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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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그 남자의 동굴
2009년 02월 17일 15시 08분  조회:1255  추천:44  작성자: 허련순

어디까지였던가요?

남자는 이야기를 시작할때마다  같은 질문을 하고있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 할가요? 비, 비이야기를 하셨잖아요. 아, 그래요. 느릿느릿한 말투에 같은 말의 반복, 그런것때문에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긴호흡의 인내가 필요하였다. 그날 비가 정말 억수로  쏟아졌지요. 왜 그리도 많이 내리던지, 내 생애에 처음으로 내린 큰 비였습니다… 그날의 비가 나를 통채로 삼켜버린셈이죠…그래요. 그때 이미 나는 그곳에서 죽은거죠...갑자기 남자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우욱-우욱, 금방이라도 토사물을 쏟아 내려는듯 몸을 비틀고 있었다.

왜요, 어디 아프신가요?

나의 다급한 물음에는 무관한듯, 그는 눈을 지긋이 감은채 목구멍 깊숙히 신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것같아  나는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청계천주위는 한가로웠다. 맑은 호수가 여유있게 흐르고 하얀 아카시아 꽃이 피여있었다. 멀지 않은곳에서 나이가 들어보이는 한 남자가 아카시아 나무사이사이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기계로  가지런히 깍아주고 있었다. 붕-하는 기계음이 울릴때마다 풀잎들이  튀여오르면서 떫은 풀냄새를 공중에 멍처럼 짙푸게 그려놓고 있었다. 풀냄새가  멍처럼 보였던 것은  아마, 그남자의 오른쪽 팔목에 문신처럼 나 있는 푸른 기미때문이였던것같다. 어릴적에 나의 왼쪽 다리에도 푸른 기미가 지도처럼 나있었다. 모욕을 시킬때마다 엄마는 그 자리에 비누칠을 두번씩을 하면서 . 이것은 엄마 마음의 멍이라는데 네가 하필이면 엄마 아픔을 가지고 나온단 말이여? 하고 푸념을 하군하였다. 그뒤부터 나는 내몸의 푸른멍을 볼때마다 자식의  몸에 새길만큼 아팠던 엄마 마음의 상처는 무엇이였을가? 하는 생각을 지울수없었다.


미안해요. 어디까지였던가요?

남자는 진통이 멎은듯  흐트러진 옷섶을 바로 잡고 있었다. 손을 움직일때마다 하얀 와이샤쯔속의 푸른 기미가 들어났다. 그것이 그 남자의 엄마가 그 남자에게 남겨준 상처인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그남자의 불행은 그 기미때문이였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운명은 육신을 닮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손금도 보고 관상도 보는것이고.

어디까지였던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 비이야기 라고 말할수있었지만 이제 그만 하기로 하였다.   더이상 비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벌써 나흘째다. 남자는 비에 대한 이야기만  시작하면 꼭 발작적인 통증을 호소하며 애기를  중단하군 하였다. 그렇게 힘든 얘기를 꼭 할 필요가 있을가. 보아하니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으면서도 남자는 꼭 할얘기가 있는듯 매일 나를 이 강역으로 이끌었다. 말하고 싶은것이 아니라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람같기도 하고 아니면 할얘기도 없으면서 시간만 끌자는 심사인것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남자가 나를 붙잡고 시간을 벌자고 늘어질만한 리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있는것 같지 않았다. 아마, 남은게 시간밖에 없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가 고심하는  남자일지는 모르지만   나의 립장은 달랐다. 한달 비자로 한국에 체류해 있는 처지라 그 남자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되도록이면 빨리 취재를 마치고 싶었다. 이쯤, 나는 이 남자에 대한 취재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형록음기를 빽에 넣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벌써부터 이 남자를 다시 만나지 말아야 할 구실을 찾고있던것인지도 모른다.

왜요? 가실려구요?

남자가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아무래도 무린것같아요.

제 얘기 안들어주실려구요?... 들어야 자서전을 쓰실수 있잖아요?

그렇지만 사실 며칠째 만났지만 나한테 해준 얘기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괜히 시간만 랑비하는것같단 생각이 들어요.

남자가 고개를 힘없이 가슴앞으로 깊게 떨어뜨리며 뭔가에 사로잡힌듯 혼자말처럼 나직히 말했다.

가지 마세요. 저와 함께 있어주면 안되겠어요?

덫에 걸린 새의 소리처럼  애처롭고 아프게 울렸다. 휠처어의 팔걸이에 올려진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있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그 옆에 서있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걸가? 날 붙잡고 도대체 뭘하자고 하는건가? 아니 아니지. 내가 도대체 이남자한테서 뭘 바라고 이러고 있는걸가? 이 남자한테 달라붙어 떠나지 못하고 있는건 바로 내가 아닌가.

 그날,

 나는 종로구에 있는 어느 직업소개소의 알선으로  마장동 초원 까페에서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그 남자를 만났다. 해빛이라곤 단 한번도 쪼인적이 없어보이는  창백하고  파리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테가 굵은 검정 안경을 끼고 있었다.

