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시 밀강향의 깊숙한 산자락, 천혜의 자연경관으로 둘러싸인 밀강촌에는 수려한 산세만큼이나 자랑할만한 아가씨가 있다. 흙을 만지며 여생을 보내려는 성공한 은퇴자도 아닌, 자연속에서 아이들을 기르고픈 젊은 가족도 아닌, 그냥 “젊은 처자”이다. 29살 꽃다운 나이에 밀강촌을 누비며 “대학생서기”로 맹활약중인 조미용(29살)씨, 그녀는 시골이야기에 푹 빠져사는 도시처녀 같은 시골처녀이다.
오늘도 이른아침부터 동네 곳곳을 누비는 “처녀서기” 미용씨의 야무진 포부를 만나본다.
조미용(29살)씨는 지난 2010년에 장춘대학 계산기학과를 전공하고 교수의 추천으로 소위 잘 나가는 외국기업에 취직할수 있는 기회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학생촌간부를 선택했다.
“외지로 나갔던 많은 선배들이 취업난에 허덕이다 다들 고향으로 돌아오더라구요. 저도 겁이 덜컥 났어요. 과연 내가 그 경쟁에서 살아남을수 있을가? 어쩌면 그 우려때문에 제가 이곳 시골을 선택했을지도 몰라요”
요즘 20대가 흔히 하는 고민에 빠졌던 조미용씨였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온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예전에는 미래를 생각하면 뭘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미래를 생각하면 두근거려요. 제가 시골체질인가 봐요. 호호…”
언뜻 어리고 연약해보이지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야무지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열심히 하루하루를 채우고있는 그녀만의 강인함이 느껴졌다.
2010년 10월, 그녀는 밀강촌지부 당서기 조리로 시골로 내려왔다. 장성하면 시골을 떠나기 바쁜 젊은이들이 대부분인 요즘,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취직에 실패하니 시골에 내려온것 아니냐”는 눈빛을 보내오는이들도 있었다. 미용씨의 부모 역시 반대했다. 큰 도시에서 출세하라고 힘들게 농사지어 대학에 보냈는데 다시 시골에 돌아오겠다는 딸을 반길수만은 없어서였다.
막상 시골생활도 결코 쉽지 않았다. 삽도 호미도 잡아본 일이 많지 않았던 그녀는 생소한 육체로동을 이기지 못해 병원에 다니며 물리치료를 받아야 할 지경이였다. 그러다 큰 도시에서 회사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가끔 사진을 보내올 때면 은근히 부럽기도 해 혼자 울기도 했지만 또래라고는 없는 동네에서 함께 고민을 털어놓을이 하나 없었다.
“그냥 포기할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마음을 굳게 다잡았죠.” 손놓고있을수 없었다는 조미용씨이다.
그는 일부러 저녁때 일일드라마 할 시간이 되면 동네 할머니들 집에 놀러갔다. 그리고는 할머니와 드라마내용을 주제로 이야기도 나누고 장단도 맞추고 응석도 부렸다. 농번기에는 일손도 돕고 마을로인들의 건강문제 그리고 공문서 하나하나까지 직접 도와나섰다. 소소한 민원부터 시설보수 등 마을일이라면 미용씨가 나서지 않는 일이 없다. 눈이 어두운 어르신들을 위해 먼 이국타향에서 자식들이 보내온 편지도 읽어드리고 교통이 불편해 시가지로 약 사러 가기조차 힘든 사정을 알고는 정기적으로 어르신들을 대신해 약을 사다드리기도 했다.
밀짚모자를 쓰고 양파와 마늘 수확을 돕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한두달 저러다 말겠지”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마을 주민들의 태도도 드디여 달라졌다. 지난해 5월 그녀는 마을 어르신들의 강력추천으로 부서기로 선출됐다.
동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가 무섭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마을일에 그녀의 발길이 안 닿는 곳이 없다보니 밀강촌 어르신들에게 조미용씨는 이제 어디 내놔도 자랑스럽고 아까운 “우리 서기님”이 됐다.
“나중에 조건 좋은 취직자리가 생기면 저도 아마 떠나겠죠. 그때가 되면 마을 어르신들 떠나기가 무척 가슴이 아플것 같아요. 지금은 떠난다는 생각을 않고 열심히 일만 할거예요”라고 말하는 그녀다.
한창 멋 부릴 나이에 시골에서 자신의 미래를 조용히 설계하고있는 조미용씨, 농촌에 정착한 “시골처녀”의 래일은 두근거림으로 벅찬다.
글·사진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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