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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그들은 력사의 산 증인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1월27일 10시43분    조회: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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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그들은 력사의 산 증인
—중국대륙의 마지막 “위안부”들을 찾아서

생전에 동료와 함께 석문자위안소자리를 확인하러 나선 리수단할머니(오른쪽) 사진/ 안세홍

“만주북부”의 마지막 “위안부” 생을 마감

올해 5월 17일, 흑룡강성동녕현경로원에 살고있던 리수단할머니(한족이름 리봉운-李凤云)가 95세로 세상을 하직하면서 “만주북부”의 마지막 “위안부”가 생을 마감하게 되였다.

21일, 리수단할머니의 장례식에 참가하고 귀가한 원 훈춘시정부 래신래방판공실 퇴직간부 엄관빈선생(71세)은 “리수단할머니는‘위안부’할머니들중에서도 가장 불쌍한분”이라고 했다.엄선생은 20년간 조선족위안부할머니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해온분으로서 그들의 상황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리수단할머니는 열아홉살나는 해 조선 평양근처에 살다가 ‘밥 짓고 빨래하는 잡부’로 취직을 시켜준다는 일제놈들의 속임수에 걸려 흑룡강성에 와 5년을 “위안부”로 살았다.“위안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일본인 주인이 지어준 “히도미”라는 이름으로 일본옷을 입고 독방에 갇혀 낮에는 병졸들을, 밤에는 군관들을 하루에 수십명씩 접대해야 했다. 하지만 주인은 하루에 수수밥 한웅큼밖에 주지 않았다. 하도 배가 고파 무우를 훔쳐 먹다가 주인한테 들켜 피 터지게 두들겨맞기도 하였다.

석문자위안소에서 함께 지내던 "위안부"들(왼쪽으로부터 리수단, 지도리, 김순옥, 리광자)

2000년 동녕현“일본군중쏘변경방어선 및 동녕요새군론증회” 회장에 등장, 55년만에 눈물로 상봉

“위안부”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목욕하고 군의관에게 성병진찰을 받군 하였다.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을 하면 가차없이 처단되기에 시시각각 생명의 위험이 닥쳣다. 하지만 하루종일 감시가 따르기에 도망칠수도 없었다.

“그놈들 사람도 아니였어! 생리가 오거나 앓아눕거나 해도 무작정 덮쳐들었어. 한 열네살 어린‘위안부’는 일본군의 륜간으로 하신이 피못이 된채 죽고말았지. 죽은 아이를 거적에 싸서 개굴에 던져버렸어. 시체마저 개들이 뜯어먹은거야…후-” 리수단할머니는 생전 땅이 꺼지게 탄식하군 하였다.

해방후로 그는 세 남편을 얻어 살림했으나 역시 아이를 갖지 못하였다. 게다가 첫 남편은 쩍 하면 매를 들군 하여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나중에 홀로 남게 된 할머니는 경로원에 살면서 근심걱정 없었으나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느 지원자가 선물한 인형아기를 늘 품에 안고 계셨다.

엄관빈선생은 당년 리수단할머니가 갇혀살았던 석문자위안소는 일본군의 “동방의 마지노방선”이라 불리던 동녕 군사요새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동녕요새군에는 일본군 3개 사단의 10만 대군이 둥지를 틀고있었으며 그곳에는 9개 군사요새에 39개 종군위안소가 설치되여있었는데 근 천명에 달하는“위안부”가 배치되여있었던것이다.

박차순할머니와 흘러간 옛노래 그리고 “아리랑”

엄선생은 “이제 무한의 효감시에 ‘모은매’라고 하는 95세나는 조선족‘위안부’할머니가 계신다.”고 했다.

5월 26일 이른 아침, 우리는 호북성 효감시 룡점촌(龙店村)의 모은매할머니네 댁을 방문하였다. 할머니는 양딸 황영화(黄荣花)씨의 도움으로 겹옷을 걸쳐입으며 흐느껴 울고있었다. 딸은 자주 손수건으로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며 “이렇게 모처럼 찾아주시니 너무 고맙고 또 옛날 생각이 나나봐요.” 하며 어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과 함께 있는것이 박차순할머니의 최대의 행복이다.

