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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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분단을 뛰어넘어 / (한국) 이선명 댓글:  조회:5002  추천:105  2007-05-16
   “어머님, 금년 어머니날에는 정말 좋은 소식이 들려 옵니다. 이제 어머님도 외국 여행을 가실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을 것 같아요. 경의선이 곧 개통된다는 소식이에요. 어머니, 그렇게 되면 개성과 평양, 그리고 신의주에 들렀다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 대륙까지 기차로 갈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어머님 모시고 꼭 중국, 아니 내친 김에 유럽까지 기차여행을 하고 싶어요.”   “글쎄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라고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미덥지 않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시지만, 목소리는 분명 기대에 차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 한번도 외국에 나가보신 적이 없다. 고소증이 있으신 지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하시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못 하셨다. 중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삼촌과 조카가 보고 싶으셔도, ‘바쁜 사람 귀찮게 뭐 하러 가냐?’ 하며 스스로 마음을 달래곤 하셨다. “아, 그런데 이제 중국과 유럽까지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할머니는 다시 한 번 천지개벽을 보는 것 같은 뭉클한 감회가 동맥을 타고 뜨겁게 전신을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경의선이 뚫리면 부산과 신의주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기차를 타고 서울과 평양의 백화점에 나란히 진열되겠지… 북한의 노동력과 남한의 기술력이 남북 경제 공동체를 이루어, 한반도에서 생산된 우수한 상품이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 철교를 넘어 중국으로, 러시아로, 그리고 저 유럽까지 실려가게 될 것은 물론이고, 남북이 지척인데, 인적 및 물적 교류를 제3국을 통하는 황당한 일도 더는 없을 것이고. 내년에 중국에서 열리는 베이징 올림픽 구경을 기대하고 있는 재미 동포들은 일단 서울에 가서 친지들과 합류하여, 경의선 철도편을 이용하여 개성과 평양에 들러 역사 유적지도 둘러보고 나서 베이징까지 안락한 기차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어 “설레는 가슴을 억제하기 어렵다”고 실토할 인사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분단의 고통, 그리고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문산에 멈추어 선 철마의 소원이, 아니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 전체의 염원이기도 하지만, 실현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장장 56년 전 1951년 6월12일 한국전란으로 끊겼던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선·동해선 철도가 오는 17일 시험 개통된다. 한민족의 혈맥을 이어 한반도가 동북아의 경제적 중심으로 다시 태어나는 역사적인 새 날이 밝아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발표된 남북의 합의에 의하면 이날 디젤기관차 1량과 객차 5량씩으로 구성된 시험운행 열차에는 남측과 북측에서 100명씩, 동해선과 경의선 열차에 각각 200명씩 모두 400명이 타고 오전 11시 출발, 경의선의 경우 남측 문산-도라산역을 거쳐 북측 판문역-개성역으로 가고, 동해선은 북측 금강산역-감호역에 이어 남측 제진역까지 운행한다.   남북이 앙숙처럼 대결하던 불과 십 수 년 전과 대비해 보면 내외의 끊임없는 방해공작을힘겹게 물리치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전진해온 ‘데이땅트’ 속의 남북 통일세력의 밀월은 우리의 민족사에 정말 장엄한 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물론 시험운행이라는 제한성 때문에 아쉬움이 있지만, 그러나 대국적으로 보면 우리의 통일염원의 실현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작가 생떽주퍼리는 그의 유명한 단편소설 <밤의 비행>에서 “길이 나면 사람들이 다니게 돼 있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야 말로 이번 남북의 임시 철도운행이 정기적 운행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는 개연성을 은유(隱喩)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 21세기 실크로드는 부산에서 출발, 평양을 거쳐 신의주와 시베리아, 만주, 중국, 혹은 시베리아 등지를 통과해 유럽으로 연결되는 유라시아 대륙횡단철도로 발전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남북이 진정한 ‘한’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서 현해탄을 건너 일본까지 포함하는 동북아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최근 소식통은 "1990년 초 1천5백여 명에 불과했던 단둥 시내 조선족의 숫자가 남북경협활성화의 기대로 이미 2만 명에 이르고 있다"고 전했다. 이것은 중국 동북3성과 만주 및 연해주에 산재한 우리 동포들이 남북경협이 가져올 효과를 예견하고, 고대하고 있음을 반증한 다. ‘달리고 싶다’는 말로 우리 민족 비극을 되새겨 주던 철마, 그 철마가 이제 세계 속으로 달릴 날이 다가오고 있다. 경의선 철도 재운행은 통일 대장정에 새 이정표이다. 우리 한민족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이 꿈의 ‘무지개의 다리’ 건설이 순조롭게 진전되기를 기원한다. // USNews 이선명 주필 
21    [창업칼럼]창업 제1과: 나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3955  추천:90  2007-05-13
성룡이 주연한 영화 《나는 누구인가?》가 상연된 후 온 세계가 "나는 누구인가?"를 가지고 무수한 화제를 만들어 뿌렸다. 오늘 창업문제에 이 화제를 적용해 보려 한다. 창업을 함에 있어서도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것이다. 왜? 자기를 모르고 창업을 하면 많은 경우 실패위험이 즉시 뒤따르기 때문이다.내가 알고있는 한 친구의 딸 얘기다. 작년에 그녀는 부모와 친척의 돈 20만원을 꾸어 미용점을 차렸다. 미용원을 하고있는 한 한국사장님이 아버지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여서 그 사장님의 도움을 받을수 있고 한국의 미용술이 중국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으니 미용점을 꾸리면 잘 할수 있다고 여겼던것이다. 100여 평방메터 되는 점포를 임대 맡았는데 한국 사장님의 도움을 받으며 실내 장식도 한국식으로 하고 설비도 한국것을 들여오고 직원도 받아 훈련을 시켰다. 한국사장님이 몸소 직원들에게 미용기술도 가르치고 고객접대도 직접 하고 하여 영업틀이 꽤 잡히고 손님들도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 사장님이 귀국한 뒤 얼마 안돼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녀가 원인을 찾아내기도 전에 점포임대료, 전기, 물값에 영업세, 공상관리비 등 명세서가 련이어 날아들었다. 수입은 없는데 지출은 팍팍 생기고 직원들 로임도 지불해야 하니 안이 단 친구의 딸은 불안해서 아주 환장할 지경이였다. 상황이 배배 꼬이니 점원들도 마음이 흔들려 그달 로임을 받아 쥐자 하나 둘 점포를 떠나버렸다. 이제 억지로 유지를 해 봤대야 비용만 들어갈 터이기에 그녀는 남은 점원들도 다 내보내고 점포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외지에서 무역사업을 하는 외삼촌이 이 일을 알고 전화를 걸어와 "창업을 하려면 이만한 실패는 감수해야 한다. 창업하는 사람치고 대번에 성공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실패경험도 재부다. 내가 뒤를 대줄테니 끝까지 해봐."하고 극구 설복했지만 그는 "다신 이런 일 못하겠다"고 진저리를 쳤다. 결과 그의 창업은 불과 두달만에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실패한 원인을 진지하게 찾아보지 않을수 없다. 영업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는 여러 미용점들을 돌아보면서 창업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국의 화장품, 미용술, 설비 등을 중국인들이 선호하니 이 우세만 가지면 영업은 얼마든지 잘해낼수 있다고 너무 이르게 자신했다. 말하자면 "시장성"이 있을 것이라는것만 생각했지 "나의 강점은 뭐고 약점은 무엇이며 나를 둘러싼 기회요인은 뭐고 경계해야 할 위험요인은 뭔가?" 이런 것은 홀시했던것이다.이 교훈에서 창업의 성공이 반드시 시장성유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것,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수 있다. 똑같은 아이템이라 해도 성공은 사람나름이다. 시장성이 없어 보이는 아이템도 개조를 해서 시장성을 갖게 할수 있지 않는가?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진정 창업을 할수 있는 사람인가? 정말 창업을 원하는가? 창업외 내 적성에 더 알맞는 일은 없는가? 재취업에 대한 미련은 없는가? "등등 자기 분석을 분명히 한 후 창업을 해도 늦지 않다. 이것이 전혀 없이 접어들었다가 한번 용도 써볼새 없이 무너지니 질겁한 나머지 실패를 딛고 제자리에서 재기할 용기마저 잃고말았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연약성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한차례의 실패로 하여 기가 죽고 진취심이 소진되여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십수차례 실패의 시련을 이겨나갈 정신적 준비도 갖추어야 한다. 유망 청년이라면 이쯤의 시련은 반드시 감수하고 용케 넘겨야 하는것이다. 이게 안 된다면 그 전도는 심히 걱정스러울수밖에 없다.나는 대관절 누군데 실패에 대처할 용기도 없느냐? 이런 문제는 한 사람의 일생에 여러 차례 등장할 수도 있다. 문제를 푸는 행정에 자기가 갖고 있는 긍정적요인을 발견 발굴하는데 모를 박아야지 부정적요인을 부풀려 스스로 신심과 용기를 마모시키는 일은 절대 피면해야 할것이다.젊은 나이에 아직 앞날이 창창하니 너무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한두 차례 지어 그 이상 실패를 한다 해도 재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마음을 차분히 하고 경험과 교훈을 정리하면서 진로를 잘 설계해 보는것이 바람직한 자세이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창업자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업종에 들어가 석달이든 반년이든 아르바이트를 하는것이 좋다고 권한다. 지어 취업을 해서 몇년 동안 체험할 수도 있다고 한다. 례컨대 해당하는 물건의 구입가격, 고객대처법, 사람들의 성향, 재고처리방법 등을 경험자들을 통해 체험하고 나서 자신이 생길 때 자체로 영업을 시작하면 하면서 배우기보다 차이가 많이 날수 있다고 한다. 천만 지당한 권고이다. 몇달 지어 몇년씩 체험하고 나서 다시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해 보자. 만족스러운 답이 나올수가 없겠는가?//길림신문
20    리룡희,“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 댓글:  조회:3978  추천:96  2007-05-06
리룡희,“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 신임 장춘시 부시장 리룡희 탐방   《길림신문》박문희 기자       신임 장춘시 부시장 리룡희씨를 만나기란 실로 조련치 않은 일이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와 그의 례절스럽고 열정적인 장용 비서를 통해서 그의 행적을 조금 알수 있을 뿐 만나기가 어려운건 물론 전화를 통한 대화조차 기대하기 쉽잖았다. 취재과정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거의 사무실에 눌러앉아 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전 장비서에게 수차례 간곡한 부탁을 해서야 드바쁜 시장실무의 틈새를 찾아 짧은 만남의 기회를 요행 가질수 있었다.   “시장님을 만나 뵙기가 굉장히 어렵네요. 공청단 성위에서 일을 보시다가 장춘시 부시장으로 오시니 사업이 훨씬 바쁘시지요? ”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일도 물론 바쁘지만 솔직히 말씀 드리면 공청단위에서 사업한 13년간 기자들의 취재요청이 무지 많았어도 저는 전부 사절했댔습니다. 소문을 적게 내고 실제적인 일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딱 한번 례외가 있는데 16차 당대회 때 이상 분들이 젊은이가 (기자 앞에) 나가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취재를 수락한 적이 있습니다. ”   “아, 그러세요? 그럼에도 이렇게 만나 주시니 다행이군요. 부시장으로 오신 후 무슨 일을 맡아 보십니까?”   “상업, 대외경제무역, 상업국유자산경영과 공상관리부문입니다. 이런 부문들의 산하에는 수다한 기업소와 단위가 있는데 경영활성화와 정돈개혁의 임무가 십분 번중합니다. 례컨대 상업국유자산경영공사 산하에만 해도 89개 국유상업기업이 있는데 그중 대다수는 결손기업입니다. 대표적 결손단위로 중흥백화점을 들수 있는데 이 기업은 10년 동안 결손기업의 모자를 써 온 오랜 문제꺼리 단위죠. 2512명 종업원의 로임을 내주지 못해 종업원들의 래신래방이 그칠 새 없는데다 새로운 문제들도 자꾸만 터져 나와 시정부는 물론 성정부에서도 골치를 무척 앓았습니다. 저는 중흥백화를 전반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 돌파구로 삼아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고 깊이 있는 조사로부터 착수해서 문제를 발견하는 족족 해결책을 들이 댔습니다. 법원 등 관련부문에도 직접 찾아 가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두달 사이에 중흥문제를 가지고 도합 8차례의 회의를 열었어요. 지금 문제는 점차 풀림새를 보이고 있는데 올해 안으로 확실한 해결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3월 1일에 도임해서 80일도 안되는 사이에 안고 있는 문제가 돌출하고 또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십개 기업과 단위를 거의다 한두차례씩 훑었다.   그의 사업은 사실 무겁고 번거롭다. 시장관리를 하면서 음식안전을 틀어쥐는 데로부터 해외로 로무자를 파견하고 투자유치대표단을 이끌고 해외고찰방문을 하고 내외 고찰단을 접대하는데 이르기까지 할 일이 아주 많다. 장바구니공사는 장춘시의 으뜸가는 공사로 현재 식료품안전정보통보 기제를 건립중이다. 음식안전관리를 보면 륙속 비법아가위과자가공점, 비법우유류통점, 비법개고기가공점 등 소탕전을 치렀는데 그중 비법개고기가공점을 들부신 전역은 영향면이 넓고 효과가 좋아 소비자들의 한결같은 옹호를 받았다.   “크고작은 일들이 항상 끊이질 않습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문제를 연구할 시간마저 없어요. 그러니까 조사하는 한편 문제를 해결하고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는 가운데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져 보니까 3월 초 이래 제가 단독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은 시간은 한주일에 불과 두어 시간밖에 안돼요. 그외 시간은 전부 밖에서 실제문제를 해결하는데 돌렸습니다.”   “인터넷검색을 통해 리시장님께서 투자유치대표단을 이끌고 한국 울산시를 방문한 소식을 읽었는데 많은 성과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   “방문은 성공적이였습니다. 박맹우 울산시 시장과 만나 좋은 얘기를 나눴고 또 경제합작계약들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합작항목들이 작동과정에 있기 때문에 언론에는 최대한 압축보도를 했을 뿐입니다. 그 기간에 삼성, LG와 SK 본부도 방문했습니다. 현대자동차 본부를 방문했을 땐 명년에 열리는 ‘장춘제 4기국제자동차박람회’에 참가할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금년 6월은 장춘시와 울산시가 자매결연을 한 10주년 기념월간입니다. 