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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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삼씨의 파란많은 인생
2012년 04월 20일 13시 37분  조회:2319  추천:1  작성자: 오지훈

강영삼씨의 파란많은 인생   2007.07
  내가 있는 곳엔 웃음이 있도다-

  웃음은 우리 생활의 윤활제이고 활력소이다. 중국말에 10년 웃으면 백년 장수한다는 말이 있듯이 웃음은 우리 생활의 그늘을 가셔주고 세월의 주름을 제거해주며 또 랑만, 쾌락, 즐거움, 행복을 만들어준다. 인생의 황혼에 들어선 로인들에겐 자식들의 효도도 효도지만 웃을 때보다 즐겁고 행복할 때가 없다 한다. 심양시조선족로인들에게 "재간둥이", "보배둥이"로 불리우는 강영삼씨, 그도 예쉰 후반의 로인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의 특유의 재치와 유모어로 항상 로인들을 웃기군 하여 그가 있는 곳엔 폭소가 그칠줄 모른다. 그래서 주변에선 그를 "우리의 코미디"라고 친절하게 부르기도 한다.

  하하- 웃고삽시다
  강영삼씨는 코미디라 불러도 손색없다. 그가 나타나는 곳이면 언제나 폭소가 터지고 씨원한 웃음바다가 펼쳐지며 또 어떤 때는 배꼽을 잡고 웃다가 눈물과 코물이 나오게 하기 일쑤다.
  그는 자신이 천생적으로 롱담을 잘하는것이 아니라 다만 웃기 좋아하다보니 남을 웃기게 되였다고 했다. 특히 로년생활에 접어들어 로인들과 많이 접촉하면서 가정의 불화목, 로년기에 오는 우울과 고독감, 여러가지 병으로 인한 고통... 등으로 하여 웃음을 잃어가고있는 로인들에게 웃음과 건강을 주기 위해 자기의 모든 재치를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로인들이 웃으면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상 쾌락을 줄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리롭다는것이 그의 지론이다.  
  기자가 그에게 웃음의 비결에 대해 묻자 그는 웃으면서 "난 관상쟁이도 아니요 또 그렇다고 해서 전문학교도 나오지 않았지. 다만 소품을 좀 연구하고 많은 사람과 접촉하면서 유심히 관찰하고 사람의 심리를 더 연구한것뿐이야."라고 실토한다.
  "내앞에선 안웃는 사람이 없다"고 장담하는 그는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그와 몇마디 말을 건네보고 묘한 웃음거리를 만들어낸다. 한번은 젊은 한족음악애호가들과 한자리에 앉았는데 그중 자신이 나이가 가장 많아 서로가 어색한 분위기였다. 누구하나 말문을 먼저 열지 않자 그는 "오늘 이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다 나의 선배다. 이 동생이 여러 선배들한테서 많이 배우고싶다."고 말해 젊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고 이내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그들과 친숙해졌다한다. 
  아무리 낯선 사람이나 생소한 장소에서도 그는 약간 분위기만 파악하면 순간적으로 머리에 웃길수 있는 령감이 절로 생겨난다고 한다. 그에게 웬간해서 웃지 않는 조카애가 있었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놈은 웬간해서 웃지 않는다. 한달에 한번씩 웃지, 그래 1년에 12번 웃을가 말가."라고 그 조카도 피씩 웃고말았다 한다.
  조선사람을 만나서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평양말을 흉내내여 웃겼고 로인과 젊은 사람들을 만나서는 무작정 웃음을 유발시키는것이 아니라 장소와 년령, 시간을 봐서 웃음거리를 척척 묘하게 만들어내 듣는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가 출연한 소품에서도 그는 자신의 재치와 장기를 남김없이 연출했다. "세방살이", "감주", "바보나으리", "술친구" 등 소품에서 그는 못난이(小芻), 머저리, 바보 등 역을 맡아서 관중을 웃겼다. 평안도인 그는 평안도말 자체가 사람을 웃기기에 평소 평안도사투리를 많이 쓰고 장소마다 다른 사투리로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자신이 구겨지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웃길수 없다는 그는 챠플린 등 동작을 너무 근사하게 흉내내였는데 어떤 사람은 아예 강영삼씨를 보고 "채플린" 또는 "떨만이"("세방살이"의 인물)라 불렀다. 그는 대창(對唱)을 잘 불렀는데 학교교사때 "우리 소녀 백점 맞았네"를 학생과 같이 대창하여 전교를 들썽케 했고 최근에는 "요렇게 조렇게" 라는 대창을 불러 장내를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서 그의 두 누이나 녀동생들이나 또 그의 두 아들딸들이나 모두 옷기기를 즐긴다. 그래서 처녀때 새차고 말수가 적었던 그의 안해도 성격이 개변되리만치 활달해졌다. 온가족이 항상 무뚝뚝하게 있는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웃기기 시작하면 웃기기 시합이라 하듯이 우스개소리가 떨어질줄 몰라 시종 화기가 돌았다.
