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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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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잃어버린 순간들의 모자이크-조원
2019년 07월 15일 09시 11분  조회:284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조원

잃어버린 순간들의 모자이크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혼자말을 하면서 창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달이 창에 걸리겠지 하면서 그녀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반쯤 기대였다.
묵직한 어둠에 눌리운 창 밖의 고요.
겹겹이 주름을 잡은 카텐의 우울.
반쯤 읽다가 엎어둔 뮤지션 지미 헨드릭스의 자서전의 책등이 밝히는 흰색.
소리를 죽이고 무심히 뼈가루의 빛만큼이나 강렬한 책등의 흰빛을 내려다보는 축음기의 나팔.
덮고 있는 담요가 만들어내는 밤바다 파도의 물결.
편안한 어둠을 보면서 그녀는 잠에 굴복하고 말았다. 안온한 잠 속으로 빠져 들면서 행복하게 죽어가는 생의 종말이 바로 이런 거야 하고 잠의 서곡에 리듬을 덧붙이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꿈 속에서 보기 위한 시도를 자꾸 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든 꿈이 현실이 될 필요는 없다, 가끔 꿈이라는 태양을 현실로 캄캄하게 가리고 만다는 생각을 하면서 싱거우리만치 자기 위안을 한다. 그녀는 떨어지는 꽃잎을 본다. 한잎, 두잎 떨어지다가 무더기로 휘날리며 꽃비로 내리는 꽃잎을 본다. 아프다, 가슴이 아파. 꽃잎이 내리누르는 무거운 중력에 심장의 주름살이 깊어진다. 꽃잎은 분명 죽은자의 몸우에 내려앉는다. 대체 누구지? 죽은 자가? 그러다가 팔을 관통하는 통증에 소스라쳐 놀라 깨였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대체한다. 오래동안 머리에 눌리운 오른쪽 팔을 주물렀다. 팔의 저림이 풀려가는 열락을 느끼며 유리창 근처에서 번쩍이는 번개를 보았다. 이윽고 묵직한 천둥소리가 나고 무섭게 비가 쏟아졌다. 그냥 폭우일 뿐이야.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녀는 요즘 혼자하는 중얼거림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는 습관이 있다는 걸 느낀다. 오래동안 폭우소리를 듣고 그녀는 누워있었다.
그녀의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을 거쳐 주방의 랭장고 문을 열고 차거운 물병을 손에 쥐였다. 유리컵에 찬물을 잔뜩 부어서는 꿀럭꿀럭 마셨다. 랭장고 문을 열어둔 채로. 랭장고 안쪽의 불그스럼한 불빛은 한기를 싣고 너울쳤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다. 혜인의 방문은 굳게 닫겨있다. 서재의 문도 닫겨있다. 거실 티비다이의 서랍들도 닫겨있다. 현관의 신발장 문도 닫겨있다. 피아노도 커퍼에 덮여있다. 세자루의 우산은 묶여진 채 항아리속에 있다. 모든 문은 깨닫는 자에게 열려지게 되여 있다. 또 문득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폭우는 지나갔지만 비바람에 제멋대로 주방창 유리에 흩뿌려지는 가는 비줄기를 보면서 홍수 재해지역으로 취재차 출타중인 남편이 오늘이면 돌아온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침대로 가서 이미 깨여진 잠에 굳이 다시 요청장을 보낸다는 것은 괴로운 선택이라는 것을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엎어진 지미 헨드릭스의 자서전에 엄지손가락을 끼워넣어서 두손으로 받쳐들고 서재로 향했다. 잠들기 전보다 옅어진 어둠을 밟으면서. 서재라는 공간은 가족에게 외딴섬의 존재처럼 거기에 있다고 그녀도 남편의 생각을 인정해주기로 하였다. 혜인도 그녀도 그 외딴섬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 녀자의 남편으로, 한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는 남자가 자신의 서재는 ‘경건하고 고요한 외도를 하는 외딴섬’이라고 꽤나 길게 이름을 지어버린 까닭일 수도 있었다. 남편은 새집으로 이사를 하기 전에 집안 벽면의 벽지와 타일, 쏘파의 사이즈와 질감, 티비가 걸리는 벽면쪽의 조명, 현관에 놓이게 될 우산꽂이 항아리, 주방과 거실의 경계를 이루는 마름모꼴의 미닫이문, 베란다의 연두색 빨래건조대와 화분통 등등의 사소하지만 지극히 중요한것들의 맞춤은 전적으로 그녀의 선택에 맡겼다. 단 서재를 꾸미는데는 고집스러울만치의 열정을 쏟았다. 외딴섬의 분위기를 맞추려고 그랬었는지는 몰라도, 아니면 인테리어를 끝내고 나서 서재의 냄새가 외딴섬 같아 보여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그 선후관계를 그녀로서는 알길이 없었다. 오른쪽 벽면 통째로 서점에서나 볼 수 있는 붙박이 책장을 천장높이까지 만들어올렸고 옻칠을 올린 용도가 불분명한 나무사다리를 비스듬히 기대여 놓았다. 이 두가지를 제외하고는 테이블과 의자 두개 모두 벼룩시장에서 헐값으로 얻어온 사냥물이였다. 폭이 삼메터 되는, 서랍이 달리지 않은 철제다리에 투박한 원목의 나무판이 올려진 길다란 테이블,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은 의자 두개, 바닥을 장식하는 검정색의 타일, 그 타일 사이를 이어주는 백색의 넓은 금들, 언제고 테이블 우에 놓여져 있는 은색빛의 노트북과 초록색 갓을 쓴 전등 등등의 장식은 너무 정직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서랍이 달리지 않은 테이블을 가리키며 “비밀은 없다”고 말하면서 남편은 퍼그나 자족적인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러던 남편이 거의 테이블 높이의 목제 수납장을 테이블 밑에 추가로 끼워넣었다. 딱히 언제 그랬는지 시간적으로 모르겠지만 그녀로써는 별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니였다. 봄철에, 아직 봄이라 하기에 애매한 겨울 끝자락에 묻어있는 올해 봄에 서재의 창을 열고 환풍을 시키며 먼지털이를 하다가 수납장 서랍에서 발견된 일기장은 그녀를 남편의 서재로 자꾸 끌고 갔다. 죽은 자의 몸우로 떨어지는 꽃잎에 눌리워 깬 새벽에 책을 들고 서재로 그녀는 발길을 옮긴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녀의 손에는 서재로 들어가는 구실로 ‘지미 헨드릭스’가 쥐여져 있다. 손엔 껄렁하게 담배를 끼고 위스키를 홀짝거리는 지미 헨드릭스에게 욕을 보일 일이다. 그녀는 남편이 늘 앉는 의자 맞은편에 놓여져 있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의자에 앉아 전등의 불을 밝혔다. 나방이라도 초록색 스탠드 갓 주위에서 날아다녔으면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전도유망한 기자이며 소설가라고 소개받은 청년을 만났던 그때 그 순간, 차잔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을 넋을 잃어버리고 쳐다보던 청년의 우울할 듯하면서도 예지력으로 빛나는 눈빛을 보면서 청년에게 이미 결박되였다고 생각했다. 세계문학의 고전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핫한 현시대 외국 소설가들의 엄밀하고 질긴 마음의 소리를 담고 있는 책들을 설렵하고 있던 그녀, 국내문학의 소박함을 가장한 촌스러움과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항변하는 소설들에 랭소를 보내고 있던 그녀, 조선어로 된 신문이나 잡지가 있기나 한가고 의심을 갖고 있던 그녀는 소설가라는 단순한 호기심에 소개팅을 덜컥 수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위 소설가라고 자칭하는 무리들 중의 한 개체의 쇼중의 쇼를 재미있게 볼 수 있겠다는 기대로 말이다. “손가락이 이쁘네요. 그 손가락과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개팅이 끝나고 차집에서 헤여지면서 등을 돌려서 다섯번째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청년이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에 그녀는 그만 주저앉아 울어버릴 번했다. 고작 열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그녀와 청년, 휴대폰에서 울려오는 소리와 생목소리가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섞여서 들려오는, 간절함이 묻어있는 청년의 중저음에 그녀는 폭삭하고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돌아보면 안돼, 몸을 돌려서는 안돼, 고개를 돌리지 말자. 그녀는 손아귀에서 빠져버릴 것 같은 휴대폰을 꼭 붙들고 서서 마음 속으로 웨쳤다. 괜히 어떤 비밀이 공유된다는 수치를 넘어선, 누군가에 의해 밝혀지길 바랐던 비밀이 뜻하지 않게 드러난 안전감으로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이 보고 싶어졌다. 차집의 유리창에 비낀 희끄무레한 그녀의 실루엣이 반사되는 해빛 속에서 그녀의 머뭇거림을 단정하게 교정해주었다.
