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
조원
불타는 금요일 밤을 보내고 나면 토요일은 한가롭고 여유롭다. 또한 일요일 밤은 우울해지고 월요일 아침은 늘 난데없이 찾아오는듯하고.
샐러리맨은 아니지만 요즘 나는 샐러리맨의 절박한 주일감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알람이 울린 후 30분이나 지나서야 잠에서 깨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를 챙겨서 나는 작업실이자 거주공간인 집을 나섰다.
바깥은 짙은 안개가 서려있었다. 얼굴은 없지만 수많은 손가락을 갖고 있는 가을바람이 안개의 립자들을 밀어가면서 세집 너머의 가시거리를 확보해주고 있었다. 가로수들의 록음은 여름이 남긴 자취로 여직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경계가 흐릿하면 사물을 살피려는 시선은 오히려 살아난다.
내가 몰고 다니는 낡은 찌프차 한대는 집앞 골목길에 세워져있다. 어디든 빈자리를 찾아 주차하기에 자리는 일정하지 않다. 매일 일이 끝나고 차에 실었던 자재와 공구함과 연장들을 지하창고로 옮겨둔다. 차에 두면 도적맞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하창고로 내려가 공구함과 연장들을 차에 실어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웅이네 전원주택의 다락방과 아래층의 거주공간을 이어주는 계단을 들이는 날이다. 그 뜻인즉 웅이네 다락방 증축공사가 마무리가 되여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직원도 없고 사무실도 없는 단독작업의 인테리어사업자인 나에게 주어진 다락방 증축공사는 대공사임에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나에 대한 신뢰와 나의 출중한 기술이라고 자부했지만 마무리가 되여가면서 왜 꼭 나였을가 하고 반문을 하게 된다. 요즘 부쩍 떠오르게 되는 생각이다.
2개월 전, 함께 공사현장을 다니다가 작은 규모의 건축회사에 취직한 장위에게서 전원주택의 다락방 증축공사건을 소개받았다. 위치와 사전 검측을 거친 뒤 설계도면, 작업기획서, 견적서를 제출한 결과 오다가 떨어졌던 것이다. 최소한의 인력 동원이라는 주인집의 특별조건을 장위가 알아내고 귀띔해주어서 ‘콘크리트기초공사 2명, 전기공사 1명, 난방및단열공사 2명, 배수공사 1명, 페인트공사 1명, 보조 1명과 본인. 총 9명 인력 동원’이라고 견적서 하단에 상세한 인력배정계획을 첨가했던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근간에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지인들의 인사말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어서 좋다. 불평을 늘여놓지 않아도 좋다. 그들이 인사처럼 물어오는 말에는 어떤 부정적 의도가 들어있지 않지만 내게는 수많은 생각과 느낌을 가져다주군 하였다. 이번 공사가 끝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을듯 싶기도 하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에 들어섰다. 웅크리고 앉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짐승이 기습하듯 안개무리들이 재빠르게 덮쳐왔다. 바다바람을 타고 차창으로 날려드는 안개에는 날이 서있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이 시려왔다. 도어를 올리려다 말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두손은 내 나이와는 물론 내가 하는 일과 잘 어울린다. 큰 상처는 없지만 여기저기 다친 자국이 남아있다. 하지만 손가락은 열개 모두 성하다. 그 손이 바로 나, 인테리어업자의 손이다. 피부는 거칠고 두껍지만 굳은살은 없다. 손이 단단하면 리력은 두툼할 것이다. 다만 복잡한 과거가 아니라 파도를 넘어온 력사.
어쨌든 나는 가장 단순하게 살기로 했으며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 손으로 바다마을 좌망 뿐만 아니라 시내 여러 공사장에서 한몫을 했다. 얼핏 어떤 건물들을 스쳐지날 때면 살아있는 존재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손을 댄 건물은 잊는 법이 없으니까.
웅이네 집은 시내에서 동쪽으로 40키로메터 떨어진 도시 외곽의 바다마을 좌망에 위치하였다. 웅이네와 나는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지만 좌망이라는 마을 자체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휘여진 해안을 따라서 주택들이 산비탈에 제멋대로 앉아있기에 걸어서 가기에는 불편한 거리였다.
웅이네 집 경사진 옆골목에 차를 세우고 공구함과 연장을 부리우고 있는데 웅이가 엄마와 함께 대문에서 마침 나서고 있었다. 녀인과 아이가 서있는 뒤쪽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안개가 걷혀져가면서 바다가 어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목청껏 기분 좋게 인사를 보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녀인은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어보였으며 웅이는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추스려 올리면서 “아저씨다, 엄마.” 하면서 환호에 가깝게 소리질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곧이어 웅이의 인사가 들려왔다.
나는 공구함과 연장을 들고 그들이 서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엄마, 오늘 유치원 가지 않으면 안돼요? 보고 싶어요. 신기하잖아요. 천정이 뚫리고 계단으로 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해요. 그 순간을 확인하고 싶단 말이예요.”
엄마에게서 웅이가 오늘의 공사일정을 들었던 모양이였다.
“유치원 가야 한다.”
녀인은 아이의 말을 짧게 끊었다.
웅이는 애써 애원을 가장한 교활한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나는 설핏 아이들의 어른스러움과 교활함은 어쩌면 어른들의 순탄치 않은 삶의 반영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였다.
“공사현장은 아이들이 함부로 들어서는 곳이 아니라고 몇번을 말했지. 어른들의 허락 없이는 한발작도 넘어서서는 안되는 금지구역이야. 오늘은 더욱 안돼. 위험해.”
나는 손의 들 것을 내려놓고 웅이의 뒤통수를 가볍게 다독이였다. 촉촉한 물기가 기분 좋게 손바닥에 닿았다.
녀인은 계단 제작의 하청업체가 열시 쯤에 도착할 것이며 오늘은 하루 집에 있을 것이며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올 것이라고 나에게 말하고는 아이를 데리고 옆골목에 주차된 차 쪽으로 옮겨갔다.
나는 웅이네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증축공사 계약서에 녀인은 공사중에서 류의해야 할 점을 세부적으로 명백하게 기재했었다. 작업시일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다락방의 공사는 완전 분리상태에서 진행, 다락방 진입은 뒤마당에 위치한 철제계단을 리용할 것, 다락방을 이어주는 계단은 작업완료 5일 전 장착, 주5일 근무에 작업시간은 아침 9시에서 오후 5시, 당일 발생되는 건축쓰레기는 당일로 처리할 것 등등의 작업규칙을.
나는 마당에서 집 출입문으로 향한 몽돌을 깔아놓은 좁은 길 따라 잔디밭을 지나고 화단을 에돌아 뒤마당의 철제계단 쪽으로 향했다.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외양의 흰색으로 매끈하게 페인트칠한 외벽을 따라 걸었다. 아주 오래전 파란 페인트칠을 했을 철제계단은 녹물로 번졌으며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떨어져나간 부위에는 녹쓸어있었다. 작업하는 사이에 오르내리면서 손길이 자주 닿았던 부위는 녹들이 밀려가고 더러는 철색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다소 가파른 계단을 타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유심히 계단을 보는 여유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다락방은 성인의 보통키 높이로 2인용 침대 세개 정도 들일 수 있는 공간이다. 앞마당을 향한 작고 낡은 창틀을 떼여내고 거의 벽면 전체를 통유리로 방의 채도를 넓혔으며 다락방에 서면 멀리 아래쪽으로 가물가물 바다가 보일 정도의 시야를 확보해주었다. 바닥은 쪽매널 대신 옅은 커피색의 원목마루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벽면은 오늘 계단이 들어서고 뒤마당으로 향한 문을 완전 봉합한 뒤 우유빛 벽지를 바르면 마루의 어두운 색상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좁은 공간이 확장되는 느낌이 날 것이다.
공구함에서 공구와 연장을 꺼내다 말고 나는 잠간 쉬기로 했다. 혼자 힘으로는 계단이 들어설 자리를 떼여낼 수도 없거니와 웅이네가 집으로 돌아와야만 작업을 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통풍구 창을 열어두고 창가에 앉았다. 눈을 뜬 채 들숨 한번 길게, 날숨 한번 길게 반복해서 쉬고 있으니 동공이 커다랗게 열려가면서 침침했던 눈은 다른 세상의 눈이 되여갔다.
마당 화단 곁, 똬리를 틀고 수도꼭지에 맞물려있는 호스.
담벼락 너머로부터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져있는 릉소화 몇송이의 잔해.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듯 대문 쪽으로 핸들을 틀고 있는 파란 어린이용 자전거와 빙하기의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건거 바구니에 꼬꾸라진 채 꼬리를 치켜든 공룡 장난감.
긴 밤의 외로움과 새벽 안개의 공포, 그 시간을 홀로가 아닌 셋이서 무난히 견뎌온 안도감으로 파라솔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진 둥근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와 쪽걸상 하나.
외출해서 밤새 귀가하지 않았는지 길 건너 이웃 울안의 빨래건조대에 걸쳐져있는 빨래들.
경사진 아래쪽으로 보이는 앞집의 지붕과 그 사이로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
내 시야로 들어오는 사물들은 낯설었다. 이 낯섬을 카메라 렌즈 속에 담으면 적격이겠다 싶었지만 바로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때로는 사물들의 적요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나는 낯설어지는 자신을 느껴가고 있었다. 증축 전 처음으로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들어섰을 때의 낯섬과 이질감과는 또 다른 낯섬이였다.
다락방에 널려있던 웅이네의 물건을 아래 마당으로 운반하던 날의 낯섬도 떠올랐다.
공사 시작과 함께 다락방의 물건들이 마당 주변에 흩어지면 집주인은 갑자기 바빠졌다. 내게 의미가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무의미하게 여겨졌던 물건들이 갑자기 의미를 지니기라도 하는 걸가.
타인의 어둡고 내밀한 구석을 파헤치고 들추어내던 서걱거리던 감정과 설핏설핏 호기심이 발동되는 충동은 혼잡스러웠다. 매사에 서늘한 구석이 있던 웅이네도 마당의 해빛 속으로 다락방의 물건들이 하나 둘 널려져가면서 거만함이 숨겨져있는 오기도 허물어져갔다. 어쩌면 오래동안 쓸모없이 적치되여있던 물건들처럼 그녀도 초라하게 오그라져가는듯하였다.
셀로판지를 두르고 붉은색 비닐끈으로 십자모양으로 포장된 케이스일듯한 물건을 계단에서 들고 내려오는 나에게 그녀가 덮치기라도 하듯 나꿔채가면서 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아귀에 잠간 잡혔던 그 순간은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그 순간 뿐인 것처럼.
