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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적마
조원
지난 여름, 10년의 한국생활을 접고 그는 귀국했다. 짧지 않았던 소설창작의 슬럼프를 깨뜨릴 수 있을지의 고민을 여름의 무더위와 함께 안고서 그는 귀국했다.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했던 책들을 한짐 지고 한국을 떠났다. 더 들고 갈 수 없는 무게의 책들은 아쉬운 대로 나에게 택배 선물박스로 떨구고 그는 한국을 떠났다.
수고했다는 말, 고마웠다는 말, 소설을 써야 된다는 말.
작별을 하면서 그와 나는 닮을 수 밖에 없는 이 세마디의 말을 서로에게 힘차게 해주었다. 어쩌면 이 말들은 각자 스스로에게 던졌던 위안이였을지도, 다짐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그가 귀국 후 여러 대표 문학지마다에 짱짱한 소설로 화려하게 복귀하고 있다. 질주하는 말에 채찍을 날리며 질풍노도의 기세로.
때로는 서리 찬 가을 아침 돌연 몰려오는 안개로, 때로는 경쾌하고도 가벼운 리듬으로, 때로는 랭소를 잔뜩 물고 있다가 터져나오는 재채기로, 때로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듯이 그의 소설은 소설을 쓸 수 없었던 나날들을 향하여 아름다운 복수로 펼쳐진다. 그의 소설을 숨 죽여 읽어가면서 나는 한참 멍때리고 있다가 다시 읽었다. 읽는다는 것, 글을 읽으며 사람을 읽는다는 것은 괜히 기분 좋은 일이다. 글 읽기가 사람 읽기에 비하면 누워서 떡 먹기라 할 수 있겠지만 글을 읽으며 사람을 온전히 읽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전우씨, 멋져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속으로 조용히 응원을 보냈다.
소설가 김경화와 나, 우리 사이의 접점은 한국생활과 문학이였을 것이다. 한국생활과 문학, 이 두가지를 가지런히 자리에 앉히고 보니 닮은 데가 있음을 놀랍게 발견한다. 고단할듯하지만 해낼 수 있는 자기긍정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싫어도 해야만 하는, 지루할듯하지만 정작 몰입하면 즐거워지는… 이 두가지는 대체로 이런 류의 공동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억지만은 아닌, 확고한 속성을 느끼면서 그와 나는 전우이며 문우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사뭇 투쟁적이고 치렬한 전战과 짐짓 점잖고 우아한 문文, 전과 문은 상호대립으로 맞서면서 어울리지 않을듯 싶지만 막상 고리로 이어놓으면 의외의 에너지 방출을 하는 희열의 순간들이 있었다. 전과 문의 성씨하에 우友라는 이름으로 겹쳐지면서 그와 나는 돈독한 친구의 관계를 건설할 수 있었다. 싸우듯이 일하고 싸우듯이 책을 읽고 싸우듯이 웃고 싸우듯이 배려해주는 그런 관계로 말이다. 그래서 소설가 김경화의 작가평은 내가 써야만 한다는 고집이 설 수 있었다. 서로를 미화하고 찬송하는, 오가는 작가평이라는 밉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작가평의 인칭도 ‘그녀’가 아닌 ‘그’가 내게는 입말처럼 착착 붙어서 중성적 이미지인 ‘그’로 생략해버린다.
우리의 만남의 장소는 서로에 대한 배려로 평택과 대구의 어느 중간 지점의 낯선 도시의 기차역이였다. 늘 길 우에서 걷고 있는 두 사람에게 어울리는, 만나고 헤여지는 여러 곳의 역에서 다섯시간 이상을 초과하지 않는 짧은 려행이 가끔 시작되였다. 려행이라고 부를 만큼의 여유의 시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만남을 그는 문학기행이라든지 문학세미나라든지 이런 거창한 행사 이름을 불러들여 부르길 즐겼다. 시시해지고 싶지 않은 오기라 해도 좋고 자칫하면 멀어질 수 있는 문학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무튼 그를 따라서 어느덧 나도 허락되는 시간이 나면 문학기행을 자연스럽게 약속해보군 하였다. 한끼의 점심밥을 해결하는 면집과 국밥집, 떠날 시간을 기다리는 기차역 간이커피숍이 우리가 마주앉을 수 있는 시간이였으며 대체로 마냥 길을 걸으며 대화를 하였다. 맛집 찾아다니는 데는 고수인 나였지만 조금은 린색하다 싶을 정도로 격식을 갖추지 않는 그의 소박함에 불만은 불만 대로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를 받기 위한 소비는 하지 않겠다는 은근히 내비쳐지는 그의 주장을 공감하게 되는 자신을 보게 되였다.
