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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룡희,“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
신임 장춘시 부시장 리룡희 탐방
《길림신문》박문희 기자
신임 장춘시 부시장 리룡희씨를 만나기란 실로 조련치 않은 일이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와 그의 례절스럽고 열정적인 장용 비서를 통해서 그의 행적을 조금 알수 있을 뿐 만나기가 어려운건 물론 전화를 통한 대화조차 기대하기 쉽잖았다. 취재과정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거의 사무실에 눌러앉아 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전 장비서에게 수차례 간곡한 부탁을 해서야 드바쁜 시장실무의 틈새를 찾아 짧은 만남의 기회를 요행 가질수 있었다.
“시장님을 만나 뵙기가 굉장히 어렵네요. 공청단 성위에서 일을 보시다가 장춘시 부시장으로 오시니 사업이 훨씬 바쁘시지요? ”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일도 물론 바쁘지만 솔직히 말씀 드리면 공청단위에서 사업한 13년간 기자들의 취재요청이 무지 많았어도 저는 전부 사절했댔습니다. 소문을 적게 내고 실제적인 일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딱 한번 례외가 있는데 16차 당대회 때 이상 분들이 젊은이가 (기자 앞에) 나가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취재를 수락한 적이 있습니다. ”
“아, 그러세요? 그럼에도 이렇게 만나 주시니 다행이군요. 부시장으로 오신 후 무슨 일을 맡아 보십니까?”
“상업, 대외경제무역, 상업국유자산경영과 공상관리부문입니다. 이런 부문들의 산하에는 수다한 기업소와 단위가 있는데 경영활성화와 정돈개혁의 임무가 십분 번중합니다. 례컨대 상업국유자산경영공사 산하에만 해도 89개 국유상업기업이 있는데 그중 대다수는 결손기업입니다. 대표적 결손단위로 중흥백화점을 들수 있는데 이 기업은 10년 동안 결손기업의 모자를 써 온 오랜 문제꺼리 단위죠. 2512명 종업원의 로임을 내주지 못해 종업원들의 래신래방이 그칠 새 없는데다 새로운 문제들도 자꾸만 터져 나와 시정부는 물론 성정부에서도 골치를 무척 앓았습니다. 저는 중흥백화를 전반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 돌파구로 삼아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고 깊이 있는 조사로부터 착수해서 문제를 발견하는 족족 해결책을 들이 댔습니다. 법원 등 관련부문에도 직접 찾아 가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두달 사이에 중흥문제를 가지고 도합 8차례의 회의를 열었어요. 지금 문제는 점차 풀림새를 보이고 있는데 올해 안으로 확실한 해결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3월 1일에 도임해서 80일도 안되는 사이에 안고 있는 문제가 돌출하고 또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십개 기업과 단위를 거의다 한두차례씩 훑었다.
그의 사업은 사실 무겁고 번거롭다. 시장관리를 하면서 음식안전을 틀어쥐는 데로부터 해외로 로무자를 파견하고 투자유치대표단을 이끌고 해외고찰방문을 하고 내외 고찰단을 접대하는데 이르기까지 할 일이 아주 많다. 장바구니공사는 장춘시의 으뜸가는 공사로 현재 식료품안전정보통보 기제를 건립중이다. 음식안전관리를 보면 륙속 비법아가위과자가공점, 비법우유류통점, 비법개고기가공점 등 소탕전을 치렀는데 그중 비법개고기가공점을 들부신 전역은 영향면이 넓고 효과가 좋아 소비자들의 한결같은 옹호를 받았다.
“크고작은 일들이 항상 끊이질 않습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문제를 연구할 시간마저 없어요. 그러니까 조사하는 한편 문제를 해결하고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는 가운데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져 보니까 3월 초 이래 제가 단독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은 시간은 한주일에 불과 두어 시간밖에 안돼요. 그외 시간은 전부 밖에서 실제문제를 해결하는데 돌렸습니다.”