그녀는 수납장 서랍을 열고 활달한 필체로 “나비의 춤사위”라고 첫장을 장식한 일기장을 펼쳤다. 주저없이. 뻔뻔스럽게. 한올의 부끄러움도 없이. 초기에 느꼈던 남편에게로 향한 무모한 불신뢰와 미안함이라던가,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행위에 대한 유죄감이라던가, 자책감도 없이. 그녀는 일기장을 넘겼다. 낯선 이질감은 손끝에서 묻어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책의 페지들이 기분 좋게 넘겨지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다. 그녀의 눈길은 무의식으로 향하는 그녀의 손길에 따라 펼쳐진 그 페지에 머물게 된다.
 
 
 
좁다란 골목과 골목을 에돌고 에돌아가야만 하는 동네 공원, 시소와 미끄럼틀과 녹쓴 운동기구가 자리잡은 구석자리에서 작은 숲이 시작되는 입구에 공중전화부스의 크기의 삼면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집 하나가 있다. 고마운 어떤 사람의 창의적인 사랑의 집이다. 길고양이 급식소. 배란기만 되면 악을 쓰고 울어대는 밤중의 고양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실면을 호소하는, 고양이의 배설물의 악취와 고양이의 몸털의 무자비한 침입으로 창문을 열 수 없다는 주변 거주자들의 항의 전화로 철거 위기에 있는 급식소. 대낮에는 감히 이웃들이 감시하는 눈길이 두려워 어스름히 끼는 저녁이면 공원을 산책하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급식소에 고양이 먹이를 작은 그릇에 소복히 담아준다. 고맙게도 나 먼저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을 고양이를 떠올리며 재빠르게 급식소를 빠져나온다. 급식소에 다녀와서야 잠을 이룰 수 있다. 내 속죄의 길은 초라하다.
 
처음으로 그 일기장을 펼쳤을 때, 그녀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남편의 숨겨둔 일기장은 절대 아니였으며 누군가에게서 부탁 받은 앞으로 쓸 소설의 소재임을 그녀는 어림짐작했다. 신문사 사회부 기자인 남편에게는 넘쳐나는 타인의 이야기가 공짜로 제공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취재를 다녀와서 남편은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아름답지만 않은 슬픈 사연들에 막무가내의 분노를 섞으면서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얼마 뒤, 그녀는 사회면을 도배하는 남편의 기사를 읽으며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기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묘하게도 그녀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잡초를 뽑아내 듯 솎아내서 진정성이 배제되여 있었다. 기차역에서 팔고 있는 삼류 잡지들의 살인과 외도, 복수와 강간, 단순한 탐욕의 파멸, 눅거리 동정을 살 수 있는 련민, 사회의 부패와 사랑의 호소 등을 뻔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들려준 부분적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의 제재로 리용되고 있음을 그녀는 눈치챘다. 치사하게. 정말로 치사하게. 그 뒤로 그녀는 남편의 치사한 소설을 읽지 않았다. 책으로 묶여나와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남편도 의외로 다행으로 여기는 듯하였다. 자신의 머리 속을 해체하려고 덤벼들지 않는 그녀에 대한 고마움이였는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상대의 공간으로 무단적인 침입을 하지 않는다는, 부부 사이에도 그런 간극 쯤은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의 합일이였을 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일기장의 래력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음은 분명히 남편만이 소유하고 싶은 비밀의 구석이겠지 하면서도, 우연히 참으로 우연하게 펼쳐든 일기장은 그녀를 주체할길 없게 만들었다. 여섯권의 일기장, 어떤 소녀의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섬뜩한 이야기에 홀려서 읽어내리면서 어데서 들어봤음직한 이야기였었다는 추론이 생기면서 그녀는 어떤 단서라도 알아내려고 소녀가 쓴, 환희라고 부르는 청년의 엄마로 된 녀인의 일기를 또박또박 한글자 한글자 고심해서 읽었다. 희경이라고 부르는 소녀에 대한 분노와 그녀에게로 향한 질투, 방아간집 소년에게 향한 련모의 정과 미움, 방아간집 소년이 희경에게 선물한 나비머리삔은 소녀의 분노를 펄펄 끓게 하며 나중에는 희경의 오빠 초막의 담요 밑에서 획득한 또 하나의 나비머리삔으로 복수를 하는 소녀, 종당에는 희경의 오빠를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몰아가는 소녀, 희경이라는 소녀에게 퍼부은 저주는 신통방통하게 주술적인 힘을 입어 희경네 가족의 오리부업은 망하고 희경의 엄마는 자살로 끝나면서 한 가족은 파멸한다. 난해한 부호학처럼 일기장 페지의 뒤면의 여백에 붙여져 있는 식물의 표본들은 생생한 삶의 기록들을 오히려 허구로 꾸며진 소설적 이야기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게 하였다.