  소개소에서는 한 중년의 남자가 자서선을 써줄  사람을 찾는데 원고료를  2천만원을 지불할수있다는 얘기만 하였고 구체적인 계약같은건 만나서 당사자들끼리 하라고 하였다. 꼭 여자여야 된다는 부가 조건이 께림직했던건 사실이지만 나로서는  절대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중국에서 내가 받는 월급으로 계산하면 8년에 벌여야 하는 돈인데 내가 마다 할리가 없었다. 

  남자의 옆에는 남자보다 훨씬  덩지가 큰  여자가 앉아있었다. 어깨가 넓고 등짝이 넓기로 들판같았다. 나의 온 신경은 그 여자한테 가있었다. 출판 계약을 여러번 해보았지만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까다로웠다. 선입견인지는 모르지만 내경험으로는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쉽고 편안하였다. 그래서인지, 계약할떄 여자가 끼이면 괜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부인일가?

  남자하고 나이는 엇비슷한데 분위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염색을 많이 한듯 뿌엿고 뻣뻣한 머리카락을  앞이마에 산검불처럼 드리워 놓았는데도  넓은  이마를 채 가리지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여자로 잘못태여난 남자같았다. 남자같은 여자는 카페안 여기저기를 흘깃거리고있었다. 정신이 산만해보여서 그런지 남자의 자서전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말없이 검은 안경넘어로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감시카메라에 찍히고있었다는것을 알아챘을때와 같은 불쾌감이 내 마음을 흐트러 놓았다.  어색한 기분을  감추려고 나는  앞에 찻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면서 남자의 시선을 피하였다. 찻잔을 도로 탁자에 놓고 손수건으로 입가의 물기를 닦고 자세를 편안하게 고치면서 이젠 시선을 걷어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힐끗 쳐다보는데  남자는 여전히  내 얼굴만 쳐다보고있었다. 하르르 얼굴이 뜨거워졌다. 물론 자서전을 잘 쓸수있는 사람인지 가늠을 하는것이겠지만 대 놓고 빤히 쳐다보는데는 어딘가 모욕감이 들기도 했다.   어둑스레한 까페에서까지 벗지 않는 저 검은 색 안경 넘어의 남자의 눈은 무엇을 감추고 싶은걸가. 거만함이나 교활함이 아니면 엉큼함같은건 아닌지…

봉순씨.

남자가 갑자기 여자를  불렀다.  그 덩지가 큰 여자는 봉순인 모양이였다.

여자가   무표정하게 남자를 쳐다보고있었다.

봉순씬 갔다가 나중에 내가 전화를 다시 할테니 그때  와요.

  여자는 차라리 잘됐다는듯 홀가분하게 자리를 뜨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밀어 놓고 도망가는 사람처럼 걸음이 날아갈듯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굴가?

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자가 떠나고 나서 남자가 처음 한 말이다.

  녜?  나는  믿을수가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리가요.  아무리 검은 안경을 썼다 하지만 그 속에서 움직이는 남자의 눈은 상대의 눈빛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고 나는 믿었다. 보지못하는 사람이 어찌  상대의 표정에 그리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할수 있겠는가.

 사실입니다. 눈 뜬 소경이랍니다. 남자는 침울하게 웃고있었다. 빈틈없이 차가운 미소였다. 그것은 인생의 파멸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 흔히 갖는 자학적인 냉소인듯 치밀하게 단단하였다.

  아ᅳ 그래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듯한 느낌과 동시에 알수없는 안도나 쾌감이 가슴을 가르고 지나갔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에서  힘을 빼면서 나는 편안하게 물앉듯 내려앉았다. 앞을 보지 못한다니 차라리 잘되였다 싶기도했다. 그의 앞에서 내가 자유스러울거란 계산에서였다. 그런 심사를 알아차리기나 한듯 남자가 예민하게  내쪽에 고개를 돌렸다.  웬지 째려보고 있는것같이 날카로웠다. 그의 안경넘어의 눈은 보이지 않는곳에 설치되여 있는 감시카메라처럼 조심스럽고 거슬렸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보지 못하는 눈이 보는 눈을 마음놓고 쳐다보는데  보는 눈이 보지 못하는 눈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다니, 이게 어디 될말인가.  

손,

  계약서에 싸인을 하는 하얀 남자의 손은 창백했다. 손등에 튀여나온 파란 혈관이 마치 그의 소유에서  분리되고싶은 듯 아슬하게 돌출되여있었다. 그는 싸인볼펜을 나에게 넘겨주면서 살짝 나의 손을 스쳤다. 차갑고 딱딱한 느낌, 아픔에 절은  비릿내가 확 풍겨왔다. 앞이가 빠졌을때 그 헌전하고 비릿한 핏냄새와 비슷한 냄새라고나 할가. 남자는 계약서를 쓴것만으로도 힘든지 별로  말이 없었다. 다만, 약속을 꼭 지켜달라는 부탁만을 거듭했다. 그건 나도 부탁하고 싶었던 사항이여서 시름이 놓였다. 은근히 그가 2천만원 원고료를 준다는 약속을 지킬지 걱정하던 차였다. 떠나기전, 남자는 양복 포케트에 손을 넣더니 수표가 들어있는 하얀 봉투를 내 앞에 쓱 밀어놓았다.

