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혁명과 사랑의 불꽃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7월1일 13시44분    조회:137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그린 영화 <암살>의 스틸컷. (주)쇼박스 제공

박원희(朴元熙)는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회령의 한 여관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26살 나던 1923년 7월4일 아침 8시의 일이었다. 더운 때였다. 전날 최고 기온이 섭씨 31.5℃까지 올랐다. 아침나절이라 선선했지만 그런 기분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회령경찰서로 압송됐다. 국경 너머로 잠입해 들어오는 반일 독립군과 사회주의자를 적발해내는 데 귀신같은 능력을 발휘한다는 그 경찰서였다.

북간도 최초 사회주의 탄압 사건

혼자가 아니었다. 셋이 함께 붙들렸다. 젊은 여성이 둘이고, 남성이 하나였다. 모두 북간도의 중심 도시 용정에 소재하는 중등학교 동양학원 관계자였다. 박원희는 그 학교의 영어 교사였고, 32살의 건장한 남성 김정기(金正琪)는 그 학교의 설립자이자 서무주임이었다. 그는 북간도를 기반으로 조선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의 아들로도 유명했다. 그간 경영해오던 <동아일보> 용정 지국 경영을 접고 동양학원 설립과 운영에 전념하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나이 어린 진규(陳奎)는 그 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다. 세 사람은 동양학원이 파견한 강연단 멤버였다. 군중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능란하게 연설할 수 있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강연이 예정된 날이었다. 동양학원이 기획한 여름방학맞이 조선 내지 순회강연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회령을 필두로 청진·함흥·원산 등 함경남북도의 큰 도시들을 돌아 서울에서 마지막을 장식할 참이었다. 7월 한 달 내내 12개 도시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강연회 수입을 모아서 학교 확장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해 4월 설립된 신생 학교 동양학원은 북간도 조선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학년 204명, 2학년 54명이 등록해 학생 총수가 258명에 달했다. 설립 첫해 첫 학기가 지났을 뿐인데도 이미 학생들이 차고 넘쳤다. 학교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돈이 들었다. 북간도 동포들의 기부에 힘입어 새 학교 부지 4천 평을 마련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건축비가 모자랐다. 이 난관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학교 관계자들은 순회강연을 고안해냈다. 자금 마련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동양학원의 존재를 선전하는 기회가 되리라고 믿었다.

경찰은 무슨 혐의로 강연단을 체포했는가? 사람들은 강연 내용이 불온할까봐 미리 검속하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예측은 빗나갔다. 경찰의 목표는 강연회를 봉쇄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박원희 일행은 체포된 이튿날 첫 열차편으로 용정의 간도총영사관 경찰서로 이송됐다. 이른바 ‘동양학원 사건’이라고 하는 북간도 최초의 사회주의 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동양학원은 김사국·박원희 부부에게 북간도 망명 생활의 한 결실이었다. 부부가 해외로 뛰쳐나간 것은 1922년 11월 서울에서 발발한 자유노동조합 사건 때였다. 임박한 체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더욱 적극적인 목표를 수립했다. 조선 독립운동의 전통적 근거지인 ‘해도’(연해주와 북간도)에 사회주의운동 기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3·1운동 출소자와 인텔리 여성의 결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박원희. 전명혁 제공
 

박원희는 혁명가의 아내이자 그 자신이 견결한 혁명가였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돼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5월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창립에 참여했다. 14인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고, 창립 집행위원 3인 가운데 1인이었다. 창립 집행위원의 면면을 보면 흥미롭다. 박원희, 허정숙(許貞淑), 주세죽(朱世竹)이 그들이다. 셋 다 배우자가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허정숙의 남편은 임원근(林元根)이었고, 주세죽의 남편은 박헌영(朴憲永)이었다. 다시 말해, 여성동우회 창립 집행부는 커플 사회주의자들로 이뤄져 있었다.

박원희는 여성운동의 조직자였다. 각종 여성단체와 사회단체의 설립에 참여했고, 그 임원진에 취임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1925년에만 서울청년회 집행위원, 노동교육회 대회준비위원, 경성여자청년회 집행위원, 경성청년연합회 집행위원, 국제청년데이 기념식 준비위원을 역임했다. 이듬해에는 중앙여자청년연맹 집행위원에 취임했고, 그 이듬해에는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인 근우회 설립에 참여해 집행위원에 선임됐다.