어떤 인기척이 느껴져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창밖의 아침해가 서재 창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틀어 문쪽을 보니 거기에는 혜인이 서있었다. 거실에 깔려있는 옅은 어둠을 뒤로하고. 엄마가 낯설어져서 못견디겠다는, 서재의 문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머뭇대는 혜인이, 당금 울음이라도 터뜨리겠다고 고집하고 있는 혜인이. 그녀가 까닭없이 치밀어오르는 수치를 안깐힘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떨쳐내며 혜인에게 말을 건네려고 할 무렵, 혜인은 벌써 문에서 사라져버렸다. 아침 식사는 불길한 음모가 발각되여버린 엄마의 창피함과 아무 것도 본 것 없음 하고 시치미 떼는 딸의 침묵 속에서 진행되였다. 혜인은 방학이였지만 영어학원의 수업시간을 핑게로 부리나케 집을 빠져나갔고 그녀도 출발을 다그쳤다. 굳이 빨리 움직여야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녀는 허둥댔다. 얼굴 화장을 잊은채 옷장에서 짙은 수박색의 바탕에 안개꽃이 다다닥 박혀있는, 무릎이 겨우 덮이는 원피스를 골랐다가 관두고 물감이 빠진 엷은 청바지에 다리를 엇바꾸어서 끼여넣었다. 살짝 겹쳐지려고 하는 배살을 누르며 단추를 채웠다. 아무래도 수면부족인 까칠할 피부의 로출을 막기 위해서는 청바지가 좋을 듯하였다. 우에는 팔꿈치를 드러낼 수 있는, 옆구리에 주름을 넣어 허리의 라인을 살려주는 흰색 적삼을 입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묶으려고 벨벳 머리끈을 찾아보았지만 화장대 서랍안에도 침대가 수납장 우에도 보이지 않았다. 잠간 망설이다가 미색의 야구모자를 눌러썼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고 천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집에 와서 가방을 뒤적였던 기억이 없다. 매일 같은 궤적을 반복하는 일상이기에 가방에 보태고 빼고 할 번거로움이 없다는걸 깨닫는다.
폭우가 쓸고 지난 아침의 거리다.
식당의 환풍기에서 뿜겨져 나오는 기름냄새.
하늘.
가지 꺾인 나무.
말끔하게 씻겨진 배수구.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
아크릴 간판의 윤나는 빛.
가로등 기둥에 부착되였던 무단광고지들의 물먹은 좌절.
빨래집게에 물려진 채로 쓰레기통 아구리에 반쯤 걸려있는, 뒤집혀진 축축한 남자 팬티에 찍힌 오줌의 흔적.
촐싹대는 애완견의 목에서 울리는 방울소리 딸랑딸랑.
번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천지개벽이 일어날 듯, 온갖 재앙이 닥쳐 지구를, 사람사는 세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릴 듯한 폭우였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면 멀쩡한 그대로이다. 누가 뭐래도 삶은 끈질기게 자기 방식대로 움직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운전을 포기하고 학원으로 가는 509번 뻐스를 기다리면서.
로씨야가 지난 시간대라 뻐스안은 띄염띄염 빈 좌석이 있었다. 그녀가 오르자 뻐스는 성급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하차문과 제일 가까운 좌석의 창가에 앉았다. 열려진 차창으로 비온 뒤의 깨끗해진 공기가 뻐스의 이동에 따라 이는 바람으로 그녀의 야구모자에 눌리운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쓸어갔다. 좁은 어깨와 얄팍한 등이 기분좋게 간질거렸다. 해빛은 투명하게 빛났다. 저런 해빛 아래로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리라. 그녀는 해빛 속에 오른손의 손가락 다섯개를 쫙 펼쳤다. 손가락들 사이에는 바람이 있고, 해빛이 있고, 평화가 있고, 생명이 있고, 음악이 있고, 사랑이 있고, 모든 아름다움은 그 사이에서 너울치는 듯하였다. “손가락은 나의 생명이다. 나의 음악이다. 나의 전부다” 그녀는 어떤 환청을 듣는다. 어떤 환청이 아니고 절친이였던 정아의 부르짖음이였다. “뒈지려고 환장했나? 저 아줌마. 손 빼들지 말라니까.” 뒈지긴, 환장하긴 하면서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화뜰 놀라 손을 거두어들였다. 정아의 부르짖음, 그 환청은 기사님의 욕하는 소리를 잠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님의 욕설도 정아가 보내오는 그 환청의 연장선 우의 음성으로 착각되면서 뒈지긴, 환장하긴 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뱉어낸 그녀의 혼자말은 또렷하게 울려퍼졌다. 뻐스안의 승객 모두가 그녀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정말로 미쳤군, 미친 녀자군 하는 당혹스럽다는, 경멸스럽다는, 안스럽다는 눈동자들이 쏘아대는 눈빛은 그녀의 억울한 몸으로 가시가 되여 박혀왔다. 그녀는 채양을 끌어내리며 모자를 한껏 눌러썼다. 목적지까지 두 정거장 남겨두고 그녀는 끝내는 뻐스에서 내려버렸다. 쿡쿡 찔러대는 가시를 뽑아버려야 했다.
뻐스는 그녀를 헌 짐짝 버리듯 내려놓고 꽁무늬 뺀다.
그녀는 뻐스의 바퀴를 향하여 뽑아낸 가시로 사격을 가한다.
쓩쓩.
뻐스의 바퀴가 바람이 빠지면서 납작해진다.
쉬이익. 픽. 덜커덕.
모든 승객이 내린다.
미치겠네.
승객들이 투덜댄다.
그녀 입가에 웃음이 대롱대롱 걸린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미쳤나? 정말로.
하늘을 우러른다.
폭염이 이어질 징조다.
길가의 우거진 오동나무에 숨어있는 매미들이 맴맴 웃기 시작한다.
그녀도 그냥 웃자고 했을 뿐.
‘푸른숲피아노’ 간판이 눈에 들어오면서 그녀는 오전의 교습이 비여있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고 생각한다. 방학이면 한가한 토요일과 일요일이다. 그녀의 학원은 동네 피아노학원과는 다른 한 차원 높은 고급학원이라고 부근에서 소문났다. 일대일의 레슨 과정을 밟는데 제한된 학원수에 질높은 수업을 보장하기 위함이였다. 또한 까페 같은 피아노학원이였다. 일층은 책과 음악, 커피와 차, 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곁들인 까페이고 이층은 레슨 교실이 두개가 있었다. 낮에는 학생 레슨의 교실이며 밤에는 성인 피아노 련습실로 리용되게 되여 있었다. 비좁은 공간이여서 일층 까페에는 피아노를 두지 못했다. 대신 책으로 벽면을 도배했다. 까페의 운영에 그녀는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 성실한 음대 아르바이트생 두명이 관리해주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이 출근하자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네일샾으로 가서 손톱정리를 해볼가고 했다가 그녀는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녀는 앙증스런 청자기 주전자안의 보리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렸다. 까페의 출입문에 ‘Open’ 패말을 뒤집어 걸어놓고 안쪽으로 문을 잠갔다. 남향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여 있어 채광은 충족했기에 조명을 밝히지 않았다. 의자가 주는 안락함을 느끼며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숨소리에 집중하면서 눈을 잠간 감고 앉았다. 꿈에 나타났던 꽃잎을 다시 떠올려본다. 배꽃, 복숭아꽃, 살구꽃, 벚꽃, 별꽃, 팝콘, 불꽃… 꽃이라는 온갖 이미지와 꽃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사물들이 어지럽게 머리 속에서 란무했다. 더불어 뻐스에서 환청으로 들려왔던 정아의 부르짖음도 되새기고 있었다.
