖아요?...그러면서도 우리한테는 소비로 하라고 달마다 소비돈을 주시지 않아요?... ” 이 애는 말을 하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방안의 애들이 모두 엉엉 울어대서 방안이 그만 울음바다가 돼버렸다. 그 통에 나도 그만 눈물을 흘려버렸다. 그 날 일이 있은 후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고 서로간에 더욱 관심하고 아껴주면서 사이가 훨씬 가까와졌다. 김일의 진보는 더욱 눈에 띄게 알리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었다. 아이들에게 먹고 잘 곳이 있게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것은 절대 아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참된 인간으로 키우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먹고 입고 자는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수 있는 일이지만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돈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돈을 잘 못 쓰다가는 오히려 아이들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참된 인간으로 키우자면 진정 아이들을 사랑하는 뜨겁고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시시각각으로, 처처에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장차 사회건설에 적응할 수 있는, 이상이 있고 삶의 올바른 목표가 있는, 도덕적 자각이 있고 진취심과 밝은 꿈이 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적 노력을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으로 키워내는 일, 적어도 그 기초 작업을 잘 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작업은 아이들의 실정에 맞게 해야지 처음부터 요구를 너무 높여도 안 되었다. 실제로 아이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나의 사업에서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일이었다. 그들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이상이 있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한 데 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이면 애들을 데리고 화룡시 13용사기념비, 청산리항일유적지에 가서 혁명전통교양을 하였으며 또 연변과기대를 견학하여 아이들의 나라와 고향을 사랑하고 과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주었다. 자금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아이들에게 해마다 각종 신문, 간행물을 1000여원어치 주문해서 짬짬이 보게 하였고 다달이 독서모임을 한 차례씩 열어 독서심득을 나누게 했다. 아이들의 학교에서의 학습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자주 학교를 찾아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학습을 열심히 하는 아이는 제때에 칭찬을 해주고 고무를 해주었으며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 대해서는 제때에 타일러 잘못을 깨닫고 고치도록 했다. 김철희는 두도진 신민촌의 장애인가정에서 온 애인데 내가 수양하여 공부시키는 애이다. 이 애가 한번은 담배를 피우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었다. 학교지도부에서는 철희더러 전교 사생들 앞에서 자기검사를 하도록 요구했다. 철희는 전교 사생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구기는 일을 받아 당할 수가 없어 집으로 도망쳐와 행장을 꾸려가지고 농촌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는 철희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얘야, 네가 고중공부를 할수 있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냐? 몸이 불편하신 너의 부모님들은 네가 여기서 열심히 공부해서 꼭 출세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계신다. 네가 이 꼴로 집으로 돌아가면 너희 부모님들이 얼마나 실망하시겠냐? 요만한 좌절도 이겨나가지 못하는 애가 당당한 남자라고 자부할 수 있니? 이래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부모에 효도할 것이며 앞으로의 삶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여러 모로 리치를 따져주자 드디어 철희는 자기 잘못을 느끼고 학교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철희가 마음을 돌려먹자 나는 즉시로 학교 당국을 찾아가 철희의 가정상황을 소개하고 학교에서 철희에게 관심을 돌려 줄 것을 부탁했다.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이때에야 내가 철희의 친부모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내가 철희에 대해 이처럼 관심하는데 몹시 감동되어 했다. 결국 학교에서는 철희에게 주려던 처분결정을 철회했다. 철희는 학교에 돌아간 후 학습에 열중하여 종당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춘외국어학원에 붙는데 성공했다. 지금 철희는 이미 대학을 마치고 안휘성 황산시의 한 여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때 화룡시내에서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PC방 중독에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엄마, 학교 다녀올게요.” 이렇게 말하고 집을 나간 뒤 곧바로 지하 PC방에 가서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퀭한 눈동자로 몇 시간씩 게임에 빠지는 자녀들 때문에 학부모들이 모진 애를 다 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무심히 넘길 수 없는 나는 우리 집에는 PC방에 다니는 애들이 없는지를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알아본 결과 우리 집 몇몇 애들도 밤마다 PC방에 다닌다는 것이 아닌가? 무척 놀란 나는 즉시 그 애들을 불러 놓고 단단히 다짐을 땄다. 그 아이들은 이제부터는 PC방에 가지 않겠노라고 굳게 결심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아이들을 매일 저녁 열시 전에 자도록 하고 열두시 쯤 아이들의 신발이 제대로 있나 검사를 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 시름을 놓았었는데, 어느 날 열두 시에 아이들이 자는 방을 일일이 돌며 검사했더니 웬걸, 두 녀석이나 자리에 없지 않는가? 신발은 분명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는데 이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했지? 그날 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의 PC방을 한집한집 참빗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두시간 만에 찾아 들어간 담배연기 자욱한 한 PC방에서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한 채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며 게임에 푹 빠져 있는 우리 집 녀석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이 녀석들은 내가 매일 신발검사를 한다는 것을 어느 결에 눈치를 채고 신발을 제 자리에 얌전하게 앉혀 놓는것으로 나를 속여넘기고 창문으로 해서 감쪽같이 새어버린 것이었다. 그날 밤 녀석들을 집까지 끌어다 놓은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녀석들더러 우선 제 방에 가서 자게 했다. 이틑날 저녁 나는 PC방 출입이 잦은 녀석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교육을 했다. --너들 생각해 봐라. 애비를 속이고 밤 열두시에 창문으로 빠져 세시, 지어 네시까지 담배연기가 매캐한 PC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정신 없다. 매일 이렇게 몸이 혹사당하니 이틑날 공부에 정신집중이 되겠냐? 그래 일단 PC방 중독에 걸리면 심신이 다 망가지는 걸 몰라? --친부모를 일찍 여의고 불쌍히 자란 너희들이 자기 운명을 자기로 개척해야 할거 아니냐? 공부란 단순히 공부하기 위해 하는거 아니야. 자기 운명을 앞으로 자기로 열어나갈 수 있는 기능을 닦아 사회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당당한 이 사회의 주인으로 자라나자면 오늘 어릴 때부터 해로운 유혹을 스스로 물리칠 줄 알아야지. --너희들이 잘 자라줘야 이 아버지도 기쁜거다. 너희들 잘 자라주지 않고 하나하나 심신이 망가진다면 내가 그래 시름을 놓을 수 있겠니? 나는 녀석들더러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속으로 우러나오는 반성을 해야지, 맘에도 없는 반성으로 또 한번 아버지를 속여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하고 두 녀석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했다. “알고 있다니 시름을 놨다.” 나는 왜 목소리가 그리 낮으냐고 녀석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고 웃음띤 얼굴로 녀석들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는 전체 모임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이상, 전도와 운명에 대한 교육을 하고 모두들 결심서를 쓰도록 했다. 