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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처럼 느껴지는 것(1)
조원
&
그 해 겨울의 밤은 추웠다.
강필두가 강림촌을 떠나던 1985년 겨울밤은 강림촌으로 왔던 20년 전인 1964년의 겨울밤보다 추웠다. 몸을 떨면서 이사 들었던 고장에서 강필두는 몸을 떨면서 떠났다. 겨울처럼 세상이 춥다고 느끼면서. 강필두가 잘살아보려던 욕망은 파멸되였다. 이루어진 욕망은 숨어있던 욕망을 드러내는 법, 하지만 강필두의 미완성된 욕망의 파멸은 숨겨둔 욕망마저 삼켜버렸다. 강필두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말년의 알콜성 치매로 오는 기억상실일 수도 있었다. 강필두가 죽은 곳은 30년을 살았지만 언젠가는 꼭 떠나야만 할 것만 같았던 D진의 료양원이였다.
강림촌에서 강필두는 10년 동란을 겪었다. 상종하기 싫었던 고향사람들을 등지고 처가마을 강림촌에서 익숙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우파모자를 쓰고 꿇고 앉았었다. 안해 조순재의 고향이였기에 강필두가 겪었던 수모보다 조순재의 모멸감이 진저리칠 정도였다. 자신이 겪고 있던 억울함과 수치, 분노와 고통의 무게가 역으로 고스란히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경계의 한끝으로 몰아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유죄감은 더 견딜 수 없었다. 1.5메터의 길이의 고깔모자의 추락을 막아내야 하는 인내, 증오로 휘갈긴 ‘반혁명 강필두’라는 먹물 붓글씨 우에 붉은 X의 부정표기가 덧대여진 가슴팍에 드리워진 패말, 패말 량단의 1키로그람의 쇠덩이 두개의 중력을 버텨야 하는 목덜미의 압박감 등등은 조순재에게로 향한 유죄의 대가로 역으로 생각하니 견딜 만도 하였다.
료양원 침대에 누워 죽어가면서 강필두는 시간의 흐름을 재고 있었다. 더딘 듯, 빠른 듯하였다. 아득한 저 끝의 어둠 속으로 밀려가는 시간은 살아온 생의 결들로 촘촘하게 엮여지면서 확실했다. 밀려간다 밀려간다 밀려간다∼ 그러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에 시간은 료양원 천정에 되돌아와서 고정되였다. 이러기를 반복하다가 강필두는 죽었다. 강필두의 죽은 몸에서 령혼은 한동안 머물러있었다. 령혼이 머물러있는 그 시간의 료양원 방은 강필두 홀로였기에 고요한 안식이였다. 령혼이 빠져나간 이튿날 아침, 료양원 원장님이 강필두를 안아 들어올릴 때 몸은 가벼웠다고 한다.
강희경은 아침 9시가 넘어서야 깨였다.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 3건이 떠있었다. 료양원 원장님의 전화였다. 긴급일듯 싶었다. 강희경은 침대에 걸터앉아 환자의 슬리퍼처럼 외로워보이는 자신의 실내화에 발을 끼워넣다가 원장님의 폰번호를 눌렀다.
“아버님 운명하셨습니다.”
원장님은 왜 전화불통이더라 뭐 이런 전주를 삭제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살아남은 자에게 어찌됐든 친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한 배려일듯 싶었다.
강희경은 잠간 언어기능을 상실한 채 침묵에 결박되였다. 혼자서 하는 침묵은 덜 외로울 수 있었지만 휴대전화를 사이두고 익숙하지 않은 상대와 함께 나누는 침묵은 견디기 어려웠다. 하물며 아버지의 죽음이 끼여있는 타인과의 침묵은 더 어려웠다. 강희경은 항공편을 알아보고 곧 출발하겠다고 답했다. 떠나면서 다시 련락드리겠다고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고 계십시오.”
강희경은 원장님께 인사를 끝내고 눈가로 번지는 눈물을 닦아냈다.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올 수 있는 휴대전화를 잡고 있던 오른손의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강필두는 강희경의 휴대전화로 련락하지 않았다. 치매증상이 거쳐가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강희경의 집으로 전화를 넣었다.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강필두는 휴대전화로 하라는 강희경의 구박에 ‘집에 없는 거 알고 전화했다.’고 일축해버렸다. 강희경이 기거하고 있는 공간에 울려퍼지는 전화벨 소리를 상상하며 강필두는 무슨 생각을 했을가?
강희경은 랭장고에서 랭수를 꺼내 목구멍으로 넘기다가 차오르는 슬픔으로 주저앉았다. 혼자 사는 집에서 한껏 통곡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강희경은 눈물을, 울분을, 슬픔을 삼키는 데 버릇되여 주저앉아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끼워넣고 들먹이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휴대전화를 다시 찾아들었다. 미국에 있는 강희수의 폰번호를 눌렀다. 강희수는 신호가 두번에서 세번으로 넘어갈 때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려온다는 신호였다. 강희경은 숨을 고르면서 긴 머리결에 손빗을 넣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강희경이 전화를 받자 강희수가 먼저 말했다.
“어, 희경아.”
언제고 강희수는 말이 짧았다.
“네. 돌아가셨대요.”
무심한 듯한 강희경의 역시 짧은 말은 더욱 비애가 섞여있었다.
“어∼”
강희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제 밤에 돌아가셨대요. 아버지가.”