“인터넷검색을 통해 리시장님께서 투자유치대표단을 이끌고 한국 울산시를 방문한 소식을 읽었는데 많은 성과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
“방문은 성공적이였습니다. 박맹우 울산시 시장과 만나 좋은 얘기를 나눴고 또 경제합작계약들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합작항목들이 작동과정에 있기 때문에 언론에는 최대한 압축보도를 했을 뿐입니다. 그 기간에 삼성, LG와 SK 본부도 방문했습니다. 현대자동차 본부를 방문했을 땐 명년에 열리는 ‘장춘제 4기국제자동차박람회’에 참가할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금년 6월은 장춘시와 울산시가 자매결연을 한 10주년 기념월간입니다. 이달 하순에 울산시 정부와 의회에서 기업인대표단, 문화교류대표단과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장춘시에 와 기념축제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번 행사 기간에 고신기술개발구의 한 거리를 울산거리로 명명하는 의식과 시내 공공뻐스 한대를 울산뻐스로 명명하는 의식도 가지게 됩니다.”
학습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 리룡희 부시장은 “리론학습은 정치자질을 높이는데 있어서의 관건이요, 학습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자칫 형세에 뒤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언제나 감히 리론학습을 늦출 수 없었다”고 했다.
2002년 그는 중앙당교 중청년 간부 훈련반에 참가했었는데 이를 계기로 맑스주의 경전저서와 론술을 참답게 정독하고 <민주정치와 정치문명> 등 6편의 론문을 써냈다. 그중 <글로벌화와 민족화를 융합시키는 행정에 중국 선진문화를 추진시켜야 한다>란 론문은 전국 핵심간행물인 <리론전연>(理論前沿)에 발표됐다.
리룡희는 경제지식과 현대기능에 대한 학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업여가를 타 대량의 경제학도서를 탐독하고 50여만자에 달하는 국내외 관련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아울러 <국유기업소 내부인원 통제문제 연구>, <중국의 WTO가입이 동북아경제에 미치는 영향 분석> 등 5편의 론문을 써냈다. 경제학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2001년에는 길림대 경제학박사 공부에 몰입, 동북아 구역경제를 전문 연구했다. 공청단사업을 할 때 기층에 대한 료해를 비교적 투철히 쌓은데다가 정치리론과 경제리론의 조예가 비교적 깊었으므로 리룡희는 장춘시정부에 전근된 뒤 재빨리 새로운 사업환경에 적응하여 배역전환(角色轉換)을 완성할수 있었던것이다.
“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자기의 소신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사업과 생활에 대한 태도를 물었을 때 그는 “이 면에서 나는 자기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은 편 ”이라고 했다.
직위가 높아짐에 따라 그는 렴정문제에 보다 깊은 주의를 돌렸다. 자각적으로 당내의 감독, 법률의 감독과 군중들로부터 오는 감독을 접수하고 배금주의. 향락주의와 극단적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권력관, 명예지위관, 리익관과 인정관을 잘 넘기기에 십분 류의했다. “제1책임자” 란 특수신분을 리용해 사리를 도모하거나 특수화를 부리지 않았으며 주택, 승용차의 사용문제에서나 개인생활, 가족과 친인척의 취업 등 문제에서 종래로 단위에 페를 끼친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활면에서 저는 매우 만족하는 편이고 사업면에서는 반대로 늘 부족감을 느낍니다.”
그의 과외취미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제일 좋아하는것이 촬영이라고 했다.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한 기회를 리용하여 그는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방면의 자료를 수태 찾아 읽고 자세히 연구하였으며 피타는 노력을 들여 미국사회의 이모저모에 대한 대량의 사진을 찍었다. 최근에 그는 사진 500여폭에 7만여자의 문자해설이 달린 책자 <흑백의 미국>(黑白美國)을 탈고, 출판했다. 독서 역시 그의 애호이다. 그가 읽는 책은 고금중외의 정치, 경제, 문화에서 천문, 지리, 력사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아주 광범하다. 그외 그는 컴퓨터기술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한다. 짬을 타 외국어공부도 내내 손에서 떼지 않고 있다.
“주요취미가 촬영이지만 전혀 시간적 여유가 없어 지금같애선 퇴직한 후라야 사진기를 들것 같네요. 동북 로공업기지 진흥사업에서 현재의 형국은 동북 3성의 세 도회지 및 대련의 합동작전과 각자 자체우세발휘의 구도입니다. 경제진흥의 견인차 역할을 노는 ‘3두마차’는 적극적인 투자, 내수 진작과 수출 확대입니다. 이 세가지는 모두 직접 물류사업과 이어져 있습니다. 제가 맡은 과업도 실상 물류사업인데 제 어깨가 무거워 짐을 느끼는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업상 압력은 받고 있지만 잘 할수 있다는 신심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정한 시간이 됐다. 다음 일이 리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는 후날 만날 기회를 다시 갖기로 리시장과 약정을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길림신문》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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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차 당대회 대표 -- 리룡희
박문희
【리룡희 략력】
1963년 출생,길림성 매하구시 사람.