3년간 6차의 문학기행이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제2차의 가을 문학기행과 제3차의 여름 문학기행에서 우리는 중국에서 출장차로 한국에 오신 문학선배님 두분을 각기 모시는 영광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선배님들이 원했든 안했든 그는 지극히 일상적인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문학의 옷을 입혀야 한다는 지론이 있었다. 허투루 식당에서 만나 밥 먹고 헤여지는 모임이길 거부했다. 그래서 리상고택과 빨간 책방 방문, 수원 화성과 벽화마을 탐방으로 정해졌다. 선배님들을 모시고 하는 모임이라 국내 문단에 목말라 있던 우리는 쉴새없이 선배님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분도 기분이려니와 술이 반가워서 이런 모임이 되면 그가 정해놓은 시간은 늘 초월되여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다음날 출근이 걱정되여 초조해하는 그의 마음을 엿보면서도 나는 블랙아웃이 될 때까지 선배님들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한번은 집으로 돌아온다는 게 대구 너머 밀양까지 가버렸다가 다시 대구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대구에 도착되여 티켓을 보고 나서야 나는 깜깜하게 끊어져있는 기억의 그 시간이 두려워졌다.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는 그 시간대에 대체 내가 뭔 짓을 했을지, 어떤 실수를 했을지 자괴감으로 불안해졌다. 나는 기계치여서 티켓자동판매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런데 티켓이 자동판매기에서 뽑아져나온 것이면 그가 해준 것임에 틀림없었다. 대구에 도착되는 기차시간에 맞추어서 그의 문안 메시지를 받고는 아무일도 없었음 하면서 네 도착 하고 뻔뻔스럽게 짧게 답해버렸다. 나로서는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으며 그도 굳이 그걸 들추어내지 않았다. 티켓 끊어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미스터리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와 함께 했던 문학기행은 힐링캠프에 다녀왔다고나 할가 뭐 그런 데가 있었다. 반복의 반복, 또 반복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생활은 때로는 무기력해질 수 있었지만 다행 긍적에너지 아이콘 김경화를 만나고 돌아오면 충전되였다. 한국생활을 낯설어했던 왕초보 시절에는 그는 선배답게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사내 식당 이모님들을 개여올려 빠삭한 누룽지 챙겨먹는 비법 같은 것을 말이다. 제6차 문학기행 때에는 2년 련속 다니는 직장의 최우수 사원으로 선정되여 포상금 두둑하게 받았다면서 그답지 못하게 럭셔리한 분위기 있는 일식집으로 나를 끌고 가 내가 좋아하는 술을 주문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성인이 장난감 사는 것,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비싼 밥을 먹거나 사치품을 사는 것, 월세를 내면서 해외려행을 가는 것, 누군가에게는 그런 행위들이 생명유지 장치라는 소비관념을 역설로 풀기도 하였다. 술만 들어가면 나는 오래동안 죽치고 앉아 제 말만 떠들어댔으며 대체로 그는 경청자의 역할을 분담하였다.
그는 소설을 생활처럼, 생활을 소설처럼 믿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황페하고 구석진 삶의 현장을 서럽고도 치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자칫 작가 개인의 삶이 그대로 녹아들어있지 않을가 하는 걱정되는 위태로운 마음으로 간혹 읽혀지기도 한다. 실화체 소설 <여름감기>(《도라지》 2011. 5기)는 그가 취재하고 다녔던 생활 그대로 펼쳐진다. “8년간 한국의 어느 식당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기본적인 인간대우는커녕 식당 사장의 폭행, 월급 한푼 받지 못하면서 현대판 노예생활(2011년 한국 KBS방송국에서 보도된 바 있음) ”을 한 흑룡강성 녕안시 와룡조선족향의 리영준씨의 불행을 동족으로서의 아픔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면서 부당한 대우에 분노하면서 사회에 호소하고저 소설화시켰으며 직접 중국대사관이랑 관련부문들을 두발로 뛰여다니며 인간적 존엄을 돌려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의로운 사람이였다. 페미니즘소설 <베거아리랑>에 등장되는 ‘춘자’의 고달픈 한국에서의 위장결혼생활, 이주로동자의 삶을 리얼하게 그려내는 소설 <일곱색갈 무지개> 등 소설들은 경험하지 않고는 써낼 수 없는 깊은 슬픔과 삶의 질곡들이 질펀하게 깔려있다. 그러면서도 줄곧 따라붙는 따뜻한 시선과 애정의 어루만짐, 종당에는 해피엔딩으로 갈 수 있길 바라는 희미한 희망들이 소설의 주선을 이루고 있다.
작년 가을의 어느 하루는 나에게 문득 법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지인이 없느냐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괜히 본인 아니면 친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나 싶어서 바로 전화를 넣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직장에 다니는 조선족 두분이 전세집 계약금을 사기당했단다. 십여년 한국에서 모아둔 재산의 전부에 해당되는 액수의 돈이였다. 듣고 보니 해결책이 거의 없어보이는 사기행각이였지만 함께 아파하는 그의 마음을 읽으면서 자기 내면으로만 집중하는 부끄러운 나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였다. 언젠가는 전세계약금 사기사건을 그는 소설로 녹여낼 거라고 감히 단정해보기도 한다.
소설가 박경리의 토지문학관 울안에 옹기종기 놓여져있는 장독들 앞에 쪼크리고 앉아있던 그, 안경알 너머 새까만 눈동자로 장독들과 눈을 맞추고 있던 그,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고향 청산리 하늘과 산을 닮았어요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알찬 씨를 이발처럼 앙다물어서 품고 있는, 유쾌하게 견고해보이는 석류 같은 모양으로 쪼크려 앉아있던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썩 후날에는 돈 벌어서 청산리에 김경화문학관을 설립하여 작가들의 창작기지를 만들 거예요 하던 롱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적마가 아닌 78년 생 말띠인 그가 결코 적마이길 고집하는 리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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