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인 15일 서울 종로구 단군성전에서 대종교의 창시자이자 항일 독립운동 투사였던 홍암(弘巖) 나철(羅喆·사진·1863∼1916) 선생의 서거 10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186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그는 을사오적 살해를 시도했고 이후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다가 1916년 음력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날 추모제는 민족 번영을 목적으로 결성된 모임인 ‘코리아 글로브’가 주최했다. 먼저 집사(제사를 도와주는 사람)가 단군성전의 문을 열고 절을 하며 선생의 혼을 모시는 ‘분향강신’(신을 모시는 의식)을 했다.
이어 사과, 배, 포도, 한과, 대추 등이 올려진 제사상 앞에서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절을 하고 술을 올렸다. 아울러 참석자들은 비나리(조상에게 고하는 의식)를 통해 선생에게 후손들의 뜻을 전했다. 이후 선생을 추모하는 묵념과 함께 그의 영원한 안녕을 비는 인사를 하며 의식을 마무리했다.
참석자들은 “대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이었다”며 “일제강점기 살아남은 독립군 20만은 홍범도가 됐다”고 말했다. 특히 김석규 코리아 글로브 상임이사는 “국민이 김좌진 장군, 신채호 선생을 독립투사로 잘 알고 있지만, 독립운동의 밑바탕을 만든 나철 선생은 잘 모른다”며 “대종교는 단순히 종교가 아닌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든 깨달음”이라고 강조했다.
선생이 대종교를 창시한 것은 19090년이다. 이후 1년 만인 1910년 교도 수가 2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10년 만주 북간도(北間島)에 지사(支司)를 설치했다가 1914년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 본사(本司)를 아예 만주 북간도로 옮겼다.
1916년 선생이 타계한 뒤 2세 교주 김교헌(金敎憲)이 취임했다. 그는 대종교의 종리(倧理)라 할 수 있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고, 3·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가는 동포들을 포섭해 그들로 하여금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실제로 1920년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청산리전투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 대부분은 대종교 신도였다고 한다.
2세 교주 김교헌이 사망한 1923년 무렵에는 한국과 만주, 러시아 연해주, 중국 본토 등지에 총 48개의 시교당(施敎堂)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이 취임했을 당시는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고, 1932년 이른바 만주국 탄생과 더불어 대종교도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며 “당시 한국과 만주 일대에서의 대종교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요, 대종교의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라고 평가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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