정아, 정아에게는 예쁜 손가락이 있었다. 피아노는 정아의 손가락을 위하여 만들어진 악기라고 하면 다소 과장된 표현인 듯 싶지만, 어쨌든 피아노에 어울리는 손가락으로 바이올린을 다루었다. 약간 앞쪽으로 동그라니 튀여나온 이마가 환히 보이게 머리를 올백으로 뒤로 빗어 묶은 정아, 쌍거풀의 커다란 놀란 듯한 두눈에는 늘 미소가 헤프게 피여났던 정아,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보이게 턱선은 다부지게 각을 이루었던 정아, 단단하고 반들반들하고 맵짠 양파 같았던 정아. 그런 정아에 비하면 그녀는 키가 멀쩡하게 큰것 빼고는 몸의 구석구석마다에는 딱히 뭐라고 콕 짚어서 말할 수 없는, 뭔가가 결여되여 있다는 애매한 인상을 주는 소녀였다. 두 소녀는 어릴 때부터 각종 문예공연에서 자주 만났으며 나중에는 같은 중학교를 다니고 함께 또 같은 성소재지 음악중등전문학교로 가게 되였다.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가장 리상적인 궁합이였던 정아와 그녀였다.
“내 손가락이 내 눈을 찔러. 푹. 푹. 찌른단 말이야.”
처절하게 울부짖던 정아를 떠올리며 그녀는 명치 끝으로 몰려오는 먹먹함에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녀는 가까스로 청자기 주전자를 들고 차잔에 보리차를 부었다. 차물로 말라버린 입술을 적셨다. 차향이 코 끝에서 맴돌았다. 고개를 들어서 차창 밖을 보았다.  
 
 
길 건너편 정육점의 불빛이 보인다.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쇼윈도의 가시가 좋은 정육점이다. 10개월 전 떠들썩한 오픈식도 없이 조용하게 입주되던 정육점은 삼일후 하늘이 준 선물로 신고식을 올렸었다. 번개의 번쩍 한번에 가게 앞의 오동나무가 쪼개져버렸고 정육점은 유명세를 탔다. 때로는 고요한 침묵의 폭력은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그 침묵은 또한 례의 바른 폭력이기도 하였다. 무뚝뚝할 주인집 남자를 닮은 정육점 간판에는 주홍색의 해서체 ‘정육점(肉店)’이 아크릴판에 불친절하게 적혀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레슨 받는 학원생의 손가락 놀림을 지켜보다가 간혹씩 맞은편 정육점을 내려다보군 하였다. 불그스름한 조명등 아래로는 내장을 빼고 반으로 가른 돼지의 몸체가 갈비뼈를 보여주면서 유리창쪽으로 갈구리에 걸려있었다. 정육점다운 쇼윈도였다. 수술복 같이 흰 유니폼을 입고 있는 주인 남자는 하루종일 바쁜 듯하였다. 아침에 걸렸던 반토막의 돼지 몸체는 오후가 되면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그 남자의 날렵한 칼솜씨에 등심, 목살, 갈매기살, 삼겹살, 갈비 뭐 이런 식으로 해체가 되여 동네 아줌마들의 시장바구니에 담겨져 나가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잠간 쇼윈도는 비워지고 그 뒤로는 고기를 발라낸 소의 다리뼈랑, 돼지족발을 차곡차곡 철사에 포개서 매달아놓기도 하였다.
그녀는 맞은편 정육점에 한번도 들린 적 없다. 굳이 뭐 육식이냐 채식이냐 하면서 주의라는 거창한 말까지 동원하여 유난을 떠는 식습성은 아니였지만 정육점 남자와 상대하기 싫었다. 만난 적은 있지만 정육점 남자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였다. 솔직히 그녀는 정육점 남자와의 조우를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면서도 금기가 주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숨어서 은밀하게 관찰하였다. 가파로운 절벽 언저리에 통행이 금지된 협곡으로 위태롭게 향하면서 위험하지만 숨막히게 아름다운 절경이 있을 거라는 기대 비슷한것도 있었다. 번개사건이 있은 후부터 정육점 남자에 대한 소문은 가게들 사이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거의 신비로움을 넘어선 신화적으로 말이다. 정육점 남자의 절단된 새끼손가락과 오동나무의 벼락사건은 묘하게 겹쳐지면서. 처음에는 작업오류로 절육기에 새끼손가락이 절단되였다는 단순 작업상해라는 소문이 떠돌더니 어느날부터는 암으로 돌아간 안해를 잊기 위해 스스로 잘라냈다고 했으며 언제부터는 또 길고양이의 꼬리를 내리찍는다는게 자기 새끼손가락을 자르게 되였으며 그 이야기는 살에 살이 붙으면서 정육점 남자가 잘려나간 새끼손가락을 아예 지나가는 길고양이의 먹이로 던져주었다는데 까지 이어갔다. 그리스신화도 아니고. 번개가 하필이면 정육점 앞의 오동나무를 목표물로 했겠는가 하는 치밀한 련관성을 련상시키게 하였다. 소문은 소문대로 정육점은 호황이다. 올해 봄 혜인의 생일 그 다음날에 그녀는 문득 남편에게 여기가 아닌 다른 데로 가서 살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남편은 변덕 많은 중년녀인의 정서파동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리유가 뭐냐고도 묻지 않았다. 교실에서 정육점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알 수 없는 어떤 소용돌이가 서서히 번진다는 불안을 느껴던가 보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남편이였다.
“그쪽은 괜찮아?”
“뭐가요?”
“물.”
“당신도 알면서도 칫. 여기야 괜찮지요. 어때요? 그쪽은?”
“란리도 이런 란리 어딨다냐? 집에 다 갔어. 산물이 터져 내려오면서 다리를 밀어버렸어”
“허억.”
“그 다리 말이지. 2년전 완공된 거란 말이야. 부실공사로 또 시끄러워질 거야.”
“사회부 기자가 아니랄가봐. 물란리에 부실공사에 대한 걱정이라니. 예민한 렵견의 후각.”
“집에도 갈수 없는 불쌍한 내 처지가 개코 같은 거지”
“쉿. 목소리 낮춰요. 누가 들을라.”
“집에도 돌아갈 수 없겠다… 여기서 강림촌까지 가까워. 거기나 들려봐야겠어”
“강림촌?”
“외가집이 있었던 동네.”
“방아간집 외가집요?”
“… 응. 그래.”
“…”
“길이 뚫리면 다시 련락할게. 잘 있고.”
남편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방. 아. 간. 집.”
음절 하나씩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음계는 미세한 떨림으로부터 단호한 웨침으로 치솟았다.
자신의 입에서 부지불식간 튀여져 나온 방아간집에 그녀 스스로 놀래버렸다. 꼬불꼬불 돌아가던 그녀의 정신회로는 갑자기 일직선으로 느슨하게 풀려지다가 다시 팽팽하게 조여지더니 거침없이 질주를 했다.
일기장의 주인은 나분이다.
방아간집 소년은 연수다.
연수를 사이에 둔 나분과 희경의 질투가 한 가족을 파멸로 이끈다.
연수는 남편이다.
남편이 떠들어댔던 첫사랑의 소녀가 나분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 지극히 사소한 나비머리삔의 음영의 농도와 자신이 잃어버리려고 했던 순간들의 재생과 그 외의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무게의 질감에 휘청했다. 분홍빛 하늘을 혈관처럼 쩍쩍 가르던 가을날의 번개를 떠올렸다. 오동나무를 쓰러뜨리던 그 번개를. 휴대폰의 벨이 또 울렸다. 우뢰의 괴성에 질겁이라도 하 듯 그녀는 흠칫 놀랐다. 압도적인 정적으로 자신으로 매몰차게 몰아갔기 때문이였다.  
 “영하야.”
