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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허동식《잡담》
어릴 때 <<홍색낭자군>> 영화는 몇번이나 구경하였을가? 나의 기억이 틀리지가 않는다면 남패천이라는 놈은 가증스러웠고 또 바레무가무극 <<홍색낭자군>>을 올려쳐다보면서 우리 시골애들은 다리를 건뜻건뜻 높게 들어보이는 홍상천인지 하는 사람을 두고 <<에구, 가다리 찢어지겠다.>>를 부르짖었다. 애들은 물론 시골어른들을 상대하여서도 홍상천이 다리를 놀이감처럼 놀리는 장면들은 이야기거리가 너무나도 단조롭고 오락성이 적어서 재미가 없었다.
그 뒤에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홍색낭자군>>도 모주석 할아버지의 부인 강청의 본보기극에 속한다고 비판을 받았고 우리들의 추억에 씁쓸한 흔적으로 허구픈 웃음으로 넘어가버렸다.
그런데 <<홍색낭자군>>은 바레무오페라라는 시각에서만 보면 명작이 아닐수가 없고 대작이 아닐수가 없다. <<가다리 찢어지는것들>>이 바로 바레무의 극치이고 서방세계의 바레무와 중국고전희곡중의 정화들이 유기적으로 조화된것들이다. 남패천을 대표로 하는 지주계급의 악착함을 죄다 무시하고 홍상천과 녀자주인공 吴琼花의 영웅적인 기상을 죄다 무시하고 시대적인 배경과 사회정치적인 배경을 죄다 무시하여도 <<홍색낭자군>>은 사실 바레무극의 경전이다. 말하자면 예술의 일맥인 형식미의 하나인 舞의 극치에 오른것이다.
내용을 떠난 형식미는 존재의 가능성을 잃게 될수도 있다. 적어도 발생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 그런데 왜서 수많은 예술품들은 와중에 내용과는 아주 상관이 없이 오똑하게 존재하여 인간령성의 눈부심을 앓고 또 인간들의 매혹을 독차지하게 되는것일가? 그 영문을 조금이라도 알고싶다.
工具理性이 주류의식으로 된 사회에서는 계급성이요 민족성이요 하는것들만이 울부짖어지고 나붓기여지여 價値理性은 가끔 수욕을 당한다. 그러면서 계급과 민족을 초월하여 공존하는 인간령성이라는것은 실리때문에 가짜예술이라는 평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구체적인 세부를 무시하면 어느 개인도 조직도 민족도 나라도 필경은 인간령성미에 대한 추구를 멈추지는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고려청자도 고려백자도 조선반도에서의 탄생과도 관련이 크지 않게 다만 인간령성의 걸작으로서 세인들의 찬탄을 받는다. 운동주시인의 시작들도 그가 중국조선족시인이든지 한국시인이든지와는 관련이 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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