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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강참안》의 발생지 화련리에는 누가 살고있었나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월23일 21시28분    조회: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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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장도철도(해방전 길회철도 1932년-1933년 부설)와 장훈고속철도가 나란히 마반터널을 뚫고지나가는 그곳 남쪽으로 약 30여리가량 길게 뻗은 깊은 산골짜기가 있다. 그곳이 바로 1930년대초 일제놈들의 피비린 대학살이 감행된 《해란강참안》의 발생지 화련리(花莲里)이다.

화련리는 이주민들의 보금자리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 전홍철촌주임은 얼마전 우리 취재진을 안내하여 해란강과 부르하통하의 합수목동쪽 강변길을 따라 차를 달렸다. 원 마반 3대 마을 산어구에서 화련리로 꺾어들어 산막바지까지 치달아오르던 차는 한 돌무지앞에 멈춰섰다.

《여기가 바로 당년 학교촌이 자리잡고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공산당원과 무고한 백성들이 일제의 총칼에 학살당하고 생매장당했는지 모릅니다. 1932년초부터 1년 반도 안되는 사이에 일제와 그 주구들은 이곳 화련리를 94차례나 포위토벌하여 1700여명이나 무참히 학살하였습니다.》

전촌주임은 모름지기 격동된 어조로 소개하면서 무덤이라기엔 너무도 어설픈 돌무지우에 비스듬히 세워져있는 돌비석을 어루쓸었다. 거기엔 《혁명렬사묘지-1967년》이라는 글자가 어슴푸레 씌여있었다.

화련리는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이주민들의 발길이 닿으면서 마을이 생겨났다고 한다. 특히 1910년 일제놈들이 조선을 강탈하고 식민통치를 감행함에 따라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이주민들은 회령방면에서 오랑캐령을 넘고 선바위를 지나 또는 종성방면에서 개산툰, 월청, 삼동, 석건평 등지를 거쳐 산속 깊은 화련리에 들어와 괴나리보짐을 풀고 뙈기밭을 일구며 이곳을 보금자리로 삼았다. 

《9.18사변》이전까지 이곳에는 류정, 중개동, 학교촌, 하촌, 계림촌 등 14개 마을에 700여세대의 조선간민들이 살고있었다. 10년대에 벌써 반일운동의 선구자와 유지인사들이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사립교육운동의 조류속에서 학교를 세워 계몽운동과 함께 근대문명과 반일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룡정 《3.13》반일운동전후 화련리는 반일항일단체인 간도국민회의 주요거점의 하나였다. 1920년 《경신년대토벌》이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령도되였던 연변지역 반일운동은 저조기에 들어가고 사회주의사조가 전파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학교촌에 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화련리는 중공해란구위의 소재지로서 이곳 화련리인민들은 토지혁명과 고리대를 반대하고 소작료와 가렴잡세를 거부하는 등 《추수》 《춘황》투쟁의 앞장에 섰다. 그들은 《소작료를 인하하여 ‘3.7’, ‘4.6’제를 실시하자!》는 투쟁구호를 웨치면서 량식탈취투쟁을 벌려 가난한 사람들이 기근을 넘길수 있도록 하였다.

《9.18사변》후 중공동만특위《옹성라자회의》지시정신에 따라 화련리인민들은 해란구위의 령도하에 량식탈취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일제주구를 청산하는 투쟁을 벌였으며 군중을 발동하여 적들의 손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무장조직을 건립하면서 항일유격투쟁에 궐기해나섰다.

피로 물든 화련리

《9.18사변》이후로 일본비행기가 국자가(연길)와 룡정 상공을 선회하였고 조선에 주둔하고있던 일본정규군 부대를 비롯하여 수백명에 달하는 군대가 연변으로 이동해왔다. 1932년 4월 2일,일본군 19사단 75퇀 퇀장을 지휘관으로 한 보병, 기병, 포병, 공병 등 병종으로 구성된 《간도파견대》가 들어섰고 4월 17일에는 관동군 히라가부대가 장춘에서, 쯔루미루부대가 녕안에서 군화발을 구르며 연변땅을 짓밟아왔다.

연변을 강점한 일제는 파쑈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경찰기구를 증설하고 많은 무장자위단을 조직함과 동시에 연변인민들의 항일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발광적인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1932년 4월 3일부터 7월 20일까지 연변 토벌에 동원된 비행기만도 380대에 달한다고 한다.

당시 일제는 중국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길림-회령(조선)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하였는데 마반산기슭에 크고작은 표말기대를 꽂아놓군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조선땅에서도 못살게 굴더니 중국에까지 따라와서 무슨 수작을 하는거냐!》 하며 기대들을 보는대로 뽑아버렸다. 이것이 곧 《공산당사건》으로 지목되였고 일제놈들이 화련리를 포위토벌하는 《빌미》로 되였다고 한다.