그녀는 모든 힘을 부리우고 난 목소리로 휴대폰에 응답했다. 휴대폰 그쪽은 쉭쉭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릴 뿐 소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알지? 오후 한시에 교습 있는 거.”
그녀는 재차 통화를 시도했다. 그래도 휴대폰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 오후에 만나.”
하고 그녀가 통화종료를 누르려는데 휴대폰 저쪽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오랜만의 우유부단을 거친 단호한 소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어. 그래. 영하야.”
별일 아닌 듯하지만 상대의 이름을 자꾸 불러주는 것도 소통을 이어가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소년다운 당돌함을 찾아갔다.
“도움? 뭔지 말해봐, 영하야.”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일단은 오셔야 돼요, 저에게로.”
흔들리는 기색이 있었다.
“오후에 만나서…”
그녀가 말을 이어려는데 휴대폰 저쪽에서는 겁에 질려서 아악 악 하는 소년의 비명이 들렸다.
“영하야, 영하야.”
소년에게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어찌나 다급하고 크게 웨쳤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갈렸다. 일초, 이초, 단 오초간의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에 그녀가 서있는 까페라는 무대의 소도구들이 슬로모션으로 그녀의 눈앞을 스쳤다. 시침이 빠져나간 벽시계, 고집스런 라침판, 한국 려행길에서 사온 포항 호미곶의 해돋이손, 패티 스미스의 초상화, 박제비둘기의 유리알 눈알.
“저에게로 와주실 수 없어요?“
소년의 애원이 드디여 들려왔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덴지만 말해, 빨리.”
그녀의 긴장은 고조되였다.
“학원의 뒤쪽… 아빠트단지 뒤쪽… 건축현장…”
그러더니 휴대폰이 끊겼다. 통화버튼을 다시 눌러도 휴대폰은 이미 정지상태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이 상황을 침착하게 대체할 수 없어서 까페내에서 맴돌았다. 소년의 위치를 파악해야 되는데 방향감각이 둔한 그녀로서는 도무지 알수 없었다. 일단은 학원 뒤쪽 방향이라고 했으니 나가야 한다는 생각 뿐. 그녀는 천가방을 들고 까페를 나섰다.
소년이 그녀의 ‘푸른숲’으로 들어선것은 지난해 초겨울의 푸근한 날이였다. 썩 어렸을 때는 굉장한 짱구였었을 것 같은, 전체 몸의 균형을 깨는, 머리가 좀 큰 소년이였다. 그녀에게로 레슨을 받으러 오는 학생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질 피아니스트로 키워내겠다는 부모님들의 욕망에 끌려오는 아이들, 피아노가 괜히 좋아지는 아이들, 돈 꽤나 있는 집안의 있어 보이려는 허영심에 떠밀려 오는 아이들, 대충 이런저런 부류였다. ‘푸른숲’은 동네 피아노학원의 떠들썩한 학생떼를 볼수 없었다. 다들 조용하게 왔다가 조용히 나갔다. 정숙 그 자체였다. 피아노를 배우는 동기야 어찌되였든 학원생들은 이 도시의 중산층 이상의 가족의 아이들이였다. 초겨울이였지만 이 겨울이 다 갈 때면 지퍼 잠그기가 힘들어질 것 같은 검정색 등산복을 입고 있던 소년에게는 따뜻한 배려가 빠져있었다. 처음으로 소년을 보면서 그녀는 ‘푸른숲’속의 외로운 새 한마리를 피끗 떠올려보았었다. 소년을 데리고 들어선 남자도 저녁이면 피곤을 끌며 세상을 향한 불만을 빈 호주머니, 빈 지갑에 채워넣으며 억센 척하며 집으로 들어서는 아빠들 중의 한 아빠일 것 같았다. 자식의 미래에 불투명하지만 한번쯤은 자기의 꿈을 기대봐야 되겠다는 절박함도 없어보였다. 그 남자는 무뚝뚝했고 그녀에게 요소요소 따져묻지도 않았으며 알아서 맡아달라는 막무가내가 있었을 뿐이였다. 피아노를 배웠다기에 일단은 소년을 피아노 앞에 앉혔다. 소년은 피아노의 까만 건반을 만지작거리더니 베토벤 버창 2악장을 연주했다. 소년이 들려주는 정확한 음정과 박자는 피아노와 함께 한시간이 오래되였으면 알려주었다. 그녀는 소년보다 소년의 아빠에게 신경이 쓰였다. 소년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에도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하다못해 소년의 뒤통수라도 쳐다봐야 되는데 남자는 줄곧 레슨 교실의 벽면에 걸려있는 노트북 크기의 까만색 흑판에 락서된 분필의 흔적을 무심하게 보고있을 뿐이였다. 이렇게 정육점 남자는 소년의 아빠로 불친절하게 그녀에게 왔다. 썩 후에야 소년은 아빠가 맞은편의 정육점 주인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딱 한번 그녀는 정육점 남자를 만났었다. 오른손을 바지주머니에 찌르고 왼손으로 소년의 손을 잡고 레슨 교실을 빠져나가던 남자는 잠간 복도에서 주춤하고 섰었다. “아빠, 여기가 거대한 피아노 같습니다. 그렇지요?” 소년이 복도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아빠에게 말했다. 이층 복도의 벽면과 문들은 새하얀 색상을 올렸으며 천장은 검정색의 피아노 건반 모양으로 굴곡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는 납작한 달모양의 전등을 맞추었기 때문이였다. “음”하고 남자는 신음 비슷한 음성으로 소년에게 화답하고는 학원을 떠났다. 그뒤로 정육점 남자는 다시 오지 않았으며 소년은 성실하게 꼬박꼬박 레슨 받으러 왔으며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소년의 연주는 단순하게 손가락으로 완성되였다. 소리에는 생명이 없었다. 그녀는 가끔씩 소년에게 이렇게 속삭이 듯 말했다. 과학적이고 수학적으로 만들어진 기계를 보면 우리 사람들의 머리에 탄복하게 되는 거지. 그것의 정밀함, 확실성, 론리성에 말이지. 하지만 머리로 만들어진걸 손으로 머리로 계산해서 다루어서는 안되지. 이 피아노라는 기계를 말이다. 다시말해서 소리에는 령혼이 있으며 생명이 있다는 거야. 딱딱한 수학을 해서는 안되지. 손가락만이 아닌 온몸으로, 모든 령혼을 담아 피아노를 다루어야 해. 감성이 중요하지. 그리고 니가 좋아하는 음악을 휴대폰 벨소리로 하지 마. 더우기 알람 음악으로는 절대 금지야. 생각해봐. 그 곡이 아침의 팡파르가 된다고 생각해봐. 기분 좋아? 더러워, 시켜서 하는 기분이란. 한없이 미워지던 기억이 그 음악의 전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샤와를 하면서 노래를 불러봐. 라지오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어봐. 예술은 수학이 아니며 과학도 아니야. 그러면 소년은 억울하다는 까만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봄이 되여 겨울 동안 레슨교실은 효과 좋은 스팀의 열기로 공기가 내내 건조해져서 피아노는 조률을 해야만 했다. 조률사가 방문할 거라는 말을 듣고 나서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조률사가 와서 피아노를 해체하는 과정을 소년은 유심히 관찰하였다. 피아노의 내부를 보면서 소년은 우와 우와 하며 감탄을 련발했다. 조률사 총각이 소년을 향하여 혀 끝으로 천장을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뜨락뜨락. 소년의 이마는 웃음 때문에 윤이 났다. 반짝반짝. 그런 소년을 보면서 그녀는 소년에게 피아노 조률사가 되여 보는게 어떠냐고 물을 번하였다.
