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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
세렌디피티
련휴는 늘 다짐으로 시작된다. 먼 려행은 삼간다, 밀린 책을 읽는다, 매일 운동을 한다, 맛집을 찾아 즐긴다, 예쁜 말 세마디씩 한다, 음주는 하되 과음은 금한다… 쉬울듯한 작고 사소한 다짐을 노트에 적어둔다. 몸에 배이지 않은 새로울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지만 몸으로 불러들이기에는 정열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다짐 중에서 한가지 다짐만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 먹는다고 마음대로 될 수 없는 인생처럼. 음주 과음으로 밤새워 빈 속 앓음을 하면서 마음 앓음보다는 덜해서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빨간 날자가 이틀을 나란히, 퐁당 하루를 건너뛰여 또 사흘을 사이 좋게 자리한 덕분에 지난 추석 련휴는 느긋이 한주로 잡혔다. 사람 만나는 일이며 술 먹을 일이며 책 읽을 일이며 넉넉한 시간이였다. 낮이면 사람 만나서 좋았겠지만 술이 더 반가웠다. 안주는 과했고 술은 더 과했다. 밤이면 그래도 책을 들 수 있었다. 조금은 어려울듯 싶은 책을 골랐다. 자잘한 글자꼴로 494페지 책의 두께와 무게에 망설이다가 읽기로 했다. 책가위를 펼치고 첫페지의 여백에 적혀있는 낯선 문자를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1991. 9. 27.
용인 동아서점에서.
남편이 사줬음.
-최
친구의 손때 묻은 책인데 최씨와는 가닥이 닿지 않았다. 책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경로를 제멋대로 상상하였다. 내 친구가 자신의 지인에게서 받은 책은 아닐 것이며 굳이 친구를 최씨로 가정한다면 친구는 동성애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이 책은 친구가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것이 명백해진다. 타인의 밑줄, 타인이 흘린 머리카락, 타인이 떨군 커피자욱, 이런 타인의 흔적을 찾아보아도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친구도 최씨 녀자도 이 책을 읽지 않았다고 추정을 할 수 있겠다. 헌 책방에서 나에게로 온 책이여서 괜히 들뜨는 마음이다. 헌 책방으로 애지중지했을 책을 보내게 되였던 그 리유를 나름대로 만들어보며 나는 최씨 녀자에게로 걸어들어갔다. 날자를 보면 발렌타인데이는 결코 아니였으며 생일 아니면 결혼기념일과 같은 특수날일 수도 있겠다. 련인 사이도 아닌 부부 사이의 책 선물이라는 게 참 좋아졌다.
설핏 발렌타인데이에 선물하면 좋은 책인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 더불어 영화 《세렌디피티(우연, 인연, 운명적인 사랑)》를 떠올렸다. 헌 책방에서 돌고 돌아 내 손에까지 오게 된 책이 아닌가. 《세렌디피티》의 줄거리를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뉴욕의 한 남자와 한 녀자가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반한다. 남자는 녀자에게 다시 만날 수 있는 련락주소와 전화번호를 묻는다. 녀자는 남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백에 넣었던 책의 첫페지에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어서 헌 책방에 넘긴다. 인연이 될 수 있다면 그 책이 남자에게로 가게 되리라. 거기에 남겨진 주소와 전화번호에 따라서 남자에게서 련락이 오리라. 그 때 되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녀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7년이란 시간이 지나서 남자와 녀자는 서로를 찾아떠난다. 남자가 녀자에게 건네려고 했지만 바람에 날려간, 전화번호가 적힌 5딸라짜리 지페는 이 사람 저 사람들 손에서 떠돌게 되고. 녀자가 헌 책방에 넘겼던 책은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다.
내 인생의 책을 굳이 한권으로 좁히라고 한다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꼽을 수 있다. 마르케스의 광팬이면서도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마르케스답지 않을 소설일 거라는 편견으로 외면을 했었는데 영화 《세렌디피티》에 이끌려 찾아 읽고는 사랑의 순애보를 생각하며 사랑의 미리보기를 하게 되였다. 더불어 마르케스를 더 사랑하게 되였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최씨 녀자도 어쩌면 남편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을지도, 아니면 어떤 인연을 확인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어찌 되다가 잘못된 우연으로 내 손에까지 들어오게 되였고.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급했다. 속독을 해서 속히 중고서점으로 넘겨야 한다고, 내가 소장하고 있을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최씨 녀자가 어떤 좋지 않은 일로 남편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던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길 바라면서.
련휴의 책으로 내가 골랐던 책이름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그래요. 이 한권의 책으로 부부의 어떤 인연을 확인하시고 부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조원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꼬마와 놀다가 다투게 되였단다.