  그는 우리말 사투리 자체가 웃긴다며 시간이 있으면 우리말 사투리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싶다고 했다. 
 
  소개신 한장에 사라진 꿈
  "중국에서 살려면 중국말을 잘해라" 부친의 이 한마디 말은 학생시절 그가 학업에 열중할수 있었던 동력이 되였다한다.
  신빈태생인 그는 7살되던 해 심양으로 이사했다. 처음엔 서탑 정미소 부근 한 일본집에 들었다가 1년뒤 명렴가로 이사해서 그는 명렴대리조선족소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어릴때 얼마나 까불었는지 이사오던 날 그는 남잡목역에 들어서는 기차를 불과 5메터 앞두고 레루길에 서서 놀다가 렬차관리원에게 붙들려 호된 꾸지람과 매를 맞기도 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씨름을 잘해서인지 그를 당해낸 사람이 없는 주먹대장이다. 그의 가족이 대흥향 전성촌이라는 중국동네에 이주하는바람에 그는 소학 6학년을 졸업못하고 한족소학교에 전학하여 4학년에 입학했다가 중국어를 도무지 알아듣을수 없어 다시 3학년, 2학년, 결국은 1학년부터 다시 다녔다. 처음에는 부끄러운줄 몰랐다가 같은 또래들이 중학교를 다니는걸 보고 철이 들기 시작, 그때부터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4학년때 대흥소학교로 전학했고 그후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의 금이 세개 있는 완장을 두른 대대장으로 되였다.
  1959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 그는 심양시1중을 지망했다. 그때는 학생들이 자기의 성적에 따라 중학교를 선택할수 있었는데 그는 어문성적은 우수해서 매번 5점이였고 수학성적이 좀 나리였다한다. 후에 통지가 왔는데 그는 지망대로 심양시1중에 진학, 대흥소학교에서 유일하게 심양시1중에 붙은 학생으로 되였다. 심양시1중은 대동구에 있었는데 왜정시대 학교건물이여서 인상에 학교건물도 좋았고 학교시설도 훌륭했다. 그는 마치 날개가 돋혀 날아갈것만 같은 기분이였다. 그때 전교에 조선족은 유일하게 강영삼씨 혼자였는데 개학해서 얼마안되여 성이 조씨라는 녀담임선생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반장으로 임명한다고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학급에 학생이 모두 55명, 유일한 조선족으로 반장이 되였으니 말이다. 전학급에서 연설할 때 그가 말을 더듬거리자 담임선생은 너무 격동되서 그런다며 격려해주기도 했다. 동학들도 나이가 많은 그를 보고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장"이라 깎듯이 불렀는데 그때 그는 중국어를 한족처럼 잘하겠노라고 은근히 벼르기도 했다.
  하루는 부교장이 그를 찾았다. 수두룩이 쌓인 편지더미를 가리키며 조선어를 중국어로 번역해보라는것이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문제없다고 대답했고 며칠을 씨름하며 그 편지를 중국어로 다 번역해냈다. 이 편지들은 학교 선배들이 조선 평양중학교 학생들과 거래한 서신이였는데 마침 그가 번역해내면서 그는 학교내 유명인물로 되였다. 가정이 곤난한 그는 당시 2등 조학금 월 9원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그를 당과와 단과 학습에 참가시키면서 중요대상으로 배양하였다. 그때 그는 적잖은 자본가와 지주의 자제들이 당과 공청단에 가입하는걸 보면서 자기도 하루빨리 이 대오속에 가입하리라 결심했다. 그때는(1961년) 계급투쟁이 갓 시작되던 때였는데 도시보다 농촌에서 그 분위기가 더 짙어갔다. 여직껏 자신이 청백한 성분으로 알고있었던 그는 1년뒤 소개신을 떼러 촌에 갔다가 소개신 뒤에 써준 부농성분을 보고 눈앞이 아찔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부친이 신빈현 백기촌에 있을 때 촌장을 한적이 있어 성분이 부농이라는것이였다. 며칠동안 고민속에 모대기던 그는 담임선생을 찾아가 가정이 곤난하여 학교를 다닐수 없다고 핑계를 댔고 담임선생과 동학들과 눈물을 뿌리며 그렇게 갈망하고 열망했던 학업을 그만두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 그는 그렇게 자기를 믿어주고 밀어주던 담임선생과 학교령도를 속였다는 죄책감에서 차마 부농성분이 찍힌 소개신을 내밀수 없었던것이다. 