황급히 학원을 나오면서 그녀는 야구모자를 눌러썼다. 피끗 정육점 유리창에서 정육점 남자의 작업복이 언뜻하는 모습이 스치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녀는 주춤하고 섰다가 발길을 재촉했다. 소년의 말대로 그녀는 학원 뒤쪽의 아빠트 단지로 발길을 옮겼다. 그녀의 이 발길이 없었다면 그녀는 가능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범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소년이 전화했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배터리가 빠져버렸다면 그녀는 가능하게 자신의 아픔을 품고 때로는 꺼내보고는 다시 깊숙이 감추고 별일 없었던 듯 살아갔을 것이다. 그녀가 매몰차게 소년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가능하게 그녀의 삶은 또다른 행로를 타고 전진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 살면서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그때 그 순간을 후회하면서 가능성이 있었을 오늘을 생각하게 된다. 가능하게. 하지만 미래의 가능성에는 두려워하며 그것의 존재에도 의심을 가지게도 된다. 가능하게.
폭우 뒤의 폭염은 무자비했다. 그녀는 연신 등줄기로 배여져 나오는 땀 때문에 자꾸 손 끝으로 등쪽의 흰 적삼을 들어다 놓았다 했다. 거치적거리기는 청바지 자락도 마찬가지였다. 아빠트 단지내의 나무숲과 화단을 에돌며 후문쪽으로 향하면서 터질 것만 같은 젖가슴을 감싼 브래지어가 짜증스러웠다. 고인물을 피하려다가 그녀는 화단밖으로 목이 꺾어져 떨어진 접시꽃을 밟았다. 그녀의 운동화 밑에 깔려 짓뭉겨진 자주빛 접시꽃잎, 적라라하게 하얗게 돌출되였던 접시꽃의 꽃술을 보면서 그녀는 어슴푸레 폭염 뒤에 따를 폭우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아빠트 단지 뒤쪽에 건축현장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일단은 뒤쪽이라고 했으니 후문으로 일단 가보아야 했다. 후문쪽으로 가까워지면서 그녀는 그쪽에는 람루한 단층집들이 모여있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화려한 도시에 가려진 그늘, 나름대로 그 그늘의 빈곤과 맞서며 어쩔수없이 즐거운 듯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기에도 딱하게 누데기처럼 덕지덕지 달고있던 단층집들은 밀려가버렸었다. 그 자리에는 새 아빠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었다. 공사현장을 에워싼 파란색 양철판에 붙여진 새 아빠트의 효과도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공사현장으로 진입할 입구를 찾아헤맸다. 길은 언제나 있는 법이였으며 그녀가 다른 삶으로 걸어갈 입구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어진 양철판 사이로 충분하게 어른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한 공간이 열려 있었다.
그 공간으로 발을 내딛고 거침없이 몸까지 건늘 찰나까지는 두려움이란 걸 아예 느끼지 못했지만 그녀는 다른 행성에라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후회하였다. 때는 이미 늦었으며 그녀는 다시 소년의 안전이 걱정스러웠다.
조각난 벽돌과 돌멩이와 모래언덕.
썩어가는 나무토막과 잡초.
건축자재와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
들끓는 파리떼들의 축제.
그녀는 한낮의 해볕 아래에서 돋는 소름을 느끼며 공사중인 3층의 엉성한 골격을 갖춘 건물로 접근하였다. 무덤과도 같은 적요에는 그녀의 발걸음소리만 들릴 뿐이다. “묘우”하는 소리에 그녀는 휘청하며 넘어질 듯하였다. 그녀의 몸 뒤로부터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바람처럼 스치더니 건물 우쪽으로 빠르게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몸 깊숙한 데서부터 일순간 치밀어오르는 공포는 온몸에 한기로 치직 퍼져나갔다. 머리속은 오히려 청량해지는 듯하였다. 고양이가 사라지는 쪽에서 그녀는 피끗 사람의 형체를 보았다. 조그마한, 직감은 그녀에게 그것은 소년이라고 말해주었다.
안전그물망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간 그녀는 건물의 입구로 들어갔다. 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란간이 미완성인 세멘트 계단을 조심스레 타고 올랐다. 미완의 건축은 그 자체의 예술적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이층의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잠간 호흡을 가다듬고 뚫려진 입구에 들어섰다.
 
 
소년은 벽 쪽의 짙은 그늘 쪽에 쪼크리고 앉아있었다. 상자종이를 깔고서. “영하야.” 하면서 그녀는 소년 쪽으로 뛰여가려고 하다가 뚝 멈추어버렸다. 소년의 옆에는 검은 고양이가 두눈을 밝히고 그녀를 당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에게도 고양이에게도 함부로 가까이해서는 안되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뭔가는 말을 해야 되는데 혀 끝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바닥에는 창 바깥의 안전그물망이 만드는 빗사각형의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세사람, 세사람은 그렇게 그 도안을 묵묵히 보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도 분명히 사람으로 보였다.
“영하야, 일어서. 일단은 여기서 먼저 나가자.”
그녀는 소년에게로 다가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거기에 있어도 소리는 들려요.”
소년이 말했다.
고양이가 몸을 게으르게 일으켰다. 고양이는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창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가볍게 몸을 날려 창턱으로 뛰여오르더니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는 꼬리가 잘려간 고양이의 엉덩이를 보고야 말았다. 흡.
“사람이 싫어졌어요.”
소년은 거의 절망적으로 신음 비슷하게 뱉어냈다.
“싫어? 싫어질 때도 가끔 있게 되는거야. 잠깐일 뿐이야.”
그녀는 소년의 기분에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목소리의 파렬음은 온전치 못했다.
“그 잠깐이 수시로 나를 따를 거예요.”
소년이 말했다.
“이겨내면서 버티면서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녀는 소년의 조숙한 사춘기의 징조를 보고있었다.
소년은 고집스럽게 지켜내려고 했던 남자라는 자존심을 허물면서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워넣고는 울기 시작했다. 소리 내서 큭흑, 자그마한 슬픔의 덩어리는 격렬하게 떨었다. 그녀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쪼크리고 소년과 마주 앉았다. 누군가에 기대고 싶었던 자신의 어떤 밤을 떠올리면서. 슬픔은 만져주어서 위안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치유가 필요하다. 한참을 기다려 주니 소년은 머리를 들고 고개를 구석 쪽으로 틀었다.
“조률사 삼촌이 금방 떠났어요, 여기서.”
“그래? 그 조률사 삼촌이랑 만났어?”
그녀는 학원으로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조률사 청년의 우유빛갈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삼촌,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 나를? … 조률사가?”
그녀는 그녀를 빼돌리고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의 전개에 긴장되였다.
“삼촌이 묻더군요. 선생님을 좋아하냐구. 아니라고 했는데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절 좋아한다고 그랬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떨어지라고 삼촌이 그랬어요.”