우리는 할머니와 마주하고 고향은 어디며 어찌되여 여기까지 오게 되였느냐 하는 식으로 수인사를 나누었다. 한참을 무언가 더듬고있던 할머니는 “전라북도 나주…” 하고 의문조로 외우더니 이어 “차수니… 박차순!” 하며 자신의 옛 이름자를 찾아내고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차순이가 여섯살 되는 해에 일본으로 징역에 끌려간 아버지는 죽고 엄마는 두 녀동생을 데리고 어디론가 살길을 찾아 떠나갔다. 외가집에 맡겨진 차순이는 거리를 떠돌며 살았고 스무세살 되던 해 1945년 6 월 “양말공장에 취직”되여 중국으로 왔다.

여느 공장이거니 하고 들어선 곳이 담을 높이 두른 남경의 한 위안소였고 그곳에서 또다시 무한의 위안소로 옮겨졌다. 그러던 어느날, 총포소리 요란하고 비행기폭격이 쏟아지는 혼란한 틈을 타 보초병의 눈을 피해가며 겨우 위안소를 빠져나왔다.

죽기내기로 거리에 뛰여나온 그는 효감시에서 몇십리 떨어진 대황만(大黄弯)에 이르러 안해를 잃고 혼자 사는 황씨를 만났다. 순박한 농민인 황씨는 박차순이를 극진히 아껴주었다. 아이를 가질수 없는 그들 부부는 60년대초에 두살짜리 양딸을 수양하면서 60년간 시골에서 농사군으로 살아왔다.

“우리 엄마는 모주석과 ‘친척’사이입니다. 모주석께서 해방시켜주었다고 자기 성을‘모’씨로 고쳤답니다.” 영화씨는 소리내여 웃으며 엄마의 성씨개명에 대해 들려주었다.

해방후 어느 한 호구조사때 할머니는 모주석의 은덕을 잊을수 없다며 성을 모씨로 고치고 조선족들이 즐기는 은백색의‘은’자에 남편이 좋아하는 매화 ‘매’자를 넣어 이름을 “모은매”(毛银梅)라고 이름을 고쳐지었던것이다.

모은매할머니는 70여년동안 한족마을에서 살아오면서 조선말을 까맣게 잊고있었다. 우리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보통 한어도 아닌 심한 지방방언을 쓰고있어 모든 대화는 딸의 “통역”으로 이루어졌다.

 

위안소를 빠져나오던 경과를 들려주는 박차순할머니.

필자는 모은매할머니의 "위안부"시절 고초에 대해 조심스레 여쭈어보았다. 딸에게서 질문을 전달받은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외로 틀었다. 한참을 지나서 오른 주먹으로 가슴을 “텅-텅-” 소리나게 치셨다. 그러던 할머니는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침대머리에 개여놓은 이부자리에 쓰러지듯 누우셨다. 그리고 계속 가슴을 두드렸다.

(아차, 큰 실수를 저지른게로구나!) 필자는 그만 당황해났다.

“엄마는 그 일만은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지금 와서 그 얘기를 하는데 뭐가 그다지 어렵냐’고 내가 탓해도 응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딸은 하얗게 질려가는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안정을 취하게 하려는듯 아무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엄선생도 따라나섰다.

필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몸둘바를 몰라 그냥 할머니 침대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할머니의 두 눈귀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새여 흐르고있었다.

“그놈들 사람도 아니였어! 울면 어떻게 다 울고 말을 하면 어떻게 다 말할수 있겠어!” 할머니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하소연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것이였다.