강희경은 말과 말 사이에 끼여드는 적막이 싫어서 다시 말했다.
“그래, 편하게 가셨겠지?”
“아마도.”
“니가 고생이 많다.”
“못 오는 거지요? 안 오는 거지요? 오빠.”
“니가 알아서 해라. 희경. 굳이 찾아간대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겠지?”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오빠도 내려놓을 때 안됐어요?”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다.”
“알았어요.”
“근데 희경, 니 계좌번호 주라. 입금할게.”
“썩 후에 리자 쳐서 받을게요.”
“그러던지. 니만 고생이 많다.”
강희경은 강희수와 통화를 끝냈다.
“미안해요. 오빠.” 하고 말하고 싶었다. 미안이라는 말 한마디로 속죄할 수 있을 정도의 미안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준비도 안된 상대에게 하는 사과는 사과도 아니다, 사과를 받아준대서 자신이 저지른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속죄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이다. 강희경은 이렇게 믿어왔고 자신을 괴롭혀왔다.
강희경은 원래 다니던 려행사에 전화해서 오후 티켓을 끊었다. 보험회사에 전화를 넣었다. 급한 사정으로 보험회사 방문을 일주일 뒤로 재예약하였다. 전남편이였던 대춘이 교통사고로 사망된 뒤에야 강희경은 대춘이 생명보험을 해두었으며 그 수혜자는 ‘강희경’이라는 걸 알게 되였다. 보험회사에서 다녀가라는 전갈이 왔었다.
강희경이 D진 료양원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무렵이였다. 료양원의 손님접대실을 조촐한 장례식장으로 꾸며놓았다. 강필두의 시신은 기거하던 방에서 강희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장님과의 간단한 인사를 끝냈다. 원장님의 안내에 따라 강필두의 방으로 강희경은 들어섰다. 원장님은 조용히 문을 닫아주고 물러갔다.
강필두는 이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져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깊은 잠 속에 빠져든 사람 같았다. 침대 밑이며 방 어디에도 슬리퍼며 신발도 보이지 않았다. 강필두는 이젠 걷는 존재가 아니였다. 신발이 놓여져있지 않는, 침대에 누워있는 죽음의 쓸쓸한 적막을 강희경은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강필두는 모든 기억의 끈을 놓아버리고 죽기 전, 밀려가던 시간의 저 끝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강희경은 강필두의 가난과 고뇌에 빨려서 홀쪽해진, 굴곡이 심해진 량볼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그리고 입관되였다. 관뚜껑을 덮기 전 강희경은 나비머리핀을 강필두의 손에 쥐여주었다. 1985년 강림촌에서 강필두와 함께 야반도주하던 강희경의 손에 꼭 쥐여졌던 나비머리핀이였다.
강필두가 누워있는 관은 손님접대실의 벽면 쪽에 걸어놓은 영정사진 아래로 안치되였다. 료양원 동료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꺼벅꺼벅 졸다가 9시가 되기도 전에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갔다. 남은 사람은 강희경과 원장님 그리고 리태수였다. 한족인 원장님은 리태수와 강희경의 조선말 대화에 지장이 된다면서 먼저 자리를 떴다. 리태수할아버지가 그기 누기야, 그기 누기네 집 앞쪽, 그기 뒤집에 살던 뭐 이런 식으로 강희경에게 강림촌 어느 누군가를 소개하면서 강희경에게 자신의 신분을 확인시키기에 고심했지만 강희경으로서는 초하루날 장터에서도 본 적이 없는 듯한, 기억에 없는 할아버지에 불과했다.
“그기 말이다. 필두 이 량반, 강림에 처음 왔을 때 말이다. 어디서 이런 골방샌님이 있었나 했더랬더. 우리 아버지, 저세상 갈 사램이 아버지하니까 우끕지. 우리 아버지 강림촌 지서였더랬더. 일자무식인 아버지가. 동네 글 깨친 사램 거의 없었더랬더. 우리 집 고간으로 필두량반과 니 엄마가 이사 들었지 머야. 공사에서 내려오는 문건들은 다 필두량반이 번역하고 써주고 그랬더랬더. 지금 말로 하면 비서 노릇이겠지무. 그란데 필두량반은 고집이 와늘 질기지. 까놓고 말하믄 머리가 돌이란게야. 그기 말이다. 죽은 사램 두고 하는 말 아니깅 한데. 오리부업 망했기로 인사 한마디 없이 밤중에 강림에서 도망치다니. 모르지. 강림이 이 갈렸을지도. 우파투쟁도 강림, 아들 억울한 강간범 엎어쓴 것도 강림, 순재 자살한 데도 강림∼ 강림이 필두량반께 좋은 추억이 될 고장은 아님메.”
강희경은 강필두의 영정사진과 리태수를 번갈았다. 강필두가 건강이 퍽 좋기 전에 미리 영정사진을 준비해두었던듯 사진 속의 강필두는 사진 바깥을 선량한 눈빛으로 굽어보고 있었다. 강필두가 갇혀있는 관속과 사진 속의 바깥은 정숙했다.
“그기 말인데, 미친 세상이였더랬더. 그 때는. 미친 척함서 세상 살믄 될꺼정. 돌대가리 필두량반. 귀는 팔랭개비고 의욕은 하늘에 삿대질하고. 부자 된다꼬 오리부업은 쓰잘데기 없이 하고. 문화대혁명 때 혼난 거 봉창한다꼬. 돈, 돈, 돈. 세상이 좋아졌기로 골방샌님에게 돈따발 쏟아질리야.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니 귀신도 돈 좋아하는메. 넬 아침에 귀신돈 마이 불태워서 보내줄꺼정? 평생 써보지 못한 돈 다 태워줄꺼정?”