이달 하순에 울산시 정부와 의회에서 기업인대표단, 문화교류대표단과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장춘시에 와 기념축제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번 행사 기간에 고신기술개발구의 한 거리를 울산거리로 명명하는 의식과 시내 공공뻐스 한대를 울산뻐스로 명명하는 의식도 가지게 됩니다.”   학습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 리룡희 부시장은 “리론학습은 정치자질을 높이는데 있어서의 관건이요, 학습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자칫 형세에 뒤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언제나 감히 리론학습을 늦출 수 없었다”고 했다.   2002년 그는 중앙당교 중청년 간부 훈련반에 참가했었는데 이를 계기로 맑스주의 경전저서와 론술을 참답게 정독하고 등 6편의 론문을 써냈다. 그중 란 론문은 전국 핵심간행물인 (理論前沿)에 발표됐다.   리룡희는 경제지식과 현대기능에 대한 학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업여가를 타 대량의 경제학도서를 탐독하고 50여만자에 달하는 국내외 관련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아울러 , 등 5편의 론문을 써냈다. 경제학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2001년에는 길림대 경제학박사 공부에 몰입, 동북아 구역경제를 전문 연구했다. 공청단사업을 할 때 기층에 대한 료해를 비교적 투철히 쌓은데다가 정치리론과 경제리론의 조예가 비교적 깊었으므로 리룡희는 장춘시정부에 전근된 뒤 재빨리 새로운 사업환경에 적응하여 배역전환(角色轉換)을 완성할수 있었던것이다.   “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자기의 소신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사업과 생활에 대한 태도를 물었을 때 그는 “이 면에서 나는 자기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은 편 ”이라고 했다.   직위가 높아짐에 따라 그는 렴정문제에 보다 깊은 주의를 돌렸다. 자각적으로 당내의 감독, 법률의 감독과 군중들로부터 오는 감독을 접수하고 배금주의. 향락주의와 극단적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권력관, 명예지위관, 리익관과 인정관을 잘 넘기기에 십분 류의했다. “제1책임자” 란 특수신분을 리용해 사리를 도모하거나 특수화를 부리지 않았으며 주택, 승용차의 사용문제에서나 개인생활, 가족과 친인척의 취업 등 문제에서 종래로 단위에 페를 끼친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활면에서 저는 매우 만족하는 편이고 사업면에서는 반대로 늘 부족감을 느낍니다.”   그의 과외취미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제일 좋아하는것이 촬영이라고 했다.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한 기회를 리용하여 그는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방면의 자료를 수태 찾아 읽고 자세히 연구하였으며 피타는 노력을 들여 미국사회의 이모저모에 대한 대량의 사진을 찍었다. 최근에 그는 사진 500여폭에 7만여자의 문자해설이 달린 책자 (黑白美國)을 탈고, 출판했다. 독서 역시 그의 애호이다. 그가 읽는 책은 고금중외의 정치, 경제, 문화에서 천문, 지리, 력사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아주 광범하다. 그외 그는 컴퓨터기술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한다. 짬을 타 외국어공부도 내내 손에서 떼지 않고 있다.   “주요취미가 촬영이지만 전혀 시간적 여유가 없어 지금같애선 퇴직한 후라야 사진기를 들것 같네요. 동북 로공업기지 진흥사업에서 현재의 형국은 동북 3성의 세 도회지 및 대련의 합동작전과 각자 자체우세발휘의 구도입니다. 경제진흥의 견인차 역할을 노는 ‘3두마차’는 적극적인 투자, 내수 진작과 수출 확대입니다. 이 세가지는 모두 직접 물류사업과 이어져 있습니다. 제가 맡은 과업도 실상 물류사업인데 제 어깨가 무거워 짐을 느끼는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업상 압력은 받고 있지만 잘 할수 있다는 신심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정한 시간이 됐다. 다음 일이 리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는 후날 만날 기회를 다시 갖기로 리시장과 약정을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길림신문》 2004년 5월   ======================================================================================= 16차 당대회 대표 -- 리룡희 박문희   【리룡희 략력】     1963년 출생,길림성 매하구시 사람.     1986년 연변농학원 졸업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음. 1988년부터 선후로 공청단 연변주위 부장, 훈춘시 량수진 당위 부서기, 공청단 연변주위 부서기, 서기, 복건성 하문시 정부 판공청 주임조리, 연변주 조직부 부부장, 공청단 길림성위 부서기, 서기, 당조서기, 길림성청년련합회 주석을 력임.     2004년 2월 장춘시 정부 부시장으로 조동.     1998년 길림대학 경제학 석사학위 획득.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 미국 일리노이주 등지에서 학습 고찰.     2002년 16차 당대회 대표에 당선.      -----------------------------------------         리룡희는 1986년 사업에 참가한 뒤 부동한 일터에서 간단없이 자기를 련마했다. 공청단성위 부서기로 발탁되자 그는 변화된 사업환경에 재빨리 적응, 주요령도에의 배합에서 직접 주 책임을 지는데로, 몇개 부문을 맡아 관리하던데로부터 전면사업을 주최하는데로의 배역전환을 신속히 완성했다. 아울러 사업주제의 요구에 따라 전 성 공청단의 제반 사업을 효률적으로 설계 조직했다. 구체적인 사업 행정에 그는 “봉사성 발휘”와  “창의력 개발” 이 두가지에 모를 박았다. 청년들의 책임감을 유발시키는 각종 주제교양활동과 2차 창업활동을 고안 전개하였으며 청년취업과 재취업 이벤트도 활발히 벌려 뚜렷한 성과를 올렸다. 이를테면 도시에서 취업과 재취업 활동을 벌린 3년 동안에 전 성 공청단 조직들에서는 선후로 3500여명 청년들의 자주창업을 도와 주었으며 467명의 재취업전형과 창업 선줄군을 키워 냈으며 3만여명 귀휴청년들을 재취업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외 5.6만명 농촌청년들을 도와 취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지도부 내부에서 그는 주변의 일군들을 성심과 관용으로 대하면서 할 말이 있으면 앞에서 말하고 문제가 있으면 책상우에 내놓도록 고무해 주었으며 서로 리해하고 신임하며 협조 배합할것을 창도했다. 공청단 성위에서 사업한 시간이 길고 자격과 경력이 오랜 그지만 지도부 성원들을 충분히 존중해 주고 그들의 의견을 허심히 청취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절차를 중요시했다. 특히 인사문제라든가 경비문제같은 일을 처리할 때면 의식적으로 여러 사람의 의견청취를 하고 사상을 통일한 전제하에서 집단 결책을 하였다.       공개경쟁을 창도하는 방법으로 현명하고 재능 있는 자를 선발 등용하고  기관내에서  학습교양활동을  전개하며  기층에 직무를  가지고 내려가 단련받게 하는 등 경로를 통해 청년간부를 적극 선발하고 훈련시켰다.       리론학습을 늦추지 않았다. 리론학습은 정치자질을 높이는데 있어서의 관건이라고 리룡희는 말한다. 2002년 학습기한이 1년인 중앙당교 중청년간부 훈련반에 참가했던 그는 이를 계기로 맑스주의 경전저작과 론술을 정독하고 등 6편의 론문을 써냈는데 그중 는 전국 핵심 간행물인 < 理論前沿 >에 발표됐다.     경제지식과 현대기능에 대한 공부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상사업가운데서 기층 조사에 류의, 3년 남짓한 시간내에 전 성 60개 현(시,구)을 거의 다 돌았으며 제1자동차공장, 통화제철소, 길림화학공정공사 등 성내 수많은 국유기업과 민영기업을 돌아보면서 특정쩨마의 조사연구를 진행, 하부의 실정을 대량 장악하고 기층을 도와 걸린 문제들을 적극 풀어주었다. 한편 사업 여가를 타 수많은 경제학 도서를 열독하고  50여만자에 달하는 국내외 경제지식과 경제동정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아울러 등 5편의 론문을 써냈다. 그중 는 중앙당교로부터 우수고찰보고로 평정됐다. 경제학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리룡희는 2001년 길림대 경제학 박사공부에 몰입,  동북아 구역경제를 전문 연구했다. 최근에는 란 쩨마의 론문을 완성했다.     기층에 대한 료해가 비교적 투철한데다 정치리론과 경제리론의 조예가 깊었으므로 리룡희는 장춘시정부에 전근된 후 재빨리 새로운 사업환경에 적응할수 있었다. 출근 이튿날부터 곧바로 기층에 대한  조사연구에 들어가 조사를 하는 한편 문제해결에 착수했다.     리룡희가 맡은 사업은 상업, 대외경제무역, 상업국유자산경영과 공상관리 부문이다. 이런 부문들의  산하에는 수다한 기업과 단위가 있는 데 경영활성화와 정돈개혁의 임무가 십분 번중하다. 비컨대 상업국유자산경영공사 산하에만 해도 89개 국유 상업기업소가 있는데 그중 대다수는 결손기업이다. 대표적 결손 기업소로 중흥백화점을 들수 있다. 이 기업은 10여년간 결손의 음영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오랜 문제거리 단위이다. 2512명 종업원의 로임을 내주지 못해 종업원들의 래신래방이 그칠새 없는데다 새로운 문제들도 자꾸 터져 나와  시정부는 물론 성정부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었다. 리룡희는 중흥백화를 전반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 돌파구로 삼아 해결하기로 작심, 깊이있는 조사로부터 착수해서 문제를 발견하는 족족 해결책을 댔다. 법원 등 관련 부문에도 몸소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두달도 안되는 사이에 중흥문제를 가지고 도합 8차례의 회의를 소집, 올해 안으로 걸린 문제를 기어이 다 풀어내고야 손을 뗄 잡도리다.     이처럼 그는 도임해서 석달도 안되는 사이에 안고있는 문제가 돌출하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십개 기업과 단위를 거의다 한두차례씩 훑었다.       그의 사업은 사실 무겁고 번거롭다. 해외로 로무일군을 파견하고 시장에서의 음식안전을 틀어쥐는데로부터 시작해서 초상인자대표단을 이끌고 해외고찰방문을 하고 내외 고찰단을 접대하는데 이르기까지 크고작은 일들이 항상 끊이지않는다. 사무실에 앉아서 문제를 연구할 시간마저 없다. 그러니까 조사하는 한편 문제를 해결하고 배우면서 일하며 일하는 가운데서 배우는 수밖에 없다. 3월 초 이래 한주일에 그가 단독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은 시간은 불과 두시간밖에 안 된다. 그외 시간은 전부 기층에 내려 가 실제문제를 해결하는데 썼다.     사업과 생활면에서 리룡희는 자기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하다. 직무가 진급함에 따라 그는 특히 렴정문제에 보다 자각적으로 주의를 돌리고 있다. 당내의 감독, 법률의 감독과 군중들로부터 오는 감독을 접수하고 배금주의, 향락주의와 극단적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권력관, 명예지위관, 리익관과 인정관을 잘 넘기기에 십분 류의한다. 그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명히 가르고 “제1책임자”란 특수신분을 리용해 사리를 도모하거나 특수화를 부리지 않으며 주택, 승용차의 사용문제에서나 개인생활, 가족과 친척,인척의 취업 등 문제에서 종래로 단위에 페를 끼친적이 없다.       그의 과외애호는 주로 촬영이다.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한 4개월간의 기회를 리용,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면의 자료를 수태 찾아 읽고 연구하였으며 피타는 노력을 들여 미국사회 이모저모에 대한 대량의 사진을 찍어 사진 500여폭에 7만 여 字의 문자해설이 달린 책자 을 탈고, 출판했다. 독서 역시 그의 애호이다. 그가 읽는 책은 고금중외의 정치, 경제, 문화에 천문, 지리, 력사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아주 광범하다. 그외, 그는 컴퓨터기술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한다. 외국어 공부도 내내 놓지 않고 있다.   , 료녕민족출판사, 2004년
19    "10등현상"에 대하여 댓글:  조회:4260  추천:169  2007-05-01
당신은 아들(혹은 딸)이 학급에서 1등(학습성적)을 하는것이 좋겠는가? 아니면 10등을 하는것이 좋겠는가? 누군가가 이런 류의 물음을 제기해 오면 우리는 경하면 "그것도 문제라고 내놓는가?"하고 그 말을 장난의 말로 치부하여  너그럽게 웃어주거나  중하면 "저 사람 머리가 돈게 아니야?" 하고 이상한 눈초리로 정신질환자를 바라보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10倍速의 경쟁시대에 자녀가 학급의 1등, 지어 학교의 1등을 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어느 부모에겐들 없겠는가.   그러나 "10등"이 "1등"보다 나을 수 있다는 론리와 함께 그 론리를 받쳐주는 연구결과가 제시되여 중국 남부 전역의 여론을 휘저어놓은 적이 있다. 일반에 통하는 상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新 관념이여서 많은 물의를 빚어내기도 했지만,  의례 그렇게 됐어야 할텐데 하는 합리상상이 왕왕 빗나가 의례 그렇게 돼야 할 일이 그렇게 되지 않고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할 일이 오히려 그렇게 돼버리고 마는 일이 非日非在인 우리의 생생한 현실생활에서 우리는 고정관념을 개뜨려야 할 필요성과 함께 입시교육과 소질교육 문제해결에 대한 현실적 대안마련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아울러 갈수록 1등을 하는 학생들에게 문제점이 따르는 경우가 있을수 있고 10등(꼭 10등이란 얘기가 아니고 10등을 포함해 중등 정도의 성적을 말함)을 하는 학생들에게 되려 利點이 주어질수 있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항주시 천장소학교의 교원 周武씨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리유를 어느 정도 알수 있을 것이다. 1989년에 주무씨는  초청을 받고 졸업생들의 모임에 참가한적이 있었다 한다. 그때 그는 예상밖의 奇현상을 발견하고 내심 놀랐었는데 그 현상인 즉 그번 모임때 이미 부교수나 경리로 된 학생들은 학창시절에 학습성적이 그닥지 않았었다는 사실과 당년에 성적이 뛰여났던 학생들은  반대로 지금 그렇다 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였다. 실상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례는 아주 많다. 다만 우리가 이런 사실에 대해 진일보의 리론 사유를 하지 않고 있거나 하려는 생각마저 가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자기의 발견에 충격을 받은 주무씨는 졸업반 학생들에 대해 추적조사를 벌리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151명 학생을 추적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였다.소학교 때 主課 성적이 5등 안에 들었던 학생중 43%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 성적이  뒤로 밀려난 반면에 7~15등에 들었던 학생의  81.2%는 초중과 고중에 붙은 후 등수가 앞자리로 바뀌였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주무씨는"10등 현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10등 현상"은 왜서 생기는 것일가? 이 원인을 구명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현실적으로도 필요할 것이다. 현실을 들여다 보면 대개 主課 성적이 뛰여난 학생에게 부모와 선생님들의 관심과 배려가 쏠리는 경우가 많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른 바의 배려란 대부분 학과성적을 높이는데 과분하게 치우쳐 학생은 왕왕 모종 압력에 시달리게 되며 따라서 능력예비와 학습자주성의 발휘에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와중에 학생은 학습목적에 異常변화를 가져와 장래의 발전에 토대를 닦기 위해서가 아닌, 학습점수를 표현하기 위한 공부에 자신을 맡기기 쉽다.   그러나 성적이 10등 좌우인 학생군체는 상황이 다르다. 상대적으로 선생님이나 부모들로부터 관심이나 배려를 덜 받게 되는데 그것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 어른들로부터 오는 압력이나 속박에서 탈피하여 학습의 자주성이 보다 강하고 취미분야도 더 넓어질수 있으며 따라서 인생의 경기판에서 승자가 되기가 비교적 쉬워질수 있다는 리치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관련되는 다른 실례도 떠올릴수 있다. 대만의 유명한 기업 聯華電子의 대변인 劉啓東씨의 학창시절 학습성적은 종래로 10등안에 들어본적이 없다고 한다. 국제외자법인들의 투표로 "아세아태평양지역 제1인"에 입선됐던 이 반도체분석大家는 "내가 학교 때 공부를 하지 않았던건 아니다. 단지 공부에만 전념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류계동씨는 학생시절 공부만 한것이 아니라 과외독서를 비롯해서 자기가 흥취를 가지는 "다른 노릇"도 했다는것이다.   하다면 "10등현상"으로부터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의 교육을 점검해 봐야 할 점이 과연 없을가?   //吉林新聞