일제놈들과 그 앞잡이들은 《화련리를 훼멸시키고 마반산을 포격하며 주변공산당과 빨갱이를 소멸하자》, 《해란구공산당을 소멸하지 않으면 동만의 공산당을 소멸할수 없다》고 고아대면서 미친듯이 토벌에 달려들었다.

1931년 10월 15일부터 해란구에 대한 제1차 토벌이 시작되였다. 놈들은 농림동을 불의에 습격하여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총격을 가하고 집집마다 불을 달았다. 닷새후 일본령사관 연길분관에서는 하동무장자위단을 사촉하여 화련리로부터 해란구의 촌마다 대소탕을 하였다. 제때에 피신 못한 7세 어린이, 임신부, 외지에서 회의를 온 혁명간부 15명 등 수십명 간부와 군중들을 한곳에 끌어다 몽땅 불에 태워죽였다.

1932년 음력 3월 28일, 일본수비대 50여명과 무장자위단이 함께 남화련리 , 중개동, 류정촌, 학교마을을 소탕하였다. 집집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재물을 략탈하며 야수적인 《3광정책》을 실시하였다. 같은 날 걸만동경찰서장 노사끼는 일본군경과 자위단을 지휘하여 화련리에서 무자비한 대학살을 감행하고 또 삼동마을 40여호 민가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리삼달이네 15명 식구를 몽땅 총칼로 찔러죽였으며 공산당원 13명을 총칼로 학살하고 불태워버렸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10여명의 로인과 녀인들 그리고 어린애들을 생매장하고 마을을 떠났다

그날 창신동에서는 일제놈들과 몇십명에 달하는 순경 그리고 무장자위단놈들이 집집을 수색하면서 공산당원 오덕윤, 반제동맹위원회 김동률, 소선대중대장 황금송 등 5명을 체포하여 서산골짜기로 압송해갔다.놈들은 나어린 황금송을 불러내놓고 그앞에서 오덕윤의 목을 자르고 김동률의 열손가락을 끊어버린후 또 목을 쳤다.그러면서 황금송더러 《공산당원의 명단을 대지 않으면 너도 같은 끝장을 보게 된다.》고 위협하였다.

황금송은 오른손을 들어 놈들의 상판대기를 가리키면서 《죽는것이 두려우면 혁명을 하지도 않았을것이다. 네놈들이 오늘 우리를 죽일수는 있어도 혁명에는 계승자가 있을것이다.내입에서 비밀을 얻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말라. 이 실인악마같은 놈들아!》하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꾸짖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놈들은 황금송의 오른팔을 잘랐다.

황금송은 또 왼손을 들어 놈들을 가리키면서 《네놈들이 망할 날이 오래지 않다!》고 쏘아붙이자 놈들은 또 그의 왼팔을 잘랐다.황금송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중국공산당 만세!》를 소리 높이 웨쳤다. 그러자 놈들은 황금송과 두 혁명자들을 모두 무자비하게 총칼로 찔러죽였다.

그해 음력 8월 7일, 해란구의 항일유격소대는 류정촌에 모여 철도경비군의 무장을 탈취할 계획을 논의하였다. 변절자의 밀고를 받은 토벌대놈들은 이른 새벽부터 기관총 3정과 대포까지 걸어놓고 류정촌을 불의습격하였다. 해란구위서기 리상근을 비롯한 유격대원 및 당지 주민 56명이 잡혀 잔혹하게 학살당하였다. 이것이 화련리의 《8.7학살사건》이다.

놈들은 백성들을 학교마을에 끌어다놓고 백성들앞에서 공산당원들을 나무가리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죽이고 연자방아에 묶어놓고 석마돌로 갈아죽였다. 지어 사지를 뜯어 가마에 삶고 칼탕을 치고 석마종대에 달아매고 목에 칼을 박아 피를 받아 죽였다.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베고 껍질을 바르고 배속의 아이도 총칼로 찔러죽이는 등 온갖 상상도 할수 없는 악랄한 수단으로 인종을 훼멸하려 들었다.

놈들이 물러간후 요행 살아남은 녀인들은 놈들의 칼끝에서 잘려나간 마을사람들의 머리를 치마폭에 싸안고 부릅뜬 두눈을 쓸어감기며 피흐르는 손끝으로 땅을 허벼파며 매장하였다. 그 참상은 《경신년대토벌》보다 더 잔혹했다고 후날 사람들은 전하고있다.

 

전홍철촌주임은 이깔나무숲속으로 우리 일행을 인도하더니 꺼먼 잔바위가 모여있는 곳을 가리켰다. 《여기에 화련리 백성들이 석마를 찧어먹던 엄청 큰 연자방아가 있었습니다. 놈들은 이 석마돌로 공산당원 17명을 한꺼번에 갈아죽이기도 하였답니다…》 전촌주임은 비분에 치를 떨며 말을 더듬었다.