돌멩이로 상대 꼬마의 이마를 때렸지.
아빠는 선생님께 호출당했어.
꼬마의 할머니께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할 수 밖에.
짱구머리가 더 짱구가 되여버린 꼬마의 머리를 보면서.
뻐스에서, 화단을 에돌면서, 엘레베터에서
아빠는 아이를 무시했단다.
아이를 바짝 끌어붙이면서.
갸 이마 엄마달처럼 부어버렸어.
엄마 없는 빈 집에 들어서면서 아이는 중얼.
아이의 눈에 달은 부어있었던가봐.
달도 아프면 울고, 울어서 얼굴이 부어버린 줄로 알았겠지.
다섯살은.
열네살의 작은 남자가 어릴 적 이야기를 해달라기에 아직은 젊은 사내가 말했다. 작은 남자와 아직은 늙지 않은 사내는 아핫핫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나니 웃음은 작아졌으며 헐겁게 늙어갔다. 둘 사이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고요한 침묵은 약속처럼 둘을 둘러쌌다. 침묵은 둘 사이를 떼여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겨운 거리감이였다. 둘은 고요를 더듬으며 서로를 사랑하기로 했다.
웃음소리가 손가락말을 닮을 때
그냥 좋아지는 말이 있다.
‘어스름’이라는 불확실한 시간대의 소리와 빛갈을 한몸에 품고 있는 말이며 ‘다만’ 하면서 간절해지는 마음을 조심스레 열어보이는 말이며 바깥과 안쪽의 경계를 허물려는듯 이으려는듯 주춤의 표정인 ‘창窗’이라는 말이며, ‘순간’이라는 말이며.
한동안은 좋아지는 특정된 말 하나 둘로 여러날을 먹고 살 수 있을듯하다. 그냥 밥처럼, 그냥 떠올리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을 그리워하듯.
요즘 자꾸 새김질하는 말은 ‘사이’이다. 시간과 공간의 틈을 뜻하는 ‘사이’를 생각하다 보니 홀로써는 불가능한, 상대적인 관계라는 말에까지 걸어들어간다.
사이봄, 사이여름, 섬과 섬 사이, 눈 깜짝할 사이, 너와 나와 우리 사이, 덩굴식물과 담벽의 사이, 동경 116도와 동경 126도의 사이, 물 끓는 사이, 거미줄에 걸려있는 해빛과 날벌레 그림자와의 사이, 해와 달의 사이, 울고 있는 사이, 잘려진 나무 단면에 박혀있는 나이테들의 사이, 이런 사이와 사이를 연缘이라는 끈으로 이어주게 된다면 무수한 별자리가 만들어지겠다. 별자리들 사이의 마음의 결도 보기 좋겠다.
몰라도 만나야 하는 사람,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나는 한때, 아니 지금도 가끔 힘들어한다. 어쩔 수 없음이 속보일 것 같아 애써 낯가림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느라면 홀로 하는 시간, 늦은 밤이면 몸을 뒤집는다. 난 몰라 하면서 돌아누우면 진짜 모를 것 같지만 다시 진짜 몰라 하면서 몸을 뒤척이면 얼마간 더 알 것 같아서 몸 밑에 깔려있는 침대의 관절은 소리를 거듭한다. 타인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던졌던 롱담이 두께로, 무게로, 색갈로 남지 말기를 감히 롱담처럼 거두어들일 수 없다. 오른쪽 식지를 만져본다. 아직 지문이 닳지 않아 다행이다. 근간에는 부쩍 입말보다 손가락말을 수없이 한 것 같다. 내 손가락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였을지 모르겠다.
추카추카, 켁, 넵, 얍, 짜잔, 께임, 이빠이, 감솨, 홧팅… 자주 애용된 내 손가락말을 라렬해본다. 이런 말들은 대개 쌍으로 덤벼드는 된발음으며 부드러움이 거세당한 거센소리이다. 병영이나 어느 훈련소의 구령 만큼이나 언어의 온도는 랭각되였으며 과열되였다. 사람이 살기 좋은 온도는 18도에서 20도라고 한다면 언어의 온도 적정치도 이쯤 되지 않을가 생각한다. 언어의 온도가 최상의 온도일 19도로 맞출 수는 없어도 랭각과 과열은 아니지 싶다. 또한 언어의 질감도 서걱거린다. 이런 손가락말들은 자신의 강한 의지의 표명은 물론, 상대에게로 향한 방어 혹은 공격의 함의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한듯하다.