18    [창업칼럼]인맥관리 역시 생산력 개발 댓글:  조회:4190  추천:105  2007-04-29
길가에서 창업청년을 붙들고 느닷없이  당신에게 얼마마한 자원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선생님,지금 저한테 자원이 있는가고 물으셨습니까? 참 웃기십니다. 저에게 자원이 있는가고 물으시다니!' 라고 할 이가 분명 있을걸로 짐작한다. 자원이나 자본이라 하면 젊은이들은 흔히  '사회에 발을 금방 들여놓은 나에게 무슨 자원(혹은 자산이나 자본)이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실상 묻는측이 웃긴다고 볼게 아니다. 아주 진지한 상황조사일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다면  우선 조사대상으로 된 그 창업청년에게 정말 자원 혹은 자본이 있냐없냐를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원은 사람자체라고 한다.그  자원을 분류하면 첫째가 건강한 신체이고 다음은 자산의 축적량과 지출량, 그외 인맥, 심리구조, 지식구조, 인품 등인데 여기서 앞 세가지는 유형자산이고 인맥부터는 모두 무형자산에 속한다.  무형자산에서는 당연히  '인맥'이 제1호로 꼽힐것이다.일명 '관계망' 으로도 불리는  '인맥' 은 지금까지 주로 혈연, 지연, 학연을 지칭해 왔는데 요즘 들어서는  '디지털인맥'  이라는 낱말까지 생겨났다. 서로간에 정보를 우선해서 주고받는 사람들의 가까운 관계를 인맥이라 할수 있겠다.  사회인이라면 세상에 태여난 그 순간부터 자의와는 무관하게 일정한 사회관계속에 놓이게 되는데 일단 사업에 참가하는 나들에는 인맥관계가 급격히 확장되여 친척, 친구,동료,동창생, 이웃과 기타 방식으로 만나 알게 된 사람들이 다 그 인맥범위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중 친척, 친구나 동창생 등이 인맥관계의 핵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그래서 중국에 옛날부터 '집안에서는 부모에 의뢰하고 밖에 나가면 친구에 의뢰하라'는 말까지 생겨났나보다. 근데 언제부턴가는 '30전에는 능력에 의뢰하고 30후에는 인맥에 의뢰하라' 는 새말이 사이버공간에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우에 언급한 그 창업청년은 가능하게 이미 유용한 인맥을 갖고있을수도 있다. 이제 중요한것은 평소에 대인관계를 윤활하게 하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해서 필요한 사람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미리 확보해 둠과 아울러 기성성과를 부단히 확장, 활용하면서  '인맥관리' 를 잘하는것일 터인데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 이런 중요한 자원, 자산과 자본을 보아내지 못하고 그것의 활용과 확장에는 더구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다양한 관계속에서 학연, 지연, 혈연 등을 축으로 형성되는 인맥이 경쟁이 있는 모든 경우에 중요한 역할을 발휘함은 의심할나위 없는 일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도 인맥을 주요기반으로 발전해왔음을 감안하면 그 작용을 충분히 알수 있다.   믿음직하고 경험도 풍부한 조력자 한둘만 있다 해도 큰 도움이 될수 있다.지금 각지에서 다양하게 조직되고있는 여러 가지 동호회도 인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흡인력이 있을법하다. 사이버공간도 인맥구축의 좋은 발상지가 될수 있다. 창업청년은 가능한 인맥을 많이 확보하기에 신경을 써야 하며 그러면 사업전개에 절대적으로 리롭다.  물론 인맥만 있으면 모든게 다되는게 아니며 또 인맥이란것이 한번 구축하면 영원히 불변하는것도 아님을 분명 알아두어야 한다. 인맥이 깨지는 일도 사실 흔히 발생하기 때문이다.주로 일방적으로 자기의 리익만 챙기려 하고 조력자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게 문제다. 조력자가 꼭 보답을 바라는것이 아니라 해도 그렇다. 도움을 받는 측이 마냥 그새 장새로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의 이미지는 자연 손상을 입게 되기 마련일 터이요, 기존 인맥자원의 리용은 그때로부터 원활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다수의 경우 인맥의 지속적인 활용은 또한 자신의 실력이 전제돼야 비로소 가능하다. 실력이 전무한 사람의 인맥활용은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십상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조력자에게 불리익을 줄수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그 인맥은 오래 가기가 힘들게 된다.//길림신문
17    [창업칼럼]미국회사: “저질제품을 급히 수매함!” 댓글:  조회:4164  추천:109  2007-04-06
(음악이 시그러우시면 Esc를 누르시고)“저질유리섬유제품을 급히 수매합니다!”   일전 인터넷 사이트를 유람하다가 이런 광고제목을 보고 호기심이 동해 그 내용물을 읽어봤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저희는 미국회사의 중국내 구매담당인데 미국의 대형 에어컨제조상의 위탁을 받고 국내에서 저질유리섬유제품을 긴급 구입중입니다.수요량은 매달 20컨테이너...”   미국회사에서 저질제품을 매달 20컨테이너 사간다?이 광고를 보고 호기심 발동도 잠간,이상하게도 갑자기 전에 안 하던 생각들이 머리 한쪽을 비집고 올라오는 것이였다.저질원료도 재처리과정을 거치면 고급원료로 될수 있겠다?고급원료가 되면 고급 상품 생산도 당연히 가능할거 아닌가?저질제품을 헐값으로 사다가 유용하게 쓸수도 있잖아?   그렇지, 기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중국의 저질제품이 외국에 수출된 례가 없는것이 아니다.이를테면 북경의 한 우산공장에서 생산하는 우산은 형편없는 저질이였다.중등 정도의 비나 막을 수 있는, 어디에 살짝 긁혀도 쫙 찢어져나가고 조금만 심하게 굴면,아니, 몇번만 열었다 접어도 우산 전체가 각이 물러나 다시 쓸수가 없을 정도인 그런 우산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다른 질 좋은 모든 우산을 제치고 유독 이 제품만이 열띤 경쟁에서 단연 왕자로 뽑혀 영국, 미국,독일 등 경제발달국에로의 수출특권을 땄다 하니,그것도 매번 수출량이 저그만치 수십만 자루라 하니 상계법칙의 무상함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기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가? 원래 구미의 발달국에 사는 사람들은 바깥 나들이를 할 때 거치장스러움을 고려해서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지극히 드물다고 한다.거리에 나갔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면 길가의 점포에 들어가 몇딸라를 주고 우산을 사서 쓰면 그만이다.값어치가 안 가니까 아까울것도 없고 해서 집까지 쓰고 와서는 바로 쓰레기통에 버린다.일부 슈퍼에서는 “따뜻한 봉사”란 회사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비가 올 때면 고객들에게 무료로 이런 우산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일차성 소비물이니만큼 각별히 잘 견디고 우수해야 할 필요가 없다.단 값은 쌀수록 좋은 것이다.이런 경우의 이른 바 “저질제품”은 가짜저질상품을 진짜량질제품으로 속여서 비싸게 팔아먹는 그런 간상배적행위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잘 팔리는 상품이 반드시 량질제품인 것만은 아님을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결코 저질제품생산을 창도함이 아니고 시장매출은 고객의 다양한 실제수요에 의해 결정된다는것을 상기시키고자 함이요,우리의 젊은 창업자들이 국내외 시장고찰을 할 때 모종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변화 많은 시장속에서 유용한 정보를 신속히 포착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가질것을 권고하고자 함이다.//길림신문
16    [창업칼럼]창업자가 써볼만한 상술--《호기심유발책》 댓글:  조회:4163  추천:98  2007-03-31
홍콩에 점착제를 경영하는 전문점이 하나 있는데 이 집에서 구사한 상술(商術)이 아주 흥미롭다.   이 점포의 주인이 한번은《강력만능점착제》라는 새로운 제품을 들여왔다. 질이 만점이라 잘 팔릴수는 있겠는데 그러자면 광고를 해야 했다.그런데 조업한지 얼마 안되는 작은 점포로서는 그 광고료가 만만치 않았다.광고회사에 퍼줄 돈은 없고 상품은 팔아야겠고 이럴 땐 어떡허지?며칠동안 알골을 굴리던 점포주인이 갑자기《으핫,한가지 수가 있어!》하고 머리를 탁 쳤다.  주인은 가치가 천원 되는 금화 한잎을 점포 앞벽에 풀(바로 새로 들여온 그 점착제)로 찰싹 붙여놓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여기 금화 한잎 보이죠? 먼저 뜯어가는 사람이 임자입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저런! 공짜라면 비상도 큰것으로 골라 먹는 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금화를 뜯어가지려 했지만, 짜장 이거 아니올시다였다.뜯어내기에는 너무나도 단단히 들어붙어 있어서 벽돌장채로 들어내기 전에는 금화를 자기것으로 만들기가 전혀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과는 불보듯 했다.마찬가지로 질이 좋은 다른 점포의 점착제는 매상고가 내내 별로였지만 이 집만은 삽시에 소문이 쫙 나서 성업이 꽤 오래 지속됐다 한다.  이집 주인이 쓴것이 대관절 무슨 묘수인가?《호기심유발》이라는 상업술이다.모종의 물욕에 바탕을 둔 호기심은 인간의 본성(큰 비상을 골라먹는 사람을 망라하여 우리 모두는 적게많게 다 이런 근성을 가지고 있다)이라서 일단 유발이 되면 뜻밖의 효과를 보는 수가 있다. 때문에 심리학원리를 시장판매술에 적용, 사람들의 호기심을 리용하거나 이끌어내는것이 이미 갈수록 많은 창업자들의 흥취를 사는 중요한 경영처방으로 자리하고있다.   현재 우리 조선족의 다수 창업자들은 짧은 밑천으로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큰돈을 털어 중앙TV 등 거물급매체에 큰 광고를 하기 어렵다.작은 지방신문 귀떼기에 성냥갑만한 싸구려광고는 할수 있겠지만 그 효과가 여의치 않다.이런 경우엔 위에 언급한 점포주인의 방법도 써볼만한 것이다.  큰 기업들에서는 체면상 이런 장난같은 방법을 쓰지 않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광고에 엄청난 돈을 얼마든지 쏟아부을수 있으니까.기본상술이야 뭐 다를리 있을가마는 그래도 큰 기업에는 나름대로의 상술이 따로 있다.그러니 초창기의 작은 창업자들에게 큰 기업들이 쓰지 않는 이런 방법을 능력껏 사용할수 있는 전용특권이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 상술을 사용할 때 류의해야 할 점이 있다.뭐니뭐니 해도 상품의 질에 대해서만은 절대적으로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만약 밥풀같은 저질풀로 금화를 붙여놓고 재간있는 놈은 떼여 가라고 큰소리 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는가? 천원을 공떼우는건 둘째치고 그 즉석에서 미친놈이라고 비웃음과 빈축을 사게 될것이요,심하면 사기꾼으로 몰려 패가망신할수도 있다.물론 이와 같은 미련탱이는 없을테지만, 비유를 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상술을 구사함에 있어서 사기(詐欺)는 금물인것만큼 상품의 질을 우선 확보하고나서 비로소《호기심유발책》을 써야 한다는 얘긴데, 생각과는 달리 이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그런 방책이 하늘에서 떨어지는것도 아니요 땅속에서 솟아나오는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고객들의 심리를 연구해야 하고 그들이 듣도보도 못했던 새로운 실행안도 몸소 더듬어내야만 하는것이다.평소에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않으면 호기심유발묘수가 어디서 나오겠는가? //길림신문  
15    연변항운협주곡 댓글:  조회:4304  추천:80  2007-03-30
   연변항운협주곡 높은 산 깊은 골 동트는 연항 망망한 대해를 헤치고 간다 야망과 패기가 가득찬 연항 진취적 기상은 우리의 자랑    --에서   연항--심신유곡에 떠오른 기적 --세계와의 거리를 엄청나게 줄여 오늘 세상은 환상과 신화를 현실로 만드는 시대에 와있다. 하늘에 올라 별을 딴다 해도 별로 놀랄 이가 없으리만치 세상은 많이 변해 있다. 연변항운공사의 다섯척 상선이 동아세아 각국의 주목례를 받으며 일본해, 황해를 주름잡아 달리고있다. △“연변1호”화학품특수선의 위용. 1992년 10월 10일, 연변의 첫 상선 인수식이 천진항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이날 연변, 길림은 해상선박이 없던 자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부터 나흘만인 14일, 는 화학제품을 가득 싣고 천진항을 떠나 18일 한국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는 연변항운사의 뜻깊고 성공적인 첫 운항이였다. 드디여 1993년 6월 12일 연변항운공사가 자기의 탄생을 세상에 선고했다. 그후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연변항운은 1,000여만 딸라에 달하는 거액의 투자로 네척의 선박을 구입, 국제 항선우에 륙속 띄움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크게 놀래웠다. 바다와 부두를 끼지 않고 있는 내륙지로서 해운의 초창기에 이처럼 방대한 자금의 투하와 더불어 총적재톤수 2만톤을 육박하는 중형선박 다섯척을 연이어 경영에 투입시킨 일은 국제해운사에서도 매우 보기 드물다 한다. *     *     * 지난 3월 4일, 연변자치주 정협 위원이며 연변항운공사 회장인 전룡만씨가 조선 평양에서 “각방면의 조화협력을 거쳐 부산--청진항로 개척의 모든 준비가 전부 끝났다. 3월 15일 우리 연변항운이 개척한 부산--청진 컨테이너 정기항선은 예정한대로 정식운항에 들어가게 된다”고 전화편으로 정식 통지를 해왔다. 금년 3월 15일!남북분단으로 끊어진 동해허리의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청진항 리용을 통한 일본해 진출을 실현하게 될 이날은 두만강지역 개발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하루로 세계 해운사에서도 그 위치를 차지하게 될것이다. 청진--부산 직통!근해를 통해 세계로!이 꿈은 인제 우리 앞에 현실로 성큼 다가왔고 아울러 아득히 멀었던 세계가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청진항은 현재 적극 개발중인 로씨야의 짜르비노항과 조선의 라진항 외 요즘 유일하게 열릴 우리 성의 대외 수출 항구이다. 주지하다싶이 여직껏 흑룡강, 길림, 내몽골 등 지역의 바다를 통한 수출수입은 거의다 멀고 붐비는 대련항을 통해 어렵게 진행돼왔다. 이 항선이 개통됨으로 해서 이 지역의 “3자기업”을 망라한 많은 기업들은 연항의 선박을 리용하여 막대한 경제적 리익을 창출하게 될것이다. *    *    * 연변항운의 개척사업에 줄곧 큰 힘을 경주해왔던 연변자치주 남상복부주장은 연항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연항은 중국내륙의 유일한 국제항운이다. 산골연변에 선 연항은 일대 기적이다. 연항의 신장발전으로 해서 연변과 주변지역의 수출입은 시간, 경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는 가까운 해상통로를 갖게 되었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이 지역의 경제는 커다란 활력을 얻게 될것이다. 실상 연항의 의의은 이 지역을 훨씬 초월한다.” 기회의 서광 휘여잡고 --사나이 전룡만의 “야심작”                              ---------------------------------------------------------------------- “연변1호”--디젤오일탱크선(유조선), 적재톤수 3404톤, 93년 7월 17일 일본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 운항 구역: 한국의 울산--홍콩--중국의 대련, 상해, 광주--필리핀의 마닐라 ------------------------------------------------------------------- 80년대 하반으로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훈춘의 개방작업과 두만강출해권회복사업, 탈랭전시대의 도래와 함께 다가온 두만강지역개발에의 유엔의 참여는 동북아의 중심, 속칭의 “황금의 삼각주”지대에 력사적인 발전기회를 시사했다. 