리태수의 푸념에 강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희경은 문득 전남편이였던 대춘의 말을 떠올렸다.
“남자들이 평생 동안 면도하는데 사용하는 시간은 3350시간!”
강희경은 강필두의 면도시간이 3350시간이 되였을가고 궁리했다. 남자들 평생의 나이 기준과 면도 차수가 모호한 시간 계산법이였지만 강필두의 면도시간은 평균치의 반에 반 정도나 될가고 강희경은 추정했다. 다행 입관이 될 때 강필두의 코 밑과 턱 밑은 면도가 되여 말끔했었다. 버리기 직전의 수세미 같은 귀털은 귀구멍을 덮은 채 제멋대로 피여있었다. 소음으로 시끄러운 세상을 무시해버리려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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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필두는 ‘파란 돼지의 해’인 을해乙亥년 1935년생의 돼지띠로 태여났다. 하지만 복돼지로는 될 수 없었다.
강필두가 조순재를 따라 처가마을 강림촌에 이사오게 된 것도 강필두의 도피라면 도피인 셈이다. 조순재와 혼약이 있게 된 것도 삶이 신산하다고 느껴지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였다.
강필두는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N진의 조선족소학교에 배치되였다. 딱히 규정된 과목이 없이 닥치는 대로 수업을 하게 되였지만 학교내의 미술수업을 주로 맡아했다. 소학교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전업화가로의 신분 상승을 위한 과도기라고 강필두는 믿고 있었다. 화가지망생이였던 강필두는 자신의 그림 못지 않게 미술수업에도 열성을 쏟았다. 열혈문화청년의 개성을 불태웠다. 그것이 화근이 되여 학생들에게 ‘불건전한 사상을 주입하는 교육자’라는 감투를 쓰고 학교에서 쫓겨나서 N진 술공장으로 전근발령이 되였다. 술공장의 단순로동자로 좌천되였다.
자신의 미래를 박력 있는 붓질로 장식하던 강필두에게 술공장의 벼겨찌꺼기를 퍼담는 삽자루는 치욕이였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암울한 현실에서 강필두가 가까이할 수 있었던 것은 술이였다. 강필두의 아버지는 강필두가 중등전문학교에 입학되던 해에 세상을 뜨면서 가세는 기울었으며 가장 노릇은 10세 이상인 형님 강필범이 형수님과 함께 이어갔기에 집으로 돌아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술에 빠져 세월을 허송하는 강필두가 딱해보였던지 함께 일하던 사람이 강필두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결혼이라며 녀자를 소개해주겠다고 나섰다. 술김에 맞선을 보겠다고 했던 호언이 있은 바로 이튿날, 조순재를 만났다.
조순재와 맞선을 보고 헤여지면서 한주 뒤의 일요일로 강필두와 조순재의 데이트는 약속되였다. 약속 전날 과음주와 더불어 신열로 강필두는 약속장소로 나가지 못했다. 강필두의 몸은 신열로 뜨거웠지만 바깥은 추웠다. 아무리 이불로 몸을 감싸도 오한으로 덜덜 떨렸다. 몸에 번진 땀들은 이불에 배여져 목덜미에 닿는 이불깃은 섬뜩했다. 이불 감싸기를 거듭하면서 외로워서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되풀이하다가 강필두는 혼미에 빠져들었다. 언뜻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간감각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싸늘하게 식은 이마에 닿아진 사람의 살을 느꼈다. 포근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병든 사람은 이마에 얹혀지는 손이 청결한지를 묻지 않으며 죽어가는 사람은 이마에 입맞춤해오는 입술이 살인자의 것이라도 상관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몸은 피페해지고 정신은 병들어버린 강필두는 조순재의 손에 이마를 맡겼다. 소요가 밀려간 영원이라는 시간을 떠올리며 그 시간 속에서 홀로 울고 싶었다. 홀로움, 강필두는 사람의 냄새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온몸에 박혀있던 가시가 물러지면서 강필두는 선량해지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 시각, 강필두는 이미 평범한 삶이 되여버린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저 하였다. 한 녀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삶을 선택했다. 삶이 걸어온 제안을 강필두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지만 의무처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조순재는 석재공장의 돌까기 림시공으로 강필두는 술공장의 로동자로 가정이라는, 주거를 기반으로 의식주 생활을 공유하는 생활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사회집단이 구성되였다. 하나의 집단은 또 다른 공간이 되기도 한다. 함께 하는 공간 속에서 함께 하는 시간은 구성원들의 인고와 정열을 필요로 한다. 림시거처로 마련된 술공장 창고를 개조한 숙소방, 구들 우의 이불 속에는 강필두의 전신에 찌든 술찌꺼기의 시큼한 발효냄새와 땀냄새가 진동했으며 조순재의 닳고 찢기고 터진 손바닥과 손등에 말라붙었던 피딱지가 굴러다녔다. 비루하고 고단하고 치졸한 삶의 밤은 언제나 일찍 시작되였다. 일에 지친, 곤궁한 두 얼굴은 지척에 있어도 서로를 분간할 수 없었다. 신문지를 깔고 구들목에 일제히 입을 벌리고 누운 신발들의 검은 비명은 강필두의 이 가는 소리와 조순재의 코골이 소리에 먹혀버렸다. 살판이 난 쥐들이 방방 날뛰고 다녔다. 하지만 어떤 마음은 새벽마다 강필두와 조순재를 달구었다. 서로의 알람이 되여가는 서로의 몸이였다. 강필두는 쇠처럼 단단해졌다. 조순재는 용광로처럼 불탔다. 용광로 속에서 쇠는 철물로 용해되였다. 철물은 또 하나의 주물로 주조되였다.
