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인 1990년은30여 년 기자인생에서 정녕 제일 자랑스럽고 제일 뿌듯했고 제일 바삐 돌아친 나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중국 첫 대형국제운동회 특파기자로
제 11차 북경아세아운동대회는 <<동아의 병부>>로 불리던 우리 나라가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41년 만에11억 중국인민이 자기의 땅에서 33억 인구의 아세아주의 <<친선, 단결, 진보>>를 취지로 처음으로 주최한 대형국제 종합운동경기였다. 제 11차 북경아세아운동대회는 아세아운동회40년 력사에서 규모가 제일 상당한 대회로 37개 국가와 지구의 대표, 운동원이 6578명(운동원 6122명)참가하여 27개 정식경기를 진행한 대형국제운동대회였다. 이 중국의 첫 대형국제운동회에 필자는 <<연변일보>> 특파기자로 물불을 모르고 밤낮이 따로 없이16일간(9. 22ㅡ10.7)이나 죽자살자 뛰여 다녔다. 이 대회에 중국이 636명의 선수를 참가시켜183금, 107은, 51동상을 따내 본 운동대회 제1위를 차지했다. 중국 조선족의 위상을 온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갖고 <<연변일보>>는 11차 아세아운동대회에 파견된 유일무이한 소수민족지역신문이였다. 이런 신분에 비춰 필자는 운동대회소식기사보다도 중국의 첫 대형국제운동마당에서 우리 조선민족과 중국 조선족의 위상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조선민족이 숨쉬는 기사를 발굴하면서44세 나이에 운동화바닥이 닳아서 구멍이 날 정도로 뛰여 다니며 매번 200부나 되는 <<연변일보>>를 선수촌과 대회장에 발부하면서 세계속의 조선민족을 만나보았다. 그속에는 중국의 조선족은 물론 조선, 남조선(한국), 재일 조선인, 재미조선인과 본 운동회의 최고 거인선수 리명훈(조선 남자롱구선수 ,23세, 키 2.32)을 만났었다. 그때 선수촌에 입주한 1만 명 촌민의5분의 1이 조선민족이였고 <<연변일보>>가 선수촌에 배달되는 유일한 조선문신문으로 가장 인기가 높아 번마다 삽시간에 거덜이 났다. 한 남조선(한국)의 동업자는 <<중국에서 자기 글 신문까지 꾸릴수 있으니 대국의 민족 정책이 정말 좋다>>며 비록 신문을 꾸리는 방침과 방법은 다르겠지만 참고를 하라며 기사 배치며 신문인쇄에 관한 건의까지 제기하였다. 그때 담은 기사의 단락들이다. ㅡ 9월 24일, 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 조직위원회와 기금회가 인민대회당에서 조직한 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 자금모임에 기여가 큰 개인, 단위를 표창하는 대회에 해내외의 인사 1000명이 참가하였는데 그 중에 유일한 중국 조선족으로 리송관이 참가 하였다. ㅡ 왕청현 하마탕뱀술공장에서 생산한 <<흰눈섭>>표 뱀술이 선수촌 부근에 자리잡은 북경장백산특산부종합경영부의 인기상품으로 되였다. 선수들은 선수촌에 술을 가지고 들어갈수 없는 규정 때문에 먼저 선불금을 내고 술병에 자기의 이름을 써 놓는 방법으로 뱀술을 차지하고 돌아갈 때 갖는다는 계약까지 맺었다. ㅡ 연변을 벗어나니깐 조선족녀성들의 치마저고리가 얼마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가를 처음 느꼈다. 개막하는 날인9월 22일 오후 천안문광장에 아름다운 조선족치마저고리를 입은 녀성8명이 나타나자 많은 해외의 관광객들이 둘러섰는데 그들 속에는 눈물을 짓는 할머니, 함께 아리랑을 부르자는 조선인, 사진을 함께 찍자고 기다리는 향향처녀들과 일본사람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ㅡ길림성매화구시 조선족처녀 김향란이61키로그람급 유도결승전에서 일본선수를 재끼고 1등보좌에 올랐다. ㅡ 남북조선녀자축구경기에서 대방선수가 넘어지면 대방선수를 일어나도록 쫓고 뺏던 뽈까지 포기하고 부추키거나 심지어 안마까지 해주었다. 경기가 끝나니 량측선수들이 손에 손을 잡고 경기장을 돌면서 관중들게 인사를 하자 경기장은 큰 박수소리와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소리가 울러 퍼졌다
. 고맙고 기쁘던 날