1986년 연변농학원 졸업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음. 1988년부터 선후로 공청단 연변주위 부장, 훈춘시 량수진 당위 부서기, 공청단 연변주위 부서기, 서기, 복건성 하문시 정부 판공청 주임조리, 연변주 조직부 부부장, 공청단 길림성위 부서기, 서기, 당조서기, 길림성청년련합회 주석을 력임.
2004년 2월 장춘시 정부 부시장으로 조동.
1998년 길림대학 경제학 석사학위 획득.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 미국 일리노이주 등지에서 학습 고찰.
2002년 16차 당대회 대표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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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룡희는 1986년 사업에 참가한 뒤 부동한 일터에서 간단없이 자기를 련마했다. 공청단성위 부서기로 발탁되자 그는 변화된 사업환경에 재빨리 적응, 주요령도에의 배합에서 직접 주 책임을 지는데로, 몇개 부문을 맡아 관리하던데로부터 전면사업을 주최하는데로의 배역전환을 신속히 완성했다. 아울러 사업주제의 요구에 따라 전 성 공청단의 제반 사업을 효률적으로 설계 조직했다. 구체적인 사업 행정에 그는 “봉사성 발휘”와 “창의력 개발” 이 두가지에 모를 박았다. 청년들의 책임감을 유발시키는 각종 주제교양활동과 2차 창업활동을 고안 전개하였으며 청년취업과 재취업 이벤트도 활발히 벌려 뚜렷한 성과를 올렸다. 이를테면 도시에서 취업과 재취업 활동을 벌린 3년 동안에 전 성 공청단 조직들에서는 선후로 3500여명 청년들의 자주창업을 도와 주었으며 467명의 재취업전형과 창업 선줄군을 키워 냈으며 3만여명 귀휴청년들을 재취업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외 5.6만명 농촌청년들을 도와 취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지도부 내부에서 그는 주변의 일군들을 성심과 관용으로 대하면서 할 말이 있으면 앞에서 말하고 문제가 있으면 책상우에 내놓도록 고무해 주었으며 서로 리해하고 신임하며 협조 배합할것을 창도했다. 공청단 성위에서 사업한 시간이 길고 자격과 경력이 오랜 그지만 지도부 성원들을 충분히 존중해 주고 그들의 의견을 허심히 청취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절차를 중요시했다. 특히 인사문제라든가 경비문제같은 일을 처리할 때면 의식적으로 여러 사람의 의견청취를 하고 사상을 통일한 전제하에서 집단 결책을 하였다.
공개경쟁을 창도하는 방법으로 현명하고 재능 있는 자를 선발 등용하고 기관내에서 학습교양활동을 전개하며 기층에 직무를 가지고 내려가 단련받게 하는 등 경로를 통해 청년간부를 적극 선발하고 훈련시켰다.
리론학습을 늦추지 않았다. 리론학습은 정치자질을 높이는데 있어서의 관건이라고 리룡희는 말한다. 2002년 학습기한이 1년인 중앙당교 중청년간부 훈련반에 참가했던 그는 이를 계기로 맑스주의 경전저작과 론술을 정독하고 <민주정치와 정치문명> 등 6편의 론문을 써냈는데 그중 <글로벌화와 민족화를 융합시키는 행정에 중국 선진문화를 추진시켜야 한다>는 전국 핵심 간행물인 < 理論前沿 >에 발표됐다.
경제지식과 현대기능에 대한 공부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상사업가운데서 기층 조사에 류의, 3년 남짓한 시간내에 전 성 60개 현(시,구)을 거의 다 돌았으며 제1자동차공장, 통화제철소, 길림화학공정공사 등 성내 수많은 국유기업과 민영기업을 돌아보면서 특정쩨마의 조사연구를 진행, 하부의 실정을 대량 장악하고 기층을 도와 걸린 문제들을 적극 풀어주었다. 한편 사업 여가를 타 수많은 경제학 도서를 열독하고 50여만자에 달하는 국내외 경제지식과 경제동정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아울러 <국유기업소 내부인원 통제문제 연구> <중국의 WTO 가입이 동북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 분석> 등 5편의 론문을 써냈다. 그중 <신강의 가지속발전문제에 대한 약간한 탐구>는 중앙당교로부터 우수고찰보고로 평정됐다. 경제학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리룡희는 2001년 길림대 경제학 박사공부에 몰입, 동북아 구역경제를 전문 연구했다. 최근에는 <중,일,한 경제 가지속발전 비교연구>란 쩨마의 론문을 완성했다.
