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곽해선옹의 주덕해경호원시절 일화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1월29일 09시30분    조회:300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4년간 주덕해주장의 경호원을 지낸적 있는 곽해선(郭海善, 80세)옹은 쉽게 자기 경력을 내비치지 않는 특이한 사람이다. 그는 또 남다른 주장을 가진 사람으로서 소수민족지역 공무원들은 민족을 막론하고 반드시 소수민족언어로 말할줄 알아야 자격있는 공무원이라고 한다.

혹 조선족자치주 초대주장의 경호원으로 사업하면서 그 영향을 받은 까닭이 아닐가고 짐작도 하였지만 그는 종래로 자신의 경호경력을 남한테 피로한적이 없다. 몇십년을 앞뒤집으로 살아온 지기도 지어 친녀동생마저도 그를 퇴대군인 정도로만 알고있을뿐이다.

필자도 곽옹을 알기는 지난세기 70년대부터이다. 당년 필자는 도문시 홍광공사에서 당위 선전위원을 지내며 홍광공사 오공대대 당지부위원, 생산대장으로 있는 곽옹을 알게 되였다. 그러나 역시 곽옹한테서 주덕해경호원경력이며 장백산특무잡이전투에 대해 들어본적 없다.

지난달 도문시에서 조직한《로전사의 발자취》출판기념좌담회에서 곽옹의 사적을 읽고 심히 놀랐다. 11월 25일, 필자는 곽옹과 무릎을 마주하고 처음으로 그이한테서 당년의 이왕지사를 들었다.

《주덕해어른 참 좋은분이지요!》

《주덕해동지(그는 주덕해란 이름뒤에 꼭 동지를 붙였다)가 살아계신다면 100세가 넘습니다. 주덕해어른 참 좋은분이지요!》 말문을 여는 곽옹은 안경을 벗고 젖어드는 눈시울을 손으로 비볐다.

곽해선네 일가(9명)는 왕청현 십리평에서 살다가 1946년에 지금의 오공촌에 이사를 왔다. 곽해선은 1950년 18세 나이에 참군하여 84퇀 변방 4대대 기동련에 배치받고 두만강변경,연길, 연변주(구)당위 보위임무를 맡았다. 그때 한개 반(12명)이 주당위를 보위하고있었다.

자치주(당년에는 자치구)가 설립되기전에는 주덕해를 주정위라 불렀다. 《나는 주정위네 집 보초를 섰습니다. 나는 제일 빼꼴쫄도(하급전사)라 당위 제일바수(제1책임자)와 감히 얘기도 못했습니다.》

그때 주당위사무실과 주덕해네 집은 청년호부근에 있었다. 주덕해부부, 장인, 장모, 아들딸 모두 한집에 살고있었다. 주덕해의 부인과 장인은 연변대학 로어교원이였다. 주덕해네 집으로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심사를 받아야 했다. 최채, 최림, 려영준, 전복래, 김학철, 전영록, 김득만, 요흔 등 동지들이 많이 나들었다. 특히 주덕해와 김학철은 같은 항일간부라 김학철은 허물없이 다녔다.

《주덕해동지는 마음이 너그러웠습니다. 전사와 간부를 가리지 않고 늘 허허 웃으면서 평등하게 잘 대했습니다.》

주덕해의 통신원도 군인이 아닌 오씨 청년이였다고 한다. 휴식일이면 주덕해동지는 호위병들과 함께 장기도 놀았고 캐럼즈(克郎棋)도 쳤다. 《주정위와 장기를 두군 하였는데 열번을 놀면 열번을 다 졌습니다. 그러나 캐럼즈는 제가 늘 이겼습니다. 그때마다 주정위는 〈꼬맹이가 정말 잘 친다》며 칭찬을 했지요.》

그때(1952년) 룡정의 어느 촌에서 주덕해의 모친과 동생이 드문드문 놀러 왔다. 들어오는 손님을 심사하면서 주정위의 동생을 통해 주덕해의 원명이 오기섭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주덕해는 언제나 전사들을 관심하였다. 그때는 로임제가 아닌 공급제였는데 식사는 주덕해동지와 한 식당에서 같은 음식을 먹었다. 보통 점심식사는 미시가루 한술을 더운 물에 풀어먹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주덕해동지는 전사들을 만날 때면 《배가 부른가》며 보살펴주었다.