해란강참안 청산대회 및 오늘의 화제

광복후 1946년 5월 중공중앙은 《청산 감조 및 토지 문제에 관한 지시》를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연변에서는 성세호대한 한간, 주구 청산투쟁이 벌어졌다. 그가운데서 규모가 가장 큰 투쟁이 《해란강학살사건 청산대회》였다.

길림신문 김성걸 김영자 기자

중공연길현위에서는 항일투쟁중에서 가장 참혹한 시련을 겪은 해란구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해란구인민들의 항일투쟁사를 조사함과 동시에 대학살사건에 대한 세밀한 조사를 진행하고 청산대회를 소집할것을 결정하였다. 1946년 10월 30일 오전 10시, 연길시 서광장에서 《해란강혈안청산대회》가 거행되였다.

해란강대학살사건의 주범 18명이 푸주간으로 들어가는 소처럼 끌려나왔다.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피해자가족들의 두눈에서 불이 일었다. 연길현 위자구 하동촌에서 일제놈들에게 학살당한 남편(김학준)의 유서 《하동자위단 혁명동지 도살사건 실록》을 땅속 깊이 묻어두었다가 공작대에 제공하여 공을 세운 김신숙녀성이 연단에 올라 대학살의 주범 명단과 그 죄상들을 낱낱이 까밝혔다.

백발이 성성한 유일남의 어머니도 연단에 올랐다.《나의 맏아들 유일남과 둘째아들 유경준은 1932년 12월 11과 24일에 하동자위단에 붙잡혔습니다. 주구 박승준, 황병연, 허남철 등은 큰아들을 석마에 갈아죽이고 둘째를 칼로 찔러죽였습니다. 나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네살난 손자마저 살해하였고 며느리를 발가벗겨 끌고 다니다가 산골짜기에 끌어다 죽였습니다. 나 역시 놈들에게 끌려가 흙탕속에 산채로 파묻혔다가 마을사람들에 의해 구원되였습니다. 집은 재더미로 되고 나는 그 재더미속에서 오늘까지 살아오며 복수의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의 처참한 공소에 대회장은 비분으로 들끓었다.

3일간 진행된 공소대회에서 39명의 피해자가족들이 일본제국주의와 그 주구들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공소하였다. 나흘째 되는 날은 공개심판대회를 열고 죄범들의 죄장에 따라 사형, 무기형, 도형으로 응당한 판결을 내리고 당장에서 집행하였다. 당시 《인민일보》는 중화민국 35년 (1946년 ) 11월 3일 보도에서 《농촌으로부터 연길을 향하여》란 제목으로 해란강참안청산대회에 대해 대서특필하였다.

그번 대회에서 리삼달 등 7명 피해자가족대표들은 일치하게 《해란강참안》에서 희생된 혁명선렬들의 추도대회를 열고 항일렬사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영원히 항일투사들과 선렬들을 기릴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항일투사들이 묻혀있는 돌무덤에 세워져있는 기념비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세월의 비바람속을 간신히 버티고있었다. 역시 또 하나의 참상이라 하지 아닐수 없었다.

그 비석을 마주한 전홍철촌주임은 퍽 가슴이 쓰려났다. 《이곳은 우리 선조들이 피와 목숨으로 지켜온 삶의 터전입니다. 일제놈들의 극악무도한 죄장을 공소하고 항일인민들의 굴함없는 투쟁정신을 기리는 유서깊은 고장입니다. 그동안 우린 너무나 소중한것들을 잊고 살아온것 같습니다.》

전촌주임은 70-80년대까지만 해도 연길, 도문 등지로부터 이곳을 찾아 항일렬사들을 기리는 활동이 빈번하게 진행되였고 또 마반촌에서도 이곳 경작지를 리용하여 다각경리를 벌려오면서 래왕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나 언젠가 모르게 교통이 불편하고 수익이 별로 나지 않는 이 고장은 이제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말았다고 한다.

화련리의 유가족들은 지금도 가끔씩 마주앉아 《참안》을 화제로 열변들을 토하면서 누구든 잊지 않고있단다. 《이제 바야흐로 유가족을 중심으로 정부와 사회 각계의 힘을 빌어 이 유서 깊은 고장을 새일대 애국애족교양지로 건설할 타산》이라고 전주임은 어조에 힘을 실었다.

우리 일행은 준비해갖고간 제물을 돌무지제단에 올려놓고 술을 부으며 이름 한자 없는 무주고혼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자리를 뜨는데 빨간 꽈리가 무덤앞에 불 밝힌 초롱처럼 조롱조롱 달려있는것이 보였다. 전주임은 마을이 있고 집터가 있던 자리엔 이상하게 붉은꽈리가 저렇게 많이 익어가고있다고 하였다.

어쩌면 피 흘려 싸우던 항일투사들과 항일인민들의 혼이 붉은꽈리로 익어 집터를 지키고있는것은 아닌가싶은 생각이 갈마들었다.

(최장산 저 《해란강대학살사건》을 참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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