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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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출판개혁의 돛을 달고
2012년 01월 06일 16시 19분  조회:1785  추천:0  작성자: 오지훈

민족출판개혁의 돛을 달고
  -민족출판사 우빈희사장
 
  2007년은 민족출판사로 볼 때 실로 벅찬 한해라 할수 있었다.
  “장문대사전”편찬을 기획해 국가로부터 1000만원의 자금을 쟁취했다. 이 대사전은 글자수가 3천만자로 쟁취한 자금은 국가출판총자금 1억원에서 10분의 1을 차지하여 엄청난 자금이 아닐수 없다. 또한 정부구매에서 정부를 대상으로 350만원 상당의 책을 판매, 그중 “중국아동백과전서”를 260만원(원가 230만원)에 판매하였다. 이밖에 “대외로 나가자(走出去)”(8권), “당대중국종교연구정선총서”(중국의 종교문화를 국외에 집중 소개함), “중국독본” 등 영향력있고 무게가 있는 일련의 도서들을 출판하여 사내 경제수익을 창출였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리하여 지난한해는 “민족출판사의 기적”을 만든 한해로 평가되고있다. 
  이는 2005년 1월 우빈희씨가 민족출판사 사장으로 취임한지 불과 2년만에 따낸 실적이자 만들어낸 기적이기도 하다. 민족출판사는 우사장을 위시한 새로운 지도층의 탄생과 더불어 개혁의 돛을 달면서 위축되던 민족출판사의 이미지가 새롭게 부각됐고 수년간 꾀해오던 변신에 한걸음 가깝게 다가섬으로써 민족출판사상 굵직한 한획을 그었다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북경으로 발령을 받고
  무순태생인 우빈희씨가 북경에 전근된것은 2004년말이다.
  그전에는 청원현 현위부서기, 서기, 무순일보 사장으로 사업하였다.
  보통인의 키를 훨씬 초과하는 그는 일찍부터 현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총명과 재능으로 맡은 분야에서 뛰여난 지도능력과 사업수완을 과시했다. 타고난 소박함과 진솔함은 사람들을 마무런 틀이 없이, 무랍없는 사이로 대해주었는데 그를 접근하는 사람마다 인정미가 넘치 사나이라는 인상을 물씬 풍겨준다. 이러한 후더운 인품과 더불어 강직함과 높은 책임감이여서인지 그는 재빨리 민족간부로 성장했고 국가민위에서 중점양성하는 민족간부명단에 자기의 이름을 올려놓은것 같다.  
  무순시 청원현에서 부서기 겸 선전부장으로 활약하는 기간 그는 중앙조직부, 통전부, 국가민위 3개 정부부서에서 조직하는 직무을 갖고 단련하는(과職鍛練) 50명 명단에 들었다. 그리하여 1995년 5월부터 1996년 5월까지 1년간 복건성 석사시 부시장으로 취임했다. 몇년후 이 50명이 북경에 집결하여 그동안의 사업경험을 교류한적있는데 그때 우빈희씨는 교류회에서 7명의 발언자속에 들어 중앙의 중시를 더 받게 되였다. 석사시에서 돌아와 얼마안되서 1996년 12월부터 그는 5년간 무순시 청원현서기로 사업하였으며 2001년 11월에는 무순일보 사장으로 발령받아 2003년 6월까지 무순일보 사장으로 정력적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그의 노력으로 하여 타 신문사보다 후진 무순일보는 신문개혁을 성공적으로 진행했고 무순일보신문그룹을 구성하여 신문개혁의 대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2003년 8월에 국가민위는 그에게 북경으로 전근하라는 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전중국이 사스라는 전례없는 재해에 휩쌓여있었고 무순일보그룹 내부의 책임자인선이 미처 해결되지 않아 1년간 지체하다 2004년 12월에 중국민족보신문사 부사장으로 발령받고 전반 신문사사업을 주관했다. 그러다 1년뒤인 2005년 1월 민족출판사 사장으로 정식 취임하게 되였다.
