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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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마주 닿는 순간 / 박창해 (미국)
2007년 07월 09일 01시 30분  조회:4776  추천:97  작성자: 박문희


마음이 마주 닿는 순간

박창해 (미국)

 
 

사람은 마음으로 사오

마음과 마음이 마주 닿는 순간순간

서로는 말이 없어도

대화는 이어만 가오

그 대화에서 정은 우러나는 거

 

백두천지에서 우러나는 샘처럼

억겁을 두고서 흘러내렸어도

상기도 압록 두만 가람을 이루듯

우리의 정성 어린 정은 흘러내리오

파란 천지같은 맑은 마음에서 말이오

 

천지에 고인 물은 화산속

밑바닥에서 끓어오른거

그러하기에 티 하나 없는

그냥 맑디 맑은 거라서

겨레가 좋아 나누어 마시는 거라오

 

겨레의 얼은 천지물 같은 거

화산같은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다 못해

겉으로 말이 되어 가람처럼 흘러내리오

억겁을 두고서 흘러내리면서

얼은 가람으로 바다가 되여 우릴 지키오

 

-(1986)정초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마음의 노래


 

 

싣는이 주:

여기 싣는
이 시는 1986 2 25일자 <길림신문>에 아래에 언급되는 편지와 함께 실린것으로, 박창해선생 (1986년 당시 69)이 옛날 학생이였던 박두희(싣는이의 형님이며 당시 연변1중 교장으로 있었음, 1995 1 28일 별세)에게 보낸 시이다.
 

 

박창해 선생은 미국적 한국인으로 당시 미국한국어학원 원장이자 철학박사였다. 선생은 1939년도에 한국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마친 뒤 연길현(지금의 룡정시)에 들어 와 은진중학교 (지금의 룡정 1)교원으로 사업했으며 그 후 미국에 가서 콜롬비아대학을 다녔었다.

 


왼쪽으로 세번째 분이 박창해선생이고 네번재 분이 싣는 이의 형님 박두희임.


1985년 여름 박창해선생은 연변에 다녀와 옛추억을 남겼던 룡정과 연길 등지에서 여러 동문과 제자들을 만나 회포도 풀고 함께 백두산 천지에 올라 민족의 정기를 혼신으로 느끼기도 했다.

 

박창해선생이 시를 담아 보낸 편지에서 그때 선생의 심경을 여실히 체감할수 있다. 


아래는 편지의 주요 내용이다----

 

......
 

몸은 늙어가고 있지만 마음과 정신은 젊어있는 모습들은 발전의 기상을 띤것으로 확신합니다.


여기 시 한수를 보냅니다. 천지에 올라서 입안으로 중얼거려 보던 것을 형식을 갖추어서 <마음이 마주 닿는 순간>을 노래로 하였습니다. 룡정에 발을 내려 디디기 전 카나다 전사장에게 한 이야기에서 나는 박교장의 정을 마음껏 느꼈고 동창회 모임과 여러 동문들 틈에서 사제의 깊은 정을 다시 보면서 읊은 것이지요. 또 겨레의 동일성도 포함하였지요. 한번 읽어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회 있으면 다른 분에게 공개하여주셔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 내외는 다시 룡정으로 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교사와 교회 건물은 헐었어도 동문들의 두터운 정은 생생히 더하여 있음을 호흡하고 돌아 왔습니다.


이달 17일에는 카나다 토론토에 있는 동문들을 만나러 갑니다. 아마 두어 밤을 새우면서 룡정과 연변자치주의 발전상을 이야기 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동무들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자주 연락이 있기를 바랍니다.


박창해
뉴욕에서



 




온 몸을 초불마냥 불태운 교육가의 일생

-- 박두희 교장을 회억하여

 

최승묵 

 

박두희교장은 우리 민족의 우수한 교육가이며 오랜 스승이다. 그느 1978년 1월에 상급의 파견을 받고 연변제1중학교에 와 교장 겸 당서기 직무를 맡게 되였다.

 

박교장이 처음 연변제1중학교에 왔을 때는 학교의 그 어디나 문화대혁명의 파괴를 받은 흔적이 력력한 때였다. 그리하여 박교장은 부임하자부터 문화대혁명의 상처를 가시고 학교를 정돈하는 무거운 과업을 떠메고 불철주야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모든것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였다. 연변제1중학교는 진흥의 새출발을 해야 하였다.

 

박교장은 웅대한 설계도를 무르익혀 나갔다. 1류의 지도부, 1류의 교원집단, 1류의 학생, 1류의 설비와 교수수단을 구비한 학교로 일떠세울 웅대한 목표아래 학교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우선 지도부를 조절하고 충실히 하였다. 조건이 부합되지 않은 교원들을 적당한 자리에 배치하고 전 주 각지에서 20명에 달하는 우수한 교원들을 뽑아다가 교원집단을 충실히 하였다. 오래동안 침체상태에 있던 실험실, 도서실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였으며 연변에서 처음으로 되는 언어실험실을 세우고 시청각 교수수단(電敎)을 도입하였다. 박교장은 또 전 주 범위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할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1978년 8월부터 상급의 비준을 거쳐 전 주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하게 되였다. 몇년간의 정돈을 거쳐 학교는 원기를 회복하고 교육개혁의 새 기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박두희교장의 신변에서 사업하면서 박교장은 개척형의 교장으로서 원견성이 있고 담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심심히 느끼게 되였다. <산해관을 넘고 황하, 장강을 뛰여 넘으며 바다를 건너 세계로 진군하자!> 이것은 박교장이 80년대 초에 제기한 구호로서 우리의 졸업생들이 우선 전국 각지의 대학들에 진학하며 나아가서 외국류학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호는 시대의 발전에 맞으며 현실적이며 원견성 있는 구호로서 지금 실현되여 가고 있다. 우리의 졸업생들은 지금 전국 100여개 소의 대학들에 널려 있으며 세계에로도 진출하고 있다.