국제적개발작업이 서막을 고한뒤 정부에서 “제2홍콩”건설을 영접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자국나게 펼치는 가운데 기회의 서광을 틀어잡고 바다에로의 직접진출을 시도, 행동에까지 옮긴 이는 다름아닌 연변항운공사 회장 전룡만씨(금년 43세) 한사람 뿐이다. 85년도 창업의 난바다에 뛰여들어 갓 터진 시장경제의 모진 세파를 헤가르며 선후로 연변대외무역경제개발공사, 중조합자기업연진수산물합자경영공사, 중한합자기업 연고정수기유한공사 등 기업을 일떠세우고 드디여 연변대외무역경제개발그룹을 설립하기에 이른 전룡만씨가 진정 바다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0년도 10월 중국해원대외기술복무 연변공사를 세울 때부터였다. 웅숭깊고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들먹이는 웅심으로 보다 큰 활무대에로의 출범을 계획한 그는 한국 해운계의 인사들과 널리 접촉하면서 서둘러 출두여건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드디여 당시 아직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형편에서도 국내 처음 한국 선주협회와 공식관계를 맺고 연변의 조선족가운데서 부원급 선원 700여명을 키워 한국,일본 등 나라의 상선에 수송하는 등 일들을 신용있게 추진해 나갔다. 수백명 선원을 외선에 보내면서 전씨에게는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국제물류업은 90%이상이 해운을 통해 실현되는데 우리 절로 해운업을 하면 어떠냐?“황금의 삼각주”에서 주무대로 등장한 연변이 으례당당 자기 몫을 해야 할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암시가 되어 그의 뇌리엔 차츰 “우리 항운을 세우자”는 대담한 구상이 륜곽을 그리며 나타났던 것이다. 전룡만씨의 구상에 대해 자치주 정부에서는 물심량면으로 열성껏 도와나섰다. 그와 수년간 합작을 해왔던 한국벗들도 발벗고 나서서 협력했다. 발뿌리 닳게 한국을 드나들면서 입술이 닳도록 유세를 들이댄 결과 한국 금융계를 크게 감동시켜 마침내는 한국특수선 주식회사, 동북선박주식회사 등의 결정적인 련대보증밑에 거익의 국제금융을 도입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가운데 전씨의 끝질긴 노력, 강한 추진력, 드높은 신용이 한국 벗들이 그를 믿고 도와 나서도록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국제표준의 중형해운회사를 일거에 일떠세운 전룡만씨에게는 할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유예함이 없이 일들을 벼락치듯 밀어나갔다. 항운의 원활한 성장을 유력하게 보좌하기 위해 외국 벗들과 공동히 투자하여 한국 서울에 장룡해운회사를, 홍콩에 룡방해운회사를 설립하고 북경에 영업부를, 서울, 홍콩에 선박대리점을 세웠으며 그 외 대련, 광주, 상해 등 10여 개 연해도시의 대외수송대리공사와 실무계약을 체결하고 중국대외수송집단 도문공사 등과도 실무협조협의를 달성했다. 최근에는 한국에 있는 해운집행자매사인 장룡해운회사와 함께 해운경영관리정책협의회를 정식 설립하고 연변항운 연변본사 조직기구도 새오 조정, 확인했다. 이로써 연변항운공사의 조직 기틀은 원만히 잡혀진 셈이다. 그러나 연변항운이 해야 할 일이 어찌 이에만 그치겠는가?   기둥재목이 수풀 이루게 --연항의 인재전략   --------------------------------------------------------------------  "연룡3호"--잡화물선, 적재톤수 8800톤. 93년 10월 24일 중국 영구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한국의 부산--중국의 영구, 룡구, 상해--대만의 기륭, 화현 ---------------------------------------------------------------------   “인재! 인재!” 항운공사를 세울 준비를 할때부터 전룡만씨의 머릿속에서는 내내 이 문제가 지꿎게 맴돌이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그마한 일을 벌려도 인재가 수요되는 법인데 황차 바다라는 개념과 황운이라는것을 전혀 모르는 연변땅에서 그가 세우려는 것은 국제대상의 현대화한 대형물류업이 아닌가! 그에 걸맞는 상당수의 인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선진적인 선박을 아무리 많이 해놓는다 해도 그것은 실상 페철무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여 그는 중해연변공사에서 해원송출사업을 할때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면서 풍부한 해원사업경험을 쌓은 량동섭, 엄영자 등 중견인물들을 중역진에 기용하는 한편 고급해원양성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92년도부터 해마다 100여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해서 중등전문학교 졸업생을 남경항해학원에 19명, 광주항해전과학교와 대련해운학원에 40명을 학습보냈고 또 한국 선주협회와 연줄을 달고 반년에 2명씩 한국의 해운회사에 보내여 실습하도록 했다. 그외 해마다 영어에 능한 대학교 졸업생들속에서 엄격한 시험을 거쳐 신입사원을 10명씩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하다고 그는 인정했다. 참신한 사고방식을 가진 세계기업의 발전추세를 따를수있는 그런 관리일군이 필요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취한 방법이 외국으로부터의 인재도입이다. 처음 청해들인 인재는 화교출신, 한국태생의 담도굉(한족, 32세)씨다. 84년도 한국고려대 기업관리학부를 나온 그는 현대그룹에서 유망한 관리일군으로 일하면서 오스트랄리아 주재원으로도 3년간 근무했었는데 상당한 외국어 회화능력과 현대화기업관리능력을 갖고있다. 다음은 신연우(24세)씨인데 특수산업학교인 부산해양대에서 항만, 운송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항운지식이 막히는데가 없고 조직능력도 갖고 있으며 영어에 또한 능란하다. 그들은 선후하여 서울서 전룡만씨의 눈에 우연히(?) 걸려들었던 것인데 허심탄회한 속심얘기들을 수차 나눈 끝에 담도굉씨는 현대그룹의 정예공업회사에서의 승진기회를 내버리고, 신연우씨는 미국의 대형물류회사에 들어갈 기회를 포기하고 결국 “심산유곡의 연변항운”에서 하나와 같이 모이게 된것이다. 그들의 연변진출에서 연변개발의 밝은 전망이 전제로 작용한 것은 물론이지만 전씨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떠밀어주었던 것도 역시 사실이다. 연변항운에 온 첫날부터 그들이 공동히 겪은 것은 뛰고있는 바깥세상과는 의념과 사고방식이 판판 다른 그런 사업환경과 분위기였다.“환경 속에 내가 용해돼 버리고 마느냐 아니면 환경을 변화시켜 뛰는 세계에 적응시키느냐”가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도전을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적극적인 스타일로 그 도전에 응했다. 말그대로 항운이안 세계적인 물류서비스산업인만큼 국제관례에 따르도록 연항의 모든 기초사업을 다져가야 했다. 총경리 중임을 떠멘 담도굉씨는 이한 요구에 좇아 회장보좌, 통솔관리, 업무감독, 정책연구, 영어교수 등 일상사무를 타진해나가는 한편 “직원의 자질향상”,“회사의 대외이미지 향상”,“현대화기업질서수립”을 목표로 내걸고 그것을 회사의 전반 상버에 철저히 관철시켜나갔다. 전화를 받고 손님을 접대하는 례절, 상하급간의 례절로부터 시작해서 사업에 림한 자세, 실무자질제고 등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굳어진 재래의 습관을 새로운 이미지로 부각한다는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그것을 봉사정신, 애사정신, 분초정신 등 일련의 정신교육으로 받쳐주면서 아주 효과 있게 이 일을 진척시켜나갔다. 연항 종합기획실에 도임한 그날부터 신연우씨는 우선 지식과 경험의 결여로 초래되는 낮은 사업효률, 주, 부 순서가 뒤바뀌고 사업절차가 무시당하여 일어나는 질서마찰 등 곤혹을 자주 치러야 했다.하여 그는 자신이 익해 배워두었던 전업지식을 최대한 발휘해서 선원, 선박, 재무, 해사 등 제반 부서에 대한 종합적 기획관리와 해운지식 전수 등 업무를 진지하게 수행함과 동시에 서둘러 모든 사업절차를 새로 분명하게 만들어내고 각 부서들에서 소정의 절차를 드팀없이 밟도록 확실한 조치들을 따라세우기에 전념을 했다. △“연변항운”은 태평양을 활무대로 삼아가지고 연변과 주변지역의 경제신장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충정을 토설하고 있는 연변항운공사 회장 전룡만씨. 연항에서 외국의 선진적 관리경험을 도입하여 조직, 관리, 경영체계를 일원화하고 인사, 행정, 재정, 기획체계를 개혁, 조정하는 행정에 한국에서 온 이 두 젊은 일군은 각자의 사업분야에서 열심히 뛰는 정신, 상당한 실력과 높은 사업효률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전 직원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영향과 전체 직원들의 노력 밑에 현재 연항에는 현대화 기업답게 완전히 새로운 사업분위기가 형성되였다. 여기에서는 일에 게으름을 부리거나 사업질서를 흐리우거나 상급에 거역하는 직원을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창의적인 자세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맡은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 반수 직원이 중등영어 수준에 이르렀고 전체가 컴퓨터 조작을 배워냈으며 또한 상당한 해운지식을 배워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중견력량들이 불끈불끈 솟아나오고들 있다. 바뀌여진 환경은 어느새 사람을 키우는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     *     * 이 장에서 간과해 넘어가지 말아야 할 건이 하나 있다. 그것인즉 전룡만 회장이 한국에 스승 두 분을 모셨다는 것이다. 한분은 정책고문으로 한국동국대 경제학교수이며 동북아경제연구소 회장인 김태홍선생이고 한분은 한국 동북선박주식회사 리사인 한강륭선생이다. 1965년도에 연세대를 마치고 미국에 류학 가서 박사칭호까지 받은 김태홍교수는 귀국한 뒤 한때는 한국정부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으로도 있었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두만강 개발 등 국제 경제협력활동에 빈번히 참가하면서 , 등 저서도 펴낸 한국 1류의 중국경제연구 전문가이며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명망 높은 분이다. 1968년도에 한국해양대를 졸업하고 한국특수선주식회사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한강륭리사는 풍부한 해운경영경험을 가진 실력가인데 중국조선족선원송출사업에서 전룡만씨와 수년간 합작하면서 연항의 설립을 위해 크게 조력했던 분이다. 이 두분은 현재 연항으로부터 여러 가지 연구쩨마를 맡아가지고 연항의 순탄한 발전을 위해 고심들을 하고있다.   *     *     * 연항의 인재전략은 한마디로 말해서 현존인재를 기용하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며 외부인재를 도입하고 외계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회사에 적용시키는 전략이다.   동북아해운과 사고방식 전환 --김태홍교수,전룡만회장과의 인터뷰 -------------------------------------------------------------  “연룡4호”--세미컨화물선, 적재톤수 1600톤, 93년 12월 24일 부산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부산--청진 -------------------------------------------------------------   (연항에 대한 몇가지 관심사를 가지고 일전에 두분과 인터뷰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따로 가진 부동한 내용의 대화지만 서술의 편리를 위해 여기에 한데 묶어 적는 바이다.)   김태홍교수와 가진 인터뷰   기자:갓 탄생한 연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태홍교수: 짧은 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 봅니다. 지리적으로 불리하고 (바다와 떨어져있음을 말함--필자 주) 기초작업이 끝나지 않아 어려운 점이 많은 연변실정에서 이와 같은 큰일을 해냈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연항의 성과를 적어도 연해도시 상해나 대련에서 성취한 것의 200%로 볼 수 있습니다. “황금의 삼각주”개발과 더불어 이 지역의 기업들은 연항의 선박을 최대한 리용하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연항은 이 지역 경제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기자: 근년래 세계경제의 불황으로 해운업도 진통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김교수의 견해는요? 김교수: 연항이 국제해운저조기에 탄생한건 사실입니다만 실상 저저기의 끝은 상승의 시발점으로 되기에 연변항운도 상승의 기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동북아지역의 경제는 호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경제기술합작이 활발해짐에 따라 자연 무역을 통한 물동량이 급 장성하게 될 것인데 물동량 대부분은 항구를 통한 해운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항운은 이 지역 발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업입니다. 기자: 연항의 성공에 대한 확신여부를 동북아 개발의 큰 시각으로 고찰함은 두말할 것 없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국제해운의 특유의 존재발전법칙으로도 가늠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김교수: 그렇습니다. 이 문제를 해답하자면 이 지역 해ㅔ운의 성격부터 구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역의 해운은 그 성격으로 보아 연근해 해운입니다. 이 지역과 같이 가까운 거리의 해운에는 중형선박이 알맞지요. 하지만 동북아의 일본, 중국, 한국, 로씨야 등 나라는 모두 해운 강국들인만큼 대부분의 국가 기간 해운 선사들이 모두 대형 선박들로 편성돼 있어서 원양해운에는 알맞지만 근거리해운에는 알맞지를 않아요. 소형 선사들은 내항이 위주여서 역시 이지역의 해운에 알맞지 않습니다. 황해, 일본해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지역에서는 주로 이삼천 톤, 만 톤 좌우의 중형선박들로 편성된 연변항운이 우세입니다. 대형선박해운과 소형 선박해운의 “틈새시장”--이것이 바로 동북아 연근해 해운입니다. 연변항운은 이 “틈새시장”을 최대한 리용해서 신속히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자: 대형상선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어렵다는 리유는 뭡니까? 김교수: 일본, 한국, 대만 등 나라와 지역의 경우, 비싼 인건비가 그들을 주춤하게 만드는 관건적 요인이 됩니다. 다음 륙상관리비가 너무 비싸고 비용이 많이 들어 도저히 리윤을 내기 어렵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되지요. 대형선박의 연근해해운은 수지가 맞지 않은 노릇이라 그거지요. 그러나 중국의 경우 저렴한 인건비의 선원을 양성할 수 있고 륙상관리비도 상대적으로 싸기에 한국, 대만 등과의 생존경쟁에서 충분한 우세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여건을 어떻게 리용하느냐는 완전히 연항 지도진의 역할에 달려있습니다. 요컨대 전룡만회장은 추진력이 아주 큰 사람이고 정부 측의 대폭적인 지지도 있기에 연항은 전망이 매우 밝다고 봅니다. 이를 확신하고 있기에 한국 측에서도 연항을 발 벗고 나서서 돕는 거죠. △국제금융도입은 신용을 생명으로 한다. 그만큼 전룡만회장의 어깨에 놓인 짐은 무겁다. 국제차관서약서에 싸인하고 있는 전씨(앞줄 가운데 사람).   전룡만회장과 가진 인터뷰 기자: 현재 여론은 연항이 전대미문의 사업을 창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을 해나가면서 전회장이 가장 깊이 느낀 감수는 무엇입니까? 전룡만회장: 모든 일에서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부한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놀랍게 변해있는 바깥세상에 적응할 수 없어요. 쉬운 례 하나 들어봅시다. 로임을 누가 주냐고 물으면 우리는 사장이 주는 게 아니라 고객이 준다고 말합니다. 사장이 준다는 것과 고객이 준다는 것은 완전히 상반되는 사고방식이지요. 