그때 자치주에 쏘련제 찦차가 두대 있었다. 한대는 주덕해동지의 전용차이고 다른 한대는 공안처 전용이였다. 주덕해는 사무실이나 집으로 올 때면 언제나 문앞까지 차를 타고 들어오는것이 아니라 저 멀리에서 차를 내려 걸어서 들어오셨다.

《문화혁명》때 《주덕해보황파》로 고생하지 았았는가 하는 필자의 물음에 곽옹은 당지부 부서기를 1년 하고 3년을 반혁명분자, 현행반혁명분자로 죽도록 투쟁을 맞았지만 누구에게나 주덕해경호원으로 있었다는 말은 한적 없다보니 주덕해에게 련루되여 투쟁을 받은적은 없다고 한다.

《주덕해동지의 딸도 인제는 70살이 거의 되겠는데, 그때 아들은 아기작거리며 걸어다녔고…》 곽옹은 억울하게 타계한 주덕해동지를 그리며 그의 가족들의 현황에 대해 퍽 궁금해하였다.

잊을수 없는 한겨울 장백산에서의 특무잡이전투

곽옹은 1952년 9월부터 11월까지 장백산에 밀입한 미장특무잡이전투에 참가하였다.

조선전쟁이 폭발한후 1952년 여름 미장반동파들은 특무를 장백산에 파견하였다. 곽해선네 한개 반이 미장특무잡이전투에 동원될 때는 이미 특무 한명을 잡은후였다. 그 특무는 중국인민해방군차림으로 화룡현공안국에 찾아와 모 해방군전사를 찾으련다고 하였다.

그때는 어디를 가나 소개신을 휴대해야 할 때라 소개신을 보자고 하니 내놓는 소개신에 찍힌 공장(公章)의 동그라미가 의심스러웠다. 자세히 심문한 결과 그놈은 대만당국이 파견한 특무였다. 그의 교대에 의하면 이미 대만과 한국에서 훈련을 거친 특무 5명을 한개조로 무어 장백산에 파견했다는것이다. 특무들의 임무는 연변 주요 간부를 살해하고 철도를 차단(파괴)시키는것이였다.

상급에서는 즉시 5명의 특무를 잡기 위하여 길림, 연변 등지의 2000 여명의 지휘원과 전투원을 동원하여 장백산지역을 포위하였다. 특무의 교대에 의하면 이미 땅굴을 세개나 파놓고 1, 2, 3조로 나누어 서로 오가며 활동을 한다는것이였다.

때는 11월이라 장백산에 큰눈이 내려 행군을 할 때면 솜바지가 불편해서 솜바지를 벗어메고 행군하고 잘 때에 솜바지를 입고 잤다고 한다. 그래도 너무 추워 잠은 고사하고 혼이 나갈 지경이였다고 한다.

대지가 온통 눈속에 묻히다보니 길을 안내하는 특무도 방향을 가릴수 없었다. 원시림속에 있는 베개봉에 가니 특무도 땅굴위치를 몰라 어리둥절해있었다. 곽해선네 대오가 겨우 산중턱에 올라서는데 자리에서 휴식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여 모두가 제자리에 앉아서 휴식을 하던중 안도현공안중대의 한 전사(성이 박씨로 기억됨)가 쉬면서 주변의 검불을 헤쳤다. 뜻밖에 그 자리에서 락하산줄이 발견될줄이야!

바로 그 주위에 특무들이 활동하는 소굴이 있었다. 거기서 특무 2명을 잡고 2호 소굴을 습격하여 무전수 한놈을 잡았다. 그 무전수의 교대에 따르면 그날 밤에 비행기로 량식을 투하하는데 신호는 우등불을 세곳에 피워놓는것이란다. 약속시간이 되자 세곳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비행기를 대기하고있었다. 한참후에 B-19형 비행기가 우르렁거리며 량식보따리를 락하하였다. 로획품은 몽땅 통졸임과 비빔밥이였다,

대오가 계속하여 총을 쏘면서 나머지 2명 특무를 추격했다. 놈들은 총소리가 나지 않는쪽으로 도망쳤다. 그때 날씨가 너무 추워 기관총이 얼어들면서 총알도 나가지 않았다. 한밤중에 추격을 그만두고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돌아와 로획한 식품으로 때를 에우고는 계속하여 화룡현 백리평쪽으로 강행군을 하였다. 그때 사람마다 어깨에 일주일간 먹을 량식, 짠지, 이불짐을 메고 밤새로 180리를 강행군하였다. 모두가 어깨가 붓고 지쳐서 녹초가 되였다.

