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150㎝, 자그마한 소녀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왼쪽으로 몸을 약간 틀어 앉은 소녀는 지그시 눈을 감더니 건반을 두드린다. 연주하던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가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소녀의오른 어깨가 크게 들썩인다. 건반을 수놓은 건 소녀의 왼손과, 오른 팔꿈치. 오른 손이 없는 소녀에게 오른 팔꿈치는 여섯번째 손가락이었다.
9일 오전 서울 삼성동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15층 갤럭시홀. 최혜연(19)양이 정은현(35) 선생님과 연습 중이었다. 올해 이 학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혜연양은 입학식에서 기념 연주회를 하기로 돼 있다.
경북 영덕이 고향인 그는 ‘팔꿈치 피아니스트’다. 세 살 때, 부모님이 하던 정육점에서 놀다 고기를 자르는 기계에 오른쪽 팔 아랫부분을 잃었다. 눈 깜짝할 새였다. “저는 잘 기억도 안 나는데, 엄마 말이 7살 때까지 ‘엄마, 나는 팔이 언제 나와?’라며 물었대요. 그때쯤 스스로 안 것 같아요. 제가 특별하다는 걸….”
그가 피아노와 가까워진 건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이모 덕분이었다. 한 살 터울인 언니가 피아노를 배우는 게 마냥 부러웠다. 하지만 꿈일 뿐이었다. 다섯 손가락만으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2011년, 그의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갓 예고에 진학한 언니의 피아노 레슨 선생님 정은현(35)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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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손이 없어 팔꿈치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최혜연양이 지난 9일 서울 삼성동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서 정은현 선생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Amazing Grace'를 연주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시각과 청각을 잃은 헬렌 켈러를 미국 작가로 키워낸 설리번 선생님의 심정이었을까. 정 선생님은 혜연양을 처음 만난 2011년 1월 1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혜연이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치는데, 마음이 울컥했어요. 잘 가르칠 자신이 없어 거절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흔들렸지요. 혜연이에게 ‘꿈이 뭐니’라고 물었는데, 대답을 듣곤 ‘아, 이 아이는 내가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를 움직인 혜연이의 대답은 “희망을 주는 피아니스트”였다.
두 사람의 지옥훈련이 시작됐다. 혜연양은 매주 경북 영덕에서 대전까지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가 정 선생님을 만나 피아노를 배웠다. 정 선생님은 혜연양을 위한 왼손 연주곡을 찾고, 오른손 멜로디가 비교적 쉬운 곡을 맞춤용으로 편집했다.
정 선생님은 혜연양이 이해하기 쉽게 오른손은 주먹으로 피아노를 쳤다. 대전의 예고에 진학한 혜연양은 하루에 3~6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했다. 허리가 틀어진 상태에서 연주하다보니 장시간 연습할 순 없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정 선생님은 “많이 힘들었을 텐데, 혜연이는 포기하겠다고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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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꿈치 피아니스트' 최혜연양과 정은현 선생님. /오종찬 기자
혜연양은 딱 한번 눈물을 보였다. 고1 때 멀리 떨어진 부모님이 그립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을 때다. 다른 친구들이 화려한 곡을 치는 걸 볼 때마다 속이 상했다고 한다. 며칠 간 피아노를 보지도 않다가 자신이 가장 행복할 때가 피아노 앞이란 걸 깨달았다. “그땐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짜증이 났어요. ‘왜 자꾸 쳐다보지?’란 생각이 들고, 불쾌했어요. 근데 피아노 앞에 앉아 있으면 내가 특이한 게 아니라 특별해진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람들이 ‘대단하다’, ‘감동받았다’고 말해주는 게 정말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혜연양은 독주회를 2013년, 2014년 두 번 열었다. 그는 “지금은 다르다는 게 피아니스트로서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다르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며 “그래도 팔꿈치로 연주하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정 선생님은 혜연양을 ‘타고난 무대체질’이라고 했다. 그는 “베테랑 피아니스트들도 떨리기 마련인데, 혜연이는 무대 위에 올라가면 더 잘 한다”고 했다. 혜연양은 공을 선생님에게 돌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선생님이 공연을 다 준비하세요. 늘 감사한데, 쑥스러워서 그동안 제대로 표현을 못했어요.”
혜연양은 선생님이 외래교수로 있는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이어가기로 했다. 그의 꿈은 4년여가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제 연주를 듣는 분들이 ‘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좀더 공부해서 저만의 곡을 만들고 싶어요.” 정 선생님도 제자에 대한 기대가 크다. “혜연이의 연주는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혜연이가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을 힐링해주는, 선물같은 존재가 되길 바랍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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