10월 2일은11억 중국 인민의 자기땅에서 제 11차 아세가경기대회를 맞은 11번째 날로 나의 일생에서 잊을수 없이 고맙고 기쁜날이였다. 오후 2시 40분경, 우리 일행은 분주히 돌아치다 보니 제때에 점심식사를 못하고 려관에서 지친 몸을 달래였다. 문뜩 노크소리가 나더니 들어오라는 소리와 함께 <<끝내 찾았습니다!>>며 한족손님이 50원짜리 현금을 들고 들어왔다. <<미안합니다. 돌아가며 생각하니 제가 선불금 50원을 결산하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이 분이 우리를 태웠던 택시기사인데 우리가 택시를 탈 때 낸 선불금을 그만 잊고 결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응당 받아야 할 돈이라고 해도 손님이 려관까지 찾아서 <<량심장부>>를 결산하는 깨끗한 그의 마음에 감복되여 문밖까지 멀리 나와 전송하였다. 오후 3시가 퍽 넘어서야 우리는 천안문광장 전문(前门)부근에 자리한 <<연길국수집>>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하던 출납윈이 우리가 자리에 앉자 맥주 두병을 들고 와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전번에 랭동시켜 달라던 맥주 두병을 그대로 결산했는데 손님들이 다시 왔으니 시름을 놓았습니다. 혹시 오지 않을가봐 걱정을 했는데…>> 뜻밖의 대접에 우리는 오늘은 전부 <<공짜>>만 생긴다며 기뻐하였다(후에 보니 이 집주인은 당년에 연변서 명망이 높았던 “마씨네 씨름형제”의 셋째였다). 저녁 6시 20분경, 우리는 남자배구경기를 보려고 조양체육관으로 갔다.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꼬리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 경로로는 표를 살수 없다고 판단한 필자는 <<특별매표구>>를 찾아가 기자증을 보이며 입장권을 4장을 사겠다고 하였다. 매표원은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 원래는 인당에 한장만 파는데 특수대우로 4장을 드리겠으니 7시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오후 한시 반부터 줄을 섰다는 료녕, 산동에서 온 손님들이 우리가 조선과 마중한 연변서 왔다니 <<외빈은 아니지만 귀빈이다>>묘 자리를 양보했다. 이날은 운수가 좋았던지 아니면 우리에게 특별좌석표를 배치했는지 우리는 뜻밖에도 국제재판석의 바로 뒤자리에 앉았는데 우리들의 오른쪽 두 남녀는 재미조선인, 왼쪽은 북경시 조선족리직간부, 뒤쪽은 재일조선족로인들이였다. 북경아세아경기가 세계각지의 우리 민족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던 것이다. 이날 경기에서 진다고 말에 올랐던 중국이 아짜한 격전끝에 3:2로 일본을 재꼈다. 우리는 너무도 흥분된 나머지 경기결속후 한참을 기다려서 중국선수들의 싸인을 받고서야 자리를 떴다. 이날은 여느 때는 손을 들어도 세우지 않던 택시들도 손을 들자 잘 멈춰섰다. 우리는 너무도 고맙고 기뻐서 <<수자11이 우리들의 길일(吉日)이다>>며 귀로에 올랐다.
여운 1 2 3
그때 통신수단은 전화, 우편, 팩스엿다. 16일간 필자는8편외 문자기사외10여 폭의 사진 기사를 발표하였다. 한번은 경험이 없는 필자가 본사 원고지에 띄여쓰기까지 한 원고를 한 건을(기억에 16페지)팩스로 급히 보냈는데 그때는 팩스비가 비싸다보니 개인돈 140원을 썼다니 편집반공실의 홍춘식부주임이 원고를 띄여쓰지 말고 한 장에 촘촘히 쓰라고 당부하였다. 그때 선수촌에 설치한 컴퓨터를 많은 중국 기자들은 컴푸터를 다를 줄 몰라서 쓰지 않았고 외국 기자들은 자기들이 갖고온 컴퓨터를 쓰기에 <<선수촌 컴퓨터가 그저 논다>>는 우수개 말까지 있었다. 10월 21일 <<연변일보>> 지경화(독자)의 글이다. <<…선수촌1만여명의 촌민중 5분의 1이나 조선민족으로 유일한 조선문신문인 <<연변일보>>를 앞다투어 보았다는 것, 200부의 신문이 삽시에 온데간데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기념으로 신문을 갖고 갔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찬가! 나는 이 신문의 통신원으로 긍지와 자랑을 느낀다!>> 그때 필자는 선농단운동장에서 처음 만난 왕청하마탕뱀술공장 최석준공장장의 청탁으로 하마탙뱀술공장과 북경모회사와 합작의향 토론에 참석하면서 며칠간 최석준의 책사로 활약 하였다. 그때 필자는 11차 북경아세아경기대회 기금회로부터 <<북경아세아운동회에 제일 먼저 기부한 기자>>라는 영예를 받았고 <<연변일보>> 김성계사장(겸 주필)의 주필상과 영예증서를 수여 받았다. 이 밖에 부언으로 개막식에서 중국방송원들이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부른다고 <<항의>>하는 한국측에 <<11억 중국인민은 남조선이라고 해야 알지 한국이라면 모른다>>며 답변하던 중국 대변인의 재치있는 답변도 잊혀지지 않는다
오기활
길림신문 2017,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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