  삼백만원입니다. 계약금으로 받으시고 자서전을 다 쓰시면 약속대로 나머지를 마저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정확하고 또박또박했다.

이외였다.

  이튿날, 남자는 나에게 어려운 제의를 하였다. 자서전이 완성되는  동안, 자기와 함께 있는것이 좋겠다고 했다. 가까이에 있으면 자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거고 시간을 충분히 리용할수있고 교통비나 주숙비를 절약하는 차원에서도 유용할것이라는것이  남자가 내세우는 리유였다. 일언지하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계약을 취소한다고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웠다. 2천만원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자서전을 써주고 기껏 만원을 받았는데 2천만원은 인민페 16만원에 해당하는 거액이니, 자존심 따위로 일을 그르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와 이런 방식으로 얽히는건 싫었다. 나는 그의 비유를 거슬리지 않으면서 거절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돈주고 거처를 얻어야 할거면 이왕이면 우리집에 빈방이 있는데 편리하지 않겠어요?

전 이미 거처를 정했습니다. 한국에 올때마다 그 한곳에서만 잡니다.

  아ᅳ 그래요.

남자는 말할때 아, 하는 감탄사를 자주 썼다.

근데 지금 사는데는 어딘데요?

그게 왜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엄청 관심이 있는 모양이였다.

제기동, 고려대학 근처입니다.

아ᅳ 그랬군요. 고려대  근처면 집세가 꽤 비쌀텐데요.

보증금 없이 32만원 월셉니다.

살긴 괜찮으십니까.

 작기는해도 주방도 있고 화장실도 딸리고  살만합니다.

아, 그래요?

안타까운듯 두손을 맞잡고 비비는 그의 손안에서 불에 대한 나무의 욕망처럼 마른 삭정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바스락거렸다.

다행히

내가 걱정했던것처럼 나의 기거문제로 자서전 계약이 무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취재를 위하여 매일아침,  첫날 만났던 마장동 까페에 나갔고  남자는 봉순이라는 여자가  휠처어에 태여가지고 오군하였다. 여자는 남자를 데려오고 데려가는 일만 하고 이야기에 끼이는 일은 없었다. 까페에서 차 한잔씩 마시고 얘기를 시작할가하면 남자는 기어이  강역을 거닐자고 한다. 한곳에 오래 앉아있는것이 불편한 모양이였다. 나는 걷고 남자는 휠처어를 타고 우리는 청계천 유보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바퀴가 어디에 걸리면 내가 휠처어를 밀기도 하였다. 그도 검은 안경을 끼고 나도 검은 안경을 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심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군했다. 어떤 이들은 지나간 다음에도 뒤돌아보군하였다.

그럴때마다 나는 휠차에서 조금씩 떨어져 걸었다.

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모르겠어요. 무슨 생각을 할가요?

다정한 부부라고 생각할거예요.

  기분이 좋은건 아니였지만 상관없었다. 남자가 자신에 대하여 되도록이면 많은 말을 해주면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것을 꺼리는 듯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날에는 별로 말 몇마디 얻어듣지 못하고 그냥 걷기만 하다가 돌아오기도 하였다. 차츰, 그가 왜 거금을 내고 자서전을 쓸려고 할가?  의문이 가기 시작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서전을 쓸만한 애기를 들려주는 일도 없으면서 도대체 왜 자서전을 쓰겠다고 사람을 불러들였는지. 실제로 자서전을 쓸 만큼 거창한 할말이 있는것 같지도 않았다. 며칠째 얻어 들은것은 총각때 사고를 당하고 두눈이 실명되고 하신도 마비되여 휠처어를 타지 않으면 걸을수 없다는것외에 아무것도 없다. 가족은 있는지, 그 남자같은 여자는 누군지, 그리고 자서전을 왜 쓸려고 하는지 그런것을 남자는 말해주지 않않다.  혹시 자서전을 핑계대고 여자를 만나고 싶은건 아닌지, 여자작가만 고집했다는  직업소개소원장의 말로 미루어 보면 전혀 그런 의미가 없다고 볼수도 없었다. 시간만 질질 끄는 남자의 의중은 아무래도 순수하지만은 않은듯 싶었다. 뭘가? 도대체 그것이 뭔지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나의 관심사는 원고료에 있을뿐이였다. 원고료를 위하여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서전을 완성하여야 했다.

며칠후,

. 어떻게 하면 남자와의 취재를 순리롭게 이끌어 낼가 고심하다가 나는 열가지 질문을 만들어가지고 남자를 만났다. 하나 하나 궁금한것들을 질문하면 남자는 어쩔수없이 대답할것이고 나는 의외의 소득을 얻게 될것이다. 마장동 청계천 하류을 한창 거닐다가 내가 준비해온 첫번째 질문을 물을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매번 그런식이였다.