기층에 대한 료해가 비교적 투철한데다 정치리론과 경제리론의 조예가 깊었으므로 리룡희는 장춘시정부에 전근된 후 재빨리 새로운 사업환경에 적응할수 있었다. 출근 이튿날부터 곧바로 기층에 대한 조사연구에 들어가 조사를 하는 한편 문제해결에 착수했다.
리룡희가 맡은 사업은 상업, 대외경제무역, 상업국유자산경영과 공상관리 부문이다. 이런 부문들의 산하에는 수다한 기업과 단위가 있는 데 경영활성화와 정돈개혁의 임무가 십분 번중하다. 비컨대 상업국유자산경영공사 산하에만 해도 89개 국유 상업기업소가 있는데 그중 대다수는 결손기업이다. 대표적 결손 기업소로 중흥백화점을 들수 있다. 이 기업은 10여년간 결손의 음영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오랜 문제거리 단위이다. 2512명 종업원의 로임을 내주지 못해 종업원들의 래신래방이 그칠새 없는데다 새로운 문제들도 자꾸 터져 나와 시정부는 물론 성정부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었다. 리룡희는 중흥백화를 전반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 돌파구로 삼아 해결하기로 작심, 깊이있는 조사로부터 착수해서 문제를 발견하는 족족 해결책을 댔다. 법원 등 관련 부문에도 몸소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두달도 안되는 사이에 중흥문제를 가지고 도합 8차례의 회의를 소집, 올해 안으로 걸린 문제를 기어이 다 풀어내고야 손을 뗄 잡도리다.
이처럼 그는 도임해서 석달도 안되는 사이에 안고있는 문제가 돌출하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십개 기업과 단위를 거의다 한두차례씩 훑었다.
그의 사업은 사실 무겁고 번거롭다. 해외로 로무일군을 파견하고 시장에서의 음식안전을 틀어쥐는데로부터 시작해서 초상인자대표단을 이끌고 해외고찰방문을 하고 내외 고찰단을 접대하는데 이르기까지 크고작은 일들이 항상 끊이지않는다. 사무실에 앉아서 문제를 연구할 시간마저 없다. 그러니까 조사하는 한편 문제를 해결하고 배우면서 일하며 일하는 가운데서 배우는 수밖에 없다. 3월 초 이래 한주일에 그가 단독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은 시간은 불과 두시간밖에 안 된다. 그외 시간은 전부 기층에 내려 가 실제문제를 해결하는데 썼다.
사업과 생활면에서 리룡희는 자기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하다. 직무가 진급함에 따라 그는 특히 렴정문제에 보다 자각적으로 주의를 돌리고 있다. 당내의 감독, 법률의 감독과 군중들로부터 오는 감독을 접수하고 배금주의, 향락주의와 극단적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권력관, 명예지위관, 리익관과 인정관을 잘 넘기기에 십분 류의한다. 그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명히 가르고 “제1책임자”란 특수신분을 리용해 사리를 도모하거나 특수화를 부리지 않으며 주택, 승용차의 사용문제에서나 개인생활, 가족과 친척,인척의 취업 등 문제에서 종래로 단위에 페를 끼친적이 없다.
그의 과외애호는 주로 촬영이다.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한 4개월간의 기회를 리용,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면의 자료를 수태 찾아 읽고 연구하였으며 피타는 노력을 들여 미국사회 이모저모에 대한 대량의 사진을 찍어 사진 500여폭에 7만 여 字의 문자해설이 달린 책자 <黑白美國>을 탈고, 출판했다. 독서 역시 그의 애호이다. 그가 읽는 책은 고금중외의 정치, 경제, 문화에 천문, 지리, 력사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아주 광범하다. 그외, 그는 컴퓨터기술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한다. 외국어 공부도 내내 놓지 않고 있다.
<조선족영재록>, 료녕민족출판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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