강필두는 내면으로부터 괴여오르는, N진에 남아있음으로 떠오르는 자신을 향한 혐오를 지울 수 없었다. 조순재가 임신 4개월 무렵, 강필두는 조순재를 설득하여 강림촌으로 이사가서 농사짓기로 하였다. 처가마을의 도움으로 아예 호적도 처가마을로 옮겼다. 땅을 두고 하늘을 바라며 사는 온전한 농민이 되자면 호적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강필두의 고집에서였다. 강필두의 학력증명서처럼 농민이 되는 데도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강필두는 확신하고 있었다. 강필두는 자신의 음주병이 술공장의 탓인듯 술공장을 멀리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리유도 만들어냈다.
처가집 일가친척들의 썰렁한 환영식이 있었다. 조순재는 가족을 배신하고 한 남자에게로 가버린 죄의식을 치르듯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닫아버렸다. 강필두의 유식을 애써 물리치려고 하는 무식한 말들은 조순재의 엉덩이에 바늘방석으로 깔려갔다. 농민들을 무식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강필두의 편견은 오히려 뻔히 드러나게 된 꼴이였다. 호랑이 장인어른의 대통이 당장 날려들 직전이였으며 일가친척들은 비난의 쓴웃음을 보냈다. 어떤 무리에 끼여드는 전제는 존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강필두는 나중에야 깨치게 되였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겨울의 어느 저녁 무렵, 강필두는 조순재와 더불어 강림촌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차거운 혀의 핥음을 받으며 오래도록 서있었다. 이영을 얹고 납작 엎드린 초가집들, 가가호호의 굴뚝에서 토하는 연기들은 대기 속에서 제멋대로 풀어지면서 그림자를 만들어갔다. 무질서하게 흩어지고 뭉쳐지는, 뭉쳐져서는 다시 흩어지는 연기 그림자들의 흔들림은 헐벗은 백양나무 가지 끝에 처연히 내려앉았다. 강필두와 조순재는 이사짐에 눌리우고 처진 자신들의 불확실한 그림자를 밟으며 강림촌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들의 그림자에는 무서워하는 표정이 있었다.
포도동.
포도동.
후두둑.
후두둑.
저녁새들의 날개짓 소리가 들려왔다.
1964년 겨울밤은 추웠다. 강림촌에서의 첫날 겨울밤은. 강필두의 겨울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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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재가 14세 때 조순재의 엄마는 조순재를 남편 몰래 중학교시험장으로 보냈다가 남편의 손아귀에 머리채가 잡혀서 마당을 다섯바퀴 질질 끌려다녔단다. 마당에 널려진 조순재 엄마의 머리카락에 놀라서 눈치머리 없던 3년 묵은 거위들도 구석으로 피해 달아나서 피신을 했단다. 거위들의 주둥이 량옆으로 뚫린 코구멍으로 단김이 새여나갔고 눈알은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돌아버렸다고 한다. 옆집의 바람기 많던 수캐도 꼬리를 뒤다리 사이로 바싹 끼워넣고 경사진 골목길을 에돌아 줄행랑을 하다가 굴러떨어져 돼지똥물에 처박혔다고 한다.
호랭이 령감탱이 그바람으로 날 쫓아온기라. 순재가스나, 거 서지 몬해. 자꾸 뛰믄 다리갱이 뿐질러놀끼다. 할딱대며 뛰다가 호랭이 고함에 난 서버렸어야. 다리갱이 뿌라지는 게 무서븐 게 아이라 힘이 읎었지라. 호랭이 손바닥에 목덜미 잡히갖꼬 공중에서 바둥거렸제라. 숨이 칵 맥히고 하늘이 노래지는 게라. 정신 채리고 봉께 땅바닥에 꼬꾸라져있는 게라. 짝짝 갈라터진 호랭이 발뒤꿈치가 눈앞에 있어야. 와 눈물도 안 나데. 너무 무세븐 게라. 니 할배 얼맹키로 무서밨다는고 허믄, 밤중에 참외 훔칠라꼬 갔다가 참외밭에 앉아있는 니 할배 보고 호랭이 봤담서 지 자리서 오줌 갈기겠노. 성대가 그 날부터 자다가 이불에 오줌 싸재끼는 병 들어버린 게라. 그라게 내가 까박 정신줄 나버린가베. 날 내뿌이라고 혔던 사램도 니 외할배였제. 세살 때 조선땅서 건너올 때 말이제. 리질에 걸려 빼빼 마르꼬 머리르 들도 몬허는 내르 니 외할무이 등에 업었제라. 내뿌이라꼬 허는 니 할배 말도 무셉지도 안혔다제. 조선땅 어디멘고 하니 깅상도 대구 어디라꼬는 혔는데 내뚜 몰라야. 조선땅서 머 혀싸서 먹고 살았는지 잘살았던가베. 기생집 가스나 자건거 뒤에 태워갖꼬 여보라 험서 일부러 니 할무이 집 앞을 지났대나. 머리는 기생오라버니맹키로 기름 처발르꼬. 휘파람 쐑쐑 불민서. 그란데 세상일 누꼬 알겠노? 난리 났지라. 일본놈허꼬 쏘련마우재는 와 남 마당서 쌈허고 지럴혔쌌켔노? 그 지럴 난리에 니 할배랑 할무이랑 지 마당 쑥대밭으로 된 거 버리꼬 여로 온기라. 