코팅장갑이 끼여진 나의 손이였지만 그녀의 길쭉한 손가락의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함부로 타인의 손에서 나돌게 해서는 안되는 방어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이 떠오르면 자꾸 셀로판지에 포장되였던 그 물건의 정체에 내 사유의 흐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아마도 웨딩사진일 것이다 라는 추측에까지 몰고 갔다.
대문이 열리면서 코마루가 유난히 날이 선 곽명이 마당에 들어섰다. 내 눈앞에 펼쳐졌던 풍경들은 편린처럼 쪼개지면서 허공으로 날려갔으며 나는 다시 익숙한 나로 돌아왔다.
곽명은 작업시간 외에 사고를 몰고 다니는 사고뭉치였지만 협동작업 중에는 상대의 몸의 리듬을 온몸으로 흡수해들이는 센스 있는 나의 파트너였다.
다락방에 들어온 곽명은 마루에 앉아있는 나와 마주앉았다. 오후에는 타업체의 창틀 바꾸는 일감이 있으니 계단 들이기를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형님, 집주인 말인데… 여기 좌망으로 이사든 지 일년도 안된답니다.”
곽명이 은밀한 화두를 꺼내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의 눈섭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밀려오고 밀려가는듯 움찔했다.
“수상하단 말입니다. 떠도는 소문은 한두가지가 아니구요.”
곽명은 상대가 속이 간질거리게 하회를 기다리게 유도하는 짓거리로 말을 끝내고 잠간 입을 다물었다.
“소문이라는 건 그저 소문일 뿐. 우리 일군들은 집주인의 사생활과는 무관하게 할일만 하면 되는게 아닌가? 자, 일어서. 일이나 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나는 말했다.
“칫, 30대 중반의 녀자가 아이 하나 데리고 시내도 아닌 바다마을로 이사든다는 자체가 사연이 있단 말입니다.”
곽명이 나를 붙잡아앉히며 말을 이었다.
“그 녀자, 남편이 바다에 빠져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남편이 어느 고위층 관리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 가서 고위층 관리가 대가로 녀자에게 좌망에 전원주택을 사줬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생각해봐요. 30대 중반의 녀자가 무슨 실력으로 좌망에 전원주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곽명의 바다눈섭은 파고의 떨림이 더 격렬해졌다.
“유명인사의 부도덕한 성공에는 찬미를 보내면서 백성들의 하잘 것 없는 부도덕한 성공에는 도덕의 자대를 휘둘러서야 쓰겠냐? 조용히 하라.”
나의 랭소는 뜨거워지려고 하였다.
“형님, 형님의 그런 지적인 표정이 싫단 말입니다. 뭔가를 자꾸 생각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가짜라니까요.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하는 게 진짜란 말씀입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에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냐고.”
“상관이 없다고요? 맙시사 형님, 상관이 있고 없고는 천천히 들어주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한심한 건 고위층 관리가 이 집으로 드나든다는 소문도 있고 더 나아가서 고위층 관리가 탐오혐의로 조사받는 중인데 이 집이 압수당할지도 모른답니다.”
“너 성깔머리와는 별개로 드라마 꽤나 봐왔네. 공사일 그만두고 드라마 극본이나 쓰지 그러게.”
“아핫, 형님도 참. 그리 추측이 안된단 말입니까? 최소한 인력 투입도 사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란 말이구요. 고위층 관리와의 똥구린 내연관계를 은페하기 위해서는 형님이 필요하지 말입니다.”
“뜬금없이 거기에 내가 왜 들어가냐구.”
“잠간만, 이런 말 해도 될지는 몰라도 그 녀자… 형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도 있단 말입니다.”
“뭐야?”
내가 내지르는 소리에 곽명이 주춤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녀자 대형 인테리어업체들의 견적서 다 패스해버리고 형님에게 일 맡긴 자체부터 의도적이라는 추측도 나돌구요.”
“허참, 됐고. 나는 못 들은 걸로 한다.”
나는 다시 일어서면서 마당 쪽을 내려보았다.
웅이네가 들어서고 있었다.
“자, 서두르자.”
나는 곽명을 재촉했다.
곽명과 나는 라지오를 틀어놓고 일하면서 가끔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흥겹게 몸을 흔들기도 했지만 오늘은 방금 전의 대화로 서로의 눈치가 겉돌기만 하고 손발이 엇나갔다. 게다가 아래층에 있을 웅이네가 괜히 신경쓰이였다. 다행 계단이 들어설 자리를 이미 먼저 사각으로 구멍을 내고 덮개식으로 막았던 것이여서 얼마 품을 들이지 않고 우리는 들어낼 수 있었다.
진공청소기로 다락방 구멍 주변을 청소하고 아래층 거실에 떨어진 먼지와 부스레기들도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아래층 청소를 곽명은 고약하게 나에게 떠밀어버렸다. 그리고는 짐짓 도와줄 것이라도 있는듯 다락방의 바닥에 엎드려 사각 구멍에 머리를 내밀고 짙은 파도눈섭을 움쭉대면서 아래층의 동향을 살폈다. 웅이네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든 벌어지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눈빛은 간절한 기다림으로 번뜩이였다. 하지만 웅이네는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래층에 들어섰을 때 나는 잠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족사진은 물론 내가 단정짓던 웨딩사진, 하다못해 촌스러운 유화를 담은 케이스 따위는 벽의 어디에도 걸려있지 않았다.
오늘은 두번째로 웅이네 살고 있는 공간에 들어선 것이다. 공사가 시작되여 며칠 후, 계단이 들어설 자리에 구멍을 내던 날을 제외하고는 다락방공사는 완전 분리상태에서 진행이 되였으며 그녀도 일절 다락방으로 올라오지 않아 그녀와는 스치는 일 따위 없었다. 아주 드물게 정원의 파라솔 아래에 등을 지고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다락방에서 볼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집에 사람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틀어놓았던 라지오의 볼륨을 낮추었다. 내가 흥얼거렸던 노래소리를 그녀가 들었다고 생각을 하니 심히 부끄러웠다.
열시 정각에 계단하청업체에서 도착, 두시간 남짓 시간을 들여서 계단이 장착되였다. 그 사이에 나와 곽명은 다락방 뒤마당으로 향한 문을 벽돌로 막았다. 그러니까 다락방과 아래층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졌으며 다락방으로 올라서려면 아래층을 거쳐야만 했다. 계단하청업체 일군들이 물러나고 나와 곽명도 점심식사하러 나서려고 정원 쪽의 수도꼭지를 틀고 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손을 씻을 무렵 그녀가 정원으로 나왔다.
그녀는 엷은 미색 코드로 치마를 입었을 몸을 가린 차림새였다. 덕분에 슬리퍼가 신겨진 맨발과 종아리가 오히려 시선 집중을 강요하는 꼴이였다. 간단한 점심을 준비했다면서 파라솔 아래 탁자 우에 토스트와 빈 유리컵 두개와 우유팩, 커피 두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더 꺼내서 자리를 만들어주고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웅이네 집의 창문을 등지고 앉아 양고기즈란토스트를 먹고 앉아있던 나는 야릇한 웃음을 입꼬리에 달고 토스트를 베여먹으며 이따금씩 내 어깨 너머로 집안 쪽을 힐끔대는 곽명을 의식하고 있었다. 파라솔 아래 음지 쪽에 앉아있는 나였지만 목덜미가 뻣뻣해지면서 뒤통수가 후끈거렸다. 점심식사를 후닥닥 끝내고 곽명은 서둘러 떠났고 나는 오후 작업을 계속해야 했으므로 쟁반에 빈 그릇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부엌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잠간 멈추어섰을 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부엌이 그쪽에 있었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거실에서 은근히 부유하는 아로마향을 맡으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바닥에는 부엌 미닫이문의 마름무꼴 무늬의 뚜렷한 그림자가 누워있었다. 그 그림자를 밟으며 부엌문 쪽으로 가까워졌을 때, 짧은 실크 잠옷 치마자락에 감싸여진, 동그랗게 말려진 녀인의 엉덩이를 나는 보고 말았다.
앞쪽으로 허리가 굽혀진 채 파여진 엉덩이골의 륜곽까지 드러난 엉덩이는 찰랑찰랑 물결이 번지듯 좌우로 일렁이고 있었다. 내 눈길은 보라색 슬리퍼 사이로 꽃처럼 피여난 녀인의 발꿈치에서 하얀 종아리를 훑고 지나 탄력 있는 허벅지 우쪽으로 거침없이 기여올라갔다. 종당에는 살랑대는 실크 잠옷 치마자락 밑에서 숨쉬고 있는 팬티의 오목부분에서 멈추어버렸다.
황급히 돌아서려는 찰나, 녀인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녀인의 손에 들려있는 매니큐어붓은 빨간 혀끝처럼 보였다. 녀인은 그 자세로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던 것이다.
녀인은 나를 등지고 선 채 고개만 내 쪽으로 틀었다. 녀인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정오의 해빛이 사정없이 부엌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녀인이 허리를 한껏 펴면서 가슴 쪽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를 어깨 뒤쪽으로 넘겼다. 훤히 드러난 오른쪽 어깨, 겨드랑이 사이의 접혀진 살, 쇄골의 굴곡과 실크 잠옷 속에서 갑자기 놀라서 튕겨올라온듯한 노브래지어의 젖가슴은 강렬한 해빛 아래에서 오히려 헛것처럼 보였다. 녀인의 몸에서 피여오르는 냄새는 아득하기만 하였다.
금방 잠에서 깨여나기라도 하듯 가늘게 치켜뜬 녀인의 눈과 나는 마주쳤다.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행위를 감추려고 숨을 잠간 멈추었던 것이 오히려 나의 머리 속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나는 머뭇대다가 재빠르게 쟁반을 녀인에게 내밀었다. 녀인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쟁반을 받았고 나는 휘청대며 계단을 밟고 성급히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공간이라는 개념은 때로는 특이하다. 출입문만 닫으면 다락방은 독립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계단으로 이어졌다는 의미 하나로 다락방은 더 이상의 홀로가 아닌, 거실공간에 존속되여있는 부가공간으로 된듯 싶었다.