소년은 되찾은 안전감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타인을 통해서 얻어듣는 거랑과는 다른, 직접 이렇게 면전을 하고 듣는 불편함으로 그녀는 말을 잃고 소년을 직시할 수 없었다. 다리가 저려왔다. 뭔가를 해야만 그 불편함을 이겨낼 것 같았다. 그녀는 상자종이를 끌어다 소년과 한메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늘 밖으로 부질없이 두 손으로 다리를 주물었다.
“삼촌… 그 개자식이 절 여기 나오라고 했어요.”
소년이 악다구니를 쓰 듯 웨쳐대면서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주체할 길 없는 분노로 맹렬하게 어깨를 다시 들썩거렸다. 그녀는 소년과의 간격을 좁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을려고 하다가 그만뒀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소년이 허공에 대고 목청껏 웨치다보니 갈 수록 목소리는 갈려갔다. 그렇게 소년의 저주는 반복되여 갔으며 그 저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힘이 빠져갔다.
봄에 학원으로 방문한 조률사 청년을 소년은 피아노 레슨 교실에서 한번 만나고부터 청년과 자주 만났다고 한다. 청년의 악기점으로 가서 악기들을 맘껏 구경하였으며 청년이 사주는 음료수도 라툐우(辣条)도 맛있게 먹었단다. 초기의 악기들에 대한 호기심이 시들어갈 즈음에 소년에게 악기점으로 가야만 하는 리유가 또 있었단다. 마음껏 컴퓨터 게임을 놀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청년의 무릎 우에 걸터앉아 게임을 함께 하기도 하였단다. 소년의 엉덩이로 청년의 바지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성기의 튕김이 전해졌으며 청년의 왼손은 소년의 바지를 쓸었다고 한다. 컴퓨터 게임의 스릴과 창피하면서도 빳빳하게 일어서는 욕망, 그 욕망을 차마 밀어낼 수 없었으며 은밀히 즐기면서 놀랍게도 기대되였단다. 소년은 청년과 친구처럼 PC방에도 다녔단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오늘은 여기로 불러내서 협박을 하더란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떨어지라고. 그리고 청년은 소년을 범했단다.
그녀는 소년의 흩어져버린 옷매무시를 그제야 발견했다. 연두색 반팔 티에 쌓인 저 가냘픈 소년의 몸, 미색의 반바지 속에 숨어있는 저 순수한 소년의 하체… 그녀는 소년을 대신하여 울어주고 싶었다. 죄여 드는 심장의 파장으로 전신이 몸서리가 쳐졌다. 어서 빨리 이 죄악의 장소를 떠나서 소년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영하야, 일어나. 가자, 우리.”
그녀는 소년의 손을 잡았다.
소년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다시 잡아서 끌었다.
다시 매몰차게 내뿌리쳤다.
소년과 그녀 사이에 끼여든 긴장된 침묵은 거친 벽면을 타고 내려오다가 응고된 세멘트 줄기처럼 완강하게 멈추었다. 상처 입은 푸른 숲속의 외로운 새 한마리를 그녀는 대책 없는 근심과 유죄감으로 바라볼수 밖에 없었다.
소년은 날숨과 들숨의 강약의 차이를 조절하면서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숨소리는 차츰 고르롭게 되였으며 소년도 유순해지는 듯하였다. 소년은 반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언제 다시 소년의 휴대폰은 켜져 있는 듯하였다. 광폭했던 금방과는 다르게 아주 침착하게 뭔가를 휴대폰에서 찾고 있었다. 격렬했던 분노가 없었던 듯. 소년은 말똥히 그녀를 쳐다보며 휴대폰을 넘겼다. 그녀는 소년의 돌발행위에 거의 공황에 빠져갔다. 그녀에게로 향한 휴대폰의 액정화면의 불빛이 꺼져갔다. 땀과 눈물이 번진 휴대폰을 그녀는 공황에 빠져버린 채 넘겨받았다. 식지로 액정화면을 눌렀다. 톡톡. 밤바다를 배경으로 한 포항 호미곶의 해돋이손 사진이 펼쳐졌다. 미끌어 떨어질 것 같은 휴대폰을 잡으려고 그녀는 가까스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한장 더 넘겨요.”
소년이 명령이라도 하 듯 말했다.
그녀는 화면을 왼쪽으로 밀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일층 까페에 놓여져 있는 해돋이손 모형의 사진이였다. 그녀는 또 어떤 함정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패배감 비슷한 무력감에 눌리워갔다.
“이 사진들이 왜 너에게 있는 거지?”
지나가는 소리인듯 무심하게 들리게끔 온갖 노력을 해보려 했지만 그녀의 입술 밖으로 튀여져 나간 말의 속도는 터무니없이 빠르게 흘렀다.
“제가 묻고 싶은 말이예요. 그 두 사진이 왜 저의 아빠의 휴대폰에 있는가고.”
소년은 쌀쌀했다.
“네 아빠? 정육점…”
“옙. 정육점의 우리 아빠에게요.”
그녀는 어리둥절 그 자체였으며 소년의 하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이 상황에서 꼬리가 잘라져 나간 검은 고양이가 떠오를가?
“우리 아빠의 소문 잘 알고 계시지요?”
취조하 듯 소년이 밀어붙였다.
“소문?”
그녀는 혀끝소리를 냈다.
“알면서도. 어른들은 원래부터 거짓말을 참말처럼 잘하는 거죠. 우리 아빠의 잘라져 나간 손가락을 잘 아시잖아요. 어른들은 다들 무서워요. 웃고 있지만 무섭다니까요. 검은 고양이 보셨지요. 우리 집 고양이였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다시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아요. 아빠에게 꼬리가 잘린 다음부터요. 제가 좋아하는 고양임에도 불구하고. 잘려진 아빠의 손가락을 검은 고양이가 물고 도망갈수야 없었지요. 정육점에 그 많은 고기 덩이를 냅두고 하필이면 아빠의 손가락이였겠어요? 그래도 굳이 아빠는 자기의 손가락을 검은 고양이가 물고 갔다가 그랬어요. 그날 고양이를 안고 정육점으로 찾아간 저의 실수였다면 실수였겠지요.”
소년의 입가로 쓴웃음이 걸려갔다.
“영하야, 어디 아파?”
그녀는 소년의 이마에 손바닥을 조심히 갖다댔다. 조률사 청년에게서 받은 충격으로 소년은 횡설수설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손바닥을 이마에 닿아야 된다는 것, 그러면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고 그녀는 고집했던 터였다. 그녀의 손바닥은 소년의 이마보다 컸다. 소년의 이마는 그녀의 손바닥을 밀어냈다.
“신들의 손. 잘 아시지요?”
소년은 골려주겠다는 심보였었는 지 자신의 오른손을 펼쳐들었다. 마치 그 손이 신의 손이기라도 하 듯. 하지만 그녀는 지금 밉상스러운 소년의 꼴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니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어?”