  “국가민위는 당시 나를 비롯해서 산하 기관에서 5명을 조동시켜 민족출판사의 지도층을 구성하였지요. 그래도 내가 출판관련 업무에 정통하고 민족사업의 경험이 풍부하다는데서 서로 낯을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사장의 중책을 메워준것입니다.”  그 당시를 돌이키며 그는 어딘가 전기색채나 희극색채가 띈다며 환하게 웃었다.
 
  '공공문화제품생산' 제출
  민족출판사는 국가민위가 주관하는 출판기관이다.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는 민족출판사는 1953년에 창립되였으며 주요하게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과 모택동의 경전저작을 번역출판하였다. 현재 민족출판사는 몽골어, 장어, 위글어, 까자흐어, 조선어 등 정상 5개 소수민족언어문자외 한어와 영어, 이문 등 문자로 책을 출판하고있다. 그래서 6개 “작은 출판사”로 불리운다고 한다. 사내에는 '구사(求事)문선’, ‘경제생활 '잡지외 영상출판 등 매체도 있다. 그리고 민족도 많은데 사내에는 도합 22개 민족구성원으로 재직자가 무려 300명이 된다.
  이런 유구한 력사와 중요역할을 담당하는 민족출판사의 중임이 우사장을 위시한 새로운 지도층들의 어깨에 떨어졌다. 그들은 부임한 첫날부터 민족출판사가 국가출판계통의 유일한 민족출판개혁시범단위라는데 중점을 두고 설계도를 다시 그렸다. 
  우사장은 먼저 사내 정황을 익숙한 기초에서 지도부성원들과 얼굴을 맞대고 출판사의 앞날을 설계했다. 그래서 국가의 5개년계획처럼 만들어낸것이 민족출판사의 5년계획안이란다. 이 5년계획에서 전 3년은 실천의 해로, 후 2년은 계획의 해로 정했다,. 실천의 해는 또 첫해는 학습의 해, 두번째 해는 실험의 해, 세번째 해는 개혁의 해로 나뉘었고 네번째 해인 올해는 형태전환(轉型)의 해라고 한다.
  그는 이 5년계획에서 중요한것은 형태전환이라고 주장하며 형태전환을 둘러싸고 모든 개혁의 프로그램을 편성했고 "공공(公共)문화제품 생산"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 공공문화제품이란 일련의 출판도서에서 첫째, 핵심가치관을 나타내는것, 둘째, 공동문화(55개 소수민족마다 다 개성이 있지만 공성이 있기에 그 공성을 살려야 한다)를 육성하는것, 셋째, 소수민족문화의 최저보장을 반영해야 한다는것이다. 우리의 생뢀에 최저생계보장이 있는것처럼 문화에도 각 소수민족들이 수요하는 도서가 있는데 이러한 도서를 출판하는것이 곧바로 문화의 최저보장이라고 일가견을 폈다.
  바뀌지 않으면 살수 없다는것이 지도층의 확고한 결심이였다. 해마다 새로운 계획이 나오고 층층이 집행되면서 사내 분위기가 확 바뀌고 사람들의 정신면모도 새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과거 누가 돈을 내면 책을 내주는 등 책출판번호만 파는" 피동적인 출판관습은 완전히 깨지고 대신 엄밀한 계획에 따라 도서를 출판하고 돈이 없어도 필요한 도서는 출판하는 시스템이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우사장은 "형태전환은 제품구조의 전환, 생산방식의 전환, 관리모식의 전환, 분배방식의 전환"이라고 설명하면서 전 3년에는 형태전환을 위한 준비를 하고 후 2년에는 공공문화제품생산기지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토로했다. 올해에 5개 민족이 총 500종의 도서를 출판할 계획인데 각 민족실마다 제마끔 책을 출판하는것이 아니라 5개 민족실이 각 100종의 도서를 출판하되 그중 70종은 동 주제의 도서를 동시출판하고 나머지 30종만 자기 민족의 원작을 출판한다. 그는 “쉽게 말하면 여러 사람들이 힌상에 앉아서 동시에 영양식을 먹는것”이라고 형상적으로 풀이했다.