다락방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아래층 녀인의 시간을 함께 나누어쓰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일을 하면서 나는 자꾸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녀인의 발자국 소리를 환청으로 듣고 있었다. 쟁반을 받으면서 던졌던 녀인의 그 웃음, 차라리 위선남에게 일격을 가하는 모욕의 화살이였다면 속이 편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 웃음의 정체를 되새겨보면서 고양이처럼 달랑 의자에 올라앉아 엄지발톱에 톡톡 매니큐어를 바르는 녀인의 모습이 언뜻언뜻 떠올라서 진저리쳐질 정도였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혼이 빠져나간 몸은 무기력하였다. 마루에 주저앉아 멍청히 있다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네시가 되여가고 있었다. 도무지 손에 일이 잡히지 않던 터라 오늘 일은 이대로 마감하려고 공구들과 연장들을 정리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주인집 녀자의 폰번호가 액정에 떠있었다. 아주 잠간 망설이다가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말하는 쪽은 녀인이였으며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듣고 있는 쪽은 나였다. 불과 일분도 안되는 전화 속 녀인의 말을 듣고 있는 사이에 내 머리 속은 휙휙 거센 바람이 무질서하게 휘몰아치는듯하였다. 어떤 불미스러운 일에 서서히 발을 내디뎌간다는 불안, 그 불안 속으로는 기필코 빨려들지 않겠다는 다짐, 그러면서도 떨쳐낼 수 없는 유혹에 기댄 사소한 희망이 그 다짐을 쓸어갔다가 다시 밀려오면서 혼란스러웠다.
녀인은 언제 집을 나가고 없었다. 시내로 나갔다가 웅이의 하교시간을 맞추어 돌아온다는 게 교통체증으로 제시간에 웅이를 마중할 수 없는 사태이니 웅이를 집에 데려다줄 수 없겠냐는 간곡한 부탁이였다.
결국에는 그녀의 부탁을 수락하고 말았다. 어차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음에랴. 때로 선택은 머리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입이 먼저 주도권을 잡게 되며 머리가 뒤따라 나와서 선택의 당위성을 강조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한가 보다.
유치원을 향해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이미 후회를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무가내에 체념하는 낯선 자신을 다시 느껴갔다.
웅이를 유치원에서 마중해서 차에 태웠다.
“아저씨, 계단 들어섰어요?”
웅이가 옆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면서 물었다. 엄마는? 하는 질문도 없었다. 가방을 무릎에 올려둔 채로.
“응. 그래. 집에 가면 올라가볼 수 있을 거야. 계단을 타고 다락방을.”
나는 웅이 쪽으로 허리를 굽혀 안전벨트를 점검하였다. 웅이 몸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오늘 바다로 나갔댔어?”
고요한 저녁나절의 바다가 길을 따라 운전하면서 나는 웅이에게 물었다.
“어, 신기하다. 어찌 알아요? 아저씨. 오늘 생활체험 수업이 있었거든요. 바다가 쓰레기 수거 수업.”
“아저씨 코는 개코다. 생선냄새에는 환장하거든.”
“아, 그거요…” 하면서 웅이는 말을 흐리면서 옷깃을 당겨 코끝으로 냄새를 맡았다.
무릎에 놓여진 가방을 다시 한번 품에 꼭 안는 웅이의 곁모습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웅이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웅이 쪽 차창 밖으로는 듬성듬성 앉은 주택들과 산비탈이 뒤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나와 웅이 사이에는 서걱거리는 침묵이 갑자기 끼여들었다. 내 쪽의 차창 밖으로는 썰물이 밀려가면서 시꺼먼 개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워져가는 바다가는 허무한 시간의 파편들이 널려있는듯하였다.
바다가 대로변에서 웅이네 집 쪽으로 올라가는 올리막길로 차의 방향을 틀려는 무렵이였다.
“아저씨, 함께 바다 구경하고 집에 가면 안돼요?”
웅이가 가방을 꼭 그러안고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나는 차를 언덕길 옆에 주차시키고 내렸다. 뒤따라 웅이가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꽤나 무거워보였다. 내가 들어준대도 품에 꼭 안고 내 뒤를 따라 길 건너 바다가의 몽돌밭까지 따라왔다.
우리는 나란히 몽돌밭에 앉았다. 한낮의 따가운 해볕에 달구어졌던 몽돌은 온기가 여직 남아있었다. 가까운 포구 쪽에는 난파어선 한척이 거뭇거뭇해져가는 어스름 속에서 힘 빠져가는 마지막 몸부림인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갈매기들의 무질서한 비행은 노을을 준비하며 높아져가는 하늘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저씨, 비밀이 생겼다는 건 근심이 생겼다는 말이겠지요?”
웅이가 두팔로 무릎을 감싸고 머리를 떨구고 나직이 물어왔다.
“근심이 생겼다는 건 어른이 되여간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나는 웅이의 조그만한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혹시 가족이야기? 하면서 나는 다소 긴장해졌다.
어른들은 말이죠. 의심하면서도 믿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아요.
오른쪽 볼을 무릎에 대고 나른해진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리면서 웅이가 말했다.
“어른들이라고 무조건 그런 건 아니야. 례를 들면 아저씨 같은 어른.”
가슴팍을 두드리며 사뭇 사내다운 티를 끌어올리면서 나는 말하고 있었지만 살짝 동요가 일었다.
머뭇거리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는 내 마음속에 현미경이라도 들이대려는듯 웅이의 깜박이는 두눈은 오래도록 나를 훑어내렸다. 이윽고 말이 없던 웅이가 몸을 돌려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앞의 몽돌밭에 내려놓았다.
“그럼 아저씨를 무조건 믿겠습니다.”
그러면서 선언이라도 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많은 따개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배구공 만한 정체불명의 물건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따개비 사이에는 해파리들이 얼기설기 말라붙어있었다.
“쓰레기 수거 수업중, 바다가에서 주은 건데요. 따개비 속에는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는 물건이 들어있어요. 혼자 따개비를 뜯어내다가 아무래도 무서워졌어요. 그렇다고 시시하게 선생님에게 바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죠.”
웅이는 좀전의 침울 속에서 빠져나와 활기를 띠며 당당해지고 있었다.
“그래, 스타일 멋있지.”
나는 엄지척을 내보였다.
“해적들이 탈취했던 보물섬 지도가 들어있을 수도 있어요.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
웅이의 얼굴은 은밀한 기색이 너울치다가 이내 비장함으로 바뀌여갔다.
나는 풉 하고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광풍이 휘몰아친다, 창대 같은 비줄기가 밤의 장막을 드리운다, 번쩍하는 번개에 그 장막은 찢어진다, 그 번개빛 속으로 한척의 배가 뒤엉켜 몸부림치는 검푸른 바다 속으로 서서히 침몰되여간다, 양피지 지도 한장이 선채 쪽에서 휘뿌려져나오고…
아이가 상상했을 머리 속 정경이 피끗 머리 속으로 스쳐지나면서 나는 차츰 재미있어지려고 하였다.
“무슨 근거로?”
나는 웅이에게 진진하게 따져묻기로 하였다.
“봐요. 여기… 제가 따개비들을 떼여내다가 그만둔 곳에서 가죽이 만져진단 말이예요.”
나는 웅이가 가리키는 따개비가 떨어져나간 쪽으로 머리를 낮추어 살폈다. 그리고 식지와 중지를 넣어서 만져보았다. 과연 미끌미끌한 것이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웅이의 말대로 가죽임에 틀림없었다.
“오, 가능성은 있겠구나. 그럼 어쩌지?”
“뜯어서 확인해봐야죠.”
단호하게 말하는 웅이였지만 분리작업은 은근히 나에게로 떠맡기는 얄팍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나는 따개비들을 조심스레 뜯어내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오래동안 그 곳에 붙어있었는지 더러는 쉽게 뜯어지지 않았다. 웅이는 쪼크리고 앉아 떨어져나오는 따개비들을 부지런히 옆으로 밀어냈다. 따개비들이 거의 떨어져나가면서 물건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내 판단으로는 카메라 케이스였지만 서뿔리 입밖으로 번지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여넣고 쪼크리고 앉은 웅이는 어깨를 달싹거렸다. 케이스의 쪼르래기를 열었다.
카메라였다.
웅이의 반짝거리던 눈이 맥없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애끓이며 기다리던 항구에서 허술한 나무배 한척을 마중한 기분이였을가?
EOS800D형 Canon카메라, 내가 쓰고 있는 카메라와 똑같은 것이였다. 축축한 습기가 번져왔지만 그렇다고 질퍽한 물기가 있는 것은 아니였다. 왼쪽 모서리는 케이스 바닥에 몰려있던 모래알갱이에 긁혀지고 닳아진 자국들이 살짝 남아있었다. 따개비들이 악착같이 붙어서 서식을 했을 정도이면 바다물 속에 잠겨있던 시간은 오래된듯 싶지만 카메라는 다소 멀쩡하다 싶을 정도로 보존이 잘되여있었다. 버튼을 눌러보았다. 깜박 불이 들어오는듯 싶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웅이는 이미 흥미를 잃고 나와 멀어져서 차가 세워진 방향으로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웅이의 뒤모습과 바다를 번갈아보았다.
시월 오후 다섯시의 빛은 너무 짧았다. 오늘의 빛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팔을 잡는 사람의 손 같았다. 차거워지는 팔뚝에 얹히는 무게감과 온기의 감촉이 닿았다. 빛이 산란되여가고 있었다.
웅이의 뒤모습은 불그스레한 노을빛 물감에 풀어져서 륜곽이 뚜렷하지 않았다. 자그마한 슬픔의 덩어리가 굴러가고 있었다. 상대의 슬픔에 적절한 거리를 지켜주는 례의를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슬픔의 원인을 추측하지 않고 위로의 형태로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저 바라보는 것.
웅이네 집에 들어섰지만 웅이네는 그 때까지 아직 돌아와있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면서 웅이는 다시 활기찬 아이로 돌아왔다. 문이 열려지면서 바로 거실로 뛰여들어가 전등을 밝히고는 곧바로 계단 쪽으로 뛰여갔다. 쿵쿵쿵 계단을 뛰여올라가는 소리가 내 앞에서 들렸다. 나는 웅이를 따라 캐논 카메라를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웅이는 다락방의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천정을 쳐다보다가 다시 쪼르르 달려가 다락방 계단 아래를 허리 굽혀 살피기도 하였다. 이 시각부터 다락방의 주인은 자신이며 엄마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아지트가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벽지가 도배되지 않은 뒤쪽 벽이 웅이에게는 커다란 캔버스처럼 보였던 모양이였다.
“아저씨, 여기에다 그림을 그려도 되는 거죠?”
웅이의 물음은 언제나 간청이 아닌 허락을 강요하는 식이였다.
나는 공구함에서 목수용 사각형 연필심을 꺼내 웅이에게 넘겼다. 웅이에게 벽면에 그림을 그리게 하고 다시 아래로 급히 뛰여내려갔다. 차에 챙겨둔 내 캐논 카메라를 갖고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웅이는 이미 사다리에 올라서있었다. 아이가 올라서기에는 위험한 사다리였다. 웅이는 벽면에 분수를 뿜어대는 고래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조심해, 떨어지지 말고.”
