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에서 바라본 고즈넉한 마을. 옆으로는 두만강이 호선형을 이루며 흘러간다.
지난 4일, 청명절을 맞으며 태여난 곳은 아니지만 동년과 소년 시절을 보냈던 화룡시 로과향 사정곡촌, 아니, 지금은 숭선진 죽림촌의 한개 툰으로 되여버린 사정곡툰을 찾았다.
죽림촌이나 원래의 사정곡촌은 로과향에 속했던 마을이다. 로과향이 화룡-로과도로를 경계로 두동강이 나면서 숭선진에 귀속, 현재 촌에는 죽림 원 마을과 흥남, 사정곡, 리수 등 마을이 아우러져 하나의 촌-죽림촌을 이룬다.
내가 살던 사정곡촌(현 사정곡툰)은 한때 연변을 들썽인 사건의 주역이다. 1963년 12월 27일, 마을소녀 몇몇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따라 하교길에 올랐다가 마을과 500메터쯤 떨어진 부근에서 두만강에 빠졌는데 그때 렬차에서 뛰여내린 조선청년 김형호와 최상현이 서슴없이 차디찬 강물에 뛰여들어 마지막으로 허우적거리는 한순자소녀를 구해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선의 노래”가 창작되였고 사건의 주인공이였던 한선자녀성은 이름을 한친선으로 고치기도 했다.
내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사정곡촌은 근 50세대 인가에 아이들도 많았던 곳이였다. 아직도 겨울철 얼어붙은 두만강에서 10여명이서 애돌(쪽발구) , 구루마(썰매)를 타며 한동안 즐기다 학교로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다니던 소학교건물은 이제는 볼품없이 허름한 모습을 하고있음에도 여전히 시야를 당겨가며 새록새록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현지에서 학교를 다닐 때 우리는 지금의 아이들이 상상조차 할수 없는 많은 거창한 일들을 했었던것 같다. 비료를 생산한다고 소똥, 돼지똥을 주었고 페물을 회수한다고 유리, 철, 납, 비닐박막 등 회수 가능한 물건줏기에 얼마나 열성을 보였는지 모른다. 뿐만아니라 한창 공부에 열심해야 했을 나이였음에도 생산대 지원을 나가 모내기, 김매기에 나섰다. 물이 얼마 흐르지 않는 골짜기에 저수지를 앉힌다고 제방뚝 쌓는 일에 동원되고 하천정비일에 참가해 돌을 주어 나르던 일…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깊은 추억으로 남을 뜻깊은 일이였음은 분명했다.
당시 마을 자체도 생기와 활력으로 넘쳐났던 고장이였다. 봄이면 웃고 떠들며 벼모내기, 담배모내기를 하는 사람들, 집집마다 온 가족이 혹은 외지의 친척들까지 가담해 잎담배를 겯던 모습들, 황소의 영각소리와 함께 소궁둥이를 치는 농군들, 그런 일군들 사이를 누비며 재롱을 떠는 아이들… 하지만 요즘 보면 내가 살던 고장은 많이 변해있었고 또 변해가고 있었다. 소똥에 얼룩졌던 흙길은 세멘트길로 바뀌였고 허름한 나무울바자는 쇠그물바자로 바뀌였으며 짚으로 되였던 이영은 파랗고 불그스레한 기와로 바뀌였다. 마을은 아름답게 변해가면서도 더불어 또 다른 모습을 보이며 변해가고있었다. 마을에선 뛰여 노는 동심을 볼수 없었고 마을의 기둥처럼 느껴지는 젊은 세대들을 보기 힘들었으며 가족끼리 혹은 겨리끼리 모여앉아 잎담배를 겯던 모습도 볼수 없었다. 마을은 마치도 쇠약해가는 인간처럼 많이 고달프게 보이고 지쳐가고있는듯한 느낌이였다. 한적한 마을은 때때로 일하러 가는 경운기소리 혹은 굴뚝에서 피여오르는 연기가 인적의 존재를 알려줄따름이였다.
선조들이 땀을 흘리며 걸구어온 마을의 땅을 걸구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타국의 어느 공장건물에서, 식당 주방에서, 어느 가정집에서 혹은 타지방의 어느 한 곳에서 열심히 일하며 부지런히 “신사임당”과 인민페를 챙기고있다.
고즈넉한 산 땅속에 묻힌채 마을의 달라져가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어르신들의 심정은 어떠할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면서 마음이 복잡해났다.
전윤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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