로임을 고객이 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다면 전화 한통을 받아도 심상히 넘겨버릴 수가 없습니다. 실상 전화 한통도 순간광고에 다름 아니죠. 친절한 표준어로 “안녕하세요! 연변항운입니다.”고 하면 그게 바로 광고가 되거든요.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냥 견지를 해나가면 그게 곧 큰 광고역할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전엔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요. 순간순간을 잘 해 나가는 사람이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벌린 게 “초(秒)관리운동”입니다. 매 하루를 분, 초로 나누어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주먹구구식의 경쟁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기자: 국제물류서비스기업으로서의 연항의 영업활동취지는 무엇입니까? 전회장: 통일적이고도 일원화된 경제체계 속에서 유력한 책임경영제를 도입하고 민족과 국적, 지역과 국경에 상관없이 세계적인 조직망을 건립하여 영업활동의 국제화와 효률화의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 한국, 인도네시아, 타이 등 7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그중 서울,연변의 륙상 근무 인원만 해도 16명이 외국인입니다. 사업효률성과 경제효과성에 구애 없이 월급을 주고 상금을 주던 그런 무책임한 관리체계를 털어버려야 합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분공위임하고 그 책임과 근무여하에 따라 승진을 결정하고 공과를 판단하는 새로운 관리체계로 바꿔버리지 않으면 안 되지요. 우리는 항운의 현대화관리요구에 따라 20여세, 30세 좌우의 젊은이도 지도진, 중역진에 올려놓고 그렇지 못한 경우엔 원로파들도 말단 직원으로 배치하는 등 대담한 개혁조치를 댔는데 전반 사업에 대한 추진이 매우 컸습니다. 내부관리 측면으로 볼 때 우리의 사업효률은 이미 국제수준에 와있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자: 전회장의 최종목표는 무엇입니까? 전회장: 동북아 최대의 기업을 키워나가자, 이 지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어 사외에 보다 많은 재부와 가치를 창조해주자는 게 저의 리상이자 인생목표입니다. 목표를 크게 세워놓고 보니 어려움에 부딪칠 때도 많고 저의 능력과 회사의 능력에 비해 부하가 점점 커가고 있음도 느끼게 됩니다만 그럴수록 나 하나를 둘로, 셋으로 쪼개서 배 이상으로 뛰여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국제해운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기업을 모델로 삼아 열심히 뛰고 있어요. 이 순간에 일본의 회사들은 어떤 스타일로 일하고 있느냐? 이런 생각을 안고 말입니다. 직원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처사가 국제적인 흐름에 몹시 뒤진다면 회사가 도저히 살아남질 못할 테니까, 그리고 회사운영효률의 여하에 따라 직원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만큼 직원모두가 높은 자각을 안고 뛰고있는 거죠. 때문에 곤난도 많지만 신심으로 충만돼 있습니다. 뜻이 있는 사나이들이 애써 일한다면 사회의 지지 밑에 꼭 풍만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연변자치주정부와 한국 벗들은 연항의 개척사업을 시초부터 물심량면으로 지지 협력해 왔다. 호상협력을 약속하며 뜨겁게 손을 잡은 자치주 남상복부주장(오른쪽)과 한국케미칼해운주식회사 박종규사장.   동트는 연항, 서막은 열렸다 --연변항운의 프로젝트와 밝은 전망 --------------------------------------------------------- “연룡5호”--잡화물선 적재톤수 2611톤, 93년 11월 5일 한국 서울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한국--일본--중국--조선 청진 -------------------------------------------------------- 금년 1월11일부터 이틀간 연변항운은 제1기 총회를 연길에서 가졌다. 이 회의는 1년 남짓한 동안의 준비와 연습을 거쳐 바야흐로 본격적 운영에 들어가는 시각에 열린,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그 영향력을 과시하게 될 중요한 회의였다. 회의에서는 연항의 지난 단계 사업을 총화검토하고 세계경제,해운형쎄와 내외사업여건을 연구분석한 기초우에서 향후목표를 전략적각도에서 명확히 제출했다. 회의는, 40만톤의 화물수송과 1000만 딸라의 영업수입창출을 금년도 목표로, 년간 150만톤 화물을 수송할수있는, 총적재톤수가 5만톤에 달하는 동북아해상수송의 중견사로 발돋움하는것을 96년도 말까지의 목표로, 해륙공복합수송체계를 수립하는것을 세기 말까지의 목표로 제기했다. 연항의 “야심”만만한 삼단도약전략! 뽀세창고, 콘테이너적하장 등 기초시설의 마련, 컴퓨터련락망 설립 등 현대화고한리의 정착, 엄밀한 인재양성체계의 확립, 과학적조직, 관리체계의 진일보의 구축, 타사와의 업무제휴 등을 그 바탕에 깔고있는 이 프로젝트는 두만강 삼각주에 대한 국제개발 프로젝트가 추진됨에 따라 허황한 신기루로가 아니라 뚜렷한 현실로 우리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게 될것이다. 보라, “연변1호”는 가동해서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연습의 때를 지우고 흑자를 기록했고 그 외의 선박들도 흑자경영체계의 기치밑에 한국, 일본, 중국, 조선, 필리핀 구간을 부지런히 뛰고들있다. “연룡4호”도 당금 동북과 세계와의 거리를 엄청나게 줄여 이 지역 경제에 흥분제를 주입하게 될 것이다. 동북아지역 물동량의 급증추세는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연변항운은 부원 급 선원 700여명을 키워 국내외 여러 선사들에 수송했다. 그들은 연변 제1대의 해원들이다. 해륙공복합수송체계의 수립도 막연한 호언장담이 아니다.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소요의 거액신용차관을 약속해왔기 때문이다. 전룡만씨는 말한다-- “방향과 목표를 뚜렷이 잡아놨으니 아무튼 우선 금년을 촌놈이 신사무대에서 겨루어 이기는 한해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촌놈”이 “신사무대”에서 겨루는 한해로! 아울러 겨루어 이기는 한해로! 이것은 심산유곡 연변항운의 세계로 향한 “야심”적인 도전이요, 진공태세인것이다. 이런 도전적 스타일은 1996년도 말, 본세기말에 가서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또한 약동하는 연항의 희망소재이기도 하다! (본문의 사진은 연변항운공사의 량동섭씨가 제공했음)  
14    젊은 창업자들에게 해보는 제안 댓글:  조회:4021  추천:115  2007-03-22
옛날 녀자들은 신랑을 잘못 고를가봐 무척 겁을 냈다. 일단 시집을 가면 좋던 궂던 그집 귀신이 돼야 했으니까. 지금은 세상이 변해서 아이 둘을 낳고도 훌쩍 리혼해서 행복을 찾아 떠나지만 그래도 따지고 보면 와중에 쓰라림과 손실이 기수부지다. 젊은이들의 창업도 결혼과 다를바 없다. 창업과 《결혼》했다가 한번 실패하면 기가 꺾여 재기의 꿈마저 접고 취직이란 《행복》을 찾아 떠난다. 향항, 상해와 북경의 창업조사에 따르면 20세좌우 젊은이들의 창업열이 40대나 50대를 초월했다 한다.길림성에는 아직 통계가 없지만 사회 일반보다 청년창업률이 높을거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런 청년들은 개인봉사업, 상업봉사나 창조성 업종에 종사하고있는것이  통례이고 그중 성공사례도 적지 않아 다른 젊은이들을 시샘케 하고 들뜨게 한다.이와 때를 같이 하여 보도매체들은 한결같이 청년창업을 부채질하고있는것이 현실이다.  전반 시장경제가  성숙돼감에 따라 상업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마당에 멋도 모르고 창업에 몰입했다가 골탕을 먹는 사실에 대해서는 류의하는 이가 별반 없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열정은 하늘을 찌르지만 자본이 없고 경험도 없어 창업에서 실패하는 사례가 많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종당에 성공하고야 마는 그런 정신은 창도해야 한다.  하지만 사고방식은 이런  경우에도 활성화하는것이  바람직할것 같다. 이를테면 어느  괜찮은 기업에서 일하다가  날개를 어느 정도 굳힌 다음 창업의 길에 나서면 어떨가 하는 물음을 한번쯤 스스로 던져본다면? 경영의 달인,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질만큼 수많은 업적을 남긴 피터 드러커는 《가장 성공한 젊은 기업인은 큰 기업의 조직에서 한 5년 내지 8년 정도 일해본적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그 기업에서 배운 경영관리방법으로 굽은 길을 적게 걷고 성공을 했다》고 말했다. 집계에 따르면 가장 빠른 성장을 기록한 세계 500대 기업에서 71%에 달하는 기업의 핵심기술,핵심자원은 모두 기업창시자가 시초에 취직했던 기업에서 가져온것이라 한다. 놀랍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럴수밖에 없을것 같다. 그러고 보면 경력 역시 중요한 자원이다. 큰 회사에서 뛰쳐나와 창업을 한 사람들에게는 직업생애에서 쌓아올린  환경우세와 더불어 전문업종에 대한 추앙을 받을만한 지식이 있으며 업종내 사정에 밝은 자로서의 특수한 지위도 가지고있다. 물론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창업을 하면 좋은 점도 있다. 실패를 거듭해도 나이가  젊기에 재기할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으며 그렇게 어렵사리 쌓은 경험으로 큰 성공도 가능한것이다.하지만 치러야 하는 댓가가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클 경우 모든 꿈이 수포로 돌아갈수 있음도 반드시 예견해야 한다. 이제 각도를 한번 바꾸어 생각해보자. 가령 실패가 피면키 어려운 일이라면 왜 하필 자기가 창설한 기업에서 실패를 거듭하겠느냐? 큰 기업에서 일할 때 실패를 미리  경험해서 그 경험으로 자기 창업을 하면 더 좋지 않겠느냐? 이것이다. 큰 기업에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젊은 창업자들에게 리롭다 할 때 과감히 이런 제안도 해보는 바다. 창업준비가 잘 돼있고 자신에 차 있는 청년은 당연히 례외다.//길림신문
13    엄마의 계산서 댓글:  조회:4249  추천:136  2007-03-18
(음악이 시끄러우시면 Esc를 누르시고)어린 피터는 상인의 아들이였다. 아이가 아주 총명했으므로 아버지는 늘 돈을 받거나 지불하는 명세서를 그에게 맡겨 처리토록 했는데 그는 번번히 잘 해냈다. 피터는 자아감각이 점점 좋아져 자기가 이미 상인이 된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어느날 그의 머리에는 갑자기 한가지《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계산서를 만들어 매일 엄마 심부름을 한 값을 받아 내야겠다고 생각한것이다.이날 엄마는 식탁우에 계산서 한장이 놓여있는것을 발견했다.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엄마가 피터에게 빚진 것:생활용품 사오기 20페니히(100페니히가 1마르크임), 우체국에 가 편지 부치기 10 페니히, 화원에서 일 돕기 20페니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장려 10 페니히, 루계 60페니히아들이 쓴 이 계산서를 보고 피터의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가?참, 피터엄마의 반응을 보기 전에 우선 이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적에 우리 아이들 엄마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표정을 짐작해보자--엄마들은 아들애에게 한 50원 정도 던져 주며《얘가 몹시 썰썰한 모양이구나? 엣다, 아무거나 네 먹고 싶은 걸 사먹어라》하거나 《이것봐라, 우리 아들이 인젠 다 컸네?》 혹은《이런? 우리 애가 진짜 대단하구나. 계산 속이 빠른걸 보니 장차 커서 부자 되겠다야?》 하면서 무척 기뻐하거나 《그래그래 엄마 빚졌다. 50원 주마. 잘만 하면야 까짓 돈 아끼겠니? 너 반에서 10등 안에만 들어라. 100원 장려다.》라고 하거나《뭐라고? 고까짓 심부름 좀 하고 돈 달라고? 엄마 뼈빠지게 일해 널 먹인 돈은 언제 갚을래? 》라면서 발끈하는 등 그 표정도 각각일 것이다.이런 식으로 교육한 결과는 구경 어떠할가? 아이들이 부모한테 손 내미는데 습관되거나 너무 개인 리속을 챙기거나 돈밖에 모르는 애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이제 피터의 이야기를 계속하면—피터의 엄마는 계산서를 자세히 보고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저녁에 피터는 식탁우에 자기가 요구한 60페니히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마치 개잡은 포수마냥 시뚝해지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곁에 또 한장의 계산서가 놓여있지 않은가.피터가 엄마에게 빚진 것:10년 동안 잘 키워준 것 0페니히, 그 사이에 먹이고 입힌 것 0페니히, 병이 났을 때 간호해 준 것 0페니히, 자애로운 어머니 장려 0페니히, 루계 0페니히자식을 위해 혼신을 다하면서도 일전한푼 보답도 바라지 않는 어머니! 어머니의 계산서를 읽은 어린 피터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콩콩 뛰는 가슴을 안고 살금살금 엄마한테로 다가가 부끄럼으로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엄마 품속에 깊숙히 묻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 60 페니히를 엄마의 행주치마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피터엄마의 계산서는 실로 천하의 부모들에게 떼여준 모범 《약방문》으로 되기에 손색없다.로동을 했으면 보수를 받아야지? 맞다. 어린 피터는 이렇게 생각했고 엄마는 두말없이 아들에게 60페니히를 주었다. 우선 이는 아들의 독립적인격에 대한 엄마의 인정이며 존중이다. 그럼 어린 피터가 엄마한테 로동보수를 달라고 요구한 것은? 당연히 맞지 않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아들더러 그 잘못을 깨닫게 하겠는가? 직설적으로 《너 그럼 못써!》하는 식으로? 만약 그런 식으로 했더면 어린 피터가 자기 잘못을 깊이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적어도 깊은 감동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피터의 엄마가 쓴 방법은 암시의 방법이였다. 그는 우리에게 자식을 교양함에 있어서 사랑과 책임성이 필수인 외 마음을 깊이 울려주는 암시적 방법으로 거룩하고 깨끗한 사랑을 표현하는 지혜도 갖추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길림신문
12    상인, 녕파사람, 연변 어머니, 그리고 집단집념 댓글:  조회:5170  추천:132  2007-03-12