요앞에 무궁화꽃이 피여있죠?

어디요?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무궁화꽃이 보이지 않았다.

조오 -앞에 있잖아요.

남자가 손짓하는  쪽을 자세히 보니, 빽빽히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그 속에  여린 분홍빛 무궁화꽃이 다소곳이 피여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보지 못하신다면서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 무궁화꽃이 피여있는줄을요?

 냄새를 맡는거지요. 여기 정자가 있을텐데 거기서 쉬다갑시다.

 바로 무궁화꽃이 피여있는곳에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둥군 버섯모양의 정자나무 밑에 벤치가 만들어져있었다. 내가 먼저 앉자 남자는 천천히 휠처어를  벤치곁으로 바짝 대여 놓았다.

그때 중년의 여자들이 하르르 웃으며 지나간다. 다들 가벼운 추리닝을 입은걸 보아서 운동하려 나온 모양이였다. 남자가 갑자기 자기 손을 나의 손위에 얹었다. 홀씨를 다털어낸 민들레 같이 부피가 느껴지지 않았다. 헐거웠다.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고 하자 도리여 꽉 잡는것이였다. 그의 손에는 거절하면 안될것같은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할말이 있어요.

남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지나가던 여자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우리쪽을 뒤돌아보았다.

이렇게 손을 잡지 않으면 말을 못할것 같아서요.

그는 자기 말이 타인에게 스며들지 않고 헛된 메아리로 자신한테로 되돌아 가는것이 두려운듯  더욱 으스러지게  손을 잡았다.

사실 제가 뭘 자서전이라도 쓸 인물이나 됩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설마 자서전을 안 쓴단 애기는 아니죠?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요 며칠 잘 생각해 봤는데,  자서전을 안 쓸랍니다.

야구공이 갑자기 날아와 가슴을 치고 가는 기분이들었다. 석연치 않은 게임이다 싶긴 했지만 이리도 어처구니 없이 깨여지리라는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발끈 했다.

그럼 계약서는 뭡니까? 저의 노력은 뭐가 되구요.

계약서의 약속은 지킬겁니다.

무순 소린지….

나는 바보처럼 손을 잡힌채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몸속에 등불이라도 켜진것처럼 남자의 얼굴은  빛이나고 있었다.

저 빛,

  남자 얼굴의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걸가? 얼굴에 빛을 담고서 남자는 모순된 말을 하고있었다. 계약서의 약속은 지킨다면서 자서전은 쓰지 않는거로하겠다고 한다. 그럼 자서전은 쓰지 않지만 원고료를 주겠다는 말인가.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한두푼도 아닌 2천만원을 그냥 준다는 얘기는 아닐것이다. 그럼 그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 되였다.

  자서전은 원래부터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거였어요.  나는 그가 괴변을 부린다고 생각되였다. 그럴거면 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한주도 넘게 끌고 다녔단 말인가. 이제 와서 그말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미안해요. 미안한데 암튼 전 자서전을 쓰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었어요.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갑자기 그의 그 검은안경을 벗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리고 얇지만 질긴 창호지 같은 그의 하얀 피부도 거칠게  찔러보고 싶었다. 그는 여전히 할 얘기가 많이 남은듯  진지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나는 그러는 남자가 어처구니 없었다.

이 손을 놓으시죠.

이 손을 놓으면 내가 말을 못할것같아서요.

 물이 가득한  세수대야의 물을 쏟히지 않을려고 꽉 잡고 있듯이  남자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놓기만 하면 곧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그 위태로움을 간신히 내 손에 의지하는듯 했다.

다 얘기 할게요. 이제 다 얘기 할수있을것같아요…

  이때, 가까운곳에서 희미한 비내음이 코끝을 축축하게 했다. 비가 올 모양입니다. 남자가 먼저 비 냄새를 알아차리고 서둘렀다. 그는 비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큰 비로 하여 사고를 냈던 반사적인 반응인모양이였다.  남자가 전화를 한지 십분도 안되여 남자같은 여자가 까만 승용차를 몰고왔다. 여자는  남자를 안아 차 뒤자석에 내리워놓고 휠처어는 접어서 차 뒤꽁무니에 실었다.  나는  여자의 옆 자석에 앉았다.  차가  마장동 지하철 역 부근까지 왔을때 비방울이 드드득 차체를 거세게 떄리기 시작했다.  누기진 비릿한 냄새가 차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남자를 처음에 보았을때 느꼈던 그 냄새와 비슷했다.  그러고보면 남자의 냄새는 비냄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아빠트 앞에서  차를 세우고 재빨리  차 뒷쪽에서 휠처를 내리웠다. 그리고 남자를 애기처럼 건뜩 들어서 휠처어에 태웠다. 가벼운 보따리를  옮기듯  여자는 힘들어보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 한 솜씨가 아니였다. 왜 남자가 덩지가 큰 여자를 곁에 두고있는지 알것같았다. 