나는 건성으로 웅이에게 주의를 주고 내 할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바다가에서 주어온 캐논 카메라를 마른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내고 카메라 청소용 붓으로 구석구석에 박혀있는 모래알들을 털어낸 뒤에 빠데리를 탈거했다. 내 손놀림은 바빠졌으며 호흡도 빨라졌다. 내 관심은 언녕 웅이에게서 멀어졌다. 내 캐논 카메라의 빠데리를 뽑아서 바다가에서 주어온 카메라에 끼워넣었다. 나는 심호흡을 길게 하고 전원버튼을 눌렀다.
성공이였다.
카메라는 거짓말처럼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였다.
앨범의 버튼을 눌러가면서 나는 위험하게 타인의 생활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빨라지는 내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 속의 이미지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덧 나는 그 이미지들에 물음표를 슬쩍 걸어두었다가 느낌표를 떨구면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타인의 생활 속에서 나는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이야몬드빛이 마루바닥에서부터 내 눈을 찔러왔다.
뭐지?
하면서 카메라 화면에서 눈을 떼고 다시 마루바닥을 내려보았다. 빨간 발톱 우에 박혀있는 큐빅이였다.
뭐지?
하면서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니 빨간 발톱은 보라색 슬리퍼에서 삐죽 나와있었다.
보라색 슬리퍼? 빨간 매니큐어의 발톱!
웅이네가 언제 내 옆에 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함께 카메라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몸 뒤쪽으로 숨기면서 튀여올랐다.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코끝을 스쳤다. 입속이 바짝바짝 말라가면서 나는 현기증으로 어질거렸다.
“뭔가에 그토록 집중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군요.”
그녀는 입가에 신비로운 웃음을 피워올리면서 말했다. 비난은 아니였다.
빌어먹을, 또 그 웃음.
내가 막 카메라 출처에 대해 설명하려고 입을 열려는데 웅이가 끼여들었다.
“엄마, 멋지죠?”
웅이가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녀를 벽면 쪽으로 끌어갔다. 동시에 고개를 탈고 내 쪽으로 찡긋 눈짓을 보내왔다. 카메라 사건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나는 널려진 것들을 대충 정리하고 웅이네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먼저 샤워를 해야 했다. 먼지와 때는 땀구멍 속에 박혀있는듯 깨끗이 씻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문지르고 씻다 보니 곧 깨끗해졌다. 문제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문제될 일이 많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떤 미묘한 일은 이미 진행되여 조여오는듯하였으며 웅이와는 웅이가 말했듯이 비밀을 공유한 공모자로 되여있었다. 그이들 모자 사이에 나는 엄연히 개입되고 있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먼지와 때처럼 시간을 들여 거뜬히 씻어낼 일이 아니였다.
나는 저녁식사도 뒤로 미루고 바다가에서 주어온 캐논 카메라의 사진을 컴퓨터로 옮겼다. 그리고 동영상도 있었다.
어느 해살 맑은 날이였을 것이다. 남자와 녀자의 무릎 아래 종아리와 발이 서로를 밀어내려는듯 서로를 끌어당기려는듯 엇갈리여 바다물 속에 잠겨있었다. 투명한 바다물은 깊이를 알 수 없게 아스라니 펼쳐져있었으며 해빛은 물 표면에서 자잘한 물고기 비늘로 반사되여 일렁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한장씩 반복 대조해보아야만 미세한 차이를 분별해낼 수 있는 발사진 스물세장이 카메라 앨범에 저장되여있었다.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놓으니 이미지들은 생생히 살아서 움직이였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어지럼증이 나는 수족관의 유리벽처럼 컴퓨터 창은 몽환의 세계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남자와 녀자가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시간들과 캐논 카메라가 바다물 속에 잠겨 따개비들이 들어붙고 해파리들이 감겨가고 있었을 그 시간들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와 녀자의 발은 카메라 속에서, 어쩌면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마지막 한순간까지 서로를 념려하면서도 서로에게 뛰여들지 않는 그 자세로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카메라가 바다가로 밀려온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그것을 주어온 웅이도 잘못한 것이고, 기어이 그것을 재생시킨 나도 잘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문득 카메라 주인을 찾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카메라에는 발사진을 제외하고는 얼굴사진은 없었다. 다만 일분 이십삼초의 동영상 하나가 있을 뿐이였다.
파란 물하늘이 흐르는 곳, 울긋불긋 피여난 산호초 사이로 까만 오리발이 신겨져있는 발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의 투영으로 한껏 길어진 까만 수영복 차림의 다리가 물을 휘젓고 있었다. 일분 이십삼초 동영상의 전부의 기록이였다.
내 인터넷 SNS에 동영상과 사진을 올리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메라가 내 손에까지 들어온 경과를 생략하고 카메라가 발견된 좌망 바가가 위치를 밝히고 주인을 찾고 있다는 문구와 메일주소를 남겼다. 휴대폰 번호를 추가했다가 다시 삭제해버렸다. 별 볼일 없는 자들의 시끄러운 통화가 걱정되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리고 난 뒤에야 짧은 하루의 긴 이야기가 이미 과거형으로 나에게서 멀어져갔으며 나는 안온하게 맥주를 마시며 여유있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녀인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없을 것이다.
그 뒤로 나의 일상은 고요하게 흘러갔으며 마무리공사는 계획보다 이틀 먼저 끝나게 되였다.
공사가 끝나고 삼일 후, 나는 웅이네를 만나러 갔다. 정산과 함께 추후 발생될 공사 중의 실수건을 합의하러 웅이네 집으로 갔다.
녀인은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녀인이 부엌으로 커피 내리러 간 사이, 쏘파에 앉아있던 나는 탁자에 엎어져있는 책에 눈길을 주었다.
그저 눈으로 들어오게 된 걸 봤을 뿐, 부러 알고 싶은 마음은 아니지.
하면서 나는 책 제목을 훑었다.
《바다》였다. 작가는 존 밴빌, 아마도 외국소설인가 보다 하면서 손이 막 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정을 멀뚱히 올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내리고 있을 때 엎어진 《바다》 밑에는 메모지 한장이 깔려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 놓여진 무테안경도. 메모지에 한장 가득 메모글이 적혀있는듯하였다. 《바다》밖으로 로출된 부분에는 검정깨알 같은 글씨가 박혀있었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리듯이 허리를 굽혀 그 메모를 보았다.
시간은
바다, 그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고른다
그는
철창 밖, 그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고른다
그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바다, 그 어두운 방…
책 속의 구절은 아닐 것이다.
나는 허리를 펴고 눈을 지긋이 감고 메모지에 적혀있는 그 어두운 방을 생각했다. 숨을 고르면서.
녀인은 커피잔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녀인은 공사 시작 전 빈틈없이 계약서를 작성했듯이 추후 발생될 실수건들도 명료하게 작성해놓았었다. 인테리어 나머지 비용은 이미 계좌이체시킨 상태였다. 녀인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해주었다. 녀인과 커피를 마시며 간단히 공사건에 대해 말이 오가면서 나는 자꾸 《바다》에 깔려있는 메모지에 눈길이 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녀인도 내 의중을 눈치채는듯하면서도 굳이 메모지를 따로 치우지 않았다.
녀인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웅이네 집에서 나왔다. 곽명을 불러서 저녁에는 근사한 축하파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차가 세워진 옆골목으로 걸어가며 휴대폰을 꺼냈다.
메일 한통이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떠있었다.
오후 세시, 좌망 바가가 좌망커피숍에서 만납시다.
캐논 카메라 주인입니다.
들어가는 말, 나오는 말, 호칭도 모두 생락한 메일답지 않은 건조한 문자메시지였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심장이 뛰는 박동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나를 미행하고 있는듯하였다.
그동안 SNS에 올렸던 게시물은 조회수는 물론 공유수도 폭증했으며 마음을 보내주고 따뜻한 댓글이 끊이지 않고 갱신되여갔다. 가끔 오버 잘하는 네티즌이 보내오는 응원의 메일도 날아들었지만 만나자고, 그것도 주인이라며 사뭇 건방지게 날려온 메일은 처음이였다. 메일의 진가를 떠나서 고의적인 해프닝일지라도 나는 만나기로 하였다. 헛물을 켜도 별로 억울할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갑자기 백수가 된 상태가 아닌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세시까지는 넉넉히 세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차를 몰고 좌망커피숍으로 갔다.
커피와 양고기즈란토스트를 시켜놓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도 해결하고 그동안 미루었던 독서도 하면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멀리서 잘 보이도록 캐논 카메라를 테이블 오른쪽 모퉁이에 얹어놓았다.
그리고 앉아서 책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모범생 자세의 책읽기는 몸을 써서 하는 일에 익숙해진 나에게 자꾸 흡연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책을 읽다가 몇번을 커피숍 뒤마당의 지정된 흡연구역으로 들락거렸다.
두시 사십분이 되여서 나는 책을 가방에 넣어버리고 뒤마당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다시 커피숍에 들어갔다.
한 녀인이 내가 앉았던 자리의 맞은편에 와서 앉아있었다. 정물화 속의 사물처럼 보였다.
캐논 카메라 녀인.
나는 괜히 긴장해졌다. 까만 벨벳핀으로 머리를 단정히 묶어올린,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는 녀인의 뒤모습을 살피며 녀인에게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녀인이 머리를 돌렸다.
나는 그만 악하고 비명을 지를 번하였다.
오전에 금방 만났던 웅이네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나를 맞았다.
설마, 하면서 나는 어정쩡 그녀와 마주앉았다. 둘 사이에는 어색하면서 간단한 목례만 있었을 뿐이였다. 한동안 나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탁자 밑을 살폈다.
나는 곽명이 말하던 떠도는 소문을 곱씹으면서 설마 아니겠지, 말도 안되는 우연은 죽었다 다시 깨도 없다면서 그녀가 캐논 카메라의 주인이 아니라고 강한 부정을 보냈지만 오전에 훔쳐보았던 ‘바다, 그 어두운 방’ 메모를 떠올리면서 가능성에 대해서 류추해보았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네요. 소문을 믿어요?”
그녀가 침묵을 깼다.
나는 굳이 무슨 소문? 하면서 금시초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나의 대답하지 않음이 대답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우연을 믿고 있어요? 의심하면서 믿고 있어요?”
그녀가 또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이미 체념한 질문이였다.
“편견과 맞서는 데는 오만 뿐만이 아니겠지요?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타인의 시선에서 멀어져서 나를 잊으면서 살 수 없을가요?”
그녀는 창밖으로 머리를 돌리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은 오후 세시의 해빛으로 나른해진 바다의 물결로 차있었다.