  음악과 미술에 남다른 흥미가 짙었던 그는 학업도 학업이였지만 매번 활동때마다 신나게 연출하는 학교악대의 연주가 부러워했고 또 선배들의 참군을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이 모든 꿈이 그 소개신 한장때문에 산산쪼각이 나고말았다.
 
  "부농"의 자식에서 교원으로
  하루아침에 "부농"의 자식으로 락인된 그는 농촌에 와서 재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부친이 부농성분으로 획분된것은 상급의 어느 지시정신에 근거한것이 아니라 농촌의 토배기정책에 의한것이였다 한다.
  성분이 나쁜 사람겐 개조표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가슴깊이 새긴 그는 새벽 4시 이슬을 이고 들에 나가 모를 져서 논판에 펴놓고 사람들이 나오기 기다렸가 같이 모를 꽂았고 남들이 다 들어간후 일손을 거두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 바람이 세차게 번지던 시절, 그가 살던 신광대대에서 투쟁대상으로 삼을 사람이 없어 결국 "부농"의 자식이였던 그와 그의 모친은 "4류분자"로 투쟁의 화살을 피할수 없었다. 그의 모친이 쓴 죄장은 남보다 좀 살았다는것이 고작이였다. 그들 모자는 마을 소텅간 옆에 있는 헐렁한 집에 같이여 집조차 갈수 없었다. 투쟁할 때는 "강영삼을 타도하자"라는 글에 빨간 승표를 친 커다란 간판을 목에 걸고 뙈약볕에 서서 투쟁을 받았다. 모친이 투쟁당하면서 뺨을 얻어맞는걸 본 그는 모든 죄가 자기한테 있다며 조금이라도 모친의 고통을 덜어주려 모지람을 썼다.
  낮에는 투쟁받고 밤에는 검토서를 써야 했는데 투쟁골간들이 일자무식쟁이라 검토서를 받아쥐고 몇장인가 세보고 적다고 다시 윽박지르기도 하였다. 하루는 집을 수색하다 오선보가 적힌 조선음악책이 나오자 무슨 비밀암호인가고 따져물어 음악책이라 한적도 있었다한다. 로동개조는 동네 모든 청소였는데 소텅간에서 집집마다 변소를 청소였다. 구린내가 코를 찌르는 한여름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동네에서 년세가 있는 사람들은 강영삼씨 모자가 무고함을 빤히 알면서도 누구하나 앞에 나서서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구하나 그들 모자와 감히 말을 건네지 못했고 일이 있어 그의 집에 가도 등록해야 했다.
  그때 동네에 벽돌집 한채 없었는데 후에 한족미장쟁이들이 와서 일하는걸 훔쳐본 강영삼씨는 눈썰미가 좋아서 후에는 아예 미장쟁이가 되여 동네 집집의 굴뚝을 쌓아주었다. 그리고 신광소학교 변소도 그때 그가 처음으로 직접 지었다. 후에 또 목수일까지 배워낸 그는 손재간이 너무 좋아 이불장, 가시장, 옷장도 척척 짜냈는데 쏘파도 여러개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투쟁은 좀체로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비록 한 마을에 사는 한 녀성과 결혼했지만 태여날 자식들의 자기와 같은 "4류분자"의 신세를 면치 못할 캄캄한 앞날을 생학하던 어느 하루 자결을 시도하려 했다가 주변의 감시가 심해 결국 목숨을 끊치 못했다.
  "재간둥이"이였던 그는 모진 투쟁속에서도 자기의 여러가지 재간을 익혀나갔고 더우기 음악에 심취한 그는 끝내 음악창작에서 두각을 내밀어 사회의 인정을 받을수 있었다. 1974년 그가 작곡, 작사하고 안무한 무용 "빈하중농 재교육 받네"가 전구문예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하게 되였다. 그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여 그는 끝내 이해 8월 오가황조선족소학교 음악미술교원으로 정식 초빙되였다.
