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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의 의미
신 철 호
수석에 혼백을 죄다 바치고 탐석에 열성을 다 희생하면서 동분서주한지 꽤 오래다. 두만강이니 가야하니 해란강이니 부르하통하니 홍기하니, 고동하니 좌우간 이름깨나 붙은 큰 강이든 작아서 이름도 없는 개울이든 둥글둥글한 돌멩이들이 널려있는 돌밭들을 보고 그저 스쳐지나간 일이 없었다.
수석인들에게 수석은 무엇일까?
리정보(李鼎輔 1693~1766)는 리조판서, 례조판서, 대제학 등을 두루 지낸 관료로서 서예도 뛰여났거니와 문장력도 뛰어났다. 그의 시조 《꽃 피면 달 생각하고》를 읊어보면 저자가 달, 술, 벗을 그리는 마음의 절절함이나 수석인들이 수석을 그리는 마음의 절절함이나 별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 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하리오.
수석인들에게 수석은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는 달이요 기쁨을 향기롭게 피워주는 술이요 자나깨나 못잊어 어데 가나 있으면 무작정 찾아보는 벗이다. 그래서 수석인이 수석을 얻은 날은 완월장취(玩月長醉)에 못지않은 완석장취(玩石長醉)ㅡ거나하게 취한 기분으로 수석을 감상하면서 즐기는데, 그런 기분이 또한 수석속에 오래동안 지어는 일생동안 스며있으면서 몸과 마음을 닦아준다. 그래서 절묘하게 빼여난 수석 한점만 얻어도 천하를 다 얻은듯 하다고 하여 일생일석(一生一石)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공자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乐水,仁者乐山)》는 말을 남겼는데 수석을 찾아 산이든 강이든 찾아 떠도는 나그네ㅡ수석인들이야말로 참으로 지혜(智慧)와 인덕(仁德)을 두루두루 갖춘 군자(君子)들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와 같은 신참들은 다만 지(智)와 인(仁)을 얼마간이라도 갖추기 위해 군자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수련을 하는 생도(生徒)일뿐이여서 스승들을 백두산처럼 희귀하게 생긴 산수석에 비한다면 나같은 초입자들은 아무렇게나 생긴 김치돌정도이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하는 일에 몸이 피곤할 때면 나는 어김없이 컴퓨터에서 수석에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 뒤져보는 것으로 머리를 쉰다. 한국 수석에서는 산수석을 주로 감상하고 중국 수석에서는 물형석을 주로 감상하면서 감미로움을 맛본다.
두만강수석회 제2임 회장이였던 리광인(李光仁)교수가 중국조선족 글로벌 네트워크(ckywf.com)에 수석코너를 만들어놓고 사진과 글을 련속부절 올리고 있는데 나는 애초부터 이 코너의 단골손님으로 되었다. 리광인교수는 오랜 언론인이고 력사학자로서 지금은 절강월수외국어대에서 교편을 잡고있는데 절강연우산악회를 꾸리고 등산도 열심히 하고있는가 하면 시간만 나면 절강성 일대의 강들을 찾아 누비며 탐석에 열과 성을 다 비치고 있다.
나도 가끔씩 이 코너에 맹물에 조약돌을 삶은 것같은 글일지라도 써서 올리는데 수석을 감상하면서 느낀 감미로움을 글로 정리하고 보면 이 또한 탐석에 못지않은 즐거움을 주는 일로 된다. 하지만 지금은 늦깎이로 박사공부를 하느라고 2년 넘게 탐석에서 손을 떼고 아울러 수석에 관련한 글도 별로 쓰지 못하고 있으니, 때로는 탐석에 대한 미련이 충천이나 하려는듯이 치밀어 오르면서 마음이 막 싱숭생숭하여져서 저도 모르게 어둠컴컴한 페갱속을 헤매고 있다고 현실을 질타하기도 한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한달에 한번씩 어김없이 떠오르는데 탐석의 자유는 나에게 언제면 찾아오려는지?