전반 교육과정에 나는 위협과 공갈 같은 저질적인 교육방법은 쓰지 않았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나는 PC방 출입이 비교적 잦았던 녀석을 내방에 데려다 같이 잤다. 그 후 우리 집 아이들은 다시는 PC방 출입을 하지 않았고 평소보다 공부에 더 열중을 하였다. 아이들에게 남을 관심하고 도울 줄 아는 품성을 키워주기 위해 나와 아내는 매년 청명절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열사비 앞에 가서 벌초를 하였으며 친인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제물을 사가지고 친인의 묘소를 찾아가 제를 지내게 하였다. 명절이나 휴가에는 아이들과 함께 홀로 계시는 노인들을 찾아가 마당 청소도 해드리고 빨래도 해드리고 창문유리도 닦아드렸다. 아이들에게 우리 말 예절과 한어예절도 가르쳐 아침 저녁으로 집안 어른들과 동네어른들에게 인사를 할 줄도 알게 하였다. 사스로 온 나라가 바짝 긴장하던 때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이닥쳤을 때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관심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키워주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스로 불행을 당하고 있는데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내놓고 집안에서 토론을 벌였다. “우리도 사랑의 헌금을 해야죠.” 형기가 차서 우리 집에 와 있는 청년이 자기의 소비돈에서 선참 50원을 내놓았다. 그가 솔선수범을 하자 너도 나도 다투어 호주머니를 털었다. 5원, 10원, 20원…이렇게 모은 성금이 800원 되었다. 우리 구역 한 집에 가스폭발사고가 났을 때도 부상자치료를 돕기 위해 우리 애들은 쓰지 않고 모여두었던 소비돈을 모아 모두 280원을 만들어 의연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아이들은 사랑의 마음을 우썩우썩 키워갔다.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 날이나 설날이면 집안에서 송구영신행사를 가지곤 했다. 그해 성탄절에도 우리 집 10여명 식구들은 선물들을 준비해놓고 오락활동을 벌이고 잛은 글짓기 시합도 가졌다. 과거, 현재, 장래란 세 단어를 가지고 짧은 글 짓기를 하였는데 김일이가 글 두개를 지어 단연 1등을 했다. 그가 지은 글은 이러했다 과거 나는 집도 없이 떠도는 유랑아였어요. 그러나 현재 나는 따듯한 가정이 있는 학생이예요. 장래 나는 훌륭한 경찰이 되어 나쁜 사람과 맞서 용감히 싸우겠어요. 그리고 한어로도 글을 하나 지었다 去我有家,在我有)暖的家,e我要孝敬88和。(과거 나에게는 집이 없었어요. 현재 나에게는 따뜻한 집이 있어요. 장래 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효도할래요.) 이런 스스로 교육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레 밝은 마음을 갖추게 되었다. 올해 소학교 5학년생인 김일은 지금 반급의 중대장이고 남을 잘 돕고 노동 잘하고 하여 작년에 학교에서 최우수 진보상과 노동열애상을 탔다. 6.1국제아동절 날에는 자기도 불우한 학생이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자기가 입던 옷도 벗어주고 내가 준 소비돈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자기보다 더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학교선생님을 통해 아이들이 셈이 다 들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매양 격동되곤 한다. 나는 많은 고생을 감내하면서 밤낮 그들을 위해 쏟은 심혈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너희들은 마침내 앞으로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너희들에게 마침내 자기의 인생 이상과 삶의 목표가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보람감에 기쁜 감정과 더불어 가슴이 후련하고 뿌듯해났다. 이처럼 다년래 나는 선후로 고아 10여명을 수양하면서 그들더러 가정과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하였으며 그들의 건전한 성장에 평탄한 길을 깔아주었다. 30여 년래 학생후원에 돈이 얼마 들어갔는지는 나 자신도 계산해낼 방법이 없다. 매번 학교에서 개학을 할 때면 아이들의 학비문제가 나의 주요한 걱정거리로 된다. 아이들을 위해 정부 관련부처와 학교를 뛰어다니며 학비감면문제로 해당일군들과 상의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신경이 여간 씌우는 게 아니다. 그러나 매번 아이들이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을 때면 나와 아내는 친자식이 대학에 붙었을 때와 꼭 같은 희열에 푹 잠기게 되는데 이 때면 노고로 인한 모든 고달픔과 번뇌가 씻은 듯 말끔히 가시어지고 모종의 성취감으로 정신이 부쩍 난다. 1998년 10월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지면서 목으로 밥을 넘기지 못했다. 병원에 가 검사를 해보니 의사가 하는 말이 간암후기가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마른 하늘에 생벼락을 맞은 듯 앞이 캄캄해났다. 과로로 인해 아내를 이 지경이 되게 만든 내가 용서 못할 죄인으로 느껴졌다. 1979년 나와 채명자는 결혼해서 18평방미터짜리 집에서 지극히 어렵게 살아왔다.아이를 낳기도 전에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면서 돼지를 먹여 판 돈으로 아이들을 학교공부 시켰다. 첫 아이를 낳을 때 나는 30원 되는 병원 주원비도 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 형편에서도 우리는 자기 집을 출옥한 인원이 사회로 진입하는 중계소로 삼고 그들을 데려다 밥을 먹이고 그들에게 일거리를 찾아주기 위해 동분 서주했다. 이러는 나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내 신랑”이라고 하면서 불평 하나 없이 나와 모든 고락을 같이 해온 아내!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생계를 돌보느라, 내가 하는 일을 돕느라 과로로 불치병에 걸린 아내!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에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내만은 살려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즉시 상해 병원에 가 확진을 하고 시급히 치료를 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리고 즉시 행동에 옮겼다. 상해로 떠나는 날 내가 수양했던 고아들과 학생들이 모두 우리를 바래러 왔다. 그 애들에게 무슨 돈이 있으랴? 하지만 그들은 우러나오는 진심에서 자기 몸에 있는 돈을 다 털어냈다. 10원이 있는 애는 10원을, 5원이 있는 애는 5원을, 2원이 있는 애는 2원을 내놓았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꼭 병 치료를 잘해서 빨리 돌아와야 돼요. 우리는 모두 어머니를 한번 잃었는데 또 잃을 수는 없어요. 우리는 다 어머니가 돌아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릴 거예요." 이 광경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모자간이 아니면서도 모자간을 초월하는 사랑만큼 가슴 치는 정이 또 있을까? 아내는 떨리는 손으로 병 치료에 쓰려고 준비했던 만원 돈에서 천원을 내여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들의 정과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우리는 상해에 도착했다. 하늘도 눈이 있는가 보다. 진일보의 검사를 거쳐 아내의 암증의혹은 배제되고 종양으로 확진이 내렸다. 몸속에 지금도 종기가 6, 7개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나와 우리 아이들은 모두가 일장 악몽에서 깨어난 심정이었다.0 아내에 대해 조금 시름을 놓게 된 나는 내가 이미 푹 빠진지 오래인 사업속으로 다시 빠져 들어갔다. 한번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맞닥쳤다. 진래감옥의 초청을 받고 가 감옥수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내가 30년 전에 후원해주었던 주인집 박씨의 맏아들을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를 통해서 안 일이지만 그의 아버지 박씨는 출옥후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이미얘기를 한 바이지만 그때 맏이는 학교에서 단지부서기를 했었는데 졸업 후 어쩌구러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되었다. 감옥수의 아들로 고생스레 자라온 그였지만 평생 농촌에서 땅을 뚜지며 묵묵히 살아나가야 할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자기의 기막힌 신세를 한탄하며 모대기던 그는 시내에 들어가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혈혈 단신으로 어느 큰 도시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어느 우연한 기회에 남의 돈을 아주 쉽게 자기 손에 넣었다. 그때 학교에서 단지부서기를 할 때 노래처럼 부르던 이상과 인생목표는 이미 그의머리속에서 까맣게 사라져버린지도 오랬다. 그는 쉽게 훔친 돈뭉치의 유혹을 부리치지 못하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을 훔친 다음 손을 씻고 사람답게 살아가겠다는 범죄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는 이런 마음을 사려먹었을 때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얼마 안 돼 그는 절도죄를 짓고 진래감옥에 들어갔다. 