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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잊을수 없는 조선보따리장사이야기
2020년 11월 27일 18시 02분  조회:1864  추천:0  작성자: 오기활

                                                            잊을수 없는 조선보따리장사이야기
     
두마강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강건너 조선 남양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온다  
세월따라 도무은 물론 남양의 용모가 크게변해  지난 80년대 우리가조선 보따리장사로 땀흘리며 분주히 오가던 중국 - 조선  국경다리의 바로 남쪽에에  한결 멋스럽고 웅장한 국경다리가 새로 일떠기까지 하여 오늘의 도문과 남양은 더욱 더 새로운 모습으로 세인을 부른다.
  
나는 30여년전인 40대 초반에  보따리 장사군으로   저 국경다리를 흽쓸느며 다녓었는데 지금 그때를 생각만해도 마음설레이고  웃음이 절로난다.
     
무거운 짐보따리를  일럭거에 꽉 박아싣고  저 다리를  건너  중국(도문)  - 조선(남양) 해관을  넘나들며 고생도 많았고 울지도 웃지도 못했던  사연들도 많았기에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떠 오르며  그래도 그때 그시절이  좋았다며 그리워 지기도 한다
때로는 기적소리 울리며  지나가는 조선 렬차를 볼때면  내가 무거운 짐보따리를 둘러메고 저 렬차에 앉아   남양에서 종성으로, 종성에서 온성으로 오르내리며  장사했던 일들이  머리에서 맴돌이친다
 
