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사는 날이 올거야,포기는 하지말아요,저 높은 하늘을 봐요,우리의 꿈이 있잖아요…”
연길시 신원아빠트단지에 자리잡은 12평방메터도 안되는 한 자그마한 가게, “방씨장식회사”란 눈에 그다지 띄지 않는 간판을 내건 그곳에서 새벽의 고요한 적막을 깨는 한 남자의 기분 좋은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이른새벽부터 방철호(43살)씨는 코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한창 분주하게 자료를 뒤진다,가구치수를 잰다, 주문을 받는다 눈코뜰새 없다.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아버지이다. 물가는 오르고 임금은 그대로인데 한창 무럭무럭 커가는 두 아이의 교육비에 가정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방철호씨는 전문직도 고위직도 또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다. 요즘은 누구나 흔하게 갈수 있다는 대학문도 가난때문에 두드려보지도 못했다.
“우리 애들은 남부럽지 않게 키워볼랍니다.저 녀석들 예쁘게 잘 키웠다는 말을 듣기전에는 저한텐 행복할 권리조차 없겠죠?”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사는 평범한 가장, 여느 아버지의 모습과 별 다르지 않다.
한살 터울인 년년생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아이들과 안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고 한다.
맨 주먹으로 가정을 이루었던 그는 갓난 아이들이 배고프다 자지러지게 울어댈 때면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애들 분유값도 안나왔다.그러다보니 여기저기 손을 내밀수밖에 없었고 안해가 마음 편하게 산후조리도 못시켜주는게 안타까왔다.
그나마 다행이였던것은 20살 나이에 료녕성 본계시 모 부대에서 3년 동안의 포병생활을 지낸적 있었던 그에게 전우들이 큰 도움을 줘 고비를 넘길수 있었다.
쪼들리는 생활난에 쫓기다가 아이들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되려는 희망을 품고 10여년전 방철호씨도 한국행을 선택했다. 그때만 해도 방문취업제와 같은 정책이 실시되기전이라 방철호씨 부부는 리자돈 15여만원을 여기저기서 꿔서 한국으로 떠났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겠다 큰 마음을 먹고 떠나온 한국생활도 생각처럼 만만치만은 않았다.평소 목수일에 손재간이 있었던 그는 무작정 건축공사장으로 달려간게 아니라 기술 하나라도 더 익혀보려는 마음으로 가구가공회사를 찾아갔다.
그렇게 시작한 가구가공일도 12년,그 시간동안 그는 밤낮이 따로없이 공장일을 하기에 바빴고 틈틈이 시간을 짜내 기술 익히기에 전념했다.
그리고 지난해, F-4비자를 취득했음에도 공부하는 애들옆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들부부는 단연 귀국을 결심했다.고향으로 돌아와 그동안 배워왔던 기술을 믿고 “방씨장식회사”를 차렸다.
“요즘 다들 한국에서 뼈빠지게 번돈으로 고향에 집 한채는 마련하잖습니까.저도 집 한채 사서 제 마음만큼 믿고 장식회사에 장식을 맡겼는데 필요이상으로 돈이 많이 들어가더군요. 살펴보니 연변은 외지에서 온 타지방 사람들이 차린 장식회사들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고향 사람들이 걱정없이 믿고 맡길수 있는 장식가게를 차리고싶었습니다.”
주문이 들어오면 고객들의 집을 방문해 가구치수를 재고 주인요구를 세세히 들어보고 집의 구조까지 세밀히 살펴보는 등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마친다.그리고는 직접 연길시 북대가구시장에 가 값싸고 질좋은 재료들을 집주인에게 추천해주기까지 하면서 부담없는 가격에 고객이 마음에 꼭 드는 장식을 해준다.
새벽부터 고된 일을 하다보니 그의 옷은 실내에서도 땀에 젖어 마를줄 모른다.그래도 가족들이 걱정할가봐 힘든 내색 한번 내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돌아가 하루가 다르게 잘 커가고있는 아이들을 보느라면 저도 모르게 새 힘이 불끈 불끈 솟아납니다. 언젠가는 아이들앞에서 옛말하며 잘살날이 올겁니다…" 방철호씨는 계속되는 작업에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사람좋은 미소를 지었다.
취재수첩을 덮고 가게를 나오는데 또 다시 방철호씨의 흥겨운 코노래소리가 들려온다.“잘사는 날이 올거야,포기는 하지 말아요…”
연변일보 글·사진 신연희 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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