진래감옥에서 강연을 하는 나를 알아본 박모는 몹시 놀랐다고 했다. 이삼십년 전 자기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었던 사람을 강산이 몇 번 변한 오늘 자랑스러운 곳도 아닌 감옥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부끄러워 나를 만나지 않으려 했다고 실토정했다. 그런데 부끄러운대로 나의 도움을 받고 싶더라면서 주동적으로 나를 찾은 경위를 나중에 내가 그와의 면회를 마치는 순간에 밝히는 것이었다. 면회실에서 우멍한 눈으로 나를 일별하고는 참괴스레 머리를 돌리고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의 눈물은 끝이 없었다. 그 눈물은 감동의 눈물이기에 앞서 부끄러움의 눈물이자 자기를 도와준 사람의 희망을 저버리고 굽은 길에 들어선 못난 자기에 대한 뉘우침의 눈물이요 회한의 눈물이었으리라. 그도 한때는 학급을 이끄는 학생대표였지 않았는가? 그때 그 열정과 호기는 어디로 갔어? 대관절 무슨 유혹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냐? 무슨 유혹이? 배우기 싫어서? 일하기 싫어서?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난 20여년간 그에게서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나는 불현듯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리에서 그는 그 이상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나도 말을 몇 마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낱낱이 읽고 있었다. 작별하면서 나는 "새 출발 준비를 열심히 해! " 하고 한마디를 했다. 그는 말은 없이 그저 머리만 거듭 힘 있게 끄덕여 보였다. 그 후에 나는 수차례 그를 면회하러 갔다. 그도 감옥에서 열심히 노동개조를 했다. 개조 표현이 좋아 1998년 그는 드디어 2년 앞당겨 출옥하였다. 하지만 40을 바라보는 그는 어디 갈 곳마저 없었다. 나는 그를 우리 집에 데려다 잡일을 시켰다. 그 후 나는 그에게 대상도 소개해주고 혼례식도 치러주었다. 하여 그에게는 포근한 가정이 있게 되었다. 그 후에는 외국노무를 나가겠다고 하여 수속을 해주었다. 한번은 그한테 돈이 급히 수요 되었다. 갑자기 어디 가 꾸려 해도 꿀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나는 남몰래 아내의 의약비용에서 2000원을 잘라내어 그에게 주었다. 얼마 전 나의 아내가 한국으로 갈 때 그는 2000원을 아내의 손에 쥐어주면서 "이전에 아저씨가 저한테 뀌어준 거래요."라고 했다. 아내는 "아저씨가 뀌어준 돈은 지금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우선 조카 살림을 춰 세우고 나중에 봐." 아주머니의 이해와 지지 앞에서 아주머니의 몸속 간장에 아직 혈관종기가 다섯 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감동된 나머지 아주머니를 덥석 그러안고 말 한마디 못하고 눈물만 좔좔 흘렸다. 지금 그는 연길시의 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가 세 식구가 본분을 지키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몇달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 잘 있느냐 무슨 어려움은 없느냐고 문안을 한다. 남윤송은 타인상해죄로 17년 유기형을 언도받았는데 나의 도움 밑에 개조에 노력하여 2003년 2월 앞당겨 풀려나왔다. 출옥 후 일시 거처할 곳이 없자 나는 그더러 우리 집에 와 있게 하였다. 그는 심한 폐결핵으로 앓고 있었는데 당시 우리 집에는 내가 데려온 가난한 애들이 6명이 들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감염이 될까봐 걱정이었다. 생각 끝에 그에게 단독 방을 하나 내주었고 아내도 따로 그에게 식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매번 식사를 끝내면 식기를 끓여서 소독을 했다. 그의 병이 깨끗이 완치 될 때까지 견지했다. 그러나 생활상의 관심과 병에 대한 치료만으로는 남윤송의 "사상병"을 퇴치하기에 부족했다. 사회상에서 기시를 받는 일이 내키지 않아 그는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다. 하루는 남몰래 애꿎은 술만 축내면서 한밤중이 되도록 자지 않고 속에 가득 깔려있는 울분을 쉼 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타이르고 말렸으나 그는 듣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나를 쥐어흔들면서 내가 자기의 고충을 모른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는 키꼴이 1.93미터나 되는 헌걸찬 사내인데 반해 나는 키가 1.58미터밖에 안 되는 왜소한 몸이어서 근본상 힘센 그를 말려내는 재간이 없었다. 그한테 이리저리 밀치어 내 몸 여러 곳에 멍이 들었고 다리는 어디에 다쳤는지 피까지 흘렀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냥 설득작업을 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우선 네가 사회를 위해 해놓은 일이 뭔가를 생각해야지.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루기 마련 아니야? 남들이 왜 너를 차별시 하겠냐? 우선 남들이 널 차별시하고 깔본다고 탓하기에 앞서 네 자신이 차별시 당한 짓을 한 게 아니야? 네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자기절로 꿋꿋이 일어나야 한다. 너 오늘 이런 꼴로는 백년가도 사람들에게 존중 받을 수 없다. " 그날 마침내 정신을 차린 그는 나를 붙들고 울면서 "나는 정말 무용지물입니다. 나에게 과연 차별시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건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그런 날이 안 올 리 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다시는 자기의 삶에 비관하지 않고 일마다 열심히 했다. 병이 완치되자 그는 천진에 가서 일자리를 찾았다. 얼마 전에 그는 천진에서 전화를 걸어왔는데 회사에서의 사업상황을 자세히 전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몸은 여기 천진에 살고 있지만 화룡의 나의 집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화룡의 집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있는 집입니다. " 그의 전화로부터 나는 그의 꽁꽁 얼었던 마음이 완전히 풀렸음을 폐부로 느끼었고 그의 앞날이 창창하기를 기원해마지 않았다. 이씨는 상해죄로 8년 유기형에 언도된 사람으로 돈화시 추리구 감옥에서 복역했었다. 그더러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사회에 돌아오도록 나는 늘 감옥에 가서 그를 면회하군 했다. 면회 때마다 마음속 얘기를 나누면서 열심히 개조를 하라고 고무 격려해 줬고 과학기술 도서와 문화서적도 자주 보내주어 장래 출옥한 후 사회에서 일을 찾는데 기초를 닦게 했다. 이씨가 향기가 차 석방된 후 경제수입이 없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나는 만원을 내서 목기공장을 꾸리도록 도와주었다. 몇 년간 경영을 열심히 잘한 보람으로 공장은 경기가 갈수록 좋아져 지금 이씨는 이미 백만 자산을 갖춘 민영기업가로 되었다. 장청학이란 청년은 상해죄로 유기형 7년에 언도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한번은 감옥에 가 보고를 할 때 특히 그를 보러 간적이 있다. 그 때 장청학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세상을 떴지 내가 이 모양이지 삶이란 것이 이제 나에겐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 범인이 앞으로의 생활에 신심을 잃는다면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며 새 출발을 할 결심과 용기마저 잃게 된다. 복형인원에게 있어서 이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이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낙망할 이유가 없어. 신심을 잃지 말고 열심히 개조를 해. 너 원하기만 한다면 출옥 후 나를 찾아와라.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 나의 말을 들은 그는 삶의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가다듬었다. 그는 마침내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감옥에서 열심히 일하며 개조의 노력을 기울였다. 개조 표현이 아주 돌출했으므로 그는 2년 앞당겨 석방되었다. 그가 출옥하는 날 나와 아내는 새 옷을 사가지고 감옥으로 그를 마중 갔다. 식당에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고 택시를 내서 그를 데리고 연길시내를 한 바퀴 구경시키면서 그 사이에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느껴보게 했다. 그는 감동되어 이렇게 말했다. "저를 믿는다면 저더러 이 경리 집에 남아 일하게 해주세요." 나는 정말 그를 우리 집에 남겨 매달 600원 노임을 주면서 그에게 할 만한 일을 맡겼다. 감옥에서 나오면 어떻게 살아나갈까 무슨 나에게 차례질 일감이나 있을까 걱정이 많았던 그는 일감이 생기고 생활이 보장되자 정서도 매우 좋아졌고 일을 해도 자신감에 넘쳐했다. 어느 한번 나는 연길감옥에서 보고를 할 때 형기가 거의 끝나가고는 있으나 돌아갈 집이 없는 왕모의 사정을 알고 왕모가 석방되는 날에 주동적으로 감옥까지 찾아와서 왕모를 나의 집에 입적시켰다. 또한 왕모에게 인력거를 사주어 왕모의 생계문제도 해결해주었다. 절도범죄자인 주모는 만기석방 된 후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나는 두말없이 사법부문과 향정부에 찾아가 주모에게 농사에 필요한 생산대부금을 해결해주었다. 