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전쟁 유가족 김필련할머니의 눈물겨운 마지막 소원
김필련할머니가 본사 편집부에 보내온 편지
최근 돈화시에 살고있는 할머니 한분이 항미원조전쟁터에서 희생된 오빠들이 너무 보고싶다면서 본사 편집부에 만장같은 편지를 써보내왔다. 할머니가 신문사에 편지를 쓰게 되였던것은 지난 3월말 한국정부가 중국인민지원군유해를 중국에 송환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행여 전쟁터에서 사망한 오빠들의 유해라도 찾을수 있지 않을가 하는 일루의 희망을 품었기때문이다.
할머니의 성함은 김필련(77세), 돈화시 홍석향 림강동촌에서 큰아들내외와 함께 살고 계셨다. 5월 28일, 기자는 돈화에 가서 할머니를 수소문해 찾아 장장 50여년 세월이나 전쟁터에 나간 오빠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다림에 지쳐버린 김할머니의 가슴아픈 이야기들을 들을수 있었다.
오빠들 모두 참전용사, 2명은 항미원조 렬사
할머니가 살고계시는 돈화시 홍석향 림강촌은 돈화시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거해 살고있는 조선족 마을이다. 중국조선족젊은이들이 국내해방전쟁은 물론 련이은 항미원조전쟁에까지 용약 참가해 피끓는 젊음을 희생했던것은 력사가 기록하고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김필련할머니는 도합 6남매인데 우로 오빠 셋과 언니, 그리고 동생이 있었다. 오빠들 셋은 모두 국내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 유공자들이다. 김필련할머니의 부모님은 모두 장질부사로 일찍 사망했고 집에는 년로한 할아버지 한분이 계셨는데 언니와 김필련할머니 그리고 동생은 아직 10대 나이의 어린이들이였다.
당시 오빠들은 두살 터울로 스무살내외의 청년들이였는데 세 오빠 모두 참군하여 국내전쟁은 물론 항미원조전쟁터에까지 나가 피흘리며 싸웠다. 큰오빠 김순학은 참군하여 국내해방전쟁에 참가했다가 1950년 10월에 또 항미원조전쟁에까지 참가했는데 항미원조전쟁이 끝난후 다행히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둘째오빠 김성학과 셋째오빠 김명학은 전쟁터에서 희생되여 다시는 영영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김필련할머니는 지금도 15살되던 해인 1952년도에 마을에서 열었던 셋째오빠 김명학의 추도회를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오빠들중 셋째오빠의 희생소식이 가장 일찍 전해져온것이였다. 셋째오빠와 한 부대에 있다가 항미원조전쟁이 끝난후 돌아온 이웃마을의 청년이 집에 찾아와 셋째오빠의 희생소식을 알려주었다. 말로는 당시 셋째오빠 김명학은 부대의 련락원으로 있었는데 련락임무를 받고 부대를 떠났다가 미처 부대의 후퇴명령을 받지 못한채 철거하지 못하고 락동강전투에서 희생되였다고 한다. 둘째오빠 김성학도 1953년도에 부산에서 사망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시 락동강전투에서 희생된 지원군렬사들의 유해를 부산에 옮겨갔다고 전갈이 와서 찾아가면 유해를 찾을수도 있었다고 하는데 집에는 아직 어린 동생들뿐이여서 오빠들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빠들은 전쟁터에서 사망하여 외로운 무주고혼이 되여 장장 50여년 세월을 나이 어린 동생들의 마음속에 가슴아픈 한으로 남게 되였던것이다.
오빠들의 빈자리, 서럽고 아팠던 성장이야기
오빠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 렬사로 유명을 달리한 김필련할머니의 가정은 그야말로 힘든 나날의 련속이였다. 설상가상으로 유일한 할아버지마저 일하다가 쑥대에 발을 찔리워 그 상처가 곪고 썩으면서 앓다가 사망하다보니 집살림은 당시 겨우 10살밖에 안되는 큰언니가 도맡아했다. 아래로는 아직 세살밖에 안되여 배고프다고 어머니젖을 매일 울면서 찾아헤매는 남동생이 있어 어린 고아들의 기구한 생활은 이루 말할수 없이 어려웠다. 고아들의 어려움을 알고 구정부에서 큰오빠를 군대에서 집으로 보내 보살펴주도록 했다. 그런데 1950년 10월에 큰오빠마저 또 지원군으로 조선전쟁터에 나갈줄이야. 다행히 큰오빠 김순학은 항미원조전쟁이 끝난후 무사히 돌아왔지만 집에 있는 나어린 고아들의 겪은 인생의 고초는 헤아릴수조차 없이 크고 무거웠다.
지원군유해송환소식이 실린 신문을 보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였다는 김필련할머니
김필련할머니와 두살 터울인 언니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는데 겨울이 되여 빙상대회가 있으면 연길이며 장춘에 가서 운동대회에 참가하여 상도 받아오군 했다. 그때 돈화에는 고중이 없어서 언니는 통화고중에 붙었는데 돈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는수 밖에 없었다. 김필련할머니 역시 그 이듬해 서란고중에 붙어 한학기 공부하고 방학에 집에 왔다가 새학기가 되여 서란으로 가는 차비 3원이 없어서 결국 공부를 그만둘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교다닐 때 김필련할머니는 고아렬군속이라고 정부의 보조로 언니는 1등공비 8원 50전을 받았고 김필련할머니는 3등공비 6원 50전씩 받아 공부를 했다고 한다.