내일은 좀 일찍 와줘요.

  여자가 떠나자 남자는 나에게 차 한잔 하자고 했다. 나는 잠간 망설이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자서전을 그만 둔다고 한 남자의 본의를 따져야  했기때문이다.    남자는 휠체어를 엘리베이터 가까이에 대고 9층단추를 누르면서 말했다.

전 혼자 삽니다.

그 여자는요?

봉순씨요?

예.

제가 외출할때마다 와서 도와주는 도우미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일층에서 9층까지 올라가는 승강기의 기계음을 들으며 나는 초조했다. 내가 보게 될 남자의 집은 어떨가? 남자가 사는 모습이 궁금해서가 아니였다. 처음에 남자를  만났을때  보지 말아야 될것을 보아버린것 같은 그런 불편하고 난감하던 상황에 다시 놓일가봐 겁났다.  남자가 사는 집은 이외였다.. 바닥에는 종이 장 한장도 널려있지않고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었다.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야지 함부로 놓으면 다음에 찾을수가 없다고 남자가 말했다.

  거실의 큰 유리문으로 끄느름한 뒤뜰이 내려다보였다. 빗줄기가 거세게 쏟아져 내리고 나무들이 쉼없이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남자는 실내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그는 휠처어를 타고  이방 저방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였다. 처음에는 무언가 찾고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괜히  두세번씩 갔던데 또가고 왔던데 또 오고 하는품이 그저 일 같지 않았다.

 어디 아프세요?

정서불안인건 같아요.

늘 그랬어요?

비만 오면.

뭘 도와드릴가요?

  남자가 잠간 망설이는듯 싶더니 정자나무아래서처럼 나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그의 손은 금방 물에서 건진듯  젖어 있었다. 미안해요… 이렇게 해야만 살것같아서요…. 정말 죄송해요.  그는 사시나무 떨듯 온 몸을 격렬하게 떨고 있었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많이 왔어요. 비로 가득찬 웅덩이에 하루밤동안 혼자 누워 있었는데 아무리 불러도 누구도 오지 않더군요…그 뒤로 전 늘 혼자였어요. 남자는 비오는날의 사고를 잊지 못했고 비만 오면 어김없이 발작을 일으키군하였다. 그는 혼자가 되는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남자는 매여 달리듯 두손으로 나의 손을 움켜 잡고 놓치 않았다. 깊은 굴속에 떨어지지 않을려고 잡은 동아줄인양 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더 안으로 옥죄여 들었다.

차츰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자의 증세도 가라앉았다. 왜 계약을 어길려고하느냐고 따질만한 상황은  아닌듯 싶었다. 차라리 이쯤해서 끝난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계약금으로 받은 3백만원만 되돌리면 아쉽지만 모든 일은 없었던일처럼 깨긋이 끝날것이다. 남자는  휠처어에 등을 깊게 오무리고  힘없이 까부러져 있었다. 잠이 든 모양이였다. 나는 거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끝으로  도장찍듯 살금살금 출입문쪽으로 가는데 휠처어가 움직이는 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왜요? 가실려구요? 남자의 목소리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처럼 처연하게 들려왔다.  너무 늦었어요. 지금 나가지 않으면 지하철을 놓치게 될것같아서…웬지 나는 죄를 짓고 도망가다 들킨 사람처럼 꺽꺽거렸다.  스스로 듣기에도  구차한 변명처럼 들렸다.  죄의식이라니? 이건 당치도 않은 일이였다. 분명히 그한테 내가 빚진건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 나는 그한테서 떠나는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있었다.  이미 지하철은 끈켰어요. 남자는  휠처에서 몸을 던지듯 철썩하고 땅바닥에 굴러내렸다.  제발, 가지말아주세요…혼자 있으면 죽을것 같아서요…그는 금방 톱으로 짤라낸  한토막의 나무처럼 내 앞에 엎드려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비에 젖은 토밥냄새가 풍기는듯 했다. 나는 눈을 감고 막연히 서있었다. 남자의 말에 놀란것은 아니였다. 앞에 놓인 현실이  안타까울뿐이였다. 이 남자와 함께 빨아 헹굴 어떤 끈적한 현실이 있는것도 아닌데 그를  외면하고 싶은 내  마음 저편에 벌써 또 하나의 다른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음에 놀라울뿐이였다. 이러다  남자의 시간에 애매하게 섞여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굴레에  함께 갇힐가봐 두려웠다.

  남자는 꼬리 짤린 도마뱀처럼 줄줄 기여서 나의 앞을 지나 출입문께로 가더니 나의 구두를  신발장안에 가지런히 놓고  문을 닫았다.