박원희는 강연회의 단골 연사였다. 강연 요청이 있으면 기꺼이 응했다. 몇 가지 보기를 들면, 1924년 러시아혁명 7주년 기념 사상단체 연합강연회에서 ‘러시아혁명과 무산계급’이란 제목으로 연단에 섰다. 이듬해에는 서울청년회 춘계 강연회, 국제무산부인데이(여성의 날) 기념 강연회에 출연했다. 특히 여성문제가 중점 분야였다. 그녀의 강연 제목을 보면 ‘현대사회와 부인의 사명’ ‘국제무산데이의 유래’ ‘자유결혼 문제에 대하여’ ‘각국 부인운동과 조선 부인운동’ 등이었다. 서울과 지방도 가리지 않았다. 요청이 있으면 지방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북 이리, 평남 진남포, 평양, 안주, 함남 원산 등이 그녀가 다녀온 출장지였다.

일찍이 오빠 박광희가 젊은 시절 여동생의 인물됨을 평하되, “생각이 제법 깊고, 공부 성적도 좋으며, 연설 재주가 있다”고 했음이 인상적이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언변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단체 임원진 내에서 역할을 분담할 적에는 으레 교양부를 맡았다. 회원과 일반 대중을 상대로 교육·선전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어린 딸의 육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린 사건이는 몸이 약했다. 고열이 나고 앓는 경우가 많았다. 박원희가 딸을 업고 서둘러 병원에 가는 모습을 목도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목격자에 따르면 “흰 저고리 흰 치마에 어린 아기를 절구통같이 들쳐 업고, 부스스한 트레머리로 더풀더풀하며 재동 네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박원희도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 김사국과 마찬가지로 건강을 잃었다. 1927년 12월 초에 시작된 몸살감기가 그녀를 중병으로 몰아갔다. 전혀 예기치 않게 급속히 병세가 악화됐다. 이듬해 1월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31살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사람들은 몹시 놀랐다. 그뿐이랴. 그 가족에게 거듭 몰려오는 불운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홀로 남은 어린 딸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철모르는 사건이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부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밖에서 나는 조문객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엄마 온다고 부르며 울었다. “이 애를 보는 사람 누군들 눈물을 참을 수 있겠는가?”비극이 꼬리를 무는 이 집안의 가족사를 취재하던 신문기자는 이렇게 썼다.

혁명가 부모 죽음 뒤 ‘사건’이의 삶

박원희의 장례식은 1928년 1월10일 거행됐다. 근우회를 비롯한 34개 사회단체가 합동으로 장례식을 주관했다.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 고 박원희’라는 명정이 덮였다. 그녀는 2년 전에 먼저 간 남편 김사국의 수철리 묘지에 함께 안장됐다.

사건이의 운명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부모 없이 자라야 할 아이의 미래가 안쓰러웠다. 북간도 용정에서 박원희와 함께 일했던 옛 동지들이 그녀의 1주기가 되던 날 추도회를 열었다. 용정의 여자청년회 주최로 열린 추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어린 사건이에게 위로금 10원과 저고리 하나를 만들어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조선일보> 1928년 4월8일치 지면에 고 박원희의 어린 딸에게 전달할 돈과 물건이 도착했다는 보도 기사가 자그맣게 실렸다.

사건이는 잘 자랐다. 다행히 외할머니가 양육을 맡았다. 박원희의 친정어머니가 일찍 가버린 딸을 대신하여 어린 피붙이를 길렀다. 박원희가 사망한 지 5년 뒤에, 한 신문기자는 9살로 성장한 사건이가 서울 북촌의 재동보통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고 보도했다.