그녀는 소년이 두려웠다. 물어보는것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신들의 손”은 그녀가 우연히 가입된 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인터넷 블로그의 방 이름이였다. 손에 관하여, 손가락에 관하여 짤막한 글을 운영자의 메일에 넣어서 그녀는 합격되였고 정식회원으로 그 블로그방을 드나들 수 있었다. 모든 글과 사진들은 비공개되였으며 회원들끼리만 공유하는 공간이였다. 한국 려행길에 호미곶 해돋이손의 밤바다를 찍은 사진을 블로그방에 올렸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포항의 숲속 길을 따라 항공 력사 박물관을 지나고 공항길을 지나고 바다와 가까워지면서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다바람의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그녀는 까닭없이 눈가가 젖어들었었다. 영문을 모르게 몰려드는 저릿함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을 흘렀었다. 때로는 문득 생각없이 흐르게 되는 눈물이 있었다. 눈물. 옆에 앉았던 남편이 피씩 웃고있었다. 그날 찍은 사진 한장, 블로그에 올린 그 사진에 대글 하나, “아팠었네요.”였다.
“아팠었네요. 그게 우리 아빠가 남긴겁니다.”
소년은 학생이 선생님께 의례 갖추어야 되는 존중의 도리를 깨달았다는 듯 정중하게 말했다. 차라리 조롱이였으면 싶었다. 그녀는.
“허거걱. 헉. 네 아빠가…”
그녀는 심연 깊숙이 찔러오는 소년의 눈길을 피하며 경악을 감추려고 버벅거렸다.
“아빠는 짬만 있으면 그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저녁 잠들기 전에도, 세수를 마치고 밥 먹기 전에도, 고기를 자르다 말고 피묻은 손가락으로 그 사진을 터치한단 말이지요. 어느날엔가 저에게 부탁을 하더라구요. 까페에 있는 그 모형을 찍어올 수 없냐구요. 그때까진 전 몰랐지요. 알았다면 사진을 찍어 아빠께 넘기지 않았을 건데. 후에야 우연히 아빠의 휴대폰을 보고 알았지요. 해돋이손을 사진 찍어오라고 했던 리유를요. 우리 아빠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다구요. 그래서 절 푸른숲으로 보냈더라구요.”
소년의 얼굴에는 분명히 배신감이라고 씌여있었다.
“그러니까, 저는 학원에 못 가겠습니다. 선생님이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절 학원에 오지 못하게요. 조률사 그 개××도 그렇고. 아빠께 제가 그러더라고 말씀하신다면 아빠가 저의 손가락을 잘라버릴 지도 몰라요.”
소년의 가슴 속에 묻어둔 괴물이 대신 말하는 듯하였다.
질투가 낳은 비극의 비극.
그녀의 의식 속에는 이미 소년이 옆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지쳐있었으며 그녀는 홀로 지금의 이 미완성의 건축현장이라는 무대에 끌려서 올라온 배우에 불과했다. 관객이 없는 무대 우에서 그녀는 어떤 거치장스러운 가식도 불필요했다. 그녀는 세멘트벽의 무대 중앙에서 주섬주섬 일어섰다. 그리고 아직 창틀도 끼워지지 않은 사각으로 뚫린 창이여만 하는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바깥의 안전그물망으로 시야가 막혀왔다. 그래도 너무 한낮의 여름해의 강렬한 빛은 있었다.
그리고 무대는 바뀌여간다.
그녀와 정아가 등장한다. 그녀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정아는 바이올린을 활을 다룬다. 정아의 오른쪽 손가락은 바이올린의 현줄 우에서 춤을 춘다. 퐁당퐁당. 즐겁게. 무대의 조명은 찬란하다. 그러다가 그녀의 버벅대는 손가락의 놀림때문에 정아의 손가락의 률동은 멈추었다 다시 움직인다. 음악이 멈추게 되면 정아는 계속 이어가자며 바이올린 턱받이에 올려진 각진 턱을 살짝 들었다 놓는다. 다시 피아노 건반을 누르지만 그녀는 곁눈으로 보이게 되는 정아의 손가락에 신경 쓰인다. 참으로 욕심나는 정아의 손가락, 그리고 그 손가락의 움직임. 그녀는 뻣뻣해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면서 정아의 그 손가락이 없어졌으면 하는 질투를 느낀다. 그녀는 아니, 아니 하면서 까만 건반을 누른다.
다시 무대는 바뀐다.
중앙과 량옆 모두가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불필요한 온갖 소도구를 배제해버린 간결해서 섬뜩한 결백의 공간 속에서 정아가 울부짖는다. 내 손가락이 내 눈을 찌른단 말이야. 푹. 푹. 찌른단 말이야. 무대의 모든 조명이 꺼지고 잠간 깜깜해진다. 다시 원통형의 밝은 조명빛이 정아에게로 집중된다. 정아는 식지가 잘려져 나간 네개의 손가락이 남아있는 오른손을 얼굴에 대고서 울부짖는다. 자꾸 찌른단 말이야. 식지가 내 손가락을 찌른단 말이야.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휘청하며 감히 정아에게로 접근하지 못하고 서있다. 그리고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조명빛은 그녀에게로 이동한다. 그녀의 독백이 시작된다. 없잖아. 너의 식지가. 너의 식지는 이미 절단되고 없다니까. 없어진 걸, 사라진 걸, 절단된 걸 인젠 받아들여야 해. 인정을 해야만 돼. 다른 삶을 살아야 돼. 정아야. 충분히 다른 일도 할수 있잖아. 바이올린말고도 할 일은 많지 않니? 너가 이럴수록 난 괴로워 죽겠단 말이야. 내가 품고 있던 질투가 너의 손가락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처럼 말이야. 정아야. 날 살려줘. 그녀는 휘청휘청 몸을 가누며 정아에게로 몸을 돌린다. 드디여 무대의 모든 조명이 밝혀지고 정아가 말한다. 손가락은 나의 생명이다, 나의 음악이다, 나의 전부다. 전부를 잃는다는 게 뭔 지 알 것 같냐? 넌 모르겠지. 그녀가 답한다. 알 만해. 알 만해. 알 만하다고. 그만해. 제발. 정아가 그녀의 말을 자른다. 아니, 절대 몰라. 몰라도 괜찮아. 언젠가 너도 어떤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겠지. 하지만 넌 말이지. 다른 거 다 빼고 너의 손가락을 자신의 목숨처럼 아껴줄 남자를 찾아야 해. 너의 손가락은 신이 준 선물이야. 너의 손가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니? 너의 지성, 너의 얼굴, 너의 가슴, 너의 샘을 아무리 좋아해도 너의 손가락의 아름다움을 알아볼수 없는 남자랑은 결혼해서는 안돼. 행복해야 돼. 너는. 네가 날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넌 날 잊을수 있겠니? 나도 잊지 못하는데. 잊을 수만 있다면 너에게도 나에게도 다 좋겠지만.
무대는 사라져버린다.
그녀는 뒤에 앉았던 소년이 일어서는 기척을 들었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소년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쿵쿵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녀는 일기장의 주인인 나분을 만나고 싶었다.
 
해볕 아래 로출된 영하가 태양을 향하여 두팔을 벌린다. 열두살의 영하의 그림자는 잛다. 영하는 구십도 각으로 몸을 돌려 쭈크리고 앉는다. 태양빛 속으로 자신의 두 손을 내민다. 움켜잡았던 손가락들을 펴면서 땅 우에 공작 한마리를 완벽한 그림자로 남긴다. 까만색 공작이 볏을 움직인다. 까닥까닥. 소년은 건물 우쪽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린다. 어른들은 유치해. 거짓말을 잘하면서 아이들이 하는 거짓말은 참말로 믿는거지. 난 단지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싫었을 뿐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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