  3년동안 오강황조선족소학교 음악미술교원을 하던 그는 1977년 심조3중이 서면서 심조3중의 음악교원으로 전근돼서 자신의 음악재질을 과시했다. 심조3중 건립초기 그가 조직한 악대와 지휘한 "동방홍" 합창은 시조선족중소학교문예콩클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는 학생들로 구성된 악대를 조직하여 여러번 문예콩클에 참가하여 상을 받았으나 후에 심조3중에 고중이 없어지고 초중만 남으면서 초중생들에게 희망을 걸기엔 너무 힘이 부치다 생각하고 교원악대를 조직하여 여러차 공연하여 수상하는 실적도 쌓았다.   
    
  꺾을수 없었던 음악의 불씨

  사회에선 강선생은 음악선생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전문 배운것은 아니다. 그는 피리에서 크라네트, 손풍금, 바이올린에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줄 알고 또한 작곡도 하고 안무도 할줄 알기에 로인협회에선 음악골간이다. 천생적으로 음악의 자질을 타고난 그여서인지 이 모든 악기를 놀라운 의지로 자학해내였다.
  "부농"의 자식으로 억울한 죄명을 쓰고 투쟁받던 나날 그의 가슴에 지핀 음악의에 불씨는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학업의 꿈을 접고 농촌에 온 그는 처음으로 신광대대선전대를 조직하였다. 그때 악기란 그가 산 낡은 손풍금 한대와 장구 하나, 그리고 만든 피리뿐이였다. 후에 크라네트 역시 그가 가마니를 짜서 판 돈으로 샀다. 농촌문화생활이 거의 없었던 시기, 그들의 공연은 삭막한 농촌마을에 생기를 부여했다. 여기서 신바람이 난 강영삼씨는 혼자서 심양시조선족문화관에 가 무용반에 참가해 춤도 배우고 장구도 배웠다. 대대에서 파견하면 보조를 받을수 있었건만 자기처럼 성분이 나쁜 사람은 파견할리 만무하다는것을 누구보다 잘아는 그는 신광대대에서 7,8리를 걸어 기차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북역에 와서 내려 다시 걸어서 문화관까지 왔다. 그러나 민족음악에 청춘이 불타오른 그때 조금도 힘든줄 몰랐다. 김관장이 민족음악을 잘 발전시켜야 한다는 그 말을 듣은후부터는 조선상점에 가서 민족악기를 보고는 참대를 사다 모방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굵은것은 단소, 중간것은 젓대, 가는것은 피리 처음에는 제대로 되지 않아 수없이 참대만 짜개버렸지만 끝내 하나하나 음이 비슷한 악기가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그때 그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악보가 무엇인지 몰랐던 그는 태원가에 있는 한 음악학교에서 배워주는 악보지식을 창문너머로 조금씩 훔쳐배웠고 후에는 다른 사람의 화성책이나 기타 음악책을 빌려서 하나하나 베끼면서 짬짬히 자학했다. 1965년 연변조선조가무단이 전국소수민족문예콩클 참가차 심양에 들려 공연을 본 그는 완전히 민족음악에 심취해버렸다. 그때 민족음악이 그렇게 훌률하고 아름다울수 없었다한다.
  그래서 한여름 비닐신을 신고 투쟁받던중 발가락으로 도레미화 하며 악곡에 골몰하다 결국 발각되여 벽돌에 꿇는 고통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1968년 심조1중 졸업생들이 하향하여 신광대대에 와 모주석어록을 선전한다고 할 때 강영삼씨는 다시 선전대로 불려가 자신의 창작을 할수 있었다. 그때 그는 가야금을 만들기 위해 집을 짓기 위해 준비해놓았던 나무를 잘랐고 거기에 성차지 않아 산골에 가서 목재를 구해다 6개의 가야금을 만들었다. 초라했지만 가야금과 같은 음이 나온다는데서 그는 매우 흡족했다. 그가 선전대에 나오면서 마을에선 민족음악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전대의 활약으로 하여 대대의 벽에 걸려있는 상장도 수두룩해졌다.