죽는 순간에도 장사를 한 상인이 있다.그에게는 소학교시절에 벌써 주어온 완구차를 고쳐서 한반 동창에게 반센트(100센트가 한 딸라임)에 팔아먹은 기록이 있다. 중학교 졸업후의 어느날에는 일본사람들이 물감에 얼룩이 진 젖은 비단필을 처리못해 쩔쩔 맬 때 그걸 가져다 특이한 옷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 일로 해서 그는 대번에 부자가 됐다. 남이 버리는 땅을 아주 헐값에 사서 몇년 후 2400여만 딸라에 팔아넘기는 놀라운 장사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77세 때 림종을 앞두고 한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걸작이였다.비서를 시켜 《본인이 며칠내로 승천을 하겠는데 이미 승천한 분들에게 건재중인 친인들의 문안과 기별을 전해드릴 용의가 있으며 기별을 전하는 대가로 사람당 100딸라씩 받겠다》는 내용의 글을 신문에 게재토록 했다. 죽은 사람에게 기별을 전해달라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아주 많아 상인은 병상에 누운채로 10만딸라를 벌었다. 수전노로 점찍힌 인물이지만 《상업에 대한 집념》이란 점에서는 그에게 높은 점수를 줘야 한다. 상업분야에서 일개인의 집념도 이토록 무서운데 이런 집념을 한개 지역, 한개 집단 지어 한개 민족이 가지고있다면 그 힘이 어느 정도겠는가? 저 남쪽의 녕파사람들이 이런 집념의 집단소유자들이라면 틀리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옷장사를 잘한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아편전쟁후 상해에서 항구를 개방하자 녕파사람들은 상해로 우르르 쓸어가 도구도 간단하고 원가도 별로 안 드는 재봉업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돈벌이가 잘되니까 친척, 친구 지어 마을사람들까지 불러다 옷을 만들어서는 서양사람들에게 팔아 국내외로 크게 소문놨었다. 개혁개방후 녕파사람들은 옛 조상들의 재간을 들춰내여 다시 복장업을 벌였다. 재창업 행정에 보여준 복장업에 대한 그들의 강한 집념은 사람들에게 지극히 심각한 인상을 주었다. 한 복장기업의 사장은 할머니인데 애초에 농촌녀성 몇명을 데리고 창업할 때 상해에 있는 녕파적(籍) 복장디자이너의 기술을 얻기 위해 수십차례 그 스승을 찾아갔었다. 그 스승은 내내 머리 반쪽도 내밀지 않았었는데 그러던 중 그 스승의 어머니가 중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그녀는 인제 기회가 왔구나 하고 로환자를 다시 없는 정성으로 살틀히 보살펴드려 마침내 스승을 감동시키고야 만다. 그녀가 핵심기술을 얻게 된건 두말할 것 없다. 이런 집념을 가진 사람이 그 할머니 한사람뿐이 아니라 녕파사람들 다수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한테도 이런 집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긴 하다.문제는 아직 집단집념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힘이 미약하다는것이다.다행히 구심점을 찾아 고군작전체나 침체집단을 큰 활력체로 묶고자 하는 노력들이 보여 자못 고무를 받는다. 일전 연변에 갔다가 《세계연변된장축제》를 기획하고있는 친구를 만났다. 《연변민들레생태문화마을》을 창설한 이 친구에 따르면 전통장에 수백종의 미생물이 서식하는데 그 많은 미생물을 기계로는 생산해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근근히 몇가지 미생물만 기계화생산에 들어간 상황이며 생산에 한계가 있는 전통장은 그 가격이 기계로 만든 장의 5배이상으로 비싸다고 한다. 그런데 연변은 콩의 주요산지이고 또 우리 가정들은 모두가 장생산의 과학을 가지고있기에 농가를 기업으로, 어머니들을 경영인으로 해서 연변을 장류생산단지로 부상시킬수 있으며 가가호호에서 생산해낸 장을 총집합시켜 재숙성 과정을 거치면 통일된 맛과 가격으로 유명브랜드를 창출할수 있다는 계산이였다. 한국을 수십차례 드나들면서 한시도 된장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작년부터 북경에 차린 사업은 원격지휘로 하면서 아예 연변에 몸을 푹 담그고있는 그는 《전통된장의 현대화생산조건은 유일하게 연변만 가지고있다》는 설을 도도히 폈다.이 말을 나는 믿는다. 한마디 부언할 것은 워낙 외지인이라면 웬간해서는 잘 인정해주질 않는 연변의 특이한 《인정세태》에서 흑룡강출신인 이 친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수년간 현지실험을 거쳐 무공해알곡 증산에 효능이 특출함이 이미 밝혀진 기능성비료 《제타》(이 비료로 생산한 입쌀은 지난해 한 근에 5원씩 팔려나갔다)를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연변에 도입, 대량 생산을 꿈꾸었지만 종당에는 성사 못하고 그 항목(비료공장)을 부득이 흑룡강에 옮길 수밖에 없었던 그다.하지만 가지고 있던 꿈을 접지 않고 생태연변건설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집스레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를 주변의 여러 사람들은 지켜보고 있다. 아무커나 이제 《민들레마을》 사람들의 집념을 연변의 어머니들과 어머니가 아닌 사람들의 집념으로 바꾸는 어려운 작업이 필히 행해져야 한다. 이 작업 또한 강한 집념이 없인 결코 해낼수 없는 일이다. //길림신문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11    민영경제: 하지 말라는 말 안하면 하라 댓글:  조회:3977  추천:97  2007-03-10
민영경제: 하지 말라는 말 안하면 하라   최근 길림성 지도부에서 민영기업에 <비금즉입(非禁卽入)>정책을 실시한다고 선포했다. <금지하는 일만 아니면 다 할 수 있다>는 이 신 정책(길림성에서 <새것>이지 적잖은 타지방에서는 <새것>이 아닌지 오래다)의 선포와 아울러 시장에 신속히 진입할 수 있도록 차별시정책 및 걸림돌정책 페지 등을 망라한 열 가지 강력한 추진조치도 마련, 발표해 믿음 또한 주는 대목이다.   길림성의 발전이 여느 성들보다 많이 뒤처져 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왜 뒤처졌는가? 길림성 자체로서 어쩔 수 없었던 력사적 원인도 있겠지만 주로 자체의 인위적 요인을 찾아 봐야 한다. 무엇이 자체의 원인인가? 측간 바닥의 돌멩이처럼 더럽고 딱딱한 집단 무의식, 특히 중층 이상 간부층의 집단 무의식 때문이라고 필자는 꼬집고 싶다. 문서주의(文牘主義)로 표현되는 이 집단 무의식은 기성 문건에 대한 맹종을 모든 분야에 종양처럼 확산시켜 모든 일을 문서로만 처리하려 들고 인간의 창조적 활동은 철저히 외면한다. 문서로만 일을 처리하려 하니 문서주의를 버린지 오랜 다른 성에 뒤처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특히 공유경제에 속하지 않는 민영경제발전이 문서주의의 해를 많이 입었다. <하라는 것만 하라>는 풍토속에서 민영기업의 발전에는 장애가 첩첩했다. 왜냐 하면 정부에서 <하라는 일> 외에도 기실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많은 일을 제쳐두고 문서에 지정한 일만 하라니 바로 수족 얽어매기 그 자체였다. 정부 관련 부처의 일부 일군들은 문건에 없는 항목을 비준했다가는 자기한테 불리익이 떨어 질가 봐 항목이야 좋건 말건 차라리 비준을 안 해 주는 형국이였다. 길림성 경제발전에 대한 그 항목들의 유용성 여부는 결코 자기 체신만을 돌보는 그 알량한 량반들의 관심사가 아니였다.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민영기업은 공유기업과의 차별화 정책(이를테면 세수정책)으로 인해 시장경쟁에서 늘 일방적으로 당하기가 일쑤였다. 공유제기업소의 회장님이나 사장님들은 휘파람을 슥슥 불면서도 비까번쩍하는 고급 자가용을 몰고 다닐 수 있었지만 민영기업의 사장들은 고심참담하게 경영을 해도 자칫 망해 자빠지기가 십상이였다.   물론 중앙의 시책에 의해 민영경제의 시장진입문턱이 하루 다르게 낮아짐으로서 민영기업의 발전이 큰 힘을 입은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와중에 민영기업의 생명력은 류달리 왕성해서 지난 해 전국적으로 비공유기업에 취직한 인원은 1.1억 명에 달했다. 이는 전반 중국 취업인수의 80%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수자이다(우리 성 비공유기업 취직인원은 295만으로 전 성 취직인수의 54%를 차지한다. 아직 전국수준에 많이 뒤처져있다).지난해 민영기업의 등록자금은 6만3000억 원으로 우리나라 GDP총량의 50%를 차지하였다. 공유제 우세확보 운운은 이미 말도 안 되는 과거사로 되여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림성의 민영기업은 현재 구태의연히 거부기 걸음을 하고 있다. 통계수치가 말해주다시피 우리 성 민영기업 호수는 강소성의 1/8, 광동성의 1/7, 절강성의 1/6이고 절강성은 규모이상 민영기업이 만인 당 4.27호인데 반해 길림성은 만인 당 고작 0.53호 밖에 안 되는 실정이며 강소성에 등록자본이 억 원 이상인 민영기업소가 370호나 되는데 반해 길림성은 겨우 9호 밖에 없다. 한 하늘 아래 같은 볕을 쪼이면서 이게 말이 되는가?   성 지도부에서 일찍 이 점을 간파하고 이미 고질이 된 간부들의 머리를 깨쳐 볼 요량으로 중국에서 경제발전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에 해마다 간부를 몇십 명씩 견학연수(기한은 1년)를 보내지만 돌아 올 때는 경제개혁에 대한 신심, 용기가 하늘을 찌르던 이들이 정작 돌아와서 일년만 지나면 기관에 쫙 깔린 보수통간부들의 수풀속에서 초지(初志)는 마모(磨耗)되고 마침내 원점으로 되돌아가기가 일쑤다.길림성의 간부가 한꺼번에 절반 정도 나갔다 오면 상황이 확 바뀔 수도 있겠지만 안 될 말이고, 내내 지금의 이런 방식으로 급변을 창도해 낸다는 것도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길림성의 고질은 책(기성 문건)대로 하는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데 있다.남방에서 박살난지 오랜 이른 바의 <문서주의>가 아직도 우리 성 다수 간부들의 두뇌를 단단히 얽어 매고 있어서 앞으로 한 발 내디디기가 여간 힘드는게 아니다.   왕민 서기는 우리 성 경제발전이 굼뜬 것은 민영경제의 히스테레지스(滯後, Hysteresis)가 낳은 결과라고 못 박았는데, 옳은 말이다. 뜻인즉 길림성이 잘 되려면 민영기업이 잘 돼야 한다는 것이다.아무튼 정부는 <비금즉입>정책에 립각해서 올부터 민영기업의 창업문턱을 가능한 낮추고 <전인민적창업>의 짙은 분위기를 창출 하겠다는 확고한 방침이다. 각 현(시)에 창업부화기지 1~2개씩 앉히고 소기업주 만 명을 키워내게 된다고 하며 창업을 돕도록 민영기업에 간부 1000명을 파견하고 창업인재 양성에 거금도 퍼붓게 된다고 하며 초창기의 창업자들에게 대부금 지원도 하게 된다고 한다. 3년 내 민영기업은 10만 개로, 개체공상호는 100만 개로 늘이고 그 수입을 배로 신장시킬 계획이라 하며 올해 민영기업 100강을 평정, 표창하여 본보기를 수립할 것이라 한다.   <비금즉입>정책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 없다. 이 정책을 <할만한, 또는 해야 할 일이라면 다 하세요, 막지 않겠소이다>는 의미로, 또는 <우리 모르는 사람들이 앉아서 무엇무엇을 해도 된다 어쩌구 안할테니, 단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일 몇가지만 확실하게 규정해 놓을테니 그외의 모든 일들은 국민 여러 분이 다 알아서, 혹은 창조적으로 만들어들 하시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조선족사회의 민영기업이나 창업에 뜻을 둔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생각을 잘 정리하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할 때가 아니냐 싶다. 우리의 사고방식도 변화된 현실에 따라 적시적인 전환을 가져와야 할 것이다. 무슨 기성 항목이 정책상 허용이 되냐 하고 전전긍긍 하지만 말고 정책적으로 금지되지 않은 무한정한 신 항목을 발견, 발굴하는데 신경을 바짝 도사려야 할 것이다. <금지령>밖의 세상은 하도 넓고 할 일 또한 하도 많아서 창의력만 충분히 발휘한다면 자유롭게 활개 칠 공간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말이다.
10    [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국)문정희 댓글:  조회:4395  추천:133  2007-03-04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국)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란이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9    '제미얀의 물고기탕'과 '과유불급' 댓글:  조회:4152  추천:121  2007-03-02
19세기 로씨야의 저명한 작가 그릴로브는 <제미얀의 물고기탕>이란 우화를 쓴적이 있다.이야기 줄거린즉 이렇다.주인공 제미얀이 맛있는 물고기탕으로 손님을 초대한다.손님은 구수한 고기탕을 맛갈스레 먹는다.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주인이 연신 대야들이로 쉴새 없이 고기탕을 강권하는 바람에 손님은 도시 받아 당할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좌석을 피해 달아나고 만다. 중국에 이 우화에 딱 들어 맞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속담이 있다.공자선생이 발명한 말인데 무슨 일을 하든 너무 지나치면 그 일을 안하니만도 못하다는 말이다. 로자선생도 이와 비슷한 리론을 편적이 있는데 <지지불패(知止不敗)>라는 낱말이 그것이다.일을 진척시킴에 있어서 적당한 부분에 와서 멈출줄 알면 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무슨 일을 하든 도를 장악할줄 알아야 하며  <도>를 넘는 모든 소행은 유해무익하다는 말이다.그러고 보면 이 두가지가 다 아주 유용한 철학인것 같다.아마 그래서 어느 큰 어른이 이 두마디 고전을 유가정신의 정수라고까지 치켜세웠는가보다.   사실 무슨 사물이나 다 일정한 질을 보장하는 량적 계선이 있다.  그 계선을 일컬어 <도>라고들 한다.  <도>를 넘으면 왕왕 사물의 원 <질>이 파괴를 입게 된다. 구수한 추어탕도 너무 먹으면 배가 세간나기 마련,물도 섭씨 령으로부터 100까지의 <도>를 벗어나면 얼음이나 수증기로 변해버리지 않는가.   가정교양에 과유불급 즉 <도>가 지나친 현상이 있는가?있다.   자식에 대한 영양보충이 지나치다.수요 이상의 영양가를 지나치리만큼 주입하면 랑비는 둘째치고 신체에 해롭다.지나친 단백질과 지방은 소화에 영향을 줄뿐더러 비만증을 초래하여 신체건강을 해친다.   지나친 관심,지나친 정감표시,익애도 문제다. 물론 부모와 어린이의 정감교류는 십분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도 년령의 변화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비교적 큰 아이에 대해서도 어린애 대하듯 지나치게 귀여워하면서 입에 넣으면 녹을가 머리에 이면 떨굴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아이 성별배역의 형성에 영향을 끼칠수 있다는게 심리학가들의 견해다.례컨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戀母情結”)도 왕왕 그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이는 아이들이 커서 정감상의 부담으로 시달리게 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어린이에 대한 돌봄도 나이가 커감에 따라 점차 줄여야지 모든걸 다 해주는 식이라면 스스로 자립능력을 키우는데 방해가 되고 아이의 건전한 심리발전에 불리하다는것이다.   교육내용이 지나치게 많아도 좋지 않다.아이의 능력범위를 넘어 지나치게 많은것을 머리속에 집어 넣어 주자고 하면 아이가 지친나머지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수 없게 된다.   과잉기대,기대치가 너무 높은것도 당연히 문제로 된다.알맞는 기대는 아이에게 진보의 동력으로 될수 있지만 아이의 년령특점이나 지력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과분한 기대를 한다면 아이가 애를 써도 안 될 때 신심을 잃게 되거나 심하면 절망할수도 있다. //길림신문
8    富者 자식과 貧者 자식의 삶바꾸기 댓글:  조회:4453  추천:147  2007-02-27
최근 호남위성TV에서 《변형계(變形計)》란 파격적인 프로그램을 펴냈다.이 프로그램의 첫기 주인공은 인터넷게임에 중독되여 학교마저 중퇴한, 長沙市 어느 기업가의 아들 위정과 청해성 시골에서 온,집이 하도 가난하여 학교에도 못 다니고 있는 소년 고점희였다.짧디짧은 7일간 위정은 청해성 민화현의 타복촌에 내려가서 한 맹인아버지의 아들노릇을 하는데 거친 빵을 먹으며 밭에 나가 힘든 일을 한다.한편 맹인 아버지의 진짜 아들인 고점희는 거꾸로 장사에 있는 위정의 집에 와서 위정이 싫증 낸지도 오랜 귀족적 생활을 체험한다.일주일 후 그들 둘은 다시 각자 본연의 삶으로 복귀한다.              이처럼 신분과 삶이 완전히 뒤바뀐 체험을 통해 부자집 아들는 참된 삶의 의의와 목표를 찾도록,그리고 가난한 집 아이는 새로운 꿈을 갖고 그 꿈을 실현시킬 힘도 키우도록 하자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다.    메마른 토지, 교통이 꽉 막힌 서부지역에서 눈먼 아버지,그리고 병약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소년 고점희는 공부에 모든 희망을 다 걸어 보지만,가난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다.집에서 돼지를 먹이다가 우연히 장사시에 온 고점희는 《새 아버지》의 호화로운《BMW》표 승용차에 앉아 번화한 거리를 내다보던 중 갑자기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다.리코더(錄像機)앞에서 눈물을 보이기가 쑥스러워 흘리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걷잡을 수 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을 마음만으론 도무지 주체할 수 없다. 가슴 아픈 사연이 많이 담겨 있는 이 장면을 보면서 시청자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준 충격은 상당히 컸다.한 시대에 사는 두 동년배 소년의 너무나도 공평하지 못한 삶과 그 심한 격차의 비참함을 직접 감수하고 있는 그들의 침울한 얼굴표정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킨 것은 고점희소년의 예쁘고 착한 마음씨였다.프로의 마감을 하루 앞두고 시청자들은 고점희가 번화한 도시생활에 미련을 가져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지 않을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그런데 고향 마을에서 눈먼 아버지가 물을 긷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는 기별이 온다.그 말을 들은 소년은 울면서 주동적으로 하루 앞당겨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요구한다.   아버지의 다친 다리가 걱정되여 하루 앞당겨 귀향길에 오른 소년, 자기를 감싸안으려는 부유한《새 어머니》를 밀치고 결연히 가난한 부모곁으로 떠나는 고점희의 뒤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성의 핵,인간정신을 보게 된다.자기를 낳아기른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식이 누구를 진정 사랑할 수 있으랴.   너무도 큰 운명의 콘트라스트(反差)가 소년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미지수다.일각에서는 이 프로가 고점희에게 너무 잔혹하지 않느냐,영원히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게 아니냐 하는 걱정도 내비쳤다.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그는 공부를 잘해가지고 꼭 대학에 붙어서 새로운 삶을 반드시 개척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혀 많은 이들의 근심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아픈 마음으로 그냥 걱정스레 지켜보고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 믿는다.   한마디 부언하지만, 한 시대에 살고 있는 도시와 농촌의 소년들이 잘살고 못사는 차이 때문에 서로간 내내 담을 쌓고 지내며 만나지 말아야 할 리유는 없다.만나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기게 되지 않을가 걱정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그래도 만나는 것이 만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만나지 않으면 차이를 알수 없을 것이요 차이를 모르면 동력도 없을 것이요 따라서 협력과 발전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길림신문