  그래서 이미 상급에 출판비용으로 600-800만원의 예산을 신청하였으며 사내 보유자금으로 시작해서 일부는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로도 진행해 나갈것이라 했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이미 3년간의 실천속에서 커다란 성취를 거두었다. 실험적으로 "중국아동백과도서”, “중국독본”, 당17차대회보도물 등 도서를 출판하여 좋은 효과를 보고있으며 이러한 공공문화제품의 생산을 통해 공익성개혁체제 구축과 기제실천이란 목표로 한걸음씩 나아가고있다. 또한 사업단위가 기업화경영으로 나아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출판계통에서도 누가 돈을 주기를 기다리는 시대를 력사가 되였으며 지금부터 모든 사업을 프로젝트화해서 자금을 쟁취하는것이 지름길이라고 피력했다. 그는 “돈은 머리를 쓰면 쓸수록 생겨나기 마련이다”고 개혁에서의 성취감을 자부하기도 했다.
 
  민족의 비문화유산 보호해야
  그는 지금 북경에서 고독감을 모르고 산다고 상경소감을 토로했다. 안해는 민족화원에서 3급미술사로 근무하며 수도 생활에 잘 적응하고있고 자기는 학습, 또 학습이라고 했다. 그는 현시대사람들이 자주 쓰는 "충전"으로 표현하지 않고 미욱할 정도로 배우고있다(惡補)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시대의 변화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이를 악물고 학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이다.   수십년을 민족간부로 몸을 담아온 그는 민족유산에 대한 애착과 관심도도 매우 높았다. 그는 자신이 청원현서기로 있을 당시 청원현의 조선족학생원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에 비추어 민족학교를 살리기 위한 부득불의 조치로 조선족중학교와 조선족소학교를 청원현조선족학교로 통합하고 새로운 청사를 지었는데 최근에 가보니 이 학교도 학생수가 얼마 안되여 소실될 위험에 처해 매우 안타깝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가슴아픈 현실이지요." 시대의 변천과 흐름속에서 여하히 소실되여가는 민족의 유산을 발굴하고 보호하는것이 우리 현실에 놓인 하나의 과제라고 직설했다.
  특히 그는 지난해 맏형인 우철희선생이 세상뜨고 또 중앙당교 교수였던 최룡수선생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신변에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우리 민족의 력사와 연구에 조예가 깊은 분들로 우리 민족의 비유산을 빨리 건지지 않으면 소실될 위험성이 크기때문이라고 말했다.
“지금 시대는 도시화, 정보화시대여서 급변하고있고 우리민족의 80세 좌우의  로일대, 조선족이민세대들이 사망되면서 우리들의 비문화유산이 소실되고있어요.. ‘우씨가족사’는 단순한 개인가족사가 아니라 중국조선족력사의 일부이며 중국 다민족력사의 일부지요.. 맏형님이 생존할 땐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못했는데 사후에야 이 점을 더 깊이 깨닫게 됐지요.”
지금 짬짬히 김학철선생의 소설을 읽고있는데 우리 민족가운데 이렇게 대단한 분이 있었다는것을 잘 몰랐다며 조선어수준이 낮은 사람이나 조선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력사와 인물에 대해 알기 어렵다면서 유구한 우리 민족의 력사와 전통, 인물을 단지 우리 민족 언어문자만이 아니라 중국어로 소개하여 타민족에게 알리는 작업도 자못 중요하다고 했다.
“물론 우리 민족언어로 우리 민족의 력사와 인물을 발굴하고 정리하는것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동시에 여하히 타민족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겠는가 하는 점도 념두고 우리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점입니다..”
우사장은 “중국소수민족중 우리 민족은 중국조선족100년사 등 책이 나온것처럼 상당히 특히한 민족이고 자기 나라가 있지만 이미 중국의 조선족으로 되여버렸다. 따라서 모국어의 점차적인 상실은 필연적인 현실로 되고있으며 문자한계에서 벗어나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겠는가 하는것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피력했다.    (2008/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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