장춘에서 농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또 주모에게 여비를 대주면서 박람회에 참가하여 치부의 길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최근 나는 또 3명의 형기가 차 출옥한 석방인원과 원조커플이 되었다. 그중의 둘은 갈 곳이 없는 무의탁자이다. 그들에게 장사를 해보라고 돈 만원을 뀌어주면서 "바른 길만 걷는다면 어느 때든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들도 노력을 아끼지 않아 장사가 꽤 잘 되고 있다. 이처럼 30여 년래 나는 시종 변함 없이 이른 바의 많은 "불량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교양하는 사업에 많은 심혈을 기울려왔으며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돌려세웠다. 내가 도와준 청소년 치고 다시 죄를 짓고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이 점을 다시 없는 자랑으로 생각한다. 몇 년래 나는 초청을 받고 여러 번 연변 자치주내 각지를 돌면서 사적보고를 하였다. 작년에 연길감옥의 초청을 받고 곧 출옥하게 될 석방인원들에게 강연을 한차례 하였는데, 그들은 나의 보고를 듣고 모두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어느 하루는 박문길이라는 청년이 우리 집에 찾아 왔는데 그는 자기는 최근 연길 감옥에서 출옥한 자로 감옥에서 나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당신이 보고에서 말한 그 일들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보나마나 당신은 허풍 치는데 불과하지요. 오늘 이 세상에 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 많은 고아와 빈곤한 학생을 정말 수양하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오늘 이 집을 찾아온 겁니다. " 이어 그는 도전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마음이 그렇게 좋다면, 나를 수양할 수 있다고 지금 감히 답복 줄 수 있습니까? " 나는 주저 없이 말을 받았다. "안 될 거 없소. 원한다면 지금부터 우리 집에 머무르오. " 그는 말한 대로 우리 집에 머물러 살았다. 그가 우리 집에 머무른 시간은 십여 일간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보고 이런 말을 했다. "이 원장님, 이 원장님한테 두 손 들었습니다. 당신이 실지 한 일은 당신이 말한 것에는 비교가 안 되게 훨씬 더 많더군요.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직접 내 눈으로 보려는 것이었는데, 지금 나는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분이고 훌륭한 분입니다. 이 사회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몇 분만 더 있어도 좋을텐데…"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보시다시피 나는 몸이 튼튼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기서 고히 이원장이 끓여주는 밥만 먹고있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가거든 그 자리에 가난한 아이 하나를 더 받아 기르세요. 나는 꼭 당신을 따라 배워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가겠습니다. 후에 능력이 될 때면 꼭 와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방탕한 아이의 개심은 금주고도 못 바꾼다는 속담이 있다. 나는 박문길과 내가 도와주었던 모든 "방탕아", "문제아"들이 꼭 자기의 앞길을 잘 헤쳐 나가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그들에게 대량의 심혈을 몰부었을 뿐만 아니라 대량의 자금도 쏟아 부었다.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문철은 돈 많은 부자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확실히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1974년부터 경제적으로 고아와 빈곤학생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들을 도와주려면 반드시 자금이 있어야 했으므로 나는 이 문제의 해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나는 1985년에 회사의 직을 보류한 채 노임도 받지 않고 나와 자체로 돈이 될 만한 일들을 여러 가지 벌렸다. 돼지사양도 하고 점포도 차리고 식당도 경영하면서 자금누적도 얼마간 했었다. 2001년에는 종자공사 경리 직을 그만두었다. 후에 나는 곰 20여 마리를 치고 샤워실도 경영하여 해마다 근 1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그간 내가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지 않고 빈곤한 학생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석방해제인원들을 여러모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 나에게는 100만원을 웃도는 자금이 있을 것이며 이미 큰 부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전히 비교적 가난한 상태에 있다. 그것은 내가 다년간에 걸쳐 번 돈을 모두 고아, 빈곤학생, 장애인, 그리고 석방해제인원들을 돕는데 썼기 때문이다. 한번은 아내가 감개에 젖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양주가 긴긴 세월 적어도 별장 한 채와 고급승용차 한대는 잃어버린 것 같네요." 그러는 아내를 보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선물한 것’이요. ‘잃어버렸다’와 ‘선물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요. ‘잃어버렸다’는 것은 제대로 지키지 못해 누군가가 우리 몰래 가져갔다는 것이고 ‘선물했다’는 것은 우리가 자원해서 내놓은 것이고 기여한 것이 아니겠소! 이런 명세를 구구히 따질 필요야 없지. 물론 이런 일들을 하노라니 우리에게 희생이 있게 되고 우리 살림이 조금 고달파진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오. 우리는 조금 고달프지만 그 대신 의지 가지 없는 고아들이 의탁이 있게 되고 돈 없는 학생들이 대학 꿈을 이루고 방탕아 문제아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되지 않았소? 이 큰 명세는 따져야 하오. 세상에 이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어데 있소?" 나는 아내에게 또 이런 말을 했다. "기왕 이 길을 선택한 이상 이 길이 아주 어렵다 해도 후회 없이 끝까지 걸어 나가야 하오." 어떤 이들은 나를 바보라고 말한다. 바보라도 좋다. 나는 어려서 모진 고생을 다하며 자랐다. 오늘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지지리도 못살던 지난 날을 깡그리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나에게 능력이 있다면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이것은 철칙으로 우리에게는 개인의 이익을 옴니암니 따져야 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내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상당히 큰 대가를 치른 것은 사실이다. 우리 가정 식구들은 늘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돈 한푼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딸이 고중을 다닐 때도 매 주 돈 5원씩만 소비돈으로 주었고 아들이 소학교를 다닐때도 이틀에 50전 주었을 뿐이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는 담배와 술을 끊어버렸고 친구들이 가지는 모임에도 웬만하면 가지 않았다. 가라오케 같은 고소비 장소에는 더구나 드나든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우리 집은 아이들이 먼저 밥을 먹고 나서야 우리 어른들이 비로소 밥술을 든다. 아이들이 다 먹고 나면 어른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도 있다. 어른이 좀 굶더라도 친부모의 사랑을 너무 일찍 잃고 자란 이 애들을 굶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시종 나의 생각이었다. 20여 년래 우리 네 식구는 종래로 단독으로 지낸 적이 없으며 우리 집 식구끼리 명절을 쇤 적도 없다. 우리 집에는 자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택시도 마음대로 타지 못한다는 제도가 있다. 나도 물론 이 제도를 준수한다. 한번은 시에서 회의를 하다가 집에 급한 손님이 와서 급히 귀가해야 하였다. 택시를 타면 5원이 들었고 3륜차를 타면 1원이면 집까지 갈수 있었다. 하여 삼륜차를 불러 탔는데 마침 그 인력거군은 용정에서 온 사람으로 본지에서 인력거를 몰려니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꺼림칙해서 우리 화룡으로 와서 인력거를 모는 거였다. 그런데 이 분은 아마 텔레비전에서 나의 사적을 본 모양, "며칠 전 텔레비전에 나온 분 아닙니까? 참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하시는 훌륭한 분이신데 어찌 이런 초라한 차를 타시는지요? 좋은 일을 말하기야 뭐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실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집에 이르러 돈 1원을 내니 그분은 "선생님이 저의 차에 앉으신 것만 해도 너무 영광스러운 일인데 어찌 돈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기어이 받지 않으려 했다. 