하얀,

  밤이였다. 남자의 빈방에서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멀뚝멀뚝 천장만 쳐다보고있었다. 어느 충집에서 비치는 불빛이 집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 아빠트는 내가 사고를 당한 대가로 받은 집이예요. 그러니깐 내 두다리와, 두 눈과 바꾼거지요. 남자의 그말만 아니였어도 편히  잠들수있었을지 모른다.  방안의 천장이며 창턱이며 옷장위이며  지어 누워있는 침대에까지 남자의 눈과 다리들이  돌아다니는것같아  종시 잠을 잘수가 없었다. 잡생각을 쫓으려고 백을 거꾸로 세고 무궁화꽃이 피였습니다를 백번도 넘게 외워보아도 소용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얗게 날을 새며 다섯시 반에 출발하는 새벽 첫 지하철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만 되면 소리없이 이곳을 빠져나갈것이다 생각하고있는데  맞은쪽 남자의 방에서 기척이 들렸다.  방문이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열렸다. 이어 옷섶이 살살 이끌리듯 조심스러운  휠처어 소리가 내 방 문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잔뜩 긴장되여 숨을 죽이고 문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찰칵, 도어가 비틀리는 쇠부치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이제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올것이다. 올것이 온것이다. 반토막의 나무 토막이 눈앞에 서있다. 엎드리지 않고 서있는 나무토막이 나의 침대가로 움찔움찔 움직여 오고있었다. 도대체 어쩔려고? ….그런데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남자가 도어를 비튼채 망설이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이윽히 아슬한 시간이 힘들게 지난후,  다시 찰칵하는 쇠소리의 마찰음이 날카롭게 들렸다. 그것은  비틀어졌던 도어가 다시 제자리에 놓이는 소리였다. 그리고 발끝으로 저며 디디듯 조심스러운 휠처의 움직임이  출입문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어 신발장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시간에 어디로 갈려고 그럴가? 출입문소리가 들리지 않는것으로 보아 밖으로 나가는건 같지 않았다.  주방쪽에서 그릇  부딫히는 소리가 자그만하게 들려왔다. 물소리가 나고 이어 가스불 켜는 소리도 들리고 얼마 안되여 물이 끓는 소리가 부지직 거리더니, 구수한 멸치국물냄새가 문틈으로 기여 들어 위를 자극했다. 자다말고 신발장은 왜 열어보았을가?  짙은 멸치국 냄새를 맡으며  나는 살풋이 잠이 들었다.

멸치

  국물은 시원하고 구수했다. 밤새 자지못해 가라앉았던 육신이 보시시 털고 일어나는듯  산뜻하고 갑삭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아침먹으라고 깨울때는 벌써 새벽지하철 시간은 이미 지난 뒤였다.

어떻게 끓였는데 이렇게 시원한가요? 비린내도 전혀 안나는군요?

밤새 어색했던 기분을 떨어버리려면 무슨 말이든 만들어야 했다. 나는 둘만의 공간에서의 침묵은 견딜수없었다.

멸치 국물은 손이 적게 가면 맛이 금새 달라지죠…. 적당히 끓이다가 비린내 땜에 멜치를 건져내야 해요…. 그 시간을 잘 맞추는것이 관건이죠.

 남자는 따뜻하게 웃고있었다.

 적당히라면 대개 얼마동안을 애기하시는거죠?

아, 저는 시간을 두고 애기한게 아닙니다… 국물이 울어나면서 풍기는 향을 맡아보고 맞추는거죠.

그는 보지 못하지만 냄새로 모든것을 보고있었다. 음식은 그렇다치고 상대의 마음속은 어떻게 꿰뚫어 보는지. 냄새를 맡는것도 아니고 눈치를 보는것도 아니고. 나는 그게 궁금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알아내죠?

아, 그건 가만히 앉아서 마주 보면 다 보입니다.

다 보인다구요?

예.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게 있지요..

나는 눈을 감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보이는데요.

하하하. 눈으로 볼려고 하지말고 마음으로 읽어야죠.

오래간만에 그가 소리내여 웃었다. 가슴을 적시는듯 그의 목소리는 물기가 있었다.

오늘 점심엔 제가 당귀와 감초를  듬뿍 넣고 백숙을 끓여 줄게요. 제가  너무 피곤하게 한것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있고…

그건….

거절하지 마세요.

남자가 단호하게 나의 말을 짤랐다. 나는 조금씩 그한테 끌려들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지난밤의  궁금증이 되살아나서 물었다.

어제 밤엔 자다 말고 왜 신발장문을 열어보았어요?

오, 그거요?  알고있었군요.

그는 쑥스럽게  웃으면서 휠체어를 움직여 싱크대로 갔다. 대답을 피하고 싶은 모양이였다. 그는 헛손질 하나 없이  정확히 수도 꼭지를 열고 흐르는 물에 빈 그릇을 씻었다. 그의 움직은  외워든것처럼 가지런하고 거침없었다.

제가 설거질을 할게요.

나는 그의 손에서 채 씻기지 않은 그릇을 가로채면서 다그쳤다.

말할수없는 리유라도 있나요?

아니요, 애기 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왜 대답하지 못하는가요?