관계의 외연을 넓히다 보면 낯설어지는 자신을 만난다. 대인관계는 보다 채워지는듯하지만 마음의 가난은 가난으로 남는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을 채 알아가기도 전에 멀리에 있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더 궁금해진다. 잘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는 리해를 앞세우다 보면 오해의 오해로 깊어지겠고 오해된 사이는 사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되여버리겠다. 기묘하고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오르간을 타듯 타인의 마음을 타다 보면 앓음이 시작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피로를 느끼면서 얼마 만이라도 말을 적게 하자면서 마음을 다독이고 다독인다. 이미 경험한 바를 잘 건사하기 위해서는 세련된 절제가 필요하다면서 휴대폰을 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빼돌리고 나 없는 사이에 뭔 일이라도 생길지 몰라. 모임의 자리를 졸면서라도 끝까지 버텨야 돼.” 하던 친구의 헐거운 말처럼 휴대폰 세상 속이 궁금해져 슬그머니 또 손길이 간다. 멈춰있는 관계는 없으며 관계는 움직이려 하는 것이므로 가까워지든 멀어지든 단단한 자신을 키워야겠다. 뭐가 어긋났는지 살피고 아귀를 잘 맞추어 거침없이 달려야 할 뿐.
“사타구니께가 간지럽다 / 죽은 형제 옆에서 / 풀피리처럼 울던 아기 고양이 / 잠결에 밑을 파고 든다”로 시작을 해서 “우리는 타인이라는 빈 곳을 더듬다가 지문이 다 닳는다” 로 끝나는 시 <더듬다>(허은실 시집 《나는 잠간 서럽다》에서)의 시귀로 글을 마감한다.
사이여름, 하풍夏风에 실려오는 것들을 적어본다.
라인, 모기와 파리, 볼륨, 자두빛, 저녁노을, 감기, 나른함, 선글라스로 보는 태양, 들려주는, 옮는다, 설핏, 부산, 거부할 수도 있는 거야, 해직자, 읽는, 쉽게, 새 소년, 묘비명은 ‘다시 돌아올 겁니다’, 감정, 유일한 방법, 인간은, 흔히, 맛이 변한다, 음지식물, 할머니는 웃고 있다, 보관 중, 겸손, 오로지 나만, 조금 달라지겠지, 일년에 천사백륙십번 이상 꿈을 꾼다, 책을 써라는 말, 깜깜한, 듬직하고 다정한, 해녀, 이끼, 핑크빛 사랑, 쉽게, 의지와 운동 사이에는, 빵, 자신과의 관계, 죽음에 너무 깊게, 치자나무꽃 흔적, 참 놀랍다, 느끼는 척, 내 말은, 그렇게까지, 아리다, 공복에, 돈의 참다운 용도, 뚝뚝, 연약한 한줄기의 갈대, 감실거린다.
하지
내 출퇴근길의 코스는 정해져있지 않다. 출근의 대기장소와 퇴근의 도착장소는 길 하나를 사이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통근차는 변함없이 정차되지만 나는 번마다 다른 길을 고른다. 골목과 골목들이 이어주는 좁은 길을 에돌아다닌다. 골목에서 진행되는 여러 사연들을 스쳐지나면서 간혹은 발걸음을 멈추고 폰카에 담아보기도 한다. 골목의 표정은 여러날이 지나게 되면 모양새를 바꾸기도 한다. 그 변화되는 모습을 보려고 출퇴근 코스를 자주 바꾸게 되였을지 모른다.
내 출퇴근길의 코스 중에는 고물상네 울안을 스쳐지나는 골목길이 있다. 다른 골목길보다 유난히 좁고 휘여져있으며 음지도 짙다. 고물상네라면 대개는 고단하고 비루하고 루추한, 별로 썩 밝지 못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지만 내가 지나다니는 골목길에 있는 고물상네 울안은 늘 산뜻했다. 연두색의 격자무늬 철제대문은 마냥 반 쯤 열려져있다. 울안의 대부분 공간에는 여기저기에서 실려온 재활용 페기물들이 높다라니 질서정연 적치되여있다. 입구 쪽의 작은 공간에는 안성맞춤하게 받침대를 놓아두었는데 그 우에는 역시 어디에서 주어온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화분들이 대부분이다. 여러 집들에서 버려진 화분들이다 보니 모양새는 참 다양하다. 허리가 불룩 튀여나온 백자항아리며 플라스틱의 소박한 그릇이며 새노란 옴팡진 질그릇이며 낮고 엷은 거의 접시모양의 화분도 있다. 키높이도 들쑥날쑥이고 몸통도 제가끔이라 여러 주인집 사람들의 취향과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보기 좋다. 화분들에는 꽃나무들이 심어져있고 더러는 꽃을 피워올리고 있다. 화분들의 뒤배경이 되여주는 것은 우아한 분위기를 즐겼을 어느 젊은 싱글 남자의 방에 걸려있었을 법한, 남자에게 키스하는 녀자의 반쪽 옆 얼굴이 클로즈업되여있는 흑백의 예술사진을 품고 있는 액자이다. 과장되게 넓은 진붉은 색의 액자는 에로틱한 사진과 멋스럽게 어울린다. 받침대 아래로는 언제나 분사기가 놓여져있고 그 옆에는 잘 닦여진 장독, 그 장독의 아구리를 덮어주는 접시 우에는 다육식물이 심어져서 얹혀져있다. 그 곁에 있는 허리께까지 오는 높이의 큼직한 항아리는 반 정도는 깨여져나가 속을 보이는데 그 안쪽을 흙으로 채워 덩굴식물을 심었다. 덩굴식물의 줄기는 받침대 우로 높게 솟은 파이프를 타고 오르고 있다.
