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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천리, 덕향 만리
2020년 08월 01일 04시 51분  조회:2577  추천:0  작성자: 오기활
김응준 시인은 고희를 넘었지만 쏟아져나오는 사랑시를 보면 자못 놀랍기도 하다. ‘시인은 영원한 청춘’이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2020-07-31 09:11:14
 
  1988년 여름, 상해 황포강 나루터에서 저자 고 김응준 시인)과 그의
우연이라 할가 아니면 인연이라고 할가, 시인 고 김응준 은사님과 교분을 쌓아온 지도 어언 6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59년 훈춘고중시절 한어과임이셨던 고인의 선정을 받아 한어과 대표를 맡아 하면서부터 은사님과 정분을 다져왔고 줄곧 은사 삼아, 형님 삼아 공경해오던차 지난 7월 7일 불행히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그냥 굳어져버렸다.
지난해 11월 중순 내가 치료차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병석에 계시는 은사님을 찾아뵌 것이 아마 그와 생전 맑은 정신상태에서 가진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는 내가 귀국하는 대로 함께 손잡고 리수일과 신순애의 사랑을 노래한 씨나리오를 쓰자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귀국 후 코로나사태로 하여 찾아뵙지 못하다가 사망 전날 병상을 찾았을 때, 둘째 딸 홍심이가 혼미중인 아버지의 귀에 대고 “장춘삼촌 오셨어요.”라고 알리자 즉시 눈을 뜨고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악수는 분명 은사님의 영면 전 우리 사제간 사귀여온 60여년 긴 세월의 마지막 석별에 찍은 종지부였다.
돌이켜보면 과연 ‘탄지일휘간(弹指一挥间)’이라고, 1959년 선생님께서 북경대학 중문학부 연수를 마치고 25세의 꽃나이 총각선생으로 훈춘고중 한어과임교원으로 부임되여 온 후 그의 검소한 차림새와 소탈한 성격, 더우기 생활 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학생들의 호감을 자아내면서 자석마냥 끄당겨 따르게 하였다. 수업 또한 인기 만점, 한어교연조의 한족교원들도 뺨칠 정도로 한자어 발음 성조(声调)표기 하나 틀림없이 확실하게 가르쳐주시던 그 모습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한어작문과 문학에 뜻을 둔 제자들을 별도로 이끌어 문학의 꿈을 키워주신 은사님, 그래서 더욱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하였다.
특히 생활난으로 어려운 제자들에게 사랑과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시던 그 시절 감격스러운 일화가 어찌 한두가지 뿐이랴!
지난 세기 50년대 후반 되게 어려웠던 년대에 은사님 가정형편도 초근목피로 겨우나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이였지만 가끔가끔 시골에서 온 이 제자를 자기 집으로 불러주었다
“이거라도 배불리 먹기요, 숙소에서 배곯기보다는 나을 거요…”
된장 한숟가락 떼여 수수밥에 발라주시던 은사님, 지금도 그 사랑, 그 정에 목이 메군 한다.
수수밥이나 두병밥으로 기아를 달랜 후 선생님의 침실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선생님의 공부비결도 발견하게 되였다. 이미 중국 명문대인 북경대학 연수까지 마친 상당한 수준이였지만 선생님의 침실 3개 벽면과 천정은 온통 친필로 쓴 한어 사자성구(成语)로 도배가 되여있으니 앉으나 서나 누우나 겨를만 있으면 한어성구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암기할 수 있었다.
“아, 공부는 이렇게 하고 지식은 이렇게 쌓는구나…”
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비법까지 배웠으니 어찌 은사님을 숭배하지 않고 또 따르지 않을 수가 있으랴!
1962년 6월, 중앙민족대학 입시를 앞두고 은사님은 반달 동안 무등 신경을 쓰시며 까근히 작문지도를 해주었다. 지어 연길로 시험을 치러 가는 날 아침 뻐스역까지 바래주면서 시험을 칠 때 우선 작문 출제를 제대로 포착하라고 재삼 당부하셨다. 이렇듯 인생의 전도에 관련된 관건적 시각에 친동생마냥 깐깐히 챙겨준 그 은혜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하여 세월이 가고 점차 ‘철’이 들면서 내 나이 칠십이 된 해부터 매년 음력설이면 빠뜨리지 않고 은사님께 ‘강다짐’ 세배를 올려왔다.
은사님께서는 또 매년 방학이면 100리, 200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도보로 춘화, 경신, 량수 등 오지에 사는 제자들 가정을 찾아 방문하셨다. 훈춘 시골 촌락 골목길에 은사님의 발자국이 찍혀졌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제자들과 학부모들은 여전히 그이를 ‘우리 선생님’이라고 친절히 부르고 있다.
새삼스레 위챗에서 읽었던 명언 두 구절이 떠오른다.