7    왜 승냥이를 양무리에 넣었는가? 댓글:  조회:4241  추천:87  2007-02-20
옛날 얘기다.양을 치는 사람 한분이 북방의 추운 곳에서 양 한무리를 방목하고 있었다.시초에는 그곳의 온도가 양의 생존에 비교적 알맞아서 양들은 유유히 풀을 뜯으며 아주 편하게 지냈다.그러다보니 점차 움직이기 싫어하는 습관이 생겨났다.겨울이 와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자 양들은 추위에 적응을 할수 없어 숱해 얼어죽었다. 양치는 사람은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어떻게 하면 양들을 살려낼것인가?뇌즙을 쥐여짜던 끝에 그는 아주 지독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양들이 살고 있는 곳에 승냥이 몇마리를 들여보냈던 것이다.천하에!왜 양무리에 하필이면 양들의 원쑤인 승냥이를  끌어들였을가?의문은 잠시 제쳐두고,아무튼 양들은 잡혀먹히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승냥이의 습격을 피해 뛰였다.그런데 그것이 신비한 효과를 냈다.재빨리 뛰여 다니는데 습관된 양들이 이 해 겨울의 혹한을 용케 이겨냈던 것이다.승냥이에게 더러 먹히긴 했지만 손실이 전보다 훨씬 적었다.   이 우화에서 승냥이는 위기의 상징물임에 틀림없다.위기의식수립의 중요성을 깨치는데 유조한 자료다.안일함에 안주하여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에 대해 의식하지 못한다면 조만간 큰 피해를 입게 될것이라는 것,이에 반해 위기의식을 가지고 대처준비를 미리 해두면 위기를 역리용해 대승을 거둘수도 있으며 적어도 손실을 보지 않거나 최소치로 줄일수 있다는 리치를 일깨우는,기업경영에도 잘 들어맞는 이야긴것 같다.   일반적으로 위기라 하면 《9.11》사건이나 《사스》사태와 같이 경제, 사회 전반에 치명적 영향을 끼치는 중대 사건을 일컬을 때가 많다.그러나 이런 중대 사건만이 위기인 것은 아니다.위기발생의 현실성은 어느 한 기업에서도 표현될수 있다.한차례 조심성이 결여된 결책으로 생명력이 있던 기업을 하루 아침에 말아먹을수도 있다.TV드라마《류로근(劉老根)》에서 룡천산장이 한 차례 사기사건으로 하마트면 일조에 박살날번하지 않았는가?   본질적으로 보면 큰 기업소나 작은 기업소나 그 내부나 주위에는 언제나 위기가 잠재해 있거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이를테면 전략적 결책의 실수,맹목적인 규모확장,감성화한 투자충동,제품에 존재하는 중대한 기술성결함 혹은 질문제,저효률적인 조직구조,관리의 혼란,삼거웃처럼 복잡하게 뒤엉킨 법놀음,매스컴의 폭로 등등이 그것이다.이런 문제들은 일단 조건만 성숙되면 순식간에 위기로 돌변하여 기업을 파탄속에 밀어넣는다.   위기의식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위기의식을 수립함에 있어서 기업주의 의식변화가 두말할것 없이 선차적이다.무슨 결정을 내릴 때 자기의 우세와 렬세,주어진 기회와 반드시 대처해야 할 위협적인 요인 등을 똑똑히 보아내고 명확한 대응책을 펴야 한다.   기업주가 보아내지 못하는 위협요인을 직원이 보아낼수도 있다.직원들이 문제를 대담히 제기하고 반영하도록 고무격려함이 필요하다.   일부 위기는 순전히 기업주가 자초한것이다.이를테면 원가를 낮추고 시장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저질원료를 쓴다든지 하는 식인데 왕왕 념원과는 상반대로 기업이 치명타를 입고 이미 쌓아올린 공적마저 깡그리 탕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위기의식이 전무한데서 생기는 비극이다.   양 치는 이가 왜 승냥이를 양무리에 넣었는지 알수 있을것 같고 아울러 그분 참 고명하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길림신문
6    박문희 프로필 댓글:  조회:4479  추천:153  2007-02-19
박문희 1950년 9월 7일 龍井 출생 1968년 上山下鄕 운동 가담 1972년부터 연변한사,연변대학 중문 전공 1974년부터 교육사업에 종사 1980년 연변일보사 입사 1985년 길림신문사에 이적 2011년 퇴직 E-mail:pwx0907@aliyun.com , puwenxi@hanmail.net
5    중국 운반로케트 전문가 리상영 댓글:  조회:4261  추천:110  2007-02-18
(음악이 시끄러우시면 Esc를 누르시고) 《장4B》총설계사, 총지휘로서의 리상영,7년 여에 10차례에 걸쳐 10종의 인공위성 16매를 전부 예정궤도에 정확히 발사, 《10발 10중》의 기적을 창조하다   전국로력모범표창대회에서.   《하량하리기금상》 수상자 《며칠전 또 한방이라,그러니까 이번이 10발10중 맞지요?》 2006년 11월 15일 북경 인민 대회당에서 거행된 《하량하리기금》 제13차 시상식에서 진지립 국무위원은 상해우주비행국 과학기술위원회 부주임이자 《장정4호B 형운반로케트》의 총설계사,총지휘인 리상영의 손을 열정적으로 잡아 흔들었다. 진지립이 말하는 《며칠전》이란 2006년 10월 24일에 있은 《실천6호》 위성 2매 발사를 가리킨다. 《압력이 만만치 않을테죠?》리상영이 미소하며 그렇다고 하자 진지립은 《그래서 압력이 동력이라고들 하는거 아닐가요!》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진지립의 《십발십중》운운은 한점 과장도 없는 사실 그대로의 얘기다. 다른 위훈은 제쳐놓고 《장정4호B 형운반로케트(략칭〈장4B〉)》의 총설계사,총지휘를 맡은 후의 공적만 보자. 1999년 5월 10일 《장4B》는 처음으로 한방에 인공위성 두개(《풍운1호C》와 《실천 5호》)를 예정궤도에 성공적으로 쏘아올렸고 1999년 10월 14일에는 《자원1호》와 《브라질》을, 2000년 9월 1일에는 《자원2호》를, 2002년 5월 15일에는 인공위성 《풍운1호D》와 《해양1호》를, 2002년10월 27일에는 《자원2호》를, 2003년 10월 21일에는 《자원1호》와 《창신1호》를, 2004년 9월 9일에는 두개의 《실천6호》위성을, 2004년 11월 6일에는 《자원2호》위성을, 2006년 4월 27일에는 《원격탐지위성1호》를, 2006년 10월 24일에는 《실천6호》 02조의 공간탐측위성 2매를 성공적으로 발사, 정확히 우주궤도에 진입시켰다. 1999년 5월부터 2006년 10월까지 7년 남짓한 기간에 그는 도합 10차례에 걸쳐 10종의 인공위성 16매를 전부 예정궤도에 쏘아 올림으로써 10발 10중의 기적을 창조해낸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리상영이 받아 안은 《하량하리기금상》은 1994년도 향항의 애국금융실업가 하선형, 량구거, 하첨, 리국위 등 4인이 향항페 4억원을 공동 기부하여 설립한 공익성 과기장려기금으로 중국과학계의 최고상, 중국의 노벨상으로도 불린다. 리상영은 지금까지 이 기금상을 받은 유일한 조선족과학자이다.   아름다운 꿈―준비된 과학자 리상영은 1941년 10월 19일 흑룡강성 오상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오상에서 조선족 소학교와 초중을 다닌 그는 늘 품행이 단정하고 공부를 잘하는 모범학생이였다. 조선족고중이 없어 한족학교에 붙은 그는 열심히 중어를 배웠는데 나중에는 《시경》까지 술술 외워 한족학생들까지 그에게 해석해달라고 도움을 청할 정도였다. 중국우주비행사업이 창건된 이듬해인 1957년,쏘련에서 《스푸트니크1호》로케트로 인류사상 첫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세상을 놀래웠다. 영화뉴스에서 그 발사장면을 본 고중생 리상영은 《나도 로케트로 하늘에 위성을 쏴봤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1959년 그의 꿈은 현실로 되였다. 북경공업학원에 붙어 뜻대로 로케트총체학과를 전공하게 된것이다.5년 학습기간 그는 말 그대로 머리를 동여매고 공부를 했다. 때는 바로 우리 나라 3년 자연재해시기라 생활고가 심각했지만 정신면의 수확은 풍성했다. 이 기간 로어를 학과목으로 배우면서 영어도 자습했다. 1964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친 그는 아장걸음을 타기 시작한 중국의 우주비행사업에 투신했다. 상해우주비행연구원에 배치받은 리상영은 모든 정력을 기술연구사업에 몰붓기 시작했다.얼마 안 가 터진 《문화대혁명》에 일시 커다란 곤혹속에 빠졌지만 그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혼란속에서 일터도 자주 바뀌였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좋았다. 로케트의 동력설계, 원격측정제어, 구조배치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할수 있어 로케트기술 전반을 장악하는데 좋은 기회가 됐던것이다. 이 기간에 리상영은 쏘련의 《련맹호》, 미국의 《타이탄(大力神)》,유럽의 《아리안(Ariane)》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계렬운반로케트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짙은 흥취를 가지고 무릇 운반로케트와 관련이 있는 자료는 빠뜨리지 않고 찾아보면서 그것들의 성능, 기술방안, 디자인 등 모든 문제를 의문이 풀릴때까지 캐고들어 그 뒤 장장 수십년간의 연구에 튼실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자유의 왕국 우리 나라의 우주비행사업은 1956년에 시작됐다.저궤도운반로케트 연구는 지난 세기 60년대 중반부터 착수됐다. 리상영이 《3년 재해》와 《문화혁명》이란 어려운 이 두 시기에 시간을 랑비하지 않고 고심히 쌓은 연구토대가 얼마나 귀중한것인지가 이때 와서 충분히 증명되였다. 바로 중국에서 지대공미사일(SAM)연구가 시작된 해인 1970년,당시 불과 29살밖에 안된 리상영은 벌써 크기가 미국의 강유력한 《타이탄2호》와 거의 맞먹는 2단식 신형 로케트 《폭풍1호(FB―1)》 로케트연구팀의 총체성능설계사란 중대한 과업을 맡는다. 이 과업을 맡은지 불과 5년만인 1975년 리상영과 그의 연구팀은 《FB―1》로 과학위성을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이때로부터 그의 재능은 급속도로 발휘되기 시작,선후로 《장정4호A형》운반로케트(략칭 장4A) 부총설계사, 《장2D》 부총설계사, 유인우주선921―3 부총설계사를 력임하며 1999년부터는 《장4B》총설계사,총지휘를 떠메기에 이른다. 이 중대한 책임들을 맡아보면서 그는 각종 중대한 기술난제들을 거의 매년 두세가지씩 풀어나갔다. 80년대에 들어서서 대형의 3단식 운반로케트 《장정3호》를 연구 제조할 때 그는 3대 기술난제의 하나로 나선 수직방향결합발진문제,말하자면 로케트 몸체와 로케트 추진제 수송시스템 사이의 공진문제를 해결하는 저항법 진동수 계산물리모텔을 국내 처음으로 고안해 내여 통신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하는데 크게 이바지한다. 《장4A》 부총설계사를 맡았을 때도 그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총체방안을 고안해내여 상규추진제 로케트의 운반능력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 기술면에서 국외 동류 로케트의 성능을 릉가했으며 우리 나라 최초로 1톤 무게의 위성을 쏘아올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 로케트로 1988년과 1990년 두차례에 걸쳐 기상위성을 정확히 태공궤도에 진입시킨다. 《장2 D》 부총설계사를 맡았을 때에는 운반능력,궤도진입 정밀도와 신뢰도가 월등한 2단식 로케트를 연구제조해 내여 련 3차례의 위성발사를 훌륭히 수행하며 《신주호》 우주선 부총설계사를 맡은 후에는 상해우주비행국 유인우주선에 대한 론증과 부분적 연구제조과업을 맡아 예비모형을 실전모형으로 승격시키는데 관건적 역할을 논다. 《장4 B》의 최초 제조과정에는 무려 153가지 부분을 새롭게 연구, 개진하는데 성능이 뛰여난 이 로케트는 현재 간편한 조정만 거치면 각종 류형의 인공위성을 보다 높은 운행궤도에 쏘아올릴수 있다. 《장4B》는 매차례의 발사때마다 대폭적인 기술개진과 창신으로 성능을 간단없이 제고했다. 작년 4월에도 리상영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4B》의 기술내포를 또 한차례 승격시켜 국내 최초로 3단식 발동기의 《2차 점화기술》을 적용, 원격탐측위성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이런 중대한 성과들로 하여 그는 선후로 국가과기진보 특등상 2차, 1등상 2차, 2등상 2차와 성, 부급의 1등공 3차, 우주비행상과 과기진보상 등을 수상했다. 숭고한 사명 소년 리상영의 로케트꿈이 그 어떤 호기심에 바탕을 둔것이라면 풍부한 경험을 갖고있는 우리 나라의 우수한 우주비행공정전문가로서의 리상영은 우주비행사업을 국가리익에 직결되는 최고사명으로 간주하고 혼신의 정감과 재질을 이 한 숭고한 사업에 깡그리 쏟아부었다. 1999년 5월초, 《장4B》 운반로케트 총설계사, 총지휘로서의 리상영은 기지에서 발사팀을 거느리고 한창 로케트발사준비를 다그치고있었다. 5월 8일 유고슬라비야 주재 중국대사관이 폭격을 당했다. 이 소식에 접한 리상영은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것 같았다. 로케트로 호된 반격을 가하고싶었다. 이때 향항《대공보》가 중국에서 이틀안으로 위성을 발사할것이라는 뉴스를 실었다. 어깨에 놓여진 짐의 무게를 느낀 리상영은 무언의 침착한 대응으로 발사현장의 모든 세부사항을 낱낱이 점검했다. 10일 오전 로케트는 리상영의 마음과 중국인민의 기개를 지니고 구중천을 힘있게 갈라 세계에 중국의 강대한 존재를 또 한차례 과시했다. 당의 16차 당대회가 열리기 직전, 리상영은 한차례의 위성발사준비를 끝마쳤다. 때는 바로 국가주석의 미국방문과 메히꼬 아태경제협력체(APEC)회의 참석 기간이여서 이때 위성발사를 한다면 그 성공여부가 커다란 파장을 몰아올것이 뻔했다. 그 압력은 엄청 큰것이였다.그에게 가해질 압력을 덜어주기 위해 상급에서는 확실한 성공을 파악하기 어려울것 같으면 발사시간을 연기하는것이 좋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나 이번 발사에 확고한 신심을 갖고 있었던 리상영은 위성발사를 예정대로 실시키로 결정했다. 발사전 최후의 동원대회에서 리상영은 이렇게 말했다. 《발사의 성공을 갈망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가 꼭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행동이 조급해져서는 안되겠 습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래일의 발사에 림해야 합니다.》 《장4B》운반로케트는 리상영의 뜻대로 《자원2호》위성을 우주공간에 정확히 쏘아올렸다. 발사현장의 지하통제실에서 발사장면을 긴장히 주시하고있던 중앙군위 조강천 총장비부 부장은 격동된 나머지 리상영을 끌어안고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그 어떤 위성을 쏘아올리든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의의와 경제적가치는 대단히 큰것이다. 때문에 매 한매의 위성을 반드시 정확한 궤도에 진입시켜야만 하는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성공은 오늘만 의미할뿐 결코 래일의 성공을 대표하지 않는다. 미국이나 로씨야 같이 익숙한 기술과 풍부한 경험을 갖고있는 그런 나라들도 발사에서 빈번히 실패하여 막대한 경제손실과 인명피해를 보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성공 아니면 실패일수밖에 없는 이런 과업을 한어깨에 짊어진 리상영은 시종 고도의 사상압력을 감수하지 않을수 없다. 성공차수가 많을수록 그 압력은 줄어드는게 아니라 늘어만 갔고 일단 발사에 특별의미가 부여되면 그 압력은 또 무게가 더해졌다. 그러나 사명감은 그에게 가해진 모든 압력을 동력으로 전환시켰다. 고도의 압력은 그의 몸에 늘 생리반응을 일으키군 했다. 수십년 종사해온 사업이고 발사기록을 봐도 첫 발사가 성공해서부터 한번도 실수도 없이 번번이 성공하여 《백발백중의 명장》으로 불려온 그지만 매번 새로 발사하기 직전이면 심장이 매분 100차 이상 뛰군 했다. 위성발사를 앞두고 심장에 이상이 와서 구심환 수십알을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넣었던 적이 있다. 그날 발사를 성공리에 매듭짓고 축하연을 가졌는데 맥주도 물맛이요 간장도 물맛이였다. 보건의사가 고개를 갸웃하고 무슨 약을 복용한게 아닌가고 물었지만 그는 도시 생각이 나질 않아 고개만 가로저었다. 