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갑록씨(61살)는 신발수리공이다. 돋보기를 넌지시 코에 걸치고 능숙하게 실을 꿰는 천씨는 흰 운동화를 손에 들고 해진 곳을 바느질한다. 여기저기 해져서 볼품없던 신발이 천씨의 꼼꼼한 바느질로 금세 새살이 붙으면서 말끔한 모습을 보인다.
천씨는 2년 넘게 연길시 북대 대우화원 아빠트 입구에 자리를 지키고있다. 예순 인생을 살아와도 돋보기 하나만 있으면 풀질에 실을 꿰매고 매듭짓는건 여느 아낙네 못지 않다.
70, 80년대에는 길목마다 조선족 신발수리공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국산, 수입산 신발이 대량으로 판매되지 않았던 시절, 신발이 약간이라도 터지면 바로 신발수리공에게 달려가 고쳤다. 하지만 보일듯 말듯 긁히웠다고 멀쩡한 신발을 버리기가 일쑤인 지금, 조선족 신발수리공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그래서 60을 넘긴 조선족신수리공인 천갑록씨가 더 반가울지도 모른다.
그가 직접 뚝딱뚝딱 솜씨를 피워 아빠트단지 입구에 마련한 판자집은 8평방메터도 안된다. 엉덩이를 붙이고 수리공구를 겨우 놓을수 있는 공간이다. 여의치 않은 비좁은 공간에 자리를 깔고 이른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손님을 맞는다.
묵묵히 신발을 수리하던 천갑록씨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제가 하고있는 일을 하찮게 보는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새 삶을 살아가도록 다독여준 희망이나 다름없습니다.”
9년전, 그는 뜻밖의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 하나를 잃었다. 다행이 목숨은 건졌지만 왼쪽 다리 뼈가 부스러져 결국 절단까지 해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다리를 잃은 절망감과 장애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편견과 차별에 몸살을 앓으면서 지난 7년을 그는 페인이나 다름없는 세월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득 더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7년을 뒤바라지 해준 가족들을 더이상 가슴아프게 하지 말고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싶었습니다”고 말했다.
마음을 다잡고 선택한 일이 지금의 신발수리 일이였다. 오래만에 손에 일을 잡고 당당하게 세상과 마주선 그는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워낙 손재주가 많았던 그였지만 남자에게 바느질, 풀질이 서툴기만 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집에서 새벽부터 기본바느질을 연습했다고 한다.
단골손님이 찾아오면 수리비도 반값만 받을 때가 많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거나 로인분들이 찾아오면 아예 수리비를 받지 않을 때가 다반사다.
20여년전 출국을 위한 “가짜리혼”바람으로 헤여진 안해와 아들이 지금까지 종무소식이다. 혈혈단신이지만 그는 결코 외롭지 않다. 30여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렴가임대주택이지만 인심좋은 그였기에 항상 여러 “형제”들이 친구가 되여준다.아빠트 웃층에서 외롭게 지내면서 늘 천갑록씨의 따뜻한 사랑을 받았던 박송산(43살)씨는 아예 그의 집으로 “이사”를 와 몇년간 서로가 의지하면서 함께 살기도 했다.
퇴근한후에도 천갑록씨는 역시 바삐 보낸다. 자신도 장애인이지만 남을 돕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는 그다. 퇴직일군인 염태기(71살)씨는 자식들이 모두 외지에 있다보니 홀로 지내고있다.6년전 뇌졸증으로 쓰러진후 운신하기조차 어렵다. 천갑록씨는 직접 음식을 만들어 대접한다.
“아무리 세월이 좋아졌다 해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홀로서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좋은 정책들이 많이 나와 장애인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것이 그가 얼마 안되는 수리비로나마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땡볕아래서 집중해 바느질하느라 흐르는 땀은 닦지도 못한다. 지금의 판자집을 좀더 든든하게 그리고 널직하게 넓혀가는게 꿈이라는 천갑록씨, 손때 탄 물건을 소중하게 다뤄가는 그의 꿈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연변일보 글·사진 정영철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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