기차를 타도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는 침대차에 앉지 않는다. 북경, 장춘, 상해, 사천 등 먼 곳으로 가도 좌석 표를 끊어가지고 앉은 채로 자면서 먼 거리를 줄이곤 했다. 때때로 조용히 생각을 하다보면 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감을 느끼게 된다. 나의 아내는 중병이 있는 몸임에도 훌륭한 치료를 받을 대신 종일 나와 함께 고아들과 빈곤한 학생들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나의 두 자식도 자랄 때 우유 한통 못먹고 자랐다. 좀 큰 뒤에는 나를 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다. 때로는 나도 어떤 억울함을 당하여 마음의 고통에 모대기고 분하고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지는 못하고 자기 자식에게 화풀이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의 자식들은 용케도 참아내고 묵묵히 견뎌 내었다. 나의 딸 이춘이는 올해 23 살이다. 춘이는 어릴 때부터 줄곧 내가 수양하는 아이들, 빈곤한 아이들과 생활을 함께 했으며 나를 도와 나이가 자기와 같거나 자기보다 더 큰 아이들을 돌보군 하였다. 매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를 도와 곰을 먹이고 상점경영을 돕곤 했다. 말하자면 나의 사업에서 좌우 팔이 되어주었다. 작년에 그가 한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떠나갈 때 춘이는 두 눈을 깜빡이며 "아빠, 나한테 기념품을 사주지 않을래요?" 하고 물었다. "너 가지고 싶은 게 뭐지?" "MP3. 사주실래요?" "그거 하나에 얼마씩 하는데?" "600원 하는 것도 있고 1000원씩 하는 것도 있어요. " 나는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런 말을 했다. "얘야, 우리 집은 오랫동안 간고분투 정신을 버리지 않고 이어왔다. 이 전통을 잊어서야 되겠니? 너 우선 한국에 가서 공부를 시작해라. 그러다 그것이 정말 수요되거든 자기 절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하나 사든지 하는 게 좋지 않겠니? " 딸은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유감을 남긴 채 한국으로 떠나갔다. 기실, 나의 딸은 나를 따라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는데 출국을 하면서 기념으로 MP3 한대 사달라는 건 조금도 분에 넘치는 요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집에 아직 돌봐줘야 할 어려운 아이들이 10여명이나 있는데 그들을 생각하면 가계계산을 꼼꼼히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는 이처럼 각박하면서도 의지 가지 없는 고아나 가정 살림이 어려운 학생들이나 석방해제인원들이나 홀로 사는 노인, 지체장애인과 같은 약세군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씀씀이가 대범했다. 장홍란은 내가 수양한 빈곤학생인데 작년에 동북사범대에 시험 쳐 붙었다. 그를 대학에 보낼 때 나는 그에게 CD기 한대를 사주었다. 그의 언니가 출국유학을 갈 때 돈이 모자라니 나는 비싼 이식으로 돈 3만원을 꾸어 그를 출국유학 시켰다. 매년 설이 되면 나와 아내는 위문품을 가득 사가지고 독신노인, 지체장애자와 곤란 호들을 한 집 한 집 방문하며 그들을 위로했다. 수년래 나는 선후로 여러 명의 빈곤학생에게 컴퓨터와 CD기, 그리고 기타 생활용품을 사주었으며 석방해제인원들에게 장사를 하라고 자금을 대주었으며 고독한 노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식품이나 생활용품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든 자금이 평균 해마다 만 여원어치 되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 친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낳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부모가 어데 있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하는 데는 나로서의 도리가 있다. 나의 딸이 이 아비한테서 MP3을 선물 받지 못한데 대해 조금은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의 딸은 어려서부터 친부모의 품에서 자라면서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유감없이 받아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복을 누릴 수 있다. 그중 최고의 복은 아마 친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는 것이리라. 이 의미에서 말하면 나의 딸은 분명 행복하다. 하지만 내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 곁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없다. 그 유감은 그 무슨 방법을 대든 미봉할 수가 없다. 내가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좀 더 쏟는 것은 미봉하기 어려운 그 유감을 단 얼마만큼이라도 줄여주어야겠다는 마음에서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그 아픈 상처를 다문 얼마라도 무마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애들도 친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꼭같이 행복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일들을 하는가 하고. 실상 나 개인으로 놓고 말하면 결코 그 무엇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요 명예나 명성이나 그 어떤 관직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런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결코 이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나라고 왜 편한 삶을 살고 싶지 않겠으며 늘 고달픈 삶을 살고 싶겠는가? 지금 나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 식솔들이 지금은 23명 대가정과 한데 섞이어 먹고살고 있지만 어느 땐가는 우리 네 식솔에게만 속하는 공간을 마련해 가지고 단란하게 모여 살면서 가정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내가 직접 차를 몰고 우리 식솔들을 태워 연변의 아름다운 산천을 함께 구경하는 것이다. 최근 나는 외상으로 26만원짜리 포크리프트 한대를 사서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희망복리원을 자기 힘으로 잘 꾸려나가자면 경제내원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30여 년래 내가 수양한 고아, 경제지원을 해준 빈곤학생, 석방해제인원은 모두 70명에 이른다. 그중 북경, 상해, 운남, 사천, 대련, 장춘 등지의 대학에 간 아이가 33명이다. 일본에 연구생으로 간 학생을 포함하여 연구생도 3명이 나왔다. 한 학생은 졸업후 연변과기대 에서 근무하고 있고 몇몇은 기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아이들은 남방의 한국 기업에 취직했다. 개인으로 창업을 한 아이들도 많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서 수여한 , , , , 국무원에서 수여한 등 여러 가지 영예를 받았고 사적이 , , , 연변TV방송 등 많은 신문간행물과 기타 매체에 보도됐다. 그러나 나는 이런 영예를 단지 나의 전진의 동력으로 간주할 따름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명예가 중요한게 아니다. 나의 명예와 관련해서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나의 영향으로 고아, 장애인, 가난한 학생, 감옥에서 나와 사회 사람들의 기시를 받으며 죽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한 가지 소망뿐이다. __끝__
68    소띠의 해,고향의 진흥을 기원하며 댓글:  조회:4151  추천:63  2009-01-27
소띠의 해, 고향의 진흥을 기원하며   대희대비가 엇갈린 쥐의 해 무자년이 저물고 세계경제의 중대한 변화를 예시하는 소의 해 기축년을 알리는 종소리가 “뗑~~!” 하고 울렸다. 그 소리가 인간의 심령을 울릴만큼 자못 웅숭깊고 우렁차다.    소의 덕성에 대해 인간의 평가는 종래로 대단하여 소를 “짐승 중의 군자”로, 지어 “동물 중의 부처요, 성자”라고 떠받들 정도다. 특히 소의 조건타발없는 봉사성, 근면성과 철저한 자기희생정신에 경복해 마지 않으며 흔히 경건한 마음으로 그러한 소의 정신을 배우겠다고들 발표를 한다.   명인들도 례외가 아니다. 로신선생은 <자조(自嘲)>라는 시에서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쌀쌀하게 눈썹 치켜세워 응대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머리 숙여 소가 되리라(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爲孺子牛)”라고 했다. 곽말약선생은 자기는 몸집이 우람진 소가 아니라 “소의 꼬리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고 모순선생은 소꼬리도 아니고 소의 몸에서 피를 빨아먹으려고 달려드는 파리와 모기를 쫓는 “소꼬리의 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인민의 황소(노복)란 허울을 쓰고 오히려 주인행세를 하면서 깍듯이 모셔야 할 주인(인민)을 괴롭히는 사람들, “닭의 대가리가 될지언정 절대 소꼬리로는 되지 않겠다”면서 벼슬자리만 노리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될수 있는 거룩한 심령의 고백에 머리가 깊숙이 숙여지지 않을수 없다.   