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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추우선생은 중국의 문화명인으로 잡힌다. 20세기 90년대에 상해戱劇학원의 원장직을 사직하고 문화려행을 시작하면서 <문화苦旅> <山居筆記> 라는 책을 내놓아 문화민중들의 각광을 받았었다. 그 뒤에는 문화평론자 자격으로 홍콩의 봉황첼레비죤방송국 문화순례에 참가하여 <千年一嘆>이라는 책을 내놓았고 중국텔레비방송의 백가강단에 등단하여 꽤나 인기를 모으는 문화인으로 되였다.
헌데 余傑이라는 사람이 인터넷에서 문화대혁명시 여추우선생이 상해시위 선전부의 어용붓대로서 4인방의 여론기구였던 <학습과 비판>에 많은 비판문장을 발표한 과거를 발로시키고 여추위선생더러 공개참회를 하라고 요구하면서부터 , 또 여추우선생이 광채롭지못한 과거를 그거 뭐 하는식으로 얼룽땅둥 넘겨보내려는 心機를 내보이면서부터 여추우선생의 인기가 많이 하락하게 되였다.
사람은 완정된 사람이 없고 옥은 티없는 옥이 없다. 또 인품과 문품을 구별할수도 있는 일이므로 , 나는 여추우선생의 비교적 충실한 독자로 되여있었다. 특히 여추우선생은 중국이 滿淸에 대한 객관적인 력사태도를 지니지못했던 과거를 청산하는데 , 국가와 민족개념에 대한 재정리를 하는데 좋은 역활을 하였다고 생각하여왔다. 몇년전부터 있은 만청연구붐과 <강서건륭성세>붐도 어떻게 보면 여추우선생의 감성이 짙은 <문화苦旅>에서부터 시작되였을지 모른다고 판단해왔고 , 그래서 드문드문 백가강단에서 여추위선생의 강의를 시청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이 교수님이 조금은 쇼적인 면도 지니고 있고 <허튼소리>도 잘 하는구나고 생각되였다.
90년대 중반까지도 사실 중국에는 이색적인 서적이 많이 출판되지는 못했었다. 지금도 조금 여전하기는 하지만 중국의 인테리들은 독립적인 생각을 하고 독립적인 생각을 내놓기가 많이 힘들다. 소위 주류이델레오기와 빗나가면 재앙을 받을가 공포심에 휩싸인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보이지않는 문자옥이 존재하는건가? 스스로의 대답은 힘든 일이다. 현재 퇴직을 하는 인문과의 어떤 교수들은 < 크게는 나라일을 거론하지 말고 작게는 학교일도 관심하지 말라>는 충고를 서로 선사하고 있다니 중국인테리들의 생존풍기와 학문풍기는 고심해볼만한 일이다.
헌데 여추우선생은 민고를 관심하고 나라를 관심하는것이 그의 고질로 되였는지 작년 문천지진시에 큰 봉변을 당했다. 새로 내놓는 책 원고료를 지진참사에 기부하기는 했지만 지진난민들의 공용시설건설에서 두부공정을 한 관료를 조사하고 징벌해달라는 요구와 상관하여 < 너무 그렇게 떠들지 말라, 외국인들이 그것을 리용하여 중국을 헏뜯는다>는 내용을 담은 “含泪劝告灾民”을 써놓아 네티즌들부터 秋雨含泪는 악어의 눈물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산채판사전에 수록되였다. 말하자면 秋雨含泪는 帮闲文人들의 太平粉饰을 비하하는 인기적인 신용어로 낱말로 되여있다.
관료사회에서 帮闲文人의 존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여추우선생의 <실수?>가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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