80년대 연변의 많은 조선족들은  조선 보따리 장사를 했는데  학교선생님들까지 방학이되면 이 장사에 나서다보니 나까지 덩달아 나섰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장사경험도 없는 나는 걱정과 두려움도 많았지만  남들이 다하는 장사인데 나라고 못할까? 는 생각에 무조건 물건구입에 나섰다.  
조선시장에서 라면, 목천, 이불등이 제일 잘 팔린다고하여 나는 첫장사로 붉은색 바탕에 무궁화꽃이 그려진 이불등을 단번에 20개나 구입했다.  그런데 조선해관에서 3개이상 초과되면 나머지는 돌려 보내고  눈에 거슬린 행동하면  몰수한다고하기에 나는 걱정하고있는데 마침  친정어머님이 우리집에 오셨다.  손재간있는 어머니는  이불등 2개씩 척척겹치더니  두다리 두팔  허리둘레  앞뒤가슴에  나누어 붙혀놓고  바느실로 듬쑥둠쑥 꿴매여  내몸에  딱 맞는 속옷을 만들어 나에게  입히고  겉에는 널찍한 내복(조선에 가면 잘 팔리는 내복적삼)까지 걸쳐 입으라고 하기에  나는 시키는 대로 하였다. 누가 내가 속옷으로 이불등 12개를 입은 줄 알랴!  전혀 티나지 않아 제격이였다. 
그리고 나머지 이불등도  여러곳에 분산시켜  다른물건 사이에 끼워 짐을 쌌더니  천만다행으로 무사통과되였다. 
 그때 장사군들이 너무 많았기에  해관 검사원들도 지치고 헷갈리여서  대충 검사를 할때도 있었는데  요행  나는 그날 운이 닿은것 같다.
  하지만 도둑이 제발등 저리다고  이불등을 감싸입고  검사원앞에 나선 나의 속은 속이아니였다.  황차 내앞에서 검사받던 왕청아줌마는 속에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는데  옷속에 뭘 감췄는가 의심했기에  화난김에  속옷을 훌떡 걷어올린 흉물스러운 모습에 나는 오늘 죽었다고  가슴이 쿵쿵,  팔다리가 후들후들거리면서  정신이 아찔했다. 
 하지만 하느님 덕분이였던지 다행이  내몸은  의심하지 않았고 다른 물건들도  다 무사통과 되였다.  지금생각해도 그때 아찔했던 순간에 가슴 쪼인다.             
 그때  조선에서 잘 팔리는 물건을 많이 가진 장사군들은  대방해관검사원들에게 술, 담배, 식품을 례물로 주고  통과하는 일은 관행으로 되였기에 나도  우선 검사원의 코밑치성부터 해야만이  그날의 액운을 때게되는줄로 믿어였다.
  그때 조선장사는 친형제간도  돈별이를 같이하고는 흔히 서로간 티각태각했는데  나는 나보다 10살아래인 영애와 오랜 친구사이로 서로믿고 친절했기에  조선장사도  같이하며  돈을 벌었는데 우리는 서로간의 믿음과 덧보이는  인성품격으로  주위 사람들의  찬사와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어느 한번은 영애와 나는  개산툰  - 삼봉 해관을 통해  장사를 했는데  두집 남편들까지 도우미로나서 장사짐을 자동차에 싣고  개산툰까지 가서  우리들의 해관검사까지 지켜 봤다.
  우리가 짐을밀고  조선삼봉해관에 들어서자  해관검사원으로  바로  이 자리에서 10년넘게  근무했다는 ××검사였는데  오랜 장사군들은  그를 “늙은 여우”라고 수근거렸다.
모두가 그의 구미를 맞추려  애쓰는 모습에  우리도 신경을 도사려야 했지만  별다른 묘책이 없어 끙끙거리다가  아예 죽지 않으면 살것이라 믿고   로실하게 속사정을 털어놓고 살려줍시사 하며 갈비를  드리대기로 했다.
 과연 ××검사원은  장사군들과 무언의 암시로  자기의 안속을 채우면서  초과된 물건을 눈을 감아주며  건너게하는 모양새였다.  언제나 생글생글거리며 잘도 웃는 영애는 ××검사원의 안중에 있는뜻했고 나역시  고지식 하기는해도  믿음성 있어 보였던지 우리더러 천천히 기다리라는   그의 암호가 감지되여  영애와 나는  검사 순서를  다른사람에게  양보하면서  어물어물 뒤로 물러서군했다.
  마침내  그 검사원은  맨 마지막 순서로  리영애, 최정금을 부르며 시간이 없는데 빨리빨리 들어오라고 하기에 우리는  그많은 짐을 낑낑거리며 끌고  검사원 앞에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무슨짐이  이렇게 많은가며 트집을 잡기 시작하더니  최정금이는 아직 들어오지 말고 저쪽켠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기에  나는 곱살이 시키는 대로 저쪽에  가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영애와 이것저것 튕기며 물어보기 시작하는데 때를맞춰 영애는  생긋이 웃으며 속사정을 실토했다. 자기는  일부러 아저씨가 근무하는 날을 택하여 오늘 왔는데  여러가지 물건도 많지만  고무장화(고무공장 판매처에 있는 친구를 통해  불합격 장화를 싼 값으로 많이 가지고 갔다)를   다섯상자나 가져 왔기에 아저씨의 신세를  져야겠다고 갈비를 드리댔다 ××검사원은  높은소리로  물건이 너무 많아 다 못 건간다고  거들먹 거리며  고무장화 세상자를 발로 툭툭차면서  돌려 내가라 호통했다.  그리고는 롱담인뜻 진담인뜻  중국에서 청도맥주와 장백산 담배가  유명하다던데  그 좋은것들은 하나도  안 가져왔네… 하면서 공개적인  암시를 보내왔다.
이에  영애는 알았다는뜻  저뒤에 있는 촤정금 언니가  빡스채로 가지고 왔는데  가다리라고  구미을 맞춰 놓고 퇴짜맞은 고무장화 세상자를 밀고나와  나에게 넘겨주면서 중국쪽에 가서 청도맥주와 장백산 담배를 사오라하기에 나는 해관밖에서 기다리고있는  두집 남편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하여 그들이 불티나게  달려가 부탁하는 물건을 사왔기에  나는 얼른 받아싣고  다시 조선해관에 갔다.  
척하면 착이라고  영애가 밀고 나왔던 고무장화 상자위에  맥주와 담배를  보기좋게 올려놓고  다시밀고 ×× 검사원 앞까지 갔더니   그는 반죽이 척척 잘 맞는다는뜻  흡족해 하면서   짐짝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술 담배만 제 몫으로 챙겼기에  우리는 그많은 물건들을  다가지고 건넜다.  뜻밖의  작전에 성공한 우리는 신심이 생겨  또 삼봉에 있는  ×× 검사원의 집에 까지 찾아가 밀담하여  뭉치돈이 되는 명태, 해삼, 낙지를  그가 시키는대로  상자마다 꽉꽉채워넣고  그위엔  다른 물건들을 눈가림하여 덮어 가지고 건너왔기에  그번 장사수입은 참으로 짭짤했다        
  