매달 식비 6원을 내면 남는 50전으로는 얼음과자 하나 사먹을수 없고 연필 한대 제대로 사서 쓸수 없는 어려운 생활을 했다. 남들이 쓰고 버린 꽁다리연필을 주어 그것을 쑥대에 꽂고 공부했다고 한다. 못 먹고 못 입는 가난한 살림을 하면서 어렵게 자란 과거를 추억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며 할머니는 눈굽을 찍었다.
오빠들의 진토가 된 유해라도 보고 눈 감는것이 소원
지난 4월에 한국으로부터 중국에 귀환된 중국지원군유해소식을 신문을 통해 본후 김필련할머니에게는 한가지 간절한 소원이 생겼다. 바로 죽기전에라도 오빠들의 진토가 되여버린 유해일지라도 한번 보고 눈을 감았으면 한이 없겠다는 소박한 소원이였다.
가난했던 살림에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한 오빠들이여서 김필련할머니의 기억속에있는 오빠들은 스무살미만의 젊은 모습 그대로이다. 셋째오빠는 마을에서 싸움도 잘했다면서 김할머니는 오빠를 추억했다. 장질부사로 앓아서 몸이 몹시 여위였지만 강기가 있고 누구한테 지지 않는 강인한 성격이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전쟁놀이를 무척 좋아해서 옆마을의 큰 부락 애들도 모두 범접 못하고 두려워할 정도로 완력이 있었고 군대에 나가는것을 그렇게도 원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참군할 때 셋째오빠는 병으로 앓다보니 무게가 표준에 못미쳐서 3번이나 시험에서 미끌어졌는데 나중에 바지가랭이에 모래를 채우고 몸무게를 늘여서야 간신히 부대에 가게 되였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둘째오빠도 2번이나 징병모집시험에 떨어졌지만 군대 가길 너무 원해서 결국 군대에 참군했다고 말했다.
마음이 따뜻하고 다감했던 셋째오빠가 아직 어린 녀동생들의 머리를 깎아주군 하던 일을 김할머니는 지금도 어제일처럼 기억하고있었다. 《내 몸에 부스럼이 있어서 옮는다고 언니 먼저 머리를 깎아주어 내가 서러워 울기도 했다》고 말하면서 김할머니는 소녀처럼 웃어보였다.
그러나 김할머니 기억속의 다정다감했던 오빠들은 이젠 백골이 진토되여 어느 낯선 땅에 이름없이 누워있겠지만 오빠들이 흙이 된들 어떠라, 오빠들의 유해라도 직접 어루만져보고싶은 할머니의 친인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절절했다.
《지금 있으면 둘째오빠는 87세, 셋째오빠는 85세이지요.》 김할머니는 오빠들 생각이 나기만 하면 마을에 세워져있는 렬사기념비를 찾아간다. 거기에는 오빠들의 이름이 새겨져있기때문이다. 렬사비에 가면 오빠들 이름에 묻은 먼지들을 닦아내면서 오빠들과 대화라도 하듯 불러본다.
《성학이 오빠~ 명학이 오빠~ 》
오빠들이 보고싶을 때마다 마을의 렬사기념비를 찾군 한다는 할머니
지난 2011년도에 한국 인천에서 살고있는 딸네 집에 갔다가 김필련할머니는 딸에게 한번 부산에 가서 무작정 오빠들의 유해라도 찾아볼 생각을 터놓았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무작정 부산 어디에 가서 오빠들의 유해를 찾을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생각을 리해하지 못하는것은 아니지만 사전계획이나 조사가 없이 무작정 유해를 찾아나서는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해 딸이 굳이 만류했고 결국 김할머니는 한국에서 아쉽게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중국지원군의 유해가 중국에 돌아온후 심양에 있는 지원군렬사릉원에 안치된다고 하던데 우리 오빠들의 유해도 어서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김필련할머니는 간절히 기대하고있었다. 언젠가 손꼽아 기다리던 오빠들의 유해가 돌아오면 훈춘에 살고있는 언니와 함께 지팽이걸음을 걷더라도 꼭 심양까지 가서 오빠들을 만나보고싶다고 김할머니는 말했다.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 항미원조전쟁관에서 집계한 조선전쟁가운데서의 중국지원군 사망자수는 18만 3108명이다. 한국의 《중앙일보》는 해외에 매장된 중국군인유해가 11만 5217구인데 그중 11만 4000여구는 조선반도에 분산되여 매장되여있다고 보도했다.
지원군렬사들이 조선전쟁터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수천수만 가족들의 가슴속에 아픈 그리움으로 못박힌지 어언 50여년 세월, 세월이 흐를수록 지원군렬사들을 절실히 가슴에 묻고 살아왔던 렬사유가족들도 점점 줄어들고있는 실정이다.
김필련할머니에겐 오빠들에 대한 기다림이 유일한 바람으로 남아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동구밖까지 배웅하면서 남긴 김할머니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는다.
《내 죽기전에 흙이 되여버린 오빠들의 모습이라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보았으면 죽어도 눈을 감을텐데…》
6남매들중 이제 남아있는것은 근 80세 고령의 언니와 김할머니 둘뿐, 그만큼 김할머니 가족처럼 마음 깊이 그리움을 아픔으로 간직한 유가족들의 눈물이 진정 영원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길림신문 안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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