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 발표된 작품
나의카테고리 : 수필
과거를 재생하는 일
조원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언제든, 어디든, 무작정.
멀리로 갈 수 없으면 동네 골목을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새벽녘에도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골목골목의 어둠의 표정들을 읽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낯선 이웃들의 철제 대문의 문고리를 눈여겨보고 구석진 어두운 곳에서 두눈 밝히고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도 만날 수 있었다. 마주보고 서있는 담벽 벽면들이 서로에게 던져주는 그림자와 희끄무레한 빛, 가로등 불빛에 처연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감나무 가지의 까치밥으로 걸려있는 감 한알, 몽달이 되여 서있는 은행나무, 벽면에 길이 따로 있 듯이 타고 오르는 담쟁이풀들, 전선주에 부착된 ‘세방 있음’의 딱지와 얼기설기 늘어져있는 전기줄이 땅에 던져놓은 그림자들 등등. 비좁은 골목들은 시간의 통로처럼 은근한 비밀이 되여서 내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름답고 슬픈 긴 시간의 리듬으로. 그 시간의 통로들은 나를 과거로 소환해갔으며 기억을 불러들이군 하였다. 애써 호명하고 싶지 않은 찌질한 기억들과 소중해서 잃어서는 안될 듯한 기억들이 재생되여갔다. 아픈 기억은 물론 아름다운 기억에서도 슬픔이 묻어났다. 어떤 기억이든지 기억 자체는 어떤 애잔함을 품고 있었다. 과거를 재생시키는 골목의 표정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고집할 수 없었다. 골목이 던지는 메시지들을 온전히 온 가슴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니까 번복되는 일상에서 홀연히 탈출하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은 과거를 만나러 가는 길이였을지도 몰랐다.
멀리로 려행을 떠나기도 했다. 허락되는 시간이면 배낭 하나 챙겨서는 가볍게 떠날 수 있었다. 행선지가 계획된 것이 아니였던 것 만큼 려행의 목적도 투명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물체, 그러니까 시외뻐스와 기차, 택시와 선체 등의 물체에 맡겨진 내 몸의 흔들림은 수많은 기억들을 불러냈다. 차창으로 흘러지나는 사소하면서도 거대한 물체들은 무작정 나에게로 덮쳐들었다가 순식간에 스쳐지나면서 클로즈업으로 아니면 아득히 멀어져가는 소실점으로 연출해갔다. 때로는 바다와 가까와지면서 택시 차창으로 불어들어오는 바다바람의 비릿한 냄새를 맡으면서 눈가가 젖어들기도 했다. 몰려드는 저릿함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번지기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정체 모를 눈물이 있다는 것도 려행 과정에서 알게 되였다. 낯선 타지의 고만고만한 익숙한 풍물들을 폰카에 담았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피사체가 눈에 안겨드는 첫 느낌이 사라질가 얼른 위챗 모멘트에 올리는 부산함도 있었다. 기억으로 기록되길 바라는 기억이 있다는 것도 려행길에서 배울 수 있었다.
몸이 흔들리면 머리 속의 기억들은 서서히 살아났다. 대개 이동하는 차체 내에 있으면 여태껏 무책임하게 세상에 내여놓은 적지 않은 소설 속의 캐릭터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미안해지고 있었다. 부끄러워 눈을 감기도 했다. 조금 애정을 두고 시간을 할애하여 그이들을 보듬고 어루만져주었다면 좋았을걸 하면서 뒤통수를 만지기도 하였다. 지금 쯤이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가고, 설익은 상태에서 얼떨하게 풍진 세상으로 불려나와서 고난을 어떻게 이겨나갈가고 말도 안될 억지근심을 보태군 하였다. 더불어 지금 쯤 그이들을 다시 불러들여 더 풍성하게 해주고 싶다는 간절함이 스몄다. 설익은 캐릭터와 설익었던 나의 만남은 이미 지울 수 없는 비망록처럼 돌이킬 수 없었기에 두고두고 새김질할 수 있는 반성문으로 될 수 있다는 위안을 주문처럼 외우기도 하였다. 지금 진행 중인 소설 쓰기도 시간이 흘러서 썩 후날에는 아쉬움으로 남겠지만 지금보다는 덜 후회되고 덜 부끄럽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 이 소설도 이런 맥락으로 시작되였을 것이다. 소설 <나비야 나비야 모르포나비야>(《장백산》 2016. 4)를 쓰고 나서 나는 도무지 다른 소설을 쓸 수 없었다. 그 소설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설 속의 나분이와 강희경, 강희수, 강필두, 조순재, 왕얼과 쑈훙 그리고 연수와 연수의 안해 등등의 캐릭터들이 통근뻐스의 차창으로 문득문득 스쳐서 지나갔다. 