새벽이 되여서야 마을에 도착한 대오는 마을사람들을 도와 청소도 하고 애민공작을 끝내고 휴식을 하는데 특무를 체포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안도부근에서 옥수수수레를 몰고 가던 형제가 일주일간 굶어서 맥을 못 추는 이상한놈들을 붙들어 수레에 묶어가지고 왔던것이다.

곽해선네가 화룡 청산구(2구)에 도착하니 학교마당에서 주공안처 처장인 요흔동지가 총결연설을 하였다. 3개월간의 전투에서 화룡현공안간부 1명이 부상을 입었고 길림 모 부대의 1명이 동복도 입지 못한채 특무를 추격하면서 기진맥진하여 추위에 동사를 하였다. 당시 특무들의 소굴위치를 발견한 안도현공안중대의 박씨전사는 2등공을 세웠다.

술 한잔 나누며 풀어내는 마음속 회한

《요행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 합시다.》 《7년간 겨우 중사반장(취사반을 인솔)을 해본 덕분으로 지금도 술안주는 볶을수 있습니다.》 곽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워낙 운동원이였던 그는 1952년 군구운동대회에 참가하여 5000메터 달리기를 하고 그날 저녁 바나나술을 마셔본후로 애주가로 되였다고 한다.

술상에서 곽옹은 허심탄회하게 내심을 내비췄다.

- 《문화혁명》때 반란파들이 그간 사업하면서 받은 상장이며 온갖것을 가져갔는데 지어 식초병까지 걷어갔습니다. 그때 가져가기를 잘했지. 지금 그것들을 건사하자 해도 쉽지는 않을걸요…

- 우리 로친(서옥희, 77세)이 정말 고생했습니다. 나는 로친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랍니다. 《문화혁명》때 투쟁을 받고 두만강반수공정(反修工程)에 끌려가 돌깨기로동개조를 하다가 4메터도 넘는 벼랑에서 떨어져 척주골절로 반신마비가 된것을 로친이 살려냈습니다. 45살에 간암진단을 받았을 때도 그랬고. 지금의 이 집도 내가 외지로 휴양 간 사이에 로친이 혼자서 지었답니다.

- 나는 독보, 독서를 즐깁니다. 《연변일보》와 《길림신문》을 해마다 주문했습니다. 지금은 고정된 집주소가 없어서 주문을 못합니다만 《길림신문》은 창간호부터 20년간 한부도 빼놓지 않고 보았습니다.

- 내가 머저리지요. 퇴대한후로 농촌건설을 잘해보겠다고 귀향하였습니다. 조직에서는 네번이나 사업배치를 해주겠다고 제의하는것을 다 마다했지요. 처음에는 로지부서기들이랑 가지 말라고 말려서 못 갔고 후에는 내가 안 갔고. 그때 갔더라면 지금쯤은 퇴직금이 한달에 몇천원은 될건데 말입니다(지금 그는 군복무무혈금 600원에 최저생활보조금 400원을 받고있음).

그이도 인간인만큼 모종의 회한도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정직하게만 살고 보람된 일을 하고도 내색 한번 내지 않으며 타인의 헌신과 희생을 존중할줄 알고 일생을 배움과 정진속에 살아가는 그 고상한 인격앞에 깊이 머리가 숙어졌다.

