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한어에서 ‘疾’은 작은 탈을, ‘病’은 큰 탈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중국 고대 문헌에 ‘疾이 더 중해지면 病이라 한다(疾甚曰病)’는 註釋문이 있는가 하면 <說文解字>에도 ‘病’을 ‘疾加(질이 중해진 것)’라 해석하였다.
조선어 한자어에서도 ‘질(疾)’은 작은 탈, ‘병(病)’은 큰 탈을 일컬었다. 이를테면 큰 탈 ‘문둥병’ ‘폐병’ ‘정신병’ 등을 절대 ‘문둥질’ ‘폐질’ ‘정신질’ 이라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작은 탈 ’치질(痔疾)’ ‘간질(癎疾)’ ‘구역질(嘔逆 疾)’ 등을 절대 ‘치병(痔病)’ ‘간병(癎病)’ ‘구역병(嘔逆病)’이라 하지 않는다.
신체 장애자를 ‘병신(病身)’이라 하지 ‘질신(疾身)’이라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신체 장애자는 그 장애가 작을지언정 큰 탈로 보았다는 의미겠다.
고한어에서 ‘疾’은 ‘생리, 육체상의 탈’의 뜻으로부터 ‘행위, 도덕상의 흠’으로 의미를 확장해 썼다. <孟子•梁惠王下> ‘寡人有疾, 寡人好勇’ ‘寡人有疾, 寡人好貨’ ‘寡人有疾, 寡人好色’ 중의 ‘疾’은 모두 '행위상, 도덕상의 흠'을 말한다.
조선어 한자어에서 ‘질(疾)’의 ‘행위, 도덕상의 흠’이라는 뜻은 한어보다 더욱 보편적이다. 이를테면 ‘도적질’ ‘오입질’ ‘쌍소리질’ ‘욕질’ ‘싸움질’ 등은 큰 흠이다. ‘離間질’ ‘고자질’ ‘흉질’ ‘삿대질’ ‘손가락질’ ‘잔소리질’ ‘광대질’ ‘주먹질’ 등은 작은 흠이다.
자질구레한 행위도 이에 포함된다: ‘태질’ ‘트림질’’하품질’ 등. 심지어 흠인지 흠이 아닌지 명확치 않은 행위도 높이 말하지 않을 때는 ‘질’을 쓸 수 있다: ‘새김질’ ‘빨래질’ ‘대패질’ ‘선생질’ ‘다림질’ ‘낚시질’ ‘칼질’ ‘찜질’ 등.
‘疾’은 고한어에서는 ‘짇[dzit]→짓’으로 읽는다. 조선어의 ‘짓’도 한자 ‘疾’과 관련이 있을 듯 하다.《論語•陽貨》:‘古者民有三疾, 今也或是之亡也 (옛날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짓이 있었으나 자금은 없어진 듯 하다)’. 이 례문의 ‘짓(疾)’은 조선어의 ‘나뿐 짓’ ‘엉큼한 짓’ ‘엉뚱한 짓’ ‘손짓’ ‘발짓’ 등의 용법과 류사한 듯하다.
어쨌든 우리말에서 ‘질’이건 ‘짓’이건 다 좋은 행위, 높이 말하는 행위에 쓰지 않는다. 고작해야 ‘노릇’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자 ‘疾’과 련결시키는 데는 무리가 없겠다.
고한어에서 ‘疾’과 ‘病’의 이런 차이점은 그리 분명하지 않았으며 先秦 문헌에 이미 헛갈려 썼다. 아마 先秦 초기 또는 商나라 때 ‘病’과 ‘疾’을 엄격히 구분해 쓰다가 先秦 중기부터 헛갈린 듯 하다.
흥미로운 일은 先秦 漢語에서 ‘病’과 ‘疾’의 구분이 흐린데도 불구하고 조선어 한자어에서는 이런 구분이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민족이 先秦 이전에 이미 한자문화와 깊숙이 관여돼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필자가 주장하는, 商나라를 세운 우리민족이 한자를 만들어 썼다는 증거의 한 단면이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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