차창으로 스러졌다 밝혀지는 고속도로 저편의 어둠 속 불빛처럼 때로는 생생하게, 때로는 희미하게, 잡힐 듯 말 듯이 스쳐서 지나갔다. 물론 소설 <나비야 나비야 모르포나비야>에서 모든 캐릭터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지만 소설 <블랙 블랙 블랙아웃>(《장백산》 2017. 1)과 소설 <잃어버린 순간들의 모자이크>(《도라지》 2017. 2)의 련작으로 이어지면서 차츰차츰 자신들의 이름과 성씨를 가지는 구체적인 인물들로 재탄생되였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련작소설을 작정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캐릭터들의 삶의 하중을 스케치하는 식으로 내쳐버린다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옛 소설의 캐릭터들처럼 나를 끊임없이 찾아올 것 같은 불안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내 실수의 빚을 보상받으려고 기억의 문을 시도 때도 없이 노크할 것이 두려워졌다. 내가 저질러버린 그이들의 삶의 심연까지 파고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죄의식(?), 캐릭터들을 세상으로 끌어냈으면 일말의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는 의무감(?)이 서서히 두려움을 밀어갔다. 소설 <나비야 나비야 모르포나비야>의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 고인 침묵의 소리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보려고 애썼으며 캐릭터들과 함께 해야 할듯한 하찮고 사소한 존재들의 어떤 기척이나 목소리의 억양, 망설임, 아쉬움, 형언할 수 없는 초조와 분노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캐릭터들을 조금씩 채워가게 되다 보니 이번의 중편소설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에까지 오게 되였다. 또한 “이미 두 소설을 쓴 저자가 아직도 나머지 여백을 채워갈 충동을 느끼고 있는지?”(소설 <블랙 블랙 블랙아웃>에 대한 리태복평론가의 평론에서) 무심한듯 툭 던져진 이 한구절은 소설을 이어쓸 수 있도록 이끌어준 다독임이였다. 하지만 소설들의 전체 색갈은 어두웠으며 아픔의 장거리 릴레이의 지속으로 이어졌다. 물컹물컹하고 축축하고 무가내하고 어쩌면 자포자기의 어쩔 수 없는 캐릭터들이였다. 련작을 써나가면서도 캐릭터들을 아프게 하는 기억의 정체와 그 기억의 근원이 대체 무엇이여야만 하는지 나를 괴롭혀왔다.
지난 여름 개봉된 영화 《군함도를 관람하고 나서 소설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을 쓰고 싶다는 강한 압박감을 받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군함도의 력사를 깊이 있게 알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군함도 관련 지식들을 검색하다가 현재 페허로 남아있는 군함도의 이미지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건축이 기억하고 있는 아픔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개인의 아픔은 궁극적으로 력사와 시대가 남겨놓은 잔여물이라고, 시대가 어쩔 수 없이 떨구고 간 그 아픔의 잔여물을 껴안고 인간은 삶의 하중을 속수무책으로 버텨나가야 한다고, 어쩌면 그런 아픔은 세월과 더불어 희석되겠지만 깨끗이 지울 수는 없다고 생각을 했다. 아픔을 덜 아프게 오늘을 살면서 래일의 삶에는 그런 아픔이 이어지지 말기를 바랐다. 소설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의 인물군상들이 겪는 아픔, 그것은 개개인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질투의 감정들로 야기된 모순과 갈등, 그로 인한 아픔의 지속일 뿐만 아니라 시대가 떨구고 간 아픔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한다고, 모두가 당신들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왜 아파야만 하는가 하는 캐릭터들이 꾸준하게 던졌던 질문을 안고서 자신의 글수준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꾹꾹 써내려갔다. 그저 아직 살아남은 자들의 행운을 빌면서. 어쨌든 삶은 살아지게 되여있으니까.
떠날 때가 되였다. 빛 밝은 또 다른 소설을 찾아 떠날 때가 되였다. 부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길 바란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