출처:2018 제6호
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
조원
불타는 금요일 밤을 보내고 나면 토요일은 한가롭고 여유롭다. 또한 일요일 밤은 우울해지고 월요일 아침은 늘 난데없이 찾아오는듯하고.
샐러리맨은 아니지만 요즘 나는 샐러리맨의 절박한 주일감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알람이 울린 후 30분이나 지나서야 잠에서 깨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를 챙겨서 나는 작업실이자 거주공간인 집을 나섰다.
바깥은 짙은 안개가 서려있었다. 얼굴은 없지만 수많은 손가락을 갖고 있는 가을바람이 안개의 립자들을 밀어가면서 세집 너머의 가시거리를 확보해주고 있었다. 가로수들의 록음은 여름이 남긴 자취로 여직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경계가 흐릿하면 사물을 살피려는 시선은 오히려 살아난다.
내가 몰고 다니는 낡은 찌프차 한대는 집앞 골목길에 세워져있다. 어디든 빈자리를 찾아 주차하기에 자리는 일정하지 않다. 매일 일이 끝나고 차에 실었던 자재와 공구함과 연장들을 지하창고로 옮겨둔다. 차에 두면 도적맞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하창고로 내려가 공구함과 연장들을 차에 실어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웅이네 전원주택의 다락방과 아래층의 거주공간을 이어주는 계단을 들이는 날이다. 그 뜻인즉 웅이네 다락방 증축공사가 마무리가 되여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직원도 없고 사무실도 없는 단독작업의 인테리어사업자인 나에게 주어진 다락방 증축공사는 대공사임에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나에 대한 신뢰와 나의 출중한 기술이라고 자부했지만 마무리가 되여가면서 왜 꼭 나였을가 하고 반문을 하게 된다. 요즘 부쩍 떠오르게 되는 생각이다.
2개월 전, 함께 공사현장을 다니다가 작은 규모의 건축회사에 취직한 장위에게서 전원주택의 다락방 증축공사건을 소개받았다. 위치와 사전 검측을 거친 뒤 설계도면, 작업기획서, 견적서를 제출한 결과 오다가 떨어졌던 것이다. 최소한의 인력 동원이라는 주인집의 특별조건을 장위가 알아내고 귀띔해주어서 ‘콘크리트기초공사 2명, 전기공사 1명, 난방및단열공사 2명, 배수공사 1명, 페인트공사 1명, 보조 1명과 본인. 총 9명 인력 동원’이라고 견적서 하단에 상세한 인력배정계획을 첨가했던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근간에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지인들의 인사말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어서 좋다. 불평을 늘여놓지 않아도 좋다. 그들이 인사처럼 물어오는 말에는 어떤 부정적 의도가 들어있지 않지만 내게는 수많은 생각과 느낌을 가져다주군 하였다. 이번 공사가 끝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을듯 싶기도 하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에 들어섰다. 웅크리고 앉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짐승이 기습하듯 안개무리들이 재빠르게 덮쳐왔다. 바다바람을 타고 차창으로 날려드는 안개에는 날이 서있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이 시려왔다. 도어를 올리려다 말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두손은 내 나이와는 물론 내가 하는 일과 잘 어울린다. 큰 상처는 없지만 여기저기 다친 자국이 남아있다. 하지만 손가락은 열개 모두 성하다. 그 손이 바로 나, 인테리어업자의 손이다. 피부는 거칠고 두껍지만 굳은살은 없다. 손이 단단하면 리력은 두툼할 것이다. 다만 복잡한 과거가 아니라 파도를 넘어온 력사.
어쨌든 나는 가장 단순하게 살기로 했으며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 손으로 바다마을 좌망 뿐만 아니라 시내 여러 공사장에서 한몫을 했다. 얼핏 어떤 건물들을 스쳐지날 때면 살아있는 존재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손을 댄 건물은 잊는 법이 없으니까.
웅이네 집은 시내에서 동쪽으로 40키로메터 떨어진 도시 외곽의 바다마을 좌망에 위치하였다. 웅이네와 나는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지만 좌망이라는 마을 자체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휘여진 해안을 따라서 주택들이 산비탈에 제멋대로 앉아있기에 걸어서 가기에는 불편한 거리였다.
웅이네 집 경사진 옆골목에 차를 세우고 공구함과 연장을 부리우고 있는데 웅이가 엄마와 함께 대문에서 마침 나서고 있었다. 녀인과 아이가 서있는 뒤쪽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안개가 걷혀져가면서 바다가 어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목청껏 기분 좋게 인사를 보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녀인은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어보였으며 웅이는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추스려 올리면서 “아저씨다, 엄마.” 하면서 환호에 가깝게 소리질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곧이어 웅이의 인사가 들려왔다.
나는 공구함과 연장을 들고 그들이 서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엄마, 오늘 유치원 가지 않으면 안돼요? 보고 싶어요. 신기하잖아요. 천정이 뚫리고 계단으로 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해요. 그 순간을 확인하고 싶단 말이예요.”
엄마에게서 웅이가 오늘의 공사일정을 들었던 모양이였다.
“유치원 가야 한다.”
녀인은 아이의 말을 짧게 끊었다.
웅이는 애써 애원을 가장한 교활한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나는 설핏 아이들의 어른스러움과 교활함은 어쩌면 어른들의 순탄치 않은 삶의 반영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였다.
“공사현장은 아이들이 함부로 들어서는 곳이 아니라고 몇번을 말했지. 어른들의 허락 없이는 한발작도 넘어서서는 안되는 금지구역이야. 오늘은 더욱 안돼. 위험해.”
나는 손의 들 것을 내려놓고 웅이의 뒤통수를 가볍게 다독이였다. 촉촉한 물기가 기분 좋게 손바닥에 닿았다.
녀인은 계단 제작의 하청업체가 열시 쯤에 도착할 것이며 오늘은 하루 집에 있을 것이며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올 것이라고 나에게 말하고는 아이를 데리고 옆골목에 주차된 차 쪽으로 옮겨갔다.
나는 웅이네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증축공사 계약서에 녀인은 공사중에서 류의해야 할 점을 세부적으로 명백하게 기재했었다. 작업시일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다락방의 공사는 완전 분리상태에서 진행, 다락방 진입은 뒤마당에 위치한 철제계단을 리용할 것, 다락방을 이어주는 계단은 작업완료 5일 전 장착, 주5일 근무에 작업시간은 아침 9시에서 오후 5시, 당일 발생되는 건축쓰레기는 당일로 처리할 것 등등의 작업규칙을.
나는 마당에서 집 출입문으로 향한 몽돌을 깔아놓은 좁은 길 따라 잔디밭을 지나고 화단을 에돌아 뒤마당의 철제계단 쪽으로 향했다.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외양의 흰색으로 매끈하게 페인트칠한 외벽을 따라 걸었다. 아주 오래전 파란 페인트칠을 했을 철제계단은 녹물로 번졌으며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떨어져나간 부위에는 녹쓸어있었다. 작업하는 사이에 오르내리면서 손길이 자주 닿았던 부위는 녹들이 밀려가고 더러는 철색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다소 가파른 계단을 타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유심히 계단을 보는 여유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다락방은 성인의 보통키 높이로 2인용 침대 세개 정도 들일 수 있는 공간이다. 앞마당을 향한 작고 낡은 창틀을 떼여내고 거의 벽면 전체를 통유리로 방의 채도를 넓혔으며 다락방에 서면 멀리 아래쪽으로 가물가물 바다가 보일 정도의 시야를 확보해주었다. 바닥은 쪽매널 대신 옅은 커피색의 원목마루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벽면은 오늘 계단이 들어서고 뒤마당으로 향한 문을 완전 봉합한 뒤 우유빛 벽지를 바르면 마루의 어두운 색상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좁은 공간이 확장되는 느낌이 날 것이다.
공구함에서 공구와 연장을 꺼내다 말고 나는 잠간 쉬기로 했다. 혼자 힘으로는 계단이 들어설 자리를 떼여낼 수도 없거니와 웅이네가 집으로 돌아와야만 작업을 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통풍구 창을 열어두고 창가에 앉았다. 눈을 뜬 채 들숨 한번 길게, 날숨 한번 길게 반복해서 쉬고 있으니 동공이 커다랗게 열려가면서 침침했던 눈은 다른 세상의 눈이 되여갔다.
마당 화단 곁, 똬리를 틀고 수도꼭지에 맞물려있는 호스.
담벼락 너머로부터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져있는 릉소화 몇송이의 잔해.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듯 대문 쪽으로 핸들을 틀고 있는 파란 어린이용 자전거와 빙하기의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건거 바구니에 꼬꾸라진 채 꼬리를 치켜든 공룡 장난감.
긴 밤의 외로움과 새벽 안개의 공포, 그 시간을 홀로가 아닌 셋이서 무난히 견뎌온 안도감으로 파라솔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진 둥근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와 쪽걸상 하나.
외출해서 밤새 귀가하지 않았는지 길 건너 이웃 울안의 빨래건조대에 걸쳐져있는 빨래들.
경사진 아래쪽으로 보이는 앞집의 지붕과 그 사이로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
내 시야로 들어오는 사물들은 낯설었다. 이 낯섬을 카메라 렌즈 속에 담으면 적격이겠다 싶었지만 바로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때로는 사물들의 적요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나는 낯설어지는 자신을 느껴가고 있었다. 증축 전 처음으로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들어섰을 때의 낯섬과 이질감과는 또 다른 낯섬이였다.
다락방에 널려있던 웅이네의 물건을 아래 마당으로 운반하던 날의 낯섬도 떠올랐다.
공사 시작과 함께 다락방의 물건들이 마당 주변에 흩어지면 집주인은 갑자기 바빠졌다. 내게 의미가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무의미하게 여겨졌던 물건들이 갑자기 의미를 지니기라도 하는 걸가.
타인의 어둡고 내밀한 구석을 파헤치고 들추어내던 서걱거리던 감정과 설핏설핏 호기심이 발동되는 충동은 혼잡스러웠다. 매사에 서늘한 구석이 있던 웅이네도 마당의 해빛 속으로 다락방의 물건들이 하나 둘 널려져가면서 거만함이 숨겨져있는 오기도 허물어져갔다. 어쩌면 오래동안 쓸모없이 적치되여있던 물건들처럼 그녀도 초라하게 오그라져가는듯하였다.
셀로판지를 두르고 붉은색 비닐끈으로 십자모양으로 포장된 케이스일듯한 물건을 계단에서 들고 내려오는 나에게 그녀가 덮치기라도 하듯 나꿔채가면서 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아귀에 잠간 잡혔던 그 순간은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그 순간 뿐인 것처럼.