갈매기 우는 선창가에 손을 들어 흔들었소.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기차는 떠나간다, 부슬비 이즈러지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분명 우리 말 노래였다! 우리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할머니께서 그토록 똑똑하게 우리 말 가사를 발음하며 높낮은 곡조를 뽑아내고있었다. 할머니는 “정든 땅 뒤에 두고”,“잘 있소 잘 가소”를 몇번이고 되뇌이더니 이윽고 깊은 한숨과 함께 “아-리랑 아-리랑” 하며 한 서린 “아리랑”을 부르는것이였다!

필자는 그만 할머니의 손을 덮썩 부여잡고 두어깨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리고말았다.

(할머니! 우리가 대체 무얼 어떻게 해드려야 할머니 가슴에 묻힌 그 한을 다 풀어드릴수 있을가요?!)

박차순할머니는 딸 사위와 함께 손님을 마을어구까지 배웅하였다.

소지량:‘위안부’는 특수군체로서 전쟁의 피해자이고 력사의 산 증인이다

5월 30일, 우리는 박차순할머니네 댁을 다녀간 상해사범대학 중국“위안부”문제연구중심 주임이며 중국“위안부”자료관 관장인 소지량(苏智良)교수를 만나러 상해로 갔다.

“동북 연변에서 오셨다구요? 그러면 얼마전 동녕에서 사망한 조선족‘위안부’리수단할머니의 소식을 들으셨겠네요.”

“네- 장례식에도 참가하였더랬습니다. 리수단할머니를 목단강시해림중한우의공원 소녀상옆에 모셨습니다. 참, 딱하기도 하지요.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형아기를 품에 안고 계셨습니다.”

엄선생은 리수단할머니의 사연과 함께 한국대사관 일군들과 중국측 정부관원들이 “위안부”할머니를 위해 추모의 꽃다발을 올리며 마지막 길을 바래준 정경을 들려주었다.

소교수는 “이제는 중국대륙에 겨우 21명의 ‘위안부’만 남아있습니다. 그분들 생전에 하루 빨리 유적지들을 확인하고 실물이며 사건들을 발굴하여 력사를 재현하는 구급성기념공사를 벌려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엄선생과 같은 “산지도”(活地图)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중국"위안부"문제연구중심 주임 소지량교수와 엄관빈선생은 “위안부” 관련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있다

그는 또 “위안부”문제에 대한 전반 사회적인 인식이 따라가지 못한 상황에서 나라의 공식문건(红头文件)이 내린것도 아닌데 “‘위안부’들을 위한 일에 이렇게 발벗고나선다는것은 이 군체에 대한 깊은 리해와 애정이 없다면 웬간한 각오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며 엄선생의 행보에 엄지손을 크게 내밀기도 하였다.

소교수는 “‘위안부’라는 이 특수군체는 전쟁의 피해자이고 력사의 산 증인이기에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들을 잘 보호하고 잘 보살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20여년간의 연구에 기초하여 “위안부”문제에 관한 주장을 강경한 어조로 피력하였다.“‘위안부’문제는 필경 전쟁이 남겨놓은 력사문제로서 제2차세계전쟁기간 일본군국주의 침략자들이 중국대륙과 조선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와 지역의 나어린 녀성들을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기편 혹은 강제적 수단으로 끌어다가 성노예로 전락시킨 전쟁범죄입니다.

일제놈들은 그녀들의 인신자유를 박탈하고 생육권리를 빼앗았으며 폭행과 학대, 학살로 인생을 파괴하고 생명을 유린하였으며 반륜리적, 반인도적인 인권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그 피해인수는 세계적으로 40만명에 달하며 중국대륙의‘위안부’수만 해도 20만명을 넘깁니다.

일본의 현 아베정부는 정확한 력사인식이 없기때문에 극력 이 력사문제를 덮어감추려 하고 회피하려 하며 지어 외곡하면서 시시각각 도처에서 침략야심을 드러내고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범죄를 승인하지 않는 일본정부와 그 우익세력과 끝까지 투쟁을 벌려야 합니다. ”

“위안부”생존자 리옥선할머니: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 일본정부가 우리앞에 무릎꿇고 공식사죄하는것을 보고 죽어야 할텐데…”

올 8월 19일, 필자는 연길에서 “위안부”로 살았다는 리옥선할머니를 만나러 한국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위안부’전문시설)으로 찾아갔다.