사실, 자다가 문뜩 허작가님이 집으로 가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작가님 방문을 열고 확인을 하려다가 오해하실가봐 신발장의 신이 있나 확인 해 본겁니다.

아연함속에서 헤아리기 힘든 긴 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밤새 느꼈던 혐오감과 두려움이 부끄러워 참을수 없었다.

남자가

식사를 마치고 처음으로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나서 나에게 말했다.

작가님은 이 안경을 벗기고 싶었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보았죠. 전 몸으로 볼수있답니다.

몸으로 느낀다는 애긴것같았다.

벗기지 않아도 스스로 벗었습니다. 자, 보세요. 이것이 저의 원 모습입니다.

나는 잠깐 할말을 잊고 안경을 벗은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반듯하고 굵은 눈섭이 약간 꺼져들어간 듯한 그의 눈을 더욱 깊어보이게 하였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망울은  보이지 않았다. 아, 저도몰래 잇사이로 탄식이 흘러나갔다. 검은 안경속 뒤는 철저히 비여있었다. 빛도, 빛이 타다 남은 잿더미도 아무것도 없이 헐렁하게 비여있었다. 가을의 빈 들녘을 보는듯한 쓸쓸함이 해일처럼 마음을 쓸어뜨렸다. 어쩔수없이 보아버린 검은 안경속의 그 공허함과 허전함, 그것은 남자의 모습이 아닌 또 다른 하나의  타인처럼 낯설었다. 차라리  안경을  쓰는것이,  적어도 나한테는  남자의 원모습인듯 익숙했다.

안경을 쓰세요.

아니, 오늘은 안쓰고 싶습니다. 안경을 쓰지 않고 작가님과 애기 하고싶습니다.

 남자가 눈망울이 없는 눈을 숨뻑거렸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볼수 없었다. 마주 본다면 결례라도 되는듯이 말이다.

자서전을 쓰지 않으신다면서 무슨 할얘기가 있겠어요.

자서전과는 상관없이 작가님한테 꼭 드릴 말이 있어요.

나는 그의 말에 아무 의욕도 느끼지 못했다.  자서전과 상관없으면 어떤 얘기도 나한테는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하고싶다는 애기를 듣지 않을수도 없었다.

  비,

그날, 비만 오지 않았더라도 내가 지하철 공사장의 웅덩이속에 빠져들어갈리가 없었겠죠… 발밑이 유달히 미끄럽더군요. 조심해야지, 하는 순간에 내 발은 벌써 허공을 딛고 있었던 겁니다. 깊은 굴속으로 추락을 하면서 나는 쏴- 하는 차거운 바람 소리를 들었어요. 아니, 파도소리였던것 같기도해요. 누구는 그게 죽음의 소리였을거라고 하더군요.  깊고깊은 굴속으로 한정없이 빠져드는듯한 아득함, 그리고 육신이 부서지는듯한 자지러움과 아찔함, 그 굴속은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만큼이나 길고 어둡고 습하고 후줄근했어요….두려웠어요.  빛이란 사라질때, 그리도 야박하게 흔적도 없이 말끔히 자신의 존재를 거둬 가더군요. 절대적인 어둠, 이게 죽음이라는거구나….나는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지요…

    타인,

  또 하나의 타인이 나와 함께 굴속에 있었어요.  굴속에 떨어지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빛이라곤 없는 캄캄한 굴속에 누워 있더군요. 쏴쏴 거세게 쏟아지는  빗소리만 들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여기가 어딘가 싶어 손으로 주위를 더듬는데 바로 나의 코앞에  물큰 하고 손에 닿는것이 있어서 자세히 만져보니  사람의 다리더군요. 나말고도 또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굴속에 있구나 싶어서  얼마나 반갑고 위로가 되던지, 두려움이 조금 가시더군요. 네놈도 나만큼 재수없고 한심한 놈이구나 싶어서 그놈을 건드렸죠.  이보세요 정신차려요. 우리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이곳을 나가야 돼요. 안그러면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요…이보세요. 내말 안들려요?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그 사람은 꼼짝 하지 않더군요. 죽었나? 나는 그가 숨이 있나없나 확인을 할려고 머리 쪽을 더듭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상반신이 없더라구요. 금새 머리카락이 쭈빗일어서더라구요 상반신이 짤린 그사람의 하신이 나의 코앞에 있은거예요. 저는 그 사람의 하반신을 밀어내고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단 생각으로 입을 사려물고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어요. 그런데 내몸은 천근만근 되는듯 도무지 일으킬수 없었습니다. 윗몸은 조금씩 움직일수있는데 아래다리가 꼼짝도 안하군요.. 그래서 내  다리가 어떻게 되였나  위로부터 더듬으며 찾기 시작했는데 나의 다리가 바로  내가 붙잡고 흔들던 그 다리더군요.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다리가 바로 내 코앞에 접어져 있었어요.  허리가 부러지면서 상신과 하신이 접혀진거였어요. 하신은 이미 마비되여 감각이 없어진거죠. 그래서  타인인줄 착각 한거구요.  이미 몸 따로 다리 따로 두동강이된  나를 보고  나는 다시 까무러쳤지요. 얼마나 지났는지…깨여보니 굴밖에  작은 정구가 반짝반짝 하는게 희미하게 보이더군요. 내눈에는 그게 너무 울어서 벌겋게 피진 엄마의 눈처럼 보이더군요. 엄마, 엄마-나좀  살려주세요…그렇게 소리치며 나는 울었어요. 울다가 까물어치고 다시 깨여나고 그러기를 수십번이나 반복했지요. 차라리 정신을 놓고 있는것이 훨씬 편했던같아요. 깨여나면 뼈가 부러진 통증도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때문에 더 참을 수가 없더군요. 줄기차게 내리는 빗물이 굴속에 고여서 감각을 잃은 두다리는 이미 물속에 잠겨있었고 벽쪽에 기대여 있는 윗몸도 빗물속에 잠기는건 시간문제였죠. 굴밖에서는 사람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물총을 튕기면서 거칠게 지나가는 찻소리만 외롭게 들려오더군요. 찻소리가 들릴때마다 혼신을 다하여 소리 지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지만 차는 그냥 지나가더군요. 물론 들을수가 없었겠지요. 그때만큼 찻소리가 그렇게 야속하고 저주로울수가  없더군요...투닥투닥, 비는 그칠줄 모르고 빗물은 점점 고여서 턱밑을 넘어서 입속으로 흘러들기 시작했어요. 이제 얼마 안있으면  곧 익사체가 될 것인데 나는 빗물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내 나이가 생각나더군요. 열아흡을 갓 넘은  스므살, 가물거리는 의식속에서 나는  하르르  복사꽃이 피여나는  고향의 언덕에서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뒤,