코팅장갑이 끼여진 나의 손이였지만 그녀의 길쭉한 손가락의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함부로 타인의 손에서 나돌게 해서는 안되는 방어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이 떠오르면 자꾸 셀로판지에 포장되였던 그 물건의 정체에 내 사유의 흐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아마도 웨딩사진일 것이다 라는 추측에까지 몰고 갔다.
대문이 열리면서 코마루가 유난히 날이 선 곽명이 마당에 들어섰다. 내 눈앞에 펼쳐졌던 풍경들은 편린처럼 쪼개지면서 허공으로 날려갔으며 나는 다시 익숙한 나로 돌아왔다.
곽명은 작업시간 외에 사고를 몰고 다니는 사고뭉치였지만 협동작업 중에는 상대의 몸의 리듬을 온몸으로 흡수해들이는 센스 있는 나의 파트너였다.
다락방에 들어온 곽명은 마루에 앉아있는 나와 마주앉았다. 오후에는 타업체의 창틀 바꾸는 일감이 있으니 계단 들이기를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형님, 집주인 말인데… 여기 좌망으로 이사든 지 일년도 안된답니다.”
곽명이 은밀한 화두를 꺼내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의 눈섭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밀려오고 밀려가는듯 움찔했다.
“수상하단 말입니다. 떠도는 소문은 한두가지가 아니구요.”
곽명은 상대가 속이 간질거리게 하회를 기다리게 유도하는 짓거리로 말을 끝내고 잠간 입을 다물었다.
“소문이라는 건 그저 소문일 뿐. 우리 일군들은 집주인의 사생활과는 무관하게 할일만 하면 되는게 아닌가? 자, 일어서. 일이나 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나는 말했다.
“칫, 30대 중반의 녀자가 아이 하나 데리고 시내도 아닌 바다마을로 이사든다는 자체가 사연이 있단 말입니다.”
곽명이 나를 붙잡아앉히며 말을 이었다.
“그 녀자, 남편이 바다에 빠져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남편이 어느 고위층 관리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 가서 고위층 관리가 대가로 녀자에게 좌망에 전원주택을 사줬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생각해봐요. 30대 중반의 녀자가 무슨 실력으로 좌망에 전원주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곽명의 바다눈섭은 파고의 떨림이 더 격렬해졌다.
“유명인사의 부도덕한 성공에는 찬미를 보내면서 백성들의 하잘 것 없는 부도덕한 성공에는 도덕의 자대를 휘둘러서야 쓰겠냐? 조용히 하라.”
나의 랭소는 뜨거워지려고 하였다.
“형님, 형님의 그런 지적인 표정이 싫단 말입니다. 뭔가를 자꾸 생각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가짜라니까요.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하는 게 진짜란 말씀입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에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냐고.”
“상관이 없다고요? 맙시사 형님, 상관이 있고 없고는 천천히 들어주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한심한 건 고위층 관리가 이 집으로 드나든다는 소문도 있고 더 나아가서 고위층 관리가 탐오혐의로 조사받는 중인데 이 집이 압수당할지도 모른답니다.”
“너 성깔머리와는 별개로 드라마 꽤나 봐왔네. 공사일 그만두고 드라마 극본이나 쓰지 그러게.”
“아핫, 형님도 참. 그리 추측이 안된단 말입니까? 최소한 인력 투입도 사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란 말이구요. 고위층 관리와의 똥구린 내연관계를 은페하기 위해서는 형님이 필요하지 말입니다.”
“뜬금없이 거기에 내가 왜 들어가냐구.”
“잠간만, 이런 말 해도 될지는 몰라도 그 녀자… 형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도 있단 말입니다.”
“뭐야?”
내가 내지르는 소리에 곽명이 주춤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녀자 대형 인테리어업체들의 견적서 다 패스해버리고 형님에게 일 맡긴 자체부터 의도적이라는 추측도 나돌구요.”
“허참, 됐고. 나는 못 들은 걸로 한다.”
나는 다시 일어서면서 마당 쪽을 내려보았다.
웅이네가 들어서고 있었다.
“자, 서두르자.”
나는 곽명을 재촉했다.
곽명과 나는 라지오를 틀어놓고 일하면서 가끔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흥겹게 몸을 흔들기도 했지만 오늘은 방금 전의 대화로 서로의 눈치가 겉돌기만 하고 손발이 엇나갔다. 게다가 아래층에 있을 웅이네가 괜히 신경쓰이였다. 다행 계단이 들어설 자리를 이미 먼저 사각으로 구멍을 내고 덮개식으로 막았던 것이여서 얼마 품을 들이지 않고 우리는 들어낼 수 있었다.
진공청소기로 다락방 구멍 주변을 청소하고 아래층 거실에 떨어진 먼지와 부스레기들도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아래층 청소를 곽명은 고약하게 나에게 떠밀어버렸다. 그리고는 짐짓 도와줄 것이라도 있는듯 다락방의 바닥에 엎드려 사각 구멍에 머리를 내밀고 짙은 파도눈섭을 움쭉대면서 아래층의 동향을 살폈다. 웅이네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든 벌어지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눈빛은 간절한 기다림으로 번뜩이였다. 하지만 웅이네는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래층에 들어섰을 때 나는 잠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족사진은 물론 내가 단정짓던 웨딩사진, 하다못해 촌스러운 유화를 담은 케이스 따위는 벽의 어디에도 걸려있지 않았다.
오늘은 두번째로 웅이네 살고 있는 공간에 들어선 것이다. 공사가 시작되여 며칠 후, 계단이 들어설 자리에 구멍을 내던 날을 제외하고는 다락방공사는 완전 분리상태에서 진행이 되였으며 그녀도 일절 다락방으로 올라오지 않아 그녀와는 스치는 일 따위 없었다. 아주 드물게 정원의 파라솔 아래에 등을 지고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다락방에서 볼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집에 사람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틀어놓았던 라지오의 볼륨을 낮추었다. 내가 흥얼거렸던 노래소리를 그녀가 들었다고 생각을 하니 심히 부끄러웠다.
열시 정각에 계단하청업체에서 도착, 두시간 남짓 시간을 들여서 계단이 장착되였다. 그 사이에 나와 곽명은 다락방 뒤마당으로 향한 문을 벽돌로 막았다. 그러니까 다락방과 아래층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졌으며 다락방으로 올라서려면 아래층을 거쳐야만 했다. 계단하청업체 일군들이 물러나고 나와 곽명도 점심식사하러 나서려고 정원 쪽의 수도꼭지를 틀고 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손을 씻을 무렵 그녀가 정원으로 나왔다.
그녀는 엷은 미색 코드로 치마를 입었을 몸을 가린 차림새였다. 덕분에 슬리퍼가 신겨진 맨발과 종아리가 오히려 시선 집중을 강요하는 꼴이였다. 간단한 점심을 준비했다면서 파라솔 아래 탁자 우에 토스트와 빈 유리컵 두개와 우유팩, 커피 두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더 꺼내서 자리를 만들어주고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웅이네 집의 창문을 등지고 앉아 양고기즈란토스트를 먹고 앉아있던 나는 야릇한 웃음을 입꼬리에 달고 토스트를 베여먹으며 이따금씩 내 어깨 너머로 집안 쪽을 힐끔대는 곽명을 의식하고 있었다. 파라솔 아래 음지 쪽에 앉아있는 나였지만 목덜미가 뻣뻣해지면서 뒤통수가 후끈거렸다. 점심식사를 후닥닥 끝내고 곽명은 서둘러 떠났고 나는 오후 작업을 계속해야 했으므로 쟁반에 빈 그릇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부엌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잠간 멈추어섰을 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부엌이 그쪽에 있었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거실에서 은근히 부유하는 아로마향을 맡으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바닥에는 부엌 미닫이문의 마름무꼴 무늬의 뚜렷한 그림자가 누워있었다. 그 그림자를 밟으며 부엌문 쪽으로 가까워졌을 때, 짧은 실크 잠옷 치마자락에 감싸여진, 동그랗게 말려진 녀인의 엉덩이를 나는 보고 말았다.
앞쪽으로 허리가 굽혀진 채 파여진 엉덩이골의 륜곽까지 드러난 엉덩이는 찰랑찰랑 물결이 번지듯 좌우로 일렁이고 있었다. 내 눈길은 보라색 슬리퍼 사이로 꽃처럼 피여난 녀인의 발꿈치에서 하얀 종아리를 훑고 지나 탄력 있는 허벅지 우쪽으로 거침없이 기여올라갔다. 종당에는 살랑대는 실크 잠옷 치마자락 밑에서 숨쉬고 있는 팬티의 오목부분에서 멈추어버렸다.
황급히 돌아서려는 찰나, 녀인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녀인의 손에 들려있는 매니큐어붓은 빨간 혀끝처럼 보였다. 녀인은 그 자세로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던 것이다.
녀인은 나를 등지고 선 채 고개만 내 쪽으로 틀었다. 녀인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정오의 해빛이 사정없이 부엌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녀인이 허리를 한껏 펴면서 가슴 쪽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를 어깨 뒤쪽으로 넘겼다. 훤히 드러난 오른쪽 어깨, 겨드랑이 사이의 접혀진 살, 쇄골의 굴곡과 실크 잠옷 속에서 갑자기 놀라서 튕겨올라온듯한 노브래지어의 젖가슴은 강렬한 해빛 아래에서 오히려 헛것처럼 보였다. 녀인의 몸에서 피여오르는 냄새는 아득하기만 하였다.
금방 잠에서 깨여나기라도 하듯 가늘게 치켜뜬 녀인의 눈과 나는 마주쳤다.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행위를 감추려고 숨을 잠간 멈추었던 것이 오히려 나의 머리 속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나는 머뭇대다가 재빠르게 쟁반을 녀인에게 내밀었다. 녀인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쟁반을 받았고 나는 휘청대며 계단을 밟고 성급히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공간이라는 개념은 때로는 특이하다. 출입문만 닫으면 다락방은 독립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계단으로 이어졌다는 의미 하나로 다락방은 더 이상의 홀로가 아닌, 거실공간에 존속되여있는 부가공간으로 된듯 싶었다.