 

참고 문헌

① ‘동양학원 巡講, 의외의 禍로 중지’, <동아일보> 1923년 7월15일치

② 재간도총영사 鈴木要太郞, ‘기밀 제271호, 동양학원 학생 조사에 관한 건’ 1923년 8월27일/ <불령단관계잡건-재만주의 부> 3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③ ‘간도 동양학원, 내지 巡講 계획’ <동아일보> 1923년 7월5일치

④ Ким-Хобан(김호반), Доклад(보고), 1923년 10월30일, с.6,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83 л.108-114

⑤ 새밝, ‘고 박원희 여사 회상’ <삼천리> 3-12, 18쪽, 1931년 12월

⑥ <매일신보> 1921년 7월30일치

⑦ 김사건, 장묘시설사용허가신청서, 1993년 12월18일

⑧ ‘여성동우 창립’ <동아일보> 1924년 5월11일치

⑨ 車相瓚, ‘想像과 印象記, 만나보기 前과 만나본 後: 朴元熙氏’ <별건곤> 3, 43쪽, 1927년 1월

⑩ ‘路上의 人’ <별건곤> 4, 39쪽, 1927년 2월1일

⑪ ‘비극 接踵하는 고 김사국씨 가정 (3)’, <동아일보> 1928년 1월9일치

한겨레21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59
  •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용정 지신진 성동촌 염지밭골의 옛 가옥, 최서해가 한때 이 마을에서 살았다고 한다. (흑룡강신문=하얼빈)오랑캐령을 넘으면 솟을 바위 하나가 북쪽에서 엎어질듯 달려온다. 대립자(大砬子), 중국말 발음 그대로 달라자라고 불리는 벼랑바위이다. 두만강을 건넌 이민들은 이때부터 간도 땅을 발로 ...
  • 2018-06-12
  • ‘력사민속’ 동인들이 두 저자에게 꽃다발을 드렸다.(좌2 박용일, 좌3 리광인)  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와 더불어 청년문사로 널리 알려진 조선족 항일독립운동가, 시인 송몽규의 평전이 리광인, 박용일 두 작가의 합작으로 일전에 연변대학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여 출간식을 가졌다. 《겨레 항일지사들...
  • 2018-05-07
  • [머니투데이 구유나 기자] [한미 수사공조 통한 3번째 문화재 환수 사례…다음달 2일 대통령 전용기편으로 입국] 30일 오전 11시(현지시간) 워싱턴 소재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열린 '문정왕후어보'와 '현종어보' 반환행사. 왼쪽부터 김연수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장,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
  • 2017-07-01
  • 임경석의 역사극장 비합법과 합법 운동 병행하며 초기 사회주의운동에 큰 족적 남긴 김사국·김사민 형제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 활동 주도하다 폐결핵으로 숨지고 정신이상 비극적 생애 아일랜드 해방투쟁에 참여한 한 형제의 비극적 삶을 그린 켄 로치 감독의 (2006). 한겨레 자료 “김사국...
  • 2017-07-01
  •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그린 영화 의 스틸컷. (주)쇼박스 제공 박원희(朴元熙)는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회령의 한 여관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26살 나던 1923년 7월4일...
  • 2017-07-01
  • 이인정 민화협 의장 '의병의 날' 맞아 '일통청화공' 친필 전해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순국 전 일본인 간수장 기요타에서 써준 유묵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 한중연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쓴 친필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 유묵이...
  • 2017-06-01
  • 장덕준 선생 6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동아일보 논설기자로 1920년 10월 간도참변을 취재하러 갔다가 11월 일본군에 피살된 추송 장덕준 선생. 그해 7월 27일 모습이다. 그는 이 사진을 찍은 뒤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방중한 미국 의원시찰단에게 일본의 불법행위를 설명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추송 장덕준 ...
  • 2017-05-31
  • (서울=연합뉴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마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7년 3월2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망국의 한을 품...
  • 2017-02-16
  • [박종인의 땅의 歷史] 고구려 땅 만주벌에서 잊고 있던 그들을 만났다 조선족 사학자 전정혁과 우리가 잊고 있는 조선인 이야기 만주 벌판을 누비며 독립 위해 목숨 바친 그들 양세봉… 이홍광… 동료들 대신 죽은 조선인 여전사들 광개토왕을 외치고 만주땅을 논하는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