후에 호주머니에서 나온 약병을 보고서야 약을 병채로 입에 털어넣었던 생각이 났다.   《대군》을 거느린 통솔자 상해우주비행국에서 실시하는 《장4B프로젝트》는 하나의 방대한 시스템이다. 산하에 통제, 발동기, 구조, 원격탐측,검측시험발사 등 10개의 계통이 주임설계사, 부주임 설계사 수십명의 지휘밑에 움직인다.  매 계통은 다 자체 연구소를 가지고있는데 통제계통처럼 전산연구소 등 여러 개의 연구소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계통 산하에는 수백개의 단일계기연구단위가 있다.례컨대 단일계기단위가 원격탐측계통에는 180여개가 있으며 통제계통에는 48개가 있다. 이 수백개의 연구단위에서 10만개도 넘는 부품을 연구해내며 그 제품생산은 전국 각지에 있는 수천개 공장의 몫이다. 이 행정에 동원되는 인수는 수천수만으로 헤아린다. 이 방대한 기술시스템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있어서 핵심고리로 되는것은 1급지휘계통인데 이 지휘계통의 일선 총지휘가 바로 리상영이다. 《장4B》의 매 차례의 위성발사는 모두 리상영의 지휘밑에 최신기술을 적용한 측정, 설계, 실험과 주도면밀한 현장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전반 행정에 그 어느 부문이든 지휘나 기술면에서 일말의 경솔성도 허용될수 없다. 어느 한 계통의 조그마한 실수도 궁극적으로 발사의 실패를 초래할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사업의 특질로 하여 기술에 대한 내부심사는 극도의 엄격성을 기할수밖에 없다. 고로 리상영은 하부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그냥 1차적으로 통과시킨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의문점만 발견하면 가차 없이 재고(再考)를 요구했다. 각 계통의 연구항목에 대한 리상영의 심사는 극히 엄격했다. 그 어떤 분야에 가든 그 분야의 핵심문제를 포착, 관련된 구체 문제까지 제기하여 개진토록 요구했다. 주임설계사를 망라한 고급두뇌들이 지휘하는 각 계통의 전문연구는 국내 나아가 국제의 최고수준급이다. 그러나 심사때마다 보고를 세심히 청취한 뒤 리상영이 즉석에서 들이대는 일련의 질문은 왕왕 한다하는 전문가들로 하여금 《아뿔싸!》 하고 식은 땀을 빼게 했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질문들은 로케트 각 계통 심층기술에 대한 깊은 료해가 없이는 문제포착자체마저 어려운것이여서 관계 전문가들은 놀란 나머지 리상영을 우러러보지 않을수 없었다.그들은 모두 리상영을 본받아 산하 각 부처에 엄격한 관리를 실시했다. 이런 까닭에 리상영이 한번 돌아본 곳에서는 락자없이 새로운 기술공략전이 벌어지군 했다. 각 부문에 내려가 항목심사를 할 때마다 리상영을 따라다니는 항목계획관리원 채익비는 리상영에 대해 탄복한 나머지 한번은 리상영에게 조용히 이렇게 물어오기까지 했다. 《총지휘님은 그 많은 부문의 기술문제를 어쩜 다 그렇게 환히 뚫고 계십니까?》 작년 4월 《원격탐측위성1호》 발사 준비를 할 때였다. 이 위성은 무게나 체적 등 면에서 모두 《장4B》 가 이전에 발사했던 위성보다 무겁고 부피가 컸다. 《장4B》로케트 정류케스의 직경은 통상적으로 2.9메터와 3.35메터 두가지가 있는데 이 위성은 체구가 웅장해서 소요공간직경이 3.8메터에 달해 비행기동, 부하, 강도, 구조, 탄성, 통제 등 면에 모두 변화가 생겼다. 대규모의 기술조정은 불가피했다. 하여 리상영과 그의 연구팀은 《장4B》를 거의 새로 설계, 제조하다싶이 했다. 이때에도 리상영은 로케트와 위성의 세부까지 꿰뚫는 불가사의한 기술통찰력으로 각 부처의 기술문제를 분석하고 철저한 해결책을 대게 하였는데 결국 그것은 로케트 《2차점화》 새 기술의 도입 등 중대한 기술개혁으로 이어졌다. 그것과 관련된 기술개진 항목은 무려 161가지에 달한다. 《확대경》을 들고 《먼지》를 찾는 사람 리상영은 발사팀 성원들에게 매번 새로운 위성발사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장4B대오에는 과거의 성적에 만족할 자본이 없다. 항시 령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자세로 과업수행에 나서야 한다》고 신신 당부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문제를 찾으라,문제를 발견하는 자가 영웅이다.》고 고무격려했다.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거나 원유설비를 개조하여 검측시험을 할 때 그는 한시도 시험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털끝만치라도 의문스러운데가 있으면 절대 그대로 넘기는 법이 없었다. 로케트 내부의 각 부분을 이어주는 케이블은 생명선과도 같아서 어느 한오리라도 헛땜을 하거나 잘못 이으면 안된다.  한번은 삼거웃처럼 얼기설기 얽힌 케이블을 가리키며 리상영이 물었다. 《확대경으로 케이블검사를 했소?》 케이블팀 팀장이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리상영은 즉시 《안되오! 케이블이 플러그에 제대로 이어졌는지 확대경으로 한오리 한오리 100%로 검사하시오!》하고 엄령을 내렸다. 또 한번은 시험을 할 때 케이블단락현상이 나타났다.정황을 보고받은 리상영은 가차없이 책임추구를 결행했다. 책임부처에서 사고원인을 한창 작업교대중에 있던 설치반 로동자들의 탓으로 밀자 리상영은 책임부처의 일군을 호되게 비평했다. 그 일군은 억울해 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러나 직원이 눈물을 보인다고 해서 록록히 처리할 리상영이 아니였다. 그는 《장4B는 눈물을 믿지 않습니다》고 하면서 그 반조더러 즉시 생산을 중지하고 정돈을 하게 했다. 나아가 작업관리, 기술조작, 교대절차와 수속 그리고 관련 세칙에서 원인을 찾게 하고 제반 제도를 철저히 수정,  보완토록 했다. 와중에 비평을 받은 그 책임일군은 리상영에게 완전히 감복이 되여 비평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생겨났고 작업질보장에 철저한 책임성을 보였다. 얼마후 그는 상해우주비행국의 선진에 당선되여 경험을 소개하게 되였는데 강연제목은 《압력은 질보장의 촉진제》였다. 인간 리상영 리상영은 사업이 아주 몸에 밴 분이다.그러나 마음의 탕개를 조금 풀 때도 있으니 그것은 위성을 방금 예정궤도에 띄워놓고 승리를 경축할 때의 한순간이다. 이 때면 그는 잠시나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만사를 잊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통쾌히 즐긴다. 팀멤버들이 총설계사에게 프로를 요청해 오면 그는 《시경》에 나오는 옛시도 멋지게 읊조린다. 《사이좋게 우는 저 징경이 하수가에 있네.곱고 고운 아가씨는 님의 좋은 짝이로세(關關雎鳩,在河之洲,窈窕淑女,君子好逑).》하고 궁글진 목소리로 읊어내리면 다들 신이나서 박수를 치며 노래를 요청한다. 그러면 그는 어릴적 어머니에게서 배운, 평생 유일하게 부를 줄 아는 노래 《노들강변》을  한가락 불러넘기군 한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서 매여나볼가...》 리상영은 《노들강변》노래를 부르는것은 어머니에 대한 가장 좋은 기념이라고 말한다. 작년에 외국출장을 하면서 흑룡강의 고향을 지나게 되였다. 어머니묘소에 내려 벌초라도 하고싶었지만 내릴수 없는 몸이였다. 당시 그는 《노들강변》을 입속으로 웅얼거렸다고 한다.   조선민요 《노들강변》을 열창중인 리상영.   백두산천지에서 부인 손광옥과 함께. 누구보다도 안해 손광옥과 두 자식에게 미안하다는 리상영이다. 결혼해서 30여년간 내내 상해를 중심으로 북경과 태원 등 로케트발사기지 사이를 오가면서 장정호운반로케트 연구설계와 발사에 혼신의 정열을 쏟다보니 모든 가무일과 두 자식을 키우는 일은 전부 역시 과학연구일군인 안해가 전담할수밖에 없다. 리상영은 로케트와 인공위성에 대해 말하라면 노들강변 청산류수지만 자식의 신변사에 대해 물으면 세마디 안짝에 둬번 막히는 정도다. 그래도 남편의 사업을 자기 일 이상으로 지지하는 안해는 로케트 발사때마다 남편걱정으로 혈압이 뛰여오르군 했다.《안해가 불합격 남편을 리해해주고 아들딸들도 잘 커줘서 너무 고맙고 행복하다》고  그는 말한다. 딸은 지금 상해 서금병원 의사로 근무중이고 아들은 미국 하불대에서 MBA과정을 마치고 이미 귀국했다. 아들이 석사졸업식을 가진다는 소식을 알고 조직에서는 그에게 휴가를 주었다. 30여년간 번번이 휴가를 사절하고 일에만 전념해왔던 리상영은 이번에는 쾌히 접수했다. 안해와 함께 아들의 졸업식에 참가하여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싶었던것이다. 평생 처음 사랑하는 남편, 존경하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나라들을 구경하면서 안해와 아들은 너무 행복해했다. //  2007-02-12  
4    포레스트의 '바보정신' 례찬 댓글:  조회:4510  추천:123  2007-02-18
톰 행크스(湯姆·漢克斯) 가 주연한 미국영화 를 본 이라면 포레스트 검프란 청년주인공에 대해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포레스트는 지력상수가 75라 소학교에 들어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좀 모자라는 축이지만 의외로 그는 하는 일마다 성공한다. 어느 날 악동들의 장난을 피해 도망치던 포레스트는 바람처럼 달릴 수 있는 소질을 보이며 급기야 대학에까지 미식축구선수로 가게 된다. 그는 어떤 상황이든 알맞게 대처하는 능력을 보이면서 나중에는 성공한 기업가로까지 성장한다. 그러나 포레스트를 바보취급하던 총명한 동창생들이나 전우들은 성공한 사람이 별로 없다.이른바의 에 대한 절묘한 조롱이다.이 영화를 보면 정상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거개가 자기들의 삶을 다시 반추하지 않을수 없다.   포레스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성공은 개인의 예비를 극한상황에까지 발휘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리념을 반영하고 있다.  모종 의미에서 포레스트의 성공은 그의 조금 모자라는 지력상수에 힘입은 결과일수도  있다.말하자면 승부나 득실을 계산할줄 모르고 바보처럼 진지하게 견지하고 집행하는 이 그를 성공하도록 만든 것이다. 굳이 그의 성공비결이 뭐냐를 따진다면  단순한 견지력과 매 한가지 일에 향한 강한 집념이 그것이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개인의 자질에는 신체소질,심리소질,지력상수 이 세가지가 포함되여 있다고 한다. 현대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일개인의 성공을 결정하는 여러가지 요소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심리소질이며 지력상수는 필요한 조건일 뿐이지 충분한 조건은 아니라고 한다.고로 우리는 일상생활속에서 학력이 높지 않은 사람들이 회사의 회장이나 사장이 되고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그 밑에서 일하는 현상을 자주 보게 된다.학력이 높다는 것은 성공할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할 뿐이지 그것이 반드시 성공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허다한 경우 기업에 결여되는 것은 총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포레스트와 같은 이다. 총명한 사람들은 일단 문제에 부딪치면 회사나 상급을 원망하기 십상이며 무슨 일이나 리익을 먼저 계산해보고는 딱 그만큼만 하려 하며 리익이 없으면 아예 하려 하지 않는다.그 어떤 결책이나 명령을 집행할 때에도 자기에게 리익은 얼마나 차례질 것이고 혹시 손실은 보지 않겠는지 하고 늘 먼저 곰곰히 따지기를 즐기는데 그러다 일단 수지가 맞지 않는다 싶으면 그 결책이나 명령에 대한 부터 마련하기에 드바쁘다.   많은 일들은 시작을 할 때엔 10점의 노력을 기울여야 3점의 결실을 맺는 경우가 푸술하다.그러나 득실을 따지지 않고 계속 해나가다 보면 3점의 노력을 들여도 10점의 결실을 볼 때가 반드시 오는것이다.   우리는 항상 지력상수의 높고 낮음으로 한 사람의 총명여부를 저울질해 왔다.그러나 암만 총명한 사람이라도 필시 단점이 있고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장점은 있게 마련이다. 포레스트가 그렇지 않은가?달리기에 특출한 재능이 있고 하모니카도 잘 불며 당구도 잘 치고 새우사양도 잘한다.자기의 부족점을 알고 누구보다 더 전념을 해서 열심히 하니 하는 일마다 성과를 낼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찌보면 모두가 포레스트보다 총명할지 모른다.하지만 우리는 매 한가지 일에 대한 집념이 몹시 결여되여 있기 때문에 일은 거창하게 벌리고들 있지만 잘 해내는 일이 별로 없고 왕왕 실패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해서 총명한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물론 아니고 그것이 죄로 된다는것은 더욱 아니다.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자기의 타고난 총명과 재질을 아름다운 보따리로 짊어질것이 아니라 거기에 포레스트의 까지 가첨해서 잘 리용해 보자는 것이다.창업청년으로서 타고난 총명 어쩌구를 우선 내세우지 않고 무슨 일을 하나 포레스트식 을 좀 가진다면 무슨 일을 하든 잘 해낼수 있겠다는것이다. //길림신문
3    너희들도《대충선생》과 작별할거냐? 댓글:  조회:4297  추천:98  2007-02-17
호적의《대충 (差不多) 선생》은 20세기 초 중국인의 《대충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 이야기이다.대충(差不多)이란 이름을 풀이해 보면 그게 그게니 대충 해도 된다는 뜻이다. 《대충선생》의 행동은 이름을 닮았다. 어머니가 백설탕을 사오라고 하면 흑설탕을 사왔다.꾸중을 들어도 똑같은 설탕인데 무얼 그러느냐며 딴전을 피웠다. 커서는 회계사로 일하며 《십(十)》과 《천(千)》을 종종 바꿔 썼다. 주인이 화를 내면 《한 획 차이에 불과한데》라며 투덜거렸다. 그런 그가 병이 났다. 가족에게 《왕(汪)》씨 성의 의사를 모셔오게 했다. 한데 수의사인 《왕(王)》씨를 잘못 데려왔다. 결국 병든 소 취급을 받다 죽게 된 《대충선생》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산 자나 죽은 자나 별 차이 있겠는가.》   이런《대충선생》이 세상에 태여난지 80년 하고도 6년이 지난 해 6월 29일 산두대학 졸업식에서 세상이 다 아는 중국의 갑부 리가성이 《을 타도하자》란 제목으로 짧은 연설을 했다.   리가성선생은 이 명작을 재독하고 《대충선생》의 불쌍한 우매에 다시금 놀람과 아울러 《대충선생》의 수명이 너무 길어 오늘까지도 그 유령이 창궐하게 활동하고 있음에 대해,그 영향으로 오늘까지도 삶을 대충 사는 사람들이 지혜를 허무하게 랑비하고 있음을 통탄했다.   리가성의 동년은 전란과 가난으로 점철된 불행의 련속이였다.교장이였지만 가난한 지식인에 불과했던 아버지가 피난지 향항에서 페병으로 사망하자 15살때 학교마저 중퇴해야 했던 리가성은 한 플라스틱무역회사에 임직하여 매일 16시간씩 근무를 했었다.무슨 일을 하나 얼렁뚱땅 대강하는 법이 없는 그는 최고를 추구하는 정신으로 사업을 개척하여 오늘 54개 나라에 사원 22만명을 둔 장강그룹을 일떠세웠다.   부동산,전력,통신,소매,항구운수 등 업종을 경영하고 있는 리가성은 창업자들에게 한가지 일을 해도 혼신을 다해 진지하게 할것을 권도하며 무슨 일을 하나 얼렁뚱땅 대강대강 대충대충 해치우는 습관에 물젖게 되면 아무 일도 제대로 해낼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경고를 두 아들에게도 한적이 있다.아들들이 아버지 밑에서 일하겠다고 했을 때 그 요구를 과단성 있게 거절했다.   《나의 회사엔 너희들이 필요 없다.다들 절로 나가 창업하거라.성실성과 근면성으로 일을 개척해라.성공못하면 돌아오지 말어라.》   하여 두 형제는 카나다에 가서 천신만고를 불사한 끝에 부동산투자 등 사업에 성공하며 드디여 카나다 상계에서 발군의 인물로 거듭난다.   《대충주의》사상은 인간의 령혼을 해치는 바이러스나 다름없다.목숨도 질기여서 호적선생이 당년에 그처럼 혹독하게 타매규탄하였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의 어린 세대와 젊은 세대를 령혼잠식의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화장실에서 분명 냄새가 나는데도 《이 정도의 냄새야 뭐 대순가》라고 하며 손수 만든 음식맛이 별로 탐탁치 않은데도 《내입에는 이만하면 괜찮은걸》라고 하며 상품포장디자인이 개진해야 할 틈이 다분히 보이는데도 《나의 작품이 왜 이렇게 멋지지?》하고 너무 일찍 만족해버리는 일들을 우리는 자주 볼수 있다.   오늘 젊은이들이 운명의 멍에를 짊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대충주의》의 위해성을 알고 일찌감치 《대충관념》과 모든 관계를 끊어버려야 한다.삶에 대한 끈질긴 추구와 참여,시련을 이겨내는 용기와 불타는 열성,인간과 사업에 대한 드높은 책임성과 뜨거운 사랑, 이것이 《대충관념》과 작별하는 최고의 약방문이다.   리가성은 모든 창업자들의 본보기임에 틀림없다.그의 끈질김도 더 비할데 없다.사회진출을 앞둔 대학졸업생들을 상대로 한 그의 짧은 연설의 마지막 한마디 말이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그 말은 이렇다--   《나는 평생을 다하여 추호의 드팀도 없는 정신적 목표와 뜨거운 마음으로 이어진 삶을 살것이며 절대로 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데 너희들은 어떻게 할거냐?》  200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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