다락방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아래층 녀인의 시간을 함께 나누어쓰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일을 하면서 나는 자꾸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녀인의 발자국 소리를 환청으로 듣고 있었다. 쟁반을 받으면서 던졌던 녀인의 그 웃음, 차라리 위선남에게 일격을 가하는 모욕의 화살이였다면 속이 편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 웃음의 정체를 되새겨보면서 고양이처럼 달랑 의자에 올라앉아 엄지발톱에 톡톡 매니큐어를 바르는 녀인의 모습이 언뜻언뜻 떠올라서 진저리쳐질 정도였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혼이 빠져나간 몸은 무기력하였다. 마루에 주저앉아 멍청히 있다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네시가 되여가고 있었다. 도무지 손에 일이 잡히지 않던 터라 오늘 일은 이대로 마감하려고 공구들과 연장들을 정리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주인집 녀자의 폰번호가 액정에 떠있었다. 아주 잠간 망설이다가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말하는 쪽은 녀인이였으며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듣고 있는 쪽은 나였다. 불과 일분도 안되는 전화 속 녀인의 말을 듣고 있는 사이에 내 머리 속은 휙휙 거센 바람이 무질서하게 휘몰아치는듯하였다. 어떤 불미스러운 일에 서서히 발을 내디뎌간다는 불안, 그 불안 속으로는 기필코 빨려들지 않겠다는 다짐, 그러면서도 떨쳐낼 수 없는 유혹에 기댄 사소한 희망이 그 다짐을 쓸어갔다가 다시 밀려오면서 혼란스러웠다.
녀인은 언제 집을 나가고 없었다. 시내로 나갔다가 웅이의 하교시간을 맞추어 돌아온다는 게 교통체증으로 제시간에 웅이를 마중할 수 없는 사태이니 웅이를 집에 데려다줄 수 없겠냐는 간곡한 부탁이였다.
결국에는 그녀의 부탁을 수락하고 말았다. 어차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음에랴. 때로 선택은 머리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입이 먼저 주도권을 잡게 되며 머리가 뒤따라 나와서 선택의 당위성을 강조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한가 보다.
유치원을 향해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이미 후회를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무가내에 체념하는 낯선 자신을 다시 느껴갔다.
웅이를 유치원에서 마중해서 차에 태웠다.
“아저씨, 계단 들어섰어요?”
웅이가 옆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면서 물었다. 엄마는? 하는 질문도 없었다. 가방을 무릎에 올려둔 채로.
“응. 그래. 집에 가면 올라가볼 수 있을 거야. 계단을 타고 다락방을.”
나는 웅이 쪽으로 허리를 굽혀 안전벨트를 점검하였다. 웅이 몸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오늘 바다로 나갔댔어?”
고요한 저녁나절의 바다가 길을 따라 운전하면서 나는 웅이에게 물었다.
“어, 신기하다. 어찌 알아요? 아저씨. 오늘 생활체험 수업이 있었거든요. 바다가 쓰레기 수거 수업.”
“아저씨 코는 개코다. 생선냄새에는 환장하거든.”
“아, 그거요…” 하면서 웅이는 말을 흐리면서 옷깃을 당겨 코끝으로 냄새를 맡았다.
무릎에 놓여진 가방을 다시 한번 품에 꼭 안는 웅이의 곁모습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웅이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웅이 쪽 차창 밖으로는 듬성듬성 앉은 주택들과 산비탈이 뒤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나와 웅이 사이에는 서걱거리는 침묵이 갑자기 끼여들었다. 내 쪽의 차창 밖으로는 썰물이 밀려가면서 시꺼먼 개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워져가는 바다가는 허무한 시간의 파편들이 널려있는듯하였다.
바다가 대로변에서 웅이네 집 쪽으로 올라가는 올리막길로 차의 방향을 틀려는 무렵이였다.
“아저씨, 함께 바다 구경하고 집에 가면 안돼요?”
웅이가 가방을 꼭 그러안고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나는 차를 언덕길 옆에 주차시키고 내렸다. 뒤따라 웅이가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꽤나 무거워보였다. 내가 들어준대도 품에 꼭 안고 내 뒤를 따라 길 건너 바다가의 몽돌밭까지 따라왔다.
우리는 나란히 몽돌밭에 앉았다. 한낮의 따가운 해볕에 달구어졌던 몽돌은 온기가 여직 남아있었다. 가까운 포구 쪽에는 난파어선 한척이 거뭇거뭇해져가는 어스름 속에서 힘 빠져가는 마지막 몸부림인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갈매기들의 무질서한 비행은 노을을 준비하며 높아져가는 하늘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저씨, 비밀이 생겼다는 건 근심이 생겼다는 말이겠지요?”
웅이가 두팔로 무릎을 감싸고 머리를 떨구고 나직이 물어왔다.
“근심이 생겼다는 건 어른이 되여간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나는 웅이의 조그만한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혹시 가족이야기? 하면서 나는 다소 긴장해졌다.
어른들은 말이죠. 의심하면서도 믿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아요.
오른쪽 볼을 무릎에 대고 나른해진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리면서 웅이가 말했다.
“어른들이라고 무조건 그런 건 아니야. 례를 들면 아저씨 같은 어른.”
가슴팍을 두드리며 사뭇 사내다운 티를 끌어올리면서 나는 말하고 있었지만 살짝 동요가 일었다.
머뭇거리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는 내 마음속에 현미경이라도 들이대려는듯 웅이의 깜박이는 두눈은 오래도록 나를 훑어내렸다. 이윽고 말이 없던 웅이가 몸을 돌려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앞의 몽돌밭에 내려놓았다.
“그럼 아저씨를 무조건 믿겠습니다.”
그러면서 선언이라도 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많은 따개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배구공 만한 정체불명의 물건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따개비 사이에는 해파리들이 얼기설기 말라붙어있었다.
“쓰레기 수거 수업중, 바다가에서 주은 건데요. 따개비 속에는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는 물건이 들어있어요. 혼자 따개비를 뜯어내다가 아무래도 무서워졌어요. 그렇다고 시시하게 선생님에게 바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죠.”
웅이는 좀전의 침울 속에서 빠져나와 활기를 띠며 당당해지고 있었다.
“그래, 스타일 멋있지.”
나는 엄지척을 내보였다.
“해적들이 탈취했던 보물섬 지도가 들어있을 수도 있어요.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
웅이의 얼굴은 은밀한 기색이 너울치다가 이내 비장함으로 바뀌여갔다.
나는 풉 하고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광풍이 휘몰아친다, 창대 같은 비줄기가 밤의 장막을 드리운다, 번쩍하는 번개에 그 장막은 찢어진다, 그 번개빛 속으로 한척의 배가 뒤엉켜 몸부림치는 검푸른 바다 속으로 서서히 침몰되여간다, 양피지 지도 한장이 선채 쪽에서 휘뿌려져나오고…
아이가 상상했을 머리 속 정경이 피끗 머리 속으로 스쳐지나면서 나는 차츰 재미있어지려고 하였다.
“무슨 근거로?”
나는 웅이에게 진진하게 따져묻기로 하였다.
“봐요. 여기… 제가 따개비들을 떼여내다가 그만둔 곳에서 가죽이 만져진단 말이예요.”
나는 웅이가 가리키는 따개비가 떨어져나간 쪽으로 머리를 낮추어 살폈다. 그리고 식지와 중지를 넣어서 만져보았다. 과연 미끌미끌한 것이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웅이의 말대로 가죽임에 틀림없었다.
“오, 가능성은 있겠구나. 그럼 어쩌지?”
“뜯어서 확인해봐야죠.”
단호하게 말하는 웅이였지만 분리작업은 은근히 나에게로 떠맡기는 얄팍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나는 따개비들을 조심스레 뜯어내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오래동안 그 곳에 붙어있었는지 더러는 쉽게 뜯어지지 않았다. 웅이는 쪼크리고 앉아 떨어져나오는 따개비들을 부지런히 옆으로 밀어냈다. 따개비들이 거의 떨어져나가면서 물건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내 판단으로는 카메라 케이스였지만 서뿔리 입밖으로 번지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여넣고 쪼크리고 앉은 웅이는 어깨를 달싹거렸다. 케이스의 쪼르래기를 열었다.
카메라였다.
웅이의 반짝거리던 눈이 맥없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애끓이며 기다리던 항구에서 허술한 나무배 한척을 마중한 기분이였을가?
EOS800D형 Canon카메라, 내가 쓰고 있는 카메라와 똑같은 것이였다. 축축한 습기가 번져왔지만 그렇다고 질퍽한 물기가 있는 것은 아니였다. 왼쪽 모서리는 케이스 바닥에 몰려있던 모래알갱이에 긁혀지고 닳아진 자국들이 살짝 남아있었다. 따개비들이 악착같이 붙어서 서식을 했을 정도이면 바다물 속에 잠겨있던 시간은 오래된듯 싶지만 카메라는 다소 멀쩡하다 싶을 정도로 보존이 잘되여있었다. 버튼을 눌러보았다. 깜박 불이 들어오는듯 싶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웅이는 이미 흥미를 잃고 나와 멀어져서 차가 세워진 방향으로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웅이의 뒤모습과 바다를 번갈아보았다.
시월 오후 다섯시의 빛은 너무 짧았다. 오늘의 빛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팔을 잡는 사람의 손 같았다. 차거워지는 팔뚝에 얹히는 무게감과 온기의 감촉이 닿았다. 빛이 산란되여가고 있었다.
웅이의 뒤모습은 불그스레한 노을빛 물감에 풀어져서 륜곽이 뚜렷하지 않았다. 자그마한 슬픔의 덩어리가 굴러가고 있었다. 상대의 슬픔에 적절한 거리를 지켜주는 례의를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슬픔의 원인을 추측하지 않고 위로의 형태로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저 바라보는 것.
웅이네 집에 들어섰지만 웅이네는 그 때까지 아직 돌아와있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면서 웅이는 다시 활기찬 아이로 돌아왔다. 문이 열려지면서 바로 거실로 뛰여들어가 전등을 밝히고는 곧바로 계단 쪽으로 뛰여갔다. 쿵쿵쿵 계단을 뛰여올라가는 소리가 내 앞에서 들렸다. 나는 웅이를 따라 캐논 카메라를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웅이는 다락방의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천정을 쳐다보다가 다시 쪼르르 달려가 다락방 계단 아래를 허리 굽혀 살피기도 하였다. 이 시각부터 다락방의 주인은 자신이며 엄마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아지트가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벽지가 도배되지 않은 뒤쪽 벽이 웅이에게는 커다란 캔버스처럼 보였던 모양이였다.
“아저씨, 여기에다 그림을 그려도 되는 거죠?”
웅이의 물음은 언제나 간청이 아닌 허락을 강요하는 식이였다.
나는 공구함에서 목수용 사각형 연필심을 꺼내 웅이에게 넘겼다. 웅이에게 벽면에 그림을 그리게 하고 다시 아래로 급히 뛰여내려갔다. 차에 챙겨둔 내 캐논 카메라를 갖고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웅이는 이미 사다리에 올라서있었다. 아이가 올라서기에는 위험한 사다리였다. 웅이는 벽면에 분수를 뿜어대는 고래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조심해, 떨어지지 말고.”