  나의  삶은 공사장의  웅덩이속에 빛물처럼 고여 있었어요. 빗방울처럼  늘 혼자서 그 웅덩이 속에 갇혀서  빗소리만 나면 그 떄의 동굴속의 환각에서 허우적거렸죠. 육신이  끊임없이 굴속으로 빠져들어가 깊은 어둠속에 갇히는가하면  입속으로 코와 눈, 귀속으로 흙물이 흘러들어가는 숨막히는 환각에 빠지기도 하고  허리가 부러져서 두동강이 난 다리와 몸뚱이가 따로 걸어다니는 공포스런 환각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그뒤의 나의 삶을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고 재현을 시키더군요.  아마 그 고통이 두려워서, 그 처절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자서전을 생각했던같아요. 혹시 이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면 그 기억에서 벗어 날수 있을것 같았거든요. 나에게 자서전이란건 그런 의미였어요. 타인과의 대화방식 말입니다.

그런데

  왜 생각을 바꾸었어요? 아, 그건…남자는 잠깐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냐 잠깐  망설이는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원하는건  타인과의 대화가  아니라 오래 동안 가두어 두었던  내안의 나의 목소리를 끌어내고 싶어했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부끄러운 애기지만…작가님의 손을 통하여 내 안의 온기를 느꼈고 내가슴속의 두군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짜릿한 인간의 즐거움도 느끼게 된거죠. 잃어버렸던 내안의 내 모습을 찾게 된셈이죠. 이제부턴  아픈 기억의 동굴에서 벗어날수  있을것같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하늘냄새가 났다. 사람의 얼굴이 하늘처럼 맑아보일때 그의 얼굴에서 하늘냄새가 나는 법이다. 나는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남자는 자기의 과거를 나한테 들려줌으로서 자신의 동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의 동굴속에 다시 갇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아닌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어처구니 없게도 피식 웃어벼렸다. 바보같이 왜 그런 순간에 웃어버렸는지 나도 알수없었다. 남자도 따라 웃었다. 그러면서 나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언제 또 오실거예요?

  나는 당황했다. 또 온다고 약속한일도 없고 올일도 없는데 남자는  내가 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자신이   또 와야 하는 리유를 알지못했기에 나는 그가 왜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지는 더욱 알수없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이 희미한 웃음이 남자의 한생을 잘 견디게 할수도 있고 남자가 다시 자기의 동굴에 갇히게도 할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내가 집을 나올때 남자는 뒤에서 오래동안 지켜보고있었다. 나의 발자취를 듣고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떠나가는 나의 발자취를 들으면서 내가 다시 올것인지, 안 올것인지를 점치고 있었을것이다. 어느 쪽이든 남자는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하기를 나는 바랬다.


  비가 오려는지 멀리 동쪽하늘에 물기를 주체하지 못해 배가 부른  구름파편들이 낮게 떠 있었다. 지금부터 남자는 비에 대한 어두운 빛을 거두어 내는 어려운  작업을 시작할테지만 나는 비가 올때마다 그남자를 떠올리게 될것이고 그 남자가  갇혀살았던 동굴속에  한동안 갇혀 있게 될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그남자의  동굴에서  벗어나게 될것이이리라.                    

                                        2007. 5 .1.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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