  • 2016-11-30
  • '위안부', 그들은 력사의 산 증인 —중국대륙의 마지막 “위안부”들을 찾아서 생전에 동료와 함께 석문자위안소자리를 확인하러 나선 리수단할머니(오른쪽) 사진/ 안세홍 “만주북부”의 마지막 “위안부” 생을 마감 올해 5월 17일, 흑룡강성동녕현경로원에 살고있던 리수단...
  • 2016-11-27
  • 추석인 15일 서울 종로구 단군성전에서 대종교의 창시자이자 항일 독립운동 투사였던 홍암(弘巖) 나철(羅喆·사진·1863∼1916) 선생의 서거 10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186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그는 을사오적 살해를 시도했고 이후 일제의 탄압에 저...
  • 2016-09-16
  • ▲  인천개항박물관 1층 입구 ⓒ 김영숙 관련사진보기 인천개항박물관 광복 71주년 특별전 '만주 아리랑-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삶과 기억' 인천 중구 한중문화관이 광복 71주년을 기념해 인천개항박물관에서 '만주아리랑-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삶과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하고 있다. 8월 10일...
  • 2016-09-03
  • 박근혜 한국 대통령 화환 보내와 주심양 한국 총영사관 빈소 찾아   (흑룡강신문=하얼빈) 리인선 기자, 함명철 특약기자= 위안부 출신 조선족 리수단 할머니가 5월 17일 오후 3시께 흑룡강성 동녕현 양로원에서 95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로써 흑룡강성에 남은 마지막 한 명의 위안부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
  • 2016-05-22
  •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2년 뒤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우당(友堂) 이회영은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회영은 가족과 함께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만주에 도착한 ...
  • 2016-04-29
  • 오늘은 '3.1절',1919년 조선반도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간도(현재 연변)에서도 3월 13일 '만세운동'시위에 나선 조선인들에게 북양군벌정부가 발포하여 19명이 사망된다. 이에 격분한 독립군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대거 섬멸한다. 그 이듬해인 1920년 일제는 간도의 독립군을...
  • 2016-03-01
  • 연병환 충대 박걸순 교수 구체적 사료 발굴 日 보고서 "연병환 체포로 불량배 종적이 끊겼다" 일경,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자 아편혐의 체포 [충북일보] 1919년 3.1 만세운동은 해외로도 번지면서 만주 용정지역에서도 일어났고, 이를 막후에서 지원한 인물은 증평출신 연병환(延秉煥, 1876~1926)이었다는 사실이 구체적...
  • 2016-02-28
  •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30분에 열린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됐다. 발렌타인데이를 맞은 2월14일 현재 한국에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과소비와 거품 상술로 변질되고 있는 밸런타인데이를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날로 정하자는 여론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2016.2.14/뉴스1 SBS
  • 2016-02-14
  • 오늘날 장도철도(해방전 길회철도 1932년-1933년 부설)와 장훈고속철도가 나란히 마반터널을 뚫고지나가는 그곳 남쪽으로 약 30여리가량 길게 뻗은 깊은 산골짜기가 있다. 그곳이 바로 1930년대초 일제놈들의 피비린 대학살이 감행된 《해란강참안》의 발생지 화련리(花莲里)이다. 화련리는 이주민들의 보금자리 도문시 장...
  • 2016-01-23
  • 사회 각계 인사들과 여러 매체 선전의 힘을 입어 전국교육계통에서 유일한 '조선족항일렬사기념관'이 룡정중학 대성중학전시관의 1층에 위치하고 있는 창고자리에 80평방미터 면적의 기초건설이 가동되었다.   룡정중학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소유한 민족교육의 요람으로서 건교이래 수많은 우수...
  • 2015-12-23
  • 박건일교수의 "내가 알고있는 한락연" 좌담회 북경에서 개최    (흑룡강신문=하얼빈) 11월 27일 중국사회과학원 박건일교수의 "내가 알고있는 한락연" 좌담회가 북경에서 개최되였다. 민족출판사 사장 우빈희, 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리춘일, 룡정한락연연구회 박호만 회장, 연변대학 북경학우회독서회, 북경애심녀성...
  • 2015-12-0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