“좋은 사람과의 인연은 소중하고 또 오래갑니다.”
“란향백리(兰香百里)
묵향천리(墨香千里)
덕향만리(德香万里).”
—백화문체로 풀이하면
“란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묵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네.”
고 김응준 은사님이야말로 1954년에 발표한 처녀작을 시작으로 문단 데뷔 66년 동안 무려 7000여수의 시가 창작과 더불어 저서 23부를 펼쳐내면서 천리(에 날린) ‘묵의 향기’를 《시향만리》(연변시인협회 간행물 제호)로 승화시키고 아울러 모든 제자, 친지, 동료들에게 믿음과 배려와 사랑을 베풀어온 만리(에 날린) ‘덕의 향기’임에 손색이 없다.
6년 전 2014년 8월 9일 연길 국제호텔에서 가진 ‘김응준 시인 탄신 80돐, 문단 데뷔 60돐 및 최신작 《사랑으로 가는 길》 출판 기념회’에서 올린 축사 한 대목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그날 옛 훈춘고중 7기 졸업생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내가 50여명 동창생들의 마음을 담아 은사님께 강태공(姜太公)에 관한 옛 전설 한토막을 들려드렸다. 옛날 강태공이 주무왕(周文王)을 도와 80세 되는 해에 상(商)나라를 무너뜨리고 주(周)나라를 세운 후 80년을 더 살아 160살을 누리였다고 하여 후세인들은 강태공의 인생을 ‘전(前)80, 후(后)80’이라고 불렀단다. 그러니 “은사님께서도 이미 80년을 살았으니 오늘 이 기념행사를 시점으로 ‘김응준 후(后)80년’ 생을 시작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언을 하였다.
과연 은사님께서는 제언을 받아들이신 듯 탄신 80돐 기념회 후 즉시로 여생의 최종작품이라면서 장편서사시 《희비 쌍곡선》 창작에 살손을 대셨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년 후인 2016년 9월 급작스레 뇌혈전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하지만 그는 생명이 경각에 놓인 상황에서도 이미 시작한 글이 중도이페될 수도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시각을 다투어 혼신의 ‘피를 쏟아, 뼈를 갉아, 생명을 바쳐가며’(《희비 쌍곡선》 머리말) 무려 36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마무리하여 2018년 7월 드디여 세상에 내놓으셨다.
이러한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만년에 로익장을 과시하면서 시가 창작 한 우물만 파온 고인에 대해 원로시인 김철옹은 그를 ‘시에 미친 사람’이라 평했고 연변대학 우상렬 교수는 고인의 장편서사시 《희비 쌍곡선》 서평에서 “우리 겨레의 시문학을 위해 열심히 뛴”, “한뉘 시를 위해 분투한 투사”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다사다난한 인생을 마감한 고 김응준 시인은 조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년에 안해를 잃고 만년에 딸자식을 앞세웠지만 완강한 의지로 파란만장한 인생고를 딛고 오직 시가 창작에 혼신을 다한 다수확 시인이다. <사랑아 어찌 늙으랴>, <두만강 천리> 등 500여수의 가사와 <사랑의 애가>, <사랑새를 기다린다> 등 500여수의 애정시들은 고 김응준 시인의 대표작이 되기에 충분하다. 원로시인 김철은 《김응준시선집》 머리말에서 김응준 시인은 “고희를 넘은 사람이지만 쏟아져나오는 사랑시를 보면 자못 놀랍기도 하다. ‘시인은 영원한 청춘’이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은사님은 시인이면서 또한 번역에도 상당히 능한 다재다능한 분이시다. 2009년부터 국가출판총서 ‘대중화문고(大中华文库)’의 특별위탁에 응해 중국의 고대명작 《론어》, 《당시선집》 및 수십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 등 수많은 한문저서들을 조선문으로 번역하여 우리 민족 문화발전 창달에 한몫을 감당하였다. 시가 창작과 고한문 번역 자질을 겸비한 그이는 중국조선족 시가문단치고 흔치 않은 출중한 존재로 각인되여있다.
고 김응준 시인의 타계에 연변작가협회 김영건 부주석은 “중국조선족 문단에 ‘큰별’ 하나가 떨어졌다.”고 애석함을 표했고 연변시인협회 전병칠 회장은 “중국조선족 시단은 훌륭한 시 스승을 잃었고 연변시인협회는 덕재 뛰여난 코기러기를 잃었다.”고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고 김응준 은사님께서는 80여성상을 그렇듯 젊고 빛나고 보람차게 살아오면서 항상 여러모로 우리의 귀감이 되였다. 수십년간 고인을 은사로, 형님으로 고이 받들어 모시게 된 긍지와 자랑을 맘속 깊이 새기면서, 재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림장춘
                                    (필자는 “연변일보”사 선임 부사장, “연변일보”선임 부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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