그 난리 읎었음 지 땅서 살았제라. 다 남자들, 남자들 지랄발광혀서 그리된겨. 뭐신고 카믄 쌈은 서나들이 허는 거사. 호랭이 니 할배 말이제, 기집들은 사람취급도 안허능기라. 중학교 시험서 자꾸 떨어지는 니 큰 외삼촌 공부시킨다꼬 온데루 끌고 다닝 게라. 가스나들 공부시켜바야 남 좋은 노릇 시킨다 싸메. 열네살에 논밭에 끌레나가 여태 이 모냥 이꼴이제. 하따, 공부만 쪼까 혔었더래도 니 아부지 만나 이 고상 안허고 살낀데. 니 외할무이 사는 꼴 보고 천하 어느 머슴아도 믿지 않코롬 혔제. 평생 시집 안 간다꼬. 하따, 긴데 땅에 코 처박고 십년 다되게 일허다 본께 억울헌기라. 그 때 딱 니 아부지 나타났제. 중매군이 공인이라꼬 헌께, 먼 빙신이래도 공인이면 된다꼬 덜커덕 만나서 결혼혀뿌였제. 땅에서 도망갈라꼬 결국에는 남자에게 시집가뿌인거제. 림시공 일년이나 혔나, 도로 여로 온기라. 휴∼ 그 후에 문화대혁명 란리에. 목숨 퍼렇게 살아있는 사램 말은 안혀기로 허고. 그 때는 당장 칵 죽고 싶었제라. 희수르 포대기에 싸서 강가에 몇번이고 댕겼어라. 그 때 칵 죽어버맀으믄 니뚜 읎었겠제. 그란데 요상헌 건 말이제. 니 할배는 사흘이 멀다꼬 니 할무이 머리채 끌고 댕김서도 울 칠남매는 어이 맹글어냈노 몰라야. 사능 게 그라고 그렇제. 오늘 내 말투 어색혀? 그랴, 오놀엔 니 외할무이 보구잡아 그러능겨. 깅상도 할무이. 깅상도 사투리 흉내낼라카이 잘 안되능겨. 깅상도 할무이 저세상 돌아가실 때 머리카락이 몇올 읎었제. 빠져서 없는 머리 꽁지서 비녀 겨우 끼워줬제. 거기 가서라도 온전한 머리 있어야 할긴데. 잘러도 잘러도 쑥쑥 올라오는 정구지맹키로 머리가 돋았으먼 싶어라. 집서 깅상도말 하능 그대로 핵교강께 다들 놀리더랑께. 핵교느 12리 떨어진 N진에 있었제. 놀린다능게, 그기 뭐신고 카니, 여그느 북쪽치들이 많은기라. 니 아부지도 황해도 어디라카더마 내사 모르제. 남의 땅에 와서 니쪽 내쪽 어딪 간노? 니편 내편이 어디 갖노? 다같이 못난 편이제. 그라고 지금 해쌌는 말들은 잡탕이제. 쭝국말 썪어가 함시로 오가잡탕 되뿌있제. 초우!
엎어놓은 공기 만큼 튀여져나온 세살의 강희경의 뒤통수를 만지며 조순재는 푸념질을 반복했다. 강희경은 사납게 울어대던 성미를 접고 손가락을 입에 물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강희경은 빨라지는 호흡과 더불어 오르락하는 조순재의 쌍봉 젖가슴 사이에 튀통수를 부비대며 히히 웃기도 하였다. 조순재의 날숨과 들숨의 리듬에 맞춰서 강희경은 손가락 빠는 속도를 조절했다. 조순재는 말하는 와중에도 강희경의 목덜미를 어루쓸어주었다. 태줄이 감겨져있던 그 자리는 조순재를 아프게 했다. 늘 강희경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조순재는 태줄을 감고 태여난 아기가 불운하다는 항간의 소문 때문만은 아니였다. 모든 걸 다 엄마로서의 자신의 책임으로 몰아갔다. 아기가 배 속에서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리고 엄마인 자신의 말을 들으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태줄을 목에 감았으랴. 갓 태여난 강희경은 어린 늙은이의 모습이였다. 모순된 어린 살점의 표정을 읽으면서 조순재는 굳이 자살기도라는 엄청난 공포스런 말까지 떠올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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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필두는 비스듬히 언덕을 이룬 늪가 쪽의 풀밭에 누워있었다. 광활한 대지의 숨결들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늪 음지 쪽 수면에 떠돌던 녹다 만 얼음덩이들은 박새들의 지저귐에 성급하게 깨여져갔고 밭갈이 소들의 영각소리는 정월 대보름에 대접했던 찰떡처럼 찰지게 들려왔다. 아이들 겨울 불장난으로 새까맣게 타다 만, 먹붓처럼 오롯이 서있던 갈대들은 밑둥으로부터 푸른 기운을 뽑아올리고 있었다. 해동의 환희에 찬 자연의 평화와 수런거림은 강필두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강필두는 엉덩이 골 사이로 눅눅하게 번지는 대지의 숨결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대지는 아리고 맵고 쓰고 떫은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여러개의 보조개로 웃고 있는 감자, 은밀한 비밀로 겹싸인 양파, 쪽으로 나뉘여지면서 기어이 한몸인 마늘, 한사코 몸통을 자랑하려는 무우 등등을 품속으로 넉넉히 받아들인다. 강필두는 자신도 대지의 너그러운 품에 안길 수 있기를 바랐으며 온전한 대지의 사람이 될 거라고 다짐했다. 강필두의 청춘의 얼굴에 내려앉은 노곤한 봄볕을 바람이 어루만져주었다.