이렇게 세세히 고물상네 울안의 입구 정경을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곳에 대한 내 애정하는 마음도 마음이려니와 휴대폰 앨범에 남겨진 덕분이기도 하다. 그 울안의 아늑한 정취에 홀려서 몇번을 폰카에 담아보았지만 시야가 막혀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락 없는 촬영은 범죄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최상의 이미지를 담으려고 고물상네 울안으로 고심 끝에 선뜻 들어갔다. “핫따, 별 꼴 다 보겠어야.” 하는 성난 남자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피사체를 세번째로 폰카에 담을 무렵이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할아버지였었겠는데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울안을 뛰쳐나왔다. “함부로 그리 하능 거 아니여.” 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철제대문이 닫기는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골목길로 냅다 뛰였다. 숨이 차올라 더 뛸 수 없을 때까지. 두근두근의 가슴을 누르면서 휴대폰 앨범을 확인하였다. 사진은 생각 대로 잘 나왔지만 죄송합니다 하고 할아버지께 사죄라도 했을걸 하면서 마음을 쓸었다.
무단침입 사건이 있고 나서 그 골목을 한동안은 걸을 수 없었다. 두려움도 두려움이였겠지만 다른 골목에서 터지는 개나리, 벚꽃, 목련, 철쭉, 튤립의 봄의 환호며 감, 대추, 석류, 포도들의 여름의 얼굴을 만나고 다니느라 그 골목을 한동안 잊고 있었다.
계절의 흔적을 몸에 기록해두려는듯 계절마다 자잘한 병이 내 몸에 들어섰다. 불볕더위에는 바깥 온도와 실내 온도의 격차로 여름감기는 어김없었다. 지난 여름의 어느 점심나절, 밤새 차올랐던 신열로 앓다가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약국을 찾아나섰다. 몸이 아프면 반드시 지름길을 선택하게 되여있으며 주위 사물들에 관심을 가져볼 수 없다. 오직 자신의 아픈 내면으로 향해지는 법이니까. 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약국으로 향한 최단의 거리는 고물상네를 지나는 골목길이였다.
참 오랜만이다 하며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고물상네 울안 앞에 다달아서 나는 걸음을 한참 멈추었다. 늘 산뜻했던 고물상네 울안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가전전자제품 싸게 드립니다”. 입구 웃쪽 전자전광판에는 이런 문구가 궁서체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성들여 꾸며졌던 작은 정원의 자리에는 낡은 에어콘과 선풍기가 놓여져있었다. 그 앞에는 어느 옷가게 쇼윈도에서 옷이 벗겨진 채로 옮겨져와서 앉아있는 마네킹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왼쪽 손목 아래 부분이 잘려져나간 전라全裸의 남성 마네킹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여 까만 몸통에 정오의 해빛을 한껏 받아들이고 있었다. 적치되였던 고물들은 어딘론가 다 실려가고 울안은 거의 비여있었다. 좀 지나면 이 집 저 집에서 쓰던 가전제품들이 자리를 채워갈 것이리라. 고물상네 할아버지의 행운을 빌어보았다.
누군가의 기억의 손때 묻은 것들이 모여있는, 버려져서 쓸모 있게 된 것들이 대화하는, 버려져서 버려지지 않은 것들을 구원하는 곳인 고물상네 울안, 그 울안을 보면서 “여름에도 감기 들 수 있잖어유. 개않아유, 아저씨. 아지도 여름 감기 들었어라.” 하고 고물상 할아버지께 말을 걸고 싶었다.
이날은 하지였다. 고물상네 할아버지의 설치예술은 일년 중에서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의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었다. 가장 짧은 하지날의 밤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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