한국 “위안부” 전문시설인 “나눔의 집” 정경.

지금 한국에는 “위안부”생존자가 38명 있고 “나눔의 집”에 10명 계셨다.“일본군‘성노예’피해자들의 생애사 연구”를 박사론문으로 집필한 “나눔의 집” 소장 안신권박사는 “‘위안부’할머니들의 증언이 있었기에 일제의 전쟁범죄와 인권유린죄악을 세상이 알게 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본대사관앞에서 수요일마다 진행하고있는 “수요집회”는 1만 3000여차로 세계 최장시위로 이어지고있다고 하였다.

안신권소장은 언제나 “수요집회” 증언현장의 앞장에 서시던 리옥선할머니는 지금 허리병으로 운신이 어려우니 다른 고통이 없도록 조심해달라며 할머니의 방문을 허락하였다.

유리창이 알른알른한 대청문을 열고 리옥선할머니 방에 들어서니 침대가에 모로 누워계시던 백발의 리옥선할머니(90세)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허리때문에 이젠 ‘수요집회’도 못나가고있어요.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 일본정부의 공식사죄를 받아야 할텐데…” 하며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리옥선할머니(앞사람)는 세계 각국으로 다니며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있다. 사진은 미국에서 유태인학살 생존자들을 만나고있는 장면.

“그게 어디 위안소요?  사형장이지! 심부름 갔다오는 애며 빨래하는 애들을 붙잡아다가 위안소에 집어넣고… 살아남은 애들이 몇이나 되오?! 그놈들 사람도 아니였어! ”

“연길에도 위안소 두개가 있었어. 하루에 수십명씩 접대해야 하는 우리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어. 도망을 치려다 귀뺨을 맞은것이 고막이 터지고 매독에 걸려 수은치료를 받고나니 영원히 녀자구실을 못하게 된거야. 해방이 나니 일본놈들은 우리를 연길 뒤산에 데려다 버렸어...” 그때를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어성은 자연 높아졌고 눈에서는 불이 일었다.

“수요시위”현장에 나선 “위안부”할머니들.

“일본정부는 지금 ‘국민기금’이니 뭐니 하면서 돈을 내밀며 우리 입을 막자고 드는데 그건 안되지. 일본정부는 우선 우리앞에 무릎 꿇고 공식사죄부터 하고 법적 배상을 해야 하는거요!” 할머니의 태도는 견결하였다.

부산 6남매집 둘째딸, 14살에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려관집 양딸로 심부름을 다니던 아이, 열여섯살 나던 1942년 7월, 대통로길에서 강제로 결박되여 연길위안소에 와 성노예가 된 옥선이, 꽃도 피우지 못한채 일본군 군화발에 짓밟힌 도라지꽃 옥선이, 은발의 90세 옥선이는 지금 일본군전쟁범죄를 증언하는 현장에 어디든 나선다.

“위안부”, 그들은 몸전체로 력사를 가르치는 산 교과서이다. 최근 중국, 한국, 조선, 일본 등 아시아  8개 국,14개 시민단체들에서는 국제련대로 손잡고 2744건에 달하는 “위안부”사례들을 정리하여 인류의 공동기억을 위한 세계기록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신청하였다.

인류의 존엄을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있는것이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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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건일교수의 "내가 알고있는 한락연" 좌담회 북경에서 개최    (흑룡강신문=하얼빈) 11월 27일 중국사회과학원 박건일교수의 "내가 알고있는 한락연" 좌담회가 북경에서 개최되였다. 민족출판사 사장 우빈희, 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리춘일, 룡정한락연연구회 박호만 회장, 연변대학 북경학우회독서회, 북경애심녀성...
  • 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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