“어이, 강선생, 백일몽 강선생.”
강필두는 언덕 우에서 들려오는 중국말 소리에 몸을 일으켜앉으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언덕 우 버티고 서있는 둥글둥글한 사내는 왕얼이였다. 머리통, 다리통, 몸통, 어깨통, 팔통, 눈통. 어쨌든 왕얼의 몸의 각 부위마다의 이름 뒤에는 통이라는 어미가 붙여져야 근사할듯 싶었다. 우람된 체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도 웅글졌다.
“어이, 강선생, 리서기 볼 일이 있다고 합니다.”
왕얼이 재차 고아대고 있었다.
“알았습니다.”
강필두는 왕얼에게 어색하게 손을 저어보이면서 말했다.
리서기라면 리태수의 아버지였으며 강필두와 조순재가 곁방살이하는 집의 주인이기도 하였다. 리서기가 강필두를 ‘강선생님’이라며 깍듯이 올려붙여서 강림촌에서는 강선생으로 통하게 된 강필두였다. 일자무식인 리서기는 공사에서 내려오는 문건들이랑 있으면 강필두를 찾았고 번역일이며 가로수에랑 벽에랑 붙일 선전문구를 쓰는 일도 강필두에게 맡겼다. 강필두가 오기 전, 마을 회계와 출납을 겸한 왕얼이 리서기의 손발이 되여주었다. 왕얼의 고향은 산동성이였는데 퇴역군인의 신분으로 강림촌에 이사 들게 되였으며 퇴역군인의 배려정책으로 마을의 관직에 오르게 되였었다. 현성이나 공사에서의 회의 때면 언어소통이 원활치 못해서 애먹던 리서기는 왕얼을 앞세우고 다녔다. 강필두가 강림촌에 정착되면서 왕얼의 역할범위가 줄게 되였다.
강필두가 언덕에 거의 오르자 왕얼은 몸을 돌려 언덕길을 재촉했다. 거대한 산 하나가 강필두의 앞에서 움직여가고 있는 듯하였다. 한동안 말없이 터벅터벅 걷던 왕얼이 리서기의 총애를 받아서 좋겠다고, 농업기술원으로 발탁되여서 좋겠다고, 리서기의 비서 골방샌님 강필두씨가 좋겠다고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야유를 퍼부었다. 왕얼이 하는 중국말은 산동사투리의 억양이 남아있어서인지 뱉어내는 야유는 더욱 야유스럽게 들렸다. 이새로 찍찍 갈겨대는 왕얼의 침방울은 염소똥에 떨어져내렸다. 강필두는 입을 꾹 다물고 왕얼의 뒤를 따랐다. 강필두의 침묵은 왕얼의 숨소리를 더욱 거칠게 만들어갔다. 왕얼은 걷던 걸음을 탑하고 멈추었다. 강필두는 주춤하고 서버렸다. 왕얼은 다리를 엉거주춤 구부리고 두 손으로 두 무릎을 잡고 다리 사이로 얼굴을 거꾸로 내밀었다. 강필두도 몸의 자세를 낮추어 왕얼의 얼굴을 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 왕얼은 뿡빵 하고 다리 사이로 방귀를 냅다 뀌였다.
초우!
강필두의 욕설이 쏟아졌다. 왕얼은 돌아서서 히히 웃었다. 강필두는 자세를 고정하고 “자네의 방귀소리가 산동방언의 극치로세. 어우, 그 냄새 또한 고약하기로.” 하면서 코끝을 쥐여보이는 액션을 했다. 왕얼의 주먹이 강필두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방어도 없었던 강필두의 왜소한 몸은 퇴역군인의 분노의 한방 펀치에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져내렸다.
언덕 아래에서 볕쪼임을 즐기던 염소 한마리가 아코디언처럼 몸을 웅크린 강필두에게로 다가섰다. 염소의 흰 수염은 강필두의 얼굴을 감싼 손등을 간지럽혔다. 왕얼을 향한 염소의 항문에서는 환약 같은 똥덩어리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왔다. 따사로운 봄볕을 맞은 염소똥들은 흑진주마냥 까만 미소를 뱉어냈다. 염소똥덩어리들은 풀밭에 글자를 새겨갔다.