나는 건성으로 웅이에게 주의를 주고 내 할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바다가에서 주어온 캐논 카메라를 마른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내고 카메라 청소용 붓으로 구석구석에 박혀있는 모래알들을 털어낸 뒤에 빠데리를 탈거했다. 내 손놀림은 바빠졌으며 호흡도 빨라졌다. 내 관심은 언녕 웅이에게서 멀어졌다. 내 캐논 카메라의 빠데리를 뽑아서 바다가에서 주어온 카메라에 끼워넣었다. 나는 심호흡을 길게 하고 전원버튼을 눌렀다.
성공이였다.
카메라는 거짓말처럼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였다.
앨범의 버튼을 눌러가면서 나는 위험하게 타인의 생활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빨라지는 내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 속의 이미지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덧 나는 그 이미지들에 물음표를 슬쩍 걸어두었다가 느낌표를 떨구면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타인의 생활 속에서 나는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이야몬드빛이 마루바닥에서부터 내 눈을 찔러왔다.
뭐지?
하면서 카메라 화면에서 눈을 떼고 다시 마루바닥을 내려보았다. 빨간 발톱 우에 박혀있는 큐빅이였다.
뭐지?
하면서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니 빨간 발톱은 보라색 슬리퍼에서 삐죽 나와있었다.
보라색 슬리퍼? 빨간 매니큐어의 발톱!
웅이네가 언제 내 옆에 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함께 카메라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몸 뒤쪽으로 숨기면서 튀여올랐다.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코끝을 스쳤다. 입속이 바짝바짝 말라가면서 나는 현기증으로 어질거렸다.
“뭔가에 그토록 집중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군요.”
그녀는 입가에 신비로운 웃음을 피워올리면서 말했다. 비난은 아니였다.
빌어먹을, 또 그 웃음.
내가 막 카메라 출처에 대해 설명하려고 입을 열려는데 웅이가 끼여들었다.
“엄마, 멋지죠?”
웅이가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녀를 벽면 쪽으로 끌어갔다. 동시에 고개를 탈고 내 쪽으로 찡긋 눈짓을 보내왔다. 카메라 사건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나는 널려진 것들을 대충 정리하고 웅이네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먼저 샤워를 해야 했다. 먼지와 때는 땀구멍 속에 박혀있는듯 깨끗이 씻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문지르고 씻다 보니 곧 깨끗해졌다. 문제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문제될 일이 많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떤 미묘한 일은 이미 진행되여 조여오는듯하였으며 웅이와는 웅이가 말했듯이 비밀을 공유한 공모자로 되여있었다. 그이들 모자 사이에 나는 엄연히 개입되고 있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먼지와 때처럼 시간을 들여 거뜬히 씻어낼 일이 아니였다.
나는 저녁식사도 뒤로 미루고 바다가에서 주어온 캐논 카메라의 사진을 컴퓨터로 옮겼다. 그리고 동영상도 있었다.
어느 해살 맑은 날이였을 것이다. 남자와 녀자의 무릎 아래 종아리와 발이 서로를 밀어내려는듯 서로를 끌어당기려는듯 엇갈리여 바다물 속에 잠겨있었다. 투명한 바다물은 깊이를 알 수 없게 아스라니 펼쳐져있었으며 해빛은 물 표면에서 자잘한 물고기 비늘로 반사되여 일렁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한장씩 반복 대조해보아야만 미세한 차이를 분별해낼 수 있는 발사진 스물세장이 카메라 앨범에 저장되여있었다.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놓으니 이미지들은 생생히 살아서 움직이였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어지럼증이 나는 수족관의 유리벽처럼 컴퓨터 창은 몽환의 세계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남자와 녀자가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시간들과 캐논 카메라가 바다물 속에 잠겨 따개비들이 들어붙고 해파리들이 감겨가고 있었을 그 시간들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와 녀자의 발은 카메라 속에서, 어쩌면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마지막 한순간까지 서로를 념려하면서도 서로에게 뛰여들지 않는 그 자세로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카메라가 바다가로 밀려온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그것을 주어온 웅이도 잘못한 것이고, 기어이 그것을 재생시킨 나도 잘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문득 카메라 주인을 찾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카메라에는 발사진을 제외하고는 얼굴사진은 없었다. 다만 일분 이십삼초의 동영상 하나가 있을 뿐이였다.
파란 물하늘이 흐르는 곳, 울긋불긋 피여난 산호초 사이로 까만 오리발이 신겨져있는 발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의 투영으로 한껏 길어진 까만 수영복 차림의 다리가 물을 휘젓고 있었다. 일분 이십삼초 동영상의 전부의 기록이였다.
내 인터넷 SNS에 동영상과 사진을 올리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메라가 내 손에까지 들어온 경과를 생략하고 카메라가 발견된 좌망 바가가 위치를 밝히고 주인을 찾고 있다는 문구와 메일주소를 남겼다. 휴대폰 번호를 추가했다가 다시 삭제해버렸다. 별 볼일 없는 자들의 시끄러운 통화가 걱정되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리고 난 뒤에야 짧은 하루의 긴 이야기가 이미 과거형으로 나에게서 멀어져갔으며 나는 안온하게 맥주를 마시며 여유있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녀인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없을 것이다.
그 뒤로 나의 일상은 고요하게 흘러갔으며 마무리공사는 계획보다 이틀 먼저 끝나게 되였다.
공사가 끝나고 삼일 후, 나는 웅이네를 만나러 갔다. 정산과 함께 추후 발생될 공사 중의 실수건을 합의하러 웅이네 집으로 갔다.
녀인은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녀인이 부엌으로 커피 내리러 간 사이, 쏘파에 앉아있던 나는 탁자에 엎어져있는 책에 눈길을 주었다.
그저 눈으로 들어오게 된 걸 봤을 뿐, 부러 알고 싶은 마음은 아니지.
하면서 나는 책 제목을 훑었다.
《바다》였다. 작가는 존 밴빌, 아마도 외국소설인가 보다 하면서 손이 막 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정을 멀뚱히 올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내리고 있을 때 엎어진 《바다》 밑에는 메모지 한장이 깔려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 놓여진 무테안경도. 메모지에 한장 가득 메모글이 적혀있는듯하였다. 《바다》밖으로 로출된 부분에는 검정깨알 같은 글씨가 박혀있었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리듯이 허리를 굽혀 그 메모를 보았다.
시간은
바다, 그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고른다
그는
철창 밖, 그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고른다
그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바다, 그 어두운 방…
책 속의 구절은 아닐 것이다.
나는 허리를 펴고 눈을 지긋이 감고 메모지에 적혀있는 그 어두운 방을 생각했다. 숨을 고르면서.
녀인은 커피잔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녀인은 공사 시작 전 빈틈없이 계약서를 작성했듯이 추후 발생될 실수건들도 명료하게 작성해놓았었다. 인테리어 나머지 비용은 이미 계좌이체시킨 상태였다. 녀인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해주었다. 녀인과 커피를 마시며 간단히 공사건에 대해 말이 오가면서 나는 자꾸 《바다》에 깔려있는 메모지에 눈길이 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녀인도 내 의중을 눈치채는듯하면서도 굳이 메모지를 따로 치우지 않았다.
녀인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웅이네 집에서 나왔다. 곽명을 불러서 저녁에는 근사한 축하파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차가 세워진 옆골목으로 걸어가며 휴대폰을 꺼냈다.
메일 한통이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떠있었다.
오후 세시, 좌망 바가가 좌망커피숍에서 만납시다.
캐논 카메라 주인입니다.
들어가는 말, 나오는 말, 호칭도 모두 생락한 메일답지 않은 건조한 문자메시지였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심장이 뛰는 박동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나를 미행하고 있는듯하였다.
그동안 SNS에 올렸던 게시물은 조회수는 물론 공유수도 폭증했으며 마음을 보내주고 따뜻한 댓글이 끊이지 않고 갱신되여갔다. 가끔 오버 잘하는 네티즌이 보내오는 응원의 메일도 날아들었지만 만나자고, 그것도 주인이라며 사뭇 건방지게 날려온 메일은 처음이였다. 메일의 진가를 떠나서 고의적인 해프닝일지라도 나는 만나기로 하였다. 헛물을 켜도 별로 억울할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갑자기 백수가 된 상태가 아닌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세시까지는 넉넉히 세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차를 몰고 좌망커피숍으로 갔다.
커피와 양고기즈란토스트를 시켜놓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도 해결하고 그동안 미루었던 독서도 하면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멀리서 잘 보이도록 캐논 카메라를 테이블 오른쪽 모퉁이에 얹어놓았다.
그리고 앉아서 책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모범생 자세의 책읽기는 몸을 써서 하는 일에 익숙해진 나에게 자꾸 흡연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책을 읽다가 몇번을 커피숍 뒤마당의 지정된 흡연구역으로 들락거렸다.
두시 사십분이 되여서 나는 책을 가방에 넣어버리고 뒤마당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다시 커피숍에 들어갔다.
한 녀인이 내가 앉았던 자리의 맞은편에 와서 앉아있었다. 정물화 속의 사물처럼 보였다.
캐논 카메라 녀인.
나는 괜히 긴장해졌다. 까만 벨벳핀으로 머리를 단정히 묶어올린,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는 녀인의 뒤모습을 살피며 녀인에게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녀인이 머리를 돌렸다.
나는 그만 악하고 비명을 지를 번하였다.
오전에 금방 만났던 웅이네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나를 맞았다.
설마, 하면서 나는 어정쩡 그녀와 마주앉았다. 둘 사이에는 어색하면서 간단한 목례만 있었을 뿐이였다. 한동안 나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탁자 밑을 살폈다.
나는 곽명이 말하던 떠도는 소문을 곱씹으면서 설마 아니겠지, 말도 안되는 우연은 죽었다 다시 깨도 없다면서 그녀가 캐논 카메라의 주인이 아니라고 강한 부정을 보냈지만 오전에 훔쳐보았던 ‘바다, 그 어두운 방’ 메모를 떠올리면서 가능성에 대해서 류추해보았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네요. 소문을 믿어요?”
그녀가 침묵을 깼다.
나는 굳이 무슨 소문? 하면서 금시초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나의 대답하지 않음이 대답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우연을 믿고 있어요? 의심하면서 믿고 있어요?”
그녀가 또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이미 체념한 질문이였다.
“편견과 맞서는 데는 오만 뿐만이 아니겠지요?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타인의 시선에서 멀어져서 나를 잊으면서 살 수 없을가요?”
그녀는 창밖으로 머리를 돌리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은 오후 세시의 해빛으로 나른해진 바다의 물결로 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