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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리밖 답사길 홰하탐석
수석인의 마음은 탐석현지를 지나치지 못하는가부다. 8월 16일 오전, 석가장 화북렬사릉원 답사를 마치고 택시로 원씨현을 지나 찬황현 황북평촌 조선의용군 4렬사묘소로 향하던중 찬황현의 한 강가 아스팔트길에서 돌로 덮힌 강을 보아내고 마음이 한없이 끌리기만 한다. 이튿날 오전 원씨현 호가장 전투현지를 답사한후 시간이 있는지라 나는 더 주저할 겨를이 없이 어제 타던 택시를 불렀다.
원씨현성에서 찬황현성까지는 19킬로메터고 찬황현성에서 탐석현지까지는 또 근 20킬로메터를 달려야 한다. 40킬로메터 거의 이른다는 말인데 택시운전사는 머리만 가로 젓는다. 오후시간에 택시를 타고 “돌”을 주으러 간다니 리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렴은 어쩌고, 반시간 나마 달리니 강변이 나타나고 돌밭이 펼쳐지는데 여기저기서 수석이 막 튀여나올것만 같다. 강은 이미 물이 말라버리고 모래를 캐느라 파놓은 웅덩이들에 물이 맑게 고였을 뿐이다. 웅덩이들 모양으로 보아 돌밭 두께가 4~5메터, 7~8메터정도를 이루는데 이 지경 돌밭 두께를 형성하기까지 오랜세월이 흘렀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모두가 수마가 잘된 돌층의 두께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 찬황현이 천년 옛현이라더니 강도 자그만치 수천수십만년의 력사를 거슬러 왔을터.
돌밭은 아득히 저 아래로 펼쳐져가고, 연변의 두만강이나 가야하와 다를바 없다. 다양한 돌들이 그대로이고 수석은 떼놓은 땡이다. 더우기 문양모양도 너무도 보편적인데 흠이라면 선명하지 못한것이라 할까. 첫시작에 벌써 문양이 어울린 수석 한점을 주어들더니 두만강의 돌과도 다름없는 청석모양의 잘 “썩은” 수석 한점이 시야에 안겨든다. 유감이라면 먼먼곳 겨레 발자취 답사에 지니고 다닐수 없는것, 사진을 찍고 도로 내려놓을수 밖에 없다. 맞춤한 것이면 배낭에도 넣으련만.
한 500~600메터를 내려왔을가. 지나온 아스팔트쪽 강가에 두 남자가 서성임이 육안으로 알려진다. 뛸데없는 수석인들이다. 거리도 있고 하여 그대로 강따라 나아가는데 한시간쯤 지나 핸드폰이 걸려온다. 택시운전사인데 지방의 한 수석인이 나를 기다린다고 한다. 5~6리쯤 쓸어보니 끝간데 없이 돌밭이고 며칠이고 탐석해도 괜찮은 수석들이 얼마든지 주어질 판이다. 나는 내 고향 연변과의 머나먼 거리를 한탄하다가 돌아설수밖에 없었는데 지방수석인은 두어시간 그때까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방수석인의 말에 의하면 원씨현에는 수석인이 10여명 뿐이고 늘 교류를 가진다고 한다. 또 먼거리 자전거타기에 맘이 끌려 자전거애호가 10여명으로 모임단체를 가지고 오늘도 100킬로메터를 달리다가 택시타고 탐석에 나선 수석인을 만나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단다. 강은 홰하라고 부르는데 자기는 수석입문 3년으로 아직 수석을 잘알지 못한다고 내비친다.
택시는 다시 찬황현성을 지나 원씨현성으로 달린다. 지방수석인의 청으로 현교통국에 다닌다는 그의 집에 가보니 수십점의 수석이 책장에 잘 모셔져 있다. 대부분 종유석이 아니면 석회암들이여서 그닥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나는 아무 내색도 내지 않았다. 탐석한 수석을 들고 이름까지 지었다며 열성을 부리지만 아까 강가에서 주어든 여러가지 문양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러나 그의 열성에는 감복되지 않을수가 없다. 내가 오늘 우리 만남도 인연인데 차후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가자고 하니 그는 자기도 소원이란다.
뜻하지 않은 찬황현 홰하탐석, 홰하탐석지 발견, 내 마음은 둥둥 뜨기만 한다. 연변 수천리밖 화북 홰하에서 탐석해 보았다는것이 그리도 즐거울수가 없다.
2009년 8월 17일, 하북 원씨현 정부초대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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