수석은 나에게 참으로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는 달이다. 그것도 《십오야 밝은 달이 십륙일에 둥글어(十五的月亮十六圆)》지는 그런 보름달이 아니라 볼 때마다 둥글어지는 그런 보름달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은 《관동별곡》에서 《… 명사(鳴沙)길 익은 말이/ 취선(醉仙)을 빗겨 실어/ 바다를 곁에 두고/ 해당화(海棠花)로 들어가니 …》하면서 자기를 감히 취선에 비할 정도로 술을 반겨마지 않은 사람이다. 술에 관한 일화도 많거니와 술을 노래한 주옥같은 시편들도 많다. 《장진주사(將進酒辭)》는 다른 때에 보도록 하고 시조《재 넘어 성권농 집에》를 음미하여 보자.
재넘어 성권농(成勸農)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이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鄭座首) 왔다 하여라
성권농이란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인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을 가리키고 정좌수는 정철 자신이다.
옛날 문인들은 다들 술이 없으면 문장이 흘러나오지 않고 문장이 없으면 술맛이 나지 아니 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술은 물로 된 시요 시는 마음으로 빚은 술(酒是水質的詩, 詩是心釀的酒)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고 달과 그림자와 더불어 술을 마셨다는 시선 리백이 생겨났을 것이며 《누운 소 발로 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달려간 정철이 생겨났을 것이다.
문인들은 술에 취하고 수석인들은 수석에 취한다.
세속의 피치 못할 사정에 밀려 마음이 괴롭고 몸이 피곤할 때 서재에 정히 소장되여있던 수석을 꺼내여 쓰다듬으면서 양석을 하고, 물을 뿜어 색상을 돋우면서 자연계 이상으로 무한히 확대하여 감상할 때면 살며시 나를 감싼 무아경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별유천지요 무릉도원이다. 남들 눈에는 그저 손바닥만큼 넓적한 돌판으로밖에 안보이는 평원석에서 수석인들은 돌돌 흐르는 개울을 보고 노랗게 핀 민들레꽃들이 뿜겨내는 봄향기를 맡으며 뻐국새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수석에는 공수의 셩녕에 의해 귀부(鬼斧)로 다듬어진 무궁한 자연의 신비가 응축되어 있다. 깊이 취하면 취할수록 그 신비가 한층 한층 벗겨지면서 려산진면목을 드러낸다. 그래서 수석도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수석에 취한다는것은 남다른 또는 남이 모르는 어떤 생활적, 예술적인 경지에 들었음을 의미한다. 수석은 하느님이 선사한 가장 갚진 선물이라는 그 선물의 값을 아는 사람들이 곧 수석인이다.
정철이 술을 찾아 소를 재촉하여 성권농을 찾아가는 것이나 수석인이 수석을 찾아 산하를 주름잡는것이나 별로 다름이 없는것은 다들 취함으로 피여오르는 생활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인 초탈의 경지에서 음미할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석을 일컬어서 기쁨을 향기롭게 피워주는 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를 넘어 술에 취하면 실례이지만 수석에 취하는데는 도(度)가 없다. 다만 도(道)가 있을뿐이다. 술에는 주도(酒道)가 있고 차에는 다도(茶道)가 있듯이 수석에도 분명 석도(石道)가 있다.
석도는 모두 다섯 차원으로 나누는데 첫째차원이 취미관(趣味观)이고 둘째차원이 미술관(美术观)이며 셋째차원이 예술관(艺术观)이고 넷째차원이 추상관(抽象观)이며 다섯째차원이 가장 높은 찰학관(哲学观)이다.
이 표준에 비춰보면 정철의 음주차원은 철학관을 넘은 차원이라 할 수 있겠다. 수석인이라는 대접을 받으려면 바로 예술관을 넘어 추상관에 이르는 정도여야 한다.