 /사진 글 오기활기자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 일러스트 이철원 2008년 5월, 중국 지린성 훈춘에 사는 한국계 중국인 최춘화(38)씨는 유치원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림걸이 어머님, 우리 유치원에서는 림걸이를 도저히 돌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만 세 살이 지난 림걸이를 유치원에 입학시킨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
  • 2013-10-02
  • 지난 26일, 2013년 연변장애인협회 운동대회가 연길 "5.1"료양원에서 성대히 열렸다. 연변 지체장애인협회(회장 리춘자)에서는 국경절을 맞으며 장애인들에게 즐거운 한때를 마련하고자 운동대회를 개최했다. 주내8개 현시의 200명 지체장애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교를 비기며 자신들의 특유한 “자존 자신 자강 자립...
  • 2013-09-27
  • 장백조선족자치현 신방자진정부에서 근무하고있는 최빈청년이 주은 돈을 임자한테 돌려주어 사회의 절찬을 받고있다. 최빈(25세)청년은 지난해 7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후 공무원시험에 학격되여 금년3월에 장백현 신방자진정부에 배치받았다. 얼마전의 하루 아침, 그는 장백현성...
  • 2013-09-27
  • 사기절도당한 돈과 물건들을 돌려받는 피해로인들. 《사기절도당한 돈도 되찾게 되여서 고맙습니다》 이는 9월 24일 오전, 룡정시 여러 로인들이 룡정시공안국 형사경찰들의 손을 잡고 하는 감격의 말이다. 당일, 룡정시공안국에서는 사회구역일군으로 사칭하고 입실사기절도한 사건에서 추징해온 돈과 물건들을 피해자들에...
  • 2013-09-25
  • [백혈병소년 후속보도 6] 백혈병소년 박명혁 병치료차 다시 천진으로 출발 출발하기에 앞서 배웅나온 친인들에게 답례하는 박명혁학생과 부모 지난 9월 7일 백혈병치료 휴식조정차 잠시 연길에 돌아왔던 백혈병소년 박명혁이가 23일 12시 23분 도문-북경행 렬차로 다시 가족과 함께 천진으로 떠났다. 박명혁의 아버지 박영...
  • 2013-09-24
  • 안충헌로인이 형원에서 시사강의를 하고있다. 길림성룡정시에는 2006년부터 현재까지 8년간 분산되여있는 로인들의 든든한 의무선전원으로 활약해 온 로인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올해 77세인 안충헌(安充宪)로인이다. 안충헌씨는 일찍 도문시철도중학교를 졸업하고 룡정시문공단에서 무대미술사업을 했으며 후에는 룡정시림업...
  • 2013-09-19
  • “저게 뭔 꼴인겨.아니 사내대장부가 아낙네들한테 둘러싸여 너풀너풀 춤이나 추고… 어휴 남사스러워라.” 아침 5시 30분,일찍 공원산책을 나온 한 할아버지가 아니꼽다는듯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렇게 하면서도 아주 싫지는 않은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자꾸만 춤판을 벌린 곳으로 눈길을 돌...
  • 2013-09-18
  • “나라에서 수원지에 보호란간을 설치해준 덕분에 가축배설물이나 쓰레기오염이 생길 우려가 없어졌습니다. 마음놓고 물을 마실수 있게 됐습니다.” 이는 연길시 의란진 대성촌 촌민들이 요즘 들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라 한다. 그도 그럴것이 식용수원지보호시설이 보완되지 못하고 제도적으로도 미비해 일부 식...
  • 2013-09-17
  • “어릴 때부터 동네어른들에게서 눈동냥으로 배운 장기가 이제는 인이 밴것 같아요.하루라도 안 놀고는 못 견디여요.”소학교때부터 어른들과 장기를 두면서 이기기도 해 칭찬을 받았다는 리남선씨(56세),연길에서는 동네장기군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장기인 김호씨의 소개로 리남선씨를 만난것은 11일 오전 11시...
  • 2013-09-13
  • 사회의 따뜻한 인정들, 14만 1520원의 치료비 지원 9월 11일, 백혈병으로 앓고있는 박명혁학생의 집으로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연변대학교육기금회 판공실 부주임 왕홍국을 비롯한 연변대학교육기금회 4명의 사업일군들이였다. 얼마전 천진에 있는 중국의학과학원 혈액연구중심에서 화학치료를 마치고 휴식조정차 연길...
