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란 <신약>에서 나오는 하느님과 누구에게 冥冥중에서 환상되거나 감지되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나뉘어진다.
두번째 하느님은 종족과 언어와 시대에 따라 부동한 명칭으로 표현이 될수가 있다. 흔히 말하는 샤머니즘의 神靈도 좋고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알라도 좋고 자본주의기독교(新敎)에서의 하느님도 좋고 인도불교가 아닌 동방불교에서 나오는 부처님도 보살도 모두가 상술한 하느님 표현중의 事例라고 생각된다.
객관세계에 하느님이 實存하는가 虛存하는가 하는 쟁론과는 거의 상관이 없이, 아직도 많은 인간의 심목중에는 하느님이 존재함은 사실이다. 비종교인중에 종교인들의 신앙을 거짓으로 보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종교체험이 전혀 없거나 적은 비종교인이 종교인들의 경건한 신앙심을 리해한다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종교체험은 고난체험과 苦難체험중에서의 명상체험으로 실천이 된다. 때문에 자연조건(기후 지형과 련관되는 자연생존조건)이 빈약할수록, 사회조건이 험악할수록 그속에 進駐한 종족과 개인의 종요체험은 집중표현으로 남아있다. 중국의 중학교력사교과서에서 말하던 戰亂시대에 불교가 여차여차하게 흥기되였다는 一理가
바로 그것이다.
반도사에서 근대사는 고난의 력사가 아닐수가 없다. 반도에 먼 옛날에는 전혀 고난이 없은것은 아니지만, 력사란 멀리 가버릴수록 흔적과 기록만 남게 된다는 時間效應으로 하여 우리의 심목중에 짜릿하게 남은 상처중에서 근대의 상처가 유별나게 표현이 된다. 이런 전제조건하에서 근대에 이르러 전래된 종교와 재래의 종교와 새로운 종교가 반도에 흥기된 직접적인 원인을 찾아볼수가 있다. 그러한 고난의 시대를 살았고, 시인의 민감된 신경을 지니였으며 유력한 언어문자 표현력을 소유한 윤동주시인과 그 詩作중에 은밀하게 또는 유표하게 드러나는 종교체험은 주목할만한 사건이다.
윤동주 시작중의 <서시> ,<십자가>, < 또 다른 고향>만 읽어보아도 우리는 그속에 담긴 종교체험을 느끼게 된다. 시인이 우러르는 하늘과 갈망하는 십자가, 그것은 고난중에서 바라보는 하늘이며 하늘에 바라는 갈망이 아닐수가 없다.
고금중외에 종교체험으로 문학의 정수를 만든 작가와 작품이 수두룩하다. 우리 문학사중에서 종교체험이 다분하였고 재기있게 표현한 문학인중에서 윤동주시인이 으뜸이 아닐가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