세계가 금융위기로 심한 몸살을 앓고있다. 이러한 때 황소처럼 끄떡없는 우리 중국의 온건한 걸음새가 너무나도 듬직해보인다.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1%로 전망한 것과는 달리 올해 중국이7.0~8.9%의 경제성장을 이룩해낼것이며 세계 경기 침체를 완충하는 “기관차”구실을 할 것이라는 국제기구의 분석이 나왔다.   우리 길림성도 근년들어 발전을 재촉하는 움직임이 평범치만은 않다. 지난해 GDP, 고정자산 투자 증장폭 등 주요경제지표가 모두 전국의 앞자리를 차지했는데 올해도 이런 태세를 그냥 유지할 잡도리다. 3000만원 이상규모의 신규항목을 1500개나 새로 가동시킨다는 점만 봐도 여간 간단치 않은게 아니다.    연변의 잡도리도 만만치 않다. 올해 황소 등 7대산업 프로젝트를 계속 실시하며 고정자산 투자도 지난해보다 35% 나 더 많은 567억원에 도달시키려 계획하고있지 않는가!    국가 종합경제실력이 크게 강화됨에 따라 우리 나라 경제발전의 전략중심은 이미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겨졌으며 “3농”에 대한 국가의 투자도 아주 적극적이다. 농촌개혁에 대한 당의 17기 3차전원회의의 최신결정과 국제금융위기의 배경하에 4만억을 쏟아부은 중앙정부의 내수진작책, 그리고 농촌토지류전정책과 관련, 농민리익보장을 위해 중앙정부에서 속속 마련중인 각종 제도적장치 등은 최근년간 지지부진하던 농촌개혁을 자극하여 신농촌건설을 크게 밀어주게 될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한국 등 나라에 진출했던 조선족농민들이 대거 귀국붐을 일으키고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주었던 토지를 도로 찾아오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지고있다. 안정된 삶의 보장인 고향땅의 중요성을 그 어느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피부로 느낄수 있는 오늘이다.     조선족농민들의 대도시 및 외국에로의 대량진출로 농촌인구가 크게 류실됨에 따라 장기간 인재결핍으로 시달리는 위기의 농촌상황이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우리의 농촌에 촌민들을 진정 대표할 수 있는 간부가 있어야 농민들을 이끌어가지고 토지합작사를 꾸리든 농산물판매합작사를 꾸리든 합작기금을 세우든 하나하나 중대한 일들을 해낼수 있을것이 아니겠는가. 촌간부를 할만한 적임자도 찾기 어려운 안타까운 현실문제들이 한국진출농민들의 대거 귀국으로 잘 풀렸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또 이 문제가 조만간 잘 풀릴것이라고 믿는다. 우선 바깥세상에 나가 눈뜨고 돌아온 이들이 고향에 대한 애정과 피땀흘려 벌어온 돈으로 고향건설에 반드시 한몫 크게 할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촌간부의 원천은 환고향한 로무일군들속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대학교 졸업생들도 원천의 하나일수 있다. 우선 그들중 단 10여명이라도 농촌개혁과 고향건설에 큰 뜻을 품고 나서서 인재난을 혹심하게 겪고있는 우리 고향에 희망을 불어넣었으면 하는 기대도 가져본다. 물론 큰 포부와 상당한 준비가 없이 아무나 쉽게 할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중앙으로부터 정책적으로 적극 밀어줄 조치를 대고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정치가적 두뇌와 총명재질을 갖춘 청년들이 반드시 나타나 수많은 청년들에게 훌륭한 본을 보여주게 될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우리 농촌의 밝은 희망을 저 푸른 하늘에 띄워보고싶은 소띠의 해다.   근면과 유유자적의 미덕으로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소, 우직한 품성에 “황소고집” 으로 항상 굳건히 제 자리를 지켜온 소, 농업을 천하지대본이라고 할 정도로 농업에 치중했던 력대 경제생활에서 거의 우리 인간과 한 가족이라고 봐도 될만큼 귀하게 대접받아왔던 소, 정말 우직하고 순박한 소의 본성을 본받아 여유와 평화를 누리며 새해부터는 우리 고향에 복된 삶을 부르고 영위하는 그런 힘센 존재로 우뚝 서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길림신문]
67    리귀남의 유화작품전시회를 가다[박문희] 댓글:  조회:9033  추천:58  2008-12-22
리귀남의 유화작품전시회를 가다일전 중앙번역국의 리란녀사가 어느 만난 자리에서 (10월) 18일 중앙민족대 유화학부 리귀남 주임 신작개인전 개막식 칵테일파티가 있는데 구경하지 않겠느냐면서 초대장 한장을 건네오는것이었다. 미술과 서예 따위에 취미가 있는데다 미모의 리란여사가 모처럼 추천하는 행사인지라 "두말할것 있나, 구경하고말고" 하고 청첩장을 얼른 받아 챙겨넣었다. 미모의 리란여사. 하나의 판에 박아낸것처럼 어머니 우복순(룡정소학교 로교원)을 빼닮아먹은 이란씨는 북경에 온지도 20여년이 되는데, 어려운 대학생들을 돕느라고 장학금사업을 지금까지 7년째 해오고있다.   현재 세계적인 금융풍파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경제상황이 그닥지 않지만 장학금사업을 접어버릴 생각은 전혀 없으며 이 일은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치든 계속 견지해나갈것이라고 했다. 미술전개최장은 베이징 北 2環에 위치한 德勝門 箭樓 3층의 藝森畵廊이었는데, 이날따라 교통체증이 심해 나는 한시간 늦게 도착했지만, 그렇다고 볼 것 못보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명청시대 베이징보위에 대공을 세운 군사방어용 성문으로서의 덕승문은 당년의 웅위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 기품이 범상치 않았다. 좁은 층계로 줄쳐오르는 참관자들의 모습이 갑옷 차림의 옛군사들 모습과 오버랩되어 안겨온다. 구불구불 위(箭樓)로 뻗힌 층계를 톺아오르노라면 一夫當關 萬夫莫開의 고사가 보는듯이 뇌리에 떠오르는것이었다. 한 젊은 여성이 꽃묶음을 안고 총총걸음으로 톺아올라온다. 누구한테 선물하는 꽃묶음일까?   눈에 익은 꽃인데, 이름을 알수 없다. 개나리꽃 같기도 한데, 그건 아니다. 그러나 아마 개나리꽃의 사촌이나 육촌쯤은 될것이다. 저기 보이는 고대 축조물이 바로 箭樓이다. 명청시대 건물이 멋지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나라때의 덕승문은 이런 모습이었다.  종루에서 내려다본 녹지.이귀남 신회화전 축하함이라고 씌어진 꽃바구니가 줄느런히 서서 하객들을 반긴다. 오, 그리고보니 그 여성도 이귀남 미술전을 축하하러 온게로구나.  건물앞에서 리란씨가 중앙민족대의 어느 교수와 무슨 얘기인지 나누고있었는데, "청각장애"가 심한 나에게는 그들이 입을 닫았다 열었다 하는 모습만 보이고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날의 주인공 리귀남 씨. 꾹 다문 입과 커다란 눈. 커다란 눈은 그의 작품의 주제의 하나이기도 하다. 아래 큰눈계열의 작품 몇폭이 소개된다. 그의 자화상도 거개 다 큰 눈이다.  어느 미모의 녀성이 리귀남씨에게 사인을 요구하는듯 했다. 말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의 움직임을 통해 볼수는 있었다.   --사인 좀 해주실래요? --머, 사인해드리죠. 얼마든지. --기념사진 남겨도 될까요? --아 되구말구요. 얼굴 잠간 빌려주는것 쯤이야 어려울 것 없죠..     --음 그렇다면 울도 한번 사진 남겨볼까요? --그러죠 머.   다리를 쩍 벌리고 선 리귀남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에도 다리를 쩍 벌리고 선 자화상과 인물들이 적지 않은데, 참 재미가 있는 동작이다. 나는 미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므로 다리를 쩍 벌리고 선 것에 무슨 심각한 의미가 있는지는 전혀 알수 없다. 때문에 무슨 해석같은 것은 시도할수 없다. 리귀남의 미술을 보러왔다 해서 리귀남과만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특히 미모의 그의 부인과 기타 미인들과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말도 안되거니와 옳지도 않을 것이므로 나는 리부인과 리란씨와도 한컷 찍었다.  근데 사후에 점검해보니 내가 머리를 너무 하늘로 쳐들고 있어서 건방진 작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지만 머리를 쳐든 부분을 수정하자니 나의 보잘것없는 포토샵 기술로는 엄두도 낼수 없었다.   이미 엎지른 물을 주어담을 수는 없는지라 그냥 건방진 그대로 두는수밖에 없었다.   참관자들은 집단적으로 리귀남과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를 거쳐 좁은 층계를 오르면 전시청에 이른다.접대원아가씨가 맞아주었다.<중국미술가>란 신문과 <중국당대화단저명화가정품정선>(제3집)을 선물하는데 신문은 옹근 한면의 편폭으로, <작품정선>은 책 전부가 리귀남의 유화신작과 미술평론가들의 평론을 싣고있었다.<작품정선>의 표지. 리귀남의 자화상. 커다란 눈이 이 세상을 내다보고있는데,눈은 분명 무슨 말인가를 하고있다. <중국미술가>의 한면. 온 화면에 말하는 눈이 가득 차있다. 근데, 그들은 정면으로가 아니라 거의 하나같이 삐딱한 시선으로  이 세상을 내다보고있는데 그것도 한결같이 의혹에 차있는듯 크게 뜨고 보는 눈길이라서 뭔가 가슴에 쿵 맞혀오는 것이 있다.그게 뭘까?칵테일이 비치되어있는 파티장 일각.커다란 눈은 무슨 말을 하고있을까?아마도 이손은 유화를 그린 그 손일게다. 분명.자화상.아래는 <기수>계열의 작품이다. 다리를 쩍 벌리고 선 기수.<기수>계열의 대학생.로동자.예술가.아래는 <큰 눈> 계열의 작품.녀자의 벗은 몸.녀체도 무언가 하소연하고 있다. 다음은 인물화.장고치는 녀인들.고독한 로인.사과를 손에 쥐고있는 녀인.녀 대학생.가을 풍경화.황혼 무렵의 말없는 덕승문 성루.황혼의 빛깔.예술가 리귀남은 항상 그림으로 말할 뿐이다.  2008.11.6 북경에서
66    혈혈단신으로 중국 서부에 진출한 한국사나이 댓글:  조회:5434  추천:52  2008-12-14