  그를 최종 투쟁대상에서 벗어나게 한 무용 "빈하중농 재교육 받네"'는 그의 피와 땀의 결정이라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악대 지도에서 안무, 작곡, 작사 모두가 혼자 도맡다싶이 했고 모판에 씌운 비닐과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그는 동네에서 우산을 빌려다 그우에 씌운 천을 뜯어버리고 거기에 비닐을 씌워 비닐박막을 만들었으며 천둥소리를 내기 위해 모진 고민끝에 벽에 걸린 "모주석이 안원으로 가다"의 큰 철판그림을 흔들어서 같은 효과를 낼수 있었는데 그때 이 종목은 형세에도 맞고 내용도 풍부하고 기교도 뛰여나는 등으로 하여 구문예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했고 강영삼 이름석자를 전구에 쫙 소문냈다.
  투쟁을 받던 그때를 돌이키면 지금도 괴씸하고 눈물나기도 하지만 그때 음악에 눈을 틔이고 끈질긴 추구로 오늘날이 있었다는것이 희비가 엇갈리고 만감이 교차된다고 했다.

  민족음악에 여생을 불살라
  1994년에 딸애의 결혼식으로 한국에 나갔다 한국채무자와의 송사건으로 제시간내 귀국 못한것으로 하여 교원직을 떼우기도 한 그였지만 2004년 귀국하여서부터 현재까지 한국에서 일하다 아리랑예술단이나 로년협회무슨 활동이 있다면 두말없이 비행기를 타고 선후 4차 날아왔는데 거기에 든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지금 아리랑예술단 악대 부단장인 그는 로인들의 합창을 지도할라 무용을 감독할라 여념이 없다. 누가 시켜서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애호이자 자신의 쾌락, 자신의 인생이라 한다.
  민족음악을 위해 쓰는 돈은 하나고 아깝지 않다는 그는 지금도 웬간해서는 택시를 타지 않고 대중교통을 리용한다. 한푼이라도 아껴서 민족음악을 위한 사업에 쓰고싶다는 그다. 처음으로 귀국하여 심양에 아리랑예술단이 있는것을 보고 거기에 매료된 그는 애착감을 갖고 관심하고 정력투구는 물론 물심량면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재입국자 신분으로 귀국하여 다시 한국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로 한국에서 일하던 그는 아리랑예술단의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일당 12만원의 일감도 팽개치고 사비를 팔며 심양에 돌아와 공연에 참가했고 그후에도 노가데판에서 일하다가도 로년협회 활동이 있다면 비행기를 타고 여러번 날아왔다. 그는 심양에 조선족가수들이 발전할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처음으로 조선족가수가요무대를 제안하여 실현시켰고 요새는 심양조선족노래자랑을 할뜻을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 내비치고 경비는 1차적으로 자신의 사비로 보태겠다고 선뜻 제안해 동감을 자아냈다.
  1989년부터 민족악기인 장새납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접촉하기 시작한 그는 귀국하여서부터 선생을 찾아 배우고싶은 욕망에서 지난해 5월 연변에 연변가무단 1급 장새납연주원 김호윤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음색과 취법을 배워 성문예콩클에서 선후 금상과 은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10월 북경에서 있은 '올림픽맞이 2007-2008 화인의 별 음악콩클'(세계화인문화예술교류협회, 중화문화예술교류협회, 중국무용가협회, 중국연출가협회 등에서 조직)에서 장새납 독주 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난해 5월 연변에 가서 한달간 장새납을 배울 때 어머님이 96세로 별세하였는데 만약 자신이 곁에서 돌봤다면 100세는 장수했을거라고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이밖에 그는 비디어와 사진촬영에도 재간있어 사비를 팔아가며 무료로 아리랑예술단과 로년협회 활동 장면을 촬영하였고 심양한국주행사기간 여러가지 활동도 거의 빠지지 않고 록화하고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취미이자 자료로 남기고싶어서이다고 했다. 결혼과 축수연에도 로인들이 찾으면 가서 비지땀을 흘리며 록화해주고 사진을 찍어주느라 반찬도 제대로 들지 못했고 거의 무료로 하는때가 많았다. 또 반주곡을 미디음악(電腦音樂)을 통해 제작할줄 알았는데 누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고 자기 돈으로 CD를 사다가 공을 들여 공짜로 만들어주었다 한다.
  그가 민족음악사업에 이처럼 여생을 불태우고 또 로년들을 위해 헌신할수 있은데는 문화대혁명기간 비인간적인 처우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꾿꾿하게 살아온 그의 인생관과 시종 강인하면서도 락관하는 생활태도에 있다. 이것이 오늘날 그의 여생에서 웃음과 민족음악가 더북어 빛을 발하고있는것이 아닐가.     오지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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