고려 중기의 문신이고 문인이였던 리규보(李奎報 1168~1241)는 호가 백운거사(白雲居士), 지헌(止軒),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등이다. 9세때에 이미 앉은 자리에서 즉흥시를 척척 써서 신동으로 알려진 인물로서 소년시절부터 술을 좋아하여 자유분방하게 지냈으며 거문고솜씨 또한 시와 술에 짝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너무 좋아한다는 의미에서 호를 삼혹호선생이라 하였다.
나는 이제야 수석에 어섯눈이 뜬 신참이지만 그래도 리규보처럼 친구 셋이 있다.
첫째 친구는 직업적 성향이라 별수 없이 서재를 가득 메운 책들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을 지금도 순진하다할 정도를 잘 듣고 있다.
둘째 친구는 칼이다. 거문고는커녕 하모니카같은 악기에조차 전혀 손을 대본 일이 없는 대신, 목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심심할 때면 칼로 뭐든지 깎아야만 하는 버릇이 사십년동안 젼혀 고쳐지지 않아 지금에는 아주 습관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등산하러 갈 때나 탐석하러 갈 때나 수염을 깎아도 되게끔 예리하게 갈아놓은 전공칼을 꼭꼭 지참하고 간다. 지금은 직업때문에 신교수로 불리지만 고급중학교에서 근무하였을 때나 TV방송국에서 근무하였을 때에는 곧잘 신목수로 불렸다. 아무튼 잔잔한 손재주를 많이 갖고 있다는데는 언제나 긍지를 가진다.
셋째 친구는 죽어서도 뿌리칠 수 없는 수석이다. 늦바람이 용마루 벗긴다고 가장 늦게 사귄 친구에 지금 넋을 싹 잃고 살고 있다.
올 2월 하순에 빛고을 광주(光州)에서 한밭 대전(大田)으로 이사를 온 후 지도를 얻어서 펼쳐보니 배재대학교 뒤편에 있는 도솔산을 넘어 갑천이라는 강이 꽤나 크게 그려져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2월 28일과 3월 22일에 안해를 데리고 봄나물도 캘 겸 탐석도 할 겸 두 번이나 갑천에 가서 다리품을 허리가 물러나게 팔았지만 수석의 팔촌조차도 못 얻었다. 원체 하천 다스리기를 잘하여서 강바닥에는 죄다 남포에 풍비박산하고 해머에 릉지처참당한듯한 뿌연 바위돌 조각들만 쫙 지천으로 널려있었을 뿐이였다.
《류비도 삼고초려(三顧草廬)만에 제갈량을 만나지 않았던가? 》
비록 도로무공이라 마음이 허전하기를 피면할 수 없었지만 감히 류비의 심경에 높이 견주면서 자기위안을 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2007년 여름에 한번 지리산에 가서 탐석해보고는 여태껏 탐석에서 손을 뗀채로 축도 아니나는 공부에만 매달려 세월을 보내기만 하였으니, 헛걸음일지라도 그동안의 애원을 풀어보았다는 의미에서는 그래도 즐겁기만 하였다.
수석은 인제 나에게 있어서 친구라는 관계를 초월하여 부모, 형제, 처자와 더불어 혈육으로 되었다. 그러니 제대로 되는 탐석을 한번도 못하고 책속에만 묻혀있어야 하는 나의 마음이 오죽하랴.
님 그려 얻은 병을 약으로 고칠쏜가
한숨이야 눈물이야 오매에 맺혔세라
일신이 죽지 못한 전은 못 잊을까 하노라
역시 리정보의 시조이다. 혈육-수석과 갈라져 2년여 살아온 내 심정을 여실하게 대신 표현해주는 시조이다.
아하! 어머니와 형님과 동생과 안해와 딸과 수석을 떠나 어디에 가서 홀로 살리오?
2009. 04. 16.
대전 배재대학교 우남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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