혈혈단신으로 중국 서부에 진출한 한국사나이 녕하한통지능시스템유한회사 박영수 리사장 탐방 [박문희 기자] 2008-12-15  중국 서부 녕하회족자치구 은천시에 한국인으로 2004년도에 첫발을 들여놓고 하이테크기업을 창설하여 간난신고 끝에 성공을 맞아온 기업인이 있으니 다름아닌 녕하한통지능시스템유한회사의 박영수 리사장(44세)이다.                                      투자사절단 접대하며 한족친구를 사귀다  1965년도 한국 충청남도 태안 태생인 박영수씨의 중국 진출은 한국에 일보러 왔던 중국 친구들을 사귀면서 시작된다.  1994년 녕하회족자치구 투자사절단이 서울에 투자유치를 왔는데 그때 한 중형 회사에서 근무하던 박영수씨는 그들 일행 15명을 접대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어 자습에 열을 올리고있던 그는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들 중의 몇 친구를 사귀게 되였다. 사절단이 귀국한 후, 그때까지 그들 사이에 높다란 언어장벽이 가로 놓여 있는 상황에서 그들간의 련계는 박영수씨의 열정으로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박영수씨는 1989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1997년부터 (주)트래픽 아이티에스(ITS-Intelligent Transpotation System) 에서 근무했는데 한국의 현대화 교통시스템의 보급작업은 마침 이 해부터 시작되여 그에게 능력발휘의 기회를 안겨준다. 사업에서 남다른 추진력과 능력을 보여준 그는 1999년 마침내 현대화 교통시스템 도입을 시도하고있는 중국에 파견되여와 회사의 해외투자기업인 성도트래픽유한회사 리사장에 부임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지능형 교통시스템을 나라 전역에 도입하기 시작한 초기 단계였는데, 박영수씨는 성도에서 3년간 사업하는 기간 사업 특성상의 우세를 빌어 중국의 각급 정부와 관련 회사를 접촉하면서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혈혈단신 녕하 찾아 《한통회사》를 창설하다  패기 있게 업무를 펼치던 중 2003년 사스의 발생과 함께 귀국했다가 1년 후  줄곧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친구들이 있는 녕하에 혈혈단신으로 찾아와 녕하한통(翰通)지능시스템유한회사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상해, 북경 등 다국적 기업이 치열한 경쟁을 벌리는 곳에는 자신이 없었던 그는 자기만의 독자적 능력발휘가 가능한 지역으로 중국 서부의 녕하를 선택한 것이다. 교통시스템이 없는 빈 구석인 이곳에서 일을 벌리면 주변 관계를 활용해서 길을 틔울 수 있고 일단 길만 뚫어놓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친구가 몇이 있다지만 필경은 생소한 곳이라 처음부터 인맥관계 구축에 숱한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술초대는 다반사고 정부와 기업소의 관련자를 한국에 청해다 구경도 시키고 했다. 그의 한족 친구들에게는 공무원 친구가 많았다. 일단 술초대를 하면 관련자뿐 아니라 무관련자들까지 부르니 환장할 노릇이였다. 상무국 국장 부르는건 좋은 일이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교육국 국장은 왜 부른단 말인가? 저녁 한끼를 대접하는데 만원 이상 때려넣어야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계산 없이 친구를 불러들이는 친구가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 아무런 소용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친구의 친구한테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 도움을 받았을 때는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중국의 생리를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최초에 고달팠던 일은 직원관리였다. 한국에서 직원들은 하나를 시키면 두개 세개를 하려 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하나는 고사하고 70%나 80% 정도밖에 못하니 속이 타서 재가 될 일이였다. 더구나 기막히는 것은 사장 시키는 대로 하는 한국의 직원들과는 아주 딴판으로 이곳 사람들은 사장이 시키는데 따르기는 고사하고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딨어》하면서 어처구니 없게도 자기 주장을 펴러 드는 통에 결국 큰 피해를 보는 경우였다. 그러나 이런 일이 몇 번 거듭되면서 사장이 시킨 일이 원래 옳았는데 집행이 안돼서 결국 회사에 불이익이 조성됐다는 것이 증명되자 차츰 직원들이 사장의 지시에 따르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였다. 물론 프로젝트 수행과정에 시행착오도 많이 빚었다.                                        《우회전술》구사하여 첫 오다를 수주받다  중국 실정에 역행하기보다는 실정을 알고 순리로 일을 진척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박영수씨는 말한다.      북경출장시 숙소에서도 컴퓨터를 리용해 데이터파일 처리에 드바쁘다.   2005년은 중국에서 중량별 화물차 료금징수 시스템을 산동성을 기점으로 중국 전역에 정식 도입하기 시작한 첫해였다. 이 시스템에 대해서는 전문가수준인 박영수는 처음에 당지 한족 친구들의 도움은 받되 오다는 자신이 직접 따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시 현실로 보아  한국인의 직접적인 오다수주가 불가능함을 재빨리 낌새채고 우회전술을 폈다. 한족 친구들에게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친구들이 방도를 대주니 그대로 했다. 한국식대로라면 전혀 상상이 안되는 이런 일도 여러 모로 분석판단한 끝에 대담히 친구들이 대주는 방도에 따랐다. 친구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작용했지만 이런 믿음은 또한 현실에 립각한 정확한 판단에 토대한 것이였다. 그의 판단은 빗나가지 않았다. 친구들을 내세워 입찰을 한 그는 개찰 전에 벌써 《이 프로는 인젠 내꺼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결국 그해 말께 그는 1500만원짜리 첫 오다를 따는데 성공했다. 하나 수주를 받았다 해서 일을 곧바로 진행시켜 일거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금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프로젝트는 수주받았는데 갖고온 돈 200만원이 몽땅 거덜이 났다. 중대 프로젝트를 수주받았으니 한국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필시 도와올게 아니냐고 할 이들이 있을테지만 그런게 아니였다.                                             친구들 도움으로 막혔던 숨통을 틔우다  중국 진출 2년 사이, 가족과 주변 친구들이 다 그를 《미친 놈》이라고 했다. 부모들은 친척들에게 부탁해서 돈을 대주지 말라고 쐐기를 박고 아내는 남편의 친구들에게 절대 돈을 대줘선 안된다고 그루를 박았다. 이렇게 돈줄기를 차단하면 배기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것이였다. 부모, 형제, 자매, 아내, 친척, 친구, 아무튼 주변의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철저한 합동작전을 폈다. 이렇게 하기를 만 2년이였다.  그런데 지금 굵직한 프로젝트를 이미 땄으니 돈만 대면 성공이라고 이실직고하는데도 모두들 한결같이 믿지를 않고 《이놈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또 〈사기술〉을 쓰는게다. 이제 돈줄기를 딱 끊으면 돌아온다》고들 하니 한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각삼추로 피말리는 고초를 겪고있을 때 그를 도와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와 가까이 지내던 한족 친구들이였다. 친구들끼리 련통해서 200만원을 만들어 뀌어주었다. 친구의 귀중함을 통감하게 하는 대목, 꽉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이는 순간이였다. 결국은 밥먹을 돈마저 떨어져 더 버티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들어섰을 때에 와서야 줄곧 목표로 삼고 노력하던 일이 비로소 결과가 나서 드디여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길이 트이자 일마다 순풍에 돛단배였다. 그 이듬해인 2006년 두 번째로 1200만원짜리 고속도로 《원카드시스템》 프로젝트를 따냈다. 2007년에는 2000만원 짜리를, 올해는 3000만원짜리를 수주 받아 수행했다.  2007년부터 자금이 돌기 시작, 《인제 자리를 잡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때에 와서야 박영수는 가정과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다.                                        중국 내수시장 뚫어 제2차 도약을 준비하다  4년간의 실천을 거쳐 그는 자기의 최초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였다. 그가 뚫은 것은 중국의 내수시장이였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의 내수시장을 뚫었기에 장래의 발전에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는 지어 현재 기승을 부리고 있는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자기에게 찾아온 두번째 호기로 간주하고 있다.  중국이라는 이 거대 시장에 4만 억(한화 8000조원)을 풀어 내수 확대를 하는 시점에서 이 호기를 잡아 날개를 활짝 펼 수 있는 제2차 도약기를 예상하고 있는 그다. 2009년 그는 녕하에서 수주액 1억을 올릴 목표를 이미 세워놓고있다. 사천대학교 기술연구소와 자매관계를 맺고 한국기술을 중국화하는 자기의 시스템개발작업을 연구소에 의뢰하기도 했다. 남들은 중국 전역을 상대로 시장공략을 꿈꾸지만 그는 녕하 시장을 전면적으로 집중공략할 전략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해왔던 교통시스템을 위주로 전력시스템과 오수처리장 등 환경관련 프로젝트에까지 진출을 준비 중이다.    