나는 80년대  련속 몇년동안 조선장사를 다녔어도  줄곧 종성에 있는 고모네 집에 주숙하면서 장사했기에  고모네 집은 온통 수라장이였다.  그러나 70대 중반이였던 고모님과 아들며느리 손자손녀  다섯삭구는  크지도 않은 단층 줄집에서 살면서도 장사군인 나를 언제나 반갑게 열정적으로 대하였고  열심히 도와 줬기에  나는 편하게 장사했고  종성시내 사람들도 나를  익숙해 하는 편이였다  
고모네는 평민의 집이였기에  빠듯한 배급으로  식량고생이 많았고  생활도 넉넉치 못했기에  나는 매번 갈때면  해관에서 허용하는 범위내의  밀가루, 입쌀, 과자, 빵, 사탕 등 먹을것들을 성의껏 챙겨가지고 갔고  또 우리가 조선에가면 외국인 대우로  체류기간에  입쌀 기름까지  배급받았기에 고모네는 그동안은 식량보탬이 되였기에 번마다  온집식구들의  옷을 챙겨 드렸기에  동네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했다  
  그러나 장사하며 뛰여 다녀서인지  조선에 가서 2~3일만 지나면 몸이  허해지면서  먹어도 배고프고 썰썰이가 나서  무엇이나  게걸스레 다먹었다.   어느한번 영애와 나는  고모네 웃방에서 장사하고 있는데  정주간에서 잠자던 손자놈이 깨여나 가마목에 덮어놓은 말가루반죽을  열어제끼고  맨손으로 주물러대며 머리부터 얼굴,  다리, 엉덩이에 까지  마구 태비를 하여  발라놓았다,  영애와 나는 눈만 판들거리는 손자놈을 보고  뒹굴며 웃으면서도  저 아까운 밀가루를 다  버렸구나며 걱정했는데   생각외로 고모는 숱가락에 물을 뭍혀 그놈의  얼굴부터  엉덩이에 까지 붙었던  밀가루 반죽을  살살 긁어모아  그릇에 다시 담더니  노르슴하게  떡을 구워  저녁상에 올렸다. 생각만 해도 메스겁고  께름직한 이떡을 어떻게 먹느냐고  영애와 나는  서로 눈짓하면서도 배고파 안 먹을수도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한입 두입 께적께적 뜯어 먹었다.   웬걸!  토하기는 커녕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고  그맛  진짜 꿀맛이였다.  중도 사흘 굶으면 딱정 벌레도 잡아  먹는다고  손자놈의 엉덩이에 붙었던  떡이라도 배불리 먹고나니  정신이나고 기분도좋아  손자놈의 어덩이를 살살 만져줬더니 그놈도 좋다고 야단아였다.    
  또 어느한번은  고모네 집에서 장사하다가  엄중한 정치사건을  일으켰다
중국에서 5~6살 어린애들이 입을  런닝적삼을 30여개 가져다 팔았는데  색갈도 곱고  앞가슴에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그림도 있어  종성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2~3일 지난 어느날,  종성안전부 사람들이  우리가 팔았던  런닝적삼을 들고와서  이집에 중국 손님이 왔는가?  아줌마들 이  적삼을 팔았는가?  모두 몇개 팔았는가? 어디에서 구입했는가? 등등을 물으며  엄숙한 표정으로  수첩에 일일이 기록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 런닝적삼을 땅에 쭉  펼쳐놓고  엄중한 정치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런닝그의 그림에서 애들이 뭘하고 있는가고 묻기에  영문도 모르고 우리는 자세히 드려다  봤더니  두 남자어린이가  군대 철갑모를 벗어서   모자 끈을 긴 막대기에 걸고  량쪽 막대기 끝을 어깨에 메고 활개치며 걸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이 철갑모에  씌여있는 "USA" 란 글자였다.  아줌마들 이글자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 아세요?   이글자는 미국이란  표시인데   이 애들이 지금  "USA"를 메고  좋다고 어디로 가고 있어요?  미국이 좋다고  웃으며 활개치며 가고있잖아요?   
하느님 맙시사!  나는 가슴이 덜컥 하며 정신이 어찔했다  년로하신 고모님의 얼굴도 어둡게 변하며 무서워 하는  기색이 넉넉했다.  조선에서 사무치게  증오하며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미국을 좋다고 선전했으니  고모네도 우리도  반혁명으로  감옥살이 할거 아닌가?  또 고모와 아들까지  안전부에 불러갔고  우리에게는 강제명령이 내렸다.
  오늘내로  종성시내에 팔았던 런닝적삼을  몽땅 걷어드리고  돈도 돌려주고  즉시 안전부에 수자까지 회보할껏,   이 적삼은 조선어디에 가서도  팔지 못하며  다시 팔다가 붙잠히면 용서 없다고 엄포까지 놓았다
 천만에 말씀 우리가 어찌 이  엄중한 반혁명  적삼을  다시 팔겠씀니까?   감옥에 붙잡아 넣지않고  이렇게  관대하게 용서 해 주신것 만으로도  감사하여   절이라도  꾹뻑 하고 십은데  …  
이튼날 종성 안전부에서  통령을 내려  고모네 집엔   정치적삼을 들고온 손님들이  줄을 섰고  우리는 찍 소리도 못하고  돈을 돌려주고 다른 물건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그날 저녁 고모는 손자손녀에게 선물로 준  런닝적삼을 농짝에서 꺼내여  펼쳐 보다가  적삼앞에"USA" 란 글자만 가위로 오려내고 그 자리에 다른 천을 대고 깁어 입혀도 되겠다며  다시 농짝밑에 감춰넣었다  나는 가슴이  찡하며  장사고 뭐고  저물건을 다 고모네를 주고  갔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네 생활도 조선보다는  나은편이지만   초중 고중 대학생 자식들의   공부 뒷바라지도 쉽지않아  이 장사길에 나선 신세였으니  계속  남은 물건을 다 팔았다. 
 