 

박교장은 민족교육이 직면하게 될 여러가지 문제들을 통찰하고 <민족교육의 출로는 개혁에 있다>고 명확히 제기하였다. 이로부터 박교장은 <세가지 어문(조선어문, 한어, 외국어)> 개혁을 돌파구로 하고 점차적으로 총체적 개혁을 할 구상을 내놓았다. 박교장은 우리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고 <조선어문을 잘 배우는 토대우에서 한어를 잘 배움으로써 조선어와 한어를 정통한 인재가 되여야 하며 우리의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일어를 잘 배우는 동시에 영어를 잘 배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우리 학교에서는 박교장의 령도아래 교육개혁이 활발하게 진행되였는 바 한어과의 <집중적 식자, 대량적 독서, 경상적 습작>실험, 조선어문과의 <작문을 주선으로 하는 교재체계개혁>, 초중에서 일어를 배운 학생들이 <고중부터 영어를 학습하는 실험>, 한어로 수업하는 학급설치 등이 그 구체적 실례로 된다. 박교장은 또 초중 4년제 실험반을 꾸리고 영어과를 설치하였으며 <전면적 질제고를 위한 실험>을 친히 틀어 쥐였다. 그때 적지 않은 교원들은 영어교원의 자질과 기타 원인으로 영어를 배우면 진학에 불리할가봐 근심하였다. 그러나 박교장은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시대를 따르자면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실로 박교장은 원견성 있는 교육가였다.

 

박두희교장은 끈기 있게 학문을 탐구하는 학식이 연박한 분이다. 지난 4월에 내가 박교장댁을 찾아갔던 일이 있었다. 그때 박교장은 한창 영문본 <모택동선집> 5권을 탐독하고 있었다. 옆에는 또 일어본 5권도 놓여 있었다. 중풍을 맞아 불구로 된 몸으로 한시도 책을 놓지 않고 있는 선생님을 보는 순간 나는 눈굽이 뜨거워지며 그제날의 일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박교장은 독서가였다. 밤이고 낮이고 명절이고 일요일이고 따로없이 틈만 있으면 책을 들었다. 박교장의 독서범위도 넓었다. 교육, 철학, 경제, 문학, 인물지 등 여러 방면이였다. 따라서 장악한 지식도 그만큼 범위가 넓었고 깊었다. 박교장은 영어, 일어, 로어, 독일어, 중어 등 몇가지 언어를 장악하였으며 영어, 수학, 물리, 한어 등 여러가지 과목을 교수하였다. 제일 즐기는 일이 무엇인가고 내가 물었을 때 박교장은 <독서>라고 대답하였으며 금후 타산을 물으니 역시 <독서>라고 하였다.

 

박두희교장은 자신에 대한 요구가 높고 생활이 매우 소박하였다. 1978년도에 연변제1중학교에 온 후 선후로 일곱번이나 이사를 하게 되였다. 식당 창고에도 들어 있었고 학생숙사에도 들어 있었지만 언제 한번 집때문에 불평을 말한적이 없었다. 이사할 적마다 언제나 웃으면서 <이것도 단련>이라고 통쾌하게 말하군 하였다.

 

박교장은 후배들의 성장에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특히 나는 그의 신변에서 사업하면서 직접적인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내가 이런저런 일로 머리를 앓을 때 그는 나를 자기 집에까지 데리고 가 식사를 같이 하면서 따뜻이 일깨워 주었다. 실로 박교장은 나의 교육사업에서의 스승이였고 힘의 원천이였다. 나는 지금 부교장 사업을 하면서 늘 그의 숭고한 형상을 떠올리며 그로부터 고무를 받군 한다.

 

박두희교장은 한생을 고스란희 교육사업에 바치였다. 그는 1927년 3월 28일에 룡정시 월청향의 한 빈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1947년 2월에 조직의 수요로 화룡현에 가 첫 교편을 잡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1989년 5월에 퇴직휴양 하기까지 장장 47년 남짓한 기간에 선후로 룡정고급중학교, 연변제1고급중학교, 조양천 제1중학교, 룡정시교육국, 룡정1중 등에서 사업하였다. 그 기간 그는 수학교연조 조장, 공청단서기, 부교무주임, 교무주임, 부교장, 교장, 당서기, 교육국장 등 직무를 맡고 자신의 심혈을 깡그리 바치였다.

 

박두희교장의 40여성상 교육생애는 초불마냥 자기 몸을 불태워 그 빛과 열을 인민교육사업에 깡그리 바친 생애이다. 우리 모두 박두희교장을 따라배워 당의 교육사업에서 초불로 되여 빛과 열을 다 하자.

 

1992.4.25 
 


 


 


 


 


 


 


 


 


 


 


 


 


 


 


 


 


 


 

 

출처: https://gmdqn.tistory.com/entry/박두희-교장을-회억하여-최승묵 [거부기통신: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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