  • 2013-09-12
  • 화룡시 문화가두 문성사회구역의 당총지부서기 장조문(51세)과 안해 리번영(49세)은 사랑과 의력에 의하여 20여년 사이에 선후로 중풍과 치매증에 걸린 량가부모 3명과 불치의 병에 걸린 형을 잘 모셔 사회상의 깊은 감동을 자아내고있다. 이들 부부는 1986년에 결혼하였는데 결혼후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6남매중의 막내인...
  • 2013-09-11
  • “리화영할머니는 참외를 무척이나 즐겨드세요. 드시고 싶을 때 못 드시면 애처럼 엉엉 운다니깐요. 호호… 김옥인할머니는 잔정이 많아서 우리 간호사들만 봐도 손을 꼭 잡고 울기도 잘 울죠.” 연변영예원 간호장 한려화(42살)씨는 료양원에 입원한 184명 어르신의 특징을 달달 외우고 다닐 정도로 어르...
  • 2013-09-11
  • 흥화로인보호중심에서 로인들이 서법연습이 한창이다. 연변주 안도현민정국에서 주내 시점으로 꾸린 《로인주간보호중심》은 로인들이 즐겨 찾고 다양한 활동을 할수 있는 활무대로 되고있다. 이 국에서는 로령화시대에 로인들에게 안정된 활동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해당부문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지난해 700만원의 자금...
  • 2013-09-09
  • 올해 67세에 나는 림수향은 왕청현 대천사회구역에 거주하는 로당원이다. 우연한 기회에 대흥구진중학교에 다니는 두 학생이 가정형편이 어려워 세집에서 살면서 평소에 쌀을 살 돈마저 없어 고생한다는것을 알게 된 림수향은 그애들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경제형편이 썩 좋은 편이 아니지만 그는 대흥구진후대관심사업위원...
  • 2013-09-06
  • (대련) 김련복 나는 날마다 동창생 룡운이가 전송하는 서영섭은사님께서 제자들에게 보내주시는 메일을 받을 때마다 고맙고 고마운 마음 억제할수 없다. 1962년 9월, 우리는 중앙민족대학 한어언어문학학부에 입학하여 5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1967년에 졸업한후 “문화대혁명”의 대혼란와중에 모교에 1년간 더 머...
  • 2013-09-04
  • “당원간부로서 조직의 배치에 따라 어느 한 땅을 밟았으면 흔적을 남겨야 한다.” 이는 화룡시 서성진당위 신응호서기의 사업신념이다. 이런 소신으로 신응호서기는 지난 5년 반 동안 피타는 노력으로 서성땅에 놀라운 변화를 이룩하였다. “진달래민속촌”이 전국에 이름을 떨치기까지 중앙털레비죤...
  • 2013-09-02
  • “남들처럼 한국에 가 일하고싶어도 어린 아들과 년로하신 부모님때문에 갈수가 없어요…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어도 참아야죠.” 수더분하게 생긴 김철호(43살)씨는 아들(김준걸)과 로모와 함께 지낼수 있어 어려운 살림에도 힘든줄은 모르겠다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룡정시대소과수농장에서 연길...
  • 2013-08-29
  • 해마다 500원씩 보내와 조청봉(31살)씨가 경제난으로 힘들게 공부하고있는 고향의 후배를 돕고싶다며 한국에서 연변일보사로 사랑의 성금 500원을 보내왔다. 연변대학 정치학부에서 연구생과정을 밟고 한국 서울대학에서 박사생과정을 수료하고있는 그는 생활난으로 힘들게 공부하는 고향의 후배들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
  • 2013-08-29
  • 연길시 발전촌 항윤제1성에 거주하는 주민입니다. 며칠전 주택관리원들과 119대원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위험에 처했던 고양이를 안전하게 구조한 일로 감사한 마음에 제보합니다. 집에 자식처럼 기르던 고양이가 잃어진지 3일째 되는 날 뜻밖에 7층밖 창턱밑에서 고양이를 발견하게 되였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 2013-08-29
  • “잘사는 날이 올거야,포기는 하지말아요,저 높은 하늘을 봐요,우리의 꿈이 있잖아요…” 연길시 신원아빠트단지에 자리잡은 12평방메터도 안되는 한 자그마한 가게, “방씨장식회사”란 눈에 그다지 띄지 않는 간판을 내건 그곳에서 새벽의 고요한 적막을 깨는 한 남자의 기분 좋은 노래소리가...
  • 2013-08-28
‹처음  이전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