-인간들아, 제발 개처럼 물고 뜯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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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재는 부어오른 만월 같은 배를 왼손으로 밀어올리며 쌀독 앞에 섰다. 배속의 아기는 쌀독에서 쌀을 퍼담으려고 버티고 서기만 하면 꿈틀댔다. 왼손으로 아기의 꿈틀이로 도드라진 배의 부분을 어루만졌다. 조순재는 굳이 그것이 아기의 주먹일 거라고 추측했다. 밥을 먹기 위해 움켜쥔 아기의 손, 밥을 달라고 펼쳐낸 아기의 손을 생각했다. 식성이 좋은 남자애일 거라 단정했다. 조순재는 허리에 힘을 주고 바가지가 들려진 오른손을 쌀독에 넣었다. 엄마가 아버지 몰래 날라온 쌀과 오빠들의 어깨에 들려져온 강냉이쌀이 바가지에 담겨졌다. 조순재는 병풍처럼 둘러친 왕꽃무늬 카텐식 칸막이용 천에 둘러싸여 서있었다. 조촐한 단칸방이라 없는 살림을 여보라 하면서 다 펼쳐놓고 전시하기가 부끄러워서 부엌 구석 쪽으로 천으로 둘러서 만든 헛간이라는 공간이였다. 조순재는 카텐 당기듯 칸막이를 걷고 필요한 걸 꺼내면 될 일도 굳이 그 공간에 발을 들이고 칸막이를 다시 닫아서 그 속에서 쌀도 퍼내고 장도 퍼담았다. 빛이 어중간히 차단된 그 공간의 고요를 조순재는 즐겼다. 호랑이 아버지가 들고 온 쌀독에 강필두는 풀을 먹여서 낡은 신문지를 몇겹으로 바르고 말렸다. 신문지의 풀 점액이 완전 건조되기 전에 강필두는 숯불다리미로 정성껏 밀어서 쌀독의 둥근 배에 널려있는 쭈글쭈글한 주름살을 펴주었다. 쌀독의 몸이 매끌매끌해지면 거기에 화책을 찢고 오려서 붙였다. 왼쪽 어깨에 물동이를 얹고 잠옷인 듯한 옷가지는 흘러내려 배꼽이며 젖가슴을 드러낸 고아한 외국 녀성의 석고상 그림이 쌀독을 장식하였다. 그림 속 녀성의 수줍음과 싱싱함은 흰빛으로 눈부셨다. 강필두는 조순재의 불룩배를 만지면서 완성품을 조순재에게 내밀었다. 삶이 제아무리 고단해도 샘물을 길어올리는 녀성인 조순재가 곁을 지켜주기에 든든하다는 고백을 강필두는 보탰다. 결혼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되는 강필두의 진중함에 조순재는 부끄러움과 당혹을 넘어서서 온전한 한 녀인으로서의 열락을 느꼈다. 쌀독 선물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카텐식 칸막이 공간이 필요했으며 조순재는 그 공간에 머물기를 즐겼다. ‘야가 인자 나올 때 된 거 같우란데. ’조순재는 달처럼 부어오른 배를 내려다보며 혼자말로 중얼대며 칸막이 천을 드르륵 옆으로 밀었다.
“시간 다됐는데 안 나오고 뭐하십니까?”
낮은 출입문이 열리면서 사람 먼저 왕얼의 성난 목소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출입문을 들어서는 왕얼의 그림자는 집의 절반을 덮어버렸다.
“아. 네.”
조순재는 왕얼의 그림자에 눌리워서 메새의 간덩이처럼 팔딱 놀랐다. 손에 들려진 쌀바가지의 쌀을 이남박에 쏟아부으면서 칸막이 천을 황급히 닫았다.
왕얼의 황소눈통은 조순재의 어깨 너머로 드리워진 천막을 향하여 아득히 열려져갔다.
작열하는 여름 오후의 해볕은 조순재의 머리 우에 얹혀진 떡함지에서 번들거렸다. 조순재의 머리와 떡함지 사이에 짓눌린 똬리가 땀에 젖어들고 있었다. 조순재는 허리의 부담을 줄이려고 두 팔을 뒤짐자세를 하고 위태롭게 들길을 걸었다. 아슬아슬하게 공중에 떠있는 바줄을 걷고 있는 곡예단의 배우처럼. 조순재의 뒤에는 왕얼이 따라오고 있었다. 왕얼의 두툼한 어깨 우에는 저울이 걸쳐져 있었다. 저울판은 게으른 몸짓으로 왕얼의 등허리께로 흘러내려있었으며 왕얼의 젖꼭지를 가리지 못한 런닝그 앞섶에는 저울대가 쥐여진 손이 있었다. 다른 손의 중지에는 저울추가 반지인양 끼워져있고. 조순재와 왕얼의 1소대 일군들의 오후 새참의 배달길이였다. 농약을 뿌리는 적절시기를 놓쳐버려서 벼밭이 돌피밭이 되여간다고 1소대 전원이 돌피와의 전쟁에 나섰다. 따가운 해볕은 돌피의 왕성한 자람새를 부추겨주었으며 1소대 남녀로소는 총동원되여 밤늦게까지 돌피를 뽑기에 전력을 다했다. 긴긴 여름날의 해는 농민들의 귀가를 일부러 지연시키려고 작정했듯이 늑장을 부리며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조순재는 임신중이라는 특혜로 취사반에 배치되였다. 임신중의 임산부가 1소대에 여섯명이나 되였지만 대대 리서기와 1소대 대장인 호랑이 아버지의 덕분이였다.