집에 돌아오는 출국 수속을하려 온성출입국 사무소에 가던날 나는 담대해서인지 둔해서인지   종성안전부에서 통령까지 내린"USA"  적삼을 또 온성 장마당에가서 은밀히  팔려고 시도했다.  영애는 겁나 울상이되여  다시 붙잡히면  모두다 끝장이라고 하는데…
나도 조금은 두렵기는 했지만  오늘 팔고 래일  중국에 들어가면 누가 붙잡는대?  하는 생각에  온성  장마당 구석에 앉아 전문 중국 물건을 구입하는 외지에서 온  할머니와   소근소근 흥정하여 몽땅 팔았다.  그리고 이 적삼을  절때 여기에서 펼쳐 놓지말고 외지에 가서  팔라고 재삼재삼 부탁까지  했다. 할머니도   여기에서 팔지 않겠으니 나를 시름  놓으라 했지만  죄진놈이였기에  우리는  남양해관을  건널 때까지  속이 조마조마하여  우리뒤에 누가 걸어 오기만 해도  당장  우리 뒤덜미를 잡는것 같아   제정신이 아니였다.
 이렇게 조선  보따리장사에 나는  몸도 마음도 피곤하게  고생도 많이 했지만  돈도 벌었기에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여  남편과 자식들의  칭찬도 받고 긍정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40대의 젊은 기백으로  중조 국경을 넘나 들며  희극배우마냥  울지도 웃지도 못할  드라마를 연출하며  돈을 벌었던  보따리장사의 사연들은   마치 한편의 소설마냥  나의 인생사에 각인되여 잊을수 없는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것  같다            
 
(최정금, 도문)
 
2020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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