65    음지에서 양지로의 첫 관문 통과한 한국의 중의 댓글:  조회:4889  추천:69  2008-11-13
향후 2년내 중의제도권진입을 목표로 박차   --대한중의협회 조근식회장 일행을 만나 왼족으로부터 대한중의협회 오재경 부회장(대한중의 신문 주필 겸), 이병근 사무총장, 조근식회장, 주일권 고문(북경광자병원 원장), 구자온 부회장.    “세계위생조직전통의학대회”가 11월 7일부터 9일 오전까지 북경에서 성대히 열렸다. 9일 오후 기자는 한국을 대표하여 이번 대회에 참석한 대한중의협회 조근식회장 일행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점잖은 기품의 조근식회장은 만나는 사람으로하여금 대한중의협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은근한 끈기를 느끼게 하는 분이였다. 조회장은 “세계위생조직전통의학대회”에 참석하게 된 것은 “전 세계 전통의학계에 대한중의협회의 립장을 알리기 위해서”라면서 이것이 중의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있는 한국정부의 정책을 바꿀수 있는 추진력으로 작용할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대한중의협회는 중국의 중의학대학 본과를 졸업한 우수한 인재 300여명을 정회원으로 둔 한국내 유일한 중의학단체이다. 300여명에 달하는 중의 의사들은 모두가 중국에서 정식으로 중의학을 전공한 고급인력들인데 그들중에는 중의학기초연구와 림상과정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우수한 인재들도 적지 않다.   “저희 대한중의협회는 2007년 8월 세계중의약학회련합회에 단체로 가입한 뒤를 이어 외교통상부 허가번호 제585호로써 금년 7월 4일 정식 허가를 획득했고 7월 16일 법인등록까지 마쳤다”고 말하는 조근식회장은 “이는 음지에서 양지로의 첫 관문을 통과한 셈”이라면서 어려움이 첩첩했던 지난 10여년간의 려정을 회고했다.   “1996년 9월 전중협(전중국중의학원한국본과생협의회)의 발족을 시작으로 1997년 첫 중의학졸업생이 배출되면서 한국진출을 모색했지만 결과는 암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대한중의협회 의사들은 중국에서 정식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중의의사자격고시에 합격해 자격증을 취득하였지만 한국정부에서 한의학과 중의학은 다르다는 리유로 활동을 금지하였던 연고로 심지어 의료봉사활동마저 고발당하는 실정이였지요.” 10여년이나 중의학을 공부했음에도 의술을 펼칠 무대가 없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조근식회장의 경우도 다를바 없었다. 공무원생활을 하던중 우연한 기회에 한의학을 접했던 조회장은 중국의 천진중의대 병원 원장과의 만남으로 중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나이 40이 넘어 중국으로 와서 7년여를 열심히 공부했다. 류학을 마친 그는 부푸는 꿈을 안고 귀국했지만 배운 의술을 의료봉사에 적용할 수 없는 판국이였다.    “중국에서 오래동안 공부하고 돌아온 저희들에게 중국은 제 2의 고향입니다. 우리 대한중의협회 가족은 사천지진소식을 듣고 모두 울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조근식 회장은 사천 지진사태때 제도적인 규제때문에 지진피해자들을 직접 달려가서 도울수 없었던 당시의 안타깝던 심정을 털어놨다.   한국 전역의 5000여명 중의대 졸업생들중 한국중의협회의 300여명 의사들은 중국인들도 하기 힘든 중국의사고시에 합격된 정식의사들이고 중국어 표준어 뿐 아니라 사천성 방언까지 구사 가능하다. 하지만 단지 정부의 모순된 행정관리로 인정을 받지 못해 사천성으로 의료봉사를 가고 싶어도 갈수 없었던 그들의 마음은 돌덩이로 지지누르듯 무거웠다고 한다.      그때 조근식 회장, 김웅 국제의료봉사단장, 오재경 중의 의사 등 6명은 대한중의협회를 대표해 종로구 효자동에 위치한 주한중국대사관을 방문, 지진피해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고 성금 500만원을 전달했었다.   그러나 중의학단체로서 외교통상부 정식 허가를 받고 법인등록까지 마침으로 해서 지금까지 중의학을 전공하고도 써볼데 없어 고통을 받고있던 대한중의협회 회원들은 제도권으로 들어가기 위한 힘찬 첫발을 내디뎠다. 이로부터 사단법인으로서의 대한중의협회는 학술 ,교육, 문화, 봉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당당히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것이다. 한국에 와있는 외국인과 소외된 계층을 위해 침구술무료봉사를 할 권한마저 없었던 대한중의협회가 “전중협”을 발족해서 장장 11년 만에 법인활동이 가능해져 제도권내로 들어갈수 있는 기틀이 잡힌 셈이다.     조근식 회장은 현재 대한중의협회는 명년에 회원을 300여명으로부터 1000여명으로 늘이고 의학교육 전문강의와 중의학번역, 신문출판사업을 비롯해 건강식품제조가공판매, 수출입도매, 약재관련 법제사업 등의 건강관련사업, 그외에도 정기의료봉사 활동 및 해외활동범위를 넓혀간다는 계획을 세워놓고있다.   조회장은 또 “한의학과 중의학 사이 정보교류에 단절이 존재한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보완책으로 중의학연구소 건립을 추진중이고 <대한중의신문>도 지난 10월 8일 허가를 맡아냈는데 12월 말 창간호를 내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작업추진을 통해 한의사나 중의 의사 그리고 모든 동양의학도를 위한 정보와 학술교류의 장이 될수 있도록 할것이라고 조근식 회장은 밝혔다. 지난 8월에 가진 대한중의협회 총회 기념사진   “전 세계에서 중의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세계가 개방의 추세에 있는 만큼 우리 나라도 개방을 추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의 와 중의는 적수가 아니라 동반자지요. 좋은 의료서비스는 경쟁을 통한 상생의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지 독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개방을 하면 우리 쪽에서 중국쪽으로 진출도 가능합니다. 그럴 경우 중의의사 자격을 가진 한국의 류학생들이 그들의 폭넓은 인맥으로 중국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수 있을것입니다. 향후 2년내에 제도권진입을 목표로 회원들과 함께 노력해 갈것입니다.”   한국의 중의계가 제도권에 진입해 대한중의협회의 회원들은 물론 수천 능력자들이 모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길림신문]정공철특약기자/박문희기자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