일터에 거의 도착되여갈 무렵, 조순재는 두 팔을 올려 떡함지를 붙들고 심호흡을 하면서 서있었다. 이마를 타고 내리는 땀방울은 속눈섭까지 적셔서 눈앞이 흐릿했다. 현기증이 났다. 눈꺼풀을 덮었다 치떴다 하면서도 눈동자는 똬리 우에 얹혀진 떡함지의 밑바닥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행히 떡함지가 조금의 그늘을 만들어준다는 위안을 하면서 힘을 얻기로 하였다. 떡함지가 갑자기 붕 공중으로 떠올랐다. 조순재는 헐거워지는 몸의 상태가 감지되면서도 한사코 떡함지를 붙들려고 발뒤축을 올려 까치발을 만들었다. 장화를 잘라 만든 고무신에서 조순재의 발뒤꿈치가 들려져 올라왔다. 무릎 우까지 오는 검정 장화를 신은 남자의 다리가 조순재의 발뒤꿈치를 막아주었다. 조순재가 머리를 돌렸다. 떡함지를 두 손으로 받쳐서 들고 있는 강필두가 뒤에 서있었다. 임신살이 오른 조순재의 얼굴은 함박꽃으로 환하게 피여올랐다. 강필두는 함박꽃에 매달려있는 땀이슬을 안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도 그 물방울이 귀여워지면서 우산을 쓰고 땀이슬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왕얼이 강필두와 조순재를 스쳐지나며 휘파람을 불었다. 무섭게 일그러지는 강필두의 얼굴을 보면서 조순재는 강필두의 옷깃을 살며시 당겼다.
떡함지를 풀고 일군들에게 싸래기쌀로 만든 시루떡을 칼로 두부의 반 만큼의 크기로 잘라서는 저울판에 올렸다. 저울눈금을 밀고 당기면서, 떼여내고 보태면서 배식을 마치고 조순재는 일터로 흩어져가는 일군들의 뒤모습을 한숨으로 보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조순재는 배 아래 쪽으로부터 오는 통증을 느꼈다. 숨을 고르며 잠간 쉬는데 왕얼이 갈길을 재촉했다.
콰이! 콰이!
짐을 덜어버린 떡함지를 머리에 인 조순재의 움직임은 올 때보다 굼떴다. 돌아갈 때는 왕얼이 코치 노릇을 했다. 빈 떡함지에 저울을 마저 넣어버리고 뒤짐을 지고 왕얼이 앞장섰다. 왕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콰이 콰이만 노래처럼 불러대며 빠르게 걸었다. 10여분 쯤 걸었는데 왕얼의 뒤모습은 저 멀리로 멀어져갔으며 조순재의 복통은 기승을 부렸다. 조순재는 왕얼을 큰소리로 불렀다. 왕얼은 들리지 않는지 점점 그녀의 시야에서 소실점으로 되여갔다. 조순재의 다리 사이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조순재는 아아 하면서 길가에 쭈크리고 앉았다가 아예 뒹굴었다. 양수가 터지면서 배속의 아기가 좁은 문으로 나오려고 했다. 강필두가 달려왔다. “참소, 좀만 참소. 의사 부르러 가겠소.” 하고는 강필두는 마을 쪽으로 뛰여가려 했다. “안돼요. 가지 마요. 시간 없어요.” 조순재는 강필두의 발목을 잡았다. 강필두는 조순재가 시키는 대로 떡함지를 풀고 식칼을 찾아들고 성냥불로 식칼을 데웠다. 성냥불이 꺼지고 타오르기를 몇번을 반복하는 사이에 아기는 이미 머리를 비집고 나왔다. 귀가 빠지면서 미끌어지듯 물컹한 살덩이가 빠져나왔다. 강필두의 어떤 육욕의 충족과 어떤 결핍의 보상과 어떤 과잉의 배설과 어떤 억압의 분출로 무단출입도 서슴지 않았던 조순재의 좁고 축축한 문에서 생명의 기적이 탄생되는 순간을 강필두는 죽는 날까지 잊지 못했다. 강필두는 고개를 틀고 눈을 감고 아기의 배꼽과 조순재의 문을 이어놓은 끈을 식칼로 절단해버렸다. 조순재의 지시에 따라 미끌대는 양수가 덮인, 물컹물컹한 아기를 엎어서는 궁둥짝을 때렸다. 이윽고 아기는 아앙~ 하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으며 조순재는 다리를 벌린 채 여름하늘을 올려다보며 귀구멍이 먹먹할 정도로 귀 속으로 눈물을 채워갔다. 두세시간 푹 고운 백숙의 자세로 질벅한 양수와 비린 피 속에 누워있는 조순재를 내려다보면서 강필두는 강희수를 품에 안고 강희수처럼 앙앙 소리내여 울어버렸다. 강필두의 무릎이 꺾였다.
노을이 서녘 하늘을 피빛으로 물들였다. 저녁노을은 아침노을을 닮아있었다. 만나고 헤여지는 순간에 하는 안녕이라는 말처럼. 무언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어스름이 드는 이 불확실한 시간에 땅과 하늘의 그 경계를 강필두는 강희수를 누인 떡함지를 받쳐들고 걸었다. 조순재는 떡함지를 받쳐든 강필두의 손목을 잡고서 걸었다. 강필두와 조순재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걸었다. 강필두와 조순재의 얼굴 표정은 온화해졌다. 굉장한 일을 겪은 하루를 보내면서 두 사람은 너그러워졌다. 이런 불확실한 시간이면 서로의 얼굴은 더 잘 보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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